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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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AUTUMN
가을 정취 가득한 서산에서 찾는 한국, 한국인
지난 2021년 9월 유튜브 Imagine Your Korea 채널에 올라온 ‘Feel the Rhythm of Korea-Seosan’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영상 제목은 ‘머드 맥스(Mud Max)’였는데, 조지 밀러(George Miller) 감독의 2015년 작인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 > 를 패러디해 만든 것이었다. 영화에서는 사막을 달리는 트럭이 등장하나, 머드 맥스 영상에서는 경운기들이 갯벌을 질주하는 식이었다. 이 영상은 바다에 면해 있는 충남 서산(瑞山)의 풍경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을 정취 물씬 풍기는 서산으로 분노 대신 기대감을 머금고, 지금 달려보자.
ⓒ 서산시
서산을 포함한 주변 지역은 ‘내포(內浦)’라고 불릴 정도로 크고 작은 갯고랑들이 내륙 깊숙한 곳까지 발달해 있다. 그만큼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差)가 크다는 뜻이다. 실제로 서산 북쪽의 가로림만(加露林灣)은 평균 조차가 4.7미터나 되고, 최대 조차는 무려 8미터 안팎에 달한다. 서산 남쪽 천수만(淺水灣)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 최대의 조수간만 차가 내어준 보물
웅도(熊島)는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육지와 연결되기도 하고 섬이 되기도 한다. 웅도와 육지를 잇는 것은 유두교이다. 하루에 두 번 바닷물에 잠기는 신비로운 모습에 인기 여행지가 되었다. 해당 다리는 갯벌생태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25년 철거될 예정이다.
세계 수위권에 속할 정도로 큰 조수간만의 차는 다양한 수산자원을 제공해 주는 풍요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그중에서도 2016년 한국 최초의 ‘해양생물보호구역’이자 25번째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래 2019년 92.04제곱킬로미터 규모로 확대되었을 만큼,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고 깨끗한 바다가 바로 가로림만이다.
머드 맥스 영상에서 주민들이 경운기를 타고 내달리는 곳 역시 간조로 드러난 가로림만의 오지리(吾池里) 갯벌이다. 밀물 때는 전어(錢魚)와 우럭을 비롯한 다양한 생선들을 잡을 수 있다. 썰물 때면 끝없이 펼쳐진 갯벌에서 한국에서 생산되는 감태(甘苔)의 대부분이 여기서 채취되고, 바지락과 새조개를 포함한 다양한 저서성(底棲性) 해산물이 잡힌다. 요즈음 같은 가을에는 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 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낙지(絡蹄)가 제철이다. 2014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식탁에 낙지죽이 오른 적이 있는데, 교황이 두 차례나 리필을 요청했을 정도로 호평받으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어민들이 낙지 잡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오지리 갯벌 남쪽에 위치한 중왕리(中旺里)에 가면 된다. 그들은 낙지가 개펄에 만들어 놓은 숨구멍을 찾은 뒤, 작은 삽처럼 생긴 가래를 이용해 최대 1미터까지 파 내려가 잡아 올린다. 원한다면 직접 낙지 잡이 체험도 해볼 수 있다. 낙지 제철인 가을에는 가로림만 곳곳에서 낙지잡기 체험이 가능하다.
특히 오지리와 중왕리 사이에 위치한 웅도(熊島)에서는 밀물과 썰물에 따라 섬이 600여 미터 거리에 있는 육지와 단절되었다가 다시 연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다 갈라짐’이라 불리는 현상이다. 밀물과 썰물은 하루에 두 번씩 있으니 바다 갈라짐 역시 하루에 두 번씩 볼 수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유독 큰, 그래서 생물종이 더욱 다양하고 양도 넉넉한 가로림만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풍경이다. 다만 오는 2025년쯤이면 연륙교가 들어설 예정이라 이 풍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채 2년도 남지 않았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면 서둘러야 한다.
풍요로움이 초래한 아픔, 그것을 견뎌내기 위한 노력
서산과 맞닿은 가로림만은 주민들에게 다양한 수산자원을 제공한다.
한편 바다로부터 얻은 풍요로움은 바다 밖으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불러왔다. 출몰하는 해적의 노략질로 인해 오랜 기간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서산은 동쪽의 산군(山群)과 바다 사이에 들판도 넓게 발달해 있기에 거기서 얻는 소출도 적지 않았던 탓이다.
선조들이 본격적인 대응에 나선 것은 조선 초인 1416년이었다. 천수만 북쪽의 도비산(島飛山)에서 군사훈련 겸 사냥대회를 하던 조선 3대왕 태종(재위 1401~1418)이 도비산 동쪽에 위치한 해미(海美) 지역이 서해안에 출몰하던 해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단은 곧 실행으로 이어졌다. 1417년에 축성 공사를 시작해 4년 만에 완공했다. 그러고는 한반도 중부지역을 관장하는 육군 최고지휘기관인 충청병마절도사영(忠淸兵馬節度使營)을 해미로 옮겨와 육상 외에 해상 방어까지 맡도록 했다. 서산이 한반도의 주요한 식재료 공급지로서만이 아니라 명실공히 공동체의 안녕을 지켜내기 위한 최전선임과 동시에 최후의 보루 역할까지 짊어지게 된 것이다.
해미읍성(海美邑城)은 현재 남아 있는 읍성 가운데 가장 보존된 곳으로,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현재 해미 한복판에서 웅장한 모습을 뽐내고 있는 약 1.8킬로미터 길이의 해미읍성(海美邑城) 이 그 증거다. 높이 5미터 안팎의 성벽이 빈틈 없이 둘러쳐져 있고 ‘치(雉)’ 도 2개나 되어, 당시의 삼엄했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치는 ‘꿩’을 뜻하는 한자인데, 꿩은 무언가 위험한 상황을 감지하면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대가리만 살짝 내놓고 동태를 살피곤 한다. 즉 ‘치’는 성벽 중간중간에 톱니처럼 바깥으로 툭 튀어나오도록 지은 구조물이다. 접근하는 적을 일찍 관측할 수 있도록 하고, 행여 전투가 벌어지면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뿐만 아니라 양 측면에서도, 즉 3면에서 공격해 격퇴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해미읍성 안으로 들어가면 수령이 300년은 족히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를 중심으로 지방 관아인 동헌(東軒)과 출장을 온 관료들이 숙박하던 객사(客舍), 죄인들을 가두어 두었던 옥사(獄舍) 등도 재건되어 있다. 동헌을 왼쪽으로 끼고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가면 정상에 청허정(淸虛亭)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지금의 정자는 2011년에 재건한 것이기는 하나 해미읍성 일대를 한눈에 조망하기에 제격이며, 주변의 소나무 숲은 산책하기에 일품이다. 전북 고창읍성(高敞邑城) 및 전남 낙안읍성(樂安邑城)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온 읍성(邑城)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해미읍성이 제 역할을 했기에 내륙지방은 오래도록 안녕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협력과 상생의 역사가 갖는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기 위해 오는 10월 7일부터 사흘 동안 ‘제20회 서산해미읍성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코로나19로 중단된 이후 4년 만의 축제다. 긴 역사만큼이나 더욱 다채로운 행사들로 구성될 예정이다.
두 사찰과 한 개의 마애불에 녹아있는 염원 충남 서산은 문화유산 면에서도 두터운 역사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자연과 조화로움도 인상적이다. 대표적인 곳으로 개심사(開心寺)와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그리고 간월암(看月庵)이 있다.
보물 143호로 등재된 개심사(開心寺) 대웅전(大雄殿). 개심사에 가면 건축예술이 돋보이는 대웅전 외에 심검당(尋劍堂)도 둘러볼 것을 권한다. 심검당은 여러 절을 떠돌며 수행하던 행각승이 머물던 별채로, 자연이 깃든 아름다움을 뽐낸다.
먼저 상왕산(象王山)과 일락산(日樂山) 사이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개심사는 백제 말기인 서기 654년에 창건된 이래 1,4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써오고 있는 사찰이다. 오랜 역사와 미학적인 가치로 말미암아 충남 4대 사찰 가운데 하나로도 일컬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개심사는 사찰로 향하는 여정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사찰 주차장에 닿기 직전 지나는 신창(新昌) 저수지는 일대의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한 시설인데, 가을 아침 그곳을 지날 때면 상서로운 안개가 신비감을 더해준다. 잠시 차에서 내려 산책을 권한다. 이후 주차장에서 일주문(一柱門)을 지나면 사찰까지 500미터 남짓한 숲길이 이어진다. 그 끝에서 만나는 첫 풍광은 직사각형 연못 위에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걸쳐놓은 외나무다리다. 그 옆으로 거울 연못이라는 뜻의 ‘경지(鏡池)’라고 새겨놓은 표석이 있다. 스스로의 마음을 물에 비추어 돌아보고 성찰하라는 의미로, ‘마음을 열고 온갖 번뇌를 씻는 사찰’이라는 뜻을 가진 개심사의 이름과 일맥상통한다.
이렇듯 개심사는 화려하지 않아 오히려 돋보이는 사찰이다. 2004년 복장유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280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불(木佛)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佛坐像), 1484년에 고쳐 지은 이래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대웅전(大雄殿) 등 곳곳에 단아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시선을 끄는 것은 승려들의 거처인 심검당(尋劍堂)이다. 옆에 연결돼 있는 부엌 부분만 후에 덧대어졌을 뿐 대웅전과 비슷한 시기에 고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이 유독 이목을 끄는 까닭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휘어진 통나무를 최소한만 다듬어 세운 기둥 때문이다. 단청도 칠하지 않아 미세하게 벌어진 나무 틈새들에서는 역사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사찰 안팎의 가을 단풍과 함께 어우러져 천년고찰의 중후함과 함께 소박하면서도 아늑한 운치를 더한다.
백제 말기의 화강석 불상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긴 세월 수풀에 파묻혀 있다가 1958년 발견되었다. 빛의 각도에 따라 오묘하게 변하는 미소가 돋보인다.
개심사의 반대편 산자락에 거대한 암반을 캔버스 삼아 조각돼 있는 서산마애삼존불 역시도 꾸밈 없이 소박해 보이기는 매한가지다. 심지어 범접할 수 있는 저 너머의 누군가가 아니라 내 주변의 장난끼 많은 친구와 같은 익살스러운 느낌마저 풍긴다. 시간이 지남에 따른 분위기 변화도 예사롭지 않다. 벽면 부조이기는 하나 양감(量感)이 풍성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보니 시간 흐름에 따라 태양빛이 드리우는 각도가 달라져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닌가 싶다. 더욱이 1,500년 가까이 베일에 싸여 있다 1959년에야 세상에 알려져 국보로 지정된 문화유산이기에 특별함은 배가 된다. 서산마애삼존불이 괜히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게 아닌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서산에 간다면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 있다. 머드 맥스 영상에도 등장하는 간월암이다. 천수만 위에 떠 있는 서산의 최남단 섬 간월도(看月島)에 있는 유일무이한 암자(庵子)이다. 이곳 역시 웅도처럼 하루에 두 번 바다 갈라짐이 나타날 때면 약 30미터 폭의 길이 드러나기에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웅도와 차이라면 밀물에 길이 잠긴다 해도 나룻배가 있어 들고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밀물에 잠겼을 때의 모습이 마치 연꽃 같다 해서 연화대(蓮花臺)라고도 불리는데, 실제로는 밀물 때든 썰물 때든 할 것 없이 한 폭의 그림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해 질 녘에 간월암에 간다면 그 그윽함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간척의 역사가 곧 한국의 역사
주전골 입구에 있는 용소폭포는 높이는 약 10m, 소의 깊이 약 7m로 아담한 규모다. 옛날 옛날 이 소에서 살던 천년 묶은 암수 이무기 2마리가 용이 되어 승천하려 하다가 수놈만 승천하고 암놈은 미처 준비가 안 되어 이곳에서 굳어져 바위와 폭포가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개심사를 비롯한 서산마애삼존불과 간월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이 질박한 역사 유산에서 느껴지는 공통된 감정은 옛사람들의 평화와 안녕을 바라는 깊은 염원이다. 바다가 많은 것을 제공해 주긴 했으나 해난사고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전근대 시대에는 해적의 노략질 탓에 공동체의 평화가 깨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옛 서산 사람들, 나아가 한국인들은 그와 같은 도전적 상황에 주눅 들지 않고 생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한시도 멈춘 적이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음에도 다시 일어섰으며, 독재 시대를 물리치고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해 왔다. 그런 면에서 간월암 바로 동쪽에 있는 ‘서산 A지구 방조제(防潮堤)’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끝내 그 방조제를 쌓는 데 성공함으로써 착공 15년 3개월 만에 완공한 ‘서산 AB지구 간척지(干拓地)’는 좁게는 서산, 넓게는 한국과 한국인의 면면을 상징하는 바로미터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워낙 큰 바다답게 공사가 시작된 1980년 당시에는 간척지 조성을 위한 방조제를 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승용차 크기의 돌을 퍼부어도 초당 8미터가 넘는 거센 물살에 휩쓸려 가기 일쑤였다. 공사는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공사를 맡고 있던 정주영(鄭周永 1915~2001) 현대건설(現代建設) 회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고철로 이용하기 위해 스웨덴에서 들여온 23만 톤급 대형 유조선이 있었는데, 그것을 끝내 메우지 못하고 있던 마지막 물막이 공사 구간에 바짝 붙여 가라앉히라는 지시였다. 모두가 긴가민가하는 사이에 유조선을 가라앉히는 데 성공했고, 유속이 잦아든 틈을 타 공사는 순조롭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길이가 7.7킬로미터에 달하는 방조제가 완공되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당시 한국의 전체 농경지 면적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1만 헥타르가 넘는 농경지였다. 단일 농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서, 50만 명의 사람들이 1년 안팎을 먹을 수 있는 양의 쌀을 재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청정한 바다와 영양 풍부한 갯벌이 선사해 준 충분한 양식, 그리고 공동체의 평화를 지켜내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확대하기 위한 노력으로 대표되는 충남 서산. 그러고 보면 서산 여행은 단지 서산의 과거에서 멈추지 않고 오늘의 한국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주민들이 수산자원을 활용하는 한편 지속가능한 환경을 위해 보호를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는 점을, 해미읍성이나 불교 관련 문화유산으로부터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의 행복도 중시하는 문화를, 그리고 서산AB지구 간척지에서는 그런 역사가 낳은 한국인의 정신까지 말이다. 가을 정취 넘치는 서산은 과거를 통해 한국의 오늘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여행지다.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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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SUMMER
한적하면서도 역동적인 휴양지
강원도 양양은 그 자체로 종합선물 세트와 같은 고장이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고갯길이 있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걸을 수 있는 트레일이 있다. 역경을 딛고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문화유산 낙산사(洛山寺)가 있으며, 한국 최고의 서핑 성지로도 꼽히는 곳이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이 고개를 넘을 땐 늑장을 부릴수록 좋다는 말이 있다. 뛰어난 풍광이 여행자를 붙잡기 때문이다. 굽이굽이 비밀스러운 길을 올라가다 보면 또 다른 세계와 연결되어 있을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든다. 길을 다소 돌아가더라도 강원도(江原道)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로 꼽히는 이 고갯길을 놓치지 말라고 추천하는 이유이다.
아름다운 고갯길과 배려의 건축
설악산은 한국인이 사랑하고 즐겨 찾는 산이다. 설악산의 한계령 이남 오색지구를 남설악이라고 하는데, 주전골은 남설악에서 가장 수려한 계곡으로, 하이킹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골이 깊어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수 있으며, 주변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고갯길의 이름은 ‘오색령(五色嶺)’이라고도 부르는 ‘한계령(寒溪嶺)’이다. 한계령은 ‘차디찬 계곡을 끼고 있는 고개’를 뜻한다. 실제로 해발고도가 1,000미터가 넘어 근처의 대관령(大關嶺)이나 미시령(彌矢嶺), 진부령(陳富嶺) 중 가장 높은 고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實學者)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그가 1751년 저술한 인문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에서 추지령(楸地嶺)과 철령(鐵嶺), 연수령(延壽嶺), 백봉령(白鳳嶺), 대관령, 그리고 한계령을 강원도의 이름난 여섯 고개로 꼽았는데, 그중에서도 한계령을 최고라 칭했다.
고갯길 정상에 다다르면 지난 1980년대 초에 들어선 한계령휴게소를 만날 수 있다. 녹음에 둘러싸인 설악산(雪嶽山) 국립공원을 감상하려는 이들의 시선을 가리지 않으려는 듯 처마 선을 유난히 낮게, 그리고 테라스를 길게 했다. 안으로 들어서면 어디에서나 기암괴석 너머 푸르른 동해를 감상할 수 있도록 개방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건물은 한계령의 정취를 방해하지 않고 자연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지붕 높이를 낮췄고, 주변 산세와 어울리게 높낮이를 조절했다.
이런 세심한 고민을 바탕으로 건물을 설계한 이는 건축가 김수근(金壽根 1931~1986)과 그의 후배인 류춘수(柳春秀)다. 한계령휴게소가 그러하듯 김수근의 건축은 배려의 미학이 특출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를 들어 갑자기 세찬 비바람이 불면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처마 밑이나 내부로 들어와 쉴 수 있도록 1층을 최대한 열린 형태로 설계했으며, 아예 골목길 형태로 만들어 쉬엄쉬엄 지나다닐 수도 있도록 했다. 내부 기둥에 붙어있는 1983년 ‘한국건축가협회상 본상’ 수상 동판은 그런 배려심 넘치는 설계에 대한 헌사일 것이다. 동시에 자연을 대하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계곡 하이킹과 온천욕의 조화
주전골 입구에 있는 용소폭포는 높이는 약 10m, 소의 깊이 약 7m로 아담한 규모다. 옛날 옛날 이 소에서 살던 천년 묶은 암수 이무기 2마리가 용이 되어 승천하려 하다가 수놈만 승천하고 암놈은 미처 준비가 안 되어 이곳에서 굳어져 바위와 폭포가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한계령휴게소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굽이굽이 내려가다 보면 곧 오색약수(五色樂水) 입구 쯤 자리한 약수터탐방지원센터에 닿는다. 이곳에서 확인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바로 ‘오색약수’와 ‘주전골(鑄錢谷) 하이킹’이다. 서기 1500년경 한 승려에 의해 발견된 오색약수는 하루 용출량이 1,500리터에 달하는데, 그 역사성과 고유성을 인정받아 2011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다섯 가지 색깔의 약수를 뜻하는 오색약수라는 이름은 주전골 위쪽에 있던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사찰 주변에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이 피는 특이한 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약수의 이름이 오색약수, 지명은 오색리, 한계령의 또 다른 명칭인 오색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물론 전설의 영역일 따름이다.
또 다른 유래도 있다. 얼핏 보면 투명한 약수지만, 입에 대어 보면 산화된 철의 맛이 난다. 실제로 철(鐵) 성분이 유독 많다 보니 오래 두면 산화반응을 일으켜 투명색에서 회색을 거쳐 다갈색에 이어 황토색으로, 최종적으로는 붉은색으로 변한다. 즉 다섯 가지 색을 모두 지녀 오색약수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이다.
오색약수는 주전골 하이킹을 하기에 최적의 출발점이다. 오색석사 터에 새로 지어진 성국사(城國寺)와 선녀탕(仙女湯)을 지나 용소폭포(龍沼瀑布)에 이르는 약 3.5킬로미터 거리의 트레일은 당일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왕복 2시간에서 3시간 정도가 걸린다. 걷다 지치면 울창한 녹음 사이로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계곡물에 발을 담가봐도 좋다. 시원함을 넘어 차갑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이다. 특히 오색약수에서 성국사까지 이어지는 약 700미터는 무장애 탐방로로 조성되어 있어 노약자나 교통약자도 큰 어려움 없이 주전골, 나아가 설악산 국립공원의 정수를 모아둔 것 같은 장쾌하며 압도적인 경치 속으로 녹아들 수 있다.
주전골 근처 오색그린야드호텔에서는 오색약수를 이용한 온천을 즐길 수 있다. 톡 쏘는듯한 탄산 온천에는 탄산과 칼슘, 철 등 인체에 유용한 성분이 풍부해 신경통, 피로 회복, 위장 장애 등에 효과가 있다. ⓒ 오색그린야드호텔
하이킹을 마치고 오색약수로 돌아온 뒤에는 온천욕으로 몸을 풀며 일정을 마무리하는 것도 추천한다. 최근 리모델링을 끝낸 오색그린야드호텔에서는 오색약수를 이용한 온천욕이나 한국 특유의 문화인 찜질방도 체험할 수 있다. 온천 후 출출해진 배는 오색약수와 호텔 사이에 있는 20여 곳에 이르는 식당에서 채울 수 있다. 이곳에서는 도시에서 맛보기 힘든 다양한 산채(山菜) 음식과 얼렸다 녹이기를 반복하며 말린 황태(黃太)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여기에 강원도에서 옥수수 알갱이나 더덕 뿌리를 넣어 만든 막걸리까지 곁들인다면 금상첨화이다.
낙산사(洛山寺) 홍련암(紅蓮庵)은 동해에서 떠오른 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 중 하다나. 바닷가 석굴 위에 지어져 암자 법당 아래로 바닷물이 쉴새 없이 출렁이며 드나든다.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海水觀音空中舍利塔)에서 시민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낙산사는 빼어난 절경으로도 유명하지만, ‘기도 성지’, ‘관음 성지’라고 불릴 만큼 소원을 빌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바다 낙산사는 서기 671년에 지어진 이래 무려 1,3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사찰이다. 애초에는 3층으로 지어졌다가 1467년에 7층으로 높여 세운 칠층석탑을 비롯한 여러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홍련암(紅蓮庵)은 문화유산과 자연이 어떻게 앙상블을 이루며 장관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사찰을 세운 의상대사가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친견했다는 낙산사의 창건 역사를 상징하는 건물로서, 푸르른 동해와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절묘한 배치가 인상적이다. 안타까운 것은 지난 2005년 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간 산불 탓에 낙산사 건물 중 20여 채가 불에 탔다는 점이다. 의상(義湘)기념관에 전시된‘녹아내린 동종(銅鐘)’이 당시의 아픔을 보여주고 있다. 창건 이래 여러 차례 파괴와 소실, 그리고 재건을 거듭해온 생명력에서 유추할 수 있듯 2005년의 경험은 슬픔으로만 기억되고 있지는 않다. 녹아내린 동종 맞은편에 전시된 첼로와 바이올린이 그 증거들이다. 당시 불타고 남은 건물의 대들보를 이용해 만든 것들인데, 고난에 굴하지 않고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대변해주고 있다.
서피비치는 하조대해수욕장 북쪽에 조성한 국내 최초 서핑 전용 해변이다. 이국적인 풍광과 함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구성되어 있으며, 비치 파티, 캠핑 등도 즐길 수 있다.
서피비치에서는 ‘서프 스쿨’을 운영한다. 초보자부터 중상급자까지 수준별 맞춤 강습이 가능하다. 또 서프 요가, 롱보드, 스노쿨링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낙산사가 정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라면, 죽도해수욕장과 인구해수욕장 주변에 즐비한 서핑 숍들은 양양의 동적인 활력을 보여준다. 파도의 규모와 빈도가 적당하고 바닷물이 유난히 맑아 한국 서핑 숍의 약 70퍼센트가 양양에 몰려 있을 정도이다. 하조대해수욕장에는 2015년에 한국 최초의 서핑 전용 해변인 1킬로미터 길이의 서피 비치(surfyy beach)도 생겼다. 7월 말 8월 초의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에는 그야말로 ‘물 반 서퍼 반’으로 채워지는 곳이다. 초심자들도 어렵지 않게 강습을 받을 수 있어 며칠 묵으며 배우는 여행자들도 적지 않다.
그러는 사이 주전골 같은 산과 계곡이 그립다면 해수욕장 사이에 자리 잡은 죽도정(竹島亭), 또는 하조대(河趙臺) 일대를 산책해보기를 추천한다. 죽도정은 죽도해수욕장(竹島海水浴場)과 인구해수욕장(仁邱海水浴場) 사이에 돌출된 죽도산 위에 있는 정자이다. 주변 암반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와 전망대에의 조망이 일품이다. 책 한 권 가지고 올라가 그늘에 앉아 바닷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으면 이보다 훌륭한 독서실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하조대는 한국 정부가 지정한 명승(名勝) 가운데 하나다. 정자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거대한 바위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늠름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사 소나무가 아니다. TV에서 공영 방송이 시작되거나 끝날 때 한국 국가인 애국가가 1절부터 4절까지 흘러나오는데, 2절 도입부에 등장한다. 이에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모르는 이가 없는 소나무가 되었다. 물론 유명세가 전부는 아니어서, 그 자체로 독특한 미감(美感)을 뽐낸다. 어떤 면에서는 산과 계곡, 바다, 그리고 문화유산을 아우르는 여행지로서의 양양 그 자체를 대표한다는 느낌도 들게 한다.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사진작가
On the Road
2023 SPRING
낯익은 곳에서 발견하는 낯선 성찰
여행의 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새로운 풍광을 만끽하는 데 집중하는 이도 있을 테고, 온전한 휴식에서 의미를 찾는 이도 있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이나 쇼핑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든 행위에는 공통점이 있다. 낯익다고 생각한 데서 낯선 가치를 발견할 때, 익숙하다고 여긴 대상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때 기쁨이 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충청남도 부여는 좋은 여행 목적지가 되어줄 것이다.
ⓒ 부여군
부여라고 하면 응당 ‘망국의 비애미’가 느껴지는 애달픈 고장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알고 보면 찬란한 문화를 일궈냈던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부여다. 예상과 달리 부여의 진정한 보물들은 낯익고 익숙한 곳 속에 숨겨져 있다.
세계와 교류하던 백제의 창구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대향로는 1996년 5월 3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봉황 뚜껑 장식, 봉래산이 양각된 뚜껑, 연꽃잎으로 장식된 몸통, 용 받침으로 구성되었다. 백제의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이 돋보인다.
금강은 400km 남짓한 길이로 한국에서 3번째로 긴 강이다. 부여 사람들은 부여를 지나 흐르는 금강을 유독 백마강이라 부른다. 백마강은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란 뜻으로,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상〮하류 16km 구간을 가리킨다. 지금은 금강 하굿둑이 건설돼 유람선 외에는 선박 통행이 자유롭지 않지만, 조선왕조 말기까지도 크고 작은 배가 드나들었다. 심지어 약 70km 하류에 있는 황해 바다로부터도 배가 들어왔고 또 나갔다. 그 핵심 창구가 백마강과 부소산성 사이에 자리한 구드래 나루터다. ‘구드래’라는 어휘는 현재 한국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일본어에 흔적이 남아 있다. 구드래에 어원을 두고 있는 ‘구다라(Kudara)’는 ‘본국’, ‘큰 나라’, ‘섬기는 나라’ 등을 뜻한다. 그리고 동시에 백제라는 국가를 가리키는 낱말이기도 하다. 즉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와 때로 경쟁하며 때로 협력했고, 멀리 중국이나 일본과는 해상무역 등을 통해 교류했다. 그 과정에서 경제를 살찌웠으며 문화 발전을 도모해갔다. 무수한 무역선이 드나든 나루 이름이 국가 전체를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을 정도로 말이다. 백제가 주변 국가들에 비해 국토 면적이 비교적 작고 대륙과 연결된 육로가 없었음에도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660년까지 무려 7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이어갈 수 있던 원동력의 비밀이 거기에 있었다.
낙화암의 진실
백화정은 부여 부소산성북쪽 금강 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육각형으로 지은 정자이다. 의자왕(재위 641~660년) 때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3천여 명이 이곳의 절벽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은 황포돛배를 본뜬 유람선이나 수륙양용 버스 등을 타고 백마강을 주유할 수 있다. 배에 몸을 실으면 30분이 채 안 걸려 고란사 선착장에 닿는데, 그곳에서부터 부소산성산책길이 시작된다. 백제인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고란사를 지나 산책길을 따라 올라가면 백마강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백화정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일품이다. ‘낙화암’은 바로 그 아래에 있다. 낙화암이라는 이름은 백제가 의자왕의 실정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3천 명의 궁녀들이 백마강으로 뛰어내려 자진한 곳이라며 부르기 시작한 명칭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인 사실과는 상관없이 약 1천 년 뒤에 만들어진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긴 자에 의해 쓰여진 역사가 무릇 그러하듯, 승리자는 미화되고 패배자는 격하된 탓이다. 12세기 중반 고려시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은 “웅대하고 용맹했으며 담력이 크고 결단력이 있었다. … 어버이를 효로써 섬겼고 형제와는 우애가 깊어 당시 사람들이 해동증자라 불렀다(雄勇有膽决 … 事親以孝與兄弟以友時號海東曾子)”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은 한반도를 가리키며,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서 ‘동양의 오성’ 중 하나로 꼽히는 학자다. 즉 의자왕은 왕으로서의 품위뿐만 아니라 성현에 비견될 정도로 인품과 학식이 훌륭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의자왕은 신라의 성 40여 개를 일거에 빼앗거나 외교술로 신라를 고립시키는 등, 탁월한 면모를 지닌 왕이었다. 다만 신라뿐만 아니라 중국 당나라까지 합세한 대군의 침략에는 버텨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여 함락과 의자왕의 중국 압송 이후에도 백제 부흥군은 의자왕의 아들인 풍왕(豊王 623~?)을 중심으로 무려 3년이나 나당 연합군에 항쟁을 이어갔다. 때론 사실과 진실은 일치하지 않는 법이다. 낙화암이라는 비애미 넘치는 이름 뒤에는 이처럼 끝까지 용맹했던 백제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백제 문화의 정수
만수산 자락에 있는 무량사 극락전은 외부에서는 2층 구조이나 내부는 위아래 구분이 없는 통층 구조의 특징을 보이며, 오층석탑과 석등이 일렬로 늘어서서 장관을 이룬다.
융성했던 백제의 모습은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누각인 사자루를 지나, 군용 창고와 막사 터, 그리고 계백(階伯 ?~660)과 성충(成忠 ?~656), 흥수(興首 ?~?) 등 백제의 마지막 세 충신(忠臣)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삼충사’를 지나 부소산성 밖으로 나오면, 멀지 않은 곳에 국립부여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유산의 깊이와 너비는 실로 깊고 또 넓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지난 1993년 12월 12일 해가 뉘엿뉘엿 지던 오후 4시 반쯤, 능산리 고분군 발굴작업이 어느덧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약 1.20m 깊이의 진흙 구덩이 속에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높이가 60cm가 넘고 무게가 12kg에 가까운 대형 향로가 한 기 출토되었다. 출토 이후 채 3년도 안 돼 그 미학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였다. 초기에는 그저 중국산 향로가 발굴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만들어지곤 했던 스타일의 향로라는 점, 백제는 불교 왕국이었으나 정작 향로에는 도교적 색채가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는 점 등이 이유였다. 그러나 그것은 백제에서 만들어진 향로임이 분명했다. 큰 틀에서의 모양은 비슷할 수 있으나 능산리 고분군에 딸린 대장간 터에서 발굴된 데다 중국의 향로들과는 달리 금동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에서 유래한 현악기인 거문고(거문고는 순우리말로, 한자로는 현학금(玄鶴琴) 또는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등이 조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산 향로와 백제금동대향로는 모양 면에서 유사한 점이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 달랐다. 특기할만한 것은 향로의 뚜껑 부분에 조각된 거문고를 연주하는 악사 주변으로 서역에 기원을 두고 있는 종적(縱笛 피리의 일종)과 완함(阮咸 기타와 비슷한 악기)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그에 더해 동남아시아에서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항아리 모양의 북(鼓), 북방 유목민들의 관악기인 배소(排簫 팬플루트와 흡사) 등을 연주하는 악사들도 배치돼 있다. 아랍을 비롯한 서역의 향(香) 문화와 중국식 향로 등 외래문화와 전통문화, 불교사상과 신선사상 등을 조화롭게 융합시킨 모습도 엿보인다. 이는 백제가 뛰어난 것은 더욱 살리고 한계가 있는 것은 세계와의 교류와 수용을 통해 극복하는 현지화 혹은 자기화에 능했음을 보여준다. 백제금동대향로에 서려 있는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통해 백제의 문화 및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이유이다.
백마강은 ‘백제의 큰 강’이란 뜻을 담고 있다. 백제 시대고증을 거쳐 건조한 황포돛배와 한국 최초로 운행하는 수륙양용 버스 투어를 통해 부여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백제문화단지는 백제 왕궁을 재현한 곳이다. 백제 왕궁인 사비궁과 사찰인 능사, 계층별 주거문화를 볼 수 있는 생활문화마을 등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 부여군
신동엽 생가와 문학관
1960년대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민족시인 신동엽을 기리고자 만든 신동엽 문학관. 시인의 생애와 문학성을 연구하고 신동엽 문학상을 제정하여 작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백제는 천수백 년 전 과거의 공간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고장이 아니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북서쪽으로 약 800미터 떨어진 곳에 시인 신동엽(1930~1969)의 생가와 그의 이름을 딴 문학관이 있다. 1959년에 등단한 신동엽은 10년을 활동하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하지만 그가 한국 문단에 남긴 족적은 뚜렷했다. 현대 한국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이었던 1960년 ‘4.19’의 한복판을 온몸으로 관통하며 남긴 작품들은 이후 세대들에게 독재를 뛰어넘는 대안적 상상력을 키워내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아직은 이루지 못한 꿈이나 언젠가는 이뤄내야 할 과제인 남북통일을 이야기했으며, 당시 한국 사회를 휘감고 있던 권위주의와 기회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시인은 요절했지만, 그의 뜻은 이어져야 했다. 유족과 출판사 창비가 기금을 마련하여 아직 독재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던 1982년에 탄압을 무릅쓰고 ‘신동엽문학상’을 제정한 것이다. 일반적인 문학상들과는 달리 시와 소설 어느 장르에도 국한하지 않고 시인 신동엽의 올곧은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작가들을 지원하고 격려하기 위한 상이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수상자를 선정해온 결과, 2023년 3월 현재 제40회 수상자까지 배출해냈다. 이런 그의 정신, 즉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가 더 나아지게 하는 데 문학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시인의 생각이 응축되어 있는 곳이 신동엽문학관이다. 그렇기에 문학관은 유미주의에 빠져있는 한국 문단의 한계를 넘어 실천적이며 참여적인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준 시인 신동엽에 대한 헌사에 가깝다.
고즈넉한 고도의 멋
규암 나루터 일대에 조성된 자온길에는 문화예술인들이 운영하는 작은 서점, 공방, 식당과 카페 등이 늘어섰다. 과거 물류가 활발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 온기가 가득한 마을이 되고자 자온(自溫)이라 이름 지었다.
백마강 너머 규암 나루터 일대에 있는 자온(自溫)길은 부여 여행의 막바지에 방문하기 좋다. 규암마을은 백마강을 통한 물류가 활발했던 시절 흥했던 마을로, 도시화로 쇠락하면서 빈집이 많아졌다. 자온은 다시 온기가 가득한 마을로 재생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는 이름이다. 길을 걷다 보면 신동엽의 뒤를 잇는 문화예술인들이 운영하는 작은 서점과 각종 용품을 만드는 크고 작은 공방들, 로컬 식재료를 이용한 식당과 카페 등을 만날 수 있다. 부여라는 고장이 지닌 여유로운 정서와 푸근하고 편안한 풍경까지…. 자온길을 걷고 있노라면 어느새 백제의 찬란했던 영화로움이 떠오를 것이고, 낯익은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각 전환의 의미에 눈 뜨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 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On the Road
2022 WINTER
안동이라는 한국의 정신
고택과 리조트, 노포와 트렌디한 식당, 목조다리와 최신식 보트 …. 도시 곳곳에 과거와 현재가 한데 뒤섞여 있지만 그 모습이 조화롭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에 취해 걸음을 옮기다 보면 하회(河回)마을과 고택, 그리고 서원에 발길이 닿는다. 그곳에서 옛 선조들의 발자취를 좇다 보면 왜 안동이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 불리는지 이유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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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입구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안동을 방문한 1999년, 그날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근조 플래카드를 발견했다. 잠시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당시 김대중(Kim Dae-jung 金大中, 1924~2009)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게 된 여왕은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라고 말했고,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안동’이었다.
여왕이 안동으로 간 까닭은? 자신의 73번째 생일에 안동에 도착한 여왕은 배우 류시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담연재(澹然齋)에서 안동 국시와 편육, 찜, 탕, 안동 소주를 곁들인 한국식 생일상을 받았다. 류시원의 생가가 담연재라는 것과 그가 조선 중기 문신인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선생의 13대 후손이라는 건 그 당시 뉴스를 보고 알게 되었다. 푸른색 모자를 쓴 여왕은 하회별신굿탈놀이를 관람하고, 고추장과 김치를 담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풍산 류(柳) 씨 문중의 고택인 충효당(忠孝堂)을 방문했을 때는 한국식 예법에 따라 신발을 벗고 맨발로 방 안으로 들어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또 고려 말에 지어진 사찰 건물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로 알려진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 앞 돌탑에서 여왕이 돌멩이 하나를 올려놓았을 때는 돌탑이 무너질까 봐 그녀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마음을 졸였으며, 여왕에게 정성스럽게 돌탑을 쌓는 건 소원을 빌어 복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 당시 여왕은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우리가 안동이라는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도 조선이라는 500년 왕조를 흐르는 DNA가 유교였다는 사실이다. 조선이 유교를 국가의 핵심 통치 이념으로 선택하는 순간, 한국적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수많은 ‘정서’와 ‘예법’들이 탄생했다. 한국에선 ‘가부장’이라 부르는 남성 중심의 문화나 손윗사람을 존중하는 ‘장유유서’ 문화가 그렇다. 안동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2~1571)과 서애(西厓) 류성룡이라는 영남학파의 대가들이 태어난 곳이며, 한국 유교의 원형을 간직한 도시다. 또 한국에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내가 여왕의 ‘안동 루트’를 처음 언급한 것 역시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호스트가 고심 끝에 찾아낸 한국 정신의 정수가 안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회마을’은 그 여정의 출발로 정답에 가깝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1926~2022)이 지난 1999년 안동을 방문했을 당시 사진이다. 그녀는 자신의 73번째 생일에 안동을 방문해 한국식 전통 생일상을 받았으며,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 하회별신굿탈놀이 등을 관람하며 한국 전통문화를 직접 경험했다. ⓒ 안동시청
조선 중기 학자로 퇴계 선생의 제자인 금난수(1530~1599) 선생이 세운 정자인 고산정(孤山亭)은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잘 어울리게 조성한 조선시대 정자의 특징을 보여준다.
한국의 정신의 정수
하회마을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됐고, 국보 2점과 보물 4점, 민속문화재 11점 등이 보존된 민속 마을이다. ‘하회’는 물이 돌아 흐른다는 뜻으로 낙동강 상류인 화천이 ‘S’자 모양으로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한다. 이곳은 태극 모양 혹은 연꽃이 물에 떠 있는 모습을 띠고 있어, 예부터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땅으로 여겨졌다.
어딜 가나 한국의 오래된 마을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안동이 늘 마음에 와닿았던 건 시간이 박제된 거대한 박물관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라는 점이다. 화경당(和敬堂), 양진당(養眞堂) 같은 고택 표지판을 따라 걷다 보면 밭에 가지런히 심어 놓은 열무, 상추가 보이고 대문 앞에 걸린 우유 배달 주머니를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하회마을에서 멀리 않은 곳에 앞서 말한 류성룡의 병산 서원(陶山 書院)이 있다. 서원은 교육 기관이다. 공자(孔子 (B.C.551~B.C.479), 맹자(孟子 (B.C.372~B.C.289)에 익숙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직관적으로 설명하자면 전국 최고의 ‘1등 스타 강사’가 운영하던 조선 최고의 기숙 학원 정도라 말할 수 있겠다.
영남학파의 두 거장, 서애 류성룡의 제자들이 모였던 곳이 ‘병산 서원’이고,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성리학(性理學)에 용맹정진했던 곳이 도산 서원(陶山 書院)이다.
병산 서원은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라 평가 받는다. 서원 누마루인 만대루(晩對樓)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와 병풍처럼 두른 산이 만들어 내는 장관을 볼 수 있다.
도산 서원은 병산 서원보다 규모 면에서 더 장대하다. 특이한 점은 퇴계 이황이 생전에 강학하던 서당과 퇴계 이황 사후에 제자들이 그의 학덕을 기리고자 세운 서원이 한 공간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서원으로 들어서면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머물며 공부한 서당 기숙사인 ‘농운정사(隴雲精舍)’를 직접 볼 수도 있고, 서원으로 올라가면 여러 사람이 모여 강론을 하거나 큰 회합을 개최했던 전교당(典敎堂)에 앉아 안동의 잔잔한 풍경을 관망할 수도 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미리 도산서원 선비문화 수련원 홈페이지에서 ‘선비문화 체험’을 예약해 체험해 보는 것도 좋다. 조선시대의 유생들이 입었던 유복을 입고, 서원과 퇴계 종택, 이육사 문학관 등을 탐방한 후, 은은한 달빛 아래 퇴계 명상길을 산책하는 1박 2일 코스 프로그램으로 인기가 많다.
1572년 서애 류성룡 선생에 의해 지어진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 건축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주변의 빼어난 강산을 품은 경치와 건축미, 서원의 가치를 높이 평가 받아 2019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95년 하회마을 입구에 개관한 탈 전문박물관으로, 하회마을에서 전승되어 이어오는 하회별신굿탈놀이에 사용하는 탈을 비롯해 한국 탈 250여 점과 외국 탈 250여 점을 소장 및 전시하고 있다.
식도락의 도시 나는 어느 지역을 가든 근처 시장에 들른다. 시장 특유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그 도시의 활력 지수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동에는 몇 개의 큰 시장이 있는데, 그중 구 시장은 갈비 골목과 찜닭 골목 그리고 맘모스 제과라는 오래된 지역 빵집 등 미식로드로도 유명하다. 미식가에게 안동은 며칠을 여행해도 성에 차지 않을 전통 음식의 성지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보통의 칼국수보다 면발이 얇아 국물 위에서 나풀거리는 ‘안동국시’를 정말 좋아한다. 부드러운 목 넘김 때문에 꿀꺽꿀꺽 잘 넘어가 평소보다 늘 더 많이 먹게 된다는 단점을 제외하면 몇 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맛이다. 어울려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인 국밥은 한국 식문화에서도 매우 중요하다.제철 무와 한우를 잔뜩 넣어 시원한 맛이 일품인 ‘안동 국밥’ 역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메뉴 중 하나다. 안동은 종갓집이 많아 제사를 지내는 일이 많았다. 제사를 지낸 후 남은 음식으로 만들어 먹는 골동반(骨董飯), 즉 비밤밥을 먹던 풍습이 있었는데, 평소 제사를 지내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비빔밥을 먹을 수 있도록 제삿밥처럼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이 헛제삿밥이다.
안동 정중앙에 위치한 전통시장인 구시장에는 안동하면 빼놓을 수 없는 안동찜닭집 30여 곳이 몰려 있는 찜닭 거리가 있어 원조의 맛을 즐길 수 있다.
관광객에게 유명한 안동 먹거리 중 하나는 안동 찜닭이다. 구 시장은 찜닭 골목으로도 유명한데, 본래는 통닭 골목이었다. 1980년대 프렌차이즈 양념치킨이 유행하면서 상권이 죽자 상인들이 자구책을 찾아 개발한 것이 매콤짭짤한 간장 양념에 윤기가 흐르는 당면과 각종 채소를 넣어 푸짐하게 조리한 찜닭이다. 이는 전국에 안동 찜닭 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간고등어’ 역시 바다에서 먼 내륙 지역까지 생선을 상하지 않게 가져오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가 축적된 안동의 대표적 음식이다. 며칠을 먹어도 즐거울 향토 음식이 즐비하지만,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지역 젊은이들이 고향 음식을 재해석한 ‘안동 고등어 파스타’나 ‘간고등어 버거’ 등은 미식의 쾌락을 극대화한다. 구 시장의 매력은‘올드 앤 뉴’가 다채롭게 섞여 고여있지 않고 흐른다는 것이다. 식사를 든든히 했다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월영교 산책은 최고의 선택이다. 이곳엔 캄캄한 밤, 강 아래로 번지는 아련한 불빛만큼이나 절절한 ‘원이 엄마’의 이야기가 얽혀있다. 이곳에서 원이라는 아이와 배 속의 아이를 두고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그리움, 원망이 빼곡히 적힌 아내의 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연인과 함께 방문했다면 ‘문 보트’를 타고 월영교 아래에서 낙동강 유람을 하는 것도 추천한다. 특히 이 주위에는 신축 호텔과 한옥 리조트 같은 다양한 숙박 시설과 주토피움, 유교랜드 같은 위락 시설이 밀집해 있어 고즈넉한 고택의 매력과는 전혀 다른 안동을 즐길 수 있다.
월영교는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목책교로, 팔각정에 오르면 안동댐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 다리 아래에서는 형형색색 빛나는 문보트와 전통 배인 황포돛배를 타고 여유를 누릴 수도 있다. 유교랜드 Confucian Land
전통과 현대의 교류 얼마 전 라스베이거스를 다녀왔다. 나는 그곳에서 한때 화려했지만 낡아가는 도시의 흥망성쇠를 본 듯했다. 과거와 다를 것 없는 ‘화산 쇼’나 ‘분수 쇼’는 마치 초췌해진 중년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극도의 화려함을 자랑하던 시저스 팰리스 호텔이나 벨라지오 호텔 역시 기력이 다한 것 같았다.여전히 관광객은 많았지만, 급격히 노쇠한 이 도시를 떠올리자 안동의 변화된 모습이 다시금 새롭게 다가왔다. 내가 처음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한 건 20여 년 전이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당시 돈을 받는 매표소나 마을 입구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 같은 편의 시설도 없었다. 하지만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한국관광공사의 영문 슬로건이 실감 날 정도로 마을은 (둘러보기 편한 방식으로) 완벽히 재편돼있었다. 특히 마을 입구로 가기 전 ‘하회세계탈박물관’은 메인 음식을 먹기 전 입맛 돋우는 애피타이저처럼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웃는 얼굴의 하회탈(국보 121)과 다양한 세계 민속 탈이 장식돼 있어 흥미로웠다. 나는 안동을 둘러보며 이것이야말로 한국적인 특징이라 생각했다. 머물지 않고 움직이는 것,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고 개선점을 찾는 것 말이다. 오래된 길 위에 낡은 노포와 트렌디한 레스토랑이 어울려 있고,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한 고택을 옮겨 현대식 한옥 호텔로 부활시키는 역동성 말이다. 한국은 결코 잠들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는 다양한 맥락으로 읽힐 테지만, 나는 그것이 이 작고 고요한 동방의 나라를 세계 10위 권의 경제 대국으로 만든 힘이라 믿는다. 안동은 그런 의미에서 전통이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도시다.
백영옥(Baek Young-ok 白榮玉)소설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On the Road
2022 AUTUMN
강릉을 보는 세 가지 시선
강릉을 단순히 바닷가 도시라고만 표현하기엔 아쉽다. 그곳엔 시대를 앞서간 문인들의 문학이 있고,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화폐 모자가 태어난 고장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향긋한 커피 향이 퍼지는 도시다. 강릉의 커피 거리는 1980년대, 작은 어촌마을 ‘안목(Anmok 安木)’에 생긴 최초의 자판기에서 시작됐다. 이후 저마다 맛을 차별화 한 수십 대의 자판기 사이로 카페가 생기기 시작해 지금은 외국인들도 자주 찾는 강릉의 대표 커피 거리가 되었다.
첫 강릉 여행에서 동생과 서로의 신발을 경포대 모래밭에 파묻고 놀다가 잃어버린 적이 있다. 조선시대 정치가이자 문인인 정철(鄭澈, 1536~1593)이 “십 리나 펼쳐진 흰 비단”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끝없는 해안가 중 어느 곳에 신발을 묻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파도를 보며 발을 구르던 기억이 난다. 해 질 무렵이라 신발 사는 걸 포기하고, 저녁 내내 맨발인 채였다. 그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한 건 걸을 때마다 발바닥을 간질이던 따뜻한 모래알 때문이다. 그날 강릉의 모래가 마치 강릉의 살갗처럼 느껴졌다.
조선 중기 시인 허난설헌(1563~1589)은 아름다운 용모에 문학적 자질까지 뛰어났지만, 불우한 가정사로 그의 작품 213수 중 128수는 세상을 떠나 신선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내용을 담고 있다.
느리게 걷는 여행 작가가 되고 난 후, 강릉에서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쓴 허균(Heo Gyun 許筠, 1569~1618)과 그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생가였다. 허균은 그의 소설에서 세상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사는 이상사회인 ‘율도국’을 꿈꾸던 조선의 아웃사이더였다. 그는 “나는 성격이 곧아서 남이 틀린 짓을 하면 참고 보지 못하고, 속된 선비들의 멍청한 짓은 비위가 상해 견딜 수 없었다”라고 말했고, 올곧은 성격이 문제가 돼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그는 성리학 이외에 다른 학문이 설 자리가 없던 조선에 천주교 서적을 들여왔고, 서산대사 같은 승려들과도 교류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건 누이의 재능을 알아본 그의 혜안이었다. 그는 27세에 요절한 누이의 이른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녀가 쓴 시를 모아 유고 시집을 냈다. 이는 조선시대엔 극히 희귀한 일이었고, 허난설헌의 시집은 중국에 먼저 알려졌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許筠•許蘭雪軒 記念公園)에는 경주 삼릉에 비견할 만한 소나무 군락지가 있었다. 한 눈에도 수백 그루는 될 법한 소나무에 일일이 번호가 적혀 있는 게 신기해서 소나무에 걸린 숫자를 하나씩 헤아리다가, 590번째 소나무 근처에서 강릉 바우길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만났다. 찾아보니 ‘바우(BAU)’는 강릉 말로 바위라는 뜻인데, 공교롭게도 손으로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쓰러져 가는 사람을 살아나게 하는 능력이 있는 바빌론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과 같았다. 이 길을 치유의 길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았다. 바우길은 대관령에서 해안, 옥계에서 주문진, 강릉의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17개 구간 총 280km의 장대한 길이었다. 걷기에 좋은 날이라 작정하고 걸어보기로 했다. 얼마 안 돼 홍길동 조각상이 놓인 다리 하나를 만났고, 허난설헌이 쓴 시 「죽지시(竹枝詞)」가 새겨진 기념비가 보였다. 우리집은 강릉땅 갯가에 있어(家住江陵積石磯) 문 앞 흐르는 물에 비닷옷 빨았지요.(門前流水浣羅衣)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배 매어 놓고(朝來閑繫木蘭棹) 짝지어 나는 원앙새를 부럽게 보았지요.(貪看鴛鴦相伴飛) 시 한 수 읽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갈대밭을 낀 커다란 현대식 건물이 아르떼 뮤지엄(ARTE MUSEUM)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진 찍기에 지금 이곳보다 핫한 공간은 없다!”라는 리뷰와 함께 최근 MZ 세대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관이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근처에 있었다. 예약 없이 보기 힘든 전시라는 말을 들었던 터라, 입장 대기 줄이 없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전시관에 들어갔다가 가득한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 너나 할 것 없이 핸드폰을 들고 촬영하는 관람객들의 손들이 어두운 전시관 안에선 하나의 오브제처럼 보였다. 눈앞까지 덮쳐오는 빛과 소리에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 또한 이곳에선 일종의 행위 예술처럼 느껴졌다.
제주, 여수에 이은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 아르떼뮤지엄 강릉. 전시관 내 천둥(THUNDER)은 이곳에서 처음 선보이는 작품 중 하나로, 천둥의 가운데서 거대한 번개를 경험할 수 있다. ⓒ 아르떼 뮤지엄
허균의 생가터에 있다가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뮤지엄에 오니 ‘올드 앤 뉴’라는 말이 떠올랐다. 자연을 모티브로 한 미디어 아트 속을 걷다 보니 눈앞으로 쏟아지는 폭포와 파도 안에 갇힌 사람이 되기도 하고, 전설 속의 백호랑이를 마주한 밀림 속 방랑자가 되었다가,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시간 여행자가 되기도 했다. 입장료가 아깝지 않았던 건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수백 장의 사진이 증명한다.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했던 건 뮤지엄을 나온 후 다리 끝에서 만난 광활한 물이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는 사실이었다. 강릉을 오랫동안 바다의 도시라고만 생각했던 내겐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가 바다와 함께 있는 풍경이 놀라웠다. 바닷물이 해안의 모래를 밀어 생긴 둑 모양의 사주가 바다를 차단하면서 생긴 호수를 ‘석호’라고 부르는데, 강릉의 경포호가 바로 석호다.걷는 속도로 본 세상은 가장 아름답다. 달리거나 뛸 때는 볼 수 없었던 무수한 풍경이 천천히 걸을 때 비로소 보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경포가시연습지와 날아든 작은 나비와 풍뎅이도, 시간에 따라 너울대는 긴 그림자와 그늘을 바라보는 일 역시 걷는 속도에 따라 머문다. 바쁜 일상이 아닌 한적한 여행에서 느린 걸음이 주는 선물이다.
경포가시연습지는 멸종위기종인 가시연꽃의 복원작업이 성공하여 군락을 이룬 곳이다. 습지와 습지 사이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수달을 포함한 다양한 희귀조류 철새들이 찾아온다.
검은 대나무의 집 한 나라를 상징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은 무엇일까. 캐나다의 단풍나무나 브라질의 삼바, 프랑스의 에펠탑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화폐라고 생각한다. 세계 기축 통화인 ‘달러’ 중 가장 큰 단위인 100달러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최고액권인 5만 원에는 누가 있을까? 바로 신사임당(Sin Saimdang 申師任堂, 1504~1551)이 있다. 우리나라 화폐 속 인물은 총 다섯 명인데 그중 두 명이 조선 최고의 사상가이자 영의정이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이다. 말하자면 세계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모자 화폐 인물인 셈이다. 1972년 율곡이 오천 원권 화폐 인물로 채택된 후 그가 태어난 집, 오죽헌(烏竹軒)은 화폐의 한 자리를 지금까지 꿰차고 있다. 오죽(烏竹)은 수피가 검은 대나무의 일종으로 오죽헌은 뜰 안에 오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사업으로 조성된 것이다. 이후 1998년 강릉시립박물관과 통합되면서 강릉의 변천사와 역사, 문화, 유적 등 볼거리가 풍성해져 연간 80~90만 명의 사람들이 찾고 있다. 오죽헌으로 향하는 입구에 선 사람들이 율곡과 신사임당의 화폐 기념물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연인은 화폐 전시물 앞에서 준비해온 5만 원과 5천 원을 꺼내어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유명인의 생가를 둘러보는 일은 그 인물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비가 온 직후 오죽헌의 검은 기와와 초록의 숲은 그 색이 한층 짙어져 오가는 이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이따금 바람에 흔들리는 청량한 검은 대나무 소리는 더위를 식혀 주었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으로, 한국 주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모자는 국내 화폐 중 5만 원권과 5천 원권에 삽화된 인물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셔터스톡
오죽헌은 집 주위로 검은 대나무가 많다고 하여 까마귀 '오(烏)’와 대나무 ‘죽(竹)’ 한자를 사용해 이름 지어졌다
커피의 도시 강릉의 커피 거리는 1980년대, 작은 어촌마을 안목(Anmok 安木)에 생긴 최초의 자판기에서 시작됐다. 안목항에 들른 사람들 사이에서 자판기 커피가 유독 맛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안목 해변 도로에 하나둘 자판기들이 생겼다. 자판기 주인들은 자신들만의 노하우로 커피 맛을 차별화했고 이를 설명하는 빼곡한 안내문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후 수십 대의 자판기 사이로 카페가 생기기 시작해 지금은 외국인들도 자주 찾는 강릉의 대표 커피 거리가 되었다.
경포대 일대는 1982년 지정된 경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바다와 분리된 경포호와 송림, 흰 모래, 푸른바 다가 조화를 이루는 경포해수욕장은 동해안 최대 해변으로 유명하다
1980년대 태어난 세대에겐 강릉을 대표하던 것이 경포대와 같은 바다였다면, MZ세대에게 강릉은 커피의 도시다. 인구 20만 명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에 500여 개에 이르는 카페가 있다. 카페 ‘보헤미안 박이추’는 강릉의 커피가 유명해지게 된 시발점이다. 한국의 커피 역사를 말할 때 박이추(朴利秋)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는 건 그가 생두에 열을 가해 볶는 로스팅을 처음 시도했기 때문이다. 로스팅의 단계에 따라 커피 맛과 향이 달라지는데, 특유의 쓴맛 때문에 커피를 거부하던 사람들도 커피를 ‘맛’을 넘어 ‘향’으로 즐기는 법을 알게 되면서, 그의 커피는 점점 유명해졌다. 혜화동과 안암동에 처음 문을 연 카페 보헤미안은 2001년 갑자기 강릉의 경포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에 분점을 내는 대신, 지방을 선택한 건 파격적이었다. 늘 내 관심을 끄는 건 누군가의 이런 작은 선택 하나가 나비효과를 일으키며 도시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 놓는 일이다. 미국의 포틀랜드가 뉴욕이나 LA 같은 도시의 복잡함에 질린 사람들의 안전지대가 됐던 것처럼 박이추에게 강릉은 자신을 품어줄 완벽한 도시로 보였다. 이제 사람들은 강릉에 가면 기념품을 사듯 커피 전문점에 들러 원두를 구입하고 대형 로스팅 기계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또 커피 박물관 커피키퍼에 들러 커피의 역사와 다양한 품종의 커피나무를 관찰한다. 야근을 거듭하는 밤에는 잠을 깨기 위해 달콤한 믹스 커피를, 아침 출근길에는 아메리카노를, 낮에 졸음 밀려오거나 허기를 느낄 때면 라떼를 마시는 것이 일상이 됐다. 이러한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세계에서 도시 대비 가장 많은 카페가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한 잔에 담긴 커피가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문화와 도시를 만든 셈이다.
On the Road
2022 SUMMER
엔진은 웅웅거리고……
한반도 남단에 위치한 거제도는 대한민국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임진왜란, 한국전쟁의 뼈아픈 흔적이 세월 속에 고스란히 새겨진 곳인 동시에 아름다운 바다 경치와 풍광을, 그리고 시대의 예술가들을 품은 곳이기도 하다.
© GEOJE CITY
지난봄 일기 예보에서 남쪽은 벌써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겨우내 얼어 있던 마음이 스스르 녹았다. 그리고 내 기억 속 거제도의 어느 해안 도로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때를 놓치면 묵직한 꽃 터널도 그 아래 어른거리는 꽃그늘도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짐을 꾸리고 해가 뜨기 전에 차에 올랐다. 네비게이션은 서울에서 거제도까지 약 네 시간 반이 걸린다고 안내했지만, 쉬엄쉬엄 가면 여섯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차에서 들을 만한 음악을 평소에 넉넉히 골라 놔 다행이었다.
는 플레이 리스트 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곡이다. 오래되었지만 아직 훌륭한 머슬카, 그랜 토리노를 운전하며 지치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 보는 내용이다.
엔진은 웅웅거리고 아픈 기억은 떠올라(Engines hum and bitter dreams grow)
그랜 토리노에 붙들린 마음(Heart locked in a Gran Torino)
외로운 리듬으로 밤새 고동치네(It beats a lonely rhythm all night long)
이 노래는 동명의 영화에 삽입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중 하나로듣고 있으면 내 차도 그랜 토리노가 되어 나를 달래 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영화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월트 코왈스키(Walt Kowalski)는 한국전쟁(1950~1953) 참전 용사다. 그는 매우 보수적이며 독불장군인 데다 참전 후 트라우마로 사람들에게 곁을 잘 내주지 않았다. 그도 거제도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거가대교가 완공되면서 부산~거제간 거리는 140㎞에서 60㎞로 단축되었으며, 이동 시간도 2시간 30분에서 30~40분대로 크게 줄어들었다. © gettyimagesKOREA
포로수용소 유적 공원 거제도는 부산광역시와 통영시를 각각 동쪽과 서쪽에 두고 있는데 섬이긴 해도 오래전부터 배를 타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서쪽의 통영시 쪽으로는 1971년 준공된 거제대교와 1999년 개통한 신거제대교가 나란히 놓여 있다. 2010년에는 거가대교가 완공되어 부산 쪽으로도 육로가 열렸다. 통영과 연결된 두 연륙교 아래의 해협은 암초가 많고 수로가 좁아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무신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이곳으로 적선을 유인해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의 날개를 닮은 진법을 펼쳐 적군을 호쾌하게 섬멸해 버렸다.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이다. 그러나 아무리 호쾌한들 전쟁은 어디까지나 전쟁이 아닐지. 거제도에 새겨진 전쟁사를 거론하자면 한국전쟁 때 대규모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고 운영했던 일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950년 9월, 유엔군은 남진하고 있던 북한군을 섬멸하기 위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이후 수많은 포로들이 생겨나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거제도 고현‧수월 지구를 중심으로 총 1,200만㎡의 부지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1951년 2월 포로수용소 업무를 개시하여 북한군 15만 명, 중공군 2만 명, 의용군 3천 명의 포로를 수용했는데, 그중에는 300여 명의 여자 포로들도 있었다.
포로들의 생활상, 막사, 의복 등 생생한 자료와 기록물로 조성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전쟁 역사의 교육장이자 관광명소가 되었다.
영화
는 1951년 한국전쟁 당시 최대 규모인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수용자로 댄스단을 구성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 NEW
이 포로수용소 유적을 기념하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제네바 협약을 접하게 된다. 전쟁에서의 인도적 대우에 관한 기준을 합의한 국제 규약이다. 특히 1949년에 합의된 제4협약은 포로들의 인권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협약이 처음으로 적용된 때가 한국전쟁 시기다. 유적 공원 초입의 전시실에는 수용소가 포로들의 인권을 위해 애쓴 여러 사례들이 선전돼 있었다. 특히 수용소 내 배식은 전선의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던 사정보다 훨씬 나았다고 한다. 그러나 포로들이 아무리 배려 받았다고 한들 전쟁 중이었다는 건 명백하다. 그들은 고향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를 어떤 섬에 고립된 채 삼엄한 경계 속에서 강제 노역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고, 이따금 대외 선전을 위해 평화롭고 즐거운 모습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소설가 최수철(Choi Su-chol, 崔秀哲)은 거제 수용소의 포로들이 스퀘어댄스를 췄다는 사진 자료를 접하고 연작 소설 『포로들의 춤』(2016)을 썼다. 연출가 김태형(Kim Tae-hyung, 金泰亨)은 같은 소재로 뮤지컬
(2015)를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영화감독 강형철(Kang Hyoung-chul, 姜炯哲)은 이 뮤지컬을 각색하여
(2018)를 찍었다. 전시에 붙잡혀 온 공산주의자들이 적국의 민속춤을 과연 자발적으로 연습해서 췄을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유 보도 사진 작가 그룹 매그넘 소속의 베르너 비숍(Werner Bischof)이 1952년에 찍은 한 사진에서는 연병장을 돌며 춤을 추고 있는 포로들이 기이하게 커다란 가면을 쓰고 있다. 아마도 적의 춤을 배웠다는 것을 감추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아직 공산주의를 고수하며 고향으로 송환될 날만 벼르는 동료 포로들에게 린치를 당하거나, 당장의 위험은 없더라도 나중에 사진이 퍼지면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에게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포로들의 춤』과
와
에서 이런 해석을 엿볼 수 있다. 한때 이쪽을 향해 총구를 겨누던 이들에게 그 이상 무엇을 베풀어야 하며 어떻게 통제하고 교화하란 말이냐고 물을 수 있다.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이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로서 달리 할 말은 없다. 그저 제발 이 지구상에서 전쟁이나 그 비슷한 위협과 폭력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거제도에는 모래보다 흑진주를 닮은 몽돌로 이루어진 해수욕장이 많다. 바닷물이 밀려왔다 몽돌 사이로 빠져나갈 때면 ‘자글자글’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는 한국 자연의 소리 100선에 선정됐다. © gettyimagesKOREA
이번엔 임진왜란의 수많은 해전 중 유일한 패배지, 칠천도로 향했다. 기념관 마당에 서서 물살을 바라보며 한숨을 몇 번쯤 내쉬었다.20분 정도 거리에는 옥포가 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처음으로 왜군과 싸워 승리한 곳이다. 나의 ‘그랜 토리노’는 전쟁의 흔적을 따라 나를 이끌고 있었다.
두 개의 큰 섬으로 연접한 해금강은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해금강 사자바위로 떠오르는 일출은 일 년 중 3월과 10월에만 볼 수 있는 비경이다. © gettyimagesKOREA
몽돌 해변 거제에는 몽돌로 이루어진 해변이 많다. 남동쪽에 있는 학동 흑진주 몽돌 해변도 그중 하나로 연중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오랜 세월 갯바위가 파도에 부서져 돌덩어리가 되고, 돌덩어리들이 닳고 닳아 주먹 크기의 둥글둥글한 몽돌이 되었다. 바위가 몽돌이 되기까지 그 긴 시간을 생각하면 내 삶의 길이는 순간이나 다름없다. 전쟁도 그 순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정말 흑진주처럼 까맣고 반질반질한 몽돌들이 햇살을 튕겨 냈다. 해변을 가득 메운 몽돌은 파도가 칠 때마다 서로 부대끼며 아주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만큼 파도의 거친 힘을 흩어 버리고 있다는 뜻이다. 모래사장과 달리 몽돌은 바닷가 주민들을 보호해 주는 기능이 있다. 이 해변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성난 파도가 기승을 부리다 간 어느 날, 해안의 몽돌들이 모두 사라지고 모래만 남아 있었다. 주민들이 이 기이한 현상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데 다음 날 거짓말처럼 몽돌들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이 짤막한 이야기에서 이곳 사람들이 몽돌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관광객들이 기념 삼아 하나둘씩 챙겨가는 걸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흔적도 꽤 보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몽돌 해변마다 안내판에 적혀 있는 어느 사연이다. 지난 2018년 국립공원관리공단 한려해상국립공원 동부 사무소로 소포 하나가 배달됐다. 그 안에는 몽돌 두 개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미국에서 놀러 왔던 한 소녀가 기념으로 몽돌을 가져갔다가 엄마의 설명을 듣고 크게 후회해 돌려준 것이었다. 과태료나 벌금을 물리겠다는 경고판보다는 진심이 담긴 소녀의 편지가 훨씬 더 설득력 있게 관광객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까? 해변을 둘러보다가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해금강을 보기 위해서다.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섬인데, 1971년에 일찌감치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2호가 되었다. 정부가 지정한 129개의 명승 중 도서 및 해안 형은 딱 15개가 있는데 그중 2개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거제 지구에 몰려 있다. 이곳의 바다 경치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말해 주는 증거다.
서양화가 양달석(梁達錫, 1908~1984)은 동심이 깃듯 향토적인 그림을 많이 남겨 ‘소와 목동의 화가’라고도 불렸다.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목인 청마 유치환을 기리기 위해 태어난 곳에 세워진 기념관으로, 청마의 문학과 삶의 자취에 대한 기록을 관람할 수 있다.
거제가 낳은 예술가들 해금강의 위용을 가슴에 새기듯 담고 항구로 돌아와서 다시 길을 잡았다. 국내1세대 서양 미술가 중 한 명인 양달석(Yang Dal-seok, 梁達錫, 1908~1984)과 한국 시단의 큰 기둥, 유치환(Yoo Chi-hwan, 柳致環, 1908~1967)을 만나러 가야 했다. 두 사람이야말로 죽어서 해금강의 우뚝 솟은 바위들 중 하나가 되어 있는 건 아닐까? 먼저 도착한 곳은 양달석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곳, 성내 마을이다. 그의 작품으로 벽화를 곳곳에 그려 놓아 그림책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목동과 소를 주제로 그린 작품이 많았다. 그림 속 아이들은 바지가 흘러내려 볼기가 훤히 드러나는데도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닌다. 물구나무를 서거나 허리를 숙여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들도 있다. 그 행동과 표정들이 무척 해학적이다. 소는 게으르게 풀을 뜯고 있고 산천초목은 푸르며 모든 것이 평화롭다. 화가가 그려 낸 세계는 어째서 저토록 서정적이고 아름다운가. 양달석은 아홉 살 때부터 큰집에서 머슴살이를 해서 소와 친해졌다고 한다. 꼴을 먹이다 소를 잃고 돌아와 크게 야단맞은 날이 있었는데, 밤새 산을 뒤지며 찾아다니다 잃은 소를 발견했을 때는 소의 다리를 붙들고 오래 울기도 했단다. 그런 아픈 기억들이 아무런 걱정과 근심이 없는 세계를 꿈꾸는 화가를 만든 건 아닐까. 청마기념관은 피안을 꿈꾸던 또 한 명의 거제 출신 예술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현실이 고될지언정 시 안에서는 의지를 일으켜 세웠던 유치환이다. 그의 대표작 「깃발」에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구절이 나온다. 바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문학 수업에서 역설법을 설명할 때 반드시 예로 든다. 그가 거제를 노래한 시 「거제도 둔덕골」이 기념관 마당의 시비에 새겨져 있었다. 시는 여러 행에 거쳐 고향 마을의 각박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다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서는 “해 뜨면 밭 갈며 어질게 살다 죽겠다”라고 약속한다. 보통 사람의 여유와 포용력이 아니다. 푸른 말을 뜻하는 그의 호(號) ‘청마(靑馬)’가 이 섬의 산야를 누비는 상상을 해 본다. 엔진은 웅웅거리고……. 버릇처럼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약속할 수 있을까? 내게는 과연 몽돌 한 개만 한 여유와 포용력이 있을까? 나의 ‘그랜 토리노’가 엔진을 웅웅거려 대답해 줬다. 그런 질문에도 얽매이지 말라고.
On the Road
2022 SPRING
영주, 세상의 끝과 시작
두 개의 큰 강의 발원지이자, 두 국가의 시작과 끝을 기억하는 땅 영주에는 헤어지는 시간을 늦추는 굽고 낮은 다리와 신비한 전설을 간직한 뜬 바위가 있다. 천혜의 자연 속에 숨겨진 깊은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보물 같은 공간이 말을 걸어온다.
경상북도 영주 무섬마을은 태백산에서 흘러내려온 두 개의 맑은 시내가 합쳐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다. 1979년 현대식 다리가 놓이기 전 이 긴 외나무다리가 물길이 동네를 휘감아 돌아 섬이 되어버린 마을과 외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어쩌면 옛날 영주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사는 곳이 세상의 끝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주시는 한반도의 동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경상북도의 가장 위쪽에 있다. 강원도와 맞닿아 있는 북동쪽으로는 태백산이, 서쪽 경계선을 길게 공유하고 있는 충청북도 쪽으로는 소백산이 우뚝 솟아 있다. 영주 사람들은 북쪽을 가로막은 저 높은 산들의 건너편이 궁금했을 것이다. 저 남쪽 바닷가에서부터 세계의 넓이가 궁금한 타지 사람들도 끊임없이 모여들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서로의 상상과 경험을 나누었으리라. 남쪽에서부터 영주로 모여든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을 물길을 생각해봤다. 남한에서 가장 긴 낙동강이다. 나는 영주에 반드시 그 발원지가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정보를 찾아봤다. 짐작대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54)에 “낙동강의 근원은 태백산 황지, 문경 초점, 순흥 소백산이며, 그 물이 합하여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 기사에서 ‘순흥’이 바로 영주 일대의 옛 이름이다. 그뿐 아니라 놀라운 정보를 하나 더 얻었다. 영주에는 낙동강뿐 아니라 한강의 여러 작은 발원지들 가운데 하나도 있었다.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이라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뜻밖의 정보였다. 한반도 남쪽의 중요한 두 강이 모두 이 곳에서 흘러나왔으니 영주는 세상의 시작이기도 한 셈이었다.오후 늦게 서울을 벗어나 두 시간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저 멀리 죽령터널 입구가 보였다. 죽령터널은 소백산 아래를 뚫어 충북과 경북을 이은 4,600미터짜리 긴 관문이다. 터널 저쪽이 바로 영주라는 걸 알고 있어 다른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게 실감났다.
17세기 중엽 비옥한 토지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조성된 무섬마을에는 현재 40여 호의 고가옥이 남아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로 반남 박씨와 예안 김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외나무다리가 굽은 이유 나는 영주 남쪽의 무섬마을로 향했다. 강물이 크게 굽어지는 안쪽, 마치 강줄기를 밀어내며 혹처럼 툭 불거진 육지에 오래된 마을이 있었다. 이런 지형에 형성된 마을을 물돌이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앞과 양옆은 물길이 감싼 채 휘돌고 뒤로는 산이 막고 있어 그야말로 섬이나 다름없다. 완벽히 고립된 곳에 마을이 형성된 이유는 이런 지형이 거주민들에게 좋은 기운을 준다는 풍수학적 믿음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자급하며 살 수 있을 만큼 넓고 기름진 땅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이 마을을 세상에 널리 알린 건 강을 가로질러 놓인 외나무다리다. 강은 여름 장마철만 아니면 두 발로 건너다닐 수 있을 만큼 얕은데, 그렇다고 옷을 적실 수는 없으니 간단하게나마 다리를 놓은 것이다. 모래톱과 얕은 물에서 고작 1미터나 떠 있을까? 외나무다리의 폭은 남자 어른 손으로 두 뼘이 될까 말까 했다. 희한하게도 다리는 강을 직선으로 가로지르지 않고 커다란 S자 형태로 늘어져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알 길이 없었으나 보기에는 무척 아름다웠다. 사진에 담아두고 오래 추억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 남녀노소에게 인기이고, 드라마나 방송에도 소개되어 끊임없이 관광객을 불러들인다고 했다. 나는 사람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호젓하게 즐길 생각으로 일찍 도착했다. 나처럼 서둘러 움직이는 사람이 없진 않았다. 외나무다리 위에 앞뒤로 서서 느릿느릿 건너는 한 커플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카메라 앵글에서 빠져나가길 기다리며 다리를 굽이지게 설치한 이유에 대해 내내 생각했다. 장마 때문에 물살이 거세지면 쉽게 무너진다고 했다. 지금이야 북쪽으로 멀지 않은 위치에 차량이 다닐 수 있을 만큼 큰 다리가 놓여 있으나 그것이 없던 시절에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한번 물살에 휩쓸려버리면 다시 설치하기가 무척 번거로울 게 뻔하고 불어난 강의 물살을 이겨내도록 단단하게 놓을 기술도 없었을 것이다. 필요에 따라 자주 다시 놓지 않으려면 재료도 아낄 겸 직선으로 놓는 게 아무래도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고택과 정자로 가득한 무섬마을의 가옥 중 16동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으로 잘 보존돼있다. 아직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 옛 선비 고을의 고요한 정취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혹시나 그저 미관상의 이유 때문이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리를 건너봤다. 한 가닥 외나무다리에는 곳곳에 다리의 폭만큼 짤막하게 옆으로 덧대 놓아 두 가닥이 되는 곳이 있었다. ‘비껴다리’라고 불리는 구조물이었다. 어쩌다 사람과 마주치게 되면 잠시 비켜서서 양보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놓은 것이었다. 사려 깊고 합리적인 사고에 감탄하는 한편으로는 바로 그 점 때문에 S자로 길게 구부려 놓은 비효율적 형상이 더욱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마을로 들어서자 잘 보존된 전통 가옥들이 한눈에 가득 담겼다. 19세기 말까지도 120여 가구에 500여 명이 살았을 만큼 큰 마을이었다. 마을을 대표하는 몇몇 기와집들의 크기와 모양만 봐도 그저 잠시 사람들이 거주했던 섬이 아니라 하나의 이상적인 소도시쯤으로 봐야 할 것 같았다. 이곳에서 수많은 학자와 선비가 배출되었고 독립유공자만도 다섯 명이라니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의 안목과 뜻이 새삼 가슴 깊이 다가왔다. 돌담과 흙길을 따라 걷다가 무섬마을 자료 전시관에 들어섰다. 마당에 한 시인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조지훈(Cho Chi-hun 趙芝薰 1920~1968). 학창시절 교과서를 펼치고 그의 시 「승무(僧舞 The Nun's Dance)」를 소리 내어 읊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섬은 그의 처가였고 그가 이곳에서 남긴 시 「별리(別離)」가 커다란 바위에 아내이자 서예가인 김난희(金蘭姬 1922~)의 필치로 깊게 새겨져 기념되고 있었다. 남편이 집을 나서 어디론가 떠나는 상황을 새색시의 눈으로 그린 시였다. 아내는 남편의 뒷모습을 마루의 큰 기둥 뒤에서 몰래 지켜보며 눈물로 옷고름을 적신다. 아마 이 여인의 남편도 외나무다리로 강을 건넜으리라.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문득 외나무다리의 S자 모양이 이해되는 듯했다. 가족을 남겨두고 마을을 나서던 무수한 사람들은 쉽게 발길을 뗄 수 없었다. 돌아올 기약 없이 떠나 가야만 하는 마음이 무거워 차마 강을 훌쩍 건너버리지 못했고, 한 번쯤은 돌아보고 싶어도 남아서 그 모습을 볼 이의 가슴이 더 미어질 것을 염려해 눈물을 삼키며 걸었다. 보내는 이도 기둥 뒤에 몸을 숨겨 떠나는 이의 마음에 짐이 되지 않으려 애썼다. 그나마 길게 굽이져 놓인 다리가 강을 건너는 시간을 늦춰주니 서로 위안으로 삼았다. 나는 시 속의 남편이 한 걸음 한 걸음 아껴 디디며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머리 위로 흰 구름이 무심히 피었다 지고, 아득히 멀리서 떠내려온 작은 잎사귀는 발 아래 잠시 머물지도 않고 스쳐 흘러가버린다.
열린 왕조와 닫힌 왕조 시내로 돌아와 영주의 중심가를 돌아봤다. 도심 인근에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고향집이 있었다. 정도전은 조선왕조 창업의 기틀을 설계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한 국가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 큰 강들의 발원지를 품은 영주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의 고향집은 세 명의 판서를 배출했다 해서 ‘삼판서 고택’이라고 불렸다. 비록 원래 있던 자리에서 수해를 당해 무너진 것을 옮겨다 복원해놓았다 해도 한 국가의 통치 이념을 성립하고 대를 이어 고위 관리를 배출해 낸 가문의 위세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천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바위벽의 마애여래삼존불상은 통일신라시대 조각 양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불상으로 평가된다. 발견 당시 불상 세 구의 양 눈이 모두 정으로 쪼아 파져 있었지만, 큼직한 코나 꾹 다문 입, 둥글고 살찐 얼굴에 힘찬 기상이 배어 있다.
시내 중심가로 들어가 영주 근대문화거리를 둘러보다가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 숭은전에 이르렀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그가 고려에 항복하러 개성으로 가던 길에 이곳에 머물렀던 인연이 이어진 것이라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방금 하나의 왕조를 열었던 혁명적 사상가를 만나고 온 길이었고 이제는 천 년을 이어 오다 멸망한 자신의 나라를 새로운 왕조에 바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임금을 만나는 중이었다. 국운이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백성들의 목숨을 지키고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었다고 한다. 영주는 경순왕의 그런 애민정신을 기리며 그를 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숭은전 앞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용이 이 자리에 떨구었을 눈물을 생각하는 중에 겨울 해는 또 빠르게 기울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인데도 부석사에 오르는 사람들이 더러 보였다. 부석사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통도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긴 오르막길과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들을 감상하던 중에 이마에 땀이 맺히고 숨이 차올랐다. 그러나 나를 비롯해 앞뒤에서 걷고 있는 관광객들은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공중에 떠다니며 도적떼를 물리치고 내려앉았다는 바위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잠시의 불편쯤이야 전설이 깃든 신비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기꺼이 치를 수 있는 대가인 셈이었다. 그 전설적 바위 곁에 부석사가 지어지던 676년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할 만큼 강성하던 때다. 불교가 국교로 그만큼 큰 지원을 받던 시기였기에 부석사의 규모나 위상은 특별했다. 그런 나라가 약 250년 뒤에는 남의 손에 넘어갔다. 복잡한 생각에 잠겨 드디어 108개의 계단을 모두 지나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무량수전 앞에 섰을 때, 내 머릿속에서 왕조의 흥망성쇠 따위는 어느새 하얗게 지워지고 없었다. 무량수전을 마주하고 왼쪽에 바로 그 뜬 돌, ‘부석’이 있었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인문지리서 『택리지』(擇里志 1751)에는 바위 아래로 밧줄을 밀어넣고 훑어도 걸리는 데가 없다고 적혀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부석사 뒤편의 화강암 일부가 판상절리에 의해 떨어져 나와 경사면을 따라 미끄러지다가 잔돌들 위에 얹혀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 눈에는 어른 스무 명쯤 둘러앉을 수 있을 크기의 테이블 같았다. 속세의 잣대로 절의 창건설화를 재고 있자니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 부석과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경계심 없이 느리고 게으른 걸음걸이에서 일종의 핀잔이 읽혔다. 고양이가 나타났던 방향의 반대편으로 사라지고서야 나는 무심결에 도서관 책벌레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하던데 내게 깨우침을 준 고양이에게서 혹시 부처를 만난 건 아닐까.
부석사 범종루에 오르면 앞으로 펼쳐진 절의 전경과 그 너머 소백산맥이 구비구비 절경을 이룬다. 부석사는 676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창건된 이래 이제까지 법등이 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온 한국의 대표적 불교 사찰이다. 2018년 다른 여섯 개 사찰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범종루는 안양루와 함께 부석사에 있는 2개의 오래 된 누각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범종루는 사찰 마당 가장자리에 자리하지만, 이곳의 범종루는 경내 중심축에 당당히 위치하고 있다. 사물이 배치되어 하루 두 번 이들을 두드리며 중생의 평안을 비는 예식의 장소이기도 하다.
순환을 포용하는 공간 오후에는 강원도 방향으로 난 고개, 마구령을 넘어 남대리의 산간마을을 다녀왔고 다시 부석사 아래로 돌아와 소수서원을 둘러봤다. 남대리는 조선의 6대 왕 단종(端宗 재위 1452~1455)이 삼촌인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손에 폐위되어 유배길에 올랐을 때 머물렀던 곳이며, 바로 거기에 한강의 영남 발원지가 있다. 소수서원은 학자를 양성하던 조선시대 최고의 지방 사립 교육기관인데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아홉 곳 중 하나다. 최초로 임금이 그 이름을 내려준 서원이며 한반도에 처음 성리학을 전파한 안향(安珦 1243~1306)을 비롯해 많은 유학의 거목들을 모시고 있다.
소수서원 주위의 둘레길은 자연과 어우러진 오래 된 서원의 경관을 풍취를 즐기기에 좋은 산책코스다. 수령이 300년에서 많게는 1000년에 이르는 소나무를 포함해 적송 수백 그루가 자라고 있다. 1542년 설립된 소수서원은 한국 최초의 서원으로 2019년 다른 여덟 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용한 산사 성혈사에는 아름다운 건물 나한전이 있다. 단청을 입히지 않아 단아하면서도 더욱 그윽한 품위를 느끼게 하는 나한전의 세 칸 연꽃과 연잎, 두루미, 개구리, 물고기 등 상징적 문양이 정교한 솜씨로 새겨져 있다.
영주의 곳곳을 다녀 볼수록 그 독특한 면모가 감탄스러웠다. 한 국가의 설계자가 난 곳이면서 사라진 왕조의 마지막 임금을 기리고 있는가 하면, 서원을 통해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를 배출한 곳인데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어린 왕의 여린 발자국이 남은 곳이기도 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순환을 반복해서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영주가 자랑하는 인물인 송상도(宋相燾 1871~1946) 선생을 통해 발원과 회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호를 붙여 엮은 저서 『기려수필』(騎驢隨筆 1955)에는 식민지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한국인들의 이모저모가 아주 자세히 기록돼 있다. 선생은 봄에 영주를 떠났다가 겨울이면 한껏 초췌해진 몰골로 돌아왔다고 한다. 식민지 주민으로 점령국에 맞서는 일에 대해 캐고 다니는 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는 이곳저곳에서 들은 얘기들을 깨알 같은 글씨로 종이에 기록하고 그 종이를 새끼처럼 꼬아 봇짐의 멜빵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검문을 당하더라도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1910년 이후 수십 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애국지사들의 유가족을 만났고 사건 당시의 신문기사와 같은 객관적 자료를 조금씩 수집했다. 송상도 선생의 사례에 이르러 나는 뜻을 품고 바깥 세계로 나갈 때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를 되새기게 되었다. 무섬마을에 가족을 남겨두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던 사람들의 단단한 각오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포용과 포섭이었다. 세상 모든 것의 발원지인 동시에 그 어떤 것도 회귀할 수 있는 피안의 공간이고자 하는 것이 영주에 깃들어 있는 정신이었다. 마지막 날 아침, 나는 서울로 돌아올 채비를 할 때까지도 평생을 바쳐 나라를 다시 일으킬 불씨를 모으던 어느 선비의 행로를 생각했다.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의 여정을 그대로 따르지는 못할지언정 고속도로를 타고 휑하니 돌아가는 건 어딘가 송구했다. 나는 옛 죽령 고갯길로 방향을 잡았다. 가파르고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 도로를 운전하는 동안 이 험한 고개를 두 발로 넘어 영주를 떠나던 선비의 단단하고도 거대한 기개(氣槪)를 느껴보고 싶었다. 고갯마루에 올랐을 때, 나는 지금 서울로 돌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영주에서 나서는 것인가 자문했다. 영주에서의 경험을 자랑할 것 같고 여러 번 다시 올 것이므로 출발로 여기기로 했다.
On the Road
2021 WINTER
섞인 시간의 단맛
전라북도 군산은 주변에 드넓은 평야가 펼쳐 있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곡식을 실어 나르던 곳이다. 부흥과 약탈의 허브가 됐던 이 항구 도시에는 역사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수많은 사연들이 지금도 유효한 듯한 군산의 생경한 이미지는 쉽게 변하고 달라지는 현대 도시의 속도감에 뭉근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1900년대 개항초기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문물이 군산항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됐다. 때문에 군산에는 지금도 생동감 넘치는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도시지만, 요즘은 인기 높은 관광 명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든다.
우리는 뭔가 섞여 있는 걸 보면 흔히‘짬뽕 같다’라고 표현한다. 채소와 해산물, 육류 등을 잘 섞으며 볶다 육수와 함께 끓여낸 빨간 짬뽕 한 그릇에는 중국, 일본, 한국이 어우러져 있다. 짬뽕으로 유명한 군산에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도 짬뽕처럼 잘 어울려 섞여 있다. 군산으로 떠나는 길에 뜨끈한 짬뽕이 생각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고속열차를 타고 익산역에 내려 다시 군산행 완행열차로 갈아탔을 때 나는 묘한 냄새를 맡았다. 외관 도장이 벗겨질 만큼 오래된 기차였는데 마치 시간이 섞인 냄새라고 해야 할까. 삐걱거리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객차 내부에선 상상했던 타임머신을 실제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1909년 일본인 승려가 창건한 동국사는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불교 사찰이다. 당시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가져다 지었는데, 현재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건물마다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외관이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1908년부터 1993년까지 85년간 군산세관 본관으로 사용됐던 이 건물은 지금은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국내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국가 지정 ‘근대문화유산’이다.
시간여행 그래선지 군산에서는 경암동 철길마을에 가장 먼저 들르고 싶었다. 이젠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기찻길 주변으로 시간이 박제된 곳이다. 마을 한복판을 오가던 기차는 군산역에서 어느 제지공장까지 나무와 종이를 천천히 싣고 다녔다. 오래 전 운행이 멈추며 마을 곳곳엔 당시의 시간도 멈춰 있었다. 60~70년대식 학교 교복이며 과거의 군것질거리와 잡화들까지 여전히 남아있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져 한적한 분위기지만, 나는 과거 속으로 이토록 쉽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 신기해 철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휘발되는 시간의 냄새가 코끝을 찡하게 했다. 그것은 녹슨 철길에 남은 목재나 종이 냄새와 비슷했다. 철길마을에서 빠져나온 나는 본격적인 군산 탐닉에 앞서 짬뽕부터 먹으러 나섰다. 군산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짬뽕집이 여럿 있다. 내가 찾아간 짬뽕 가게는 ‘빈해원’이었다. 건물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칠십 년 전통을 가진 이곳의 ‘청탕면’은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사람에게도 부담 없는 짬뽕이다. 한입 맛을 보자 신선한 해물이 진득하게 우러난 국물 안에서 일종의 위로가 느껴졌다. 시간이 농축된 맛이란 이런 것이구나. 장소가 주는 예스러움이 분위기를 더하고 음식은 깊은 위로가 된다. 군산에서 느낀 켜켜이 쌓인 첫 시간의 냄새가 종이었다면, 두 번째는 짬뽕이다. 군산은 오래 전부터 전국에서 곡식이 가장 많이 생산되며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였다. 배가 든든해진 나는 근대 건축물들을 한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근대화 거리를 찾아가 그 에너지의 과거 버전을 체험해보기로 했다. 근대 건축관과 근대 미술관, 근대 역사박물관을 하나씩 둘러보며 나는 그 생기가 아직도 여전한 게 신기했고 역사와 세월이 남긴 것에는 고유한 작품성까지 깃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시간에 닳고 퇴색된 것들이 아직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근대 풍경을 현재가 공유하는 광경은 여러 개의 차원과 시간이 섞인 시공간의 모형과 같았다. 시간을 견딘 이 거리의 빈티지한 변화에선 일말의 건축미까지 읽을 수 있었다. 기능만을 중시하지 않고 미를 추구했던 흔적을 아스라이 엿보았다. 가장 아담한 건축미를 보이는 건 옛 군산세관 건물이었다. 군산에는 바다와 연결되는 금강이 흐르는데, 주변에는 배로 실어나를 곡식을 모아두던 ‘조창’이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조창은 식민지 시대에 들어서 그야말로 세곡 납부용 물류센터로 이용됐다. 당시 일제의 곡물 선적 전용 창구였을 이 건물 앞에 서자 마음이 복잡했다. 독일인이 설계하고 일본인이 건축했으며 벨기에산 붉은 벽돌을 썼고 창은 로마네스크식, 현관은 영국식인데 지붕은 일본식으로 덮었다. 과연 군산의 대표적인 짬뽕 스타일 건축물이다.
군산지역에서 포목점을 경영해 큰돈을 벌어들인 뒤 부의회 의원을 지낸 일본인 히로쓰 게이사부로가 살았던 집이다. 1920년대에 지은 전형적 일본식 무가의 가옥으로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커다란 정원과 웅장한 외관이 당시 부유한 일본 상류층의 생활상을 짐작하게 한다.
이질적 조화로움 근대화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국사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절인데 현재는 한국 사찰로 사용된다. 한눈에 봐도 무척 일본풍인 이 조그만 절은 느낌이 낯설었다. 일본식 미니멀리즘이 반영된 듯 액세서리 없이 댄디한 대웅전의 옷차림에, 월명산 자락의 백 년 된 대나무숲 헤어스타일이 잘 어울려 패션 감각이 있어 보였다. 동시에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루며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절의 뜰에는 일제가 한국인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갔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한 ‘소녀상’이 서 있었다. 당시 일본인 지주들은 쌀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 군산의 소작농들을 착취했었다. 핍박당한 소작농들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항거하며 거세게 봉기했었다. 그러나 거친 역사를 통과해 온 종교시설의 호젓한 경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과거의 원한마저 부질없이 휘발되고 해탈에 이른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이 절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들이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조화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 이상 기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경암동 철길마을 주변에는 옛 추억에 잠길 수 있는 재미있는 먹거리와 놀거리가 많다. 요즘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에 나온 달고나의 인기가 군산에서도 폭발적이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마주했다. 부유한 일본인이 살던 가정집일 뿐이지만, 시간의 풍파를 견딘 매력적인 장소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정원과 넓은 창을 가진 안채들이 아름다움을 좇는 인간의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었다. 근처 월명동 골목의 오래된 벽들, 좁은 골목들, 녹슨 철제 대문들이 주는 느낌도 아스라했다. 역사의 격동기를 지나온 채 아직도 존재하는 흔적들을 보며 오랫동안 그대로 남는 것의 의미를 생각했다. 우주가 빛의 속도보다 빨리 팽창하며 변해가고 있는데 변하지 않는 것들의 묵묵함을 보는 건 참 안심되는 일이다. 시간여행의 현란함에 취한 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으로 향했다. 이 곳은 서구의 빵 맛을 먼저 본 일본인을 상대로 영업하던 빵집이었는데, 일제의 패망 이후 한국인이 명맥을 이어받아 현재의 빵집으로 운영 중이다. 이 가게에서 유명한 단팥빵과 야채빵을 직접 먹어보니 과거의 맛과 현재의 맛이 혓바닥 위에서 짬뽕되었다. 흔한 빵마저 시간여행의 매개물이 되는 곳이 군산이다. 빵을 즐기지 않는 나도 그 자리에서 몇 개나 먹어버렸다.
군산 구석구석에는 여러 층위의 시간이 섞여 있었다. 망해버린 나라와, 일제 식민지였던 시절과 독립 후의 근대, 그리고 산업화로 바빴던 현대. 그 시간의 흔적들이 오래된 옛 도시에 고스란히 섞여 있는 모습이 독특한 감명을 주고 있었다.
문학의 기록 “나라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거야? 나라가 내게 뭘 해준 게 있다고, 일본인이 내놓고 가는 내 땅을 쟤들이 왜 팔아먹으려고 해? 이게 나라냐?” “기다리면 나라에서 억울하지 않게 처리하겠죠.” “됐고, 난 오늘부터 도로 나라 없는 백성이야. 제길. 나라가 백성한테 고마운 짓을 해 줘야 백성도 믿고 마음을 붙이며 살지, 독립됐다면서 고작 백성의 땅 뺏어 팔아먹는 게 나라냐?” 채만식(蔡萬植 1902 ~ 1950)의 소설
(1946)의 마지막 장면을 현대어로 바꾼 것이다. 채만식 문학관 앞에서 작가의 많은 작품 중 이 구절이 문득 떠오른 것은 도착부터 나를 따라다닌 군산이 가진 특별한 역사성 때문이었다.
채만식 문학관에는 30여년 동안 소설, 희곡, 평론, 수필 등 그가 집필한 200여편의 많은 작품을 모아둬 작가의 작품세계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군산 출신인 채만식 작가는 해방 전후 세태를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스킬을 가졌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는 한반도가 조선 땅이었던 시절, 행정기관에서 주인공 집안에 동학운동(東學運動 1894)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씌워 ‘처벌 받을래? 아니면 논을 내놓을래?’ 했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선대의 피땀 흘린 노력으로 조금씩 사서 모은 자기 논을 절반 이상 빼앗긴 주인공은 상심이 컸다.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했을 때 소작농 생활로 어렵게 살다 지쳐 일본인에게 남은 땅을 팔게 된다. 어차피 일제가 망하면 다시 자기 땅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일제의 재산을 환수한 독립 정부가 땅을 다시 빼앗아 가 팔아치우면서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생애 내내 자기 것을 빼앗기기만 했던 운명으로 살아간 소설 속 주인공에게 독립의 기쁨은 없었다. 나라다운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이 인물을 통해 한 국가가 멸망할 무렵 과도기적 혼돈과 그 속에서 사는 사람이 느꼈을 억울함과 회의감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채만식 작가가 남긴 작품들이 군산의 또 다른 문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는 점도 이처럼 뛰어난 작품성 때문이다.
또한 채만식 작가는 일제의 힘에 동조했던 문학가 중에서 제대로 ‘반성’을 한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해방 후에 소설
(民族-罪人 1948~1949)을 발표하며 반성의 의지를 작품으로 극명히 보여줬다. 그런 일단락 때문에 그의 문학 작품은 군산의 근대유산들과 함께 버려지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일 수도 있다.
군산 구석구석에는 여러 층위의 시간이 섞여 있었다. 망해버린 나라와, 일제 식민지였던 시절과 독립 후의 근대, 그리고 산업화로 바빴던 현대. 그 시간의 흔적들이 오래된 옛 도시에 고스란히 섞여 있는 모습이 독특한 감명을 주고 있었다.
군산역으로 돌아가기 전 무려 칠십 년 동안 호떡을 팔고 있다는 중동호떡에 들렀다. 청나라에서 넘어온 호떡은 얇은 밀반죽 빵 속에 시럽을 넣어 구은 음식이다. 보통은 기름에 굽지만 여긴 화덕에 구운 것을 팔았다. 나는 호떡의 느끼하지 않은 단맛에 기분 좋게 취하며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철길이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역사 속에 남겨진 깔끔한 단맛. 그 맛이 꼭 군산 같았다.
과거와 현재가 철길을 따라 이어지는 광경은 쉽사리 현실감을 아련하게 흐려버린다. 약 2.5km의 철길 양쪽으로 낡은 집들과 옛 모습의 가게들이 즐비하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예전 학창 시절의 교복을 빌려 입고 철길을 따라 걸으며 추억을 되새긴다.
도시를 구경하다 보면 아름다운 색감의 서정적인 벽화와 종종 마주친다. 유명 관광지에 화려한 포토존을 이루고 있기도 하지만 좁은 골목길의 소박한 벽화도 많다.
20세기 전반 한국문학을 대표했던 작가 중 한 사람인 채만식의 삶과 작품 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채만식문학관에는 전시실, 자료실, 시청각실과 함께 문학 산책로, 공원도 갖추어져 있다.
2018년 국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빈해원은 짬뽕으로 유명한 중국음식점이다. 옛스러운 정취의 독특한 건물로
을 비롯한 영화 촬영 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기름에 지지지 않고 않고 오븐에 굽는 중동호떡에는 군산을 대표하는 흰찰쌀보리와 함께 검은콩, 검은쌀, 검은깨를 넣은 플랙푸드 선식이 시럽으로 들어가 고소하고 담백하다.
On the Road
2021 AUTUMN
천년 수도의 아름다운 파동
오랜 역사와 문화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 땅을 파면 문화재가 나오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된다는 고대 왕국의 수도. 경주는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 찬란했던 문명을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자리한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높이가 13.4m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감은사는 신라 30대 문무왕이 삼국 통일을 완성한 후 짓기 시작한 절로 지금은 지상에 이 탑들만 남아 경주의 동쪽 바다를 지키고 있다.
비트 세대 대표작가 잭 케루악(Jack Kerouac 1922~1969)— 그가 말년에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던 걸 상기하며, 한때 불교문화의 심장이었던 경주로 향하는 길에 두근거리는 맥동을 느꼈다. 그가 쓴 소설의 제목이 바로 이 칼럼의 이름 “On the Road” 였다. 경주를 요약하는 단어는 ‘천년 수도’다. 정확하게는 992년 동안 수도였으니 천년에서 8년 모자라지만 아름다운 도시니까 그냥 넘어가자. 기원 전 57년부터 936년까지 하나의 나라로 살았던 사람들, 그 나라의 이름은 신라였다. 천년간 지속된 국가는 몇 개 떠오르지 않는다. 비잔티움과 신성로마제국을 포함하며 오랜 역사성 부문에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로마제국 정도만 생각날 뿐. 아, 파라오 왕조도 상당했었지. 그런데 아시아 동쪽 끄트머리의 작은 땅에도 천 년 동안 지속하며 찬란한 문화를 남긴 국가가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경주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나 장안(시안), 바그다드 같은 화려하고 유명한 대도시와 같은 리그에서 뛴 선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주는 고대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를 너머 유럽과 교류하던 중국과도 활발한 교류를 해서 신라인의 무덤에서 로만 글라스가 출토되기도 한다. 시야가 좁지 않고, 경기장을 넓게 쓰며 세계시민으로 존재감을 가진 나라였던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제국주의의 행패와 전쟁으로, 웬만한 건 다 무너졌던 이 나라에 아직도 신라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비도를 지나면 궁륭천장으로 짜인 원형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연꽃 모양의 돔으로 이루어진 천장과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부처와 보살, 수호신들이 고대의 건축술과 조형미를 보여준다. 현재는 보존 문제로 관람객이 주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며 볼 수 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한석홍
비밀스러운 아름다움 나는 배를 타고 온 이방인 탐험가처럼 동쪽 바다에서부터 경주로 들어가 문무 대왕(~681 文武大王)을 기리는 첫 유적지, 감은사지(感恩寺址)를 만났다. 이 절의 네이밍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왕의 은혜를 팔로우하고 틈만 나면 ‘좋아요’를 계속 누르겠다는 뜻이다. 감은사지의 느낌은 조금 특별하다. 관광명소 특유의 과도한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자칫 버려진 듯 보일 지경이다. 입장료도 없고 관리인도 보이지 않았다. 낡아버린 쌍탑만 달랑 남은 절터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이 쌍탑은 아주 오랫동안 이 자리에 우뚝 서 있다. 고대의 감은사 아래는 바닷물이 닿는 곳이었고, 절 아래로 용이 드나들 수 있는 수로가 설계되어 있었다. 두 개의 탑이 용이 된 왕을 지키는 중인지 용이 두 개의 탑을 지키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탑의 수수한 아름다움이 눈길을 오래 잡아끌어 시선을 돌리기 싫을 정도다. 이 탑을 해체하고 복원할 때 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具)에는 신라의 정교한 금속 공예술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보물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아주 그냥 미친듯이 예쁘다. 탑의 겉모습인 수수한 아름다움과의 대비가 선명하다. 보이지도 않는 탑 속에 숨겨진 이 보물이 신라의 찬란한 문명을 만든 기본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하되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 아름다움은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스스로 빛난다는 걸 가르치는 것인가. 신라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을 더 보고 싶어 경주 속으로 빨리 파고들었다. 곧 경주로 향하는 바닷바람을 막는 토함산이 나타났고, 산 깊은 곳에 있는 석굴암(石窟庵)이 등장했다. 경주의 아름다움을 담당하는 최전방 국가대표선수는 누가 뭐래도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 투톱이다. 불국사의 부속암자인 석굴암은 로마에 있는 판테온과 비슷한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고대에 그런 상당한 건축 기술의 교류가 있었다는 놀라움도 있지만, 나는 당장 눈앞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도 충분히 바빴다. 석굴암은 불교국가였던 신라의 깊은 불심으로 만든 아름다운 인조 돌 동굴 속 불교미술이자 건축미의 절정이다. 빗물도 스며들지 않고 안에 이끼도 끼지 않는다고 한다. 돌을 뚫어 석굴을 만들자니 화강암이 너무 단단해서 조립식 건축 기법으로 이 인조 석굴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점이 중국이나 인도의 불교 석굴과 다른 점이고, 그래선지 상당히 유니크한 매력을 뿜어낸다. 내가 찾아간 날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 내내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석굴암의 내부 역시 문화재 보호를 위해 많이 가려져 있고, 줄 서서 지나가야 해서 자세히 볼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긴 시간 빤히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름다움은 가슴에 와락 안기는 종류였다. 조각 예술의 강렬한 미학이 파동처럼 번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 같은데, 잠깐 스쳐봤으나 망막에 본존불상의 표정이 배어버린 느낌이었다.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중턱에 있는 석굴암의 석가여래좌상은 불교미술사에서 두드러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전실과 원실 사이, 비도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에 20여 년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고대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그리스 로마 건축양식에 불교미술이 접목된 화강암 석굴이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한석홍
빈티지 미학 탄력을 받은 나는 다음 차례의 아름다움을 찾아 불국사로 향했다. 대웅전(大雄殿) 앞 쌍탑을 보며 한 자리에 오래 남아있는 것의 빈티지 미학을 느꼈다. 신라가 멸망한 뒤, 다음 왕조들에서도 주요한 지방 거점의 역할을 하며 존재해 온 경주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빈티지일 것이다. 한때의 찬연했던 광휘와 오래 견뎌온 것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었다. 이 두 개의 탑이 얼마나 오래 이곳에서 시공간을 봐왔겠는가. 왕조의 흥망성쇠를 보았고, 그들의 삶이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세월의 굴곡도 보았을 것이고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쌍탑을 비롯해 불국사의 구조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균형미를 갖고 있다. 불국사의 보물인 다보탑(多寶塔)에 조각된 네 마리 사자상 중 세 개는 유실되었다. 석가탑(釋迦塔)은 보수 공사 중에 떨어뜨리고, 탑 속의 사리함이 깨지는 등의 난리와 풍파도 겪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유물들은 번뇌를 초월한 듯 무덤덤해 보였다. 뭐든 견뎌낸 것들은 참 고혹적이다. 침략을 받고, 땅을 빼앗기고, 지진이 나고, 도굴당하고, 유물이 사라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문화재를 지키려 노력해 온 이들의 마음이 찬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석가탑 안에선 당시의 목판 인쇄술을 보여주는 다라니경(陀羅尼經)도 발견되었다. 이 또한 신라의 자랑스러운 보물이다. 인쇄술이 인류문명 발전에 얼마나 큰 속도감을 부여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니까. 빈티지 유물들이 보여주는 시공간의 크기와 깊이에 압도되다 불국사를 빠져나오니 문학관이 하나 보였다. 경주 출신인 김동리(1913~1995 金東里), 박목월(1915~1978 朴木月)두 작가를 함께 기념하는 시설이었다. 이들은 꽤 아름다운 글들을 썼다. 신라 문화와 한국 근대문학은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나는 하나의 연결점을 떠올렸다. 신라시대에 만든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라는 거대한 범종의 금석문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당시 사람들은 재물을 싫어하고 글재주를 사랑했다.” 내겐 이 글귀가 신라 사람들이 돈이나 탐하는 대신 문학을 사랑했다는 얘기로 해석됐다. 이렇게 아름다운 생각을 했던 나라였으니,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잔뜩 남긴 것 아닐까? 어릴 때부터 경주의 문물을 보고 자랐을 작가들이 부러웠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덕에 그들은 아름다움에 대해서라면 풍부한 시야를 자동으로 가졌을 것 같다. 그들을 상상하며 걷다 보니 문득 박목월 시인의 기념관에 흐르던 육성 시 낭독이 들려왔다.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 (William Wordsworth 1770~1850)처럼 광의의 낭만주의 시를 써온 시인의 서정에는 인생과 자연에 대한 통찰이 압축되어 있었다. 경주의 보물은 유물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작품 또한 오래도록 남아 계속 빛나고 있다. 나의 문학기행은 문학관에서 짧게 마무리했지만 더 깊은 탐구를 위해 두 작가의 생가와 주요 작품의 배경지들을 둘러보는 코스도 잘 마련되어 있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불국사는 석굴암과 함께 신라 불교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정교한 석축으로 조성된 터에 대웅전, 극락전 등 전각과 석가탑과 다보탑, 백운교와 연화교 등을 품고 있다. 석굴암과 더불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약 3만 8,000평의 평지에 23기의 원형 분묘가 솟아 있는 대릉원은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군이다. 경주 시내 한가운데 황남동에 자리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비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죽음의 한복판에 삶의 한복판이 있다니. 삶과 죽음의 관계는 조화일까 부조화일까. 현대와 고대의 간극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경주란 여러가지 선명한 대비만으로도 독특한 존재성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곳이다.
통일신라시대년에 주조된 성덕대왕신종은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cm, 무게 18.9톤에 이르는 범종으로 현존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종이다. 종의 맨 위에서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은 한국 동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며, 깊고 그윽한 여운이 오래 지속되는 신비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동리목월문학관은 경주 출신 소설가 김동리(1913-1995)와 시인 박목월(1915-1978)을 기리기 위해 2006년 토함산 자락에 건립되었다. 한국 현대문학에 큰 자취를 남긴 두 문인의 원고, 작품집, 동영상 등을 전시하고, 각기 생가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로 연결되는 투어도 제공한다.
동리문학관 안에 복원된 소설가 김동리의 창작실이다. 동리목월문학관은 동리문학관과 목월문학관으로 나뉘어져 각 작가의 유품, 동상을 전시하고 있다.
소설가 김동리의 육필 원고이다. 복원된 그의 창작실에는 생전에 사용하던 만년필, 안경, 책장, 집필노트 등 다양한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찬란한 종소리 문학관을 떠나 대릉원(大陵苑)에 다다른 나는 거대한 무덤들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의 그로테스크함에 감탄하다 시공간에서 내 좌표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 한 무덤 속으로 피신했다. 실내를 관람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천마총 내부였다. 발끝이 서늘했다. 경주 기행 내내 비가 많이 왔는데 발이 젖는 줄도 모르도록 경주는 계속 신선한 볼거리를 선사하는 곳이었다. 무덤 속은 무섭거나, 신비하거나, 칙칙하거나 할 것 같았지만, 아름다웠다. 사람이 죽어서 누워있던 자리는 몰락의 느낌 없이 편안해 보였고 그 정성 들인 장례에 동원된 품을 생각하니 옛날 사람들의 부지런함도 경이로웠다. 내 게으름을 반성하며 무덤에서 나오자 경주 시내 황남동 번화가가 나왔다. 나는 현대에 조성된 번화가와 고대 무덤가의 간극에 살짝 황당해졌다. 죽음의 한복판에 삶의 한복판이 있다니. 삶과 죽음의 관계는 조화일까 부조화일까. 현대와 고대의 간극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경주란 여러가지 선명한 대비만으로도 독특한 존재성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곳이다. 짧은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앞서 언급했던 성덕대왕 신종 앞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경주를 찾은 내가 가장 다시 만나고 싶었던 신비였다. 이 종의 표면에 새겨진 반쯤 뭉개진 글자들, 그러니까 재물을 싫어하고 글재주를 사랑했다는, 그 아름다운 문장을 내 눈앞에 생생히 홀로그램으로 띄워주는 듯했다. 그리고 이 종의 독특한 공명을 가진 소리를 떠올렸다. 독자에게 종소리를 직접 들려줄 수 없어 아쉽지만, 이 거대한 범종이 퍼트리는 맥놀이 현상은 현대의 파동 역학을 잘 알고 만든 것 같은 소리라 소름이 돋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경주에 오면 이 웅혼한 종소리를 꼭 한 번 듣고 가면 좋겠다. 이 종소리가 지닌 파동은 경주의 빈티지 미학을 잘 보여주는 유물들과, 문학에 대한 이해의 경건함과, 세계와 교류하던 고대의 대도시를 지키는 용이 스스로의 찬란함에 감탄하며 내지르는 포효 세리머니와 같을지도 모른다. 간접적으로라도 그 파동을 부디 전달받을 수 있길 바라며. 아름다움에 경도되는 파동이 영원하기를.
On the Road
2021 SUMMER
문화예술을 품은 서촌의 시간 속으로
왕이 거닐던 옛 산수화 속 동네, 식민지 암흑시대 한 호리한 시인이 몸을 웅크린 채 저항시를 쓰던 동네, 서울의 옛 도심 빌딩 숲 한가운데 한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동네 서촌으로 떠났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으로 옛 서울의 경계를 이루었던 인왕산 자락 아래 동네들을 일컫는 별칭이다. 인왕산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눈을 돌리면 북악산 밑으로 경복궁과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다. 고즈넉한 한옥과 어울리며 제각기 멋을 풍기는 아담한 빌딩들이 들어선 서촌은 과거와 현재가 흥미롭게 공존하는 곳이다. 이 마을에선 오래된 한옥이 이국적인 디저트 카페로 다시 태어나고, 조선 시대(1392~1910)의 수묵화가 21세기 화가의 캔버스 위로 펼쳐진다. 사람의 훈기가 가득한 체부시장과 통인시장에서 수성(水聲)계곡으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들은 마치 실존주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집필실이 있던 체코의 황금소로 22번지 골목처럼 아늑하다. 때로는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뒷골목을 걷는 느낌도 든다. 북촌에 이어 서촌이 최근 서울의 명소로 떠올랐다. 아기자기한 골목과 맛있는 음식점, 감각적인 카페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예술을 자연스레 몸으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인왕산에는 코로나 19사태속에 홀로 하는 등산에 재미를 느낀 사람들이 찾아와 눈 앞에 펼쳐지는 서울의 경관에 빠져들기도 한다.
서촌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살았지만, 문화예술만은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이곳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문화예술이 형형색색 모여 미로 같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옥인동에 위치한 수성계곡은 나무 그늘과 물소리가 시원해 예로부터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장소이다.
한양도성은 14세기 조선 건국 직후 왕도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데, 서쪽 벽이 인왕산을 가로지르며 서촌을 품고 있다.
옛 사람들의 자취
2013년 9월에 설립된 박노수 미술관은 이 곳에서 40여 년간 거주하던 박노수 화백의 기증작품과 컬렉션 등 1000여 점의 예술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1941년 연희전문 학생이던 윤동주는 자신이 존경하던 소설가 김송(金松·1909~1988) 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며 시를 썼다. 이 곳에서 ‘별을 헤는 밤’을 비롯한 대표작을 썼으나 당시의 집은 남아 있지 않다.
서촌의 높은 곳에 올라 펜으로 길거리와 마을의 풍경을 담는 김미경 화가. 그는 20년의 기자생활을 끝낸 후 2005년 뉴욕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다시 2012년 서촌에 자리를 잡고 그림 그리며 ‘옥상화가’로 알려졌다.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에 인접한 서촌은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 즉 후일의 세종대왕 (1397~1450 世宗大王)을 비롯한 여러 왕자들이 나고 자란 동네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곳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왕실군락지’였다. 서촌이 배경인 산수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 安平大君)이 꿈에 도원에서 노니던 광경을 화가 안견(安堅)에게 설명해서 그리게 한 작품이다. 이 그림 속 옥인동 수성계곡은 안평대군뿐 아니라 세종의 둘째 형님 효령대군(1396~1486 孝寧大君)도 살았던 장소다. 학문과 덕성이 출중했던 그는 동생인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권력의 갈등에서 비켜나 불교의 중흥에 힘쓴 인물로 추앙 받는다. 또한 이 동네에는 겸재 정선(1676~1759 謙齋 鄭敾)이 살며 조선 문화 절정기였던 진경시대(眞景時代)의 걸작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1751)⟩를 그리기도 했다. 국보 제 216호인 이 유명한 그림은 고 이건희(1942~2020 李健煕) 삼성그룹 회장의 소장품이었는데, 최근 국가에 기증되어 다시 한번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조선 중기부터 서촌에는 왕실 가족보다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신분이었던 중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역관과 의관, 내시 등 궁중관리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즉, 현재의 사직동, 옥인동, 효자동 등 여러 동네를 아우르는 이 지역은 사대부가 살았던 북촌과 달리 궁궐의 운영에 필수적인 기능인들의 거주지였다. 그래서 북촌의 한옥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웅장한데 비해 서촌의 한옥은 아담하고 소박하다. 서촌에 실핏줄 같은 작은 골목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의 몰락에 이어 일제강점기(1910~1945)에 이르자 이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시인 윤동주(1917~1945 尹東柱), 이상(1910~1937 李箱), 노천명 (1911~1957 盧天命)과 소설가 염상섭(1897~1963 廉想涉)이다. 또한 화가 구본웅(1906~1953 具本雄), 이중섭 (1916~1956 李仲燮), 천경자(1924~2015 千鏡子)도 이곳에 살았다. 같은 시기 서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1858~1926 李完用)과 윤덕영(1873~1940 尹德榮) 같은 거물 친일파들의 호화로운 서양식 저택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을 일으키고 향유되는 문화예술은 어둠 속에서 껍질을 깨고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키는 새의 부화와 같다. 단단한 껍질에 포위된 채 살기 위해 쪼아야 하는 아기새처럼, 당시 예술가들은 치열한 창작 활동을 통해 가난과 절망의 시기를 탈출하려 노력했다. 이들의 흔적을 찾는 것이 이번 서촌 기행의 은밀한 화두이기도 하다.
1941년 효자동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위해 조성된 공설시장이 모태인 통인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서촌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지금의 시장 형태를 갖추게 됐다.
향기를 따라 나는 먼저 청운동의 ‘청운 문학도서관’과 ‘윤동주 문학관’이 자리한 ‘시인의 언덕’ 으로 향했다. 언덕 너머 서울 구 도심이 부채처럼 펼쳐지며 멀리 남산타워와 한강 너머 롯데타워도 보였다. 산비탈에 한옥을 잘 복원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청운 문학도서관에 비해 철문의 콘크리트 건물인 윤동주 문학관은 삭막한 감옥을 연상시켰다. 옥외에 카페 정원과 벤치가 있는 이 건물은 2013년 동아일보(東亞日報)와 건축전문지 ⟨SPACE⟩가 공동실시한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 조사에서 상위에 올랐다. 윤동주 문학관의 영상실 콘크리트 벽에는 식민지 시절 서촌에 살며 저항시를 썼고, 일본 유학 중 항일운동에 가담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시인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무기를 들고 직접 싸우지 못하고 골방에 숨어 고작 시나 써서 창피하고, 심지어 그 시가 잘 써지기까지 해서 더욱 창피하다’고 쓴 그의 일기가 떠올라 마음이 처연해진다. 이곳에서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나와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의 집’으로 갔다. 흔히 서촌 문화예술 탐방자들이 출발점으로 삼는 장소이다. 그런데 이상이 세 살에 양자로 들어가 이십여 년을 살았던 원래 집은 없어지고 집터만 남아서 지금의 이상의 집은 그의 사후에 새로 지은 집이다. 이곳에는 그의 친필 원고 등 주로 문학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수성동 계곡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청아한 산수화를 즐겨 그렸던 한국화가 박노수(1927~2013 朴魯壽)의 작품이 모여있는 ‘박노수미술관’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윤동주 시인이 대학생 시절에 살던 하숙집터도 나온다. 이제 마침내 서촌의 끝인 수성동 계곡에 당도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여성 화가가 마스크를 쓰고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서촌의 옥상화가’로 이름이 난 김미경 씨였다. 20년 경력의 신문기자였던 그는 8년 전 직장을 그만 두고 제도용 펜으로 후벼 파듯 서촌의 옥상 풍경들을 그리고 있다. 인왕산을 비롯해 한옥, 일본식 적산가옥, 빌라 등의 옥상으로 올라가 서울의 역사가 압축된 서촌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처음엔 그가 화가인 줄 모르던 주민들이 ‘지도를 그리는 간첩’으로 신고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이젠 그의 그림이 서촌의 여러 가게에 걸려있다. 문득 그가 앞으로 그려나갈 서촌의 미래 모습이 궁금해진다.
1941년 효자동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위해 조성된 공설시장이 모태인 통인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서촌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지금의 시장 형태를 갖추게 됐다.
1940년대에 지어진 보안여관에는 여러 화가와 문인들이 즐겨 묵었다. 2004년까지 여관으로 운영되다가 최근에 전시, 공연 등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윤동주 문학관
이상의 집
사직공원
경복궁
미로 속에 뒤를 돌아보다 마지막으로 통의동 보안여관에 들렀다. 화가 이중섭, 시인 서정주(1915~2000 徐廷柱) 등의 예술가가 묵었던 이 여관은 1942년에 지은 건물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 중이다. 1936년 서정주 시인이 동료 시인들과 힘을 모아 창간한 동인잡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 서니 역사의 자취가 곳곳에 묻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과 옹기종기 비좁은 전시실이 오래된 매력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 반가왔다. 보안여관의 최성우 대표는 화가의 꿈을 안고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미술경영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이 곳을 서촌을 대표하는 복합문화센터로 만들었다. 현재는 보안여관 바로 옆에 4층 건물을 지어 문화사업을 더욱 확장하고 있는데, 실험적인 젊은 국내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뿐만 아니라 해외프로젝트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보안여관 기획전에 앞으로는 외국 작가들도 초청할 계획이다. 4층 건물의 3, 4층이 게스트하우스이자 레지던스 작가들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서촌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살았지만, 문화예술만은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이곳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문화예술이 형형색색 모여 미로 같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골목길 여행의 장점은 미로 속에 자주 길을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낯선 길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또한 느닷없이 때때로 골목이 막혀 뒤돌아 나오며 자신의 발자취를 뒤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나는 이번 기행에서 자주 눈을 떴고 자주 뒤돌아보았다.
대오서점이 개점하던 1950년대에는 인근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책을 사거나 또는 팔러 오는 학생들로 붐볐다. 처음에는 한옥의 창고를 개조해 만든 책방이 점점 현관으로, 집안으로 확장됐다. 현재는 다시 규모가 줄었고, 뒤편 공간에는 북카페가 운영 중이다. ©Newsbank
‘먹자골목’으로 유명한 서촌의 체부동은 낮부터 밤까지 미식을 즐기러 찾아 드는 다양한 세대로 붐빈다. 아담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미로 같은 골목이 이어진다.
이산하(Lee San-ha 李山河) 시인
On the Road
2021 SPRING
고창, 위대한 씨앗이 움트는 고장
전라북도 고창 일대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가슴저린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고장이다. 빨간 동백꽃이 핀 이른 봄 날, 한국 농민운동의 큰 발자취가 남아 있는 땅으로 시인 이산하가 달려갔다.
수천 년 내려 온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코로나 19 한 방으로 휘청거린다.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는 적이 첨단미사일 못지 않게 무섭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이 전대미문의 상황을 견디어 나가고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죽어도 다가가 눈을 감겨줄 수 없다. 얼굴을 보며 꽃을 바칠 수도 없다. 코로나 19는 자유도 슬픔도 용납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동안 자유를 방종으로 기만하며 살아온 우리의 삶에 대한 강력한 경고일 것이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타인의 슬픔이나, 또는 나의 슬픔을 이용해 잇속을 챙긴 일이 없었나 돌이켜 볼 일이다. ‘메멘토 모리’– 이 무력한 순간에 가슴에 새기고 싶은 문구다.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도솔암 올라 가는 길 옆의 마애여래좌상은 한 국에서 가장 큰 마애불상 중 하나로 고려시대에 조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체 높이 15.7m, 무릎 넓이 8.5m로 암벽 표면 6m 높이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1890년대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이 불상 앞에서 거사가 성공하기를 빌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혁명의 씨앗 고창으로 떠나기 며칠 전부터 잠을 설쳤다. 13부작 미국 드라마
>에 푹 빠진 탓이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혼자 넷플릭스의 세계에 탐닉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서울 용산역에서 출발한 KTX 고속열차가 1시간 40분 만에 광주 송정역에 도착했다. 코로나 사태로 승객이 줄자 목적지 근처인 정읍역을 건너뛰었다. 마중 나온 후배 차에 실려 거꾸로 고창을 거쳐 고부를 향해 달렸다. 고창읍내로 들어가는 로터리 홍보전광판이 ‘한반도 첫 수도 고창 방문을 환영합니다. 사계절 아름다운 선운산, 동학농민혁명(1894 東學農民革命) 성지’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그렇다. 여기는 조선 후기 19세기 말 동학농민혁명의 깃발이 처음 펄럭였던 곳이다. 그리고 그 전사들의 피와 뼈가 묻힌 무덤이다. 전광판 옆에 ‘복분자, 장어 특산품 원산지’, ‘전봉준(1855~1895 鄭鳳俊) 장군 동상건립 모금운동에 적극참여 부탁드립니다’라는 현수막들도 보였다. 정부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세운 전봉준 동상이야 여러 개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역 민간인들의 자발적 참여로 만든다는 의미인 듯했다.
승용차가 넓은 들판을 지나 한 작은 기와집 앞에 멈췄다.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죽산마을 송두호(1829~1895 宋斗浩)의 집이다. 대문은 없고 오른쪽 콘크리트 기둥에 ‘동학농민혁명 모의장소’라는 커다란 글자가 보였다. 이 집이 바로 조선을 뒤흔든 농민혁명의 씨앗이 처음 뿌려진 곳이다. 위로 솟는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게 씨앗이다. 그 씨앗을 뿌리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서로 눈빛을 보며 결사항전을 약속했다. 그 결의의 결정체가 전봉준, 손화중(1861~1895 孫華仲), 김개남(1853~1895 金開男) 등 22명의 이름이 적힌 한 장짜리 ‘사발통문(沙鉢通文)’이다. 사발통문이란 주동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사발을 엎어놓고 그린 원을 중심으로 둥글게 서명해 지지자들에게 알리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둥글게 앉으면 지위고하를 판단하기 어렵다. 중세 유럽의 원탁회의와 유사하다.
이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이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랜 폭정에 항거하기 위한 풀뿌리 민중의 계획적인 사건이었음을 증명한다. 이 문서에 적힌 4개의 행동지침도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향하자는 일종의 전쟁 선포였다. 그런데 이 혁명군의 극비문서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53년 전 이 마을에 사는 송준섭(宋俊燮)씨의 집 마루 밑에 묻혀 있던 것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당시 혁명이 실패하자 정부 진압군이 여기는 ‘역적의 마을’이라 하여 마을 주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집은 불태워버렸다. 사발통문은 누군가 몰래 매장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이 집의 바로 앞집이 나를 안내하는 후배의 할아버지가 살던 집이었다. 후배가 계속 두 집을 번갈아 보았다. 눈빛이 젖어갔다. 가슴에 파문이 이는 듯했다. 내가 굳이 여기를 먼저 찾은 이유는 126년 전에 참수당한 한 혁명가의 숨결부터 찾아 묵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동학혁명모의탑’이 보였다. 사발통문 서명자들의 후손들이 건립한 것이다. 거기서 또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동학농민군위령탑’이 있다. 이름 없이 죽은 수십만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탑이다. 고부의 1차봉기(반정부투쟁)는 성공했으나 공주 우금치(牛禁峙)의 2차봉기(항일독립투쟁)는 참패를 당했다. 조선군과 일본군의 총에 농민군은 전멸했다. 죽창과 총은 애당초 싸움이 될 수 없었다.
위령탑 앞에 하얀 쌀밥 한 그릇이 놓여 있다. 밥을 위해 굶주린 농민들이 곡괭이와 낫을 높이 들었다. 마스크를 나누어 쓰듯 함께 나누어 먹어야하는 게 밥이다. 광활한 들판을 보니 서울로 진군하는 동학농민군과 로마로 진군하는 스파르타쿠스 전사들이 겹쳐졌다. 두 혁명은 참수되었다. “빈손을 쥐면 주먹이 돼”라고 외치며 싸웠던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들.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노예해방을 이루고 자유를 얻었는데도 자조적으로 내뱉는 절규가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돈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 그렇다. 밥 없는 자유는 죽음이다. 밥을 굶을 자유밖에 없는 약자들은 여전히 노예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현대판 노예는 발의 족쇄가 마음의 족쇄로 바뀌었을 뿐이다.
매년 3월 하순이면 국내 최대 동백꽃 군락지인 선운사 주변의 동백이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빨간 꽃잎과 짙푸른 잎사귀가 천년 고찰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 고창군청
선운사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는 위치에 개방된 양식의 만세루(萬歲樓)는 설법을 위한 강당의 용도로 건축됐다. 이 절의 기록에 따르면 1620년 대양루(大陽樓)로 지어졌다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52년 다시 지으며 만세루로 불리게 되었다. 천정 대들보와 서까래 및 기둥을 다듬지 않은 원목을 그대로 사용해 지은 것이 특색이다.
바다가 주는 선물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자 가슴이 막혔다. 터널 속에 갇힌 듯 답답했다. 고창의 고인돌 유적지로 가다가 무거운 돌이 내 가슴을 누를 것 같아 선운사(禪雲寺)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고요한 절에 가서 나를 가라앉히고 마음속의 먼지도 씻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니 절은 동백꽃을 보러온 사람들로 넘쳤다. 동백꽃은 도솔암(兜率庵) 바위 절벽의 마애불과 함께 선운사의 대표적인 두 상징이다. 선운사는 577년 백제의 검단(黔丹)스님과 신라의 의운(義雲)스님이 서로 뜻을 모아 창건했다. 당시 두 나라는 전쟁 중이어서 피난민들이 많았다. 비록 적국의 국민이었으나 두 스님은 난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힘을 모아 절을 지어 공동체생활을 했다. 굶주린 백성들의 생계를 해결하고 고아들을 거둬 공부시켰다. 그래서 이 절은 원래 난민구제소였다. 약 1300년 뒤 농민군이 도솔암 마애불 앞에서 거사성공을 기도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대웅전 뒤편의 울창한 붉은 동백숲 사이로 오가는 스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절에서 나와 바닷가로 달렸다. 부안의 변산반도 격포항(格浦港)이 마주 보이는 동호해수욕장과 구시포 해수욕장의 명사십리(明沙十里)였다. 1km 이상 직선으로 펼쳐진 고운 백사장을 따라 수백 년 된 소나무숲이 울창하다. 새싹 같은 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솔향에 귀를 씻었다. 솔숲의 바람소리는 찻물 끓는 소리와 닮았다. 백사장 너머 갯벌이 아득히 펼쳐져 있다. 우리나라 서해는 세계 어느 바다보다도 조수간만의 차가 크기로 유명하다. 매일처럼 바다가 육지가 되고 육지가 바다가 되는 일이 반복된다. 내가 서 있는 지금은 바다가 육지다. 드넓게 펼쳐진 갯벌을 보니 바다 한 잎을 떼어내 염전을 만든 사람이 떠올랐다. 임진왜란(1592~1598) 때 이순신(1545~1598 李舜臣) 장군은 전쟁군수품이 바닥나자 해변 한 자락을 떼어내 큰 가마솥을 만들고 바닷물을 부어 증발시켰다. 그렇게 대량 생산된 소금을 팔아 수천 톤의 군량미를 마련했다. 그는 탁월한 전투지휘관이자 영민한 경영자였다. 이곳 바닷물은 염도가 높아서 피부병과 신경통 환자들의 해수욕이나 모래찜질 장소로 유명하다. 주변에 대규모 염전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소나무숲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맨발로 긴 백사장을 걷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걸었다. 맨살이 차가운 모래에 닿을 때마다 새로운 감각기관이 생겨나는 듯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그렇게 백사장을 산책하는 사이 석양이 지기 시작했다. 저녁노을은 동백꽃이 떨어지기 직전처럼 관능적이었고 장엄했다. 저녁식사는 고창 땅을 밟은 이상 풍천장어 구이와 복분자 술을 먹어야 한다. 이 지역의 명물인‘풍천장어’는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곳에서 잡아 특히 건강식으로 이름이 높다. 번화가가 아닌‘아는 사람만 간다’는 들판의 외딴 곳에 있는 한 식당으로 갔다. 정원과 실내 모두 넓은 ‘형제수산 풍천장어’집이었다. 주인이 직접 구워주는 참숯불 생장어구이는 양념장이 남달랐다. 소스에 들어간 재료가 한약 약초, 곡물 효소, 약초술 등 무려 20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계절따라 달리 나오는 반찬의 식재료도 모두 유기농 재배이다. 직접 담근 복분자 술도 혀를 갖고 놀았다. 장어와 술이 어우러져 성장판이 다시 열릴 것 같은 맛이었다.
고창군 공음면(孔音面) 학원농장 일대 청보리밭은 매년 봄이면 50만여 명이 찾는 관광 명소다. 이 곳의 청보리밭 축제는 지역 최대의 행사인데, 지난해부터 코로나 19 상황으로 잠정 보류되었다.
청보리밭 일대의 위치를 표시해주는 작은 장승. 안내판을 겸한 이런 장승들이 30여만평 규모의 넓은 청보리밭 주변 곳곳에 서 있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어지듯 아름다움을 버려야 새 생명이 탄생한다. 새삼 봄비에 젖어가는 저 들판의 새싹들이 경이롭다. 이번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은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여행이었다.
고창군에는 약 1,600기의 선사시대 지석묘가 분포되어 한국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룬다. 고창 고인돌 유적은 화순, 강화 유적과 함께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주말이면 고창읍성 앞 놀이마당에서 고창농악 공연이 펼쳐졌다. 읍성 앞에는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가 신재효(1812~1884 申在孝)의 생가가 있어 이곳에서도 전통음악을 공연했는데, 코로나 19로 인해 지난해부터모든 공연과 행사가 취소된 상태다.
고인돌 군집 다음날 아침 일찍 읍내의 고인돌 전시장을 둘러보고 대산면으로 갔다. 천연의 역사가 살아있는 원형 그대로의 고인돌을 대면하고 싶었다. 마을 입구에서 대산 중턱으로 올라가는 오솔길마다 고인돌 천지였다. 커다란 산 하나가 야외 선사 박물관이었다. 고인돌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었고 위로 올라갈수록 숫자가 낮아졌다. 산꼭대기의 1호까지 보고 싶었지만 너무 지쳐서 포기했다. 전 세계 고인돌의 60퍼센트가 몰려 있는 한반도에서도 고창 유적은 1천 여 기에 달하는 가장 큰 군집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형식도 독특하고 다양해서 고인돌 축조과정의 변천사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창은 군 전체가 문화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3년에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생물자원의 다양성을 인정받아 군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오후에 지친 다리를 끌고 학원농장의 청보리밭으로 갔다. 아직은 철이 이르지만 매년 4월이 되면 인근의 유채꽃까지 활짝 피어 한 해 수십만이 찾아 오는 관광 명소이다. 파릇파릇 어린 싹이 돋아나는 밭뚝 사이로 걸어 나오며 이제 고창 여행을 마무리할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어지듯 아름다움을 버려야 새 생명이 탄생한다. 새삼 봄비에 젖어가는 저 들판의 새싹들이 경이롭다. 이번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은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여행이었다.
고전리 염전마을
운곡람사르습지
고창고인돌박물관
고창판소리박물관
On the Road
2020 WINTER
어느 길에 관한 명상
한국 불교가 선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조계산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한반도 서남단 전라남도 순천에 위치한 이 산의 동쪽과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송광사와 선암사는 각기 비구승과 대처승의 종단을 대표하는 총림이다. 두 절을 이어주는 산길에 신자들과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인터넷 검색 창에 ‘송광사’를 입력하면 ‘송광사에서 선암사 가는 길’이란 자동완성 검색어가 바로 아래 뜬다. 마찬가지로 ‘선암사’를 입력하면 ‘선암사에서 송광사 가는 길’이란 연관 검색어가 붙어 있다. 인터넷 사용자들의 입력 횟수를 토대로 자동으로 생성된다는 이 검색어 ‘서제스트’는 당신이 찾으려는 것은 지금 입력한 목적지에 있지 않고 그것을 향해 가는 길 위에 있다는 말을 간절하게 전하려는 듯하다. 계절은 또다시 가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내비게이션을 켠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위안 조계산 정상에서 남쪽을 보면 순천시가 자랑하는 순천만 습지가 펼쳐져 있다. 조계산을 다양한 수종의 활엽수림으로 뒤덮이게 만든 데에는 이 남해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고온다습한 바람의 영향이 크다. 이 울창한 산 중에 있는 두 절을 동서로 잇는 약 6.5㎞ 남짓 되는 이 산길이 우리의 수정된 목적지다. 큰 산을 두고 양쪽 산자락에 비슷한 규모의 절이 들어서는 사례는 많지만, 목조로 지어진 절이 역사의 풍파까지 견디며 모두 온전히 유지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지도에서 보면, 동쪽 사면에 있는 선암사가 조계산 정상에 더 가깝다는 것을 빼면 두 절이 산허리로 난 길을 동등하게 공유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이 길이 절실한 곳은 송광사 쪽이다. 행정이나 교통, 시장 같은 생활권을 동남쪽에 있는 순천 시내에 두고 있는 송광사 입구의 외송(外松)마을 사람들에게는 선암사 앞을 지나는 이 산길이 순천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송광사에서 조계산을 우회해 순천을 오가는 버스 편이 귀하던 시절의 얘기다. 지금은 순천역 앞에서 송광사까지 111번 시내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약초꾼이나 화전민, 아니면 갈 길이 급한 인근의 산골 마을 사람들이나 오가던 이 길이 한 해에 40만 명이 찾는 당일 산행 코스로 입소문이 난 것은 조계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게다가 선암사와 송광사는 산중에서 흔히 만나는 평범한 절이 아니다. 모두 천년을 오르내리는 오랜 역사를 가진 고찰일 뿐만 아니라 강원(講院)과 선원(禪院) 등을 모두 갖춘 몇 안 되는 이름난 총림(叢林)이다. 송광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삼보(三寶) 사찰 중 가장 많은 고승을 배출한 승보(僧寶) 사찰로 이름이 높고, 선암사는 한국의 불교 문화를 계승하고 지켜온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래서일까. 고승대덕은 아닐지라도 세속의 인연과 번민을 떨치고 새로운 깨달음을 찾아 이 길을 오갔을 수행자들의 자취를 따라 걷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등산객들의 마음은 까닭 없이 벅차오른다. 번번이 걸음을 더디게 하는 오르막길 앞에서 그림자도 벗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거친 숨을 몰아쉬는 병약한 여행자건, 길을 묻는 이에게 제법 알은체를 하며 심부름을 가듯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능숙한 산악회원들이건, 길모퉁이에서 잠시 길동무가 된 이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내려놓고 약속이나 한 듯 이 숲길이 주는 위안과 치유의 느낌과 흥분을 전한다. 그들에게는 길 위에 구르는 작은 돌 하나, 이름 모를 들꽃 하나도 허투루 여길 것이 없다. 그러나 언제나 위안은 잠정적이다.
평화 순천역을 기점으로 송광사를 들머리로 삼아 선암사 쪽으로 내려오면 돌아오는 길이 가깝고, 선암사를 들머리로 송광사 쪽으로 내려오면 가는 길이 가까운 대신 돌아오는 길이 멀다. 효율만으로 선뜻 나설 길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솔깃할 만한 감성의 정보를 보탠다. 그 전날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건 선암사 길을 택한다면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을 거스르며 곧게 뻗은 길과 그 양옆으로 힘차게 솟아오른 편백나무 숲이 뿜어내는 신선한 기운에 압도될 것이다. 그리고 곧 계곡물을 가로지른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인 승선교(昇仙橋)에 눈길이 머물면 당신은 이미 정토에 들어선 것이다. 만일 그때가 봄이라면 대웅전 뒤편 돌담장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각양각색의 매화꽃을 볼 것이다. 대개 수령이 400년이 훌쩍 넘은 토종 매화나무로 ‘선암사 고매화’라 불린다. 조금 때를 놓쳤다 해도 망설이지 말고 그대로 강행하라. 화사한 벚꽃이 대신 맞을 것이다. 일주문에서 우리 일행을 맞은 것은 천 리를 간다는 은목서 꽃의 은은한 향기였다. 방아 찧는 토끼와 함께 달에 산다는 전설에 나오는 그 계수나무가 바로 이 은목서다. 작고 하얀 꽃잎들이 마당에 가득했다. 선암사가 건네는 가을 인사다. 내가 보기에 높은 문과 연못, 그리고 그리 크지 않은 절집들이 이런저런 꽃나무들을 비켜 오밀조밀하게 들어서 마을을 이룬 절이 선암사다. 선암사 승선교에 견주는 것이 송광사의 삼청교(三淸橋)인데 좀 부족하다 싶었는지 그 다리 위에 우화각(羽化閣)이란 집을 지었다. 송광사 계곡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볼거리이자 쉼터이다. 깊은 산에서 보는 이 없이 외롭게 자라다 뿔뿔이 흩어져 계곡을 타고 내려온 색색의 낙엽들이 우화각 아래 켜켜이 잠겨 있다. 물빛이 차다. 송광사는 대웅전 앞의 너른 마당이 중심이다. 선암사에서 출발해 해가 질 무렵 송광사에 이르렀다면 가능한 높은 곳에 올라 송광사를 굽어보라. 산자락 사이로 아스라한 잔광이 어둑한 절집 기와지붕 위를 비출 때의 그 고즈넉한 적막감은 오래 두고 마음에 남을 것이다. 송광사의 이 절제된 절집 구성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뒤에 복원된 풍경이다. 어느 절을 들머리로 삼든 되도록 오래 머물기를 바란다. 평화란 늘 잠정적이다.
선암사와 송광사는 산중에서 흔히 만나는 평범한 절이 아니다. 모두 천년을 오르내리는 오랜 역사를 가진 고찰일 뿐만 아니라 강원(講院)과 선원(禪院) 등을 모두 갖춘 몇 안 되는 이름난 총림(叢林)이다.
굴목재 보리밥집 선암사에서 출발해 편백나무 숲을 지나고 호랑이가 턱을 괴고 지나는 이들의 의중을 지켜보았다는 바위를 지나 처음 만나는 고개가 굴목재다. 조계산의 정상을 북쪽에 두고 걷는 이 구간은 제법 가파르지만 이 고갯길만 넘으면 곧 완만해진다. 반대로 송광사 쪽에서 걸으면 줄곧 계곡을 따라 올라오다 튼튼한 나무다리를 돌다리처럼 두드려보며 건너고, 길을 가로막으려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스님의 도력으로 멈춰 세웠다는 전설의 바위를 지나면 굴목재란 표지석이 나온다. 선암사 쪽에서 오른 고개는 ‘큰 굴목재’, 송광사 쪽에서 오른 고개를 ‘작은 굴목재’라 부르는데 이 고개가 호남정맥의 조계산 분수령이다. 동쪽 사면으로 흐르는 물은 순천만을 향해 가고, 서쪽 사면으로 흐르는 물은 벌교 앞바다로 이어진다. 이 고개를 지나 내리막길로 접어들면 난데없는 보리밥집이 나온다. 유럽의 까만 호밀 빵과 한국의 보리밥은 사회적 등급이 같다. 하얀 밀빵과 쌀밥이 소수의 좀 살 만한 사람들의 양식이었다면 호밀 빵과 보리밥은 오랜 세월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굶주림을 피하기 위한 양식이었다. 물론 지금은 옛 추억을 떠올리며 별미로 먹거나, 건강식으로 찾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말이다. 한때 계곡 아래 장안마을의 화전민이 살았던 터를 보수해 대피소 기능을 겸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조계산 등산 코스에 딸린 일종의 패키지라고 여길 정도로 이 밥집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마솥으로 지은 보리밥에 주위에서 나는 산나물과 텃밭에서 가꾼 푸성귀로 만든 반찬과 시래기 된장국으로 차려낸 소박한 밥상이지만 해발 600m의 고갯길을 두어 시간 걸어온 이들에게는 비길 바 없는 성찬이 된다. 더러 장안마을 쪽에서 올라와 보리밥을 먹고 다시 삼삼오오 산길을 걸어 내려가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장안마을 꼭대기까지 골목길을 따라 굽이굽이 차를 몰고 올라와 20분 정도 산길을 걸어 오르는 길이 굴목재의 보리밥을 맛볼 수 있는 최단거리다. 뭐라고 딱히 표현할 수 없는 맛이지만 누구든 순식간에 한 그릇을 뚝딱 비우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집’이란 칭찬을 듣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보리밥의 포만감은 썩 유쾌하지 않다. 평소보다 많이 먹거나 쉬 꺼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럭저럭 굶주림이라는 자연적 본성에서 겨우 벗어나는 이 행위에 자꾸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기 때문이다.
역사 모든 길은 잠정적이다. 위안과 평화, 포만감 같은 거라고 여겨도 좋다. 지나는 이들의 의중을 지켜보며 앉아 있었다는 호랑이 바위나 길을 가로막으려는 바위를 스님의 도력으로 멈춰 세웠다는 전설은 단순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도 없이 끊어졌다 이어졌을 이 굴목재를 넘어가는 길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빨치산'이라는 용어는 주로 남한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조직되고 활동한 사회주의 무장 유격대를 의미하는데, 조계산은 그들의 근거지 중 하나인 지리산과 이어진 중요한 통로이자 활동 거점이었다. 송광사 쪽에서 멀지 않은 홍골이라는 계곡은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들의 은신처로 마지막까지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벌어진 곳이다. 이 과정에서 송광사에 머물던 노인들이 다수 살해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 시절을 살았던 인물들이 각자의 신념과 생존을 위해 숨 가쁘게 쫓고 쫓기던 길이 바로 우리가 소개한 길의 일부일 것이다. 이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갈등을 일으킨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무슨 이유에선지 대처승은 일본 제국의 잔재이므로 모두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불교에서 기혼 승려인 대처승을 허용하는 전통은 없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억불 정책 속에서 어려워진 사찰의 살림을 관장하는 사람을 승려로 대접하는 풍습은 있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에 메이지 유신 이후 기독교 목사의 예에 따라 대처승을 허용한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해방 무렵에는 기혼 승려가 비구승보다 훨씬 더 많았다. 이미 승려이자 시인인 한용운(1879~1944)은 『조선불교유신론』(1913)에서 “육체를 타고나서 식욕이나 색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헛소리일 뿐”이라며 결혼에 대해 승려들 각자가 자신의 욕망을 점검해 자유롭게 결정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불교계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했어야 할 일에 국가 권력이 나서 간섭한 것은 한국전쟁으로 사찰들이 입은 물적 피해보다 더 큰 불행이었다. 결국 이 분규는 1969년 대법원이 모든 종권(宗權)은 비구승에게 있다고 판결하면서 끝이 났고, 이에 반발한 승려들은 한국불교 태고종을 창종했다. 선암사가 바로 그 태고종의 태고총림이고, 송광사는 비구승으로 이뤄진 조계종의 총림이다. 이로써 두 절의 스님들이 스승과 도반을 찾아 서로 오가며 가르침을 받고 교류하던 시절은 끝이 났다. 절을 둘러싼 재산권 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인연 송광사 새벽 예불은 경건하고 장엄하다. 이 소리의 장엄함과 음악성을 명상 음악으로 발전시킨 이는 국악인 김영동(金永東 1951~)이다. 그는 송광사의 사물 소리(법고, 목어, 운판, 범종)와 예불문, 발원문, 반야심경에 대금과 소금을 얹고 신디사이저를 적절하게 혼합하여
(1988)이라는 한 편의 일상 음악을 완성했다. 그레고리안 성가 같은 교회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 음반의 마지막 트랙에 실린 ‘반야심경’을 들어보길 권한다. 뉴에이지 계열의 음악에 영향 받은 보통의 명상 음악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감동을 느낄 것이다. 2010년에 황병준이라는 전문 레코딩 엔지니어에 의해 녹음된 음반도 있는데 예불 속의 물소리나 바람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완전히 배제하고 오랜 목조건물 안의 울림을 살렸다는 점에서 김영동의 작품과 다르다. 숨어 있는 자연의 소리를 찾아들으며 우리를 새로운 공간에 머물게 하는 것이 김영동 음악의 매력이라면 황병준의 음악은 흔적 없이 사라지는 시간 속에 철저히 우리를 가둔다.
김영동은 자신이 이 음반을 만들게 된 계기를 송광사의 한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에 계신 법정(1932~2010) 스님을 만나러 간 인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법정은 ‘무소유’라는 사상과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 종교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無所有’라는 한자어에서 본질적 의미소(sème)는 ‘있을 有’다. ‘有’자란 ‘손으로 고기를 움켜쥐고 있는’ 모양의 갑골문이 진화한 글자다. 올해는 법정 스님이 돌아가신 지 10주기다. 여전히 불일암 앞에 얌전히 놓인 참나무 장작으로 손수 만들었다는 의자에는 마른 목련 이파리가 대신 앉아 쉬고 있다. 아마 그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잎아, 매달려 있느라 수고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