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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 & Culture

K-팝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Arts & Culture 2026 SPRING

K-팝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2025년 6월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는 전 세계 모든 연령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경이로운 영향력을 보여줬다.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중 하나인 이 제68회 그래미 어워즈 ‘베스트 송 리튼 포 비주얼 미디어’ 부문에서 수상하는가 하면, 가상 걸그룹 헌트릭스가 제79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축하 무대를 꾸몄을 정도로 이 영화의 인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올해 1월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튼호텔에서 열린 제83회 골든글로브 어워즈에서 매기 강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가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 2관왕을 차지했다. 수상 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오드리 누나, 이재, 레이 아미(왼쪽부터). ⓒ 연합뉴스 의 성공은 ‘성공’이라는 말로 부족하다. 가히 ‘현상’이라 할 만한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넷플릭스가 가지고 있던 기존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웠다. 우선 넷플릭스 최초로, 불과 공개 13주 차에 조회수 3억 회를 돌파했다. 이후 예정된 수순처럼 넷플릭스 역대 통합 조회수 1위에 올랐으며, 한번 탄력을 받은 누적 시청 그래프는 좀처럼 꺾일 줄 몰랐다. 아무리 늦어도 공개 3개월 정도가 지나면 상승세가 점차 둔화하는 일반적 흥행 패턴과는 차원이 다른 기세였다. 명확한 선과 악 구도, 빠른 이야기 전개, 매력적인 캐릭터 등 이 작품에는 대중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선호할 만한 요소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두를 한데 묶어 사람들을 모니터 앞에 오래 잡아둘 수 있게 만든 건 단언컨대 음악의 힘이었다. 그래서 의 흥행은 어쩌면 여타 애니메이션 영화보다 더핑크퐁컴퍼니의 대표 음원 ‘핑크퐁 아기 상어’와 비교하는 게 어울릴지도 모른다. 의 를 비롯해 이런 노래들은 특히 10대 이하 어린이와 청소년 시청자의 마음을 빠르게 사로잡았다. K-팝에 관한 진심 같은 노래나 영상을 반복 청취 및 시청하는 데 익숙한 시청자층의 열광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졌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계속해서 위기설에 시달리는 영화관에 가 직접 등판한 것이다. 그것도 작품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싱어롱 상영’의 형태로 말이다. 2025년 8월 23일 북미에서만 1,700개가 넘는 극장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약 1,000개 상영관을 매진시켰고, 개봉하자마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K-팝을 테마로 한 일종의 뮤지컬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싱어롱 이벤트가 이 작품과 궁합이 잘 맞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주인공 루미처럼 긴 보라색 머리를 하나로 땋고, 첫 곡 부터 영화의 하이라이트 까지 쉼 없이 고조된 분위기로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의 모습을 전하는 외신이 하루가 멀다고 전해졌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시작은 K-팝이었다. K-팝을 진심으로 좋아해 온 사람들 중 상당수는 라는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K-팝의 위력에 편승하려는 마케팅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K-팝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음악 자체보다는 K-팝이 보유한 팬덤의 폭발적 에너지를 탐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콧대 높은 영미권 미디어도, 긴 역사를 가진 유수의 음악 시상식도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던 그 힘은 아군과 적군을 전부 빨아들일 정도로 강력한 자기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K-팝 팬덤은 잿밥에만 관심 있는 이들에게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니었다. 하지만 는 그런 사례들과 확실히 달랐다. 작품을 보면 알았다. 사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단순하다. 비밀을 숨긴 히어로가 사연 있는 적을 만나 서로 교감하다 결국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한다는 이야기.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마음을 주었던 전형적인 히어로물의 공식이다. 다만 그 모두를 감싸는 포장지가 달랐다. 영화 곳곳에 나타난 K-팝과 한국 문화, 익숙한 서울 풍경까지 어디 하나 제작진의 진실된 마음이 어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상적 걸그룹의 재현 스토리만 보면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작품의 개성과 캐릭터의 독자성은 어디까지나 K-팝의 몫이었다.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대대로 이어온 역사와 전통의 ‘데몬 헌터’ 3인조 그룹의 면면부터 보자. K-팝,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짧은 시간 스쳐가는 그들이 누구를 모티프로 삼았는지 단번에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한국 걸그룹의 원조격으로 불리는 김시스터즈, 국내 최초의 댄스 걸그룹 세또래 또는 3인조 1세대 걸그룹 S.E.S.를 지나 태어난 ‘헌트릭스’는 한 치의 오차 없이 K-팝 걸그룹의 이상적 모습을 재현했다. 영화를 보며 유쾌하면서도 감성적인, 소탈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가족과 다름없는 단단한 자매애로 똘똘 뭉친 그들을 좋아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헌트릭스는 영화 내내 노래하고 춤춘다. 라이벌 그룹 사자보이즈도 마찬가지다. K-팝 아이돌 그룹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K-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하다. 에서 신인 보이 그룹의 필수 코스인 ‘청량 콘셉트’를, 에서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했다’ 선언하던 수많은 보이 그룹을, 에서 숨겨둔 카리스마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걸그룹을 떠올리지 않은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심지어 이 노래들 속에는 2020년대 들어 ‘케이팝 세계화’에 눈이 먼 ‘이지리스닝’ 유행 사이로 자취를 감춰 버린 K-팝의 그리운 원형이 하나씩 숨어 있었다. K-팝 팬들 사이에서 ‘교수님들의 조별 과제’라는 반응이 괜히 등장한 게 아니었다. 이 말은 ‘K-팝을 수십 년 연구한 전문가들이 팀을 이뤄 과제를 제출한 것 같은 수준’이라는 뜻으로, 그만큼 완성도가 높았음을 의미한다. K-팝의 정수를 담은 OST 의 OST는 가상의 아이돌 그룹들이 부른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K-팝 스타들을 뛰어넘는 음악적 성과를 거두며 돌풍을 몰고 왔다. ⓒ 넷플릭스 K-팝의 숨은 ‘오리지널리티’까지 놓치지 않은 OST의 주역은 더블랙레이블이다. 빅뱅, 2NE1, 블랙핑크를 프로듀싱하며 YG엔터테인먼트를 K-팝 3대 기획사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프로듀서 테디가 설립한 바로 그 레이블이다. 2021년부터 YG 산하에서 독립해 독자적 활동을 선언함과 동시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 프로젝트를 만난 셈이다. 앨범에 참여한 프로듀서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 영화가 무척이나 즐거운 프로젝트였다고 말한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협업과 K-팝의 성공 공식, 그 가운데에서도 빅뱅, 2NE1 등을 통해 영미권을 중심으로 좋은 반응을 가장 빨리 얻어본 이들의 에너지가 모인 셈이었다. BTS나 블랙핑크 같은 대형 그룹이 아니면 좀처럼 흥행이 쉽지 않다고 하는 북미에서 OST가 유독 좋은 반응을 이끈 이유이기도 했다. K-팝 성공 공식을 꿰고 있는 이들을 등에 업은 프로젝트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현상’에 있어 OST의 인기는 작품 그 이상이었다.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 8주 1위를 자랑하는 타이틀 곡 을 중심으로 OST의 거의 전곡이 사랑받았다. 앨범 가운데 8곡의 수록곡이 빌보드 100위 권에 동시에 진입하는 진풍경 가운데 3곡은 무려 톱 10에 이름을 올렸다. 힘이 빠지려나 싶을 때마다 음악과 영화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화제성을 견인했다. 골든 글로브도, 아카데미 시상식도, 그래미 시상식도 모두 참지 못하고 의 손을 들었다. 덕분에 2026년 상반기까지도 의 인기는 쉽게 식을 것 같지 않다. K-팝은 지금까지 ‘특정 팬덤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쌓아 올린 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K-팝이 낯선 이들에게 팬덤은 어디까지나 경외의 대상이었다. 세상은 그들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보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까지 사랑하게 만드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K-팝의 정수에서 뽑아낸 순정한 에너지가 그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손끝에서 영화가, 음악이 되어 더 먼 곳으로 뻗어가고 있다. 이해의 영역에만 존재하던 K-팝은 이제 서서히 수용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지금부터 시작될 K-팝의 이야기는 분명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젊은 거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Arts & Culture 2026 SPRING

‘젊은 거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2025년 10월 개봉한 영화 은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젊은 감독 윤가은이 6년 만에 선보인 신작이다. 한층 성숙해진 감독의 연출력과 등장인물들의 연기력에 호평이 쏟아지며, 평단과 관객들에게 두루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영화인들과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영화 관람을 독려하는 이례적인 일도 벌어졌다. 2025년 10월 개봉한 윤가은 감독의 은 평단과 관객들에게 두루 호평을 받으며, 낭트 3대륙 영화제 대상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거머쥐었다. ⓒ 바른손이엔에이 은 키스 장면을 상상하게 하면서 시작한다. 관객들은 검은 화면에서 들려오는 음향이 누군가가 키스하며 내는 소리라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비어 있던 스크린은 곧장 흥분한 연인의 얼굴로 채워진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두 남녀, 그중에서도 여자아이에게 맞춰진 초점은 이렇게 자신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이 소녀의 격정을 전부 받아낼 준비를 마쳤습니다.’라고. 이 선언은 윤가은 감독의 전작을 아는 이들에게 더 또렷하게, 마치 전작에 보내는 작별 인사처럼 들렸을 것이다. ‘키스’라는 행위는 과거 윤가은의 영화 속 풍경들과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윤가은 감독은 걸출한 데뷔작 (2016)과 후속작 (2019)은 물론 그 이전에 제작한 (2011)이나 (2013) 같은 단편들에서도 아이들이 친구, 가족, 사회와 맺는 관계를 들여다보는 데 중점을 뒀다.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묘사한 적은 없었다. 순하게 웃고, 말갛게 울며, 자아를 키워가는 유년기에 집중한 것이다. 하지만 여러 인터뷰에서 윤가은 감독은 줄곧 청소년, 특히 여성 청소년의 성과 사랑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밝혔다. 언젠가 자신이 동경해 온 장르인 하이틴 로맨스를 찍을 줄 알았다며 말이다. 영화 전문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그런 풋풋한 작품도 구상해 봤으나 완성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성과 사랑은 어떤 두려움, 공포, 불안, 걱정,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는 무엇이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누가 누구와 입 맞추는 것만으로는 끝맺을 수 없는 이야기가 시나리오로 스며들었다는 뜻이다. 은 그 당혹감에 대한 응답이다. 또 다른 폭력성 열정적인 키스를 마친 주인(서수빈)은 야한 만화를 그리는 친구와 장난친다.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는 아직 모르지만, 담임 교사와 진로 상담을 할 때도 능청스럽다. 집에서는 마술을 연마 중인 남동생, 약간의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는 유치원 원장 어머니와 산다. 아버지의 부재가 이 가족의 흉터와 연관이 있어 보이지만, 세 사람은 주어진 일상을 살 뿐이다. 이처럼 영화는 여느 교실에 하나쯤 있을 법한 씩씩한 인물로 주인을 소개한다. 조금 울퉁불퉁한 면모마저 그 나이에 걸맞은 개성으로 받아들여지도록. 그런데 주인의 급우 수호(김정식)가 교내에서 아동 성범죄자 출소 반대 서명 운동을 벌이고, 주인이 거기에 연명하기를 거부하면서부터 캐릭터에 얽힌 미스터리가 발동한다. 언뜻 문제없이 비치는 이 운동을 향해 거부를 넘어 분노를 표출하는 주인을 보며 관객은 묻고 싶어진다. 주인은 왜 그러는 걸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주인을 날 세우게 한 것은 서명 운동에 쓰인 언어다. 성폭력 피해자의 삶이 ‘파괴된다’는 문장으로 가해자의 복귀를 막으려는 수호를, 주인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자신이 친족 성폭력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서명하지 않음으로써 하고 싶은 말은 간명하다. ‘삼촌이 내게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했어도, 나의 삶은 파괴되지 않았고, 파괴되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의 존엄을 분명히 하는 것을 넘어서 ‘피해자다움’을 해체하려는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주인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학생들 앞에서 고백한 뒤 오해, 의심, 소외의 시간이 따라붙는다. 주인이 받는 익명의 쪽지가 그 상징물이다. 윤가은 감독은 가려진 발신자의 자리에 관객을 초대한다. 피해자를 피해자라는 정체성만으로 이해하려 드는 오만을 지적하다가, 이 영화마저 주인의 진심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물러나기도 한다. 그런 태도를 응축하고 있는 장면이 세차장 시퀀스다. 주인 모녀가 탄 자동차가 거대하고 시끄러운 세차 기계를 통과하는 동안, 주인은 소리를 지른다.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 엄마를 원망하다가, 세상을 나무라다가, 결국 그 모든 혼란을 응축한 존재인 자신을 발산하듯이. 자동차가 깨끗해지는 동안 주인의 음성은 들릴 듯 말 듯 뭉개진다. 영화는 주인의 마음속 얼룩도 조금이나마 지워졌기를 바라며, 엄마의 입을 빌려 말할 따름이다. “한 바퀴 더 돌까?” 중층적 시선 속 인물들은 성폭력이라는 사건을 각기 다른 형태로 통과한다. 누군가는 직접적으로 고통받았고, 누군가는 그의 가족으로서 죄책감을 느낀다. 또 다른 누군가는 비슷한 경험을 했음에도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 없어 두 번 괴롭다. 성폭력은 나와 무관한 타자의 일일 뿐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 모두가 이 영화를 마주한 관객의 속내를 차례로 대변하는 셈이다. 윤가은 감독은 그동안 어린아이들의 시선으로 인간관계와 사회를 그려내며 독자적 영화 세계를 구축해 왔다. 세 번째 장편영화인 은 이전 작품들에서 한 단계 나아가 친족 성폭력을 경험한 고등학교 여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감독의 주제 의식을 한층 확장하고 심화시켰다. ⓒ 바른손이엔에이 윤가은 감독은 익명의 쪽지를 통해 그들 각자가 품을 수 있는 의문까지 재현한다. 주인에게 어찌 그리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느냐고 따지며 조용히 있어 달라고 경고하던 무례함은 영화 끝에서 또 다른 고백으로 이어진다. 나도 너와 같은 일을 겪었다고. 그러나 너와 같이 살 수 없었다고. 너처럼 바로 서기 위해 너를 잊지 않겠다고. 윤가은 감독은 수십 명의 목소리로 마지막 쪽지에 적힌 문장을 관객에게 들려준다. 한 사람으로 특정되지 않는 그 목소리는 다정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내뿜는다. 즉 주인을 위협하던 익명의 목소리는 실은 다른 피해자의 것이었다. 주인도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수호의 동생이자 엄마의 학생인 여자아이를 꼬집어 멍들게 한 적이 있다. 영화는 이 두 가지 사실로써 관객을 시험하는 것만 같다. 피해자가 무결할 때만 연대할 것인가? 성폭력 피해자도 다른 종류의 가해자가 될 수 있지 않나? 주인은 ‘사랑’이 꿈이라고 적었다. 우리는 그 사랑을 함께 이루기 위해 무얼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의 탁월함은 여기에 있다. 포용과 지지 성폭력을 주제로 다룬 기존 영화들이 대체로 사회 고발적 성향을 드러냈던 데 반해 이 영화는 폭력의 순간을 재현하거나 절망의 깊이를 표현하는 대신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 현재의 일상을 어떻게 영위해 가고 있는지 섬세하면서도 비전형적인 시선으로 그려냈다. ⓒ 바른손이엔에이 2025년은 드물게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 모두 나온 해였다. 매해 신작을 발표하는 홍상수 감독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거장의 반열에 오른 예술가들 사이에서, 윤가은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영화 은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한국 영화’로 거듭 호명되었다. 이 영화는 2026년 2월 초 기준, 누적 관객수 약 20만 명을 기록했다. 한국 독립·예술 영화로서는 달성하기 어려운 스코어다. 봉준호, 연상호 등 유명 감독들과 김혜수, 김태리 같은 배우들, 그리고 수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홍보하며 응원하고 지지한 까닭이다. 토론토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바르샤바국제영화제, BFI 런던영화제, 홍콩아시안영화제 등 해외에서도 주목받았다. 평단과 대중의 애정을 두루 얻은 배경에는 성폭력 생존자의 실존을 헤아린 포용력도 있지만, 어렵다는 이유로 지나쳐 온 이야기를 툭 꺼내놓은 용기를 향한 지지도 있을 것이다. 윤가은 감독도 회고했다. “ 을 향한 환대도, 불편한 마음도 모두 감사하고 기적 같았다.” 이 영화를 통해 존재하지만 묻힌 생존자의 목소리를 드높인 윤가은 감독은 또 어떤 작품으로 우리의 눈을 번뜩 뜨이게 할까. 당장 2026년 공개될 단편 앤솔로지 속 그녀의 짧은 영화 를 기다리며 이 젊은 거장의 성장을 기대해 보자.

시간의 흔적을 품다 - 건축가 조성룡

Arts & Culture 2026 SPRING

시간의 흔적을 품다 - 건축가 조성룡 1944년생인 조성룡은 한국 현대 건축에서 독자적 목소리를 내온 건축가다. 그는 공간에 내재한 역사와 공동체의 기억 등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축적되는 유무형의 가치를 존중하고 보존하며, 이를 현재와 연결하려 한다. 공동 주택이나 공공 건축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크고 작은 공동 주택과 미술관, 기념관, 공원 등을 꾸준히 설계했다. 서울 어린이대공원 내에 있는 꿈마루는 원래 골프장 클럽하우스로 지어진 건물이다. 노후화로 인해 철거 후 신축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었지만, 조성룡 건축가는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레노베이션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덕분에 이곳은 어린이대공원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낯설고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이 되었다. ⓒ 김재경 “신축이나 증축만이 아니라, 오래된 장소와 건물을 재생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성룡의 이 말은 그의 건축 철학을 단적으로 웅변한다. 그의 작업은 형태의 완결을 궁극적 목표로 삼지 않는다. 대신 시간이 켜켜이 쌓이며 공간과 건물 표면에 남는 ‘흔적’을 통해 의미가 축적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흔적은 단순히 소멸이나 쇠퇴의 증거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과 장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원이기 때문이다. 조성룡의 건축은 그 자원을 어떻게 촉발하고 보살필 것인지를 묻는 지속적 실천이다. 한반도 남단에 자리한 작은 섬 소록도에 조성된 ‘국립소록도병원 100주년 기념 시설물’이 대표적 사례다. 2016년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기념 조형물 제작에 대한 의뢰가 들어왔지만, 그는 조형물 대신 소록도 마을의 역사를 보여주는 안내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한센병 환자들의 주거지인 이 섬의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할 것인지 고민한 끝에, 그는 1970년대 지어진 낡은 주택 한 채를 레노베이션하여, 이곳에 살았으며 또한 여전히 살고 있는 한센병 환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것이 소록도를 위해 건축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조성룡에게 건축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되는데, 건축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수많은 후배 건축가들에게 모범이 되고 자극을 주었다. 도시와 사람, 시간이 만나 만들어내는 서사를 보다 섬세하게 읽어내도록 만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조성룡의 업적은 완성된 건물 자체에 있기보다는 설계 과정에서 그가 제기했던 질문들이 쌓여 만들어낸 담론에 있다. 공공적 맥락을 중시하는 그의 시각은 설계 공모를 비롯해 교육·주거·문화 시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에 일관되게 드러난다. 조성룡은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공공적 가치를 끊임없이 탐구해 온 건축가이다. 건축물의 화려한 외관보다는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지닌 삶의 방식을 우선시한다. 특히 그는 공간에 내재한 역사의 흔적을 절제된 미학으로 되살려내는 건축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 한겨레신문 설계 공모에서 시작된 문제의식 설계 공모는 으레 제한된 프로그램과 규정, 촉박한 일정이라는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설계 공모는 건축가가 장소의 맥락을 압축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훈련의 장이 되기도 한다. 조성룡에게도 그것은 단순히 좋은 평면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설계 공모의 까다로운 조건들은 조성룡에게 대지가 지닌 역사성을 집중적으로 날카롭게 접근하도록 하는 장치로 작용했다. 초기 스케치와 다이어그램, 비교안들은 이후 실현 단계에서 형태와 기능을 검증하는 이론적·실무적 자산으로 남았다. 조성룡은 1983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선수촌 및 기념공원’ 국제 공모에 당선되면서 건축계에 등장했다. 서울 잠실에 있는 아시아선수촌아파트와 아시아공원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기념성과 일상성의 접점, 공공적 기억의 조직을 고민한 이 작업은 시설이 도시 경관과 시민 삶을 연결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파트의 질서가 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입주자들이 자유롭게 보행할 수 있도록 각 동의 1층을 필로티 구조로 만들어 비웠으며, 주차장과 주거동 사이에 널찍한 마당을 설치했다. 이 경험은 공적 시설의 설계가 기념적 요소와 일상적 사용을 어떻게 조화시킬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어 주었고, 이후 공공 프로젝트에서 장소성·공공성과 관련된 판단들을 반복적으로 촉발시켰다. 그에게 설계 공모라는 장은 결국 완성된 건물 하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질문을 발화하고 검증하는 연습장이었다. 그 연습은 이후 작은 작업이나 큰 공공사업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이응노의 집’은 한국 현대 미술의 거장인 이응노를 기리기 위해 고향 홍성에 세워진 기념관으로, 그의 굴곡진 생애가 건축으로 형상화된 곳이다. 조성룡은 옛 문헌을 조사해 과거의 지형을 살려내고, 완만한 산기슭을 따라 황토색 건물들이 주변 풍경 속에 녹아들도록 소박하게 디자인했다. 그러나 공간 내부는 긴장감이 감돌게 설계하여 외부와 대비를 이루도록 했다. ⓒ 김재경 품위 있게 늙어가는 건축물 국립소록도병원 100주년 기념 시설물은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사용되었던 옛 병사 한 동을 레노베이션한 공간이다. 섬 초입에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던 건물을 없애는 대신 소록도를 찾는 방문객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환영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 김재경 교육 시설은 건축의 사회적 역할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프로젝트 중 하나다. 이런 공간은 단지 기능을 모아 놓은 그릇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 만남과 공적인 행위가 만들어지는 배경이자 촉매다. 조성룡이 인하대학교 학생회관 설계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단순한 프로그램 충족이 아니라, 내부 공간이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공동의 행동 양식을 길러내느냐였다. 그는 계단과 라운지 같은 가변적 회합 공간을 통해 우연한 만남을 촉발하고, 토론과 자발적 활동이 가능해지도록 했다. 조성룡은 또한 건축 재료가 시간의 흐름을 수용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인다. 건물의 벽과 바닥, 손잡이와 계단의 마감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색되고 닳는다. 조성룡은 그것을 건축물의 ‘풍화’라 일컫는데, 이 풍화는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함께 진행된다. 시간이 흐르며 쌓인 손때와 자국이 곧 공동체의 서사가 되는 것이다. 그는 여러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품위 있게 늙어가는 건축’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어떤 건물이든 지어진 그 순간부터 서서히 낡아가기 마련이므로 건물의 노후화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수십 년 전 지어진 낡은 건물들을 무작정 철거한다고 해서 도시 문제가 전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는 건물이 자연스럽게, 품위 있게 풍화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도시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대안이자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조성룡이 재료와 디테일을 신중히 고려하는 이유다. 그가 지은 건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운치가 느껴지는데, 이는 치밀하게 계획된 결과이다. 이는 주거 설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주거 설계에서는 작은 결정들이 일상의 풍경을 바꾼다. 창의 위치, 중정의 크기, 마감재의 촉감 같은 미세한 선택들이 쌓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집이 개인의 기억과 삶의 흔적을 담는 그릇이 된다. 이러한 판단은 단기적 편의가 아니라 장기적 삶의 질을 염두에 둔 설계적 약속이다. 장소성에 대한 관심 어린이대공원 꿈마루의 본체는 한국 현대 건축 1세대인 건축가 나상진이 1968년 설계한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이다. 이 건물이 철거 대신 재생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설계자였던 나상진도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재조명받게 되었다. ⓒ 김재경 한편 조성룡에게 전시와 문화 시설은 건축적 사유를 공개적으로 시험하는 장이다. 1989년 도쿄에서 열린 은 제24회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주목받은 한국 현대 건축을 소개하는 건축 전시였다. 이 전시에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하나로 참여한 조성룡은 관객들과의 직접적 만남을 통해 장소성에 대한 자신의 건축적 사유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읽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장소성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장소의 기후적·경관적 조건을 설계 장치로 전환한 경기도 용인의 근대미술관 계획과 해운대 빌리지 프로젝트 등으로 이어졌다. 최근의 작업들에서도 장소성에 대한 관심은 계속된다. 서울 어린이대공원의 부속 건물인 꿈마루는 공원의 이용성과 프로그램을 연결해 세대 간 경험을 매개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며, 선유도 공원 관련 작업에서는 기존 장소의 생태적·문화적 맥락을 재해석하고 회복하는 노력이 읽힌다. 특히 해운대 빌리지나 선유도 공원처럼 자연과 맞닿은 장소에서는 염분·습기·바람 같은 물리적 조건과 생태적 변화가 설계 시 고려 사항이 되고, 그것들이 표면과 형상을 통해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도록 구성된다. 그런가 하면 미술관 같은 문화 공간은 단지 전시물을 담는 그릇을 넘어서 관객의 경험을 매개하고 도시적 기억을 생산하는 능동적 장치로 작용한다. 조성룡의 작업에서 개념적 스케치와 실천적 건축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다. 드로잉과 모형은 현실적 제약을 넘어서는 상상을 촉발하고, 당선된 공모안이나 실현된 건물은 그 상상을 검증하고 재정의한다. 대한주택공사의 초고층 아파트 당선 사례는 밀도와 수직성, 공동체 형성 문제를 재검토하게 만들었고, ‘바로크’로 불린 설계는 표면의 리듬과 형식적 실험을 통해 시간성과 경험의 중첩을 묻는 시도였다. 조성룡의 개념적 실험은 실현 가능한 전략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현장에서 마주하는 물리적·제도적 제약은 다시 개념을 숙성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 순환은 조성룡의 설계 언어를 다층적으로 만들어 주었고, 단일한 스타일이나 표면적 미학을 넘어 지속 가능한 설계 태도를 확립하게 했다.

스크린의 질감, 환각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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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질감, 환각의 감각 람한(본명 한지혜)의 작업은 매끈하고 꿈결 같은 형광 팔레트 속에서 그로테스크와 아름다움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스크린의 질감을 회화적 경험으로 옮기며,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시각 언어를 제시하는 그녀의 작업은 젊은 세대를 사로잡는다. < Case_01_01(toxin) >. 2020. 디지털 프린트, 라이트 패널. 100 × 100cm. 2020 부산비엔날레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커미션. © 람한, 휘슬갤러리 람한은 자신을 디지털 페인터라 소개한다. 작업 과정에서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는 미술가를 통상 ‘디지털 아티스트’라 부르지만, ‘디지털 페인터’는 그리 흔한 용어가 아니다. 그녀는 붓과 물감 대신 태블릿 펜과 픽셀로 그림을 그린다. 떠오른 생각과 일상의 풍경을 스마트폰으로 기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액정 태블릿에서 스케치와 채색을 거쳐 작품을 완성한다. 스케치부터 마감까지 즉흥성이 크고, 디지털 파일의 기록성을 활용해 끊임없이 수정·갱신한다. 화면 위에 색을 찍고 선을 긋는 작업 과정을 분명한 회화 행위로 인식하는 그녀는 관람객이 작업의 ‘회화성’에 집중하길 바란다. 디지털이 일상화된 오늘날, ‘디지털 페인터’라는 명명은 회화의 정의가 갱신되어야 함을 환기한다. 블로그에서 미술관으로 디지털 환경을 바탕으로 한 람한의 작업은 가상과 현실, 기억과 환상이 뒤섞인 독특한 세계관을 선보인다. 서브컬처의 요소들이 작품에 녹아 있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열성적인 팬덤이 형성되었다. © 람한, 휘슬갤러리 작가의 이름 ‘람한’은 활동명이다. 학창 시절 별명 ‘람쥐’에서 딴 ‘람’에 본래 성 ‘한’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람한은 10대 후반부터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블로그에 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게재해 왔다. 디지털의 가상 세계는 그녀에게 일찍부터 활동의 장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에 재학하면서는 인스타그램(@ram__han)으로 개인 작업을 꾸준히 공개했으며, 출판사의 책 표지 의뢰를 비롯해 애플·LG OLED·빅히트·SM 엔터테인먼트 등과 협업을 병행했다. 2017년 첫 개인전 《나이트캡》을 열고, 일러스트레이션 화집 『Let’s meet at 7pm』을 발간하는 등 소규모 전시와 출판물을 통해 차츰 활동 반경을 넓혔다. 2018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이 개최한 단체전 《유령팔》에 참여하게 되면서 람한은 비로소 제도권 미술계에 본격 진입했다. 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는 SNS를 통해 람한의 작업을 발견하고, 디지털 기반의 가상 세계를 창작 거점으로 삼아 매체와 형식을 실험하는 작가로 그녀를 주목했다. 그동안 온라인에서 작업을 선보여 온 그녀는 이 전시에서 처음으로 대형 설치 연작을 전시장에 구현했다. 가로·세로 3미터 규모의 디지털 페인팅 연작은 ‘컴퓨터 안’의 작업을 ‘컴퓨터 밖’으로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한 고민을 본격화한 계기였다. 디지털 질감을 오프라인에서 충실히 재현하기 위해 그녀는 조명용 필름(백라이트 필름)에 아카이벌 프린트를 한 뒤 뒤쪽의 LED 광원으로 비추는 라이트 패널 방식을 고안·적용했다. 호텔 객실을 모티프 삼은 이 연작에는 어항이 나란히 들어선 벽장, 침대 위에 뛰어오른 흰토끼, 원형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비행기 등이 배치되어 있다. 공간의 기능을 의도적으로 제거해 판타지만을 부각시킨 이 연작의 향수 어린 색감과 구성은 영화 속 러브호텔 장면, 그 화려하면서도 쓸쓸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1989년생의 세계관 < Save our souls_05 >. 2022. 디지털 프린트. 14 x 28cm. © 람한, 휘슬갤러리 < Room type 02 >. 2018. 디지털 프린트, 라이트 패널. 300 × 300cm. 2018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유령팔》 커미션.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소장. © 람한, 휘슬갤러리 휘슬 갤러리 이경민 대표는 “세대론으로만 환원하면 비평의 여지를 좁힐 수 있으나, 작가가 소재를 선택하고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에 동세대의 관심사가 강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1989년생인 람한의 미감은 만화·애니메이션·게임 등 서브컬처에 깊게 닿아 있다. 그녀는 ‘아니메’의 세계에서 성장했으며, 일본 만화 특유의 아름다우면서도 잔혹한 미학과 조형미에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1999년 발매된 넥슨의 롤플레잉 게임 일랜시아가 주는 자유도 높은 세계관과 동서양 미감의 결합은 람한이 펼쳐내는 상상력의 지층을 이룬다. 그녀는 지금도 새로운 게임을 발견하면 그 세계관을 직접 체험해 보는 편이다. 그런가 하면 같은 SF 영화와 피겨 문화 또한 주요한 참조 목록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상징하는 가수 엄정화의 와 이정현의 로 대표되는 사이버 감성의 대중음악 비주얼은 밀레니얼 기억과 결합해 화면에서 재조합되고, 인터넷 대중화 초기에 검열 없이 접한 자극적인 이미지들이 남긴 시각·정서적 흔적은 형광 계열 팔레트의 질감으로 응결된다. 람한은 《유령팔》 이후 2020년 부산비엔날레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 《게임사회》, 2024년 예술경영지원센터 우수 전속 작가 기획전 《다이얼로그: 경계인간》 등 국내 주요 기관 전시와 아트페어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의뢰 작업도 활발하다. 특히 책 표지 작업에서 람한은 SF·판타지 서사를 색감과 구성으로 충실히 시각화하는 발군의 기량을 선보인다. 정세랑의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 리커버 특별판(2020)은 퇴마 판타지의 공기를 유니크한 팔레트로 포착함으로써 독자들의 소장 욕구를 자극했다. 김보영의 『사바삼사라 서』(2024), 정보라의 『너의 유토피아』(2025) 등의 표지 작업은 각 작품의 정서를 관통하는 시각적 입구로 기능했다. 2023년 아트바젤 홍콩 설치 전경. © 람한, 휘슬갤러리 디지털 텍스처의 회화적 전환 < Expectancy >. 2019. 디지털 프린트, 라이트 패널. 150 × 150㎝. 2019년 시청각에서 열린 람한, 박혜인 2인전 《Ghost Shotgun》 설치 전경. © 람한, 휘슬갤러리 2022년과 2024년 휘슬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Spawning Scenery》와 《Inaudible Garden》은 디지털 페인터로서 람한의 야심과 고민을 집약해 보여준 자리였다. 우선 《Spawning Scenery》에서 그녀는 매끈한 디지털 화면의 특성을 극대화하고자 색과 표면의 감각을 밀도 있게 탐구했다. 에서는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사이키델릭한 색채의 끈적하고 반짝이는 덩어리들이 뒤엉키고 폭발하며 화면을 채운다. 인간과 동식물이 결합된 크리처 드로잉 연작과 가상현실 작업 등 이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대중 매체와 서브컬처에 축적된 기억과 감각을 재조합해 판타지를 덧입히고, 이를 관람자의 체험으로 전환하려는 목표를 드러냈다. 한편 《Inaudible Garden》에서는 ‘정원’이라는 주제 아래 식물과 여성 이미지를 다루며 표현 방식을 한층 응축했다. 연작은 제목으로 ‘튤립’을 명시하지만, 백라이트 필름에 아카이벌 프린트된 이미지는 단번에 꽃으로 읽히지 않는다. 온전한 튤립 원본을 그린 뒤 일부를 확대·복제·재조합하고 그 위에 드로잉을 더해 활자처럼 배열한 결과다. 보다 추상화된 이미지를 통해 디지털 회화의 고유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다. 람한은 모니터에서만 포착되는 결, 빛의 번짐, 픽셀과 브러시가 만드는 미세한 차이를 관람자가 그대로 감각하도록 출력과 재현의 여러 단계를 실험한다. 람한의 회화는 도구의 전환을 넘어 지각의 확장에 가깝다. 붓 대신 펜, 안료 대신 픽셀을 들었을 뿐 여전히 회화의 본질을 수행하며, ‘디지털 페인터’라는 명명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굳혀가고 있다.

과거의 풍속이 현재의 트렌드가 되다

Arts & Culture 2026 SPRING

과거의 풍속이 현재의 트렌드가 되다 온양민속박물관은 한국인들의 전통 생활 양식과 관련된 민속자료를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시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사립 민속 박물관이다. 방대한 유물을 주거·생업·의례 등 유형별로 구분해 조명한다. 전시관뿐 아니라 야외 정원도 잘 조성돼 있어, 역사 교육과 휴양을 겸하는 복합 문화 공간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2024년, 온양민속박물관이 개관 46주년을 맞아 기획한 전시 모습. 좌식 생활 문화를 대변하는 소반의 다양한 쓰임새와 형태를 살펴보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전시다. 온양민속박물관 제공 온양민속박물관은 충청남도 아산시에 위치한 한국 최초의 사립 민속 박물관이다. 총 8만 2,644m² 대지에 본관, 구정아트센터, 카페, 정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인이 운영하는 박물관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이 박물관은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인 계몽사를 창업한 구정 김원대(1921~2000) 회장이 1978년 사재를 털어 설립했다. 1970년대 한국은 빈곤 퇴치 및 산업화를 목표로 한 정부 정책의 영향으로 우리 고유의 생활 문화가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 회장은 민속학, 고고학, 서지학계 학자들로 자문단을 꾸리는 한편 학예사들이 전국을 다니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민속품들을 수집했다. 전통 의복부터 밥그릇, 소반, 쟁기, 지게 등 불과 몇 십 년 전 이 땅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생활용품이었지만, 오늘날엔 쉽게 볼 수 없는 희귀품들이다. 민속 유물의 가치 온양민속박물관 본관은 3개의 상설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과거 한국인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 1만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은 본관 1층이며, 입구 맞은편에 뮤지엄숍이 자리한다. 온양민속박물관의 소장품 가운데 고려(918~1392) 시대 법회에 사용된 청동북, 19세기 후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왕세자 의례용 갑주(갑옷과 투구)와 갑주함, 고종(재위 1863~1907)의 아버지 이하응이 착용한 것으로 알려진 거북 흉배 등 일부는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유산으로 지정됐다. 소장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도 흥미롭다. 제작 연도(1162)와 함께 봉안처와 출토지가 분명한 천수원명 청동북의 경우, 이순신(1545-1598) 장군의 묘소 인근에 거주하던 한 주민이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중 1977년 발견했다고 한다. 단순히 고물이라 생각한 그는 “비누 한 장 값도 되지 않는다”는 고물상 말에 도로 가져갔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화재관리국에 연락했고, 박물관과 연결되었다. 비로소 유물의 가치를 알게 된 그는 설립자가 건넨 사례비를 끝내 마다하고 기증했으며, 박물관의 보존과 연구를 거친 청동북은 발견된 지 47년 만에 보물로 지정됐다. 제3 전시실에는 실용성과 조형미를 겸비한 전통 공예품을 비롯해 한국인의 민간 신앙과 놀이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통 연희 중 하나인 탈놀이에 쓰이는 다양한 종류의 지역별 탈들이 한쪽 벽에 걸려 있다. 야외 전시장 한쪽에 자리한 전통 가옥은 1878년 지어진 너와집(소나무 판재로 지붕을 올린 집)으로, 강원도 삼척에서 박물관 자리까지 해체해 옮겨오는 데 당시 돈 1억 원이 들었다고 한다. 현재 화폐 가치로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이다. 당시만 해도 집 한 채를 먼 지역까지 이전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 너와집은 단순한 건축 유물을 넘어, 산간 지역 생활 문화와 함께 박물관의 수집 역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장 가치가 높다. 이러한 민속자료는 부유한 사람들이 구입하는 값비싼 미술품이나 골동품과 달리 지금 보존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낳은 결과다. 건축 기행의 명소 본관 건물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구정아트센터는 건축가 이타미 준이 한국에서 가장 처음으로 설계한 건축물이다. 중앙홀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 개의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각종 문화 행사와 특별 전시가 이곳에서 진행된다. 온양민속박물관은 건축 순례지로서 빠지지 않는 명소다. 정문에서 바로 보이는 본관은 한국 현대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김석철(1943-2016) 건축가가 설계했다. 그는 서울 예술의전당,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하다. 웅장한 본관 건물은 주변 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한국 전통 건축물 특유의 긴 처마와 누마루가 안정감을 주고, 건물 외관과 내부 벽면은 붉은 벽돌과 검은 벽돌을 가로 쌓기와 세로 쌓기로 교차해 조화를 이룬다. 설계 당시 백제(기원전 18~서기 660) 시대의 무덤인 무령왕릉 내부의 벽돌 쌓기 방식과 색채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옛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유물 1만여 점이 전시된 본관은 총 6만 4,800m² 규모로 3개의 상설 전시실과 특별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제1전시실은 관혼상제를 중심으로 한 한국인의 일생과 의식주, 제2전시실은 농어업과 사냥, 채집 등 한국인의 생업, 제3전시실은 각종 민속 공예와 민간신앙, 놀이, 학술과 제도 등으로 구분해 전시 중이다. 각 전시실의 짜임새 있는 구성과 동선은 관람객의 몰입도를 한층 끌어올린다. 이는 건축 설계 단계부터 각 공간에 전시될 유물의 실제 크기와 배치를 계산해 전시실을 구성한 결과다. 또한 제1전시실은 실제 전통 가옥의 부엌, 안방, 대청, 사랑채 등으로 구성하고 과거를 ‘체험’하기 위해 외부 빛을 최소화한 반면, 제2전시실의 경우 상단 창문을 통해 자연광을 들여 각종 생활 도구의 현장감을 극대화했다. 이와 같은 자연광은 높은 천장고를 확보한 중앙 홀의 상단 창문을 통해서 매일 달라지는 빛의 장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온양민속박물관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건축물이 있다. 1982년 준공한 구정아트센터는 재일 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1937-2011)의 국내 첫 건축물이다. 그는 2005년 프랑스 예술 훈장인 슈발리에와 레지옹 도뇌르, 2010년 일본 최고의 건축상인 무라노 도고상을 받은 세계적 건축가로 국내에선 제주 포도호텔, 수풍석뮤지엄, 방주교회 등을 설계했다.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건축에 앞서 돌이 많은 이 지역의 특징을 연구했다. 그러고는 돌을 캐 돌담을 쌓고 질 좋은 황토를 채취해 주민들과 함께 벽돌을 만들었다. ‘이순신이 성장하고, 죽어서 묻힌 곳’이라는 지역성을 담기 위해 건물은 전체적으로 이순신을 상징하는 거북선을 형상화했다. 멀리서 봐도 타원형 지붕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정아트센터의 중앙홀 내부로 들어서면 흰색과 흙벽돌이 어우러진 건축물이 그 자체로 예술품임을 알 수 있다. 탁 트인 공간에 두 개의 큰 기둥이 한눈에 들어오고, 11m가 넘는 천장고와 가로 세로 겹겹이 교차하며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목재 대들보를 보노라면 흡사 거대한 목선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든다. 박물관에서 힙플레이스로 온양민속박물관은 개관 당시 관람객이 줄을 서서 들어갈 정도였지만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다. 그러다가 2013년 구정아트센터를 레노베이션해 공연과 전시, 문화 행사를 아우르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재개관하면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특히 2022년 지역의 공예 자원 개발을 목적으로 설립한 아산공예창작지원센터와 카페 온양이 생기면서 관람객의 연령대가 크게 낮아졌다. 지원금과 기부금 의존도가 높은 사립 박물관으로서 가장 큰 현안은 홍보와 관람객 유치다. 요즘 홍보에 한몫하는 것은 박물관 굿즈 브랜드 ‘Objet Onyang’이다. 지역 작가들과 함께 개발한 전통 탈 마그네틱은 신세계백화점 본점 하우스오브신세계 숍에서도 판매될 만큼 인기 상품이다. 또 팽이치기, 연날리기 같은 전통 놀이 체험 키트는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곳은 개관 초기부터 축적된 자료들을 디지털화하는 아카이빙 작업을 통해 향후 체계적인 전시와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다. 올해 1월 김은경 관장은 박물관 재건과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김 관장은 설립자의 3남 2녀 중 막내딸이다. 온양민속박물관은 2028년 개관 50주년을 앞두고 전시와 도록 발간을 병행하는 프로젝트를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최근에는 구정아트센터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외국인 관광객도 부쩍 늘었다. 박물관이 트렌드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 관람객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본관 제1 전시실에는 의식주 생활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유물들이 생애 주기별로 진열되어 있다.

고전(古典)에서 걸어 나온 전위적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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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典)에서 걸어 나온 전위적 에너지 단편선은 ‘언어와 소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철학적 아티스트’라 불린다. 2004년 처음 무대에 서며 뮤지션으로서 첫걸음을 시작했다. 이후 실험적 음악 세계를 지속적으로 선보이며, 한국 인디 음악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국내 인디 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꼽힌다. 2024년 결성된 밴드 단편선 순간들의 리더 단편선은 독특한 발성을 지닌 싱어송라이터이다. 또한 특정 장르에 갇히지 않고 발군의 역량을 발휘하는 프로듀서이기도 하며, 편곡과 기획에도 참여하는 등 다방면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오소리웍스라는 인디 음악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당신은 나 같은 한국 영화의 기괴한 아름다움에 매혹돼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시각적 미학을 청각으로도 경험해 볼 준비가 돼 있는가? 그렇다면 이제 한국 인디 음악계를 대표하는 ‘미학자’ 단편선을 만나볼 차례다. 그의 본명은 박종윤이며, 1986년생이다. 2020년 말, 필자는 패션 잡지 『W Korea』의 연말 특집호에서 ‘올해의 프로듀서’를 선정하는 설문에 “단편선”이라고 답한 적 있다. 반면에 다른 두 명의 음악 평론가들은 K-팝 프로듀서를 지목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한 해를 결산하는 자리에서 대중은 잘 모를 수도 있는 인디 음악가 단편선을 꼽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무렵 나온 싱어송라이터 천용성과 전유동의 음반은 인디 팝의 풋풋함을 유지하면서도 통일성과 독자적 미학을 갖춘 쾌작이었다. 그리고 그 음반들의 크레딧 끝엔 “Produced by 단편선”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프로듀서로서 단편선은 미니멀한 포크 음악, 앰비언트적 음향 실험, 록적인 소용돌이를 오가면서 아티스트들이 그려놓은 스케치를 대담하게 채색했다. 호방하고 섬세한 그의 지휘봉은 예사롭지 않았다. 러시아 단편선 ‘단편선’이라는 예명은 어디서 왔을까. 서울 홍익대학교 인근에 자리한 라이브 카페 ‘언플러그드 홍대’에서 만난 단편선은 이 질문과 관련해 러시아 작가들의 이야기부터 꺼냈다.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는데, 긴 소설보다는 짧은 소설이 좋았죠. 톨스토이나 체호프의 단편선처럼 말이죠. 조금 더 커서 음악을 하게 되면서, 저도 그들처럼 이야기를 잘 버무리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특히 그는 체호프의 작품들 가운데 「갈매기」와 「관리의 죽음」에 열광했다. 격조 있는 문어체를 통해 진행되는 스토리에는 엽기적이고 희한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부조리의 미학이 광채를 뿜는 보석 상자를, 단편선은 마음에 깊이 담아두었다. 2000년대 초는 한국에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온라인 취향 공동체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당시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었던 단편선은 나이는 어려도 ‘입심’은 셌다. 그는 ‘웨이브’ 같은 유명 음악 웹진에서 논객으로 활동했다. 해학적이면서도 뼈를 때리는 구석이 있는 그의 유쾌한 미문은 꽤 인상적이었고, 당시 활동하던 음악 평론가들의 눈에도 띄게 되었다. 이후 대중음악 웹진 ‘보다’가 창간되었을 때 정식 필자로 영입되어 음악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사실 중학교 다닐 무렵 오락실에 있던 리듬 게임 DDR을 통해서였어요. 거기 나오는 음악들이 너무 좋았고, 미디가 보급되던 시기라서 그런 음악을 실제로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강했죠. DDR 같은 리듬 게임에 심취한 이들이 모이는 온라인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당시 모임 대표였던 박장미(현재 밴드 ‘단편선 순간들’의 기타리스트)도 만났죠.” 단편소설을 좋아하고 리듬 게임에 심취했던 아이는 스무 살이 되면서 기타를 들었다. 2004년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한 그는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결성해 홍대 앞 라이브 클럽 ‘롤링스톤즈’에서 공연했다. 장르는 비교적 점잖은 모던 록이었다. 자립, 독립, 전위의 음악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프로듀싱 음반인 포크 듀오 선과영의 , 단편선의 첫 음반 , 오소리웍스가 발매한 소음발광의 , 프로듀싱 음반인 싱어송라이터 천용성의 , 프로듀싱 음반인 천용성의 , 프로듀싱 음반인 싱어송라이터 전유동의 . 오소리웍스 제공 한국 인디 음악인들 사이에서 아직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하나의 투쟁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단편선이다. 2009년, 홍대 앞 작은 식당 ‘두리반’이 지역 재개발로 인해 강제로 철거될 위기에 놓였다. 대표적 서민 음식인 칼국수를 파는 식당을 지키기 위해 홍대 인근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이듬해 단편선도 그곳에 갔다. 아방가르드 활동가이자 음악가인 한받, 기획자 박다함, 블루스 음악가 하헌진 등을 만난 단편선은 그들과 함께 공연과 입담으로 유쾌함과 처절함이 교차하는 싸움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중 2010년 5월 1일, 120주년이 되는 노동절을 맞아 단편선을 비롯한 젊은 음악가들이 기획한 페스티벌 ‘51+’가 작은 돌풍을 일으켰다. “기껏해야 20대 초반이던 저희가 무대의 취지를 설명하며 한 팀, 한 팀 섭외해 나갔고, 결국 그날 하루 동안 70여 팀이 공연에 합류할 수 있게 됐어요. 그 장소가 지금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홍대입구역 앞 AK 플라자 자리에요.” 단편선은 2012년 솔로 데뷔 앨범 을 낸다. 당시 활동명은 ‘회기동 단편선’이었다. 모교인 경희대가 있었던 동네 ‘회기동’에, 자신이 즐겨 읽고 좋아했던 ‘단편선’을 결합한 이름이다. 2013년 싱글 를 냈을 때는 홍대 앞 게릴라 이벤트에 여장을 하고 나타나 화제가 됐다. 단편선은 그렇게 뼛속까지 ‘자립’과 ‘독립’과 ‘전위’로 무장한 인물이었다. 이듬해 ‘단편선과 선원들’이라는 독특한 밴드가 등장했다. 통기타, 베이스기타, 바이올린, 퍼커션으로 구성된 이 밴드는 록 밴드의 전통적 편제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다. 그들의 정규 앨범 (2014)과 (2016)은 제목처럼 원시적이고 공격적이면서도 꿈결 같은 스토리텔링을 담은 수작이었다. 은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앨범 트로피를 가져갔다. 그들의 노래에는 설화적 캐릭터가 등장하곤 한다. 사람들의 모든 것을 품어줬지만 정작 외톨이가 된 거인(‘거인’)이나 사람들을 홀리고 춤추게 하는 초현실적 가객(‘이상한 목’) 같은 기괴하고 아름다운 존재 말이다. “사람들이 제 음악을 들었을 때 쾌적함을 느끼기보다는 뭔가 알 수 없는 곳에 빠져들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애니메이션 처럼요. 환상적인 경험을 겪은 뒤 변화가 생기거나 성장하는 것처럼 제 음악을 듣기 전과 들은 후 사람들이 뭔가 달라지는 경험을 했으면 해요.” 2025년 열린 부산국제록페스티벌 무대에서 공연 중인 단편선 순간들. 이들은 원초적이면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무대를 만들어냈다. 2000년부터 시작된 부산국제록페스티벌은 국내 최초이자 최장수 록페스티벌이다. 부산문화관광축제조직위원회 제공 음악적 미학의 집대성 는 단편선 순간들이 2024년 신작 를 발표하기 전 진행했던 팝업 스토어 형식의 전시회다. 오디오 다큐멘터리 상영, 대담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오소리웍스 제공 단편선은 “내러티브가 명료하고 순차적으로 술술 풀리는 음악보다는 웃기고 재미난 아이디어가 있는 희한한 음악을 내 몸과 마음이 원한다”고 말했다. 음악에 홀수 박자와 변칙 박자를 자주 쓰는 것도 그런 시도의 일환이다. 현재 그가 몸담고 있는 밴드 ‘단편선 순간들’의 노래 중에도 5박, 6박, 7박을 오가는 ‘불’이나 ‘독립’ 같은 곡이 그러하다. 2025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앨범 상을 받은 단편선 순간들의 는 단편선이 펼쳐 보이는 음악적 미학이 집대성된 결과물이었다. 총 10곡이 실린 이 음반의 첫 트랙은 영국 작곡가 엘가의 을 록 음악의 미학으로 비튼 서곡 ‘Land of Hope and Glory (and The Things)’다. 그리고 마지막 트랙에는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곡을 몽환적인 연주곡으로 재해석한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가 놓여 있다. 즉, 클래식 명곡을 앞뒤에 배치한 구조다. “클래식과 팝 음악 또는 인디 음악 사이에 있다고들 생각하는 위계질서를 파괴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죠. 두 곡들은 대단히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론 팝 음악이 가진 말도 안 되게 캐치한 후크가 있는 곡들이잖아요.” 이 앨범의 타이틀곡 ‘음악만세’는 발표 1년이 채 되지 않아 한국 인디 신의 새로운 국가 같은 위상을 차지했다. 2025년 여름, 여러 대형 야외 페스티벌에서 수천, 수만의 관객들이 단편선 순간들과 함께 “음악 만세”를 외쳤다. 특히 후반부에 삽입된 실제 시위 현장의 외침은 청량감 넘치는 록의 생동하는 기운과 합쳐져 묘한 뉘앙스와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는 2022년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구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퇴직 연설을 노래에 삽입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단편선은 여전하다. 그는 클래식을 탐미하되 인디를 지향한다. 톨스토이와 체호프의 작품이 지닌 고전성을 좇되 낯설고 날이 선 ‘뿔 달린’ 인디 록 음악을 엔진으로 삼아 전진한다. “제 음악 인생을 시리즈로 비교하면, 2편의 결말 정도쯤 와 있는 것 같아요. 이제 마흔 살에 이르렀지만, 쉰 살까지 가는 여정에 뭔가 또 엄청난 게 기다리고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어벤져스로 치면 타노스가 등장하기 직전 정도의 긴장감이 있는 거죠. 음악에 관한 글을 쓰든, 제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든, 다른 사람의 음악을 제작하든 음악 일을 오래 하는 게 목표예요. 이제 AI가 뚝딱 음악을 만들어주는 시대가 왔어요. 저는 이럴 때일수록 자신의 취향, 관점, 태도에 더욱 솔직한 음악이 중요하다고 봐요. 사람들이 힘껏 용기를 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낯설고, 어둡고, 기괴한 세계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데뷔한 단편선은 이후 자신이 발표한 음반은 물론 프로듀싱한 앨범들에도 수상의 영예를 지속적으로 안기며, 한국 인디 음악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오른 ‘해녀’

Arts & Culture 2026 SPRING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오른 ‘해녀’ 제주 해녀 문화는 수많은 세대를 거쳐 전승되며 공동체 중심의 독특한 전통을 형성해 왔다. 최근 해녀를 소재로 한 K-드라마와 다큐멘터리가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소개되면서, 해녀에 대한 국제적 관심도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올해 1월 ‘haenyeo(해녀)’가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정식 표제어로 등재되었다. 제주 해녀 문화는 한반도 남단에 위치한 섬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여성 공동체 문화이다.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26년 1월에는 'haenyeo’라는 단어가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등재되었다. ⓒ 한국관광공사 한반도 남단에는 거친 계절풍이 깎아 만든 현무암의 섬 제주가 있다. 수백 년 동안 섬사람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 척박한 토양과 가늠할 수 없는 기상 조건으로 인해 농경이 어려워지자 그들은 생존을 위해 바다에 의지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해녀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별도의 호흡 장비 없이 바다로 뛰어들어 해산물을 채취하며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이다. 시간이 흐르며 이들의 노동, 환경에 대한 지식, 신앙적 의례와 공동체적 연대가 결합되면서 고유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제주의 자연환경이었다. 과거에는 남성들도 함께 참여했으나, 점차 여성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8~19세기에 이르러 여성들이 수중 채취 작업의 대부분을 전담하며 가계 경제에서 핵심적인 주체로 부상했다.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전문적인 해녀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부터다. 고대 문헌에 의하면 이들은 주로 ‘잠녀’ 혹은 ‘잠수’라 불렸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재위 491-519) 503년 ‘진주 캐는 사람’에 대한 언급이다. 조선 시대(1392-1910)에 들어서면서는 확실한 분업이 이루어졌다. ‘포작’이라 불리는 남성들이 깊은 바다에서 전복을 따고, 여성들은 주로 해조류를 수확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남성 잠수부들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물질’은 여성들이 전담하게 되었고, 이들을 ‘바다의 여인’, 즉 ‘해녀’라 부르게 되었다. 공동체 윤리 제주 해녀들은 예로부터 생계를 잇기 위해 별도의 장비 없이 맨몸으로 깊은 바다에 잠수해 해산물을 채취했다. 이러한 어업 방식의 가치를 인정받아, 2023년 유엔 세계식량농업기구가 지정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해녀박물관 해녀들은 산소통 없이 오로지 숨 참기, 경험, 강인한 체력에 의존한다. 숙련된 해녀들은 약 20미터 깊이까지 내려가 전복, 성게, 소라, 해조류 등을 채취한다. 수면 위로 올라올 때 이들이 내뱉는 독특한 휘파람 소리인 숨비소리는 호흡을 조절하는 동시에 자신의 안전을 알리는 신호이다. 해녀들은 숙련도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뉘며 작업 수심도 각각 달라서 상군은 가장 깊은 곳에서, 하군은 해안가에서 작업한다. 해녀는 절대 혼자 잠수하지 않고 마을 단위의 공동체로 움직인다. 이들에게 협업은 필수다. 이러한 공동체 윤리는 바다 너머까지 이어진다. 무사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인 잠수굿을 올리고, 노를 젓거나 쉴 때는 삶의 고단함과 해학, 강인한 회복력을 표현한 민요를 부른다. 지속가능성이 세계적 화두가 되기 훨씬 전부터 해녀들은 어린 전복을 잡지 않고 산란기에는 조업을 금하는 등 자원 관리의 지혜를 실천해 왔다. 이러한 생태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제주 해녀 문화는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에 등재되었다. 해녀의 역사 또한 제주 너머까지 이어진다. 19세기 후반부터 해녀들은 한반도 전역과 일본, 중국,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원정을 떠났다. 1930년대에는 제주도 밖에서 활동하는 해녀의 수가 수천 명에 달했다. 이러한 이동성은 근대 한국사에서 나타나는 광범위한 노동 이주와 문화 교류 양상을 반영한다. 해녀의 수는 1960년대에 정점을 찍었다. 제주 해안가 마을의 소녀들이 물질을 배우는 것이 당연시되던 때였다. 이후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감귤 농업이 확대되고 관광 산업이 발전하며 제주의 모습은 바뀌었다. 새로운 생계 수단이 등장함에 따라 해녀 인구는 급감했다. 현재 남은 해녀 대부분은 고령층이고, 해녀 공동체의 규모는 계속해서 축소되고 있다. 제주 해녀들 사이에서는 물질을 하기 위해 인근 해역으로 배를 타고 나가거나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노를 저으면서 부르는 노동요가 전승된다. 일반적으로 ‘해녀 노래’라 불리는 이 민요는 노 젓는 동작에 맞추어 단순하면서도 역동적인 리듬이 사용된다. ⓒ 언스플래시 세계 공용어가 되다 해녀 인구가 감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녀에 대한 국제적 인식은 오히려 높아졌다. 한국어 문헌은 방대하게 존재하나, ‘해녀’라는 단어는 영문 자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과 같은 권위 있는 역사 사전에 새로운 단어가 등재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문헌적 근거가 쌓여야 한다. ‘해녀’라는 용어는 최근 학술 연구, 다큐멘터리,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2025)와 같이 제주를 배경으로 한 K-드라마 덕분에 전 세계 시청자들은 제주의 해안 문화를 만나볼 수 있었다. 2026년 1월, 해녀는 "한국에서 생계 수단으로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 잠수사"라는 정의와 함께 한국 문화에서 유래한 단어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등재되었다. 영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최고의 기록인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은 영속적 의미를 갖는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영어권에서 꾸준히 사용된 어휘들을 수집하여 해당 언어의 역사적 기록으로 보존하고 있다. 한번 등재된 단어는 영구적으로 영어의 일부가 된다. 그동안 제주 해녀의 삶은 주로 한국어 문헌 속에만 머물러 있었다. 독보적인 문화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해녀’라는 단어 자체가 영어권이나 그 외의 외국어 문헌에 등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이제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등재되면서 그 이름과 역사는 세계 공용어 속에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비록 이것이 전통의 존속을 보장하지는 못할지라도, 해녀의 삶이 인류의 언어와 세계 문화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음을 인정받은 셈이다. 물질은 죽음의 위험이 뒤따르는 일이기에 해녀들은 바다에 나가기 전 신들에게 안전과 풍요를 빌곤 했다. 사진은 영등굿을 지내는 장면으로, 제주 지역의 대표적인 마을굿이다. ⓒ 국가유산청

지금 대중문화가 무속을 다루는 방식

Arts & Culture 2025 WINTER

지금 대중문화가 무속을 다루는 방식 최근 들어 한국 무속을 모티프로 삼은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부쩍 늘었다.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이고, 예능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또한 무속인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상투적 묘사에서 탈피해 새로운 시각으로 이들을 그려낸다. 무속을 매개로 한 한국식 오컬트는 무속인들이 신의 중재자로서 귀신을 달래고 위로한다는 점에서 서구의 오컬트 장르와 차별화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는 이러한 한국 무속의 특성을 잘 담아내며, 한국식 오컬트가 하나의 장르적 계보를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는 ‘K-팝’과 ‘데몬 헌터스’의 결합이 절묘한 애니메이션이다. 일반적으로서구의 오컬트 장르에서 데몬 헌터스는 구마 사제를 가리키지만, 이 작품에는 무당이 등장한다. 각자의 신을 섬기는 무당은 무속 의식인 굿을 진행하는 동안 접신하고 신탁을 전달한다. 선악 구도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구마 사제는 악령들과 싸우고 이를 물리치는 존재로, 어찌 보면 ‘파이터’에 가깝다. 하지만 무당은 악령들(한국에서는 원귀들)과 싸우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고 맺힌 한을 풀어줌으로써 응당 가야 할 저승으로 고이 보내준다. 그런 점에서 무당은 파이터라기보다는 ‘카운슬러’에 가깝다. 영매자인 무당의 역할이 구마 사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이러한 차이점은 사후 세계와 귀신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관점이 서구와 다른 데서 연유한다. 한국에서는 귀신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에는 무당의 후예인 헌트릭스 멤버들이 악령들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주인공 루미가 진우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이 싸움은 대결보다는 구원에 가깝다. 루미는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혼을 팔아 악령이 된 진우를 물리치는 게 아니라 구원해 주려 애쓴다. 루미의 태도는 무당의 본질적 역할과 맞닿아 있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의 헌트릭스가 무대에서 팬들과 교감하는 과정은 무당이 굿을 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이 의식은 전통적으로 춤과 노래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로 그 점에서 굿은 K-팝 아티스트들의 공연과 유사하다. 무당들이 굿으로 원혼을 위로해 주는 것처럼 K-팝 아티스트들은 춤과 노래로 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 국내 대중문화에서 무당이 긍정적 역할로 묘사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무당은 대개 ‘신병’이라 불리는 원인 모를 병을 앓다가 내림굿을 받고 신을 받아들이는 혹독한 운명을 지녔다. 1970~8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는 무당의 영적인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미신으로 치부했다. 자연히 TV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무당도 대개는 무섭고 이질적인 존재로 그려졌다. 하지만 최근 K-콘텐츠 속에 나타나는 무당들은 훨씬 밝아졌고 당당해졌다. 영화 에 등장하는 무당 화림(김고은)은 가죽 롱코트를 휘날리며 귀신과 맞서는 스타일리시한 모습을 선보인다. 화림 같은 젊은 세대 무당은 올해 상반기 방영된 SBS의 이나 tvN의 같은 TV 드라마에도 등장한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의 여주인공 여리(김지연)는 첫사랑 윤갑(육성재)의 몸에 빙의한 이무기 강철과 함께 왕가의 저주를 풀어내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동안은 서사적 필요에 의해 조연이나 단역으로 등장했던 무당이 판타지 액션과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올라선 것이다. 이는 현재 무당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말해준다. 이런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잘 보여주는 작품이 다.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이 작품은 대본집이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을 정도로 화제성이 높았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성아(조이현)는 ‘천지선녀’로 불리는 고등학생 무당이며, 저주받은 존재인 첫사랑 견우(추영우)를 사랑의 힘으로 지켜내는 수호천사 같은 역할로 나온다. 견우를 구하기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당이 지니는 ‘힐러’로서의 면모를 강조한다. 의 루미와 유사한 설정이다. 국내 OTT 플랫폼 티빙의 오리지널 시리즈 은 귀신 현상을 겪은 제보자들과 무속인들을 밀착 취재해 귀신과 무속이라는 주제를 다각도로 탐구한 다큐멘터리다.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는 점에서 호평받았다. 티빙 제공 새로운 접근 방식 젊은 세대 무당이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 시대적 변화는 라는 매우 독특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탄생시켰다. 일정 기간 한 집에 머무르고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의 인연을 찾아간다는 포맷은 여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무당과 점술가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자신의 영적 능력을 토대로 연애 상대를 선택한다는 신선한 발상은 시청자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성 출연자들이 태어난 일시만 보고, 그중에서 운명의 상대를 선택하는 오프닝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들은 자신이 모시는 신의 뜻이나 점괘를 통해 알게 된 운명의 상대와 자신이 본능적으로 끌리는 상대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다른 연애 프로그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재미를 제공했다. 출연자들의 수려한 외모와 언변 또한 젊은 세대 무당에게 호감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 프로그램은 2024년 첫 번째 시즌이 방영된 후 인기에 힘입어 올해 초 두 번째 시즌이 전파를 탔다. 장르적 분화 그렇다면 최근 몇 년 사이 무속인들이 호감의 대상이 된 이유는 뭘까. 우선 무속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라진 데 있다. 한국인들은 이제 무속을 음습한 미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카운슬링으로 여기게 됐다. 한마디로 과거에 비해 무속을 훨씬 캐주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 사람들은 무속인이나 점술사들을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찾는다. 도시 변두리의 후미진 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던 무당집과 점집도 이제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에 자리를 잡은 경우가 많다. 한편 젊은 세대가 무속에 호감을 갖는 이유로,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꿈을 펼치기 어려워진 사회 현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은 이전 세대들이 젊은 시절 느꼈던 것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무속을 통해 보다 직관적인 조언을 듣고 그를 통해 위안을 느낀다. 무속에 관한 젊은 세대의 관심과 호감은 이 소재가 대중문화에서 다양한 장르로 분화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이제 무속을 매개로 한 콘텐츠들은 사극, 로맨스, 액션 판타지로 그 영역을 넓혔다. 또한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에 더해 같은 애니메이션, 같은 다큐멘터리의 소재로도 등장한다. 한국의 전통 무속 신앙이 지닌 문화적 요소들이 더욱 다채로운 형태로 새롭게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구아진의 네이버 웹툰 는 절대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무당들의 이야기다. 도서출판 들녘에서 단행본으로도 출간됐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아 2022년 대한민국콘텐츠대상의 대통령상을 비롯해 다수의 상을 받았다. ⓒ 구아진, 투니드 엔터테인먼트, 도서출판 들녘

합성의 스토리텔러, 김아영

Arts & Culture 2025 WINTER

합성의 스토리텔러, 김아영 김아영은 영상,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 등을 아우르며 다양한 서사를 연결하고 확장하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작가는 현실과 허구, 기록과 상상을 교차시켜 불가항력에 저항하거나 그로부터 빗나가고 이탈하는 존재와 사건들을 탐구한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2월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개최된 < ACC 미래상 2024: 김아영 -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 >. 근대화 이후 사라져가는 여러 문화권의 전통적 우주론과 시간 체계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혁신적인 미래 가치와 가능성을 확장한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ACC 미래상’을 받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사진 홍철기 김아영의 작업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지난해 내가 목격한 광경을 떠올려 본다. 2024년 9월 7일, 나는 제15회 광주비엔날레를 취재하기 위해 외신 기자들과 프레스 투어 버스를 타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향했다. 그날 전시관의 중심에는 대형 스크린 세 개가 삼각형 구조를 이루며 공중에 들린 채 설치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지난해 ‘ACC 미래상’을 수상한 김아영의 신작 가 세 개 채널 영상으로 상영 중이었다. 나는 관람객을 위해 설치된 스크린 앞 슬로프에 누워, 영화 를 떠올리게 하는 테크노 오리엔탈리즘적 도시에서 사이버펑크의 전사 같은 여성 라이더 둘이 함께 질주하고, 싸우고, 뒤엉키는 장면을 보며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참 지나 버스로 다시 돌아왔을 때 외신 기자들도 “김아영이 누구냐?”며 서로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어떤 기자는 그 작품을 두고 “페미니즘적 자아 혹은 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사회 소외 계층으로서 라이더들을 영웅화하는 계급 투쟁적 이야기”라고도 말했다. 바로 그 전시에서 김아영의 작품을 접한 외신 기자들과 해외 미술 관계자들이 그녀가 지금의 국제적 명성을 얻는 데 직간접적으로 일조했음은 자명하다. 이후 작가는 2025년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수상했고,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과 뉴욕현대미술관 PS1의 개인전 초대를 받았으며, 홍콩 M+ 뮤지엄의 파사드 커미션 작업을 의뢰받았다. 그녀의 작품이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의 마음을 짧은 시간에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나는 김아영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사변적 픽션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김아영은 자본주의나 이데올로기 같은 거시적 서사를 고고학, 미래주의, SF적 상상력이 가득한 중첩적 서사로 재구성한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의 독특한 작업 세계에 최근 국내외 미술계가 주목하고 있다. 2023년 골든 니카상, 2025년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수상했다. 에르메스재단 제공, 사진 김상태 딜리버리 댄서의 사변적 세계 (2022), (2022), (2024), (2024)로 이어지는 ‘딜리버리 댄서’ 연작은 작가가 마치 전도사처럼 주창해 온 사변적 픽션의 작동 원리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시다. 이 연작은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비롯되었다. 김아영은 당시 여러 앱으로 배달 음식을 시키면서도 막상 그 음식을 배달하는 이들과 직접 만나 본 적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누군가의 저녁 식사를 나르는 그들은 누구일까? 김아영의 사변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철저하게 리서치 중심적인 그녀의 사변은 취재를 통해 획득한 인식과 세상사의 원리를 나름의 방식으로 유추하거나 재정의하고, 이를 다른 사건이나 상황에 적용해 보는 실험의 과정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 방정식을 도출한 뒤, 그 식을 활용해 야구 선수가 힘껏 던진 공의 낙하지점을 유추하는 과정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더 나아가 상수에 변화를 준 인력의 공식을 대입해 화성이나 달 세계의 중력을 가상의 영상 이미지로 표현하는 단계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김아영은 ‘Monster’의 애너그램(철자의 순서를 바꾸는 것)인 ‘에른스트 모(Ernst Mo)’라는 여성 라이더를 창조하고,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라이딩을 ‘댄싱’으로 표현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묻는다. “만약 통행인이 사라진 세상에서 무언가를 정해진 시간 안에 배달하기 위해 빛의 속도로 달리는 ‘딜리버리 댄서’가 있다면, 그녀에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에른스트 모는 빛의 속도로 달리기 위해 접히거나 끊어진,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공간을 달릴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 곳을 달리다 보면 결국 다른 우주와 섞여버릴 것이며, 그렇게 두 우주가 만나는 지점(작품에서는 이를 ‘누수 지점’이라 말한다)에서 도플갱어와 맞닥뜨릴 것이다. 작품에서 에른스트 모는 그렇게 다른 우주의 자아인 ‘엔 스톰(En storm)’을 만난다. 그녀가 나타날 때면, 즉 두 세계가 교차할 때면 시간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라 느리게 흐르고, 급기야 느리게 흐른 시간 탓에 배달 콜을 제때 수행해 내지 못한 에른스트 모의 등급이 점점 낮아져 새로운 임무를 배정받지 못하기에 이른다. 이 매력적인 이야기는 마치 파사칼리아처럼 악장을 달리하며 변주한다. 에선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이 가상의 도시 ‘노바리아’에서 ‘우연히 소멸된 것으로 알려진 과거의 시간관이 담긴 유물들’을 배달하며,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24시간 365일’이란 서구의 시간관에 질문을 던진다. 에선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이 시간을 되찾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들은 ‘사막과 도시와 차원이 교차하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시간을 운반하고, 미래에서 온 주시관들의 눈을 피하고 싸운다. 변주는 애니메이션과 실사 그리고 퍼포먼스를 아우르며 계속될 것이다.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이 만나 서로 대립하지 않고 생존하는 세계가 나타날 때까지. 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부상한 플랫폼 노동의 문제를 그려낸 작품이다. 디지털 기술과 복합적인 스토리텔링을 통해 작가의 주제 의식을 성공적으로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가 제공 사변의 시작: 다공성 계곡 사변의 변주를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은 ‘다공성 계곡’ 연작이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에서 다공성 계곡은 ‘플롯 구멍’이 많은 계곡, 즉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들이 살아가는 곳을 뜻한다. 이 개연성 떨어지는 가상의 공간에 사는 ‘페트라 제네시트릭스’는 암벽 밖으로 튀어나온 거대하고 기이한 암석 결정에 깃들어 사는 광물이자 데이터 클러스터다. 어느 날 다공성 계곡의 폭파로, 페트라는 다른 암석 플랫폼으로 이주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면서 당황스러운 실질적 문제에 직면한다. 이 이야기 역시 변주한다.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은 페트라가 크립토밸리라 불리는 섬의 해안가에서 눈을 뜨며 시작한다. 이 섬에서 페트라는 이주 당국에 붙들려 바이러스 취급을 당하고, 이주 심사에서 떨어져 ‘스마트 그리드’라는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어는 순간 환청과 환영을 듣고 그에 따라 탈출을 감행한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따라 동굴로 들어간 페트라는 그곳에서 ‘어머니 바위’라는 초월적 존재를 만나고, 이 어머니 바위와 결합한다. 마치 신화 혹은 우화와도 같은 이 일련의 이야기들은 감상자가 이주, 난민, 국가, 경계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김아영은 2025년 11월 뉴욕 캐년에서 열린 ‘퍼포마 비엔날레 2025’에서 퍼포먼스 신작 〈 Body^n 〉을 공개했다. 도플갱어의 개념과 신체 재현 문제를 탐구한 작품이다. 으로 에미상을 수상한 바 있는 김차이 무술 감독과 스턴트 배우들의 동작을 실시간 라이브 모션 캡처를 통해 디지털화했다. 사진은 < Body^n >의 프로덕션 스틸. 작가 제공 석유, 기억 그리고 기계 김아영의 작품 목록에서 가장 무쌍하게 변모하는 또 다른 주제는 ‘석유’다. 그리고 이 주제는 ‘리서치 프로젝트’라는 작가의 또 다른 작업 양식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석유에 대한 관심은 작가의 가족사에서 시작한다. 한양건설 부장이었던 작가의 부친은 1979년 작가가 태어난 지 세 달 만에 쿠웨이트로 파견되었다가 1982년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1984년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 걸프전이 발발한 1991년에 돌아왔으며, 그 기간 매년 두 번씩 휴가로 한국을 찾았다. 작가는 어린 시절 느꼈던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아버지가 선물로 들고 온 신문물이 가져다준 기쁨을 기억한다. 1979년 OPEC 중동 국가들이 석유 수출을 제한하며 제2차 석유 파동이 벌어졌으며, 외화를 확보해 유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 주도로 국내 건설 업체들이 중동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작가가 알게 된 건 성장한 후다. 석유 자본의 전 지구적 이동이 대한민국에 사는 한 어린아이, 즉 자신의 성장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작가 자신을 매혹했다. 이것이 ‘석유 자본의 이동과 중동 특수에 관한 리서치 프로젝트’의 발단이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첫 작품은 연작으로, ‘제페트’는 역청을 뜻한다. 글로 읽어도, 영상으로 봐도 무척이나 난해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석유와 중동 특수에 대한 방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대본을 쓰고, 이 대본을 ‘논리 정연하면서도 혼돈스러운 규칙’을 통해 재생성할 기계 장치(컴퓨팅 장치)를 만든다. 참고로 작가는 이 장치에 ‘기계 장치의 신’을 뜻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극작 용어를 이름으로 붙였다. 작가는 자신이 쓴 대본과 이 대본을 기계 장치에 넣어 얻은 결과물에 각각 기계 알고리듬을 통해 만들어진 음률과 인간 작곡가의 음률을 붙이고 이를 합창 형식으로 공연했다. 최근작 ‹알 마터 플롯 1991›(2025)은 석유에 관한 이 방대한 리서치 프로젝트의 집약판이다. 작가는 아버지가 다니던 한양건설이 1979년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대규모 거주 단지 ‘알 마터 아파트’를 추적하며, 석유 자본의 형성과 이동의 거시사가 작가의 삶과 그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미시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사한다. 현장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주변인들이 그 호화 주택 단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들을 수집해 생성형 AI와 CGI, 라이다 스캐닝 등의 새로운 기술들을 활용해 미래적 에세이 필름 형태로 완성했다. 김아영의 초기작은 몽타주 사진 작업이었다. 이후 자신의 변화에 관해 김아영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최근에는 몽타주를 포함하는 상위 개념으로 ‘합성’이라는 용어를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매끈한 합성이 아니라, 비뚤비뚤하고 거칠거칠한 이음매가 모두 드러나는 합성이요.” 김아영이 현실과 픽션을 거칠게 섞은 모습은 마치 관절이 다 드러난 사이보그 같다. 올해 3월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개인전 오프닝에서 작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앞으로는 ‘딜리버리 댄서’와 리서치 중심의 작품들을 투 트랙으로 진행하려 한다”고 말했다. ‘딜리버리 댄서’의 사변적 픽션이 현실의 핍진성을 떨쳐버리고, 그 작동 원리만을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인공 팔을 떠올리게 하는 반면, 리서치 프로젝트의 방법론은 작가의 해석이 담긴 현실 이야기를 매우 핍진하게 담아낸다는 점에서 육체적이다. 흡사 전자 의수를 단 사이보그, 강력한 기계 팔을 가진 아시안 퓨처리즘적 모습의 김아영이 합성의 이야기꾼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알 마터 플롯 1991〉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중 하나인 알 마터 주택단지가 배경이다. 개인적 경험을 근현대사로 확장한 작품이며, 석유를 매개로 경제 성장과 지정학적 분쟁 등 다층적 서사가 담겼다. 2025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개인전 에서 공개됐다. 작가 제공

공공 너머 미래를 향한 건축, 건축가 전숙희

Arts & Culture 2025 WINTER

공공 너머 미래를 향한 건축, 건축가 전숙희 건축가 전숙희는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건축이라는 매개를 통해 동시대의 주요 질문들을 탐구하며 대안을 제시해 왔다. 그녀에게 건축은 단순히 조형물을 구축하는 행위를 넘어, 사회적 맥락과 인간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실천적 사유를 담아내는 그릇과 같다. 경상남도 남해에는 농업용 창고로 사용하기 위해 화강암을 쌓아 만든 1920년대 건물들이 군데군데 있다. 전숙희 건축가는 한 도예가의 요청으로 그중 하나를 도예 공방으로 리모델링했다. 외관은 그대로 보존하되 아름다운 남해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도록 지붕에 전망대를 설치했다. ⓒ 노경 전숙희는 건축이 개인의 공간을 넘어 사회 전체에 기여하는 공공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신념을 꾸준히 피력해 왔다. 그녀는 건축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건축 교육을 받았다. 특히 이화여대 건축학과 첫 입학생이었던 그녀는 선배들의 부재 속에서 자립적으로 모든 것을 찾아 해결해야 했던 경험이 독립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프린스턴 대학원에서는 소수 정예 교육 시스템 속에서 교수진과 학생들 간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깊이 있는 탐구를 할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건축을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접근하게 된 토대가 되었다. 장영철 건축가와 함께 2008년 와이즈 건축사사무소를 공동 설립한 이래, 그녀의 작업들은 이러한 비판적이고 탐구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건축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95%의 건축 전숙희는 건축이 단순히 사적 소유물의 가치를 넘어, 사회 전체에 기여하는 공공성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녀에게 건축은 도시의 일부로서, 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사회적 자산이다. 따라서 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할 때 주변 환경과 조화로운지 고려하고, 지역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녀는 이러한 관점에서 ‘95%의 건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기존의 민간 영역에 집중된 5%의 특별한 건축을 넘어, 나머지 대다수의 건축물이 공공적 가치를 실현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은 아산나눔재단 프로젝트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녀는 비영리 재단의 사옥인 이 건물에서 ‘공공에 문턱이 낮은 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경험은 사적 소유물이라 할지라도 도시와 사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그리고 건축가로서 이러한 공공적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이후 참여했던 노무현시민센터 프로젝트는 이러한 철학을 실현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그녀는 조선 시대 궁궐인 창덕궁 인근이라는 특수한 장소성과 북촌 지구 단위 계획의 제약, 시민들의 의견 수렴 과정 등 여러 가지 큰 난관 속에서도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경험은 건축가가 단순히 도면을 그리는 것을 넘어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는 주체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노무현시민센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동시에 시민들을 위한 공공 공간으로 설계된 곳이다. 창덕궁 바로 옆에 위치한 이곳은 과거 나지막한 구릉지였는데,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건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바닥과 벽, 지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곡선을 활용했다. ⓒ 노경 위안의 장소 전숙희는 건축가가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또한 그것을 잘 활용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건축가는 나무를 키우는 사람과 다르지 않으며, 나무가 숲을 이루기도 하고 정원이나 산책로가 되기도 하듯 결국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 건축가의 소임이라고 믿는다. ⓒ 이민희 전숙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지쳐 있으며, 위안과 휴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녀는 개인이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소통하고 교류하며 정서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낯선 이들과 공존하는 공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 역사적 의미를 내포한 공간 등이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녀는 절두산 순교 성지를 예로 들며,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선 비종교적 차원의 정서적 공간으로서 이곳이 많은 사람에게 휴식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언급한다. 또한 스웨덴 우드랜드 화장터를 방문했던 경험은 그녀에게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건축적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획일적인 현대의 장례 문화와 달리, 죽음을 엄숙하게 성찰하고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공간은 단순히 기능적 측면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슬픔을 치유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이처럼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건축적으로 섬세하게 다루는 것이 건축가의 중요한 역할임을 인식하고, 공간이 주는 위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피겨앤그라운드는 서울 강남 가로수길의 30여 년이 넘은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한 작업물이다. 폐쇄적이었던 저층부는 덜어내고, 상층부의 공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입면을 구성하는 벽돌 마감의 수평 띠는 발코니와 외부 계단인데, 각 층을 연결해 ‘길’을 형상화했다. ⓒ 노경 건축가의 시각과 과제 서울 성산동 주택가 깊숙이 자리 잡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던, 과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을 재현한 공간이다. 큼직한 안내판이나 근사한 로비 대신 작은 문 하나만 외부로 열어둔 채 가이드가 방문자들과 동행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선으로 설계됐다. ⓒ 김두호 전숙희는 기후 변화와 인구 감소라는 두 가지 시대적 과제에 주목하며, 건축이 이러한 문제 해결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그녀는 인구 감소로 인해 발생하는 도시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특히 한국 사회의 고유한 인구 구조적 특징에 대한 건축적 대응을 모색한다. 그녀는 서울의 인구가 800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인구학적 예측을 제시하며, 이에 따른 도시 공간의 재편과 기존 인프라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런가 하면 고령화 사회에 대비한 건축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노인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는 주거 환경 조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기술적인 해결을 넘어 사회 구조적 변화가 건축에 미치는 영향까지 통찰한다. 구도심의 쇠퇴와 신도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다양한 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간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건축가들이 반드시 직면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며, 그녀는 건축이 그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파주출판도시 내 자리 잡고 있는 뮤엠 사옥은 영어 교육 회사인 뮤엠교육의 부엉이 로고에서 착안해 그루터기 형태로 건물을 완성했다. 전체가 검은 벽돌로 이루어진 직사각형 형태의 건물에 율동감을 부여하기 위해 절개된 듯한 비틀린 형태의 출입구를 만들었다. ⓒ 노경 중요한 것은 소통의 능력 전숙희는 건축이 단순히 설계 능력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건축 실현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과의 긴밀한 소통과 협력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건축주, 시공사, 그리고 여러 방면에서 경험을 쌓아 온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조율하며 최적의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설계도를 그리는 작업이 전체 프로세스의 일부에 불과하며, 실제 건물이 지어지기까지의 복잡한 과정에서 소통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건축은 결국 ‘관계’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나 혼자 20%를 잘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80%를 채워줄 수 있는 ‘관계’에 의해서 건물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 같아요. ‘관계’를 절차와 시스템, 심지어는 구현되지 않은 기술까지 아우르는 복합성을 띤 개념으로 확장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는 1988년 독일에서 시작된 글로벌 전시로, 암흑 속에서 시야가 차단된 채 다른 감각들을 일깨우며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묻는 프로그램이다. 어둠속의대화 북촌 전시장은 전통 대나무 발에서 모티프를 얻은 건물 외피를 통해 이 전시의 특징을 건축적으로 구현해 냈다. ⓒ 김용관 뮤엠 사옥 프로젝트와 같은 벽돌 쌓기 작업은 그녀가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 사례다. 초기 설계 의도와 현장 상황 간 불일치, 그리고 숙련공과의 소통 부족으로 인해 발생했던 어려움은 결국 현장에서 끊임없는 대화와 협의를 통해 해결될 수 있었다. 건축이 결코 건축가 한 명의 역량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소통, 그리고 때로는 고집과 자부심이 얽힌 결과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한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공유하고 드러냄으로써 다음 세대가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선배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이는 건축계 전체의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과정이며, 건축이 단순한 기능 구현을 넘어선 사회적 역량을 발휘하는 토대가 된다. "돌이켜보면, 건축이라는 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단순히 공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를 고민하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숙희의 건축은 단순히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 행위를 넘어, 우리 사회에 던지는 깊이 있는 질문이자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강력한 메시지다. 남해 돌창고의 내부는 곡식만 보관하면 됐던 단출한 공간을 현재의 용도에 맞게 바꾸기 위해 여러 방식의 보강이 필요했다. 오래된 목재 트러스를 철재로 바꿔 지붕을 떠받칠 수 있도록 했고, H빔을 설치해 기둥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 노경

복을 부르는 포용의 미덕

Arts & Culture 2025 WINTER

복을 부르는 포용의 미덕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호호당의 양정은 대표는 전통을 단순히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 감각과 실용성을 결합해 일상에서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재해석한다. 그래서 호호당의 제품에는 한국적 미학뿐 아니라 사용자의 삶을 아우르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양정은 대표가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호호당 쇼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녀는 보자기 포장 문화를 통해 품격 있는 전통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보자기는 물건을 싸서 보관하거나 실어 나르기 위한 용도로 네모나게 만든 천을 말한다. 보자기는 이처럼 예부터 가방 역할을 했다. 하지만 가방은 정해진 크기에 맞춰서 물건을 담는 데 반해 보자기는 물건에 맞춰서 감싸 담는다. 보자기 문화에는 사람을 대할 때 정성을 다하고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우리의 습성이 잘 드러나 있다. 보자기를 뜻하는 한자 ‘복(幞, 襆)’은 행운이나 행복을 뜻하는 ‘복(福)’과 음이 같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보자기에 물건을 싸두면 복이 든다고 믿었다. 혼례 시 신랑 신부가 주고받는 예물이나 함 등을 포장한 보자기가 대표적인 예다. 보자기를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시대 문헌들에 보자기에 얽힌 사화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일상 대소사에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왕실의 복식과 물품에 관한 규례를 적은 책 『상방정례』(1749)에는 당시 궁중에서 사용하던 보자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적혀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왕과 왕세자가 머리에 쓰는 관 종류는 외부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3폭짜리 솜보자기로 포장했으며, 옷은 4폭 홑보자기, 버선과 신발은 3폭 홑보자기로 싸서 보관했다고 한다. 1폭은 오늘날로 치면 약 35㎝ 너비이다. 왕실에서 사용한 보자기의 재질은 주로 비단이며, 홍색 계열을 가장 많이 사용했고, 간혹 자주색과 남색, 청색, 백색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보자기는 옷보, 이불보, 상보 등 싸는 물건에 따라 이름이 달리 붙는다. 일상에 필요한 물건 외에도 경전을 담는 경전보, 각종 제의에 쓰이는 특수용 보를 비롯해 혼례에 사용되는 사주단자와 함, 폐백 등을 담는 혼수보 등 용도에 따라 구분해서 사용했다. 또 혼례 예물을 싸는 보자기는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파랑, 빨강, 노랑, 하양, 검정의 오방색 실로 수를 놓아 부부의 화합을 기원했다. 이처럼 의식주 전반에 걸쳐 친숙한 포장 도구였던 보자기는 근대화를 거치며 사용 영역이 축소되었으나, 오늘날에도 정성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선물 포장에 쓰이거나 각종 예식에 두루 활용된다. 정성을 표현하는 도구 서울 청담동 명품거리 골목에 위치한 호호당 쇼룸에 들어서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중요한 순간들이 한눈에 스쳐 지나간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입히는 배냇저고리부터 돌반지, 복주머니, 한복, 유기그릇과 목각 인형 등 결혼, 임신과 출산, 명절, 각종 기념일에 필요한 전통 생활용품들이 보자기에 담겨 진열돼 있다. “보자기는 주는 사람의 정성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도구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받는 사람이 계속 재사용할 수 있어서 매우 친환경적입니다.” 양정은 대표는 보자기의 실용성을 먼저 강조한다. 그녀가 보자기에 관심을 두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보자기는 제 삶의 뿌리 중 일부라고 할 수 있어요. 할머니와 아버지가 드라마와 영화 사극에 들어가는 특수 의상 사업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집 안에는 시대에 따라 고증한 한복, 갑옷, 소품들을 만들고 남은 원단이 가득했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남은 천을 모아 보자기를 만들어 쟁여두셨어요.” 그렇게 만든 보자기는 명절이나 특별한 날 선물 포장뿐 아니라 도시락 주머니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줄 때도 고운 색깔의 보자기에 담아서 주셨다고 한다. 품질과 디자인은 물론이고 가격도 적당해야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보자기를 자주 사용할 수 있다. 양 대표가 가격이 비싼 전통 옷감 대신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리사이클 원단을 개발한 이유다. “집과 작업장이 위아래로 붙어 있다 보니 어쩌다 별식을 하면 넉넉하게 만들어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명절 때면 떡과 육포를 만들어 이웃에도 돌렸어요. 음식 포장은 주로 제 몫이었는데, 이런저런 모양을 내서 싸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죠.” 어려서 보고 자란 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일까? 음식 포장으로 시작된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은 대학에서 전통 식생활 문화 공부로 이어졌고, 한때는 오너 셰프로서 한식당 ‘정미소(井米所)’를 운영하기도 했다. 체력이 따라가지 못해 2년 만에 그만두긴 했지만, 이 일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이후 선물 요리에 집중했다. “주로 폐백, 이바지 음식을 주문받았는데, 포장용 보자기가 마땅치 않았어요. 그래서 과거 저희 집에서 작업하시던 분들을 수소문해 원단을 구해서 직접 만들었죠. 음식 보고 온 손님들이 보자기 포장에 반해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보자기는 어떤 형태의 물건이든 포장할 수 있는 유연함을 지녔다. 또한 묶기, 접기, 꼬기, 감기, 땋기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아름다움을 배가할 수 있다. 대중화 위한 소재 개발 2011년 문을 연 호호당은 세련된 보자기 포장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국내외 많은 럭셔리 브랜드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뷰티 브랜드 설화수를 시작으로 구찌, 루이비통, 보테가 베네타 등 해외 명품 브랜드와도 협업해 답례품, 선물 포장 작업에 참여했다. “설화수의 경우 10년째 디자인 작업을 함께 해오면서 저 또한 성장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오래도록 간직할 가치를 먼저 생각하게 됐죠.” 이 과정에서 그녀는 보자기를 일상에서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됐다. “전통 보자기는 실크나 모시로 만드는데, 너무 고가여서 한계가 있었죠. 전통의 아름다움을 누구나 손쉽게 누렸으면 하는 고민이 소재 개발로 이어졌고, 이를 충족할 기능성 섬유를 찾게 됐습니다.” 양 대표는 가격대를 낮추기 위해 폐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이렇게 만든 리사이클 원단을 인정받아 호호당은 2021년 GRS(Global Recycled Standard, 국제 재활용 표준) 친환경 기업으로 공식 인증받았다. "저희와 협업하고 있는 호텔신라 보자기는 현재 100% 폐플라스틱을 재활용한 원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호호당 보자기도 일부 천연 소재 외에는 바꿔나가는 중이고요.” 양 대표가 2024년 새롭게 선보인 색동 바구니. 색동은 예로부터 귀한 일에 사용하는 옷감이었다. 조선의 제21대 임금인 영조(재위 1724~1776)가 정순왕후를 왕비로 책봉할 때 사용했던 두루마리의 색동을 재해석했다. 복을 부르는 마음 보자기 포장에서 생활용품 브랜드로 발돋움한 호호당은 굵직한 국내외 행사에 공식 기념품으로 채택돼 호평을 받았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경복궁 영추문 천장에 있는 백호를 응용해 자수 마그넷과 보자기 가방을 선보였고, 2021년 서울에서 개최된 P4G(Partnering for Green Growth and the Global Goals 2030, 녹색성장 및 2030 글로벌 목표를 위한 연대) 정상회의 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문양을 응용한 보자기 가방을 제작해 화제가 됐다. “원단에 들어가는 문양은 주로 우리 민화에서 응용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에 나오는 그 귀여운 호랑이를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호호당이 해온 일을 인정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양 대표가 이끌던 호호당은 무역회사에 다니던 남편 김준식 씨가 2016년 합류해 해외 직수출의 길이 열렸다. 현재 호호당은 서울과 대구, 베트남 호찌민에 공장을 둔 제조 기업으로 성장했다. “호호당은 제가 결혼할 때 ‘늘 좋은 일만 있으라’고 어머니가 저희 가정에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이듬해인 2011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무척 막막했어요. 혼자 출산을 준비할 때는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한 배냇저고리를 만들면서 그 허전한 심경을 추스를 수 있었죠. 어머니가 염원하신 것처럼 저도 호호당을 찾는 분들께 좋은 일만 가득 담아 드리고 싶어요.” 보자기에 담는 정성스러운 그 마음이 복을 부르나 보다. 부부간 신뢰와 화목을 상징하는 목각 기러기는 전통 혼례에서 가장 중요한 예물이었다. 장인이 호두나무를 정성스럽게 깎아 만든 호호당의 목각 기러기는 주로 전통 옷감인 양단이나 노방 보자기로 포장한다.

‘어쩔 수가 없는’ 삶에 대한 박찬욱의 풍자

Arts & Culture 2025 WINTER

‘어쩔 수가 없는’ 삶에 대한 박찬욱의 풍자 박찬욱 감독의 풍자적 스릴러 는 벼랑 끝에 내몰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일상의 불안정성을 탐구한다. 블랙 코미디와 도덕적 긴장감이 교차하는 이 작품은 사람들이 사회적·경제적 압박 속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그들의 인간성을 시험하는 제도를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드러낸다. 박 감독은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이번 신작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2025년 8월 말 개막한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이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장면. 그는 신작 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이 영화제에 참석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 제공, 사진 Jacopo Salvi 한국 영화계의 거장 박찬욱 감독의 신작 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강렬한 심리 묘사와 시각적 대담함을 이어가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각본, 제작, 연출을 모두 맡은 그는 이번 작품에서 불확실성, 자동화, 도덕성의 붕괴를 다룬 블랙 코미디 스릴러를 선보였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했으며, 박 감독이 20여 년에 걸쳐 구상한 끝에 완성된 작품이다. 지난 8월,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처음 공개된 뒤, 9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 관객에게도 소개됐다. 이 작품은 경제적 불안과 기술 발전이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극 중에는 해고당한 가장 ‘만수(이병헌)’와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아내 ‘미리(손예진)’가 등장한다. 는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사회의식이 가장 뚜렷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극단으로 내몰린 한 남자의 비극을 넘어, 진정한 선택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을 담아낸다. 이 이야기에 끌리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읽은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순간, ‘이건 꼭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우선 작품의 핵심이었던 비극에 매료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어쩌면 원작보다 더 유머러스하게 표현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저에 깔린 비극에 약간의 유머를 더하면 훨씬 매혹적인 이야기가 될 거라는 직감이 있었다. 또한 한 인간의 내면 심리를 따라가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를 함께 탐구하는, 두 가지 층위를 담은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 3차 포스터. 이 영화는 2025년 9월 17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였으며, 일주일 후 일반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국내 극장에서 개봉했다. 2025년 11월 말 기준, 전국적으로 약 300만 명의 누적 관객 수를 기록했다. ⓒ CJ ENM 어떤 장르를 염두에 두었나? 이야기의 구조만 보면 추리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어릴 적에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지만, 그런 장르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추리소설은 대개 어떤 미스터리로 시작하는데, 그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되고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시작부터 범죄를 저지르려는 한 남자가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미스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이 작품은 오히려 사회 제도 속에서 점점 범죄자로 내몰리게 되는 한 평범한 사람의 심리에 관한 이야기다.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이 작품의 내러티브는 훨씬 더 강렬하고, 집요하며, 절망적이다. 기본적으로는 비극이지만, 그 속에 깃든 부조리한 유머 덕분에 나에게는 코미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가 영향을 주었나? 이 영화를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도끼〉 리메이크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처음부터 원작 소설에 매료된 것이었고,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는 그 이후에야 보게 되었다. 그의 버전은 톤과 정서가 완전히 달라서, 이 작품은 그 영화의 리메이크라기보다는 원작 소설의 또 다른 해석이라 보는 편이 맞다. 물론 당시 원작의 판권은 여전히 가브라스 감독이 가지고 있어서 제작 과정에서 약간의 조율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아내이자 프로듀서였던 미셸이 이번 영화의 제작에도 함께 참여하면서 원만히 진행되었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 이 이야기를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요즘 어떤 영화를 준비하고 있냐?”고 물으면, 나는 간단히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곤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20년 넘게, 전 세계 어디서나 반응은 늘 같았다.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미국 스튜디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작품이 만들어질 거라고 믿었다. 스튜디오들은 영화를 제대로 만드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적은 예산을 제시했다. 의견 차이를 좁히는 데 2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셈이다. 결국 오랜 기다림 끝에, 이 작품이 본래의 의도대로 구현될 수 있는 합의점을 찾게 되었다. 이 작품은 단지 현대 한국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면 어디서든, 과거에도 미래에도 언제든 통할 이야기다. 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가 원작이며, 박찬욱 감독이 연출과 공동 각본을 맡았다. 주인공이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당한 후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 CJ ENM 이번 영화에서 가장 다루고 싶었던 주제는 무엇이었나? 하나의 주제라기보다는, 서로 얽히고 겹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성과 중심의 노동, 과잉 생산성, 치열한 경쟁, 인공지능까지. 이건 한국적인 동시에 세계적인 문제다. 한국은 이 모든 글로벌 이슈가 한꺼번에, 그리고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한국이 겪는 문제들이 다른 나라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예를 들어 AI, 고용 불안, 중산층 붕괴, 남성성에 대한 고민 같은 것들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사회적 질문들을 던지면서 자본주의의 단면을 비판하고, 그 너머의 더 큰 의미를 탐색한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가 남기는 정서는 깊은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블랙 코미디의 요소들도 있지만, 마지막에는 공허함과 비극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이 드라마의 본질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의도대로,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정리되는 감정을 느끼길 바란다. 주인공은 가족을 위해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영화는 그 행동이 정말 가족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묻는다. 관객 각자가 이 가족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길 바란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를 것이다. 바로 그런 대화의 화두를 던지는 것이 내가 바랐던 부분이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 이번에는 폭력의 강도가 훨씬 절제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폭력을 묘사하는 이유는 공포와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폭력의 공포, 그 뒤에 따라오는 고통을 드러내려면 결국 폭력적인 장면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폭력은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까지도 파괴한다. 내 작품 속 폭력 장면이 유난히 아프게 느껴지고, 죄책감의 그림자를 동반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영화 속 폭력 묘사에 관해 내가 고민하는 부분이 두 가지 있다. 관객이 그 폭력 장면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 폭력을 아름답게 느끼게 되는가이다. 나는 최대한 이 두 가지를 피하려 한다. 물론 나도 다른 감독의 영화를 보다가 폭력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연출의 미학적 완성도에 감탄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내 작품에서 그런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한다면,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것 같다. 이 영화의 코믹한 요소는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만수의 행동이 슬프면서도 동시에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모든 것을 합리화하지만, 그로 인해 가족은 오히려 무너진다. 우리는 도대체 이 모든 게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묻게 되고, 그것이 단지 어리석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코미디가 필요했다. 영화는 한여름의 절정에서 시작해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는 예보와 함께 막을 내린다. 식물을 사랑하는 만수는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지나간다. 그것이 내가 원했던 배경이었다. 이는 만수가 일하는 회사 이름(처음엔 ‘태양’, 그다음은 ‘문 제지’)에서도 드러난다. 원작에는 AI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각본을 다듬어 가는 동안 세상은 변하고 있었고, AI가 현실에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들어왔다. 만수는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을 여전히 습관적으로 한다. 기계가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의 ‘직관’만큼은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관객이 그와 함께 그 불확실한 미래를 상상하기를 바랐다. 이병헌과 손예진을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하다. 영화의 대부분을 이끌어가며 도덕적 갈등과 감정의 무게를 끝까지 견뎌낼 배우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병헌이 떠올랐다. 이번 작품에서 그의 연기는 남우주연상에 손색이 없을 만큼 강렬하다. 손예진의 경우, 아내 ‘미리’ 역할에는 낙관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생명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실직한 남편을 붙잡고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 그런 기운을 가진 배우가 바로 손예진이었다. 촬영 현장 중 배우 손예진의 모습을 담고 있는 비하인드 스틸. 손예진은 극 중에서 주인공 만수의 아내 미리 역할을 맡았다. ⓒ CJ ENM 인상적인 사운드트랙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조용필의 열렬한 팬이었다. 언젠가 그의 노래를 영화에 쓰고 싶다고 늘 생각했고, 딱 맞는 순간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때가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음악을 한껏 키워 대사에 가려지지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흐르게 하고 싶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조용필의 명곡이 너무 많아서 어떤 곡을 써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고추잠자리〉가 가장 어울린다고 느꼈다. 장면에 따라 아이러니하게 들리기도 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영화의 장면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곡을 정한 순간부터 편집은 몇 프레임씩 늘리고 줄이는 세밀한 조율 작업이 되었다. 기타 리프 하나, 가사 한 줄조차 배우의 움직임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게 만들고 싶었다. 영화 속 장면들은 바로 그 치열한 조율의 결과이다. 나는 어렸을 때 들었던 한국의 명곡들을 늘 영화 속에 담아냈다. 〈박쥐〉에서는 남인수의 노래들, 〈헤어질 결심〉에서는 정훈희의 〈안개〉가 그랬다. 내가 즐겨 들었던 노래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화 속에 다시 불러내고 싶다. 요즘 젊은 세대는 그런 노래들을 거의 모르는 게 아쉽다. 외국의 팝송은 지금도 어디서나 바로 알아듣지 않나. 우리 세대가 사랑했던 한국의 위대한 가수들, 작곡가들도 문화적 기억 속에 그만한 자리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사람들은 정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에 묶인 채 살아가고 있는가?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사실 진정한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주인공은 영화 내내 그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진실이라기보다 비겁함이 만들어낸 일종의 자기변명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나약함과 취약함, 결점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자기 정당화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세상의 어두운 면을 마주할 때 유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머는 우리가 잠시 한걸음 물러서서 더 명확히 바라보고, 때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일조차 버틸 수 있게 해준다. 가장 끔찍한 순간에도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본인이 실직당하는 상황을 상상해본 적이 있나? 영화 산업 역시 늘 전망이 밝지는 않다. 일자리와 안정감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은 누구나 안고 살아간다. 나는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형태는 달라질 수 있다. 사람들이 극장에 모여 함께 영화를 보는 문화는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런 시대가 오더라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 투자를 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계속 영화를 만들 것이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다 하더라도…. 이미 그렇게 해본 적도 있다. 방식은 바뀔지 몰라도,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마음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만수가 자신의 제거 대상인 범모(이성민)와 대립하는 장면을 담은 비하인드 스틸.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된 배우들의 연기에서 현장의 열기가 느껴진다. ⓒ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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