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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수많은 작업이 집약된 푸드 스타일링 세계

An Ordinary Day 2024 SPRING

수많은 작업이 집약된 푸드 스타일링 세계 푸드 스타일리스트는 음식과 식기 등으로 테이블 공간을 연출하는 일을 한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음식의 질감, 맛, 향 그리고 매무새까지 전달해야 한다. 노력과 창의력을 동시에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모니터로 레퍼런스를 꼼꼼히 확인하며 준비한 음식을 세팅하고 있는 푸드스타일리스트 보선(金甫宣) 씨. 클라이언트의 컨펌은 음식을 준비하고 스타일링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이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큰길에서 살짝 벗어난 골목 안쪽에 지은 지 오십여 년쯤 된 이층집이 있다. 대문은 없고 마당 한쪽에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근처 성미산에 사는 새들이 날아와 쉬어가는 곳이다. 감나무가 환히 내다보이는 통창 안쪽에는 새벽 세 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스튜디오가 있다. 사람들과 온갖 물품이 분주히 드나들고, 환한 조명이 켜졌다가 꺼지고,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호기심 많은 동네 강아지들과 고양이들이 기웃거리는 이곳은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보선 씨(金甫宣)의 작업실이다.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영역은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음식을 직접 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비자 시장을 조사하거나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메뉴도 개발한다. 일의 영역이 넓으니 일과도 바쁘게 돌아간다. 이십 년 넘게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살아온 김보선 씨의 하루하루도 다양한 일들로 촘촘하게 채워진다. 뭐든 잘해야 하는 직업 김보선 씨는 작업실 근처에 있는 집에서 걸어서 출근한다. 보통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서 아홉 시에 작업실의 문을 여는데 외부 촬영이 있는 날은 예외다. 촬영 시작이 아홉 시라면 다섯 시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예전에는 잡지에 실릴 음식을 촬영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판도가 달라졌다. “잡지가 많이 없어지고 광고 시장도 대부분 디지털로 옮겨갔어요. 요즘 들어오는 일은 브랜드SNS 작업, 전시 세팅, 행사 세팅 등이 주를 이루고 주방가전 신제품이 나오면 그 제품을 테스트하고 메뉴를 개발하고 소책자를 만드는 일도 해요.” 이전에는 요리 따로, 스타일링 따로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의뢰인 대부분이 요리까지 다 할 줄 아는 스타일리스트를 찾는다. “요리를 알고 스타일링을 하느냐, 모르고 하느냐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달라져요. 요리가 받쳐 주지 않으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어서 결국 요리를 배우게 되죠. 예를 들어 완성된 볶음요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기름칠을 할지 물엿을 바를지 결정해야 하는데, 그 판단을 하려면 요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해요. 또 고기 종류에 따라 가장 맛있어 보이는 온도가 몇 도인지도 알아야 하죠. 그래서 요리뿐만 아니라 식재료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해요.” 한식, 양식, 중식, 일식 등 요리의 장르도 다양하고 그에 따른 식재료도 무궁무진하다. 그중 특정한 분야만 잘해서는 일을 맡을 수가 없다. “어떤 일이 들어올지 모르니까요. 전반적으로 다 할 줄 알아야 하고 잘해야 해요.” 잘해야 하는 건 요리만이 아니다. 촬영에 필요한 각종 소품도 준비해야 한다.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그릇부터 시작해 그와 어우러지는 테이블보, 냅킨, 수저, 양념통, 꽃 등…. “시안이 촬영 하루 전날 오는 경우도 많아서 뭘 사러 갈 시간도 없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평소 시간 날 때마다 준비해야죠.” 요리연구가, 플로리스트, 코디네이터, 디자이너를 모두 합한 직업이 푸드 스타일리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최고의 바게트 전문가를 가리는 ‘르빵 바게트 챔피언십 2023’의 공간을 연출한 모습. 8m에 달하는 대형 테이블은 수십 여 종류의 바게트와 각종 오브제로 채웠다. ⓒ 김보선(金甫宣) 스물두 살에 찾은 꿈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을 통해 푸드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원래 요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요리 관련 일을 하고 싶었는데 식당에서 일을 하면 같은 요리만 하잖아요. 매번 새로운 요리를 하고 더 맛있어 보이게 연출하고 또 화보로 작업물을 만들어 내는 푸드 스타일링이라는 일이 재미있어 보였어요.” 결심이 선 이후 앞만 보고 달렸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한 다음 본격적으로 꿈을 좇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는 푸드 스타일링을 위한 학교도 아카데미도 없었다. “당시 요리연구가이자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던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하는 클래스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선생님 스케줄이 있으면 수업이 없어지거나 미뤄졌죠.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클래스였는데, 한 달에 겨우 한 번 할 때도 있었어요.” 푸드 스타일링을 배우다 보니 요리를 모르면 안 되겠다 싶어 신라호텔 조리 교육센터에 들어갔다. “거기서 양식을 배운 이후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어시스턴트로 들어가 일을 더 배우려고 했어요. 그런데 배우려는 사람은 많고 자리는 없으니까 조리 경력이 있으면 남들보다 유리하겠다 싶어 파스타 전문점에 들어가서 일을 했어요.” 그 경력을 발판으로 어시스턴트가 되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수업을 일주일에 하루로 몰고 나머지 시간 내내 일을 했다. 졸업 후 다음 단계를 고민하던 그녀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요리 종류와 식재료가 다양했어요. 디저트, 와인 등 다루는 범위도 넓었고요. 견문을 넓힐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일본에서 생활비, 학비,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세 개를 하며 일을 배웠다. 200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부모님이 계신 집 반지하에 조그마한 작업실을 차려 푸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일은 없었어요. 삼 개월에 하나 들어올까 말까 했죠. 멍하니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도서관, 서점에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했어요. 그러다 일이 하나라도 들어오면 연습을 엄청 많이 했어요.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여러 번 테스트하고, 한 컷을 찍는 촬영에도 플랜C까지 만들었어요. 한 번 일을 맡긴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고, 주위에 소개해 주고, 그럭저럭 자리를 잡기까지 5년 정도 걸렸어요.” 원물 자체가 싱싱하고 좋아야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늘 식재료 공수에 심혈을 기울인다. ⓒ 김보선(金甫宣) 먹는 것도 일, 쉬는 것도 일 반지하에서 작업실을 시작한 이후 서너 번을 옮겼고, 지금의 작업실은 8년 전에 이사한 곳이다. 촬영은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잡힌다. 촬영이 없는 날에는 촬영 준비로 분주하다. 시안을 파악하고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고 스태프들에게 할 일을 지시한다. ‘북유럽의 삭힌 청어요리’처럼 생소한 음식을 만들어야 할 때면 식재료를 준비와 레시피 연구, 그리고 테스트도 해야 한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날에는 영수증과 세금계산서 등을 정리한다. 아침은 삶은 달걀이나 고구마로, 점심과 저녁은 거의 배달 음식으로 때운다. “냉장고에 좋은 식재료들이 많지만, 저를 위해 요리하거나 정리할 시간도 여유도 없어요. 거의 매일 새벽에 일이 끝나거든요. 집에선 잠만 자요. 하루 네 시간 정도 자나 봐요.” 가끔 시간이 날 때면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김보선 씨에게는 일의 연장이다. 맛깔스러운 음식을 보면 자동으로 몸이 반응한다. 요리조리 보며 조리법을 탐색하고 또 언제가 같은 음식의 스타일링을 제안 받게 되면 직접 만들어봐야 하니까 말이다. “아이디어가 떠올라야 정리가 되고 실행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한 일이에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을 한다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일을 분리하는 게 불가능해요. 좋아하지 않으면 못 하는 일이죠. 원래 뭐든 조금 하다 금방 포기하는 성격이었는데 이 일은 저한테 맞아요. 할수록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당의 감나무로 날아드는 새들을 바라보는 일이 김보선 씨에겐 짧은 휴식이고 위로이다. 아니 어쩌면 그 역시 또 다른 아이디어의 온상일 것이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맨손으로 고치는 만년필

An Ordinary Day 2023 WINTER

맨손으로 고치는 만년필 손으로 글씨를 쓸 일이 도통 없는 이 시대에, 여러모로 불편한 만년필을 사랑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 만년필 한 자루가 그들에겐 작은 행복이고 사치다. 만약 아끼는 만년필이 고장 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의 금이 간 행복을 고쳐줄, 만년필 수리를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여기 있다. 손으로 글씨 쓸 일이 별로 없는 요즘 시대에 만년필을 수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김덕래(金德來) 씨. 그는 이 일이 단순히 펜을 수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잇는 일이라고 말한다. ‘만년필의 미덕, 만년필의 고집을 절반이라도 지닌 사람은 우리 중에 없다’라고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말했다. ‘잉크가 샘물처럼 솟아난다’는 의미의 파운틴 펜을 우리나라에서는 만년필이라고 부른다. ‘천년만년’, 즉 영원히 사용할 수 있는 펜이라는 뜻이다. 물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만년필도 예외는 아니다. 펜촉은 마모되고 자칫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고장 난다. 오래 방치하면 잉크가 말라붙어 제 기능을 상실한다. 수리한 만년필로 쓰는 손 편지 그의 아지트이자 작업실은 방에 딸린 작은 드레스룸이다. 이곳에는 수리를 맡긴 고객들의 만년필, 수리 도구와 색색의 잉크, 그리고 고객들이 보내온 편지와 선물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는 도구 대신 맨손과 손톱으로 만년필을 수리한다. 손끝만큼 예민하고 또 정밀한 도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년필을 구입하기는 쉽지만, 고장이 난 만년필을 수리하는 일은 불편하고 때론 어렵다. 국산 브랜드인 모나미를 제외한 대부분의 만년필은 수입품이다. 국내에서 구입한 수입 만년필이 고장 나면 구입처로 접수 가능하지만, 병행수입 제품을 구입했거나 해외에서 구입한 경우 등은 사실상 수리를 맡길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구입한 제품이라도 손상의 정도가 심각하면 애지중지 아껴온 펜일지라도 수리불가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 또 부모님의 유품이거나 오래된 빈티지 만년필 등이 손상된 경우는 더더욱 맡길 곳이 없다. 이 때문에 만년필 사용자들에게 김덕래(金德來) 씨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만년필 수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이가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아니라 중학생과 고등학생인 두 아이를 둔 1974년생 아버지이다. 경기도 김포시의 아파트, 그 안에서도 방에 딸린 한 평 남짓한 드레스룸이 그의 작업실이다. 갖가지 만년필들과 색색의 잉크병들, 벽에 붙은 메모지들, 작업대와 컴퓨터, 앙증맞은 냉장고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한쪽 벽에 있는 창문으로 손바닥만 한 햇빛이 들어온다. 좁지만 아늑한 공간이다. 그의 하루는 아침 일곱 시 무렵 시작된다.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있으니 늦잠 잘 여유는 없다. “아내와 교대로 아이들 아침밥을 차려주거든요. 아이들을 깨워서 간단한 시리얼 등으로 아침을 챙기고 학교 보내고 나면 아홉 시쯤 되요. 그때부터 제 일과가 시작됩니다.” 그의 손에 맡겨지는 만년필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떨어뜨려 펜촉이 완전히 손상된 경우,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필기감이 이전과 달라진 경우, 실제로는 멀쩡한 상태지만 사용하는 사람이 ‘정상 컨디션인지 모르겠다’라고 느끼는 경우이다. 즉 심각, 경미, 정상, 세 가지로 나뉜다. ‘심각’으로 분류된 만년필의 대부분은 펜촉이 망가진 케이스다. 펜촉은 만년필의 심장이자 가장 비싸고 예민한 부품이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휘어진 부분을 펜촉보다 강한 도구로 펴면 되레 더 심하게 꺾이는 경우가 많아요. 수리할 때 손톱으로 조금씩 펴주는 게 저는 가장 좋더라고요” 도구 대신 맨손을 사용하는 이유이다. 손끝만큼 예민한 도구, 손톱만큼 정밀한 도구는 없다. 펜을 분해해서 펜촉을 반듯하게 잡고, 내부를 세척하고, 다시 결합하여 잉크를 주입하면 일이 끝나는 것 같지만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은 그 후부터다. 수리된만년필을 직접 사용하며 테스트해야 한다. “만년필을 반나절 눕혀두었다가 사용해 보고, 그다음 날엔 하루 동안 세워두었다가 사용해 보기도 해요. 뒤집어서 놔두기도 하고요. 어떤 경우에도 잘 쓰여야 하니까요.” ‘심각’의 경우보다 까다로운 것은 ‘경미’의 경우다. 사용하는 사람이 그만큼 예민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작업할 때도 예민해진다. 사용하다 생길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고 반복적으로 테스트하여 완벽한 상태로 만들지 않으면 안심할 수가 없다. 하루 안에 작업이 마무리될 때도 있지만 길게는 열흘쯤 걸리기도 한다. 작업이 끝나면 수리한 만년필로 손 편지를 쓴다. “펜을 다 수리하면 그 펜으로 편지를 써서 함께 보내요. 편지에는 ‘내가 의뢰한 펜이 이런 과정을 겪었구나’라고 이해하실 수 있는 내용들을 적어요. 왜 문제가 생겼는지, 어떤 조치를 했는지, 어떤 테스트를 거쳤는지 알려드리고 앞으로 사용할 때 도움이 될 내용도 적어요. 편지는 만년필이 이제 이렇게 잘 써진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고, 손 편지가 귀한 시대에 펜으로 쓴 편지를 받는 기쁨을 전하기 위함이기도 해요.” 그 시간에 펜 하나 더 수리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이도 있지만 김덕래 씨에게는 의미 있는 과정이다. 물건을 고치는 일이 마음과 마음을 잇는 일로 바뀐다.   새로운 선택 손상 정도에 따라 적절하게 수리하면 작업이 끝난 것 같지만, 본격 작업은 그 이후부터이다.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하고 수없이 테스트를 반복한 후에야 고객에게 보낸다.   강릉이 고향인 김덕래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삼척산업대학교 토목학과에 입학했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 복무 후 복학해 학교를 다니던 중 길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가 굉장히 재미있다며, 너도 한 번 우리 학교에 대해 알아보라던 친구의 말이 이상하리만큼 마음에 남았다. 친구의 권유로 학교를 그만두고 그 해에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전공과 관련 없는 의류매장 운영, 사회복지사, 해외배송업체, 일식조리사, 자동차 정비, 레저용품 생산회사 등을 전전하다가 2012년 수입 필기구 유통회사에 들어갔다. 내세울 경력이 없는 자신에게 마음을 써주는 사장님에게 보답하려고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열심히 일을 익혔다. 고객관리가 주 업무였는데 ‘고객의 만년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어느 날 들었다. 퇴근 후와 주말에 자신의 만년필을 일부러 고장 내고 고치면서 수리하는 방법을 스스로 익혔다. 고객들의 만년필을 고쳐주면서 만년필 사용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고, 지방의 한 대학교에서 강의해달라는 요청과 교내 웹진에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강의와 연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선택해야 할 시기가 왔어요. 안정된 직장에 다니느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냐. 아내는 어처구니없어 했지만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죠. 그게 2020년이었어요.”   수입은 줄어도 행복은 는다 고객은 초등학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다양하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 연재한 글을 보고 연락한 사람, 고객의 소개를 받은 사람, 인터넷 검색으로 그를 찾아낸 사람들이 의뢰인이다. 전화, 이메일, SNS 등으로 먼저 상담한 후 일이 진행되는 방식을 알려주고 택배로 만년필을 받는다.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경우에는 방법을 알려드려요. 수리가 필요할 경우에는 비용이 얼마 정도 드는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안내한 후 잘 생각해 보시고 보내라고 해요. 여러 변수가 있으니 느긋하게 기다리실 수 있는 분의 의뢰만 받아요.” 적게는 4~5만 원, 많게는 40~5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발생하고 수리 기간은 3개월에서 5개월 정도 걸린다고 미리 설명한다. 한 달에 20~30자루 정도 수리하는데 지금 수리 중이거나 대기 중인 만년필은 40자루 정도이다. “한 달에 20일은 만년필을 수리하는 것에 집중해요. 나머지 10일 중 일주일 정도는 글을 쓰고요. 그리고 2~3일 정도 강릉에 계신 부모님을 만나러 가요. 한 달에 한 번 강릉 가는 것, 2주에 한 번 헌혈하러 가는 것, 그리고 가끔 산책하는 것 외에 외출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주말도 휴일도 없어요. 이 공간이 일터이자 휴식처예요. 창문이 없었다면 밤낮도 몰랐을걸요. 끼니 챙기는 것도 종종 잊어버릴 정도니까요.” 아침 아홉 시에 시작한 작업은 저녁 아홉 시, 열두 시, 때로는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기도 한다.수리, 테스트, 상담, 작업 과정 기록, 손 편지 쓰기, 고객들과 안부 주고받기 등으로 하루가 빼곡하게 채워진다. “한 달에 열 자루도 못 고칠 때도 있어요. 언젠가부터 속도가 오히려 느려졌어요. 전에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젠 만족이 안 되니까.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게 저의 도리죠. 좁은 작업실에 있지만 전 세계의 펜을 만질 수 있는 직업이에요. 작업시간을 줄이면 수입이 나아질지 몰라도 저는 덜 행복할 것 같아요. 그리고 누구보다 진심으로 만년필을 대하는 수리공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 고객들이 있어서 좋아요. 전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 제가 선택한 인생이니까요.”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 작가(Photographer)

완벽한 취향과 미래의 고민을 담아 만든 매거진

An Ordinary Day 2023 AUTUMN

완벽한 취향과 미래의 고민을 담아 만든 매거진 『어반라이크』는 일 년에 두 번 발행되는 잡지지만 실체는 무크 또는 단행본에 가깝다. 시작은 매달 발행하는 타블로이드 매거진으로, 도시 감성의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을 주로 다루었다. 김태경 편집장은 대학 시절 우연히 발을 들인 이 일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지나고 보니 선택의 순간마다 자신도 모르게 책을 만드는 일을 선택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김태경(金泰庚) 씨는 도시를 의미하는 ‘urban’에 ‘like’를 더한 만든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어반라이크』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새벽 다섯 시.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 ‘새벽에 하는 일’을 시작한다. 이를테면 차를 마시는 일, 음악을 듣는 일, 책을 읽는 일. 잠으로 충전된 몸과 마음이 차와 음악과 책을, 새로운 하루를 오롯이 받아들인다. 학생 기자에서 편집장이 되기까지 한 가지 주제를 다루는 『어반라이크』는 일 년에 두 번 발행된다. 소모성 잡지 보다는 아카이빙의 기능에 더 충실한 편이다. 도시를 의미하는 ‘urban’에 ‘like’를 더해 만든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어반라이크』의 편집장 김태경(金泰庚) 씨의 새벽시간은 오 년 전쯤 시작되었다. 그전까지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야행성 생활을 이어왔다. “몸이 좀 안 좋았어요. 건강을 위해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운동은 귀찮고 건강식을 챙겨 먹는 것도 번거로울 것 같아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보자’라고 마음먹었어요. 밤에 하던 일들을 새벽에 하는 거죠. 그랬더니 몸이 좋아졌어요. 삶의 질도 달라지고 풍성해진 기분이더라고요.” 그녀가 잡지계에 발을 디딘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각 신문사에서 패션 잡지를 만들 때였어요. 학생 기자를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엽서로 응모했어요. 친구들이 커피숍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할 때, 저는 선배들 서포트하고, 스트리트 패션 취재했는데 그 일이 꽤 재미있었어요.” 전공인 경영학보다 잡지사 일이 신났지만 내심 간직하고 있던 꿈은 따로 있었다. “드라마 PD가 되고 싶었어요. 이 일은 재미있으니까 잠깐 해보는 거지, 그랬는데 제가 졸업하던 1998년도에 IMF가 터졌어요. 그때 어느 잡지사에서 제의가 왔고, 취직하기도 힘든데 잘됐다 싶어 입사했어요. 그때 시작한 이 일을 이 나이 되도록 이 일을 계속할 줄은 그땐 정말 몰랐죠.”   취향과 개성을 담은 잡지 매거진은 해당 호 주제에 따라 책의 페이지나 크기, 인쇄되는 용지와 표지의 모양새도 매번 달리한다. 늘 만들던 잡지지만, 늘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후 여러 잡지사를 섭렵하며 패션 에디터, 프리랜서 등으로 일하다가 2009년, 콘텐츠 전략회사 어반북스에 정착하고 2013년 『어반라이크』를 창간했다. 타블로이드판형의 잡지였던 『어반라이크』가 일 년에 두 번 발행하는 지금의 형태로 변화한 것은 2016년이었다. “패션 잡지사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당시 유행하던 타블로이드 판 형의 잡지를 내게 되었는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많았어요. 꾸역꾸역 매달 마감하다가 어느 순간 이게 맞나 싶더라고요. 독자들은 점점 책을 구입하지 않고, 광고주들은 지면광고에서 웹광고로 옮겨가고….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장용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 선택과 집중을 하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무크 형식으로 제작하면서 한 가지 주제를 다루게 되었어요. 일 년에 두 번 발행하는 잡지가 매체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걸 개성으로 봐주시고 다양성으로 봐주셔서 그때 잘 변화했다고 생각해요.” 이후 『어반라이크』는 ‘호텔’, ‘집에서 일하기’, ‘출판사’, ‘문구’, ‘식사’, ‘그릇’ 등 매 호 한 가지 이슈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무크 형식의 잡지로 변모했다. 볼륨과 판형, 인쇄되는 용지도 주제에 따라 매 호 바꿨다. 그 결과 독자들의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면서 한 번 발행한 책은 ‘과월호’가 아닌 ‘단행본’이 되어 꾸준히 팔리고 있다.   정형화되지 않은 시스템 ‘이게 되나?’ 했는데 ‘이게 되네’ 싶었던 게 또 있다. 출퇴근과 고정인력을 없앤 것이다. “3년 전 어느 날, 출근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어요. 감시하려고 기자들을 책상 앞에 앉혀 놓은 것 같고, 매일 출근하는 게 비효율적인 것 같더라고요. 이러려고 조직을 만든 게 아닌데, 그래서 정리했어요. 직장이 없어진 후배들한테는 다른 직장을 주선해 주거나 프리랜서 일을 맡겼어요. 그 후부터는 책의 테마에 따라 그에 맞는 사람을 찾아 외부 팀을 꾸려 책을 만들었어요. 불필요한 인간관계에 신경 쓰지 않고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죠. 그렇게 2년 동안 자유롭게 지내다가 1년 전에 어시스턴트 두 명을 뽑았어요. 프로젝트가 커지면서 일이 많아졌거든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아닌지 고민도 돼요. 그런데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지만 사람으로 인해 기운을 얻기도 하잖아요.”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요소들을 덜어낸 이후, 기획은 김태경 편집장의 몫이 되었다.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과 기획을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차피 아이덴티티는 제가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결국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거니까요. 아이템이 정해지면 그걸 토대로 해서 세부 기획안을 받고, 역할을 분담하고, 각자 취재해서 원고를 넘기면 제가 취합해서 디자이너에게 보내요. 아이템은 늘 정리하고 있고요." 프로젝트 에디터들은 매번 바뀌지만, 사진작가 한 명과 디자이너 두 명은 십 년째 함께 해오고 있다. 형식과 돈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는 뜻이 통한 이들이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어반라이크』의 정체성은 탄탄해졌다. 틀 속에 갇힌 조직이 아니라 밖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시스템이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안주하지 않는 삶을 위한 질문 그녀의 라이프스타일 역시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공유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있다. 출근도 퇴근도 없고 회식도 야근도 없다. “회의는 화상으로 하고 다른 업무는 이메일 등으로 처리해요. 경기도에 『어반라이크』 사무실이 있어서 자료와 책들은 그곳에 보관하고, 서울에도 사무실이 하나 있어요. 사무실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나가고, 외부 미팅이 일주일에 두어 번 있어요. 주 4일 이상은 일을 하지 않아요. 장소가 어디가 됐든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돼요. 언제든지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요.” 이 말의 숨은 뜻은 ‘안주하지 않겠다, 언제든지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걸음을 멈추고 ‘나는 왜 아직 이 일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도 종종 있다. “무리하지 않아요. 모든 걸 쏟아붓지는 않아요. 예전에 잡지사에서 일할 때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나 자신이 소진되지 않도록 몸을 사려 왔던 것 같아요. 솔직히 독자를 생각해서 만드는 건 아니에요. 너무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했나 싶지만 그래서 버틸 수 있었고 질리지 않고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좋은 편집장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얻었다. “저는 글을 특별히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인터뷰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게 많지도 않고 모든 게 중간이에요. ‘모든 걸 다 잘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잘하는 사람을 찾아서 일을 맡기면 되는 거라는 결론을 내렸죠. 그릇’에 대한 책을 만들기 위해 그릇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요.”   이루고 싶은 꿈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집중하며 살아온 그녀의 다음 스텝은 무엇일까? 그 즐거운 고민이 깊어지고 무르익는다. “한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을 인터뷰해 보니, 그들의 마지막 정착지는 정원 아니면 서재였어요. 저는 식물 키우는 것엔 재능이 없으니, 정원은 아닌 것 같고, 책을 읽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궁극적으로는 도서관이에요. 얼마 전 출장에서 헬싱키에 있는 도서관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보드를 타고 놀고 있고 몇몇 사람들은 잔디밭에 누워서 책을 읽는 등 놀이터처럼 즐겁고 감각적인 공간이었어요. 저도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여행 갈 때마다 책을 엄청나게 사 오는데 혼자 갖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서울과 가까운 곳에 그런 도서관을 만들어서 도서관 할머니로 살고 싶어요.” 『어반라이크』의 다음 스텝도 있다. “해외에 진출하는 게 목표예요. 그래서 해외 도서전 같은 데 참가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도 고민 중이에요. 책을 만드는 일은 컵 하나를 만드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해요. 그런데 가성비는 컵이 훨씬 높죠. 효율적인 방식을 찾아야 해요. 비즈니스로도 성공하고 싶어요. 잡지 업계에 예전 같은 의 호시절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뭔가 찾아보고 싶어요. ‘이것도 지겨운데’, ‘하다 보니 비슷해지는데’라는 느낌이 올 때, 거침없이 변화하기 위해 늘 생각하고 있는 거죠.” 『어반라이크』는 ‘어떻게 하면 도시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품고 태어났다. 그에 대한 답을 김태경 편집장은 갖고 있을까? “제가 지향하는 것은 중간이에요. 위와 아래 사이, 경계, 가운데에 있는 중간층에 대한 고민이 부재하다고 생각해요. 보편적인 것에 대한 콘텐츠, 메시지가 없어요. 그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선택지도 없어요. 그런 걸 찾아가고 있어요. 도 아니면 모가 아니라.” 중간을 탄탄하게 채우면 도시에서 잘 살 수 있다. 매일 새벽, 그녀는 오롯한 혼자의 시간 속에서 그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자신을 위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김태경 편집장이 찾아낸 방법은 또 어떻게 변주되고 확장될까? 마음에 품을 즐거운 기대가 하나 생겼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 작가(Photographer)

대를 이어온 고소함

An Ordinary Day 2023 SUMMER

대를 이어온 고소함 한국인의 밥상에서 참기름은 빠지는 법이 없다. 나물을 무치거나 고기에 양념할 때도, 볶음밥부터 비빔밥까지 안 쓰이는 곳 없이 요리의 풍미를 완성한다. 38년째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한국인의 밥상을 책임지는 참기름을 짜고 고춧가루를 빻는 대우고추참기름은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대우고추참기름 대표인 유문석(兪文錫) 씨는 그의 어머니를 이어 이 자리에서 38년째 장사를 하고 있다. 한국의 요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참기름, 고춧가루와 함께 마늘, 잡곡, 액젓 등과 같은 식재료도 판매한다. 토요일 오전, 암사 지하철역에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자 눈 부신 햇살과 갖가지 냄새가 한 번에 들이닥친다. 휴일을 맞은 사람들의 가벼운 옷차림과 발걸음,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와 와르르 터지는 웃음소리가 지하철역 바로 옆에 있는 암사종합시장(岩寺綜合市場)으로 이어진다. 백여 개가 넘는 가게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이곳은 1978년도에 개점한 전통시장이다. 오랜 시간 동안 지역주민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긴 했지만, 본격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던 팬데믹 기간이었다. 시장을 드나들며 식재료를 구입하던 단골들이 온라인 주문을 요구했고, 시장 측에서 그 요구를 받아들여 전국 최초로 ‘우리시장 빠른배송’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시스템 덕에, 이제는 전국 어디에서나 암사종합시장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를 이어온 가게 참기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수확한 참깨를 깨끗이 씻어 건조해야 한다. 이것을 골고루 볶은 다음 충분히 식힌 후 유압기에 넣어 기름을 짜낸다. 참깨 한 말(약 6kg)을 짜내면 350mm들이 병 6~7개를 채울 수 있다. 시장 안으로 한 발짝을 딛자 벌써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풍겨온다. 이 자리에서만 38년째, 대를 이어서 가게를 지켜오고 있는 대우고추참기름에서 일 년 내내 흘러나오는 냄새다. 가게를 운영하는 이들은 아버지, 어머니, 아들로 이루어진 한 가족이다. 아들 유서백(兪抒伯) 씨는 아버지에게 일을 배우며 온라인 판매에 주력하고 있다. “회사에 다니다가 2년 전쯤 가게 일을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결정한 건 아니고 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아버지도 연세가 있으시니 슬슬 물려받을 준비를 해야겠다고요. 그러다가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우리도 온라인 판매를 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매일 아침 일곱 시 반에 문을 열고 저녁 여덟 시 반까지 장사한다. 쉬는 날은 없다. “깨소금 볶고 고춧가루 빻고 참기름, 들기름 짜고 선식도 만듭니다. 선식에는 겉보리, 현미찹쌀, 찰보리, 현미, 서리태, 백태, 검정찹쌀, 옥수수, 참깨, 흑임자, 땅콩, 호두, 호박씨, 해바라기씨, 아몬드, 바나나, 찰수수, 열일곱 가지 재료가 들어가요. 미숫가루처럼 물이나 우유에 타 먹을 수도 있어요. 이렇게 하루 열세 시간 일을 합니다. 저는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는 쉬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부모님은 하루도 쉬지 않으세요.” 곁을 지키고 서 있던 아버지 유문석(兪文錫) 씨가 왠지 쑥스러워하며 변명하듯 설명을 덧붙인다. “장사를 오래 하다 보니 이 동네 살다 이사 가신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이 여기까지 찾아오시는데 문이 닫혀 있으면 죄송하잖습니까. 그래서 문을 닫기가 어려워요.”   어깨너머로 배운 일 유문석 씨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제대 이후부터였다. “1970년대 후반 즈음 제가 군대를 다녀왔을 때 어머니께서 고추 장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마른 고추를 빻아주는 고추방앗간이었죠. 여기 말고 다른 시장이었는데, 그 시장이 헐리면서 이쪽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어머니를 도와드리다가 일을 함께하게 되었어요.지금은 시장이 현대화되어 괜찮지만, 예전에는 지붕이 없으니 바람 불면 날아가고 비 오면 천막 쳐야 하고…. 그때는 정말 힘들었죠.” 집마다 김치를 담그고 밥을 해 먹던 시절이었고 어느 집에나 고춧가루가 필요했다. 김장철은 특히 분주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고춧가루를 찾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다. “당시 우리 가게 바로 옆집이 참기름 짜는 가게였어요. 자주 왕래하다 보니 작업하는 걸 자주 봤고, 저도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1985년부터 유문석 씨는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함께 팔기 시작했다.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인지라 처음에는 실수도 잦았지만,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차차 제대로 된 참기름을 짤 수 있게 되었다. 『동의보감(東醫寶鑑)』 탕액편에 기록된 수천 가지 약재 중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참깨이다. 참깨는 ‘효마자(孝麻子)’라 불리기도 하는데, 아들보다 효도를 잘한다는 의미이다. 중풍과 심근경색을 예방하고, 흰머리를 검게 해주고, 근심을 덜어주는 것이 참깨의 세 가지 덕목으로 꼽힌다. 참깨의 45~55%는 기름이고 36%는 단백질이다. 그런데 참깨는 불용성 식이섬유가 풍부해서 소화가 잘 안되는 음식이기도 하다. 참깨의 영양분을 제대로 흡수할 수 있도록 가공한 것이 참기름이다. 참깨 한 말 즉 6kg으로 350ml들이 병 6~7개를 채울 수 있다. 흔히 색깔과 향이 진하면 좋은 참기름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참깨를 오래 볶으면 색과 향이 진해지는 대신 영양가가 손실된다. 색과 향이 연한 것을 선호하는 손님도 있기 때문에 먼저 취향을 물어보고 거기에 맞추어 상품을 준비한다. 참깨는 국산과 수입산 두 종류를 사용하는데, 국산 참깨로 짠 참기름이 수입 참깨로 찬 것보다 세 배 정도 비싸다.   가업을 잇는 아들 밀키트나 배달 음식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이전보다 참기름이나 고춧가루를 찾는 이들은 줄었지만, 가족은 일 년 내내 가게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한다. 최근엔 멀리서도 대우고추참기름의 제품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온라인 판매도 시작했다. 유문석 씨는 멀리서 일부러 찾아오는 단골들이 늘 마음에 걸린다. “거기는 기름집이 없습니까, 왜 여기까지 오십니까? 하고 물어요. 다른 데보다 싸게 드리지도 못하고 그저 정성껏 짜드리는 것뿐인데 매번 찾아주시니까.” 그래서 그런 손님들이 집에서 편하게 물건을 받을 수 있는 온라인 판매 쪽에 기대를 걸고 있다. “아직은 판매량이 많진 않아요. 그런데 앞으로 점점 온라인으로 가야죠. 쉽지는 않겠지만 아이가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잘 되겠죠.” 아들이 가업을 잇겠다고 회사를 그만둔 것은 혹시 아버지의 뜻이었을까? “강요는 안 했어요. 부모가 하라고 한다 해서 자식이 무조건 따라 하지는 않잖아요. 자기가 해야 하니까 한다고 했겠죠.” 식사 준비를 위해 주방을 지키던 그의 아내 신예서(申叡抒) 씨가 손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다가온다. 그녀는 스물네 살에 유문석 씨를 만나 결혼했다. 당시 시어머니가 고추방앗간을 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신 씨도 합류하게 되었다. “저는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자영업이라는 게 육체적 노동과 정식적 스트레스가 많잖아요. 잘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남이 볼 때는 앉아서 팔기만 하면 돈이 들어오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거든요. 장사가 잘되면 주위에 비슷한 가게가 들어서기도 하고, 손님들도 다 똑같진 않으니까 그분들 성향도 맞춰야 해요. ‘너는 직장생활 해라, 우리 수순 밟지 말고 편하게 살아라,’ 그런 마음이었어요.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같이 일을 하게 되니 부모로서 안타까운 부분들이 있어요. 우리도 힘들었는데 아들도 힘들게 살겠구나.” 부부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다. 큰아들이 장사를 같이하고 있고 작은아들은 회사원이다. “작은애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인플레이션이 엄청나니까 갈수록 힘들어진대요. 자영업도 힘들지만, 경제적인 부분은 월등히 나아요. 반대하지 못한 이유에 그런 것도 있어요. 또 회사는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그만둬야 하잖아요. 아이 아버지 동년배들은 이미 다 은퇴했어요. 이 일은 정년도 없고 나만 건강해서 움직이면 먹고사는 데는 걱정이 없으니 마음은 편하죠.” 신 씨는 일을 함께하게 된 아들이 걱정스럽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오간다. 어찌 되었든 이왕 하기로 한 거 잘 되길 바랄 뿐이다. 아버지의 일을 배우랴 온라인 판로를 개척하랴 정신없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예나 지금이나 손님을 상대하는 것은 주로 신 씨의 몫이다. “이것저것 물어보는 분들한테 제가 가진 노하우를 알려드리기도 하고, 그분들에게 배우기도 해요. 참기름은 상온에, 들기름은 냉장고에 보관하라거나, 제철 나물을 무칠 때는 파와 마늘을 넣지 말고 소금, 참기름, 깨만 넣으면 풍미가 훨씬 좋다거나.” 갓 짠 참기름 냄새를 뒤로하고 돌아 나오는 길, 시장 가방을 든 젊은 부부가 들뜬 발걸음으로 들어선다. 전통은 이런 방식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져 나갈 것이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 작가(Photographer)

자수로 이름표 새겨주는 체육사

An Ordinary Day 2023 SPRING

자수로 이름표 새겨주는 체육사 체육사는 운동에 필요한 기구와 장비들을 파는 곳이다. 하지만 학교 인근 체육사들은 그것만으로 수익을 내지 않는다. 학생들의 교복과 체육복에 자수로 이름을 새겨주는 일. 김일체육사 이경자 사장이 40년간 변함없이 해온 일이다. 재봉틀로 한 글자씩 이름을 새기면서, 그녀는 오늘도 기쁘게 손님들을 맞이한다. 이경자 씨는 지난 40년간 변함없이 오전에 체육사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린다. 학생이었던 손님이 엄마가 되어 아이 이름을 새기러 오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손님도, 정겨웠던 주변 풍경도 변했으나 변하지 않은 한가지는 그가 손수 새기는 이름 자수이다. ‘뚝딱’이란 말이 있다. 힘들이지 않고 일을 손쉽게 해치우는 모양을 나타낸다. 이경자 씨가 재봉틀로 이름을 새기는 데는 1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말 그대로 뚝딱 일을 끝내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보낸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일자로 선을 긋는 일부터 시작해 한글까지 수없이 연습하며 가능해진 일이다. 변함없는 40년 김일체육사가 일 년 중 가장 바쁠 때는 매년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인 1~2월이다. 신입생들은 교복을 새로 맞춘 뒤 이곳을 방문해 입학 연도에 해당하는 컬러에 이름을 새긴 명찰을 단다. 이 씨의 손가락들은 한쪽으로 일제히 휘어있다. 이름을 새기며 살아온 40년 세월이 손에 오롯이 담겨있다. “처음 재봉틀을 다룰 땐 손을 많이 다쳤어요. 지금은 손가락이며 손목 통증에 시달리고 있고요. 그래도 참 행복했던 것 같아요. 재봉틀을 돌리고 있으면 딴생각이 전혀 안 나거든요. 바쁠 땐 밥 먹는 것도 잊어요. 시간이 정말 빠르게 가요.” 그녀가 40년을 보낸 김일체육사는 경기도 김포시 북변동에 있다. 북변동은 과거 김포시의 중심가였던 곳이다. 1970년대 군청과 우체국이 들어서고 그 주변에 점포와 술집, 다방 등이 들어서면서 김포 최고의 번화가로 자리 잡았다. 그랬던 이 거리가 현재 재개발을 앞둔 상태다. 지금의 정겨운 풍경들이 몇 년 안에 흔적 없이 사라질 예정이다. “이 동네가 철거되면 그때는 체육사를 그만두려고요. 지금은 한 달 월세가 오십만 원인데, 새 곳으로 가면 지금 보다 몇 배를 더 내야 할 거예요. 현재의 수입으로는 감당할 방법이 없어요. 이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몇 년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저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더없이 고맙게 느껴져요.” 자수로 이름표를 새겨주는 학교는 김포중학교, 김포여자중학교, 김포고등학교를 비롯해 김포시에 있는 약 20개의 중•고등학교다. 학교별로 학년별로 명찰 색이 다르다. 혹여 실수라도 할까 봐 해가 바뀌면 학교, 신입생, 재학생 등 각각의 명찰 색깔을 벽에 새로 써서 붙여두고 일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처럼, 색색의 이름표를 새기며 그녀는 묵묵히 새봄을 맞이한다. 손, 발, 무릎의 삼박자 김일체육사는 이 씨가 세 번째 주인이다. 첫 번째 주인은 이 씨의 고교 동창의 아버지였다. 김포 시가지가 형성되던 무렵에 문을 연 이곳을 고교 동창이 물려받아 운영했고, 1983년 그녀가 인수해 지금에 이르렀다. “김일체육사가 ‘김포에서 제일가는 체육사’라는 의미더라고요. 뜻이 참 좋아서 상호를 그대로 쓰고 있어요.” 체육사는 운동과 관련된 여러 가지 기구와 장비를 파는 곳이다. 하지만 학교 인근 체육사들은 그것만으로 수익을 내지 않는다. 교복에 자수로 이름을 새겨주는 것이 꽤 중요한 수입원이다. 체육복을 팔 때 ‘서비스’로 이름을 새겨주다 교복에 다는 명찰까지 체육사의 몫이 된 것이다. 학교 교과에 교련(敎鍊 고등학교 이상의 학생들에게 실시된 군사 교육훈련 과목으로 대학 교련은 1988년에 폐지됐고, 고등학교 교련은 1997년부터 선택과목으로 바뀌어 사실상 폐지됐다)이 있던 시절에는 교련복에 이름을 새겨주는 것도 체육사의 일이었다. 교련복을 파는 곳이 체육사였기 때문이다. “초창기엔 여기서 판매하는 교련복이며 체육복을 다른 가게로 가지고 가서 이름을 새겨왔어요. 자수를 할 줄 몰랐으니까요.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어서 장사하면서 틈틈이 연습했어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온종일 재봉틀과 함께했죠. 자신 있게 이름을 새기기까지 6~7년은 걸린 것 같아요. 재봉 자수는 손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발로 페달을 밟아 속도를 조절하고 무릎 리프트를 밀어 글씨 두께를 조율해야 해요. 삼박자가 맞아야 하기 때문에 오랜 숙련이 필요하죠.” 이경자 씨가 바늘귀에 실을 꿰는 건 아주 순식간이다. 시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실을 꿰는 감각이 손에 익은 덕분이다. 재봉틀로 새긴 그의 글씨체는 아름다운 궁서체다. 궁서체는 조선시대 궁녀들이 쓰던 한글 서체로 예의를 갖춰야 하는 문서에 주로 사용한다. 붓글씨에서 유래한 서체답게 자수로 새긴 그의 글씨도 여간 유려하지 않다. 무엇보다 세상에 하나뿐이다. 손으로 새기니 그럴 수밖에 없다. 명찰 한 개를 새겨주면 이천 원을 받는다. 어떤 이는 너무 싸다고 하고 어떤 이는 좀 비싸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저 웃으며 이름을 새길 뿐이다. “4년 전에 우리 가게에도 컴퓨터자수 기기를 들여놨어요. 친동생이 컴퓨터 자수를, 제가 재봉 자수를 맡아 함께 작업해요.” 컴퓨터자수와 재봉자수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체온이 스미기라도 한 것처럼, 수동으로 새긴 것이 좀 더 따뜻하다. 재봉 자수를 찾는 고객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일체육사엔 학창 시절 이곳에서 명찰을 해간 이들이 아이 엄마가 되어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녀는 참 기분이 좋다. 한 자리를 오래 지키길 잘했다 싶어진다. 요샌 근처 유치원생 엄마들이 유치원복이며 수건에 이름을 새기러 올 때가 많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꼬마들인데도, 이름을 새기는 이 씨의 얼굴엔 늘 환한 미소가 돈다. 고향에서 나무처럼 매년 명찰을 새기다 보면 그 해 유행하는 이름을 알 수 있다. 부모의 성을 함께 쓰는 네 글자 이름이나, 다섯 글자나 되는 긴 이름을 발견할 때도 있다. 손끝의 온기를 더해 이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담아 새기다 보면 하루가 지났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40년을 하다 보니 시대별로 어떤 이름이 유행하는지 알게 되더라고요. 한때는 한글 이름이 많더니 요샌 중성적인 이름이 많은 것 같아요. 부모의 성을 함께 쓰는 네 글자 이름도 새겨봤고, 한글로 된 다섯 글자 이름도 새겨봤어요. 돌아보니 다 재미있는 추억이네요.” 유행은 스포츠 물품에도 있다. 인기를 끄는 운동에 따라 잘 팔리는 물건이 그때그때 달라진다. 너른 들이 있는 김포는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겨울마다 논을 얼려 아이들이 썰매며 스케이트를 타던 지역이다. 운영 초창기인 80년대 중반까진 그도 스케이트를 많이 팔았다. 겨울이 겨울답던 시절이었다. 롤러스케이트가 잘 나가던 때도 있었다. 무엇이 잘 팔리든, 아이들이 건강하게 놀 수 있는 물건을 판매한다는 게 그는 참 좋았다. 탁구 세트와 배드민턴 세트, 축구공, 농구공 등은 유행을 타지 않고 그럭저럭 팔리던 물품이지만, 최근엔 인터넷 판매에 밀려 판매실적이 매우 저조하다. 대신 옷에 패치를 붙이러 오는 사람이 많다. 집에서 바느질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구멍 난 겉옷에 패치를 붙여달라고 고객들이 찾아오면, 장미꽃이나 나뭇잎 같은 문양으로 바느질을 해 구멍을 메워드리곤 해요. 재질이 다른 패치를 옷감에 붙이는 것보다, 옷과 같은 색 실로 문양을 만들어 구멍을 메우는 게 더 잘 어울리거든요. 손님들이 좋아해 주셔서 저도 기분이 좋아요.” 이 동네엔 김일체육사 외에 체육사가 한 곳 더 있다. 김포체육사가 그곳이다. 거기서도 재봉 자수를 하지만, 두 곳은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협력하는 관계다. 체육복이 필요한 학생 수를 계산해 체육복을 반반씩 들여오고, 한 곳에서 먼저 다 팔면 다른 곳으로 안내하는 식이다. 서로 도와야 오래갈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아이들도 동네 사람들과 함께 길렀다. 9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기 전 김일체육사는 김포시 유일의 영화관이던 우파레극장 자리에 세 들어있었다. 가게 안에 살림집을 들이고 거기서 두 아이를 길렀다. 이웃들이 수시로 아이들을 돌봐줬다. 일과 육아를 함께하느라 꽤 힘들었는데도, 온 동네에 온기가 가득하던 그 시절이 그녀는 무척 그립다. “김포 양촌읍에서 태어나 김포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 나왔어요. 고등학교 선배와 결혼해서 여태 김포에 살고 있고요. 어릴 땐 이 주변이 다 논밭이었어요. 가을이면 벼가 노랗게 익은 들판이 정말 아름다웠죠. 도시가 형성되면서 옛 정취는 사라졌지만, 따뜻한 추억들이 내 가슴에 있어요. 생애 마지막까지 이 지역에서 살고 싶어요.” 이경자 씨는 올해 칠순을 맞는다. 태어난 자리에서 한평생을 살아가는 나무처럼, 고향 땅에 단단히 뿌리내린 칠십 년 인생이다. 그녀가 만든 나무 그늘 아래로 오늘도 하나 둘 손님이 찾아오면 이름을 새기며 이곳에 온기를 채워간다. 박미경(Park Mi-kyeong 朴美京)자유기고가(Freelance Writer)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도장에 새기는 이름의 무게

An Ordinary Day 2022 WINTER

도장에 새기는 이름의 무게 도장은 나무, 뼈, 뿔, 수정, 돌, 금 등에 글씨나 문양을 새겨 문서에 찍도록 만든 물건으로 인주나 잉크를 묻혀 날인하여 개인이나 단체를 증명하는 용도로 쓰인다. 한국에서 도장은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만큼 중요한 물건이다. 도장에 대해서는 잘 안다는 뜻인 ‘박인당(博印堂)’의 박호영 씨는 70여 년 동안 세상에 하나뿐인 도장을 만들고 있다. 박호영 씨는 매일 아침 집을 나서 그의 가게인 박인당(博印堂)으로 출근한다. 도장 대신 사인이 익숙한 요즘이라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에서 하나뿐인 도장을 만드는 일에 마음을 다하고 있다. 박호영(朴浩榮) 씨는 매일 아침 집을 나선다. 84세나 되었지만,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쉬는 날은 없다. 손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전철을 타고 그의 가게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에 있는 오래된 빌딩 3층에 8평 남짓한 박인당이 있다. 가게 입구와 벽면은 그가 지금까지 받아온 상장으로 빼곡하다. 근무 시간은 아침 열 시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지만, 자리를 비울 때도 종종 있다. “나이가 드니까 병원에 자주 가야 해. 오후 세 시쯤엔 점심 먹으러 나갔다 오기도 하고.” 빌딩 밖에는 간판도 걸려 있지 않고, 운이 나쁘면 주인을 만날 수도 없다. 그래서야 운영이 제대로 될까 싶지만, 이곳을 찾는 손님들의 대부분은 오랜 단골 아니면 단골의 소개로 온 사람들이라 문제 되지 않는다. 도장의 존재 이유 도장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에 일찌감치 등장한다. 기원전 5,000년 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장은 점토판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 신화)에는 ‘천부인(天符印)’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환인이 그 아들 환웅에게 천하를 다스리고 인간 세상을 구하게 함에 있어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보냈다’라는 기록이 고려 시대 때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 ‘천부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여기에 도장‘인(印)’이 들어가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환웅이 환웅 천체(하늘의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표이자 상징으로 추측된다. 도장의 존재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한때 도장은 한국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도장이 없으면 각종 계약서, 문서를 작성할 수 없었고 은행 거래도 할 수 없었다. 71년 전, 1〮4후퇴(한국전쟁이 일어나고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공세에 따라 정부가 수도 서울에서 철수한 사건)로 인해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피란민들에게도 도장은 필요했다. 피란 후 살기 위해 배운 일 당시 박호영 씨는 함경남도 흥남시에 살고 있었다.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흥남시에 살던 육촌 형님 집으로 가족들과 함께 옮겨갔다. 1〮4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피란하여 정착한 곳은 거제도(한국 남해에 있는 섬으로 지금은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였다. 박 씨는 쇠톱을 갈아서 도구를 만들고 직접 나무를 해서 도장을 새겨 사람들에게 팔았다. 돈이 없다고 하면 곡식으로 대신 받았다. “거기서 3년을 살았어. 처음에는 1인당 3홉씩 배급식량을 주다가 점점 줄어들더니 결국 끊어졌어. 먹고 살 것이 없으니까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지.” 부산의 판자촌으로 주거지를 옮긴 지 6개월쯤 지났을 때, 흥남시에서 함께 살던 육촌 형님의 연락을 받았다.‘내 후배가 서울 신당동에서 인장 업을 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일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열여섯 살의 박 씨는 짐을 꾸려 서울로 올라왔다. “그 집에서 10년 동안 일했어. 추사체 연구회 회원이었던 김두칠(金斗七) 선생이 나를 가르쳤어. 그분이 글씨를 써주면 나는 새기는 작업을 했는데, 낮에 일을 받아 오니 나는 주로 밤에 일을 했지. 그러면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고. 바쁠 때는 하루 두 시간 자고. 글자 한 자 새기는 데 얼마, 하는 식으로 돈을 받았어. 24시간 동안 1,000자를 새길 때도 있었어.” 도장을 새기고 있을 때면 손님이 찾아와도 모를 집중력을 발휘한다. 작은 인면에 글자를 새기는 탓에 시력이 저하되는 직업병을 얻기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이 일을 그만두면 더 큰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며 웃는다. 집중과 노력의 시간 좌서(左書), 전서(篆書), 예서(隸書), 초서(草書) 등 한자의 서체와 서예도 이때 익혔다. 어린 시절 천자문(千字文 한문 학습 입문서로 널리 사용된 중국의 책)을 익힌 것이 도움이 되었다. 독립을 한 것은 스물여섯 살 때였다. 서울 을지로 5가에 있는 인쇄소 한쪽에 책상 하나를 놓고 손님을 받았다. 이후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지금의 자리에 가게를 얻은 것이 11년 전이다. 도장을 새기는 데 필요한 건 집중력과 노력이라고 박 씨는 말한다. “이제 손으로 직접 새겨서 하나하나 만드는 도장 가게는 거의 없어. 돈벌이도 안 되는 데다가 너무 힘이 들어.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서체를 알아야 하고 서예도 배워야 하는데 젊을 때부터 익히지 않으면 힘들지.” 동전보다 작은 인면(글자를 새기는 부분)에 최대 24자까지 새길 때도 있다. 그래서 ‘황반 변성’이라는 직업병도 얻었다. 황반은 망막 중심부에 있는 신경조직으로, 시세포 대부분이 존재하고 물체의 상이 맺히는 곳이다. 황반변성은 황반부의 후천적인 퇴행으로 변성이 일어나 시력장애를 일으키는 질환으로 실명을 초래할 수도 있는 질환이다. 글자나 직선이 휘어 보이고 글을 읽을 때 어느 한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왼쪽 눈은 온전한데 오른쪽 눈이 그래. 벌써 20년쯤 되었어. 수술로도 치료가 안 되고. 그러니 일하다가 자주 쉬어야 해. 지금은 하루에 한 개 정도 만들어.” 70여 년 동안 도장을 만들어 왔지만,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2001년 수해로 그가 만든 도장이 찍힌 명부를 모두 잃은 이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4,700여 개에 달한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도장이 필수품이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1990년대 컴퓨터 프로그램과 기계가 보급되면서 빠르고 값싸게 만들 수 있을뿐더러, 서명 거래가 일반화되어 도장이 없어도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박 씨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도장’만드는 일을 멈출 생각이 없다. “한 번 새기면 평생 사용하는 게 도장이야. 내가 만드는 도장은 위조가 불가능해.” 손님과의 상담 시간은 그래서 중요하다. 먼저 도장의 재료를 정한다. 단단한 나무에서부터 값비싼 춘천옥(강원도 춘천에서 나는 옥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 중 하나를 선택한 후 이름의 획수를 계산하여 몇 자를 새길지 정한다. 한국인의 이름은 성을 포함하여 보통 세 글자인데, 한자 이름의 총 획수에 따라 길흉이 달라진다는 성명학의 수리론을 적용하여 이름 뒤에 복과 운을 불러오는 글자를 더하는 경우도 있다. 이어서 이름과 어울리는 서체를 정하고, 먼저 붓으로 인면에 쓴다. 그 후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전각 작업이 시작된다.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 집중하다 보면 시간이 금세 지나가지. 눈 때문에 자주 쉬어야 하지만.” 박 씨는 4,700명의 이름과 연락처, 인영(도장을 찍은 형적) 등이 기록된 고객 명부를 갖고 있다. 2001년, 청계천이 범람하여 당시 반지하에 있던 가게가 수해를 입었는데, 그 후 컴퓨터로 명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60이 넘은 나이였지만 컴퓨터를 구입하여 차근차근 독학으로 배워나갔고 명부 정리는 물론 포토샵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 도장을 늘 가지고 다니느냐’고 묻자 그는 주머니를 뒤져 두 개의 도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손으로 직접 뜬 도장 주머니는 젊은 시절, 아내가 만들어준 것이다. “아내는 할 만큼 했으니 쉬라고 말하지. 그런데 나는 싫어. 내 나이에 일하는 사람, 내 주위에 한 명도 없어. 일이 없으니 먹고 자는 것밖에 할 게 없잖아. 머리도 몸도 퇴화하는 거야. 나도 그렇게 될까 봐 일을 못 놓는 거지." 소원을 묻자 박 씨는 가볍게 웃으며 머리를 흔든다. “소원? 없어. 인생 말년에 무슨 소원이 있겠어.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다 가는 것 말고는.”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이름 안에는 그가 행한 일, 그가 걸어간 일, 그가 뿌린 씨앗과 거두어들인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박호영 씨가 새겨온 또 새겨갈 이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가 만든 도장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한 사람의 삶을 증명해 줄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몇 분이면 도장을 만들 수 시대지만 그는 여전히 고객의 행복을 바라며 글자 하나하나를 그의 손때 뭍은 조각도로 새긴다. 이 일은 어떤 기계로도 대신할 수 없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서비스를 파는 당구장

An Ordinary Day 2022 AUTUMN

서비스를 파는 당구장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많이 줄긴 했으나, 문화체육관광부 통계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국내에 등록된 당구장은 15,845개이다. 9,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년에 한 번 이상 당구를 치는 남성은 12.5%로, 1,125명(복수 응답)에 달한다. 주로 남성들이 취미나 운동 또는 친목을 목적으로 찾는 당구장. 이곳에서 당구가 아닌 서비스를 판다는 김만연(金萬演 Kim Man-youn) 씨는 오늘도 고객을 향해 환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다 30년 동안 회사에 다니다 퇴직 후 당구장 주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김만연 씨. 그는 고객에게 마음을 다하는 서비스가 늘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인정전(仁政殿) 동행각(東行閣)에 옥돌대 2대가 놓여 있어 때때로 대신들과 큐대를 잡았다.’ 인정전은 창덕궁(昌德宮)의 정전(正殿)이고 옥돌대는 당구대이다. ‘대신들과 큐대를 잡은’ 인물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으로,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을 ‘옥돌(당구)의 날’로 정할 정도로 당구를 즐겼다고 한다. 위의 기록은 순종의 장례식을 담은 사진첩 『순종 국장록(純宗國葬錄)』에 실려 있는데, 순종이 서거한 해는 1926년이다. 1884년 미국 선교사가 제물포에 당구대를 처음 설치했으며 당구가 왕실에 들어온 것은 1909년이고, 순종이 궁에서 당구를 즐길 당시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당구장들도 성업 중이었다. 한국인이 개업한 최초의 당구장 무궁헌은 1924년에 문을 열었는데 상류층 사람들의 유흥장이자 사교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마음을 전하는 인사 서울특별시 구로구 디지털단지 골목으로 접어들면 줄줄이 늘어서 있는 당구장 간판들을 볼 수 있다. 금요일 오후 4시, ‘다빈치 당구장’의 문을 열자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즐거운 탄성이 터져 나온다. 막 출근한 당구장 주인 김만연 씨는 테이블을 돌며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중이다. “이 지역은 건물마다 당구장이 하나씩 있어요. 손님들을 우리 당구장으로 오게 하려면 뭔가 달라야죠. 가장 반응이 좋은 게 인사예요. 한 바퀴 돌면서 ‘오셨습니까’, ‘뭐 필요한 거 없습니까’라고 인사도 건네고 농담도 주고받고요. 당구장이 뭘 파는 곳이라고 생각하세요?” 난데없이 질문이 기자에게 날아온다. “서비스인가요?”라는 대답이 몹시 반가운 눈치다. “맞아요. 서비스업종이에요. 당구를 파는 건 당구 선수들이죠. 서비스를 받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니까 사장이나 매니저가 늘 자리를 지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요. 손님들이 뭔가를 요구하기 전에 미리 드려야죠.” 김 씨는 오후 4시에 출근하여 저녁 10시에 야간 근무자가 오면 퇴근한다. 이때도 역시 인사를 빠뜨리지 않는다. 악수, 하이 파이브 등 스킨십도 하고 눈도장도 찍는다. “직원이 새로 오면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게 인사하는 법이에요. 상대에게 존중의 마음을 실어 예를 표하는 게 인사잖아요. 그게 서비스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당구장을 차리기 전, 그는 30년 동안 회사 생활을 했다. 대기업 기획조정실에서 고객 만족 업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서비스’에 예민하다. 퇴직 후 찾은 제2의 직업 “한 직장에서 30년을 근무하고 2012년에 퇴직했어요. 두 달쯤 쉬었는데 평생 일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쉬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뭐라도 해볼까, 뭘 할까, 고민하다가 아이들한테 물었는데 둘째 딸이 ‘아빠는 뭘 잘해?’라고 묻더라고요. 클래식 기타, 골프, 볼링, 바둑, 당구 다 잘한다고 했더니 그중 당구가 제일 좋을 것 같대요. 놀면서 그냥 하라고. 당구 칠 줄은 알지만 운영은 모르니까 서점 가서 책을 한 권 샀어요.” 『당구장이나 해볼까』라는 책 속에 한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책 속에 ‘200은 흥하고 1,000은 망한다’는 말이 있었어요. 당구 200점을 치면 손님한테 서비스를 열심히 하지만 1,000점을 치면 손님을 가르치려 하기 때문에 망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김 씨는 1,000점(4구 당구 기준)을 친다. 웬만한 프로선수의 실력이다. ‘가르치려 들면 안 되는구나!’라고 다짐하고 당구장을 인수했다. 이것저것 배워가며 슬슬 재미를 붙일 무렵, 옆 당구장이 시설과 서비스가 더 좋다고 꼬셔서 단골 고객을 빼앗아 가는 사기꾼에게 호되게 당했다. 찾는 이가 줄자 계속되는 적자로 인해 임대료도 못 내는 지경에 이른 김 씨는 ‘손님을 가르쳐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인터넷 유명 당구 동호회에 『당구란 수학과 물리학』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공식을 배우고 대학에 들어가면 공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배우죠. 기존 당구 입문서에는 공식만 나와 있어요. 그걸 그대로 외우면 금방 잊어버려요. 원리를 이해하면 창의력이 생기죠. 저는 거기에 중점을 두었어요. 꼬박 일 년을 써서 한 장 한 장 프린트해서 손님들에게 나눠줬어요.”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적자는 여전했다. 그만 가게를 닫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잘 알고 지내던 국가대표 프로 당구선수가 서울시 구로구에 있는 디지털단지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구로공단 자리에 새로 조성된 디지털단지는 IT기업들이 즐비하고 사회에 첫발을 디딘 사회 초년생들이 주를 이루는 곳이다. 유동 인구가 많아 하루 24시간 북적거린다.“저녁 여섯 시쯤 와보니 사람들이 지하철역까지 줄을 서서 행렬하듯 퇴근을 하는 거예요. 두 번째 와서 계약했어요.” 첫 번째 당구장을 2년 만에 정리하고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게 8년 전이다. 363㎡ 크기에 16대의 당구대가 있다. 한 달 임대료가 1,000만 원이고 첫날 매상은 30만 원이었는데 보름도 안 되어 100만 원을 넘어섰다. 한 해 동안 번 돈의 10%는 재투자해 당구대와 설비 등을 바꾸어나갔다. 아침 열 시부터 다음 날 새벽 두 시까지 영업하는데 손님이 있으면 새벽 다섯 시에 문을 닫기도 한다. 낮에는 은퇴 후 여가생활을 즐기는 60대들이 주를 이루고 퇴근 시간이 지나면 30~50대 회사원들로 북적인다. 새벽 시간에는 10~20대들이 자리를 채운다. 하루 평균 100명 이상의 손님들이 그의 당구장을 찾는다. 김만연 씨에게 당구는 오락문화를 넘어 과학이다. 그는 직접 쓴 책을 통해 ‘당구는 뉴턴의 운동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물리학이며, 움직이는 각도는 수학’이라고 말한다. 낮에는 여가생활을 즐기는 60대가, 퇴근 시간 이후에는 회사원들이, 새벽에는 젊은이들로 당구장은 매일 북적인다. 손님을 부르는 남다른 서비스 김 씨가 당구를 처음 배운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학원에 다닐 때였다. 처음부터 잘 쳤냐고 묻자 ‘왕도는 없어요, 연구와 노력의 대가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1974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때만 해도 오락문화가 별로 없었어요. 바둑 아니면 당구 정도였죠. 10년 전쯤 당구 중계를 해주는 채널이 생기면서 당구를 즐기는 사람이 많이 늘었어요.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당구가 스포츠로 인정되었고 유흥장이었던 당구장이 스포츠시설이 되었죠.” 당구를 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과 비례하여 당구장도 엄청난 기세로 늘어났다.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꿈꾸며 창업하는 ‘시니어 창업’이 급증한 것도 한몫 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기준, 60세 이상의 시니어 창업자 6명 중 5명은 폐업을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과 다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앉아서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있으면 좋지요. 그런데 우리 당구장은 당구대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쾌적하진 않아요. 그 대신 좋은 시설을 갖추려고 애를 많이 쓰죠. 당구대마다 VAR(Video Assistant Referees)을 설치해서 게임을 하다가 시비가 붙으면 비디오로 확인할 수 있어요. 오후 여섯 시까지는 11,000원을 내면 무제한 당구를 칠 수 있고요. 한 시간에 한 번 음료수 카트를 끌고 돌아다니면서 ‘뭘 좀 도와드릴까요?’ 물어요. 벽에는 시계도 걸지 않았어요. 뭔가 붙어 있으면 보게 되고 글씨가 있으면 읽게 되고 그러다 보면 주의가 흩어지니까요. 콜벨도 없어요. 부르기 전에 먼저 가서 서비스를 하겠다는 거죠.” ‘나이 들어 은퇴하고 친구들과 어울릴 때 가장 가성비가 좋은 것이 당구’라고 김 씨는 말한다. 비용이 적게 들고 두뇌를 쓰기 때문에 치매 예방에도 좋다. 김 씨가 쓴 당구 칼럼은 책으로 엮여 나와 당구인들 사이에서 제법 소문이 났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개인 레슨도 하고 있다. ‘당구는 뉴턴의 운동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물리학이며, 움직이는 각도는 수학입니다.’ 표지에 쓰인 문구다. 책장을 넘기자 그림과 함께 루트가 나오고 피타고라스 방정식이 나온다. 공식을 외우는 게 아니라 이해한 사람들의 실력이 쑥쑥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이 만만치 않다. 당구는 물론이고 골프, 클래식 기타, 포커, 바둑까지 단순한 아마추어 이상의 실력을 갖추었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요즘 김 씨는 산악자전거에 빠져 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출근하고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 자전거로 산을 탄다. “늦둥이 막내아들이 결혼식을 올릴 때, 클래식 기타로 축하 연주를 해주는 게 제 꿈입니다. 은퇴 후의 삶이니 가급적 즐겁게 살아야죠.” 30년의 직장생활 끝에 ‘당구장이나 해볼까’ 하고 시작한 일이 삶의 새로운 에너지가 되었다. 하고 싶은 일, 즐거운 일이 여전히 잔뜩 남아 있는 제2의 인생이다. 그의 당구장엔 여유롭게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은 적지만, 세심하게 관리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시설이 있고, 손님이 부르기 전에 먼저 찾아가는 서비스가 있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마음을 끌어당기는 간판

An Ordinary Day 2022 SUMMER

마음을 끌어당기는 간판 박근철(Park Guen-chul 朴根哲) 대표는 2005년 간판을 제작하는 종합 광고 기획사 ‘DISIGN M’을 창업해 지금까지 일해 오고 있다. 그는 튀지 않으면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품위 있는 디자인으로 고객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다. 2005년부터 간판 제작하는 ‘DESIGN M’을 운영하는 박근철 씨는 고객의 마음을 빠르게 읽고 원하는 디자인을 만들어 신뢰를 얻고 있다. 낯선 곳에 가면 길가에 줄줄이 늘어선 간판들을 비교하며 식당을 선택하게 된다. 비슷비슷한 음식을 파는 가게들 사이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간판이 있다면 음식 맛이 남다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간판은 가게의 얼굴이자 가게 안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 간판은 가게의 첫인상에 불과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문을 하게 만드는 마법, 딱 거기까지다. 손님의 두 번째, 세 번째 발걸음은 주방장의 손맛과 고객을 대하는 태도, 청결, 분위기 같은 요소들이 좌우한다. 이처럼 간판은 첫걸음을 이끌 뿐이지만, 그 힘이 없이는 아무리 뛰어난 손맛도 세상에 알려질 수 없으니 고객의 물꼬를 트는 마중물이라 할 수 있다. 박근철 대표는 그런 마중물을 붓는 사람이다. 직장 생활 건물 입구에 세워진 DISIGN M의 간판은 간결하지만 강한 인상을 준다. 열린 출입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돈된 사무실이 고요하다. 좌우를 살펴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다. 크기로 봐서는 열 명 정도는 너끈하게 일할 공간이다. “계십니까?” 그제야 출입문 맞은쪽 책상에 놓인 두 개의 모니터 사이로 얼굴이 올라온다. 박 대표다. 주문받은 간판 디자인에 열중한 나머지 사람이 들어서는 줄도 모른다. 박 대표의 고향은 강원도 인제군으로 깊고 높은 한계령 초입에 있다. 1등급 물에서만 산다는 쉬리가 살 만큼 깨끗한 개울이흐르는 곳이다. 초등학교를 나와서는 이웃 마을의 중‧고등학교로 통학했고, 한계령 너머 고성에 있는 경동대학교 건축공학부에 입학했다. 삼남매인 그는 위로는 형이, 아래로는 여동생이 있다.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집안 살림살이라 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학비는 스스로 벌어야 했다. 그러던 차에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닥쳤다. 직업 군인이 되려고 부사관 지원을 했는데 경제 위기 탓에 경쟁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결국 자원 입대해서 군 복무를 마쳤다. 전역 후 춘천으로 간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여러 곳에서 일하다가 2002년 우연찮게 간판 제작 시공 업체에 취업을 하게 됐다. 그곳에서간판 디자인과 제작, 시공을 배웠다. 간판 일이라는 게 한 가지 기술만 익혀서는 안 된다. 자그마한 간판 하나를 시공하려 해도 철공, 조명, 전기 같은 다양한 기술이 필요하다. 용접, 그라인더, 드릴 작업은 필수고 커팅, 전기 배선그리고 다양한 소재의 특성도 익혀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는 사람의 힘만으로 무게가 수백 킬로그램이나 되는 간판을 끌어올리고 밧줄에 매달려 설치해야 했다. 육체 노동 강도가 대단히 셌고 위험성도 컸다. “그때는 너무 무서웠어요. 지금처럼 사다리차나 스카이 같은 장비가 없었거든요. 건물 4~5층 옥상에서 간판을 끌어올린 다음 안전 달비계에 몸을 의지해 작업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평균적으로 한 사람이 100kg 정도를 당겨야 했다. 간판 무게가 400kg이면 4명이 위에서 당기는 식이다. 때때로 사고도 일어났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가로 30m 길이의 간판을 옥상에서는 8명이 당기고, 아래에서는 한 명이 사다리에 올라가 밀어 올렸다. 그때 갑자기 아래에서 밀고 있던 동료가 사다리 아래로 추락한 거다. 3층 높이였다. “2단 사다리의 걸쇠가 풀려 미끄러졌어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친구였는데……. 당시 사고로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다녀요.” 박 대표도 왼쪽 엄지를 들어 보인다. “저도 엄지손가락이 안 구부러져요. 드릴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 인대가 끊어졌어요.” 가운뎃손가락에도 드릴 날에 장갑이 말리면서 생긴 상처가 또렷하다. 홀로서기 간판 업체 직원 시절 월급은 85~90만 원이었다. 2003년께 그 월급을 받으며 달세 방에서 살았다. 보증금 50만 원에 달세가 30만 원이었다. 학비를 마련하려고 일을 시작했는데, 달세를 내고 나면 통장이 휑하니 비었다. 대학에 복학한다고 장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빨리 기술을 익혀 독립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직원 시절 디자인 편집 작업도 어깨너머로 배웠다. 부족한 부분은 책을 사서 독학으로 익혔다. 20년 전 그가 했던 첫 디자인은 닭발 집 간판이었다. 이 간판은 지금도 춘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 가게가 번창해 춘천에만 스무 개가량 체인점이 생겼기 때문이다.“지금 보면 폰트나 그림이 촌스럽다는 생각도 들어요.하지만 제 첫 디자인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시공할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해요.”지금의 회사는 2005년 창업했다. 월급쟁이 직원으로는 장래가 막막해 작은 사무실을 얻고 다이어리 한 권을 무기로 간판 업계에 들어섰다. 박 대표의 어깨 뒤로 보이는 책꽂이에는 제각각의 다이어리가 빼곡히 꽂혀 있다. 그의 간판 업력과 엇비슷한 권수다. 고객의 요구 사항을 비롯해 결제 내역까지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몇 쪽을 넘기다 보니 과거 그의 발자국을 따라 동행하는 듯하다. 십수 년 동안 그의 손을 거친 간판들, 그리고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담겼다.그는 직관적인 사람이다. 디자인에서도 느낄 수 있다. 현장에서 익힌 감각으로 고객의 요구를 빠르게 읽고 디자인 콘셉트를 뽑아낸다. 회사 이름인 ‘M’도 그렇다. 거창하게 의미를 담고, 고민을 해 짓지 않았다. ‘업체 명을 뭘로 하지?’ 궁리할 때 신용카드에 찍힌 브랜드 로고가 보였다. ‘아, 이거다!’ 그건 바로 알파벳 M이었다. 간판 제작엔 철공, 조명, 전기 같은 다양한 기술이 접목된다. 여기에 배선, 사다리 작업 등 위험한 순간이 뒤따른다. 늘 안전에 유의해야 하는 이유다. 직관과 열린 마음 작가가 글을 쓰거나 디자이너가 책 표지를 작업할 때, 거듭 고치고 바꾸다가 첫 콘셉트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인이 시를 쓸 때도 그렇다. 시를 쓰도록 마음을 흔든 첫 감성이 중요하다. 탈고를 거듭하다 감성을 놓치면 구겨 버려야 한다. 처음 그 순간의 직관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타고난 광고쟁이다. 논리나 지식, 이성을 뛰어넘는 직관의 소유자다. 회사가 십오 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빛바랜 느낌이 들지 않고 여름날 햇빛처럼 쨍하고 빛나는 이유도 그의 직관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고객의 요청이 들어오면 현장 답사를 간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는 간판을 구상하면서 어디에 포인트를 줘 돋보이게 할까를 고민한다. 튀지 않으면서 눈길을 사로잡는 품위. 그것이 그가 추구하는 디자인이다. 자신의 디자인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고집하지 않는다. 고객의 마음을 빠르게 읽어 내 다시 작업에 들어간다. 열린 마음을 지닌 기획자다. 직관과 열린 마음은 회사가 지속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처음엔 알음알음 고향 사람들 인맥으로 시작한 사업인데, 이제는 영업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될 만큼 자리를 잡았다. 따로 영업 사원을 고용할 필요도 없다. 이미 스무 해 가까이 직접 디자인하고 시공한 간판들이 천군만마의 몫을 해내고 있다. 여기에 한번 맺은 고객과 쌓은 무한한 신뢰 관계도 한몫한다. ‘왜 그런 신뢰가 쌓였을까?’ 그도 모른다. 자신은 그저 고향 강원도 산골의 나무와 집 앞의 개울물처럼 소소하고 맑게 살아왔을 뿐이다. 때론 가슴 아픈 주문도 있다. 장사를 접으며 ‘상가 임대’ 현수막을 걸어 달라는 요구다. 이런 광고에는 돈을 받을 수 없어 시공을 하고 조용히 돌아온다. 박 대표는 큰 욕심 없이 일한다. 사업을 더 키울 계획도 없다. 지난 20년처럼 자신을 믿고 찾아 주는 고객들에게 진심을 담아 디자인하고, 정성껏 시공하며 살아가겠다는 다짐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주꾸미 식당 간판 시공 현장으로 가는 박 대표와 동행했다. 묵직한 공구 벨트를 차고 스카이 고소 작업대에 고민 없이 올라선다. 간판 배선을 마무리하며 글자 캡을 씌우는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똑 떨어진다. 땀방울 떨군 자리, 오늘도 그와 고객 간의 신뢰가 피어난다. 20년 전 처음 간판 디자인을 맡은 닭발 집은 번창해 춘천에만 스무 개가 넘는 체인점이 생겼다. 새로운 체인점이 생길 때면 지금도 직접 간판을 제작한다.

마음을 안아주는 편의점

An Ordinary Day 2022 SPRING

마음을 안아주는 편의점 유동인구가 많은 도시의 여느 편의점과 달리 훤히 트인 논밭을 끼고 들어선 고층 아파트 동네 앞 편의점. 7년간 이곳을 지키는 마음씨 따뜻한 주인은 자신의 가게가 이웃 사람들의 포근한 사랑방이자, 다친 마음을 위로하는 든든한 쉼터가 되기를 바란다. 경기도 안성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이정심 씨의 일과 중 중요한 부분이 하루 두 번, 주문한 제품이 잘 배송되었는지 확인하고 진열하는 일이다. 인근에 경쟁 편의점이 생기거나 코로나 19의 타격으로 고객들의 발길이 줄어도 그는 항상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자신의 가게가 동네 주민들의 쉼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아직 들판에 봄기운이 돌기 전, 경기도안성시청을 지나 왕복 이차선 도로로 들어서니 양옆으로 펼쳐 진 논에 밑동만 남은 벼 포기들이 줄지어 있다. 저수지를 지나 토현리 마을로 들어섰다. 들판에 비닐하우스, 농기계수리소, 축사, 작은 공장들이 듬성듬성 눈에 띈다. 여기부터 목적지까지는 2Km, 하지만 약속시간은 50분이나 남았다. 날씨가 쌀쌀하니 뜨거운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가도 가도 카페는커녕 구멍가게도 보이지 않는다. 민가도 없이 논만 펼쳐진 벌판 저 멀리 아파트 몇 동이 우뚝 서있다. 저기다! 속도를 높인다. 도시에서는 익숙하지만 이곳에선 낯설어 보이는 편의점이 거기 있었다. 반갑다.   이정심 씨는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단순한 계약직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정직원으로 대우한다. 덕분에 직원들은 주인 의식을 가지고 꼼꼼하게 매장을 관리하고, 친절하게 손님을 응대한다. 한결 같은 마음 ‘딸랑’– 출입문을 밀자 종소리가 울린다. “어서 오세요!” 종소리보다 맑은 목소리가 나를 반긴다. 조금은 삭막해 보였던 겨울날 들판에 서 있다가 갑자기 고급호텔에 들어선 듯하다. 귤빛 조명이 은은하게 공간을 채우고 눈앞엔 정갈하게 정돈된 와인진열대가 있다. 따끈한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고 커다란 통유리 창을 마주한 시식대에 앉는다. 한적한 논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커피 때문일까? 봄을 기다리는 들판은 더 이상 휑하거나 추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난 해의 고된 노고를 위로하듯 평온하다. 이곳은 ‘이마트24 R안성유안점’이다. 시골동네 편의점이라면 먼지 앉은 상품이 듬성듬성 놓여 있는 초라한 진열대가 떠오르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곳은 뭔가 많이 다르다. 갖가지 일상에 필요한 상품들이 빠짐없이 빼곡하게 차있다. 과자, 즉석식품, 음료, 와인은 물론, 푸짐한 반찬을 갖춘 도시락뿐 아니라 신선식품을 비롯해 한 끼 밥상을 차리는데 부족함 없는 찬거리까지 풍성하다. 거기다 귀이개, 손톱깎이와 같은 자잘한 생활용품에 반려동물의 간식까지, 대형마트의 상품들을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동네 주민들이 시내 마트까지 차를 타고 물건을 사러 나갈 필요가 전혀 없어 보인다. “저는 무엇이든 꽉꽉 채우는 성격이에요.”이 곳의 경영주 이정심(李貞心) 씨는 말한다. “이웃들이 차를 몰고 멀리 나가지 않아도 집 가까이에서 편하고 빠르게 일상 용품을 살 수 있기를 바라요. 그래서 가능한 한 본사에서 취급하는 상품들을 종류 별로 빠짐없이 발주해요. 작은 편의점이지만 동네 이웃들에게 확실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이윤을 쫓기보다는 우선 편의를 제공하고 싶어요.” 1969년 경남 남해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정심 씨는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언니가 살던 수원으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우연하게도 첫 직장은 체인점을 거느린 중소규모 마트의 캐셔였다. 22살 이른 나이에 결혼해 1남 2녀를 둔 정심 씨는 2002년 가계에 도움이 되고자 교보생명에 보험설계사로 입사했다. 17년 공을 들여 영업소장까지 했고, 전국 1300여 영업소 가운데 100위 안에 들어 상도 받았다. “애들 키우며 주부로 살 때는 몰랐는데, 일을 하다 보니 저에게 고객을 대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보험 일을 처음 시작할 땐 두려웠지만, 차츰 남들만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업소장을 할 때도 뒤처지지 않았어요. 무조건 진실하고 한결같이 사람을 대했죠. 늘 고객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어요. 그게 편의점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보험 고객을 찾아다니던 정심 씨는 이제 스스로 찾아오는 고객을 맞이한다. 그는 지금도 예전의 마음가짐 그대로 껌 한 통을 사러 들어온 손님에게도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넨다. 말 한마디에 정성을 담고, 사소한 것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 마음 씀씀이로 이웃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진심과 배려 2016년 홈플러스가 운영하던 할인마트 겸 편의점 체인 ‘365플러스’를 인수한 것이 시작이었다. 오랜 보험업무로 몸과 마음이 방전됐을 즈음이었다. 지금의 절반 크기도 되지 않았던 매장의 원래 주인은 보험 고객 중 한 명이었는데, 정심 씨는 신기하게 처음부터 이 곳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운영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정심 씨가 인수하자 이전보다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고된 나날이었지만 고객들을 만나면 힘이 생겼다. 그 기운이 삶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정심 씨의 매장이 활기를 띠어서인지 브랜드 이미지가 높은 편의점이 인근에 들어선 것이다. 고객이 드나들 때마다 울리던 종소리 간격이 갈수록 뜸해졌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좌절하지 않고 열과 성을 다했다. 그의 진심이 통했는지 멀어졌던 이웃들의 발길이 다시 정심 씨의 마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새로 연 편의점이 브랜드 인지도가 높고, 물품도 다르니까 제가 고객에게 드릴 수 있는 것들의 한계가 있었죠. 저는 그저 하던 대로 열심히 하며 고객을 기다렸어요. 6개월쯤 지나니 대부분 다시 찾아오시더라고요.” 2021년, 홈플러스가 편의점 사업을 접자 정심 씨는 브랜드를 바꿔 이마트24 매장을 열었다. 마트와 나란히 있던 식당 자리까지 인수해 공간을 두 배 이상 넓혔다. 임대료도 그만큼 늘어났다. 농촌이라 고객은 한정되어 있다. 매출만 생각한다면 굳이 공간을 늘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정심 씨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했다. “매장이 작아서 아쉬웠던 게 있었어요. 손님들이 도시락을 사서는, 실내에 자리가 없으니 바깥에서 먹게 되는 거예요. 그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쾌적한, 겨울에는 따뜻하고 아늑한 실내에 앉아서 드시게 하고 싶었죠. 매장이 두 배가 됐다고 매출이 두 배가 되는 게 아니었지만, 그게 제 꿈이었어요.” 아늑한 조명 아래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실내에 대형 통유리로 시야가 확 트인 시식대는 휴양지의 전망 좋은 카페와 다르지 않다. 커피전문점에서나 볼 수 있는 커피머신이 눈길을 끈다. 컵을 올리고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커피가 내려지는 일반 편의점 기계와는 많이 다르다. “제가 만든 라떼 한 잔 드릴까요?” 정심 씨가 커피 머신 앞에 선다.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린다. 순간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퍼진다. 밀크 스티밍이다. 하트가 그려진 찰진 라떼의 거품이 입술을 감싼다. 정심 씨는 1급 바리스타 자격증도 땄다. “스티밍을 하고 안 하고는 거품의 탄력이 달라요. 같은 가격이라도 좀 더 좋은 커피를 손님에게 서비스하고 싶어 열심히 배웠죠.” 정심 씨가 간절히 원하던 테이블을 마련한 뒤, 손님들은 이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며 음식을 먹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최근엔 코로나 19 때문에 취식이 제한되어 그를 안타깝게 한다. 카페 같은 편의점 이쯤 되면 정심 씨의 매장을 단순히 편의점이라 부를 수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가 아끼는 보물은 따로 있다. 매장을 지키는 사람이다. 편의점 알바 구직 앱에 들어가면 주당 15시간 이내의 단기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주휴수당과 같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자영업자들의 고육지책이다. 하지만 정심 씨는 다른 길을 택했다. 비록 자그마한 편의점이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소중한 일터라 생각할 수 있도록 정직원 대우를 한다. 주휴수당, 4대 보험은 물론 명절마다 약소하지만 상여금을 주고, 근속에 따른 수당도 있다. 일터에 대한 자부심을 지닌 직원들은 경영주처럼 매장을 관리한다. 언제 오더라도 알바생이 아닌 경영주가 직접 고객을 맞이하는 셈이다.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니, 찾아오는 손님도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매장을 나선다. 매출이 오르는 비결이다. 때론 고객도 기꺼이 가게 일을 돕는다. 한 번은 편의점을 자주 찾던 손님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기에 정심 씨가 “사는 게 힘드시죠?” 하고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손님이 자신의 어려움을 한없이 풀어놨다. 보증 때문에 어려움에 처했고, 이로 인해 가족들과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정심 씨는 자기 일처럼 공감하고 위로했다. 그 뒤로 손님은 물류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찾아와 말없이 일을 돕고 간다. 밭농사를 짓는 이웃은 채소를, 과수원을 하는 손님은 배를 한 소쿠리 들고 찾아온다. 이런 물건들은 직원들에게 나누어진다. 넉넉한 시골 인심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래서 정심 씨의 편의점은 동네 사랑방이자 마을 정자와 같은 곳이다. 몸이 불편한 남편을 시중하는 할머니, 아픈 아이를 돌보는 젊은 엄마, 거름을 내다가 온 농부, 기름때 절은 작업복의 이주노동자. ‘딸랑’하는 종소리와 함께 이들이 들어설 때, 정심 씨는 언니이자 누님이고, 딸이자 벗이 된다. 때론 아이들의 고모이자 큰엄마가 되어 한 가족으로 어우러진다. 돌아오는 길, 정심 씨의 마음이 담긴 라떼가 오래도록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추억을 떠올리는 맛

An Ordinary Day 2021 WINTER

추억을 떠올리는 맛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맛과 재료가 조금씩 변화해왔지만 떡볶이가 한국인의 소울 푸드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서울 떡볶이 맛집’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이 가게는 시어머니의 손맛을 이어 40년째 수많은 고객에게 정겨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추억 한 조각에 떡볶이가 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골목에서 풍겨 나오는 맛있는 냄새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오늘날 흔히 먹는 고추장 떡볶이는 마복림(马福林, 1920~2011) 할머니가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전에는 가래떡을 먹기 좋게 적당한 크기로 잘라 여러 가지 채소를 넣고 간장으로 양념해 볶은 음식이었다. 조선 말기 19세기에 편찬된 저자 미상의 조리서 에 의하면, ‘흰 가래떡과 등심, 참기름, 간장, 파, 버섯 등을 함께 볶아 만든 궁중음식’으로 ‘떡찜’, 또는‘떡잡채’ 라고 했다. 고급 재료들로 만들던 귀한 음식이 어떻게 대중적인 음식으로 바뀌었을까? 한국전쟁 직후였던 1953년, 마 씨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중국 음식점을 찾았다. 마침 개업 직후여서 주인이 자축하는 떡을 테이블마다 돌렸고, 마 씨는 실수로 짜장면 그릇에 그 떡을 빠뜨렸는데 그게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비싼 춘장 대신 고추장에 떡을 버무려 매콤한 떡볶이를 만들었다. 그는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소스로 만든 떡볶이를 파는 가게를 서울 중구 신당동에 열었고, 1970년대에 들어 이것이 전 국민의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이 동네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분식집이 성행했는데, 그 중에는 DJ가 신청곡을 틀어주는 가게도 있었다. 하교 길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떡볶이를 나눠 먹는 것이 그 시절 청소년들의 오락이었다. 한 가족의 생계 김진숙(金眞淑) 씨의 시어머니는 1980년대,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있는 시장에서 떡볶이 장사를 시작했다. 간판도 없는 노점상이었다. “올해 아흔 두 살이신 어머님은 당시 사십 대 중반이었고, 제 남편은 열한 살이었어요. 주위에 여자고등학교가 세 개나 있어서 학생들이 많았대요. 학교 급식이 없던 시절이라, 점심시간엔 나와서 떡볶이를 먹는 아이들도 많았고요. 그 아이들이 졸업한 후에도 찾아오고, 그래서 늘 손님들이 북적거렸대요. 시댁에 식구가 많았는데, 어머님이 그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셨어요.” 김 씨는 1992년에 시어머니의 넷째 아들인 김완용(金完用) 씨와 결혼했다. 십 년 전 시어머니가 고관절 수술을 받은 후 혼자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온 가족이 시간을 쪼개 짬나는 대로 왔다. 남편도 하던 일을 그만두고 가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김 씨에게 ‘같이 한 번 가볼래?’라며 제안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작은아이가 마침 여름방학이어서 손이 좀 덜 갈 때였다. 그렇게 따라가서 일주일쯤 일을 거들었는데 지켜보던 시어머니가 계속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멋도 모르고 덥석 하겠다고 대답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2015년, 도시 재개발로 인해 시장이 없어진 후 시장 자리가 있던 곳에 새로 차린 것이 지금의 가게이다. ‘갈현시장 할머니 떡볶이’라는 간판도 그때 처음 달았다. “그때 어머님은 이미 팔십 살이 넘으셨는데도 할머니라고 불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셨어요.” 김 씨가 웃으며 당시를 돌이켰다. “그때부터 남편이랑 저랑 둘이서 가게를 하게 됐어요. 메뉴는 어머님이 시장에서 팔던 그대로예요. 떡볶이, 순대, 만두 두 종류, 삶은 달걀, 김말이.” 기본적인 조리법은 시어머니의 방식을 이어가지만, 소스의 비율이 조금 달라졌다. 자극적인 맛을 줄이고 지금은 부드러운 맛을 강조한다. 덜 달고 덜 짜고 덜 매운 맛이다. 식재료도 건강과 위생을 고려하여 좋은 것으로 세심하게 골라 쓴다. 남편은 아침 7시에 가게에 나온다. 전날 씻어 둔 조리기구들을 세팅하고 물을 올리고 순대를 찌고 달걀을 삶고 기본적인 준비를 하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 “떡볶이용 밀가루 떡이 뭉쳐 있는데, 하나하나 떼는 게 고된 일이에요. 하나씩 떨어져 있는 떡도 있지만 그런 떡은 맛이 떨어져요. 우리 손이 한 번 더 가면 손님들이 더 맛있는 걸 드실 수 있어요. 떡 한 판에 낱개로 324개 나오는데 하루 열 판 정도 나가요.” 두 시간 동안의 준비가 끝나고 9시가 되면 가게 문을 연다. 김 씨는 10시쯤 가게에 나온다. 부부 사이에 특별한 역할 분담은 없다. 두 사람 모두 조리를 하고 손님을 받는다.“둘 중 한 명이 없어도 장사를 해야 하니까 둘 다 뭐든지 할 줄 알아야 해요.” 서울 갈현동에 있는 ‘갈현시장 할머니 떡볶이’주인 김진숙, 김완용 씨 부부는 어머니가 40여 년 전에 시작한 가게를 이어받아 옛 맛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 전에는 3명의 직원을 데리고 가게를 운영했으나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작년부터는 시간제 직원 한 명만 두고 부부가 모든 일을 하고 있다. 비법을 지킨다 갈현동 할머니 떡볶이 가게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맛으로 떡볶이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김진숙 씨는 시어머니 진양근씨가 1980년대 가게를 내면서 개발한 소스의 비법을 아직도 소중하게 지키고 있는데, 그 맛이 뛰어나서 동네 손님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종종 있다. 조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벌 끓이기’이다. 손으로 하나씩 떼어놓은 떡은 끓는 물에 넣어 잠시 끓인 다음 조리용 판으로 옮겨진다. 이 과정이 제대로 안 되면 떡이 퍼지거나 질겨진다. 매일 조금씩 다른 떡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해 온도와 시간을 맞추는 것이 관건이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회사 때려치우고 떡볶이 장사나 할까’라고 말하지만, 사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장사죠.” 손님이 끊이질 않는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는 비법은 소스를 만드는 재료의 비율, 불의 온도, 그리고 조리 시간이다.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비율이 안 맞고 온도와 시간이 안 맞으면 소용없다. 이 과정은 모두 시어머니에게 배운 비법이고 때문에 영업비밀이다. 고춧가루, 고추장, 물엿 등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을 포함하여 열 가지 남짓한 재료가 소스에 들어간다. 이렇게 만든 떡볶이는 1인분에 3,500원이다. 지난 4월, 3,000원 하던 가격을 500원 올렸다. “해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그게 반영돼 모든 식자재값이 오르기 때문에 가격을 안 올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떡볶이는 한끼 식사가 아니라 간식으로 먹는 음식이라 값을 올리기 쉽지 않아요. 계속 고민하다가 6년 반 만에 500원을 올렸어요.” 1인분의 양은 ‘고무줄’이라고 김 씨는 말한다. 보통 17~18개의 떡에 어묵을 섞어 1인분으로 담지만 학생이나 노동자에게는 늘 덤을 얹어 주기 때문이다. 열 평이 채 못 되는 가게의 테이블은 요즘 모두 한쪽으로 치워져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홀 손님을 받지 않은 지 일 년이 지났다. 가게 한 구석에 작은 전기밥통과 인덕션이 있는데 부부가 짬을 내어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는 곳이다. 늦은 오후에 군것질로 대충 허기를 채우고 저녁 8시에 문을 닫는다. 정리와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밤 10시.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부부의 하루 일과이다. “일주일에 하루, 월요일에 쉬어요. 이 가게를 연 이후 그 밖에 쉰 날이 딱 사흘인데 제가 수술받은 다음날, 아들 입대한 날, 그리고 퇴소한 날이었어요. 가끔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손님들과의 약속이니까요. 이 지역에 사는 손님만 오는 게 아니라 전국 팔도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는데, 헛걸음하면 미안하잖아요. 쉬는 날에도 다른 거 없어요. 밀린 집안 일하고, 손목터널증후군 고치러 병원에 가요. 직업병이죠.” 손님이 끊이질 않는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는 비법은 소스를 만드는 재료의 비율, 불의 온도, 그리고 시간이다.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비율이 안 맞고 온도와 시간이 안 맞으면 소용없다. 연령을 초월한 많은 한국 사람들의 소울푸드인 떡볶이는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흰떡을 여러 가지 야채, 어묵과 함께 고추장 소스에 넣고 뭉근하게 끓여 만든다. 국물 떡볶이, 즉석 떡볶이, 간장 떡볶이, 로제 떡볶이 등 다양한 종류의 떡볶이가 있는데 그 중 국물이 자작한 국물 떡볶이가 가장 대중적이다. 최선을 다하는 하루하루 시어머니를 도와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김 씨는 호된 경험을 했다. “제대로 된 포장용기가 없어서 비닐 봉지를 사용하던 시절이었어요. 떡볶이를 포장해간 손님이 조금 있다가 다시 왔어요. 국물이 새서 청바지에 묻었다면서 떡볶이가 든 봉지를 그대로 던졌어요. 놀라고 당황해서 덜덜 떨었어요.” 이처럼 가끔 부부를 힘들게 한 손님들이 있었다. 달걀 하나를 빠뜨렸다고 전화로 삼십 분 동안 항의한 손님도 있었다. 알아보니 다른 손님과 봉지가 바뀌었던 것인데 값을 물어주겠다고 해도 계속 화를 냈다. 자신이 원하는 만두가 아닌 다른 만두를 줬다고 접시를 던진 손님도 있었다. 가게에 와 있던 친척이 말리다가 싸움이 붙어 경찰까지 오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일을 겪고 부부는 ‘손님이 뭐라고 하면 무조건 인정하자’고 다짐했다. 물론 대부분의 손님들은 따뜻하고 다정하다. 더운 날 마시고 일하라며 음료를 사오기도 하고, 텃밭에서 딴 채소를 가져오는 이들도 있다. “어머님을 기억하는 분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도 하고, 초등학교 동창회하고 다같이 오시기도 해요. 그분들은 떡볶이가 아니라 추억을 먹으러 오는 거죠. 이런 손님들을 보며 따뜻한 마음과 베푸는 방법을 배워요. 이런 게 세상 사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김 씨는 언젠가 이 가게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쉽다. 앞으로 십 년만 더 하고 가게를 접을 계획이기 때문이다. 서운하긴 하지만, 이 힘든 일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도 않다. 아이들이 직장에도 다녀보고 원하는 것을 다 해보고도 떡볶이 장사를 하고 싶어 한다면 몰라도. 새벽부터 재료 하나하나를 정성껏 준비하여 뜨거운 불판 위에서 조리하고,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게 푸짐하게 담아주는 떡볶이는 허기뿐만 아니라 추억을 채워주고 마음을 데워주는 음식 이상의 무엇이다. 김 씨 부부는 그 옛날,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팔았던 추억의 맛을 이어가기 위해 고단하지만 날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작은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

An Ordinary Day 2021 AUTUMN

작은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 통계청에 의하면 2019년 11월 현재 전국 1천 813만 호의 주택 가운데 62.3 퍼센트가 아파트였다. 이처럼 한국인의 대표적 주거 형태를 이루는 아파트에는 입주민의 안전을 돌보고, 분쟁이나 민원을 해결하며 건물을 관리해주는 등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관리소 직원들이 있다. 이상용(李相龍) 씨는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510세대로 구성된 아파트 단지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급한 민원이 들어와 인터뷰 시간을 30분 늦추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연락을 받고, 오후 네 시 반에 관리사무소에 들어섰다. 단지 옆 신축 건물 공사로 인해 소음이 발생한다는 것이 급한 민원이었고, 회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언쟁이 오가나 했더니 잠시 후 입주자 대표와 공사 현장 담당자 등이 일어나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마주한 이상용 씨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문제가 있거나 불만이 있는 분들이 저를 찾아오시니, 늘 이래요.” 민원을 해결하고 분쟁을 조정하는 것은 관리소장의 주요한 업무 중 하나이다. 이상용씨는 2009년 육군 예비역 대령으로 전역한 뒤 지금은 서울 마포구 강변힐스테이트 아파트 관리소장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다양한 민원 “이야기가 잘 되면 괜찮은데 가끔 상식에 어긋나는 사람도 있죠. 지난봄에는 109동 사는 분이 민원을 계속 넣었는데, 그 동이 가라앉고 있다는 거예요. 모든 세대가 냉장고를 같은 자리에 놓아두고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그 무게 때문에 침하한다, 베란다 뒤에 균열도 보인다고 주장해요.” “우리 아파트는 3년에 한 번씩 정밀 점검을 받고 있고, 2019년에도 점검을 받았지만 문제가 없었다”고 아무리 말해도 믿지를 않자 결국 입주자 대표회의에 안건을 올려서 세 군데 전문업체한테 문의를 했다. 결론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고, 이상용씨는 “내년에 또 정밀 점검을 하니 이상이 있으면 조치하겠다”고 겨우 설득에 성공했다. “아무리 황당한 민원이어도 모른 척할 수는 없고, 반드시 처리한 다음 결과를 이야기해주어야 해요.” 가장 빈번하고 골치 아픈 민원은 소음이다. 몇 주 전, 위층에서 아이들이 너무 뛰어서 잠을 못 자겠다는 민원이 밤 열 두 시쯤 들어왔다. 당직하던 경비원이 위층에 인터폰을 넣어서 사정을 말했지만, 밤 늦게 연락을 했다고 한참 욕을 먹었다. 이 사실을 다음날 아침에 보고 받은 이상용 씨는 무척 속이 상했다. “그분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경비원은 무슨 죄예요. 층간소음의 경우에는 솔직히 방법이 없을 때가 많아요. 바로 위층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하기도 해요. 아래층에서 민원이 들어왔다고 하면 나쁜 감정을 가질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조심스럽게 말하라고 직원들을 교육합니다.” 지하주차장에 드나드는 차소리가 시끄러우니 해결해달라는 주민도 있었다. 공용시설은 경비용역업체가 관리하고 개인시설은 입주자 각자가 관리해야 하는데, 경계가 불분명한 것도 있고 입주자 입장에서는 다 공용시설이라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상용 씨는 경비원과 미화원을 포함해 총 열 세명의 직원들을 통솔한다. 그는 입주민은 물론 직원들과의 소통 역시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의 하루 일과는 반복적이면서도 규칙적이다. 아파트 단지 전체에 안내방송을 하는 것도 그 중 하나인데, 요즘은 코로나 19로 인해 안내 방송이 더 잦아졌다. 입주민들은 매일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이상용씨를 찾아온다. 그는 민원을 꼼꼼하게 듣고, 입주민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도우려 노력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하루 종일 조용할 틈이 없다. 직업군인에서 관리소장으로 이상용 씨가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딴 것은 2011년, 지금 아파트의 관리소장으로 온 것은 2019년이었다. 주택관리사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500세대 미만의 주택에서 3년 이상 경험을 쌓아야 500세대 이상주택의 관리를 맡을 수 있다. 그는 2012년에 250세대가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자격증 시험이 없었다. 아는 사람에게 맡겨 주먹구구식으로 관리했다. 지금은 해마다 주택관리사 자격증 시험이 있고 1,500~2,000명이 합격한다. 자격증을 딴다고 모두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서비스직이라서 적성이 맞아야 한다. 불만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대처를 잘못하면 쉽게 감정 싸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직업의 좋은 점은 정년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모두 다 오래 일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나이가 많다고 일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입주자들이 싫어할 수 있어요. 젊은 사람들은 아이디어가 많지만 경험이 부족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기계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지만 뭘 바꾸려고 하지 않죠. 장단점이 있어요.” 주택관리사가 되기 전에 이상용 씨는 32년 간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다. 2009년 6월 중령으로 제대해 지인이 하는 군 관련 회사에서 잠깐 근무했다. 그러다 한 선배가 적성에 맞을 거라며 권유해 주택관리사 시험을 봤다.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군대에서의 경험이 일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많다. 지휘관으로 근무할 때 원칙 중 하나가‘1% 지시, 99퍼센트 확인’이라는 것이었다. ‘지시는 짧게 하고 확인은 철저하게 하라’는 군대의 지휘 체계가 관리 업무에도 잘 적용된다. 출근시간은 오전 9시지만 그의 하루는 8시 5분에 시작된다. 오전 6시에 기상했던 군대 시절의 습관 때문에 5시면 눈이 떠진다. “집에서 전철을 타고 여기 오면 정확하게 8시 5분이에요. 월, 화, 금요일에는 사무소로 바로 들어오지 않고 우선 단지 안을 한 바퀴 둘러봐요. 월요일에는 주말 동안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화요일에는 분리수거 업체가 오는 날이니까 수거 후 청소 상태 를 확인하고, 금요일에는 주말 동안 쉴 테니 여기저기 꼼꼼하게 둘러보죠.” 이해심과 참을성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는 없는지 묻자 “없다고는 못하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이 힘들기 보다는 상식을 벗어난 사람들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을 해달라고 하는 입주민은 으레 감정이 나빠지면 “우리가 봉급 주는데”라는 말을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비애감이 든다. 이상용 씨는 그럴 때 시간을 가지며 마음을 다스린다. 서로 마음이 풀린 다음에 이야기하면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 일하는 아파트에는 심한 갑질이 없다. 대신 자랑할 것이 많다. 이 아파트 단지에는 매주 화요일마다 과일 행상이 온다. 그 행상에게 매주 경비원 6명, 미화원 5명의 과일 값 6만원을 지불하는 입주민이 있다. “1년은 52주인데 작년에 그 행상이 51번 왔어요. 1년이면 삼백만원이 넘죠. 제가 여기 오기 전부터 하신 일이라는데, 처음에는 부모님이 하다가 지금은 따님이 한대요. 인사를 드리러 찾아갔더니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라고 하세요. 우리가 청소를 하거나 다른 작업을 하고 있으면 빵이나 음료수를 사주시는 분들도 많아요.” 오후 6시에 퇴근을 하고 6시 50분 전철로 귀가하여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TV 드라마를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저녁 10시 반에는 잠자리에 든다. 주말에는 맛있는 걸 먹으러 가거나 바둑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서울 외곽에 있는 친척집에 가서 텃밭을 가꾼다. 이상용 씨는 뭔가를 돌보고 가꾸는 것을 좋아한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지금도 텃밭에서 일을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관리소장에게 필요한 적성으로 그는 이해심과 참을성을 꼽았다. 사람과 부딪치는 일이니 이해하고 배려하고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공동체는 시계 바늘처럼 정확한 그의 일상과, 마을을 지키는 커다란 나무처럼 듬직한 그의 배려에 의해 오늘도 차곡차곡 돌아가고 있다. “작년에는 아파트 정문 쪽이 휑해 보여서 꽃을 심기로 했어요. 같이 꽃을 심을 분들은 나오시라고 방송을 했더니 아이들 데리고 여러 분이 오셨어요. 함께 꽃을 심고 나서 광장에서 막걸리 한잔 같이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요. 애로사항이 있어도 얘기 못하는 분도 많거든요. 그럴 때 듣는 거죠. 순찰을 돌고 있으면 때로는 그에게 다가와 “소장님, 그때 고마웠어요, 도움을 받았어요, 수고하셨어요”라고 말해 주는 주민이 있다. “이분들이 내가 한 일을 알아주는구나. 이 일을 하기를 잘했구나.”그가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공동체는 시계 바늘처럼 정확한 그의 일상과, 마을을 지키는 커다란 나무처럼 듬직한 그의 배려에 의해 오늘도 차곡차곡 돌아가고 있다. 고즈넉한 한강변에 자리한 이 아파트 단지는 510세대의 비교적 아담한 규모지만, 주위에 다른 아파트 단지들과 함께 건축된 서울 도심 서쪽 주거지역의 일부이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하지권 사진작가

추억을 선물하는 가게

An Ordinary Day 2021 SUMMER

추억을 선물하는 가게 추억을 선물하는 가게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젊은층에게는 새로움을 안겨주는 ‘레트로’가 주요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서울의 옛 도심 종로의 레트로 열풍을 이끌고 있는 한 레코드 가게를 찾았다.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는 러시아의 문학 이론가이며 작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Victor Shklovsky 1893~1982)가 처음 사용한 문학용어이다. 익숙한 이야기 구조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친근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지루함을 줄 수도 있다. 반면 어려운 형식의 구조는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키고 흥미와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세상은 쉽고 편리하고 간단한 것을 지향하고 있는 듯하지만, 인간의 심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곳을 꿈꾸고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기대한다. 레트로스펙트(retrospect), 또는 요즘 ‘레트로’라고 줄여서 쓰이는 말은 회상, 추억이라는 의미지만 ‘과거의 추억이나 전통 등을 그리워하며 그것을 본뜨려는 성향’이란 의미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새것은 헌것이 되고 헌것은 새로운 세대의 새로움이 된다. 노년은 젊음을 그리워하고 젊음은 노년이 누렸던 것을 동경한다. 역시 인간은 복잡하다. 레트로 감성이 한껏 풍기는 턴테이블이 돌고 LP판 위에 스타일러스를 올리는 순간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서울레코드를 채운다. 요즘처럼 깨끗한 음질은 아니지만 턴테이블이 주는 특유의 감성적인 사운드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황승수 대표 역시 오프라인 레코드 시장이 부활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세대를 뛰어넘어 서울레코드를 찾는 손님들을 위해 클래식, 재즈, 국악, 트로트, 로큰롤, 올드팝, 뮤지컬, OST, K-팝 등 장르별로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새롭게 주목받는 LP 제2의 성황기를 맞은 서울레코드는 항상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이곳을 찾는 누군가는 추억에 젖고 누군가는 아날로그 감성이 주는 매력에 빠진다. 1980년대 CD가 보급되기 전까지 비닐은 20세기 음악 재생의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 CD와 MP3, 음원 생산으로 쇠퇴기를 맞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비닐이 주는 따뜻한 감성을 찾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서울레코드의 내부는 리모델링을 통해 현대적으로 꾸며졌지만, 단층짜리 옛 건물은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종로3가 거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종로3가에 있는 ‘서울레코드’는 낯설고도 익숙하고, 오래된 동시에 새로운 공간이다. 1976년에 문을 열었고 지금의 황승수(黃昇洙) 대표는 이곳의 네 번째 주인이다. LP와 카세트테이프가 CD로 바뀌고, DVD가 반짝 성황을 누리다가 사라진 이후 스트리밍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음반업계의 전망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 와중에 45년을 한자리에서 버틴 40평 남짓한 레코드가게는 그 어떤 레코드보다 희귀할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사장님이 2000년까지 하다가 mp3가 나오면서 가격경쟁이 안 돼서 정리하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음반은 소유하는 것보다 듣기 위한 게 목적이었으니까 사람들이 더 이상 앨범을 사지 않을 것 같았죠. 당시 직원이었던 분이 가게를 인수하면서 두 번째 사장님이 됐어요. 처음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한류가 시작되면서 외국손님들이 많이 왔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운영을 하다가 세 번째 사장님에게 가게를 넘겼어요. 두 번째 사장님 밑에 있던 부장님이 가게를 계속 운영했는데 그때 제가 직원으로 들어왔어요. 제가 일을 시작하고 3년째 되었을 때 세 번째 사장님이 가게를 정리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갑자기 인수받게 되었어요.” 2015년의 일이었고 그는 40대 초반이었다.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으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돈을 벌 궁리를 해야 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다가 ‘하고 싶은 일보다 잘 알고 있는 일’을 하게 되었다. “형이 비디오 유통업체에 있었어요. 비디오, CD, DVD 같은 것들은 유통구조가 다 연결되어 있거든요. 어릴 때는 아버지가 전축 시스템 가져오셔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10대 때는 형을 따라 레코드 회사에도 가봤어요. 그러면서 이쪽 세계를 잘 알게 되었어요.” 처음 직원으로 일하던 시기에는 손님의 연령대가 꽤 높았다. 가게 뒤에는 세운상가(1968년 완공된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 길 건너에는 종묘(宗廟 1394년에 착공한,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 옆에는 탑골공원(塔골公園 1897년, 영국인 브라운(J. M. Brown)의 설계로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내 공원)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젊은 세대들은 보기 힘든 동네이기도 하다. LP를 찾는 40, 50대가 그나마 젊은 쪽이었고 카세트테이프를 사려는 노인들이 주고객이었다. 그러다가 분위기가 바뀌었다. ‘힙(hip)’하다는 의미에서 ‘힙지로’로 불리게 된 을지로, 새로운 핫스팟으로 떠오른 한옥마을을 찾는 외국인과 젊은이들이 늘어났고, 음반업계에서 완전히 사라질 줄 알았던 LP가 신선한 아이템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손님들의 연령대가 낮아졌다. 어쩌면 손님들은 물건이 아니라 추억을 구하러 오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세상에서 익숙한 것을 구하고, 익숙한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다. 추억의 공유 “우리 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서 듣는 게 중요했어요. 지금은 스마트폰과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으니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음반업계는 소멸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제 듣는 것보다 소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긴 거예요. 스마트폰 화면에 음반 재킷 하나 떠 있는 걸로 성이 안 차는 거죠. 그래서 LP를 사는 게 아닐까요? 젊은 사람들이 와서 LP에 바늘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걸 보면서 저도 놀랐어요. 조금 더 깨끗한 소리를 위해 CD가 나온 거잖아요. 세상은 이렇게도 바뀌고 저렇게도 바뀌는구나 싶어요.” 이제는 특정 세대가 아니라 다양한 세대가 이곳을 찾는다. 딸들이 아버지를 데려오기도 하고, 부모가 아이들을 데려와서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고른다. “어릴 때 듣고 좋아하던 곡인데, 가사도 조금 알고 멜로디도 기억하는데 제목은 모른다며 물어보는 분들이 있어요. 나이가 들어 컴퓨터도 할 줄 모르고 혼자 사시는 분들이에요. 이렇게 저렇게 추리해서 찾아드리면 감동하시고, 그걸 보면 저도 기분이 좋죠.” 1960년대에 유명세를 떨쳤던 밴드의 곡이 혹시 있느냐고 물어본 사람이 있었다. 곡을 찾아서 틀었는데 놀랍게도 노래를 부른 사람과 손님의 목소리가 흡사했다. 혹시 본인이 부른 곡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음반을 찾아다녀도 없어서 듣고 싶어도 못 들었던 곡이라 했다. “어릴 때부터 이 동네에서 살던 분인데, 집안이 어려워서 학교를 못 다니고 영화 포스터 붙이는 일을 했다는 손님도 있었어요.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밥을 굶고 영화를 봤다는 거예요.” 길고도 복잡한 타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손님으로 왔다가 추억을 공유하게 된 사람들은 마음에 온기를 품고 돌아가고, 사탕이나 귤, 음료수 같은 걸 들고 다시 찾아와 정을 나눈다. 아름다운 배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아홉 시 반에서 열 시 사이에 서울레코드의 셔터가 올라간다. 문은 아내가 열고 황대표는 영두 시에서 한 시 사이에 나와서 교대한다. 저녁 일곱 시 반에 문을 닫는데, 장사가 안 되는 날은 더 늦게까지 열어두기도 한다. 저녁 일곱 시 반 이후, 셔터가 내려진 레코드가게 앞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이른바 ‘내일의 신청곡’ 시간이다. “가게 앞에 빨간 우체통이 있어요. 신청곡을 써서 넣으면 틀어드려요.” 하루 동안 들어온 신청곡을 비롯해 비슷한 분위기의 곡들을 더해서 파일을 만들고, 가게 문을 닫은 후 틀어 놓는다. 음악은 밤 열두 시까지 흘러나온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춤을 추기도 한다. 어둠이 내린 밤의 거리,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삶은 어떻게든 흘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안에서 놀거리를 찾는 거예요. 일주일에 일요일 하루 쉬는데, 그날도 음악 듣고 오디오 만지작거리고 영화 보고 그래요. 어떻게 보면 취미를 다 여기 가져다놓은 거예요. 아내가 그래요. ‘너 놀려고 이거 차린 거지?’” 옆에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사장님의 놀이터를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하고 한마디 거든다. “처음부터 크게 돈을 벌겠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저 유지하면서 좋아하는 음악 듣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저는 여기서 놀고 손님들은 찾던 음악을 구해가고요.” 어쩌면 손님들은 물건이 아니라 추억을 구하러 오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세상에서 익숙한 것을 구하고, 익숙한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다. 그의 말처럼 세상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흘러간다. 그 흐름 안에 아름답고 정다운 음악이 있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Ahn Hong-beomPhotograp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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