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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영주, 세상의 끝과 시작

On the Road 2022 SPRING 2088

영주, 세상의 끝과 시작 두 개의 큰 강의 발원지이자, 두 국가의 시작과 끝을 기억하는 땅 영주에는 헤어지는 시간을 늦추는 굽고 낮은 다리와 신비한 전설을 간직한 뜬 바위가 있다. 천혜의 자연 속에 숨겨진 깊은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보물 같은 공간이 말을 걸어온다. 경상북도 영주 무섬마을은 태백산에서 흘러내려온 두 개의 맑은 시내가 합쳐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다. 1979년 현대식 다리가 놓이기 전 이 긴 외나무다리가 물길이 동네를 휘감아 돌아 섬이 되어버린 마을과 외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어쩌면 옛날 영주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사는 곳이 세상의 끝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주시는 한반도의 동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경상북도의 가장 위쪽에 있다. 강원도와 맞닿아 있는 북동쪽으로는 태백산이, 서쪽 경계선을 길게 공유하고 있는 충청북도 쪽으로는 소백산이 우뚝 솟아 있다. 영주 사람들은 북쪽을 가로막은 저 높은 산들의 건너편이 궁금했을 것이다. 저 남쪽 바닷가에서부터 세계의 넓이가 궁금한 타지 사람들도 끊임없이 모여들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서로의 상상과 경험을 나누었으리라. 남쪽에서부터 영주로 모여든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을 물길을 생각해봤다. 남한에서 가장 긴 낙동강이다. 나는 영주에 반드시 그 발원지가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정보를 찾아봤다. 짐작대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54)에 “낙동강의 근원은 태백산 황지, 문경 초점, 순흥 소백산이며, 그 물이 합하여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 기사에서 ‘순흥’이 바로 영주 일대의 옛 이름이다. 그뿐 아니라 놀라운 정보를 하나 더 얻었다. 영주에는 낙동강뿐 아니라 한강의 여러 작은 발원지들 가운데 하나도 있었다.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이라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뜻밖의 정보였다. 한반도 남쪽의 중요한 두 강이 모두 이 곳에서 흘러나왔으니 영주는 세상의 시작이기도 한 셈이었다.오후 늦게 서울을 벗어나 두 시간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저 멀리 죽령터널 입구가 보였다. 죽령터널은 소백산 아래를 뚫어 충북과 경북을 이은 4,600미터짜리 긴 관문이다. 터널 저쪽이 바로 영주라는 걸 알고 있어 다른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게 실감났다. 17세기 중엽 비옥한 토지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조성된 무섬마을에는 현재 40여 호의 고가옥이 남아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로 반남 박씨와 예안 김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외나무다리가 굽은 이유 나는 영주 남쪽의 무섬마을로 향했다. 강물이 크게 굽어지는 안쪽, 마치 강줄기를 밀어내며 혹처럼 툭 불거진 육지에 오래된 마을이 있었다. 이런 지형에 형성된 마을을 물돌이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앞과 양옆은 물길이 감싼 채 휘돌고 뒤로는 산이 막고 있어 그야말로 섬이나 다름없다. 완벽히 고립된 곳에 마을이 형성된 이유는 이런 지형이 거주민들에게 좋은 기운을 준다는 풍수학적 믿음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자급하며 살 수 있을 만큼 넓고 기름진 땅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이 마을을 세상에 널리 알린 건 강을 가로질러 놓인 외나무다리다. 강은 여름 장마철만 아니면 두 발로 건너다닐 수 있을 만큼 얕은데, 그렇다고 옷을 적실 수는 없으니 간단하게나마 다리를 놓은 것이다. 모래톱과 얕은 물에서 고작 1미터나 떠 있을까? 외나무다리의 폭은 남자 어른 손으로 두 뼘이 될까 말까 했다. 희한하게도 다리는 강을 직선으로 가로지르지 않고 커다란 S자 형태로 늘어져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알 길이 없었으나 보기에는 무척 아름다웠다. 사진에 담아두고 오래 추억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 남녀노소에게 인기이고, 드라마나 방송에도 소개되어 끊임없이 관광객을 불러들인다고 했다. 나는 사람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호젓하게 즐길 생각으로 일찍 도착했다. 나처럼 서둘러 움직이는 사람이 없진 않았다. 외나무다리 위에 앞뒤로 서서 느릿느릿 건너는 한 커플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카메라 앵글에서 빠져나가길 기다리며 다리를 굽이지게 설치한 이유에 대해 내내 생각했다. 장마 때문에 물살이 거세지면 쉽게 무너진다고 했다. 지금이야 북쪽으로 멀지 않은 위치에 차량이 다닐 수 있을 만큼 큰 다리가 놓여 있으나 그것이 없던 시절에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한번 물살에 휩쓸려버리면 다시 설치하기가 무척 번거로울 게 뻔하고 불어난 강의 물살을 이겨내도록 단단하게 놓을 기술도 없었을 것이다. 필요에 따라 자주 다시 놓지 않으려면 재료도 아낄 겸 직선으로 놓는 게 아무래도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고택과 정자로 가득한 무섬마을의 가옥 중 16동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으로 잘 보존돼있다. 아직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 옛 선비 고을의 고요한 정취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혹시나 그저 미관상의 이유 때문이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리를 건너봤다. 한 가닥 외나무다리에는 곳곳에 다리의 폭만큼 짤막하게 옆으로 덧대 놓아 두 가닥이 되는 곳이 있었다. ‘비껴다리’라고 불리는 구조물이었다. 어쩌다 사람과 마주치게 되면 잠시 비켜서서 양보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놓은 것이었다. 사려 깊고 합리적인 사고에 감탄하는 한편으로는 바로 그 점 때문에 S자로 길게 구부려 놓은 비효율적 형상이 더욱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마을로 들어서자 잘 보존된 전통 가옥들이 한눈에 가득 담겼다. 19세기 말까지도 120여 가구에 500여 명이 살았을 만큼 큰 마을이었다. 마을을 대표하는 몇몇 기와집들의 크기와 모양만 봐도 그저 잠시 사람들이 거주했던 섬이 아니라 하나의 이상적인 소도시쯤으로 봐야 할 것 같았다. 이곳에서 수많은 학자와 선비가 배출되었고 독립유공자만도 다섯 명이라니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의 안목과 뜻이 새삼 가슴 깊이 다가왔다. 돌담과 흙길을 따라 걷다가 무섬마을 자료 전시관에 들어섰다. 마당에 한 시인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조지훈(Cho Chi-hun 趙芝薰 1920~1968). 학창시절 교과서를 펼치고 그의 시 「승무(僧舞 The Nun's Dance)」를 소리 내어 읊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섬은 그의 처가였고 그가 이곳에서 남긴 시 「별리(別離)」가 커다란 바위에 아내이자 서예가인 김난희(金蘭姬 1922~)의 필치로 깊게 새겨져 기념되고 있었다. 남편이 집을 나서 어디론가 떠나는 상황을 새색시의 눈으로 그린 시였다. 아내는 남편의 뒷모습을 마루의 큰 기둥 뒤에서 몰래 지켜보며 눈물로 옷고름을 적신다. 아마 이 여인의 남편도 외나무다리로 강을 건넜으리라.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문득 외나무다리의 S자 모양이 이해되는 듯했다. 가족을 남겨두고 마을을 나서던 무수한 사람들은 쉽게 발길을 뗄 수 없었다. 돌아올 기약 없이 떠나 가야만 하는 마음이 무거워 차마 강을 훌쩍 건너버리지 못했고, 한 번쯤은 돌아보고 싶어도 남아서 그 모습을 볼 이의 가슴이 더 미어질 것을 염려해 눈물을 삼키며 걸었다. 보내는 이도 기둥 뒤에 몸을 숨겨 떠나는 이의 마음에 짐이 되지 않으려 애썼다. 그나마 길게 굽이져 놓인 다리가 강을 건너는 시간을 늦춰주니 서로 위안으로 삼았다. 나는 시 속의 남편이 한 걸음 한 걸음 아껴 디디며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머리 위로 흰 구름이 무심히 피었다 지고, 아득히 멀리서 떠내려온 작은 잎사귀는 발 아래 잠시 머물지도 않고 스쳐 흘러가버린다. 열린 왕조와 닫힌 왕조 시내로 돌아와 영주의 중심가를 돌아봤다. 도심 인근에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고향집이 있었다. 정도전은 조선왕조 창업의 기틀을 설계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한 국가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 큰 강들의 발원지를 품은 영주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의 고향집은 세 명의 판서를 배출했다 해서 ‘삼판서 고택’이라고 불렸다. 비록 원래 있던 자리에서 수해를 당해 무너진 것을 옮겨다 복원해놓았다 해도 한 국가의 통치 이념을 성립하고 대를 이어 고위 관리를 배출해 낸 가문의 위세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천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바위벽의 마애여래삼존불상은 통일신라시대 조각 양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불상으로 평가된다. 발견 당시 불상 세 구의 양 눈이 모두 정으로 쪼아 파져 있었지만, 큼직한 코나 꾹 다문 입, 둥글고 살찐 얼굴에 힘찬 기상이 배어 있다. 시내 중심가로 들어가 영주 근대문화거리를 둘러보다가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 숭은전에 이르렀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그가 고려에 항복하러 개성으로 가던 길에 이곳에 머물렀던 인연이 이어진 것이라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방금 하나의 왕조를 열었던 혁명적 사상가를 만나고 온 길이었고 이제는 천 년을 이어 오다 멸망한 자신의 나라를 새로운 왕조에 바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임금을 만나는 중이었다. 국운이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백성들의 목숨을 지키고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었다고 한다. 영주는 경순왕의 그런 애민정신을 기리며 그를 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숭은전 앞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용이 이 자리에 떨구었을 눈물을 생각하는 중에 겨울 해는 또 빠르게 기울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인데도 부석사에 오르는 사람들이 더러 보였다. 부석사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통도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긴 오르막길과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들을 감상하던 중에 이마에 땀이 맺히고 숨이 차올랐다. 그러나 나를 비롯해 앞뒤에서 걷고 있는 관광객들은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공중에 떠다니며 도적떼를 물리치고 내려앉았다는 바위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잠시의 불편쯤이야 전설이 깃든 신비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기꺼이 치를 수 있는 대가인 셈이었다. 그 전설적 바위 곁에 부석사가 지어지던 676년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할 만큼 강성하던 때다. 불교가 국교로 그만큼 큰 지원을 받던 시기였기에 부석사의 규모나 위상은 특별했다. 그런 나라가 약 250년 뒤에는 남의 손에 넘어갔다. 복잡한 생각에 잠겨 드디어 108개의 계단을 모두 지나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무량수전 앞에 섰을 때, 내 머릿속에서 왕조의 흥망성쇠 따위는 어느새 하얗게 지워지고 없었다. 무량수전을 마주하고 왼쪽에 바로 그 뜬 돌, ‘부석’이 있었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인문지리서 『택리지』(擇里志 1751)에는 바위 아래로 밧줄을 밀어넣고 훑어도 걸리는 데가 없다고 적혀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부석사 뒤편의 화강암 일부가 판상절리에 의해 떨어져 나와 경사면을 따라 미끄러지다가 잔돌들 위에 얹혀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 눈에는 어른 스무 명쯤 둘러앉을 수 있을 크기의 테이블 같았다. 속세의 잣대로 절의 창건설화를 재고 있자니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 부석과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경계심 없이 느리고 게으른 걸음걸이에서 일종의 핀잔이 읽혔다. 고양이가 나타났던 방향의 반대편으로 사라지고서야 나는 무심결에 도서관 책벌레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하던데 내게 깨우침을 준 고양이에게서 혹시 부처를 만난 건 아닐까. 부석사 범종루에 오르면 앞으로 펼쳐진 절의 전경과 그 너머 소백산맥이 구비구비 절경을 이룬다. 부석사는 676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창건된 이래 이제까지 법등이 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온 한국의 대표적 불교 사찰이다. 2018년 다른 여섯 개 사찰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범종루는 안양루와 함께 부석사에 있는 2개의 오래 된 누각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범종루는 사찰 마당 가장자리에 자리하지만, 이곳의 범종루는 경내 중심축에 당당히 위치하고 있다. 사물이 배치되어 하루 두 번 이들을 두드리며 중생의 평안을 비는 예식의 장소이기도 하다. 순환을 포용하는 공간 오후에는 강원도 방향으로 난 고개, 마구령을 넘어 남대리의 산간마을을 다녀왔고 다시 부석사 아래로 돌아와 소수서원을 둘러봤다. 남대리는 조선의 6대 왕 단종(端宗 재위 1452~1455)이 삼촌인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손에 폐위되어 유배길에 올랐을 때 머물렀던 곳이며, 바로 거기에 한강의 영남 발원지가 있다. 소수서원은 학자를 양성하던 조선시대 최고의 지방 사립 교육기관인데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아홉 곳 중 하나다. 최초로 임금이 그 이름을 내려준 서원이며 한반도에 처음 성리학을 전파한 안향(安珦 1243~1306)을 비롯해 많은 유학의 거목들을 모시고 있다. 소수서원 주위의 둘레길은 자연과 어우러진 오래 된 서원의 경관을 풍취를 즐기기에 좋은 산책코스다. 수령이 300년에서 많게는 1000년에 이르는 소나무를 포함해 적송 수백 그루가 자라고 있다. 1542년 설립된 소수서원은 한국 최초의 서원으로 2019년 다른 여덟 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용한 산사 성혈사에는 아름다운 건물 나한전이 있다. 단청을 입히지 않아 단아하면서도 더욱 그윽한 품위를 느끼게 하는 나한전의 세 칸 연꽃과 연잎, 두루미, 개구리, 물고기 등 상징적 문양이 정교한 솜씨로 새겨져 있다. 영주의 곳곳을 다녀 볼수록 그 독특한 면모가 감탄스러웠다. 한 국가의 설계자가 난 곳이면서 사라진 왕조의 마지막 임금을 기리고 있는가 하면, 서원을 통해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를 배출한 곳인데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어린 왕의 여린 발자국이 남은 곳이기도 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순환을 반복해서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영주가 자랑하는 인물인 송상도(宋相燾 1871~1946) 선생을 통해 발원과 회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호를 붙여 엮은 저서 『기려수필』(騎驢隨筆 1955)에는 식민지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한국인들의 이모저모가 아주 자세히 기록돼 있다. 선생은 봄에 영주를 떠났다가 겨울이면 한껏 초췌해진 몰골로 돌아왔다고 한다. 식민지 주민으로 점령국에 맞서는 일에 대해 캐고 다니는 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는 이곳저곳에서 들은 얘기들을 깨알 같은 글씨로 종이에 기록하고 그 종이를 새끼처럼 꼬아 봇짐의 멜빵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검문을 당하더라도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1910년 이후 수십 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애국지사들의 유가족을 만났고 사건 당시의 신문기사와 같은 객관적 자료를 조금씩 수집했다. 송상도 선생의 사례에 이르러 나는 뜻을 품고 바깥 세계로 나갈 때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를 되새기게 되었다. 무섬마을에 가족을 남겨두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던 사람들의 단단한 각오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포용과 포섭이었다. 세상 모든 것의 발원지인 동시에 그 어떤 것도 회귀할 수 있는 피안의 공간이고자 하는 것이 영주에 깃들어 있는 정신이었다. 마지막 날 아침, 나는 서울로 돌아올 채비를 할 때까지도 평생을 바쳐 나라를 다시 일으킬 불씨를 모으던 어느 선비의 행로를 생각했다.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의 여정을 그대로 따르지는 못할지언정 고속도로를 타고 휑하니 돌아가는 건 어딘가 송구했다. 나는 옛 죽령 고갯길로 방향을 잡았다. 가파르고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 도로를 운전하는 동안 이 험한 고개를 두 발로 넘어 영주를 떠나던 선비의 단단하고도 거대한 기개(氣槪)를 느껴보고 싶었다. 고갯마루에 올랐을 때, 나는 지금 서울로 돌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영주에서 나서는 것인가 자문했다. 영주에서의 경험을 자랑할 것 같고 여러 번 다시 올 것이므로 출발로 여기기로 했다.

섞인 시간의 단맛

On the Road 2021 WINTER 1644

섞인 시간의 단맛 전라북도 군산은 주변에 드넓은 평야가 펼쳐 있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곡식을 실어 나르던 곳이다. 부흥과 약탈의 허브가 됐던 이 항구 도시에는 역사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수많은 사연들이 지금도 유효한 듯한 군산의 생경한 이미지는 쉽게 변하고 달라지는 현대 도시의 속도감에 뭉근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1900년대 개항초기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문물이 군산항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됐다. 때문에 군산에는 지금도 생동감 넘치는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도시지만, 요즘은 인기 높은 관광 명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든다. 우리는 뭔가 섞여 있는 걸 보면 흔히‘짬뽕 같다’라고 표현한다. 채소와 해산물, 육류 등을 잘 섞으며 볶다 육수와 함께 끓여낸 빨간 짬뽕 한 그릇에는 중국, 일본, 한국이 어우러져 있다. 짬뽕으로 유명한 군산에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도 짬뽕처럼 잘 어울려 섞여 있다. 군산으로 떠나는 길에 뜨끈한 짬뽕이 생각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고속열차를 타고 익산역에 내려 다시 군산행 완행열차로 갈아탔을 때 나는 묘한 냄새를 맡았다. 외관 도장이 벗겨질 만큼 오래된 기차였는데 마치 시간이 섞인 냄새라고 해야 할까. 삐걱거리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객차 내부에선 상상했던 타임머신을 실제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1909년 일본인 승려가 창건한 동국사는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불교 사찰이다. 당시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가져다 지었는데, 현재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건물마다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외관이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1908년부터 1993년까지 85년간 군산세관 본관으로 사용됐던 이 건물은 지금은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국내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국가 지정 ‘근대문화유산’이다. 시간여행 그래선지 군산에서는 경암동 철길마을에 가장 먼저 들르고 싶었다. 이젠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기찻길 주변으로 시간이 박제된 곳이다. 마을 한복판을 오가던 기차는 군산역에서 어느 제지공장까지 나무와 종이를 천천히 싣고 다녔다. 오래 전 운행이 멈추며 마을 곳곳엔 당시의 시간도 멈춰 있었다. 60~70년대식 학교 교복이며 과거의 군것질거리와 잡화들까지 여전히 남아있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져 한적한 분위기지만, 나는 과거 속으로 이토록 쉽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 신기해 철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휘발되는 시간의 냄새가 코끝을 찡하게 했다. 그것은 녹슨 철길에 남은 목재나 종이 냄새와 비슷했다. 철길마을에서 빠져나온 나는 본격적인 군산 탐닉에 앞서 짬뽕부터 먹으러 나섰다. 군산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짬뽕집이 여럿 있다. 내가 찾아간 짬뽕 가게는 ‘빈해원’이었다. 건물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칠십 년 전통을 가진 이곳의 ‘청탕면’은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사람에게도 부담 없는 짬뽕이다. 한입 맛을 보자 신선한 해물이 진득하게 우러난 국물 안에서 일종의 위로가 느껴졌다. 시간이 농축된 맛이란 이런 것이구나. 장소가 주는 예스러움이 분위기를 더하고 음식은 깊은 위로가 된다. 군산에서 느낀 켜켜이 쌓인 첫 시간의 냄새가 종이었다면, 두 번째는 짬뽕이다. 군산은 오래 전부터 전국에서 곡식이 가장 많이 생산되며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였다. 배가 든든해진 나는 근대 건축물들을 한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근대화 거리를 찾아가 그 에너지의 과거 버전을 체험해보기로 했다. 근대 건축관과 근대 미술관, 근대 역사박물관을 하나씩 둘러보며 나는 그 생기가 아직도 여전한 게 신기했고 역사와 세월이 남긴 것에는 고유한 작품성까지 깃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시간에 닳고 퇴색된 것들이 아직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근대 풍경을 현재가 공유하는 광경은 여러 개의 차원과 시간이 섞인 시공간의 모형과 같았다. 시간을 견딘 이 거리의 빈티지한 변화에선 일말의 건축미까지 읽을 수 있었다. 기능만을 중시하지 않고 미를 추구했던 흔적을 아스라이 엿보았다. 가장 아담한 건축미를 보이는 건 옛 군산세관 건물이었다. 군산에는 바다와 연결되는 금강이 흐르는데, 주변에는 배로 실어나를 곡식을 모아두던 ‘조창’이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조창은 식민지 시대에 들어서 그야말로 세곡 납부용 물류센터로 이용됐다. 당시 일제의 곡물 선적 전용 창구였을 이 건물 앞에 서자 마음이 복잡했다. 독일인이 설계하고 일본인이 건축했으며 벨기에산 붉은 벽돌을 썼고 창은 로마네스크식, 현관은 영국식인데 지붕은 일본식으로 덮었다. 과연 군산의 대표적인 짬뽕 스타일 건축물이다. 군산지역에서 포목점을 경영해 큰돈을 벌어들인 뒤 부의회 의원을 지낸 일본인 히로쓰 게이사부로가 살았던 집이다. 1920년대에 지은 전형적 일본식 무가의 가옥으로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커다란 정원과 웅장한 외관이 당시 부유한 일본 상류층의 생활상을 짐작하게 한다. 이질적 조화로움 근대화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국사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절인데 현재는 한국 사찰로 사용된다. 한눈에 봐도 무척 일본풍인 이 조그만 절은 느낌이 낯설었다. 일본식 미니멀리즘이 반영된 듯 액세서리 없이 댄디한 대웅전의 옷차림에, 월명산 자락의 백 년 된 대나무숲 헤어스타일이 잘 어울려 패션 감각이 있어 보였다. 동시에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루며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절의 뜰에는 일제가 한국인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갔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한 ‘소녀상’이 서 있었다. 당시 일본인 지주들은 쌀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 군산의 소작농들을 착취했었다. 핍박당한 소작농들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항거하며 거세게 봉기했었다. 그러나 거친 역사를 통과해 온 종교시설의 호젓한 경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과거의 원한마저 부질없이 휘발되고 해탈에 이른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이 절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들이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조화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 이상 기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경암동 철길마을 주변에는 옛 추억에 잠길 수 있는 재미있는 먹거리와 놀거리가 많다. 요즘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에 나온 달고나의 인기가 군산에서도 폭발적이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마주했다. 부유한 일본인이 살던 가정집일 뿐이지만, 시간의 풍파를 견딘 매력적인 장소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정원과 넓은 창을 가진 안채들이 아름다움을 좇는 인간의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었다. 근처 월명동 골목의 오래된 벽들, 좁은 골목들, 녹슨 철제 대문들이 주는 느낌도 아스라했다. 역사의 격동기를 지나온 채 아직도 존재하는 흔적들을 보며 오랫동안 그대로 남는 것의 의미를 생각했다. 우주가 빛의 속도보다 빨리 팽창하며 변해가고 있는데 변하지 않는 것들의 묵묵함을 보는 건 참 안심되는 일이다. 시간여행의 현란함에 취한 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으로 향했다. 이 곳은 서구의 빵 맛을 먼저 본 일본인을 상대로 영업하던 빵집이었는데, 일제의 패망 이후 한국인이 명맥을 이어받아 현재의 빵집으로 운영 중이다. 이 가게에서 유명한 단팥빵과 야채빵을 직접 먹어보니 과거의 맛과 현재의 맛이 혓바닥 위에서 짬뽕되었다. 흔한 빵마저 시간여행의 매개물이 되는 곳이 군산이다. 빵을 즐기지 않는 나도 그 자리에서 몇 개나 먹어버렸다. 군산 구석구석에는 여러 층위의 시간이 섞여 있었다. 망해버린 나라와, 일제 식민지였던 시절과 독립 후의 근대, 그리고 산업화로 바빴던 현대. 그 시간의 흔적들이 오래된 옛 도시에 고스란히 섞여 있는 모습이 독특한 감명을 주고 있었다. 문학의 기록 “나라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거야? 나라가 내게 뭘 해준 게 있다고, 일본인이 내놓고 가는 내 땅을 쟤들이 왜 팔아먹으려고 해? 이게 나라냐?” “기다리면 나라에서 억울하지 않게 처리하겠죠.” “됐고, 난 오늘부터 도로 나라 없는 백성이야. 제길. 나라가 백성한테 고마운 짓을 해 줘야 백성도 믿고 마음을 붙이며 살지, 독립됐다면서 고작 백성의 땅 뺏어 팔아먹는 게 나라냐?” 채만식(蔡萬植 1902 ~ 1950)의 소설 (1946)의 마지막 장면을 현대어로 바꾼 것이다. 채만식 문학관 앞에서 작가의 많은 작품 중 이 구절이 문득 떠오른 것은 도착부터 나를 따라다닌 군산이 가진 특별한 역사성 때문이었다. 채만식 문학관에는 30여년 동안 소설, 희곡, 평론, 수필 등 그가 집필한 200여편의 많은 작품을 모아둬 작가의 작품세계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군산 출신인 채만식 작가는 해방 전후 세태를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스킬을 가졌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는 한반도가 조선 땅이었던 시절, 행정기관에서 주인공 집안에 동학운동(東學運動 1894)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씌워 ‘처벌 받을래? 아니면 논을 내놓을래?’ 했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선대의 피땀 흘린 노력으로 조금씩 사서 모은 자기 논을 절반 이상 빼앗긴 주인공은 상심이 컸다.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했을 때 소작농 생활로 어렵게 살다 지쳐 일본인에게 남은 땅을 팔게 된다. 어차피 일제가 망하면 다시 자기 땅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일제의 재산을 환수한 독립 정부가 땅을 다시 빼앗아 가 팔아치우면서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생애 내내 자기 것을 빼앗기기만 했던 운명으로 살아간 소설 속 주인공에게 독립의 기쁨은 없었다. 나라다운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이 인물을 통해 한 국가가 멸망할 무렵 과도기적 혼돈과 그 속에서 사는 사람이 느꼈을 억울함과 회의감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채만식 작가가 남긴 작품들이 군산의 또 다른 문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는 점도 이처럼 뛰어난 작품성 때문이다. 또한 채만식 작가는 일제의 힘에 동조했던 문학가 중에서 제대로 ‘반성’을 한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해방 후에 소설 (民族-罪人 1948~1949)을 발표하며 반성의 의지를 작품으로 극명히 보여줬다. 그런 일단락 때문에 그의 문학 작품은 군산의 근대유산들과 함께 버려지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일 수도 있다. 군산 구석구석에는 여러 층위의 시간이 섞여 있었다. 망해버린 나라와, 일제 식민지였던 시절과 독립 후의 근대, 그리고 산업화로 바빴던 현대. 그 시간의 흔적들이 오래된 옛 도시에 고스란히 섞여 있는 모습이 독특한 감명을 주고 있었다. 군산역으로 돌아가기 전 무려 칠십 년 동안 호떡을 팔고 있다는 중동호떡에 들렀다. 청나라에서 넘어온 호떡은 얇은 밀반죽 빵 속에 시럽을 넣어 구은 음식이다. 보통은 기름에 굽지만 여긴 화덕에 구운 것을 팔았다. 나는 호떡의 느끼하지 않은 단맛에 기분 좋게 취하며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철길이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역사 속에 남겨진 깔끔한 단맛. 그 맛이 꼭 군산 같았다. 과거와 현재가 철길을 따라 이어지는 광경은 쉽사리 현실감을 아련하게 흐려버린다. 약 2.5km의 철길 양쪽으로 낡은 집들과 옛 모습의 가게들이 즐비하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예전 학창 시절의 교복을 빌려 입고 철길을 따라 걸으며 추억을 되새긴다. 도시를 구경하다 보면 아름다운 색감의 서정적인 벽화와 종종 마주친다. 유명 관광지에 화려한 포토존을 이루고 있기도 하지만 좁은 골목길의 소박한 벽화도 많다. 20세기 전반 한국문학을 대표했던 작가 중 한 사람인 채만식의 삶과 작품 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채만식문학관에는 전시실, 자료실, 시청각실과 함께 문학 산책로, 공원도 갖추어져 있다. 2018년 국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빈해원은 짬뽕으로 유명한 중국음식점이다. 옛스러운 정취의 독특한 건물로 을 비롯한 영화 촬영 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기름에 지지지 않고 않고 오븐에 굽는 중동호떡에는 군산을 대표하는 흰찰쌀보리와 함께 검은콩, 검은쌀, 검은깨를 넣은 플랙푸드 선식이 시럽으로 들어가 고소하고 담백하다.

천년 수도의 아름다운 파동

On the Road 2021 AUTUMN 1816

천년 수도의 아름다운 파동 오랜 역사와 문화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 땅을 파면 문화재가 나오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된다는 고대 왕국의 수도. 경주는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 찬란했던 문명을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자리한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높이가 13.4m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감은사는 신라 30대 문무왕이 삼국 통일을 완성한 후 짓기 시작한 절로 지금은 지상에 이 탑들만 남아 경주의 동쪽 바다를 지키고 있다. 비트 세대 대표작가 잭 케루악(Jack Kerouac 1922~1969)— 그가 말년에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던 걸 상기하며, 한때 불교문화의 심장이었던 경주로 향하는 길에 두근거리는 맥동을 느꼈다. 그가 쓴 소설의 제목이 바로 이 칼럼의 이름 “On the Road” 였다. 경주를 요약하는 단어는 ‘천년 수도’다. 정확하게는 992년 동안 수도였으니 천년에서 8년 모자라지만 아름다운 도시니까 그냥 넘어가자. 기원 전 57년부터 936년까지 하나의 나라로 살았던 사람들, 그 나라의 이름은 신라였다. 천년간 지속된 국가는 몇 개 떠오르지 않는다. 비잔티움과 신성로마제국을 포함하며 오랜 역사성 부문에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로마제국 정도만 생각날 뿐. 아, 파라오 왕조도 상당했었지. 그런데 아시아 동쪽 끄트머리의 작은 땅에도 천 년 동안 지속하며 찬란한 문화를 남긴 국가가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경주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나 장안(시안), 바그다드 같은 화려하고 유명한 대도시와 같은 리그에서 뛴 선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주는 고대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를 너머 유럽과 교류하던 중국과도 활발한 교류를 해서 신라인의 무덤에서 로만 글라스가 출토되기도 한다. 시야가 좁지 않고, 경기장을 넓게 쓰며 세계시민으로 존재감을 가진 나라였던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제국주의의 행패와 전쟁으로, 웬만한 건 다 무너졌던 이 나라에 아직도 신라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비도를 지나면 궁륭천장으로 짜인 원형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연꽃 모양의 돔으로 이루어진 천장과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부처와 보살, 수호신들이 고대의 건축술과 조형미를 보여준다. 현재는 보존 문제로 관람객이 주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며 볼 수 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한석홍 비밀스러운 아름다움 나는 배를 타고 온 이방인 탐험가처럼 동쪽 바다에서부터 경주로 들어가 문무 대왕(~681 文武大王)을 기리는 첫 유적지, 감은사지(感恩寺址)를 만났다. 이 절의 네이밍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왕의 은혜를 팔로우하고 틈만 나면 ‘좋아요’를 계속 누르겠다는 뜻이다. 감은사지의 느낌은 조금 특별하다. 관광명소 특유의 과도한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자칫 버려진 듯 보일 지경이다. 입장료도 없고 관리인도 보이지 않았다. 낡아버린 쌍탑만 달랑 남은 절터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이 쌍탑은 아주 오랫동안 이 자리에 우뚝 서 있다. 고대의 감은사 아래는 바닷물이 닿는 곳이었고, 절 아래로 용이 드나들 수 있는 수로가 설계되어 있었다. 두 개의 탑이 용이 된 왕을 지키는 중인지 용이 두 개의 탑을 지키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탑의 수수한 아름다움이 눈길을 오래 잡아끌어 시선을 돌리기 싫을 정도다. 이 탑을 해체하고 복원할 때 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具)에는 신라의 정교한 금속 공예술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보물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아주 그냥 미친듯이 예쁘다. 탑의 겉모습인 수수한 아름다움과의 대비가 선명하다. 보이지도 않는 탑 속에 숨겨진 이 보물이 신라의 찬란한 문명을 만든 기본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하되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 아름다움은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스스로 빛난다는 걸 가르치는 것인가. 신라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을 더 보고 싶어 경주 속으로 빨리 파고들었다. 곧 경주로 향하는 바닷바람을 막는 토함산이 나타났고, 산 깊은 곳에 있는 석굴암(石窟庵)이 등장했다. 경주의 아름다움을 담당하는 최전방 국가대표선수는 누가 뭐래도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 투톱이다. 불국사의 부속암자인 석굴암은 로마에 있는 판테온과 비슷한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고대에 그런 상당한 건축 기술의 교류가 있었다는 놀라움도 있지만, 나는 당장 눈앞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도 충분히 바빴다. 석굴암은 불교국가였던 신라의 깊은 불심으로 만든 아름다운 인조 돌 동굴 속 불교미술이자 건축미의 절정이다. 빗물도 스며들지 않고 안에 이끼도 끼지 않는다고 한다. 돌을 뚫어 석굴을 만들자니 화강암이 너무 단단해서 조립식 건축 기법으로 이 인조 석굴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점이 중국이나 인도의 불교 석굴과 다른 점이고, 그래선지 상당히 유니크한 매력을 뿜어낸다. 내가 찾아간 날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 내내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석굴암의 내부 역시 문화재 보호를 위해 많이 가려져 있고, 줄 서서 지나가야 해서 자세히 볼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긴 시간 빤히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름다움은 가슴에 와락 안기는 종류였다. 조각 예술의 강렬한 미학이 파동처럼 번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 같은데, 잠깐 스쳐봤으나 망막에 본존불상의 표정이 배어버린 느낌이었다.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중턱에 있는 석굴암의 석가여래좌상은 불교미술사에서 두드러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전실과 원실 사이, 비도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에 20여 년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고대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그리스 로마 건축양식에 불교미술이 접목된 화강암 석굴이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한석홍   빈티지 미학 탄력을 받은 나는 다음 차례의 아름다움을 찾아 불국사로 향했다. 대웅전(大雄殿) 앞 쌍탑을 보며 한 자리에 오래 남아있는 것의 빈티지 미학을 느꼈다. 신라가 멸망한 뒤, 다음 왕조들에서도 주요한 지방 거점의 역할을 하며 존재해 온 경주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빈티지일 것이다. 한때의 찬연했던 광휘와 오래 견뎌온 것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었다. 이 두 개의 탑이 얼마나 오래 이곳에서 시공간을 봐왔겠는가. 왕조의 흥망성쇠를 보았고, 그들의 삶이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세월의 굴곡도 보았을 것이고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쌍탑을 비롯해 불국사의 구조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균형미를 갖고 있다. 불국사의 보물인 다보탑(多寶塔)에 조각된 네 마리 사자상 중 세 개는 유실되었다. 석가탑(釋迦塔)은 보수 공사 중에 떨어뜨리고, 탑 속의 사리함이 깨지는 등의 난리와 풍파도 겪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유물들은 번뇌를 초월한 듯 무덤덤해 보였다. 뭐든 견뎌낸 것들은 참 고혹적이다. 침략을 받고, 땅을 빼앗기고, 지진이 나고, 도굴당하고, 유물이 사라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문화재를 지키려 노력해 온 이들의 마음이 찬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석가탑 안에선 당시의 목판 인쇄술을 보여주는 다라니경(陀羅尼經)도 발견되었다. 이 또한 신라의 자랑스러운 보물이다. 인쇄술이 인류문명 발전에 얼마나 큰 속도감을 부여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니까. 빈티지 유물들이 보여주는 시공간의 크기와 깊이에 압도되다 불국사를 빠져나오니 문학관이 하나 보였다. 경주 출신인 김동리(1913~1995 金東里), 박목월(1915~1978 朴木月)두 작가를 함께 기념하는 시설이었다. 이들은 꽤 아름다운 글들을 썼다. 신라 문화와 한국 근대문학은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나는 하나의 연결점을 떠올렸다. 신라시대에 만든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라는 거대한 범종의 금석문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당시 사람들은 재물을 싫어하고 글재주를 사랑했다.” 내겐 이 글귀가 신라 사람들이 돈이나 탐하는 대신 문학을 사랑했다는 얘기로 해석됐다. 이렇게 아름다운 생각을 했던 나라였으니,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잔뜩 남긴 것 아닐까? 어릴 때부터 경주의 문물을 보고 자랐을 작가들이 부러웠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덕에 그들은 아름다움에 대해서라면 풍부한 시야를 자동으로 가졌을 것 같다. 그들을 상상하며 걷다 보니 문득 박목월 시인의 기념관에 흐르던 육성 시 낭독이 들려왔다.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 (William Wordsworth 1770~1850)처럼 광의의 낭만주의 시를 써온 시인의 서정에는 인생과 자연에 대한 통찰이 압축되어 있었다. 경주의 보물은 유물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작품 또한 오래도록 남아 계속 빛나고 있다. 나의 문학기행은 문학관에서 짧게 마무리했지만 더 깊은 탐구를 위해 두 작가의 생가와 주요 작품의 배경지들을 둘러보는 코스도 잘 마련되어 있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불국사는 석굴암과 함께 신라 불교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정교한 석축으로 조성된 터에 대웅전, 극락전 등 전각과 석가탑과 다보탑, 백운교와 연화교 등을 품고 있다. 석굴암과 더불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약 3만 8,000평의 평지에 23기의 원형 분묘가 솟아 있는 대릉원은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군이다. 경주 시내 한가운데 황남동에 자리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비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죽음의 한복판에 삶의 한복판이 있다니. 삶과 죽음의 관계는 조화일까 부조화일까. 현대와 고대의 간극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경주란 여러가지 선명한 대비만으로도 독특한 존재성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곳이다. 통일신라시대년에 주조된 성덕대왕신종은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cm, 무게 18.9톤에 이르는 범종으로 현존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종이다. 종의 맨 위에서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은 한국 동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며, 깊고 그윽한 여운이 오래 지속되는 신비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동리목월문학관은 경주 출신 소설가 김동리(1913-1995)와 시인 박목월(1915-1978)을 기리기 위해 2006년 토함산 자락에 건립되었다. 한국 현대문학에 큰 자취를 남긴 두 문인의 원고, 작품집, 동영상 등을 전시하고, 각기 생가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로 연결되는 투어도 제공한다. 동리문학관 안에 복원된 소설가 김동리의 창작실이다. 동리목월문학관은 동리문학관과 목월문학관으로 나뉘어져 각 작가의 유품, 동상을 전시하고 있다. 소설가 김동리의 육필 원고이다. 복원된 그의 창작실에는 생전에 사용하던 만년필, 안경, 책장, 집필노트 등 다양한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찬란한 종소리 문학관을 떠나 대릉원(大陵苑)에 다다른 나는 거대한 무덤들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의 그로테스크함에 감탄하다 시공간에서 내 좌표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 한 무덤 속으로 피신했다. 실내를 관람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천마총 내부였다. 발끝이 서늘했다. 경주 기행 내내 비가 많이 왔는데 발이 젖는 줄도 모르도록 경주는 계속 신선한 볼거리를 선사하는 곳이었다. 무덤 속은 무섭거나, 신비하거나, 칙칙하거나 할 것 같았지만, 아름다웠다. 사람이 죽어서 누워있던 자리는 몰락의 느낌 없이 편안해 보였고 그 정성 들인 장례에 동원된 품을 생각하니 옛날 사람들의 부지런함도 경이로웠다. 내 게으름을 반성하며 무덤에서 나오자 경주 시내 황남동 번화가가 나왔다. 나는 현대에 조성된 번화가와 고대 무덤가의 간극에 살짝 황당해졌다. 죽음의 한복판에 삶의 한복판이 있다니. 삶과 죽음의 관계는 조화일까 부조화일까. 현대와 고대의 간극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경주란 여러가지 선명한 대비만으로도 독특한 존재성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곳이다. 짧은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앞서 언급했던 성덕대왕 신종 앞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경주를 찾은 내가 가장 다시 만나고 싶었던 신비였다. 이 종의 표면에 새겨진 반쯤 뭉개진 글자들, 그러니까 재물을 싫어하고 글재주를 사랑했다는, 그 아름다운 문장을 내 눈앞에 생생히 홀로그램으로 띄워주는 듯했다. 그리고 이 종의 독특한 공명을 가진 소리를 떠올렸다. 독자에게 종소리를 직접 들려줄 수 없어 아쉽지만, 이 거대한 범종이 퍼트리는 맥놀이 현상은 현대의 파동 역학을 잘 알고 만든 것 같은 소리라 소름이 돋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경주에 오면 이 웅혼한 종소리를 꼭 한 번 듣고 가면 좋겠다. 이 종소리가 지닌 파동은 경주의 빈티지 미학을 잘 보여주는 유물들과, 문학에 대한 이해의 경건함과, 세계와 교류하던 고대의 대도시를 지키는 용이 스스로의 찬란함에 감탄하며 내지르는 포효 세리머니와 같을지도 모른다. 간접적으로라도 그 파동을 부디 전달받을 수 있길 바라며. 아름다움에 경도되는 파동이 영원하기를.

문화예술을 품은 서촌의 시간 속으로

On the Road 2021 SUMMER 2054

문화예술을 품은 서촌의 시간 속으로 왕이 거닐던 옛 산수화 속 동네, 식민지 암흑시대 한 호리한 시인이 몸을 웅크린 채 저항시를 쓰던 동네, 서울의 옛 도심 빌딩 숲 한가운데 한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동네 서촌으로 떠났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으로 옛 서울의 경계를 이루었던 인왕산 자락 아래 동네들을 일컫는 별칭이다. 인왕산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눈을 돌리면 북악산 밑으로 경복궁과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다. 고즈넉한 한옥과 어울리며 제각기 멋을 풍기는 아담한 빌딩들이 들어선 서촌은 과거와 현재가 흥미롭게 공존하는 곳이다. 이 마을에선 오래된 한옥이 이국적인 디저트 카페로 다시 태어나고, 조선 시대(1392~1910)의 수묵화가 21세기 화가의 캔버스 위로 펼쳐진다. 사람의 훈기가 가득한 체부시장과 통인시장에서 수성(水聲)계곡으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들은 마치 실존주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집필실이 있던 체코의 황금소로 22번지 골목처럼 아늑하다. 때로는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뒷골목을 걷는 느낌도 든다. 북촌에 이어 서촌이 최근 서울의 명소로 떠올랐다. 아기자기한 골목과 맛있는 음식점, 감각적인 카페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예술을 자연스레 몸으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인왕산에는 코로나 19사태속에 홀로 하는 등산에 재미를 느낀 사람들이 찾아와 눈 앞에 펼쳐지는 서울의 경관에 빠져들기도 한다. 서촌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살았지만, 문화예술만은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이곳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문화예술이 형형색색 모여 미로 같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옥인동에 위치한 수성계곡은 나무 그늘과 물소리가 시원해 예로부터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장소이다. 한양도성은 14세기 조선 건국 직후 왕도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데, 서쪽 벽이 인왕산을 가로지르며 서촌을 품고 있다. 옛 사람들의 자취 2013년 9월에 설립된 박노수 미술관은 이 곳에서 40여 년간 거주하던 박노수 화백의 기증작품과 컬렉션 등 1000여 점의 예술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1941년 연희전문 학생이던 윤동주는 자신이 존경하던 소설가 김송(金松·1909~1988) 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며 시를 썼다. 이 곳에서 ‘별을 헤는 밤’을 비롯한 대표작을 썼으나 당시의 집은 남아 있지 않다. 서촌의 높은 곳에 올라 펜으로 길거리와 마을의 풍경을 담는 김미경 화가. 그는 20년의 기자생활을 끝낸 후 2005년 뉴욕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다시 2012년 서촌에 자리를 잡고 그림 그리며 ‘옥상화가’로 알려졌다.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에 인접한 서촌은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 즉 후일의 세종대왕 (1397~1450 世宗大王)을 비롯한 여러 왕자들이 나고 자란 동네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곳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왕실군락지’였다. 서촌이 배경인 산수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 安平大君)이 꿈에 도원에서 노니던 광경을 화가 안견(安堅)에게 설명해서 그리게 한 작품이다. 이 그림 속 옥인동 수성계곡은 안평대군뿐 아니라 세종의 둘째 형님 효령대군(1396~1486 孝寧大君)도 살았던 장소다. 학문과 덕성이 출중했던 그는 동생인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권력의 갈등에서 비켜나 불교의 중흥에 힘쓴 인물로 추앙 받는다. 또한 이 동네에는 겸재 정선(1676~1759 謙齋 鄭敾)이 살며 조선 문화 절정기였던 진경시대(眞景時代)의 걸작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1751)⟩를 그리기도 했다. 국보 제 216호인 이 유명한 그림은 고 이건희(1942~2020 李健煕) 삼성그룹 회장의 소장품이었는데, 최근 국가에 기증되어 다시 한번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조선 중기부터 서촌에는 왕실 가족보다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신분이었던 중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역관과 의관, 내시 등 궁중관리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즉, 현재의 사직동, 옥인동, 효자동 등 여러 동네를 아우르는 이 지역은 사대부가 살았던 북촌과 달리 궁궐의 운영에 필수적인 기능인들의 거주지였다. 그래서 북촌의 한옥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웅장한데 비해 서촌의 한옥은 아담하고 소박하다. 서촌에 실핏줄 같은 작은 골목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의 몰락에 이어 일제강점기(1910~1945)에 이르자 이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시인 윤동주(1917~1945 尹東柱), 이상(1910~1937 李箱), 노천명 (1911~1957 盧天命)과 소설가 염상섭(1897~1963 廉想涉)이다. 또한 화가 구본웅(1906~1953 具本雄), 이중섭 (1916~1956 李仲燮), 천경자(1924~2015 千鏡子)도 이곳에 살았다. 같은 시기 서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1858~1926 李完用)과 윤덕영(1873~1940 尹德榮) 같은 거물 친일파들의 호화로운 서양식 저택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을 일으키고 향유되는 문화예술은 어둠 속에서 껍질을 깨고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키는 새의 부화와 같다. 단단한 껍질에 포위된 채 살기 위해 쪼아야 하는 아기새처럼, 당시 예술가들은 치열한 창작 활동을 통해 가난과 절망의 시기를 탈출하려 노력했다. 이들의 흔적을 찾는 것이 이번 서촌 기행의 은밀한 화두이기도 하다. 1941년 효자동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위해 조성된 공설시장이 모태인 통인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서촌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지금의 시장 형태를 갖추게 됐다. 향기를 따라 나는 먼저 청운동의 ‘청운 문학도서관’과 ‘윤동주 문학관’이 자리한 ‘시인의 언덕’ 으로 향했다. 언덕 너머 서울 구 도심이 부채처럼 펼쳐지며 멀리 남산타워와 한강 너머 롯데타워도 보였다. 산비탈에 한옥을 잘 복원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청운 문학도서관에 비해 철문의 콘크리트 건물인 윤동주 문학관은 삭막한 감옥을 연상시켰다. 옥외에 카페 정원과 벤치가 있는 이 건물은 2013년 동아일보(東亞日報)와 건축전문지 ⟨SPACE⟩가 공동실시한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 조사에서 상위에 올랐다. 윤동주 문학관의 영상실 콘크리트 벽에는 식민지 시절 서촌에 살며 저항시를 썼고, 일본 유학 중 항일운동에 가담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시인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무기를 들고 직접 싸우지 못하고 골방에 숨어 고작 시나 써서 창피하고, 심지어 그 시가 잘 써지기까지 해서 더욱 창피하다’고 쓴 그의 일기가 떠올라 마음이 처연해진다. 이곳에서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나와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의 집’으로 갔다. 흔히 서촌 문화예술 탐방자들이 출발점으로 삼는 장소이다. 그런데 이상이 세 살에 양자로 들어가 이십여 년을 살았던 원래 집은 없어지고 집터만 남아서 지금의 이상의 집은 그의 사후에 새로 지은 집이다. 이곳에는 그의 친필 원고 등 주로 문학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수성동 계곡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청아한 산수화를 즐겨 그렸던 한국화가 박노수(1927~2013 朴魯壽)의 작품이 모여있는 ‘박노수미술관’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윤동주 시인이 대학생 시절에 살던 하숙집터도 나온다. 이제 마침내 서촌의 끝인 수성동 계곡에 당도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여성 화가가 마스크를 쓰고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서촌의 옥상화가’로 이름이 난 김미경 씨였다. 20년 경력의 신문기자였던 그는 8년 전 직장을 그만 두고 제도용 펜으로 후벼 파듯 서촌의 옥상 풍경들을 그리고 있다. 인왕산을 비롯해 한옥, 일본식 적산가옥, 빌라 등의 옥상으로 올라가 서울의 역사가 압축된 서촌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처음엔 그가 화가인 줄 모르던 주민들이 ‘지도를 그리는 간첩’으로 신고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이젠 그의 그림이 서촌의 여러 가게에 걸려있다. 문득 그가 앞으로 그려나갈 서촌의 미래 모습이 궁금해진다. 1941년 효자동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위해 조성된 공설시장이 모태인 통인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서촌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지금의 시장 형태를 갖추게 됐다. 1940년대에 지어진 보안여관에는 여러 화가와 문인들이 즐겨 묵었다. 2004년까지 여관으로 운영되다가 최근에 전시, 공연 등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윤동주 문학관 이상의 집 사직공원 경복궁 미로 속에 뒤를 돌아보다 마지막으로 통의동 보안여관에 들렀다. 화가 이중섭, 시인 서정주(1915~2000 徐廷柱) 등의 예술가가 묵었던 이 여관은 1942년에 지은 건물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 중이다. 1936년 서정주 시인이 동료 시인들과 힘을 모아 창간한 동인잡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 서니 역사의 자취가 곳곳에 묻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과 옹기종기 비좁은 전시실이 오래된 매력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 반가왔다. 보안여관의 최성우 대표는 화가의 꿈을 안고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미술경영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이 곳을 서촌을 대표하는 복합문화센터로 만들었다. 현재는 보안여관 바로 옆에 4층 건물을 지어 문화사업을 더욱 확장하고 있는데, 실험적인 젊은 국내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뿐만 아니라 해외프로젝트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보안여관 기획전에 앞으로는 외국 작가들도 초청할 계획이다. 4층 건물의 3, 4층이 게스트하우스이자 레지던스 작가들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서촌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살았지만, 문화예술만은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이곳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문화예술이 형형색색 모여 미로 같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골목길 여행의 장점은 미로 속에 자주 길을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낯선 길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또한 느닷없이 때때로 골목이 막혀 뒤돌아 나오며 자신의 발자취를 뒤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나는 이번 기행에서 자주 눈을 떴고 자주 뒤돌아보았다. 대오서점이 개점하던 1950년대에는 인근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책을 사거나 또는 팔러 오는 학생들로 붐볐다. 처음에는 한옥의 창고를 개조해 만든 책방이 점점 현관으로, 집안으로 확장됐다. 현재는 다시 규모가 줄었고, 뒤편 공간에는 북카페가 운영 중이다. ©Newsbank ‘먹자골목’으로 유명한 서촌의 체부동은 낮부터 밤까지 미식을 즐기러 찾아 드는 다양한 세대로 붐빈다. 아담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미로 같은 골목이 이어진다. 이산하(Lee San-ha 李山河) 시인

고창, 위대한 씨앗이 움트는 고장

On the Road 2021 SPRING 1707

고창, 위대한 씨앗이 움트는 고장 전라북도 고창 일대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가슴저린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고장이다. 빨간 동백꽃이 핀 이른 봄 날, 한국 농민운동의 큰 발자취가 남아 있는 땅으로 시인 이산하가 달려갔다. 수천 년 내려 온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코로나 19 한 방으로 휘청거린다.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는 적이 첨단미사일 못지 않게 무섭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이 전대미문의 상황을 견디어 나가고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죽어도 다가가 눈을 감겨줄 수 없다. 얼굴을 보며 꽃을 바칠 수도 없다. 코로나 19는 자유도 슬픔도 용납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동안 자유를 방종으로 기만하며 살아온 우리의 삶에 대한 강력한 경고일 것이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타인의 슬픔이나, 또는 나의 슬픔을 이용해 잇속을 챙긴 일이 없었나 돌이켜 볼 일이다. ‘메멘토 모리’– 이 무력한 순간에 가슴에 새기고 싶은 문구다.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도솔암 올라 가는 길 옆의 마애여래좌상은 한 국에서 가장 큰 마애불상 중 하나로 고려시대에 조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체 높이 15.7m, 무릎 넓이 8.5m로 암벽 표면 6m 높이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1890년대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이 불상 앞에서 거사가 성공하기를 빌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혁명의 씨앗 고창으로 떠나기 며칠 전부터 잠을 설쳤다. 13부작 미국 드라마 >에 푹 빠진 탓이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혼자 넷플릭스의 세계에 탐닉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서울 용산역에서 출발한 KTX 고속열차가 1시간 40분 만에 광주 송정역에 도착했다. 코로나 사태로 승객이 줄자 목적지 근처인 정읍역을 건너뛰었다. 마중 나온 후배 차에 실려 거꾸로 고창을 거쳐 고부를 향해 달렸다. 고창읍내로 들어가는 로터리 홍보전광판이 ‘한반도 첫 수도 고창 방문을 환영합니다. 사계절 아름다운 선운산, 동학농민혁명(1894 東學農民革命) 성지’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그렇다. 여기는 조선 후기 19세기 말 동학농민혁명의 깃발이 처음 펄럭였던 곳이다. 그리고 그 전사들의 피와 뼈가 묻힌 무덤이다. 전광판 옆에 ‘복분자, 장어 특산품 원산지’, ‘전봉준(1855~1895 鄭鳳俊) 장군 동상건립 모금운동에 적극참여 부탁드립니다’라는 현수막들도 보였다. 정부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세운 전봉준 동상이야 여러 개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역 민간인들의 자발적 참여로 만든다는 의미인 듯했다. 승용차가 넓은 들판을 지나 한 작은 기와집 앞에 멈췄다.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죽산마을 송두호(1829~1895 宋斗浩)의 집이다. 대문은 없고 오른쪽 콘크리트 기둥에 ‘동학농민혁명 모의장소’라는 커다란 글자가 보였다. 이 집이 바로 조선을 뒤흔든 농민혁명의 씨앗이 처음 뿌려진 곳이다. 위로 솟는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게 씨앗이다. 그 씨앗을 뿌리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서로 눈빛을 보며 결사항전을 약속했다. 그 결의의 결정체가 전봉준, 손화중(1861~1895 孫華仲), 김개남(1853~1895 金開男) 등 22명의 이름이 적힌 한 장짜리 ‘사발통문(沙鉢通文)’이다. 사발통문이란 주동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사발을 엎어놓고 그린 원을 중심으로 둥글게 서명해 지지자들에게 알리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둥글게 앉으면 지위고하를 판단하기 어렵다. 중세 유럽의 원탁회의와 유사하다. 이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이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랜 폭정에 항거하기 위한 풀뿌리 민중의 계획적인 사건이었음을 증명한다. 이 문서에 적힌 4개의 행동지침도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향하자는 일종의 전쟁 선포였다. 그런데 이 혁명군의 극비문서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53년 전 이 마을에 사는 송준섭(宋俊燮)씨의 집 마루 밑에 묻혀 있던 것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당시 혁명이 실패하자 정부 진압군이 여기는 ‘역적의 마을’이라 하여 마을 주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집은 불태워버렸다. 사발통문은 누군가 몰래 매장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이 집의 바로 앞집이 나를 안내하는 후배의 할아버지가 살던 집이었다. 후배가 계속 두 집을 번갈아 보았다. 눈빛이 젖어갔다. 가슴에 파문이 이는 듯했다. 내가 굳이 여기를 먼저 찾은 이유는 126년 전에 참수당한 한 혁명가의 숨결부터 찾아 묵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동학혁명모의탑’이 보였다. 사발통문 서명자들의 후손들이 건립한 것이다. 거기서 또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동학농민군위령탑’이 있다. 이름 없이 죽은 수십만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탑이다. 고부의 1차봉기(반정부투쟁)는 성공했으나 공주 우금치(牛禁峙)의 2차봉기(항일독립투쟁)는 참패를 당했다. 조선군과 일본군의 총에 농민군은 전멸했다. 죽창과 총은 애당초 싸움이 될 수 없었다. 위령탑 앞에 하얀 쌀밥 한 그릇이 놓여 있다. 밥을 위해 굶주린 농민들이 곡괭이와 낫을 높이 들었다. 마스크를 나누어 쓰듯 함께 나누어 먹어야하는 게 밥이다. 광활한 들판을 보니 서울로 진군하는 동학농민군과 로마로 진군하는 스파르타쿠스 전사들이 겹쳐졌다. 두 혁명은 참수되었다. “빈손을 쥐면 주먹이 돼”라고 외치며 싸웠던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들.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노예해방을 이루고 자유를 얻었는데도 자조적으로 내뱉는 절규가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돈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 그렇다. 밥 없는 자유는 죽음이다. 밥을 굶을 자유밖에 없는 약자들은 여전히 노예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현대판 노예는 발의 족쇄가 마음의 족쇄로 바뀌었을 뿐이다. 매년 3월 하순이면 국내 최대 동백꽃 군락지인 선운사 주변의 동백이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빨간 꽃잎과 짙푸른 잎사귀가 천년 고찰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 고창군청 선운사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는 위치에 개방된 양식의 만세루(萬歲樓)는 설법을 위한 강당의 용도로 건축됐다. 이 절의 기록에 따르면 1620년 대양루(大陽樓)로 지어졌다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52년 다시 지으며 만세루로 불리게 되었다. 천정 대들보와 서까래 및 기둥을 다듬지 않은 원목을 그대로 사용해 지은 것이 특색이다. 바다가 주는 선물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자 가슴이 막혔다. 터널 속에 갇힌 듯 답답했다. 고창의 고인돌 유적지로 가다가 무거운 돌이 내 가슴을 누를 것 같아 선운사(禪雲寺)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고요한 절에 가서 나를 가라앉히고 마음속의 먼지도 씻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니 절은 동백꽃을 보러온 사람들로 넘쳤다. 동백꽃은 도솔암(兜率庵) 바위 절벽의 마애불과 함께 선운사의 대표적인 두 상징이다. 선운사는 577년 백제의 검단(黔丹)스님과 신라의 의운(義雲)스님이 서로 뜻을 모아 창건했다. 당시 두 나라는 전쟁 중이어서 피난민들이 많았다. 비록 적국의 국민이었으나 두 스님은 난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힘을 모아 절을 지어 공동체생활을 했다. 굶주린 백성들의 생계를 해결하고 고아들을 거둬 공부시켰다. 그래서 이 절은 원래 난민구제소였다. 약 1300년 뒤 농민군이 도솔암 마애불 앞에서 거사성공을 기도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대웅전 뒤편의 울창한 붉은 동백숲 사이로 오가는 스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절에서 나와 바닷가로 달렸다. 부안의 변산반도 격포항(格浦港)이 마주 보이는 동호해수욕장과 구시포 해수욕장의 명사십리(明沙十里)였다. 1km 이상 직선으로 펼쳐진 고운 백사장을 따라 수백 년 된 소나무숲이 울창하다. 새싹 같은 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솔향에 귀를 씻었다. 솔숲의 바람소리는 찻물 끓는 소리와 닮았다. 백사장 너머 갯벌이 아득히 펼쳐져 있다. 우리나라 서해는 세계 어느 바다보다도 조수간만의 차가 크기로 유명하다. 매일처럼 바다가 육지가 되고 육지가 바다가 되는 일이 반복된다. 내가 서 있는 지금은 바다가 육지다. 드넓게 펼쳐진 갯벌을 보니 바다 한 잎을 떼어내 염전을 만든 사람이 떠올랐다. 임진왜란(1592~1598) 때 이순신(1545~1598 李舜臣) 장군은 전쟁군수품이 바닥나자 해변 한 자락을 떼어내 큰 가마솥을 만들고 바닷물을 부어 증발시켰다. 그렇게 대량 생산된 소금을 팔아 수천 톤의 군량미를 마련했다. 그는 탁월한 전투지휘관이자 영민한 경영자였다. 이곳 바닷물은 염도가 높아서 피부병과 신경통 환자들의 해수욕이나 모래찜질 장소로 유명하다. 주변에 대규모 염전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소나무숲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맨발로 긴 백사장을 걷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걸었다. 맨살이 차가운 모래에 닿을 때마다 새로운 감각기관이 생겨나는 듯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그렇게 백사장을 산책하는 사이 석양이 지기 시작했다. 저녁노을은 동백꽃이 떨어지기 직전처럼 관능적이었고 장엄했다. 저녁식사는 고창 땅을 밟은 이상 풍천장어 구이와 복분자 술을 먹어야 한다. 이 지역의 명물인‘풍천장어’는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곳에서 잡아 특히 건강식으로 이름이 높다. 번화가가 아닌‘아는 사람만 간다’는 들판의 외딴 곳에 있는 한 식당으로 갔다. 정원과 실내 모두 넓은 ‘형제수산 풍천장어’집이었다. 주인이 직접 구워주는 참숯불 생장어구이는 양념장이 남달랐다. 소스에 들어간 재료가 한약 약초, 곡물 효소, 약초술 등 무려 20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계절따라 달리 나오는 반찬의 식재료도 모두 유기농 재배이다. 직접 담근 복분자 술도 혀를 갖고 놀았다. 장어와 술이 어우러져 성장판이 다시 열릴 것 같은 맛이었다. 고창군 공음면(孔音面) 학원농장 일대 청보리밭은 매년 봄이면 50만여 명이 찾는 관광 명소다. 이 곳의 청보리밭 축제는 지역 최대의 행사인데, 지난해부터 코로나 19 상황으로 잠정 보류되었다. 청보리밭 일대의 위치를 표시해주는 작은 장승. 안내판을 겸한 이런 장승들이 30여만평 규모의 넓은 청보리밭 주변 곳곳에 서 있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어지듯 아름다움을 버려야 새 생명이 탄생한다. 새삼 봄비에 젖어가는 저 들판의 새싹들이 경이롭다. 이번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은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여행이었다. 고창군에는 약 1,600기의 선사시대 지석묘가 분포되어 한국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룬다. 고창 고인돌 유적은 화순, 강화 유적과 함께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주말이면 고창읍성 앞 놀이마당에서 고창농악 공연이 펼쳐졌다. 읍성 앞에는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가 신재효(1812~1884 申在孝)의 생가가 있어 이곳에서도 전통음악을 공연했는데, 코로나 19로 인해 지난해부터모든 공연과 행사가 취소된 상태다. 고인돌 군집 다음날 아침 일찍 읍내의 고인돌 전시장을 둘러보고 대산면으로 갔다. 천연의 역사가 살아있는 원형 그대로의 고인돌을 대면하고 싶었다. 마을 입구에서 대산 중턱으로 올라가는 오솔길마다 고인돌 천지였다. 커다란 산 하나가 야외 선사 박물관이었다. 고인돌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었고 위로 올라갈수록 숫자가 낮아졌다. 산꼭대기의 1호까지 보고 싶었지만 너무 지쳐서 포기했다. 전 세계 고인돌의 60퍼센트가 몰려 있는 한반도에서도 고창 유적은 1천 여 기에 달하는 가장 큰 군집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형식도 독특하고 다양해서 고인돌 축조과정의 변천사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창은 군 전체가 문화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3년에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생물자원의 다양성을 인정받아 군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오후에 지친 다리를 끌고 학원농장의 청보리밭으로 갔다. 아직은 철이 이르지만 매년 4월이 되면 인근의 유채꽃까지 활짝 피어 한 해 수십만이 찾아 오는 관광 명소이다. 파릇파릇 어린 싹이 돋아나는 밭뚝 사이로 걸어 나오며 이제 고창 여행을 마무리할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어지듯 아름다움을 버려야 새 생명이 탄생한다. 새삼 봄비에 젖어가는 저 들판의 새싹들이 경이롭다. 이번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은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여행이었다. 고전리 염전마을 운곡람사르습지 고창고인돌박물관 고창판소리박물관

어느 길에 관한 명상

On the Road 2020 WINTER 1293

어느 길에 관한 명상 한국 불교가 선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조계산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한반도 서남단 전라남도 순천에 위치한 이 산의 동쪽과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송광사와 선암사는 각기 비구승과 대처승의 종단을 대표하는 총림이다. 두 절을 이어주는 산길에 신자들과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인터넷 검색 창에 ‘송광사’를 입력하면 ‘송광사에서 선암사 가는 길’이란 자동완성 검색어가 바로 아래 뜬다. 마찬가지로 ‘선암사’를 입력하면 ‘선암사에서 송광사 가는 길’이란 연관 검색어가 붙어 있다. 인터넷 사용자들의 입력 횟수를 토대로 자동으로 생성된다는 이 검색어 ‘서제스트’는 당신이 찾으려는 것은 지금 입력한 목적지에 있지 않고 그것을 향해 가는 길 위에 있다는 말을 간절하게 전하려는 듯하다. 계절은 또다시 가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내비게이션을 켠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위안 조계산 정상에서 남쪽을 보면 순천시가 자랑하는 순천만 습지가 펼쳐져 있다. 조계산을 다양한 수종의 활엽수림으로 뒤덮이게 만든 데에는 이 남해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고온다습한 바람의 영향이 크다. 이 울창한 산 중에 있는 두 절을 동서로 잇는 약 6.5㎞ 남짓 되는 이 산길이 우리의 수정된 목적지다. 큰 산을 두고 양쪽 산자락에 비슷한 규모의 절이 들어서는 사례는 많지만, 목조로 지어진 절이 역사의 풍파까지 견디며 모두 온전히 유지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지도에서 보면, 동쪽 사면에 있는 선암사가 조계산 정상에 더 가깝다는 것을 빼면 두 절이 산허리로 난 길을 동등하게 공유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이 길이 절실한 곳은 송광사 쪽이다. 행정이나 교통, 시장 같은 생활권을 동남쪽에 있는 순천 시내에 두고 있는 송광사 입구의 외송(外松)마을 사람들에게는 선암사 앞을 지나는 이 산길이 순천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송광사에서 조계산을 우회해 순천을 오가는 버스 편이 귀하던 시절의 얘기다. 지금은 순천역 앞에서 송광사까지 111번 시내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약초꾼이나 화전민, 아니면 갈 길이 급한 인근의 산골 마을 사람들이나 오가던 이 길이 한 해에 40만 명이 찾는 당일 산행 코스로 입소문이 난 것은 조계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게다가 선암사와 송광사는 산중에서 흔히 만나는 평범한 절이 아니다. 모두 천년을 오르내리는 오랜 역사를 가진 고찰일 뿐만 아니라 강원(講院)과 선원(禪院) 등을 모두 갖춘 몇 안 되는 이름난 총림(叢林)이다. 송광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삼보(三寶) 사찰 중 가장 많은 고승을 배출한 승보(僧寶) 사찰로 이름이 높고, 선암사는 한국의 불교 문화를 계승하고 지켜온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래서일까. 고승대덕은 아닐지라도 세속의 인연과 번민을 떨치고 새로운 깨달음을 찾아 이 길을 오갔을 수행자들의 자취를 따라 걷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등산객들의 마음은 까닭 없이 벅차오른다. 번번이 걸음을 더디게 하는 오르막길 앞에서 그림자도 벗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거친 숨을 몰아쉬는 병약한 여행자건, 길을 묻는 이에게 제법 알은체를 하며 심부름을 가듯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능숙한 산악회원들이건, 길모퉁이에서 잠시 길동무가 된 이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내려놓고 약속이나 한 듯 이 숲길이 주는 위안과 치유의 느낌과 흥분을 전한다. 그들에게는 길 위에 구르는 작은 돌 하나, 이름 모를 들꽃 하나도 허투루 여길 것이 없다. 그러나 언제나 위안은 잠정적이다. 평화 순천역을 기점으로 송광사를 들머리로 삼아 선암사 쪽으로 내려오면 돌아오는 길이 가깝고, 선암사를 들머리로 송광사 쪽으로 내려오면 가는 길이 가까운 대신 돌아오는 길이 멀다. 효율만으로 선뜻 나설 길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솔깃할 만한 감성의 정보를 보탠다. 그 전날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건 선암사 길을 택한다면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을 거스르며 곧게 뻗은 길과 그 양옆으로 힘차게 솟아오른 편백나무 숲이 뿜어내는 신선한 기운에 압도될 것이다. 그리고 곧 계곡물을 가로지른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인 승선교(昇仙橋)에 눈길이 머물면 당신은 이미 정토에 들어선 것이다. 만일 그때가 봄이라면 대웅전 뒤편 돌담장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각양각색의 매화꽃을 볼 것이다. 대개 수령이 400년이 훌쩍 넘은 토종 매화나무로 ‘선암사 고매화’라 불린다. 조금 때를 놓쳤다 해도 망설이지 말고 그대로 강행하라. 화사한 벚꽃이 대신 맞을 것이다. 일주문에서 우리 일행을 맞은 것은 천 리를 간다는 은목서 꽃의 은은한 향기였다. 방아 찧는 토끼와 함께 달에 산다는 전설에 나오는 그 계수나무가 바로 이 은목서다. 작고 하얀 꽃잎들이 마당에 가득했다. 선암사가 건네는 가을 인사다. 내가 보기에 높은 문과 연못, 그리고 그리 크지 않은 절집들이 이런저런 꽃나무들을 비켜 오밀조밀하게 들어서 마을을 이룬 절이 선암사다. 선암사 승선교에 견주는 것이 송광사의 삼청교(三淸橋)인데 좀 부족하다 싶었는지 그 다리 위에 우화각(羽化閣)이란 집을 지었다. 송광사 계곡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볼거리이자 쉼터이다. 깊은 산에서 보는 이 없이 외롭게 자라다 뿔뿔이 흩어져 계곡을 타고 내려온 색색의 낙엽들이 우화각 아래 켜켜이 잠겨 있다. 물빛이 차다. 송광사는 대웅전 앞의 너른 마당이 중심이다. 선암사에서 출발해 해가 질 무렵 송광사에 이르렀다면 가능한 높은 곳에 올라 송광사를 굽어보라. 산자락 사이로 아스라한 잔광이 어둑한 절집 기와지붕 위를 비출 때의 그 고즈넉한 적막감은 오래 두고 마음에 남을 것이다. 송광사의 이 절제된 절집 구성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뒤에 복원된 풍경이다. 어느 절을 들머리로 삼든 되도록 오래 머물기를 바란다. 평화란 늘 잠정적이다. 선암사와 송광사는 산중에서 흔히 만나는 평범한 절이 아니다. 모두 천년을 오르내리는 오랜 역사를 가진 고찰일 뿐만 아니라 강원(講院)과 선원(禪院) 등을 모두 갖춘 몇 안 되는 이름난 총림(叢林)이다. 굴목재 보리밥집 선암사에서 출발해 편백나무 숲을 지나고 호랑이가 턱을 괴고 지나는 이들의 의중을 지켜보았다는 바위를 지나 처음 만나는 고개가 굴목재다. 조계산의 정상을 북쪽에 두고 걷는 이 구간은 제법 가파르지만 이 고갯길만 넘으면 곧 완만해진다. 반대로 송광사 쪽에서 걸으면 줄곧 계곡을 따라 올라오다 튼튼한 나무다리를 돌다리처럼 두드려보며 건너고, 길을 가로막으려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스님의 도력으로 멈춰 세웠다는 전설의 바위를 지나면 굴목재란 표지석이 나온다. 선암사 쪽에서 오른 고개는 ‘큰 굴목재’, 송광사 쪽에서 오른 고개를 ‘작은 굴목재’라 부르는데 이 고개가 호남정맥의 조계산 분수령이다. 동쪽 사면으로 흐르는 물은 순천만을 향해 가고, 서쪽 사면으로 흐르는 물은 벌교 앞바다로 이어진다. 이 고개를 지나 내리막길로 접어들면 난데없는 보리밥집이 나온다. 유럽의 까만 호밀 빵과 한국의 보리밥은 사회적 등급이 같다. 하얀 밀빵과 쌀밥이 소수의 좀 살 만한 사람들의 양식이었다면 호밀 빵과 보리밥은 오랜 세월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굶주림을 피하기 위한 양식이었다. 물론 지금은 옛 추억을 떠올리며 별미로 먹거나, 건강식으로 찾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말이다. 한때 계곡 아래 장안마을의 화전민이 살았던 터를 보수해 대피소 기능을 겸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조계산 등산 코스에 딸린 일종의 패키지라고 여길 정도로 이 밥집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마솥으로 지은 보리밥에 주위에서 나는 산나물과 텃밭에서 가꾼 푸성귀로 만든 반찬과 시래기 된장국으로 차려낸 소박한 밥상이지만 해발 600m의 고갯길을 두어 시간 걸어온 이들에게는 비길 바 없는 성찬이 된다. 더러 장안마을 쪽에서 올라와 보리밥을 먹고 다시 삼삼오오 산길을 걸어 내려가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장안마을 꼭대기까지 골목길을 따라 굽이굽이 차를 몰고 올라와 20분 정도 산길을 걸어 오르는 길이 굴목재의 보리밥을 맛볼 수 있는 최단거리다. 뭐라고 딱히 표현할 수 없는 맛이지만 누구든 순식간에 한 그릇을 뚝딱 비우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장 맛있는 보리밥집’이란 칭찬을 듣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보리밥의 포만감은 썩 유쾌하지 않다. 평소보다 많이 먹거나 쉬 꺼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럭저럭 굶주림이라는 자연적 본성에서 겨우 벗어나는 이 행위에 자꾸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기 때문이다. 역사 모든 길은 잠정적이다. 위안과 평화, 포만감 같은 거라고 여겨도 좋다. 지나는 이들의 의중을 지켜보며 앉아 있었다는 호랑이 바위나 길을 가로막으려는 바위를 스님의 도력으로 멈춰 세웠다는 전설은 단순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도 없이 끊어졌다 이어졌을 이 굴목재를 넘어가는 길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빨치산'이라는 용어는 주로 남한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조직되고 활동한 사회주의 무장 유격대를 의미하는데, 조계산은 그들의 근거지 중 하나인 지리산과 이어진 중요한 통로이자 활동 거점이었다. 송광사 쪽에서 멀지 않은 홍골이라는 계곡은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들의 은신처로 마지막까지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벌어진 곳이다. 이 과정에서 송광사에 머물던 노인들이 다수 살해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 시절을 살았던 인물들이 각자의 신념과 생존을 위해 숨 가쁘게 쫓고 쫓기던 길이 바로 우리가 소개한 길의 일부일 것이다. 이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갈등을 일으킨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무슨 이유에선지 대처승은 일본 제국의 잔재이므로 모두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불교에서 기혼 승려인 대처승을 허용하는 전통은 없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억불 정책 속에서 어려워진 사찰의 살림을 관장하는 사람을 승려로 대접하는 풍습은 있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에 메이지 유신 이후 기독교 목사의 예에 따라 대처승을 허용한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해방 무렵에는 기혼 승려가 비구승보다 훨씬 더 많았다. 이미 승려이자 시인인 한용운(1879~1944)은 『조선불교유신론』(1913)에서 “육체를 타고나서 식욕이나 색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헛소리일 뿐”이라며 결혼에 대해 승려들 각자가 자신의 욕망을 점검해 자유롭게 결정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불교계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했어야 할 일에 국가 권력이 나서 간섭한 것은 한국전쟁으로 사찰들이 입은 물적 피해보다 더 큰 불행이었다. 결국 이 분규는 1969년 대법원이 모든 종권(宗權)은 비구승에게 있다고 판결하면서 끝이 났고, 이에 반발한 승려들은 한국불교 태고종을 창종했다. 선암사가 바로 그 태고종의 태고총림이고, 송광사는 비구승으로 이뤄진 조계종의 총림이다. 이로써 두 절의 스님들이 스승과 도반을 찾아 서로 오가며 가르침을 받고 교류하던 시절은 끝이 났다. 절을 둘러싼 재산권 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인연 송광사 새벽 예불은 경건하고 장엄하다. 이 소리의 장엄함과 음악성을 명상 음악으로 발전시킨 이는 국악인 김영동(金永東 1951~)이다. 그는 송광사의 사물 소리(법고, 목어, 운판, 범종)와 예불문, 발원문, 반야심경에 대금과 소금을 얹고 신디사이저를 적절하게 혼합하여 (1988)이라는 한 편의 일상 음악을 완성했다. 그레고리안 성가 같은 교회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 음반의 마지막 트랙에 실린 ‘반야심경’을 들어보길 권한다. 뉴에이지 계열의 음악에 영향 받은 보통의 명상 음악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감동을 느낄 것이다. 2010년에 황병준이라는 전문 레코딩 엔지니어에 의해 녹음된 음반도 있는데 예불 속의 물소리나 바람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완전히 배제하고 오랜 목조건물 안의 울림을 살렸다는 점에서 김영동의 작품과 다르다. 숨어 있는 자연의 소리를 찾아들으며 우리를 새로운 공간에 머물게 하는 것이 김영동 음악의 매력이라면 황병준의 음악은 흔적 없이 사라지는 시간 속에 철저히 우리를 가둔다. 김영동은 자신이 이 음반을 만들게 된 계기를 송광사의 한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에 계신 법정(1932~2010) 스님을 만나러 간 인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법정은 ‘무소유’라는 사상과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 종교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無所有’라는 한자어에서 본질적 의미소(sème)는 ‘있을 有’다. ‘有’자란 ‘손으로 고기를 움켜쥐고 있는’ 모양의 갑골문이 진화한 글자다. 올해는 법정 스님이 돌아가신 지 10주기다. 여전히 불일암 앞에 얌전히 놓인 참나무 장작으로 손수 만들었다는 의자에는 마른 목련 이파리가 대신 앉아 쉬고 있다. 아마 그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잎아, 매달려 있느라 수고 많았다!

해남,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땅

On the Road 2020 AUTUMN 1153

해남,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땅 ‘땅끝’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해남은 곳곳에 아름다운 경관의 산들과 유서 깊은 사찰들이 자리 잡고 있어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한반도 서남단에 위치한 이 지역은 고대 중국과 한국, 일본을 연결하는 뱃길이 있어 문화의 이동로 역할을 하기도 했고, 유배길에 오른 이들의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해남의 고천암(庫千巖)호는 매년 겨울 수십만 마리의 철새들이 찾아오는 주요 철새 도래지로 이곳을 찾는 가장 대표적인 철새는 가창오리이다. 그 외에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여러 종의 희귀한 새들이 종종 눈에 띄어 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슈베르트를 들을 때면 나는 오래전에 본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2001)에 나오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슈베르트는 그렇게 산책하듯 연주하는 게 아니야!” 피아노 선생인 에리카가 학생인 안나를 꾸짖으며 내뱉는 말인데,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아내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면 이 장면에 대한 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인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1983)에 나오는 에리카에게 이 정도의 독설은 그저 일상적인 언어인 것만은 분명하다. 정신착란으로 죽은 아버지, 딸의 성공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빠진 어머니, 빈(Wien)의 음악계에서 밀려나 근근이 피아노 강사로 살아가는 독신 피아니스트의 마음의 상처를 가장 가까이서 위로하는 것은 언제나 병들고 불행한 슈베르트의 음악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명연주의 모방에 급급한 안나의 ‘산책’은 “슈베르트의 정신에 위배되는 죄악”일 수밖에 없었다. 자, 이 비유를 본래적인 의미로 환원하면, 누구에게나 아무 생각 없이 산책하듯 걸어서는 안 되는 장소가 있다. 내게는 해남이란 곳이 그렇다. . 1710. 종이에 담채. 38.5 × 20.5 ㎝.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은 한국인의 초상화 중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 윤선도의 증손이고 실학의 거두 정약용의 외증조부이다. ‘남도 답사 1번지’ 나는 1980년 봄부터 1982년 가을까지 해남에서 살았다. 그때 나는 스무 살을 갓 넘었고 평생을 두고 나눠 써야 할 삶에 대한 물음과 울분과 격정을 죄다 탕진한 상태였다. 빈털터리가 된 나는 도망치듯 자원입대를 했다. 예상대로 그곳에서는 그 어떤 추상적인 질문도 허용되지 않았다. 한겨울에 기초 군사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곳은 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한반도의 서남쪽 끝에 붙은 해남반도였다. 나는 그 해안선을 지키는 초병이었다. 푸른 이끼가 낀 돌담과 탱자나무 울타리, 안개에 갇힌 눅눅하고 비릿한 바다 냄새, 끝없이 펼쳐진 들판 사이로 뻗은 황톳길과 작은 실개천, 그 둔덕에 뛰놀던 흑염소 두어 마리, 우편물에 적힌 남편의 이름자도 모르고 늙어가는 부대 앞 점방 아줌마, 이것이 간신히 잦아든 내 불안과 마주친 해남의 첫인상이었다. 그 시절로부터 40년이 지나 다시 우슬치(牛膝峙)를 넘는다. 영암, 강진 방면에서는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읍내로 들어간다. 일행과 나는 예약한 숙소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낯익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한때 찬란했던 문화유산을 둘러보며 역사 속의 기억을 되새기고 감상에 젖는 행위를 답사나 여행으로 여긴다면 해남은 찾아갈 곳이 못 된다. 우선 찬란했던 시절이 없다. 따라서 이렇다 할 볼거리도 없다. 굳이 찾자면 옛 왕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권력과의 불화로 낙향한 은둔자나 유배형을 받은 죄인들이 살던 터전이 있을 뿐이다. 이런 해남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의 첫 권 첫머리에 ‘남도 답사 1번지’로 소개해 문화 답사 여행의 붐을 일으킨 사람이 유홍준 교수다. 연동마을 안쪽 비자나무 숲에 둘러싸인 해남 윤씨 종갓집인 녹우당, 두륜산 골짜기 고목들이 터널처럼 하늘을 가린 십 리 숲길을 지나 호젓하게 들어앉은 대흥사, 달마산 능선에 자리 잡은 고색창연한 미황사와 땅끝 전망대가 있는 사자봉까지 그의 구성진 입담에 이끌려온 많은 사람들은 널리 알려진 기존의 명승지와는 전혀 다른 평온하면서 아득하고, 친근하면서 멋스럽고, 소박하면서 정갈한 해남의 풍광에 매료됐다. 그러나 무심하게 산등성이를 감싸며 들판을 휘감는 은근한 햇빛과 바람의 고요가 한바탕 거센 비바람을 사정없이 쏟아부으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난 이후의 풍경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으리라. 해남 윤씨 종가 녹우당의 사랑채. 조선 17대 왕 효종(재위 1649∼1659)이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수원 집의 일부를 뜯어 옮긴 것이다. 현판은 윤선도의 증손자 윤두서의 절친한 친구이자 빼어난 서예가였던 이서(1662~1723)의 글씨로 전해진다. 해남은 바다의 남쪽을 뜻한다. 곧 땅의 끝에서 바다의 남쪽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곳이란 뜻이 담겨 있다. 고대에 해양 문화가 번성하던 시절에도 그랬고, 절해고도의 유배지에서 꿋꿋하게 살아서 돌아오게 만든 힘도 이 ‘땅끝’에 있었다. 보길도 부용동 정원의 중심 세연정 전경이다. 1637년 인조(재위 1623~1649)가 조선을 침략한 청 황제에게 항복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윤선도는 이곳에 정자와 연못을 축조하여 은거하며 지냈다. 그는 이 정원에 머물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비롯한 수십 편의 한시를 남겼다. 미황사는 한반도 최남단에 있는 절로 749년 창건되었다. 13세기 중국의 학자와 관리들이 이곳에 내왕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중국에도 알려진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왼쪽에 이 사찰의 중심 건물인 대웅보전이 있고, 그 뒤로 달마산의 수려한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달마산 봉우리 가파른 암벽에 자리하고 있는 도솔암은 대흥사의 말사 암자로 오랫동안 폐사지로 방치되었다가 2002년 중건되었다. 녹우당과 부용동 우리가 녹우당을 찾은 날은 편의점에서 산 우산이 별 소용이 없을 만큼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 빗속에서 녹우당의 이곳저곳을 소개하며 이 집에 얽힌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생애를 설명해준 이는 문화관광해설사이자 윤선도의 13대손인 윤영진(尹泳鎭, 68세) 씨다. 그가 기억하는 학창시절의 해남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신작로와 담벼락마다 붙은 간첩 신고 포스터로 집약된다. ‘대공(對共) 취약지역’이었던 해남의 환경은 자연스럽게 그를 군인으로 만들었다. 윤선도의 손자이자 자신의 직계 할아버지인 윤이후(尹爾厚, 1636∼1699)가 꼼꼼하게 일상을 기록한 『지암일기(支菴日記)』를 줄줄이 꿰게 된 것은 그가 육군 대령으로 전역을 하고 귀향한 뒤의 일이다. 윤이후는 조선 최고의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아버지이며, 윤두서는 강진으로 유배를 와서 18년을 산 정약용의 외증조할아버지다. 윤두서는 이 집에서 태어났다. 녹우당의 기둥이 왕실의 건축물처럼 둥근 것은 효종이 왕세자 시절 사부였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집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준 이는 ‘윤 대령’이다. 윤선도는 그를 챙겨주던 효종이 죽자마자 유배형을 받고 7년 만에 돌아와 효종이 지어준 수원의 사랑채를 뜯어 이곳으로 옮겼다. 그의 나이 여든한 살 때였다. 녹우당 옆에 지어진 유물전시관에는 윤두서가 그린 자화상과 조선전도가 있다는데 쏟아지는 비도 비지만 도난을 우려해 복제품을 걸어두었다는 말에 일행은 발길을 돌렸다. 윤선도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보길도 부용동이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완도에 속하지만 그 시절에는 주로 해남 백포에서 뱃길로 드나들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완도와 해남 갈두리 선착장 두 곳에서 30분마다 페리호가 오간다. 백포마을에는 해남윤씨 소유의 별서가 있다. 윤선도의 할아버지 때부터 이 만의 개펄을 막아 농토로 만드는 간척 사업을 벌였다는데 윤두서 대에는 그 규모가 상당해 이곳에 토지를 관리하는 전택(田宅)을 지은 것이다. 윤두서가 그린 진경산수화 중에 ‘백포별서도(白浦別墅圖)’가 있다. 아마 외국인이 부용동 정원을 둘러보았다면 한 부유한 조선 귀족의 뛰어난 안목과 풍류,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절묘한 설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손님이 오면 맞은편 언덕에서 북을 쳐 손님을 맞는 퍼포먼스를 연출하기도 했다는 말에는 탄식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한국인들의 속내는 좀 복잡하다. 그의 행적이 청빈이나 여민동락(輿民同樂) 같은 한국인들의 관념 속에 있는 선비 정신이나 삶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가 살았던 때가 두 차례의 큰 전쟁으로 농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곤궁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는 점은 자연을 벗 삼은 그의 고결한 품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윤선도가 보길도를 배경으로 쓴 『어부사시사』는 표현이 세련되고 역동적이며 감각적인 묘사로 한국문학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시조다. 하지만 이 시조에 화자로 등장하는 어부 역시 그가 서문에 썼듯 “목청을 같이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고 서로 노를 젓게 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위한 풍경의 일부로 연출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政爭으로 세 차례나 유배를 가야 했던 그의 憂國의 깊은 울분마저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이것이 내가 그 아름다운 부용동 정원을 ‘산보’하듯 맘 놓고 걸을 수 없는 소이다. 보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예송리 앞바다 전복 양식장에 작업선들이 떠 있다. 주변에 몽돌해변과 상록수림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대흥사와 미황사 해남문화원의 주선으로 해남에서 보건소장으로 은퇴한 전국성(70세) 씨로부터 해남의 근황을 들었다. 그는 잊고 지냈던 해남 사람들의 부드러움과 부지런한 면모를 일깨워주었다. 그는 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사회복지학을 가르치기도 한데, 일찍 가세가 기운 탓에 자립해야 했던 처지가 오늘의 자신을 키웠다고 스스로를 대견해 했다. 길 안내까지 자청해 나서준 덕에 우리는 이동 중인 차 안에서 좀 더 느슨한 대화를 이어갔다. 해남에서도 가장 오지였던 화원면이 전국 최대의 겨울배추 생산지이자 절임배추의 공급지가 되었으며, 목포와 도로로 연결되면서 화원의 땅값이 크게 올랐다는 소식에 우리는 무릎을 쳤다. 40년 전만 해도 ‘화원 출장은 하룻길’이었다는 말에 나는 보급품 일제 조사를 위해 오로지 걸어서 해안가 초소들을 찾아다니던 땀에 전 기억을 떠올렸다. 간척 사업으로 경지면적은 전국에서 가장 넓어졌지만 그 바람에 바다 물길이 바뀌어 마음만 먹으면 주전자 한가득 주워 담던 세발낙지와 그 많던 짱뚱어가 사라졌다는 말에는 아쉬운 탄식이 나왔다. 개발은 유적지의 형편이나 인심도 수시로 바꾼다. 대흥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새로운 식당가가 들어서고, 옛 사하촌에 200년 역사의 유선여관이 문을 닫았다는 얘기도 ‘전 교수’가 전해준 소식이다. 유선여관은 추운 겨울 천 리도 더 되는 먼 길을 여동생을 앞세워 면회를 온 어머니를 모시고 눈 덮인 대흥사 경전을 둘러본 뒤, 온돌방에 나란히 누워 갑갑한 집안 소식에 오지 않는 잠을 청하던 곳이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 귀양길에 친구인 초의선사가 머물던 이곳 대흥사에 들렀다가 대웅전에 걸린 당대의 명필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현판을 떼어 내고 자신의 글씨를 걸었다가 근 8년 만에 해배되어 올라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이광사의 현판을 되걸게 했다는 일화는 사실인 듯하다. “추사는 바다를 건너간 뒤 남에게 구속받거나 본뜨는 일 없이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박규수의 평이 설득력을 더한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 손자이고 추사는 그의 아버지의 친구다. 차의 명인으로도 알려진 초의가 만년에 기거해 차 문화의 성지로 알려진 일지암(一枝庵)을 보려면 대흥사에서도 40분은 더 산을 올라야 한다. 더 사납게 바뀐 곳은 미황사다. 건물 서너 채로 간신히 절간의 구색을 유지하던 이곳에 높은 석축을 쌓고, 초입에는 어지간한 큰 절에서나 보는 사천왕상도 두고, 또 템플스테이도 한다고 하니 살림의 규모가 크게 는 모양이다. 나무꾼이나 수도승들이 다녔을 법한 달마산의 좁은 옛길을 보수해 미황사에서 땅끝 마을까지 돌아 나오는 ‘달마고도(達磨古道)’라는 멋스러운 이름을 붙인 등산로는 꽤 소문이 나 있다. 단청을 올리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의 대웅전에 안도감을 느끼는 초로의 나그네에겐 이 佛事의 영광이나 수고로움보다 격세지감이 먼저 다가온다. 내가 처음 미황사를 만난 것은 싸리나무를 하러 달마산 근방에 사역을 나와서다. 이 싸리나무로 빗자루를 만들어야 연병장에 흩날리는 낙엽을 쓸고 제설 작업도 한다. 매서운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지방은 아니지만 한 번씩 한밤중에 얌전하게 쌓인 눈을 치우는 데는 이 싸리비가 제격이다. 고개를 들면 기암절벽들이 병풍처럼 늘어선 바위산이 보이고, 고개를 숙이면 눈도 뜨지 않은 새끼 강아지들이 어미 품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듯한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요사채 앞 툇마루 끝에 늙은 대처승 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물이라도 한 잔 얻어 마셨는지, 아득한 바다 너머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화원면 일대 배추밭 두륜산 대흥사 윤두서 고택 사자봉 땅끝전망대 땅끝에서 해남이란 지명은 유사한 지리적 환경과 뜻을 가진 또 다른 지명인 남해와 다르다. 남해는 남쪽에 바다가 있는 땅, 남쪽 바다와 면한 곳이란 뜻이라면 해남은 바다의 남쪽을 뜻한다. 곧 땅의 끝에서 바다의 남쪽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곳이란 뜻이 담겨 있다. 고대에 해양문화가 번성하던 시절에도 그랬고, 절해고도의 유배지에서 꿋꿋하게 살아서 돌아오게 만든 힘도 이 ‘땅끝’에 있었다. 이 끝과 시작이 공존하는 땅이란 이미지는 종종 소박한 시인들에게 서정을 불러일으키곤 하지만 그 극단에서 치열하게 이 역설의 서사와 싸움을 벌인 이는 시인 김지하(金芝河, 1941~)다. 김지하는 부정부패를 일삼던 이들의 부패상을 독창적 형식으로 풍자한 『五賊』이란 시를 발표한 이후로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첨예한 문제가 벌어질 때마다 선두에 서 있었다. 도피, 체포, 투옥, 고문, 다시 사면이란 굴레에서 몸과 마음이 지친 그는 1984년 가족과 함께 외가인 해남에 내려온다. 생활은 차츰 안정되었으나 정작 그 자신은 그 안에 녹아들지 못했다. 그 무렵 그는 땅끝에서 “옛날도 훗날도 함께 들어와 외치고 울고 가슴을 치며 눈물 삼키고 고개 숙여 걷는 것”들을 본다. 그 어둡고 불길하고 축축한 이미지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존재”인 ‘애린’이란 추상의 존재였다.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혼자 서서 부르는/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 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하략)”-「애린」(1985) 그 뒤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본격적인 정신과 치료를 받기 위해 해남을 떠나야 했다. 만년의 비트겐쉬타인은 “비종교적이고 우울한” 슈베르트의 선율에서 “사고가 첨예화되는 요점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철학적 탐구』)는 것이 그 요점이다.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언제나 승리자의 것인 건강함을 주요한 판단의 척도로 삼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것을 일갈한다. “‘건강함’이라니, 무슨 어리석은 수작인가! 건강함이란 그저 존재하는 것을 미화시킨 것일 뿐이다.”(『피아노 치는 여자』) 이 빈(Wien) 사람들도 사고력이 바닥나기 직전의, 미치기 직전의 우울감에서 스스로를 넘어서는 새로움을 발견하는 모양이다. 이들에게 해남이라는 ‘거친 땅’을 보여주고 싶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뒤엉킨 땅

On the Road 2020 SUMMER 1016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뒤엉킨 땅 조선 시대 서울에서 출발하여 동북 변방 함경도 경흥(慶興)에 이르는 유일한 교통로였던 경흥대로 – 지금은 그 일부가 국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마저 의정부와 철원을 지나 군사분계선 앞에서 끊겨 있다. 더 이상 북쪽으로 갈 수 없는 이 길은 누군가에는 고향으로, 다른 이들에게는 잃어버린 자신으로, 혹은 그저 그 무엇으로 돌아가고픈 바람을 대변한다. 북서울 꿈의 숲(Dream Forest) 전망대에서 바라본 인근의 연립주택가 풍경. 이 공원이 조성된 오패산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퇴각한 경로의 일부이다. 제롬 드 그루트(Jerome de Groot)의 『역사를 소비하다 Consuming History』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은 최근 2,30년 사이에 변화된 역사의 소비 행태를 그 이전과 확실히 구분 짓는다. 정보화라는 전례 없는 기술적 진보로 수많은 미디어가 등장하고, 여기에 대량 소비를 겨냥한 거대자본이 개입하면서 유행처럼 일어난 역사 소프트웨어의 붐 속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물론이고 텔레비전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리얼리티 쇼에서 게임까지 역사가 관여하지 않는 곳이 없다. 멀게만 느껴졌던 역사가 다양한 미디어 속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참여하고 체험하는 장르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역사 소비 시대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푸는 데는 두꺼운 책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론의 수사학이면 족하다. 대중문화는 시나 소설 같은 복잡한 장르와 달리 남다른 상상력이나 표현보다는 유형을 더 중시한다. 누구나 그럴 듯하다고 느끼는 것에 매달려 삶 자체를 쉽게 유형화하는 대중문화에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라는 설득력과 ‘전형적인 인물’들이 판을 치는 역사는 아주 질 좋은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역동적인 국가주의와 함께 민족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깊은 맛이 우러나야 더 많은 고객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비평가들의 조언도 하나 추가하자. 중국 지린성 쪽에서 바라본 두만강 하구의 북한-러시아 간 철교. 북한 라선경제특구에서 철도를 이용해 러시아 하산으로 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게 된다. ⓒ 연합뉴스 강원도 철원군 월정리역에 전시되어 있는 붉게 녹슨 열차 잔해. 맞은편에는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서진 북한군의 화물 열차 골격도 보존되어 있다. 서울과 동해안의 원산을 잇는 경원선은 1914년 전 구간이 개통되었지만, 남북 분단으로 인해 현재는 남한 내 일부 구간에서만 운행되고 있다. 폐역된 월정리역은 남방 한계선에 인접한 위치로 주요 관광지가 되었다. ⓒ 연합뉴스 두 고갯길 지난 3월 넷플릭스가 아시아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 출시한 『더 킹덤』 시즌 2는 17세기 조선을 역사적 배경으로 삼은 한국형 좀비 드라마다. 외신은 『워킹데드』의 느려터진 서양 좀비에 비하면 그 속도만으로도 공포를 느낄 만큼 빠른데다 『왕좌의 게임』에 버금가는 시대극을 더해 전 세계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 양반 계층의 의상 중에서도 갓이 ‘신비한 모자’로 화제가 되면서 코스튬 드라마로서의 볼거리도 한몫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 드라마의 최대 격전지는 자막으로도 여러 번 소개되는 문경 새재다. 조선이 개척한 중요 간선도로이자 문화의 소통로로 기능했던 영남대로의 길목인 이 가파른 고갯길은 수도 방어에도 매우 유리했다. 하지만 1592년 4월,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주력군인 고니시(小西行長) 부대가 이 고갯길을 넘을 때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8000의 기병을 과신해 고개 너머 평지에 진을 친 한 사령관의 오판 때문이었다. 충주가 뚫렸다는 소식에 선조는 새벽같이 한양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나섰고, 왜군은 사흘 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장악했다. 『더 킹덤』의 작가는 바로 이 문경새재에서의 아쉬움을 드라마를 추동하는 역사적 상상력의 한 발화점으로 삼은 것이다. 城에서 시작해 城으로 끝나는 서양의 역사 드라마와 대조적으로 한국의 역사 드라마는 길에서 시작해 길로 끝나는 관습적 비유에 익숙하다. 이때 고갯길과 그 關門(성문이 아니다)을 통과하는 일은 고난이나 국면 전환을 상징하곤 하는데 문경새재는 그 역사성과 빼어난 자연 경관을 더해 한국의 고갯길의 대명사로 대접받고 있다. 그러나 길 위에서 펼쳐지는 스토리텔링이 역사 문화상품으로 ‘소비’될 때 그 관심의 불균형은 심화되고 국가주의는 부풀려진다. 어떤 길은 기념하되 어떤 길은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다. 이번 기행은 잘 관리된 공원이나 친절하게 재현된 기념관은커녕 팻말이나 기념석 하나 없는 코스다. 걷는다기보다는 찾아 나선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이 비공인된 ‘역사를 다룬’ 불안정하고 몽상적인 방식은 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의정부 축석령 전투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무공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와 동상. 경흥대로의 일부 구간인 축석령은 서울 북부를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1950년 6월 26일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고 국군이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만드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서수라에서 동대문까지 구글 어스에서 한반도의 동북부 끝인 두만강 하류를 내려다보면 몇 개의 석호(潟湖)가 있는 아름다운 작은 만(灣)이 보인다. 강 건너편은 러시아의 하산이다. 간간이 러시아 말이 들릴 듯 한 거리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묘사했던 “오랑캐와 접경(接境)하여 백성(百姓)이 모두 굳세고 사납다”는 함경도 사람들이라면 몇 마디는 쉬이 알아들었을 것이다. 이곳 사람들의 기상은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라는 관직도 없는 선비가 의병 3,000명을 모아 왜군 2만 8,000명을 물리친 것으로도 이름 높다. 숙종은 이들의 공덕을 기려 길주에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세웠는데 러일전쟁 때 이를 본 한 일본군 장군이 제 나라로 반출했다 100년 만에 돌려받은 뒤 북한으로 되돌려 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만의 남쪽으로 뉴스에서 자주 듣던 나진 · 선봉 지구가 보인다. 북한이 가장 먼저 자유 무역 지구로 개방한 경제 특구다. 만의 동쪽 끝이 한국 최북단의 옛 서수라(西水羅) 항 자리인 듯싶은데 지도에는 항구의 흔적도 표기도 없다. 조선은 이곳에 서울과 연결하는 첫 번째 봉수대(烽燧臺)를 두고 적의 침략에 대비했다. 서수라 위쪽으로 은성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이곳이 옛 경흥이다. 서울로 가는 경흥대로는 서수라에서 경흥을 거쳐 잠시 두만강을 거슬러 오르다 우람한 산맥들 사이로 뻗는 실핏줄 같은 길을 따라 남쪽으로 길을 튼 뒤 함흥과 원산을 경유한 뒤 강원도 철령을 넘는다. 남쪽으로 뻗은 영남대로에 문경새재가 있다면, 동북 방면으로 가는 경흥대로에는 철령이 있다. 모두 백두대간을 넘는 분수령이다. 지도에서 보듯 철령은 높고 가파르다기보다는 비탈길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갯길이다. 이 같은 지형의 이점을 이용해 고려와 조선은 이곳에 요새인 철령관(鐵嶺關)을 세워 동북 방어의 진지로 삼았다. 이 철령관을 기점으로 북쪽의 함경도는 관북(關北), 서쪽의 평안도는 관서(關西) 지방으로 나눈다. 철령을 넘어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고 내려가다 보면 동남쪽에 그 이름난 금강산이 있다. 아쉬움을 남긴 채 서울이 있는 서쪽으로 길을 틀어 내려가면 차츰 길들이 희미해지는 지점이 남과 북을 끊어 놓은 휴전선 언저리다. 휴전선을 훌쩍 뛰어넘어 김화 평야에서 포천을 지나 축석령을 넘어 의정부로 들어서면 눈앞에 떡 하니 서울을 에워싼 북한산이 버티고 있다. 의정부역에서 전철을 타면 서울의 동대문역까지 40분이면 도착한다. 이번 여행을 굳이 구글 어스를 통해 가보지도 못한 북한 땅인 경흥 서수라에서 출발한 까닭은 이 길을 따라 도문선, 함경선, 경원선으로 연결된 1000㎞가 넘는 철길이 남북 분단으로 단절되었음을 알리려는 뜻도 있지만, 예부터 함경도 북쪽의 여진족들이 통상이나 외교를 위해 조선의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야인입경로(野人入京路)’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경흥으로 가는 길은 ‘되돌아가는 길’인 것이다. 1964년 6월 착공된 미아리 고개 도로 확장 공사 장면. 당시 이 길에는 인도가 따로 없어 차와 사람이 같이 지나다녀야 했다. ⓒ 서울시 현재의 미아리 고개. 1950년 북한군이 이 고개를 넘어 서울로 진격해 들어왔으며, 이후 15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 길을 통해 강제로 북한에 끌려가 라는 대중가요가 탄생하는 배경이 됐다. 돈암과 미아리 경흥대로의 공식적인 기점은 동대문이지만 여진족의 사신들은 동대문보다 북쪽에 있는 혜화문을 이용한 듯하다. 혜화문은 일제 때 도심을 넓히면서 헐린 뒤 지금은 그 위치만 알려져 있다. 혜화(惠化)는 ‘은혜를 베풀어 교화한다.’는 뜻으로 여진족들을 교화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혜화문을 나서 의정부 방면으로 가려면 성북천 위에 놓인 삼선교를 건너 삼선평(三仙平)이라는 들판을 지난 뒤 북한산 끝자락과 이어진 개운산 사이의 언덕을 넘어야 하는데 이 고갯길이 돈암동 고개다. ‘되너미 고개’로 불리던 지명을 한자로 바꾼 것이다. ‘되놈’이란 동북방의 이민족을 지칭하는 낮춤말로 언제부턴가 여진족들이 이 고갯길의 대표적인 손님이 된 것이다. 그 연유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깊다. 동북 지역의 토호였던 이성계의 아버지는 원명 교체기에 100년 가까이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동북 지역을 수복하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그 지위를 이어받은 이성계 역시 동북 지역의 토착 기반을 이용하여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으로부터 이 곳을 지켰다. 특히 여진족과의 화친은 그만의 외교적 자산으로 건국에 큰 힘으로 삼았다. 이성계는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이 길로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개경을 지켰으며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여생을 이 길을 오가며 살았다. 그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도 이 길과 이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경흥대로에는 태조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돈암동 고개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미아리 고개다. 고개 너머에 미아리라는 행정 지명이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미아miari'를 검색하면 두 가지 내용이 뜬다. 하나는 ‘미아리 텍사스’라는 별명을 가진 집창촌이 폐쇄되었다는 기사이고, 또 하나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싸우던 최후의 격전지라는 소개 글이다. 동두천, 의정부 전투에서 북한군 주력인 인민군 1군단에 밀린 국군은 미아 사거리에서 돈암동 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탱크 부대를 막기 위해 개운산 능선에서 마지막까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로 개운산은 민둥산이 되어 버렸지만 포연이 가신 지금은 전망 좋은 아파트단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에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대중가요가 빅히트를 하면서 이 지명을 다시 한 번 널리 알렸다. 그러나 이 지역 사람들은 ‘한 많은’ 미아리 고개보다는 돈암동 고개라는 지명을 선호한다. 옛길을 복원해 문화 탐방로 만들기에 공을 들이는 지자체의 사업에서도 ‘미아리 고개’란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노랫말에 나오는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끌려간 민족의 비극적인 현장으로 기억되는 것이 영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게다가 끌려간 사람의 주체가 후퇴하는 인민군에게 끌려가다 학살당한 우익 인사인지, 정부의 말만 믿고 서울에 남아 있다 인민군에 부역한 혐의로 끌려가 처형된 사람인지 모호하다는 것도 한 이유다. 서울 수복 후 부역자로 몰려 검거된 사람은 5만여 명이고, 이 중 160여 명이 사형을 당했다. 1. 상상톡톡미술관 2. 미아리고개 예술극장 3. 미아리 점성촌 4. 혜화문 동두천, 의정부 전투에서 북한군 주력인 인민군 1군단에 밀린 국군은 미아 사거리에서 돈암동 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탱크 부대를 막기 위해 개운산 능선에서 마지막까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로 개운산은 민둥산이 되어 버렸지만, 포연의 기억이 사라진 지금은 전망 좋은 아파트 단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북서울 꿈의 숲은 서울에서 4번째로 큰 규모의 공원이다. 과거 놀이공원이 있던 부지에 2009년 개장되었으며 지상 3층, 높이 49.7m의 전망대를 갖추고 있다. 돈암동 제일시장은 1952년에 자리 잡기 시작한 전통 시장을 1970년대에 들어 새롭게 단장한 지역의 명소이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오래된 가게들이 많아 인근 주민들에게 친숙한 일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꿈의 숲을 만들다 미아 사거리에서 북한산 칼바위와 오패산 사이에 난 수유리 고개를 넘은 뒤 중량천을 따라 의정부가 있는 북쪽으로 가는 3번 국도는 몇 차례 넓혀지고 비껴간 것을 감안하면 얼추 경흥대로와 나란히 간다. 큰 고개도 없다. 그래도 옛길의 맛을 좀 더 느끼고 싶다면 방학사거리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큰 길에서 왼쪽으로 한 블록 뒤로 들어가면 폭이 10미터 정도 되는 길이 도봉산역 앞까지 약 3㎞ 정도 이어진다. 길의 중간쯤에 북서울 중학교가 있다. 이 길이 옛 경흥대로다. 길의 양쪽은 대개 상가가 아니면 시장통이다. 놀랍게도 500년도 훨씬 넘은 길이 과거의 재현이 아닌 아직 생활 속에서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당을 쓸고 물건을 사고팔며 살아가는 이 길이 그 옛날 어떤 놀라움과 아우성과 기쁨의 시간들로 흘러넘쳤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간간히 길가에 보이는 표지판에는 도봉산 둘레길과 왕족이나 세도가들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 세세히 그려져 있을 뿐이다. 서울의 동북부나 경기도 의정부 방면에 사는 사람들에게 미아리 고개는 도시로 가는 일종의 관문과 같았다. 미아리 고개를 넘지 않고는 그럴 듯한 물건을 사거나 볼거리를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청춘 시절을 추억하며 쓴 『그 남자네 집』에서 ‘그 남자’가 “어둑시근한 카바이트 불빛이 무대 조명처럼 절묘하게 투영된 자리에서”, “나직하고도 그윽하게 정지용과 한하운의 시를 암송하곤 했”던 곳도 삼선교 포장마차 집이었고, 그 빤한 감자국밥이나 선지가 들어간 우거지된장국도 돈암동 제일시장에서 먹으면 왠지 국물 맛이 더 깔끔하게 느껴졌다. 전차 종점이 있던 돈암동까지는 도시였고, 전차가 다니지 않는 미아리는 시골이었기 때문이다. 1939년에 개통되어 1968년까지 30년 간 운행된 전차가 이런 인식을 깊게 심어주었다면, 2002년 서울시의 균형 발전을 위한 뉴타운 지정은 미아리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바꿔 놓았다. 개발의 속도와 규모는 엄청나 불과 10여년 만에 사람들의 기억에 있는 미아리의 이미지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그 대표적인 상징이 오패산 자락을 주민들의 생활 속 휴식처이자 문화 공간으로 펼쳐 놓은 ‘북서울 꿈의 숲’이다. 이곳 전망대에 오르면 서울의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대중문화 속에서는 그럴듯하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며, 그럴듯하지 않은 상상은 상상이 아니다.”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의 말이다. 의정부역 앞에서 북쪽으로 뻗은 길은 크게 두 방면으로 갈라진다. 오른쪽으로 튼 동북쪽 길이 축석령을 넘어 휴전선을 지나 북한 땅인 원산, 함흥을 거쳐 두만강으로 가는 경흥대로다. 그대로 직진하면 동두천, 연천, 철원을 지나 역시 휴전선을 넘어 압록강으로 이어진다. 나는 땀내를 풍기며 휘적휘적 내 곁을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본다. 굶주림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장사치들과 섞여 양주골 누원(樓院)까지 내려온 북관 선비가 살곶이로 가는 중량천 배 위에 짐을 부리고 홀가분한 얼굴로 다시 축석 고개를 넘고 있다. 마음속으로는 선비로 돌아갈 날을 염원하면서. 바람이 잔뜩 든 젊은 양반 하나가 노새를 타고 가다 졸음에 겨워 비탈길에서 잠시 휘청거린다. 등짐을 가득 진 어린 종들은 발바닥이 부르튼 줄도 모르고 마냥 즐겁다. 금강산은 아직 멀다. 긴 소총을 어깨에 메고 대열의 후미에서 목청껏 군가를 부르며 행군하는 소년병의 쉰 목소리가 문득 잠긴다. 나는 어느 쪽으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다.

지혜의 눈으로 보는 ‘보이지 않는 땅’

On the Road 2020 SPRING 1182

지혜의 눈으로 보는 ‘보이지 않는 땅’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여주는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다. 남한강이 가로지르고 있어 예로부터 수운(水運)을 이용한 미곡 집산지였으며, 지금도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또한 고려 후기부터 도자기 제조가 시작되어 지금도 국내 도자기 산업의 중심지이다. 경기도 여주 파사성에서 내려다본 한강과 주변 산들이 어우러진 풍경이다. 파사성은 둘레 약 950m, 높이 약 6.5m의 성곽으로 6세기 중엽 이후 신라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강을 따라 진입하는 적을 감시하고 견제하기에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미술사학자 유홍준(You Hong-june 兪弘濬)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한국 인문 도서 최초의 밀리언셀러로 1990년대 초반 전국적인 답사 열풍을 몰고 온 화제작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문화유산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즐길 수 있게 독자의 눈높이로 풀어준 유창한 얘기에 담긴 그의 견해는 적잖은 외국인들에게도 길잡이가 되곤 한다. 그는 이 시리즈 여덟 번째 권에서 외국인이 하루라는 제한된 시간에 한국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둘러보고자 하는 경우 추천할 만한 곳으로 두 개의 코스를 꼽았는데, 그중 하나가 여주다. 그는 여주를 꼽은 이유로 “우리나라 절집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신륵사와 “폐사지의 역사적 정취”가 있는 고달사, “엄숙하면서도 품위 있는” 세종과 효종의 두 왕릉, 그리고 “남한강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CNN도 아시아 정보 사이트인 ‘CNN GO’에서 2012년 ‘한국에서 가 봐야 할 아름다운 50곳’에 여주 신륵사를 포함시켰다. 그런데 이곳을 다녀간 외국인들의 감탄과는 달리 정작 한국인들의 반응은 심드렁하다. 유홍준이 추천한 볼거리와 미학적 설명이 한국인에게는 별다른 호기심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범하고 익숙하다. 그는 왜 관광 안내서에 소개된 화려한 유적지나 명승지를 제쳐두고 소박하고 평범한 여주를 선택했을까. 이 글은 그의 권유에 혼란스러워 할 독자들에게 먼저 다녀간 한 여행자가 보내는 편지다. 과연 이 편지는 당도할 것인가. 홍천면 계신리 남한강가 바위 절벽에 새겨져 있는 높이 223㎝, 너비 46㎝의 이 마애불 입상은 화려한 옷 주름, 세련된 연꽃 대좌와 광배 등 통일신라(676~935)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수운의 안전을 위해 조성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드린다. 높이 약 9.4m의 신륵사 다층전탑은 10세기 무렵 중국으로부터 전래한 새로운 양식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개 사찰의 탑들이 중심 전각인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전탑은 절의 동남편 바위 언덕 위에 세워져 한강을 굽어보고 있다. 보물 226호이다. 보이지 않는 땅 동양 의학을 처음 접하는 서양인 의사들이 놀라는 점 중 하나가 동양의 인체도에는 근육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근육질의 남성 이미지를 보며 해부학을 공부한 서양인들의 눈에는 평면의 형상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혈 자리와 기의 흐름만을 나타낸 이 기이한 인체도가 공상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 두 세계관의 차이를 멕시코 출신의 의사이자 작가인 곤살레스 크루시(Gonzalez Crussi)는 이렇게 정리한다. 서양인들이 근육이라는 의지를 나타내는 자발적인 도구를 통해 복잡한 인체의 체계를 드러내고자 했다면, 동양인들은 비자발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혈관과 심장의 맥박을 통해 육체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을 인식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홍준은 한국의 자연과 문화유산의 ‘근육’이 아닌 그 안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국인들에게는 ‘풍수지리’라는 땅을 보는 고유의 안목이 있다. 지리는 서양과 같은 개념이지만, 풍수는 설명하기가 좀 까다롭다. 풍수를 이해하려면 먼저 ‘기’라는 개념을 알아야 하는데, 서양에는 이를 대체할 만한 마땅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기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형태가 있는 모든 물질의 근원으로 정의하지만, 때론 다양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모호하고 포괄적인 개념으로도 사용한다. 이를테면 땅속에는 살아 있는 기가 있고, 이 기에 힘입어 만물이 생겨난다는 것이 동양 사상의 오랜 뿌리다. 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보이지 않는 지기(地氣)를 살피는 것이 바로 동아시아의 전통적 지혜인 풍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땅(terra invisibilis)’이란 바다와 숲, 산 같은 ‘보이는 땅’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시간과 경계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번성했던 강 마을 여주는 서울과 닮았다. 두 곳 모두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앙을 동서로 가르는 한강이라는 물길이 관통하며 주변 산들과 적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강의 뱃길을 통하면 서울에서 여주까지는 하룻길이다. 최고의 풍미를 자랑하는 여주 쌀과 서해를 통해 들어온 소금과 젓갈은 물론 싱싱한 해산물까지 당일 배송으로 주고받을 수 있었던 꽤 오래된 일일 생활권이었다. 여주가 살기 좋은 곳으로 입소문에 오른 것은 왕권을 강화한 고려(918~1392)가 내륙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이나 특산물을 한강을 통해 배로 실어 나르기 시작하면서다. 여주가 장삿배와 세곡선의 중간 기착지가 되면서 눈 밝은 선비와 관리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조선(1392~1910)이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로는 세도가의 고장으로 거듭났다. 그 시절에 도성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당일 입궐’이 가능한 지역이란 점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조선 왕조의 왕비들 중 20%가 넘는 사람들이 여주 출신이란 점, 또한 수도권에서 건물이나 석탑 같은 국보와 보물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고장이란 점이 그 증거다. 강을 이용한 물류는 빠르고 편한 반면에 사고가 나면 재산은 물론이고 사람의 목숨까지 잃는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 수운의 안전을 위한 풍습 중 하나가 부처님께 정성으로 기원하는 것이었다. 강가의 암벽에 새겨진 마애석불은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두 곳이 있는데 모두 한강변에 있다. 하나는 중부 지방인 충주 창동리의 옛 금천나루 옆에 있고, 또 하나는 여주 이포나루 바로 윗자리인 계신리 ‘부처울 습지’에 있다. 암석의 재질이나 상태는 물론 그 규모나 모양이 달라도 둘 다 통일신라(676~ 935)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시대의 작품이다. 지금은 댐이 들어선 탓에 수량이 늘어 물가에서 그리 높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암벽에 새겨진 불상을 강 위의 배에서 올려다보며 무사안위를 빌었을 것이다.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신륵사는 한국 전통 절집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곳으로 석등, 다층석탑, 극락보전 등 국가 지정 보물을 포함한 다수의 유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CNN이 ‘한국에서 가 봐야 할 아름다운 50곳’에 포함시키기도 한 이 절은 대부분의 사찰과 달리 강가에 위치해 있다. 신륵사 전탑과 고려청자 한국의 불교 사찰이 대개 산에 자리하고 있는 것과 달리 여주 신륵사는 드물게도 강과 관계가 깊다. 한강을 굽어보는 암석 위에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은 신륵사에 남은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지금은 가람의 중심을 법당에 두지만 초기에는 탑이 그 중심이자 전부였다. 한강은 한반도 남쪽에서는 가장 많은 수량을 가진 데다 강폭이 좁고 강수량도 여름철에 집중되다 보니 수해가 잦았다. 여주의 전탑이 한강을 굽어보는 강가에 들어선 것은 수해로부터 벗어나길 바라는 염원에서다. 특히 전탑이 서 있는 절벽 아래는 강물이 휘돌아나가는 곳이라 물살이 거세 배들이 전복되는 사고가 잦았다. 따라서 절벽 위에 높이 전탑을 세운 것은 강을 오가는 배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동시에 이 가파른 땅의 나쁜 기운을 제압하는 풍수지리의 비보(裨補)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비보란 약하거나 모자란 것을 도와서 보태거나 채운다는 뜻이다. 산과 바위가 근육이라면, 강은 땅의 핏줄이니 이 전탑을 세워 땅의 나쁜 기를 누름으로써 피를 순하고 맑게 정화하는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여느 절들의 탑들과 달리 한강을 굽어보는 암반 위에 탑을 세운 것도 바로 그 풍수지리의 영향이다. 지금은 그 처음의 의미를 잃고 강월헌(江月軒)이라는 정자에 가려 있다. 전탑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양식이다. 중국과 달리 벽돌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많은 승려들을 당에 보내 새로운 불교의 경향을 배우도록 독려하는 등 당의 제도와 문물을 크게 받아들였는데, 이 전탑은 그 교류의 유산으로 보인다. 신륵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암리 고려 백자 가마터는 10세기 후반에 조성된 중국식 벽돌 가마로 그 운영 시기가 전탑의 건립 시기와 겹친다. 서해를 건너온 중국인 도공들이 전탑의 제작을 주도하고 이를 고려의 도공들이 돕는 그림이 그려진다. 전탑 벽돌에 새겨진 당초문이 바로 그 흔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중국에서 들여온 벽돌 가마가 『고려도경』(1123)을 쓴 송나라 서긍(徐兢)이 감탄한 고려의 비색 청자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주로 경기도 일대에 퍼진 중국의 벽돌 가마는 고려의 도공들에 의해 점토를 사용한 한국식 흙 가마로 서서히 바뀌면서 한 번에 고온으로 굽는 중국의 방식과 달리 초벌과 재벌로 나누어 굽는 기술이 널리 퍼졌다. 이런 기술적 진화로 한반도 어디서나 구하기 쉬운 흙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고려 청자가 절정기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도자기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지금도 여주에는 약 400개의 도자기 업체가 운영되고 있다. 면적이 약 6만㎡에 달하는 고달사 폐사지는 8세기 후반 창건되어 여러 세기에 걸쳐 번창했던 절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이곳에는 아름다운 2기의 승탑을 비롯해 훌륭한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달사지부도는 높이 4.3m의 고려 시대 승탑으로 고달사지 뒤편 낮은 산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국보 제4호로 지정된 이 승탑은 정제된 조형과 세련된 조각 수법이 돋보이는데, 특히 중대에 조각된 용과 거북의 형상이 매우 입체적이다. 살아 있는 땅, 고달사지 서울에서 여주를 오가는 육로는 크게 강북 방면 길과 강남 방면 길로 나뉜다. 어느 길을 택하든 잰 걸음으로 이틀은 걸렸을 길이다. 우선 강북 방면 길은 삼국 시대부터 남한강과 인접한 고을과 그 주변의 사찰들을 이으면서 뭍길의 교통을 연계하고 지원하던 옛길이다. 파사성(婆娑城)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의 풍광도 으뜸이다. 탁 트인 남쪽으로는 서쪽으로 길게 뻗은 강줄기 위에 걸린 이포대교를 내려다볼 수 있고, 북쪽으로는 멀리 장대한 태백산맥의 연봉과 마주한다. 이곳에 서면 왜 이곳에 성을 쌓고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줄기차게 싸움을 벌였을까 하는 궁금증은 절로 사라진다. 정변으로 쫓겨나 충주로 귀양 가던 고려의 목종(재위 997∼1009)과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으로 피신하던 공민왕(재위 1351~1374)이 쓸쓸히 지나간 길이기도 하다. 그 길목에 “폐사지의 역사적 정취”가 느껴진다는 고달사가 있다. 폐사지가 된 지금도 고달사의 광활한 빈터에 놀라게 되지만, 고려 때의 고달사는 사방 30리를 경내로 삼아 수백 명의 승려가 살았다고 하니 고려 왕실로부터 엄청난 우대와 경제적 지원을 받았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고달사의 폐사 이유를 찾는 학자도 있다. 14세기 말 유교 국가인 조선이 들어서면서 국가의 지원과 특혜가 사라지자 불교가 스스로 자립할 힘을 잃은 것이라는 해석이다. 고달사지에는 세련된 조각 기법의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를 비롯하여 승탑과 사탑 등 훌륭한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기품 있는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도 볼거리지만, 이 사탑들은 이른바 비보사탑(裨補寺塔)으로 땅의 기운을 빌려 왕의 권위를 지키고 알리는 방편으로 삼아 민중들의 관심을 더 크게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고달사지에 서서 아무리 좌우의 산세를 둘러봐도 대가람의 위엄을 찾아보긴 어렵다. 그저 찬 바람 소리를 들으며 절터 뒷산을 서성일 때 드는 마음만은 공허하다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온화하고 포근하다. 이것이 생기가 있는 살아 있는 땅의 느낌인가. 한국의 불교 사찰이 대개 산에 자리하고 있는 것과 달리 여주 신륵사는 드물게도 강과 관계가 깊다. 한강을 굽어보는 암석 위에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은 신륵사에 남은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효종(재위 1649~1659)의 능 바로 아래에 자리한 왕비 인선왕후의 능이 각종 석물에 둘러싸여 있다. 능서면 영녕릉 사적지에는 서쪽에 세종대왕(재위 1418~1450)과 왕비 소헌황후의 합장릉이, 동쪽에는 효종과 왕비 인선왕후의 쌍릉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능들은 엄숙하면서도 품위 있는 전형적인 조선 시대 왕릉의 모습을 보여 준다. 지혜의 눈 강남 방면 길은 조선 시대 도성에서 부산 동래에 이르는 주요 간선망과 연계되어 세종대왕이 외가인 여주로 강무(講武)를 갈 때 또는 역대 왕들이 이곳에 잠든 세종과 효종 두 왕릉을 참배할 때 다니던 길이다. 경기도 광주에 있던 세종대왕의 능을 나중에 여주로 다시 옮긴 것은 이곳이 한반도 최고의 명당이라는 풍수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조선의 왕릉은 모두 다 크고 아름답다. 한강의 풍광을 바라보는 최고의 전망대는 영릉에서 남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강변에 있는 영월루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남한강변 서쪽으로 들어선 여주 시가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고, 고개를 들면 강 건너 북쪽으로 규모가 엇비슷한 산들이 멀리 혹은 가까이 그림처럼 늘어서 있다. 그중 어딘가에 고달사를 품 안에 안은 혜목산이 있을 것이다. 혜목(慧目)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5개의 눈 중 하나로 지혜의 눈을 뜻한다. 불교 경전 중 하나인 『원각경(圓覺經)』에는 “밝은 해를 일산(日傘)으로 가린다 해도 지혜의 눈은 맑고 순수하다(幻翳朗照 慧目清净).”는 구절이 나온다.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도 나의 몸과 마음은 이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청정한 지혜의 눈이 아직 먼 것인가. 1. 이포대교 2. 여주세계생활도자관 3. 황포돛배 나루터 4. 명성황후 생가

모든 고향의 이름은 밀양이다

On the Road 2019 WINTER 1309

모든 고향의 이름은 밀양이다 밀양은 인구 10만 8천여 명의 작은 내륙 도시이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부산광역시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47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밀양은 서울에서는 자동차로 약 4시간 남짓 걸린다. 도심을 뚫고 흐르는 강 주변으로 구석기 시대 주거지부터 철기 시대 유적과 조선 후기 유림의 근거지까지 오랜 역사의 숨결이 깃들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밀양시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위양못은 약 63,000㎡ 규모의 저수지로 신라 시대에 농업 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되었다. 인근에 가산저수지가 들어서면서 본래의 기능을 잃었지만, 1900년 지어진 정자 완재정(宛在亭) 주변의 풍광이 빼어나 관광객들을 불러모은다. 한 편의 영화로 기억되는 도시들이 있다. 그중 이창동(Lee Chang-dong 李滄東) 감독의 2007년 개봉작 『밀양』(Secret Sunshine)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기를 바란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 인터넷 기사에는 아직도 주인공 전도연(Jeon Do-yeon 全道嬿)의 연기에 “소름 끼쳤다”는 댓글이 붙어 다닌다. 그는 이 영화로 제60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의 첫머리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아저씨, 밀양이 어떤 곳이에요?” “밀양이 어떤 곳이냐? 뭐라 카겠노… 경기는 엉망이고예, 그다음에… 한나라당 도시고, 그다음에… 부산하고 가깝고, 말씨도 부산 말씨고. 좀 급하고, 말씨가. 인구는 15만 정도였다가 요새는 한 10만으로 줄었고….” “아저씨, 밀양이란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뜻요? 우리가 뭐 뜻 보고 삽니꺼? 그냥 사는 거지.” “한자로 비밀 밀(密), 볕 양(陽). 비밀의 햇볕. 뜻 좋죠?”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주인공은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가다가 그곳으로 막 접어드는 도로에서 자동차가 고장이 나 정비소로 견인되어 가는 중이었다. “여행 다니시는 모양이지예?” “아뇨. 밀양에 살러 왔어요.” ‘살기 위해’ 온 그곳에서 그의 어린 아들은 유괴되고 살해된다. 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마을을 이룬 곳, 그들의 삶을 둘러싼 여러 조건들이 끊임없이 평범한 개인의 행복과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곳, 어떤 이에게는 희망을 주지만 어떤 이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을 안겨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게 하는 곳, 그러나 대다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냥저냥 눌러 사는 곳. 그렇다면 모든 도시의 이름은 밀양이다. 전국의 전통 누각 중 가장 오래된 누각의 하나로 손꼽히는 영남루는 밀양강 옆 높은 절벽에 위치한다. 조선 시대의 내로라하는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풍경을 극찬한 여러 글과 글씨가 누각 내부에 편액으로 걸려 있다. 강의 도시 밀양은 강을 끼고 있다. 이 불변의 조건은 밀양의 옛날과 오늘을 구성한다. 강은 동쪽으로 여러 차례 휘돌며 남쪽으로 흐르다 낙동강과 합친 뒤 남해 바다로 들어간다. 이 강이 밀양강이다. 밀양 읍내는 이 강의 북쪽에 있다. 밀양이란 지명에 쓰인 한자 ‘양(陽)’은 ‘볕’이란 뜻도 있지만, 강 이름 뒤에 쓰일 때는 ‘강의 북쪽’을 일컫는다. 북쪽에 산이 있고 남쪽에 강이 있으니 얼마나 볕이 잘 들겠는가? 밀양의 지명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3세기 중국 사서인 『삼국지』에 보인다. 이 책에 언급된 ‘미리(彌離)’라는 국가명은 고대 한국어 ‘미르’를 중국 옛 한자로 바꿔 표기한 것이다. 고대 한국어의 ‘미르’는 물 또는 물의 신으로서 용(龍)을 뜻한다. 그러니 ‘비밀의 햇볕’이라는 이름 풀이는 이창동 감독 스스로가 밝혔듯이 자의적인 시적 인식에 불과하다. 밀양강 주변에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과 오래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공존한다. 2001년에 완공된 밀양댐 북쪽 구릉에는 공사 중 발굴된 2만 7000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이 있다. 이로써 밀양에 사람이 살았다고 입증할 수 있는 시기는 3세기보다 더 올라갔다. 그런가 하면 밀양강 하천 충적지에는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유적들이 곳곳에 있다.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고 고속도로가 그 옆을 지나는 금천마을에는 청동기 시대 논농사 유적이 있다. 산 위 움집에서 비옥한 하천 근처 땅으로 내려오는데 수만 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집터는 자연 제방 위에 있고, 밭 자리는 집터 바로 아래, 논 자리는 그보다 낮은 곳에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봄이 오면 돌보습으로 땅을 갈아 기장이나 옥수수 따위를 심고, 그렇게 수확한 곡식을 빗살무늬토기에 저장해 추운 겨울을 났을 것이다. 좌절도 기쁨도 지금 우리보다 먼저 느꼈을 당시 사람들의 이 소박한 살림살이 흔적 위로 ‘비밀의 햇볕’이 비춘다. 그들이 지키고 싶어 했던 소중한 가치들은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다. 영남루 옆으로 부속 건물인 침류각이 계단식 월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천태산 자락에 자리 잡은 부은사는 금관가야의 2대왕인 거등왕이 부친인 수로왕을 기리기 위해 200년 무렵 세웠다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굽이쳐 흐르는 밀양강 위로 낙동대교와 삼랑진교가 내려다보인다. 철기 문명의 도시 강바닥에서 출토된 허물어진 배의 구조물을 보면 옛 사람들이 강을 오르내리며 고기잡이를 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에게 배는 바람의 힘을 이용할 만큼 과학적이며 온갖 도구를 사용해 만든 첨단의 기술 문명이었다. 그들은 밀양강과 합쳐져 바다로 흘러가는 낙동강으로 종종 배를 몰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 모험성과 진취성으로 낙동강 하류 김해 지역에 새로운 북방 이민 세력이 세운 가락국과 연합해 500년 동안 가야 연맹의 일원으로 한반도의 철기 문명을 이끌었다. 밀양강을 바로 옆에 낀 마을 중에는 ‘쇠가 나는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금곡’이란 지명이 두 군데 있다. 흥미롭게도 두 곳 모두에서 제철 유적이 발굴됐다. 상동면에 있는 금곡마을과 그 인근에는 쇠를 달굴 때 나오는 부산물인 쇠 부스러기가 산을 이룰 정도로 쌓여 있었고, 얼마 전 도로 공사 중 발굴된 삼랑진읍 금곡마을에서는 제철로에서 폐기장까지 일련의 제철 과정이 모두 발견되었다. 밀양강 주변에는 예전부터 풍화나 침식으로 강가에 퇴적한 사철(砂鐵)이 많았다는 얘기다. 이런 고고학적 발굴은 밀양이 주변국은 물론 일본과 중국에도 철을 수출했으며, 또한 가공한 철을 끈으로 묶어 화폐처럼 사용했던 변한(4세기경까지 낙동강 하류에 있었던 부족 연맹) 12개국 중 일원으로 활약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이 변한이 ‘철의 왕국’으로 일컬어지는 가야연맹으로 발전했으며, 신흥 세력인 신라에 병합된 뒤에는 자원과 기술을 제공해 신라가 강력한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불교의 도시 한반도의 다른 지역처럼 밀양에도 산천경개가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절이 들어서 있다. 그 중에 이곳 사람들이 각별하게 여기는 절은 부은사와 만어사이다. 부은사는 해가 지는 밀양강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만어사는 검은 암괴류(巖塊流)가 절 앞 계곡에 길게 펼쳐져 있어 경관이 독특하다. 밀양 사람들은 이 두 절을 가야 불교의 성지로 여긴다. 역사책은 가야가 신라보다 앞선 5세기 무렵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부인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사를 지으면서 불교를 공식 수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절과 관련한 구비전승은 그 시기를 가야의 성립 초기로 이끈다. “수로왕이 만어사를 창건할 때 낙성식에 참석한 스님들이 부은사에서 자고 갔다”는 전설을 토대로 볼 경우 불교 전래 시기는 1세기경으로 앞당겨진다. 허황후가 인도에서 올 때 가지고 왔다는 파사석탑(婆娑石塔)에 관해 『삼국유사』는 “이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논의와 별개로 신라 불교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데 가야 불교가 기여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가야 문화는 그 고유성과 영향력을 인정받아 신라 시대는 물론 조선 시대까지 그들의 문화를 기리는 행사가 계속 열렸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지난 10월에는 2020년 3월 1일까지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가야 본성(本性)-칼과 현을 위해 김해의 수로왕비릉에 있던 파사석을 서울로 옮기기에 앞서 이전을 알리는 고유제를 지냈다. 이 제사에 지역의 정치인 등 유력 인사들이 참석했다는 것은 그 후손들이나 지역민들에게는 허황후 얘기가 단순히 전설이 아니라 역사로 함께 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밀양 시내 곳곳에 ‘가야’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상점들이 많은 것도 그 증거이다. 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마을을 이룬 곳, 그들의 삶을 둘러싼 여러 조건들이 끊임없이 평범한 개인의 행복과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곳, 어떤 이에게는 희망을 주지만 어떤 이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을 안겨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게 하는 곳, 그러나 대다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냥저냥 눌러 사는 곳… 밀양 사람들이 불교의 성지로 여기는 만어사는 1세기경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경내에는 12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있다. 만어사 주변 너덜 지대에는 ‘만어석(萬魚石)’이라 불리는 검은 돌들이 가득 널려 있다. 전설에 의하면 용왕의 아들을 따라 온 수많은 물고기떼가 돌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커서 천연기념물 제5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남대로의 도시 영남대로는 수도 한양에서 한반도의 동남쪽 끝인 동래를 잇는 길로 조선 시대 가장 대표적인 육로였다. 천년 넘게 이용해 온 바다로 나가는 물길 대신 밀양이 이 길의 경유지가 되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상징하는 바가 크다. 우선 한반도 안에 통일된 국가 체제가 이어지면서 이웃 군현은 물론이고 중국을 오가는 빠르고 안정적인 길들이 확보되었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원의 쇠퇴 이후 일본의 국력이 강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왜구들의 발호로 이어져 활발했던 한반도의 수운(水運)이 그들의 횡포로 거의 마비되기에 이른다. 조선의 육로 확보는 이런 고육지책의 결과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영남대로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공격로가 되기도 했다. 부산포로 들어와 동래성을 함락한 뒤 교두보를 확보한 왜군이 양산을 지나 밀양의 관군과 마주친 곳은 삼랑진읍에 있는 작원관(鵲院關)이다. 이곳은 동래에서 서울을 연결하는 교통과 국방의 중요 관문이다. 그러나 고작 300여 명의 병력으로 1만 명이 넘는 적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왜군은 이 길을 통해 18일 만에 한양까지 점령했다. 그나마 위로를 주는 것은 밀양 출신 스님인 사명당(1544~1610)이 2000명의 승군을 모아 왜군이 점령한 평양성 탈환 전투에 참여하는 등 여러 곳에서 큰 전공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선조의 특사로 파견되어 교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 3000명을 데리고 돌아오기도 했다. 밀양읍성으로 오르는 길목에 사명당의 동상이 밀양강을 내려다보며 서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앞선 기술 문명이 있었고 해양 지향적이며 다문화적인 사회 시스템을 누렸던 밀양이 영남대로에 편입된 지 100년도 되지 않아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의 새로운 구심점인 사림파의 고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15세기 후반 신진 사류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밀양 출신 김종직(1431~1492)과 그의 제자들은 관료 세력들에 맞서 그들의 비리는 물론 임금의 처신까지 비판했고, 의리와 실천을 강조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밀양 부북면에는 김종직의 생가와 묘를 비롯해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예림서원이 있다. 나루와 기차역의 도시 조운 제도가 복원되어 삼랑리에 조창이 생기고 다시 세곡선이 오가게 된 것은 국제 정세가 안정되고 세금을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해서 내는 납세 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18세기 중반의 일이다. 영남대로와 이어진 수운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삼랑리는 관원들과 선주들이 일을 보던 사무실과 창고, 주막, 여인숙, 점포 등이 저잣거리를 이루어 붐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번영도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삼랑진에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끝이 났다. 기찻길은 대체로 영남대로를 따라 놓였다. 그 바람에 삼랑리는 다시 평범한 나루터가 되고, 삼랑진역은 읍의 중심이 되면서 새롭게 번창했다. 삼랑진역은 이광수(1892~1950)가 쓴 근대 문학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1917년)에도 등장하는데, 그에게 기차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가는 근대적 개인을 묘사하는 소설적 장치였다. 반면에 김정한(1908~1996)의 단편 「뒷기미 나루」(1969)에 묘사된 삼랑진은 다르다. 그는 “뒷기미 나루는 삼랑진을 더 거슬러 올라간 낙동강 상류께, 지류인 밀양강이 본류에 굽어드는 짬이라, 다른 곳보다 물이 한결 맑았다. 물이 맑아 초가을부터 기러기떼며 오리떼가 많이 모여 들었다”고 묘사하면서 동시에 이 나루가 “순한 백성들과 그들의 아들딸들이 징용이다, 혹은 실상은 왜군의 위안부인 여자 정신대다 해서” 건너간 비극의 장소로 인식했다. 밀양 삼랑진은 시인 오규원(1941~2007)의 고향이다. 그에게도 고향은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는 열세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얼굴이다. 어머니의 얼굴은 “언제나 평화와 안식이 준비되어 있는” “잠들고 싶고 꿈꾸고 싶은” “자궁과 같은 존재”이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불화와 궁핍의 근원”이었다. 그는 이 심리적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중학교 때 고향을 떠난 이후로 아버지가 계신 고향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는 고향이란 “자궁을 지닌 어머니의 몸과 같아서 자궁 안의 자연의 언어와 자궁 밖의 현실의 언어를 품고 있는 시간적 공간”이며 “그 경계에 내가 서 있다”고 술회했다. 그렇다면 모든 고향의 이름은 밀양이다. 밀양강 하류의 오우진(五友津)나루는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세곡선이 오가던 수운의 요지였고,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모아 놓는 조창도 있었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어 기찻길이 생기면서 평범한 나루터가 되었다.

주목할 만한 섬, 서해 5도

On the Road 2019 AUTUMN 1168

주목할 만한 섬, 서해 5도 38선 바로 남쪽에 위치한 ‘서해 5도’는 군사적으로 매우 민감한 곳이어서 남북한 간 문제가 떠오를 때마다 어김없이 뉴스에 등장한다. 북한 땅을 바로 코앞에 마주 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은 있지만 쉽게 발길을 향하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 바닷길을 통해 중국과 활발히 무역을 하기도 하고, 천주교 선교사들이 오고 가기도 했다. ‘서해 5도’ 중 가장 면적이 넓은 백령도의 두무진 포구는 해안선을 따라 기암절벽이 4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북한과 마주 보고 있어 군사적 긴장감이 감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신비한 경치에 끌려 이 섬을 찾는다. 지난 7월 백령·대청·소청도의 지질 명소 10곳이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언어는 현실을 반영한다. 일정한 지역 안에 있는 다수의 섬들을 가리키는 ‘군도’는 고대에는 에게해를 지칭했으나, 차츰 에게해에 있는 수많은 섬들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이러한 어원학적 탐구는 어떤 시기에 그리스 사람들이 에게해의 섬들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1950년에 발발해 엄청난 희생을 치른 한국전쟁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과 소련이 획정한 분단선인 북위 38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교전선을 군사분계선(MDL)으로 하는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3년 만에 끝이 났다. 이때 연해도서 및 해면에 관한 통제권은 전쟁 이전으로 되돌렸는데 군사분계선보다 위도상으로 훨씬 북쪽에 위치한 서해의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우도, 연평도만은 UN군의 관할 아래 두고 이를 서해의 남북 경계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시 UN군 총사령관이 남북한 간 군사 충돌을 방지할 목적으로 이 다섯 개의 섬과 북한의 황해도 사이의 해상에 북방한계선을 설정했다. 이는 38선 이남이었던 코앞의 황해도 옹진반도를 넘겨준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방어선을 지킨 결과였다. 이때부터 서로 별 연관이 없어 보였던 이 다섯 개의 섬을 하나의 범주로 묶은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이른바 ‘서해 5도’다. 그렇다면 이 섬들은 어떤 ‘주목할 만한 가치’를 부여받은 것일까? 백령도 서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사항포는 어선들이 조업하는 포구로 이곳 앞바다에서는 까나리가 많이 잡힌다. 대치에서 화해로 서해 5도로 가는 교통편은 인천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이 유일하다. 소청도와 대청도를 거쳐 백령도로 가는 배는 하루 세 번 왕복하고, 연평도는 하루 한두 번 오간다. 인천에서 가장 먼 백령도까지는 평균 30노트의 고속페리로 4시간 정도면 도착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 한 번 12시간씩이나 걸리던 뱃길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지만, 파도가 거세면 제 속도를 못 내고 안개나 바람으로 인한 결항도 잦다. 연평도는 백령도보다 훨씬 가까이 있지만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인천에서 뱃길로 약 200㎞ 떨어진 백령도는 지도상으로 보면 훨씬 가까운 육지가 따로 있다. 장산곶과의 거리가 불과 16km에 불과하다. 연평도는 이보다 더 가까운 10㎞ 앞에 부포리라는 포구가 있다. 문제는 이 두 지역이 모두 북한 땅이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조업을 하는 어민들은 안개가 짙게 낀 날 뱃길을 잃고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한 수역으로 들어갔다 놀라서 허둥지둥 돌아왔다는 에피소드 하나쯤은 너나없이 말한다. 이것이 서해 5도의 첫 번째 ‘주목할 만한 가치’다. 중화동 바닷가에서 한 주민이 수확한 다시마를 말리고 있다. 이 마을에는 국내에서 두 번째로 오래 된 장로교회가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이 섬들이 옆구리에 들이밀어진 비수와 같다. 백령도에서 평양까지 거리가 150km에 불과하고, 연평도에서는 해주에 있는 북한의 최남단 해군 기지를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으니 민감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최근 몇 해 동안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모두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40여 개소의 현대화된 민간 대피 시설들이 이 섬들의 전략적 중요성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긴장과 대치가 강화될수록 평화와 화해에 대한 열망 또한 절실하다. 번번이 기대에 어긋나긴 했지만, 최근 그 열망에 불을 지핀 것이 지난해 남북 지도자의 판문점 선언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올 4월부터는 이 지역에서 야간 어로 활동이 55년 만에 재개되었고, 조업이 가능한 어장도 크게 늘었다. 여기에 지난 6월 30일 남북한과 미국의 지도자가 함께 판문점에서 만나 정전을 넘어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것을 다짐했다. 이 일련의 소식들은 오래 잊고 지냈던 옛이야기들과 함께 분단 이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이 섬들이 간직한 빼어난 자연 풍광과 독특한 섬 문화의 가치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이 섬들이 내세운‘머물고 싶고, 가고 싶은 섬’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비로소 현실감을 주었다. 아침 7시 50분, 등짐은 물론 양손 가득 보따리를 들고 기대와 설렘에 가득한 사람들을 태우고 백령도로 향하는 첫 배가 인천항을 미끄러지듯 떠난다. 오늘 점심은 백령도 냉면에 김치떡? 아니면 싱싱한 해삼 한 접시와 간자미에 양념을 얹어 끓인 팔랭이찜? 서해 방어의 최전선 지리적으로 서울의 북쪽을 에워싸고 있는 황해도는 평지가 많아 육지의 외곽 방어에서는 이렇다 할 역할을 못했지만 해안 방어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이 지역은 5세기 삼국 시대부터 한반도 서쪽 해안을 따라 중국 요동 지역까지 이어지는 북부 연안 항로의 중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려 말인 14세기 전후부터 16세기 조선 중기까지는 왜구가 이곳까지 올라와 해안 지방 약탈을 서슴지 않았으며, 명·청 교체기인 조선 후기에는 혼란을 틈타 바다에 해적의 무리들이 출몰하기도 했다. 주변 정세가 안정된 18세기 이후에는 청의 어선들이 수시로 와서 불법 어로를 하다 주민들과 충돌하는 일이 잦았고, 청과 조선 상인들의 밀무역이 성행하던 곳이기도 했다. 중국 산동성까지의 거리가 187㎞로 인천보다 오히려 더 가까웠던 백령도는 오랜 기간 이런 갈등과 교역의 최전선이었다. 조선 정부는 침입자들을 감시하고 추포하기 위해 연안의 주요 포구에 진을 설치했다. 이 진들은 점차 포구에서 곶으로, 나아가 섬으로 옮겨졌다. 바다에서부터 외적이 뭍으로 상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내륙에는 저지선으로 삼을 만한 적당한 산악이나 요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초 가장 먼저 백령도에 진을 설치했는데 이곳에는 이미 11세기 고려 때부터 백령진이라고 불리는 군사 기지가 있었다. 이곳을 지나 장산곶에 이르면 바로 남북 연안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물길을 만날 수 있다. 주둔한 군사들이 자급자족할 만큼 농토가 넓다는 이점도 있었다. 지금도 백령도에는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이들과 주민들의 식량은 자급자족하고도 남는다. 그 탓인지 지금도 이 섬에는 어업보다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주민들이 훨씬 더 많다. 백령도 해안 철조망 너머로 북한 땅이 보인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 간 가장 큰 군사적 충돌의 대부분이 이 인근 바다에서 일어났다. 천주교 전래의 길 백령도 사람들은 고전소설 『심청전』의 중요한 무대인 인당수가 바로 이 섬의 북서쪽 바다라고 믿는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이 필요했던 심청은 남경 상인들이 무사귀환을 위해 바다에 바칠 제물로 순결한 처녀를 사러 다닌다는 말을 듣고 기꺼이 몸을 판다. 그가 몸을 던진 소설 속 유리국 인당수가 백령도 진촌리 앞 바다라는 것이다. 이런 심청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섬 사람들은 인당수가 바라다 보이는 진촌리에 심청각을 지었다. 『심청전』은 작자 미상의 설화 소설로 이런 믿음이 사실일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의 바다가 상인들이 두려워할 만큼 파도가 거센 곳임은 분명하다. 남북으로 흐르는 연안 해류와 동서로 오가는 조류가 수시로 겹치는 데다 암초가 많아 예부터 선박 침몰 사고가 잦았다. 영조 때인 1771년에는 해상 군사 훈련을 벌이다 이곳에서 군선이 침몰하고 수군들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자, 임금이 직접 나서 장산곶을 기준으로 이남과 이북이 각각 따로 훈련하도록 규정을 바꿀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2010년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인해 남한의 초계함 천안함이 침몰된 곳도 이 부근이다.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백령도를 거쳐 한양이나 개성을 오가는 루트를 역사에 남긴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1821~1846)이다. 1845년 중국 상해에서 사제가 된 김대건은 이듬해 제3대 조선교구장이었던 페레올(Jean-Joseph-Jean-Baptiste Ferréol 1808∼1853)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선교사의 입국로로 개척하라는 명을 받았다. 당시 조선은 외세의 문호 개방 요구에 맞서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해 박해하던 때였다. 5월 14일 교우들과 함께 마포를 출발한 김대건은 5월 29일 백령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청나라 어선과 접촉하여 조선 지도 2장과 6통의 서한을 주고받은 뒤 돌아오다 6월 5일 체포되었다. 조선 정부는 그해 9월 16일 김대건을 처형했고, 로마 교황청은 1984년 그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서해 5도에는 교회가 유난히 많다. 상주 인구가 약 5,700명 남짓한 백령도에만 교회가 13곳이고 신도는 전체 주민의 75%에 이른다. 백령도에 있는 중화동교회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 교회다. 1898년 조선 정부가 전도와 교회 설립의 제한을 해제하자 이곳 기독교인들이 한학 서당을 고쳐 초가 6칸짜리(39.6㎡) 교회를 세운 것이 그 시작이다. 그 옆에 있는 백령기독교역사관에는 19세기 초부터 이 섬과 주변에서 전개된 초기 기독교 선교의 역사 기록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서양목 열풍의 중심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개항을 시작하기 전 모든 무역은 정부가 관장했다. 그렇다고 밀무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초기 밀무역은 부산의 왜관이나 대마도에서 이루어졌다. 일본 상인들이 가져온 은과 조선의 인삼이 이들의 주거래 품목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장산곶 부근이 청나라 상인과 조선 상인 간의 밀무역 중심지였다. 주 교역 품목은 조선의 홍삼과 청나라 상인들이 가져온 서양목이었다. 아편전쟁을 겪은 청나라에서는 아편의 해독제로 홍삼의 인기가 높았고, 조선에서는 베틀로 짠 거친 재래식 무명보다 영국이나 인도에서 방직 기계로 짠 무명의 품질이 좋다고 소문이 나면서 서양목 열풍이 일어났다. 개성 상인들은 물론 서울의 자본가들도 앞다퉈 홍삼과 서양목을 맞바꿔 큰 이득을 보았다. 거래 현장인 백령도나 소청도 등지에서는 허술한 경비 속에서도 관헌들이 불법 거래 무역상들을 체포하는 일이 잦았고, 이들은 서로 사기를 당했다며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뒷날 개항이 되면서 조선의 경제를 뒤흔든 서양목 상권은 일본 상인들에게 넘어갔고, 19세기 중반 밀무역으로 한국인의 의생활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곳이 바로 백령도 앞바다였다는 역사적 사실도 잊혀져 갔다. 백령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관창동 마을. 과거에는 중국에서 무역상들이 실어온 물품들을 마을 앞 포구에서 하역한 뒤 이곳에서 보관했다. 이 일련의 소식들은 오래 잊고 지냈던 옛이야기들과 함께 분단 이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이 섬들이 간직한 빼어난 자연 풍광과 독특한 섬 문화의 가치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이 섬들이 내세운‘머물고 싶고, 가고 싶은 섬’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비로소 현실감을 주었다. 인천항에서 하루에 3번 있는 초쾌속선을 타면 4시간 만에 백령도 용기포 신항에 도착한다. 휴가에서 돌아오는 군인들을 비롯해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배에서 내리고 있다. 서해 5도 관광의 백미는 뛰어난 자연 경관이다. 이곳은 백령도의 두무진을 비롯해 어디를 가든 해안선마다 겹겹이 쌓인 깎아지른 절벽이 장관을 이룬다. 그런가 하면 소형 항공기가 착륙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한 백사장도 있다. 지질학자들은 이런 신비한 풍광이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3개의 육괴가 오랜 기간 동안 서서히 현재의 위치로 이동해 한반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곧 충돌 시 발생한 엄청난 에너지가 지각 변동을 일으켜 기이하게 변형된 새로운 암석 덩어리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난 7월 환경부는 백령·대청·소청도의 지질 명소 10곳을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했다. 그뿐 아니라 서해 5도는 식물지리학적으로도 남방과 북방의 한계 지역이어서 두 지역의 식물이 혼재하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특히 대청도는 동백나무 자생 북한지일 뿐만 아니라 대청부채, 실부추 등의 식물이 자생하는 지역으로 학계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자, 이제 머리를 식히고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황해도식 냉면은 쇠고기 국물에 닭이나 꿩, 돼지 육수를 섞는 평양식 냉면과는 달리 돼지고기로만 국물을 낸다. 이 밍밍한 황해도식 냉면에 간장 대신 까나리액젓으로 간을 하는 것이 백령도 냉면의 특징이다. 메밀이 70% 이상 들어가다 보니 면발이 입안에서 뚝뚝 끊어진다. 여기에 부드러운 돼지고기 수육 한 접시 또는 황해도식 왕만두나 녹두 빈대떡을 곁들이면 한 끼의 상차림이 끝난다. 김장김치에 굴과 홍합을 넣어 빚은 만두 모양의 큼직한 ‘김치떡’은 계절 음식이니 겨울 손님에게 미루자. 모든 식재료는 현지산이다. ‘머물고 싶고, 가고 싶은 섬’이란 말을 혀끝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문경의 세 갈래 고갯길

On the Road 2019 SUMMER 1046

문경의 세 갈래 고갯길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 남쪽으로부터 쳐들어 오는 적을 막아 수도권을 지키기 위한 국방의 요새. 문경 새재가 불러오는 단상들이다. 예로부터 영남 지방의 관문 역할을 해 온 경상북도 문경의 고갯길을 걸어 본다. 영남대로 능선 중 가장 높은 주흘산의‘부봉(釜峯)’에서 내려다본 문경새재.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40분가량 걸리는 문경새재는 그 역사가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로부터 중요한 교통로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은 지금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문화 유적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로 붐빈다. 한국어에서 자주 쓰이는‘분수령(分水嶺)’이라는 말은 ‘분수계(分水界 drainage divide)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산지가 70퍼센트인 한반도에서 수계를 나누는 기점은 대개 고갯마루처럼 높기 때문에 그 경계를 고개로 대신한 말이다. 산봉우리와 분수령을 잇달아 이어 놓은 것이 한국의 산줄기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분수령에서 갈라지는 물의 행로에 따라 산줄기의 위상이 달라진다. 곧 고갯마루에서 이쪽과 저쪽으로 나뉜 물이 다시 만나지 않고 서로 다른 하구로, 바다로 흘러간다면 그 분수령에는 더 높은 품격이 부여된다. 한반도 북단의 백두산에서 시작해 이런 품격 있는 분수령을 따라 남쪽의 지리산까지 1,600㎞가 넘는 큰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부른다. 한국인들은 이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종주하는 것을 명예롭게 여긴다. 근대의 축척 개념을 적용해 세밀한 지형도를 그린 조선 시대의 지리학자 김정호(1804~1866 추정)는 만년에 백두대간의 산줄기와 하천, 고을을 용이나 태극의 모습으로 형상화해 그린 목판본 생활 지도를 따로 만들어 보급했다. 바로 유명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61)이다. 그 배경에는 백두대간을 한반도 자연 지리의 상징이자 이 땅의 문화와 사회, 역사, 환경을 이해하는 바탕으로 여겼던 그의 자연관이 있었다. 애국가 첫 소절에 백두산이 등장하고, 초등학교를 비롯해 각급 학교의 교가(校歌)마다 어김없이 인근 산의 정기를 이어받았음을 강조하는 가사가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경새재의 제1관문 주흘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이 지역의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가치가 새로이 인식되어 1708년 조령산성을 축성하면서 세워졌다. 삼국의 각축이 심했던 5 세기경에 축조된 약 1.6 km 길이의 고모산성은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다. 성벽에 올라서면 주변의 빼어난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세와 현세를 잇는 길 중부 내륙 지방의 충주 수안보에서 남동쪽을 향해 자동차로 20분쯤 달리면 옛 도요지가 나온다. 여기에 차를 두고 굽은 길을 두어 번 돌아 걸어가면 훼손된 석탑과 거대한 돌미륵상이 서 있는 옛 절터를 만난다. 고려 시대 위용을 자랑했던 미륵대원 터다. 돌미륵상은 보수 중이다. 무상한 마음에 발걸음은 표석을 따라 하늘재로 향한다. 굽은 길을 따라 펼쳐진 숲은 울창하지만 걷는 이를 위압하진 않는다. 길이 아늑하고 편안하니 저절로 걸음이 느려지고, 눈길은 한가로이 기이한 형상의 나무와 바위 틈 사이에 핀 들꽃에 머문다. 숨이 가빠질 즈음 야트막한 고갯마루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우리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고갯길인 하늘재다. 내리막길은 문경 땅이다. 이 고갯마루에 비가 내려 문경 쪽으로 흐르면 낙동강 물이, 충주 쪽으로 흐르면 한강 물이 된다. 충주 쪽의 지명은 내세를 뜻하는 ‘미륵리’이고, 문경 쪽은 현세를 뜻하는 ‘관음리’다. 관음리 길에도 석불이 곳곳에 남아 있다. 아쉽게도 이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하늘재의 옛 이름은 계립령, 즉 ‘닭이 서 있는 모양을 한 고개’이다. 역사서 『삼국사기』(1145)에는 “156년, 신라의 아달라 왕이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阿達羅尼師今 三年 夏四月 開鷄立嶺路)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신중한 역사학자들은 이 고개를 기원전부터 이 지역에 살았던 부족 국가들이 만든 교통로로 추정한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 세 나라가 한반도의 중앙을 관통하는 한강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이곳을 놓고 수백 년 동안 다투긴 했지만 그 시기의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작은 나라에 불과했고 왕권도 약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접경지 길목이라 해서 항상 군인들만 들끓은 것은 아니다. 이 고갯길은 오래 전부터 남북에서 생산된 물산이 오가던 길목이었으며, 아도화상(阿道和尙)이라는 고구려의 승려가 처음으로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넘어온 길이기도 하다. 이 고갯길을 넘어 아도화상이 포교를 했다는 구미에 있는 모례(毛禮)마을은 오늘날 신라 불교의 성지로 대접받고 있다. 하늘재를 넘어 북쪽을 향해 길을 떠났던 야심찬 신라인들의 목적지는 문화 예술의 황금기를 이룬 당나라였다. 경주에서 출발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가려면 여러 도시를 지나 문경에서 하늘재를 넘은 뒤 충주에서 한강 수로를 타고 서해안으로 나가 당은포(唐恩浦)에서 배를 타고 북쪽의 연안 항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승려 원효(617~686)와 의상(625~702)은 최소한 이 길을 두 번 오갔다. 서른네 살의 원효는 650년 의상과 함께 이 고개를 넘어 당시 유행하던 당나라 유학길에 나섰다가 요동에서 고구려 국경 수비대에 붙잡혀 되돌아왔다. 그로부터 10년 뒤 원효는 다시 한 번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은포에서 배를 기다리다 불현듯 의상과 헤어져 되돌아온다. 잠결에 마신 달고 시원한 물이 깨어나 보니 해골에 고인 빗물이라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해동고승전』(1215)에 전한다. 그 뒤 원효는 성당(盛唐) 문화가 압도하던 시기에 독자적인 사상 체계로 한국 불교사에 큰 자취를 남겼으며, 의상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신라 불교의 성행을 이끌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국운이 기울자 935년 고려에 항복했다. 고려에 귀의해 수도 개경에서 만년을 보낸 경순왕이나 신라의 재건을 다지며 금강산으로 들어간 그의 아들 마의태자나 뜻은 달랐지만 모두 이 하늘재를 넘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1594년 중성(中城) 축성과 함께 만들어진 제2관문 조곡관은 문경새재의 관문들 중 가장 먼저 세워졌으며, 다른 관문들에 비해 주변 산세가 험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더 가파른 고갯길로 고려 시대 미륵대원은 공무로 길을 떠난 관리나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역원(驛院)의 관리를 대행했던 사찰이자 인기 있는 여행지이기도 했다. 김변(金賆)이란 사람의 처 허(許) 씨(1255~1324)의 묘지명은 그 시절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허 씨는 남편이 죽자 무덤 부근에 절을 짓고 금은으로 사경(寫經)을 하는 등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10년이 넘게 불사를 했다. 그러다 57세 때 길을 떠나 이름난 사찰과 명산을 순례하였는데 그녀가 예를 올린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미륵대원의 석불이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고 남녀의 사회적 지위가 비교적 평등했던 고려 시대 여성들의 성지 순례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늘재에서 남쪽으로 40분쯤 오르면 탄항산 정상이다. 여기서 평탄한 능선을 따라 봉우리 몇 개를 지나면 첩첩이 늘어선 산 사이로 문경 새재의 3관문인 조령관이 내려다보인다. 이곳 또한 조령관 지붕에 빗물이 떨어져 북서쪽인 충주로 흐르면 한강 물, 남동쪽인 문경 쪽으로 흐르면 낙동강 물이 되는 분수령이다. 조령관에서 문경 쪽으로 2관문 조곡관을 지나 1관문 주흘관으로 이어진 길이 바로 충주와 문경을 오가는 새재 길이다. 하늘재에서 능선을 타면 새재까지 반나절 거리다. 문경 새재는 조선이 건국 초기에 크게 개척해 500년 동안 한양과 동래, 즉 오늘날의 서울과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의 중요한 교통로이자 고갯길로 이름을 떨쳤다. 그렇다면 왜 조선은 천년이 넘게 이용해 온 평탄한 하늘재를 버리고 해발 100여 미터나 더 높고 더 가파른 새재를 개척했을까? 유림의 길 하늘재는 조세로 거둔 곡물 따위를 운반하는 조운선(漕運船)이 오가던 한강 수로와 이어진 교통로라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한때 일본을 위협하던 원나라와 고려가 쇠퇴기에 들어서면서 바다에는 왜구가 창궐했다. 왜구들의 노략질이 일상화되자 수운(水運)은 점점 약화되었다. 몽골과 홍건적의 침입을 막지 못해 방어선으로서 하늘재의 역할도 무색해졌다. 반면에 새재는 방어에 유리한 험로(險路)였고, 육로로 오간다면 이 길이 더 짧았다. 왜구들은 조선 초기까지 들끓었다. 조선의 3대 군주 태종(재위 기간 1400~1418) 은 무력과 무역이라는 두 가지 수단으로 왜구의 도발을 억제하는 한편 빠른 통신과 교통을 위해 전국을 사방으로 연결하는 대로를 구축하고 길목마다 군사들이 주둔하며 말과 숙식을 제공하는 역참 제도를 시행했다. 큰 산을 넘거나 물을 건너는 자연 거점에 역이나 원을 두었던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는 역은 30리마다, 원은 10리마다 하나씩 체계적으로 설치했다. 문경 새재가 영남대로의 일부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새재를 이용하자 다른 고개들보다 이동 시간이 빨라졌다. 대로라고 해 봐야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어깨가 부딪치는 정도의 폭에 불과했지만 목축을 하지 않는 농업 국가에서, 또 적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하는 나라에서 이 정도의 육로면 부족할 게 없었다. 다만 이 길을 개통하면서 왜 방어를 위한 성벽인 관방(關防)을 설치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방심 때문인지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략해 파죽지세로 북진해 올 때 천혜의 요새인 새재 협곡에서 막지 못하고 충주에서 기마전을 펴다 결국 패배했다. 이 소식은 선조(1552~1608)가 수도를 포기하고 달아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영의정 유성룡(1542~1607)의 건의로 새재에 방어 성벽인 2관문을 설치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3개의 관문이 완성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인 18세기 초다. 그러나 그 뒤로는 큰 전란이 없어 변방의 경비나 사신 왕래를 위한 관문 역할에 충실했다. 외세의 침략에 의한 부침은 고려나 조선 모두 피할 수 없었지만, 그 길 위에서 벌어진 삶의 모습은 크게 달랐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의 10개 도시 가운데 절반이 이 영남대로에 걸쳐 있어 새재는 조선의 문화를 지켜볼 수 있는 상징적인 고갯길이 되었다. 관리를 뽑는 시험은 고려 때도 있었지만, 조선 시대에는 정기적으로 과거 시험을 치렀다. 이 시험에 합격해야 입신양명을 할 수 있었으므로 유학을 공부한 영남 지방의 많은 선비들이 관리 등용의 부푼 꿈을 안고 이 길을 떠났다. 따라서 돌아오는 길은 금의환향하는 축복의 길이자 동시에 부끄러움과 한숨이 서린 길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유림들이 조정에 간언이나 진정을 하러 떠나는 상소(上疏) 길이기도 했다. 유림의 고장 안동 유생들이 상소문을 들고 출발해 문경 새재를 넘는 데 4일이 걸렸고, 조정에 전달해 해석을 받아들고 돌아오는 데는 모두 석 달이 걸렸다. 여기에 왕의 특명을 받고 신분을 감춘 채 지방을 감찰하러 가는 암행어사, 정부의 문서를 전하러 가는 관리, 명승지로 유람을 떠나는 풍류객들로 문경 새재 부근의 역원이나 주막은 붐볐으리라. 1관문과 2관문 사이에는 정자가 있는데 이는 새로 부임하는 경상도 관찰사와 떠나는 관찰사가 관인을 인수인계하던 곳이다. 이 정자 앞에는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작은 폭포도 있다. 문경 새재를 지나는 특별한 손님이라면 일본을 오가던 조선통신사들을 꼽을 수 있다. 임진왜란의 상처를 딛고 두 나라의 교류를 위해 꾸려진 외교 사절단은 조선의 학식과 문화를 대표하는 이들로 400~6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출발해 몇 개 도시를 거쳐 문경 새재를 넘은 뒤 부산에 이르렀다. 이들의 숙식은 모두 지역의 부담이어서 조정에서는 갈 때와 올 때 길을 달리해 부담을 줄이도록 규정했다. 대로라고 해 봐야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어깨가 부딪치는 정도의 폭에 불과했지만 목축을 하지 않는 농업 국가에서, 또 적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하는 나라에서 이 정도의 육로면 부족할 게 없었다.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한 길로 유명했던 토끼비리는 벼랑을 깎고 바위를 깨뜨려 만든 길로, 한쪽은 까마득한 벼랑 아래에 영강(穎江)이 흐른다. 현재는 2㎞ 정도만 남아 있으며 그중 절반만 통행이 가능하다. 수백 년 동안 왕래하던 사람들의 발길로 인해 길바닥 바위들이 반들반들하게 닳았다. 이름 없는 이들의 길 3관문에서 몇 개의 바위산을 넘은 뒤 계단이 많고 가파른 길을 1시간 반가량 오르면 해발 1,026m의 조령산 정상이 나온다. 여기서 남쪽으로 3㎞쯤 내려가면 이화령이다. 이곳의 물도 괴산 쪽으로 흐르면 한강에 합류하고, 문경 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에 합류하는 분수령이다. 이화령은 길이 험하고 산짐승의 피해가 두려워 여럿이 함께 어울려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경상도 문경과 충청도 괴산을 동서로 잇는 유일한 길이어서 예부터 존재했을 것이 분명하나 사료는 없다. 다만 어려서 이화령을 넘는 봇짐꾼들이나 소떼를 몰고 넘는 소장수들을 보았다는 노인들의 목격담으로 미루어 충주로 가는 새재의 우회로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안전하고 숙박 시설이 잘 갖춰진 새재 길을 마다하고 여럿이 어울려 이 길로 에둘러 돌아간 사람들은 누구일까. 전국의 장터를 돌며 물건을 팔던 보부상들이었을까. 이들에게는 트집을 잡아 인정이나 뜯어내려는 포졸들이 득실대는 새재 길보다는 산짐승 울음소리를 벗 삼아 여럿이 어울려 넘어가는 이화령 길이 더 나았던 것일까. 역사 속의 그들은 결코 존경받는 신분이 아니었지만, 남다른 기동성과 결속력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면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서 싸웠다. 이화령 옛길은 새재나 하늘재와 달리 일제 강점기인 1925년 영남과 서울을 잇는 신작로로 만들어져 각광을 받다가 1994년에 이화령 터널이, 2001년에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길 옆을 지나면서 지금은 등산객들이나 자전거 동호인들이 오가는 한적한 길이 되었다. 이 세 길 중에 당신이라면 어느 길을 걷는 여행자가 되고 싶은가? 미륵대원 터에 있는 높이 10.6m의 화강암 석조여래입상. 바로 앞에는 높이 6m의 오층석탑과 팔각 석등도 남아 있다. 고려 시대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대원은 사찰과 역원의 역할을 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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