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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SPRING

낯익은 곳에서 발견하는 낯선 성찰

여행의 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새로운 풍광을 만끽하는 데 집중하는 이도 있을 테고, 온전한 휴식에서 의미를 찾는 이도 있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이나 쇼핑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든 행위에는 공통점이 있다. 낯익다고 생각한 데서 낯선 가치를 발견할 때, 익숙하다고 여긴 대상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때 기쁨이 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충청남도 부여는 좋은 여행 목적지가 되어줄 것이다.


ⓒ 부여군


부여라고 하면 응당 ‘망국의 비애미’가 느껴지는 애달픈 고장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알고 보면 찬란한 문화를 일궈냈던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부여다. 예상과 달리 부여의 진정한 보물들은 낯익고 익숙한 곳 속에 숨겨져 있다.


세계와 교류하던 백제의 창구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대향로는 1996년 5월 3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봉황 뚜껑 장식, 봉래산이 양각된 뚜껑, 연꽃잎으로 장식된 몸통, 용 받침으로 구성되었다. 백제의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이 돋보인다.


금강은 400km 남짓한 길이로 한국에서 3번째로 긴 강이다. 부여 사람들은 부여를 지나 흐르는 금강을 유독 백마강이라 부른다. 백마강은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란 뜻으로,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상〮하류 16km 구간을 가리킨다. 지금은 금강 하굿둑이 건설돼 유람선 외에는 선박 통행이 자유롭지 않지만, 조선왕조 말기까지도 크고 작은 배가 드나들었다. 심지어 약 70km 하류에 있는 황해 바다로부터도 배가 들어왔고 또 나갔다. 그 핵심 창구가 백마강과 부소산성 사이에 자리한 구드래 나루터다.

‘구드래’라는 어휘는 현재 한국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일본어에 흔적이 남아 있다. 구드래에 어원을 두고 있는 ‘구다라(Kudara)’는 ‘본국’, ‘큰 나라’, ‘섬기는 나라’ 등을 뜻한다. 그리고 동시에 백제라는 국가를 가리키는 낱말이기도 하다.

즉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와 때로 경쟁하며 때로 협력했고, 멀리 중국이나 일본과는 해상무역 등을 통해 교류했다. 그 과정에서 경제를 살찌웠으며 문화 발전을 도모해갔다. 무수한 무역선이 드나든 나루 이름이 국가 전체를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을 정도로 말이다. 백제가 주변 국가들에 비해 국토 면적이 비교적 작고 대륙과 연결된 육로가 없었음에도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660년까지 무려 7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이어갈 수 있던 원동력의 비밀이 거기에 있었다.

낙화암의 진실

백화정은 부여 부소산성북쪽 금강 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육각형으로 지은 정자이다. 의자왕(재위 641~660년) 때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3천여 명이 이곳의 절벽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은 황포돛배를 본뜬 유람선이나 수륙양용 버스 등을 타고 백마강을 주유할 수 있다. 배에 몸을 실으면 30분이 채 안 걸려 고란사 선착장에 닿는데, 그곳에서부터 부소산성산책길이 시작된다.

백제인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고란사를 지나 산책길을 따라 올라가면 백마강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백화정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일품이다.

‘낙화암’은 바로 그 아래에 있다. 낙화암이라는 이름은 백제가 의자왕의 실정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3천 명의 궁녀들이 백마강으로 뛰어내려 자진한 곳이라며 부르기 시작한 명칭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인 사실과는 상관없이 약 1천 년 뒤에 만들어진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긴 자에 의해 쓰여진 역사가 무릇 그러하듯, 승리자는 미화되고 패배자는 격하된 탓이다.

12세기 중반 고려시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은 “웅대하고 용맹했으며 담력이 크고 결단력이 있었다. … 어버이를 효로써 섬겼고 형제와는 우애가 깊어 당시 사람들이 해동증자라 불렀다(雄勇有膽决 … 事親以孝與兄弟以友時號海東曾子)”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은 한반도를 가리키며,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서 ‘동양의 오성’ 중 하나로 꼽히는 학자다. 즉 의자왕은 왕으로서의 품위뿐만 아니라 성현에 비견될 정도로 인품과 학식이 훌륭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의자왕은 신라의 성 40여 개를 일거에 빼앗거나 외교술로 신라를 고립시키는 등, 탁월한 면모를 지닌 왕이었다. 다만 신라뿐만 아니라 중국 당나라까지 합세한 대군의 침략에는 버텨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여 함락과 의자왕의 중국 압송 이후에도 백제 부흥군은 의자왕의 아들인 풍왕(豊王 623~?)을 중심으로 무려 3년이나 나당 연합군에 항쟁을 이어갔다. 때론 사실과 진실은 일치하지 않는 법이다. 낙화암이라는 비애미 넘치는 이름 뒤에는 이처럼 끝까지 용맹했던 백제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백제 문화의 정수

만수산 자락에 있는 무량사 극락전은 외부에서는 2층 구조이나 내부는 위아래 구분이 없는 통층 구조의 특징을 보이며, 오층석탑과 석등이 일렬로 늘어서서 장관을 이룬다.


융성했던 백제의 모습은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누각인 사자루를 지나, 군용 창고와 막사 터, 그리고 계백(階伯 ?~660)과 성충(成忠 ?~656), 흥수(興首 ?~?) 등 백제의 마지막 세 충신(忠臣)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삼충사’를 지나 부소산성 밖으로 나오면, 멀지 않은 곳에 국립부여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유산의 깊이와 너비는 실로 깊고 또 넓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지난 1993년 12월 12일 해가 뉘엿뉘엿 지던 오후 4시 반쯤, 능산리 고분군 발굴작업이 어느덧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약 1.20m 깊이의 진흙 구덩이 속에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높이가 60cm가 넘고 무게가 12kg에 가까운 대형 향로가 한 기 출토되었다. 출토 이후 채 3년도 안 돼 그 미학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였다.

초기에는 그저 중국산 향로가 발굴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만들어지곤 했던 스타일의 향로라는 점, 백제는 불교 왕국이었으나 정작 향로에는 도교적 색채가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는 점 등이 이유였다. 그러나 그것은 백제에서 만들어진 향로임이 분명했다. 큰 틀에서의 모양은 비슷할 수 있으나 능산리 고분군에 딸린 대장간 터에서 발굴된 데다 중국의 향로들과는 달리 금동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에서 유래한 현악기인 거문고(거문고는 순우리말로, 한자로는 현학금(玄鶴琴) 또는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등이 조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산 향로와 백제금동대향로는 모양 면에서 유사한 점이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 달랐다.

특기할만한 것은 향로의 뚜껑 부분에 조각된 거문고를 연주하는 악사 주변으로 서역에 기원을 두고 있는 종적(縱笛 피리의 일종)과 완함(阮咸 기타와 비슷한 악기)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그에 더해 동남아시아에서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항아리 모양의 북(鼓), 북방 유목민들의 관악기인 배소(排簫 팬플루트와 흡사) 등을 연주하는 악사들도 배치돼 있다.

아랍을 비롯한 서역의 향(香) 문화와 중국식 향로 등 외래문화와 전통문화, 불교사상과 신선사상 등을 조화롭게 융합시킨 모습도 엿보인다. 이는 백제가 뛰어난 것은 더욱 살리고 한계가 있는 것은 세계와의 교류와 수용을 통해 극복하는 현지화 혹은 자기화에 능했음을 보여준다. 백제금동대향로에 서려 있는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통해 백제의 문화 및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이유이다.


백마강은 ‘백제의 큰 강’이란 뜻을 담고 있다. 백제 시대고증을 거쳐 건조한 황포돛배와 한국 최초로 운행하는 수륙양용 버스 투어를 통해 부여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백제문화단지는 백제 왕궁을 재현한 곳이다. 백제 왕궁인 사비궁과 사찰인 능사, 계층별 주거문화를 볼 수 있는 생활문화마을 등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 부여군

신동엽 생가와 문학관

1960년대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민족시인 신동엽을 기리고자 만든 신동엽 문학관. 시인의 생애와 문학성을 연구하고 신동엽 문학상을 제정하여 작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백제는 천수백 년 전 과거의 공간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고장이 아니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북서쪽으로 약 800미터 떨어진 곳에 시인 신동엽(1930~1969)의 생가와 그의 이름을 딴 문학관이 있다.

1959년에 등단한 신동엽은 10년을 활동하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하지만 그가 한국 문단에 남긴 족적은 뚜렷했다. 현대 한국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이었던 1960년 ‘4.19’의 한복판을 온몸으로 관통하며 남긴 작품들은 이후 세대들에게 독재를 뛰어넘는 대안적 상상력을 키워내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아직은 이루지 못한 꿈이나 언젠가는 이뤄내야 할 과제인 남북통일을 이야기했으며, 당시 한국 사회를 휘감고 있던 권위주의와 기회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시인은 요절했지만, 그의 뜻은 이어져야 했다. 유족과 출판사 창비가 기금을 마련하여 아직 독재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던 1982년에 탄압을 무릅쓰고 ‘신동엽문학상’을 제정한 것이다. 일반적인 문학상들과는 달리 시와 소설 어느 장르에도 국한하지 않고 시인 신동엽의 올곧은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작가들을 지원하고 격려하기 위한 상이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수상자를 선정해온 결과, 2023년 3월 현재 제40회 수상자까지 배출해냈다.

이런 그의 정신, 즉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가 더 나아지게 하는 데 문학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시인의 생각이 응축되어 있는 곳이 신동엽문학관이다. 그렇기에 문학관은 유미주의에 빠져있는 한국 문단의 한계를 넘어 실천적이며 참여적인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준 시인 신동엽에 대한 헌사에 가깝다.



고즈넉한 고도의 멋

규암 나루터 일대에 조성된 자온길에는 문화예술인들이 운영하는 작은 서점, 공방, 식당과 카페 등이 늘어섰다. 과거 물류가 활발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 온기가 가득한 마을이 되고자 자온(自溫)이라 이름 지었다.


백마강 너머 규암 나루터 일대에 있는 자온(自溫)길은 부여 여행의 막바지에 방문하기 좋다. 규암마을은 백마강을 통한 물류가 활발했던 시절 흥했던 마을로, 도시화로 쇠락하면서 빈집이 많아졌다. 자온은 다시 온기가 가득한 마을로 재생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는 이름이다.

길을 걷다 보면 신동엽의 뒤를 잇는 문화예술인들이 운영하는 작은 서점과 각종 용품을 만드는 크고 작은 공방들, 로컬 식재료를 이용한 식당과 카페 등을 만날 수 있다. 부여라는 고장이 지닌 여유로운 정서와 푸근하고 편안한 풍경까지…. 자온길을 걷고 있노라면 어느새 백제의 찬란했던 영화로움이 떠오를 것이고, 낯익은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각 전환의 의미에 눈 뜨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 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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