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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한국에서 와인을 빚는 프랑스 농부

In Love with Korea 2023 AUTUMN

한국에서 와인을 빚는 프랑스 농부 프랑스인 도미니크 에어케(Dominique Herqué) 씨에게 한국은 꿈을 이뤄가는 나라다. 땅을 살리는 방법으로 농사를 짓고, 그 결실들로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와인을 제조하며 산다. 그는 한국인 아내 신이현(Shin Ihyeon) 씨와 함께 프랑스 알자스를 닮은 한국의 ‘작은 알자스’에서 꾸리는 이 삶이 참 좋다고 말한다. 프랑스 알자스에서 태어난 도미니크 씨는 오랜 세월 엔지니어로 일하다 와인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농업 대학에서 양조학을 전공하고 알자스 와이너리에서 경험을 쌓았다. 아내와 한국으로 들어온 후 충청북도 충주에 내추럴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 ‘작은알자스’를 만들었다. 도미니크 에어케 씨가 있는 작은 알자스는 고요한 듯 고요하지 않다. 마당에선 풍경(風磬 작은 종)이 쉼 없이 울려대고, 밭에선 새와 닭과 거위가 수시로 울어댄다. 하지만 전혀 시끄럽지 않다. 자연 속의 소리는 소음보다는 음악에 가깝다. 숲과 같은 포도밭 귀마저 즐거운 ‘작은 알자스’는 수안보온천(水安堡溫泉)으로 유명한 충북 충주시(忠州市) 수안보(水安堡)면에 있다. 뒤론 산이 있고 앞은 탁 트여 있어, 평온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도미니크 에어케 부부가 ‘첫눈에 반했던’ 이 땅은 프랑스 알자스와 비슷한 데가 많다. 알자스(Alsace)는 도미니크 씨의 고향이다. 프랑스 최북단에 자리한 와인 생산지로, 산 밑 언덕배기에 포도밭이 많다. 흙도 까맣고 볕도 깊다. 그가 지금 있는 이곳도 마찬가지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새 인생을 시작했지만, 이곳에서 그는 자주 고향을 느끼며 산다. “2017년에 여기로 왔어요. 한국에서 농사도 짓고 와인도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아 1년간 전국을 둘러봤는데,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어요.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이 땅을 만났어요. 보자마자 ‘여기다’ 싶었죠.” 도미니크 씨는 아내와 가꾸는 약 4,000㎡의 농토를 ‘숲과 같은 포도밭’이라 부른다. 이들의 밭엔 10여 종의 포도나무와 30종 안팎의 사과나무가 있다. 다양한 와인 맛을 내기 위해 다양한 품종의 포도와 사과를 재배하고 있다. 이 밭에 심은 건 포도나무와 사과나무만이 아니다. 복숭아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무화과, 보리수, 키위, 라벤더…. 부부는 제초제나 살균제 같은 화학성분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퇴비’가 되어줄 100여 종의 식물을 주위에 빼곡하게 심어 놨다. 닭과 거위가, 벌과 지렁이, 온갖 미생물이, 서로를 이롭게 하며 더불어 살아간다. 그와 아내는 어떻게 하면 와인을 더 맛있게 만들까보다, 어떻게 하면 땅을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더 많이 고민한다. 좋은 와인은 잘 지은 농사에서 오고, 좋은 과일은 비옥한 땅에서 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그는 익숙한 프랑스식 농사법을 따른다. “한국인들이 절기(節氣 한 해를 스물넷으로 나눈, 기후의 표준점)에 맞춰 농사를 짓는다면, 우리는 행성달력(행성의 움직임에 맞춰 농사를 짓는 달력)에 맞춰 농사를 지어요. 우주의 모든 행성은 매일 움직이고, 그 움직임에 따라 식물의 반응이 달라지거든요. 열매에 좋은 날, 뿌리에 좋은 날, 잎에 좋은 날, 꽃에 좋은 날이 따로 있어요. 오랜 세월 축적한 삶의 지혜를 기꺼이 따르고 있죠.”   와인 한 병에 담긴 자연 오크통에서 숙성하고 있는 레돔 내추럴 레드 와인 그들은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맛있는 과일을 얻기 위해 농약이나 퇴비를 쓰지 않고 건강하게 땅을 일구며 다양한 과수나무와 거위, 닭, 지렁이를 키워 땅속 미물까지 함께 돌본다. 그렇다고 달력에만 의지하진 않는다.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날씨엔 농부가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그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꼼꼼히 검토하며 농사짓는다. 예컨대 풀을 깎아놓았는데 며칠 후 꽃샘추위가 들이닥치면 갓 나온 싹이 모두 얼어버리고, 풀을 안 깎았는데 장맛비가 내리면 벌레들이 떼 지어 몰려든다. 그간의 실패가 그에게 알려준 소중한 경험들이다. 매년 같은 일을 하지만, 도미니크 씨는 단 한 해도 같은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믿고 있다. “땅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라 처음 한두 해는 참 힘들었어요. 거리의 낙엽들을 차에 꽉꽉 채워 오고, 동네 깻단을 죄다 모아와 밭에 뿌렸어요. 해마다 왕겨 5톤씩을 밭에 집어넣었고요. 그렇게 3년쯤 지나니 땅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모습으로 회복되었어요.” 사과로 만드는 내추럴 시드르는 작은알자스의 대표 상품으로, 레돔이라는 이름은 도미니크의 애칭을 따 이름 붙였다. ‘작은 알자스’에서 생산하는 와인은 사과를 발효시켜 만드는 시드르(Cidre, 영어로는 사이더 Cider), 포도로 빚은 로제와 산머루를 섞어 빚은 레드와인이다. 첨가제는 물론 효모도 넣지 않는다. 말 그대로 ‘내추럴 와인’이다.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는 대신 ‘그 해의 모든 것’이 담긴다. 나무들을 키운 햇볕과 바람, 농부의 땀과 고민까지 와인 한 병에 고스란히 실린다. 발효 시간까지 합하면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그의 와인을 마시는 일은 그가 만난 자연과 교감하는 일이다. “와인 브랜드가 레돔(LESDOM)이에요. ‘Le’는 불어로 복수를 뜻하고 ‘Dom’은 저의 애칭입니다. ‘도미니크 가(家)’란 뜻이에요. 이젠 여기가 제 고향이에요.” 도미니크의 아내 신이현 씨는 소설가다. 1994년 「숨어 있기 좋은 방」이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하며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도미니크 씨가 아내를 처음 만난 건 1998년 프랑스 파리에서다. 당시 도미니크 씨는 파리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었고, 신이현 씨는 프랑스에서 1년쯤 살아보는 꿈을 이루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이 모두 아는 베트남 부부가 집들이에 두 사람을 초대했다. 도미니크 씨와 신이현 씨는 만나자마자 서로 호감을 느끼고 연애를 시작했고. 파리에서 1년만 살아보려던 신이현 씨의 계획은 변경됐다. 2003년 결혼식을 올린 뒤 파리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그러다 도미니크 씨가 캄보디아 회사로 가게 되면서 6년간 캄보디아 생활을 했고, 이후 그가 한국의 대기업으로 파견되면서 아내의 나라인 한국에서 처음 살아보게 됐다.   한국에서 시작된 제2의 인생 숙성 중인 레드 와인을 점검 테이스팅 하는 도미니크 씨. 그는 누구나 떠올리는 정형화된 맛을 추구하기보다는 과일이 자란 땅의 성격과 맛을 와인 한 병에 그대로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첫’ 한국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당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 자신이 맡은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땐 일에 허덕이느라 삶을 돌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론 매우 고마운 시기예요. 농부가 되는 꿈을 갖게 해줬으니까요. 알자스에서 평생 포도 농사를 지으신 외할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포도밭을 나눠주시면서, 어릴 때부터 저는 포도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포도밭에서 자주 놀았고, 포도 수확기 때마다 농사일을 거들곤 했죠. 언젠가부터 그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더라고요. 한국에서 그 그리움이 꿈으로 이어졌네요.” 농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미니크는 다시 파리로 갔다. 프랑스농업대학(Centre National d'Enseignement Agricole par Correspondance)에서 2년간 공부한 뒤 와인 양조장에서 1년간 일을 배웠다. 이제 농부가 될 차례였다. 처음에 그는 프랑스에서 포도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다. 남프랑스 곳곳을 돌아다니고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곳도 찾아냈지만, 이번엔 아내가 망설였다. 프랑스에선 파리 외의 지역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그녀가 처음으로 타국살이를 두려워했다. “아내가 한국으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한국엔 제대로 된 시드르 생산지가 없으니, 우리가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요. 그때 저는 농사를 지을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좋았어요.” 2016년 한국으로 다시 왔고, 이듬해 지금의 땅을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보낸 지난 6년이 그저 꿈만 같다. 한여름 포도밭의 풀을 깎을 때도, 한겨울 포도나무 가지를 칠 때도, 그는 더위나 추위보다 즐거움을 더 많이 느낀다. 프로그래머로서 한국에 살 때는 미처 몰랐던 기쁨이 매일 새롭게 그에게 찾아온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이 나라를 그는 농사를 통해 하루하루 알아가고 있다. 그에게 한국은 꿈을 이루게 해준 아주 고마운 나라다. “지금의 ‘작은 알자스’는 지난해 새로 지은 건물이에요. 양조를 위해 지은 건데, 짓다 보니 애초 생각보다 규모가 커졌어요. 공간이 커진 만큼 쓰임새도 커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안에서 생태적 농사법이며 자연적 와인 제조법도 나누고, 술이며 농사와 관련된 작품 전시도 해보고 싶어요. 내성적인 저보다는 아내가 그 일을 맡게 되겠지만, 이 공간이 그렇게 쓰일 걸 생각하면 저도 기분이 좋아요.” ‘농부’ 도미니크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간다. 해가 뜨자마자 밭으로 가서, 온갖 생물들과 안부를 나눈다. 볕이 너무 뜨거워지면 집에서 쉬고, 볕의 기세가 누그러지면 다시 밭으로 나가 해가 온전히 질 때까지 밭을 가꾼다. 요즘 그가 힘쓰는 일은 포도나무 가지가 처지지 않고 올라가도록 줄로 잡아주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십 대 초반의 포도나무인 셈이라 손이 아주 많이 간다. 꽤 힘들 텐데도 그는 자주 웃음 짓는다. 자연을 그대로 담는 그의 와인들처럼, 그의 미소에 그의 행복이 오롯이 실려 있다. 박미경(Park Mi-kyeong 朴美京)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작가

“새로운 삶 준 한국, 제2의 고향이죠”

In Love with Korea 2023 SUMMER

“새로운 삶 준 한국, 제2의 고향이죠” 스롱 피아비(Sruong Pheavy)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당구 선수로 손꼽힌다. 한국에 온 지 10년 차, 한 남자의 아내를 넘어 이제는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내세울 수 있게 된 그녀는 노력으로 가득 채운 시간이 어떻게 기적을 만들어내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캄보디아를 떠나와 한국 남성과 결혼해 한국에 정착한 스롱 피아비 씨는 남편의 권유로 당구를 시작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손꼽히는 3쿠션 프로 당구 선수가 되었다. 그녀는 당구를 시작하기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삶이 펼쳐지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3월 11일 경기도 일산 JTBC스튜디오에서 열린 ‘SK렌터카 PBA-LPBA 월드챔피언십 2023’ LPBA 결승전에서 스롱 피아비 선수가 월드챔피언으로 등극했다. 높은 벽으로만 여겼던 김가영(Kim Ga-young 金佳映) 선수를 제치고 거머쥔 트로피였기에 그녀에게는 더욱 의미가 남달랐던 경기였다. 세트스코어 4-3으로 승리를 확정 지은 이번 경기를 두고, 당구 팬들은 길이길이 남을 명승부라며 극찬을 이어갔다. 월드챔피언십 우승자 되다 “이번 월드챔피언십 우승은 그랜드슬램이라는 데 의미가 있어요. 저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정말 믿을 수 없었죠. 승리의 여운이 계속 남아 경기가 끝난 후에도 혼자 펑펑 울었어요. 그동안 힘들었던 모든 순간이 머릿속에서 스쳐 갔어요.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제 삶의 순간들, 그 마지막에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제가 있었죠.‘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무도 알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번 승리가 정말 감사했습니다.” 월드챔피언십에 최종 우승자로 이름을 올린 피아비 선수는 “큰 승리가 사람에게 주는 자신감은 다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동안 여러 승리를 손에 쥐어봤지만, 챔피언십 승리가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는 의미였다. “예선부터 정말 힘들게 올라갔어요. 올라갈수록 몸도 마음도 부담도 커졌어요. 긴장감이 엄습할 때는 잘 때 가슴이 아파 잠을 못 이룰 정도였죠. 자고 일어난 후에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한두 시간 혼자 깊게 숨을 쉬면서 컨디션을 조절해야 했어요. 워낙 긴장하다 보니 몸도 제 몸 같지 않더라고요. 원래 아무리 긴장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죠.” 당구는 미세한 손의 방향으로 승부가 나는 게임인 만큼, 긴장으로 인한 손 떨림은 경기에서 큰 위기였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그녀의 매니저도 “결승전을 치를 때 보니, 김가영 선수는 워낙 경험이 많아 전혀 떨지 않더라. 반면 스롱 피아비 선수는 손이 떨리는 게 멀리서도 보일 정도”라고 이야기했다. “당구는 자세가 결승을 판가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긴장해서 손을 덜덜 떨고 있으니 마음이 어땠겠어요. 덜덜 떠는 스스로를 보면서 저는 더 긴장되고, 긴장하니 손은 더 떨리고…. 악순환이었죠.” 하지만 긴장되는 상황 속에서도 마음을 꼭 부여잡고 경기에 임한 결과 그녀는 월드챔피언십 우승 소식을 고국의 부모님께 전할 수 있었다.   처음 접한 당구로 인생의 새 길 열다 지난 3월 열린 ‘SK렌터카 PBA-LPBA 월드 챔피언십 2023’여자부에서 우승을 한 스롱 피아비 선수가 트로피를 들고 세러머니를 하고 있다. ⓒ 박용선(朴龍先) 이번 월드챔피언십 경기에 이르기까지 스롱 피아비 선수는 수많은 경기를 거쳐 왔다. 2010년 한국에 온 후 2011년에 당구를 배우기 시작해 여자 당구 3쿠션 아마추어 대회를 휩쓸었다. 이후 2017년 프로로 데뷔한 그녀는 데뷔 10개월 만에 국내 1위라는 랭킹을 차지했다. 무섭도록 빠른 그녀의 성장에 국내 당구계는 모두 긴장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라는 국적 때문인지 이미 업계에서는 그녀의 존재감을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빠르게 순위권을 탈환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에서 온 제가 낯선 이곳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었겠어요. 저도 제 삶에 큰 기대가 없었는데 당구를 만나면서 모든 게 달라졌죠. 뭔가를 기대해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자 작은 가능성이라도 붙들고 싶었어요. 당구를 시작한 후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에만 매진할 수 있던 이유죠.” 어마어마한 연습량 때문에 집에 돌아온 후에는 팔이 아파 밥숟가락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남편 김만식(金晚植) 씨는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런 노력이 있어야 당구선수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내에게 약한 마음을 내비치지 않았다. “남편의 권유로 시작한 당구인 만큼 남편은 저를 정신적으로 강하게 키웠어요. 제게 당구를 알려준 스승은 따로 있지만, 남편은 제 멘탈코치인 셈이었죠. 사실 결혼 후 남편과 다른 일로 싸운 적은 없는데 오로지 당구 때문에 싸웠어요. 제 시합을 보고 난 후 ‘왜 그렇게 쳤냐’,‘더 얇게 쳐야지’, ‘그때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저 선수 잘하는 것 좀 봐라’라며 어찌나 혹독하게 몰아붙이던지요. 그럴 땐 저도 화나서 ‘그렇게 잘하면 당신이 쳐봐라’라고 말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남편이 어떤 마음으로 제게 말하는지 아니까 귀담아들으려고 했죠. 남편은 제게 정말 고마운 사람이에요.” 그녀가 처음 당구장에 갔던 순간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당구가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싶어 당시의 기분을 물었지만, 그녀의 답변은 의외였다. “그냥 당구장이었어요.” 남편을 따라 처음 간 당구장에서 딱히 인상적인 느낌은 없었다고 했다. 그저 당구를 치는 남편을 조금 지루하게 기다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낸 게 전부였다.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처음 당구장에 온 아내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제가 가만히 앉아 남편을 기다리는 게 미안했는지 와서 한번 쳐보라고 하더라고요. 알려 준 대로 쳤을 뿐인데 남편은 제게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나 봐요. 그날 집에 오더니 ‘당구선수 할래?’라고 묻더라고요. 하지만 전 싫다고 했어요. 당구선수 해 봤자 돈만 쓰지 정작 돈은 못 번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양국에 필요한 사람 되고파 처음 접한 스포츠와 언어 장벽, 고강도 연습 등으로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에도 그녀가 큐를 놓지 않은 이유는 캄보디아의 아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 박용선(朴龍先) 남편은 피아비 씨를 부단히 설득했고, 결국 그녀는 큐를 잡기 시작했다. 남편이 사 준 3만 원짜리 큐를 들고 그때부터 당구장에서 하루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당구를 시작하긴 했는데 말이 안 통하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스승님이랑 여러 대화를 자유롭게 하고 싶은데 한국말이 부족하니 서로 그림을 그려가며 소통했어요. 몇 년 후에는 저도 한국말이 좀 늘기 시작했고, 좀 더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됐죠.” 처음에는 억지로 시작한 당구였지만, 나중에는 스스로를 엄격히 대하며 훈련에 임했다. 그러자 그녀의 실력은 몰라볼 정도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지금의 스롱 피아비 선수가 될 수 있었다. “남편이 요즘 저를 보면 ‘미안했다’라고 말해요. 잔소리를 많이 했는데도 포기하지 않아서 고맙다고요. 물론 저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캄보디아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이겨냈어요. 한국에 오고 나서 제 고향인 캄보디아가 얼마나 가난한지 더 크게 체감했거든요.” 피아비 씨의 집 한 켠에는 캄보디아 아이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나는 이들을 위해 살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한국에서 꿈을 이룬 자신처럼, 캄보디아의 아이들이 꿈을 꾸고 또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을 적은 것이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컴퓨터도 할 줄 몰랐는데, 남편이 알려줘서 컴퓨터를 시작했어요. 인터넷에 접속한 후 캄보디아의 실상을 알 수 있었어요. 여기 와서 보니 내 나라가 이렇게 가난하구나 싶어 펑펑 울었어요. 그런 저에게 남편이 말했죠. ‘당구선수로 성공해서 유명해지면 돈도 많이 벌어서 캄보디아 아이들 도울 수 있어’라고요. 그동안 제 가족만 돕는다는 생각으로 살았는데 가족을 넘어 캄보디아의 많은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그 말이 제게 큰 위안을 주었어요. 그 이후로 캄보디아 아이들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실제로 피아비 선수는 우승으로 받은 상금을 차곡차곡 저축해 캄보디아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보내고 있다. 구충제와 학용품 등을 고향의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시작으로 고향 땅에 학교를 짓는 게 그의 꿈이다. 팬들의 응원 덕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는 그녀는 “힘들 때 팬들의 한마디와 응원이 정말 큰 힘이 됐다. 어젯밤에도 팬들의 댓글을 읽으며 울었다. 내가 혼자 여기까지 온 것 같지만, 사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도와 여기까지 왔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한국과 캄보디아, 양국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이야기했다. 앞으로 캄보디아에 스포츠센터를 건립하고 싶다는 스롱 피아비 선수. 당구로서는 한 개인이 이룰 수 있는 것은 다 이룬 만큼, 이제 더 큰 가치를 찾아 나아가고 싶다는 그녀는 캄보디아의 스포츠 인프라를 개선해 고향 땅의 아이들이 더욱 쾌적한 환경에서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갖도록 돕고 싶다고 전했다. 황정은(Hwang Jung-eun 黃淨垠) 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계획에 없던 삶의 여정

In Love with Korea 2023 SPRING

계획에 없던 삶의 여정 과학과 디자인, 여행과 스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관심이 있는 마리 부스(Marie Boes)는 서울시 명예시민뿐만 아니라 많은 자격증을 획득하고 상을 받았으며,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등 예상치 못한 길을 걸어왔다. 마리 부스는 벨기에의 조용한 도시 이르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녀가 한국에 처음 방문한 건 2014년 석사 과정의 일환으로 중국에서 여름 코스를 마친 다음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한국이 떠올라 되돌아온 후 줄곧 한국에서 생활 중이다. 2016년 마리 부스가 한국에서 살기 위해 왔을 때, 그녀는 블로그를 시작했다. 벨기에에 있는 할머니에게 자신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시작한 이후 블로그는 두 개의 사업으로 진화했는데, 미디어 콘텐츠 제작사와 SEO(Search Engine Optimization: 검색 엔진 최적화) 마케팅 회사가 그것이다. 벨기에의 조용한 도시 이프르(Ypres)에서 태어나고 자란 29세의 마리 부스는 이제 작은 회사를 운영하면서 서울에서 살고 있다. “전혀 계획하지 않았어요. 그냥 그렇게 된 거예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보통 가족이 읽을 수 있는 블로그를 시작해요. 그렇게 저도 글쓰기를 시작했죠. 그리고 특정 지역의 지원을 받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어요. 저는 그 여행기를 블로그에 올려 지역을 홍보했고요. 이런 일을 하고 나니 ‘와, 멋지다. 나는 겨우 23살이지만, 여행 지원을 받을 수 있고, 글쓰기도 좋아하니 이것으로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했어요.” 인생의 전환들 한국 생활도 계획에 없었다. 2014년 석사과정의 일환으로 중국에서 여름 프로그램을 마친 후, 젊은 여성이 혼자 여행하기에 한국이 안전한 곳이라 믿고 방문하게 되었다. “어떤 기대도 없었어요. 여행 책 『론리플래닛』을 들고 온 게 다였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이킹을 많이 했어요. 해변으로도 가고, 서울도 가고, 부산, 경주, 속초도 혼자 갔어요. 그리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서 1년 반 동안 일을 했고 이후 벨기에로 돌아갈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가야겠어. 그곳에서 정말 즐겁게 지냈지’라는 생각이 들어 한 달 계획으로 한국에 돌아와서 아직도 여기에 있네요.” 처음에는 여행 블로그 ‘Be Marie’를 운영하는 것 외에 영어도 가르치고, 스키 강사도 하고, 영화 촬영장 스태프 등 다양한 일을 했다. 그녀는 또 다른 웹사이트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그녀의 웹사이트를 방문할 수 있게 할지 고민했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면서 웹 사이트 개발과 SEO(검색 엔진 최적화)를 독학했다. 블로그가 성장하고 점점 더 많은 트래픽을 끌어들이면서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여겼고 그녀에게 웹사이트 작업을 맡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의 회사 중 하나인 나무마케팅이 탄생했다. 그러나 마리 부스는 미디어 혹은 정보기술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었다. 영국의 노팅엄 트렌트 대학교(Nottingham Trent University)에서 산업 공학으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 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저는 모든 걸 하고 싶었어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어요”라고 말한다. 산업 공학은 그녀가 좋아하는 과학도, 디자인도 포함되어 있으며, 현재 몇 개의 의료 관련 웹사이트 작업을 하고 있는 나무 마케팅을 운영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산업 공학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다채로운 커리어 디자인은 마리 부스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었고 여전히 그렇다. 그녀는 벨기에와 이탈리아에서 산업 디자인 코스를 수료했으며, 자전거 용품과 슬라이딩 루프를 디자인한 경험이 있다. 심지어 패션 브랜드를 공동으로 론칭하기도 했다. 코로나19가 발생해 관광업이 멈추게 되자 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산상회에 지원했다. 아산상회는 북한에서 온 청년과 국내외 청년들이 함께 창업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는 6개월짜리 글로벌 팀 창업 프로그램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북한에서 온 한 여성과 함께 아이스토리(IStory)를 설립했다. 아이스토리는 사회적 기업 패션 브랜드로 팔꿈치에 패치를 단 티셔츠를 생산했다. 이 디자인은 남한에 정착한 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개념적으로 보여준다. 지금은 더 이상 관여하고 있지 않지만, 마리 부스는 “저는 그 일이 매우 자랑스러워요. 『뉴욕 타임스』 에도 우리 기사가 나왔어요! 정말 멋졌어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이제 자신만의 일로 담요, 가방, 티셔츠 등을 디자인하는데 궁궐과 사원의 목조 건물을 장식하는 다채로운 색깔의 단청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작품은 한국의 전통 문양에 대한 애정과 박물관에서 원하는 굿즈를 찾지 못해 직접 만들게 된 것이다.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진 않지만, 매달 열 개에서 스무 개 정도 주문을 받는다. 아산상회 프로그램을 하는 동안 그녀는 북한에서 온 대학생 이지안 씨와 한국의 병역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미국에서 돌아온 민경환 씨도 만났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공통된 목적이 있었다. 한국을 세상에 홍보하는 것이다. 이후 그들은 ‘한국 어때요(How Is Korea)’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고 영어 가르치기, 여행할 만한 곳, 음식, K-팝, 안전에 대한 조언, 택시, 카카오톡 사용법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영상 콘텐츠를 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블로그와 유튜브 채널을 통해 팬데믹 기간 동안 한국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을 경험했다. “이전에 벨기에 사람들에게 한국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어요. 근데 지금은 K-팝과 K-드라마가 벨기에에서도 인기가 정말 많아요. 한국이 문화적으로 확실히 유명해졌다고 느껴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사업에 이르기까지 여행으로 와서 한국에 정착한 그녀는 웹사이트 제작, 사회적 기업 패션 브랜드 창업, 한국을 홍보하는 유튜브 채널 개설, 서울시 명예시민 등 다양한 활동과 사업을 이어가며 이곳에서의 삶을 즐기고 있다. 마리 부스는 두 개의 회사를 운영하지만 풀 타임으로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은 없다. 그녀는 두명의 파트너와 함께 일주일에 두 번 사무실에서 일하고, 다른 모든 일은 프로젝트 단위로 프리랜서와 일한다. 그녀는 대부분 서울 이태원에 있는 집에서 일한다. 이런 모습이 태평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매우 체계적이라고 말한다. “항상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서 천천히 아침 식사를 하고 9시쯤 일을 시작해요. 아침은 저에게 가장 생산적인 시간, 즉 최고의 ‘집중 시간’이에요. 이때 웹사이트 콘텐츠, 제안서, 또는 보고서를 쓰죠. 제가 최고로 집중을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오후에는 긴장을 풀고 친구를 만나거나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오기 전에 근처 남산을 오르기도 한다. 그녀는 한국의 카페 문화를 사랑한다. 원하는 카페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작업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기간 중 거의 일을 할 수 없었을 때 그녀는 뷰티 관련 수출 회사 마케팅팀에서 정규직으로 일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사무실에 앉아 한국 회사의 위계질서와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경험했다. 한국과 한국 사람을 좋아해서 한국으로 이주해온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는 사회적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정말 여러 면에서 적응하려고 애를 썼어요.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고 한국인 친구를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제가 한국 사람처럼 행동하려고 하니까 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삶이 더 쉬워졌다. 그녀가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의 친구들 대부분이 외국인이고, 대부분의 작업이 영어로 이루어진다. 사업주로서 젊고 외국인이며, 여성이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저는 무엇을 하든 남자보다 3~4배는 더 잘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그것이 결국 저를 더 나은 사업가로 만들었어요”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좋은 변호사와 회계사를 두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이제 탄탄한 실적을 갖고 있다. 서울법률그룹과 같은 고객과 일하고 있으니 그것이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 2019년에는 한국관광공사와 서울관광공사로부터 블로그 상을 받았고, 2021년에 서울시 명예시민으로도 선정됐다. 다른 사람에게 영감 주기 마리 부스의 모든 교육과 경험은 그녀의 세월과 비례 되지 않는 것 같다. 이제 겨우 29세인 그녀는 실제로 동년배들과 비교했을 때도 아주 다른 삶의 단계에 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아주 느릴 뿐 아니라 수줍음을 많이 타고 부적응자라고 말한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적응하는 게 항상 어려웠어요. 누구보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고요. 짧은 머리를 하고 농구를 했어요. 남자애 같았죠. 모든 것이 어울리지 않았어요.” 그녀는 삶에서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스스로 많은 장애물을 극복했던 그녀는 이제 자신의 경험을 나누기 위해 대중 강연과 다른 젊은 여성들을 멘토링 하는 데에 관심이 많다. 작년에 이와 관련된 몇 가지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그중 하나는 이화여대 이과 여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젊은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에게 정해진 길을 꼭 따라야 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줬다. “반응이 아주 좋았고 저도 많은 것을 얻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제가 선택한 길을 보면 하나의 길을 따르지 않았어요. 그래도 모든 게 잘 되었고요.” 하지만 그녀가 벨기에에서 안정적인 사무직을 갖지 못한 것을 걱정하는 할머니가 여전히 마음에 걸린다.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는 “이 사진이 할머니가 제가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있음을 믿도록 도와줄 거예요”라고 덧붙였다. 한국의 궁궐이나 박물관에서 자신이 원하는 굿즈를 발견하지 못한 그녀는 단청에서 영감을 얻어 이를 패턴화한 가방, 담요, 티셔츠 등의 굿즈를 직접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마리 부스는 한국이 낯선 외국인들에게 다양한 여행 정보와 한국의 매력을 소개하는 웹사이트 ‘Be Marie(bemariekorea.com)’에서 한국의 전통 문양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굿즈도 판매하고 있다. ⓒ Be Korea Shop 조윤정(Cho Yoon-jung 趙允貞) 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단과 조엘’과 함께해요

In Love with Korea 2022 WINTER

‘단과 조엘’과 함께해요 그들은 자신의 주 매체인 유튜브를 통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국인인 다니엘 브라이트와 조엘 베넷은 잠시 시간을 내어 낯선 이들에게 다가가 식사를 하거나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영국에서 온 브라이트와 베넷은 유튜브 ‘단앤조엘’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서 새로 업로드 할 영상 촬영을 준비하던 중에도 지나가는 이웃들과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거나 안부를 묻는다. 그들은 이런 평범한 일상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다니엘 브라이트와 조엘 베넷은 서울 마포구 연남동 골목길에 있는 한 카페 야외에 앉아 영상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햇볕 좋은 가을날의 늦은 오후였다. 이들은 런던에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주최하는 한류 행사를 홍보하기 위한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곧 런던으로 떠날 예정인데, 지난 5년간의 한국 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것 같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하며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을 때 나이 든 신사가 영어로 수다를 떨기 위해 멈추어 섰고, 야쿠르트 아줌마가 전동 카트를 타고 지나갈 때는 손을 흔들었다. 베넷은 “한국에 살며 사랑하는 순간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에요”라고 말한다.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 이런 순간들은 아주 평범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이디어의 전부다. 브라이트와 베넷은 유튜브 채널 ‘단과 조엘’을 운영하고 있고, 그들의 영상은 누구나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는 단순한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2017년 한국에 왔을 당시, 처음에는 스테레오 타입의 콘텐츠를 만들었다. 돌아다니면서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하고, 또 다른 외국인 두 명이 한국에서 재미있게 지내는 모습을 찍는 식이었다. “이런 형태의 촬영을 계속하다 보니, 한 발짝 물러서서 한국을 좀 더 깊게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 덕분이었고, 우리가 어떤 콘텐츠를 만들기 원하는지를 신에게 물어보며 보냈던 시간이었어요”라고 베넷이 회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상 스타일과 방향이 바뀌는 계기가 된 두 개의 콘텐츠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어느 날 브라이트는 조엘이 영상을 찍는 동안 야외 테이블에서 김치찌개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바로 그 순간부터 상호작용이 시작되었죠. 브라이트가 한국어를 할 수 있는 데다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어서 가능했어요”라고 베넷이 말했다. 또 다른 하나는 광장시장이 문을 닫을 때쯤 그곳을 떠나려고 했는데, 한 남성이 소주 몇 병을 앞에 두고 가판대에 앉아 있는 걸 봤을 때였다. “그 남자가 조금 슬프고 외로워 보였어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었죠”라고 브라이트가 말했다. 베넷이 영상을 찍는 동안 브라이트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더 이상 카메라를 보고 있지 않았어요. 저와 그 사람이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죠”라고 브라이트가 말했다. 이 순간이 특별한 막간의 시간이었음을 그들은 나중에 깨달았다. 이후 영상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베넷이 말하듯 ‘순간을 억지로 만들어내려고 하기보다 순간을 포착하면서’부터였다. 두 사람은 폐지를 주워 간신히 살아가는 한 여자 노인이나 서울역에 살고 있는 노숙인 남성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주목하게 되었고, 이를 영상으로 찍게 되었는데 브라이트가 이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브라이트는 노숙인을 보면 항상 멈춰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고 베넷이 말했다. 브라이트는 영상에 달린 “아, 그건 너희들이 외국인이어서야”, “콘텐츠가 필요해서 하는 거잖아”라고 달린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웃기지만, 콘텐츠가 맞긴 하죠. 마치 내가 이 의자에 앉은 건 이 의자에 앉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과 같죠”라고 생각에 젖어 말했다. “하지만 우리의 콘텐츠가 너무 도발적이거나 격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사회적 이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말하지는 않아요. 저는 사람을 만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아요. 그 노숙인이 서울역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긴 하지만 그게 그의 정체성은 아니었어요.” 시청자들은 단과 조엘 영상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종종 그들의 따뜻함, 깊이, 그리고 영상미에 대한 댓글을 남긴다. 둘의 삶을 수렴하다 브라이트와 베넷은 둘 다 알고 있던 조시 캐롯이라는 친구를 통해 만났는데, 그 친구는 ‘Korean Englishman’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의 영상에 출연했었고, 이후 둘은 뭔가 다른 것을 해보기 위해 자신들의 유튜브 채널 운영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이 일이 그들을 한국으로 향하게 했다. 영상에서 나타나는 다큐멘터리적 요소는 이들의 스킬과 관점 때문이다. 베넷은 런던 커뮤니케이션 대학에서 영화와 영상을 공부했다. 2010년 졸업 후 그는 마케팅 목적으로 민족지학적 영상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다. “예를 들어 이를 닦는 모습을 찍는 것 같은 일상적인 영상들이었죠. 그래도 다양한 인구 통계적 성격을 띠었어요. 빈민가에서 부유한 지역까지, 유럽, 아프리카, 중국 등…. 이 일을 통해 무언가를 그저 표면적으로 보지 않게 되었어요”라고 말한다. 브라이트는 2019년 같은 학교에서 온라인으로 포토저널리즘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전에는 SOAS 런던 대학교에서 한국학과 언어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 2년 동안 KOTRA 런던 무역관에서 일했다. 북 웨일스의 바닷가에서 자라는 동안 그는 한국에 대해 꽤 잘 알게 되었다. 그가 다닌 교회 목사의 부인이 한국인이었고, 2012년 교환 학생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반면 베넷은 2002년 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한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거의 몰랐다. 비보잉에 한창 관심이 있던 그는 막연하게 한국에 많은 스트리트 댄서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를 통해 2011년 포항에서 4주간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자극적이고 재미만을 추구하는 영상을 촬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유튜브는 전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통로다.   한국인이라는 것? 카메라는 ‘우리 친구들(Woori Mates)’ 시리즈를 위해 한국에 있는 외국인 친구들을 향하기도 했다. 이때 대화를 나누는 형식은 같았다. 그들이 다루는 주제 중 하나는 ‘내가 과연 한국인이 될 수 있을까?’였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인 이주자들은 수십 년간 자신들이 이주한 나라에서 잘 북 웨일스의.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한국에서 정체성 이슈에 대해 토론하는 걸 듣는 건 신선했다. 베넷에게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영국인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저는 런던 근처 베드포드라는 다문화 사회에서 자랐어요. 제 친구들 대부분은 혼혈이었고요” 작년에 그가 비자 문제로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진짜로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브라이트가 ‘너는 네가 한국인이 되었다고 생각해?’라고 물었어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제가 그곳을 떠났을 때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는 현재 필리핀에서 자란 한국인 여성과 약혼한 상태고 ‘제3문화’ 아이들이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한 토론은 그들 콘텐츠의 한 부분이다. 이 주제에 대한 브라이트의 견해는 한글로 쓴 그의 책 제목 『저 마포구 사람인데요?』에 요약된 듯하다. 이 제목은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그는 “마포구는 제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정착한 곳이고 현재 제가 사는 곳, 유튜브를 만들기 시작한 곳, 저희 아이가 태어난 곳입니다.”라고 말한다. 브라이트의 아내는 한국인으로 두 사람은 런던에서 만났다. 부부에게는 아누라는 어린 아들이 있다. “저는 아이가 ‘오, 나는 진짜 영국인이야’, 혹은 ‘오 나는 진짜 한국인이야’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요. 저는 정체성 문제가 그에게 너무 큰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라죠. 저는 정체성이란 본인이 자신에 대해 느끼고 본인이 어떻게 사느냐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이 카메라를 자신들에게 돌릴 때면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권 사람들의 데이트와 결혼, 한국에서 영국인 아버지로 살기, 타투, 기독교 신앙, 그리고 음식과 같이 자신들의 삶과 밀접한 이슈들에 대해 토론한다. 가끔 한국어를 하기도 하고 또 영어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두 언어의 외국인 악센트와 사투리가 재미를 더한다. 브라이트와 베넷은 유튜브를 통해 종종 진솔한 이야기를 꺼낸다. 외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나, 폐지를 주우며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이나 노숙자와의 식사 등을 담기도 한다. 화려한 영상이나 주제도 좋지만, 이야기에 힘을 싣는 건 결국 사람이라고 말한다. ⓒ DanandJoel   음식으로 연결되다 음식은 ‘단과 조엘’ 유튜브 콘텐츠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영상에 등장하고 때로는 중심 주제가 되기도 하며, 가끔은 배경이 된다. “어릴 때부터 저는 정말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어요”라고 베넷이 말했다. 어느 시점에 그는 고기 먹는 것을 중단했고, 버거 식당에서 열린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야채 버거를 주문했을 때 놀림 받았던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다 한국으로 왔어요. 그리고 바비큐를 처음 먹었던 때를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근데 음식보다도 한국인들이 음식을 먹는 방법, 함께 먹는 모습이 더 특별했어요. 테이블 주위에 함께 둘러앉아 고기를 굽거나 찌개를 같이 먹는 식문화 같은 것들은 저에게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지요.”라고 말했다. 브라이트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저는 음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정에서 자랐어요. 거의 모든 식사가 있기 전에 우리는 ‘오늘 메뉴가 뭐야? 오늘은 뭘 먹지?’라고 했을 정도였죠. 모든 식사에 아주 열정적이었고 너무 중요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저는 음식이 정말 중요한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한국의 음식 문화를 정말 제대로 누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의 아내는 그의 음식 사랑을 함께 나누고, 두 사람은 음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음식은 아주 소중하고 제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라고 브라이트는 말한다. 음식을 두고 같이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아주 단순하지만, 굉장히 매력적이다. 단과 조엘의 유튜브 채널은 구독자는 31만 명(2022년 11월 기준)이다. 사람들은 이들이 엄청난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채널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건가요?”라고 질문하자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베넷은 “아뇨!”라고 말한다. “저도 동의해요”라고 브라이트가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프리랜서 작가 일과 영화 일을 통해 수입을 보충한다. 브라이트는 토끼 소주의 크리에이티브 콘텐츠 프로듀서로 파트타임 일을 하기도 하고 베넷은 개인 유튜브도 운영한다. 5년 동안 256개의 영상을 만든 지금, 두 사람은 이제 변화의 단계에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유튜버보다는 유튜브를 플랫폼으로 이용하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라고 생각한다. 이제 두 사람은 계속해서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지,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지, 그리고 중단할 때가 되었는지를 고민한다. 채널 구독자들은 용기를 주면서 중단하지 말라고 댓글을 단다. 지금으로서는 적어도 한동안 더 많은 이야기를 계속 나눌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조윤정(Cho Yoon-jung 趙允貞) 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허동욱(Heo Dong-Wuk 許東旭) 사진가

월스트리트에서 서울의 골목길로

In Love with Korea 2022 AUTUMN

월스트리트에서 서울의 골목길로 12년 전 인수합병 거래를 위해 한국에 온 마크 테토 씨는 한옥이 자신의 삶을 바꿀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국의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해 널리 알리는 게 정말 즐거워요. 저는 예술 학교에 다니지도, 예술이나 예술사, 예술 비평을 공부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예술가들을 한 명 한 명 만나면서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마크 테토 씨는 한옥으로 이사하면서 한국의 예술과 문화에 더 깊은 지식과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여전히 한국의 예술가들을 만나며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 배우고 있다. 마크 테토 씨는 한국인들이 보기에 완벽하게 성공한 뉴욕커일지도 모른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와튼 경영 대학원 MBA를 취득하고 월스트리트 모건 스탠리에서 투자은행 일을 했다. 그런 그가 왜 맨해튼에서의 생활과 아파트를 떠나 한국에서 새로운 일을 찾고 서울의 높은 지역 골목길 꼭대기에 위치한 한옥에 살게 되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테토 씨는 2010년 삼성전자에 새로 조직된 글로벌 인수합병 팀에 신입으로 채용되어 한국에 오게 되었다. “하나의 모험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는데 한국 문화와 음식을 좋아했어요. 그게 충분히 위안이 되었죠.”라고 그는 회상했다. 그는 강남에서 일하며 살게 되었고 음식과 밤 문화, 그리고 역동적이고 현대적인 서울의 문화를 즐겼다. 몇 년 후에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대와 달리 그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주는 매력에 사로잡혔다. 이제 테토 씨는 한국말과 글쓰기를 놀라울 정도로 유창하게 하면서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한국적인 것들에 대해 전문가다. 2018년에 그는 경복궁 명예 수문장이 되었고 1년 후에는 서울시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북촌에 있는 자신의 한옥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옥은 “한국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더 깊은 지식과 관심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세 개의 목표, 새로운 길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토 씨는 한국에 얼마나 오래 머무를지 모르지만 세 가지 목표를 향해 노력하기로 했다. 직업적으로 전문성을 키우며 좋은 성과를 내고, 한국어를 배우고, 다양한 직업군의 한국인 친구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었다. “어쩐지 이 세 가지를 잘하면 더 흥미로운 기회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5년이 지난 후 새로운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회사를 바꾸고, 집을 바꾸고, 갑자기 TV에 출연하게 되었어요.” 먼저, 테토 씨는 TCK 투자회사로 옮겼고 이제 그는 이 회사의 공동 CEO이다. 이 회사는 그와 비슷한 전망을 하고 있던 오하드 토포르(Ohad Topor) 씨가 처음 만들었는데 서울을 기반으로 글로벌 재정 관련 일을 한다. 글로벌 투자와 함께 테토 씨는 벤처캐피털 영역에서도 활동한다. 두 번째로, 그는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새집이라고 하기보다 오래된 집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만난 흥미로운 사람 중 한 명인 박나니 씨는 한옥에 대해 책도 냈고, 그에게 북촌의 한옥을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다. “즉흥적으로 그녀를 따라 이곳에 왔어요. 저는 이사를 할 계획이 없었는데 그녀가 이 집을 보여줬고, 이제 저는 여기 살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새로운 지하실을 포함해서 개조된 집은 “삶이 평행으로 펼쳐지는 집”이라는 의미의 ‘평행재(平幸齋)’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에 테토 씨는 JTBC 프로그램 에 나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프로그램은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한국어가 유창한 외국인들이 의견을 교환하면서 다른 문화와 사고방식에 대해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때때로 토론이 전통적인 것과 관련되면 그는 자신의 집에 대해 말하게 돼 곤했다. 그래서 시청자들에게 테토 씨는 한국 문화에 꽤 박식한 외국인으로 각인되었다. 실제로 테토 씨는 필요에 의해서 한국의 전통 가구와 예술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래 갖고 있던 가구나 가게에서 살 수 있는 가구들이 자신의 한옥에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가 여기에서 살 작정이면 제대로 집을 꾸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공간에 관해 공부하기로 결심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조선시대와 그 당시 사람들 집에 어떤 가구가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감정사에서 수집가로 거실 탁자를 알아보는 단순한 이유에서 출발해 테토 씨는 예술 감정사, 수집가, 작가, 그리고 강사로 변화했다. 결국 그는 전통 격자문에서 영감을 받아 팔각형 모양의 탁자를 스스로 만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반닫이는 여기에, 도자기는 저기에 놓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집안의 다른 가구들도 머릿속에 그려보게 되었다. 그래서 박물관을 다니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조선백자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다음에 고려청자, 그리고 신라 토기까지 이어졌어요. 이전 시대로 돌아가지만 동시에 앞으로도 나아가게 되었는데, 그건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죠. 달 항아리를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국의 현대 예술가들 이름이 뜨는 거예요. 구본창(Koo Bohn-chang, 具本昌)과 강익중(Kang Ik- Joong, 姜益中) 같은. 백자 달 항아리 패턴이 한국의 현대 예술에도 등장함을 알게 되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게 고려시대 백자 하나가 부엌의 조리대 위에 놓여 있고 커피는 허명욱(Huh Myoung-wook, 許明旭) 작가의 다채로운 옻칠 구리 컵에 제공된다. 거실에는 구본창 작가의 영묘한 청화백자 사진을 담은 병풍이 있다. 신라 토기 하나는 조선시대 목재 궤를 장식하고 있고 그 위에는 현대의 단색화 그림이 걸려 있다. 벽장에서 테토 씨는 자연스럽게 고대의 나무 도시락통과 통일신라시대 와당을 꺼내와 보여준다. 아래층에 있는 그가 직접 디자인한 옷장의 슬라이드 문을 열면 조선의 책가도에서 영감을 얻어 구성한 선반과 받침대가 나타난다. 여기에 그의 옷들이 수집품처럼 걸려 있다. 손님방의 침대를 마주 보는 벽에는 한지에 프린트한 김희원의 사진이 걸려 있다. 정원으로 난 격자문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방이 확장되고 외부가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테토 씨의 수집품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혼합되어 있고 모든 것이 이야기를 품고 있다. 모든 현대 작품들은 그가 잡지를 위해 예술가들을 인터뷰할 때 만났던 사람들이 만들었다. “예술가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작품이 훨씬 더 의미가 있게 됩니다. 작품은 그저 하나의 오브제가 아니고 나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거죠.”라고 그는 설명하면서 지승민 도예가가 만든 그릇을 예로 들었다. “이 접시들은 그냥 접시가 아니에요. 제가 작가를 알아요. 그가 결혼하기 전에 아내와 만났죠. 저를 결혼식에 초대했고요. 그래서 이제 이 물건들은 이야기를 품고 있어요.” 한국적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그가 사는 한옥 ‘평행재(平幸齋)’에는 집에 꼭 어울리는 고가구와 도자기, 작품부터 직접 제작한 가구, 소품 등으로 가득하다. 한국에서의 삶 제2장 지난 4년 동안 테토 씨는 50여 명의 예술가를 만났다. 이로 인해 그는 한국의 예술에 대해 소중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자신이 배운 내용을 강의할 기회가 생겼다. 외국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한국의 예술에 대한 강의를 처음 요청받았을 때 그는 “내가 그럴 자격이 있나?”라고 자문했다. 자신이 진행한 인터뷰와 자신의 집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국의 전통 예술과 현대 예술을 관통하는 세 가지 특징이 보였다. 여백의 미, 자연의 미, 그리고 정이 그것이었다. “외국인으로서 우리는 조금 다르게 보는 것 같아요. 제가 공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한국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아주 대단하게 보인다는 겁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한국의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해 널리 알리는 게 정말 즐거워요. 저는 예술 학교에 다니지도, 예술이나 예술사, 예술 비평을 공부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예술가들을 한 명 한 명 만나면서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테토 씨는 이제 스스로 ‘한국에서의 삶 제2장’이라 부르는 시간을 즐기고 있다. “5년 동안 한옥에 살고 난 지금의 마크는 아주 다릅니다. 이 공간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많은 걸 배우고 저 자신도 변했습니다.”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는 독지 활동을 통해 사회 환원을 하고 싶어 한다. 그는 ‘박물관의 젊은 친구들’에 가입해 함께 모금 활동을 펼쳐 일본으로부터 두 점의 귀한 불교 유물을 구입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개인적으로 그는 미국의 수집가로부터 신라시대 수막새 21점을 구입했고 이 또한 박물관에 기증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외에도 그는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발레단 지원 활동도 한다. 대문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작은 정원은 그가 직접 꾸미고 가꾼 꽃과 나무가 계절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새로운 시각 올해 테토 씨는 5월 중순에 열린 ‘2022 박물관·미술관 주간’의 대사로 활동해 주길 요청받았다. 그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박물관과 미술관을 방문하도록 독려하고 이를 위해 몇 가지 이벤트를 주관하고 사회적 미디어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다. 뉴욕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 몇 개가 있지만 그는 거의 가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박물관과 한옥이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테토 씨는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177,000여 명이다. 그리고 여기에 남겨진 코멘트를 보면 그가 한국의 예술과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 많은 사람이 주변의 것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광화문의 사무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그는 이웃 동네 느낌을 즐긴다. 한국 문화에 관해 쓴 글에서 그는 이 골목길들이 서울의 얼굴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곳에서 도시의 진정한 삶이 펼쳐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입구에 걸려 있는 조선왕조의 한 관료(테토 씨는 이 인물이 누구인지 아직 조사 중이다)가 테토 씨가 신발을 벗는 동안 지켜본다. 많은 한국인이 뉴욕을 동경하지만 테토 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한국에서 아주 흥미롭고 다채로운 삶을 찾았어요. 제가 미국에 있다면 대체로 매일 직장에서 일하고 귀가하는 식이었을 거예요. 그게 다였겠죠.” 그리고 아마도 월마트에서 구입한 가구에 앉아 그곳에서 구입한 그릇에 담긴 밥을 먹고 있을 거라고 그는 혼잣말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현관에서 마주하는 평행재(平幸齋)의 수호신이라 부르는 초상화는 20세기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윤정(Cho Yoon-jung 趙允貞) 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기회가 이끄는 대로

In Love with Korea 2022 SUMMER

기회가 이끄는 대로 한국에 오는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다른 일을 하기 위한 과정에서 짧게 머무르는 정류장과도 같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매슬론 씨는 이 일을 지속하고 있고, 원래 하고 싶었던 예술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또 좋아하는 일을 시도해 보는 걸 주저하지 않기에 다른 영역에도 손을 대본다. 네오팝 작가이자 영어 교수, 그리고 보디빌더까지 다양한 역할을 해내는 크리스토퍼 매슬론(Christopher Maslon)은 좋아하는 일을 시도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파란 셔츠와 넥타이를 맨 크리스토퍼 매슬론 씨는 누가 봐도 여느 영어 교수처럼 보인다. 하지만 스프라이프 넥타이가 생기를 더하면서 교수 이상의 무언가가 기대된다. 소셜 미디어에서 그를 찾아보면 그의 페이스북은 온통 예술과 관련되어 있고 반면에 인스타그램은 보디빌딩 사진으로 가득하고 가끔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계정이 혹시 해킹당한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저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아는 걸 원하지 않아요. 각각 다른 일은 다른 카테고리로 구별하는 걸 좋아해요”라고 매슬론 씨는 말한다. 교수라는 직업 외에도 그는 예술가이고 보디빌더이기도 하다. 코스프레를 사이드잡으로 하면서 가끔 모델이나 공연, 혹은 빅토리아 고딕 예술과 패션 관련 일을 한다. 그의 삶의 태도는 기회가 주어지면 이를 좇아가고, 그것이 낯선 영역이라면 배우면서 해보는 식이다. “제게 주어진 일이 엄청나게 거대해 보이면 저는 완전히 그 일에 몸을 던집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도 한국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바로 뛰어든 건 아니다. 기회를 잡아라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거주하고 있을 당시 한국인 이웃이 보낸 장문의 이메일을 받았을 때 매슬론 씨는 이를 무시했다. 메일은 “한국에서 영어 가르치기”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매슬론 씨는 메일을 받고 바로 삭제했는데 며칠 간 메일이 신경 쓰였다. 컴퓨터공학 교수였던 그 이웃에게 메일에 대해 묻자“당신이 적임자예요!”라고 말했다. 당황한 매슬론 씨는 이를 부인했지만, 곧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공짜 비행기표가 제공됐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주일 후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믿고 말이다. “2002년 3월 31일에 한국에 왔어요. 이날을 저의 ‘한국 생일’이라고 불러요. 그게 20년 전이고, 이후 돌아가지 않았죠.” 그때는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었던 해였다. 매슬론 씨는 축구팬은 아니었지만 월드컵 열기에 사로잡혔다. 한번은 저녁 식사에 참석해 한 중년 네델란드인 옆에 앉은 적이 있는데 나중에 뉴스를 보고 그가 한국 대표팀을 이끈 히딩크 감독임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한국에 있었던 게 너무 좋았어요. 마법에 걸린 것 같았죠. 저 자신이 역사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어요”라고 그는 회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매슬론 씨는 한국인의 근면성을 존경하게 되었고 한국 음식과 사극드라마를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 왕과 양반에게 특별한 친밀감을 느꼈다. 그리고 한국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교회에서 알게 된 언어학 학생 권선애 씨와 사랑에 빠졌다. 3년 후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기억을 되살리며 매슬론 씨는 웃었는데, 오하이오의 집주인이었던 한국인의 충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만나는 첫 여성과 결혼할 생각은 하지마!” 매슬론 씨 부부의 딸 엘리자베스는 2006년에 태어났다. 생각지 않게 매슬론 씨는 영어를 가르치는 일도 좋아하게 되었다. 대전에 있는 동아기술고등학교에서 아홉 달을 가르치기로 계약하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직업을 찾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저는 뭔가 설명하고, 나누고, 묘사하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아요. 가르치는 일은 제게 너무나 잘 맞아요.” 3년 후에 그는 대전보건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영어뿐만 아니라 예술사, 그리고 디자인과 사진을 가르치고 있다. 자신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TESOL 석사학위도 받았다. 앤디 워홀의 영향 매슬론 씨에게 가르치는 일은 예상치 못했다. 왜냐하면 학교를 싫어한 걸 차치하더라도 자신은 예술가로 태어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네 살 때인 어느 날 혼자 놀게 되었을 때 그는 크레용이 담긴 박스를 찾아내 벽 전면에 그림을 그렸다. 대부분 검정과 보라색으로 칠한 나무와 동물들 그림이었다. 매슬론 씨의 주 작업은 실크스크린 판화인데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처음 본 앤디 워홀의 아이콘 작 <100개의 캠벨 수프 깡통>에서 영감을 받았다. “내 머리 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어요. 그날 이후 판화 작업에 매료되고 앤디 워홀이 마릴린 먼로와 캠벨 수프 깡통 만들 때 사용한 작업 과정을 배우는 데에 몰두했어요.” 자신이 삶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된 그는 장학금을 받고 오하이오의 콜럼버스미술디자인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실크스크린 예술에 몰입했다. 그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 직지심체요절 』을 포함해 한국이 유서 깊은 인쇄술 전통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어 기뻤다. 다행이도 그는 가르치는 일 외에 남은 시간을 예술 작업에 쓸 수 있었고 곧 외국인 예술가 집단인 대전국제미술가모임(DJAC)에 합류하게 되었다. “Lucky Numbers” 2015. Silkscreen on vinyl. 30 x 42 cm. “Telephone Series #1 (3)” 2015. Silkscreen on vinyl. 30 x 42 cm. 네오팝 정체성 2015년 DJAC 봄 전시회에 출품한 1940년대 미국 냉장고를 보여주는 그의 실크스크린 작품이 한 갤러리 대표의 눈에 띄었고 이 만남은 그의 예술 커리어에 돌파구가 되었다. 갤러리 대표는 매슬론 씨를 한국판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스튜디오로 안내했다. “건물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음각인쇄잉크 냄새를 맡을 수 있었어요. 판화가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죠. 니르바나에 온 것 같았어요. 저에게 두 달 간 체류가 제공되었어요.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음껏 날개를 펴고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었죠.” 두 달 동안 그는 60여 점의 작품을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자신을 네오팝 예술가로 정체화했으며 플라스틱 판화로 영역을 확장했다. 이란 제목이 붙은 시리즈는 레이디 가가의 동명 노래에서 영감을 받았고 2019년 대전의 갤러리 이안에서 단독 전시회에 발표했다. 이 시리즈의 작품 중 네 점은 현재 미국 나사(NASA)의 필립 메츠거 물리학박사 연구실에 걸려있다. 두 사람은 해안모래채취그룹 회원으로 온라인에서 만났다. 그의 작품에서 좀 더 깊은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매슬론 씨는 “제 작품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는 세탁기, 건조기, 전화기, 타자기, 축음기, 그리고 동물 또는 식물 같은 것들을 좋아한다. 보디빌딩을 축소 인화한 사진도 있다. “저의 네오팝 판화들은 수집품 같은 거예요. 현대와 빈티지 이미지를 섞어 놓은 흥미로운 합성체죠. 작품들은 어떤 특정한 느낌이나 복합적인 느낌을 표현합니다. 흐릿한 집합체이거나 종종 불분명한 이미지들을 겹쳐놓은 것들이죠.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기 어렵죠.”라고 그는 설명한다. “저는 개별적인 대상물을 만들어내 사람들이 흠모하고 경건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자극을 줍니다. 사람들이 공부하고 감탄하도록요. 저는 언제나 개별적으로 표시하는 것, 개별성을 갖는 것, 어떤 것이 정체화되어 적절한 이름을 갖도록 하는 것, 그것이 무엇과 관계 있고, 어디에서 왔는지 역사성을 부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크리스토퍼 매슬론은 일과 예술 외에도 보디빌딩을 즐긴다. 그는 운동을 통해 변화된 몸이 자신감은 물론 여러 가지 기회도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다. © Christopher Maslon 보디빌딩 & 고딕 상상력 그가 좋아하는 두 가지, 즉 가르치는 일과 예술 외에도 매슬론 씨에게 보디빌딩은 그가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이다. 2004년에 그는 몸이 너무 약해진 걸 깨달았다. 영어를 가르쳤던 고등학교의 계단을 오르는 게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고 3년 동안 개인 트레이너와 거래를 했다. 한 시간 영어를 가르쳐주는 대신 한 시간 운동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보디빌딩 쇼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이걸 할 거야”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일 년 후에 그 쇼의 무대에 섰고 자신의 체급에서 3등을 했다. 2014년에는 서울 머슬마니아 대회 남성 클래식 부문에서 3등을 했다. 대부분의 영어 교수들 이력에는 없는 일이다. 과거에 몸이 너무 말라서 해변에서 셔츠를 벗기 싫어했던 소년이었던 매슬론 씨는 “보디빌딩은 제 몸을 바꿨을 뿐 아니라 저의 자신감도 바꿔놨어요. 제 삶에 정말 큰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해요. 왜냐하면 제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거든요”라고 말한다. 보디빌딩과 자신의 페이스북 사진들은 ‘놀라운 기회들’로 연결되었다. 한 모델 에이전시가 전설의 영화배우 이순재 씨가 광고한 영어 앱 ‘산타 토익’을 텔레비전에 광고하기 위해 근육질의 외국인을 찾고 있다가 그에게 연락을 했다. 또 영화 에서는 미국 과학자 역을 맡아서 3초 정도 등장하기도 했다. 때때로 코스튬 플레이를 즐기기도 하는데 슈퍼 히어로나 빅토리아 시대 복장을 하는 걸 즐긴다. 빅토리아 시대와 고딕 문화를 좋아하는 그의 취향은 1960년대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였던 와 매사추세츠 몬손에서 거의 200년 된 집에서 성장했던 그의 경험을 상기시킨다. 대전에 거주하는 알라 포노마레바(Alla Ponomareva) 씨와 함께 작업한 판타지 사진 프로젝트 이후 매슬론 씨는 요즘 소품을 많이 만들고 있다. 뼈대, 해골, 고딕 시대 관, 티파니 스타일 등잔 등이 그런 것들이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거라면 그는 뭐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 거의 완벽한 매슬론 씨가 말을 할 때면 표정에서 마치 축제가 벌어지는 듯하다. 대화의 주제에 따라 표정을 바꿀 때면 눈이 반짝거리고 얼굴 근육이 움찔거린다. 그는 손으로도 여러 제스처를 취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의 오하이오 한국인 이웃이 매슬론 씨가 좋은 선생님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게 분명하다. “놀랍게도, 내가 카리스마가 있다고 그가 말했어요. 저는 쉴 새 없이 말하고 손을 써가며 말을 해요. 저는 시각적 인간이에요.” 하지만 미국을 떠난 후의 경험을 묘사하면서 그는 가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저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감정이 격해질 때는 눈을 감아야 해요.”라고 그는 설명했다. “한국은 제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어요.” 그는 머릿속으로 지난 20년을 떠올리고 그려보고 있었다. 자신의 여정이 지금까지 97%는 좋았다고 그는 말한다. 사실 그는 이걸 혼자 간직하고 싶어 했다. “여기엔 누구도 초대하고 싶지 않아요. 아주 사적인 일이니까요.”라고 말하며 그는 다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소리와 시각적인 것을 실험하다

In Love with Korea 2022 SPRING

소리와 시각적인 것을 실험하다 이 젊은 프랑스 남자가 하고 있는 일, 그의 예술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는 오랫동안 “소리와 시각 예술과 관련된 모든 것을 통합시켜” “이질적인 요소가 만나게 하는 일” 혹은 “두 세계를 함께 채집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을 자신의 스튜디오로 선택했다. 한국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대부분의 외국인 체류자와 달리 해미 클레멘세비츠 씨의 여정은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다.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자라면서 그는 예술대학 교수로 아시아에서 종종 전시회를 연 아버지를 통해 한국과 주변 국가에 대해 들었다. 마르세이유-지중해 미술학교(ESADM)에 입학할 즈음에 클레멘세비츠 씨는 아시아와 동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학교에서 한국 학생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중 한 친구의 초대로 2009년에 독학한 한국어로 무장해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그 첫 방문이 제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어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죠.”라고 그는 말한다. “이곳에 저랑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들이 있고 동시에 제게 익숙한 것들과 완전히 다름을 느꼈어요. 그리고 어쩐지 이 다른 것들이 제게 아주 잘 맞았어요.” 이후 몇 년 간 클레멘세비츠 씨는 방학 동안 한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는 이 여행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한국어를 공부하고 문화를 흡수하는 동안 그는 서울의 실험적 예술 현장을 경험했다. 또한 한국인들이 자신의 예술 아이디어에 아주 수용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어 더욱 한국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의 대학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 중 하나가 외국에서의 인턴 경험이었고 클레멘세비츠 씨는 자연스럽게 다시 서울에 눈길을 돌렸다. 아버지의 한국인 친구 한 분의 도움으로 그는 2011년에 예술 컨설팅 회사에서 4개월 동안 일할 수 있었다. 그것이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체류한 경험이 되었고 한국을 자신의 새로운 고향으로 만들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졸업 후 그는 “한국에 가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2013년 그는 영구적으로 머물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소리 클레멘세비츠 씨는 종종 사운드 예술가, 혹은 인터미디어 예술가라고 불리지만 그 스스로는 자신을 단순히 “소리에 관심이 있는 예술가”라고 소개한다. 한국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그는 두 개의 영역을 오간다. 실험적 음악과 소리를 조합한 시각 예술이 그것이다. “소리는 제게 가장 중심적인 것입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소리와 시각 예술 두 영역이 만나도록 하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 결과는 다양하게 표현된다. 한 주 동안 그는 음악 공연을 하고 그 다음 주에는 가장 최근에 만든 “소리 조각 작품” 또는 설치 작업을 선보이는 식이다. 이를 위해 작곡을 하고 안무가와 협업해 공연을 하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작품 중 어떤 것들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스피커 국기, 망가진 국기(Speaker Flag, Broken Flag)” 같이 많은 작품이 고장난 스피커를 보여주는데 이 작품은 태극기 중앙에 스피커가 있다. “통역을 위하여(For Interpreters)”는 수화를 사용하는 비디오인데 시청자는 소리를 스스로 상상해야 한다. 이 작품은 “소리 없이 소리를 표현한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지난 몇 년 간 클레멘세비츠 씨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백남준 아트센터, 국립한글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과 같은 주요 장소에서 전시를 하고 공연을 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 활동을 시작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홍대 근처의 작지만 실험적인 공간에서 작업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한국에서의 첫 프로젝트 중 하나인 “테이크아웃 드로잉”은 국제적 정취가 물씬한 서울 이태원 지역에 있는 데이크아웃 드로잉 카페에서 2014년에 작업했다. 두 달 동안 매일 그는 그곳에서 즉흥 솔로 콘서트나 초대 손님이 있는 공연을 하거나 더 많이는 그저 리허설을 했다. 확실한 틀이 없는 공연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건 제대로 된 콘서트와 리허설 사이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죠.”라고 그는 말한다.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2013년 이후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는 Rémi Klemensiewiczs는 시각과 청각의 관계, 존재와 해석의 차이를 작품으로 옮긴다. 주로 소리를 소재로 하여 전시, 라이브 퍼포먼스, 무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탐구를 이어가고 있다. 수수께끼 클레멘세비츠 씨는 역설과 애매모호함을 즐기는 듯한데 이는 그의 작품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존칭법은 보통 개인 간에 적절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클레멘세비츠 씨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느끼는데, 특히 학생과 선생의 관계에서 그렇다. “학생과 선생님이 함께 있을 때 학생이 언어뿐 아니라 몸짓이나 다른 미묘한 것들에서 예의를 갖추는 걸 볼 수 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관계의 룰이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는 거의 가족 같은 느낌을 받아요. 프랑스에서 제가 느끼는 것과 정반대죠. 프랑스에서는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고 친구처럼 얘기 나누지만 선생님과 친하다고 느낀 적은 드물어요.” 그는 자신의 고국과 한국의 외적인 면모에서도 역설적인 것을 발견한다. 파리와 프랑스의 여러 지역들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지만 클레멘세비츠 씨는 전통과 영성이 사라졌다고 느낀다. 한국은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건물들이 좀 뒤죽박죽처럼 보였어요. 근데 시각적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정신에는 질서가 있다고 느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두 나라를 비교하자면 프랑스는 외부에는 질서가 있지만 내부엔 혼란이 있어요. 한국은 표면적으로는 혼란이 있지만 내면에는 질서가 있고, 전통과 과거와도 연결되어 있어요.” 그 같은 발견이 그를 설득하고 자극해서 한국에 눌러 앉게 만들었다. 하지만 비자 때문에 팬데믹 동안에 많은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내야 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시골에 머물렀고 최근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콘크리트와 자연의 모습이 얼마나 미묘하게 겹쳐져 있는지 새롭게 깨달았다. 지하철을 따면 주변의 산자락까지 이동할 수 있고 한강변 자전거길을 따라가면 거대한 아파트들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모습을 보인다. “이런 건 완전 짱이죠.”라고 말하며 그는 웃었다. 2019년 11월 19일 전라남도 순천의 예술공간 돈키호테(Artspace Donquixote)에서 Rémi Klemensiewicz가 중 ‘Handmixer’의 한 장면을 공연하고 있다. 생계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시간을 프랑스 시골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프랑스 유튜브 사용자들을 위해 온라인 한국어 수업을 만들었다. 한 친구의 제안으로 기분전환으로 만든 것이 진지한 일로 변했다. 결국 한글을 자세히 소개하는 것을 포함해서 수업을 계획하고 작성하면서 몇 달을 보냈다. 수업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소리 작업을 하는 예술가로서 클레멘세비츠 씨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이 돈벌이가 되지 못함을 깨달았다. 한국어과 프랑스어를 오가는 언어 수업 덕분에 다행히 제대로 된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조언들을 무시할 수 있었다.가르치는 일이 균형을 잡는 데에도 좋지만 클레멘세비츠 씨는 진정 언어를 갖고 실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게다가 그는 한글의 시각적인 면도 높게 평가하고 자신의 작업에 녹여내기도 했다. 2018년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전시한 “소리 말 시리즈”는 스피커와 케이블로 만들어진 한글 단어를 선보인다. 전시회의 일부로 초대 뮤지션들과 함께 케이지 공간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피아노에서 네 음(G, A, G, E)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무음으로 해서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예술 수업 강의는 그에게 안정적 수입을 제공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중학생들과 예술 워크숍을 진행하는 걸 시작으로 이제 서울 성수동 헬로우뮤지엄에서 정기적으로 아이들에게 소리와 시각 자료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PATI)에서 “소리 디자인” 강의를 하게 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로 한국현대무용단과 협업도 하게 되었다. 2017년 10월 12월부터 28일까지 서울 소재 복합문화공간 탈영역우정국에서 진행된 전시 에서 Rémi Klemensiewic가 선보인 작품 ‘Interpreted Masks’이다. 종이마스크와 스피커, 케이블과 소리로 구성됐다. 과정 클레멘세비츠 씨의 작업은 규정하기 어렵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점이 있다. 그가 보고 듣는 것 모두가 그의 예술에 스며든다는 점이다. 이런 배경을 알면 계속해서 변하는 한국에 대한 그의 거의 본능적인 애착이 좀 더 잘 이해가 된다.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전형적으로 밀월기간이었다. “바닥에 자면서 행복했어요. 매일 자장면을 먹을 수 있는 게 행복했어요. 매일 비가 내려도 행복했어요.”라고 그는 회상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작업 리듬’이라고 부르는 것, 즉 일과 사적인 삶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 - 예를 들어 밤에 전화를 해서 다음날까지 10페이지 번역을 요청하는 것 같은 - 조금씩 방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일과 쉼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고 인정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모든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시회나 공연을 하는 동안에는 그 일이 너무 좋아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9년을 보낸 클레멘세비츠 씨의 삶은 실험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과 닮았는데, 그에게 영향을 준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강조한 것처럼 과정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제 안무가 노경애 씨와 프랑스의 모교와 함께 하는 교환 프로젝트에 그가 푹 빠져 있는 게 놀랍지 않다. 이 프로젝트에서 그는 청각장애인 댄서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고 공연하기로 되어 있다. 32살인 그는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전시회를 하자고 아무도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라고 자문한다. 제대로 된 직장을 얻으라는 조언을 기억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무실에서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리스크가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기적이 일군 삶

In Love with Korea 2021 WINTER

기적이 일군 삶 이탈리아 피아나소에서 태어난, 본명이 빈첸시오 보르도인 김하종 신부는 1990년에 한국에 왔고 이후 빈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해 왔다.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도 그가 운영하는 복지센터는 매일 수백 명의 배고픈 노숙자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다. 김하종 신부는 30년째 매일 신부복 대신 앞치마를 입고 있다. 신부복보다 앞치마가 본인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성남시 안나의 집에 있는 그의 소박한 사무실에는 김수환 추기경(Stephen Cardinal Kim Sou-hwan, 金壽煥, 1922~2009)의 사진이 걸려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여전히 세상을 위협하고 있지만 김하종 신부는 조용히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 그에게 ‘나눔’은 전염력 높은 행복감으로 사람들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다. 성남에서 그가 운영하는 사회복지센터 ‘안나의 집’에서 나눔은 여러 형태를 갖는다.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초 이래로 가장 눈에 띄는 나눔의 형태는 매일 가난한 노숙자들을 위해 수 백 개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는 일이다. 김 신부가 이 무료급식소를 연 건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오래 전이다. 팬데믹으로 실내 음식 섭취가 제한되자 대부분의 무료급식소는 문을 닫았지만 김 신부는 그렇게 하길 거부했다. “무료급식소를 문 닫을 수 없어요. 위장은 쉬지 않으니까요. 이곳을 찾는 70퍼센트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우리가 급식을 하지 않으면 이들은 굶어야 해요.”라고 그는 말한다. 무료 점심 도시락 급식을 도시락으로 전환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는 다른 운영 체제를 요구했고 포장재 때문에 비용도 오르고 종사자들의 건강에 대한 위협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2020년 1월 이후 시 당국의 허가를 받아 안나의 집은 매일 650에서 750개의 도시락을 큰 문제없이 제공해오고 있다. 김 신부는 가난한 이들에게 매일 급식을 하는 게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언젠가 한번 쌀이 거의 다 떨어졌던 때를 떠올렸다. “매일 160킬로그램의 쌀이 필요해요. 근데 이틀 분밖에 남지 않았죠. 제가 걱정을 했더니 주방장이 ‘예수님이 보내주실 거예요’라고 하더군요. 다음날 쌀 100포대가 문밖에 놓여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음식과 돈, 옷과 마스크 등 여러 물품을 기부한다. 많은 이들은 시간을 내서 음식 준비, 포장, 청소, 도시락을 받기 위해 줄 선 사람들 안내하는 일 등을 돕는다. 자원봉사자들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찾아온다. 천주교인뿐 아니라 스님과 회교도도 포함하며 유명인사도 회사원과 학생들도 있다. 심지어 루이 뷔통이라는 이름의 개도 있어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빈민들은 성남의 곳곳에서 찾아오고 3시에 배급되는 도시락을 받으러 심지어 서울에서도 찾아온다. 김 신부와 자원봉사자들은 이들을 환영하며 “어서 오세요.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팬데믹 때문에 어려운 상황인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랑과 나눔의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팬데믹의 또 다른 경험인데 정말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요.”라고 그는 말한다. 빈민을 위한 헌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미래의 김 신부가 될 빈첸시오 보르도는 이미 신부가 되기로 작정했다. 대학에서 동양 철학과 종교를 공부한 후 그는 빈민을 돕는 데 집중하는 오블리티 선교수도회에 가담했다. 아시아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고 1990년 5월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 빈곤 가정을 돌보는 수녀님과 함께 일하기 시작한다. 2020년에 출간된 그의 책 에서 김 신부는 1992년 변곡점이 된 사건을 기억한다. 그는 곰팡이가 핀 지하방에서 어떤 날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기도 하면서 이웃이 가져다주는 음식에 의존하며 홀로 사는 50대 반신 불구의 남자를 만났다. 그와 얘길 나누고 방을 청소한 후 김 신부는 허락을 받고 그를 안아주는데 냄새가 너무나 고약해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형용할 수 없는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복지체계 밖에 남겨진 걸 깨달은 김 신부는 다음 해 빈민을 위한 급식소를 시작한다. 그 당시 한국은 지금과는 달랐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사람들이 저에게 왜 노숙자를 돕느냐고 묻곤 했어요. 노숙자는 문제를 일으키는 알코올 중독자니 도와서는 안 된다고 했죠.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진 않아요. 한국 사회가 많이 변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노숙자가 되었다. 이듬해 김 신부는 어머니의 세례명이 ‘안나’인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무료급식소를 시작했고, 그렇게 ‘안나의 집’이 탄생했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모든 요일에 무료 급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무료급식소는 성남성당이 제공한 공간에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2018년에 그곳을 비워야 했다.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김 신부의 걱정이 커졌다. 성남시 직원들은 길 건너 그린벨트로 묶였던 땅이 해제될 테니 그곳에 새로운 공간을 지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실행가능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땅을 살 돈이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인 걸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제 정말 이 일을 끝내고 퇴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라고 그는 말한다. 새로운 둥지 도움은 인터뷰 요청의 형태로 찾아왔다. 김 신부는 주저했지만 지역신문이라고 착각하고 인터뷰를 하기로 동의하고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인터뷰는 KBS방송과 하는 거였고, ‘인간극장’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김 신부에 대한 방송이 나가자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후원이 밀려들어왔고 빠르게 12억에 도달한 후원금은 땅을 사기에 충분했다. 김 신부는 오랜 기간 타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자신의 에너지를 ‘사랑’으로 꼽았다. 힘들고 포기할 뻔한 상황마다 누군가가 나타나 도움을 주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안나의 집을 꾸릴 수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이 가진 사랑의 힘이라고 믿는다. 안나의 집은 2018년 새 건물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무료급식이 주된 업무이지만 김 신부의 노력으로 더 많은 일에 봉사를 하게 되었다. 현재 의료봉사, 재활, 법률 서비스, 인문학 강좌 등이 주 단위로 제공된다. 또한 노숙자와 노인들, 가출청소년들을 위한 쉼터, 젊은이를 위한 셰어하우스, 가출청소년과 도움이 필요한 젊은이들을 위한 모바일 봉사활동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코로나 이전에 봉사활동 프로그램 ‘아지트’(아이들을 지켜주는 트럭)는 매일 밤거리를 배회하는 수십 명의 소년 소녀들을 만났다. 팬데믹으로 인해 많은 활동이 중지되었지만 김신부는 여전히 지금은 소형차인 아지트를 끌고 거리로 나간다. 아지트는 한국어로 ‘집합소’ 혹은 ‘안전한 집’을 의미한다. “희망을 주려고 해요.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는 거죠. 씨앗이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하고 또 실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가능한 무엇이든 하도록 부름 받았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무료급식소를 문 닫을 수 없어요. 위장은 쉬지 않으니까요. 이곳을 찾는 70퍼센트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우리가 급식을 하지 않으면 이들은 굶어야 해요.” 하느님의 종 지난 30년 동안 김 신부는 거의 매일 앞치마를 몸에 걸쳤다. 하지만 일요일에는 자전거를 타기 위한 채비를 하고 한강 둑을 따라 자전거를 타러 간다. 귀중한 휴식의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긴 하지만 매일 같이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육체적으로 힘든 건 말할 것 없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뛰는 걸 알아차렸을 때 그는 의사를 찾아갔고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분간 그가 유일하게 지켜온 이탈리아 습관인 모닝 에스프레소를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힘들고 베푸는 삶에서 그가 보상으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빈민들을 위해 일하는 게 절 행복하게 합니다. 저에게는 일이 아니예요. 저의 사명이고 이곳에서 저의 삶은 이들을 환영하고 사랑하고 돕는 겁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 사명은 ‘하느님의 종’을 의미하는 그의 한국 이름 ‘하종’에 반영되어 있다. 김이라는 성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성직자였던 앤드류 김대건 (1821-1864)에 헌사하는 의미로 따왔다. 김대건은 천주교를 탄압한 조선왕조 시기에 처형당했고 1984년에 다른 한국인 순교자들과 함께 성인으로 공표되었다. 김 신부의 업적이 알려지면서 그는 2014년 명망 있는 호암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았다. 어떤 상이 가장 의미가 크냐는 질문에 김 신부는 표정이 환해지면서 최근에 손때 묻은 천 원짜리 지폐를 모아 그에게 선물한 유치원 어린이들을 언급했다. 그를 특별히 행복하게 만든 또 다른 상은 2015년 대통령령으로 주어진 한국 국적 취득이다.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오래 전에 그는 한국에 영원히 머물 것을 결심했다. 심지어 사후 장기 기증 서약까지 해 놓았다.“저는 외국인이 아니고 한국 사람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자원봉사자들은 매일 1시부터 안나의 집 지하에 있는 식당에 모여 도시락을 준비한다. 밥, 반찬, 국, 빵, 통조림 캔 등을 일사불란하게 담고 포장하는 손놀림이 무척 능숙하다. 김 신부(맨 오른쪽)도 항상 이들과 함께 일한다. 김 신부는 매일 3시부터 안나의 집 앞에 있는 성남동 성당의 너른 공터에서 노숙자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준다. 700여 개의 도시락은 2시간 정도면 모두 소진된다.

색다른 지역 관광을 주도하다

In Love with Korea 2021 AUTUMN

색다른 지역 관광을 주도하다 색다른 지역 관광을 주도하다 전라북도 농촌 도시인 순창에 사는 레아 모로 씨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구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길 원한다. 레아 모로는 매주 닷새동안 전라남도 순창군 투어 버스인 ‘풍경버스’에서 안내를 진행한다. 풍경버스는 강천산 군립공원, 전통고추장 민속마을, 채계산 등 순창의 주요 관광명소를 돈다. 프랑스 리옹 근처 인구 1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 이제롱(Yzeron) 출신인 레아 모로 씨는 자신이 ‘주류 여성’이 아니라고 소개한다. 케이팝 그룹 중 BTS와 블랙핑크에 감탄하긴 해도 그녀가 아주 좋아하는 가수는 인디밴드 새소년이다. 그리고 서울의 명소보다 소도시의 생활을 선호한다. 풍부한 전통 문화와 관습이 남아 있는 전라북도 시골 도시인 순창에서 레아 씨는 지역 공무원으로 관광 홍보 일을 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외국인이 지역의 관광 명소를 격찬하며 홍보하는 걸 보면 당연히 놀란다. 레아 씨의 한국어 발음은 완벽하지 않지만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전달할 때는 자연스럽게 기분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순창은 고추장과 많은 명승지로 유명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쉽게 닿지는 않는 곳이다. 더 많은 방문객을 유치하고 이들이 주변을 쉽게 둘러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순창군은 2019년에 버스 투어를 도입했고 이를 위한 가이드를 찾고 있었다. 재즈 카페를 운영하는 레아 씨의 친구가 그녀를 추천했다. “제가 불어, 영어, 한국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인과 외국인 관광객 모두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친구가 설득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이미 유튜브 여행 채널을 운영하고 있었고 관광산업 관련 경험도 있었다. 순창군이 그녀를 위해 관광 홍보관 자리를 만들기로 결정했지만 외국인을 공무원으로 채용하기 위해서는 상부 기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6개월 후에 그녀는 홍보관으로 채용되었다. 지역 사람들은 그녀를 “프랑스 공무원”이라 부른다. 레아 씨는 군에서 인기가 많다. 그녀는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데 보관함에는 작업용 장갑, 아줌마 바지, 카메라와 한복이 들어 있다. 그녀의 일을 수행하면서 농부들에게 도움을 줘야 할 때도 있고 비디오 영상을 찍고 싶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KBS의 같은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는 것 역시 자신이 맡은 홍보 일의 일부라 생각한다. 그녀는 소도시에는 볼 게 별로 없다는 편견을 떨쳐버리고 한국에는 서울과 케이팝과 케이드라마 외에 훨씬 더 경험할 게 많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방랑벽 고향 마을 이제롱에서 순창까지 오게 된 건 여행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프랑스 시골에서 자란 레아 씨는 늘 바깥세상이 궁금했다. 그러다 어린 시절 가족이 발리에 배낭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오토바이를 탔어요. 부모님은 저와 제 여동생을 다리 사이에 태우셨죠. 이 여행이 제 삶의 모든 걸 바꿔놓았다고 생각해요.”라고 그녀는 회상한다. “여행을 통해 세상에는 다른 모습의 사람, 다른 문화, 다른 언어가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게 더 많은 기회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레아 씨는 호주에서 18개월 동안 일하고 영어를 배우고 때때로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Great Barrier Reef)에서 다이빙을 즐겼다. 이후 태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동남아시아 여행을 했다. 결국 여행 산업에 마음을 두고 온라인 수업을 듣고 관광경영 학사를 취득했다. 이 수업이 요구하는 것 중 하나가 한 나라에서 6개월간 인턴을 하는 거였다. 한국인 친구가 광주에 있는 페드로 하우스와 여행 카페를 추천했다. 2016년 그녀는 한국에 왔고 거의 2년 동안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게 되었다. “광주를 사랑하게 되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역사를 좋아했던 할아버지로부터 한국 역사에 대해 배웠어요. 할아버지는 남한과 북한에 대해 알려주셨죠. 하지만 광주와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어요. 광주는 한국의 현대사와 한국사회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좋은 곳이었어요.” 광주에 사는 동안 그녀는 전라도 지역을 많이 여행했고 특히 인근 섬들을 포함해 외진 곳들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외국인을 위한 관광정보가 없었기 때문이 이 여행들은 외국인 배낭 여행자에게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페드로 하우스의 주인 페드로 김(본명 김현석)과 함께 가이드북을 쓰게 되었다. 책은 출간되지 않았지만 온라인에서 “전라 고 (Jeolla Go)"라는 이름의 채널로 재탄생되었다. 나중에 경상도 지역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그녀는 조선산업이 대부분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거제도의 문화센터에서 한동안 일하기도 했다. 광주로 돌아왔을 때 순창에서의 일자리는 좀 더 지속적인 일을 추구했던 그녀에게 마침 좋은 기회가 되었다. 모로는 모국어인 프랑스어와 한국어는 물론 영어에도 능통해 주로 순창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최근에는 한국인을 더 많이안내한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그의 한국말 설명을 들으며 순창의 여러 장소를 흥미롭게 돌아본다. ⓒ Lea Moreau 아주 바쁜 가이드 관광 홍보관이자 경험 많은 배낭여행자로서 레아 씨는 다른 여행자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데 즐거움을 갖는다. 그녀는 소도시에는 볼 게 별로 없다는 편견을 떨쳐버리고 한국에는 서울과 케이팝과 케이 드라마 외에 훨씬 더 경험할 게 많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녀는 순창에는 한국에서 가장 긴 출렁다리 중 하나가 있다고 예를 든다. 또한 봄에는 벚꽃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곳 중 하나로 유명한 진해나 하동보다 덜 붐빈다. 가을에는 강천산국립공원의 단풍이 유혹적이다. 하지만 그녀가 새 일을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 코로나 팬데믹이 닥쳤고 관광은 사실 거의 정지된 상태다. 미소 짓는 얼굴 모습을 하고 오픈탑 형태를 갖추고 두 개의 버스를 합쳐 특별히 제작된 순창 시티투어버스는 현재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약 10명 정도 실어 나른다. 팬데믹 방침에 따라 모두 버스를 타기 전에 체온을 측정한다. 투어는 외국인 승객이 없을 때는 한국어로 진행된다. 대부분의 여행이 가상체험으로 이루어지는 이때 레아 씨의 홍보 일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지속된다. 매주 한 번 정도 그녀는 ‘전라 고’에 새로운 내용을 업로드하고 순창군의 공식 유튜브 채널인 ‘순창 튜브’에도 협업을 하고 있다. 이런 일을 그녀는 가장 좋아한다. “영상 촬영을 좋아해요. 고등학교 다닐 때 저희 반은 마다가스카로 여행을 갔고 그때 제가 촬영을 맡았어요. 물론 그때 찍은 영상의 질이 아주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촬영 기술이 좋아진 게 분명하다. 작년에 관광 비디오 컨테스트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150만원 상금으로 그녀는 파노라마 촬영을 위해 드론을 구입했다. 현지 이웃들 사이에 ‘프랑스 공무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모로는 현재 순창군 미생물산업사업소 미생물계 소속 직원이다. 순창은 고추장, 된장으로 유명하고 미생물산업사업소는 이런 발효 음식을 연구하고 홍보하는 일을 맡고 있다. 덕분에 모로는 고추장과 된장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매력에 관해 한국사람만큼 잘 안다. ⓒ Lea Moreau 꿈을 살다 레아 씨는 최근에 순창군과의 계약을 3년 연장했다.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일상을 공유함으로써 한국을 좀 더 잘 알게 되는 거예요.”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제가 한 곳에 머무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가 만나는 사람들과 사귄 친구들 때문이에요. 한국인은 정말 환대해 줘요. 외국인을 보면, 특히 시골에서는, 도움을 주려고 하죠. 제게는 그런 만남이 그 자체로 하나의 모험이 되고요.” 레아 씨는 자신의 한국어가 완벽하지 못함에도 동료 공무원들이 자신에게 행정 시스템과 일에 대해 알려주려고 애를 쓰는 걸 고맙게 생각한다. “저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저를 신뢰하는 걸 알고 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고마운 생각에 그녀는 일주일에 10시간 온라인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레아 씨의 개인적인 삶의 모토는 “인생을 꿈꾸지 말고 꿈을 살아라”이다. 그녀는 한국에서의 삶과 여행에 대한 책을 쓰는 것, 여행 TV쇼를 만드는 것, 지역 산업을 좀 더 홍보해서 지역공동체에 기여하는 것 등 미래에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좀 더 여행을 많이 하고 자신의 글로벌 여정을 공유하도록 영감을 주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그녀는 말한다. 조윤정 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허동욱 사진작가

대만족의 삶이라 말하는 니코

In Love with Korea 2021 SUMMER

대만족의 삶이라 말하는 니코 대만족의 삶이라 말하는 니코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Kordonias Nikolaos) 셰프는 어린 시절 맛본 지중해 요리를 오랫동안 즐겁게 만들고 있다. 여러 해를 길 위에서, 다양한 부엌에서 보낸 후 정착한 서울에서 자신의 식당을 경영하며 요리하고 있다. 서울 중심지에 위치한 익선동에서 한 블록 떨어진 작은 골목길에 예상치 못한 그리스문화의 안식처가 손짓한다. 한옥에 들어선 ‘니코 키친’이 토착 그리스 요리를 선보이면서 단골손님을 만들어내고 있다. 식당 주인인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셰프, ‘니코’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는 에게해에 있는 사모트라키섬에서 성장한 자신의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들려준다. 이 섬은 날개를 단 승리의 여신 니케를 비롯해 신화의 위대한 신들의 성소가 있는 곳이다. 자신의 고향인 이 고대의 섬을 니코는 목가적으로 묘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얀색으로 칠해진 집들로 가득한 그리스의 섬을 떠올리게 한다. “아름답고 조용하고 사람들은 친절해요. 삶의 속도는 느리고요. 사람들은 느긋하고 여유롭죠. 걱정을 하지 않아요. 집이 있고 일이 있으니까요. 삶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아요. 하지만 원하는 대로 살고 있고 행복하죠.”물론 게다가 “아주 좋은 음식”도 있다. 대화에서는 유기농 생산품, 신선한 닭, 사모트라키섬 주위의 코발트 색 바다에서 잡은 맛있는 생선에 대해 풍부한 얘기가 오갔다. 성장기에 엄마와 할머니가 만든 음식이 그를 사로잡았다. “아마도 냄새였을 거예요.”라고 니코는 말한다.이 모든 게 현재의 그의 삶과 일에 대해 말해준다. 2004년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곧바로 다른 음식의 냄새를 알아차렸다. 곧 냄새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에서 요리하는 포장마차의 냄새였고, 아주 달랐어요. 고추, 김치 같은 냄새가 공기에 떠다녔죠.”라고 그는 기억을 되살린다. 그는 국제적 정취로 가득한 서울의 이태원에 있는, 지금은 문을 닫은 그리스 식당 산토리노에 일자리를 얻었다. 어린 시절 태권도 수업 외에는 한국에 대한 경험이 없는 그는 한국이 어떤 곳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한국행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이동은 그에게 자연스러웠다. 지중해와 카리브해 지역의 항구 사이를 운행하는 크루즈 배에서 일한 후 그는 뉴욕의 요리학원에서 공부했고 맨해튼에서 명망 있는 셰프들과 일했다. 그 후 지인이 식당을 여러 개 운영하는 캐나다에서 6년을 보냈다. 오너 셰프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는 아침마다 서울 익선동에 자리한 레스토랑 니코키친의 한옥 문을 직접 연다. 그는 자신의 식당을 찾는 손님들이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곁들인 휴식을 즐기며 아름다운 그리스를 상상하길 바란다. 한국에 정착하다 이태원에서 일하는 동안 니코 씨는 우연히 산토리노가 들어선 건물에서 일하는 서현경 씨를 만났다. 그들은 오가며 마주치다가 결국 결혼으로 골인했다. 니코는 그리스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서 씨는 이전에 여러 해를 살았던 일본으로 되돌아갈 계획을 보류하고 있었다. “어떤 일들은 그냥 운명적인 것 같아요.”라고 니코 씨는 서울에 완전히 정착하게 된 일에 대해 얘기했다. 2018년에 니코 씨와 그의 아내는 ‘니코 키친’을 열었다. 특별히 한옥을 찾아 나선 건 아니었지만 한옥의 건축 양식이 마음에 들었다. 이 집을 샀을 때 불을 먹는 신화적 동물인 해태상 두 개가 있었는데 이전에 이곳에 입점한 카페에 남아 있었던 거였다. 해태상은 꽃나무 화분으로 가득한 작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지키고 있다. 니코 키친은 조선왕조의 군인들이 종묘 주위를 순찰할 때 사용한 순라길에서 연결된 골목길에 위치한다. 종묘와 이어진 곳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이 있다. 가까이에는 역사가 오래된 불교 사원이 있고 골목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한국의 전통적인 색동천을 전시하는 색동박물관이 있다. 식당은 매일 영업을 하며 니코 씨가 모든 요리를 한다. 그의 아내는 그가 일중독자라고 하지만 그는 아주 행복해 보인다. “이게 제 삶이고 저는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라고 그는 말한다. “저 자신이 음식을 좋아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제가 만든 음식을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또 방문하는 게 좋아요.” 점심과 저녁 사이에 니코 씨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이때 그는 서울의 여러 곳을 걸어 다닌다. 궁궐이나 절, 서울 한복판을 흐르는 청계천에도 간다. 팬데믹 전에는 사우나에서 몸을 풀기도 했는데 지금은 참고 있다. 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여유 있게 식사하고 와인을 맛보고 긴장을 푼다. 바로 이것이 니코 씨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며 그가 원하는 식당의 분위기이다. 니코키친의 셰프는 오직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한 명이다. 그가 나고 자란 에개해의 작은 섬, 사모트라키섬의 맛과 가장 비슷한 맛을 내기위해 신선한 그리스식 재료와 레시피를 사용한다. 니코키친의 작은 공간 곳곳에는 그리스를 떠올리는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다. 냉장고의 한 면에는 그리스의 상징적인 지역 사진이 프린팅 된 귀여운 마그넷들이 붙어있다. 식도락가들이 발견한 곳 익선동에서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떨어진 조용한 골목에 위치한 니코 키친은 그냥 지나치다 들어오는 손님이 많지 않다. 그렇지만 이곳은 늘 예약이 꽉 차 있다. 요리 프로그램을 향한 한국인의 채워지지 않는 식욕이 이 식당으로 이어졌고, 니코 씨는 ‘여기GO’ ‘올리브쇼’(올리브 채널) 등 몇몇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손님으로도 심사위원으로도 출연했다. 미디어 노출이 많아지면서 아침 일찍부터 식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전화와 이메일 연락이 온종일 오게 되었다. 니코 씨는 텔레비전 출연의 혜택을 인정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요리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 메뉴는 그리스 가정식을 바탕으로 한다. 가지와 다진 소고기로 만든 그리스 전통 음식인 무사카는 지속적으로 손님들이 찾는 요리다. 페타 치즈를 넣은 그리스 샐러드, 브라타 샐러드, 치킨 수블라키와 새우 사가나키도 인기 메뉴다. 그리스 음식이 아직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기 때문에 피자나 파스타도 메뉴로 제공된다. 하지만 니코 씨 자신만의 스타일로 직접 만든 사워 반죽을 사용해 만든다. 퓨전 메뉴를 선택한 건 좀 더 자유롭게 요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기분이 날 때면 스페인 요리나 이태리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자유로움을 좋아한다.하지만 그가 만드는 음식의 핵심은 항상 같다. 건강한 지중해 스타일의 음식으로 신선하고 자연의 재료로 만든 음식이다. 대부분 채식이고 무설탕에 튀김은 최소로 한다. 과거에는 그리스 식재료를 구입하기 어려웠는데 요즘은 원하는 것을 온라인으로 모두 구할 수 있다. 특정한 치즈나 다른 재료를 급하게 구해야 하면 출근길에 그가 아직 살고 있는 이태원의 가게에 들르면 된다. 대부분의 식당처럼 니코 키친 역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경영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리스 대사관의 직원들과 근처 절의 스님들을 포함해 많은 손님들이 단골이다. 불교 경전의 여러 장면을 묘사한 다채로운 색의 절 외관이 식당의 정문 위 너머로 보인다. 니코키친은 테이블 4~5개가 전부인 작은 레스토랑이고 모든 좌석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니콜라오스와 그의 아내는 이 곳을 찾는 모든 손님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니코키친은 테이블 4~5개가 전부인 작은 레스토랑이고 모든 좌석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니콜라오스와 그의 아내는 이 곳을 찾는 모든 손님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앞날들 자신이 선택한 제2의 고향인 한국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본 후 니코 씨는 잘 관리된 빌딩과 거리, 그래피티 같이 공공 지역의 흉물이 없는 것, 그리고 교양 있고 친절한 한국인에 대해 얘기했다. “여기는 천국 같아요. 완벽한 곳이에요. 그래서 이곳에 사는 게 행복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그리스를 많이 그리워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팬데믹이 지나가고 일상이 회복되면 사모트라키섬에 가보고 싶어 한다. 좀 쉬면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좋은 음식을 맛보고 바다낚시도 하고 싶다. 그는 자기 인생의 다음 단계를 그려보기도 한다. 그건 퓨전 음식 없이 온전히 그리스 요리만을 제공하는 좀 더 큰 식당을 여는 것이다. 그동안 상황을 살펴왔고 이제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한 곳에서 모두 실현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요. 물론 돈도 벌고요.”라고 그는 말한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이것이 니코 씨의 간단한 철학이다. 그렇게 말하자 그의 아내가 끼어들어 응수하며 비밀을 폭로했다. 니코 씨가 햄버거를 좋아하고 가끔은 켄터키 프라이 치킨을 즐긴다고. 음식이 그를 한국으로 이끌었고, 그를 여기에 붙들어 두었으며 그를 행복하게 한다. “하루 일과가 끝날 때 만족스럽지 않으면 피곤해집니다. 하지만 만족스러워 미소 지을 수 있으면 모든 문제와 피로는 사라지죠.” 조윤정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판소리에 매혹되다

In Love with Korea 2021 SPRING

판소리에 매혹되다 자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확실하게 아는 행운을 아무나 갖게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로르 마포 씨는 그 행운을 거머쥐었다. 자신의 천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판소리를 한 번 듣는 것으로 족했다. 어떤 주저함도 없이 그녀는 서울에 오기로 결정했고 이제 한국의 전통 성악 장르인 판소리 기예를 연마하고 있다. 언젠가 세계 곳곳에서 공연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파리의 삼정전자에서 일하고 있을 때 로르 마포 씨가 갖고 있던 꿈은 집을 사서 아이들이 북적이는 탁아소를 운영하는 거였다. 적어도 판소리 공연을 보러 가기 전 까지는 그랬다.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첫눈에 반해버렸죠.” 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한국의 전통 사설 노래에 완전히 빠져든 그녀는 공연 내내 웃음 지으며 생각했다. “좋아. 정말 좋아. 이게 내가 하고 싶은 거야.” 공연이 끝난 후 마포 씨는 소리꾼 민혜성 씨에게 다가가서 판소리를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물었다. 양반 계급의 남자와 평민 출신의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유명한 사랑 이야기인 의 일부를 불렀던 민 씨는 판소리를 배우려면 한국에 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알려줬다. 회계학 전공자이자 케이팝 팬이기도 한 마포 씨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제가 한국에 가면 저에게 판소리를 가르쳐 주실래요?” 2년 동안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고 가족과 친구를 설득하고 준비를 한 후 2017년에 마포 씨는 서울에 왔다. 민 씨는 훈련을 하는 데에 적어도 10년은 걸릴 거라고 경고했었다. 하지만 마포 씨는 걱정하는 어머니께 “일 년만 해 볼게요.”라고 말했다. 마포 씨가 특별히 모험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느낌만 믿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약속대로 마포 씨는 판소리 다섯 편 중 하나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이수자인 민 씨에게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배울 게 많았다. 판소리에서는 스토리텔링이 중심이기 때문에 가사를 이해하는 게 중요했다. 따라서 한국어와 한자를 배우는 게 먼저였다. 프랑스에서 우연히 를 듣고 판소리와 사랑에 빠진 로르 마포 씨는 판소리를 배우기 위해 2017년 한국으로 날아왔다. 그리곤 당시 공연을 했던 소리꾼 민혜성 씨의 제자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판소리를 잘 배우기 위해 한국어부터 익혀야 했던 그는 전문적인 소리꾼이 되기 위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연습한다고 한다. 연습, 그리고 또 연습 코로나 사태 전에 마포 씨의 하루는 오전 11시에서 저녁 9시까지 수업과 연습, 그리고 때때로 공연이나 TV 출연으로 채워졌다. 그녀는 남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느꼈다. 가사를 이해하는 건 둘째 치고 발음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했다. 발음을 제대로 하기 위해 어떨 땐 일주일 간 펜을 입에 가로로 끼워 넣고 연습하기도 했다. “제가 한국 사람처럼 노래를 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문적인 소리꾼이 되고 싶어요.”라고 깊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를 가진 36세 마포 씨는 말한다. 여전히 초보자였던 시절에 잊지 못할 순간이 찾아왔다. 2018년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프랑스 엠마누엘 마크롱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기념하기 위해 엘리제궁에서 그녀가 노래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카메룬 태생의 프랑스 국적을 가진 그녀는 2019년에 있었던 공연을 더 특별하게 생각한다.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스승과 다른 소리꾼들과 함께 한 공연이었다. 청중 속에는 그녀의 가족뿐 아니라 지역의 고위 관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제가 공연하는 걸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해요. 다른 청중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느라고요. 어머니는 정말 뿌듯해 하셨어요.”라고 마포 씨는 말한다. 각각의 노래와 그 메시지가 마포 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판소리는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한 동생과 욕심 많은 형의 민속 설화를 바탕으로 한 ‘흥부가’이다. “흥부가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예요. 모든 가족은 다르긴 해도 문제를 갖고 있죠. 저희 가족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흥부가가 전하는 메시지인 좋은 사람으로 살면 보상을 받게 된다는 걸 믿어요.” 그녀의 목표는 ‘흥부가’를 완벽하게 부르는 것을 넘어서 세 시간이 걸리는 전곡을 공연하는 것이고 세계 곳곳에서 그렇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또 아이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는 것도 꿈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처럼 아이들이 판소리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걸 도와주고 싶어 한다. “파리에서 저는 종종 우울했어요. 왜 그런지도 모르고 제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판소리를 부르면 제 마음이 아주 선명해지는 걸 느껴요.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이 아름다운 음악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마포 씨는 매일 엄마와 얘길 나누는데 어머니는 매번 좋은 남자를 만났는지 묻는다. 그때마다 그녀는 “아직요.”라고 대답하고 있다. 때때로 한국어와 불어를 섞어 공연을 하는 마포 씨의 꿈은 언젠가 판소리를 불어로 완창하는 것이다. 한국 고유의 민속음악인 판소리를 불어로 노래하기가 쉽진 않지만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 중이다. 팬데믹의 해 2020년은 마포 씨에게 특히 어려운 해였다. 공연은 허락되지 않았고 그녀의 비자로는 예술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현재 자신의 유튜브 채널 ‘로르랑 아리랑’과 스승의 수업을 불어로 번역해 내보내는 ‘봉주르 판소리’를 통해 청중을 만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공연을 하지 못하니 수입이 없다. 그럼에도 마포 씨는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살고 있는 하숙집 주인은 돈을 받지 않고 그녀가 필요한 것을 조달해 주면서 그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무대 공연을 위해 마포 씨에게 한복을 선물하기도 했다. 마포 씨는 그런 그녀를 언니라고 부른다. 마포 씨는 한국어의 존칭어나 관계어가 가끔 혼란스럽긴 하지만 사람들 덕분에 한국에서의 경험은 대체로 좋았다고 말한다. “파리의 한국 친구들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살 곳을 찾거나 은행 계좌를 만드는 것 같은 기본적인 일에 도움을 주었어요.” 라끌레트 치즈나 후식 케이크인 에클레어 같은 맛있는 프랑스 음식을 그리워하긴 하지만 이를 대체할 자기만의 한국 음식을 찾기도 했다. 한국인들이 숙취용으로 좋아하는 곰탕은 술을 마시지 않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2020년의 모든 것이 음울한 건 아니었다. 마포 씨는 명망 있는 한국예술종합대학교에 합격하게 되어 꿈을 이뤘다. “또 학생이 되고 모든 것을 번역해야 하는 일”이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녀는 아주 기뻤다. 진짜 걱정거리는 학비다. 살면서 처음으로 돈에 쪼들리게 되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무대에서 공연할 때 청중이 저를 판소리를 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판소리 소리꾼으로 봐주기를 바라요,” 후회는 없다 하지만 마포 씨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단 한 번 자신의 선택을 의심한 적이 있다. 일 년에 두 번 하는 집중 판소리 훈련인 ‘산(山) 공부’를 처음 했을 때였다. “죽는 줄 알았어요.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훈련을 했어요. 연습하고 먹고, 연습하고 먹고.” 그녀는 당시를 떠올렸다. “스스로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라고 물었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와, 내 판소리가 정말 좋아졌네’라고 했죠.” 산 훈련이 제대로 된 목소리와 복잡한 기술을 익히는 데에 필수적이었음을 그녀는 인정한다. 마포 씨는 또 다른 포부를 갖고 있다. 판소리를 불어로 부르는 것이다. 때때로 한국어와 불어를 섞어서 공연을 하기도 하는데 그게 더 어렵게 느껴진다. “한국어로 부를 때의 기술은 달라요.”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한국어로 노래할 때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요. 근데 불어로 노래하면 그냥 노래 같아요. 불어로 부를 때도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게 하고 싶어요.” 어떤 언어로 노래를 하든지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음 문장에 집약되어 있다. “무대에서 공연할 때 관중이 저를 판소리를 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판소리 소리꾼으로 봐주기를 바라요.” 그녀는 올해 무대에서 다시 공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흥부가’를 완전히 익힌 후에 좀 덜 알려진 ‘수경낭자가’로 넘어가는 것도 목표이다. 사랑 이야기인 ‘수경낭자가’는 오늘날에는 단지 몇 명의 소리꾼에 의해 이어지고 있는데 민혜성 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언젠가 한 사람만이라도 제가 스승님이 판소리하는 걸 들었을 때와 같은 느낌을 갖고 ‘와, 나도 판소리 배우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마포 씨는 기대에 차서 말한다.

두 개의 언어로 꿈꾸다

In Love with Korea 2020 WINTER

두 개의 언어로 꿈꾸다 러시아 태생이지만 한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이에바 씨는 한국인들이 놀랄 정도로 한국어를 잘한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만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한국과 러시아의 문학을 양국에 소개하고 싶어 한다. 이에바 씨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어를 더 잘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는다. 그녀가 나오는 유튜브 영상에는 그런 댓글이 몇 십 개 달린다. MBC 에브리원 퀴즈 예능 프로그램 , KBS 쿨FM 에 고정으로 출연하는 에바 씨는 사람들이 그녀가 러시아인임을 잊게 만든다. 하지만 두 개의 언어를 유창하게 한다는 게 가끔은 어떤 언어와도 편하지 않음을, 또 두 개의 문화에 익숙한 게 가끔은 어디에서도 고향을 갖지 못하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그걸 에바 씨가 순간적으로 깨닫게 된 건 2017년 외대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처음으로 3분짜리 텍스트를 통역하는 일을 하게 되었을 때 한국어도 러시아어도 모르는 것처럼 느낀 멘붕의 순간이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안 들렸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에바 씨는 피아노 강사로 한국에 초대된 어머니를 따라 처음 한국에 왔다. 에바 씨와 엄마가 살던 도시 카바로프스크의 한국인 선교사를 통해 일이 주선되었는데 한국인 교회를 다니던 외할머니를 통해 연결되었다. 그렇게 해서 에바 씨는 반에서 유일한 외국인으로 경기도 의왕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저는 외국인이라기보다 외계인이었어요.”라고 그녀는 기억을 되살렸다. 하지만 6년 후에 러시아로 돌아가게 되면서 일종의 문화 충격을 경험한다. 그리고 다시 6년이 지나서 국가 장학금을 받고 한국의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때 또다시 문화 충격을 경험한다. 쌍방향 문화 충격 문화와 언어의 교차 경험은 러시아 대학에서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하면서 동시에 외대에서 미디어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할 때 정점에 달했다. “한국에서 넉 달을 지내고 러시아로 가서 한 달을 지내곤 했어요. 러시아에 가면 모든 것이 항상 그대로였어요. 근데 한국에 돌아오면 늘 무언가가 변해 있었고요.”라고 그녀는 기억한다. “한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한동안 힘들었어요. 하지만 점차 적응을 하게 되었어요. 이 경험을 통해 제가 좀 덜 예민해지고 새로운 것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이게 된 거 같아요.” 2015년에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에바 씨는 이전에 같은 반 학생이었던 남자와 결혼해 그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한 건 편의 때문이었다. 그녀의 원래 성은 코노노바였고 사람들이 의도적이 아니어도 이상하고 별난 이름으로 불러댈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한국 이름이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 잠시 얘길 나누다 보면 그녀가 옆집에 사는 젊은 여자 같기 때문이다. 에바 씨는 인기 있는 어린이 텔레비전 프로그램 를 보며 자랐고, 남자 친구가 2년간 군복무를 하는 동안 변함없이 기다린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 친구가 서울 외곽의 남양주에서 복무했다고 하면서, “사실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전화도 할 수 있었고 한 달에 한두 번 그를 만날 수 있었어요.”라고 했다. 많은 한국 여자들이 남편에 대해 말할 때 정색을 하며 장난스럽게 말하듯 그녀도 “그렇게 자주 보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근데 지금 우리는 너무 자주 보는 거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워낙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부부지만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에바 씨는 종종 남편에게 나가서 운동을 하든 뭐라도 하라고 잔소리를 한다고 한다. 팬데믹이 아니라면 에바 씨는 아마도 국제 교류와 관계된 일을 하면서 좀 더 바쁘게 지낼 것이다. 현재 국제 행사가 거의 치러지지 않아서 그녀는 번역일을 좀 더 하고 있다. 통역은 수정하거나 실수를 고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스트레스라고 느낀다. “끝나고 나면 기분은 좋지만 왠지 공허하기도 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번역할 때는 마감을 지키고 완벽하게 만족할 수 없는 게 스트레스고요. 나중에 내가 한 작업을 보면서 ‘왜 이렇게 썼지?’라고 생각하기도 하죠. 하지만 적어도 눈으로 볼 수 있는 최종 결과물이 있어 좋아요.” 궁극적으로 에바 씨는 문학 번역을 하고 싶다. 현재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고, 언젠가 박민규 작가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비롯해 여러 작품을 번역하고 러시아 소설도 한국에 소개하기를 원한다. 이 분야에서 그런 작업을 할 수 있기 위해서 두 개의 언어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에바 씨는 한국어와 러시아 둘 다 편하게 사용하고 있고 쌍방향으로 통역과 번역을 한다. 에바 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제 한국에서 좀 더 오래 살았으니 아마도 한국어가 더 편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누구를 상대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요.”라고 말한다. 언어 유창성 통역과 번역이 자신에게 성취감을 준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에바 씨를 대중에게 알린 건 방송이었다. 사실 그녀가 언어에 그토록 열심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원래 갖고 있던 꿈이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처음 TV에 얼굴을 알린 건 언어 퀴즈쇼인 에서였다. 다른 외국인과 겨루어 일등을 차지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TV조선의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로 일했다. 제목과 달리 그녀는 서울 시내를 탐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처음에는 지역 음식을 소개하고 나중에는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는 식이었다. “문어를 잡거나 빵집에서 밀가루 포대를 나르거나 하는 아주 힘든 노동을 했어요. 벼를 심는 것 같은 한국적인 경험도 했구요.”라고 에바 씨는 그 시간을 떠올렸다.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일들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상어와 함께 다이빙하기였다. 한국은 크기에 비해 다양한 특색의 지역들이 있으며, “우리가 늑대를 무서워하는 것보다 늑대가 사람을 더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 외에도 그녀는 텔레비전에서는 누구나 좀 더 활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침 방송 리포터로서 명랑 쾌활하고 에너지를 뿜어내야 함을 알게 된 거였다. “제가 생각보다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인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필요할 때는 좀 더 ‘연기’를 해야 했죠”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런 경험과 자신의 언어 능력 때문에 에바 씨는 단순히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외국인이 한국 텔레비전에서 인기를 얻는 현상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러시아에서는 텔레비전에 외국인이 많이 나오지 않아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려면 시청자들의 언어를 할 줄 아는 거 외에 다른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한국에서는 한국어를 할 줄 알면 기회가 주어져요. 이곳만의 특별한 점이고 물론 고맙게 생각할 일이죠.” 하지만 그녀는 가끔 너무 유창하지 않은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귀여운데 실수를 하거나 사투리를 쓰거나 발음이 좀 별나거나 하면 사람들은 더 즐거워하는 거 같아요.” 결국 방송은 엔터테인먼트이기 때문이다. 에바 씨는 “방송에서 계속 일하려면 노력을 해서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에바 씨는 한국 사람처럼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녀를 하나의 ‘캐릭터’로 생각한다. 즉 한국 사람처럼 말하는 외국인 캐릭터인 것이다. 이게 짐을 덜어주긴 한다. “사람들은 제가 아주 머리가 좋다고 생각해요. 근데 말을 잘하는 거랑 머리가 좋은 건 서로 다른 거죠. 저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언어를 잘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역사나 전통에 관해서 모르는 게 많아요. 제가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있을 뿐이죠. 그래서 좀 더 공부를 해서 저에게 부족한 면을 메워 나가려고 해요.”라고 그녀는 다짐한다. 틈을 메꾸다 에바 씨는 여전히 프로그램 진행자를 꿈꾸지만 지금은 진입 장벽이 낮고 제약이 적으면서 훨씬 더 다양한 콘텐츠를 가능하게 하는 유튜브를 고려해 보고 있다. 세상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건 이전처럼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다. 에바 씨는 결혼 후 “그래, 이제 여기서 영원히 사는 거야”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 지금은 여기에서 사는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남편은 언젠가 러시아에서도 살아보고 싶어 해요. 아니면 그냥 제3의 나라에서 살 수도 있고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가 아는 외국인들은 단순히 사람들이나 음식, 문화를 소개하면서 칭송하거나 비교하는 것 이상을 제공할 수 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학생들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요. 혹은 사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으로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고요.”라고 그녀는 바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얘기했다. 감사하게도 그녀는 한국인이나 타국인 둘 다와 똑같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언어 능력이 있다. 하지만 자신이 아직 어려서 필요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지 못했다고 느낀다. 그녀가 생각하는 또 다른 목표는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는 일이다. 올해는 두 나라가 외교 관계를 맺게 된 지 30년이 된 해다. 여러 가지 행사가 계획되었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모두 취소되었다. 지금 에바 씨는 관련된 인스타그램 데이터를 번역하거나 콜센터에서 통역 봉사를 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택시 잡는 법에서부터 공항 화장실에 갇힌 사람을 진정시키는 일까지 온갖 일을 하고 있다. 스물여덟인 그녀는 꿈을 꿀 수 있는 충분한 재능과 시간이 있다. 그것도 두 개의 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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