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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한 봉지의 감성

Lifestyle 2025 AUTUMN

한 봉지의 감성 커피믹스는 뜨거운 물만 부으면 간편히 마실 수 있는 음료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점차 대중화됐고, 현재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들이 시장에 나와 있다. 사람들의 입맛과 인식이 변화하면서 2010년대 이후 소비량이 줄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커피믹스는 인스턴트커피와 설탕, 크림을 일정 비율로 한 봉지에 넣은 제품이다. 1976년 동서식품이 국내 최초로 커피믹스를 개발한 이래 현재는 맛과 건강을 고려한 다양한 종류의 커피믹스가 출시되고 있다. © 뉴믹스커피 믹스 커피는 인스턴트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넣어 조제해 먹는 방식의 커피이다. 믹스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누군가에겐 취향의 표현이고, 또 누군가에겐 위로의 언어이다. 한때는 서열과 관계를 상징했으며, 여성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기도 했다. 그 믹스 커피를 한 봉지에 담아낸 제품, 커피믹스가 탄생했다. 모두가 표준화된 맛을 즐기게 된 순간,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커피믹스는 단지 빠르고 간편한 커피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로 감정을 포장한, 한국식 커뮤니케이션이다.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물 속에서 퍼지는 그 맛은 어떤 시대의 감성을 품고 있다. 우수한 발명품 2020년 개봉한 영화 에는 유니폼을 맞춰 입은 여직원들이 누가 먼저 믹스 커피를 타는지 속도를 겨루는 장면이 등장한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여성 사원들은 저마다 커리어 우먼을 꿈꾸지만, 8년을 일했음에도 여전히 믹스 커피 타는 일이 주요 업무이다. 영화는 코믹한 장면 뒤에 시대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런가 하면 인스턴트커피와 크림, 설탕의 비율로 범인을 추적하는 장면은 커피 취향이 곧 정체성이던 시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정체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치며 수많은 고졸 여성들이 가장 먼저 정리 해고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여성이고 고졸이라는 이유로 저부가가치 인력으로 분류된 그들이 사라지자, 믹스 커피를 타고 회의실을 정리하며 일상의 틈을 메우던 손길 또한 함께 없어졌다. 남은 직원들은 곧 그 공백을 체감했다. 특히 믹스 커피를 직접 타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바로 그 시점에 커피믹스가 해결사처럼 등장했다. 봉지를 뜯어 컵에 넣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누구나 일정한 맛을 낼 수 있는 이 표준화된 취향의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효율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그 상징성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2017년 특허청이 설문 조사한 ‘한국을 빛낸 발명품 10선’에서 커피믹스가 5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보다 앞선 순위가 훈민정음, 거북선, 금속활자, 온돌 같은 역사적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작은 봉지가 지닌 사회적 파급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웃도어 아이템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왕실을 비롯한 일부 고위층만 즐기던 사치품이었다. 커피가 대중적인 기호 음료로 정착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였다. 미군 보급품을 통해 인스턴트커피가 암암리에 유통되고, 다방에서도 믹스 커피를 팔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퍼졌다.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커피를 물에 타 마시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다. 1970년에는 식품 제조 기업 동서식품이 국내 최초로 인스턴트커피를 선보였다. 그리고 6년 뒤인 1976년, 세계 최초로 커피, 크림, 설탕을 한 봉지에 담은 커피믹스를 출시했다. 낱개 포장된 이 발명품은 과거 ‘빨리빨리’ 문화로 상징되던 산업화 시대 한국의 성장 속도와 정서를 담은 생활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초창기엔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가정과 사무실에는 각각의 유리병에 담긴 ‘커피 삼총사(커피, 크림, 설탕)’가 갖춰져 있었고, 커피를 개인의 취향에 맞춰 타 줄 인력과 사회적 여유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커피믹스는 오히려 아웃도어 아이템이었다. 사람들은 믹스 커피를 만들어 먹기 어려운 야외에서 레저 활동 중 커피믹스를 마시며 당분을 충전했다. 1980년대 들어 등산과 낚시, 야유회 문화가 확산되면서 커피믹스 소비량도 점점 증가했다. 커피믹스가 그 편리성 덕분에 인기를 얻자, 이후 여러 기업들이 커피믹스를 생산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고, 전체 커피 시장에서 커피믹스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게 됐다. 상징의 스펙트럼 커피믹스가 야외에서 실내로 들어온 건 1997년 이후였다. 잉여 인력의 부재, 급박한 노동 환경, 그리고 정수기의 대중화는 커피믹스가 업무의 기본 세팅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예전처럼 누군가의 취향을 일일이 기억해 커피를 내어줄 필요 없이, 모두가 같은 봉지로 만족할 수 있었다. 이로써 커피는 더 이상 서열과 기호의 상징이 아니라, 생존과 자기 위로의 도구가 되었다. 해외에서의 인식 변화도 흥미롭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커피믹스는 한국만의 이상한 문화였다. 에스프레소, 블랙커피, 캔 커피 중심의 시장에서 커피믹스는 지나치게 달고, 아무런 감각도 감정도 없어 보였다. 커피는 예나 지금이나 취향의 영역이고 감성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 모든 걸 생략한 듯한 커피믹스가 환영받을 리 없었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믹스커피에 우유, 시나몬 가루, 바나나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제조하여 마시는 트렌드가 불고 있다. ‘달고나 커피’가 대표적이다. 그릇에 꿀을 넣고 색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거품기로 젓다가 커피믹스를 넣고 걸쭉해질 때까지 계속 저은 다음 우유에 부어서 마신다. © 한국관광공사 하지만 2010년대 들어 한국 드라마를 비롯한 K-컬처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외국인들은 커피믹스를 감성적인 음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 달달한 커피 한 잔을 매개로 나누는 대화가 그들의 감성을 건드린 것이다. 지금은 러시아, 동유럽, 인도네시아, 베트남, 대만 등지에서 박스째 수입하는 K-푸드가 되었다. 2016년 국내 한 여행사가 외국인 관광객 약 천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과반이 넘는(53%) 외국인들이 커피믹스를 ‘가장 맛있는 한국 차’로 뽑기도 했다. 믹스 커피를 한국의 차로 보는 시선이 흥미롭다. 한편 커피믹스는 생존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2022년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는 한 광산이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 당시 무너진 갱도에 고립된 광부들이 221시간을 버티게 해준 것이 바로 커피믹스였다. 이들은 커피믹스를 식사 대용으로 조금씩 나눠 먹으며 생명을 이어갔고, 구조 후 스스로 걸어 나올 만큼 건강했다. 커피믹스에 함유된 당분과 열량, 카페인의 각성 효과가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유용했는지를 보여준 극적인 사례다. 젊은 세대의 변화 최근 커피믹스는 다시 한번 새로운 얼굴로 나타났다. 배달 서비스 플랫폼 배달의민족 창업자로 유명한 김봉진 그란데클립 대표가 선보인 ‘뉴믹스커피’는 커피믹스를 시대감각에 맞게 재해석한 브랜드다. “커피는 원래 타 먹는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다방과 사무실을 오가던 옛 감성을 다시 불러냈다. 서울 성수동과 북촌의 쇼룸형 매장은 그 자체로 커피 문화의 회고적 감성을 재현한 공간이다. 이 브랜드의 등장은 단지 레트로 감성 때문만이 아니다. 원두커피가 처음 보편화됐을 때 사람들은 그 쓴맛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카페모카, 프라푸치노 같은 달콤한 음료가 인기를 끌었다. 이후 아메리카노의 깔끔한 쓴맛으로 점점 입맛이 이동했지만, 최근 들어 다시 달고 진한 커피가 돌아오고 있다. 크림 라테, 아인슈페너, 비엔나 라테 같은 음료의 유행은 젊은 세대의 기호 변화를 잘 보여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뉴믹스커피 성수동 매장 앞에서 제품을 시음해 보고 있다. 2024년 론칭한 뉴믹스커피는 ‘기념품 커피’, ‘디저트 커피’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브랜드이다. 군밤 맛, 시나몬 약과 맛, 팥빙수 맛 등 획일화되었던 기존 커피믹스의 맛을 다양하게 변주함으로써 커피믹스 문화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 뉴믹스커피 이러한 흐름 속에서 커피믹스는 다시 새로운 것이 되었다. 뉴믹스커피 매장을 찾는 외국인 비율이 높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SNS와 드라마에서 본 한국식 커피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그들을 뉴믹스커피로 이끈다. 발상의 전환 측면에서는 이보다 신선할 수 없는 뉴믹스커피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커피 한 잔조차 부담스러운 요즘 젊은 세대에게 커피믹스는 새로운 감정의 언어일 수 있다. 최근에는 커피믹스를 활용한 다양한 영상 콘텐츠도 활발히 유통된다. 커피믹스로 카페라테, 칼루아, 크림커피 등을 만드는 레시피 영상이 유튜브에 쏟아진다. 커피믹스 시장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진화하고 있다. 건강과 다이어트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당분이 거의 없는 제로 슈거, 고단백, 무지방 제품 등 기능성을 더한 제품들이 등장하면서, 기존 원두커피와 스페셜티 시장 사이에서 꾸준한 수요를 견인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통계에 의하면 2022년 기준, 국내 커피 시장에서 액상 커피 판매 비중이 35.6%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커피믹스 판매량도 24.8%를 기록해 아직도 믹스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2024년에는 커피믹스 판매량이 10년 만에 증가세로 전환됐다. 2024년 기준, 동서식품이 출시하는 커피믹스의 대명사 ‘맥심 모카골드’는 연간 약 57억 개가 팔렸다. 초당 약 180개가 팔린 셈이다. 이처럼 커피믹스는 여전히 한국인의 일상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효율과 위로의 상징이던 커피믹스는 다시 한번 새로운 세대에 의해 감정의 매개체로 재해석되고 있다. 취향의 서열을 해체하고, 감정을 연결하는 한국식 커피. 그 중심에서 커피믹스는 여전히 한 모금의 여유를 내어준다.

낯선 것에 쫓기다

Lifestyle 2025 AUTUMN

낯선 것에 쫓기다 『절망의 구』 김이환 작, 숀 린 할버트 역 서펜츠 테일, 2024 368쪽, 14.99파운드 낯선 것에 쫓기다 서울의 무더운 어느 일요일 저녁, 정수는 담배를 피우러 집을 나선다. 모든 것이 평범해 보이던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의 구가 나타나 사람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지르던 이들은 순식간에 새까만 덩어리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도시는 공포에 휩싸이고, 구는 천천히 그러나 끈질기게 사람들을 쫓아다닌다. 그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두려움은 극에 달한다. 정수는 부모님을 찾기 위해 남쪽으로 서둘러 나서지만, 곧 자신 또한 끝없이 위협하는 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도망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는 과연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면 결국 굴복하고 절망에 빠지게 될까? 이것이 바로 김이환의 『절망의 구』 속 주인공이 처한 위기다. 이 작품은 2009년 처음 출간되었으나 최근에야 영어로 번역되었다. 10년이 훌쩍 지난 작품이지만, 마치 코로나19 팬데믹을 배경으로 한 것처럼 여전히 시의성을 지닌다. 좀비 영화에 익숙한 독자라면 좀비 영화와의 유사점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좀비처럼 구 또한 아무것도 개의치 않으며 거침없이, 살아 있는 자들을 집어삼키려 한다. 느리게 움직여 달아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공포는 그 압도적인 규모와 결코 멈출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위기가 확산되고 두려움이 고조되면, 좀비 영화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류 사회의 근간이라 믿었던 문명성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남는 것은 결국 각자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뿐이다. 더 나아가 『절망의 구』에서는 좀비 영화의 공통된 주제이기도 한 미디어의 불신 문제가 드러나며, 어떤 정보가 진실인지 가려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공포와 고통은 더욱 극대화된다 한편, 구는 좀비와 다르다. 인간과 괴물 사이 어디쯤에도 속하지 않는다. 또한 좀비로 인한 세상의 종말이 흔히 바이러스의 발병이나 초자연적 현상으로 설명되는 것과 달리, 구는 완전히 미스터리다. 그 어떤 논리나 동기로도 설명할 수 없는, 철저히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무섭고, 현대 사회의 막연한 불안과 절망의 메타포로 기능한다. 저자가 말하듯, “무언가로부터 도망치지만 정작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지는 결코 알 수 없는” 바로 그러한 상태다. 『절망의 구』는 뛰어난 과학소설이 대개 그러하듯,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성찰과 비판을 담고 있다. 한국 작가가 한국을 배경으로 집필한 만큼, 의무 군복무 제도나 그로 인해 형성된 부정적 남성성 같은 한국 특유의 문화적 맥락도 담고 있다. 그러나 작품이 던지는 물음은 궁극적으로 인류 전체를 향한다. 위기 속에서 우리는 누구를 믿을 것인가? 모든 것이 붕괴되는 순간에도 우리는 품위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가? 놀라운 결말과 함께 『절망의 구』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관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되돌아보게 하며, 스스로에게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던지게 만든다. 『한옥, 오늘』 박나니 저, 사진 이종근 한림출판사, 2023 280 쪽, 35,000원 과거의 건축, 현재에 다시 살아나다 박나니의 『한옥, 오늘』은 한옥, 즉 한국의 전통 가옥에 대한 저자의 애정 어린 시선을 한층 더 확장한 책이다. 첫 번째 책이 주거 공간으로서의 한옥을 다루었다면, 이번 책은 공공 및 상업 공간으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가 직접 한옥을 찾아가 주인들과 나눈 대화에서 얻은 통찰은, 이종근 사진작가가 담아낸 예술적 건축 사진과 어우러져 한층 더 깊이 있고 아름답게 펼쳐진다. 이 책에 담긴 한옥들은 휴가용 숙소나 호텔, 미술관과 전시장, 바와 레스토랑 등 다양한 공공·상업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중에는 스위스 대사관, 테스트 키친, 예술가의 작업실과 쇼룸처럼 다소 특별한 용례도 눈에 띈다. 소개된 한옥들은 전통 건축을 레노베이션한 경우도 있고, 새로 지어진 건물도 있으며, 때로는 한국적 건축 요소와 서구적 감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경우도 있다. 각 건축물을 들여다볼수록 분명해지는 사실은, 한옥이 한국 전통의 중요한 일부분이면서도 결코 과거에 묶여 있는 화석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한옥은 한국적 정신이 살아 숨 쉬는 형태로 지금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소유자들은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문화적 책임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 전통을 오늘의 삶 속에 되살리려 애쓴다. 『한옥, 오늘』은 오래된 건축이 품은 새로운 가능성을 통해 독자의 눈을 열어줄 것이다. 단편선 순간들, 오소리웍스, 미러볼뮤직, 2024 기이하고 아름다운 실험 밴드 ‘단편선 순간들’의 데뷔 앨범 는 올해 2월,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음반’ 부문을 수상했다. 한국대중음악상은 한국의 그래미 어워즈를 표방하며 2004년 탄생한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상이다. 음악을 면밀히 살펴보는 깐깐한 전문가들에게 최고의 음악적 평가를 받은 것이다. 리더인 단편선(본명 박종윤)은 21세기 한국 인디음악을 이해할 때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키워드다. 대학에서 언론정보학을 전공한 그는 미학과 철학에도 심취한 바 있는데,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단편들을 좋아해서 예명을 ‘단편선’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음악은 문학적이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음악 비평 커뮤니티에서 논객으로 활약하던 그는 2012년 첫 번째 정규 음반을 발표했다. 이후 2013년에는 4인조 밴드 ‘단편선과 선원들 ’을 결성해 ‘어쿠스틱 호러 판타지 하드록’이라 불릴 만큼 아방가르드 색채가 물씬한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고, 2017년 밴드 해체 후 최근 몇 년 동안은 독보적인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는 뮤지션으로서 그의 복귀작이다. 그가 여러 명의 연주자들과 결성한 새로운 밴드 ‘단편선 순간들’의 정규 1집이기도 하다. 록, 재즈, 클래식 등이 뒤섞인 이 음반은 그동안 그의 음악이 ‘뒤틀린 아름다움’을 지향했던 것과 달리 ‘아름다운 뒤틀림’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의 첫인상이 뒤틀림이었다면 후자의 방점은 이제 아름다움에 있다. 그래서인지 발라드곡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친절한 느낌의 곡들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하지만 적당한 불친절이 없다면 단편선이 아니다. 몇몇 곡들은 편안하게 감상하기 어려운 긴장감을 조성한다. 타이틀곡 ‘음악만세’는 연주곡에 가깝지만, 중반부에 등장하는 연설이 뜻밖의 감정적 진폭을 만들어낸다. 그는 한 노동 운동가의 연설을 삽입해 기막힌 콜라주 같은 음악적 연출을 선보였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임희윤 음악평론가

분재로 세계를 감각하는 방법

Lifestyle 2025 AUTUMN

분재로 세계를 감각하는 방법 바위틈이나 절벽처럼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나무는 살아남기 위해 교묘히 가지를 틀고 뿌리를 더욱 깊게 내리며, 크기를 더 키우지 않는다. 분재는 바로 여기서 영감을 얻은 작업이다. 유상경 씨는 한국만의 조화로운 미감으로 분재를 만들어 키우고 판매하며, 분재를 가꾸는 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식물 마니아 유상경 씨가 운영하는 ‘서간’은 식물을 매입해 그대로 판매하는 일반적인 꽃집과 달리 화분과 이끼, 돌 등을 활용해 식물을 작품처럼 디자인한 뒤 판매하는 공간이다. 오전에는 화훼 농장에 가서 식물을 구경하고 오후에는 식물을 돌보며 가꾸는 게 그의 주된 일상이다. 서울 서촌의 한적한 어느 골목,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디귿자 모양의 아담한 한옥이 펼쳐진다. 대부분 무릎 높이 아래로 자라는 작은 분재들이 점점이 늘어선 이곳, 서간은 유상경 씨가 운영하는 분재 가게이자 전시관이다. 마당의 자갈, 잡초, 한곳에 켜켜이 쌓아둔 기왓장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자연과 함께한 어린 시절 분재는 손바닥만 한 작은 화분에 나무나 풀, 이끼, 돌 등을 심고 배치하는 일 또는 그렇게 가꾼 화초나 나무를 말한다. 유상경 씨는 취미로 분재를 시작했는데 일이 커져 전시관으로 이어졌다. 그는 거의 매일 이곳에 상주하며 40여 개의 분재를 돌보는데, 하루 1~2시간이 꼬박 걸린다. “어릴 때 전라남도 광양에 살았어요. 조경이 잘 된 동네였죠. 그래서 산이며 나무며 바다며 자연과 친숙하게 자랄 수 있었어요.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이사해서도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근처에 산을 타러 다니곤 했어요.” 말하자면 유상경 씨는 ‘덕후’다. 산에 오르거나 길을 걷다가도 눈에 들어오는 풀과 나무, 이끼 같은 사소한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마음에 드는 자연석을 수집하기도 했다. 독립해 혼자 살게 되면서는 본격적으로 집에 식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심심할 때면 혼자 식물원이나 농장에 자주 다녔어요. 오래된 화분을 사 모으기도 했고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게 되면서는 주말이면 종일 식물을 만졌어요. 나중에는 집에만 식물이 60~70종이 됐어요.” 집에 살아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몸가짐이 사뭇 달라지는 일이다. 점점 더 부지런해졌다. 가지도 직접 치고, 해가 잘 드는 곳에 두었다가 다시 서늘한 곳으로 옮겼다가, 분갈이를 여러 번 해주며 식물이 하루하루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보니 본격적으로 식물을 가꾸는 법을 배울 필요를 느꼈다. “이 식물에 흙을 이걸 쓰는 게 맞는지, 가지를 이렇게 쳐도 되는 건지, 분갈이를 이렇게 자주 해줘도 되는 건지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알게 된 게 분재라는 장르예요.” 서울 서촌의 고즈넉한 골목길 끝에 자리한 서간은 느리게 움직이는 이 지역 특유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룬다. 유상경 씨는 이곳에서 분재 원데이 클래스와 정규반 수업을 진행한다. 때로는 브랜드와 협업해 팝업 스토어를 열기도 하고, 작가들의 작품 전시도 개최한다. 오해와 진실 분재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치스럽고 인위적인 취미로 오해받곤 한다.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우선 분재를 가꾸고 감상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파리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가지가 어떻게 뻗어져 나가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시간이 많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로 인식될 수도 있다. “한번은 대학생 손님이 오셔서 분재 가격을 물어보더니,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다시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분이 정말 시간과 돈이 넘쳐서 분재를 사려는 게 아니죠. 저는 오히려 분재를 통해 여유로운 시간을 사는 거라 생각해요.” 또한 분재 하면 많은 이들이 철사를 칭칭 감아 수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혹은 식물이 비좁은 화분에 갇혀 원래 크기대로 자라지 못하고 간신히 생명을 유지한다고 생각한다. 유상경 씨는 서간에서 원데이 클래스도 운영하는데, 종종 분재에 대한 이러한 편견과 오해를 접한다. 그는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 “화분에서 식물을 키운다는 것부터가 인공이에요. 그렇다면 화분에 옮겨 심은 식물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요? 제한적인 환경에서 자라는 식물에게는 적절한 관리가 필요해요. 가지치기를 적당히 해주고, 필요하다면 철사로 가지를 교정해 서로 경쟁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거죠. 나무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나무에 해를 입히지 않아요. 나무에 하는 모든 일이 애정에서 비롯되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나무가 못나 보이는 계절도 있다. 여름에는 덥고 습해 병충해가 잦기 때문에 이파리가 시들해지는 경우가 많다. 분재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봄과 가을이다. 서간에 방문한 6월 말에는 철쭉이 꽃을 피웠다가 떨구고 딱 한 송이가 남아 있던 참이었다. “좋아하는 수종이 따로 있지는 않아요. 보기에 예쁘면 다 좋아하는데, 못생겼으면 또 그런대로 좋아해요.” 식물의 줄기와 가지가 뻗어나가는 모양새에 따라 분재는 여러 종류로 나뉜다. 전나무나 삼나무처럼 줄기가 위로 솟아나는 것을 직간, 해송처럼 비스듬히 기울어서 자라는 나무를 사간, 줄기가 아예 바닥으로 늘어지는 것을 현애라고 한다. 이곳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형태는 나무줄기가 길고 가늘게 뻗어 끝부분에 이파리가 달려 있는 문인목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생긴 모양을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문인목이더라고요. 옛날 조선 시대 선비들이 즐기던 나무라는 뜻이죠. 뜻을 알고 나니 더 좋아요. 깊은 내공을 갖고 있지만 으스대지 않는 느낌이랄까요? 그게 제가 추구하는 이상향에 가까워요.” 서간에서는 대부분 한국 자생식물을 이용해 분재를 만든다. 특히 그는 꼭지윤노리나 애기범부채처럼 정감 있는 이름을 가진 나무에 더 애착을 느낀다. 그는 이왕이면 우리 자생식물을 위주로 분재를 하고자 다짐했고, 옛 선비들이 그린 수묵담채화 등을 보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한국의 미감을 꾸준히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투박한 미감 유상경 씨는 모든 식물이 제각각의 아름다운 실루엣과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분재라는 방식을 통해 각 식물의 특징과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한다. 사진은 유상경 씨가 핀셋으로 잎을 다듬고 있는 모습.   유상경 씨가 좋아하는 한국의 전통문화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수묵화이다. 여백이 많으며 모든 것이 조화롭게 그려진, 화려하진 않지만 슴슴한 맛이 있는 그림이다. “나무도 별 볼 일 없이 그려져 있고, 산도 크긴 하지만 위압적이지 않아요. 그 안에서 인간은 아주 작게 존재하죠. 인간이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걸 깨닫는 순간 위안을 찾는 것 같아요. 서간에 와서도 사람들이 비슷한 순간을 경험했으면 좋겠어요.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식물을 보다 보면 나의 존재마저 없어지는 느낌. 아주 작은 점이 된 기분을 느끼다 갔으면 해요.” 한국 분재의 특징도 이와 비슷하다. 중국에서 유래된 분재가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려(918~1392) 시대 중기의 문헌들에 분재에 대한 기록이 있어, 대략 13세기쯤 이미 분재를 즐기는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분재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좀 더 자연스러운 미감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유상경 씨가 좋아하는 백자나 막사발에서 느낄 수 있는 투박한 미감에 가깝다. “요즘 생각하는 한국의 멋은 한마디로 조화라고 생각해요. 하나하나가 존재감 없이 어우러지는 게 아니라,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있으면서 조화로울 때 더 아름답잖아요. 예를 들어 어떤 나무는 꽃이 지고 나면 볼품없어지죠. 그렇다고 해서 나무를 안 보이는 곳에 들여놓지 않아요. 그 시기마저 수용하는 게 한국의 멋이라고 생각해요. 내년에 또 가장 예뻐질 때를 기다리는 거죠.” 서간은 매주 목요일부터 일요일, 1시부터 6시까지 열려 있다. 혹한기나 혹서기에는 예약제로 운영할 생각을 하고 있다. 모두 이곳에 있는 나무, 그리고 나무를 감상하는 사람들을 배려해서다. “요즘은 나무의 뿌리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늘 보는 건 줄기부터 이파리까지 윗부분이지만, 분갈이할 때 보면 뿌리가 무성해요. 살아남기 위해서 무언가를 부여잡고 있는 흔적이죠. 경이로운 마음이 들어요.” 서간 내부에는 곳곳에 분재가 놓여 있다. 봄과 여름에는 화사한 꽃을 만끽하고, 가을에는 붉게 익은 열매를, 그리고 겨울에는 나목을 감상하는 등 분재와 함께하는 일상은 언제나 즐거움이 끊이지 않는다.  유상경 씨가 분재에 사용하는 식물들은 대부분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식물들이다. 우리 고유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분재와 어울릴 만한 화분 수집은 물론 고가구와 인테리어 소품을 모으는 것도 그의 취미 생활이다. 사진은 스튜디오 한쪽에 놓여 있는 빈티지 지류함으로 그가 서울 일대를 샅샅이 뒤진 끝에 찾아냈다.

컵에 담긴 청춘의 생존기

Lifestyle 2025 SUMMER

컵에 담긴 청춘의 생존기 급격한 물가 상승 때문에 점심값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던 2010년대 초반, 서울 노량진에 포진한 포장마차들에서는 작은 혁명이 일어났다. 빠르게, 싸게, 든든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이른바 ‘컵밥’이 탄생한 것이다. 컵밥은 이제 단순한 끼니를 넘어 시대의 필요가 만들어 낸 새로운 식문화로 자리 잡았다. 고시촌의 생존 음식에서 K-푸드로 확장된 컵밥에는 청춘의 고단한 시간과 한국인의 밥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로벌 푸드엔터테인먼트 브랜드 ‘컵밥’은 송정훈 대표가 2013년 미국 유타주에서 푸드트럭으로 시작해 현재는 미국 전역으로 매장을 확장했다. 현지인의 문화와 입맛을 반영한 레시피 덕분이다. ⓒ 컵밥 “점심값 1만 원 시대.” 이 표현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2011년이었다. 당시 언론은 콩국수 한 그릇 9,500원, 칼국수 8,000원, 설렁탕 1만 원 등을 예시하며 물가 상승을 대서특필했다. 직장인들은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 관공서나 학교, 회사 구내식당을 찾기 시작했고, 편의점 도시락도 불티나게 팔렸다. 이는 단순한 식비 절약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생존형 소비에 진입했다는 신호였다. 2011년은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유난히 팍팍했던 시기였다. 제조업과 대기업의 생산성이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경제 성장률은 세계 평균에도 못 미쳤다. 생산자 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6.7%, 소비자 물가지수는 4%나 올랐다. 이 시기는 우리 경제가 ‘고성장’에서 ‘저성장’으로 궤도를 바꾼 변곡점이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비싸지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물가 상승으로 직장인조차 점심값을 고민하던 시절, 취업준비생, 특히 고시생들의 현실은 더욱 암담했다. 부모의 지원에 의존하며 온종일 공부에 매진해야 했던 이들에게 아르바이트는 사치에 가까웠다. 고시생의 하루는 공부를 중심으로 철저히 계획되어 있었고, 식사조차 효율성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했다. 노량진 컵밥의 탄생 서울 노량진은 학원가로 유명한 지역이다. 1980~90년대에는 대학 입시 학원들이 밀집해 호황을 누렸다. 이후 입시 학원들이 강남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는 공무원 시험을 위한 전문 학원들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노량진은 전국에서 고시생들이 모여드는 대표적인 고시촌이다. 이곳엔 ‘고시 식당’이라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일정 금액을 내면 밥과 반찬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뷔페식 식당이다. 지금도 고시 식당의 가격은 7,000원 안팎으로 저렴하지만 2011년 당시엔 3,000원 선이었다. 점심값이 1만 원을 넘는 시대에 이 가격은 분명 저렴했지만, 고시생들에게는 그것조차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물가가 오르면서 고시 식당의 가격도 조금씩 인상되고 있던 터라 고시생들의 걱정이 커져갔다. 노량진역 앞, 긴 행렬을 이룬 포장마차도 이 지역만의 독특한 풍경이었다. 떡볶이, 핫도그, 햄버거 같은 분식을 주로 팔았지만, 주먹밥이나 간단한 덮밥 형태의 메뉴도 일부 있었다. 그러던 중 2011년, 본격적으로 밥을 파는 포장마차들이 등장했다. 플라스틱이나 스티로폼, 혹은 넓적한 종이 용기에 볶음밥을 담아 팔거나 맨밥 위에 여러 가지 토핑을 얹은 덮밥을 팔았다. 가격은 한 그릇에 2,000원 정도였다. 뷔페식으로 구성한 고시 식당이 1인당 3,000원가량 했으니, 포장마차에서 파는 2,000원짜리 컵밥이 그다지 매력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시생에게 차액1,000원은 무시 못 할 금액이었다. 또 고시 식당은 여러 반찬을 내놓다 보니 개별 품질이 떨어졌으며, 음식을 고르고 받아야 하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는 고시생들도 많았다. 반면 컵밥은 간편하게 먹을 수 있고 양이 푸짐했으며, 달고 짠 맛으로 젊은 입맛을 사로잡았다. 줄 서서 기다릴 필요 없이 서서 5분 만에 한 끼를 해결하고 바로 학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컵밥은 가격, 맛, 시간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다. 노량진 컵밥 거리 모습. 컵밥은 노량진 포장마차에서 개발된 거리 음식으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수험생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 서울관광재단 컵밥 거리의 퇴색 ‘컵라면’에서 파생된 신조어 ‘컵밥’은 언론이 좋아할 만한 소재였다. 고시생들이 만든 신개념 식문화라는 스토리는 충분히 화제성이 있었다. 점심값 1만 원 시대에 한 끼에 2,000원이라는 상징성까지 더해져 컵밥은 빠르게 주목받았다. 단순히 값싼 끼니가 아니라, 청년 세대가 고안해 낸 생존 방식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컵밥 열풍이 커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주변 식당들이 포장마차의 컵밥 때문에 매출이 줄었다며 민원을 제기했고, 구청은 단속에 나섰다. 결국 포장마차 사장님들은 라면, 핫바 등으로 품목을 바꾸거나 컵이 아닌 알루미늄 포일 용기를 사용하는 식으로 우회해야 했다. 식당과 포장마차 간 컵밥 전쟁으로 컵밥 원조들이 노량진에서 사라져갈 때 아이러니하게도 컵밥은 전국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건강을 강조한 ‘비건 컵밥’, ‘키토 컵밥’ 같은 차별화된 메뉴도 등장했다. 2012년엔 한 편의점 브랜드가 발 빠르게 컵밥 제품을 출시했다. 이 무렵 노량진 포장마차들은 단속으로 인해 이미 컵밥을 팔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대기업은 되고, 서민은 안 되냐”라는 포장마차 사장님들의 항변은 컵밥 열풍 이면의 사회적 불균형을 보여줬다. 노량진의 컵밥 포장마차들은 3년 후 구청의 중재로 기존 학원가에서 150미터 떨어진 사육신역사공원 앞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컵밥 거리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청년 세대가 공무원을 더 이상 안정적인 직업으로 여기지 않기 시작하면서 고시생 인구가 줄었고, 이에 따라 고시촌의 분위기 역시 예전 같지 않게 됐다. 노량진 컵밥도 그만큼 활기를 잃었다. 그러나 컵밥 거리는 흥미로운 탄생 과정으로 인해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고, 한번쯤은 가봐야 하는 명소로 떠올랐다. 이제는 고시생보다 가족 단위의 여행객이나 젊은 연인들이 이곳을 더 많이 찾는다. 노량진 컵밥이 생존형 식문화에서 관광 콘텐츠로 확장되며 새로운 소비문화를 창출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포장마차에서 분식 대신 밥을 팔자 대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처럼 젊은 고시생들도 떡볶이나 국수 대신 밥을 먹어야 든든하다고 여겼다. 알곡 상태의 밀을 곱게 빻은 밀가루는 일종의 가공식품이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섭취 후 혈당을 급격히 올리고, 이내 급격한 허기를 유발한다. 반면 쌀은 천천히 흡수되어 포만감이 오래간다. 이는 수천 년 동안 쌀을 주식으로 삼아온 식습관에서 비롯되어 몸에 자연스럽게 새겨진 감각이다. 시대적 트렌드 오늘날 컵밥은 더욱 진화하고 있다. 고급화된 메뉴, 브랜드화된 제품, 해외에서의 K-푸드 아이콘으로 거듭나며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문화로 남아 있다. 우선 컵밥은 컵라면처럼 빠르게 대중화에 성공했다. 냉동식품이나 레토르트 형태로 가공되며 편의점과 마트에서 ‘전자레인지 2분’이면 완성되는 간편식으로 자리 잡았다. ‘집에서도 간단한 한 끼’라는 메시지는 시대 흐름과 맞아떨어졌고, 컵밥의 대중성을 더욱 굳혔다. 이제 컵밥은 한국을 넘어 세계로 향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 유타주에서 시작된 컵밥(Cupbop) 프랜차이즈다. 비보이 출신이었던 송정훈 대표가 유학을 왔다가 시작한 이 브랜드는 컵밥을 미국식 패스트푸드 스타일로 재해석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밥, 고기, 소스, 토핑을 조합해 하나의 볼로 제공하는 방식은 미국의 푸드 트렌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한국적 맛을 유지하면서도 서구적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 주효했다. 어느덧 창업 20년이 넘은 이 브랜드는 현재 미국 전역으로 매장을 넓혀가고 있으며, K-푸드 열풍과 맞물려 더욱 성장 중이다. 이 외에도 컵밥은 일본, 동남아, 유럽 일부 지역에서 한식 간편식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BTS, 김치, 불고기와 함께 컵밥은 ‘일상 속의 한류’를 구성하는 아이템으로 떠오르는 중이다. 컵밥의 가치는 단순히 간편하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한국 사회의 변화, 특히 청년 세대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음식이라서다. 고된 공부와 취업 준비, 아르바이트 사이에서 허겁지겁 끼니를 해결해야 했던 수많은 청춘들의 진심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컵밥은 시대의 필요가 만들어낸 음식 문화였다. 길거리에서 시작된 작은 컵 하나가 세계인의 식탁에 오르기까지 컵밥은 그 자체로 한국인의 생활과 감성을 담아낸 살아 있는 음식 문화의 사례다. 한 손에 쥔 이 작고 따뜻한 한 끼가 앞으로 또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지 기대가 된다. 노량진 컵밥은 간편식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1인 가구 증가에 따라 간편식 시장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다양한 종류의 컵밥이 편의점과 마트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 뉴스뱅크

미래의 꿈, 현실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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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꿈, 현실과 만나다 『네 이웃의 식탁』 구병모 작, 김지영 번역 와일드파이어, 2024 224쪽, 14.99 파운드 미래의 꿈, 현실과 만나다 구병모의 『네 이웃의 식탁』은 정부의 저출산 해결 프로젝트 사업에 참여한 네 커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녀 셋을 낳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서약을 하면 실험공동주택에 입주할 수 있게 해주는 사업이다. 요진과 남편 은오가 네 번째 입주 부부로 공동주택에 들어오면서, 독자들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이 커뮤니티의 모습을 처음 마주하게 된다.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라는 희망적인 이름과 달리, 이곳 입주민들 사이에는 이미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공동주택 반장 역할을 자처하는 단희는 쾌활하고 적극적이지만, 이웃에 대한 관심이 간섭과 참견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출산 직후 동화책 그림 그리는 일에 복귀한 효내는 남편이 출근한 사이 아이를 돌보며 마감에 시달리고 있다. 공동체 생활에 참여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여산과 교원 부부는 그들만의 문제가 있지만, 작은 공동체에서 비밀이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그 가운데 새로 합류한 요진과 은오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커플로, 요진은 ‘직장맘’이고 은오는 전업 아빠다. 단희의 남편 재강의 차가 고장 나자, 은오가 요진과의 카풀을 제안하면서 부담스러운 상황이 연출된다. 출퇴근길을 함께하게 된 재강은 요진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꾸 선을 넘으려 하고, 요진은 자신의 판단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서울의 높은 집값, 최저 수준의 출산율, 정부의 어설픈 대응 등 현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조명한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인간적 질문들의 틀에 불과하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전통적인 성 역할에 따라 사회가 아버지 또는 어머니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이를 낳은 후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요진의 친구들이 말하듯, 정말 아이를 낳아야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며, 그 이전까지는 그저 ‘소꿉놀이’에 불과한 것인가? 생물학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이 서로 얽히고설켜 인물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지만, 그 원인이 정확히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작품 속의 공동체는 마치 현미경 아래 놓인 페트리 접시와 같다.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이 고립된 공간에 모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리 좋은 의도로 시작했더라도, 곧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입주자들은 과연 그 균열을 메꿀 수 있을까? 아니면 균열이 점점 깊어져 그들이 섬세하게 쌓아올린, 취약한 세상을 뒤흔드는 단층선으로 변하게 될까? 중대한 사회 문제로 인해 아무리 상황이 심각하다 해도, 사회란 결국 개인과 개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곳이다. 구병모 작가는 거시적인 한국 사회와 미시적인 공동체의 삶을 동시에 들여다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성인으로 산다는 것, 부모가 된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무한화서』 이성복 작, 안톤 허 번역 앨런레인, 2023 176 쪽, 18.00 달러 시의 거장이 들려주는 시와 삶에 대한 성찰 이성복의 『무한화서』는 창작 수업 중 470개의 아포리즘을 학생들이 정리하여 담은 책이다. 깊은 성찰을 통해 얻은 지혜의 글을 통해 저자는 종교, 철학, 스포츠, 과학, 수학 등 다른 분야들을 인용하면서 은유와 비유를 통해 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언어, 사물, 시, 글쓰기, 삶이라는 다섯 주제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에 대한 저자의 일관된 생각이 그 기저에 흐르고 있다. 즉, 시란 의도적 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미묘한 사유가 드러나며, 저자는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도 매번 다른 관점과 시선을 보여준다. 각각의 아포리즘은 빗방울처럼 잠깐 스쳐 지나가지만, 쌓이고 쌓여 결국 바위를 뚫는 물방울처럼 깊은 울림을 남긴다. 특히 마지막 장에는 시와 무관해 보이는, 그러나 어쩌면 가장 시적인, 인생의 지혜들이 담겨 있다.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야 독자는 그 여정이 ‘언어’에서 ‘삶’으로 곧게 이어지는 직선이 아니라,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하나의 원형임을 깨닫게 된다. 한 번 읽으면 저자의 시 철학을 엿볼 수 있고, 차분히 여러 번 읽다 보면 더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 역성 > 이승윤, CD,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마름모, 2024 불합리한 세상을 향한 포효 이승윤은 2011년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이후 인디 음악계에서 활동했다. 그가 대중적 인지도를 얻게 된 건 JTBC가 2020년부터 방영하는 예능 프로그램 의 초대 우승자가 되면서부터다. 브릿팝, 하드록, 헤비메탈, 펑크 록에 이르기까지 날것의 재료들을 도마에 올려 난도질한 뒤 특유의 한국어 말맛을 뒤섞는 게 그의 음악적 레시피다. 2024년 발매한 정규 3집 은 싱어송라이터로서 그가 걸어온 여정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 용어를 가져온 가사들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폭풍처럼 질주하는 록 템포에 올라타 활어처럼 펄떡인다. 그가 쓰는 가사는 대체로 호전적이다. 싸움의 대상은 자기 자신과 세계다. 그는 세상이 제시하는 진리와 삶의 방식, 성공 방정식에 대해 끝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고개를 흔든다. 15곡이 실려 있는 이 앨범은 64분에 이르는 대장정이다. 타이틀곡 은 사납게 포효하는 보컬과 밴드 사운드에 산뜻한 현악을 가미해 ‘처박혀 버린 얼’과 ‘짓밟힌 넋’을 되찾는 역성혁명을 이루겠다고 천명한다. 앨범은 중반부 어쿠스틱 팝 발라드에서 야성적 펑크 록을 지나 후반부쯤 6분이 넘게 몰아붙이는 에서 하이라이트에 도달한다. 부드럽게 시작해 광기 어린 드럼의 질주로 치닫는 마지막 곡까지 이 앨범은 이승윤이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물게 굵은 붓과 커다란 캔버스를 쓰는 아티스트임을 입증한다. 다양한 음악적 색깔을 자기 식대로 쌓아 올려 큰 그림을 그려 내는 앨범 지향형 음악가 말이다. 이승윤은 이 음반으로 2025년 열린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악인, 최우수 록 노래, 최우수 모던록 노래 3개 부문의 트로피를 안으며 3관왕에 올랐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임희윤 음악평론가

숨 고르기의 미덕

Lifestyle 2025 SUMMER

숨 고르기의 미덕 김차이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으로 제74회 에미상 스턴트 퍼포먼스 상을 받은 스턴트 배우이다. 그녀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누군가 대신할 수 없는 연기로 작품에 기여하며 성취감을 느낀다. 나이가 들어도 현장을 누비는 베테랑 배우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스턴트 배우 김차이는 경기도 하남에 위치한 베스트 스턴트팀(Best Stunt Team) 연습실에 출퇴근할 때마다 오토바이를 애용한다. 그녀를 비롯해 베스트 스턴트팀 배우들은 < 오징어 게임 >으로 비영어권 최초 에미상 스턴트 퍼포먼스상을 받았다. 당신은 김차이를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는 영화와 드라마 속 액션 장면에 숨을 불어넣는 스턴트 배우이다. 글로벌 히트작 (2021)에서 주인공들 중 하나인 새벽을 연기한 배우 정호연의 대역이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과 같은 해 11월 개봉한 영화 에서는 여우 역으로 개성 있는 액션을 선보이며 얼굴을 알렸다. 이 영화는 제20회 뉴욕 아시안영화제에서 다니엘 A. 크래프트 우수 액션시네마 상을 받았다. 또한 (2023), (2023) 등 국내외에서 주목받은 한국 영화의 무술팀으로 활약했다. 최근에는 한소희, 전종서 주연의 영화 와 전도연, 김고은 주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촬영으로 바빴다. 는 김차이가 처음으로 참여한 영화 (2015)에서 함께한 두 배우들과 재회한 작품이라 더욱 뜻깊었다. 지난 10년 동안 성장을 거듭한 결과, 이제 그녀는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들의 액션 연기를 대신하는 스턴트 배우로 우뚝 섰다. 나만의 무기 이 여정의 시작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소극적인 어린아이였던 김차이에게 숨겨진 끼가 있음을 직감한 어머니는 딸을 연기 학원에 보냈다. 덕분에 그녀는 초등학생 때부터 과자 광고를 찍고 아역 배우가 되었지만, 연이은 오디션에 지쳐 사춘기 시절 잠시 방황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고등학교와 대학 연기과에 진학하며 배우의 꿈을 놓지 않았다. 기회를 잡으려면 나만의 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깨달음도 일찍 얻었다. 아크로바틱에 자신 있었고, 몸 쓰는 일에 늘 뛰어났던 그녀는 액션에 눈을 돌렸다. 배우는 넘쳤지만, 액션 전문 배우는 흔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작품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그녀는 액션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디서 액션 연기를 배울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남들보다 운동을 잘한다고 해서 감독의 부름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묵묵히 의지를 다지고 있었던 김차이는 대학 교양 과목으로 택한 호신술 강의를 듣던 중 인연을 만났다. 호신술을 가르치던 교수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달리 돋보이는 그녀를 눈여겨봤고, “격투기 선수로 키워 보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그는 액션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녀에게 당시 스턴트 배우로 활약하던 제자를 소개했다. 이들의 만남은 또 다른 스승을 모시는 기회로 연결되었고, 드디어 본격적으로 스턴트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대학에 다닌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아역 배우로 데뷔한 김차이는 어린 시절 태권도, 검도, 스피드 스케이팅 등을 즐겨 했고 자신의 강점과 특기를 살려 스턴트 전문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일에 대한 자긍심 김차이는 스턴트 배우로 일하면서 복합적인 감정의 터널을 통과했다고 고백했다. 오래전 계획한 대로 액션이라는 강점을 키울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정극 연기에 대한 갈증도 깊어졌다. “대역이 아닌 ‘진짜 배우’로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언제나 마음 한쪽에 있었어요. 꿈을 꿈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아 조급했던 적도 있었고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널리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서 작품에 기여한다는 만족감이 크다고 강조했다. 스턴트 배우로서 자긍심을 다지게 한 동력은 트로피였다. 김차이는 을 함께한 스턴트 팀원들과 같이 제74회 에미상 스턴트 퍼포먼스 상을 받았다. , , 와 같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받은 상이라 더욱 놀라웠고 기뻤다. 쉽게 얻어진 상은 아니었다. 한여름엔 뙤약볕 아래에서 400여 명의 군중들과 호흡을 맞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시퀀스를 완성했다. 한겨울에는 살이 에이는 추위에도 맨살을 드러내야 했다. 그녀는 이 드라마에서 새벽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절박한 심경을 액션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호연 배우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펴봤고, 신체적 특징과 습관을 면밀히 관찰해 액션 연기에 반영했다. “내가 살면서 이런 상을 받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김차이는 수상 후 3년이 흘렀음에도 그때의 벅찬 감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스턴트 배우들을 대표해서 받는 상으로 여겼다”는 말을 덧붙였다. 액션 베테랑을 향해 김차이는 액션, 스릴러 장르에 주로 출연하지만 사실 로맨스 영화를 즐겨왔다고 한다. (2003)처럼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보며 혼자 펑펑 운 적도 있었다. 촬영 현장에서는 모든 에너지를 뿜어내지만, MBTI가 ‘I’로 시작하는 내향형 인간인지라 집에 가만히 누워 있는 걸 낙으로 삼는다. 그런 김차이의 곁에는 특별한 친구가 있다. 그녀가 중국에서 촬영을 하던 시기에 만나게 된 중국인 친구다. 그녀는 연출을 전공하면서 한국 영상 산업에 관심이 생겨 서울에서 어학연수 중이다. 2016년부터 우정을 쌓아온 두 사람은 급기야 룸메이트가 되기에 이르렀다.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친구가 요리를 해줘요. 중국인답게 따뜻한 차도 자주 내주고요. 처음에는 영어로 소통했는데, 점차 서로의 모국어에 익숙해지고 있죠.” 친구가 한국어를 배우는 동안 그녀도 중국어를 조금씩 익힌 덕분에 이제는 제법 의사소통이 수월해졌다고 한다. 친구의 안내로 상하이 여행을 다녀온 김차이는 그녀에게 한국을 알려주고 싶어 얼마 전 강릉 여행을 함께하기도 했다. “여행을 하면서 그동안 나 자신을 일에만 너무 가두고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찾아오는 여유로운 시간을 중히 여기며, 앞으로 더 많은 곳에 가볼 계획이에요. 소소한 것에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도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 같아요.” 동료들과 풋살 팀을 꾸려 휴식하듯 운동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숨 고르기의 미덕을 깨우치자 목표를 대하는 자세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20대에는 “스턴트 연기의 특성상 30대 후반이면 은퇴해야 하는 게 아닐지 걱정이 많았다”던 그녀는 이제 환갑이 되어도 촬영장을 누비는 액션 베테랑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 꿈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배우로서 얼굴을 드러낸 자신을 상상하기도 한다. 다시 연기 공부를 열심히 해서 40대가 되기 전에 이름 있는 배역을 맡아보고 싶기도 하다. 그 바람을 전하는 김차이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세상은 넓어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외에서도 일해 보고 싶어요. 언젠가 할리우드에서 활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의 앞길은 창창하니까요!” 김차이 씨가 동료와 함께 훈련 중인 모습. 촬영 현장은 항상 안전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평소 동료들과 합을 맞추는 연습에도 최선을 다한다.

마음을 잇는 음식, 잔치국수

Lifestyle 2025 SPRING

마음을 잇는 음식, 잔치국수 한국의 식문화에서 국수를 이용한 음식은 일상식이 아니었다. 외국 사신에게 예우를 갖추기 위해 대접하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잔치에서 유래하여 이름을 얻은 잔치국수다. 과거의 잔치국수는 재료와 제조법이 현재와 상이하지만, 축원의 의미를 담은 음식이라는 점은 여전하다. 잔치국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국수 요리이다. 삶은 소면 위에 각종 고명을 얹고, 진하게 끓여낸 멸치 육수를 부어 먹는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밀이 매우 귀한 식재료였다. 한반도의 기후 환경이 밀 재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918~1392)에는 밀을 중국에서 수입해 먹었고, 조선 시대(1392~1910) 에는 상대적으로 기후가 서늘하고 건조한 북쪽 지방에서 늦가을에 파종해 초여름에 수확하는 겨울밀을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 수량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주로 메밀이나 녹두, 콩 같은 곡물을 곱게 갈아 면을 뽑았다. 그런데 이런 재료들로 면을 만들면 찰기가 없이 뚝뚝 끊어진다. 식감도 거칠고 색도 거무튀튀하다. 이에 비해 밀은 글루텐 함량이 높아 길고 가늘게 면을 만들 수 있다. 색도 뽀얗고 표면도 매끈하다. 색감과 형태가 말끔하고 세련되니, 옛날 사람들은 밀가루 국수에서 순결하다는 인상까지 받았다. 지금이야 밀국수가 흔하디흔하지만, 그것을 처음 본 사람들에게는 매료될 수밖에 없는 등장이자 존재였을 것이다. 국수 건조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자연 건조 시 온도와 습도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다. 사진은 경주의 대표적 로컬 브랜드인 아화전통국수의 소면 건조 장면. ⓒ 아화전통국수 아화전통국수의 김영철 대표가 건조된 소면을 알맞은 길이로 재단하고 있는 모습. 아화전통국수는 2010년대 말 현대식 제면 기계를 도입했지만, 아직까지도 90% 이상은 예전과 같은 전통적인 수작업으로 국수를 만든다. ⓒ 아화전통국수 잔치의 주인공 고려 시대,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돌아가 작성한 견문록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사신이 경내에 들어오면 10여 종의 음식을 제공하는데, 면식(麵食)을 우선하였다”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조선 시대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불교 행사 때 주요 손님들에게 유과, 두부탕, 과일 등과 함께 국수를 대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세조(재위1455~1468) 때는 명나라 사신에게 접대하는 면을 여러 고을에서 장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언급도 있다. 선조(재위 1567~1608) 때는 국수를 장만하기 쉽지 않으니, 사신에게 주는 음식으로 국수 대신 밥을 대접하도록 조치했다고 한다. 이처럼 국수는 사신이 오거나 나라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상에 올리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민가에서는 혼례나 회갑연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나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잔치의 주인공들이 오랫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축복해 주러 온 손님들이 다 같이 국수를 나누어 먹었다. ‘잔치국수’라는 명칭은 이러한 풍속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미혼 남녀에게 주변에서 “언제 국수 먹게 해줄래?”라고 묻는 것은 언제 결혼하느냐는 의미의 우회적 표현이다. 기계화된 제면법 잔치국수의 사전적 정의는 “따뜻한 맑은장국에 국수를 말고 갖은 고명을 얹은 음식”이다. 더 정확히 정의하자면, 멸치를 넣고 장시간 끓여낸 육수에 밀가루로 만든 가늘고 긴 국수인 소면(素麵)을 넣은 음식을 지칭한다. 한마디로 멸치 육수와 소면의 조합이 잔치국수의 핵심이다. 잔치국수가 오랜 역사를 지녔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현재의 제조법대로 잔치국수를 먹게 된 것은 불과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전통 국수 요리에서 면은 재료나 형태가 오늘날처럼 단 몇 가지로 제한되지 않았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재료는 메밀 가루였고, 채소나 고기를 채썰어 가루를 묻힌 후 익혀서 면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때로는 꽃잎을 면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면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19세기 초 빙허각 이씨가 저술한 생활백과사전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왜면(倭麵)’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는 국수형 화채의 일종으로, 더운 여름철 소면을 삶아 오미자 우린 국물에 말아 시원하게 먹었던 계절 음식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이 편찬한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왜면을 만드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밀가루를 기름과 소금으로 반죽해 실처럼 늘어뜨려 말렸는데, 이 제조법은 현재의 소면과 유사하다. ‘왜(倭)’는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소면은 조선 후기 일본에서 유입된 식재료일 가능성이 높다. 1930년대 신문 기사에도 ‘일본 국수 소면’이라는 표현이 등장해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한다. 국내에서 소면을 대중적으로 만들어 먹기 시작한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추정된다. 제아무리 글루텐 함량이 높다고 한들 면발을 손으로 길고 가늘게 뽑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소면은 고도화된 제면기의 등장과 함께 발전했다. 1920년대 신문에는 ‘최신형 제면기 특가 판매’ 같은 광고가 자주 실렸는데, 이를 통해 그 당시 제면기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40년 조선일보 5월 8일자 기사에는 쌀 배급이 불안정해지자 대용식을 장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고, 이에 따라 소면이 인기를 얻어 주문이 쇄도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눈치 빠른 상인들이 쌀 장사를 접고 밀가루와 국수 장사에 대대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언급도 있다. 이후 제분기와 제면기 등 설비를 갖춘 국수 공장들이 전국 곳곳에 생겨났고, 기계화된 제면법이 활성화되었다. 1930년대 초반 출발한 식품 제조 회사 풍국면(豊國麵)은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국수 공장이라는 명예를 지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국내 최대 규모의 기업 삼성이 1938년 창업된 삼성상회(三星商會)와 이곳의 대표 상품 ‘별표 국수’에서 비롯됐다는 유래 또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지금과 같은 잔치국수의 전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피난민들이 멸치 어업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몰렸으며, 미국으로부터 잉여 농산물인 밀을 대량으로 원조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밀가루로 뽑은 면을 뿌연 멸치 국물에 말아 한 끼 식사를 해결했다. 마음을 위로하는 음식 오늘날 잔치국수는 더 이상 특별한 날에만 먹는 고급스러운 음식이 아니다. 가정에서는 한 끼를 간단히 때우기 위해 끓여 먹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직장인들이나 학생들은 분식집이나 포장마차에서 저렴한 잔치국수를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곤 한다. 결혼식 피로연에서도 서양식 뷔페에 밀려 겨우 구색을 갖추는 정도로 퇴색했다. 그럼에도 정성껏 끓여낸 멸치 육수에, 찬물에 힘껏 빨아 전분기 없이 뽀얀 소면이 담긴 잔치국수가 목전에 있다면, 그것을 마다할 한국인은 없을 터이다. 잔치국수의 입지는 예전만 못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인생의 어느 순간 잔치국수로 인해 위로를 받은 기억이 하나쯤 있으리라. 뜨끈한 국물이 대접 가득 낙낙히 담겨 있다. 똬리를 튼 국수를 젓가락으로 살살 풀어 입에 넣으면 면발이 미끄러지듯 입안으로 빨려든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국수에 구수한 멸치 향이 진득하게 들러붙어 흡사 갯가에 나와 있는 듯하다. 눈앞에 푸르른 바다가 펼쳐진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잔치국수는 지금은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혼례나 회갑연 같은 잔칫날에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이런 풍속에서 ‘잔치국수’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 셔터스톡

온전함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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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함에 대한 고찰 『희랍어 시간』 한강 작, 데보라 스미스, 원 에밀리 애 번역 펭귄북스, 2024 160쪽, 9.99 파운드 온전함에 대한 고찰 우리는 서로 대화하고 주변 세상을 보는 능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능력이 없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예를 들어,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과연 생각할 수 있을까?『희랍어 시간』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의 실어증으로 인해 ‘뿌연 침묵’에 휩싸인다. 말을 찾게 되었지만, 이후 부분적으로 다시 실어증을 앓게 된다. 듣고 읽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할 수는 없다. 주인공은 다시 한번 침묵이라는 껍질에 싸여 주변 세계와 단절된다. 여기에 한 젊은 남자의 이야기가 주인공의 이야기와 엮이며 전개된다. 그는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다가 17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결국 앞이 안 보이게 될 운명이다. 가족들은 그의 귀국을 반대하고 걱정하지만, 그는 독일 유학 시절 배운 고대 희랍어를 가르치는 아카데미 강사로 생계를 이어간다. 말할 수 없는 여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언어를 통해 언어와 다시 연결되고자 남자의 수업을 듣는다. 서로와 온전히 소통하지 못한 채 이렇게 한 공간을 오가다가, 우연한 사고로 인해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가장 표면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희랍어 시간』은 상실에 대한 고찰이다. 주인공들은 그들의 신체적 능력을 잃어가는 것 외에도, 소중한 사람의 상실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낸다. 여자는 얼마 전 이혼하고 전 남편에게 양육권을 빼앗긴 후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괴로워한다. 남자는 독일에 있던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폭력과 실연을 당한 기억에 시달린다. 이미 잃어버렸거나 약화되고 있는 그들의 능력(즉 주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은 산산조각난 관계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의 기저에는 ‘온전함’에 대한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제는 죽고 없는, 남자의 친구 요아힘은 역시 신체적 아픔이 있었다. 그는 한때 “매 순간 죽음과 마주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삶에 대해 가장 잘 성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온전함의 의미를 가장 잘 관조할 수 있는 이들은 자신의 중요한 일부를 상실한, 그리고 세상과의 연결을 잃어버린 사람들일지 모른다. 상실과 결핍이라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희랍어 시간』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오랫동안 서로를 맴돌던 여자와 남자가 마침내 함께하게 되었을 때, 미래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듯 보인다. 주인공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손쉬운 해결책이나 간단한 해피엔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내일은 오늘보다 더 밝아 보인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김수현 작, 안톤 허 번역 펭귄북스, 2024 272쪽, 28.00 달러 “네 잘못이 아니야”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 김수현은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 잘못이 아니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떠난 여정 끝에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가 탄생했다. 부제는 ‘어른살이를 위한 체크리스트’라고 되어 있지만, 저자는 기존의 답답한 규칙 대신 또 다른 규칙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저자는 확실한 한국적 관점에서 한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써내려가면서, 유교적이고 집단주의적인 한국 사회를 개인주의적인 서구 사회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얼핏 마치 외부인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다행히도 실제는 그렇지 않다. 외국인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 저자의 조언 대부분은 보편적인 내용이다. 문화적 차이는 존재하지만, 사람은 결국 사람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누구나 희망, 두려움, 꿈, 불안을 느낀다. 어떤 것도 단순한 흑백논리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집단주의나 개인주의 같은 꼬리표는 사회 전반에 대해 적용하기에는 편리한 표현일 수 있지만, 개개인에 대해서는 그 특징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가리는 결과를 낳는다. 분명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 매몰되어 그로 인한 신경증에 시달리는 이 시대를 위한 것이다. 독자들은 출신 국가에 상관없이 현대 사회의 부담감을 해소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2 > 미역수염(Seaweed Mustache), CD, 김밥레코즈(Gimbab Records), 2024 창의적 콜라주 미역수염은 2014년 결성된 부산 출신의 4인조 록 밴드다. 2016년 발매한 미니 앨범 < The Whistle >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2022년 정규 1집 < Bombora >가 록 마니아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 무렵부터 한국의 헤비한 록 음악을 대표하는 밴드로 급부상했다. 두 번째 정규 음반 <2>는 1집에서 들려준 청각적 풍경을 확장시킨 명작이다. 음반 전체가 마치 성나게 덮쳐오는 파도 같다. 이 앨범의 주된 재료는 슈게이즈, 포스트메탈, 블랙게이즈 같은 장르들이다. 44분 동안 진행되는 여덟 곡에는 흉측한 불협화음과 황홀한 멜로디, 불분명한 노이즈와 선명한 속주(速奏)가 온통 뒤섞여 있다. 공존하기 힘들 듯한 이질적 요소들이 합체해 이율배반의 괴력을 뿜어낸다. 기타, 베이스, 드럼의 격렬한 총진격은 종종 가녀리게 끊어질 듯 미려한 곡선을 그려내는 보컬 멜로디를 만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포옹한다. 형이상학적 묘사, 서사, 나열로 점철된 불가사의한 영어와 한국어 가사도 흥미롭다. 첫 곡 < FALL >은 미역수염의 미학을 압축한 서곡이다. 광야를 울릴 듯한 공간감 속에서 베이스와 드럼의 느린 통타(痛打)로 시작되는 노래다. 남성과 여성의 보컬을 통해 전달되는 무기력한 멜로디가 분출하는 사운드 위로 황홀하게 짓이겨진다. 묵직한 리듬, 기타의 격정적인 트레몰로 연주, 한껏 증폭돼 지글거리는 노이즈가 멜로디 위로 불꽃놀이처럼 떨어진다. 이어지는 곡 < HEX >는 또 다르다. 듣는 이를 옥죄는 기타의 불협화음, 노랫말을 툭툭 랩처럼 뱉는 여성 보컬과 살벌하게 으르렁거리는 남성 보컬이 교차하며 새롭고 기이한 모자이크를 만든다. 후반부에 분출하는 고음의 기타 트레몰로 멜로디는 공포 영화의 기막힌 반전(反轉)처럼 기능한다. 극단적 음악을 구사하는 미역수염에게도 발라드 같은 노래가 있을까? 처연하기 이를 데 없는 여섯 번째 곡 < SWEETHOME >이 그 답이다. 판소리라는 소재에 한국적 한(限)의 정서를 버무린 임권택 감독의 1993년 개봉작 < 서편제 >가 만약 30여 년 만에 리메이크된다면? 그리고 그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이가 의 나홍진이나 < 파묘 >의 장재현 감독이라면? 그 주제가로 추천할 만한 트랙이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임희윤음악평론가

문화의 차이를 즐기다

Lifestyle 2025 SPRING

문화의 차이를 즐기다 고베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나리카와 아야(Aya Narikawa) 씨는 오랫동안 아사히신문 문화 담당 기자로 활동했다. 그런 그녀를 한국으로 이끈 것은 바로 한국 영화였다. 그녀는 최근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박사 과정을 마치고, 한국과 일본 양국의 문화를 전파하는 일에 한층 더 힘쓰고 있다. 아사히신문 기자에서 영화 칼럼니스트로 변신한 나리카와 아야 씨가 홍대 앞에 위치한 독립영화관 인디스페이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 달에 4편가량 한국 영화를 감상하는 그녀는 독립영화에도 관심이 많아 이곳을 자주 찾는다. 한 편의 영화를 두 번 이상 관람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나리카와 아야는 2021년 개봉 20주년을 맞아 재개봉한 한국 영화 < 고양이를 부탁해(Take Care of My Cat) >를 다시 보면서 생각했다.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딱 20대 초반 시절의 나와 닮았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이다. 오사카에서 태어나 고치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녀는 일본을 떠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가족과 멀어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나로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나리카와 씨는 가까운 나라인 한국에서 그 바람을 이뤘다. 2002년에는 어학 연수생, 2005년에는 교환 학생으로 서울을 찾았던 그녀는 9년간 기자 생활을 했던 아사히신문을 떠나 2017년 한국에 정착했다. 오랜 시간 그녀를 사로잡은 한국 영화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가교 역할 나리카와 씨는 영화관을 운영했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함께 영화 감상을 즐겼고, 어학 연수를 계기로 한국 영화에 깊이 빠져 버렸다. 문화 담당 기자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일본에 방문한 한국 영화인들을 인터뷰하거나 그들의 통역을 도맡기도 했다. 한국어에 능통한 일본인이자 한국 영화 팬으로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갈증이 있었다. “한국 드라마와 K-Pop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그에 비해 한국 영화에 대한 일본 대중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어요. 일본에서 < 설국열차(Snowpiercer) >가 개봉했을 때 제가 봉준호 감독을 인터뷰했는데, 봉준호 감독이니 기사를 크게 실어줘야 한다고 부탁하자 그게 누구냐고 묻던 아사히신문 데스크의 반응에 실망했던 기억이 나요. 한국 영화를 마음껏 깊이 취재할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직접 탐구를 시작해 보자는 마음으로 한국 유학을 결심했어요.” 주변에서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학생으로 돌아가겠다는 그녀의 선택에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나리카와 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영화로 배운 한국 나리카와 씨는 자신의 사연에 흥미를 느낀 한국 기자의 제안을 받아 수년째 중앙일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일본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 문화 이야기를 쓴다. 경기도 일산에 거주 중인 그녀는 부산, 전주, 제천 등 한국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다가 겪은 일에 대해서도 적었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아끼는 지역은 제주라고 한다. 제주도는 자연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상흔도 간직하고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최근 나리카와 아야 씨가 한국과 일본에서 펴낸 책들. 그녀는 한국에서 일본 책과 영화를 소개하는 북카페를 운영하는 것이 꿈이다. 그녀는 제주 해변에서 돌고래를 목격한 것도 행복했지만, 일본에서 온 가족들과 함께 4·3평화기념관(Jeju 4·3 Peace Memorial Hall)에 다녀온 일도 뜻깊었다고 한다. 이창동 감독의 < 박하사탕(Peppermint Candy) >(2000)으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처음 접했고, 오멸 감독의 < 지슬(Jiseul) >(2013), 류승완 감독의 < 군함도(The Battleship Island) >(2017), 장준환 감독의 < 1987 >(1987: When the Day Comes)(2017) 같은 영화를 보며 한국 현대사의 맥락을 익힌 그녀는 무작정 역사를 공부하는 것보다 재밌는 영화를 통해 다른 나라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이 더 효과적인 공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덕분에 그녀는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에서 재일코리안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연구소 주최로 ‘재일코리안 영화제’를 개최하며 뿌듯했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2025년 2월, 나리카와 씨는 마침내 박사 과정까지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했다. 박사 논문 주제는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영화 교류 양상 연구(South Korea-Japan Film Exchanges Since the Normalization of Diplomatic Relations)’였다. 한국과 일본의 다양한 매체에 한국 영화와 관련한 글을 기고하고, 방송에 출연해 양국의 문화를 알려온 그녀다운 선택이었다. 이 논문에는 재일코리안 촬영 감독 이병우(Lee Byung-woo), 일본의 한국 영화 배급사 시네콰논(Cinequanon) 대표 이봉우(Lee Bong-woo) 등의 사례도 언급된다. 모두 양국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던 시절부터 활동해 온 인물들이다. 나리카와 씨는 “지금보다 상황이 어려웠을 때 양국 교류에 나섰던 사람들이 택한 방법을 알아가면서 현재의 나도 해낼 수 있으리라는 용기를 얻었다”라고 곱씹었다. 논문 집필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아사히신문 선배 기자와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이병우 촬영 감독의 손녀를 만난 일이다. 재일코리안 영화인들에 관한 기록이 부족해 연구가 쉽지 않던 차에 이병우 씨의 손녀에게 귀중한 자료들을 전달받은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 “기자 생활을 하며 쌓았던 내공 덕분일까요? 제가 만나야 할 사람, 필요로 하는 자료가 있을 때 우연히 제 앞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일들이 한국 생활에도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북카페의 꿈 논문이 무사히 통과된 다음, 나리카와 씨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도쿄에 다녀왔다. 2020년 한국에서 출간된 후 2024년 10월 일본에서도 출간된 저서 『어디에 있든 나는 나답게』의 북토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나리카와 씨가 한국에서 써온 칼럼들을 묶어서 펴낸 책이다. 행사가 열린 공간은 ‘독서가의 거리’로 알려진 진보초의 한국 책 전문 서점 ‘책거리(Chekccori)’였다. 이날 서점 스태프들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양국의 문화를 전파 중인 나리카와 씨에게 근사한 상장을 만들어 선물했다. 상장에는 그녀에게 항상“차이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돼라”고 당부했던 어머니의 말도 인용되어 있었다. 나리카와 씨는 북토크 자리에서 많은 독자들에게 응원을 받았다. 그녀는 독자들의 질문을 듣고 5년 후 계획을 고민해 봤다고 한다. “‘책거리’의 반대 버전, 그러니까 한국에서 일본 책과 영화를 소개하는 북카페를 운영해 보고 싶어요. 그곳에서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한 독립영화 상영회도 열고 싶고요. 이렇게 말하다 보면 도와주는 사람이 또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리카와 아야 씨가 운영하는 온라인 사이트. 영화 칼럼을 비롯해 신문에 연재하는 기사들과 자신의 일상 이야기를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있다. 자신만의 북카페를 상상하며 미소 짓는 나리카와 씨는 이제 자신을 걱정하던 일본 친구들에게서도 “정말 즐거워 보인다”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녀는 “일부러 즐거워 보이려고 애쓴 적이 없는데도 그런 말을 자주 들어서 신기하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말과 글로 나누는 동안 자연스럽게 웃는 법을 배운 것은 아닐까? “타지에서의 삶이 어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에요. 그렇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위해 한 발짝 나가본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어요. 한번 해보고 나면 기대한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수 있어요!” 나리카와 씨는 작은 도전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고른 책들이 진열된 공간에서 신선한 일본 영화를 감상할 날이 매우 기다려진다.

전쟁이 남긴 푸짐한 맛, 부대찌개

Lifestyle 2024 WINTER

전쟁이 남긴 푸짐한 맛, 부대찌개 부대찌개는 한국전쟁 이후 생겨난 음식이다. 전쟁 이후 세 끼는 고사하고 한 끼도 제대로 먹기도 힘든 가난했던 시절 등장한 부대찌개는 푸짐한 양으로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선사했다. 양만이 아니었다. 서양의 식재료를 한국인의 손맛으로 풀어낸 맛도 일품이었다. 김치, 고추장 등의 한국 식재료와 햄과 소세지, 베이크드빈 등의 서양 식재료를 더해 만든 부대찌개는 동서양의 식문화 조합이 돋보이는 음식이다. 한 국가의 식문화가 고유성을 확립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동한다. 기후, 토질 등이 선천적 요소라면, 역사적 사건이나 자연재해 등은 후천적 요소다.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엔 전쟁이 있다. 전쟁이 전 세계 식문화를 바꾼 사례는 넘치고도 남는다. 끓는 물에 각종 채소와 소고기, 양고기 등을 넣어 살짝 익혀 먹는 샤브샤브는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가 세계 정복에 나서면서 퍼진 음식이다. 나폴레옹이 질 좋은 식량 보급품 마련을 위해 개발을 독려해 태어난 게 통조림이다. ‘부대’에서 시작한 맛 한국에도 이와 유사한 음식이 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이후 생긴 부대찌개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커다란 상흔을 남겼다. 남북으로 나뉜 한반도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체제가 공존하는 땅이 됐다. 남한엔 종전 후에도 미군이 의정부, 파주, 평택(송탄) 등 여러 지역에 주둔하게 된다. 부대찌개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바로 이 미군 부대와 관련이 있다. 부대찌개는 육수에 햄, 소시지, 베이컨, 베이크드 빈스, 다진 고기, 김치 등을 넣고 고추장으로 맛을 낸 매콤한 양념을 섞어 끓인 음식이다. 여기에 라면까지 넣으면 감칠맛이 두 배가 된다. 조선시대엔 없었던 부대찌개는 어떻게 한국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 되었을까. 부대찌개 원조집 중 하나로 알려진 의정부 오뎅식당의 역사를 들추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오뎅식당의 창업주는 1960년부터 포장마차에서 부대찌개를 팔았다. 창업 초창기부터 부대찌개란 메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뎅식당 누리집에 있는 기록을 보면, 당시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던 이가 가져다준 햄과 소시지, 베이컨으로 볶음 요리를 만들어 팔았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단골들은 밥과 함께 먹을 만한 국물 요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주인장은 고민 끝에, 기존에 팔던 볶음 요리에 물을 붓고 김치와 고추장 등을 넣어 찌개를 만들었다. 부대찌개가 탄생한 것이다. 고기 맛과 진배없는 소시지나 햄, 베이컨은 사람들 입맛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매콤한 국물은 밥을 말아 먹기에 충분했다. 단박에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몰렸다. 오뎅식당이 인기를 끌자, 인근에 부대찌개 식당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과 같은 ‘의정부 부대찌개 골목’이 생겨난 사연이다. 2009년, 이 지역은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로 지정됐다. 부대찌개 명가들이 몰려있는 지역 대부분은 미군 부대 인근이다. 경기도 의정부, 동두천, 평택(송탄), 전북 군산, 서울 용산 등에는 맛이 조금씩 차이 나는 부대찌개 식당들이 즐비했다. 한편, ‘존슨탕’이라고도 불렸다. 1966년 방한한 미국 대통령 린든 베인스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1973) 의 이름을 땄다는 설이 유력하다. 부대찌개가 처음 만들어진 경기도 의정부에 위치한 부대찌개 거리. 매년 이 거리에서 부대찌개 축제가 열린다. ⓒ 의정부시 상권활성화재단 맛을 완성하는 재료 서양에선 소시지나 햄을 구워 먹거나 빵 사이에 넣어 먹는다. 이걸 국물에 넣어 익혀 국물과 함께 먹는 일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한국인에게 국물 요리는 식사에 필수적인 존재이다. 부대찌개의 넉넉한 국물 안에서 익은 소시지나 햄은 쫄깃하면서도 부드럽다. 또 소시지나 햄 특유의 기름진 맛이 국물에 스며든다. 여기에 베이크드 빈즈와 김치야말로 부대찌개의 간판 얼굴이다. 풍미를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시지와 햄의 쫀득한 식감에 지칠 때쯤 만나는 푹 익은 콩 요리는 혀의 쉼터가 되어줬다. 보드라운 질감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맛이다. 푹 익은 매콤한 김치는 부대찌개의 맛을 진두지휘 하는 장군 역할을 한다. 김치가 맛이 없으면 제아무리 다른 재료가 좋아도 부대찌개 특유의 맛이 안 난다. 식당에 따라선 라면이나 두부를 넣기도 한다. 치즈가 올라가는 식당도 있다. 라면은 탄수화물만이 줄 수 있는 넉넉한 포만감을 제공한다. 숟가락으로 들어 올릴 때마다 쭉쭉 늘어지는 치즈는 별미다. 치즈를 넣어 독특한 맛을 내는 한식이 부대찌개뿐이겠는가. 닭갈비, 등갈비 요리, 떡볶이 등 우리 전통 한식에 색다른 맛을 내려고 할 때 종종 출동하는 게 치즈다. 푸짐한 양과 다채로운 토핑, 감칠맛이 일품인 부대찌개는 김치찌개, 된장찌개 못지 않은 인기 메뉴이다. ⓒ 셔터스톡 특색 있는 부대찌개 노포 한국에서 부대찌개 명가는 어디일까. 부대찌개 식당은 동네마다 3~4개 이상 있을 정도로 많다. 프랜차이즈 부대찌개 식당도 전국에 퍼져있고 편의점에만 가도 시판 부대찌개 제품이 있다. 하지만 탄생 역사를 새기며 먹을 만한 곳은 역시 노포다. 더구나 부대찌개는 지역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 ‘OOO파’ 식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선 ‘의정부파’부터 살펴보자. 이 파의 수장은 3대째 맛을 이어오고 있는 오뎅식당이다. 양념이 이미 진하게 배여 있는 볶음 요리에서 출발한 찌개다. 달짝지근한 맛을 내는 베이크드 빈스가 들어가지 않는 게 특징이다. 이런 이유로 담백한 맛이 장점으로 꼽힌다. 의정부 부대찌개에 견줄만한 상대는 ‘송탄파’다. 그런데 현재 ‘송탄’은 행정구역상 없는 지역이다. 1995년 평택시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송탄식 부대찌개의 가장 큰 특징은 육수를 사골로 우린다는 점이다. 사골 육수라서 전체적으로 맛이 진하고 걸쭉하다. 치즈도 올라간다. 소고기 다짐육과 대파 등 고기와 채소가 한데 어우러져 풍미를 그윽하게 한다. ‘최네집 부대찌개’와 ‘김네집’, ‘황소집’, ‘땡집’ 등이 이 지역 부대찌개 노포로 알려져 있다. ‘최네집 부대찌개’는 1969년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친구들이 당시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던 주인장에게 권유해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가네’는 주문 시 이 가게만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소시지와 햄 추가는 첫 번째 주문에서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이미 졸아든 육수에 추가한 소시지와 햄이 짠맛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라면을 넣는 시간도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반쯤 끓었을 때 넣어 먹어야 면의 익힘과 맛이 가장 좋다고 한다. ‘황소집’도 한우 사골로 육수를 우린다. 다른 송탄파 부대찌개에 견줘 덜 맵다는 평이다. ‘파주파’는 부대찌개 양대 산맥인 ‘의정부파’와 ‘송탄파’에 견줘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채소가 다른 지역 부대찌개에 비해 많이 들어가 팬층을 확보했다. 쑥갓이 푸짐하게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사골 육수가 아니라서 국물이 상대적으로 담백한 편이다. ‘원조 삼거리부대찌개’가 이 지역 대표 노포다. 5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1990년대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정미식당 부대찌개’도 이 지역 부대찌개 강자다. ‘군산파’는 소고기로 육수를 내는 게 특징이다. 마치 평양냉면집처럼 얇게 썬 소고기가 올라간다. 1984년 문 연 ‘비행장정문부대찌개’가 이 지역 부대찌개 노포다. 독특하게 햄버거도 판다. 부대찌개와 햄버거를 함께 먹는 여행자가 많다. 서울은 부대찌개 강자가 많은데, 그중에서 용산 이태원에 있는 ‘바다식당’을 으뜸으로 친다. 이곳은 1970년대부터 영업해온 곳으로, 메뉴판에 부대찌개 대신 ‘존슨탕’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부대찌개는 한국인의 창의력이 반영된 한식이다. 시대의 참혹한 현실에 조응해 탄생한 부대찌개. 사람들은 여전히 이 얼큰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으로 과거 역사의 상처를, 오늘날 고단한 삶을 위로받고 있다. 박미향(Park Mee-hyang, 朴美香) 음식 저널리스트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세대를 거쳐 이어온 투쟁

Lifestyle 2024 WINTER

세대를 거쳐 이어온 투쟁 『 철도원 삼대 』 황석영 작, 김소라/배영재 번역, 486쪽, 16.99 파운드, 스크라이브 퍼블리케이션즈(2023) 세대를 거쳐 이어온 투쟁 『철도원 삼대』는 일제강점기의 철도처럼 한국 근대사를 꿰뚫고 있다. ‘기차’하면 떠오르는 낭만적인 감성과 달리, 철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억은 쓰라린 비극으로 가득하다. 철도는 많은 것을 상징한다. 멈출 수 없는 근대 사회의 힘, 불과 철을 동력으로 삼아 밝은 미래로 질주하는 모습, 사람과 장소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연결성의 시대 등이다. 하지만, 소설 속 한 인물의 표현처럼, 한국의 철도는 “조선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맹글어진”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철도 부지를 만드느라 집에서 쫓겨나야 했고, 선로 작업에 동원되어 노동 착취를 당했다. 영문본 제목(『Mater 2–10』)은 당시 사용된 전설적인 기관차의 모델명이다. 소설은 민족 분단의상징이 된 기관차를 제목으로 삼음으로써, 또 다른 비극의 단면을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이진오가 공장 폐업에 항의하며 농성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물리적 세계는 우뚝 솟은 공장 굴뚝 꼭대기로 한정되어 있지만, 자신의 기억, 그리고 할머니와 친척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회상하며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이진오의 가족은 한반도 철도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증조부 이백만은 어릴 적에 기차를 보고 첫 눈에 반해, 아들의 이름을 각각 일철(한쇠), 이철(두쇠)로 지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회와 착취라는 철도의 양면성을 상징하듯 서로 엇갈린 행보를 보인다. 형 일철은 철도 종사원이 되어 기관수 자리까지 올라, 경제적으로는 여유롭지만 일제의 억압에 시달리며 그들의 입맛대로 맞춰야 하는 삶을 살게 된다. 반면, 동생 이철은 공산당원을 만나 노동운동가가 되어, 끊임없이 경찰에 쫓기는 신세임에도 정직한 양심을 갖고 살아간다. 결말이 명쾌하게 정리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이진오가 사측에 맞서 농성을 벌이는 모습은 식민지 시대와 해방 후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국내 노동자들이 이어간 투쟁을 상기시킨다.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이래 투쟁의 역사는 계속되어 왔다. 이진오는 결국 자신도 무대에서 하나의 배역을 맡은 배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하기로 결심한다. 『철도원 삼대』는 과거를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발견해낸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한 가지 언급할 것이 있다. 문학 번역은 매끄럽고 튀지 않아야 (즉, 순화 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대표적이지만, 이 작품의 번역자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지워버리지 않기 위해 친족 호칭과 지위 등 원문의 특정 요소들을 그대로 살렸다. 결과적으로는 독자에게 너무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한국적인 용어의 사용으로 훨씬 더 풍부한 내러티브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작, 안선재/김지형 번역, 278쪽, 28달러, 하와이대출판부(2024) 전 세계의 노동자들을 위한 목소리 1984년 27세의 한 공장 노동자가 박노해라는 필명으로 시집을 출간했다(‘노해’는 문자 그대로 ‘노동자의 해방’을 뜻한다). 군사정권의 금서 조치와 저자를 밝히기 위한 경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100만 부 가까이 판매되었다. 『노동의 새벽』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전에 발표된 매우 의미 있는 작품으로, 40년이 지나서 발표된 영문판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울림을 준다. 박노해의 시는 노동자의 글 답게 담백하고 소박하다. 화려한 기교 없이, 평범한 노동자의 담담한 언어가 시인의 감정과 경험을 빛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권력자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고, 빈부 격차의 문제를 고발하며, 평화로운 삶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갖고,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 박노해 시인의 작품에 독자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대한민국 노동자들을 위한 밝은 새벽을 꿈꾸고 있다. 국내 독자들이 영문본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원문 전체가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에 실린 두 편의 글은 박노해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설명을 제공한다. 지금도 곳곳에서 투쟁하고 있는 억압받는 이들에게, 박노해 시인의 이번 영문본 작품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힘이 되어 주기를 기대한다. 한국의 문화 및 자연 유산을 만나다 국가유산진흥원 https://www.kh.or.kr/visit/en 한국의 문화 및 자연 유산을 만나다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은 한국의 유•무형 자연, 문화유산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코스를 소개한다. 홈페이지를 통해 북쪽의 강원도부터 남쪽의 제주도까지 전국의 75개 국가유산을 체험할 수 있는 10가지 방문 코스를 만날 수 있다. 선사시대, 민속 음악, 사찰, 유교 문화 등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방문 코스를 통해 일반적인 관광지를 넘어선 새로운 경험을 해보길 바란다. 홈페이지에서는 운영 시간, 입장료, 상세 길 안내 등 75개 국가유산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며, 가이드북과 지도도 다운로드 할 수 있다. 외국인 방문객은 각 코스 체험을 기록할 수 있는 ‘여권(스탬프북)’을 인천공항 여행자 센터에서 신청해 캠페인에 참여할 수 있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가족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

Lifestyle 2024 WINTER

가족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 낯선 도시에서 실패 없는 식사를 하려면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라는 말도 있다. 어디로든 이동이 가능한 기사들은 곳곳에 위치한 가성비 좋은 음식점들을 훤히 꿰고 있을뿐더러 시간과 경험을 바탕으로 검증된 리스트이니 신뢰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감나무집 기사식당’은 맛집에 밝은 기사들의 발길이 밤낮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감나무집 기사식당 주인 장윤수 씨가 손님상에 내 놓을 음식을 서빙하고 있다. 한국에서 기사식당은 말 그대로 기사, 그중에서도 택시 기사들을 위한 식당이다. 기사들을 주 고객으로 맞이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우선 차를 댈 수 있는 넉넉한 주차 공간이 필요하다. 메뉴는 다양할수록 좋지만, 시간이 걸리면 곤란하다. 직업의 특성상, 새벽이나 밤중에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저렴한 가격, 푸짐한 양, 변함없는 맛이 더해져야 한다. 365일, 24시간 열려있는 식당 감나무집 기사식장의 주인인 장윤수(張倫秀) 씨의 하루의 시작은 매일 다르다. “새벽부터 나올 때도 있고, 시장을 가는 날이면 좀 늦을 때도 있고. 시간을 정해두고 일을 하지는 않아요. 집에서 잠시 쉴 때도 모니터로 가게를 수시로 들여다봐요. 모니터링하다가 손님이 많다 싶으면 만사 제쳐두고 냅다 뛰어가죠.” 한국의 기사 식당은 주차장 구비, 푸짐한 한 상, 빠른 회전 등이 특징이다. 주차장, 식당, 살림집이 나란히 붙어 있는 구조다. 일과 휴식을 분리할 수 없는 이 구조는 장 씨에게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집이 가까워야 통제가 돼요. 바쁘다고 호출하면 금방 갈 수 있으니까. 24시간 전천후지.” 한 번에 70여 명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은 점심식간이면 순식간에 만석이 된다. 연중무휴, 24시간 영업 중인 감나무집이 문을 연 건 25년 전이다. “다른 데서 한정식집도 하고, 갈빗집도 했는데 잘 안됐어요. 다 털어먹고 집으로 들어왔지. 여긴 우리 집이니까. 처음에는 함바집(건설 현장에 임시로 지어 놓은 식당)을 했어요. 일꾼들이 일을 일찍 시작하니까 우리도 새벽 장사를 했는데 그러다 보니 근처를 오가던 택시 기사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 사람들이 더 늦게까지 장사하면 좋겠다고 해서 24시간 문을 열기 시작한 거죠.” 언제 찾아가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데다 값은 저렴하고 음식은 맛있다. 국과 반찬도 매일 바뀐다. 당연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근처에 기사식당이 많았는데 순댓국, 설렁탕 같은 단일 메뉴만 있었어요. 우리는 백반집이었지. 당시 기사들은 대부분 형편이 좋지 않고 맞벌이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일하다 보면 집에서 밥을 못 챙겨 먹으니까, 집밥이 그리웠겠죠. 사 먹는 음식은 혼자 먹기도 어렵고, 비싸기도 했으니까요. 여기 오면 미역국, 된장국, 콩나물국처럼 집에서 늘 먹는 국과 반찬이 있으니까 좋아하더라고요.” 집에서 먹던 음식 그대로 장윤수 씨의 고향은 충청도이다.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대가족 속에서 살았다. 농사를 크게 짓느라 집은 언제나 일꾼들과 가족들로 북적거렸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할머니와 어머니는 늘 주방에서 밥을 짓고, 김치를 담그고, 나물을 무쳤다. “맨날 다듬고 무치고, 그거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어요. 친구들이 놀러 오면 배추 뽑고 오이 따서 잘라보고 무쳐보고 짜다, 싱겁다, 이거 넣어보자, 저거 넣어보자면서 놀았죠. 국물 내고 밀가루 반죽해서 칼국수도 만들고…. 어른들이 먹어보고 맛있다고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어요. 엄마가 가서 공부하라고 혼내면 도망 다니고…. 재미있는 게 따로 있는데 공부가 되겠어요? 나는 요리사하고 음식 장사 하련다, 그거 하면서 재미있게 살련다, 생각했죠.” 집에서 해 먹던 음식 그대로 만들어 손님에게 내놓는다. 강원도에서 농사지은 콩으로 된장도 직접 담근다. 감나무집의 인기 메뉴인 돼지불백과 오징어볶음 “기사들에게 빨리 내놓을 수 있는 음식, 그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 저렴하지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뭘까 하고 연구 많이 했어요. 그래서 나온 게 돼지불백이죠.” ‘돼지불백’ 즉 ‘돼지불고기백반’은 이곳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이다. 메인 메뉴인 돼지불고기를 푸짐하게 쌈 싸 먹을 수 있게 상추, 배추같은 야채도 함께 낸다. 여기에 밑반찬 서너 가지와 계란프라이, 잔치 국수가 쟁반에 함께 나온다. 밥이 가득 담긴 밥솥이 식당 한쪽에 있어 추가로 주문하지 않아도 밥을 양껏 먹을 수 있다. 메인 메뉴인 돼지불고기를 제외한 나머지 반찬과 국 등도 리필할 수 있다. 식사 후에는 자판기의 무료 커피와 건빵으로 입가심도 할 수 있다. 연말에는 택시 안에 놓아둘 수 있는 작은 달력을 만들어 나눠준다. “전에는 눈대중, 손대중으로 내가 간을 보면서 만들었는데, 우리 아들이 군대 가기 전에 내 레시피를 다 문서로 만들었어. 옛날 맛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거지.” 레시피와 일일 판매량은 ‘일급비밀’이다. 집 같은 식당, 가족 같은 손님 이전에는 감나무집을 찾는 손님은 단연 기사들이 많았는데, 요즘엔 일반인들의 비중이 훨씬 많다. 다양한 반찬을 맛볼 수 있는 백반집이 점점 사라져 있는 요즘, 집에서 해 먹는 것보다 가성비 있게 즐길 수 있어 젊은이들이나 아이가 있는 가족들도 많이 찾는다. 또 한국의 집밥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외국인 여행객들도 많이 찾는다. 장윤수 씨의 하루는 손님이 많은 때와 적은 때로 나뉜다. 매일 새벽 시장을 봐서 가게로 온다. 바쁜 아침 시간에는 식사를 거르고 손님이 뜸해지는 오후 두 시경에 점심을 먹는다. 세 시부터 일곱 시까지는 가능하면 휴식을 취한다. 휴대전화를 잠깐 들여다보고 모자란 잠을 보충한다. 주말 저녁 시간이 제일 바쁘다.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손님의 행렬이 새벽까지 이어진다. 주방과 홀을 오가며 손님들의 상을 살피면서 부족한 것은 채우고 필요한 것은 가져다준다. 어떤 걸 잘 먹는지, 무엇을 남기는지 체크하여 더하고 덜할 반찬을 정한다. 밤 열 시쯤 늦은 저녁 식사를 한다. 최근에는 택시기사뿐만 아니라 집밥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 한국의 집밥을 체험해보고자 하는 외국인 등 다양한 손님이 24시간 방문하고 있다. 평일에는 새벽 한 시쯤 식당을 나서지만 주말에는 새벽 서너 시가 되어서야 손을 털 수 있다. 남편은 함께 장을 보고 바쁜 시간이면 주차장도 관리한다. 엄마를 닮아 요리를 좋아하는 아들은 든든한 동지가 되어 함께 일한다. 일일 2교대 또는 3교대로 일하는 직원은 스무 명이 넘는데 십 년 넘게 일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모두가 가족이고 ‘한집에서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하는’ 식구이다. 집밥을 먹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까지. 돼지불백, 순두부찌개, 생선구이 세 가지로 시작한 메뉴는 이제 열 가지로 늘었다. 다양한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기사들을 위해 줄기차게 연구한 결과물이다. “후회는 안 해요. 지금도 요리하는 거 좋아하고,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그렇게 행복해요. 여기에 밥 먹으러 오는 이들도 나한텐 식구나 다름없어요. 가족 밥 해 먹이는 일이 이렇게 좋아. 난 피곤한 줄도 모른다니까.” “돼지불백 하나요!” 성미 급한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앉기도 전에 외친다. 장윤수 씨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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