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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서촌의 공공 한옥들

Features 2024 WINTER

서촌의 공공 한옥들 서촌은 북촌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한옥 마을로 꼽히는 지역이다. 그중 서울시와 종로구가 운영하는 서촌 내 공공 한옥들은 전통 주거 문화 체험은 물론 다채로운 문화 예술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어 서촌을 대표하는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는 중이다. 서촌라운지의 안마당 전경. 2층 구조의 한옥을 개조한 서촌라운지는 아파트 등 현대식 라이프스타일에 익숙해진 시민들에게 한옥의 주거문화를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 서울시청 서촌의 한옥들은 대부분 근대기에 양산된 ‘도시형 한옥’이다. 1920~30년대 주로 지어진 도시형 한옥은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인구 과밀 현상을 겪고 있던 경성(京城, 현재의 서울)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났다. 당시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토지를 매입해 필지를 잘게 쪼갠 뒤 소형 한옥을 지어 대량 공급했다. 도시형 한옥은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대문과 방들이 ㅁ자 형태로 연결된 구조이다. 전통 한옥에 비해 규모나 구조가 간소화된 대신 장식적인 요소가 많아지고, 재료에서도 유리나 벽돌 등 근대적인 소재가 사용되었다. 또한 점차 달라지는 생활 양식을 반영해 부엌과 화장실을 신식으로 고치는 등 개량되었다. 하지만 도시형 한옥에도 한옥 특유의 정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많은 이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하룻밤이라도 특별함을 누리고자 한옥 스테이를 찾는 이유다. 그러나 한옥 스테이는 만만치 않은 가격 때문에 부담이 큰 게 사실이다. 이에 서울시와 종로구에서는 공공 자금으로 한옥을 매입해 일반에 개방하고,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서촌에도 상촌재(Sangchonjae, 上村齋), 홍건익 가옥(Hong Geon-ik House, 洪建翊 家屋), 서촌라운지(Seochon Lounge) 같은 공공 한옥이 있어 지역 주민들과 서촌 방문객들이 즐겨 찾고 있다. 이들 공공 한옥에서는 전통 주거 문화를 경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예 체험이나 미술 작품 전시 등 색다른 문화 예술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다. 서촌에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도시형 한옥이 밀집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전통 한옥과 유사해 보이지만 형태와 재료, 구축 방식 등에서 차이가 난다. 유리와 벽돌, 타일, 함석 등 근대적 재료를 사용하는 한편 장식적 측면이 매우 강화되었다는 점이 도시형 한옥의 특징이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전통 한옥의 미 상촌재는 오랫동안 방치된 경찰청 소유의 폐가를 종로구가 2013년에 매입해 복원한 후 2017년부터 일반에 개방한 공간이다. 19세기 말 전통 한옥 방식으로 조성된 이곳은 온돌 문화를 비롯해 한국 전통 가옥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장으로 활용된다. 안마당과 사랑마당이 지형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위계를 지니며, 이들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상촌재는 한옥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2017년에 국토교통부의 <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을, 2018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의 <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을 받았다. 상촌재는 장기간 방치된 한옥 폐가를 19세기 말 한옥 양식으로 복원한 공간이다. 전통 한옥 미학을 되살린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으며, 서촌의 대표적 공공 건물로 자리 잡고 있다. ⓒ 종로문화재단(Jongno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상촌재의 매력은 건축물뿐 아니라 풍성한 문화 예술 프로그램에도 있다. 이곳은 한옥·한복·전통 공예·세시 풍속과 관련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한다. 일회성 체험 행사뿐 아니라 전문 교육 프로그램도 탄탄하게 갖추고 있다. 또한 젊은 예술가들을 발굴해 주기적으로 전시회도 개최한다. 상촌재는 시민들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기 때문에 연간 평균 약 2만 명이 방문하는 서촌의 인기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서촌의 공공 한옥 중 하나인 상촌재에서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운영한다. 사진은 그중 하나인 ‘전통 의식주 교육’ 현장으로, 한복을 갖춰 입은 어린이들이 예절 교육을 받고 있다. ⓒ 종로문화재단(Jongno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근대적 절충 양식 1930년대 지어진 홍건익 가옥은 전통 방식과 근대적 양식이 절충된 민가 건축물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한옥 중 우물과 빙고(氷庫)까지 갖춘 몇 안 되는 집이다. 홍건익은 상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얕은 구릉 위에 지어진 이 집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등 각 건물을 독립적으로 배치했는데, 이러한 구조는 전통 한옥 양식의 전형적 특징이다. 반면에 대청에 설치한 유리문과 처마의 차양은 근대기 한옥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홍건익 가옥은 2011년 서울시가 매입해 보수 공사를 진행하였고, 2017년 공공 한옥으로 개방되었다. 이곳에서는 방문객을 대상으로 도슨트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중 서촌을 산책하며 곳곳에 자리한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을 듣는 프로그램이 인기다. 조선 시대의 화가 정선(Jeong Seon)이 남긴 화첩 < 장동팔경첩(Album of Eight Scenic Sites of Jang-dong in Seoul) >의 배경을 방문해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홍건익 가옥의 또 다른 매력은 시즌별 문화 행사다. 여름밤에는 전통차를 즐기는 다회를, 추석에는 송편을 빚는 행사를 운영하는 등 계절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침선, 옻칠, 도예 등 공예 프로그램은 지역 예술가나 크리에이터들과 함께한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2022년 12월부터 2023년 1월까지 진행된 홍건익 가옥 특별전 < 집의 사물들 - 삶의 품행 > 전시 모습. 오우르(OUWR) 등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공예가들의 다양한 작업을 소개한 전시다. ⓒ 홍건익 가옥, 오우르(OUWR) 전통과 현대의 연결 서촌라운지는 서울시가 추진 중인 한옥 정책의 일환으로 2023년 10월 오픈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한옥 내부를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한 이곳은 기획 전시가 열리는 1층과 방문자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는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촌라운지는 회화, 공예, 건축 등 여러 분야의 창작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서촌 지역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콘텐츠를 주로 제공한다. 특히 국가와 세대를 초월한 라이프스타일 콘텐츠에 초점을 두고 있다. 개관 기념 전시 < 독일 바우하우스×전통 공예, 음미하는 서재(Bauhaus×Korea Craft Design) >는 바우하우스 양식을 대표하는 가구와 국내 공예가들의 작품이 어우러진 전시로, 이 공간의 성격과 지향점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올해에도 스위스 로잔예술대학 산업디자인과 학생들과 국내 조명 브랜드 아고(AGO)의 협업 전시가 열리는 등 국내와 해외,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는 프로그램이 꾸준히 개최되었다. 서촌라운지는 전시 프로그램 외에도 티 소믈리에와 함께하는‘계절 차[茶]회(Global Seasonal Tea-Talk)’가 유명하다. 우리나라 차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전통 차를 마시며 비교해 보는 시간도 있어, 예약이 금세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한옥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구조와 형태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지만, 특유의 고즈넉한 정취는 여전하다. 현대인의 삶과 문화에도 영감을 준다. 서촌의 공공 한옥들이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은 서촌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다. 서촌라운지의 인기 프로그램인 계절 차회에서 한 참가자가 차를 음미하고 있다. 티 소믈리에의 설명을 들으며 차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은 외국인을 위한 차 모임이 따로 운영된다. ⓒ 서촌라운지

느리고 소박하며 자연스러운 삶

Features 2024 WINTER

느리고 소박하며 자연스러운 삶 2015년부터 ‘가정식 패브릭(Gajungsic Fabric)’이라는 의류 브랜드를 운영해 온 김우정(Kim Woo-Jung, 金佑定) 대표는 소박하고 편안한 옷을 짓는다. 서울 여러 동네를 떠돌다가 5년 전 서촌에 정착해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녀가 만든 옷을 ‘서촌스럽다’고 말한다. 경상남도 마산이 고향인 김우정(Kim Woo-Jung, 金佑定) 씨는 스무 살이 되면서 서울에 살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스무 번 가까이 이사를 다녔다. 의류 디자이너인 그녀는 5년 전 서촌에 작업실을 마련하면서 이 동네와 인연을 맺었고, 지난해에는 인왕산이 보이는 집으로 이사해 서촌살이를 만끽하고 있다. 밥도 ‘짓고’, 옷도 ‘짓고’, 집도 ‘짓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의식주에 대해 한국어는 같은 동사를 사용한다. 건강을 생각하고 편안함을 중히 여기는 그 마음이 같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밥 먹고 건강하길, 이 옷 입고 편안하길, 이 집에서 행복하길. 가정식 패브릭의 김우정 대표가 옷 짓는 마음이 딱 그렇다. 식당 앞에 붙은 ‘가정식 백반’이라는 문구가 엄마의 손맛 같은 집밥을 생각나게 하듯 ‘가정식 패브릭’이란 이름에서는 마치 가족을 위해 만든 옷 같다는 느낌이 든다. “집밥은 속이 편하잖아요. 인공 조미료 덜 쓰고 좋은 재료로 만드는 집밥처럼 천연 소재로 오래 두고 입어도 안 질리고 예쁜 옷들을 만듭니다. 옷에 대해 오래 공부했고, 의류 회사에 근무하며 합성 섬유부터 온갖 종류의 소재를 다 써봤더니, 결국 자연에서 나는 소재가 제일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좋은 소재 어려서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던 김 대표는 대학에서 의류학을 전공한 후 아동복과 여성복을 제작하는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10년간 근무했다. 치열하게 산 만큼 꽤 지쳐 있었다. 잠시 쉬어 보자며 떠난 3개월 장기 여행에서 돌아온 후 퇴사를 결심했다. 잊고 지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빠듯한 회사 생활이 지겨울 때면 이따금 손수 옷을 지어 입곤 했다. 회사를 그만두니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2015년, 가정식 패브릭은 이렇게 탄생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쉽게, 너무나 많이 만들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조금은 느리게, 조금 더 정성스럽게 시간을 들여 옷을 짓고 싶었어요. 의류 회사에서는 정상 판매율이나 재고 관리에 신경 써야 했고 그런 비용이 옷 가격에 포함됩니다. 좀 더 값싼 재료로 더 많이 만들어 큰 수익을 거두는 게 목표죠. 저는 천천히 다가가 오래 머무르고, 적은 수의 사람들일지라도 깊이 있게 교감하고 싶었어요. 어떤 사람이 얼마만큼 정성을 담아 만들었는지를 상상하며 옷을 고르면, 그 태도가 그 옷 입을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믿거든요.” 김 대표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옷 만드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공예품을 만들 듯 가정식 패브릭을 꾸려왔다. 그래서 소재에 들이는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음식의 재료가 중요하듯 옷도 소재가 핵심이다. 그녀는 리넨과 코튼을 특히 좋아한다. 봄·여름 옷감으로 리넨을 추천하는 그녀는 일 년의 절반 이상 리넨 원피스를 입고 지낸다. “입으면 입을수록 몸에 맞춰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느슨함의 멋”을 만드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큰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좋은 소재를 구하기 위해 전 세계를 누비며 출장비를 지불한다. 얼마 전 서울 정동에 있는 신아기념관에 마련한 가정식 패브릭의 쇼룸 전경. 김우정 씨는 옷이 체온뿐 아니라 마음의 온도까지 높여 준다고 생각하고, 정성 들여 지은 옷들이 고객들의 일상에 여유를 만들며 오랫동안 함께하기를 바란다. “양털에서 채취하는 울은 오랜 역사를 가진 영국에서 주로 구해옵니다. 리넨도 리투아니아, 벨기에 산(産)이 유명해요. 질 좋고 가격 좋은 캐시미어를 찾아 몽골의 농장들을 뒤지기도 하고, 현지에서 직접 소재를 받아 니트웨어를 만들어요. 실과 원단을 만드는 기술력도 중요해서, 원단 가공 기술을 오랫동안 발전시켜 온 이탈리아를 누비기도 했어요. 오래된 방직기를 지금도 사용하는 일본에서는 손으로 짠 듯한 성근 느낌의 소재를 구할 수 있죠. 인도에서는 여전히 사람이 직접 베틀로 실을 짭니다. 그렇게 만든 카디(khadi) 소재로 올봄 몇 벌의 옷을 만들었는데 얼마나 부드러운지 몰라요. 인도의 목화 중에는 척박한 환경에서 굳이 물을 많이 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오가닉 코튼이 있는데, 조금 거친 듯한 그 질감이 매력적인 옷을 만듭니다. 환경 문제와 지속가능성까지 생각하니 더 좋잖아요.” 회사원으로 출장을 다닐 때는 유행을 파악하고 효율성만 따졌다. 얼른 만들어 빨리 팔고 금방 잊혀도 상관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혼자 만들어서 느리고, 어렵게 구한 좋은 재료라 적게 만들 수밖에 없다. “좋은 소재와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이 만나면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이 만들어진다”고 자신하는 그녀는 “조금 모자란 듯 만들어서 남기지 않고 다 파는” 자신의 경영 철학에 더없이 만족한다. 쇼룸 선반 위에 공예 작품들이 놓여 있다. 김우정 씨는 유리, 도자, 금속, 가죽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공예가들과 협업하여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연다. 그들 중 상당수가 서촌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다. 서촌살이 손님은 대부분 오래된 단골이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사람들이 많다. 엄마가 입던 옷을 딸이 물려받아 엄마와 딸 모두가 고객이 된 경우도 잦다. 김 대표는 “유행을 타지 않아 서로 다른 세대가 모두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기쁨”이라 말한다. 오래 운영해 온 블로그와 홈페이지에서 옷을 보고 택배 주문하는 이들이 많지만, 직접 와서 옷을 느껴보고 싶어 하는 손님들이 늘어나 얼마 전 정동(貞洞)에 쇼룸을 열었다. 알음알음 이름을 알려온 가정식 패브릭은 “서촌스럽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서촌스러운 옷은 대체 뭘까? “자연스러운 옷이요. 입고 동네를 거닐 수도 있고, 그 옷차림으로 미술관도 갈 수 있는 옷인 것 같아요. 화려하지 않지만, 결코 남루하지도 않죠. 나를 감싸는 가장 가까운 사물이 옷이니까 정서적으로 따스한 느낌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편안하고 단정하면서도 따스한 온기를 가진 옷을 서촌스럽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누구보다도 서촌을 잘 알지만, 그녀는 서촌 토박이는 아니다. 경상남도 마산(馬山)이 고향인 그녀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살기 시작했다. 용산구에서 시작해 종로구까지 서울 지역 10여 개 구(區)에서 살아봤다. 서촌에는 5년 전쯤 왔다. 서울 곳곳에서 다 살아 본 뜨내기가 “살아보니까 여기 서촌이 좋더라”면서 눌러앉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서울살이 18번째 집이요, 결혼 후 세 번째 집이다. 대로변 상가주택의 3층과 4층을 쓰는 복층집이다. 문 열자마자 보이는 큰 창 너머 인왕산 풍경과 사방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반해 단번에 이 집을 선택했다. “여기 서촌에는 오래된 옛날과 최신의 오늘이 뒤섞여 있어요. 조금만 나가면 도심의 높은 빌딩들이 보이지만, 동네 안쪽에는 어릴 적 뛰놀던 고향처럼 정감 있는 골목들이 빼곡하죠. 골목 안쪽에는 한옥과 현대식 주택들이 공존합니다. 볕 좋은 길가에서 고추 말리는 할머니와 유행을 좇는 힙한 젊은이들이 함께 머무는 곳이 바로 서촌이에요. 명동이나 강남 같은 상업 지역과 다르게 사람 사는 느낌이 있다는 게 서촌의 매력이죠. ” 인왕산이 보이는 옥상에는 가드닝을 좋아하는 남편이 정성 들여 가꾸고 있는 갖가지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김우정 씨는 해가 저물 무렵 이곳에서 서촌의 노을을 만끽하곤 한다. 자연과 함께하는 일상 시간의 흔적과 사람 냄새, 오래됨과 느림의 미덕을 간직한 곳. 낡음과 늙음이 흠이 되지 않는 동네가 바로 서촌이다. 자연이 가까이 있기에 얻을 수 있는 회복력도 큰 선물이다. “높은 건물 없이 나지막한 동네라 저 너머 인왕산까지 보이죠. 서촌이 사대문 안 도심이지만, 여기서 조금만 가면 수성동 계곡이 있고 서울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도 있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등바등 힘들게 일하던 도시인의 삶을 순식간에 한 발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친 마음이 회복되고 충전되는 느낌이 들죠. 그래서 서촌을 좋아해요.” 동네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거실의 널따란 창문 앞 은행나무로 까치가 날아들었다. “올봄 저 나무에 집을 지은 까치들이에요. 둘이 합심해서 끊임없이 잔가지를 물어다 나르는데, 대체 어디서 구해왔을까요? 둥지를 짓다 떨어뜨리기도 해서 이 나무 아래에만 잔가지가 소복했어요.” 김우정 부부가 집을 고치고 꾸미는 과정도 새들과 다를 바 없었다. 광고·마케팅 전문가로 잘나가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 인생을 준비 중인 남편 정영민(鄭詠珉) 씨가 구석구석을 손봤다. 벽을 페인트칠 했고, 문과 붙박이장의 색을 고르고 바꿨다. 조명, 문고리, 손잡이를 교체하는 데는 그녀가 유럽 출장 때마다 사서 싸들고 온 수집품들이 요긴하게 쓰였다. 카펫을 깔고 빈티지숍에서 함께 고른 가구들을 배치했다. 작은 옥상 정원에는 서리 내릴 때까지 꽃을 피우는 아네모네, 잎을 만지면 향이 올라오는 애플민트, 키 큰 수크령을 비롯해 은쑥과 야생 안개꽃 같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이사한 후 일 년 가까이, 느리더라도 하나하나 직접 고치고 키워낸 집 가꾸기의 과정은 그녀가 옷을 만드는 모습과 똑 닮았다. 살림집 2층 다락방 풍경. 남편 정영민(鄭詠珉) 씨가 벽면을 직접 페인팅하고 가구도 만들었다. 구석구석에는 부부가 오랫동안 수집해 온 빈티지 소품들을 놓아 장식했다. 부부는 이곳을 이웃들과 함께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한다. 그녀는 거실 창문 앞에 오수(Sue Oh) 작가의 < 인왕산의 돌들 >이란 작은 그림을 놓았다. 버터옐로우 컬러로 칠한 따뜻한 느낌의 거실 벽에는 고지영(KO Jiyoung) 작가의 그림을 걸었다. 그 아래 수납장에 놓인 인형은 손뜨개 작가 강보송(Bosong Kang)의 작품이다. 이들은 모두 비슷한 취향으로 알게 된 서촌의 예술가들이다. “예전부터 흠모해 온 유리 공예가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서촌에 사시더라고요. 혼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꾸리는 사람들이 서촌에 많이 삽니다. 취향이 비슷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내가 만든 옷과도 잘 어울려서 쇼룸 한쪽에서 전시도 열곤 해요. 우쿨렐레 연주와 목공일을 좋아하는 남편이 꾸민 4층 다락방에서는 북토크나 소규모 문화 모임도 열어요. 마치 음식을 나눠 먹듯 동네 지인들과 문화와 경험을 나누며 삽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서로를 보듬고, 때로는 자연을 통해 위로받는 일상. 서촌에서 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왕산, 서촌을 품다

Features 2024 WINTER

인왕산, 서촌을 품다 서촌의 랜드마크인 인왕산은 경치가 아름다워 예로부터 이곳을 그린 산수화가 많았다. 조선 시대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장소였고, 현재는 시민들이 즐겨 찾는 등산 명소이자 동네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인왕산에서 내려다본 서울 도심.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수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산인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의 능선을 연결해 성곽을 쌓았다. 서울 한양 도성은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른다. ⓒ 한국관광공사(Korea Tourism Organization) 매일 집을 나서며 마주하는 골목 풍경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싸전이 오락실로 바뀌고, 철물점이 레스토랑으로 바뀌는 것이다. 방진 가림막에 싸여 정체가 모호했던 곳들이 하나둘 상가로 변했다. 저녁 무렵 귀갓길, 광화문 어깨너머 인왕산과 북악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마음이 놓인다. 마을 어귀 경복궁역 사거리에 서면 쭉 뻗은 자하문로 저 멀리 북한산 능선이 날개를 펼친 새의 모습으로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보현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나를 기다렸다 두 팔 벌려 말하는 것 같다. 웅장한 산세 인왕산은 창의문에 이르는 서촌 일대와 서대문구 무악동과 홍제동에 걸쳐 있다. 높이는 338.2메돌(m)이라 들머리를 어디로 하든지 산 정상까지 대략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화강암질의 바위산은 높이에 비해 그 웅자와 기세가 등등하고 골이 깊어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였다고 한다. 조선 초기 왕족의 집단 주거지였던 서촌은 후기에 이르러 권문세족들이 청풍계곡, 옥류계곡 주변에 터를 잡았다. 임진왜란 이후, 남부인 사직단 위쪽에 대규모로 들어섰던 인경궁을 철거하면서 군인과 평민들이 대거 정착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실 기관에 소속된 하급 관리, 궁궐의 잡일을 하는 하인, 권문세가에서 대소사를 맡아보는 하인 등 다양한 계층이 혼재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내내 짓고 허물기를 반복했던 왕족, 권문세족의 집들은 대부분 일제 시대에 용도 변경되거나 철거되어 역사의 흔적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 장동팔경첩(Album of Eight Scenic Sites of Jang-dong in Seoul, 壯洞八景帖). 정선(Jeong Seon, 鄭敾). 1750년대. 종이에 담채. 33.4 × 29.7 ㎝. 서촌에 살았던 화가 정선은 이 지역에서 경치가 빼어난 여덟 군데를 골라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은 그중 인왕산 기슭의 골짜기를 그린 작품으로, 70대 노년기의 무르익은 필치가 드러난다.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의 한양천도 이후 역사의 중심에 자리해온 서촌 지역에서 시간은 길로 연결된다. 옛 지명은 실록과 승정원일기 같은 국가 문서나 고서화에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책들은 입이 무겁다. 묵직한 입을 열도록 대화를 청해야 한다. 서촌에서 객관적 역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시간과 공간의 궤적을 달리하는 선인들과 소통하고픈 소망이 우리를 길로 나서게 한다. 변화의 한복판에서 서촌은 직선보다 곡선이 아직 살아 있는 곳이다. 사람들을 빠르게 다른 장소로 보내주는 직선도로에서 건물은 평평한 면이 된다. 물결치는 기와집이 점처럼 박힌 골목은 ㄱㄴㄷㄹ 한글처럼 이어진다. 그곳에서 문패에 적힌 그림 같은 문자들을 읽거나 문고리 혹은 쇠살 문양에 미혹되어 길을 잃는다. 길이 때로는 ㅁㅂ자로 나타날 때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촌 안에 공공도서관 4개와 20개나 되는 작은 서점들이 있어 글 읽는 마을 ‘서촌(書村)’이라 부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꽃놀이 명소 한양 도성 사람들은 봄꽃놀이 명소로 인왕산 자락 좌우에 있는 필운대와 세심대를 첫손에 꼽았다. 남쪽 자락의 필운대는 서대(西臺), 북악에 가까운 세심대는 동대(東臺)로도 불렸다. 조선 시대 세시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3월이 되면 살구꽃이 지천인 필운대와 복사꽃 가득한 세심대를 찾는 상춘객이 “구름처럼 모이고 안개처럼 밀려들어 줄지 않는다.”고 했다. 평소 시를 즐겨 짓지 않던 연암 박지원은 『연암집』 4권에 두 차례에 걸쳐 필운대를 시제로 삼을 정도였다. 당시의 모습은 18세기 문인 윤기의 『무명자집(無名子集)』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었다. “서대(西臺)가 솟아 있어 바위는 넓고 평평한데 / 화창한 볕 푸른 봄이 도성에 가득” 한 흥취를 느낄 수 있다.(시고 제4책) “바위의 대는 높아 활쏘기 좋고 군기가 엄하여 군마가 고요하네 / 천관의 위치엔 푸른 버들 늘어서 있고 / 백보의 정원엔 붉은 과녁 설치되었네”(시고 제3책) 세심대는 왕실에서도 자주 찾는 곳으로 신하들과 올라 활도 쏘고 시를 주고받았던 상춘대임을 알 수 있다. 바위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각각 배화여고와 신교동 농학교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어 뭇사람의 발길을 에두르게 한다. 수성동 계곡 처서가 지나도록 무더위가 가시질 않더니 며칠 장대비가 내렸다. 어둠 속에 잠긴 수성동 계곡은 빗소리로 가득하다. 물소리로 이름을 얻은 수성동(水聲洞) 기린교 앞에 서자, 한낮의 수선함에 묻혔던 물소리가 주절거림을 들려준다. 비 온 뒤 우레 같은 물소리는 정악(正樂)처럼 힘차고 곧은 소리로 말미암아 산심을 숙연케 한다며 추사 김정희가 시로서 입을 떼었다(수성동 우중관폭[水聲洞雨中觀瀑]). 더구나 ‘층층이 기와 덮인 듯한 솔숲이 대낮에 걸어가는데도 밤인 것 같다.’고 하는 뜻은 어둠 속에서 오히려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산에서 내달려온 물줄기가 기린교를 향해 치달리다 너럭바위를 타고 힘차게 내리 꽂히며 튀는 소리는 장쾌하고 서늘하다. 억센 빗줄기에 소나무 가지들이 채찍처럼 흔들리며 공기를 가른다. 대지를 두드리고 바위틈을 구르는 그 모든 것이 뒤섞인 가운데 소리가 심장을 뒤흔든다. 수성동 계곡은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찾던 명승지이다. 길이 3.8m의 장대석 두 개를 붙여 만든 기린교는 한양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형대로 보존된 돌다리여서 역사적으로 가치가 크다. ⓒ 셔터스톡(Shutterstock) 서울 전경 산허리를 베어 만든 인왕 북악 스카이웨이는 1968년 1월 21일 31명의 북한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청와대 경비 강화를 위해 만들어진 도로이다. 사직동에서 시작하여 북악산 능선을 따라 아리랑 고개까지 대략 10km이다. 도로에 올라서서 창의문 방향으로 걷다 보면 무무대(無無帶)에 이른다. 시야에 거칠 것 없는 전망대는 날이 좋으면 북악에 들어 앉은 청와대로부터 경복궁, 랜드마크인 롯데월드타워와 남산서울타워를 파노라마로 보여준다. 가깝게는 동네 개 짖는 소리, 수성동을 향해 달리는 마을버스와 자전거가 빤히 보인다. 이곳에서 도성에 이르는 최단 코스는 초소책방 건너편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최근에 설치한 계단을 따라 어둠 속에 둥둥 떠있는 노란 불빛은 입산객의 안전을 호시탐탐 엿보는 호랑이 눈처럼 빛나고 있다. 나무 계단이 끝나는 곳에 눈썹돌[屋蓋石]을 얹은 여장(女墻)이 등줄기처럼 나타난다. 도성 안팎으로 뻗은 산세를 흘낏흘낏 살피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두 다리를 버티고 선 호랑이 등에 올라탄 기분이다. 도성 밖 홍제원 또는 세검정 방향은 기차바위로 내려서야 한다. 인왕산은 30여 개의 군 초소가 있어 오랫동안 시민들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2018년 인왕산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대부분의 군 초소가 철거되었는데, 일부는 시민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진은 그중 하나인 ‘숲속쉼터’이며 초병들의 거주 공간을 레노베이션하여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 스튜디오 켄(Studio Kenn) 유럽에 로마로 이르는 길이 있다면 조선에는 중국 대륙과 연결되는 지름길이 의주대로였다. 현재는 통일 염원을 담아 통일로로 바뀌어 서울역에 이른다. 중국 사신은 의주를 지나 평양과 개성을 거쳐 한양으로 들어온다. 서대문 밖 홍제원은 사신들이 유숙하는 여관으로 마지막 의관을 정제하여 무악재를 넘었다. “임진강 건너 한양을 바라보매 팔짱을 끼고서 성 밖을 겹으로 둘러싼 산들이 마치 봉새가 빛을 발하듯 환하다.”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조선부(朝鮮賦)』에 기록한 내용은 지금도 변함없이 마을 어귀에서 바라본 느낌과 같다. “홍제원(洪濟院)에서 동쪽으로 몇 리 가지 않아서 하늘이 만든 관애(關隘) 즉 좁은 길목이 하나 있는데 남쪽과 북쪽이 안산과 인왕산으로 막혀 있고 가운데로 말 한 필 겨우 통과할 정도이니 더할 수 없이 험한” 지세는 여전하다. 등줄기를 중심으로 ㅈ 자처럼 좌우로 뻗어내린 산세는 정상에 점 하나를 더 얹었다. 마치 한 계단 더 올라 시야를 넓혀 배움을 더하라는 듯 바위가 솟아 있다. 밝은 날 그곳에 서면 도성을 둘러싼 내사산과 외사산이 ㅅㅅㅅ으로 다가온다. 불 꺼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는 한 일(ㅡ) 자로 입을 굳게 다문 채 전각들의 규모와 배치로서 조선 시대의 위계질서와 덕목, 사상과 이념을 전한다. 우중에 오른 인왕산은 모든 것을 공(空)의 상태로 보여주었다. 가늘어진 빗발 속에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안산과 북악, 남산이 언뜻 언뜻 머리를 드러냈다. 문득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산에 올라 보았던 한양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왕산이 경복궁의 우백호를 담당하는 까닭에 지역의 변천사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터이다. 켜켜이 쌓인 이야기 속에 과거를 불러들이는 흔적들이 제자리에 있도록 꼭 눌러 둬야 한다. 대화를 위해 그나마 펼쳤던 책이 입을 다물지 않도록 인왕산은 역사의 문진(文鎭)이 되어야 한다.

서촌의 다채로운 전시 공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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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의 다채로운 전시 공간들 경복궁 서문(西門)인 영추문(迎秋門) 인근 통의동(通義洞)과 창성동(昌成洞)을 비롯해 서촌 전역에는 다양한 전시 공간들이 자리한다. 이곳에는 대안적인 비영리 공간부터 동시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상업 갤러리까지 두루 포진해 있다. 보안1942의 2022년도 하반기 기획 전시 < 워키토키쉐이킹(Walkie-talkie-shaking) >. 워키토키의 특성에서 모티프를 얻어 소통의 본질을 탐구한 전시다. 보안1942는 2007년부터 예술 공간으로 운영되어 왔으며 사진, 회화,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 고정균(Goh Jeongkyun, 高政均) 청와대와 바로 인접한 효자동(孝子洞) 한적한 골목에는 주황색 벽돌 건물이 파란 하늘과 감각적인 대비를 이루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은 사진집 전문 출판사 이안북스(IANNBOOKS)의 김정은(KIM Jeong Eun, 金廷恩) 대표가 설립한 복합문화공간 더레퍼런스(The Reference)다. ‘예술과 전시가 있는 서점’을 모토로 하는 더레퍼런스는 말 그대로 서점과 전시 공간이 결합한 형태다. 지하층과 1층의 윈도 공간은 갤러리로, 2층은 아트북 서점으로 기능한다. 김정은 대표가 더레퍼런스를 시작한 건 2018년이지만, 그녀는 2007년부터 이안북스를 운영하며 서촌에 다양한 정체성으로 미술 생태계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공간들이 생겨나는 모습을 지켜봐 왔다. “10년 만에 효자동에 공간을 마련했어요. 그간 많은 변화가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서촌은 거주자 중심의 마을이라는 느낌이 확연해요. 굽이굽이 이어지는 골목마다 건축가 혹은 디자이너의 사무실, 이머징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전시 공간, 미술가의 집 등이 숨어 있으니까요. 창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커뮤니티 같은 곳이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김 대표의 말처럼 서촌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곳곳에서 활동하는 지역이다. 그러한 자양분 덕분에 예술적 인프라가 잘 갖춰진 지역이 될 수 있었다. 복합문화공간 더레퍼런스 2층에 자리한 서점은 책을 매개로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플랫폼을 지향한다. 국내외 사진가들의 작품집과 사진 관련 도서가 망라되어 있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대표적 터줏대감 “땅의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2007년, 마치 약속한 듯 비슷한 시기에 서촌을 대표하는 공간들이 통의동과 창성동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당시 전시 공간을 찾고 있던 저 역시 보안여관을 발견하게 됐고요. 운명적인 만남이었습니다.” 보안1942(Boan1942) 최성우(Choi Sung-woo, 崔盛宇) 대표의 말이다. 처음 보안여관과 주변 건물을 매입했을 땐 새 건물을 올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비가 하도 새서 천장을 뜯어보니 ‘소화(昭和) 17년(1942년) 5월 3일’이라고 적힌 상량문과 함께 박공지붕이 드러났다. 시인 서정주(徐廷柱)의 자서전 『천지유정(天地有情)』을 통해 젊은 날의 서정주가 기거하며 다른 문인들과 함께 전설적인 시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 창간호를 만든 장소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여관의 수명을 다한 보안여관은 ‘보안1942’라는 이름을 달고 20년 가까이 다종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큐레이터 팀의 기획으로 시각예술 전시를 선보일 뿐 아니라 2013년부터 청년 예술인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두럭(DoLUCK)’을 지속해 오고 있고, 차 문화의 동시대적 가치를 되새기는 을 개최하는가 하면, 아트 페어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의 필름 섹션을 선보이는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이다. 다채롭고 유연한 활동 2002년 팔판동(八判洞)에 개관한 팩토리는 2005년 서촌으로 이전했다. 2017년 15주년을 맞은 후 두 번째 시즌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팩토리2(Factory 2)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구성원 각자가 몰두하는 주제에서 출발하여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 기획자, 음악가 등과 협업의 지점을 만들어 전시를 비롯한 출판, 퍼포먼스, 워크숍 등을 진행한다. 그래서 팩토리2는 예술 기획을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가 되기도 하고, 다양한 장르의 창작자들이 제작한 에디션 작품을 판매하는 숍이 되기도 하며,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열람실로 변모하는 등 매번 새롭게 변신한다. 감상과 경험의 경계 없는 교감을 추구하는 팩토리2의 다채롭고 유연한 활동은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스스로를 쇄신하고 있다. 2023년 4월부터 6월까지 열린 < 내 책상 위의 천사(An Angel at My Table) >전을 보기 위해 팩토리2에 모여든 관람객들. 2005년 서촌에 자리 잡은 팩토리2는 디자이너, 건축가, 음악가, 무용가 등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과 협업하여 틀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형태의 전시를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팩토리2 제공, 사진 김다인(Dain Kim, 金多仁) 1999년 인사동에 문을 연 대안공간의 원조, 사루비아 다방이 서촌으로 온 건 2011년이다. 이후 미술인 회원들의 순수 기부로 운영하는 회원제로 운영 방식을 바꾸고, 이름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Project Space SARUBIA)’로 변경하는 등 변화를 단행했다.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실험적인 예술을 지원하는 비영리 전시 공간으로서 미술계의 지형을 다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독립 큐레이터 추성아(Sungah Serena Choo, 秋成妸)는 사루비아가 “전시를 통해 미술가가 한 단계 도약할 기회를 제공하는 소중한 독립 예술 공간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1999년 첫 전시로 유머러스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조각 작품을 선보이는 함진(Ham Jin, 咸進) 작가의 개인전을 선보인 이래 박미나(MeeNa Park, 朴美娜), 손동현(Donghyun Son, 孫東鉉), 우한나(Hannah Woo, 禹한나), 전소정(Sojung Jun, 全昭侹) 등 오늘날 중요하게 호명되는 작가들의 초창기 작업을 사루비아에서 소개한 경우가 정말 많아요. 특히 회화 등 전통적인 매체를 다루는 작가들의 예술 세계를 어떻게 전시로 풀어낼 것인가에 대해 사려 깊게 접근하는 시도가 좋습니다.” 갤러리 워크 ‘화랑가 1번지’로 통하는 삼청동(三淸洞)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서촌에는 상업 갤러리도 다수 자리한다. 미술관이나 비영리 전시 공간과 달리 갤러리는 동시대 작가들이 펼쳐내는 현재진행형의 예술 세계를 함께 구축해 나가고, 이를 전시라는 특별한 결과물로 소개하며 작품을 판매해 작가의 활동이 지속 가능하도록 돕는다. 그중 리안갤러리(Leeahn Gallery)는 일찌감치 서촌에 자리를 잡은 갤러리 중 하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아트 컬렉션을 해온 안혜령(Hyeryung Ahn, 安惠玲) 대표는 2007년, 근대 미술의 요람으로 불리는 대구에서 앤디 워홀 타계 20주년을 기념한 전시를 열며 갤러리의 출발을 알렸다. 2013년에는 서울 창성동에 지점을 내면서 지역 화랑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갤러리로 성장했다. 이 갤러리는 알렉스 카츠, 데미안 허스트, 엘리자베스 페이튼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개인전을 여는 한편 백남준(Nam June Paik, 白南準), 이강소(Lee Kang-So, 李康昭), 이건용(Lee Kun-Yong, 李健鏞) 등 한국 대표 작가들을 대변하며 자신감 넘치는 행보를 보여 왔다. 리안갤러리가 2020년 12월부터 2021년 1월까지 개최한 백남준(Nam June Paik, 白南準) 전시는 작가의 폭넓은 작품 세계를 살펴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이곳은 국내외 저명한 작가들의 전시회를 꾸준히 개최함으로써 관람객들이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리안갤러리 제공, 사진 이시우(Si Woo Lee, 李始雨) 2012년 개관 후 2019년 창성동으로 이전한 스페이스 윌링앤딜링(Space Willing N Dealing)의 김인선(Kim Inseon, 金仁宣) 대표는 지리적인 이유로 서촌을 선택했다. “기존 방배동에 있을 때는 주변에 갤러리가 많지 않아서 전시 오프닝이나 퍼포먼스 등 특정 행사를 할 때만 관객이 몰리는 경향이 있었어요. 그런데 서촌은 경복궁, 삼청동과 가깝고 주변에 비슷한 규모의 갤러리도 많아서 평소에도 워크인 관람객이 많은 편이에요. 작가들의 예술 세계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에 더 부합한다고 할 수 있죠.” 김인선 대표는 2022년부터 상업 화랑으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서 남진우(Jinu Nam, 南眞優), 이세준(Lee Sejun, 李世準), 장성은(Chang SungEun, 張晟銀) 등 촉망받는 젊은 아티스트들을 전속으로 대변하고 있다. 6차선 도로변 건물 2층에 자리한 갤러리에서는 일 년 내내 다양한 장르와 경력의 미술가들이 지닌 문제의식을 실험적으로 담아낸 10여 개의 개인전과 그룹전이 쉼 없이 이어진다. 전시마다 작가에게 직접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아티스트 토크를 마련하고, 전시 기획과 실무를 소개하는 커리큘럼을 선보이는 등 다각적 시도를 펼치고 있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올해 3월 열린 권혜성(Kwon HyeSeong, 權惠星) 작가의 개인전 < 우산 없는 사람들(People without Umbrellas) > 전시 전경. 동양화와 서양화의 융합을 보여 준 전시이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은 촉망받는 국내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는 한편 다층적 프로그램들을 통해 이들을 지원한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제공, 사진 한황수(Han Hwangsu, 韓黃水) 2019년 용산에서 시작해 2022년 서촌 누하동(樓下洞)으로 이전한 드로잉룸(drawingRoom)의 김희정(Kim Heejung, 金希貞) 대표도 서촌을 이상적인 지역으로 꼽았다. “드로잉룸(drawing room)은 저택에서 응접실을 뜻해요. 그 이름처럼 예술과 일상이 공존하는 공간을 추구하는데요, 자연과 일상이 만나 예술적 삶을 영위하는 서촌의 고즈넉함이 저희 갤러리의 지향점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서촌에 개성과 소신이 있는 작은 상점들이 모여들고 오래 자리하는 데도 같은 마음이 작동한다고 봐요.” “신진 작가를 발굴하여 첫 개인전을 개최하고, 미술 시장에 발을 내딛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는 김희정 대표는 개관부터 지속해 온 신진 작가 지원 프로그램에 열과 성을 다한다. 이러한 미술 공간들의 노력 덕분에 서촌은 한국 미술계의 지형을 다변화하는 중요한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창성동 실험실(Changseong-dong Laboratory)은 다양한 관점으로 문화적 실험을 모색하는 갤러리이다. 물리학자인 서강대학교 이기진(Kiejin Lee, 李基鎭) 교수가 운영한다. 그는 4인조 걸그룹 투애니원(2NE1)의 리더 씨엘(CL)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안동선(An Dong-sun, 安姛宣) 미술 저널리스트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핫플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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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핫플레이스 경복궁 서쪽 마을인 서촌(西村)은 매우 유서 깊은 지역이다. 조선 시대(1392~1910)에는 왕족이나 사대부 등 권력자들이 거주했고, 중인들의 문화 활동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서촌에 발자취를 남겼다. 사진은 경복궁 서쪽 담장이다. 이 담장은 지하철 경복궁역에서부터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의 발자취와 한국 전통 문화를 소개하는 청와대 사랑채까지 800미터가량 이어진다. 담장 가운데에 경복궁 서쪽문인 영추문(迎秋門)이 있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서촌은 한국의 전통 지리학(풍수지리)상 좋은 터이며, 경관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북쪽에 백악(白岳, 북악), 서쪽에 인왕산(仁王山)이 있으며, 동쪽은 경복궁(景福宮), 남쪽은 사직단(社稷壇)의 앞길이 경계가 된다. 또 서촌의 한가운데엔 인왕산과 백악의 여러 계곡 물을 아우른 백운동천이 남북으로 흐른다. 백운동천은 옛 서울의 중심 하천인 청계천의 제1 상류다. 인왕산 쪽엔 수성동(水聲洞)과 옥류동(玉流洞), 청풍계(淸風溪), 백운동(白雲洞) 등 아름다운 계곡이 많다. 서촌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 가운데 하나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는 세 곳인데, 서촌과 북촌(北村), 향교동(鄕校洞, 현재의 종로 3가 일대)이다. 고려(高麗) 때인 1068년 현재의 경복궁 북쪽 부분과 청와대(靑瓦臺) 일대에 고려 남경(南京, 남쪽 수도)의 행궁(임시 궁궐)이 지어졌다. 서촌과 북촌은 행궁의 바로 옆이므로 고려 때부터 동네가 형성됐을 것이다. 서촌이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경복궁이 지어지면서부터다. 이성계(李成桂)는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朝鮮)을 세웠다. 그리고 1395년 수도를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開城)에서 현재의 서울로 옮겼다. 이성계가 서울로 수도를 옮길 때 처음 지어진 궁궐이 경복궁이었고, 경복궁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궁궐이었다. 경복궁이 지어지자 자연스럽게 경복궁의 동쪽과 서쪽, 남쪽에 관련 국가기관과 민간 주거지가 형성됐다. 전통 문화유산을 가꾸고 지키는 비영리 문화재단, 아름지기재단 사옥에서 보이는 영추문 담장. 아름지기재단을 비롯해 이 길에 접한 건물들에서는 대부분 건너편 궁궐 담장을 볼 수 있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왕들의 탄생지 조선 초기에 서촌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3대 왕인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의 집이었다. 현재의 서울 종로구(鐘路區) 통인동(通仁洞) 일대에 있던 이방원의 사저에선 4명의 왕이 나왔다. 태종 이방원이 이곳에 집을 지었고, 그곳에서 아들 세종(世宗)과 손자 문종(文宗), 세조(世祖)가 태어났다. 왕세자는 궁궐에 살므로 사저가 있을 수 없다. 태종과 그 아들, 손자들이 사저에 살았던 것은 애초 그들이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태종 이방원이 여기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가 왕이 되면서 그 아들과 손자들이 모두 왕이 될 수 있었다. 특히 태종의 아들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세종은 한글을 만들었고, 영토를 넓혔으며,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 태종의 집은 세종 이후 사라졌는데, 대체로 시민단체 참여연대(參與連帶)에서 통인시장(通仁市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에 서촌은 경복궁 바로 옆이어서 태종과 세종뿐 아니라, 많은 왕족이 살았다. 태종의 형 정종(定宗)과 태종의 배다른 동생 이방번(李芳蕃), 세종의 형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모두 서촌에 살았다. 특히 안평대군의 집에선 조선 전기에 가장 유명한 풍경화인 가 그려졌다. 안평대군이 꾼 꿈을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安堅)이 그렸다. 이 그림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약탈돼 현재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学)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1951년 문을 연 대오서점(Daeo Bookstore, 大五書店)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카페를 겸한 문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는 서촌의 대표적인 핫플레이스이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장동 김씨 세거지 조선 때 서촌에선 가장 유명한 사대부(士大夫, 학자 정치인)는 김상헌(金尙憲)이다. 그 자신이 성공한 사대부였을 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이 조선 후기에 최대의 권력 가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집안은 바로 ‘장동 김씨(壯洞 金氏)’인데, 김상헌과 김상용(金尙容) 형제가 장동(현재의 서촌)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졌다. 이 집안은 조선 후기에 가장 강력했던 당파인 서인과 그 주류인 노론의 핵심이었다. 조선 후기 이 집안에서 15명의 정승과 35명의 판서가 나왔다. 김상헌은 그의 정치적 영향력뿐 아니라, 그가 쓴 여러 시와 글로 서촌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근가십영(近家十詠)」에서 서촌의 명승지인 백악과 인왕산, 청풍계, 백운동, 대은암(大隱巖), 회맹단(會盟壇), 세심대(洗心臺) 등을 노래했다. 또 인왕산에 대한 답사기를 썼고, 청나라에 잡혀가 있던 시절에 서촌의 집을 그리워하는 시도 썼다. 서촌의 대로변에는 큰 빌딩들이 들어서 있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옛 정취를 자아내는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정치 권력을 쥔 장동 김씨들은 문화도 주도했다. 김상헌의 증손자인 김창업(金昌業)과 김창흡(金昌翕)은 조선 후기 최고의 풍경화가인 정선(鄭敾)을 후원했다. 서촌에 살았던 정선은 그 보답으로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의 집을 그린 < 청풍계 >라는 작품을 7점이나 남겼다. 또 장동 김씨의 터전이었던 장동 일대를 그린 <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을 2벌이나 남겼다. 정선은 말년에 조선 후기에 가장 유명한 풍경화이자 서촌을 대표하는 그림인 <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를 그렸다. 조선 후기에 가장 뛰어난 왕이었던 영조(英祖)는 왕이 되기 전 서촌 남부의 창의궁(彰義宮)에서 살았다. 그는 왕이 된 뒤에도 이곳을 자주 방문했으며, 창의궁 시절에 대한 8편의 시를 썼다. 또 신분이 낮았던 자신의 어머니를 모신 사당 육상궁(毓祥宮, 현재의 칠궁)을 역시 서촌 북부에 마련해 자주 방문했다. 조선 후기에 가장 유명한 사대부 예술가였던 김정희(金正喜)도 서촌 남부의 월성위궁(月城尉宮)에 살았다. 그의 증조부가 영조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여기서 자라 조선 최고의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조선 후기엔 상업의 발달, 계급의 완화에 따라 서촌의 중남부에 살던 하급 관리 중인(中人)들의 문학 활동도 활발해졌다. 중인들은 여러 시모임을 만들어 장동 김씨와 사대부들이 터를 잡고 있던 옥류동 일대에서 함께 문학 활동을 벌였다. 중인들끼리 만든 시모임도 있었고, 사대부와 함께 만든 시모임도 있었다. 가장 유명한 시모임은 천수경(千壽慶)과 장혼(張混)이 이끌었고, 이들은 여러 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조선이 망한 뒤 일제 강점기엔 대표적 매국노인 이완용(李完用)과 윤덕영(尹德榮), 고영희(高永喜) 등이 서촌에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특히 윤덕영은 옥류동의 2만여평 터에 건축 면적 800평의 서양식 주택을 지었는데, 이 집은 당시 조선의 개인 집 가운데 가장 컸다. 해방과 화재 등으로 인해 윤덕영의 대규모 서양식 주택과 대규모 전통 주택(한옥) 본채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딸과 사위가 살던 서양식 집(현재 박노수미술관)과 그의 첩이 살던 한옥은 아직 남아 있다. 근대의 흔적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서촌엔 작가와 화가들이 많이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에 서촌에 살았던 대표적인 작가는 전위적인 시와 산문을 쓴 이상, 항일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윤동주와 이육사, 친일 활동을 했던 소설가 이광수와 시인 노천명, 해방 뒤엔 소설가 박완서와 김훈, 미술사학자 유홍준 등이 있다. 화가로는 좌파 화가였던 이여성-이쾌대 형제, 이중섭, 이상의 친구 구본웅, 친일 한국화가 이상범, 박노수, 천경자 등이 활동했다. 한국 근현대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자 소설가, 건축가였던 이상(李箱, 1910~1937)이 20여 년간 살았던 집이다. 한때 철거될 위기에 처했으나, 문화유산국민신탁이 2009년 시민 모금과 기업 후원을 통해 매입하여 관리하고 있다. 내부에는 그의 작품을 연대별로 정리한 아카이브가 한쪽 벽면에 설치되어 있다. ⓒ 한국문화원연합회 해방 뒤 서촌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60년 4.19 시민혁명이다. 당시 부정 선거를 항의하려고 이승만(李承晩)이 있던 경무대(景武臺, 현재의 청와대)로 몰려든 학생과 시민에게 경찰이 총을 쏘면서 혁명에 불이 붙었다. 시민들이 경찰의 총에 쓰러진 곳이 현재의 효자로(孝子路)와 청와대 분수대 광장 일대였다. 또 군사 정부의 독재자 박정희(朴正熙)는 1979년 10월26일 현재의 무궁화 동산에 있던 보안 가옥(안가)에서 측근이었던 김재규(金載圭)의 총에 맞아 숨졌다. 서촌에 살았던 대표적 정치인은 2대 국회의장과 대통령 후보를 지낸 신익희(申翼熙)이며, 기업인으로는 현대의 정주영(鄭周永) 회장이 살았다. 조선 때부터 북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좋은 주거지였던 서촌은 박정희 군사 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점점 쇠퇴했다. 청와대에 대한 경비가 강화되면서 서촌 일대에 대한 통제가 심했기 때문이다. 또 1970년대 서울의 강남(江南)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가장 좋은 주거지가 서촌과 북촌 등 강북에서 강남 쪽으로 옮겨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서촌에 대한 여러 규제가 완화되고 2010년 전통 주택에 대한 지원이 시작되면서 서촌은 자연과 역사, 문화가 잘 갖춰진 서울의 인기 방문지 중의 하나가 됐다. 1920~30년대 지어진 개량 한옥과 현대적 건물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서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저 멀리 서촌의 랜드마크인 인왕산이 보인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김규원(KIM Kyuwon, 金圭元) 한겨레21 선임기자

시간에 닳지 않는 홍대의 아이콘들

Features 2024 AUTUMN

시간에 닳지 않는 홍대의 아이콘들 홍대 앞은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번화가이자 관광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급속한 상업화로 홍대 지역이 변화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홍대 앞 명소들은 저마다의 개성으로 홍대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홍대 앞 초입(홍익로3길)에 자리한 호미화방은 50년 역사를 자랑한다. 1987년부터는 창업자의 아들이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는 손자까지 힘을 보태고 있다. 호미화방의 로고는 1970년대 후반, 단골이었던 홍익대학교 대학원생이 ‘미술은 영원하다’는 의미를 담아 디자인해 주었다.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일대는 법정동인 서교동보다 ‘홍대 앞’이라는 단어로 더 익숙하게 불리는 곳이다. 1990년대 이후 서울의 핫플레이스로 이 지역이 각광받게 된 데에는 인디 뮤지션들의 역할이 컸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홍대만의 독특한 문화와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디 문화의 부흥과 더불어 골목 구석구석 들어선 카페와 클럽, 문화 공간들은 홍대 앞을 수십 년간 인디 문화와 젊은 감각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일조했다. 그러나 여타 지역이 그랬던 것처럼 홍대 앞도 임대료 인상과 그에 따른 여파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상권이 활성화되고 거대 자본이 유입되면서 홍대 앞의 개성을 만들어 온 많은 예술가와 공간들이 주변 지역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대형 프랜차이즈 상점이 들어섰다. 그래서 혹자에게 홍대 앞은 이제 상업적인 분위기만 풍기는 번화가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홍대 앞 곳곳에는 여전히 고유의 개성과 정체성을 지닌 공간들이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지역 문화의 산실 역할을 하고 있다. 홍대 앞 터줏대감 중 하나인 수(秀)노래방 전경. 1999년 오픈한 이곳은 기존 노래방들과는 다른 고급화 전략을 내세우며 성장했다. 2005년 MBC가 방영한 인기 TV 드라마 에서 주인공 남녀가 노래를 부른 장소로 알려지며 더욱 유명해졌다. 예술인들의 사랑방 1990년대 이후 홍대 앞이 인디 문화의 성지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전부터 형성된 이 지역 특유의 예술적인 환경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의 중심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이 있었다. 홍익대학교 미대생들과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교류하며 만들어 낸 독특한 문화가 인디 밴드와 클럽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1975년 개업한 호미화방(Homi Art Shop)도 홍대 앞 미술 문화의 산증인으로 현재까지 홍익대학교 인근에서 영업하고 있다. 호미화방은 반세기 동안 다양하고 질 좋은 미술 재료를 공급하며 한국 미술이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난 2020년에는 서울미래유산(Seoul Future Heritage)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호미화방이 단순히 화방으로서의 가치만 지니는 것은 아니다. “호미화방에 가면 인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만나고 교류할 수 있다”라는 예술인들의 인식이 이곳을 홍대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동력이었을 것이다. 신천지를 펼친 LP 바 1990년대 홍대 앞을 추억하는 뮤지션들과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장소가 하나 있다. 바로 블루스 하우스(Blues House)다. 홍대 앞에 인디 문화가 태동한 시기에 이곳도 문을 열었다. 블루스 하우스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세련된 공간 구성과 음악 선곡으로 금세 홍대를 대표하는 바(bar)로 자리매김했다. 오로지 이곳에 가기 위해 홍대 앞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당시 주목받던 한 소설가의 장편소설 배경이 되기도 했다. 20년간 같은 자리를 지키며 뮤지션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블루스 하우스. 그러나 지난 2016년 임대료 상승과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아야만 했다. 추억의 이름이 될 뻔만 이곳이 2020년 다시 문을 열며 역사는 현재진행형이 됐다. 오랫동안 영업한 서교동을 떠나, 망원동에 새로 둥지를 튼 것이다. 예전과 동일한 서체의 간판과 빼곡한 음반, 변함없는 분위기가 오랜 단골들과 음악을 사랑하는 젊은 세대를 반기고 있다. ⓒ NAVER Blog Jinnie 음악 문화의 계승 최근 젊은 층들 사이에서 레트로 열풍이 거세다. 먹거리부터 패션, 음악 등 삶 전반에서 과거의 유행이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레트로 바람을 타고 추억 속 제품들도 다시 각광받는다. 이제는 사라진 줄 알았던 바이닐(vinyl), 레코드판도 그 바람을 타고 힙한 굿즈로 관심을 끈다. 올해로 개업 11주년을 맞은 김밥레코즈(Gimbab Records)도 홍대 앞 명소로 젊은이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있다. 연남동 골목의 작은 공간에서 2013년 문을 연 김밥레코즈는 오프라인 음반 매장을 찾아볼 수 없었던 시절, 음반을 직접 고르고 구매할 수 있는 드문 장소였다. 김밥레코즈의 탄생은 인디 뮤지션과 클럽으로 자생한 홍대 앞 음악 문화 계승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곳을 필두로 인근에 여러 레코드숍이 생기며, 자연스럽게 관련 공연과 문화 행사들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2020년부터 열리고 있는 마포 바이닐 페스타(Mapo Vinyl Festa)도 그중 하나다. 홍대 앞에 탄탄한 바이닐 문화가 형성되면서 김밥레코즈도 2년 전 동교동의 더 넓은 공간으로 이전했다. 김밥레코즈는 이곳에서 음반 판매뿐만 아니라, 해외 음반 수입, 소규모 레이블 공연 기획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홍대 앞 음악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김밥레코즈는 2013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바이닐 레코드 매장으로, 국내외 뮤지션들의 공연도 기획해 진행한다. 10년 넘게 서울레코드페어(Seoul Record Fair)도 주최하고 있어 국내 바이닐 레코드 시장의 저변 확대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 논텍스트(NONTEXT), 사진 김동규(Kimdonggyu) 소극장 문화의 산실 소극장 산울림(Sanwoollim)은 올 초 타계한 원로 연출가 임영웅(林英雄)이 극단 산울림의 전용 극장으로 1985년 개관한 100석 규모의 소극장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 고도를 기다리며 >를 한국에서 초연하며 이름을 알린 극단 산울림과 소극장 산울림은 여성의 삶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올리며 전성기를 맞았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 위기의 여자 >, 드니즈 살렘(Denise Chalem)의 <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 등의 공연은 그때까지 문화예술계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중장년층 여성들을 극장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0~90년대에 이어진 소극장 전성기가 지난 후에도 이곳은 여전히 젊은 연출가들의 실험적인 무대를 지원하는 연극계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랜드마크로 홍대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1985년 개관한 소극장 산울림은 고전 작품의 깊이 있는 해석, 젊은 연출가들의 실험적인무대를 보여 주며 홍대 앞에 또 하나의 랜드마크를 추가했다. 최근에는 건물 1~2층에 갤러리와 아트숍을 마련해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대표적 약속 장소 1990~2000년대 인디 문화가 한창이던 시절, 홍대 앞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일대를 일컫는 말이었다. 반면 최근의 홍대 앞은 주변의 상수동, 연남동, 망원동까지 훨씬 더 넓은 권역을 의미하게 됐다. 높아진 임대료 탓에 여러 상점과 공간들이 인근 지역으로 밀려난 탓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덕에 홍대 앞은 특정 대학가의 상권 자체를 지칭하기보다 더 넓은 지역과 그곳에서 공유되는 특유의 정서를 상징하는 말이 될 수 있었다. 리치몬드과자점(Richemont Patisserie)은 한때 홍대 앞의 대표적인 약속 장소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홍대 앞을 지키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범홍대권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로 불린다. 1979년 문을 연 성산동 본점에 이어 1983년 홍대점을 오픈한 리치몬드과자점은 지난 2012년 임대료 상승과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의 인기에 밀려 30년간 이어온 홍대점 영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4~5년 전 동네 빵집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성산동 본점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서울 3대 빵집’으로 불리며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밤식빵과 슈크림빵으로 대표되는 변치 않는 메뉴에도 있지만, 서교동 시절부터 켜켜이 쌓아온 홍대 앞의 추억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트렌드를 만들어 내는 힘

Features 2024 AUTUMN

트렌드를 만들어 내는 힘 홍대 앞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다양성을 지닌 지역이다. 하지만 그 모든 특성을 관통하는 하나의 특징이 있다. 당대의 문화를 선도한다는 점이다. 홍대 앞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문화는 새로운 트렌드가 되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곤 했다. 이 점에서 홍대 앞은 일반적인 대학가와 뚜렷이 구별된다. 사진은 홍익문화공원(Hongik Cultural Park) 맞은편에 위치한 벽화 거리의 초입. 홍익대학교의 지하 캠퍼스 건설로 인해 홍익대 담장에 그려진 벽화들은 최근 사라졌지만, 나머지 한쪽인 주택가 담벼락의 벽화들은 아직 남아 있다. 이 벽화들은 거리미술전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전형적인 주거 지역이었던 홍대 앞은 1955년 홍익대학교가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변화의 물꼬가 트였다. 1961년 미술대학(Hongik Art College), 1972년 산업미술대학원(Graduate School of Industrial Art)이 건립되면서 학교 주변에 미대생들의 작업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작업실들은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됨으로써 사적인 공간을 넘어 정형화되지 않은 일종의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했다. 예컨대 문화예술 작품과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자발적 토론이 이루어졌고, 때로는 기성 문화를 비판하는 퍼포먼스가 벌어지기도 했다. 어떤 곳은 갤러리로, 또 다른 곳은 카페로 변모하기도 했으며, 밤에는 클럽이 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작업실은 그 어떤 제약 없이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실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홍대 앞 작업실 문화는 예술가, 기획자, 지식인들을 모여들게 만들었으며 대안 문화의 토대를 서서히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분위기가 1990년대 중후반 홍대 앞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홍대 앞을 구성하는 공간과 사람, 이들의 교류와 소통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환경과 맞물려 문화적 트렌드를 이끌게 되었다. 2007년 개관한 KT&G 상상마당 홍대(KT&G SangSang Madang Hongdae, 想像广場)는 영화관, 공연장, 갤러리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예술가들에게는 창작 활동 지원을, 일반인들에게는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한다. 홍대 앞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다. 라이카시네마(Laika Cinema)는 2021년 문을 연 연희동 최초의 예술영화관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에릭 로메르 등 거장들의 대표작을 비롯해 대형 영화관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작품성 높은 영화들을 상영한다. 거리의 예술화 1990년대 홍대 앞은 상반된 모습을 띠는 지역이었다. 대안 문화의 중심지이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명 피카소 거리를 중심으로 소비문화가 확산됐다. 피카소 거리는 홍익대학교 정문 왼쪽에서 극동방송 건물 뒤편까지 이어지는 약 400미터 길이의 골목길을 말한다. 이곳은 당시 고급스러운 카페와 패션 브랜드 숍들이 즐비했던 압구정동(狎鷗亭洞) 로데오 거리에 빗대 피카소 거리로 불렸다. 카페와 유흥 업소들이 피카소 거리를 장악하면서 기존 홍대 앞의 문화적∙예술적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었고, 이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에 따라 홍대 앞 고유의 문화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촉발됐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홍익대학교 미대생들을 중심으로 한 거리미술전(Street Art Exhibition)이다. 1993년부터 시작된 거리미술전은 학교 밖을 벗어나 홍대 지역 곳곳에서 주민들과 함께 진행하는 미술 행사이다. 거리미술전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이 바로 벽화 거리이다. 거리에 예술적 색채가 덧입혀지면서 홍대 지역은 머물고 싶은 곳으로 변화했다. 또한 벽화 작업에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지역 공동체 회복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를 모범 사례로 이후 전국 곳곳에서 지역 정체성을 쇄신하기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벽화 조성 작업이 확산되었다. 대안 문화 공간 국내 대안 공간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인 속에서 1990년대 후반 태동되었다. 우선적으로 국제 외환 위기의 영향이 컸는데, 미술 시장이 불황을 겪으면서 젊은 작가들이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또한 다원화된 문화예술 환경 변화의 요인도 컸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들이 활발히 등장했지만, 기존 공간들은 이러한 작품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해 자생적으로 대안 공간이 형성되었고, 1999년 홍대 앞에 한국 최초의 대안 공간인 대안공간 루프(Alternative Space LOOP)가 들어섰다. 젊은 작가들의 새롭고 실험적인 작품을 발굴 및 지원하고, 국외 작가와의 교류와 연계를 모색하는 것이 설립 취지였다. 이곳을 시작으로 여러 대안 공간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대안공간 루프의 탄생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1990년대 홍대 앞을 관통하는 대안 문화의 깊이와 저변을 확장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예술 작품을 소수의 소유물로 바라보지 않고, 시민 모두가 공유하는 공공적이며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예술가들이 제안하는 사회적, 문화적, 예술적 이슈들을 관람객들과 공유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한마디로 예술의 경계와 벽을 허물었던 것이다. 2023년 대안공간 루프의 작가 공모전에 선정된 정찬민(Chanmin Jeong, 鄭讚珉)의 개인전 < 행동 부피(Mass Action) > 전시장 모습. 1999년 국내 최초의 대안 공간으로 출발한 대안공간 루프(Alternative Space LOOP)는 매년 동시대 이슈를 독창적 시각으로 선보이는 실험적인 예술가들을 선정해 기획 전시를 열고 있다. ⓒ 대안공간 루프 2018년 개관한 복합문화공간 연남장(Yeonnamjang, 延南㙊)은 연희동 일대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을 위한 작업실이자 쇼케이스 공간이다. 콘텐츠에 따라 1층 카페 공간을 뮤지컬 무대, 전시장 등 다목적으로 활용한다. 최초의 아트 마켓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열렸던 2002년 FIFA 월드컵은 다양한 문화 행사와 축제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홍대 앞에서도 지역 내 장소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그즈음 서울시와 마포구가 홍대 앞 일정 구역을 ‘걷고싶은거리(Hongdae Culture Street, 弘大文化街)’로 지정했는데, 그 길 중심에 위치한 장소가 흔히 ‘홍대 놀이터’라 부르는 홍익대학교 건너편 어린이 공원이었다.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기획자들이 주축이 되고, 문화예술 분야의 작가들이 모여 이 공간의 발전적인 활용 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이곳에는 2002년 5월 국내 최초의 수공예품 시장인 희망시장(Rainbow Art Market)이 열리게 되었다. 소수의 인원만 이용하던 놀이터가 아트 마켓의 거점이 됨으로써 해당 공간은 활성화될 수 있었다. 희망시장은 그동안 홍대 앞 여러 공간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벼룩시장을 정기적인 문화예술 행사로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당시 국내에서는 이러한 아트 마켓을 좀처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입소문이 났고, 시장이 열리는 매주 일요일 오후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희망시장은 일상적인 장소가 창작과 유통의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희망시장은 이후 아트 마켓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는 홍대 앞 놀이터가 아닌 실내 한 스튜디오로 장소를 옮겼지만, 예술의 생산과 소비를 직접 연결하는 장으로서 그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살롱 문화 트렌드 2000년대 접어들어 홍대 지역에는 카페 문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홍대 앞 카페 문화는 다른 지역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단순히 음료를 마시고 여가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아니라 유사 분야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 문화예술적인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살롱 문화가 이미 이 시기 홍대 앞에 형성되었던 셈이다. 그래서 대개의 카페 내부에는 큰 테이블이 있었고, 언제든지 즉흥 공연 무대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악기와 소품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또한 문화예술 분야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다양한 리플릿들이 항시 놓여 있었고, 종종 소규모의 프리마켓이 열리기도 했다. 이러한 홍대 앞 살롱 문화의 대표적인 공간은 2004년 문을 연 이리(Yri)카페이다. “음악, 미술, 글쓰기, 영화 등 우리는 가리지 않고 존중합니다”라는 모토를 내건 이리카페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향한다. 전시와 낭독회, 공연, 세미나 등의 프로그램들을 통해 살롱문화를 확장하고 있다. SNS 발달과 함께 다양한 취향이 세분화되는 현 시점에서 살롱 문화를 지향하는 공간의 힘을 홍대 앞 카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리카페(Yri Cafe)는 홍대 지역에 거주하는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출발했으며 낭독회, 전시회, 연주회 등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2004년 서교동에서 문을 열었고, 2009년 상수동 현재 위치로 이전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 출판 문화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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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출판 문화의 산실 홍대 지역의 또 다른 정체성으로 꼽히는 게 출판 문화다. 이곳에는 대형 출판사를 비롯해 독립 출판사, 디자인 회사들이 밀집해 있으며 지역 사회와 출판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적 관계가 형성돼 있다. 이렇게 자생적으로 발달한 출판 문화는 국내에서 가장 먼저 홍대 앞에 독립 서점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2011년 문을 연 땡스북스는 동네 책방의 원조로 불리는 곳이다. 주로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20~30대 직장인들이 자주 찾는다. 서점 주인이 디자이너 출신이어서 독특하고 세련된 책들을 많이 볼 수 있다. ⓒ 땡스북스 미술과 음악 분야를 중심으로 성장하던 홍대 앞은 1990년대 말부터 또 다른 변화를 겪게 되었다. 광고, 디자인, 만화, 방송, 사진, 영화, 출판, 패션 등 문화 산업 직종들과 전문가들이 하나둘씩 이곳으로 몰려든 것이다. 이로써 홍대 앞은 복합 문화 지역으로서의 장소성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홍대 지역에는 출판사들이 밀집해 있는데, 이들이 직접 운영하는 북카페는 단순히 책을 판매하고 독서 공간을 제공하는 기존 북카페와 차별되는 운영 방식과 활동을 보여 준다. 이러한 양상도 오늘날 홍대 앞 풍경을 이루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자생적 출판 문화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파주출판도시(Paju Book City)는 200여 개의 중소 규모 출판 기업들이 조합을 결성하고, 출판 산업의 활성화를 꾀하고자 관의 지원을 받아 조성한 계획적인 출판 산업 단지이다. 반면에 홍대 앞은 문화적 토대가 축적되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출판 단지가 형성되었다. 홍대 앞은 파주출판도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출판 인력들이 몰려 있는 지역이다. 한때 국내 출판업계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던 문학과지성사(Moonji Publishing Company)와 창비(Changbi Publishers) 사무실도 이곳에 있다. 1970년 창립된 문학과지성사는 1989년 서교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해 지금까지 홍대 앞을 지키고 있다. 1966년 문예지 『창작과비평(Changjak-gwa Bipyeong, Creation and Criticism)』을 발행하며 출판업을 시작한 창비도 파주출판도시에 본사를 두고, 홍대 앞에 서울 사옥(Changbi Seokyo Building)을 마련해 다양하게 활용하는 중이다. 이 외에도 국내 유수의 출판사들이 홍대 앞에 밀집해 있다. 1979년 시작된 글벗서점은 오랫동안 홍대 앞을 지켜온 터줏대감 중 하나다. 초기에는 예술 서적 위주로 판매했으나, 현재는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취급한다. ⓒ 마포구청 홍대 앞 출판 문화가 파주와 다른 점 또 하나는 지역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서울와우북페스티벌(Seoul Wow Book Festival)을 들 수 있다. 출판 관계자, 예술가, 시민들이 모여 책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 교류하고, 문화예술 경험을 함께 공유하는 행사이다. 2005년부터 매해 가을 열리는 이 페스티벌은 출판사, 저자, 독자 및 지역 주민들을 한데 묶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와우북페스티벌은 폭넓은 독서 문화를 조성하고, 출판 산업과 문화예술 산업의 부흥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사업을 주최하는 사단법인 와우컬처랩(Wow Culture Lab)은 홍대 앞의 수많은 출판사 및 문화예술 단체와 연계하여 문화예술 활동을 도모하고 있다. 또한 국제 출판 문화 포럼, 지역 도서관 활성화 방안 연구, 직장인 문화예술 교육 등 사업 영역을 점차 다각화하는 중이다. 출판사 직영 북카페 출판사들이 직접 운영하는 홍대 앞 북카페는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성지로 통한다. 단순히 자사가 출간한 책 홍보를 넘어 복합문화공간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대표적인 예로 문학동네(Munhakdongne Publishing Group)의 카페 꼼마(COMMA)가 있다. 국내 굵직한 출판 그룹 중 하나인 문학동네는 2011년 홍대 앞 주차장 거리에 카페 꼼마 1호점을 연 데 이어 유동 인구가 많은 홍대입구 지하철역 앞에 2호점을 열었다. 현재 두 곳은 사라지고 없지만, 합정동과 동교동에서 북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문학동네는 이 외에 서울 다른 지역과 수도권에서도 북카페를 운영한다. 2010년대 들어 카페 문화가 정착하면서 커피와 함께 독서를 즐길 수 있는 북카페가 등장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것은 출판사들이다. 도서 판매뿐 아니라 각종 이벤트를 개최함으로써 독서 문화를 폭넓게 확장시켰다. 사진은 문학동네가 운영하는 카페 꼼마 합정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르 클레지오, 오에 겐자부로가 카페 꼼마에서 독자들과 만남을 가졌으며 황석영(黃晳暎), 한강(韓江), 옌렌커(閻連科) 등 국내외 저명 작가들의 강연이 지속되고 있다. 이곳은 기업의 문화 행사나 드라마 촬영 장소로도 애용된다. 창비도 2012년부터 카페 창비를 운영 중이다. 이곳은 협업 형태로 북카페를 운영하는 것이 특징이다. 2021년부터는 라이프스타일 디자인 브랜드 브라운핸즈(Brown Hands)와 함께하고 있다. 이 공간에서는 브라운핸즈가 직접 로스팅한 원두커피를 맛볼 수 있으며, 장인들이 만든 가구와 조명 제품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 젊은 층이 즐겨 찾는다. 그런가 하면 문학과지성사는 올해 6월 서교동 사옥 지하층에 문지(文知)살롱(Moonji Salon)을 새롭게 열었다. 이곳은 커피와 위스키를 마실 수 있는 카페 공간과 북토크나 강연을 진행하는 이벤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는 우체국 느낌으로 꾸민 문지 포스트를 마련해 독자들이 작가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포스트잇에 메모를 남길 수 있도록 했다. 독립 서점 붐 출판사가 운영하는 북카페 못지않게 홍대 지역에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 독립 서점이다. 홍대 앞에는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이 아닌 작고 특색 있는 서점이 많다. 이들 공간에서는 대형 서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립 출판물을 전시하거나 판매한다. 대표적으로 유어마인드(YOUR-MIND)와 땡스북스(THANKSBOOKS)가 있다. 유어마인드는 국내 최초의 독립 출판물 전문 서점으로 알려졌다. 2009년부터 국내 소형 출판사의 독립 출판물과 작가들이 직접 제작한 아트북을 판매하고 있다. 이곳은 출판사도 겸하고 있으며, 매년 서울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Unlimited Edition)’을 개최한다. 초기에는 홍대 앞 작은 갤러리에서 진행했지만, 최근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이나 일민미술관 등 굵직한 전시 공간과 함께할 정도로 성장했다. 유어마인드는 2017년 기존 서교동에서 연희동으로 이전했는데, 주말에는 사람이 꽉 찰 정도로 연희동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2009년 출발한 언리미티드 에디션(Unlimited Edition)은 독립 출판물, 아트북 제작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축제다. 홍대 지역에 가장 먼저 생긴 독립 서점 유어마인드가 주관하는 행사로, 해외 팀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어 국내외 아트북의 최신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 임효진, 언리미티드 에디션 홍대 앞에서 출발해 연희동으로 이전한 유어마인드 내부. 도서 판매뿐 아니라 출판도 병행하고 있으며, 아티스트들과 협업하여 제작한 팬시 상품들도 판매하는 등 활동 범위를 넓히는 중이다. 2011년 오픈한 땡스북스는 주목할 만한 책들을 선별하여 판매하는 큐레이션 서점이다. 책과 관련된 디자인 작업을 하는 스튜디오도 함께 운영한다. 한 달에 한 번 출판사와 함께 개최하는 기획 전시는 인기가 높다. 모든 책을 망라하고 있지는 않지만, 동네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유어마인드가 소규모 독립 출판물을 유통하는 데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데 반해 땡스북스는 대형 출판사가 간행한 책들도 셀렉션에 포함해 책을 다루는 범위가 좀 더 넓다. 하지만 독립 출판물 페어를 개최하거나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여는 등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는 점, 지나치게 상업적이지 않은 공간으로 운영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지닌다. 최근 들어 홍대 앞뿐 아니라 인근 망원동, 연남동, 연희동 등지에 개성 있는 독립 서점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가가77페이지(gaga77page), 서점 리스본(Bookshop Lisbon), 안도북스(AndoBooks), 책방 연희(Chaegbangyeonhui)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범홍대권에는 독립 서점이 굵직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인디 음악의 성지

Features 2024 AUTUMN

인디 음악의 성지 한국 인디 음악은 홍대 지역의 라이브 클럽들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1990년대 초반 홍대 앞에 하나둘 생겨난 라이브 클럽들은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선보이는 한편 인디 밴드의 등용문 역할을 했다. 또한 동시대 음악인들이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며 국내 음악 신을 풍성하게 만들어 왔다. 2023년 10월, 라이브 클럽데이(Live Club Day) 중 클럽 빵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는 4인조 밴드 다브다(Dabda). 라이브 클럽데이는 티켓 한 장으로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며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음악 축제이다. 라이브 클럽들과 여러 공연장들이 밀집해 있는 홍대 지역의 특성에서 비롯된 공연 형태이다. ⓒ 인썸니아(indieinsomnia) “그 더운 여름날에 나완 다른 세상이 그곳에 있었지 / 뜨거운 햇살 어지러운 길바닥 아래 물을 뿌려대는 아이들” 남성 듀오 위퍼(Weeper)의 노래 < 그 더운 여름날에 1996 >은 이런 가사로 시작한다. 이 곡은 위퍼가 2001년 발매한 앨범 < 상실의 시대 >에 실려 있다. 노래의 배경은 이렇다. 1996년,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인 5월 25일. 위퍼의 리더 이지형(E Z Hyoung, 李知衡)이 ‘나완 다른 세상’이라 묘사한 곳은 홍대 앞 주차장 거리였다. 더 정확히는 그곳에 설치된 무대였다. 무대는 가죽 옷을 입고 체인을 걸치고 머리를 바짝 세운 ‘무뢰한’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는 소음처럼 들렸을 수도 있는 날것의 소리를 ‘작렬’시켰다. 사람들은 그 음악을 펑크라 불렀고, 그날 행사에는 ‘스트리트 펑크쇼’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펑크는 한국에 없던 음악이었다. 1970년대 후반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나 더 클래시(The Clash)의 이름은 한국에선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 스트리트 펑크쇼 >는 그 무명의 음악이 홍대 앞 언더그라운드에서 자생하고 있다는 걸 알려준 이벤트였다. 지하에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던 청년들은 땅 위로 올라와 불특정 일반 대중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관객 중 한 명이었던 이지형도 그날의 경험을 < 그 더운 여름날에 1996 >이란 노래로 만들었다. 의미 있는 파도를 만들어 낸 이날의 행사를 기점으로 1996년은 한국 인디의 원년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라이브 클럽의 시대 < 스트리트 펑크쇼 >에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긴 청년들은 당시 드럭(Drug)이라는 라이브 클럽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곳은 1994년 7월 문을 열었다. 처음엔 그저 술을 마시며 음악을 듣는 흔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너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Kurt Cobain) 1주기 추모 공연을 열면서부터 공간의 성격이 바뀌었다. 드럭에서는 주기적으로 공연이 열렸다. 공연을 보러 왔던 이들이 몇 달 뒤 무대에 서기도 했다. 5인조 펑크록 밴드 크라잉넛(Crying Nut)의 시작도 그랬다. 홍대 앞에는 라이브 클럽들이 속속 생겨났다. 롤링스톤즈[(현 롤링홀(Rolling Hall)], 마스터플랜, 블루데빌(Blue Devil), 스팽글(Spangle), 재머스(Jammers), 클럽 빵(BBang), 프리버드(Freebird) 등 라이브 클럽들이 홍대 앞을 중심으로 신촌을 거쳐 이화여대 후문까지 넓게 자리 잡았다. 1990년대 중후반 국내 인디의 시작은 곧 라이브 클럽의 시작이기도 했다. 당시 라이브 클럽들과 인디 신은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미디어는 언니네 이발관(Sister’s Barbershop), 허벅지밴드(Herbuxy Band), 황신혜밴드(Hwang Shin Hye Band) 같은 인디 밴드들의 특이한 이름에 먼저 흥미를 보였고, 펑크를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현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편 이 시기에 모던 록이라는 장르도 이식됐다. 기존과는 다른 음악을 즐기고 다른 정서를 지닌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한국 인디 1세대가 됐다. 홍대 앞 라이브 클럽들은 펑크, 모던 록, 힙합 등 각각의 색깔이 있었다. 전자음악에 특화된 곳도 있었다. 라이브 클럽에는 하우스 밴드처럼 해당 클럽 무대에 주로 서는 밴드들이 존재했다. 크라잉넛과 노브레인(No Brain), 위퍼 등이 드럭의 스타였다면 언니네 이발관과 마이 앤트 메리(My Aunt Mary)는 주로 스팽글 무대에 올랐다. 클럽은 자신의 소속 밴드들과 컴필레이션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드럭은 < Our Nation >(1996)이란 이름의 스플릿 앨범을 시리즈로 만들었고, 재머스는 < 록 닭의 울음소리 >(1997), 롤링 스톤즈는 < The Restoration >(1998)을 발표했다. 명백히 1990년대 인디 신은 클럽의 시대였다. 클럽 빵 앞에서 공연 목록을 훑어보고 있는 음악 팬들. 1994년 오픈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클럽 빵은 주로 포크 음악이나 모던 록 색채를 지닌 팀들이 무대에 선다. 뮤지션들의 컴필레이션 앨범도 자체 제작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한국대중음악상(Korean Music Awards) 특별상을 받았다. 스타들의 등용문 2000년대는 레이블의 시대가 됐다. 컴필레이션 앨범의 제작 주체가 라이브 클럽이 아닌 레이블로 바뀐 것은 상징적이다. 라이브 클럽에서 하우스 밴드처럼 활동했던 밴드들은 이제 자신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해 줄 소속사가 필요해졌다. 이는 인디 신이 좀 더 체계적인 구조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에 따라 레이블 역할까지 소화하는 클럽들이 생겨났다. 경영상의 어려움도 불거졌다. 이 과정에서 사라지는 클럽과 새롭게 문을 여는 클럽이 생겨났다. 앞에서 언급한 1990년대의 클럽들 가운데 꾸준히 명맥을 잇고 있는 건 롤링홀과 클럽 빵 정도다. 빈자리는 스트레인지 프룻(Strange Fruit), 언플러그드, FF, 제비다방(Jebi Dabang) 같은 새로운 곳들이 대체했다. 신생 공간들이 과거의 라이브 클럽과 온전히 같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라이브 클럽이 해 온 등용문 역할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각 클럽은 여전히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자신들의 공간과 어울리는 아티스트를 무대에 세운다. 얼마 전 클럽 빵에서는 슈게이징 밴드 잠(Zzzaam)이 오랜 공백 끝에 재결성 공연을 가졌다. 재결성 공연 장소로 클럽 빵을 택한 건 이들의 시작에 빵이 있었기 때문이다. 1인 인디 밴드 십센치(10CM)가 스타가 되기 전, 자주 섰던 무대도 빵이었다. 그런가 하면 스트레인지 프룻은 홍대 앞에서도 개성이 강한 음악인들이 선호하는 공연장이고, FF에선 여전히 뜨거운 록의 에너지를 경험할 수 있다. 이제는 몇 만 관객 앞에서 공연하는 잔나비(Jannabi)가 몇십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FF에서 공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언플러그드는 인디 음악을 테마로 한 복합문화공간이다. 1층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카페로, 지하층은 공연장으로 운영된다. 1층 카페에서는 김사월(Kim Sawol, 金四月) 등 이곳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의 시그니처 칵테일을 맛볼 수 있다. 2012년 상수동에 문을 연 제비다방은 예술을 매개로 소통하는 문화 공간이다. 매주 주말에는 관객들의 자발적 모금으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공연과 이벤트가 진행된다. 홍대 앞을 사랑하는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전 세계 음악인들의 교류 현재 남아 있는 라이브 클럽들이 연합해 ‘라이브 클럽데이’를 부활시킨 건 필요에 의한 일이었다. 2004년 시작한 ‘사운드데이’를 전신으로 하는 이 행사는 2011년 폐지됐다가 2015년 부활했다. 당시 클럽들이 어려워지면서 이 상황을 함께 헤쳐보자는 취지가 있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이 음악 축제는 라이브 문화를 이끌고 분위기를 조성했다. 초기의 어려움과 달리 지금은 굳건히 자리를 잡아 표를 구하는 게 어려워졌을 정도다. 또 행사 때마다 교류해 온 아시아 지역의 음악인들과 함께 올해 아시안 팝 페스티벌을 연 건 라이브 클럽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외 음악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하는 얘기가 있다. 전 세계 어디에도 홍대 앞 같은 장소가 없다는 것이다. 홍대 앞처럼 라이브 클럽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 흔치 않다는 뜻이다. 이런 장점을 바탕으로 홍대 앞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라이브 클럽데이(Live Club Day)가 열리고, 1년에 한 번 잔다리 페스타(Zandari Festa)라는 글로벌 쇼케이스가 개최된다. 홍대 지역의 중심인 서교동(西橋洞)의 옛 지명 ‘잔다리’를 가져다 이름 붙인 이 축제는 해외의 내로라하는 음악 산업 종사자들이 찾는다. 매해 가을 홍대 앞 곳곳에서 열리는 공연장에 해외 음악 관계자들이 국내 인디 음악인의 공연을 보고 자신들이 기획하는 행사에 초청하기도 한다. 그렇게 누군가는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무대에 서기도 하고, SXSW, 리버풀 사운드시티(Liverpool Sound City) 등에 초대된다. 최근 “밴드 붐은 온다”는 말이 밈(meme)처럼 떠돌고 있다. 일종의 바람이 담긴 말이겠지만, 실제 다시 밴드의 시대가 온다면 그 현상의 절반 이상은 라이브 클럽 덕분일 것이다. 지금 밴드 붐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 그룹인 새소년(SE SO NEON), 실리카겔(Silica GEL), 잔나비, 혁오 등의 시작엔 한결같이 라이브 클럽이 있었다. 그리고 라이브 클럽은 한결같이 늘 홍대 앞에 있었다. 홍익대학교 정문에서 상수역 방향으로 뻗어 있는 도로의 중간 지점에는 클럽 거리가 형성돼 있다. 라이브 클럽을 비롯해 댄스 클럽과 코미디 클럽 등 각각의 색채가 뚜렷한 공간들이 한데 모여 있다. 2004년 오픈한 클럽 FF는 라이브 클럽과 댄스 클럽의 구분이 명확했던 시기, 라이브 공연과 디제잉 파티를 함께 즐길 수 있어 유명해진 곳이다. 크라잉넛, 노브레인 같은 국내 최고의 밴드들이 20년 동안 한결같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 인썸니아(indieinsomnia)

동네가 응원하는 동네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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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 응원하는 동네 잡지 정지연(Jung Ji-yeon, 鄭芝姸)은 올해로 창간 15주년을 맞은 월간지 『스트리트 H(Street H)』의 편집장이다. 홍대 지역의 문화를 다루는 이 잡지는 이곳의 변화무쌍한 풍경을 촘촘히 기록해 왔다. 그녀는 지속적인 변화 속에서도 다양성, 대안적 삶, 예술성, 자생성 등으로 요약되는 ‘홍대 정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말한다. 정지연(Jung Ji-yeon, 鄭芝姸)은 잡지사와 출판사에서 15년 넘게 일하다가 동네 잡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2009년 홍대 앞 문화를 다루는 『스트리트 H』를 창간했다. 그녀는 홍대에 대해 “트렌드를 일으키고 그것을 확산시킬 수 있는 저력을 지닌 곳”이라고 말한다.  서울 상수동(上水洞)에 자리한 『스트리트 H』의 사무실에는 곳곳에 타블로이드판 잡지와 지역 관련 책자들이 잔뜩 쌓여 있다. 편집부의 오랜 역사가 보이는 듯하다. 정지연 편집장은 홍대 앞 다양한 공간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월 업데이트한 지도, 인포그래픽 포스터와 함께 무가지(無價紙) 형태로 발행한다. 이 잡지는 지난 15년 동안 음악, 미술, 디자인, 출판, 식문화 등 전 영역에 걸친 지역의 변화상을 발 빠르게 전하며, 특별한 홍보 없이도 동네 주민과 상점 주인들이 자발적으로 찾아 읽는 장수 매체로 자리 잡았다. 30여 년 전,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의 동네였던 홍대 앞은 2010년대부터 젠트리피케이션과 상업화의 물결에 휩쓸리며 성장과 쇠퇴를 거듭하고 있다. 이 과정을 오롯이 기록해 온 『스트리트 H』는 홍대 지역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유행의 속도가 빠른 서울에서 동네 잡지를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스트리트 H』는 광고 기반의 상업 잡지가 아니다. 만약 클라이언트나 기관의 보조금으로 운영되었다면, 지원이 사라지는 순간 쉽게 동력을 잃었을 것이다. 창간 10주년을 넘기면서 지역과 관계가 한층 끈끈해진 이유도 있다. 주민들이 지역 내 소식을 먼저 알려주기도 하고, 동네의 중요한 사안에 대해 의견이 필요할 때는 『스트리트 H』가 나서서 마이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변화를 목격해 온 사람으로서 지난 시절을 복기해 본다면? 나는 2005년부터 2010년 사이를 ‘감성 문화기’라고 정의한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성행했던 인디밴드 열풍이 잦아들고, 통기타 들고 노래하는 어쿠스틱 뮤지션들이 다수 등장한 시기다. 원목 느낌을 살린 카페라든지 버스킹 공연 같은, 오늘날 대중문화에서 이야기하는 낭만적인 홍대 이미지가 이때 만들어졌다. 축제도 많이 열렸다. 이처럼 홍대 앞에 굵직한 문화적 흐름이 형성되던 2009년 6월, 『스트리트 H』가 창간되었다. 창간 계기는 무엇이었나? 2007년,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뉴욕에서 일 년 정도 머무르며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L 매거진(L Magazine)』, 『타임아웃(Time Out)』 같은 로컬 잡지들을 자주 뒤적였는데, 거기 실린 정보들이 참 요긴했다. 문득 한국에서 ‘홍대’를 주제로 잡지를 만들면 어떨까 싶더라. 당시 홍대 앞은 다채로운 문화가 꿈틀거릴 때여서, 이를 콘텐츠로 다루면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았다. 홍대 지역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큰 변화를 겪은 상권이다. 그 과정을 걱정스럽게 지켜봤을 것 같다. 그렇다. 2010년부터 슬슬 임대료가 올라가더니, 2013년에 관련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고 2016년쯤엔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그 여파로 홍대 지역이 예전의 동력을 잃은 면이 있다. 예술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댄스 클럽과 포장마차를 중심으로 유흥의 거리로 변모했다. 또한 작고 개성 있는 가게 대신 프랜차이즈 점포들이 많이 들어섰다. 그만큼 대중화되었다는 얘기다. 그 시기에 『스트리트 H』도 로컬 미디어들이 흔히 빠지는 딜레마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만드는 잡지가 본의 아니게 젠트리피케이션에 일조할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연남동(延南洞) 특집’, ‘망원동(望遠洞) 특집’처럼 종종 특정 동네를 앞세운 특별판을 발행했다. 그러나 고민이 깊어지면서 지역을 섹션화하는 기사는 더는 쓰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SNS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인데, 괜히 우리까지 나서서 부동산 업자들이 솔깃해할 콘텐츠를 만들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스트리트 H』는 홍대 지역의 역사와 이곳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화 활동, 그리고 주요 거점들을 기록하기 위해 창간되었다. 로컬 콘텐츠 제작이 드물었던 시기에 첫발을 디뎠던 『스트리트 H』는 이제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동네 잡지가 됐다. 취재 장소를 선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나는 “사람이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지역을 만든다”는 말을 자주 한다. 어떤 공간이 지역에 좋은 영향을 미치려면, 그곳을 운영하는 사람이 확고한 자기 콘텐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홍대 앞에는 예전에 방송국 PD였던 이가 주인인 카페도 있었고, 라디오 작가가 운영하는 서점도 있다. 이런 재미난 이력을 가진 공간이 전에 비해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공간을 꾸려 가는 사례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로우북스(Low Books)는 국책(國策) 기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분이 경주(慶州)에 놀러 갔다가, 한 독립책방에서 영감을 받아 남동생과 함께 연 서점이다. 이곳은 북클럽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데, 이런 곳은 얼마든지 소개할 수 있다. 반면, 타지역 사업을 위한 교두보나 일종의 테스트 베드처럼 보이는 공간은 취재를 피한다. 대형 프랜차이즈 업장도 마찬가지다. 인터뷰 코너를 오래 연재해 왔다. 지금까지 만난 166명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지난해 돌아가신 박서보(Park Seo-Bo, 朴栖甫) 화백이 종종 생각난다. 선생님께서 성산동(城山洞) 근처 작업실로 출퇴근하실 때였는데, 인터뷰 요청을 드려도 답이 없기에 한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뜸 전화를 하셔서는 “나 박서보인데, 지금 와” 하시는 거다. 내가 사진 기자 핑계를 대면서 내일 가면 안 되겠냐고 하니까 “아니, 내일 오면 나 하기 싫은데”라고 응수하셨다. 그래서 혼자 카메라 들고 찾아갔다. 인터뷰도 굉장히 재미있었는데, 최근 박서보재단(PARKSEOBO FOUNDATION) 측에서 당시 인터뷰 사진을 자료로 소장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스트리트 H』는 이제 단순한 잡지를 넘어 공공 아카이브 성격을 띠게 된 것 같다. 잡지 일과 별도로 홍대 앞 아카이빙 소모임 ‘ZINC’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동안 홍대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연도별∙항목별로 정리하는 모임인데,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자료가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는 편이다. 반면에 2005년부터 지금까지 약 20년 동안의 자료는 제대로 정리된 게 거의 없다. 리서치 과정에서 특정 시기의 사건을 검색하다 보면, 내가 알고 싶었던 정보는 전부 『스트리트 H』에 있더라. 홍대 앞의 변화상을 꼼꼼하게 조사해 사진과 함께 구성한 자료이다. 이런 충실한 노력 덕분에 『스트리트 H』는 홍대 앞에 대한 정보를 가장 풍부하고 정확하게 담고 있는 아카이브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정지연 제공 현재의 홍대 지역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다. 흔히 예전만 못하다고 하는데.“홍대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한참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이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삶의 태도를 만들어 준 곳”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다. 홍대 정신이 지금도 계승되고 있다고나 할까. 예컨대 10년 넘게 홍대 앞을 지킨 카페 수카라(Sukkara)는 제철 채소나 토종 농산물로 만든 가정식 요리를 선보였던 곳이다. 지금은 비록 사라졌지만, 카페 대표가 만든 농부시장 마르쉐@(Marche@)은 서교동(西橋洞)을 비롯해 서울 곳곳에서 훌륭하게 운영되고 있다. 과거 홍대 지역에 새로운 문화를 일구었던 사람들의 정신적 자산과 인프라가 여전히 뿌리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설령 예전 같은 문화적 코어는 없을지 몰라도 새로운 실험과 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홍대 주민이라고 들었다. 끝으로 동네 자랑을 한다면?나는 경의선(京義線) 숲길(Gyeongui Line Forest Park) 끝자락에 살고 있다. 원래는 아무것도 없던 곳이었는데, 전철이 생기고 공원이 조성되면서 살기 편한 곳으로 바뀌었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45분가량 슬렁슬렁 걸어가는 코스가 참 좋다. 2000년대 들어 사람들이 굉장히 중시하게 된 라이프스타일 중 하나가 자연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흐름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동네다.

다양성이 공존하는 홍대 문화의 생태계

Features 2024 AUTUMN

다양성이 공존하는 홍대 문화의 생태계 1980년대까지만 해도 홍대 앞은 일반적인 대학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적 실험과 도전이 모색되었다. 그 과정에서 홍대 지역은 ‘홍대 문화’라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며 외부적 환경 변화에 끊임없이 대응하고 있다. 홍대 앞은 과거 기차가 지나다니던 길목이었다. 폐선된 철길은 이제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철둑길을 따라 옹기종기 들어섰던 건물들은 ‘서교365’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옛 정취를 간직한 건물들에는 개성 있는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홍대 앞에는 오랜 세월 축적된 독특한 대학 문화와 청년 문화가 있다. 이곳에서는 미술과 음악, 연극, 영화, 퍼포먼스 등 전방위적 예술 활동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또한 디자인, 만화, 출판, 광고, 패션, 디지털 콘텐츠 등 전문 업종도 밀집해 복합 문화 지역으로 성장해 왔다. 한마디로 홍대 지역은 새로운 트렌드를 선도하는 사람들의 놀이터다. 거리 곳곳에 개성 있고 자유로운 마인드를 지닌 대학생, 예술가, 클러버, 문화 기획자와 예술 경영인, 힙스터들이 활보한다. 이곳에 끊임없이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다. 홍대 앞 곳곳에서는 거리 공연을 하는 뮤지션들을 쉽게 볼 수 있다. 1990년대 이 지역이 활성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버스킹 문화가 형성됐으며, 가수의 꿈을 키우기 위해 이곳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훗날 유명해진 아티스트들도 많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범홍대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홍대’는 서울 상수동(上水洞)에 소재한 홍익(弘益)대학교 주변의 번화가를 일컫는다. 이 지역은 ‘연대(연세대학교) 앞’이나 ‘이대(이화여자대학교) 앞’ 등 여느 대학가처럼 처음에는 ‘홍대 앞’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이는 순전히 홍익대학교를 기준으로 한 지명이다. 1984년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이 개통되면서는 ‘홍대 입구’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1990년대 후반에는 서울시가 서울 전역에 ‘걷고 싶은 거리’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쳤는데, 이 시기 홍대 앞에 걷고 싶은 거리 구간이 조성되고부터는 ‘홍대 거리’라는 명칭도 생겨났다. 이렇게 홍대 앞은 세월이 흐르면서 지칭하는 말도 다양해지고, 각 명칭이 포괄하는 장소도 점차 넓어지는 추세다. 최근에는 ‘홍대 지역’이라는 말도 쓰인다. ‘홍대’가 함의하는 지리적 범위의 확장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지하철이다. 2000년도 이후 지하철 6호선, 공항철도(Airport Railroad), 경의중앙선(Gyeongui-Jungang Line)이 차례로 개통하면서 홍대 지역은 홍대입구역(2호선, 공항철도, 경의중앙선)과 합정역(2호선, 6호선), 상수역(6호선)을 잇는 서울 최대의 상권이 형성되었다. 행정 구역으로 보면 기존 서교동, 상수동, 동교동에서 인근 연남동, 연희동, 합정동, 망원동, 성산동까지 폭넓게 아우르게 되었다. 홍대 앞은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연세대학교 앞을 중심으로 하는 ‘신촌권’에 속했지만 이후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우며 성장했고, 현재는 ‘범홍대권’의 중심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사진은 어울마당로 초입으로, 홍대 상권의 출발점이다.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이 근방에 밀집해 있다. 이곳에 관광 안내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200미터 남짓 위쪽으로 걸어가면 홍익대학교 정문이 나온다. 옛 철길의 흔적 한강변에 위치한 서울화력발전소는 홍대 지역에 큰 영향을 끼친 문화적 유전자라 할 수 있다. 발전소 소재지의 지명을 따라 일반적으로 당인리(唐人里) 화력발전소라 불리는 이곳은 1930년 준공된 한국 최초의 발전 시설로, 한 해 전 개통된 당인리선(Danginri Line)을 통해 석탄과 물자를 공급받았다. 발전소 연료가 석탄에서 가스로 대체되자 더 이상 철도가 필요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1980년 당인리선이 폐선되었다. ‘서교365’는 당인리선이 남긴 흔적이다. 기차가 운행되지 않으면서 폐선된 철길은 도로와 주차장으로 바뀌었고, 일부 구간에는 2~3층짜리 낮은 건물들이 들어섰다. 부지가 협소하다 보니 2~5미터 폭의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상이 연출되었다. 약 200미터가량 가늘고 길게 이어진 이 건물군이 서교365이다. 건물들이 서교동 365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어 이런 명칭이 붙었다. 서교365는 주변의 말쑥한 고층 건물들과 대조를 이룬다. 이 허름한 건물들을 둘러싸고 철거 논란이 지속되고 있지만, 옛 자취를 소중히 여기는 인근 상인들과 건축가들의 노력으로 아직까지는 보존되고 있다. 개성 있는 식당과 선술집, 가난한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많은 데다가 독특한 경관이 지닌 매력이 한몫했을 것이다. 당인리선이 지나갔던 길은 무허가 건물들이 헐리고 고급 카페와 술집, 음식점들이 들어서면서 대규모 상권으로 변모했고 홍대 지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홍대입구역 7번 출구부터 상수역 방향으로 약 2㎞가량 뻗어 있는 이 길의 현재 공식 도로명은 ‘어울마당로’이다. 지난해에 마포구청이 이 길을 관광 특화 거리로 재정비하면서 ‘레드 로드(red road)’라는 이름을 새롭게 붙였다. 당인리 화력발전소는 건축가 조민석(Minsuk Cho)이 이끄는 매스스터디스(Mass Studies)의 설계에 따라 현재 리모델링 중인데, 2026년 전시실과 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경의선숲길은 일반적인 공원과 달리 도심을 가로지르며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16년 옛 철길에 조성되었으며, 서울의 대표적 산책로이자 휴식처로서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 마포구청 홍대 문화의 출발 인디와 대안, 언더그라운드로 요약되는 홍대 문화는 1955년 홍익대학교의 상수동 이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홍익대 미대의 존재는 1970-80년대 이 지역의 정체성을 결정 지은 원동력이다. 이 시기에 작업실, 미술 학원, 공방, 미술 전문 서점, 스튜디오, 갤러리 등이 이곳에 자리 잡았다. 미술 학원은 미대생들의 작업실에서 시작하여 학원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1986년경 홍익대에서 산울림 소극장까지 이어진 길 양쪽으로 입시 전문 대형 미술 학원 거리가 생겨났다. 무수히 들어선 미술 학원들은 홍대 앞 특유의 풍경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2013년 이후 홍익대 미대가 실기 시험을 폐지하면서 미술 학원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홍대 지역이 사회적 관심을 받으며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 포스트 모던 양식의 고급 카페들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문화예술인들이 드나들던 거리에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테마 카페와 복합 갤러리가 등장하면서 자유롭고 세련된 이미지가 부각되었다. 예술가들이 직접 운영하는 카페들도 늘어났다. 홍대 정문에서 극동방송국과 주차장 거리에 이르는 길 주변에 카페 골목이 형성되면서 이 일대는 ‘피카소 거리’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소비 문화가 확산되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커져갔다. 1993년부터 홍익대 미대생들이 시작한 ‘거리 미술전(Street Art Exhibition)’은 홍대 문화의 정체성과 건강한 대학 문화를 지키기 위한 학생들의 대응이었다. 매년 담벼락 곳곳에 벽화 그리는 행사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 ‘벽화 거리’가 조성되었다. 홍대 클럽 거리에는 1990년대 중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이곳에서 일어난 인디 뮤직 신을 주도했던 라이브 클럽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클럽 FF도 그중 하나. ‘록 음악 맛집’으로 통하는 이곳은 크라잉넛(Crying Nut)이나 서울전자음악단(Seoul Electric Band) 같은 록 밴드들이 무대에 선다. 획일성에 대한 저항 홍대 지역에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라이브 클럽들이 생겨나며 지역 문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클럽 문화는 기존에 형성돼 있던 미술 문화와 새롭게 나타난 소비 문화가 결합하며 탄생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2년에 생긴 카페 ‘발전소’다. 이곳은 음악 작업을 하던 가게 주인의 작업실에서 출발해 바(bar)로 발전했으며, 댄스 클럽의 원형이 되었다. 1994년에는 드럭(Drug)을 필두로 실험적, 도전적인 무대를 선보였던 라이브 클럽들이 성행했다. 클럽은 대안적인 놀이 문화를 찾던 이들의 해방구였다. 2000년대부터는 클럽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들 클럽을 중심으로 다양한 축제들이 개최되었다. 이렇게 복합적인 문화 지역으로 성장한 홍대 앞은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정부가 지원하는 공공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면서 문화 관광 지역으로 그 정체성이 전환되었다. 이로써 홍대 문화는 소수의 마니아들이 즐기던 문화에서 대중화, 관광 상품화되는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도 나타났다. 임대료 상승으로 폐관 위기에 처한 소극장이나 철거 위기에 놓인 공연장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프린지페스티벌, 한국실험예술제, 와우북페스티벌 등 다양한 분야의 언더그라운드 축제들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대 자본이 유입되면서 많은 문화 공간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홍대 문화 형성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주체들이 지속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에도 홍대 문화는 상업적 획일화에 저항하며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문화적 저력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문화 생산자들이 끊임없이 홍대 문화 생태계를 다층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들로 인해 ‘홍대다움’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도시를 숨 쉬게 하는 공원

Features 2024 SUMMER

도시를 숨 쉬게 하는 공원 서울숲은 성수동에 또 다른 표정을 만들어 내는 공간이다. 2005년 개장한 이곳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조성한 국내 최초의 공원이다. 35만 평 부지에 문화예술공원, 체험학습원, 생태숲, 습지생태원 등 네 가지 특색 있는 테마로 구성되었으며, 지역의 생태 및 지리적 특성이 잘 반영되어 도심 속 대표적 휴식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한강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조성된 서울숲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삼각형 모양이다.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문화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도심 속 여유로운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다. ⓒ 서울연구원(The Seoul Institute) 서울숲은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강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에 조성되어 있다. 서울숲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쪽 꼭짓점이 꼬부라진 삼각형 모양이다. 모서리를 따라 흐르는 녹지띠가 주변을 감싼 도로의 소음과 오염 물질을 막아주겠다는 듯 높게 서 있다. 그 삼각 녹지의 내부는 밀도가 각기 다른 숲이 채운다. 도심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간선도로, 강과 바투 붙은 지리적 특성에서 엿볼 수 있듯 서울숲 부지는 과거부터 활용도가 높은 땅이었다. 도시형 공원 서울숲이 자리한 부지는 조선(1392~1910) 시대에는 왕실의 사냥터였다. 1908년에는 국내 최초로 정수장이 설치되어 주민들에게 수돗물을 공급했다. 이후 골프장, 경마장, 체육공원 등 여러 용도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1990년대 들어 이곳을 주거 및 업무 지역으로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공원이 부족한 서울 동북부 지역의 시민들에게 도심 속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계획이 실행되었다. 2003년, 서울숲 조성을 위한 설계 공모가 시작됐고, 2005년 6월 마침내 35만 평 규모의 서울숲이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서울숲의 봄 풍경. 지천에 피어 있는 튤립들이 방문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 서울시 서울숲은 일반적 형태의 근린공원을 넘어 뉴욕 센트럴파크나 런던 하이드파크처럼 서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도시 숲을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당시 서울숲 설계 공모에 당선된 동심원(同心圓)조경기술사사무소(Dongsimwon Landscape Design & Constructions)는 이곳이 자연의 영역을 넘어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 장소가 되기를 바랐다. 그 결과 문화예술공원, 자연생태숲, 자연체험학습원, 습지생태원 등 네 개 테마 공간과 한강으로 이어지는 수변공원이 조성됐다. 휴식의 공간 대중교통을 이용해 서울숲에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지하철을 타는 것이다. 서울숲역 4번 출구로 빠져나와 색색의 컨테이너로 구성된 공간 플랫폼 언더스탠드 에비뉴(Understand Avenue) 사이로 들어서면, 서울숲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문화예술공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본래 경마장이었던 이곳은 방문객들이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됐다. 초입 광장에는 경마장을 기념하는 군마상이 있는데, 역동적인 말의 모습이 뒤편의 활력 넘치는 바닥분수와 잘 어우러진다. 공원 깊숙한 곳에 물놀이터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만, 이 바닥분수는 입구와 가까워서인지 여름철 어린아이들의 물놀이 공간으로 사랑받는다. 날이 더워지면 분수 주위로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이 돗자리를 펴고 둘러앉는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되면 물놀이객을 위한 간이 탈의실이 설치되기도 한다. 반면 바닥분수 뒤편으로 뻗은 거울연못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즐거움을 준다. 수심이 얕은 이 연못에는 주변 나무들이 수면에 비쳐 깊은 산중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목마른 새들이 잠시 내려앉아 물을 마시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서울숲 초입에 위치한 거울연못은 수심 3㎝의 얕은 연못으로,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늘어선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을 비롯해 주변 풍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담아낸다. ⓒ 서울연구원 나무의 행렬이 흐트러지고 일직선이었던 길이 부드럽게 휘어지기 시작하면 넓은 녹지가 나타난다. 가족마당이라 불리는 이곳은 단풍나무, 메타세쿼이아 등 키 큰 수목들이 길을 따라 하늘로 쭉쭉 뻗은 산책로에 둘러싸여 있다. 시원하게 펼쳐진 넓은 잔디밭은 도시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포장해 온 음식을 펼쳐놓고 먹는가 하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낮잠을 즐기고, 자전거를 타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 시간을 보낸다. 밤이면 미니 스크린을 펼쳐놓고 영화를 보는 사람도 있다. 서울숲에서 강아지들이 가장 많이 뛰노는 공간이기도 하다. 재즈 페스티벌 같은 큰 축제도 주로 이곳에서 열린다. 거울연못 대각선 방향에 자리한 야외 무대에서 시민들이 공연을 즐기고 있다. 이곳은 탁 트인 분지 형태의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어 문화예술 행사들이 자주 진행된다. ⓒ 윤준환(Yoon Joon-hwan, 尹晙歡) 보존을 위한 노력 자연생태숲은 서울숲의 가장 깊숙한 안쪽 공간에 자리한다. 공원을 설계한 조경가는 서울 근교의 울창한 숲을 본떠 비슷한 수종을 심고 밀도를 조정해 야생의 자연에 가까운 공간을 만들어 냈다. 서울숲 규모가 꽤 크다 보니 입구 부근만 둘러보고 돌아가기 일쑤인데, 자연생태숲에 와본 이들은 서울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 펼쳐져 있는 데 감탄하며 거듭 방문하곤 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잡아끄는 것은 바로 꽃사슴 방사장이다. 긴 철조망 너머의 보호 구역에는 꽃사슴 십여 마리가 자유롭게 뛰놀며 살고 있다. 꽃사슴을 더 자세히 보고 싶은 사람들은 서울숲의 공중을 가로질러 한강 고수부지로 연결되는 전망 보행교에 오른다. 사슴은 물론 오랜 시간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어 원시림처럼 울창해진 숲을 볼 수 있다. 주변으로는 벚꽃이 많이 심겨 있어 꽃이 피는 봄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다리를 건넌다. 이 다리가 시작되는 지점은 서울숲에서 가장 높은 공간에 위치해 있는데 ‘바람의 언덕’이라 불리는 이곳의 진가는 가을에 확인할 수 있다. 가득 자란 억새들이 미풍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계절의 고즈넉함을 느끼게 한다. 한편 삼각형 모양 부지의 또 다른 모퉁이에는 기존 유수지를 활용해 만든 습지생태원이 있다. 이 유수지는 과거 홍수를 조절하는 기능을 맡았다. 폭우가 내려 한강이 범람하면 유수지가 그 빗물을 흡수해 큰 수해를 방지하며 방파제 역할을 해왔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유수지 시설 중 몇몇 기둥을 남겨두었는데, 여름이면 기둥을 타고 오른 덩굴이 장관을 연출한다. 습지생태원은 기존 유수지의 지형을 최대한 살리고 목재 관찰 데크를 놓아 새와 습지 식물을 관찰하게 해놓았다. 그런가 하면 아이들의 생태 학습을 위한 체험학습원은 폐쇄된 정수장 시설을 개조해 조성되었다. 특히 침전조 구조물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활용한 갤러리 정원은 매우 아름다워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에서 식물이 자라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벽체와 더불어 보존된 U형 수로에 흙을 채우고 덩굴 식물을 심은 덕분인데, 여름이면 잎이 피어나 넉넉한 그늘을 드리운다. 서울숲의 여름 풍경. ⓒ 서울시 시민 참여 공원 멀리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숲과 공원은 분명히 다르다. 숲이 그대로의 자연이라면, 공원은 자연은 물론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는 녹지다. 사람들의 일상, 그리고 주변의 문화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하지 못하는 공원은 도시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 서울숲은 그러한 면에서 주목할 지점이 많은 공원이다. 서울숲은 시민들이 계획, 조성, 관리 및 운영 전 과정에 참여한 국내 최초의 공원이다. 계획 과정에서는 워크숍 및 공청회 등을 통해 전문가들과 각계각층의 의견을 반영했으며, 조성 과정에서는 시민들이 기금을 모으고 수만 그루의 나무들을 직접 심었다. 그 중심에는 2003년 출범한 서울그린트러스트(Seoul Green Trust)가 있다. 이곳은 시민 참여를 바탕으로 서울시 생활권 녹지를 확대 및 보존하고 쾌적한 도시 환경을 만드는 비영리 재단법인이다. 서울그린트러스트는 개장 당시부터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서울숲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2016년부터 2021년까지는 서울숲을 수탁 운영하기도 했다. 이 기관이 서울숲에서 벌인 다양한 활동은 시민 참여를 통한 공원 관리의 지속 가능성 확보, 주민 참여 프로그램의 내용과 취지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2020 아시아도시경관상 본상을 받았다. 민간 공원 경영의 첫 모델로 그 성과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서울숲의 영향력은 공원 내에서 그치지 않는다. 공원이 위치해 있는 성수동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여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어우러지는 공공의 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공원을 만들기 위해 이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는 한편 소셜벤처가 밀집해 있는 인근의 특징을 고려해 체인지 메이커들이 서울숲을 즐겁게 향유할 기회도 마련했다. 서울숲은 수제화 제작 등 경공업이 몰려 있어 낙후 지대로 불리던 성수동의 표정을 변화시키며, ‘성수동에 가고 싶은 또 다른 이유’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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