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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k by Brick

정체성 위에 또 다른 정체성을 포개는 건축가 조민석

Brick by Brick 2024 AUTUMN

정체성 위에 또 다른 정체성을 포개는 건축가 조민석 매스스터디스(Mass Studies) 대표 조민석(Minsuk Cho, 曺敏碩)이 설계한 건축물들은 독특한 형태와 과감한 시도로 사람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이는 조민석이 복잡다기한 현대 사회의 모습을 대면하고, 이질적인 것들을 그대로 포용해 드러낸 결과이다. 서펜타인 파빌리온 설계를 앞두고 조민석이 고려했던 것은 파빌리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곳에 모여들 사람들이었다. 그는 총체적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부지의 중심에 완결된 형태의 건물을 세우는 대신 오히려 여백을 만듦으로써 그곳에서 다양한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도록 했다. 서펜타인 갤러리 제공, 사진 이반 반(Iwan Baan)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ies)는 매년 여름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를 초대해 임시 별관을 짓고, 이를 통해 건축계의 최신 흐름을 선보인다. 2000년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첫 시작을 알린 이래 토요 이토(Toyo Ito), 렘 콜하스(Rem Koolhaas), 프랭크 게리(Frank Gehry), 사나(SANAA), 페터 춤토어(Peter Zumthor), 디에베도 프랑시스 케레(Diébédo Francis Kéré) 등 동시대 최고의 건축가들이 이 프로젝트를 거쳐 갔다. 여름 몇 달 동안 전시되는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세계 건축계가 주목하는 축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영국에 완성한 건물이 없는 건축가들 중에서 대상자를 선정하기 때문에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대체로 초청된 건축가들의 영국 데뷔작이 된다. 지난 6월 7일 런던 켄싱턴 공원(Kensington Gardens)에서 올해의 서펜타인 파빌리온이 공개됐다. 영예의 주인공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가 조민석과 그의 회사 매스스터디스다. 한국인 건축가로는 그가 처음이다. 조민석(Minsuk Cho, 曺敏碩)은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그것의 맥락을 심도 깊게 고민하는 건축가이다. 그는 공간에 본래 내재해 있었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춰 균형을 잡는 것이 건축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비어 있는 중심 조민석은 이번 파빌리온을 ‘Archipelagic Void’로 명명했다. 갤러리, 도서관, 오디토리움, 티하우스, 플레이 타워라는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다섯 개의 구조물들은 한가운데 자리한 텅 빈 원을 중심으로 연결된다. 기능이 규정되고 형태가 분명한 군도를 이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규정되지 않은 빈 공간이다. 조민석은 이 보이드를 ‘마당’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전통적인 주거 건축은 여러 채들이 마당을 둘러싸고 배치된 형태이다. 텅 빈 마당은 놀이, 노동, 제례 등 성격이 다른 일들이 벌어지는 장소로 매번 변신한다. 중국 철학자 노자(Lao Tzu)는 『도덕경(Tao Te Ching, 道德經)』에서 바퀴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바퀴 한가운데는 비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비움[虛]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민석이 비어 있는 마당을 중심으로 파빌리온을 배치한 것은 한국이나 동양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재해석이다. 동시에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역사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기존까지 진행된 22개의 파빌리온은 대체로 지붕이 있는 단일한 구조물인 경우가 많았고, 중심이 비어 있는 경우는 없었다. 원불교 원남교당(Won Buddhism Wonnam Temple, 圓佛敎 苑南敎堂)의 대법당 내부 모습. 9미터 높이의 철판 중앙을 뚫어서 만든 지름 7.4미터의 원형 개구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로 인해 빛과 그림자가 시시각각 움직이는 정중동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 신경섭(Kyungsub Shin, 申璟燮) 정체성의 축적 조민석은 하나보다는 여럿을 선호하며, 기존 내러티브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대고 싶어 한다. 그는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서울은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번화한 지역 중 하나인 강남에 건물보다 풀이 더 많았던 시절이었다. 역시 건축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한강에 위치한 섬 여의도(汝矣島)에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를 설계했다. 목가적 풍경과 개발의 살풍경이 공존하는 한강, 콘크리트가 광활하게 깔린 광장, 이 둘을 가로지르는 한강 다리의 교각….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뒤엉킨 풍경을 조민석은 자신이 느꼈던 최초의 건축적 감각이었다고 회상한다.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마리네티(Filippo Tommaso Emilio Marinetti)는 1909년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에 「미래파 선언(The Futurist Manifesto, Le Futurisme)」>을 발표하며 미래주의 운동의 기치를 올렸다. 이 글에서 그는 교각을 거인의 무용으로 추켜세웠다. 마리네티에게 거대한 인프라스트럭처는 미래를 앞당기는 기술의 선물이었다. 반면에 조민석은 일렬로 늘어선 교각의 콘크리트 아치에서 파리 개선문을 포개 읽었다. 그에게 한국의 현재는 서구의 과거와 얽혀 있었고, 기념비와 인프라스트럭처는 완충 지대 없이 공존했다. 네모반듯한 빌딩들이 일률적으로 늘어선 마곡산업단지에 개관한 스페이스K 서울미술관(Space K Seoul Museum). 자유로운 형태에 나지막한 높이의 미술관을 설계함으로써 정형화된 건물들의 획일적인 리듬을 깨고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 신경섭(Kyungsub Shin, 申璟燮) 조민석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교 건축대학원에서 공부한 뒤 뉴욕에서 실무를 시작했다. 이 지적 여정은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외국에서 공부한 한국 건축가가 없지는 않았지만,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해외여행과 유학 등에 규제가 완화되면서 많은 학생들이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는 한국 건축계에서 주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당대 건축의 주요 흐름을 시차 없이 학습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한국과 적당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까지 한국 건축가들은 한국만의 고유한 것을 건축으로 시각화해야 한다는 과제에서 자유롭기 힘들었다. 그는 뉴욕과 서울 사이의 거리와 시차 속에서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 등 “정체성들 위에 다른 정체성들을 축적”할 수 있음을 재차 확인한다. 전라남도 보성에 위치한 초루(醋樓)는 천연 식초의 하나인 흑초(黑醋)로 만든 차와 음료를 맛볼 수 있는 장소이다. 건축가는 수려한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튀지 않는 검박한 건축물을 디자인했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북촌 중심가에 위치한 송원아트센터(Songwon Art Center)는 대지의 형국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태가 결정된 건축물이다. 경사지와 평지의 높이 차이가 3미터에 이르는 데다 부지가 협소해 큰 제약이 뒤따랐지만, 지형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최대치의 효율성을 얻어냈다. ⓒ 신경섭(Kyungsub Shin, 申璟燮) 이질적인 것들의 포용 조민석은 세기말 세기 초 세계 건축계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 렘 콜하스가 이끄는 OMA 로테르담 사무실에서 다양한 실무 경험을 쌓았다. 그 후에는 제임스 슬레이드(James Slade)와 함께 뉴욕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2003년 서울로 돌아와 매스스터디스를 설립하고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펼쳐나간다. 매스스터디스의 전략은 “21세기 초 한국의 현대성을 조건 짓는 것들, 과거와 미래, 지역적인 것들과 전 지구적인 것들, 유토피아와 현실 그리고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하나의 통합된 시각을 제시”하기보다 다층적이고 복잡한 상황을 대면하고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는 정체성을 하나로 환원시키지 않으며, 복잡한 현실을 재단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려는 전략이다. 뉴욕과 로테르담에서 싹튼 이 태도는 서울에서 완전히 만개한다. 이질성과 복합성이 넘쳐나고, 혼란과 획일성이 공존하는 곳으로 서울만 한 도시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주한 프랑스대사관은 한국의 1세대 건축가 김중업(Kim Chung-up 金重業, 1922~1988)의 설계로 1962년 완공된 건물이다. 여러 차례의 증개축으로 인해 심하게 훼손된 파빌리온을 원래 의도대로 복원하기 위해 고심한 결과, 지붕은 다시 날렵한 곡선을 갖게 됐으며 1층 역시 본래의 필로티 구조를 되찾았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조민석과 매스스터디스의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바둑 두기에 비유한다. 그들의 작업 전체가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는 이 말은 쉽게 확장될 수 있다. 바둑판 위에 깔려 있는 무수히 많은 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이미 깔려 있는 돌에 따라 놓을 수 있는 수는 무척 다양해진다. 강남 한가운데 자리한 럭셔리 오피스텔 부티크 모나코(Boutique Monaco)에서 공공성을 묻고, 연구 단지와 아파트가 격자 패턴에 따라 펼쳐진 서울의 뉴타운에서는 획일적 리듬을 깨는 미술관으로 도시의 박자를 변주한다. 또 서울 구도심 안에 자리 잡은 종교 시설은 기념비적이고 다채로운 형태를 드러내면서도 주변의 끊어진 좁은 골목을 연결해 미세한 움직임을 촉발한다. 그런가 하면 제주도와 전라남도 보성(寶城)의 압도적인 자연 속에서는 검박한 형태로 돌아간다. 그들은 때로 도시 계획가 로버트 모지스(Robert Moses)처럼 대형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듯 보이지만, 때로는 사회 운동가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처럼 작은 골목을 보존하기 위한 대안을 궁리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서펜타인 파빌리온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스타 건축가들이 그곳에 세웠던 기존 파빌리온들이 써온 역사를 소환하고, 공원이라는 장소가 가진 잠재력을 끌어내려고 시도한다. 특이한 형태를 통해 단일한 정체성을 강조하기보다 이질적인 것을 포용하고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켄싱턴 공원에 내려 앉은 별은 조민석과 매스스터디스가 오랫동안 빚어온 것이고, 그들이 바둑판 위에 올린 가장 최근 돌이다. 그들이 다시 세상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하나보다는 다른 여럿이 함께 있는 편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IT 기업 카카오(Kakao)의 사옥 스페이스닷원(Space.1). 제주도 구릉지에 자리한 이 건물은 창의적이고 수평적인 기업 문화를 지닌 조직에 어울리는 공간 유형을 고민한 결과 디자인되었다. 건축가는 8.4 × 8.4 m 크기의 캔틸레버 구조 모듈 5개를 변주하여 조합함으로써 수직,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공간을 탄생시켰다. ⓒ 신경섭(Kyungsub Shin, 申璟燮)

기능에서 비롯된 유기적 아름다움

Brick by Brick 2024 SUMMER

기능에서 비롯된 유기적 아름다움 더_시스템랩(THE_SYSTEM LAB)을 이끄는 김찬중(Chanjoong Kim, 金贊中)은 독특한 건축 미학으로 주목받는 건축가이다. 그의 작품에는 한국 건축에서 보기 어려운 위트가 담겨 있다고 평가받는다. 2016년, 영국 라이프스타일 잡지 『월페이퍼(Wallpaper*)』가 선정한 ‘세계의 떠오르는 건축가 20인’에 선정된 바 있다. 더_시스템랩의 김찬중 대표는 ‘합리적인 혁신’을 통해 건축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하는 건축가이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변화의 속도가 빠른 오늘날, 건축이 시대의 흐름에 반응할 수 있는 유기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강석(Gangseok Lee) “ 형태는 기능을 따릅니다.” 김찬중에게 자신의 철학을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다.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의 경구(警句)라 진부하게 들릴 거라는 말투였지만, 표정은 단호했다. “너무 고전적인 얘기라 식상하겠지만, 저희 작업에 사용된 모든 곡선과 유기적 형태들은 제각각 고유한 기능을 가집니다.” 건축가는 예술가가 아니기에, 기능에 맞추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미적 탐닉보다 건축 방식을 먼저 따지는 게 숙명이다. 머큐어 앰배서더 서울 홍대(Mercure Ambassador Seoul Hongdae)는 대로변에 면하는 부분에 투과성 차폐막이 설치되었다. 이는 도로의 소음을 차단하는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심미적 측면에서 개성 있는 실루엣을 만들어 냈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기능을 고려한 디자인 서울 강서구 마곡동(麻谷洞)의 삼진제약 연구센터(2021)는 살짝 불어든 바람에 팔랑 들린 커튼 자락을 닮은 건물이다. 각종 실험이 진행되는 연구소는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공간이다. 그렇다고 연구원들이 종일 연구에만 몰두할 수는 없다. 가끔 기지개 켜고 창밖도 내다봐야 숨통이 틘다. 펄럭이는 듯한 입면(facade)은 이런 점을 고려하되, 오후 햇빛이 눈을 찌르는 서향 건물의 난제를 풀 해법이었다. 건축가는 연구원들의 개인 책상을 가장자리에 두고, 공동 업무 공간인 실험실은 중앙부에 배치하도록 설계했다. 개별 공간에서는 집중력 있게 자기 연구에 빠져들고, 실험실에서는 트인 생각으로 머리를 맞대는 구조다. 그는 창가에 놓인 책상으로 햇빛이 너무 세게 들이쳐도, 외부와 단절된 채 꽉 막혀 있어도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빛을 막으면서도 도시와의 관계는 열어 두기 위해 벽을 들어 올렸다. 얇은 천 느낌의 곡면 외벽은 80mm 두께의 초고강도 콘크리트(UHPC, Ultra-High Performance Concrete)로 제작했다. 형태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강도는 일반 콘크리트를 압도한다. “외벽 콘크리트 패널을 곡면으로 만들어 직사광선은 가리고, 살짝 열린 틈으로 간접 광이 들어올 수 있게 했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곡면의 열린 틈으로 도시를 내다볼 수도 있어요. 직사광선과 무관한 북향이었다면 이런 시도를 안 했을 겁니다. 모든 것들은 기능과 연관된 선택입니다.” 한 블록 옆에 위치한 IT 기업 엑셈 마곡연구소(2022)도 이들이 맡은 프로젝트였는데, 마찬가지로 서향이다. 외벽에 특수 알루미늄 차광판을 45도 기울인 상태로 줄지어 붙였다. 삼진제약 연구센터와 마찬가지로 오후 서쪽 하늘의 강한 빛을 차단하고 반사된 빛이 부드럽게 내부로 흘러들게 하는 역할이다. 그는 모니터와 스크린을 중심으로 일하는 IT 회사의 특성을 고려해 균질한 실내 빛 환경에 신경 썼다. 외부 차광판과 유리 벽 사이는 직원들이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는 발코니형 쉼터로 조성했다. 실험적 시도 ‘어금니 빌딩’이라 불린 폴 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2011)는 바닥 면적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공간에 대한 의뢰인의 요구를 모두 담다 보니, 머핀처럼 위쪽이 부풀었다. 가우디의 작품 카사 밀라(Casa Mila)와 닮았단 소리를 듣는 한남동 오피스 빌딩(2014)은 구불구불한 외벽에 곡선형 창을 내고 발코니를 만들었다. 발코니는 실내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피로감을 줄여 주는 역할을 맡는다. 강남구 도산공원 바로 앞에 위치한 폴 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는 고급 브랜드 매장이 밀집된 주변 환경 속에서 해당 브랜드를 일반인들에게 어떻게 인지시킬 것인지 고민한 끝에 탄생했다. 그 결과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각기 다른 해석이 가능한 건물이 되었다. 현재는 헤리티크뉴욕(HERITIQUE NewYork) 매장으로 사용된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삐죽하게 솟은 송파구 오금로(梧琴路)의 다세대 주택 다락다락(DARAK DARAK, 2016)은 건축물의 면적과 층수에서 제외되는 다락의 특성을 이용해 연면적과 높이를 확대했으며, 녹과 얼룩에 강해 오랫동안 깨끗하게 쓸 수 있는 컬러 강판을 사용한 덕에 눈에 띄는 건물이 됐다. 까다로운 조건과 제약이 김찬중에게는 실험적 시도의 원천이 됐다. “새로운 소재에 관심이 많습니다. 형태나 물성이 바뀌면 사람들의 접근이 달라져요. 다가와 두드려 보고 만져 봅니다. ‘스머프집 같다’, ‘문어 빨판 같다’는 식으로 별명도 지어 부릅니다. 이처럼 각자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투영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건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건축이란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물, 그리하여 사람들의 창의성을 북돋우고 건조한 도시에 활력도 불어넣는 것이라 믿거든요.” 부산 구도심에 위치한 PLACE 1 BUSAN은 하나은행 빌딩을 리모델링한 프로젝트이다. 건축가는 바빌론 시대의 공중 정원에서 모티브를 얻어 건물 상층부를 독특한 방식으로 디자인했다. ⓒ 유청오(Cheong O Yu)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물 코오롱그룹의 의뢰로 울릉도에 지은 코스모스 리조트(2017)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건축 같지 않은 건축에 대한 도전이었다. 바다 위 절벽에 놓인 이 호텔은 건물이라기보다는 한 점의 오브제다. 보티첼리의 이 연상되는 이 건물은 비너스를 실어 온 조개껍질처럼 희고 단아한 모습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형태는 봉오리 벌어지는 꽃잎 같고, 옆에서 본 곡선은 넘실대는 파도를 닮았다. 2015년 리조트 설계를 의뢰받은 김찬중은 예닐곱 시간 뱃길을 따라 울릉도로 들어갔다. 섬에 밤이 내리자 별과 하늘의 움직임이 보였고, 해가 뜨자 파도와 바람 소리가 들렸다. 천문기상대에 자료를 요청해 해와 달의 궤적을 받았고, 자연이 그린 포물선에서 건물의 곡선들을 추출했다. 건축물의 모든 부분이 자연을 닮은 이유다. “수만 년 동안 추산(錐山)을 중심으로 형성된 울릉도의 자연에 인위적인 표현을 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밖에서건 안에서건 건물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을 담길 바랐거든요.” 코스모스(KOSMOS) 리조트는 원시적인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울릉도에 위치한다. 건축가는 대지에 건축물을 설계하기보다는 자연을 담는 그릇을 만들고자 했다. 또한 그는 이곳이 별들의 궤적을 관조하는 일종의 천체 관측 도구가 되기를 희망했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살포시 자연을 파고든 건축물이니 육중해서는 안 된다. 날렵하고 가벼우면서도 외벽의 단단함을 갖추고, 염분 많은 바다의 풍파를 견딜 수 있는 소재가 필요했다. 토목에 주로 사용되던 UHPC를 건물 전체에 적용하기로 했다. 누구도 한 적 없는 시도다. 일반 콘크리트는 30cm 두께지만, 12cm로 얇게 만드는 게 가능했다. 강도는 다섯 배나 더 세다. 극한 조건을 충족할 콘크리트를 제작해 울릉도까지 실어 나르는 게 문제였다. 거푸집으로 현장 타설(打設)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그 또한 세계 최초였다. 그렇게 탄생한 유기적 형태는 자연이 낳은 것처럼 어우러졌다. 그의 어머니는 화가다. 어머니는 누드 크로키로 종종 전시회를 열었다. 인체 곡선이 갖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 손재주와 눈썰미 등의 감각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듯하다. 아버지는 그가 효율적인 실용주의자로 성장하게끔 자극을 주었다. 기능주의자면서도, 예술가 못지않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건축가가 된 배경이다. 미래를 위한 건축 “건축은 오래된 산업 중 하나입니다. 세상의 변화가 느릿하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기술 혁신이 빠르게 진행됩니다. 우리가 땅을 확보해 설계하고 짓기까지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까지 걸리는데, 그 사이 기술과 트렌드, 건물의 역할까지도 급속히 바뀌거든요. 건축가로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고민이 숙제입니다.” 성수동 연무장길에 자리하고 있는 우란(友蘭)문화재단은 지역적 맥락에 흡수될 수 있도록 설계된 건축물이다. 주변에 위치한 소규모 공방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작은 덩어리들이 집합을 이룬 듯한 형태로 디자인됐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건물의 형태적 혁신은 기능의 변화를 반영한다. 김찬중의 신작들은 이제 지역성과 공동체, 역사를 파고든다. 그는 2021년 울산광역시 울주군(蔚州郡) 외고산(外高山) 옹기마을의 쇠락한 구도심 재생 프로젝트를 맡았다. 외고산 옹기마을은 전통 옹기의 제조 기술과 미학을 지켜가고 있는 곳으로, 전국에서 생산되는 옹기의 50퍼센트 이상이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그는 카페와 맛집으로 주말만 북적이는 명소가 아닌, 젊은 사람들이 일하며 생활하는 정주형 오피스를 통해 진정한 지역 활성화가 이루어지기를 고대한다. 지난해에는 서울시의 의뢰로 재단법인 아름지기와 함께 종로구 옥인동(玉仁洞) ‘윤씨 가옥’의 리모델링을 맡았다. 이 집은 대한제국(1897~1910) 시대 친일파 관료였던 윤덕영(尹德榮)이 자신의 소실을 위해 지은 한옥이다. 당대 최고로 화려했던 집이었지만, 권력의 몰락과 함께 빈집으로 쇠락해 방치돼 있었다. 그는 내년 상반기 공개를 목표로, 이곳을 시민들을 위해 열린 공간으로 바꿔 놓을 계획이다. 그는 미래를 짓는다.

비어 있는 공간의 감각, 건축가 최욱

Brick by Brick 2024 SPRING

비어 있는 공간의 감각, 건축가 최욱 원오원아키텍스(ONE O ONE architects) 대표인 건축가 최욱(Choi Wook, 崔旭)은 서양의 건축이도상학적인 반면 한국의 건축은 그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적 표현 방식을 건축에 구현하려고 하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시각적인 형태 미학에 관심을 두는 대신 경험과 직관을통해 한국 고유의 공간 형식을 꾸준히 탐색한다. 최욱은 건축물의 시각적인 조형성보다는 공간 구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축가이다. 건물과 대지(垈地)의 관계, 건물 내부와 외부의 소통,질감과 색감 등을 통해 공간 내에서 감성적 체험이 가능하도록 유도한다. ⓒ 텍스처 온 텍스처(texture on texture) “2021년 11월, 국립중앙박물관에 새로 조성된 ‘사유의 방’은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되어 각각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로 지정된 두 점의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위한 공간이다. 어두운 진입로를 돌아 흙빛의 공간에 들어서면 관람객들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미륵의 미소를 만난다. 쇼케이스를 벗어난 국보의 안전성에 대한 고려,360도 관람이라는 과감한 시도, 불상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지키면서도 새로운 전시 방식을 구현한 ‘사유의 방’은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공간감을 보여 준다. 관람객들이 불상을 접하는 공간의크기는 배우의 표정을 잘 읽을 수 있는 소극장의 내부 길이인 24m로 하고, 두 개의 불상을 어긋나게 배치해 타원형 좌대 위에 올렸다. 1도 정도 기울어진 바닥과 천장은 불상들을 향하고 있으며,벽은 빛을 흡수하는 흙과 숯 같은 자연 재료로 마감했다. 덕분에 내부에서는 금동 불상만이 빛을 뿜는다. 천장은 소방법을 고려해 검고 평활한 면 대신 알루미늄 봉을 선택했다. 빼곡한알루미늄 봉들 덕분에 천장은 광활한 밤하늘이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각적인 투시화법을 깨뜨리고 싶었어요. 시각적 중심이 없으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되죠. 탑돌이를하듯 말이죠. 엄정한 기하학적 논리보다 영적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어요. ” 이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 최욱은 서양의 투시도법에서 벗어나 공간의 감각을 구체화하는 접근방법을 보여 줬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은 전시 방식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물을 360도로 관람할 수 있게 공간을 조성했으며,유물과 관람객들 간 거리도 치밀히 계산했다. 원오원아키텍스 제공, 사진 김인철(Kim In-chul, 金仁哲) 한국 건축에 대한 탐색 “베니스 건축대학으로 유학을 갔는데, 당시 유럽에서 주목받는 대학 중 하나였어요. 당대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건축계의 석학들이 모여 있었죠. 논리적이고 이성주의에 근거한 서양 건축을 배우다보니 우리와 굉장히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르네상스 시기에 들어서면 투시화법적인 공간이 생기는데, 그러면 파사드가 중요해지거든요. 그런데 한국 건축은 파사드가 중요치않은 것 같았어요. ‘우리는 다른 체계가 있을 것 같다’라는 의구심이 들었죠.” 유학 시절 비첸차의 안드레아 팔라디오 도서관 계단에서 만난 현대 음악가의 질문도 흥미로웠다. “한국의 음악은 정말 이상하지 않냐고 하더라고요. 서양 음악은 서로 교류하며 화음을 만드는데, 우리나라 음악은 5개 음이 질주한대요. 만나질 않는다고요. 나중에 저는 그것을병치의 세계라고 이해했어요. 서양의 컴포지션과 극명하게 다른 거죠.” 한국 건축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갈증은 유학에서 돌아온 후 건축 답사를 다니면서 조금씩 해소되었다. 그는경사지가 많은 우리 땅에서 자연환경에 순응하며 배치된 기단(基壇)의 존재에 주목했다. 작은 필지가 모여 만드는 군집의 풍경도 매혹적이었다. 도심 개발로 인해 북촌 한옥들이 급격하게 사라져가는 풍경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 2000년대 초반에는 북촌에 자리한 한옥에 사무실을 꾸렸다. 한옥의 특징을 체험하고 관찰하는 시간이었다. 이러한 탐색의 시간은 곧 결과로 이어졌다. 2012년의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Hyundaicard Design Library)와 2016년의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Hyundaicard CookingLibrary) 등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시리즈에서는 빛과 소리, 냄새 등 공간 자체가 주는 감각에 주목했다. 또한 2013년 작업한 현대카드 영등포 사옥(HyundaicardYeongdeungpo Office Building)의 경우 로비 바닥면을 외부로 확장시켜 건물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게 했다. 여러 고층 빌딩에서는 주변 땅의 흐름을 고려한 섬세한저층부가 기단의 역할을 하도록 했고, 상층부는 그 존재감을 없애 파사드의 존재를 흐릿하게 만들고자 했다. 로비에서는 여러 방향에서 빛이 들어와 공간 내부에 그림자가 지지 않는양명(陽明)한 빛을 만들었다. 서양 건축의 체계로 구현되는 현대 건축에서 그는 경험을 통해 체감하는 동양적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서울 가회동에 위치한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는 최욱이 기존 갤러리 건물을 간결하게 레노베이션하여 여백의 아름다움을 살린 공간이다.중정을 둘러싼 삼면에 유리창을 두어 밝은 빛을 실내로 끌어들였고, 나무∙철∙스테인리스 같은 소재를 사용해 각각의 물성을 대비시켰다. 원오원아키텍스(ONE O ONEarchitects) 제공, 사진 남궁선 현대카드 영등포 사옥은 건물이 주변 환경에 스며들도록 설계되었다. 1층 로비 바닥을 건물 외부로 확장시켜 안팎의 경계가 사라지게 했으며,건물 외피에 입힌 커튼월은 고층 빌딩의 존재감을 약화시켜 주변 다른 건물들과 위화감 없이 어울리게 만든다. 원오원아키텍스 제공, 사진 남궁선(Namgoong Sun,南宮先) 공간의 흐름 “우리 전통 건축은 터의 단면과 기단이 공간의 성격과 크기 그리고 사람의 움직임을 만들었어요. 일반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땅과 주변 상황을 먼저 이해하려고 합니다.그리고 건물이 놓이는 대지와 주변의 관계, 즉 단면의 연속적 시퀀스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바닥의 질감, 공간의 온도와 색감을 맞추는 게 중요한 주제예요.” 화장품 제조 기업아모레퍼시픽의 헤리티지 브랜드 설화수(雪花秀)는 2022년 서울 가회동(嘉會洞)에 플래그십 스토어 ‘설화수의 집’을 열었다. 이곳은 최욱이 추구하는 건축의 접근법을 잘 보여 준다.1930년대 지어진 대로변의 근대 한옥과 1960년대의 양옥을 레노베이션한 이 프로젝트는 시대와 형식이 다른 두 건축물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채가 군집을 이룰 때공간의 흐름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가 중요했다. 그는 기존 한옥의 터를 충실히 반영하면서 땅의 흐름을 만들고, 전면 한옥의 중정과 뒤편에 길게 들어선 양옥을 잇기 위해6m에 달하는 옹벽을 털어 냈다. 양옥에 지하층을 만들어 한옥의 중정과 연결하는 작업은 매우 까다롭고 어려웠지만, 이를 통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어떻게 하면한옥의 장점을 극명하게 보여 줄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 한옥에 투명한 유리문과 창을 설치하고 채와 채 사이 공간에서 시선이 사선으로 흐르도록 했다. 이를 통해 한옥에서 양옥으로 이르는길에서는 각기 다른 풍경을 만나게 된다. 최욱은 이를 일보일경(一步一景)이라고 부른다. 몸의 감각이 경험하는 산책로인 셈이다. ‘설화수의 집’은 한국적인 공간 구현에 대한 건축가의 탐색이 잘 드러난 곳이다. 그는 기존에 있던 한옥과 양옥을 하나의 공간으로 합치기위해 두 집을 가로막고 있던 옹벽을 없애고 그 자리에 중정을 만들어 서로 연결시켰다. 원오원아키텍스 제공, 사진 김인철 고유한 DNA 현대카드의 후원으로 이탈리아 건축 디자인 잡지 『도무스(domus)』의 로컬 에디션인 『도무스 코리아(domus Korea)』를 발행하면서 건축에 대한 최욱의 시각은 점차 구체화되었다.2018년 11월 창간호를 시작으로 2021년 가을호까지 총 12권이 발행된 이 잡지는 그가 오랫동안 탐색했던 한국 건축의 특성을 여러 비평가와 작가, 건축가들과 함께 고민해 보는 좋은기회였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땅, 그라운드, 병치, 군집, 공(空)감각(비어 있는 공간에 대한 감각)과 같은 키워드를 길어 냈다.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존중의표현이라고 할 수 있죠. ‘한국’이라는 거창한 개념을 말하려는 것보다는 이 땅의 dna, 고유한 문화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어요.” 최욱은 땅에 대한 이해에서출발해 그것의 성격을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주제를 건축으로 풀어낸다. 이는 논리적인 체계로 설명되지 않는 경험과 직관의 영역에 속한다. 자칫 모호한 언어로 남을 수도 있는 경험과직관을 그는 구체적인 수치와 정교한 구축 방식으로 구현하고, 공간의 경험을 통해 설득한다. 서울 부암동(付岩洞)에 있는 그의 자택 ‘축대가 있는 집’이나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에 위치한‘바닷가의 집’은 그가 만들고자 하는 건축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원형에 가깝다. “한국 건축은 터의 조건, 빛의 관계, 쓰임새 등을 해석하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건물의정면이 아닌 공간의 분위기가 중요해요.’라는 그의 말처럼 이 집들은 건축의 외형적 형태가 극대화되는 대신 채와 채 사이의 공간이나 햇빛과 바람, 새소리, 파도 소리 같은 주변 감각이 먼저다가온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을 설계한 김태수(Tai Soo Kim, 金泰修) 선생님이 오래전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제 거장의 시대가 끝나고 모더니즘 시대가되었다지만, 1980년대는 모더니즘은 끝났고 오토 파운데이션의 시대라고요. 각자 자신의 토대를 만드는 시대라는 거죠. 제게도 어린 시절의 고유한 기억들이 남아 있어요. 원오원 식구들에게도취향보다는 자신만의 중요한 기억, 개인적인 경험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해요. 자기 서사를 통해 작업을 읽고 만들어 가는 거죠.”  서울 부암동에 위치한 최욱의 자택 ‘축대가 있는 집’은 그가 지향하는 건축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지형을 그대로 살려서 지은 이 집은벽을 최소화해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사진은 부부가 사용하는 다이닝 공간이다. 원오원아키텍스 제공, 사진 남궁선 최욱의 세컨드 하우스인 ‘바닷가의 집’은 이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 어촌 마을의 다른 집들과 이질감 없이 융화될 수 있도록 아담한 크기로지어졌으며, 건물 벽면도 미장으로 마무리되었다. 기능적 고려보다는 곳곳에 창을 크게 내서 바다 풍경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데 중점을 둔 집이다. 원오원아키텍스 제공, 사진김인철 서울 호텔신라 5층에 자리한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 라운지(GENESIS Lounge)는 한옥 마당과 대청에서 얻은 모티브를 구현한공간이다. 층고가 낮은 호텔의 실내 공간이라는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천장에는 반사 성질이 있는 재료를 사용했다. 원오원아키텍스 제공, 사진 김인철 임진영(Lim Jin-young, 任鎭咏) 오픈하우스서울(OPENHOUSE Seoul) 대표

땅의 건축가 조병수

Brick by Brick 2023 WINTER

땅의 건축가 조병수 유기성과 추상성의 만남, 거침 속의 세련됨, 세련됨 속의 무심함…. 이는 비평가들이 조병수의 건축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그는 한국적인 자연스러움과 모더니즘의 추상성이라는 양 극단을 버무려 내는 건축가로 통한다. 그의 작업에는 오랜 시간 탐색해 온 한국 문화와 사상, 건축의 본질에 대한 태도가 담겨 있다. 건축가 조병수의 대표작 중 하나인 땅집(Earth House)은 땅 위에 건물을 세우는 대신 과감하게 땅을 파고 내려가 대지가 집을 품을 수 있도록 설계한 집이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건축가의 또 다른 대표작인 ㅁ자집(Concrete Box House)은 13.4 × 13.4 m 크기의 정사각형 공간 중앙에 5 × 5 m의 개구부를 만들어 내부 공간과 바깥이 연결되도록 디자인했다. ⓒ 황우섭 조병수에게 땅은 건축적 화두이다. 그는 주어진 지형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땅을 덜 훼손하는 방법을 택하며, 건축물을 매개로 인간이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데 집중한다. ⓒ 텍스처 온 텍스처(texture on texture) 『현대 건축: 비판적 역사(Modern Architecture: A Critical History)』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현대 건축의 역사서다. 영향력 있는 건축 역사학자인 케네스 프램튼(Kenneth Frampton)은 2020년 출간한 이 책의 다섯 번째 개정판에서 처음으로 한국 건축을 언급했다. 현대 건축에 늦게 진입한 한국의 상황과 함께 대표적 건축가로 김수근(Kim Swoo-geun, 金壽根, 1931~1986)과 조병수, 조민석(Minsuk Cho, 曺敏碩)을 소개했다. 왕성하고 꾸준하게 자신의 작업을 알려 온 조병수가 본격적으로 국제 무대에 선 순간이었다. 1978년,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세종문화회관이 완공되어 열린 기념 전시에서 건축 도면을 처음 본 그는 건축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막연히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기왕이면 마크 트웨인의 고향 근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울 청계천 헌책방에서 마크 트웨인의 『What Is Man?』이라는 책을 봤어요. 인간을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서 충격을 받았죠. 저에게 큰 질문을 던졌어요.”이 책을 기회로 인간에 대한 믿음은 그의 삶에서나 건축에서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그가 이성과 감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감성적인 건축을 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경험적 건축 미국의 한적한 시골, 몬태나대학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그런데 어느 날 무심코 바라본 하늘은 별 볼 일 없던 시골 풍경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했다. 특히 몬태나의 농업 창고는 그에게 강렬한 영감을 주었다. 그는 담백하면서도 꾸밈없는 이 실용적인 건물이 한국 전통 건축의 태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는 자신의 건축 주제인 ‘경험과 인식’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구에서는 현대 건축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일고 있었다. “맥길대학교(McGill University) 교수인 알베르토 페레스 고메스(Alberto Pérez-Gómez)의 『현대 과학의 위기와 건축(Architecture and the Crisis of Modern Science)』이 감명 깊었어요. 케네스 프램튼의 「비판적 지역주의를 향하여」 같은 글도 그렇고요. 현대 건축에 대한 반성은 자연과 소통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건축에 그 대안이 있다고 생각했죠.” 그는 한국 건축이 자연과 융화하는 점, 지나치게 섬세하지도 않고 과장되지도 않아 자연스럽고 편안한 점에 착안했다. 그것은 시각적인 비례나 형태를 넘어선 ‘경험적인 건축’을 추구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대학원 졸업 논문은 이에 대한 모색이었다. 그는 사람이 공간에 들어가 무엇을 경험하는지, 그 경험을 통해 어떻게 자연을 인식하게 되는지, 그리고 구조물과 여백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주목한다. 박스 시리즈 음악 스튜디오와 거주 공간을 겸한 카메라타의 건축 스케치. 조병수 제공 3층짜리 건물인 카메라타의 1층은 음악 스튜디오로 사용된다. 창고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내부에 기둥과 보를 없애고, 서쪽의 긴 콘크리트 벽면은 거친 질감을 표현했다. 사진에서 보이는 천장은 와이어로 달아맨 2층 메자닌의 바닥면으로, 흡음을 위해 목재 사이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 김종오(KimJong-oh, 金鐘五)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조병수는 건축가로서 본격적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어유지마을 프로젝트에서 시도한 합판 위 스테인리스 마감, 갈바륨 지붕과 얇은 기둥은 한정된 예산을 고려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간결한 디테일과 재료의 조합으로 흥미로운 구성을 만들었다. 그의 말마따나 비용을 저렴하게 들일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다 보면 친환경적인 건축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ㅁ자집과 카메라타(Camerata)는 그의 건축 세계를 보여 주는 대표작이다. ㅁ자집은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그의 세컨드하우스로, 대학원 졸업 논문에서 제안했던 개념을 구현했다. 전형적인 한옥 마당을 연상시키는 네모난 중정과 10개의 굵직한 한옥 고재는 전통 건축 양식을 차용한 것이라기보다는 빛, 바람, 하늘 같은 자연환경을 건물 내부로 들이기 위한 의도가 강했다. 이 집의 구조적인 실험도 눈여겨볼 만하다. 단조로운 콘크리트 박스를 만들기 위해 그는 방수제를 쓰지 않고 양생(養生, curing) 중에 콘크리트를 두드리는 방식으로 자연 방수를 시도했다. 수축 비율이 다른 콘크리트와 목재를 직접 연결한 과감한 시도도 성공적이었다. 이로써 실내는 보 없이도 10개의 목재가 5~6m 간격으로 힘을 적절히 분산할 수 있었고, 지붕은 파라펫 없는 정사각 평면이 될 수 있었다. 목재의 수축 방향과 콘크리트 처짐에 관한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카메라타는 유명한 디스크자키인 황인용(黄仁龍)의 음악 스튜디오이자 집이다. 조병수는 소리의 경험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다가 몬태나의 시골 창고를 떠올렸다. 어둑한 공간을 한줄기 빛과 음악 소리만으로 채우겠다는 과감한 아이디어는 황인용이 어린 시절 경험했던 소금 창고의 기억과 맞물리며 공감을 얻었다. 내부에 기둥을 없애고 2층 메자닌을 와이어로 달아맨 공간은 청각적 경험을 살리고자 한 접근이었다. 음향 문제는 공사비를 고려해 천장 콘크리트를 거칠게 켜를 내 흡음판 역할을 하게 했다. 한편 두 개의 상자, 즉 음악 스튜디오와 집 사이에는 중정을 만들었다. ㅁ자집과 카메라타 이후 단순한 형태의 상자들을 조합해 사이 공간을 만들며 건축 너머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박스 시리즈가 이어졌다. 그의 건축은 단조로운 상자에서 출발해 꺾이거나 뒤틀리며 역동성을 갖는 방향으로, 또 직선에서 곡선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땅에 대한 고찰 총 6평 규모의 땅집은 방 두 개와 서재 하나, 부엌, 화장실, 보일러실이 각각 1평씩 구성되어 있다. 마당으로 난 두 개의 방문을 비롯해 집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또한 허리를 숙여야 할 만큼 작은데 이는 절제와 성찰, 겸허함을 표현하기 위한 건축가의 의도이다. ⓒ 김용관 조병수의 실험은 땅집으로 이어졌다. 과감하게 땅을 파고 들어간 이 건물은 땅에 대한 그의 친숙함에서 출발했지만, 공간을 단순화할수록 하늘과 나무, 별과 바람을 더 잘 느낄 수 있다는 신념도 한몫했다. 이러한 태도는 바닷가 경사지에 건물을 묻어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바다와 연결하고 공간을 땅의 품속에 안기게 한 지평집에서도 이어진다. 땅에 대한 관심은 그가 올해 총감독을 맡은 제4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서 더욱 확장되었다. 옛 한양의 산길, 물길, 바람길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은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 본연의 지형을 잇고, 물길을 연결하고, 바람이 지나가는 쾌적하고도 걷기 좋은 물리적 환경을 만들기 위한 제안이었다. 최근 영국 템스 앤 허드슨(Thames & Hudson) 출판사가 발간한 『Byoung Cho: My Life as an Architect in Seoul』에서도 그가 나고 자란 서울의 자연 환경,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여러 건축물을 소개하며 서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그가 말하는 땅은 추상적이고 인문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공간 경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물리적인 실체이다. “나는 자연환경, 문화적 환경, 그리고 맥락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그중에서도 특히 지형, 바람, 물과 같은 물리적인 콘텍스트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그의 집과 사무실, 그리고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을 통해 한국의 도시들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잃어버렸던 공간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여전히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즐겁게 작업하며, 하루 일과 끝에 친구들과 와인 한잔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일상을 유지한다. 달라이 라마가 말하는 관계성을 되새기며 감성적인 건축을 실천하고자 한다. 건축가로 살아온 지 이제 30년, 그에게 건축은 여전히 삶의 따뜻한 공간을 만드는 일이자 흥미로운 놀잇거리이다. ㅁ자집은 10개의 고재를 5미터 간격을 두고 20센티미터 두께의 콘크리트 지붕과 연결했다. 수축 비율이 다른 목재와 콘크리트의 결합은 건축가의 실험 중 하나였으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 텍스처 온 텍스처 지평집은 땅의 복잡한 등고를 따라 스며들 듯 지어졌다. 콘크리트 벽체의 틈에서 이 지역의 자생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건축물이 자연과 교감할 수 있도록 한 건축가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 세르조 피로네(Sergio Pirr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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