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Arts & Culture

지금 대중문화가 무속을 다루는 방식

Arts & Culture 2025 WINTER

지금 대중문화가 무속을 다루는 방식 최근 들어 한국 무속을 모티프로 삼은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부쩍 늘었다.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이고, 예능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또한 무속인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상투적 묘사에서 탈피해 새로운 시각으로 이들을 그려낸다. 무속을 매개로 한 한국식 오컬트는 무속인들이 신의 중재자로서 귀신을 달래고 위로한다는 점에서 서구의 오컬트 장르와 차별화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는 이러한 한국 무속의 특성을 잘 담아내며, 한국식 오컬트가 하나의 장르적 계보를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는 ‘K-팝’과 ‘데몬 헌터스’의 결합이 절묘한 애니메이션이다. 일반적으로서구의 오컬트 장르에서 데몬 헌터스는 구마 사제를 가리키지만, 이 작품에는 무당이 등장한다. 각자의 신을 섬기는 무당은 무속 의식인 굿을 진행하는 동안 접신하고 신탁을 전달한다. 선악 구도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구마 사제는 악령들과 싸우고 이를 물리치는 존재로, 어찌 보면 ‘파이터’에 가깝다. 하지만 무당은 악령들(한국에서는 원귀들)과 싸우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고 맺힌 한을 풀어줌으로써 응당 가야 할 저승으로 고이 보내준다. 그런 점에서 무당은 파이터라기보다는 ‘카운슬러’에 가깝다. 영매자인 무당의 역할이 구마 사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이러한 차이점은 사후 세계와 귀신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관점이 서구와 다른 데서 연유한다. 한국에서는 귀신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에는 무당의 후예인 헌트릭스 멤버들이 악령들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주인공 루미가 진우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이 싸움은 대결보다는 구원에 가깝다. 루미는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혼을 팔아 악령이 된 진우를 물리치는 게 아니라 구원해 주려 애쓴다. 루미의 태도는 무당의 본질적 역할과 맞닿아 있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의 헌트릭스가 무대에서 팬들과 교감하는 과정은 무당이 굿을 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이 의식은 전통적으로 춤과 노래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로 그 점에서 굿은 K-팝 아티스트들의 공연과 유사하다. 무당들이 굿으로 원혼을 위로해 주는 것처럼 K-팝 아티스트들은 춤과 노래로 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 국내 대중문화에서 무당이 긍정적 역할로 묘사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무당은 대개 ‘신병’이라 불리는 원인 모를 병을 앓다가 내림굿을 받고 신을 받아들이는 혹독한 운명을 지녔다. 1970~8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는 무당의 영적인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미신으로 치부했다. 자연히 TV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무당도 대개는 무섭고 이질적인 존재로 그려졌다. 하지만 최근 K-콘텐츠 속에 나타나는 무당들은 훨씬 밝아졌고 당당해졌다. 영화 에 등장하는 무당 화림(김고은)은 가죽 롱코트를 휘날리며 귀신과 맞서는 스타일리시한 모습을 선보인다. 화림 같은 젊은 세대 무당은 올해 상반기 방영된 SBS의 이나 tvN의 같은 TV 드라마에도 등장한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의 여주인공 여리(김지연)는 첫사랑 윤갑(육성재)의 몸에 빙의한 이무기 강철과 함께 왕가의 저주를 풀어내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동안은 서사적 필요에 의해 조연이나 단역으로 등장했던 무당이 판타지 액션과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올라선 것이다. 이는 현재 무당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말해준다. 이런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잘 보여주는 작품이 다.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이 작품은 대본집이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을 정도로 화제성이 높았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성아(조이현)는 ‘천지선녀’로 불리는 고등학생 무당이며, 저주받은 존재인 첫사랑 견우(추영우)를 사랑의 힘으로 지켜내는 수호천사 같은 역할로 나온다. 견우를 구하기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당이 지니는 ‘힐러’로서의 면모를 강조한다. 의 루미와 유사한 설정이다. 국내 OTT 플랫폼 티빙의 오리지널 시리즈 은 귀신 현상을 겪은 제보자들과 무속인들을 밀착 취재해 귀신과 무속이라는 주제를 다각도로 탐구한 다큐멘터리다.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는 점에서 호평받았다. 티빙 제공 새로운 접근 방식 젊은 세대 무당이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 시대적 변화는 라는 매우 독특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탄생시켰다. 일정 기간 한 집에 머무르고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의 인연을 찾아간다는 포맷은 여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무당과 점술가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자신의 영적 능력을 토대로 연애 상대를 선택한다는 신선한 발상은 시청자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성 출연자들이 태어난 일시만 보고, 그중에서 운명의 상대를 선택하는 오프닝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들은 자신이 모시는 신의 뜻이나 점괘를 통해 알게 된 운명의 상대와 자신이 본능적으로 끌리는 상대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다른 연애 프로그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재미를 제공했다. 출연자들의 수려한 외모와 언변 또한 젊은 세대 무당에게 호감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 프로그램은 2024년 첫 번째 시즌이 방영된 후 인기에 힘입어 올해 초 두 번째 시즌이 전파를 탔다. 장르적 분화 그렇다면 최근 몇 년 사이 무속인들이 호감의 대상이 된 이유는 뭘까. 우선 무속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라진 데 있다. 한국인들은 이제 무속을 음습한 미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카운슬링으로 여기게 됐다. 한마디로 과거에 비해 무속을 훨씬 캐주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 사람들은 무속인이나 점술사들을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찾는다. 도시 변두리의 후미진 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던 무당집과 점집도 이제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에 자리를 잡은 경우가 많다. 한편 젊은 세대가 무속에 호감을 갖는 이유로,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꿈을 펼치기 어려워진 사회 현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은 이전 세대들이 젊은 시절 느꼈던 것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무속을 통해 보다 직관적인 조언을 듣고 그를 통해 위안을 느낀다. 무속에 관한 젊은 세대의 관심과 호감은 이 소재가 대중문화에서 다양한 장르로 분화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이제 무속을 매개로 한 콘텐츠들은 사극, 로맨스, 액션 판타지로 그 영역을 넓혔다. 또한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에 더해 같은 애니메이션, 같은 다큐멘터리의 소재로도 등장한다. 한국의 전통 무속 신앙이 지닌 문화적 요소들이 더욱 다채로운 형태로 새롭게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구아진의 네이버 웹툰 는 절대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무당들의 이야기다. 도서출판 들녘에서 단행본으로도 출간됐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아 2022년 대한민국콘텐츠대상의 대통령상을 비롯해 다수의 상을 받았다. ⓒ 구아진, 투니드 엔터테인먼트, 도서출판 들녘

합성의 스토리텔러, 김아영

Arts & Culture 2025 WINTER

합성의 스토리텔러, 김아영 김아영은 영상,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 등을 아우르며 다양한 서사를 연결하고 확장하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작가는 현실과 허구, 기록과 상상을 교차시켜 불가항력에 저항하거나 그로부터 빗나가고 이탈하는 존재와 사건들을 탐구한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2월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개최된 < ACC 미래상 2024: 김아영 -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 >. 근대화 이후 사라져가는 여러 문화권의 전통적 우주론과 시간 체계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혁신적인 미래 가치와 가능성을 확장한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ACC 미래상’을 받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사진 홍철기 김아영의 작업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지난해 내가 목격한 광경을 떠올려 본다. 2024년 9월 7일, 나는 제15회 광주비엔날레를 취재하기 위해 외신 기자들과 프레스 투어 버스를 타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향했다. 그날 전시관의 중심에는 대형 스크린 세 개가 삼각형 구조를 이루며 공중에 들린 채 설치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지난해 ‘ACC 미래상’을 수상한 김아영의 신작 가 세 개 채널 영상으로 상영 중이었다. 나는 관람객을 위해 설치된 스크린 앞 슬로프에 누워, 영화 를 떠올리게 하는 테크노 오리엔탈리즘적 도시에서 사이버펑크의 전사 같은 여성 라이더 둘이 함께 질주하고, 싸우고, 뒤엉키는 장면을 보며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참 지나 버스로 다시 돌아왔을 때 외신 기자들도 “김아영이 누구냐?”며 서로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어떤 기자는 그 작품을 두고 “페미니즘적 자아 혹은 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사회 소외 계층으로서 라이더들을 영웅화하는 계급 투쟁적 이야기”라고도 말했다. 바로 그 전시에서 김아영의 작품을 접한 외신 기자들과 해외 미술 관계자들이 그녀가 지금의 국제적 명성을 얻는 데 직간접적으로 일조했음은 자명하다. 이후 작가는 2025년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수상했고,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과 뉴욕현대미술관 PS1의 개인전 초대를 받았으며, 홍콩 M+ 뮤지엄의 파사드 커미션 작업을 의뢰받았다. 그녀의 작품이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의 마음을 짧은 시간에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나는 김아영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사변적 픽션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김아영은 자본주의나 이데올로기 같은 거시적 서사를 고고학, 미래주의, SF적 상상력이 가득한 중첩적 서사로 재구성한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의 독특한 작업 세계에 최근 국내외 미술계가 주목하고 있다. 2023년 골든 니카상, 2025년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수상했다. 에르메스재단 제공, 사진 김상태 딜리버리 댄서의 사변적 세계 (2022), (2022), (2024), (2024)로 이어지는 ‘딜리버리 댄서’ 연작은 작가가 마치 전도사처럼 주창해 온 사변적 픽션의 작동 원리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시다. 이 연작은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비롯되었다. 김아영은 당시 여러 앱으로 배달 음식을 시키면서도 막상 그 음식을 배달하는 이들과 직접 만나 본 적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누군가의 저녁 식사를 나르는 그들은 누구일까? 김아영의 사변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철저하게 리서치 중심적인 그녀의 사변은 취재를 통해 획득한 인식과 세상사의 원리를 나름의 방식으로 유추하거나 재정의하고, 이를 다른 사건이나 상황에 적용해 보는 실험의 과정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 방정식을 도출한 뒤, 그 식을 활용해 야구 선수가 힘껏 던진 공의 낙하지점을 유추하는 과정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더 나아가 상수에 변화를 준 인력의 공식을 대입해 화성이나 달 세계의 중력을 가상의 영상 이미지로 표현하는 단계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김아영은 ‘Monster’의 애너그램(철자의 순서를 바꾸는 것)인 ‘에른스트 모(Ernst Mo)’라는 여성 라이더를 창조하고,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라이딩을 ‘댄싱’으로 표현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묻는다. “만약 통행인이 사라진 세상에서 무언가를 정해진 시간 안에 배달하기 위해 빛의 속도로 달리는 ‘딜리버리 댄서’가 있다면, 그녀에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에른스트 모는 빛의 속도로 달리기 위해 접히거나 끊어진,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공간을 달릴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 곳을 달리다 보면 결국 다른 우주와 섞여버릴 것이며, 그렇게 두 우주가 만나는 지점(작품에서는 이를 ‘누수 지점’이라 말한다)에서 도플갱어와 맞닥뜨릴 것이다. 작품에서 에른스트 모는 그렇게 다른 우주의 자아인 ‘엔 스톰(En storm)’을 만난다. 그녀가 나타날 때면, 즉 두 세계가 교차할 때면 시간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라 느리게 흐르고, 급기야 느리게 흐른 시간 탓에 배달 콜을 제때 수행해 내지 못한 에른스트 모의 등급이 점점 낮아져 새로운 임무를 배정받지 못하기에 이른다. 이 매력적인 이야기는 마치 파사칼리아처럼 악장을 달리하며 변주한다. 에선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이 가상의 도시 ‘노바리아’에서 ‘우연히 소멸된 것으로 알려진 과거의 시간관이 담긴 유물들’을 배달하며,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24시간 365일’이란 서구의 시간관에 질문을 던진다. 에선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이 시간을 되찾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들은 ‘사막과 도시와 차원이 교차하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시간을 운반하고, 미래에서 온 주시관들의 눈을 피하고 싸운다. 변주는 애니메이션과 실사 그리고 퍼포먼스를 아우르며 계속될 것이다.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이 만나 서로 대립하지 않고 생존하는 세계가 나타날 때까지. 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부상한 플랫폼 노동의 문제를 그려낸 작품이다. 디지털 기술과 복합적인 스토리텔링을 통해 작가의 주제 의식을 성공적으로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가 제공 사변의 시작: 다공성 계곡 사변의 변주를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은 ‘다공성 계곡’ 연작이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에서 다공성 계곡은 ‘플롯 구멍’이 많은 계곡, 즉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들이 살아가는 곳을 뜻한다. 이 개연성 떨어지는 가상의 공간에 사는 ‘페트라 제네시트릭스’는 암벽 밖으로 튀어나온 거대하고 기이한 암석 결정에 깃들어 사는 광물이자 데이터 클러스터다. 어느 날 다공성 계곡의 폭파로, 페트라는 다른 암석 플랫폼으로 이주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면서 당황스러운 실질적 문제에 직면한다. 이 이야기 역시 변주한다.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은 페트라가 크립토밸리라 불리는 섬의 해안가에서 눈을 뜨며 시작한다. 이 섬에서 페트라는 이주 당국에 붙들려 바이러스 취급을 당하고, 이주 심사에서 떨어져 ‘스마트 그리드’라는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어는 순간 환청과 환영을 듣고 그에 따라 탈출을 감행한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따라 동굴로 들어간 페트라는 그곳에서 ‘어머니 바위’라는 초월적 존재를 만나고, 이 어머니 바위와 결합한다. 마치 신화 혹은 우화와도 같은 이 일련의 이야기들은 감상자가 이주, 난민, 국가, 경계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김아영은 2025년 11월 뉴욕 캐년에서 열린 ‘퍼포마 비엔날레 2025’에서 퍼포먼스 신작 〈 Body^n 〉을 공개했다. 도플갱어의 개념과 신체 재현 문제를 탐구한 작품이다. 으로 에미상을 수상한 바 있는 김차이 무술 감독과 스턴트 배우들의 동작을 실시간 라이브 모션 캡처를 통해 디지털화했다. 사진은 < Body^n >의 프로덕션 스틸. 작가 제공 석유, 기억 그리고 기계 김아영의 작품 목록에서 가장 무쌍하게 변모하는 또 다른 주제는 ‘석유’다. 그리고 이 주제는 ‘리서치 프로젝트’라는 작가의 또 다른 작업 양식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석유에 대한 관심은 작가의 가족사에서 시작한다. 한양건설 부장이었던 작가의 부친은 1979년 작가가 태어난 지 세 달 만에 쿠웨이트로 파견되었다가 1982년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1984년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 걸프전이 발발한 1991년에 돌아왔으며, 그 기간 매년 두 번씩 휴가로 한국을 찾았다. 작가는 어린 시절 느꼈던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아버지가 선물로 들고 온 신문물이 가져다준 기쁨을 기억한다. 1979년 OPEC 중동 국가들이 석유 수출을 제한하며 제2차 석유 파동이 벌어졌으며, 외화를 확보해 유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 주도로 국내 건설 업체들이 중동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작가가 알게 된 건 성장한 후다. 석유 자본의 전 지구적 이동이 대한민국에 사는 한 어린아이, 즉 자신의 성장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작가 자신을 매혹했다. 이것이 ‘석유 자본의 이동과 중동 특수에 관한 리서치 프로젝트’의 발단이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첫 작품은 연작으로, ‘제페트’는 역청을 뜻한다. 글로 읽어도, 영상으로 봐도 무척이나 난해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석유와 중동 특수에 대한 방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대본을 쓰고, 이 대본을 ‘논리 정연하면서도 혼돈스러운 규칙’을 통해 재생성할 기계 장치(컴퓨팅 장치)를 만든다. 참고로 작가는 이 장치에 ‘기계 장치의 신’을 뜻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극작 용어를 이름으로 붙였다. 작가는 자신이 쓴 대본과 이 대본을 기계 장치에 넣어 얻은 결과물에 각각 기계 알고리듬을 통해 만들어진 음률과 인간 작곡가의 음률을 붙이고 이를 합창 형식으로 공연했다. 최근작 ‹알 마터 플롯 1991›(2025)은 석유에 관한 이 방대한 리서치 프로젝트의 집약판이다. 작가는 아버지가 다니던 한양건설이 1979년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대규모 거주 단지 ‘알 마터 아파트’를 추적하며, 석유 자본의 형성과 이동의 거시사가 작가의 삶과 그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미시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사한다. 현장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주변인들이 그 호화 주택 단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들을 수집해 생성형 AI와 CGI, 라이다 스캐닝 등의 새로운 기술들을 활용해 미래적 에세이 필름 형태로 완성했다. 김아영의 초기작은 몽타주 사진 작업이었다. 이후 자신의 변화에 관해 김아영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최근에는 몽타주를 포함하는 상위 개념으로 ‘합성’이라는 용어를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매끈한 합성이 아니라, 비뚤비뚤하고 거칠거칠한 이음매가 모두 드러나는 합성이요.” 김아영이 현실과 픽션을 거칠게 섞은 모습은 마치 관절이 다 드러난 사이보그 같다. 올해 3월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개인전 오프닝에서 작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앞으로는 ‘딜리버리 댄서’와 리서치 중심의 작품들을 투 트랙으로 진행하려 한다”고 말했다. ‘딜리버리 댄서’의 사변적 픽션이 현실의 핍진성을 떨쳐버리고, 그 작동 원리만을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인공 팔을 떠올리게 하는 반면, 리서치 프로젝트의 방법론은 작가의 해석이 담긴 현실 이야기를 매우 핍진하게 담아낸다는 점에서 육체적이다. 흡사 전자 의수를 단 사이보그, 강력한 기계 팔을 가진 아시안 퓨처리즘적 모습의 김아영이 합성의 이야기꾼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알 마터 플롯 1991〉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중 하나인 알 마터 주택단지가 배경이다. 개인적 경험을 근현대사로 확장한 작품이며, 석유를 매개로 경제 성장과 지정학적 분쟁 등 다층적 서사가 담겼다. 2025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개인전 에서 공개됐다. 작가 제공

공공 너머 미래를 향한 건축, 건축가 전숙희

Arts & Culture 2025 WINTER

공공 너머 미래를 향한 건축, 건축가 전숙희 건축가 전숙희는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건축이라는 매개를 통해 동시대의 주요 질문들을 탐구하며 대안을 제시해 왔다. 그녀에게 건축은 단순히 조형물을 구축하는 행위를 넘어, 사회적 맥락과 인간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실천적 사유를 담아내는 그릇과 같다. 경상남도 남해에는 농업용 창고로 사용하기 위해 화강암을 쌓아 만든 1920년대 건물들이 군데군데 있다. 전숙희 건축가는 한 도예가의 요청으로 그중 하나를 도예 공방으로 리모델링했다. 외관은 그대로 보존하되 아름다운 남해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도록 지붕에 전망대를 설치했다. ⓒ 노경 전숙희는 건축이 개인의 공간을 넘어 사회 전체에 기여하는 공공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신념을 꾸준히 피력해 왔다. 그녀는 건축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건축 교육을 받았다. 특히 이화여대 건축학과 첫 입학생이었던 그녀는 선배들의 부재 속에서 자립적으로 모든 것을 찾아 해결해야 했던 경험이 독립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프린스턴 대학원에서는 소수 정예 교육 시스템 속에서 교수진과 학생들 간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깊이 있는 탐구를 할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건축을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접근하게 된 토대가 되었다. 장영철 건축가와 함께 2008년 와이즈 건축사사무소를 공동 설립한 이래, 그녀의 작업들은 이러한 비판적이고 탐구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건축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95%의 건축 전숙희는 건축이 단순히 사적 소유물의 가치를 넘어, 사회 전체에 기여하는 공공성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녀에게 건축은 도시의 일부로서, 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사회적 자산이다. 따라서 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할 때 주변 환경과 조화로운지 고려하고, 지역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녀는 이러한 관점에서 ‘95%의 건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기존의 민간 영역에 집중된 5%의 특별한 건축을 넘어, 나머지 대다수의 건축물이 공공적 가치를 실현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은 아산나눔재단 프로젝트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녀는 비영리 재단의 사옥인 이 건물에서 ‘공공에 문턱이 낮은 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경험은 사적 소유물이라 할지라도 도시와 사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그리고 건축가로서 이러한 공공적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이후 참여했던 노무현시민센터 프로젝트는 이러한 철학을 실현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그녀는 조선 시대 궁궐인 창덕궁 인근이라는 특수한 장소성과 북촌 지구 단위 계획의 제약, 시민들의 의견 수렴 과정 등 여러 가지 큰 난관 속에서도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경험은 건축가가 단순히 도면을 그리는 것을 넘어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는 주체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노무현시민센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동시에 시민들을 위한 공공 공간으로 설계된 곳이다. 창덕궁 바로 옆에 위치한 이곳은 과거 나지막한 구릉지였는데,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건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바닥과 벽, 지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곡선을 활용했다. ⓒ 노경 위안의 장소 전숙희는 건축가가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또한 그것을 잘 활용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건축가는 나무를 키우는 사람과 다르지 않으며, 나무가 숲을 이루기도 하고 정원이나 산책로가 되기도 하듯 결국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 건축가의 소임이라고 믿는다. ⓒ 이민희 전숙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지쳐 있으며, 위안과 휴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녀는 개인이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소통하고 교류하며 정서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낯선 이들과 공존하는 공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 역사적 의미를 내포한 공간 등이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녀는 절두산 순교 성지를 예로 들며,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선 비종교적 차원의 정서적 공간으로서 이곳이 많은 사람에게 휴식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언급한다. 또한 스웨덴 우드랜드 화장터를 방문했던 경험은 그녀에게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건축적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획일적인 현대의 장례 문화와 달리, 죽음을 엄숙하게 성찰하고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공간은 단순히 기능적 측면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슬픔을 치유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이처럼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건축적으로 섬세하게 다루는 것이 건축가의 중요한 역할임을 인식하고, 공간이 주는 위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피겨앤그라운드는 서울 강남 가로수길의 30여 년이 넘은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한 작업물이다. 폐쇄적이었던 저층부는 덜어내고, 상층부의 공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입면을 구성하는 벽돌 마감의 수평 띠는 발코니와 외부 계단인데, 각 층을 연결해 ‘길’을 형상화했다. ⓒ 노경 건축가의 시각과 과제 서울 성산동 주택가 깊숙이 자리 잡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던, 과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을 재현한 공간이다. 큼직한 안내판이나 근사한 로비 대신 작은 문 하나만 외부로 열어둔 채 가이드가 방문자들과 동행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선으로 설계됐다. ⓒ 김두호 전숙희는 기후 변화와 인구 감소라는 두 가지 시대적 과제에 주목하며, 건축이 이러한 문제 해결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그녀는 인구 감소로 인해 발생하는 도시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특히 한국 사회의 고유한 인구 구조적 특징에 대한 건축적 대응을 모색한다. 그녀는 서울의 인구가 800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인구학적 예측을 제시하며, 이에 따른 도시 공간의 재편과 기존 인프라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런가 하면 고령화 사회에 대비한 건축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노인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는 주거 환경 조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기술적인 해결을 넘어 사회 구조적 변화가 건축에 미치는 영향까지 통찰한다. 구도심의 쇠퇴와 신도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다양한 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간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건축가들이 반드시 직면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며, 그녀는 건축이 그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파주출판도시 내 자리 잡고 있는 뮤엠 사옥은 영어 교육 회사인 뮤엠교육의 부엉이 로고에서 착안해 그루터기 형태로 건물을 완성했다. 전체가 검은 벽돌로 이루어진 직사각형 형태의 건물에 율동감을 부여하기 위해 절개된 듯한 비틀린 형태의 출입구를 만들었다. ⓒ 노경 중요한 것은 소통의 능력 전숙희는 건축이 단순히 설계 능력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건축 실현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과의 긴밀한 소통과 협력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건축주, 시공사, 그리고 여러 방면에서 경험을 쌓아 온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조율하며 최적의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설계도를 그리는 작업이 전체 프로세스의 일부에 불과하며, 실제 건물이 지어지기까지의 복잡한 과정에서 소통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건축은 결국 ‘관계’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나 혼자 20%를 잘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80%를 채워줄 수 있는 ‘관계’에 의해서 건물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 같아요. ‘관계’를 절차와 시스템, 심지어는 구현되지 않은 기술까지 아우르는 복합성을 띤 개념으로 확장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는 1988년 독일에서 시작된 글로벌 전시로, 암흑 속에서 시야가 차단된 채 다른 감각들을 일깨우며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묻는 프로그램이다. 어둠속의대화 북촌 전시장은 전통 대나무 발에서 모티프를 얻은 건물 외피를 통해 이 전시의 특징을 건축적으로 구현해 냈다. ⓒ 김용관 뮤엠 사옥 프로젝트와 같은 벽돌 쌓기 작업은 그녀가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 사례다. 초기 설계 의도와 현장 상황 간 불일치, 그리고 숙련공과의 소통 부족으로 인해 발생했던 어려움은 결국 현장에서 끊임없는 대화와 협의를 통해 해결될 수 있었다. 건축이 결코 건축가 한 명의 역량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소통, 그리고 때로는 고집과 자부심이 얽힌 결과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한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공유하고 드러냄으로써 다음 세대가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선배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이는 건축계 전체의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과정이며, 건축이 단순한 기능 구현을 넘어선 사회적 역량을 발휘하는 토대가 된다. "돌이켜보면, 건축이라는 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단순히 공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를 고민하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숙희의 건축은 단순히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 행위를 넘어, 우리 사회에 던지는 깊이 있는 질문이자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강력한 메시지다. 남해 돌창고의 내부는 곡식만 보관하면 됐던 단출한 공간을 현재의 용도에 맞게 바꾸기 위해 여러 방식의 보강이 필요했다. 오래된 목재 트러스를 철재로 바꿔 지붕을 떠받칠 수 있도록 했고, H빔을 설치해 기둥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 노경

복을 부르는 포용의 미덕

Arts & Culture 2025 WINTER

복을 부르는 포용의 미덕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호호당의 양정은 대표는 전통을 단순히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 감각과 실용성을 결합해 일상에서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재해석한다. 그래서 호호당의 제품에는 한국적 미학뿐 아니라 사용자의 삶을 아우르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양정은 대표가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호호당 쇼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녀는 보자기 포장 문화를 통해 품격 있는 전통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보자기는 물건을 싸서 보관하거나 실어 나르기 위한 용도로 네모나게 만든 천을 말한다. 보자기는 이처럼 예부터 가방 역할을 했다. 하지만 가방은 정해진 크기에 맞춰서 물건을 담는 데 반해 보자기는 물건에 맞춰서 감싸 담는다. 보자기 문화에는 사람을 대할 때 정성을 다하고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우리의 습성이 잘 드러나 있다. 보자기를 뜻하는 한자 ‘복(幞, 襆)’은 행운이나 행복을 뜻하는 ‘복(福)’과 음이 같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보자기에 물건을 싸두면 복이 든다고 믿었다. 혼례 시 신랑 신부가 주고받는 예물이나 함 등을 포장한 보자기가 대표적인 예다. 보자기를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시대 문헌들에 보자기에 얽힌 사화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일상 대소사에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왕실의 복식과 물품에 관한 규례를 적은 책 『상방정례』(1749)에는 당시 궁중에서 사용하던 보자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적혀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왕과 왕세자가 머리에 쓰는 관 종류는 외부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3폭짜리 솜보자기로 포장했으며, 옷은 4폭 홑보자기, 버선과 신발은 3폭 홑보자기로 싸서 보관했다고 한다. 1폭은 오늘날로 치면 약 35㎝ 너비이다. 왕실에서 사용한 보자기의 재질은 주로 비단이며, 홍색 계열을 가장 많이 사용했고, 간혹 자주색과 남색, 청색, 백색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보자기는 옷보, 이불보, 상보 등 싸는 물건에 따라 이름이 달리 붙는다. 일상에 필요한 물건 외에도 경전을 담는 경전보, 각종 제의에 쓰이는 특수용 보를 비롯해 혼례에 사용되는 사주단자와 함, 폐백 등을 담는 혼수보 등 용도에 따라 구분해서 사용했다. 또 혼례 예물을 싸는 보자기는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파랑, 빨강, 노랑, 하양, 검정의 오방색 실로 수를 놓아 부부의 화합을 기원했다. 이처럼 의식주 전반에 걸쳐 친숙한 포장 도구였던 보자기는 근대화를 거치며 사용 영역이 축소되었으나, 오늘날에도 정성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선물 포장에 쓰이거나 각종 예식에 두루 활용된다. 정성을 표현하는 도구 서울 청담동 명품거리 골목에 위치한 호호당 쇼룸에 들어서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중요한 순간들이 한눈에 스쳐 지나간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입히는 배냇저고리부터 돌반지, 복주머니, 한복, 유기그릇과 목각 인형 등 결혼, 임신과 출산, 명절, 각종 기념일에 필요한 전통 생활용품들이 보자기에 담겨 진열돼 있다. “보자기는 주는 사람의 정성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도구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받는 사람이 계속 재사용할 수 있어서 매우 친환경적입니다.” 양정은 대표는 보자기의 실용성을 먼저 강조한다. 그녀가 보자기에 관심을 두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보자기는 제 삶의 뿌리 중 일부라고 할 수 있어요. 할머니와 아버지가 드라마와 영화 사극에 들어가는 특수 의상 사업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집 안에는 시대에 따라 고증한 한복, 갑옷, 소품들을 만들고 남은 원단이 가득했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남은 천을 모아 보자기를 만들어 쟁여두셨어요.” 그렇게 만든 보자기는 명절이나 특별한 날 선물 포장뿐 아니라 도시락 주머니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줄 때도 고운 색깔의 보자기에 담아서 주셨다고 한다. 품질과 디자인은 물론이고 가격도 적당해야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보자기를 자주 사용할 수 있다. 양 대표가 가격이 비싼 전통 옷감 대신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리사이클 원단을 개발한 이유다. “집과 작업장이 위아래로 붙어 있다 보니 어쩌다 별식을 하면 넉넉하게 만들어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명절 때면 떡과 육포를 만들어 이웃에도 돌렸어요. 음식 포장은 주로 제 몫이었는데, 이런저런 모양을 내서 싸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죠.” 어려서 보고 자란 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일까? 음식 포장으로 시작된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은 대학에서 전통 식생활 문화 공부로 이어졌고, 한때는 오너 셰프로서 한식당 ‘정미소(井米所)’를 운영하기도 했다. 체력이 따라가지 못해 2년 만에 그만두긴 했지만, 이 일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이후 선물 요리에 집중했다. “주로 폐백, 이바지 음식을 주문받았는데, 포장용 보자기가 마땅치 않았어요. 그래서 과거 저희 집에서 작업하시던 분들을 수소문해 원단을 구해서 직접 만들었죠. 음식 보고 온 손님들이 보자기 포장에 반해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보자기는 어떤 형태의 물건이든 포장할 수 있는 유연함을 지녔다. 또한 묶기, 접기, 꼬기, 감기, 땋기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아름다움을 배가할 수 있다. 대중화 위한 소재 개발 2011년 문을 연 호호당은 세련된 보자기 포장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국내외 많은 럭셔리 브랜드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뷰티 브랜드 설화수를 시작으로 구찌, 루이비통, 보테가 베네타 등 해외 명품 브랜드와도 협업해 답례품, 선물 포장 작업에 참여했다. “설화수의 경우 10년째 디자인 작업을 함께 해오면서 저 또한 성장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오래도록 간직할 가치를 먼저 생각하게 됐죠.” 이 과정에서 그녀는 보자기를 일상에서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됐다. “전통 보자기는 실크나 모시로 만드는데, 너무 고가여서 한계가 있었죠. 전통의 아름다움을 누구나 손쉽게 누렸으면 하는 고민이 소재 개발로 이어졌고, 이를 충족할 기능성 섬유를 찾게 됐습니다.” 양 대표는 가격대를 낮추기 위해 폐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이렇게 만든 리사이클 원단을 인정받아 호호당은 2021년 GRS(Global Recycled Standard, 국제 재활용 표준) 친환경 기업으로 공식 인증받았다. "저희와 협업하고 있는 호텔신라 보자기는 현재 100% 폐플라스틱을 재활용한 원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호호당 보자기도 일부 천연 소재 외에는 바꿔나가는 중이고요.” 양 대표가 2024년 새롭게 선보인 색동 바구니. 색동은 예로부터 귀한 일에 사용하는 옷감이었다. 조선의 제21대 임금인 영조(재위 1724~1776)가 정순왕후를 왕비로 책봉할 때 사용했던 두루마리의 색동을 재해석했다. 복을 부르는 마음 보자기 포장에서 생활용품 브랜드로 발돋움한 호호당은 굵직한 국내외 행사에 공식 기념품으로 채택돼 호평을 받았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경복궁 영추문 천장에 있는 백호를 응용해 자수 마그넷과 보자기 가방을 선보였고, 2021년 서울에서 개최된 P4G(Partnering for Green Growth and the Global Goals 2030, 녹색성장 및 2030 글로벌 목표를 위한 연대) 정상회의 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문양을 응용한 보자기 가방을 제작해 화제가 됐다. “원단에 들어가는 문양은 주로 우리 민화에서 응용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에 나오는 그 귀여운 호랑이를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호호당이 해온 일을 인정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양 대표가 이끌던 호호당은 무역회사에 다니던 남편 김준식 씨가 2016년 합류해 해외 직수출의 길이 열렸다. 현재 호호당은 서울과 대구, 베트남 호찌민에 공장을 둔 제조 기업으로 성장했다. “호호당은 제가 결혼할 때 ‘늘 좋은 일만 있으라’고 어머니가 저희 가정에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이듬해인 2011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무척 막막했어요. 혼자 출산을 준비할 때는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한 배냇저고리를 만들면서 그 허전한 심경을 추스를 수 있었죠. 어머니가 염원하신 것처럼 저도 호호당을 찾는 분들께 좋은 일만 가득 담아 드리고 싶어요.” 보자기에 담는 정성스러운 그 마음이 복을 부르나 보다. 부부간 신뢰와 화목을 상징하는 목각 기러기는 전통 혼례에서 가장 중요한 예물이었다. 장인이 호두나무를 정성스럽게 깎아 만든 호호당의 목각 기러기는 주로 전통 옷감인 양단이나 노방 보자기로 포장한다.

‘어쩔 수가 없는’ 삶에 대한 박찬욱의 풍자

Arts & Culture 2025 WINTER

‘어쩔 수가 없는’ 삶에 대한 박찬욱의 풍자 박찬욱 감독의 풍자적 스릴러 는 벼랑 끝에 내몰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일상의 불안정성을 탐구한다. 블랙 코미디와 도덕적 긴장감이 교차하는 이 작품은 사람들이 사회적·경제적 압박 속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그들의 인간성을 시험하는 제도를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드러낸다. 박 감독은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이번 신작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2025년 8월 말 개막한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이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장면. 그는 신작 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이 영화제에 참석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 제공, 사진 Jacopo Salvi 한국 영화계의 거장 박찬욱 감독의 신작 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강렬한 심리 묘사와 시각적 대담함을 이어가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각본, 제작, 연출을 모두 맡은 그는 이번 작품에서 불확실성, 자동화, 도덕성의 붕괴를 다룬 블랙 코미디 스릴러를 선보였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했으며, 박 감독이 20여 년에 걸쳐 구상한 끝에 완성된 작품이다. 지난 8월,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처음 공개된 뒤, 9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 관객에게도 소개됐다. 이 작품은 경제적 불안과 기술 발전이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극 중에는 해고당한 가장 ‘만수(이병헌)’와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아내 ‘미리(손예진)’가 등장한다. 는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사회의식이 가장 뚜렷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극단으로 내몰린 한 남자의 비극을 넘어, 진정한 선택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을 담아낸다. 이 이야기에 끌리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읽은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순간, ‘이건 꼭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우선 작품의 핵심이었던 비극에 매료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어쩌면 원작보다 더 유머러스하게 표현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저에 깔린 비극에 약간의 유머를 더하면 훨씬 매혹적인 이야기가 될 거라는 직감이 있었다. 또한 한 인간의 내면 심리를 따라가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를 함께 탐구하는, 두 가지 층위를 담은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 3차 포스터. 이 영화는 2025년 9월 17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였으며, 일주일 후 일반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국내 극장에서 개봉했다. 2025년 11월 말 기준, 전국적으로 약 300만 명의 누적 관객 수를 기록했다. ⓒ CJ ENM 어떤 장르를 염두에 두었나? 이야기의 구조만 보면 추리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어릴 적에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지만, 그런 장르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추리소설은 대개 어떤 미스터리로 시작하는데, 그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되고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시작부터 범죄를 저지르려는 한 남자가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미스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이 작품은 오히려 사회 제도 속에서 점점 범죄자로 내몰리게 되는 한 평범한 사람의 심리에 관한 이야기다.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이 작품의 내러티브는 훨씬 더 강렬하고, 집요하며, 절망적이다. 기본적으로는 비극이지만, 그 속에 깃든 부조리한 유머 덕분에 나에게는 코미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가 영향을 주었나? 이 영화를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도끼〉 리메이크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처음부터 원작 소설에 매료된 것이었고,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는 그 이후에야 보게 되었다. 그의 버전은 톤과 정서가 완전히 달라서, 이 작품은 그 영화의 리메이크라기보다는 원작 소설의 또 다른 해석이라 보는 편이 맞다. 물론 당시 원작의 판권은 여전히 가브라스 감독이 가지고 있어서 제작 과정에서 약간의 조율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아내이자 프로듀서였던 미셸이 이번 영화의 제작에도 함께 참여하면서 원만히 진행되었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 이 이야기를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요즘 어떤 영화를 준비하고 있냐?”고 물으면, 나는 간단히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곤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20년 넘게, 전 세계 어디서나 반응은 늘 같았다.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미국 스튜디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작품이 만들어질 거라고 믿었다. 스튜디오들은 영화를 제대로 만드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적은 예산을 제시했다. 의견 차이를 좁히는 데 2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셈이다. 결국 오랜 기다림 끝에, 이 작품이 본래의 의도대로 구현될 수 있는 합의점을 찾게 되었다. 이 작품은 단지 현대 한국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면 어디서든, 과거에도 미래에도 언제든 통할 이야기다. 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가 원작이며, 박찬욱 감독이 연출과 공동 각본을 맡았다. 주인공이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당한 후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 CJ ENM 이번 영화에서 가장 다루고 싶었던 주제는 무엇이었나? 하나의 주제라기보다는, 서로 얽히고 겹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성과 중심의 노동, 과잉 생산성, 치열한 경쟁, 인공지능까지. 이건 한국적인 동시에 세계적인 문제다. 한국은 이 모든 글로벌 이슈가 한꺼번에, 그리고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한국이 겪는 문제들이 다른 나라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예를 들어 AI, 고용 불안, 중산층 붕괴, 남성성에 대한 고민 같은 것들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사회적 질문들을 던지면서 자본주의의 단면을 비판하고, 그 너머의 더 큰 의미를 탐색한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가 남기는 정서는 깊은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블랙 코미디의 요소들도 있지만, 마지막에는 공허함과 비극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이 드라마의 본질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의도대로,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정리되는 감정을 느끼길 바란다. 주인공은 가족을 위해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영화는 그 행동이 정말 가족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묻는다. 관객 각자가 이 가족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길 바란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를 것이다. 바로 그런 대화의 화두를 던지는 것이 내가 바랐던 부분이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 이번에는 폭력의 강도가 훨씬 절제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폭력을 묘사하는 이유는 공포와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폭력의 공포, 그 뒤에 따라오는 고통을 드러내려면 결국 폭력적인 장면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폭력은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까지도 파괴한다. 내 작품 속 폭력 장면이 유난히 아프게 느껴지고, 죄책감의 그림자를 동반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영화 속 폭력 묘사에 관해 내가 고민하는 부분이 두 가지 있다. 관객이 그 폭력 장면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 폭력을 아름답게 느끼게 되는가이다. 나는 최대한 이 두 가지를 피하려 한다. 물론 나도 다른 감독의 영화를 보다가 폭력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연출의 미학적 완성도에 감탄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내 작품에서 그런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한다면,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것 같다. 이 영화의 코믹한 요소는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만수의 행동이 슬프면서도 동시에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모든 것을 합리화하지만, 그로 인해 가족은 오히려 무너진다. 우리는 도대체 이 모든 게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묻게 되고, 그것이 단지 어리석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코미디가 필요했다. 영화는 한여름의 절정에서 시작해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는 예보와 함께 막을 내린다. 식물을 사랑하는 만수는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지나간다. 그것이 내가 원했던 배경이었다. 이는 만수가 일하는 회사 이름(처음엔 ‘태양’, 그다음은 ‘문 제지’)에서도 드러난다. 원작에는 AI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각본을 다듬어 가는 동안 세상은 변하고 있었고, AI가 현실에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들어왔다. 만수는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을 여전히 습관적으로 한다. 기계가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의 ‘직관’만큼은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관객이 그와 함께 그 불확실한 미래를 상상하기를 바랐다. 이병헌과 손예진을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하다. 영화의 대부분을 이끌어가며 도덕적 갈등과 감정의 무게를 끝까지 견뎌낼 배우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병헌이 떠올랐다. 이번 작품에서 그의 연기는 남우주연상에 손색이 없을 만큼 강렬하다. 손예진의 경우, 아내 ‘미리’ 역할에는 낙관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생명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실직한 남편을 붙잡고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 그런 기운을 가진 배우가 바로 손예진이었다. 촬영 현장 중 배우 손예진의 모습을 담고 있는 비하인드 스틸. 손예진은 극 중에서 주인공 만수의 아내 미리 역할을 맡았다. ⓒ CJ ENM 인상적인 사운드트랙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조용필의 열렬한 팬이었다. 언젠가 그의 노래를 영화에 쓰고 싶다고 늘 생각했고, 딱 맞는 순간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때가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음악을 한껏 키워 대사에 가려지지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흐르게 하고 싶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조용필의 명곡이 너무 많아서 어떤 곡을 써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고추잠자리〉가 가장 어울린다고 느꼈다. 장면에 따라 아이러니하게 들리기도 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영화의 장면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곡을 정한 순간부터 편집은 몇 프레임씩 늘리고 줄이는 세밀한 조율 작업이 되었다. 기타 리프 하나, 가사 한 줄조차 배우의 움직임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게 만들고 싶었다. 영화 속 장면들은 바로 그 치열한 조율의 결과이다. 나는 어렸을 때 들었던 한국의 명곡들을 늘 영화 속에 담아냈다. 〈박쥐〉에서는 남인수의 노래들, 〈헤어질 결심〉에서는 정훈희의 〈안개〉가 그랬다. 내가 즐겨 들었던 노래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화 속에 다시 불러내고 싶다. 요즘 젊은 세대는 그런 노래들을 거의 모르는 게 아쉽다. 외국의 팝송은 지금도 어디서나 바로 알아듣지 않나. 우리 세대가 사랑했던 한국의 위대한 가수들, 작곡가들도 문화적 기억 속에 그만한 자리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사람들은 정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에 묶인 채 살아가고 있는가?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사실 진정한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주인공은 영화 내내 그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진실이라기보다 비겁함이 만들어낸 일종의 자기변명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나약함과 취약함, 결점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자기 정당화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세상의 어두운 면을 마주할 때 유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머는 우리가 잠시 한걸음 물러서서 더 명확히 바라보고, 때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일조차 버틸 수 있게 해준다. 가장 끔찍한 순간에도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본인이 실직당하는 상황을 상상해본 적이 있나? 영화 산업 역시 늘 전망이 밝지는 않다. 일자리와 안정감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은 누구나 안고 살아간다. 나는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형태는 달라질 수 있다. 사람들이 극장에 모여 함께 영화를 보는 문화는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런 시대가 오더라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 투자를 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계속 영화를 만들 것이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다 하더라도…. 이미 그렇게 해본 적도 있다. 방식은 바뀔지 몰라도,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마음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만수가 자신의 제거 대상인 범모(이성민)와 대립하는 장면을 담은 비하인드 스틸.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된 배우들의 연기에서 현장의 열기가 느껴진다. ⓒ CJ ENM

전 세계의 눈을 사로잡은 한국 창작 뮤지컬

Arts & Culture 2025 WINTER

전 세계의 눈을 사로잡은 한국 창작 뮤지컬 K-팝과 영화, 드라마를 넘어 최근에는 한국의 창작 뮤지컬도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2016년 초연한 이 있다. 이 작품은 제78회 토니상에서 6개 부문 상을 휩쓸면서, 한국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 외에도 ‘국내용’이었던 작품이 ‘해외용’으로 기획돼 글로벌 무대로 진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2025년 6월 8일 뉴욕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열린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이 작품상·극본상·연출상·작사 작곡상·남우주연상·무대 디자인상 등 6개 부문을 휩쓸었다. 국내 초연의 창작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토니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 AP 연합뉴스 ‘이고트(EGOT)’는 미국 문화 산업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4개의 권위 있는 시상식을 가리키는 용어다. TV 프로그램에 주어지는 에미상, 음악 분야의 그래미상, 영화의 오스카상, 그리고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무대 예술 작품을 대상으로 한 토니상이 그것이다. K-콘텐츠는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이 오스카상을 받으며 파란을 일으켰고, 황동혁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은 2022년 에미상 6관왕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그래미상은 1993년 성악가 조수미가 오페라 부문에서 본상을 받았으며, BTS가 여러 차례 후보에 오른 바 있다. 여기에 더해 2025년 6월, 뮤지컬 의 브로드웨이 버전이 토니상을 받으며 K-콘텐츠가 ‘이고트’라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게 됐다. 파격적 행보 은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서로 사랑을 느끼며 겪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2016년 한국에서 초연했고, 2024년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NHN링크 제공 한국 뮤지컬 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기록을 세운 은 무대에 오르는 과정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 작품은 비영리 문화예술 지원 단체 우란문화재단이 작사가 박천휴와 작곡가 윌 애런슨이 만든 초안을 2014년 발굴해 기획했다. 이듬해 리딩 공연, 트라이 아웃 공연을 시도하는 등 콘텐츠 인큐베이팅 환경이 잘 갖춰지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며 구체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흥미로운 것은 2016년 뉴욕에서도 리딩 공연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크리에이티브 팀이 뉴욕대학교의 티쉬예술학교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하긴 했지만, 개발 단계부터 글로벌 시장을 겨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치밀한 개발 과정을 거쳐 토니상 수상까지 끌어낸 이 작품의 스토리는 무척 매력적이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에는 인간을 도와주는 로봇인 낡은 헬퍼봇들이 살고 있다. 어디로 갔는지 주인들은 사라지고, 헬퍼봇들은 이젠 단종이 된 탓에 고장 난 부품이나 소모품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매일 반복되는 비슷비슷한 일상 속 어느 날, 주인공인 5세대 헬퍼봇 올리버에게 이웃에 사는 6세대 헬퍼봇 클레어가 방문한다. 고장 난 충전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다. 이를 계기로 두 헬퍼봇들은 인간들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관계’를 형성하며, ‘사랑’이라는 감정까지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두 헬퍼봇들은 결국 결별을 선택하게 되고, 열린 결말의 마지막 순간을 대면한다. N차 관람 이끈 팬덤 문화 한국의 뮤지컬 시장에서는 두세 달 공연 후 다음 시즌에 앙코르 무대가 꾸며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뮤지컬 환경에서 은 10년 동안 무려 여섯 차례나 앙코르 공연 시즌을 거듭하며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심지어 그 과정 중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도 있었다. 뮤지컬의 본고장인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도 그 시기 셧다운을 피하기 어려웠지만, 국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은 효과적인 감염 확산 대응으로 총체적 셧다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래서 해외 유수의 언론에서는 한국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령’이 살아남은 나라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리지널 내한 공연이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완벽한 방역 통제 아래 막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물리적으로 혹독한 제한이 공연장에 적용되던 시절, 옆 좌석을 비우고 한 자리씩 떨어져 앉은 관객들은 응원이라도 하듯 뜨거운 눈빛으로 무대를 응시했고, 마지막 커튼콜에 등장한 배우들은 감동에 겨워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의 인기는 같은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하는 ‘N차 관람’으로 확인됐다. N차 관객들은 공연을 보러가기 전,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을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2020년 첫 공연을 펼친 는 실존 인물인 폴란드의 과학자 마리 퀴리의 삶에 상상력을 더해 구성한 작품이다. 2024년, 한국 뮤지컬 최초로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현지 프로덕션으로 장기 공연을 올렸다. 라이브 제공 차이점과 공통점 은 한국과 브로드웨이 버전에 몇 가지 차이가 있다. 두 작품은 막을 올린 환경에 맞춰 각각 진화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언어다. 한국어가 영어로 바뀌며 크고 작은 변화가 더해졌다.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뮤지컬 넘버 는 브로드웨이 버전에서는 지워졌다. 개발 초기부터 관객들의 정서나 문화적 차이를 고려해 영어 버전과 한국어 버전이 각기 다르게 만들어졌다는 후문도 있는데, 덕분에 더욱 효과적으로 객석에서 공감을 이끌어내고 소구할 수 있는 매력이 완성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극장 규모도 다르다. 한국에서는 300석 남짓한 소극장 뮤지컬로 인기를 누렸지만, 브로드웨이는 1,000석 규모의 벨라스코 극장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브로드웨이 관객들은 소극장에서 느낄 수 있었던 아기자기한 맛 대신 대극장의 시원시원하고 생동감 넘치는 스케일을 통해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버전은 몇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 작품에서 화분은 무대의 오브제이자 두 헬퍼봇의 관계와 감정을 상징하는 캐릭터 역할도 맡고 있는데, 이러한 장치와 메시지를 살리기 위해 영어 단어 ‘플랜트’로 번역하지 않고 한국어 단어 ‘화분’을 그대로 사용했다. 두 주인공이 제주도 여행에서 경험한 반딧불이 서사도 그대로 유지됐다. 숲속을 가득 채운 반짝이는 반딧불이는 두 헬퍼봇의 아름다운 한때와 소중한 추억을 상징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브로드웨이에서도 N차 관람의 열기가 뜨거웠다는 사실이다. N차 관람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현상인데, 이들은 여러 차례 반복해서 관람하는 자신들을 ‘반딧불이’라고 부른다. 극단 연우무대의 창작 뮤지컬 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가상의 섬에서 벌어지는 군인들의 이야기를 뭉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2011년 신인 창작자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CJ문화재단 크리에이티브 마인즈에서 처음 선보였고, 2013년 초연 후 한국뮤지컬대상에서 극본상을 받았다. 연우무대 제공 한국 창작 뮤지컬의 미래 의 성과로 인해 이제 한국 뮤지컬은 제2, 제3의 ‘해피 엔딩’을 꿈꾸는 시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원소 라듐을 발견해 남편과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마리 퀴리의 일생에 상상을 더한 팩션 뮤지컬 는 그녀의 고국인 폴란드 무대로 진출할 예정이며, 푸치니의 오페라를 한국식으로 각색한 뮤지컬 는 슬로바키아로 악보와 대본이 팔려나갔다. 또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외딴 무인도에 남겨진 한국군과 북한 포로들의 해프닝을 그린 도 영미권 시장 진출을 앞두고 있고, 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쇼케이스 무대를 선보이며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국 뮤지컬의 엔딩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까? 희망 섞인 미소로 대답해 본다. “어쩌면.”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를 국가 이념으로 설정하는 등 참신한 스토리와 뛰어난 연출로 2019년 초연 이래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국악 장단에 현대 음악을 결합한 뮤지컬 넘버와 화려한 안무도 압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PL엔터테인먼트 제공

K-팝의 최전선, 팝업 스토어

Arts & Culture 2025 AUTUMN

K-팝의 최전선, 팝업 스토어 K-팝 신에서 팝업 스토어가 성행 중이다. 기존에는 앨범 발매를 홍보하기 위한 단순한 이벤트 성격이 짙었지만, 최근에는 유수의 브랜드들과 협업해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거나 뮤지션의 세계관을 스토리텔링해 전달하는 등 콘텐츠가 창조적으로 진화하면서 팬덤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 aespa WEEK – #Whiplash_mood 〉는 에스파의 미니 5집 앨범 < Whiplash > 발매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팝업 스토어이다. 에스파의 세계관 및 앨범 콘셉트를 키네틱 아트로 재해석했으며, 공간 전체가 살아 숨 쉬는 듯한 공감각적 연출로 팬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2024년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서울 성수동에서 열렸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제 팝업 스토어가 없는 K-팝은 허전하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었다. 불과 4~5년 사이 일어난 일이다. 단기 운영되는 임시 매장으로, 상업 브랜드와 좋은 상성을 보이며 빠르게 성장한 이 새로운 마케팅 방식은 K-팝과도 궁합이 꽤 좋았다. 새것이라면 뭐든 반가운 K-팝 업계 특유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자연스럽다. 자리를 잡아도 너무 잘 잡아 이제는 “잘 만든 팝업 스토어 하나가 웬만한 타이틀곡이나 뮤직비디오보다 낫다”는 소리가 팬들 사이에서 종종 들려올 정도다. 안정감과 소속감 어느새 K-팝의 필수 요소가 되어 버린 팝업 스토어는 지난 몇 년간 K-팝을 산업으로 보는 시각 아래 활발하게 호명되었다. 특히 지금까지 없던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K-팝 산업 속에서 비즈니스 확장이나 수익 구조 다각화를 가능케 해 가치를 인정받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가수와 팬이 직접 만날 수 없었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팝업 스토어가 부쩍 성장한 점만 봐도 그렇다.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서는 안 되는 인류 초유의 사태 속에서, 팝업 스토어는 K-팝 팬덤이 ‘우리’로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K-팝 팝업 스토어와 일반 팝업 스토어의 차이가 생긴다. 후자가 팝업 대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그로 인해 형성된 잠재 고객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전자는 이미 탄탄하게 구성된 팬덤과의 깊이 있는 교류를 핵심으로 한다. 예를 들어 신상품을 알리기 위한 팝업 스토어를 생각해 보자. 일반 팝업 스토어는 제품의 호감도와 인지도를 높여 궁극적으로 해당 제품의 판매량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반면 K-팝 팝업 스토어는 새롭게 발매된 앨범을 통해 팬덤을 한자리에 모으고, 콘텐츠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강한 소속감과 몰입감을 느끼게 하는 데 집중한다. 수익화는 대부분 현장 머천다이즈 판매로 이뤄진다. 2025년 3월 더현대서울에서 열린 < G-DRAGON Media Exhibition: Übermensch >는 지드래곤의 정규 3집 < 위버멘쉬(Übermensch) > 발매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미디어아트 전시다. VR, AI 기반의 음성 인터랙션, 홀로그램, 초대형 미디어 파사드 등 신기술을 기반으로 기획된 이 전시는 팬들에게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제공했다. 또한 지드래곤의 오랜 상징인 데이지꽃 조형물을 곳곳에 설치해 일관된 디자인을 완성했다. ⓒ 셔터스톡 요컨대 K-팝 팝업 스토어는 직접 만지고 경험하는 팬 행위의 가장 진보적인 형태이다. 지금껏 대표적인 K-팝 오프라인 콘텐츠로 군림해 온 콘서트와 팬 사인회 그 어떤 것도 가수가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가수, 즉 IP의 힘이 유난히 강한 K-팝 산업에서 직접적인 IP 노출 없이도 이 정도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팝업 스토어가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다. 그런 점에서 K-팝 팝업 스토어는 좋아하는 뮤지션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팬들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이벤트들과 비슷한 속성을 지닌다. K-팝 팝업 스토어의 서막 그동안 K-팝이 강력한 IP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을 펼쳐온 만큼 팝업 스토어의 원조를 찾기는 쉽지 않다. 전시와 체험, 교류와 제품 판매가 모두 이루어지는 K-팝 팝업 스토어의 속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다만 ‘오프라인에서 가수 없이 색다른 방식으로 콘텐츠를 즐기는 공간’이라는 특성을 생각하면, 2015년 서울 이태원 드로잉 블라인드에서 열린 f(x)의 정규 4집 <4 Walls> 앨범 발매 기념 전시회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당시만 해도 K-팝과 전시회를 연결한다는 게 상당히 생소했는데, 앨범 발매 전 빔프로젝터를 통해 천장을 포함한 사방 벽면에 멤버들의 티저 사진과 영상을 공개하며 화제를 모았다. K-팝의 기본적 홍보 방식인 티저 프로모션과 전시 형태를 융합한 이 행사는, 지금은 한없이 체급을 불린 K-팝 팝업 스토어의 체험판이자 프로토타입이라 할 만하다. 흥미로운 건 당시 f(x)의 전반적 아트 디렉팅을 진행한 인물이 이후 그룹 뉴진스를 만든 민희진이라는 점이다. 뉴진스는 여러 면에서 2020년대 K-팝의 변화를 주도한 아이콘으로 불리는데, 그중 브랜드와 협업해 이를 효과적으로 풀어낸 팝업 스토어의 흥행도 빼놓을 수 없다. 2022년 8월, 더현대 서울에서 열린 뉴진스의 데뷔 기념 팝업 스토어는 현재 나타나고 있는 K-팝 팝업 스토어 전쟁의 서막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어마어마한 대기 줄을 비롯해 상투적인 K-팝 머천다이즈 형태에서 벗어난 패셔너블한 디자인과 구성으로 분야를 막론한 각계각층의 큰 관심을 모았다. 뉴진스는 이후에도 디저트 브랜드 누데이크, 애니메이션 등 대중의 예상을 뛰어넘는 창조적인 협업으로 끝없이 뉴진스 붐을 이어 나갔다. 2023년 발매한 EP 발매 프로모션 관련 팝업 스토어에는 10만 명이 넘는 누적 관객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팝업’의 재정의 팝업 스토어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면서, K-팝 그룹을 보유한 크고 작은 기획사들 모두가 분주해졌다. 가수의 사진만 활용하거나 머천다이즈 판매에만 눈에 불을 켠 팝업 스토어는 설 자리가 없어진 지 오래다. 보다 적극적으로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고 있다. 일례로 최근 SM엔터테인먼트와 산리오코리아가 협업한 ‘Where is KEY? with HELLO KITTY’가 눈에 띈다. 샤이니 키의 시그니처 캐릭터 복실이와 산리오 캐릭터 헬로키티가 등장해 동화 같은 스토리라인을 펼쳐낸 이 팝업 스토어는 2D와 3D라는 다른 차원의 두 콘텐츠가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뉴진스의 미니 2집 < Get Up > 발매 기념으로 열린 < 버니랜드 >는 글로벌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와 디지털 IP 플랫폼 기업 IPX가 협업해 선보인 팝업 스토어다. 2023년 7월부터 8월 말까지 서울 낙원동, 홍대, 강남 등지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됐으며 뉴진스의 정체성을 담은 특색 있는 공간 연출과 체험형 콘텐츠로 큰 화제를 일으켰다. 사진은 낙원동 악기 상가에 마련된 체험 공간. 아트포인트(Artpoint) 제공 그뿐만이 아니다. K-팝 팝업 스토어는 이제 공간도, 차원도 넘어선 곳으로 개념을 넓혀 나가고 있다. 세븐틴의 대표적인 오프라인 이벤트 ‘SEVENTEEN STREET’는 제한된 실내 공간을 넘어 한강 세빛섬이나 성수동, 압구정동 일대를 무대로 삼은, 천장 없는 거대한 팝업 스토어라 할 수 있다. 2025년 상반기 큰 화제 속에서 마무리된 플레이브의 2주년 기념 팝업 스토어 ‘Happy Plave Day’는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그룹의 특징을 십분 발휘했다. ‘직접’ 만날 수 없는 가수와 팬 사이의 한계는 팝업 스토어라는 물리적 공간과 데뷔 2주년이라는 기념일을 통해 흥미롭게 극복되었다. 멤버들의 필체가 담긴 축하 리플릿과 손 편지, 직접 그린 그림을 실물로 완성한 축하 케이크, 독자적 기술을 활용해 멤버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운영한 라이브 포토존 등 팬과 가수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로 꼼꼼하고 세심한 기획력이 돋보였다. 그렇다. K-팝 팝업 스토어의 핵심은 ‘함께’다.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시공간을 통해 가수와 팬, 팬과 가수, 팬과 팬 모두가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을 더 공고히 다진다. 공통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한 팀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유대감과 커뮤니티의 현신 앞에서 ‘팝업’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가 재정의되고 있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Arts & Culture 2025 AUTUMN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서도호는 자신이 거주했던 집의 표면을 재구성한 직물 조각으로 잘 알려졌다. 그는 집, 물리적 공간, 감정의 전이, 기억, 개인성 및 집합성의 문제를 조각, 드로잉, 영상 작업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풀어낸다. Do Ho Suh, “Rubbing/Loving Project: Seoul Home,” 2013-2022. Installation view, The Genesis Exhibition: Do Ho Suh: Walk the House. Courtesy of the Artist,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and Victoria Miro. Repurposing supported by Genesis © Do Ho Suh. Photo © Tate (Jai Monaghan) ‘집’이란 무엇인가? 설치미술가 서도호의 작품은 이처럼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동양화를 전공한 뒤 1990년대 초반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이래로, 작가는 독일, 영국 등 여러 나라로 거점을 옮기며 작품 활동을 지속해 왔다. 그에게 이주는 그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감각과 존재 방식의 전환이었다. 이에 집이라는 공간은 정체성을 담는 그릇인 동시에, 문화적 충돌과 경계의 문제를 탐색하는 조형 실험의 장이 되었다. 그간 작가가 세계 곳곳에서 머물렀던 집이 어떻게 해체되고 재구성되었는지 그 여정을 따라가 보자. 기억의 재창조 서도호는 언제나 ‘집’의 개념을 조각처럼 다루어 왔다. 그러나 그의 집은 하나의 단단한 형태로 고정된다기보다 유동적인 존재로서 등장한다. 작업 초기 탄생한 작품 (1999)은 작가가 유년 시절을 보낸 서울의 전통 한옥을 옥색 한복 천으로 정교하게 재현한 결과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업이 휴대 가능한 형태로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목 역시 전시 장소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전시가 열릴 때마다 작품에는 새로운 도시의 이름이 덧씌워졌는데, 이로 인해 현재는 제목에 뉴욕, 볼티모어, 런던, 시애틀 등의 지명이 추가되어 있다. 동일한 구조물이 각기 다른 지역의 빛, 공기, 시간과 접촉하며 여러 층위를 얻게 된 것이다. 결국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집에 대한 기억 역시 끊임없이 번역되고 재창조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장소성과 정체성의 관계를 복합적으로 조망하는 서도호 특유의 방법론이자, 그가 구축해 온 노마드적 삶의 기반이기도 하다. Do Ho Suh, “My Homes.” 2010. Courtesy of the artist,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Victoria Miro and STPI - Creative Workshop & Gallery © Do Ho Suh Photo by Hyunsoo Kim 이러한 방향성은 미술관 내부에서 외부로도 확장되었다. 2018년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런던 리버풀 스트리트역 인근에 설치되었던 은 고가도로 위에 마치 추락한 듯 보이는 한옥과 대나무 정원으로 시민들의 이목을 끌었다. 낯선 문화와 환경이 조우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시각화함으로써, 작가는 해외 생활 중 경험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등의 대립을 직관적으로 드러냈다. 한편, 이질적 공간에 불시착한 집의 모습은 이후 작업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이 시대의 모든 이주자들이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즉, 서도호의 손끝은 개인의 기억을 짓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집’이라는 은유를 통해 문화적 틈새를 가로지르기에 이른다. Do Ho Suh, “Nest/s.” 2024. Installation view, The Genesis Exhibition: Do Ho Suh: Walk the House Courtesy of the Artist,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and Victoria Miro. Creation supported by Genesis © Do Ho Suh. Photo © Tate (Sonal Bakrania) 행위와 감정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10월 26일까지 진행하는 개인전 는 앞서 살펴본 그의 시선이 더욱 명확히 펼쳐지는 장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 ‘집을 걷다’는 한국 전통 가옥을 짓는 대목장이 해체 가능한 구조물을 다른 장소로 옮길 때 사용하는 표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전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유년기의 경험에 기반을 둔다. ‘수묵 추상의 거장’이라 일컬어지는 서세옥 화백은 서울 성북동에 창덕궁 건물 중 하나를 모델로 한 한옥을 지어 거주했다. 아버지가 대목장과 함께 목재를 짜맞춰 세운 이 집은 자연스럽게 아들 서도호의 추억이 깊이 뿌리내린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걷는 집’의 개념은 시각적 재현을 넘어 촉각적 기록의 방식으로도 나아간다. 대형 설치 작품 (2013~2022)에서 서도호는 자신이 살던 성북동 집의 표면을 더듬으며 오랜 시간 축적된 기억의 결을 종이에 옮겼다. 이 작업은 한옥의 외벽을 닥종이로 감싼 뒤, 흑연을 문질러 질감과 구조를 천천히 드러내 완성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작가와 장소 간 정서적 관계가 되살아나는 과정은 작품 제목에도 묻어나 있다. 제목에서 반복되는 ‘러빙’은 한국어 자음 ‘ㄹ’의 발음에서 착안해 문지르기(rubbing)와 사랑하기(loving)라는 두 단어를 포갠 것으로, 행위와 감정을 나란히 호출한다. 또한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작가가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의 공간은 종종 다른 공간의 기억을 함께 품는다. 이는 물리적 장소가 과거의 삶과 감각을 저장하고, 그것이 또 다른 장소로 옮겨질 수 있다는 믿음과도 맞닿는다. 테이트 모던의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2024)는 그러한 인식을 구현한 작품이다. 작가가 머물렀던 여러 도시의 방 구조가 얇은 직물로 봉합된 이 설치물은 관객의 이동을 전제로 완성된다. 안팎의 경계를 흐리는 이 통로를 직접 걸어서 지나가며, 관객은 아득한 한때의 시간을 통과한다. 비슷한 관점에서 (2024)은 작가 가족의 현재 런던 자택을 큰 틀로 두되, 이전 집의 공간 구성을 내부에 병치한다. 조명 스위치나 수도꼭지처럼 사소한 사물의 위치는 실제 쓰였던 높이와 장소를 충실히 따르며, 색상은 각 도시의 기억을 구획 짓는 시각적 기호가 된다. 와 마찬가지로 관람객들은 작품 안을 거닐며 작은 요소들을 하나씩 되짚어보게 되는데, 마치 일기장을 천천히 넘기듯이 한 가족의 삶을 구성해 온 궤적을 조용히 따라간다. 런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서도호. 그는 뉴욕과 런던,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설치미술가이며 동시대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작가 중 하나다. 고정된 공간 개념을 초월하여, 시공의 경계를 가로지르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는 노마드적 공간 개념을 탐구한다. © Gautier Deblonde, DACS 2025 다시, 집 이제 처음의 질문을 다시 꺼내어 본다. 서도호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인가? 국경을 넘어 이어진 여정 속에서, 작가는 익숙해진 집을 분해하고 그 집을 낯선 땅에 다시금 내려놓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실과 천, 종이로 지어진 그의 집은 언제나 사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그 내부에는 시대와 세계, 나아가 이동의 순간이 응축되어 있다. 반복되는 이주 속에서도 자신만의 집을 되살리는 행위는 작가에게 있어 장소를 기억하는 하나의 의례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조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접히고 옮겨지는 각각의 작품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집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집이란 정해진 목적지가 아니라 계속해서 탐구해야 할 기나긴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어떤 이야기를 품은 채 어디로 향하게 될까? Do Ho Suh, “Perfect Home: London, Horsham, New York, Berlin, Providence, Seoul” (detail). 2024. Polyester, stainless steel. 455 x 575 x 1237 cm. Courtesy of the Artist,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and Victoria Miro. Photo by Jeon Taeg Su © Do Ho Suh Do Ho Suh, “Home within Home.” 2019. Polyester fabric, stainless steel. 744 x 827 x 805 cm. Installation view, Incheon International Airport, Seoul, Korea. 2020. © Do Ho Suh. Courtesy of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Photo by Jeon Taeg Su

SoA, 손끝으로 짓는 공동의

Arts & Culture 2025 AUTUMN

SoA, 손끝으로 짓는 공동의 SoA(Society of Architecture)는 2010년 강예린, 이치훈 두 사람이 함께 설립한 건축가 그룹이다. 이들은 현대적인 삶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것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는 건축적 가능성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 도시사회학, 역사, 미술 등 건축 이외의 분야와도 다양한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윤슬: 서울을 비추는 만리동’은 광학렌즈 형태로 만들어진 지름 25m의 공공미술 작품이다. 노천극장을 연상케 하는 중심 공간은 지면 아래 4m 깊이로 움푹하게 들어가 있으며 2,800개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만리동은 서울역 바로 옆에 위치한 동네로, 보행자들은 서울역 고가도로를 단장해 조성한 공중 보행로 ‘서울로7017’부터 이곳까지 이동하며 시각적 경험을 확장할 수 있다.   © 신경섭 SoA는 도시와 건축의 사회적 조건을 분석하며, 다양한 규모의 구축 환경을 탐구해 왔다. 비교적 초기 작업이었던 ‘지붕감각’ 또한 그러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카드와 공동으로 주최하는 건축 전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에서 선보였던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장소성을 고려하여, 주름지고 과장된 지붕을 통해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제공했다. SoA는 이 작품을 필두로 건축을 단순한 공간을 넘어 사회적, 감각적 경험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발전시켜 왔다. 협업, 감각, 관계, 지속 가능성, 허용 오차 등의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며, 건축이 사회와 함께 변모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은 개인의 작가성을 내세우기보다는, 건축을 집단적인 노력의 결과물로 간주한다. 이러한 철학은 그들의 작업 방식과 결과물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지붕감각’은 전통 건축의 중요한 요소였던 지붕을 재해석한 작업이다. 갈대발을 활용해 대형 지붕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관람객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는 한편 발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과 바람을 통해 과거 한옥 지붕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감각적 경험을 재현했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카드, 뉴욕현대미술관이 공동 주최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의 우승 작품이다. © 신경섭 공동의 감각 SoA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의 생산을 넘어, 감각 경험을 통해 사회적 연결을 엮어내는 데 주목한다. 이는 개인의 감각을 확장하고, 궁극적으로 사회적 소통을 촉진하는 건축의 잠재력을 탐색하게 한다. 앞서 말한 ‘지붕감각’과 ‘통의동 브릭웰’은 이러한 SoA의 건축 철학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공동의 감각을 추구하는 건축적 실험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선 ‘지붕감각’은 개인의 감각적 경험이 어떻게 공동의 감각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촉각, 청각 등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결합해 공간과 교감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이 작품이 감각에 방점을 둔다면, ‘통의동 브릭웰’은 ‘공동’ 쪽에 더 가닿는다. 보통 ‘정원’과 ‘브릭’으로 설명되곤 하는 이 건물에는 사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 통의동 브릭웰이 세워진 골목에는 1990년 돌풍에 쓰러져 죽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지역 주민들에게 쉼터 역할을 했던 천연기념물 백송이 있었다. SoA는 이 건물이 “막다른 골목에서 역사성과 공간성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대한 제안”이라며, “진정한 필로티로서 기능하는 것, 그리고 제2종 일반 주거 지역에서 건폐율 60%라는 제약을 극복하며 건축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려가 중요했다”고 말한다. 법규를 따르면서도 ‘해석’을 포함해야 했던 것이다. 건축을 통해 지역 사회와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SoA는 현대적 삶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것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는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는 건축가 그룹이다. 이들은 건축뿐만 아니라 공공예술, 리서치, 출판 등을 통해 건축적 고민을 풀어가고 있다. 202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초청되었다. 사진 왼쪽부터 강예린, 이치훈 건축가. SoA 제공 수공예를 닮은 건축 ‘통의동 브릭웰’은 천연기념물 백송이 있었던 골목에 자리하고 있다. 터가 지니고 있는 역사성을 고려해 지어진 이 건물은 1층부터 4층까지 시원하게 뚫린 개방적 원형 구조가 특징이다. 외장재로 사용된 벽돌이 독특한 시각적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 신경섭 SoA는 건축에 수공예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재료의 물성을 탐구한다. 기존 건축에서 흔히 사용되지 않는 재료를 과감하게 도입하거나, 기존 재료를 사용할 때도 어떤 산업 재료가 아니라 크래프트맨십이 들어갈 만한 것에 대해 먼저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건축은 실험 정신으로 빚어낸 결과물이다. ‘지붕감각’에서는 갈대를 재료로 선택했는데, 이를 위해 집요한 탐구와 실험을 거듭해야 했다. “전형적이지 않은 재료를 찾아다니며 직접 다 만져봤다. 갈대 역시 구하기 쉽지 않았다. 순천 습지 개발 지역에 가서 구해와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수입해 오게 되었는데, 바람에 제대로 흔들리지 않아 결국 을지로에 가서 다시 찾아야 했다. 바람에 반응하는 재료와 방식을 찾는 데 정말 오래 걸렸다.” 통의동 브릭웰 프로젝트에서는 다채로운 질감과 색상의 벽돌을 혼합하여 다양한 각도로 쌓고, 이로써 독특한 패턴을 만들어냈다. 또한, 벽돌과 벽돌 사이의 간격을 조절하여 빛과 바람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설계했다. 서울 학동사거리에 위치한 LG 플래그십 스토어 리뉴얼 프로젝트에서는 테라코타와 LED 조명을 결합하여 혁신적인 파사드를 구현했다. SoA의 이러한 시도는 재료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건축 디자인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낯섦으로 무장한 그들의 건축은 우리에게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권유한다. 이들은 실험적인 태도가 건축의 형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믿는다. 서울의 대표적 대학가 중 하나인 신촌은 1990년대 이후 상업 자본이 침투하면서 ‘자생적 청년 문화’라는 특유의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신촌 청년문화 전진기지’는 청년들의 창조적 문화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곳으로, 주변 상업 시설들과 변별되는 특색 있는 형태로 디자인되었다. 특히 벽과 기둥, 지붕과 창문을 드러내는 대신 수공예적 파사드로 건물 전체를 감쌌다. © 텍스처 온 텍스처 빌더로서의 건축가 한편,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다수 수행하며 SoA가 쌓은 역량 중 하나는 ‘디자인 빌드’다.  재료를 직접 다루고 시공 과정을 이해하며, 디자인과 빌드 사이의 ‘허용 오차’를 줄여나갈 때 건축물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우리의 디자인이 결과적으로 구현되기 전까지 허용 오차를 붙잡고 가는 일이 건축"이라는 SoA의 말처럼, 그들은 디자인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섬세하게 조율하며 최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SoA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시공 가능성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혹시 발생할 수 있는 변수에 유연하게 대처한다. 숙련된 기술자들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시공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고, 새로운 기술과 공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특히 이들은 1:1 목업을 빌더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구이자 작업이라고 여긴다. 도면이나 3D 모델링으로는 완벽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재료의 질감, 색상, 빛의 투과도, 공간감 등을 실제로 경험하고 디자인에 반영하기 위해서다. 복잡한 형태나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는 경우, 1:1 목업은 필수적인 과정이다. 디자인의 실현 가능성을 검증하고, 시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사전에 파악하여 해결하기 좋다. 숙련된 장인들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협력하는 일도 허용 오차를 줄이는 데 중요한 과정이다. 예를 들어 국립중앙박물관 으뜸홀 리뉴얼 프로젝트에서도 18m 길이의 데스크에 반가사유상의 옷 주름 형태를 적용하기 위해 1:1 목업을 활용했다. 복잡한 형태의 데스크를 실제로 제작하기 전에 1:1 모형을 만들어 형태와 재료, 색상 등을 검토하고 디자인을 개선했다. 그런 다음 시공 과정에서의 정밀성을 위해 모듈로 나누어 제작하고, 각 모듈을 연결하는 디테일을 고안했다. 앞서 언급한 LG 플래그십 스토어 리뉴얼 프로젝트에서는 파사드를 디자인하면서 VSA 코리아와 협업하며 디자인적 의미는 물론, 시공의 효율성까지 고려했다. 파사드의 강관을 돌려가며 시공할 수 있도록 설계하여, 디자인적 완성도와 시공 편의성을 동시에 확보한 것이다. SoA는 “현재 한국의 제도나 여건은 건축가가 현장에서 점점 배제되는 방향”이라며, 시공과 기술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바탕으로 디테일이나 기술적인 노하우를 축적한 빌더로서의 건축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건축의 만듦새와 완성도를 높이려면, 결국 설계의 정확도가 높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SoA의 건축은 이처럼 디자인과 시공, 이상과 현실, 그리고 건축과 사회의 경계를 넘나들며 완성된다. 그들은 손으로 직접 재료를 만지고, 몸으로 시공 과정을 경험하며 건축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얻는다. 또한, 숙련된 기술자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건축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열려 있는” 협업을 통한 그들의 건축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대구 미래농원’은 과거 아버지가 가꾸던 조경수 농원을 아들이 물려받아 새로운 공간으로 바꾼 프로젝트다. SoA는 20년 세월이 만들어 낸 숲과 정원을 해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풍경이 될 수 있도록 건물을 설계했다. © 텍스처 온 텍스처

무더위 속에서 빚어낸 청량함

Arts & Culture 2025 AUTUMN

무더위 속에서 빚어낸 청량함 서해와 금강을 끼고 있는 한산 지역은 습도가 높고 토양이 비옥해 질 좋은 모시풀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갖췄다. 그래서 조선 시대 한산모시는 지역 특산품으로 전국적 명성을 떨쳤고, 지금도 모시의 대명사로 통한다. 한산모시짜기는 1967년 국가무형유산 종목으로 채택됐으며, 2000년 기능 보유자로 지정된 방연옥 장인과 지역의 부녀자들이 함께 명맥을 잇고 있다. 방연옥 장인이 입으로 가늘게 쪼갠 모시를 틀에 걸어놓은 후 한 올씩 빼내 무릎에 대고 손바닥으로 비벼서 실을 길게 잇고 있다. 한산모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여름철 옷감이다. 모시풀 줄기의 껍질을 벗겨 얻은 실로 전통 방식의 베틀을 이용해 직조한다. 모시 짜기는 가족 내 분업, 이웃과 마을 간 협업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 왔다. 이는 화합과 결속의 주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같이 공동체 안에서 전승돼 온 전통 기술이라는 점에서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모시는 아토피를 전혀 일으키지 않는 천연 섬유다. 땀에 젖어도 처지지 않고 살갗에 달라붙지 않으며, 바람을 맞으면 다시 까슬까슬해져 며칠을 입어도 상쾌하다. 그 시원한 착용감은 어떤 섬유에도 댈 게 아니다. 오래 입어 낡아져도 빨아서 풀을 먹이면 새 옷 같다. 살짝 구겨져도, 해져서 기워 입어도 멋스럽다. 한여름 무더위에 모시옷을 입은 이는 단아한 기품을 풍긴다. 고급 옷감 애초부터 모시는 멋을 내기 위한 옷감이며, 일할 때 입는 평상복 용도가 아니다. 예부터 모시는 예복이나 상복 등에 사용되는 고급 옷감으로, 나라에 바치는 진상품이나 귀한 교역품으로 쓰였다. 모시옷을 언제부터 입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통일신라 경문왕(재위 861~875) 때 당나라에 모시를 보낸 기록이 있어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123년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고려(918~1392)에 와서 한 달간 머물며 쓴 보고서 『고려도경』에 보면, “직조 기술이 매우 정교해 왕부터 일반 백성까지 흰 모시옷을 입는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통해 이 시기에 모시옷 제작 기술이 크게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베틀에 걸린 모시 섬유의 모습. 한산모시는 실의 균일도가 일정해 다른 지역 모시보다 더 단아한 느낌을 준다. 조선 후기에는 모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가격이 폭등하고 위조품이 유통되는 등 각종 폐단이 일어나자, 나라에서 모시 생산을 아예 금한 적도 있었다. 옛날 문헌을 보면 충청도 전역이 모시 생산지로 언급되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서천군 한산 지역만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감각과 인내 모시 일은 한산 일대의 농가에서 가장 큰 부업이었다. 이곳 여인네들은 누구나 논밭일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모시 작업에 참여했다. 베틀에서 옷감을 짜는 일은 각자 집에서 하지만, 말린 모시풀 줄기를 실로 만드는 과정은 여럿이 모여 함께해 왔다. 모시는 다년생 쐐기풀로 6월, 8월, 10월 세 차례 수확한다. 수확 시기가 빠르면 모시가 약하고 늦으면 거칠기 때문에 8월에 수확하는 모시가 품질이 가장 좋다. 모시풀 줄기의 껍질을 벗겨내면 푸른 속살이 나온다. 이 속대를 물에 담갔다가 볕에 말리기를 서너 번 반복해 푸른 물을 빼면 하얀 섬유질만 남는다. 이것을 태모시라고 한다. 추출한 태모시는 입에 물고 이를 사용해 하나하나 쪼갠다. 이때 혓바닥과 입술의 감각으로 굵기를 가늠하며 일정하게 쪼개야 한다. “태모시 쪼개는 일은 기계로는 할 수 없어요. 숙련된 감각이 필요하거든요. 경험이 부족한 초보자는 입술이 터져 피가 나기도 합니다. 침을 적셔가며 째기 때문에 입안이 자주 마르는 사람은 하기 어렵죠. 사람마다 치아 구조와 혀의 감각이 다르다 보니 각자 쨀 수 있는 굵기가 다릅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쪼개 놓은 태모시 올은 가는 것, 중간 것, 굵은 것 세 종류로 분류한 다음 손바닥으로 비벼서 잇고 실로 만든다. 그 뒤엔 날실을 계량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실의 굵기가 다르므로 한 폭에 날실을 몇 올이나 쓸지 결정하는 단계다. 가느다란 날실이 많이 들어갈수록 고운 모시가 된다. 모시는 보통 7새에서 15새까지 있으며, 10새 이상을 세모시라고 부른다. ‘새’는 피륙의 날실을 세는 단위로, 1새는 80올이다. 모시 한 폭이 보통 30㎝ 내외이니, 10새 모시는 30㎝에 800올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새의 숫자가 높을수록 올이 가늘고 고우며 상품 가치가 높다. “15새 모시는 비단보다 고와서 마치 잠자리 날개 같죠. 그렇게 짜려면 아주 촘촘한 바디가 있어야 하는데, 2006년 바디장이 돌아가신 뒤로는 구할 수가 없어요. 개량 베틀의 금속 바디로는 만들 수 없습니다.” 실을 베틀 바디에 한 올씩 끼운 다음에는 실이 매끈해지도록 풀을 먹인다. 이때 콩가루 풀을 조금만 잘못 발라도실이 엉키거나 끊어지곤 해서 장인도 애를 먹는다고 한다. 이렇게 실이 비로소 완성되면 베틀을 조립해 모시를 짠다. 한 필을 짜는 데 10새의 경우 15일 정도 걸린다. 한 필이면 보통 여자 치마저고리 한 벌과 남자 윗도리 하나를 만들 수 있다. 다 짜낸 직물은 물에 씻어 풀기를 빼고 말린 다음 보관한다. “모시실은 건조하면 쉽게 끊어져요. 그래서 찜통더위 속에서 바람이 통하지 않게 문을 닫고 땀을 쏟으면서 짭니다. 요즘엔 가습기가 있어 습도를 맞추기 쉬우니 일하기가 조금 수월해졌죠.” 모든 공정이 어렵고 까다롭지만, 가장 힘든 것은 마지막 모시를 짜는 단계다. 습하고 무더운 한여름이 고운 모시를 짜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서다. 이렇게 모시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낸 직녀의 손끝에서 완성된다. 한 주먹 정도의 모시 섬유 한 타래를 ‘한 굿’이라 부른다. 10굿 정도는 돼야 한 필의 모시를 짤 수 있다. 피, 땀, 침, 눈물 1945년생인 방 장인은 손놀림만 보면 나이가 무색해진다. “어머니가 저를 젖먹이 때부터 데리고 일하셨어요. 제가 철들어 막상 배우려고 드니까 ‘고생한다’며 못 하게 하셨습니다. 8남매 중 막내인 저만큼은 힘든 모시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녀가 어깨너머로만 알고 있던 모시 짜기를 제대로 배운 것은 결혼한 다음이었다. 시집와서 보니 이웃 마을에 문정옥(1928~2016) 선생이 살고 있었다. 문 선생은 한산모시짜기가 1967년 국가무형유산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첫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사람이다. “운명이었나 봐요. 저는 그분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오며 가며 어르신이 마당에서 모시 일 하시는 것을 구경도 하고 도와드리기도 했어요.” 방 장인의 솜씨와 품성을 눈여겨본 문 선생의 권유에 따라 본격적으로 모시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1980년에 전수자가, 1986년에 이수자가 되었다. “태모시를 째고 한 올씩 잇는 일은 어렸을 때부터 익혔던 터라 어렵지 않았지만, 날실에 풀 먹이기와 모시를 짜는 작업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문 선생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지요.” 그녀는 2000년 국가무형유산 한산모시짜기 2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녀만큼 모시를 솜씨 있게 짜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모시 일이 크나큰 고통에 불과했다. 결국 방 장인이 문정옥 선생의 뒤를 이어 기능보유자가 된 데는 솜씨를 떠나서 일을 좋아하는 마음이 한몫했다. “모시 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시 짜는 데 피, 땀, 침, 눈물이 들어간다’는 말이 있어요.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죠. 하지만 다 만들어 놓고 보면 참 뿌듯해요. 그 재미에 가르치고 배우는 거죠.” 팔순이 된 그녀는 여전히 전승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즐긴다. 딸과 며느리가 이수자로 같은 길을 걷고 있으니 힘들 게 없다고 환히 웃는다. 모든 준비 과정을 마친 후 베틀에서 모시를 짜고 있는 방연옥 장인. 이 작업은 상당히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며, 숙련도에 따라 모시를 짜는 기간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3일에 한 필 정도를 짤 수 있다.

멀리서 비추는 등불 같은 연출

Arts & Culture 2025 AUTUMN

멀리서 비추는 등불 같은 연출 이인수는 작가들의 언어를 사랑하는 연출가이다. 희곡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작가가 구현하려는 세계를 탐구하며 무대 위에 실현한다. 또한 그 과정을 함께하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창조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언제나 마음을 열어둔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연극은 모두가 함께 만드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인수는 최근 한국 연극계에서 주목받는 연출가 중 하나다. 그녀는 깊이 있는 텍스트 분석으로 희곡이 가진 본래의 언어적 힘을 드러내고, 섬세한 연출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그녀의 연출에는 “좋은 작품은 좋은 글에서 시작된다”는 두터운 믿음이 깔려 있다. “너무 행복해요.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지요.” 2015년, 마틴 맥도나 원작의 을 처음 연출한 이후 10년이 흐른 지금까지 쉼 없이 공연을 이어 온 이인수는 지금 행복하냐는 질문에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출한 작품들마다 대부분 호평 일색이었고, 무엇보다 그 과정이 행복한 작업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자신도 속해 있는 ‘글과 무대’라는 창작 집단의 든든한 동료들이 있다. ‘글과 무대’는 네 명의 극작가와 두 명의 프로듀서, 그리고 한 명의 연출가로 이루어진 단체이다. 이들은 각자 개인 작업을 하면서도 동시에 ‘글과 무대’라는 이름으로 함께 작업하는 여정을 수년째 이어오고 있다. 10년쯤 됐으면 번아웃이 올 법하건만, 그녀는 연극 작업이 마냥 즐겁다고만 했다. 한국에서 연극은 큰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OTT를 통해 전 세계적 명성을 얻는 드라마 감독들처럼 높은 인지도가 생기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즐거운지 우문을 던졌더니,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기쁨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극은 이야기의 표현 방식이 무척 다양해요. 같은 이야기라도 정말 소소한 일상처럼 풀어낼 수도 있고, 응축해서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죠.” 2025년 7월 19일부터 8월 3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소극장 무대에서 상연되었던 중 한 장면. 창업 2년 차 스타트업을 배경으로 노동 환경 문제를 고발하는 블랙 코미디다. ‘글과무대’의 중장기 프로젝트 두 번째 작품이며 김윤영이 희곡을 썼다. 글과무대는 이인수 연출가가 속해 있는 창작 집단으로 극작가 김윤영, 진주, 최보영, 황정은이 함께 꾸려가고 있다. 글과무대 제공 새로운 세계 이인수가 매료된 ‘새로운 세계’는 무엇일까? 스포일러의 위험을 감수하고 살짝 이야기를 해보자면, 먼저 최근작인 에 등장하는 천수관음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온라인 플랫폼을 운영하는 한 스타트업을 배경으로 갈수록 열악해지는 노동 환경을 고발하는 블랙 코미디다. 극 중에는 두 명, 세 명의 몫을 넘어 수십 수백 명의 일을 대신하는 느낌으로 살다 보니 손이 천 개가 된 인물이 등장한다. 기상천외한 일이지만, 천수관음으로 변신한 인물은 마치 카프카의 「변신」 속 주인공처럼 천연덕스럽게 사무실에서 일하며 사람들과 어울린다. 독특한 매력의 배우 황석정이 출연하는 역시도 노숙자들이 죽어서 집의 일부가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황당무계한 설정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의 잔인무도한 면모를 너무나 잘 보여주었다. 연출을 하는 동안 이인수 자신도 마음이 아팠다는 또한 마찬가지다. 극작을 가르치는 예술대학 교수와 학생이 주고받는 대화로 구성된 이 작품은 극중극 형태로 한 자매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진행된다. 내밀한 상처로 괴로워하는 여성들을 그려내는 데 있어 그 섬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몰입했다는 관객 평이 많았던 작품이었다. 2023년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상연되었던 윤미희 작가의 는 ‘보존’이라는 주제 속에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액자소설처럼 뒤섞여 있는 작품이다. 소멸과 영원, 보존과 복원에 대해 추상적이고 우화적이지만 결코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보편적 서사가 전개된다. 이인수만의 심도 있는 해석으로 희곡에 숨결을 불어넣었다는 평을 받았다. 국립극단 제공 섬기는 연출 “20년 넘는 배우 경력에서 이렇게 다정한 연출가는 처음 봤어요. 연출가도 다정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죠.” 는 암 병동에 함께 머무는 일곱 명의 여성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 연극에 출연했던 배우 중 하나는 이인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주로 50대 중후반의 남성 연출가들이 주도하고 있는 국내 연극계에서 여성 연출자가 무대를 지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다정한’ 연출로 배우들을 사로잡기는 더욱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인수는 보기 드문 연출가라 할 수 있다. 이인수는 연출이 “텍스트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작가의 의도와 구상을 되도록 충실하게 구현해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연출”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작품을 연출가에게 넘기고 나서는 ‘더는 내 작품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연습실에도 일부러 잘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작가들이 많은 기존 관행으로 볼 때 이인수의 이 말은 참으로 신선하다. 사실 그녀는 극작에 문외한이 아니다. 이쯤에서 그녀의 길고도 긴 ‘가방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녀는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에 진학했으며, 이후 미국 마이애미대학과 피츠버그대학에서 연극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구자로서 커리어도 길지만 극작에 대한 열정도 뜨거워 몇 편의 작품을 썼고, 유학 뒤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녀의 희곡이 다른 연출가에 의해 공연되기도 했다. “정말 힘들었어요. 연출가가 제 작품을 존중하지 않더라고요. 연출가는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마음대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물론 그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이후 그녀는 극작보다 연출에 집중했다. 다양한 연출 기회를 얻었고, 그때마다 작가에 대한 존중을 첫 번째로 생각하며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의도적인 작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글과 무대’에도 ‘무대’보다 ‘글’이 앞서 있다. 서로 존중하는 그 하모니 덕분에 ‘글과 무대’는 그 어느 단체보다 풍성하고 역동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2023년 대학로예술극장에서 초연된 은 관객과 평단의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큰 화제를 모았다. 18세기 후반, 양반집 별당을 배경으로 당대 여성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흔적을 조명하는 이야기다. 글과무대의 진주 작가가 희곡을 썼다. 글과무대 제공 관객과의 싱크로나이즈 “PPT를 띄우고 강연할 때보다 PPT 없이 그냥 이야기할 때 듣는 이들의 집중도가 더 올라간다는 연구가 있대요. 저는 연극이 그런 매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 장소, 실물 소도구가 없어도 이야기만으로 장소와 도구를 상상하게 하는 게 연극이고, 그걸 보는 관객과 배우들의 뇌는 그 순간 싱크로나이즈드 되는 거죠. 저는 그게 연극의 대단한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관객들과의 교감에 대해 질문을 던지자 돌아온 답변이다. 7월 19일부터 8월 3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소극장 무대에 올랐던 공연 시 이런 일이 있었다. 직원들을 사정없이 몰아치는 대표 역할을 맡은 배우에게 객석에서 느닷없이 “미친놈”이라는 욕이 날아왔다고 한다. 그만큼 관객들이 몰입하고 공감했다는 말이겠다. 또 공연을 다 보고 나가면서 “과로하면 안 돼. 과로하면 죽어”라고 일행에게 속삭인 관객도 있었다. 이인수는 그런 순간이 제일 기쁘다고 했다. “제 사촌 언니 딸이 과로사하겠다 싶은 곳에서 일하다가 이 연극을 보고 직장을 그만둔 뒤 새 직장에서 즐겁게 일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정말 좋더라고요” 고전 인문학의 재해석 이인수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고전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일이다. 지난 5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레퍼토리 공연으로 셰익스피어의 를 연출하기도 했거니와 필립 리들리의 나 앨런 베넷의 , 데이비드 그레이그의 등 굵직한 해외 작품들 여러 편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문학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라는 공연에서도 여실히 묻어난다. 미국의 두 남녀 작가 엘리자베스 비숍과 로버트 로웰이 일평생 주고받은 편지들을 묶은 이 작품은 네 명의 배우들이 한 공간에 앉아서 이렇다 할 동선 없이 편지를 읽는 형태로 공연되었다. 짧은 영상에 중독된 현대 사회에서 이런 진중한 작품을 매우 아날로그적 형태로 무대에 올리는 일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터. 그러나 그녀는 ‘관객에 대한 믿음’으로 이 작품을 연출했고, 2시간 가까운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한 사람이 다른 이성과 사랑에 빠져도, 각자의 삶이 어떤 굴곡을 거치든 서로에게 ‘저기 멀리 등불 하나 들고 기다려 주었던 존재’였던 두 사람의 우정의 결, 그 텍스처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인수의 이 변은 그녀의 예술 세계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기도 한 듯하다. 작가의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결을 충실하게 구현해 관객들이 그 작품과 교감하게 하고, 그로 인해 마침내 사람들을 위로하는 등불 하나 켜는 일 말이다. 이인수가 보여줄 다음 등불이 어떤 색으로 빛날지 사뭇 기대된다. 진주 작가가 극을 쓴 는 2021년 두산아트랩 공연에서 쇼케이스로 첫선을 보였고, 이듬해 두산아트센터 소극장 무대에 정식으로 오른 작품이다. 어느 예술대학의 극작 수업에서 교수와 학생이 일대일 수업을 진행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인수 연출가는 세대 간 동행과 연대를 중점적으로 표현했던 쇼케이스와 달리 2022년 공연에서는 등장인물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대면하고 극복해 가는지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한국어의 밤하늘을 빛내는 시의 별자리들

Arts & Culture 2025 AUTUMN

한국어의 밤하늘을 빛내는 시의 별자리들 한국에서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이 처음으로 간행된 시기는 1970년대다. 이때부터 현대시가 널리 읽히며 차츰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국내 출판문화의 양대 산맥이었던 창비와 문학과지성사는 각각 '창비 시선'과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반백 년 동안 꾸준히 발간하며 한국 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1978년 첫 시집을 낸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현재 620권이 넘는다. 시인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는 표지는 이 시리즈의 시그니처이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전 세계에서 한국처럼 시집을 많이 읽는 나라는 거의 없다. 오랫동안 사랑받아 독자들 입에 꾸준히 오르내리거나,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만 즐기는 게 아니다. 한국 독자들은 이제 막 나온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을 꾸준히 읽고, 때때로 수십 권씩 책장에 모으곤 한다. 거의 매년 신작 시집이 종합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서점에서 수시로 열리는 시인들의 낭송 콘서트엔 독자들이 빼곡히 몰려든다. 이에 부응해 출판사들도 열심히 시집들을 출간한다. 2024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유통된 시집 숫자는 무려 1만 3,611종에 달한다. 한국의 시집 출판이 얼마나 활성화되어 있는지는 서점에 가면 금세 알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서점인 교보문고는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다. 여기엔 걷는사람,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민음사, 아침달, 창비, 천년의시작 등의 출판사가 펴낸 시집 시리즈들이 모여 있다. 마치 음반 회사의 레이블처럼 시리즈 각각엔 신작 시집들이 수십 권에서 수백 권씩 같은 디자인을 입고 나와 있다. 한때 시집 시리즈를 내는 출판사 숫자가 100여 곳을 넘었을 때도 있었다. 독일의 문예 비평가 발터 베냐민은 어떤 이념의 존재 형식을 밤하늘의 별자리에 비유했다. 뭇별들이 모여 별자리 하나를 이룩하듯 한국에서 각 출판사가 꿈꾸는 시의 이상은 시리즈 아래 뭉쳐진 수많은 시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하나의 시집은 제각각 ‘잘 빚은 항아리’이지만, 그들은 또한 모여서 시의 장엄한 장독대를 이룬다. 한국어는 언어의 마당에 늘어선 시의 항아리들 속에서 불멸의 힘을 쌓아가고 있다. 시의 대중화 한국에서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이 본격적으로 묶여 나온 건 1970년에 출판된 ‘현대시인선집’에서부터다. 한국시인협회가 기획한 이 선집엔 김광림, 박남수, 박재삼, 신석정, 이형기, 조병화 등 주로 순수 서정 계통의 시인들이 참여했으나, 오래지 않아 맥이 끊겼다. 시집 시리즈가 대중들의 지속적 독서와 수집 대상이 된 건 민음사에서 1973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세계시인선’과 1974년부터 간행한 ‘오늘의 시인 총서’부터다. 고은 시인이 한국어로 옮긴 『당시선』을 시작으로 매년 10~15권 정도 출간된 ‘세계시인선’은 괴테, 보들레르, 랭보, 워즈워스, 바이런, 푸시킨, 휘트먼, 엘리엇, 타고르 등 세계적 시인들의 대표작을 가려 뽑아 원문과 함께 수록했다. 1978년까지 모두 80권이 차례로 간행되었다. 이 시인선은 1990년대와 2010년대에 각각 장정과 판형, 그리고 수록 시집의 구성을 바꾸면서 개정돼 현재에도 출판되고 있다. 살아 있는 시집 시리즈 중에서 가장 오래된 셈이다. ‘오늘의 시인 총서’는 자유와 저항의 시인 김수영의 유고 시집 『거대한 뿌리』를 내면서 시작됐다. 이 총서는 현대성, 혁신성, 실험성이 돋보이는 시집들을 잇달아 펴내, 한국 시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김수영을 비롯해 김춘수, 고은, 김종삼, 황동규, 오규원, 정호승, 최승호, 황지우 등 현대 한국 시에 큰 업적을 남긴 시인들이 참여했다. ‘세계 시인선’과 ‘오늘의 시인 총서’의 성공을 계기로 문학 출판에서 시집 비중이 늘었고, 시의 대중화 현상이 비로소 자리 잡았다. 이어서 기획돼 나온 ‘창비시선’(1975년)과 ‘문학과지성 시인선’(1978년)의 영향이 컸다. 두 시리즈는 1970년대 중후반 각각 첫 책이 나온 이래, 지난 50년 동안 한 해도 쉬지 않고 꾸준히 시집들을 더하면서 한국 현대시의 우람한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2025년 7월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문학과지성사 팝업 스토어 전경. 종이 박스로 제작한 부스에 시집을 비롯해 신간들이 진열돼 있다. 팝업 스토어는 최근 출판사들의 주요 마케팅 전략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1978년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시작으로, 올해 7월에 621번째 시집이 나왔다. 국내에서 가장 큰 시집 시리즈이고, 전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와 짝패를 이루는 ‘창비시선’의 규모도 만만치 않다. 이 시선은 1975년 신경림의 『농무』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모두 521권이 출간됐다. 두 시집 시리즈는 2000년대 초까지는 시적 경향에서도 서로 뚜렷이 대비되면서 한국 시의 지형을 풍성하게 만들어 왔다. 문학의 사회 참여 ‘창비시선’은 현실 변혁 의지와 사회 비판 의식을 내세우면서 민중적 서정성을 담은 시집들을 주로 출판해 왔다. 예컨대 신경림의 『농무』는 한국 농촌의 척박한 현실과 고단한 삶, 농민들의 분노와 슬픔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로써 오랫동안 초월의 세계에 머무르던 한국 시의 언어가 현실적 구체성과 민중적 생동성을 회복했다. 초기에 이 시선에 참여한 시인들은 문학의 사회 참여를 내세우면서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 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고취하는 한편, 민중의 아픔과 저항 의지를 소박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언어로 그려냈다. 『새벽길』(고은),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저문 강에 삽을 씻고』(정희성), 『사상의 거처』(김남주), 『섬진강』(김용택), 『참된 시작』(박노해), 『초혼제』(고정희)는 초기 ‘창비시선’을 대표하는 시집들이다. ‘문학동네 시인선’은 다른 출판사들에 비해 출발이 늦었지만, 대담하고 간결한 디자인으로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24년에는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문구 편집숍 포인트오브뷰와 함께 팝업 스토어를 열어, 스페셜 리커버 시집 3종을 선보였다.   포인트오브뷰 제공  1990년대 이후 ‘창비 시선’은 이념이 붕괴하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노골화하는 시대 흐름에 맞추어 조금씩 변화해 갔다. 민중적 서정성의 영역을 도시 생활에까지 확장하고, 생태주의나 여성주의도 적극 수용했다. 『가만히 좋아하는』(김사인),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김선우), 『어두워진다는 것』(나희덕), 『맨발』(문태준), 『그리운 여우』(안도현),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정호승),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함민복) 등은 이 시기 창비를 대표하는 시집들이다. 실존에 대한 성찰 약 40년의 역사를 지닌 ‘민음의 시’는 민음사를 대표하는 브랜드 중 하나로, 실험적인 시 세계를 펼쳐 보이는 시인들의 시집을 출간하며 다른 출판사들과 구분되는 색깔을 견지해 왔다 민음사 제공  민중주의를 내세운 ‘창비시선’과 달리,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아방가르드 정신을 바탕으로 개인의 내면과 실존에 관한 성찰, 언어에 대한 탐구에 집중했다. 이 시리즈는 “시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고 묻지 않고, “시는 무엇이며, 언어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초기 이 시인선에 참여한 시인들은 정치적∙사회적 폭력, 전통과 관습의 억압 등에 대한 성찰을 문법의 해체, 양식의 파괴 등 언어의 혁신을 통해 보여주는 한편, 산업화한 도시에서 새롭게 나타난 감각 세계를 시 안에 끌어들였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이성복), 『이 시대의 사랑』(최승자),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불쌍한 사랑 기계』(김혜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황인숙), 『잎 속의 검은 잎』(기형도) 등이 이 시기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대표하는 시집들이다. 2000년대 이후에도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그 정신을 잃지 않고, 한국 시의 언어적 혁신과 전위적 첨단을 개척해 왔다. 『수학자의 아침』(김소연), 『이별의 능력』(김행숙), 『생물성』(신해욱), 『슬픔이 없는 십오 초』(심보선),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이원),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진은영), 『혼자 가는 먼 집』(허수경), 『육체쇼와 전집』(황병승) 등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시집들이다. 새로운 서정의 언어 2010년 이후, 시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두 시리즈를 넘나드는 시인들이 늘어났다. 언어의 혁신이 감각의 혁신으로, 감각의 혁신이 인식의 혁신으로, 인식의 혁신이 현실의 혁신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두 시리즈 모두 자유롭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강조하고, 감각적 언어 실험과 새로운 서정의 언어를 결합한 시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창비 시선’에선 안미옥, 안희연, 최지은 등이, ‘문학과지성 시인선’에선 서윤후, 유희경, 임솔아, 이제니 등의 시집이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 밖에도 한국에는 시리즈 시집들이 넘쳐난다. 민음사에서 1987년부터 펴내기 시작한 ‘민음의 시’는 현재까지 334권이 나와 있다. 개성적이고 실험적인 시를 우선하는 이 시집 시리즈엔 김영승, 문보영, 성미정, 성동혁, 안미린, 양안다, 오은, 장정일, 최승호, 황인찬 등의 시인이 참여했다.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창비와 함께 한국 문학 출판을 주도하는 문학동네에서도 2011년부터 ‘문학동네 시인선’을 펴내면서 시집 출판에 뛰어들었다. 이 시인선은 현재까지 238권이 나와 있는데, 무엇보다 2010년대 이후 한국인의 일상과 감성을 새로운 서정의 언어로 담아내는 시도를 꾸준히 선보이는 게 특징이다. 김경주, 김현, 김민정, 박준, 신철규, 이원하 등이 이 시집에 참여했다. 이 외에 천년의시작이 내고 있는 ‘시작시인선’(539권), 걷는사람의 ‘걷는사람 시인선’(126권), 아침달의 ‘아침달 시집’(51권) 등도 한국 시라는 거대한 우주에서 중요한 별자리를 이루고 있다. 창비는 2024년 4월, ‘창비시선’ 500호 출간을 기념해 서울 망원동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시에 어울리는 향과 음악을 추천하고, 한정판 굿즈를 판매하는 등 독자들이 시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체험 공간을 제공해 큰 인기를 끌었다. 창비제공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