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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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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2021 SPRING 287

하나의 코리아를 향한 공동 작업 북한 출신 작가 코이와 그의 멘토이자 미술치료사 신형미 작가의 전시회 ‘다시, 남향집’이 2020년 11월 25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두 작가가 공동 작업을 통해 북한이탈주민의 남한 정착과정 및 남북한 주민들의 상호 이해와 통일을 향한 염원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여 많은 관심을 끌었다. 탈북민 출신 작가 코이(Koi)는 자신을 드넓은 강물에서 맘껏 헤엄치며 살기 위해 어항을 탈출한 물고기에 비유한다. 흔히 ‘비단 잉어’로 불리는 코이는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8㎝밖에 자라지 않는다. 반면, 연못에서 15~25㎝, 강물에서는 90~120㎝까지 너끈히 큰다. 코이라는 예명이 ‘넓고 자유로운’ 남한 땅에서 그가 키워가는 당찬 꿈을 말해준다. 코이는 열여덟 살이던 2008년 12월 홀로 함경북도 청진 고향 집을 떠나 국경을 넘어 중국에 도착했다. 그가 위험한 여정을 택한 것은 앞서 가족과 함께 남한에 와 살고 있던 친한 친구의 강력한 권고 때문이었다. 부모님도 그의 뜻을 꺾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태국을 거쳐 2009년 3월, 꿈에 그리던 남한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겁 없이 넘어왔다고 당시를 돌아본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면 엄두도 못 낼 것 같다며.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코이는 서울에서 미술대학 진학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대안학교인 하늘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입시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 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다. 이 학과의 첫 탈북민 학생이었다. 2020. 목재, 아크릴페인트. 160 x 100 cm. 인사동 로포하우스에서 2020년 11월 25일부터 30일까지 열렸던 북한 출신 작가 코이와 그의 멘토이자 심리치료사 신형미 작가의 전시회 에 전시되었던 공동 작품으로 수열의 합 시그마에서 영감을 받아 한반도를 표현했다. 2020. 특수 패브릭(섬유원단) 100 x 100 cm. 수많은 사람들의 통일을 향한 염원이 모여 하나된 한반도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코이 작가의 생각을 담은 단독 작품이다. 우연, 또는 인연 입학 후 코이는 탈북청년크리스천연합회에서 미술치료사인 신형미(Shin Hyung-mee 辛亨美) 작가를 만났다. 신 작가는 코이를 처음 만났던 그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2013년 첫 만남에서 코이가 아주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지녔다는 걸 단박에 느꼈죠. 당시 제가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탈북청년들을 위해 지원하는 집단 심리 상담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코이가 저의 개인적인 지도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줄곧 멘토 역할을 해주고 있어요. 코이는 제가 주는 모든 것을 감사하게 받으며 끊임없이 발전해나가고 있습니다.” 남북한 출신 두 작가가 ‘통일’을 주제로 아홉 작품을 선보인 ‘다시, 남향집’은 멘토와 멘티로서 이들이 이어 온 특별한 인연의 결과이자 작가 코이를 알린 첫 전시이기도 했다. 통일부 남북통합문화 콘텐츠 창작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 전시에는 두 작가의 공동 작품 3점과 각기 개인 작품 3점씩이 출품되었다. 회화, 섬유미술, 설치, 물감 프로젝트 등 다채로운 장르를 아우르는 작품들에 탈북민들이 자유와 평화 속에 더 나은 삶을 누리고자 남한으로 찾아 드는 모습을 담았다.‘남향집’은 햇볕이 잘 드는 마음 속의 따뜻한 집을 상징한다. 공동 작품 가운데 하나인 ‘시그마가 품은 한반도 지도’는 수열의 합 시그마(∑ Sigma) 에서 영감을 받아 삼천리 금수강산을 묘사했다. ‘색으로 소통하다’프로젝트에 참여한 59명이 힘을 더한 작품이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북한이탈주민 30명과 남한 시민 29명이 각자 생각하는 통일에 대한 이미지를 자기만의 색으로 표현해 물감을 만들었고, 여기에 두 작가가 작품 활동 중에서 느낀 ‘감정의 색’을 더해 모두 101개의 물감을 전시했다. 전시가 끝난 뒤 이 물감들은 통일교육이 필요한 여러 곳에 기증되었고, 앞으로 릴레이식으로 이어나갈 계획이다. 코이 작가의 단독 작품 ‘너와 함께 걷는 남향집 가는 길’은 마치 그가 북한에서 매일 신고 다녔던 운동화 50켤레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설치미술이다. “북에 있는 제 친구 50명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한 명 한 명에게 손편지를 신발에 써넣었어요. 북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을 향한 그리움과 통일에 대한 소망을 담았습니다. 많은 관람객들이 이 작품 앞에서 오랜 시간 머무셨어요. 운동화 속 편지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꼼꼼히 읽고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계셨고, 어떤 분들은 큰 감명을 받았다는 감상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제게도 가장 소중한 작품이었죠.” 그의 또 다른 작품‘유닛 하모니(Unit Harmony)’는 소원을 적어 날리면 이뤄지는 종이비행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나 하나의 유닛은 각기 다른 개인의 꿈을 상징한다. 이 모든 꿈들이 하나로 합쳐져 더 큰 꿈을 이루듯이 통일을 바라는 염원이 모여 하나된 한반도를 이룰 수 있음을 표현했다 소통과 인내 신형미 작가의 단독 작품 ‘오래 달리기 트렉’은 미술치료사로 일하면서 그가 만난 수많은 탈북민 가운데 기억에 또렷이 남는 46명의 길고 힘든 여정을 구현했다. “저에게 오래 달리기는 어릴 때부터 어려운 일이에요. 북한이탈주민들이 남한에 도착하기까지 위험한 순간도 경험했고, 안도의 순간들도 있었을 텐데 장거리 트렉에서 느끼는 감정과 비교하면 어떨까 상상해 보는 것이죠.” 신 작가의 또 다른 단독 작품 ‘자리’는 의자 시리즈 중 하나로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몇 명의 탈북민 내담자를 표징한다. 남다른 멘토와 멘티 관계이지만 두 작가는 살아온 환경과 과정이 다른 만큼 이번 작업을 하면서 가치관의 차이를 실감하기도 했다. 소통과 배려, 인내가 필요했다. 협력하는 과정을 통해 ‘남과 북의 통합’을 고민했다. 코이 작가는 예상보다 많은 관람객들이 자신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고 말한다. “코로나 19로 관람이 저조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뜻밖에 많은 분들이 찾아줘서 놀랐습니다. 저의 재능이 통일을 위해 의미 있게 쓰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특히 혼자 무언가를 해내는 것보다 ‘남한 출신 작가와 북한 출신 작가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통일의 첫 단추를 끼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시는 신형미 작가가 기획을 제안해 추진했다. 2008년 서울여대와 인천동부교육청 프로젝트 ‘하나 됨을 위한 탈북 청소년 예술치료 교육’이 발단이 되어 열린 전시회 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시다. 올 봄 민주평화통일자문회 평화나눔갤러리에서 한 번 더 전시회가 열린다. “저희는 기획단계부터 일회성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되는 전시로 준비했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더 큰 전시 프로젝트로 발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소통하며 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으로 북한에 자연스럽게 다가가고자 가교 역할을 할 계획입니다.”신 작가의 설명이다. 이 모든 꿈들이 하나로 합쳐져 더 큰 꿈을 이루듯이 통일을 바라는 염원이 모여 하나된 한반도를 이룰 수 있음을 표현했다. 2020. 패브릭, 핸드라이팅, 신발 설치작품 50컬레. 코이 작가가 자신이 북한에서 신던 것과 같은 운동화 50 켤레 안에 친구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손으로 쓴 편지를 넣어서 그리움을 표현했다. 미술치료사 신형미 작가(왼쪽)와 그의 멘티이자 북한 출신 작가인 코이가 이어온 특별한 인연은 ‘통일’을 주제로 아홉 작품을 선보인 전시회 에서 첫 열매를 맺었다. 신 작가는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코이 작가의 예술 세계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 것이 즐겁다고 말한다. 꿈을 향한 발걸음 코이 작가는 현재 패션 관련 기관에서 일하며 홍익대 패션대학원 패션비즈니스학 석사과정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2016년에는 코오롱그룹 후원으로 커먼그라운드에서 남북한 청년 작가 9명이 함께한 전시회를 기획하고 참여했다. 그의 꿈은 통일에 대비해 패션산업과 문화예술 분야에 영향력 있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신형미 작가는 2004년부터 탈북민들과 깊은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한 탈북소년을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 미술치료사인 그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하나원에서 그림을 통한 심리상담으로 그들의 마음을 치료하고 소통해왔다. 미국 오하이오대학교에서 순수미술 회화를 전공한 신 작가는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치료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차의과대학교 임상미술치료학 박사과정 중이다. 탈북민이 남한 사회에서 건강한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한 국가•사회적 과제라는 신념으로 한국 사회의 다양한 시각 전환 교육을 위한 여러 활동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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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2020 WINTER 100

잊힌 아이들의 이야기 지난 6월 개봉된 영화 은 1952년 ‘위탁 교육’을 위해 동유럽 5개국으로 보내진 북한 전쟁 고아들의 흔적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다. 뉴욕국제영화제 등 해외 주요 영화제에 초청된 이 영화의 제작을 위해 감독은 16년 동안 50번 넘게 동유럽과 한반도를 오가며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루마니아의 소도시 시레트(Siret)에 어린이들을 태운 특별열차가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도착했다. 한껏 상기된 표정의 어린이들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열 살 안팎의 이 아이들은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온 북한의 전쟁 고아들이었다. 위탁 교육을 받기 위해 줄잡아 5천여 명의 아이들이 이처럼 루마니아를 비롯해 폴란드,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 등 동유럽 5개국에 보내졌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거리를 헤매게 되었다. 남한의 전쟁 고아들이 미국이나 유럽으로 보내진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 아이들이 동유럽으로 간 사실은 최근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은 오랫동안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동유럽행 북한 전쟁 고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덕영(Kim Deog-young 金德榮) 감독이 2004년부터 16년간 50번 넘게 동유럽을 오가며 사재와 발품을 팔면서 집념을 쏟아부은 결과이다. 김 감독이 처음 루마니아행을 결심한 것은 대학 2년 선배인 영화감독 박찬욱(Park Chan-wook 朴贊郁)으로부터 기막힌 사연을 전해 들은 뒤였다. “북한으로 송환된 북한인 남편을 40년 넘게 기다리고 있는 루마니아 할머니가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북한 전쟁 고아 문제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죠.” 어떤 부부 그가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1952년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열여덟 살의 제오르제타 미르초유(Georgeta Mircioiu)는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100㎞ 정도 떨어진 시레트 조선인민학교에 미술 교사로 부임한다. 그곳에서 북한 고아 관리 책임자로 파견된 당시 26세의 청년 교사 조정호를 만난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1957년 루마니아와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아 결혼에 이른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고아 소환 정책으로 두 사람은 1959년 평양으로 가야 했고, 귀국 직후 남편 조 씨는 숙청당해 지방의 탄광 노동자로 전락한다. 1960년대부터 주체사상이 확립되던 북한에서는 외국인 배척 운동이 일기 시작해 국제결혼을 했다가 추방당하는 외국인들이 속출했다. 남편과 떨어져 살던 미르초유는 두 살짜리 딸이 칼슘 부족으로 병에 걸려 1962년 딸과 함께 루마니아로 일시 귀국했는데, 이후 북한 입국이 불허된 1967년 남편과 연락이 끊겼다. 그 뒤 미르초유는 여든여섯 살이 된 지금까지 남편의 생사(살아 있다면 94세)만이라도 확인해 달라는 탄원서를 북한 당국에 수없이 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83년부터 ‘실종’이라는 짤막한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어느덧 환갑이 된 딸과 함께 부쿠레슈티에서 사는 그는 지금도 국제기구에 호소문을 보내면서 남편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미르초유는 ‘정호 1957’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결혼 금반지를 평생토록 끼고 있다. 남편과의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미르초유는 지극 정성을 기울여 『루마니아-한국어 사전』(13만 단어)과 『한-루 사전』(16만 단어)을 만들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절절한 사연은 김 감독에 의해 지난 2004년 KBS TV 6•25 특집 로 방영됐다. 한편 동유럽 5개국에서 북한 고아들의 흔적을 찾던 김 감독은 루마니아 기록필름보관소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내리는 북한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4분 30초짜리 영상을 극적으로 발견했다. 하얀 장갑을 낀 직원이 먼지를 뽀얗게 덮어쓴 은빛 통에서 꺼낸 35㎜ 필름을 보는 순간 미르초유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 그 순간, 김 감독은 “이 역사를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 계기로 관련 자료를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반세기 전의 북한 관련 문서나 사진, 영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시 관계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 증언을 듣는 것부터가 불가능했다. 그때부터 김 감독은 동유럽 곳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행여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문서 보관소, 관련 학교, 기숙사를 샅샅이 찾아다녔다. 그리고 북한 아이들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 역사학자, 언론인들의 증언을 카메라에 담았다. 외교 문서 등으로 추정하는 동유럽행 북한 전쟁 고아는 5천여 명이지만, 김 감독은 1만 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말한다. 송환과 이별 영화 에는 북한 아이들이 현지 아이들과 함께 수업하고 뛰어노는 모습들이 흑백 영상으로 생생하게 담겼다. 영상에는 이 아이들의 단체 생활 모습도 담겨 있다. 아침 6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김일성 얼굴이 그려진 인공기를 향해 경례를 한 뒤 를 부르는 장면이 이채롭다. 북한 아이들과 함께 공부했던 루마니아, 불가리아 친구들은 60여 년이 지나 백발이 된 지금도 ‘백두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한국어로 부를 정도다. 이 노래는 지금도 북한에서 모든 행사 때 서곡으로 불릴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증언에 따르면 이 아이들의 일상이 항상 군인처럼 엄격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같이 축구도 하고, 동산 같은 곳에서 배구도 하며 놀았죠. 다들 친형제처럼 지냈어요.” 불가리아인 친구 베셀린 콜레브의 증언이다. 그에 따르면, 북한 아이들은 선생님들을 엄마, 아빠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 아이들의 선생님이었던 디앙카 이바노바는 색이 바랜 사진을 보여주며 “이 친구가 나를 가장 많이 따랐던 ‘차기순’이었어요.”라고 이름까지 기억했다. 김 감독은 당시 기숙사를 탈출한 일부 아이들이 인근에 정착해 현지인과 결혼하고 택시 기사 등으로 생활했다는 제보를 받고 추적했지만, 끝내 이들을 찾아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위탁 교육은 당시 동유럽 국가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련이 기획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쟁 고아를 돌봐주는 동유럽의 선한 모습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홍보하려는 프로파간다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기술과 문화가 앞선 동유럽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이 장차 국가 건설에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북한이 이러한 위탁 교육을 수용했을 것이라고 김 감독은 추측한다. 1956년 낯선 땅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가던 북한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본국 소환령으로 정들었던 친구, 선생님들과 이별을 해야 했다. 아이들은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북한으로 차례차례 송환되었다. 당시 헝가리를 비롯해 동유럽 국가에서 소련에 반대하는 자유화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일성이 1956년 불가리아를 방문하는 동안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제거하려는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 일어났다. 또 폴란드에 있던 북한 고아 2명이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다 붙잡히는 사건도 터졌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거리를 헤매게 되었다. 남한의 전쟁 고아들이 미국이나 유럽으로 보내진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 아이들이 동유럽으로 간 사실은 최근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객관적 자료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귀국 열차가 북한 땅에 들어서자 역마다 2~3명씩 내리게 했다고 합니다. 만약의 집단 행동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타국 생활을 같이 한 아이들을 분리시킨 것으로 볼 수 있지요.” 김 감독의 얘기다. 아이들이 보내오던 편지는 채 3년이 되지 않은 1961년 이후 북한 당국의 검열로 말미암아 영원히 끊겼다. 마지막으로 보내온 편지에는 “입을 옷이 있었으면 좋겠다. 뭔가를 쓸 수 있는 공책을 보내달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었다. 아이들은 편지 끝에 언제나 “엄마, 보고 싶어요.”라고 썼다. 떠나기 전 아이들은 자신들이 살던 곳에 흔적을 남겼다. 학교 근처 숲에 이름을 새긴 오벨리스크와 기념비가 남아 있는 곳도 있다. 폴란드 프와코비치 국립중앙제2학원에서 발견된 현판에는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조선 전쟁 고아들인 우리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기념비에는 아이들의 이름이 한글과 알파벳으로 쓰여 있다. 체코 발레치 마을 인근에 있는 중세 오벨리스크에서도 두 명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김 감독은 “10m 정도 되는 높이의 탑에 몰래 올라가 단단한 돌을 깎아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에서 떠나기 직전 아이들의 절박한 심경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김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특정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에 편향된 감상에 치우치지 않으려 각별한 노력과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한다. 그를 위해 풍문에 기대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 자료를 찾아내 논란을 줄이려 노력했다. 그 결과물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에 때맞춰 개봉했지만, 코로나19 상황으로 흥행은 부진했다. 하지만 최근 한 재미교포의 주선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130여 개국에서 이 영화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국내에서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이 영화는 뉴욕국제영화제, 니스 국제영화제, 폴란드 국제영화제 등 13곳의 국제영화제 본선에도 진출해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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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2020 AUTUMN 46

증언으로 밝힌 북한 음악 오늘날 북한에서 연주되고 있는 음악의 특성과 형성 과정에 대한 재일동포 원로 예술가 8명의 증언이 책으로 묶어졌다. 국립국악원이 2019년 12월에 펴낸 『재외 동포 원로 예술가 구술 채록 – 일본 편』은 공동 저자 천현식(Cheon Hyeon-sik 千賢植), 김지은(Kim Ji-eon 金芝恩) 씨가 2년에 걸쳐 기울인 노력의 결과다. 1973년 초연된 혁명 가극 는 북한의 5대 혁명 가극 중 하나로 일제강점기 때 헤어진 가족이 김일성 지배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다시 만난다는 이야기를 그린다. 사진은 1955년 설립된 조총련 산하의 예술 단체 금강산가극단이 평양에 가서 를 전수받은 후 1974년 무대에 올린 장면이다. 가극 성악가 류전현(柳展鉉)이 출연했다. 남북한의 음악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70여 년 분단 상황을 거치며 다른 길을 걸어왔다. 음악에서도 통치 이념인 주체사상을 강조하는 북한에서는 전통 음악을 가리키는 용어부터가 다르다. 남한에서 ‘국악’이라고 부르는 음악이 북한에서는 ‘민족 음악’이다. 전통 악기에 대한 태도도 양쪽이 사뭇 다르다. 남한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해 온 반면에 북한은 서양 음악 연주에도 문제가 없도록 대부분의 전통 악기를 개량해서 사용하고 있다. 국립국악원 천현식 학예연구사와 북한 음악 연구자 김지은 씨가 공동으로 집필한 『재외 동포 원로 예술가 구술 채록 – 일본 편』은 이 같은 북한 음악의 실체를 안내하는 길라잡이가 되어 준다. 이 책은 총련계 재일동포 원로 예술가 8명의 구술을 기록한 것으로 남북한 간에 왕래와 교류가 전면 중단된 상황에서 귀한 자료일 수밖에 없다. 구술에 참여한 이들은 전 금강산가극단 지휘자 김경화(金慶和), 가극 성악가 류전현(柳展鉉),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해외 담당 부소장을 맡고 있는 작곡가 이철우(李喆雨), 안무가 임추자(任秋子), 전 금강산가극단 배우이며 성악가인 정호월(鄭湖月), 작곡가 정상진(丁相鎭), 도쿄 조선대학교 음악교육과 교수 최진욱(崔振郁), 무용수 현계광(玄佳宏)이다. 이들은 북한으로부터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 인민배우, 공훈배우 등의 칭호를 받았으며 이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2008년 4월,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베이징 국가대극원에서 중국 순회 공연을 시작한 혁명 가극 의 포스터. 이 무대에는 북한의 피바다가극단 소속 배우들을 비롯해 50여 명의 공훈예술가와 인민예술가들이 출연했다. 천현식, 김지은 씨는 국립국악원이 진행 중인 ‘재외 동포 원로 예술가 구술 채록 사업’의 첫 지역으로 선정된 일본을 2017년 이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원로 예술가 8명의 증언을 책으로 엮어냈다. 다른 이념, 다른 음악 천현식 학예연구사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북한 음악 전문가로 『북한의 가극 연구』, 『예술과 정치』(공저) 등의 책을 펴낸 바 있고 「모란봉악단의 음악 정치」 같은 논문을 쓰기도 했다. 김지은 연구자는 대학에서 첼로를 전공한 뒤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북한 음악 예술론을 주제로 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그는 지난 2007년 재일 금강산가극단의 한국 공연 기획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북한 음악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고 한다. 두 연구자가 채록한 북한 음악에 대한 이야기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수두룩하다. “정상진 작곡가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러시아 음악의 영향을 받아 선율을 위주로 한 표제음악을 주로 작곡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향곡이든 관현악곡이든 ‘선율에 각을 뜨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오래전부터 강조해 왔다고 합니다. 서양식 테마에 의한 작곡법을 북한에서는 선율을 끊어서 단락을 많이 주는 방식으로 여기는 거죠. 그런데 요즘에는 조금 다양해져서 과거보다는 각을 조금 뜬 것 같은 창작곡이 나오는 경향도 있다고 합니다.” 천 학예연구사의 전언이다. 그는 이 책에 구술자들의 증언 외에도 남북한 음악의 다른 면들을 친절히 소개하고 있다. 그 한 예로 2019년 남한에 공개된 북한 민족 가극 ≶춘향전> 영상 자료를 보면, 남도 판소리식 탁성 창법이 아니라 맑고 청아한 서양식 벨칸토 창법을 따르고 있다. 내용에서도 춘향과 몽룡의 사랑 이야기에 방점을 찍는 남한과 달리 양반과 상민의 계급적 대립을 부각시키고 있다. 북한의 민족 가극은 노래와 음악을 기본으로 하는 종합적인 무대 예술을 뜻하는데, 1960년대에 시작된 전통 악기 개량과 더불어 만들어진 성악의 새로운 갈래이다. 으로부터 시작된 민족 가극은 1970년대 혁명 가극 형태로 이어졌다. 천 학예연구사는 “북한에서는 판소리를 연구용, 교육용으로 배울 뿐 대중이 향유하는 음악으로는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남한에서는 전통 음악의 대표적 장르로 대중화된 판소리가 북한에서는 양반과 지배 계층의 정서가 배어 있다는 이유로 배척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판소리 가 북한에서 민족 가극으로 변형된 이유다. 북한의 성악은 발성과 창법, 가사와 음악 양식까지 사회주의 혁명과 인민의 감성에 맞게 변화되어 왔다. 성악 발성은 전통 민요를 부르는 ‘민성(民聲) 창법’과 서양 음악식 발성인 ‘양성(洋聲) 창법’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민족 발성의 준말인 민성은 ‘주체 발성’이라고도 부르는데, 맑고 나긋나긋하면서도 간드러지게 느껴지는 목소리는 전통 서도소리 창법을 현대 감각에 맞게 발전시킨 것이다. 민족 가극 에는 민성 가수들이 많이 출연하고, 혁명 가극 에는 양성 가수들이 주로 나오는 경향이 있다. 정호월 성악가에 따르면, 북한식 발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높은 톤의 목소리를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특히 전통 민요는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불러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메조소프라노 가수들이 늘어나면서 낮은 목소리의 노래도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르는 현상이기도 하다. 한편 김 연구자는 “정상진 작곡가에 의하면 북한의 대표적 가극 작품들 사이에도 각각의 특징이 있다”면서 “예를 들어 ≶피바다>는 민족적이면서 구수한 느낌이며, ≶꽃파는 처녀>는 세련된 선율이 많고, ≶금강산의 노래>는 조금 더 현대적인 색깔을 지녔다”고 설명한다. 이런 특성은 악기 편성에서도 드러나는데, 는 순수한 민족 악기 중심으로 창작되었고, 도 처음엔 민족 악기와 금관악기로 연주했다가 외국에 소개하기 위해 바이올린을 추가했다. 그런가 하면 는 양악기 위주의 편성으로 민족 악기는 죽관악기만 들어간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북한 음악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들어 “민족 음악이 상대적으로 인기가 떨어지고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서양 음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 구술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1.안무가 임추자 선생의 약력을 소개하는 페이지. 1957년 일본에 조선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헌신한 그는 재일동포 무용계의 큰 별로 불린다. 2019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2.작곡가 정상진 씨가 조선국립교향악단의 김병화 지휘자에 대해 회상하는 내용이 담긴 페이지. 1992년 6월 도쿄 동경예술극장대극장에서의 공연 사진도 함께 게재되었다. 변화의 바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북한 음악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들어 “민족 음악이 상대적으로 인기가 떨어지고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서양 음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 구술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한 예를 들면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축하 공연에 참가했던 삼지연관현악단의 지휘자 장룡식(張龍植)의 인기가 매우 높아 그가 지휘봉을 잡는 공연에 관객들이 많이 모인다고 한다. 김 연구자는 구술자들을 통해 “전반적으로 북한 음악도 해외의 큰 흐름을 반영해 변화하고 있는 모습이 엿보이고 있으며, 외국 창법도 많이 도입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정상진 작곡가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의 음악대학에서는 모란봉악단의 창법인 ‘모란봉식 가요 창법’을 가르친다고 해요. 이 창법은 기존의 민성, 양성에 대중가요까지 세 가지 부류로 나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최근에는 음악대학에 대중가요를 가르치는 학과가 생겼다고 한다. 반면에 과거 북한을 대표하는 공연예술 단체였던 국립민족예술단은 원로 중 상당수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세대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어 가극의 경우 피바다가극단으로 일원화되고 있다는 것이 최진욱 교수가 전하는 최근 북한 음악 교육 과정의 변화이다. 특히 평양음악대학은 철저한 수재 교육을 표방하여 실력을 중시하며, 전문 외국인 강사도 많이 초빙해 수업을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 결과, 피아노 및 성악 분야 국제콩쿠르에서 입상자를 많이 내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남한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1917∼1995)이 북한에서는 여전히 높은 명성을 유지하고 있고 윤이상관현악단, 윤이상연구소 등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천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평양에는 윤이상 음악에 미친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이 구술자들의 증언이다. 북한의 음악종합대학에는 민족학부, 양악부, 작곡학부 등의 학과가 있는데 이론학부에서 윤이상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한편 북한에서는 오랫동안 재즈나 록 음악이 대부분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왔는데 “서양의 대중 가수들이 마약을 복용하고 너절한 생활을 한다”고 여긴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일부 재즈 연주자들의 무정부주의 사상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 음악에는 스윙이나 비트 같은 리듬이 녹아 있다는 김 연구자의 의견에 정상진 작곡가도 상당 부분 동의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예술가들은 남한에서 ‘북한판 걸그룹’으로 불려지는모란봉악단 소속 가수들이다. 2012년 김정은 국무위원장 체제 출범과 함께 결성된 악단으로 평창동계올림픽대회 당시 북한측 공연 단장을 맡아 남한에도 잘 알려진 현송월(玄松月)이 악단장이다. 단원의 대부분은 김정은 위원장의 부인 리설주(李雪主)가 다닌 금성학원이나 평양음악무용대학 출신이어서 리설주가 결성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란봉악단은 공훈국가합창단과 더불어 김정은 시대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공연 형식에서도 다른 단체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또한 2015년 김정은의 지시로 창단한 금관악기 위주의 경음악단 청봉악단(靑峰樂團)도 이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음악 정치 천 학예연구사는 “전통 악기를 개량해서 쓰고, 퓨전 음악을 시도하는 측면에서는 북한이 남한을 앞서간다”고 평가했다. 북한에서는 악기 개량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12현이던 가야금 줄 수가 19현, 21현으로 늘어났고, 5음계 역시 7음계로 확장되며 파격적인 변화가 진행돼 왔다. 북한의 개량 악기 가운데 옥류금, 장새납, 대피리 같은 것은 남한에서도 적극적으로 연주에 수용하고 있다. 두 저자는 “북한 음악은 정치를 빼고 얘기할 수 없고, 북한에서는 음악이 다른 장르의 예술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의 배경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음악은 정치에 봉사해야 한다. 정치가 없는 음악은 향기가 없는 꽃과 같으며, 음악이 없는 정치는 심장이 없는 정치와 같다”라고 규정한 사실이 있다. 남한에서는 음악이 개인의 즐거움과 취향을 기본으로 하는 것과 달리 북한에서는 음악이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것이 오늘날 남북한의 음악이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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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2020 SUMMER 72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 분단 상황이 70년 이상 계속되면서 남북한의 미술은 상반된 이념적, 정치사회적 환경에 따라 매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한국전쟁에 대한 그림에서도 양쪽의 기억은 사뭇 다르다. 남북의 화가들은 각기 다른 관점과 양식으로 전쟁을 기록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3일 만에 서울은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화가들은 대부분 양식 배급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좌익 단체인 조선미술동맹(Korean Art Alliance)의 주도 아래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를 그려야 했다. 같은 해 9월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이 퇴진하자 이들은 적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때 공산 치하에서 북한군 협력에 앞장섰던 기웅(奇雄), 김만형(金晩炯)을 포함한 여러 화가들이 북쪽으로 떠났는데 그 이전에 이미 북으로 갔던 사람들까지 합치면 월북 미술가는 대략 40여 명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인 사람도 있겠지만, 공산 치하에서의 행적이 문제가 될까 두려워 마지못해 월북을 택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은 같은 민족이 이념으로 나뉘어 서로를 적으로 여기며 싸우는 과정에서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된 커다란 역사적 시련이자 충격이었다. 이러한 민족적 비극을 다룬 걸출한 문학 작품들은 꽤 많이 나왔지만, 미술 작품은 그렇지 못했다. 남북한 모두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전쟁의 참상에 비해 실제로 전투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은 몇 점 되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남한 국방부에서 관리하던 종군화가단(Army Signal Corps)에 속해 있었던 유병희(柳秉熙)의 (1951)다. 이 작품은 1951년 6월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있었던 치열한 전투를 그리고 있다. 태극기는 화면 위에 높이 세워져 있고, 북한의 인공기는 피에 젖은 채 땅에 떨어져 있다. 그림은 국군의 승리를 표현하고 있지만, 대한민국 해병대 5대 작전 중 하나로 기록된 이 전투에서 약 2,260여 명의 북한군과 700여 명의 국군이 희생되었다. <38선(The 38th Parallel)>. 김원(金原). 1953. 캔버스에 유채. 103 × 139 ㎝. . 남관(南寬). 1963. 캔버스에 유채, 콜라주, 부식. 97.5 × 130.5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피난민들의 참상 한국전쟁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시사만화가 김성환(金星煥; 1932~2019)이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18세의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그는 「연합신문」에 라는 제목의 만화를 연재하고 있었다. 서울이 북한군에 넘어가자 그는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다락방에 숨어 지내면서 거리에서 목격한 장면을 약 110점의 생생한 수채화 스케치로 남겼다. 이 중에는 국군이 막강한 화력을 과시하던 소련제 탱크 T34를 빼앗고, 주변에 북한군 시체가 널려 있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당시 다수의 화가들은 전투 현장을 사실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피난민의 고달픈 생활이나 혼란스러운 피난길의 상황을 화폭에 담았다. 화가들 자신이 피난민의 일원으로 매일 겪어야 했던 가장 절박한 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양 출신으로 전쟁 전에 월남한 김원(金原 Kim Won; 1912~1994)은 1953년 작 <38선>에서 분단의 선을 넘으려는 북한 피난민들의 행렬을 비장하게 그려냈다. 앞에 선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안고 오열하거나 아이를 안거나 업은 채 힘들게 언덕을 넘고 있다. 대지의 어두운 청색과 붉게 물든 하늘이 이들의 절망과 고통을 표현한다면, 오른쪽 언덕 위의 밝은 광선은 희망을 상징한다. 전쟁에 대한 참혹한 기억은 전후 한국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가던 시기에도 계속 그림으로 제작되었는데 대체로 은유적이거나 추상적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소련이나 북한에서 성행하던 사회주의 사실주의(Socialist Realism) 미술이 정치적으로 오염되었으며 선동성이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이러한 추세는 세계적인 것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나 미국 화단에서도 사실주의는 외면당하고 추상미술이 강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사실주의 회화는 정치적이거나 좌파 계열로 인식되었으며, 예술로서 평가조차 하지 않으려는 시각도 존재했다. 전후 한국 미술인들 역시 해외 미술의 동향이었던 추상미술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치색을 피하고 전쟁의 상처에 대한 분노, 아픔, 허무감, 가족의 상실을 추상적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다. 일례로 남관(南寬 Nam Kwan; 1913~1990)은 전쟁 중에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고 하는데, 피난길에서 목격한 참상들이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63년 작 에서는 그러한 잠재된 기억들이 침울하고 회상적이며 감상적인 분위기로 전달된다. 화면에는 인간의 형상이나 기호 또는 상형문자와 같은 형태들이 부유하듯이 자리 잡고 있다. 크고 작은 획으로 이루어진 형태들은 시간이 정지되고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배경 속에서 비극적인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부분). 이쾌대(李快大). 유채. 1958. 200 × 700 ㎝. . 정종여(鄭鍾汝 Chung Chong-yuo). 1958/1961(개작). 조선화. 154 × 520 ㎝.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Fatherland Liberation War)으로 부르는 북한에서 그려진 전쟁 관련 그림들은 남쪽과 판이하게 달랐다 … 북한 미술에서는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다고 해도 전투 장면보다는 주로 북한군을 도와주는 영웅적인 인민들의 모습들이 등장한다. . 김의관(金義冠). 1966. 조선화. 121× 264 ㎝.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영웅적인 인민들의 모습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Fatherland Liberation War)으로 부르는 북한에서 그려진 전쟁 관련 그림들은 남쪽과 판이하게 달랐다. 전후 북한이 채택했던 미술의 방향이 사회주의 사실주의였기 때문이다. 평양미술대학에서도 러시아 미술은 정규 과목이었고, 화가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역사화처럼 극적이면서도 영웅적인 인물들의 구성을 배웠다. 특히 월북 작가로 한국전쟁을 주로 그린 화가는 남한에 있을 때부터 장엄한 군중화로 주목받았던 이쾌대(李快大 Lee Quede; 1913~1965)였다. 그의 대표적인 전쟁화 (1958)는 북한이 중공군의 참전에 감사하면서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다지기 위해 평양의 모란봉 구역에 건립한 조중 우의탑(Sino-Korean Friendship Tower) 내부에 그려진 벽화이다. 그림 중앙에는 중공군이 미군과 국군을 물리치는 상감령(上甘嶺)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 장면이, 오른쪽에는 패잔한 미군이, 윗부분에는 승리한 중공군이 등장한다. 북한 미술에서는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다고 해도 전투 장면보다는 주로 북한군을 도와주는 영웅적인 인민들의 모습들이 등장한다. 월북 화가였던 정종여(鄭鍾汝 Chong Chong-yuo; 1914~1984)가 국가미술전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1961)는 강원도 고성 주민들이 눈보라 속에서 전선에 탄약과 음식을 나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는 인물들과 동물들의 움직임이 리듬감 있게 구성되어 있으며 함축적인 필선이나 먹의 농담, 원근법적인 배치로 공간감이 잘 살아나 있다. 1950년대만 해도 북한에서는 유화로 그리는 화가가 붓과 먹으로 그리던 동양화가(ink wash painters)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조선화(Chosonhwa)’가 권장되었다. 김일성이 “서양에서 들어온 유화보다는 전통적인 붓과 먹을 사용하는 고유한 조선화가 민족적 형식이며, 이를 주체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조선화의 약점은 색채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색채를 사용하여 선명하고 간결하며 아름답고 힘있게 인민들의 투쟁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그렇게 색채 조선화를 강조했던 그가 칭찬한 작품들로는 김의관(金義冠 Kim Ui-gwan; 1939~)의 (1966)과 리창(李昌 Ri Chang; 1942~)의 (1966)가 있다. 은 강원도 고성군 남강마을에서 추수한 볏단 속에 인민군을 숨기고, 총을 든 강인한 여성들이 소를 끌면서 영웅적으로 싸우는 작품으로 국가미술전람회에서 일등상을 받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 미술에서 한국전쟁을 다룬 작품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보다는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그린 작품들이 양적으로 월등히 많다. 조국해방전쟁은 실패로 끝난 전쟁이었고, 항일 투쟁을 통한 김일성 우상화가 우선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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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2020 SPRING 59

평화의 꿈을 담은 베를린의 예술 정원 독일 수도 베를린에 지구상 마지막 분단의 땅인 남북한의 식물이 한데 어우러질 예술정원이 탄생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2019년 5월 23일 포츠담광장의 쿨투어포룸(Kulturforum)에 조성된 한시적인 정원 ‘제3의 자연 (Das dritte Land)’은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중요성을 독일과 남북한이 공유할 수 있는 뜻깊은 장소이다 무너진 베를린 장벽 인근에 조성된 이 예술정원은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서 착안한 백두대간으로 형상화됐다. 현무암과 흙으로 만든 축소 백두대간에서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듯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등줄기로 남북을 잇는 주축이자 자연 생태계의 핵심축을 이루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북쪽 경계 백두산에서 시작해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을 통해 남해안으로 맥이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생태학적인 면을 넘어 인문사회학적인 면에서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평화와 화해를 향한 무언의 기도와도 같은 이 신비한 예술정원은 40대 예술인 3명이 의기투합한 합작품이다. 금아트프로젝트(Keum Art Projects)의 김금화(Kim Keum-hwa 金錦和) 큐레이터와 설치미술가 한석현(Han Seok-hyun 韓碩鉉), 김승회(Kim Seung-hwoe 金承會) 두 작가가 3년여의 준비 끝에 일궈냈다. 기획과 조직은 김금화 큐레이터, 작품의 전체 비주얼은 한석현 작가, 식물 관련 부분은 김승회 작가가 나눠 맡았다. 한석현(왼쪽), 김승회 두 설치미술 작가가 베를린 포츠담광장 쿨투어포룸에 조성된 예술 정원 ‘제3의 자연’에 식물을 식재하고 있다. 이 정원은 베를린 장벽 철거 30주년을 기념하고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로 2019년 5월 개장했으며, 2020년 10월까지 방문객을 맞이할 예정이다. ⓒ 금아트프로젝트(Keum Art Projects) 한반도 중부 이북의 고산 지대에서 자생하는 바람꽃(Anemone narcissiflora L.)이 활짝 피어 있다. 작가들은 흑백의 수묵화적 정취를 표현하기 위해 이 밖에도 오랑캐장구채, 기생꽃, 은꿩의다리, 큰까치수염 등 흰 꽃이 피는 식물들을 검은 바위에 흙을 얹고 심었다. 문화와 정서의 동질성 김금화 큐레이터는 베를린에서 현대예술 독립기획사를 운영하면서 한국과 독일의 작가, 갤러리, 기업의 예술 전시 프로젝트를 돕고 있다. 한석현 작가는 현대 미술과 생태학적 실천의 확장적 결합에 천착해왔다.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 중이다. 김승회 작가는 분단된 베를린 장벽과 통일 이후 장벽을 둘러싸고 발생한 사회적·도시건축학적·생태학적 변화에 주목해왔다. 미술과 조경의 소통이 가능한 공공미술을 기반으로 삼는다. 백두대간의 지리적 특성이 한민족의 문화와 정서의 동질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한석현 작가는 이 정원을 구상하면서 시각적 표현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고 말한다. “ 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진경산수화의 걸작이며 남북한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잘 알려져 있고, 지금까지 남북의 문화적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문화적 배경을 이번 프로젝트에 넣으면서 비 갠 뒤 안개가 자욱한 산자락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그는 한반도의 산세가 담고 있는 수묵화적 풍경을 정원 예술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탐색한 끝에 결국 검은 바위 밑에서 피어나는 흰 색깔의 야생화와 안개 분무 장치를 통해서 산수화의 정취를 표현해 냈다. 두 작가들은 한민족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백두대간을 형상화하기 위해 현무암과 흙으로 모형을 만들고, 인공 분무 장치로 산자락에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한 풍경을 연출했다. ⓒ 금아트프로젝트(Keum Art Projects) “북쪽의 꽃을 심고 싶다고 했을 때 다들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방문객들에게 선사하는 게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제3의 자연’은 성 마테우스 교회 앞 부지에 1,250㎡(25×50m) 넓이로 조성되었으며, 당초 남북한에서 자생하는 식물 60종(남한 식물 37종, 북한 식물 23종) 3,000주를 심을 계획이었으나 북한 측의 미온적 태도로 인해 현재 45종(남한 식물 31종, 북한 식물 14종) 1,500주만 식재되어 있다. 수묵화적 풍경 그가 처음 예술 정원을 구상한 것은 2016년 베를린 베타니엔 예술가의 집(Kunstlerhaus Bethanien)에서 입주 작가로 머물고 있을 때였다. “2016년 봄 베를린에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한없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독일 통일이 이런 안정감과 평화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는 순간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독일 통일이 양측이 서로 원하고 자유롭게 왕래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도 정치적 결정만 기다리기보다는 남북한 사람들이 더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지난 10여 년간 저 자신조차도 누군가와 통일에 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는 데 생각이 미쳐서 남북한과 관련된 작업을 하고 싶어졌어요” 예술 정원의 핵심 주제는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이다. ‘제3의 자연’이란 명칭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작명은 김금화 큐레이터가 했는데, 르네상스 시대 철학자 자코포 본파디오(Jacopo Bonfadio)가 정원을 인간이 만든 ‘제3의 자연(Terza Natura)’이라 정의하고 예술의 한 분야로 끌어올린 데서 착상했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남북한 경계 없이 어우러진 한반도의 산수와 초목을 감상할 수 있다. “정원은 자연에 대한 동경,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됐습니다. 이러한 정원의 의미에 분단된 남북한의 현재를 뛰어넘는 한반도의 유토피아적 상상을 중첩시킨 제목입니다.” 상상과 현실 그러나 작가들의 이런 구상은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엄정한 분단의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기획 초기에 호의적이고 협조적이었던 북한 측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소극적 태도로 돌아섰다. 그 결과 현재 예술 정원에는 작가들이 처음 선별한 60종 3,000주의 남북한 식물 가운데 절반가량인 45종 1,500주만 심겨 있다. 북한에서 가져오기로 한 식물이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 때문에 전달되지 않아서다. 그래서 북한 쪽 백두대간이 자생지인 야생화들은 경북 봉화군에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가져와 아쉬움을 달랬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만큼 큐레이터와 작가들은 북측에서 직접 식물들을 가져올 방법을 찾고 있다. 베를린자유대학교 소속 베를린 식물원, 한국 국립수목원, 북한 조선중앙식물원 등과 접촉 중이다. 그 밖에도 어려움은 또 있었다. 대도시 베를린에서 예술 정원을 조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행정적 허가를 받아내는 게 최대 관건이었다. 베를린 공원관리청으로부터 허락을 받는 힘겨운 과정은 김금화 큐레이터가 발 벗고 나섰다. 적법한 절차를 밟고, 규격과 시공 방법도 독일 표준을 따라야 했다. 공원관리청, 식물보호관리청 등의 규정과 작가들의 예술적 아이디어 사이에서 타협해야 할 것들이 숱했다. 또 다른 문제는 재정이었다. 다행히 2019년 3월 한 달 동안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3만 2,500유로를 모금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국내 유명 배우들과 뮤지션 등 각계 인사들이 프로젝트에 공감해 응원 메시지를 보냈으며, 기획과 홍보에 힘을 보탰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독일 주재 한국문화원, 독일 크룰재단(Hans and Charlotte Krull Foundation) 등에서도 후원이 뒤따랐다. 아직 북한 땅에서 자란 식물을 기다리고 있는 미완의 단계이지만 어렵게 이룬 성과는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당초 2019년 11월 15일까지였던 개장 기간도 베를린 주민들과 베를린 미테(Mitte) 지구 문화국의 지지와 성원으로 올해 10월 30일까지 연장됐다. 독일 당국의 지원 2019년 5월 23일부터 11월 15일까지 1차 개장 기간에는 다양한 이벤트가 열려 분위기를 띄웠다. 첫날 공연을 펼친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Jo Su-mi 曺秀美) 씨는 “독일 분단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남북 교류와 평화를 기원하는 예술 정원을 응원해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날 개장 행사에서는 가야금 연주자 주보라(Ju Bo-ra)와 퓨전 타악기 핸드팬(Handpan) 연주자 진성은(Jin Sung-eun)의 합동 연주도 있었다. 6월 7일에는 수화(手話)를 하면서 북한 가요 을 불러 유명해진 싱어송라이터 이랑(Lee Lang 李瀧)이 성 마테우스 교회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11월 8일에는 사찰 음식을 세계에 알린 정관(Jeong Kwan) 스님이 이 교회에서 남북 통일을 염원하는 화합의 만찬을 선보였다. 이어 김금화 큐레이터의 기획으로 ‘경계와 유토피아, 정치와 예술’이라는 주제 아래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퍼포먼스를 펼쳤다. 프로젝트가 연장되면서 세 사람은 북한 식물을 확보하는 데 계속 힘을 쏟고 있다. “북쪽의 꽃을 심고 싶다고 했을 때 다들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방문객들에게 선사하는 게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우리는 올해도 계속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예술 정원에서 남북한 사람들이 모여 막걸리라도 한 잔씩 하면서 어떤 이야기든 나누게 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석현 작가의 말에는 간절함과 결연함이 배어 있었다. 김금화 큐레이터는 “남북 대화가 진척되어 이 정원에서 남북 생태학자들이 심포지엄을 열고 백두대간의 식물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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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2019 WINTER 54

화해와 통일의 일꾼을 키운다 탄광촌으로 알려진 강원도 태백시에서 대안학교와 수련원을 통해 통일 이후를 살게 될 미래 세대를 키우고 있는 미국인 신부가 있다. 4대째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는 벤 토레이(Ben Torrey) 신부다. 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3세(Reuben Archer Torrey Ⅲ) 가 세운 수도 공동체에서 기도와 노동을 통해 젊은 인재를 교육하고 있는 그에게 통일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곧 다가올 현실이다. 벤 토레이 신부는 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3세의 한국 이름 ‘대천덕(戴天德)’을 따라 자신의 이름을 ‘대영복(戴永福)’으로 지었다. 그는 2005년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이주했으며, 현재 ‘네 번째 강(Fourth River)’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통일 이후 세대를 가르치고 있다. 태백에 있는 삼수령은 세 물줄기가 동·서·남해로 흘러가는 출발지다. 해발 920미터인 이곳에 내리는 비가 북서쪽 경사지로 흘러내리면 한강이 되어 서해로 가고,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어 남해로, 동쪽으로 떨어지면 삼척의 오십천으로 흘러 동해로 빠진다. ‘바람의 언덕’이라 불리는 삼수령 골짜기에서 미국인 신부가 북한 쪽으로 흘러가는 네 번째 강을 만들고 있다. 대를 이어 한국에서 선교와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는 벤 토레이 신부는 북한 개방에 대비해 이곳에 ‘통일 세대’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삼수령센터(Three Seas Center)를 세워 ‘네 번째 강(Fourth River)’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강원도 태백시에 위치한 삼수령센터 3층 예배실에서 벤 토레이 신부가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벤 토레이 신부가 학생들에게 동해와 서해, 남해로 갈라져 흐르는 물줄기의 시작점인 ‘삼수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통일 한국을 위한 인재 양성 ‘네 번째 강’ 프로젝트는 ‘생명의 강 학교(The River of Life School)’와 ‘삼수령 청소년수련원(Three Seas Youth Center)’이 두 축을 이룬다. 2010년에 개교한 생명의 강 학교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대안 학교로 청소년들을‘화해와 통일의 일꾼(agents of reconciliation and unification)’으로 키우는 데 역점을 둔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경쟁 대신 협동과 섬김의 중요성을 배운다. “지구촌의 교육은 대부분 경쟁 체제잖아요?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은 더욱 심하죠. 앞으로는 경쟁의 승자가 아니라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나눌 줄 아는 사람, 뒤처진 사람들과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자라나는 세대는 개방된 북한이나 통일 한국을 현실로 맞이하게 될 겁니다. 경쟁적 교육만 받은 세대는 이러한 과업을 감당하기 힘들어요. 우리는 경쟁보다는 협력의 정신과 협력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남북 통일의 가장 기초적인 요소가 협력이니까요.” 토레이 신부의 부인 리즈 토레이(Liz Torrey)가 교장을 맡고 있는 이 학교는 중고교 정규 교과목과 더불어 북한에 관한 교육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남북한의 언어 차이, 역사, 사회 제도 등을 망라한다. 그래서 도서실에는 북한 관련 책들이 빼곡하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뿐만 아니라 노동도 해야 한다. “노동이 곧 기도이며, 기도가 노동이다”라는 성 베네딕트 수사의 가르침에 따라 교과 과정에 노동이 필수로 들어 있다. 학생들은 매주 수요일 아침 토레이 신부의 거처이자 기독교 초교파 수도공동체인 예수원(Jesus Abbey), 생명의 강 학교, 삼수령청소년수련원, 삼수령목장(Three Seas Ranch)에서 의무적으로 여러 가지 노동을 한다. 청소, 원예, 잡목이나 잡초 베기, 목초 파종, 외양간 청소, 세탁 같은 것들이다. 토레이 신부의 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3세 신부가 산림청으로부터 임차한 50만㎡가량의 목장과 공동체 마을 곳곳이 자연, 인간, 노동이 어우러지는 교육 현장이다. 토레이 신부도 직접 도끼를 들고 땔감 장작을 팬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 서로 협력하는 법을 배운다고 믿는 그는 “10대 시절 아버지와 함께 4년 동안 예수원 건물을 지을 당시에도 장작을 팼다”고 회상했다. 토레이 신부는 생명의 강 학교에서 여름철 1주일 동안 다른 학교 학생들을 위해 노동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 역시 북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북한 개방에 대비하기 위한 교육의 일환이다. 학생들은 이 기간 동안 휴대전화를 학교에 맡겨야 한다. 토레이 신부는 이 학교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기숙사가 달린 교사 건물을 짓고 있다. 노동을 통한 협력 삼수령 청소년수련원은 중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영성과 체력을 동시에 키울 수 있는 포괄적인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품성 개발과 섬김으로 청년들에게 남북 통일을 준비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강력한 통일 국가로 세계 무대에서 자리 잡기를 기대하고 있는 이때 젊은이들을 이 나라가 요구하는 지도자로 준비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남한은 총명한 젊은 인재들의 보고이지만, 우리 젊은이들이 북한 청년들에 대해 관심이 부족하고 교육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통일이 되더라도 사회 통합 과정에서 오는 여러 가지 문제, 즉 세계관이나 가치관, 문화, 언어 등의 차이에서 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동서독의 통일 과정과 철의 장막 붕괴를 통해 우리가 배운 바와 같이 이런 문제들은 지금부터 착실히 준비해야 합니다. ‘네 번째 강’ 계획은 바로 그러한 일을 위한 것입니다.” 삼수령목장은 통일이 되면 소 키우는 기술로 북한 주민의 경제 활동을 돕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또한 예수원에서는 이곳을 집처럼 여기는 60여 명이 공동체 생활을 한다. 매주 월~수요일에는 2박 3일 일정으로 예약한 방문객들이 머물다 갈 수도 있다. 이들은 더불어 일하고 함께 밥을 먹으며, 하루 3번 이상 묵상을 한다. 기도도 자신이 아닌 이웃을 위해 한다. 이 기간 동안에는 이들도 휴대전화를 예수원 측에 맡겨야 한다. 이런 방문자가 매달 150~400명에 이른다. 이곳은 전액 후원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숙박비는 없다. 물론 신앙심과 형편에 따라 헌금을 할 수는 있다. “자라나는 세대는 개방된 북한이나 통일 한국을 현실로 맞이하게 될 겁니다. 경쟁적 교육만 받은 세대는 이러한 과업을 감당하기 힘들어요. 우리는 경쟁보다는 협력의 정신과 협력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남북 통일의 가장 기초적인 요소가 협력이니까요.” 간절한 소명 토레이 신부가 ‘네 번째 강’ 계획에 착수한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2002년 8월 ‘대천덕(Dae Chon-dok 戴天德)’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더 알려진 아버지의 장례식 때였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던 집사가 어머니 제인 토레이(Jane Torrey)에게 전해 달라는 말씀이 있었다. “에덴동산에는 흐르는 강이 4개 있는데, 삼수령엔 강이 3개밖에 없어요.” 토레이 신부는 즉각 이 말에 담긴 뜻을 이해했고, 예수원에 네 번째 강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강은 북쪽을 향하는 생명수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버지가 통일을 준비할 세대를 양성하기 위한 수련원 설립을 놓고 20여 년간 기도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활 터전이 있던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살면서도 꾸준히 생명의 강 학교와 삼수령 청소년수련원 설립을 돕고 있었던 토레이 신부에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일상생활 도중에도 문득 북한의 어려운 상황이 생각나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잦았다. 불현듯 아버지 장례식 때 들었던 ‘네 번째 강’ 이야기가 떠올랐다. 북한 개방에 대비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그는 2003년 태백 예수원 공동체에 합류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명의 간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백 예수원 공동체는 곧 그를 삼수령센터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2005년 한국으로 완전히 이주해 이곳에 정착했다.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벤 토레이 신부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났지만, 7살부터 19살 때까지 한국에서 자랐다. 그는 한국 청년 10명과 함께 아버지가 1965년 태백에 예수원을 건립할 당시 첫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6개월 동안 대형 군용 텐트에서 지내며 일을 도왔다. 예수원 설립 장소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누비던 그의 아버지는 태백 지역 성공회로부터 이곳 얘기를 듣고 땅을 구입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1969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1976년 뉴욕 주 사라 로렌스 대학(Sarah Lawrence College)을 졸업한 후 2년 동안 지역 사회 봉사단체를 이끌다가 1978년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와 예수원에서 1년을 보냈다. 이때 그는 삼수령 지역의 일부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계속 살 생각은 없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79년부터 에트나 생명보험회사(Aetna Life and Casualty)와 앤더슨 컨설팅(Andersen Consulting)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시스템 개발자 등 IT 전문가로 일했다. 1994년 코네티컷 주에 미션스쿨인 킹스스쿨(The King’s School)을 설립해 2004년까지 이사장과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삼수령센터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예수원은 루벤 아처 토레이 3세 신부가 1965년 설립한 기독교 초교파 수도 생활 공동체이다. 현재 벤 토레이 신부의 숙소로도 사용되고 있다. 4대째 이어온 인연 토레이 가문은 4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다. 토레이 신부의 증조할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1세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20세기 초 한국을 방문해 교회 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할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2세도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 교회의 재활 운동을 위해 일했다. 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3세 역시 한국에서 성공회 사역자로 활약하면서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인 성 미가엘신학원을 재건립했고, 태백에 예수원을 설립하고 삼수령센터의 터전을 닦은 후 이곳에서 영면에 들었다. 토레이 신부 가족은 대대로 기독교 초교파 정신을 소중히 지켜왔다. 증조할아버지가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 會衆敎會) 목사, 할아버지는 장로교 목사, 아버지는 성공회 신부, 토레이 신부 자신은 미국 동방교회(The Syro-Chaldean Church) 소속이다. 올해 5월 삼수령센터 공동체 마을 증설 공사를 시작한 토레이 신부는 ‘네 번째 강’ 프로그램을 확장하기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필요한 만큼 주실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은 한국 교회와 사회가 모두 분열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일이다. 그는 힘주어 말했다. “통일을 위해서는 남한 사회부터 먼저 하나가 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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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2019 AUTUMN 50

‘통일 경험’에서 희망을 보다 남북한의 정치 외교적 현안과 무관하게 인도적 지원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995년부터 대북 지원 사업을 벌여오고 있는 국제 구호 단체 굿네이버스의 이일하(Yi Il-ha 李一夏) 이사장을 만나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다. 2004년 굿네이버스 이일하 이사장이 평양에서 약 55km 거리에 위치한 남포시의 남포 육아원을 방문하고 있다. 국제 구호 개발 지원 단체인 굿네이버스는 1995년 이후 북한에 아동 보호 지원, 농축산 개발, 보건 의료 지원 분야의 인도적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이일하 굿네이버스 이사장은 지난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결렬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다. 국제 구호 개발 지원 단체인 굿네이버스의 창립자이자 ‘한국 NGO계의 대부’로 불리는 그는 오랫동안 정체 상태였던 대북 지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재개할 채비를 마쳤던 터였다. 그는 북미 관계가 풀리면 북한에 대규모 젖소 목장과 우유 가공 공장을 세운다는 목표를 세워 두고 있었다. 돼지·소·닭을 키우고, 소시지 공장을 비롯한 축산 가공 공장도 만들 예정이었다. 또 북한에서 생산한 삼계탕을 남한에 유통시킬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북한의 낙후된 보건 의료 시스템과 의료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제약 연구소, 제약 공장, 병원 등을 설립해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구상도 세워 두었다. 주사제와 캡슐제를 만드는 공장을 두 군데 짓고, 한약도 생산할 수 있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자 그의 이 같은 청사진의 실현도 또 한 번 멈추어 섰다. 젖소 지원 사업 그동안 굿네이버스가 펼쳐온 대북 민간 지원 사업은 아동 보호 지원, 농축산 개발, 보건 의료 지원 분야로 나눌 수 있다. 만성적 식량 부족과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념을 뛰어넘은 인도적 지원 사업을 벌여 왔다. 그 시작은 1995년이었다. 굿네이버스는 북한에 식량과 생활필수품 등을 지원하며 인도적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1997년에는 밀가루, 치과병원 설립 기자재, 작업복, 면장갑 등을 지원했다. 같은 해 이일하 이사장은 유엔에 속한 비영리기구(NPO)의 수장으로서 처음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이후에도 120여 차례 북한을 방문했고, 굿네이버스 관계자들의 방북까지 합하면 그 횟수가 140여 회에 이른다. 그러던 중 굿네이버스의 대북 지원 패러다임이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트럭에 1,001마리의 소를 싣고 판문점을 넘어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하는 이른바 ‘소떼 방북’을 단행했다. 이를 계기로 굿네이버스도 같은 해 9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젖소 200마리를 싣고 가 목장을 조성했다. 당시 북측은 정 회장 때와는 달리 비공개를 요청했고, 굿네이버스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소 200마리를 북한에 보내는데 비밀이 지켜질 리 없었다. 100마리씩 인천에 가서 한 달 동안이나 검역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젖소를 실은 트럭 10여 대가 검역소를 거쳐 인천항으로 향하는 모습이 TV 카메라에 잡혀 보도되는 바람에 북측 담당자가 언짢은 반응을 드러냈다. 우여곡절 끝에 총 510마리의 소가 북한으로 보내져 목장이 네 군데 생기게 되었다. 남한 수의사들이 평양 인근의 강동군 구빈리 협동농장에서 젖소들의 건강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굿네이버스는 북한에 젖소를 전달한 후 수의사를 비롯한 전문가들을 파견해 지속적 관리와 교류를 시도하고 있다. 사실 젖소를 북한에 지원하는 굿네이버스의 계획은 그보다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5년 이 이사장은 중국 단둥(丹東)에 갔다가 북한 해주에 한우 200마리를 보냈다는 호주 교민을 만나 “한우보다 젖소를 보내는 것이 낫겠다”는 얘기를 들었고, 낙농업을 키워야 북한 주민들에게 미래가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듬해 이 이사장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정부 낙농연구소 수석연구원을 만나 모든 절차적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미국 연방 정부의 불허로 계획은 무산됐다. 그는 이 사연을 굿네이버스 회지에 실었는데, 당시 서울우유에 근무하던 회원이 그 글을 보고는 새끼를 밴 젖소 200마리를 마리당 150만 원이라는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굿네이버스가 젖소 지원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선 까닭은 복합적 효과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젖소를 키우기 위해서는 수의사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꾸준히 관리해야 한다. 따라서 북한에 젖소를 전달한 후에도 남북이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북한의 젖소 사육 농민들과 남한의 수의사, 낙농업 관계자, 굿네이버스 직원들이 다각적인 소통을 이어갔다. 주민 소득 증대 이후 북측에서는 우유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우유 가공 설비 지원을 희망했다. 치즈 가공 공장을 지어준 굿네이버스의 조건은 단 한 가지였다. 이익금 절반을 마을 사람들이 나눠 갖되, 나머지 절반은 궁핍한 아이들을 먹이는 데 쓰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의 성과는 주민들은 물론 굿네이버스 측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평양시 변두리의 시골 마을이던 강동군 구빈리의 지역 소득은 5년 만에 10배로 급증했다. 주민 숫자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이 자랑스러운 발전상을 마을 어귀 간판에 큼지막한 글씨로 써 붙여놓을 정도였다. 낙농 사업의 성과가 커지자 이번에는 북한 농업성에서 양계 사업 지원을 부탁해 왔다. 이는 각종 장비뿐 아니라 종자 개량을 위한 값비싼 달걀을 외국에서 사와야 하는 일이었다. 굿네이버스는 프랑스에서 1개에 적게는 5천 원, 많게는 5~20만 원까지 하는 최우량 품종의 종자 달걀을 수입했고, 북측에서는 반경 4㎞ 이내에 외부인의 접근이 금지된 종계장(種鷄場)을 제공했다. 지원 사업의 효과가 날로 높아지자 북한은 이번엔 사료 공장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굿네이버스는 원산 근교에 있는 아연 공장에 기계를 증설해, 이곳에서 생산한 아연을 팔아 원료를 공급하는 방안을 생각해 냈다. 이 사업 역시 남한 정부의 무상기금 150만 달러와 은행 융자 유상 기금 700만 달러를 투입해 2년여 만에 은행 융자금 전액을 갚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이 같은 북한에서의 사회적 기업 운영 경험은 굿네이버스가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지역 개발 사업을 벌이는 데 커다란 자산이 됐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인도적 차원의 대북 식량 지원은 진작 했어야 한다는 것이 이 이사장의 견해다. “때늦은 감이 있죠. 하지만 북한은 지금 후원금 몇 십만 달러가 간절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전문 구호 분야를 개발해야 합니다. 농축산업, 의료, 교육 등 특화 분야에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하지요. 북측의 관심도 식량이나 비료 지원보다 지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개발 협력 쪽에 쏠려 있습니다.” 구빈리 협동농장은 이 이사장에게 잊지 못할 ‘통일 경험’을 선물했다고 한다. 이 이사장을 포함한 사업 점검 방북단은 열흘 정도 머물면서 주민들과 더없이 가까워졌다. 그곳 개천에서 물고기를 함께 잡아 매운탕을 끓이고 한솥밥을 지어 먹으며 정을 나눴다. “북한을 우수한 인력과 풍부한 자원을 갖춘 가능성 있는 시장으로 보고 투자하면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이런 통일 경험을 하는 북한 주민이 늘어나면 진짜 통일도 저절로 앞당겨지겠지요.” “북한은 지금 후원금 몇 십만 달러가 간절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전문 구호 분야를 개발해야 합니다. 농축산업, 의료, 교육 등 특화 분야에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하지요.” 평양의 정성제약공장에서 주사제를 생산하고 있는 모습이다. 굿네이버스는 북한의 보건 의료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지원을 하고 있다. 아동 보호 지원 굿네이버스는 그동안 농축산 분야를 포함해 북한의 25개 사업장에서 아이들을 포함한 북한 주민 22만여 명을 도왔다. 신의주를 비롯한 지역의 육아원 아동들에게 영양식을 지원하는 아동 보호 지원 사업은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 실질적 도움이 되고 있다. 2018년에는 북한 아동들이 굶주림에 고통받지 않도록 ‘굿네이버스 미국’을 통해 114톤의 분유를 지원했고, 20여 종의 의약품을 전달해 보건 의료 환경개선에도 힘썼다. 이와 함께 아동 교육을 위해 교과서 제작용 종이 150톤과 교육용 컴퓨터를 지원했고, 인라인 스케이트와 축구공 같은 특기 교육 자재도 틈틈이 제공해 오고 있다. ‘굶주림 없는 세상,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이사장이 1991년 창립한 굿네이버스는 이제 세계적인 NPO로 성장했다. 현재 한국 내 52개 지부, 36개 나라 210개 사업장에서 전문 사회복지 사업과 국제 구호 개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구촌에서 활동하고 있는 직원만 3천 명이 넘고, 한국에서만 50만여 명에 이르는 회원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1996년엔 한국 최초로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로부터 NGO 최상위 지위인 ‘포괄적 협의 지위’를 얻기도 했다. “창립자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남북 화해 분위기를 만드는 일입니다. 북한 주민 지원 사업을 축소하거나 끊어버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로우면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덧 고희를 넘긴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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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2019 SUMMER 18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링크(LiNK, Liberty in North Korea)는 미국의 한인 학생들이 2004년 설립한 비정부단체이다. 현재 미국, 캐나다, 영국, 일본을 비롯한 16개국 275개 단체와 협력 관계를 맺고 주로 탈북민들의 해외 정착을 돕고 있는데, 최근 한국지부장 박석길(Sokeel Park 朴錫吉) 씨가 영국·한반도 관계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영국 왕실에서 ‘대영제국 국가공로훈장(MBE)’을 받았다. 한국계 영국인인 박석길 씨는 유엔에서 인턴십을 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링크’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2012년부터는 한국지부를 맡아 탈북민의 구출과 정착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계 영국인으로 LiNK의 한국지부를 이끌고 있는 박석길 씨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동갑인 35세이다. 그는 자신이 만약 북한에서 태어났더라면 ‘장마당 세대’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북한 주민들 중 특히 이 세대에 주목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에 태어난 이 젊은이들이야말로 북한 사회에 변화를 일으킬 개연성이 높은 세대라고 믿기 때문이다. ‘장마당’은 소련 붕괴 이후 북한 정부가 주민들에 대한 생필품 배급을 대폭 줄이자, 먹고 살기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야외 시장을 가리키며 일정 부분 북한 경제의 시장화를 상징한다. 북한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장마당 세대는 1990년대 중반 국가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몰락한 이후 성장해 기존 세대와 사뭇 다른 사회화 과정을 겪었다. 이 연령대의 탈북민들에게 “당에서 배급받은 기억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대개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외부 세계의 정보를 상대적으로 많이 접한 이들은 가치관, 인식, 행동 등에서 부모 세대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정보 기술과 환경이 바뀌면서 이들은 불법 외국 미디어를 소비해 외부 세계의 색다른 관점에 눈을 뜨게 됐다. 특히 패션을 비롯한 외양과 생활 방식은 남한 드라마와 중국 영화로부터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국제 정치 전문가이기도 한 박 지부장은 장마당 세대 이외에 북한의 가족들과 접촉을 이어가고 있는 탈북인, 자본주의, 정보 유입의 확대, 정부 통제를 벗어난 인적 연결망 탄생, 북한 내부의 만연한 부패를 6대 북한 변화 요인으로 꼽는다. 우연한 계기 “유엔에서 인턴십을 하느라 뉴욕에 있을 때 탈북인을 여러 명 만나게 됐죠. 그때 북한 주민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는 각오와 열정을 갖게 됐습니다.” 박 씨가 탈북인을 돕는 링크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그는 런던정경대에서 국제관계학·국제정치사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유엔이나 영국 외교부에서 일하고 싶어, 우선 유엔 인턴십부터 지원했다. 인턴으로 일하던 2008년 어느 날 뉴욕에 온 탈북자 구호단체 ‘크로싱 보더(Crossing Border)’ 설립자인 마이크 김의 강연을 들으러 가게 됐다. 시카고 출신 한인 2세이자 금융 전문가인 마이크 김은 북한 주민들의 빈곤 실상과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Escaping North Korea』라는 책을 출간한 직후였다. 훗날 탈북인을 돕다가 중국 공안에 구속되기도 한 그는 강연이 끝난 뒤 박 씨에게 링크에서 활동해 보라고 권했다. 링크는 1980년대 후반에‘카스콘(KASCON, Korean American Students Conference)’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한국인 학생들과 미국인 학생들이 모여 해마다 컨퍼런스를 열면서 탈북민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졌다. 2004년 예일대에 모인 한인 2세 학생들은 고통 받는 북한 주민들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고자 ‘북한의 자유’라는 뜻이 담긴 ‘링크’를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워싱턴 DC에 본부를 두기로 했다. 회의나 토론만으로는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단체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링크의 활동비는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각종 재단, 학생, 기업가, 종교 단체, 회원 등의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소모임에서는 티셔츠나 직접 구운 과자와 버블 티, 주먹밥 같은 작은 물건들을 팔고, 음악회를 열어 모금 활동을 하기도 한다. 정부 지원 예산은 전혀 없다. 기부금은 주로 중국에 은신해 있는 탈북인들을 탈출시키는 데 쓰인다. 1명이 탈출하는 데 드는 돈은 3000달러(약 330만 원) 정도다. 탈북인의 주요 경유지인 동남아 국가에 은신처를 제공하고, 미국에 정착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영어 교육과 직업 훈련도 시켜 준다. 링크는 ‘노마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대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노마드 인턴’을 양성해 미국, 캐나다 등지를 다니며 북한과 북한 주민에 대한 인식과 행동을 바꾸게 하는 캠페인이다. 노마드 인턴으로 선발되면 북한 관련 교육을 받는다. 그런 다음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10주 동안 북한을 알리는 활동을 펼친다. 노마드 인턴은 3명이 한 팀을 이루어 모두 1000여 곳을 방문한다. “미국 50개 주 중 두세 곳을 빼고 거의 모든 지방을 돌았어요. 작은 마을에 사는 미국인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냐’고 물을 땐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현장을 다녀본 박 씨의 체험담이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링크를 후원하고 있는 지지자들이 보내온 사진들이다. 워싱턴 DC에 본부를 두고 있는 LiNK는 16 개국 275 개 단체와 협력 관계를 맞고 있다. © 링크 박석길 씨가 링크 한국지부의 직원들과 함께 서울 저동에 있는 사무실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링크 “북한 주민에 대한 한국 청년들의 공감 능력은 100점 만점에 10점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북한에 대한 많은 지식보다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외교관의 꿈을 대신한 링크 박 씨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13살 때인 1998년 처음 한국에 방문했다. 영국에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왔기 때문이다. 소년 박석길은 처음 찾아온 한국에서 북한의 존재를 실감나게 체험했다. 버스를 탈 때마다 창문에 붙어 있는 빨간 스티커가 궁금했던 그는 “이게 뭐냐”고 아버지에게 캐물었다. 아버지는 “북한 간첩을 신고하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고 말해 주었다. 어린 소년은 그때 남북한의 적대 관계를 생생하게 느꼈다고 한다. 그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모두 함경북도 명천(明川) 출신 실향민이었다. 명천은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한에 선물로 보낸 송이버섯으로 유명한 칠보산(七寶山)이 있는 곳이다. 박 씨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할머니와 함께 영국으로 이민 갔다. 통역·번역가로 일하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국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는 것은 물론 BBC 뉴스에서 한국 얘기가 나오면 “와서 보라”고 채근했다. 영국에서 고교를 졸업한 박 씨는 워릭대(University of Warwick)에 합격한 뒤 서울에 와 1년간 연세대 어학당을 다니면서 한국어를 익혔다. 어머니를 더 닮아 외모는 서양인이지만 이제 한국어가 유창하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그는 2007년 다시 한국으로 와 행정안전부의 지방정부연수원 국제협력교육과에서 개발도상국 공무원들에게 한국의 경제와 문화를 알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박 씨는 2012년 5월 링크 한국지부가 만들어지면서 영국 외교관의 꿈을 접고 서울에서 장기 체류 상근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서울에 있는 한국지부에서는 현재 그를 포함해 8명의 회원이 상근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탈북 난민 구조와 보호, 정착을 돕는 링크의 기존 업무뿐만 아니라 탈북민들을 대하는 인식을 개선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무엇보다 한국 젊은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는 한국 학생들이 탈북인을 너무 모르는 데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한국에 탈북인이 얼마나 왔는지 대부분 모릅니다. 3만 명이 넘는다고 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그는 한국 학생들이 북한 주민에 무관심한 건 북한 이슈가 너무 정치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박 씨는 링크가 ‘북한인권운동단체’로 불리는 게 썩 내키지 않는다. 한국에서 보수단체로 알려져 활동에 제약을 받을까 봐 걱정스러워서다. “한국에선 북한인권단체라 하면 바로 보수우파라고 말하잖아요. 우리는 우파도 좌파도 아닙니다. 북한 주민을 위해 활동하는 비정부단체일 뿐입니다. 북한인권단체란 표현도 그래서 꺼려요.” 하지만 그는 장기적으로 인권 개선 없이 북한의 정상 국가화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일각에서 지금 북한 인권을 거론하면 비핵화를 어렵게 하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이 문제를 언제까지 그냥 두고 넘어갈 수 없지 않느냐는 게 그의 지론이다. 독재 정권 시절의 한국에게도 그랬듯이 북한 인권 문제는 어렵지만 누군가는 꾸준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박 씨는 BBC 월드서비스에 한국어 방송을 넣는 방안도 영국의 데이비드 앨턴(David Alton) 상원의원과 더불어 추진하고 있다. 한국어 방송이 많아질수록 북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알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프레임을 벗어난 공감 능력 2018년 한 해 동안 링크의 도움을 받아 북한 밖에 정착한 탈북인은 326명에 달한다. 탈북인 구출 사업을 시작한 이후 2018년 말까지 합하면 모두 1000여 명이 링크의 혜택을 받았다. “탈북인들은 남북한 간 문화 격차와 생소한 제도 때문에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데 많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링크는 탈북인이 한국에 정착하고 더 나아가 사회에 녹아들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탈북민들이 늘어나고 한국에 잘 정착할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씨는 탈북민이 도움이 필요한 피해자일 뿐 아니라 북한 변화의 촉진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탈북인 대부분이 북한에 남은 가족에게 돈을 보내거나 통화하면서 자연스레 경제적으로, 의식적으로 북한 내부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한 축이 된다는 논리다. 박 씨는 앞으로 10~20년 안에 지금과는 아주 다른 북한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에 따라 한국의 미래를 짊어진 청년들이 북한 주민에 대해 공감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북한 주민에 대한 한국 청년들의 공감 능력은 100점 만점에 10점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북한에 대한 많은 지식보다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한국인들은 주로 북한을 ‘한민족이며 통일의 대상’으로 보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을 많은 지하자원과 값싼 노동력 등을 갖춘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나 이용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 같아요.” 박 씨는 “한국 청년들이 북한 사회에 대해 참 무심하다. 그래서 북한이 문을 열었을 때 편견과 몰이해로 인한 남과 북의 사회적 갈등은 상상 이상이 될 수 있다”고 걱정한다. 그는 정치·안보 프레임으로만 북한을 바라보는 국제 사회에도 다른 관점을 제안한다. “북한이라고 하면 흔히 김정은이나 핵무기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2500만 북한 주민이지요.” 링크는 탈북민 지원 외에 북한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 세계에 전달하는 활동도 한다. 2018년 만든 다큐멘터리 (The Jangmadang Generation)도 그 일환이다. 박 지부장이 공동 감독을 맡은 이 52분짜리 다큐멘터리는 탈북 청년 10명의 생생한 육성으로 북한 청년들의 사고와 문화를 전해 준다. 박 지부장은 “다큐멘터리를 본 분들은 영상 속 북한 청년들이 내 친구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주민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주문한다. “적대도, 시혜도 아닌 시선이 중요하죠. 새로운 상상력을 위한 가교가 탈북인인 셈입니다.” 박 지부장은 영국·한반도 관계 증진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 올해 영국 왕실에서 ‘대영제국 국가공로훈장(MBE)’을 받았다. 탈북민과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일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영국 축구국가대표팀 주장으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에서 손흥민 선수와 함께 뛰고 있는 해리 케인도 이번 훈장 서훈자 명단에 올랐다. 박 지부장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활동하며 탈북인들이 무사히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모든 분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훗날 여건이 된다면 조부모의 고향인 북한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고 한다. 북한 문제가 너무 큰 이슈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의 또 다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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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2019 SPRING 50

목도리로 남북의 마음을 잇다 대북 지원 단체인 하나누리 대표 방인성 목사는 자원봉사자들이 손수 짠 목도리를 북한 어린이들에게 전달하는 지원 사역을 8년째 이어오고 있다. 2017년부터는 마을금고를 주축으로 하는 북한 농촌마을 자립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한국 교회들이 북한 주민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여기기에 앞서 그들의 삶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문제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함경북도 두만강 하류에 자리한 라선특별시는 북한에서 맹추위로 소문난 곳이다. 1월 평균 기온이 섭씨 영하 18도인 데다가 “소가 날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겨울바람이 거세다. 하나누리의 대표이자 함께여는교회의 담임목사인 방인성(Pang In-sung 方仁成) 씨는 해마다 겨울이면 이 추운 곳으로 향한다. 라진·선봉경제특구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의 아이들에게 목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곳에 겨울나기 물품을 전달하고 있는 방 목사는 “목도리 3,000여 개가 담긴 종이 상자를 실은 트럭이 칼바람을 뚫고 유치원, 탁아소, 보육원을 돌고 나면 아이들 표정이 무척 밝아진다”고 전했다. “난방 연료가 부족한 실정이라 북한 어린이들은 매서운 겨울바람을 맨몸으로 견뎌야 합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목도리는 최고의 겨울나기 선물이죠. 그래서 저는 1m 남짓한 목도리가 3,000리나 떨어진 남과 북의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학생 자원봉사자들의 정성 방인성 목사가 북한 어린이들에게 전달하는 목도리는 예외 없이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만든다. 주로 중고교 학생인 자원봉사자들이 매월 넷째 주 토요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하나누리 사무실에 모여 목도리를 손수 뜬다. 사무실에 오지 못하는 봉사자들은 하나누리가 제공하는 재료를 택배로 받아 완성한 뒤 다시 사무실로 보내 준다. 캠페인에 참여한 중고교생들은 목도리를 뜨는 것으로 학교에서 요구하는 자원봉사 시간을 인정받는 효과도 있으니, 이 캠페인은 남북한 청소년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북한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선물받은 목도리가 남한 청소년들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말하면 더없이 고마워한다. 진심이 담겨 있는 선물이라고 여겨서다. 기부금을 모아 목도리를 사서 전달하면 손쉽겠지만 굳이 손수 뜨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에는 기업에서도 이 캠페인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 임직원들이 단체로 목도리 뜨기 운동에 동참했고, 미국·캐나다 등지에서도 재료를 보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해마다 국내외적으로 2,000~3,000명이 캠페인에 참여한다”는 것이 방 목사의 귀띔이다. 목도리를 뜨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재료와 함께 동봉된 도안을 보면 처음 해 보는 사람도 그리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재료비는 방 목사가 벌이는 ‘목도리, 남북을 잇다’ 캠페인에 참여하는 독지가들의 정성으로 마련된다. 이 캠페인은 2011년 한 하나누리 직원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당시는 남북 관계의 악화로 교류 사업이 모두 중단됐을 때였다. 아무리 정치적 상황이 어려워도 민간 교류의 끈은 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방 목사에게 목도리 뜨기 아이디어가 참신하게 다가왔다. 중국인을 통해 물품을 북한에 전달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북한 관계자들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느냐며 감탄했을 정도였으니까요.” 2013년, 북한 라선특별시의 어린이집 아이들이 남한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짠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난방 연료가 부족한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목도리는 훌륭한 겨울나기 용품이다. ⓒ 하나누리 청소년 자원봉사자들이 서울 중구에 있는 하나누리 사무실에 모여 목도리를 뜨고 있다. 목도리 뜨기 행사는 매월 넷째 주 토요일마다 열리는데, 방문이 어려운 자원봉사자들은 재료를 택배로 받아 완성해서 보내온다. 자립을 위한 마을금고 사업 하나누리는 좀 더 거시적인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북한 농촌마을 자립 모델 사업이 그것이다. 2009년부터 라선특별시 룡평마을에 농기구·비료·종자 등을 꾸준히 지원해 왔고, 량강도의 농장, 함경북도 청진의 고아원·보육원을 돕기도 했던 하나누리는 2017년부터 룡평자립마을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있다. 10년 계획인 이 프로젝트는 외부 지원 없이 이 마을이 스스로 식량, 육아, 주거, 교육, 의료, 에너지, 자치 등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목표다. > 이 사업의 핵심은 마을금고 운영이다. 하나누리에서 마을금고 농장 계좌에 넣은 자금을 주민들이 대출 받아 농약이나 농기구를 사고 나중에 상환하는 방식이다. 이 사업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방글라데시의 무함마드 유누스가 창시한 그라민은행의 영세민을 위한 무담보 소액대출 마이크로크레딧에서 착상했다. 룡평마을은 48가구에 농장 면적이 62정보(약 61만 5,000㎡)에 달한다. 이 마을은 2017년 마을금고 대출로 트랙터 1대, 디젤유, 비료 등을 구입했다. 대출 규모는 한국 돈으로 치면 3,290만 원 정도다. 이 마을에서 보내온 2017년 성과 보고서를 보면 괄목할 만하다. 벼와 옥수수의 생산량이 각각 전년 대비 1정보(9,917㎡)당 1톤씩 늘었다. 또 1가구당 월 생활 수준을 비교하면 전년보다 쌀 10㎏, 국수 10㎏ 정도 소비가 증가했다. 자립마을 사업의 관건은 빌린 돈의 상환 능력에 있다. 2018년 7월 17일 1차 상환액이 들어왔다. 초기 사업이 안정적으로 이뤄졌다고 판단하는 방 목사는 “룡평자립마을은 북한 전 지역에 적용 가능한 확산 모델”이라고 역설했다. 이 마을에서 상환한 자금은 나선특별시의 또 다른 마을에 재투자할 계획이다. 북한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선물받은 목도리가 남한 청소년들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말하면 더없이 고마워한다. 진심이 담겨 있는 선물이라고 여겨서다. 기부금을 모아 목도리를 사서 전달하면 손쉽겠지만 굳이 손수 뜨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8년 북한 라선특별시 룡평마을에 있는 양계장 모습이다. 하나누리는 마을금고 사업을 통해 48가구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이 경제적 자립을 이루도록 돕고 있다. ⓒ 하나누리 통일 이후를 대비하다 하나누리는 라선특별시에 대표 사무소를 여는 계획도 세웠다. 그곳에서 진행되는 사업의 전반적 관리, 수익의 재투자, 남측 기업의 소통 창구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표 사무소는 중장기적으로 여행사, 외국어 학원, 운송업, 양식업, 지하자원 개발, 스마트시티, 도시·토지 개발 연구 사업 등을 추진하게 된다. 방 목사는 룡평마을 사업을 진행하면서 가구마다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0~30%의 고금리 대출이 북한 경제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2009년 북한 정부가 화폐 개혁을 단행했을 때 저축했던 돈을 많이 잃어버렸던 북한 주민들은 은행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 영향으로 고리대금업이 성행했고, 가계 대출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 같은 상황에 착안해 마을금고에서 사업 대출뿐만 아니라 가계 대출도 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룡평마을 1가구당 월 생활비가 한화 5만 원 수준인 점을 감안해, 한 가구당 최대 한화 8만 5,000원을 무이자로 대출해 주는 것이 사업의 뼈대다. 하나누리는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실질적인 활동, 연구, 교육, 이 세 날개로 통일을 준비한다는 목표로 2007년 출범했으며, 2019년 1월에는 부설 연구 기관으로 ‘하나누리 동북아연구소(Hananuri Northeast Asia Research Institute)’를 설립했다.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의 상생 가능한 발전 모델을 연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당장은 룡평자립마을 사업 모델화 연구를 과제로 삼는다. 하나누리 산하에는 이 외에도 ‘토지 + 자유연구소(Institute of Land and Liberty)’가 설립돼 희년경제(禧年經濟) 체제를 연구하고 있다. 토지든 노예든 빌린 지 50년이 되는 해에 원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던 초기 기독교 전통인 ‘희년’에서 착안한 개념인데, 햇빛이나 공기처럼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을 공유하자는 철학이 담겨 있다. 즉 통일 이후 북한의 토지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남북한에 적용 가능한 대안 경제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연구하려는 것이다. “두 체제를 뛰어넘는 한반도의 새로운 대안 경제 구조가 필요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드러내는 경제 구조를 성경 속의 희년 법에서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누리는 노무현 정부 시절 사회·문화 교류 차원에서 남북 미술 작가들의 합동 전시회를 열고, 남북 청소년들의 나무 심기 봉사 활동을 통해 교류하는 기회도 만들었다. 2007년에는 남북 청년 500여 명이 도라산 역에서 휴전선을 넘어 개성 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행사도 준비했다. ‘자전거로 분단을 넘는다’는 취지로 기획한 행사였다. 하지만 다음 해 이명박 대통령의 보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행사는 돌연 취소됐다. “통일부나 후원 기업, 북측에서 모두 크게 관심을 보인 행사였어요. 북한 민족경제협력연합회와 협의서를 작성하고 실행 직전까지 갔는데,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더는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추진하고 싶습니다.” 방인성 목사는 2007년 비정부기구 하나누리를 설립하여 북한 주민들을 위한 실질적 지원 외에도 통일 이후를 대비해 상생 가능한 발전 모델을 연구하고 있다. 개신교 개혁 운동에 대한 관심 방 목사의 북한 지원 사업을 힘들게 하는 것은 비단 정치적 상황만이 아니다. 하나누리의 활동은 남쪽 기독교계에서조차 대체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 “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일을 하느냐”, “그 사람들은 없어져야 되는 사람들이다. 속지 마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을 정도다. 방 목사는 “통일이 되면 한국 교회들이 북한에 예배당 세울 생각만 하는데, 북한 주민을 실질적으로 돕는 문제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대형 교회와 교단들이 경쟁하며 십자가를 세우고 교회 확장에만 욕심을 부린다면 북한은 더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한국 교회가 북한 주민들을 전도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교회가 먼저 북한 주민을 사랑하고 남과 북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통일과 평화 운동에서 ‘돈보다 관심과 참여가 중요하다’는 신념으로 주변인들을 독려한다. 방 목사가 북한과 통일 문제에 열중하게 된 데는 할아버지의 영향이 적지 않다. 평안북도 철산 출신인 할아버지 방계성(方啓聖) 목사는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에는 예배당에 인공기를 게양하고 기독교연맹에 가입하라는 공산당의 요구를 거절해 총살형을 당했다. 방 목사의 아버지 방정원(方正圓) 씨도 목사였다. “비극적 가족사를 뛰어넘어 북쪽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복음의 본령이라는 생각으로 통일과 평화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방 목사는 영국 런던대 킹스칼리지 신학부와 옥스퍼드대 웨스트민스터칼리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영국 국제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뒤 킹스 크로스 한인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옥스퍼드 한인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하기도 했다. 1996년 귀국한 그는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항거하다 투옥됐던 성도들이 서울 창신동에 세운 성터교회를 맡았다. 이 성터교회 시절 아픈 신자를 위해 신장을 기증하는 바람에 그는 신장 하나로 살고 있다. ‘목사의 설교와 삶은 일치해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에 따른 결정이었다. 그런가 하면 방 목사는 2014년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염원하며 광화문광장에서 40일 동안 단식을 한 적도 있다. 이렇듯 남북 지원 사업과 사회적 현안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 온 그는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담임목사를 맡고 있는 함께여는교회는 신자가 100명 남짓한 작은 교회이며, 교회개혁실천연대와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를 결성해 개신교 개혁 운동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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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2018 WINTER 50

평양의 오늘을 전하다 최근 북한의 실상을 증언하는 책이 서울에서 출판되었다. 스스로를 ‘평양 순회 특파원’이라 부르는 재미 프리랜서 진천규(Jin Chun-kyu, 秦千圭) 기자의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는 생생한 사진과 풍부한 인터뷰로 오늘의 북한 모습을 전한다. 서방에서는 북한 하면 으레 ‘은둔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최근 비핵화 협상으로 북한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지만, 여전히 통제가 엄격한 데다가 방문마저 자유롭지 않아 사회 전모를 제대로 알 수 없어서다. 그래서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국제 사회의 엄혹한 제재로 경제 발전은 정체되고 인민들의 생활고도 극심하리라는 통념을 갖는다. 이 같은 고정관념과는 달리 진천규 기자의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타커스)는 우리가 잘 몰랐던 ‘평양의 오늘’을 보여 준다. 그는 2017년 10월부터 올해 7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방북해, 40여 일간 북한 주민 250여 명을 만나고 취재한 내용과 사진을 이 책에 수록했다. 그래서 이 책은 북한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얼마나 어떻게 변했는지를 말해 준다. 이 책은 문재인 대통령이 여름 휴가 중 읽은 세 권의 책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남북 관계가 단절되었던 지난 9년간 한국 언론인의 방북 취재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미국 영주권을 지닌 한국인 프리랜서 언론인인 진 기자는 북한 당국과 신뢰 관계를 구축해 평양은 물론 원산, 마식령 스키장, 묘향산, 남포 등지의 모습을 비교적 자유롭게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평양의 주체사상탑에서 본 서평양 지역 창전거리의 모습이다. 고층 아파트 단지가 줄지어 있는 이곳은 지난 2012년 완공되었다. © 진천규 자동차와 휴대전화 진 기자가 스스로 ‘평양 순회 특파원’이라고 칭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1988년 언론 자유 수호 투쟁 해직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국민주 모금 형태로 창간된 「한겨레」 신문에 합류했던 그는 그해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회담 등을 취재하면서 북한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과 2000년 남북정상회담 취재를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특히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때는 풀기자로 들어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함께 손을 잡고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직접 찍기도 했다. 이후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던 그가 17년 만에 다시 찾은 북한에서 가장 크게 달라졌다고 여긴 것은 자동차와 휴대전화였다.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식당 옥류관 앞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 10여 대가 늘 줄을 서 있었다. 택시는 외국인이나 고위 간부들만 탈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일반 시민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었다. 차가 드물어 한산한 거리 한복판에서 교통 경찰이 수신호를 하던 평양에 신호등이 없으면 안 될 만큼 자동차 대수가 늘어난 것이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었죠. 평양 시내에만 6,000대 이상의 택시가 돌아다니고 택시 회사도 5~6개가 된다고 하더군요.” 그가 택시를 타고 택시 기사인 운전원에게 물었더니, “택시는 주로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이 없는 뒷골목까지 가려는 사람들이 이용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단다. 개인 소유의 자동차가 없어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으며, 러시아워에는 약간의 교통 혼잡 현상도 일어난다고 한다. 또 하나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여전히 정보와 이동이 통제되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휴대전화 사용자가 500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이었다. 평양 시내에서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거나 사진을 찍는 모습이 더 이상 신기한 장면이 아니게 된 것이다. 진 기자가 평양 취재 중 더욱 놀란 사실은 예상보다 훨씬 개방적인 인터넷 환경이었다. 평양국제공항에서 와이파이로 인터넷을 이용하면서 그는 국제공항이라서 가능한 일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묵었던 평양호텔에서도 인터넷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는데,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상황은 아니겠지 짐작하면서도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제가 원하는 자료를 바로 찾고, 미국이나 남한의 지인과 아무 때나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었어요.” 평양에서 서울로 이메일을 보내면 받는 사람들이 “북한에서 보내는 이메일이 맞느냐”며 깜짝 놀라곤 했단다. 한번은 업무 때문에 급하게 서울로 이메일을 보내고 답장을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상대방이 메일을 받고도 평양에서 보낸 게 맞는지, 행여 감시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해 답장을 안 했다는 것이다. 그의 책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도 평양에서 서울에 있는 출판사와 이메일로 실시간 소통하며 출간 마무리 작업을 했다고 한다. “미국을 비롯한 외부 세계는 조금만 더 경제 제재를 가하면 북한이 곧 손들고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북녘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은 오판이란 판단이 들었다” 평양대극장에서 공연 관람을 마치고 나온 평양 시민들이 줄지어 선 택시를 타고 있다. 평양 시내에만 6,000대 이상의 택시가 영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진천규 신뢰를 토대로 한 취재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그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평양 시내는 신축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과거에 비해 훨씬 화려해 보였다. 특히 창전(倉田)거리는 외국인들이 ‘평해튼(평양 맨해튼)’이나 ‘리틀 두바이’라고 부를 정도의 모습이었다. 또한 주로 과학자들이 거주하는 미래과학자 거리에는 고층 아파트와 고급 백화점이 들어서 있어 자본주의 국가의 도시를 연상시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야심차게 개발했다는 신시가지 려명(黎明)거리의 빌딩숲은 문 대통령의 평양 방문 카퍼레이드 방송 화면에도 잡힌 바 있다. 진 기자는 평양에 피자 가게가 6개나 운영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위한 식당이라고 한다. 만경대 구역 축전동에 있는 ‘이딸리아료리전문식당’은 2008년 평양에 처음 생긴 이탈리아 음식점으로 진 기자가 방문했을 때 300여 평이나 되는 넓은 공간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시민들이 피자와 스파게티를 먹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평양에서 찍은 사진들 가운데 가장 희귀한 것이 보통 시민들의 살림집 내부 모습이라고 말했다. 북한에서 살림집이라 불리는 아파트를 취재할 기회가 생겼는데, 북한 관계자는 그에게 “외부인으로는 최초의 취재”라고 귀띔했다. 그가 방문한 곳은 고층 아파트들이 몰려 있는 려명거리 지역이었는데, 2017년 완공된 이 아파트는 재개발 이전에 살던 사람들에게 1순위로 입주 자격이 주어졌고, 근처에 근무하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진 기자가 방문한 집에는 침대, 가스레인지, 냉장고, 전기밥솥 등이 갖춰져 있었으며, 남한의 중산층 가정집과 비슷한 생활 환경을 누리고 있었다. 미리 연락하고 찾아갔지만, 일부러 없던 물건을 갖다 놓거나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평양에서는 집의 크기를 평수가 아니라 서양처럼 방의 개수로 계산한다고 한다. 방 2개짜리 집, 3개짜리 집, 4개짜리 집 등으로 집의 크기를 구분짓는 것이다. 방의 개수는 집주인의 권력 관계나 사회적 지위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양 가족의 숫자로 결정한다고 한다. 려명거리에 있는 아파트의 한 달 주택 사용료는 240원으로,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2,700원 정도다. 실제 가격이라고 하기보다는 상징적인 요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진 기자는 “고층 아파트의 경우 엘리베이터 관리자가 따로 있어 눈길을 끌었다”고 전했다. 북한에서는 에너지 절약을 위해 전기료는 받고, 수도료는 따로 없다고 한다. 그는 이번 방북 취재 기간 동안 자신을 담당하는 안내원이 있었지만, “평양 시민들 사이에 섞여서 자유롭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취재했고, 촬영한 사진과 영상은 어떠한 검열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북한 당국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과 사진은 전체 모습이 온전히 나오게 해 달라. 건설 노동자와 남루한 노인 모습은 찍지 말아 달라”가 전부였다고 한다. 진천규 씨가 자신의 책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를 들고 있다. 이 책에는 그가 2017년 10월부터 2018년 7월 사이 네 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해 취재한 내용과 사진이 실려 있다. 문화적 통일을 향한 노력 그동안 세상에 공개된 북한 관련 책과 사진은 주로 외국 기자가 취재한 것들이다. 그들은 말이 잘 통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관찰자’의 입장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진 기자는 그런 한계를 깨고 싶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감정과 생각까지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취재에 임했다. 그는 “미국을 비롯한 외부 세계는 조금만 더 경제 제재를 가하면 북한이 곧 손들고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북녘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은 오판이란 판단이 들었다”고 말한다. 평양 사람들은 의식주를 단순히 해결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외부인들의 생각보다 다양한 소비 생활을 하고 있었다. 특히 진 기자는 북한핵 문제로 북한과 미국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지난해 10월에도 “평양이 전쟁 준비에 돌입했으리라는 세간의 우려와 달리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북한 취재에 각별한 사명감을 가진 그는 ‘경계인’으로서 “편견 없이 보고 전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런 얘기를 전했다. 일각에서는 “평양의 특별한 일면을 북한 전체의 모습처럼 얘기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비판하지만, “남한에서 서울과 지방의 차이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얘기다. 평양 상주 특파원이 오랜 꿈이었던 그는 지금 2019년 개국할 계획인 ‘통일 TV’를 설립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그가 준비위원장을 맡은 통일 TV는 남과 북이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역사물과 자연 다큐멘터리, 음식 관련 프로그램 등을 제작하고, 북측 영상물 저작권을 확보해 방영하는 케이블 방송사다. 그는 통일 TV를 준비하고 있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전했다. “남과 북이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교류하며 동질성을 회복해 가는 것이 문화적 통일을 앞당기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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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2018 AUTUMN 61

이것이 바로 평양냉면이다 11년 만에 이루어진 남북 정상 회담이 정치적 화제만 낳은 것은 아니다. 판문점에서 남과 북의 정상이 나란히 앉아서 먹은 ‘평양냉면’이 최고의 실시간 검색어가되었고, 대도시 평양냉면 식당들은 몰려드는 손님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와 함께 탈북민 출신 요리사 윤종철 씨의 가게 ‘동무밥상’도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지난 4월, 11년 만에 다시 열린 남북 정상 회담의 최대 수혜자는 평양냉면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 회담 만찬 식탁에 오를 ‘옥류관 평양냉면’을 모두 발언에서 언급하면서 큰 화제가 되었고, 바로 그날부터 점심과 저녁에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유명 냉면 가게 앞이 장사진을 이뤘기 때문이다. 한 카드회사가 통계 자료를 통해 회담 직후 사흘 동안 서울 시내 평양냉면 가게 매출이 전 주보다 80% 이상 늘어났다고 밝혔을 정도였다. 평양냉면의 폭발적 인기 속에서 주목받는 곳이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수석 요리사를 동반하고 온, 바로 그 옥류관에서 평양냉면 비법을 배운 탈북민 요리사 윤종철 씨가 경영하는 동무밥상이 바로 그곳이다. 사실 이 집은 이번 신드롬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맛집을 다루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평양의 옥류관 냉면 맛을 볼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평일 점심시간에는 1시간 넘게 순서를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상 회담을 계기로 더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더욱 바빠진 윤종철 씨를 서울 합정역 부근에 있는 동무밥상에서 만났다.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식당은 아직 붐비고 있었다. “가게 규모에 비해 원래 손님이 많았지만, 남북 정상 회담 덕분에 갑자기 더 늘어났습니다. 국내 언론은 물론 일본, 필리핀 같은 외국 방송사까지 우리 식당을 취재하고 싶다고 합니다.” 함경북도 온성이 고향인 윤종철 씨는 1998년 탈북해 2000년 한국에 왔다. 평양 옥류관에서 음식을 배운 이력이 있는 그는 2015년 서울 합정동에 ‘동무밥상’이란 음식점을 열어 북한 음식을 내고 있다. 남북한 평양냉면의 차이 동무밥상에서 평양냉면만 팔지는 않는다. 메뉴판에는 오리 불고기, 명태 식해, 찹쌀 순대, 감자 만두, 옥수수 국수 같은 다양한 북한 향토 음식이 적혀 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평양냉면이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 음식 하면 자연스럽게 평양냉면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평양에서는 옥류관, 청류관, 고려호텔, 민족식당이 4대 냉면집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옥류관 냉면이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윤 씨는“고급 인력이 있어서”라고 대답했다. “북한에서는 뭐든 잘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은 전부 평양에 보내져요. 요리 좀 한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들이 모인 곳이 1961년 김일성 교시로 만들어진 옥류관입니다.” 윤 씨는 자신이 만드는 모든 음식에서 평양 최고의 식당인 옥류관의 맛을 재현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냉면을 만들 때도 남한의 평양냉면집들과 달리 옥류관 식으로 소 잡뼈와 양지, 꿩고기, 닭고기를 우려낸 냉면 육수를 돌과 숯, 모래가 담긴 여과기에서 한 번 걸러 낸다. 간장은 양파, 대파, 사과, 배를 넣고 달여 낸다. 그런데 윤 씨는 “옥류관 평양냉면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하고 싶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질 못해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첫 번째 이유는 육수와 간장을 만드는 물이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 대동강과 남한 한강의 물맛이 다르다고 강조하는 그는 “옥류관이 금강산에도, 중국에도 생겼지만 물이 달라서 냉면 맛이 다 조금씩 다르다”고 전했다. 동무밥상의 냉면은 반죽의 재료 배합 비율에서도 차이가 난다. 메밀 함량이 60~70%에 이르는 서울의 유명 냉면집들과 다르게 메밀 비율은 40%로 낮고 대신 고구마 전분이 40%, 밀가루가 20% 들어간다. 그래서 면발을 씹어 보면 연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옥류관 냉면의 국수는 메밀 40%에 감자 녹말이 60%”라면서 자신도 개업 초기에는 옥류관과 동일한 비율로 면을 뽑았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면발이 질기다면서 가위로 잘라 먹는 손님들 때문에 할 수 없이 녹말 비율을 줄이고 밀가루를 섞게 되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냉면을 포함한 국수 종류를 ‘명(命)길이 국수’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일에도 냉면을 먹고, 잔칫집에 가도 냉면을 줍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의미지요. 그런데 남한에 와서 보니 냉면을 가위로 잘라 먹어 깜짝 놀랐어요. 처음에는 면이 쫄깃쫄깃한 이유를 자세히 말씀드렸는데, 제 얘기를 불쾌하게 여기는 분들도 있어서 설명을 안 하기로 한 대신 반죽에 밀가루를 섞었지요.” 그는 또 옥류관에서는 소화를 돕는 식소다를 반죽에 넣지만 자신은 넣지 않는다면서 그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동무밥상에는 여러 가지 음식이 있지만, 그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평양냉면이다. 이 집의 냉면은 옥류관 방식을 따르고 있어 대부분 ‘남한식’으로 변한 냉면 전문 식당들과 만드는 방법이나 재료, 맛이 다르다.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는 남한 사람들은 식소다를 넣으면 안 먹어요.” 식소다로 인해 옥류관 냉면이 칡냉면에 가까운 검은 색이 나는 것과 달리 동무밥상의 냉면이 연회색으로 바뀐 것은 바로 그 차이 때문이다. 남측예술공연단 일원으로 평양에 갔다가 옥류관 평양냉면을 처음 맛본 가수 윤도현(尹度玹)은 “옥류관에서는 종업원이 직접 면을 젓가락으로 들어 식초를 뿌려 준다. 우리처럼 육수에 직접 식초를 넣지 않는 게 특이하게 느껴졌다”고 소개한 바 있다. 윤종철 씨는 남북 음식 문화의 차이를 받아들여 식초와 겨자는 손님들의 취향대로 넣도록 하고 있다. 동무밥상에서는 냉면 상차림에 평양 백김치, 함경도 콩나물김치, 양강도 양배추김치가 함께 나오는데 이 또한 윤 씨의 배려다. 손님들이 북한의 명물로 소문난 김치를 골고루 맛볼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남한 평양냉면 맛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동무밥상 냉면에 처음에는 “심심하다”거나 “밍밍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럼에도 손님들이 이 집의 냉면 맛에 한번 빠지면 단골이 된다고 하는데, 그 비결은 아무 양념도 치지 않고 수저로 홀짝거리며 계속 떠먹게 되는 육수 맛 때문이란다. 평양냉면은 남한 사람들이 평소에도 즐겨 먹는 음식이지만, 최근 남북 정상 회담 이후 더욱 폭발적 인기를 모으고 있다. 특히 남북 정상이 나란히 앉아 함께 먹은 옥류관 식 평양냉면이 화제가 되면서 동무밥상 앞에는 이 집 냉면을 맛보려는 사람들이 연일 긴 줄을 이룬다. 소중한 북한 음식의 원형 함경북도 온성이 고향인 윤 씨가 평양의 옥류관에서 요리를 배운 데는 당 간부였던 아버지의 덕이 컸다.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일식 요리사로 일했던 경력이 자칫 흠이 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당 간부를 지낼 만큼 출신 성분은 괜찮았다. 그 덕분에 윤 씨는 군에 입대한 뒤 당의 배려로 전문 취사병 교육을 받게 됐고, 교육을 받으러 간 곳이 바로 옥류관이었다. 그곳에서 4개월 정도 요리를 배운 뒤, 군 간부 전용 식당의 요리사로 배치됐다. 10년 넘게 북한군 장성급 전용 식당에서 고향이 각기 다른 장성들이 제각각 주문하는 요리들을 만들다 보니 여러 지역의 음식을 두루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 머릿속에 북한 음식 레시피가 수백 가지는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렇게 다양한 레시피를 익힌 그는 제대 후에는 회령경공업전문학교에서 발효 공부를 해 된장, 간장 같은 발효 식품이나 사이다를 만드는 방법을 익혔고, 강의도 했다. 평양에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이따금 불려가 요리 솜씨를 발휘하기도 했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던 1998년 탈북한 그는 중국을 거쳐 2000년 한국으로 왔다. 정착 초기에는 건설 현장 일용직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남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2013년 한 음식 문화 행사에 참석한 윤 씨는 북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이 체험한 옥류관 요리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은 요리 스튜디오 ‘호야쿡스’ 이호경 사장의 도움으로 3일짜리 ‘팝업 스토어’를 차릴 수 있었고, 고객들 호응이 좋아 2015년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은 윤종철 씨는 남쪽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굳이 가위로 자르지 않아도 먹기 편하게 전분과 밀가루의 조합을 만들어 냈고, 지나치게 많은 양념을 써서 먹은 후에 계속 갈증을 일으키지 않도록 레시피도 개발했다. 그의 진심과 솜씨가 소문이 나자, 손님들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옥류관 냉면의 비법을 전수받으려는 사람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고, 프랜차이즈를 하자는 제의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잘라 버린다고 한다. 만약 돈을 더 벌기 위해 그런 방식을 택하게 되면, 옥류관 식 평양냉면을 비롯한 북한 음식의 원형을 고수하기 위한 자신의 철칙이 변질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음식이 맛있다는 표현을 ‘딱 소리 난다’고 합니다. 동무밥상 냉면이 옥류관 냉면 못지않게 맛있다는 걸 통일이 되면 북녘 동포들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라도 그런 유혹을 이겨 내고 싶습니다.” “북한에서는 냉면을 포함한 국수 종류를 ‘명(命)길이 국수’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일에도 냉면을 먹고, 잔칫집에 가도 냉면을 줍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의미지요. 그런데 남한에 와서 보니 냉면을 가위로 잘라 먹어 깜짝 놀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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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2018 SUMMER 48

인권, 탈북 여성을 향한 새로운 시선 ‘여성 인권을 지원하는 사람들(Women’s Human Rights Defenders)은 남한 사회 정착 과정에서 인권 침해에 노출된 탈북 여성들을 돕는 시민 단체이다. 특히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상대적으로 낮은 북한 사회의 상황을 고려하여 탈북 여성들의 인식 개선을 위한 노력과 함께 법률적 지원을 하고 있으며, 합창단 운영과 세미나 등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남북한 여성들의 상호 이해와 연대를 모색한다. 남북한 여성들의 연대를 위해 2011년 ‘여성인권을 지원하는 사람들(여인지사)이 창단한 합창단 ‘여울림’의 단원들은 지휘를 맡고 있는 최영실 전 성공회대 교수와 함께 격주 토요일마다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에 모여 노래 연습을 한다. 합창단 활동은 분단 이후 쌓여 온 남북한 주민들 사이의 이질감을 극복하고, 문화적 공감대를 넓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통일부 산하 통일교육원 통계에 의하면 2017년 말 기준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 3만 1,000여 명 가운데 70% 가량이 여성이다. 이들 탈북 여성들이 겪는 인권 침해 중 가장 심각한 것이 성차별과 성폭력이다. 사단법인 ‘여성 인권을 지원하는 사람들(이하 ‘여인지사’)은 이렇게 인권 침해로 고통 받는 탈북 여성들을 집중적으로 돕고 있다. 특히 가정 폭력, 성폭력, 성희롱, 성매매를 여성 인권을 침해하는 4대 폭력으로 규정하고 적극적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피해자들은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어디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해 고립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정착한 지 오래되지 않은 탈북 여성들은 특히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는 공동체나 사회적 연대망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또한 피해자가 어렵게 용기를 내 문제 제기를 하고 고소를 하더라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안전과 비밀이 침해되거나 피해자가 도리어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사단법인 한국여성의전화(Korea Women's Hot Line)에서 상담 전문가로 활동했던 김향순(金香順) 여인지사 공동 대표의 말이다. 이 단체가 성 관련 인권 침해에 특히 주목하는 것은 탈북 여성이 남한 여성보다 성폭력 피해를 경험하는 경우가 무려 10배 이상 많기 때문이다. 여인지사에서 탈북 여성들의 상담을 맡고 있는 이샘 씨는 이런 현상을 “인권에 대한 남북한의 인식 차이와 경제적 약자인 탈북 여성들의 절박한 환경이 만든 결과”라고 해석했다. 인권 침해에 대한 낮은 인식 최근 국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에 대한 탈북 여성들의 첫 반응은 의외다. 이들은 “어떻게 그런 걸 드러낼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북한 사회에서는 남성의 성폭력에 대해 관대한 문화가 있기 때문에 생긴 인식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 익숙했던 탈북 여성들은 성폭력에 대한 대응에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북한에서는 강간죄로 감옥에 갔다는 얘기를 들어 보지 못했다”고 입을 모은다. 간통 사실이 발각돼도 여성은 부화방탕(浮華放蕩)했다는 비난을 받고 석 달 동안 노동단련대에 보내지지만, 남성은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북한에서는 남성들이 체제 불만을 성적인 농담으로 푸는 일이 잦다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탈북 여성들은 법과 제도, 그리고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아 성희롱과 성폭력의 개념 차이를 이해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또한 대체적으로 남한 정착 과정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가정 폭력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게다가 북한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정 폭력이 심각한 인권 침해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었고, 남한에 와서도 관련법과 제도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인해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남한 사회에서 탈북 여성들은 도와줘야 할 약자로만 인식되어 왔지만, 이제부터는 이들에 대한 취업 지원 같은 복지적 차원을 넘어 인권적 관점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싶다” 성매매에 노출되는 탈북 여성들 “성폭력을 비롯한 인권 침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싶어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죠. 가해자들도 탈북 여성들의 취약점을 악용해 범행을 은폐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남북하나재단에서 발간하는 잡지 『동포사랑』의 기자이기도 한 이샘 씨는 그 자신도 탈북 후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10년 동안 가사 도우미 생활을 하다가 2011년 서울로 온 탈북 여성이다. 이샘 상담원은 자신이 담당했던 상담 사례를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한 40대 탈북 여성은 모 기업 회장의 자택에서 오후 8시부터 오전 8시까지 12시간 동안 간병 일을 해 오고 있다고 한다. 다리가 불편하고 당뇨병을 앓고 있는 이 기업인은 야한 농담으로 성희롱을 하거나 몸을 만지는 등 성추행을 하는 사례가 잦았다. 참다못해 항의하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도 그런 일이 지속됐다. 그럼에도 이 여성은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북한에 두고 온 딸을 남한으로 데려오기 위해 저축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다른 곳보다 보수가 높은 일자리를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탈북 여성의 성폭력 피해는 취업이나 결혼을 알선하는 과정에서 주로 발생한다. 일자리를 구해 주겠다거나 배우자를 소개해 주겠다면서 접근해 강제 추행을 저지르는 남성들이 적지 않다. 또 외롭게 살아가다 온라인에서 만난 남성과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과정에서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기만 하고 막상 결혼에는 실패하는 사례도 다수 접수되고 있다.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돈이라도 벌어야 하는 탈북 여성의 특수한 상황을 악용해 성매매로 유인하는 업주들도 있다. 당장 생활이 곤란한 일부 탈북 여성의 경우 “한국에서 성매매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란 그릇된 인식 때문에 성매매에 나서기도 한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성매매가 자본주의의 일반적 현상”이라고 가르치는 북한의 교육 탓이다. 여성가족부 조사에 의하면 “남한에 정착하고 나서 성매매를 권유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탈북 여성이 전체의 30%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 권유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며, 취업 교육으로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성 관련 인권 침해에 특히 주목하는 여인지사는 남북한 사회의 인식 차이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 주는 책자를 지속적으로 발간해 현장 교육에 활용하고 있다. 인권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들 여인지사는 2016년부터 여성가족부 위탁 사업으로 북한 이탈 여성 상담 치유 전담 프로그램인‘찾아가는 상담’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전문 상담원이 참여하는 통합 지원 서비스도 시행하고 있다. 탈북 여성들의 심리적 안정을 돕기 위해 시작한 ‘찾아가는 상담’은 각기 다른 대상을 위한‘자조(自助) 그룹’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자녀 교육과 부부 관계 상담을 하는 주부 그룹, 직장 문화 애로 사항·후속 학업·과로 문제 등을 상담하는 직장 여성 그룹, 20~30대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대학공부 상담 그룹 등 3개 자조 모임이 있다. 이 가운데 ‘찾아가는 상담’ 프로그램에 곁들여지는 국내 여행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높다고 한다. 자유로운 여행에 갈증을 느껴온 탓이다. 여인지사는 이밖에도 『알아 두면 좋은 여성 인권 지침서』, 『탈북 여성 지원 실무자를 위한 여성 폭력 예방 교육 매뉴얼』 등의 책자도 발간해 탈북 여성들과 탈북민 지원 기관에 배포하고 있다. 이들 책자는 여성 폭력 문제의 실상과 남북한 인식 차이, 대처 방법 등을 사례를 들어 꼼꼼하게 알려 준다. 이밖에 여성 폭력 예방 교육 영상물을 제작해 전국의 하나센터 등 탈북민 지원 기관의 현장 교육에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들어서는 북한 이탈 여성의 일·가정 양립 지원을 위한 상담원 양성 과정 프로그램을 새롭게 운영하기 시작했다. 홍영희(洪英姬) 공동 대표는 “탈북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겪는 일·가정 양립의 문제점과 직장 내에서 겪는 여러 갈등 형태를 상담할 수 있는 전문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게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남북한 여성 연대의 새로운 패러다임 그런가 하면 여인지사는 탈북 여성 인권 지원 못지않게 남북 여성 연대의 새로운 틀을 만드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남북 여성 합창단 ‘여울림’을 2011년 창단했다. 여울림은 해마다 전국 합창제에 출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데, 이 이름에는 ‘여성들의 어울림’, ‘소리의 어울림’이라는 중의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합창단은 격주 토요일마다 노래 연습을 하는데, 현재 전체 단원이 35명이며 연습 때는 평균 25명이 참석한다. 60대 탈북 여성 합창 단원 김명화 씨는 “음악 문화와 발성법이 달라 처음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연습하면서 맞춰 나가고 있다”면서 “연습 후 회식을 통해 남측 여성들과 더욱 가까워져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합창단 지휘를 맡고 있는 최영실(崔永實) 전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는 “음악적 이질감을 가진 남북 여성들이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노래하는 과정은 거리감과 편견을 넘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강조했다. 최영애(崔永愛) 이사장은 “2012년부터 해마다 개최되고 있는 남북여성문화제가 주변화, 대상화된 탈북 여성들이 남한 사회에서 적극적 삶의 주체로 거듭나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면서 “남한 사회에서 탈북 여성들은 도와줘야 할 약자로만 인식되어 왔지만, 이제부터는 이들에 대한 취업 지원 같은 복지적 차원을 넘어 인권적 관점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여인지사는 2010년 대표적 여성 인권 운동가인 최영애 이사장의 주도 아래 설립됐다. 그는 ‘성폭력’이란 단어가 통용되기도 전인 1991년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만들어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다. 특히 여인지사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진보와 보수 인사들을 두루 아우르는 단체라는 점이 특징이다. 남한의 여성 인권 운동 단체 대표, 북한 여성 연구자, 탈북 여성들이 이 단체의 주역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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