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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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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2021 AUTUMN 145

색다른 지역 관광을 주도하다 색다른 지역 관광을 주도하다 전라북도 농촌 도시인 순창에 사는 레아 모로 씨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구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길 원한다. 레아 모로는 매주 닷새동안 전라남도 순창군 투어 버스인 ‘풍경버스’에서 안내를 진행한다. 풍경버스는 강천산 군립공원, 전통고추장 민속마을, 채계산 등 순창의 주요 관광명소를 돈다. 프랑스 리옹 근처 인구 1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 이제롱(Yzeron) 출신인 레아 모로 씨는 자신이 ‘주류 여성’이 아니라고 소개한다. 케이팝 그룹 중 BTS와 블랙핑크에 감탄하긴 해도 그녀가 아주 좋아하는 가수는 인디밴드 새소년이다. 그리고 서울의 명소보다 소도시의 생활을 선호한다. 풍부한 전통 문화와 관습이 남아 있는 전라북도 시골 도시인 순창에서 레아 씨는 지역 공무원으로 관광 홍보 일을 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외국인이 지역의 관광 명소를 격찬하며 홍보하는 걸 보면 당연히 놀란다. 레아 씨의 한국어 발음은 완벽하지 않지만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전달할 때는 자연스럽게 기분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순창은 고추장과 많은 명승지로 유명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쉽게 닿지는 않는 곳이다. 더 많은 방문객을 유치하고 이들이 주변을 쉽게 둘러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순창군은 2019년에 버스 투어를 도입했고 이를 위한 가이드를 찾고 있었다. 재즈 카페를 운영하는 레아 씨의 친구가 그녀를 추천했다. “제가 불어, 영어, 한국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인과 외국인 관광객 모두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친구가 설득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이미 유튜브 여행 채널을 운영하고 있었고 관광산업 관련 경험도 있었다. 순창군이 그녀를 위해 관광 홍보관 자리를 만들기로 결정했지만 외국인을 공무원으로 채용하기 위해서는 상부 기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6개월 후에 그녀는 홍보관으로 채용되었다. 지역 사람들은 그녀를 “프랑스 공무원”이라 부른다. 레아 씨는 군에서 인기가 많다. 그녀는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데 보관함에는 작업용 장갑, 아줌마 바지, 카메라와 한복이 들어 있다. 그녀의 일을 수행하면서 농부들에게 도움을 줘야 할 때도 있고 비디오 영상을 찍고 싶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KBS의 같은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는 것 역시 자신이 맡은 홍보 일의 일부라 생각한다. 그녀는 소도시에는 볼 게 별로 없다는 편견을 떨쳐버리고 한국에는 서울과 케이팝과 케이드라마 외에 훨씬 더 경험할 게 많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방랑벽 고향 마을 이제롱에서 순창까지 오게 된 건 여행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프랑스 시골에서 자란 레아 씨는 늘 바깥세상이 궁금했다. 그러다 어린 시절 가족이 발리에 배낭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오토바이를 탔어요. 부모님은 저와 제 여동생을 다리 사이에 태우셨죠. 이 여행이 제 삶의 모든 걸 바꿔놓았다고 생각해요.”라고 그녀는 회상한다. “여행을 통해 세상에는 다른 모습의 사람, 다른 문화, 다른 언어가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게 더 많은 기회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레아 씨는 호주에서 18개월 동안 일하고 영어를 배우고 때때로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Great Barrier Reef)에서 다이빙을 즐겼다. 이후 태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동남아시아 여행을 했다. 결국 여행 산업에 마음을 두고 온라인 수업을 듣고 관광경영 학사를 취득했다. 이 수업이 요구하는 것 중 하나가 한 나라에서 6개월간 인턴을 하는 거였다. 한국인 친구가 광주에 있는 페드로 하우스와 여행 카페를 추천했다. 2016년 그녀는 한국에 왔고 거의 2년 동안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게 되었다. “광주를 사랑하게 되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역사를 좋아했던 할아버지로부터 한국 역사에 대해 배웠어요. 할아버지는 남한과 북한에 대해 알려주셨죠. 하지만 광주와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어요. 광주는 한국의 현대사와 한국사회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좋은 곳이었어요.” 광주에 사는 동안 그녀는 전라도 지역을 많이 여행했고 특히 인근 섬들을 포함해 외진 곳들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외국인을 위한 관광정보가 없었기 때문이 이 여행들은 외국인 배낭 여행자에게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페드로 하우스의 주인 페드로 김(본명 김현석)과 함께 가이드북을 쓰게 되었다. 책은 출간되지 않았지만 온라인에서 “전라 고 (Jeolla Go)"라는 이름의 채널로 재탄생되었다. 나중에 경상도 지역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그녀는 조선산업이 대부분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거제도의 문화센터에서 한동안 일하기도 했다. 광주로 돌아왔을 때 순창에서의 일자리는 좀 더 지속적인 일을 추구했던 그녀에게 마침 좋은 기회가 되었다. 모로는 모국어인 프랑스어와 한국어는 물론 영어에도 능통해 주로 순창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최근에는 한국인을 더 많이안내한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그의 한국말 설명을 들으며 순창의 여러 장소를 흥미롭게 돌아본다. ⓒ Lea Moreau 아주 바쁜 가이드 관광 홍보관이자 경험 많은 배낭여행자로서 레아 씨는 다른 여행자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데 즐거움을 갖는다. 그녀는 소도시에는 볼 게 별로 없다는 편견을 떨쳐버리고 한국에는 서울과 케이팝과 케이 드라마 외에 훨씬 더 경험할 게 많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녀는 순창에는 한국에서 가장 긴 출렁다리 중 하나가 있다고 예를 든다. 또한 봄에는 벚꽃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곳 중 하나로 유명한 진해나 하동보다 덜 붐빈다. 가을에는 강천산국립공원의 단풍이 유혹적이다. 하지만 그녀가 새 일을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 코로나 팬데믹이 닥쳤고 관광은 사실 거의 정지된 상태다. 미소 짓는 얼굴 모습을 하고 오픈탑 형태를 갖추고 두 개의 버스를 합쳐 특별히 제작된 순창 시티투어버스는 현재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약 10명 정도 실어 나른다. 팬데믹 방침에 따라 모두 버스를 타기 전에 체온을 측정한다. 투어는 외국인 승객이 없을 때는 한국어로 진행된다. 대부분의 여행이 가상체험으로 이루어지는 이때 레아 씨의 홍보 일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지속된다. 매주 한 번 정도 그녀는 ‘전라 고’에 새로운 내용을 업로드하고 순창군의 공식 유튜브 채널인 ‘순창 튜브’에도 협업을 하고 있다. 이런 일을 그녀는 가장 좋아한다. “영상 촬영을 좋아해요. 고등학교 다닐 때 저희 반은 마다가스카로 여행을 갔고 그때 제가 촬영을 맡았어요. 물론 그때 찍은 영상의 질이 아주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촬영 기술이 좋아진 게 분명하다. 작년에 관광 비디오 컨테스트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150만원 상금으로 그녀는 파노라마 촬영을 위해 드론을 구입했다. 현지 이웃들 사이에 ‘프랑스 공무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모로는 현재 순창군 미생물산업사업소 미생물계 소속 직원이다. 순창은 고추장, 된장으로 유명하고 미생물산업사업소는 이런 발효 음식을 연구하고 홍보하는 일을 맡고 있다. 덕분에 모로는 고추장과 된장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매력에 관해 한국사람만큼 잘 안다. ⓒ Lea Moreau 꿈을 살다 레아 씨는 최근에 순창군과의 계약을 3년 연장했다.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일상을 공유함으로써 한국을 좀 더 잘 알게 되는 거예요.”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제가 한 곳에 머무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가 만나는 사람들과 사귄 친구들 때문이에요. 한국인은 정말 환대해 줘요. 외국인을 보면, 특히 시골에서는, 도움을 주려고 하죠. 제게는 그런 만남이 그 자체로 하나의 모험이 되고요.” 레아 씨는 자신의 한국어가 완벽하지 못함에도 동료 공무원들이 자신에게 행정 시스템과 일에 대해 알려주려고 애를 쓰는 걸 고맙게 생각한다. “저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저를 신뢰하는 걸 알고 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고마운 생각에 그녀는 일주일에 10시간 온라인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레아 씨의 개인적인 삶의 모토는 “인생을 꿈꾸지 말고 꿈을 살아라”이다. 그녀는 한국에서의 삶과 여행에 대한 책을 쓰는 것, 여행 TV쇼를 만드는 것, 지역 산업을 좀 더 홍보해서 지역공동체에 기여하는 것 등 미래에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좀 더 여행을 많이 하고 자신의 글로벌 여정을 공유하도록 영감을 주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그녀는 말한다. 조윤정 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허동욱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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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2021 SUMMER 465

대만족의 삶이라 말하는 니코 대만족의 삶이라 말하는 니코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Kordonias Nikolaos) 셰프는 어린 시절 맛본 지중해 요리를 오랫동안 즐겁게 만들고 있다. 여러 해를 길 위에서, 다양한 부엌에서 보낸 후 정착한 서울에서 자신의 식당을 경영하며 요리하고 있다. 서울 중심지에 위치한 익선동에서 한 블록 떨어진 작은 골목길에 예상치 못한 그리스문화의 안식처가 손짓한다. 한옥에 들어선 ‘니코 키친’이 토착 그리스 요리를 선보이면서 단골손님을 만들어내고 있다. 식당 주인인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셰프, ‘니코’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는 에게해에 있는 사모트라키섬에서 성장한 자신의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들려준다. 이 섬은 날개를 단 승리의 여신 니케를 비롯해 신화의 위대한 신들의 성소가 있는 곳이다. 자신의 고향인 이 고대의 섬을 니코는 목가적으로 묘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얀색으로 칠해진 집들로 가득한 그리스의 섬을 떠올리게 한다. “아름답고 조용하고 사람들은 친절해요. 삶의 속도는 느리고요. 사람들은 느긋하고 여유롭죠. 걱정을 하지 않아요. 집이 있고 일이 있으니까요. 삶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아요. 하지만 원하는 대로 살고 있고 행복하죠.”물론 게다가 “아주 좋은 음식”도 있다. 대화에서는 유기농 생산품, 신선한 닭, 사모트라키섬 주위의 코발트 색 바다에서 잡은 맛있는 생선에 대해 풍부한 얘기가 오갔다. 성장기에 엄마와 할머니가 만든 음식이 그를 사로잡았다. “아마도 냄새였을 거예요.”라고 니코는 말한다.이 모든 게 현재의 그의 삶과 일에 대해 말해준다. 2004년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곧바로 다른 음식의 냄새를 알아차렸다. 곧 냄새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에서 요리하는 포장마차의 냄새였고, 아주 달랐어요. 고추, 김치 같은 냄새가 공기에 떠다녔죠.”라고 그는 기억을 되살린다. 그는 국제적 정취로 가득한 서울의 이태원에 있는, 지금은 문을 닫은 그리스 식당 산토리노에 일자리를 얻었다. 어린 시절 태권도 수업 외에는 한국에 대한 경험이 없는 그는 한국이 어떤 곳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한국행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이동은 그에게 자연스러웠다. 지중해와 카리브해 지역의 항구 사이를 운행하는 크루즈 배에서 일한 후 그는 뉴욕의 요리학원에서 공부했고 맨해튼에서 명망 있는 셰프들과 일했다. 그 후 지인이 식당을 여러 개 운영하는 캐나다에서 6년을 보냈다. 오너 셰프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는 아침마다 서울 익선동에 자리한 레스토랑 니코키친의 한옥 문을 직접 연다. 그는 자신의 식당을 찾는 손님들이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곁들인 휴식을 즐기며 아름다운 그리스를 상상하길 바란다. 한국에 정착하다 이태원에서 일하는 동안 니코 씨는 우연히 산토리노가 들어선 건물에서 일하는 서현경 씨를 만났다. 그들은 오가며 마주치다가 결국 결혼으로 골인했다. 니코는 그리스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서 씨는 이전에 여러 해를 살았던 일본으로 되돌아갈 계획을 보류하고 있었다. “어떤 일들은 그냥 운명적인 것 같아요.”라고 니코 씨는 서울에 완전히 정착하게 된 일에 대해 얘기했다. 2018년에 니코 씨와 그의 아내는 ‘니코 키친’을 열었다. 특별히 한옥을 찾아 나선 건 아니었지만 한옥의 건축 양식이 마음에 들었다. 이 집을 샀을 때 불을 먹는 신화적 동물인 해태상 두 개가 있었는데 이전에 이곳에 입점한 카페에 남아 있었던 거였다. 해태상은 꽃나무 화분으로 가득한 작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지키고 있다. 니코 키친은 조선왕조의 군인들이 종묘 주위를 순찰할 때 사용한 순라길에서 연결된 골목길에 위치한다. 종묘와 이어진 곳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이 있다. 가까이에는 역사가 오래된 불교 사원이 있고 골목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한국의 전통적인 색동천을 전시하는 색동박물관이 있다. 식당은 매일 영업을 하며 니코 씨가 모든 요리를 한다. 그의 아내는 그가 일중독자라고 하지만 그는 아주 행복해 보인다. “이게 제 삶이고 저는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라고 그는 말한다. “저 자신이 음식을 좋아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제가 만든 음식을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또 방문하는 게 좋아요.” 점심과 저녁 사이에 니코 씨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이때 그는 서울의 여러 곳을 걸어 다닌다. 궁궐이나 절, 서울 한복판을 흐르는 청계천에도 간다. 팬데믹 전에는 사우나에서 몸을 풀기도 했는데 지금은 참고 있다. 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여유 있게 식사하고 와인을 맛보고 긴장을 푼다. 바로 이것이 니코 씨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며 그가 원하는 식당의 분위기이다. 니코키친의 셰프는 오직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한 명이다. 그가 나고 자란 에개해의 작은 섬, 사모트라키섬의 맛과 가장 비슷한 맛을 내기위해 신선한 그리스식 재료와 레시피를 사용한다. 니코키친의 작은 공간 곳곳에는 그리스를 떠올리는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다. 냉장고의 한 면에는 그리스의 상징적인 지역 사진이 프린팅 된 귀여운 마그넷들이 붙어있다. 식도락가들이 발견한 곳 익선동에서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떨어진 조용한 골목에 위치한 니코 키친은 그냥 지나치다 들어오는 손님이 많지 않다. 그렇지만 이곳은 늘 예약이 꽉 차 있다. 요리 프로그램을 향한 한국인의 채워지지 않는 식욕이 이 식당으로 이어졌고, 니코 씨는 ‘여기GO’ ‘올리브쇼’(올리브 채널) 등 몇몇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손님으로도 심사위원으로도 출연했다. 미디어 노출이 많아지면서 아침 일찍부터 식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전화와 이메일 연락이 온종일 오게 되었다. 니코 씨는 텔레비전 출연의 혜택을 인정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요리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 메뉴는 그리스 가정식을 바탕으로 한다. 가지와 다진 소고기로 만든 그리스 전통 음식인 무사카는 지속적으로 손님들이 찾는 요리다. 페타 치즈를 넣은 그리스 샐러드, 브라타 샐러드, 치킨 수블라키와 새우 사가나키도 인기 메뉴다. 그리스 음식이 아직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기 때문에 피자나 파스타도 메뉴로 제공된다. 하지만 니코 씨 자신만의 스타일로 직접 만든 사워 반죽을 사용해 만든다. 퓨전 메뉴를 선택한 건 좀 더 자유롭게 요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기분이 날 때면 스페인 요리나 이태리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자유로움을 좋아한다.하지만 그가 만드는 음식의 핵심은 항상 같다. 건강한 지중해 스타일의 음식으로 신선하고 자연의 재료로 만든 음식이다. 대부분 채식이고 무설탕에 튀김은 최소로 한다. 과거에는 그리스 식재료를 구입하기 어려웠는데 요즘은 원하는 것을 온라인으로 모두 구할 수 있다. 특정한 치즈나 다른 재료를 급하게 구해야 하면 출근길에 그가 아직 살고 있는 이태원의 가게에 들르면 된다. 대부분의 식당처럼 니코 키친 역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경영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리스 대사관의 직원들과 근처 절의 스님들을 포함해 많은 손님들이 단골이다. 불교 경전의 여러 장면을 묘사한 다채로운 색의 절 외관이 식당의 정문 위 너머로 보인다. 니코키친은 테이블 4~5개가 전부인 작은 레스토랑이고 모든 좌석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니콜라오스와 그의 아내는 이 곳을 찾는 모든 손님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니코키친은 테이블 4~5개가 전부인 작은 레스토랑이고 모든 좌석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니콜라오스와 그의 아내는 이 곳을 찾는 모든 손님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앞날들 자신이 선택한 제2의 고향인 한국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본 후 니코 씨는 잘 관리된 빌딩과 거리, 그래피티 같이 공공 지역의 흉물이 없는 것, 그리고 교양 있고 친절한 한국인에 대해 얘기했다. “여기는 천국 같아요. 완벽한 곳이에요. 그래서 이곳에 사는 게 행복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그리스를 많이 그리워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팬데믹이 지나가고 일상이 회복되면 사모트라키섬에 가보고 싶어 한다. 좀 쉬면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좋은 음식을 맛보고 바다낚시도 하고 싶다. 그는 자기 인생의 다음 단계를 그려보기도 한다. 그건 퓨전 음식 없이 온전히 그리스 요리만을 제공하는 좀 더 큰 식당을 여는 것이다. 그동안 상황을 살펴왔고 이제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한 곳에서 모두 실현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요. 물론 돈도 벌고요.”라고 그는 말한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이것이 니코 씨의 간단한 철학이다. 그렇게 말하자 그의 아내가 끼어들어 응수하며 비밀을 폭로했다. 니코 씨가 햄버거를 좋아하고 가끔은 켄터키 프라이 치킨을 즐긴다고. 음식이 그를 한국으로 이끌었고, 그를 여기에 붙들어 두었으며 그를 행복하게 한다. “하루 일과가 끝날 때 만족스럽지 않으면 피곤해집니다. 하지만 만족스러워 미소 지을 수 있으면 모든 문제와 피로는 사라지죠.” 조윤정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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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2021 SPRING 603

판소리에 매혹되다 자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확실하게 아는 행운을 아무나 갖게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로르 마포 씨는 그 행운을 거머쥐었다. 자신의 천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판소리를 한 번 듣는 것으로 족했다. 어떤 주저함도 없이 그녀는 서울에 오기로 결정했고 이제 한국의 전통 성악 장르인 판소리 기예를 연마하고 있다. 언젠가 세계 곳곳에서 공연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파리의 삼정전자에서 일하고 있을 때 로르 마포 씨가 갖고 있던 꿈은 집을 사서 아이들이 북적이는 탁아소를 운영하는 거였다. 적어도 판소리 공연을 보러 가기 전 까지는 그랬다.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첫눈에 반해버렸죠.” 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한국의 전통 사설 노래에 완전히 빠져든 그녀는 공연 내내 웃음 지으며 생각했다. “좋아. 정말 좋아. 이게 내가 하고 싶은 거야.” 공연이 끝난 후 마포 씨는 소리꾼 민혜성 씨에게 다가가서 판소리를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물었다. 양반 계급의 남자와 평민 출신의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유명한 사랑 이야기인 의 일부를 불렀던 민 씨는 판소리를 배우려면 한국에 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알려줬다. 회계학 전공자이자 케이팝 팬이기도 한 마포 씨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제가 한국에 가면 저에게 판소리를 가르쳐 주실래요?” 2년 동안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고 가족과 친구를 설득하고 준비를 한 후 2017년에 마포 씨는 서울에 왔다. 민 씨는 훈련을 하는 데에 적어도 10년은 걸릴 거라고 경고했었다. 하지만 마포 씨는 걱정하는 어머니께 “일 년만 해 볼게요.”라고 말했다. 마포 씨가 특별히 모험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느낌만 믿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약속대로 마포 씨는 판소리 다섯 편 중 하나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이수자인 민 씨에게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배울 게 많았다. 판소리에서는 스토리텔링이 중심이기 때문에 가사를 이해하는 게 중요했다. 따라서 한국어와 한자를 배우는 게 먼저였다. 프랑스에서 우연히 를 듣고 판소리와 사랑에 빠진 로르 마포 씨는 판소리를 배우기 위해 2017년 한국으로 날아왔다. 그리곤 당시 공연을 했던 소리꾼 민혜성 씨의 제자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판소리를 잘 배우기 위해 한국어부터 익혀야 했던 그는 전문적인 소리꾼이 되기 위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연습한다고 한다. 연습, 그리고 또 연습 코로나 사태 전에 마포 씨의 하루는 오전 11시에서 저녁 9시까지 수업과 연습, 그리고 때때로 공연이나 TV 출연으로 채워졌다. 그녀는 남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느꼈다. 가사를 이해하는 건 둘째 치고 발음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했다. 발음을 제대로 하기 위해 어떨 땐 일주일 간 펜을 입에 가로로 끼워 넣고 연습하기도 했다. “제가 한국 사람처럼 노래를 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문적인 소리꾼이 되고 싶어요.”라고 깊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를 가진 36세 마포 씨는 말한다. 여전히 초보자였던 시절에 잊지 못할 순간이 찾아왔다. 2018년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프랑스 엠마누엘 마크롱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기념하기 위해 엘리제궁에서 그녀가 노래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카메룬 태생의 프랑스 국적을 가진 그녀는 2019년에 있었던 공연을 더 특별하게 생각한다.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스승과 다른 소리꾼들과 함께 한 공연이었다. 청중 속에는 그녀의 가족뿐 아니라 지역의 고위 관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제가 공연하는 걸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해요. 다른 청중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느라고요. 어머니는 정말 뿌듯해 하셨어요.”라고 마포 씨는 말한다. 각각의 노래와 그 메시지가 마포 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판소리는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한 동생과 욕심 많은 형의 민속 설화를 바탕으로 한 ‘흥부가’이다. “흥부가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예요. 모든 가족은 다르긴 해도 문제를 갖고 있죠. 저희 가족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흥부가가 전하는 메시지인 좋은 사람으로 살면 보상을 받게 된다는 걸 믿어요.” 그녀의 목표는 ‘흥부가’를 완벽하게 부르는 것을 넘어서 세 시간이 걸리는 전곡을 공연하는 것이고 세계 곳곳에서 그렇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또 아이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는 것도 꿈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처럼 아이들이 판소리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걸 도와주고 싶어 한다. “파리에서 저는 종종 우울했어요. 왜 그런지도 모르고 제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판소리를 부르면 제 마음이 아주 선명해지는 걸 느껴요.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이 아름다운 음악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마포 씨는 매일 엄마와 얘길 나누는데 어머니는 매번 좋은 남자를 만났는지 묻는다. 그때마다 그녀는 “아직요.”라고 대답하고 있다. 때때로 한국어와 불어를 섞어 공연을 하는 마포 씨의 꿈은 언젠가 판소리를 불어로 완창하는 것이다. 한국 고유의 민속음악인 판소리를 불어로 노래하기가 쉽진 않지만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 중이다. 팬데믹의 해 2020년은 마포 씨에게 특히 어려운 해였다. 공연은 허락되지 않았고 그녀의 비자로는 예술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현재 자신의 유튜브 채널 ‘로르랑 아리랑’과 스승의 수업을 불어로 번역해 내보내는 ‘봉주르 판소리’를 통해 청중을 만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공연을 하지 못하니 수입이 없다. 그럼에도 마포 씨는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살고 있는 하숙집 주인은 돈을 받지 않고 그녀가 필요한 것을 조달해 주면서 그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무대 공연을 위해 마포 씨에게 한복을 선물하기도 했다. 마포 씨는 그런 그녀를 언니라고 부른다. 마포 씨는 한국어의 존칭어나 관계어가 가끔 혼란스럽긴 하지만 사람들 덕분에 한국에서의 경험은 대체로 좋았다고 말한다. “파리의 한국 친구들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살 곳을 찾거나 은행 계좌를 만드는 것 같은 기본적인 일에 도움을 주었어요.” 라끌레트 치즈나 후식 케이크인 에클레어 같은 맛있는 프랑스 음식을 그리워하긴 하지만 이를 대체할 자기만의 한국 음식을 찾기도 했다. 한국인들이 숙취용으로 좋아하는 곰탕은 술을 마시지 않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2020년의 모든 것이 음울한 건 아니었다. 마포 씨는 명망 있는 한국예술종합대학교에 합격하게 되어 꿈을 이뤘다. “또 학생이 되고 모든 것을 번역해야 하는 일”이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녀는 아주 기뻤다. 진짜 걱정거리는 학비다. 살면서 처음으로 돈에 쪼들리게 되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무대에서 공연할 때 청중이 저를 판소리를 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판소리 소리꾼으로 봐주기를 바라요,” 후회는 없다 하지만 마포 씨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단 한 번 자신의 선택을 의심한 적이 있다. 일 년에 두 번 하는 집중 판소리 훈련인 ‘산(山) 공부’를 처음 했을 때였다. “죽는 줄 알았어요.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훈련을 했어요. 연습하고 먹고, 연습하고 먹고.” 그녀는 당시를 떠올렸다. “스스로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라고 물었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와, 내 판소리가 정말 좋아졌네’라고 했죠.” 산 훈련이 제대로 된 목소리와 복잡한 기술을 익히는 데에 필수적이었음을 그녀는 인정한다. 마포 씨는 또 다른 포부를 갖고 있다. 판소리를 불어로 부르는 것이다. 때때로 한국어와 불어를 섞어서 공연을 하기도 하는데 그게 더 어렵게 느껴진다. “한국어로 부를 때의 기술은 달라요.”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한국어로 노래할 때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요. 근데 불어로 노래하면 그냥 노래 같아요. 불어로 부를 때도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게 하고 싶어요.” 어떤 언어로 노래를 하든지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음 문장에 집약되어 있다. “무대에서 공연할 때 관중이 저를 판소리를 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판소리 소리꾼으로 봐주기를 바라요.” 그녀는 올해 무대에서 다시 공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흥부가’를 완전히 익힌 후에 좀 덜 알려진 ‘수경낭자가’로 넘어가는 것도 목표이다. 사랑 이야기인 ‘수경낭자가’는 오늘날에는 단지 몇 명의 소리꾼에 의해 이어지고 있는데 민혜성 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언젠가 한 사람만이라도 제가 스승님이 판소리하는 걸 들었을 때와 같은 느낌을 갖고 ‘와, 나도 판소리 배우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마포 씨는 기대에 차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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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2020 WINTER 476

두 개의 언어로 꿈꾸다 러시아 태생이지만 한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이에바 씨는 한국인들이 놀랄 정도로 한국어를 잘한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만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한국과 러시아의 문학을 양국에 소개하고 싶어 한다. 이에바 씨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어를 더 잘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는다. 그녀가 나오는 유튜브 영상에는 그런 댓글이 몇 십 개 달린다. MBC 에브리원 퀴즈 예능 프로그램 , KBS 쿨FM 에 고정으로 출연하는 에바 씨는 사람들이 그녀가 러시아인임을 잊게 만든다. 하지만 두 개의 언어를 유창하게 한다는 게 가끔은 어떤 언어와도 편하지 않음을, 또 두 개의 문화에 익숙한 게 가끔은 어디에서도 고향을 갖지 못하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그걸 에바 씨가 순간적으로 깨닫게 된 건 2017년 외대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처음으로 3분짜리 텍스트를 통역하는 일을 하게 되었을 때 한국어도 러시아어도 모르는 것처럼 느낀 멘붕의 순간이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안 들렸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에바 씨는 피아노 강사로 한국에 초대된 어머니를 따라 처음 한국에 왔다. 에바 씨와 엄마가 살던 도시 카바로프스크의 한국인 선교사를 통해 일이 주선되었는데 한국인 교회를 다니던 외할머니를 통해 연결되었다. 그렇게 해서 에바 씨는 반에서 유일한 외국인으로 경기도 의왕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저는 외국인이라기보다 외계인이었어요.”라고 그녀는 기억을 되살렸다. 하지만 6년 후에 러시아로 돌아가게 되면서 일종의 문화 충격을 경험한다. 그리고 다시 6년이 지나서 국가 장학금을 받고 한국의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때 또다시 문화 충격을 경험한다. 쌍방향 문화 충격 문화와 언어의 교차 경험은 러시아 대학에서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하면서 동시에 외대에서 미디어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할 때 정점에 달했다. “한국에서 넉 달을 지내고 러시아로 가서 한 달을 지내곤 했어요. 러시아에 가면 모든 것이 항상 그대로였어요. 근데 한국에 돌아오면 늘 무언가가 변해 있었고요.”라고 그녀는 기억한다. “한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한동안 힘들었어요. 하지만 점차 적응을 하게 되었어요. 이 경험을 통해 제가 좀 덜 예민해지고 새로운 것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이게 된 거 같아요.” 2015년에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에바 씨는 이전에 같은 반 학생이었던 남자와 결혼해 그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한 건 편의 때문이었다. 그녀의 원래 성은 코노노바였고 사람들이 의도적이 아니어도 이상하고 별난 이름으로 불러댈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한국 이름이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 잠시 얘길 나누다 보면 그녀가 옆집에 사는 젊은 여자 같기 때문이다. 에바 씨는 인기 있는 어린이 텔레비전 프로그램 를 보며 자랐고, 남자 친구가 2년간 군복무를 하는 동안 변함없이 기다린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 친구가 서울 외곽의 남양주에서 복무했다고 하면서, “사실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전화도 할 수 있었고 한 달에 한두 번 그를 만날 수 있었어요.”라고 했다. 많은 한국 여자들이 남편에 대해 말할 때 정색을 하며 장난스럽게 말하듯 그녀도 “그렇게 자주 보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근데 지금 우리는 너무 자주 보는 거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워낙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부부지만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에바 씨는 종종 남편에게 나가서 운동을 하든 뭐라도 하라고 잔소리를 한다고 한다. 팬데믹이 아니라면 에바 씨는 아마도 국제 교류와 관계된 일을 하면서 좀 더 바쁘게 지낼 것이다. 현재 국제 행사가 거의 치러지지 않아서 그녀는 번역일을 좀 더 하고 있다. 통역은 수정하거나 실수를 고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스트레스라고 느낀다. “끝나고 나면 기분은 좋지만 왠지 공허하기도 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번역할 때는 마감을 지키고 완벽하게 만족할 수 없는 게 스트레스고요. 나중에 내가 한 작업을 보면서 ‘왜 이렇게 썼지?’라고 생각하기도 하죠. 하지만 적어도 눈으로 볼 수 있는 최종 결과물이 있어 좋아요.” 궁극적으로 에바 씨는 문학 번역을 하고 싶다. 현재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고, 언젠가 박민규 작가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비롯해 여러 작품을 번역하고 러시아 소설도 한국에 소개하기를 원한다. 이 분야에서 그런 작업을 할 수 있기 위해서 두 개의 언어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에바 씨는 한국어와 러시아 둘 다 편하게 사용하고 있고 쌍방향으로 통역과 번역을 한다. 에바 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제 한국에서 좀 더 오래 살았으니 아마도 한국어가 더 편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누구를 상대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요.”라고 말한다. 언어 유창성 통역과 번역이 자신에게 성취감을 준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에바 씨를 대중에게 알린 건 방송이었다. 사실 그녀가 언어에 그토록 열심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원래 갖고 있던 꿈이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처음 TV에 얼굴을 알린 건 언어 퀴즈쇼인 에서였다. 다른 외국인과 겨루어 일등을 차지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TV조선의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로 일했다. 제목과 달리 그녀는 서울 시내를 탐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처음에는 지역 음식을 소개하고 나중에는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는 식이었다. “문어를 잡거나 빵집에서 밀가루 포대를 나르거나 하는 아주 힘든 노동을 했어요. 벼를 심는 것 같은 한국적인 경험도 했구요.”라고 에바 씨는 그 시간을 떠올렸다.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일들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상어와 함께 다이빙하기였다. 한국은 크기에 비해 다양한 특색의 지역들이 있으며, “우리가 늑대를 무서워하는 것보다 늑대가 사람을 더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 외에도 그녀는 텔레비전에서는 누구나 좀 더 활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침 방송 리포터로서 명랑 쾌활하고 에너지를 뿜어내야 함을 알게 된 거였다. “제가 생각보다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인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필요할 때는 좀 더 ‘연기’를 해야 했죠”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런 경험과 자신의 언어 능력 때문에 에바 씨는 단순히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외국인이 한국 텔레비전에서 인기를 얻는 현상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러시아에서는 텔레비전에 외국인이 많이 나오지 않아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려면 시청자들의 언어를 할 줄 아는 거 외에 다른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한국에서는 한국어를 할 줄 알면 기회가 주어져요. 이곳만의 특별한 점이고 물론 고맙게 생각할 일이죠.” 하지만 그녀는 가끔 너무 유창하지 않은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귀여운데 실수를 하거나 사투리를 쓰거나 발음이 좀 별나거나 하면 사람들은 더 즐거워하는 거 같아요.” 결국 방송은 엔터테인먼트이기 때문이다. 에바 씨는 “방송에서 계속 일하려면 노력을 해서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에바 씨는 한국 사람처럼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녀를 하나의 ‘캐릭터’로 생각한다. 즉 한국 사람처럼 말하는 외국인 캐릭터인 것이다. 이게 짐을 덜어주긴 한다. “사람들은 제가 아주 머리가 좋다고 생각해요. 근데 말을 잘하는 거랑 머리가 좋은 건 서로 다른 거죠. 저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언어를 잘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역사나 전통에 관해서 모르는 게 많아요. 제가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있을 뿐이죠. 그래서 좀 더 공부를 해서 저에게 부족한 면을 메워 나가려고 해요.”라고 그녀는 다짐한다. 틈을 메꾸다 에바 씨는 여전히 프로그램 진행자를 꿈꾸지만 지금은 진입 장벽이 낮고 제약이 적으면서 훨씬 더 다양한 콘텐츠를 가능하게 하는 유튜브를 고려해 보고 있다. 세상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건 이전처럼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다. 에바 씨는 결혼 후 “그래, 이제 여기서 영원히 사는 거야”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 지금은 여기에서 사는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남편은 언젠가 러시아에서도 살아보고 싶어 해요. 아니면 그냥 제3의 나라에서 살 수도 있고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가 아는 외국인들은 단순히 사람들이나 음식, 문화를 소개하면서 칭송하거나 비교하는 것 이상을 제공할 수 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학생들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요. 혹은 사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으로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고요.”라고 그녀는 바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얘기했다. 감사하게도 그녀는 한국인이나 타국인 둘 다와 똑같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언어 능력이 있다. 하지만 자신이 아직 어려서 필요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지 못했다고 느낀다. 그녀가 생각하는 또 다른 목표는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는 일이다. 올해는 두 나라가 외교 관계를 맺게 된 지 30년이 된 해다. 여러 가지 행사가 계획되었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모두 취소되었다. 지금 에바 씨는 관련된 인스타그램 데이터를 번역하거나 콜센터에서 통역 봉사를 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택시 잡는 법에서부터 공항 화장실에 갇힌 사람을 진정시키는 일까지 온갖 일을 하고 있다. 스물여덟인 그녀는 꿈을 꿀 수 있는 충분한 재능과 시간이 있다. 그것도 두 개의 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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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2020 SUMMER 264

혼합과 움직임의 기술 거의 20년 동안 외국인 거주자로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탈리아 태생 건축가 시모네 카레나 씨는 한국 생활의 빠른 속도에 끊임없이 영감을 받는다. 미래 도시의 실험실로 부상할 거라고 믿는 한국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닉하면서 그는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관계된 공간에 하이브리드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즐거움을 느낀다. 밥 말리로 인해 모든 여정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고향 토리노의 폴리텍대학 건축학과 학생이었던 시모네 카레나 씨는 스스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목적지는 자메이카. 이제는 고인이 된 전설적인 레게 가수 밥 말리의 고향이다. “어렸을 때부터 밥 말리에 열광했어요.”라고 카레나 씨는 기억을 되살린다. “열한 살 때 삼촌이 저보고 ‘나중에 크고 나면 이 사람을 싫어할 거야. 그저 대중음악일 뿐이야’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전 이렇게 말했죠. ‘아뇨. 저는 자메이카에 가서 그의 가족을 만나고 이 음악에 대해 배울 거예요.” 자메이카의 기술대학 건축과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는 동안 카레나는 실제로 밥 말리의 아내와 아이들을 만났다. 또한 레게음악에 뿌리를 둔 전자음악 장르인 더브(dub)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베이스를 취해서 자신만의 소리를 덧붙이면 돼요. 건축에서 구조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요소를 가미하는 것과 같은 식이죠.”라고 카레나 씨는 설명한다. 이러한 접근은 건축가로서 그가 하는 일에도 적용된다. 또한 한국에서 사는 그의 삶 속에서도. 예를 들어, 그는 서울 북촌 언덕 위에 위치한 전통 기와집 한옥에서 살고 있다. 한국에 정착한 지 20년이 되어 가는 이탈리아 건축가 시모네 카레나 씨는 결혼 후 신혼집을 알아보다가 서울 북촌에 있는 한옥에 매료되어 구입, 1년 동안 직접 개조 공사를 해서 현대적 감각의 집을 탄생시켰다. 그곳에서 3형제를 낳아 살고 있다. 하이브리드 홈 서울의 옛 중심부에 위치한 북촌은 한국의 마지막 왕조인 조선시대에 지어진 한옥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 일층집 한옥의 문과 창문은 전형적으로 나무와 한지로 만들어졌다. 카레나 씨가 매입했을 때 집은 이사 들어오기에 힘든 상태였다. “나무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원래 소박한 집이었구요. 그래서 우리가 매입할 수 있었죠.”라고 카레나는 당시를 떠올리며 웃었다. 그때가 2006년이었다. 북촌에서 집을 개조할 때는 보존 정책 때문에 제한 사항이 많다. 예를 들어, 지금은 허용이 되지만 당시만 해도 유리 창문이나 문을 만들어 넣는 건 불법이었다. 하지만 카레나 씨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풍부한 건축 유산을 이어받은 이탈리아 출생인 그가 교육과 일로써 해 온 것들이 복원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결과로 나온 ‘한옥 더브’는 옛것과 새로움이 함께한다. 귀중한 옛 건축물이 내부적으로는 완전히 현대적인 집을 감싸고 있다. 원래 남쪽을 향하고 있던 집은 복원 과정에서 서쪽을 향하게 되었다. 이탈리아를 향하면서 경복궁과 청와대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집의 중앙에는 리빙풀이 있는데 이곳은 열린 공간으로 낮에는 놀 수 있고 밤에는 휴식을 취하는 침실이다. 부엌과 다른 내부 공간은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어 1980년대의 전자음악을 떠올리는 느낌의 밝음과 따뜻하고 아름다움을 동시에 선사한다. 지하에 있는 작업실에는 천창(천장에 바닥유리창이 설치)이 있다. 카레나 씨의 아내인 패션디자이너 신지혜 씨가 그곳에서 작업하면서 위를 올려다보면 세 아들이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녀는 한옥에서 자랐고 장미나무가 자랐던 마당에서 뛰어놀던 행복한 기억을 갖고 있다. 해가 지나면서 아이들은 성장하고 테라스를 집안으로 들였다. 그곳에 심었던 살구나무도 집 안으로 들어와 나무 꼭대기가 천장을 통과해 뻗어 있고 여섯 번째 가족 일원으로 식탁 옆에 서 있다. 카레나 씨는 자신의 집이 순수하게 한옥을 개조한 건 아니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혼합 양식이죠. 우리 가족처럼요. 그래서 최종 결과도 혼합적이 될 겁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집 안에서의 삶을 구성하는 ‘리빙 실험’의 일부이다. “저는 한국 건축이 궁금해서, 또 집의 규모가 우리 집, 우리 땅이라는 느낌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했어요. 저희 동네도 너무 좋아요. 하지만 관광객들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될 수도 있지요.”라고 그는 솔직하게 말한다. 그의 리빙 실험 중간 결과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삶의 질에 만족하고 있고 아이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어서 행복해요. 근데 경제 구조는 적대적이죠.” 북촌의 많은 오래된 집들이 가게와 갤러리, 카페로 개조되고 이웃이 상업지역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는 큰 아파트 단지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학원이나 음악교습실, 혹은 수영장 같은 교육 인프라나 가족을 위한 서비스의 부족으로 이어진다. 카레나 씨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아이들이 희생이 될 것 같아 걱정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북촌의 미래를 꿈꾼다. 위로 층을 올리는 게 허용되지 않지만 흥미롭게도 밑으로 내려가는 데에는 규제가 없다. “20층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요. 핵안전지역과 새로운 지하도시를 짓는 거죠”라고 말하며 그는 웃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실내 공간이 부족해지자, 야외 대청마루를 실내로 들이는 확장 공사를 했다. 그 때문에 바깥에 있던 살구나무도 집 안에들어와 살게 되었다. 열정에 이끌려 카레나 씨는 “제 삶은 열정에 이끌려 온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되었을까 궁금할 것이다. 그의 학력은 국제적이다. 토리노 폴리텍 대학에서 건축학 석사를 받은 것으로 시작해서 옥스퍼드 대학 교환학생 프로그램, 하버드 대학 디자인학과 여름학교에서 공부하고 남캘리포니아 건축전문대 (Southern California Institute of Architecture)에서 두 번째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물론 자메이카도 빠뜨릴 수 없다. 자메이카의 경우처럼 카레나 씨를 한국으로 이끈 건 사실 음악이었다. 토리노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백 년이나 된, 가족이 운영하는 벽돌 공장에 위치해 있었다. 어느 날 한 밴드가 그곳에 와서 뮤직비디오 촬영을 했고 그는 이를 계기로 청각장애인을 위한 뮤직비디오를 만들게 되었다. 비디오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투어를 하는 동안 그는 홍익대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학과장을 만났고 교수 제안을 받았다. 카레나 씨는 2001년에 한국에 왔고 지금까지 홍대에서 재직 중이다. 그는 아내가 된 신지혜 씨가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에 만났다. 그녀는 나중에 이탈리아에서 패션을 공부할 계획이었다. 대륙을 횡단하는 연애를 거친 후 이 커플은 한국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이탈리아보다 한국에 더 많은 건축 관련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어요. 이곳에 살면서 성장 가능성을 보는 게 행복합니다.” 아이들이 리빙풀 공간에서 즐겁게 뛰어 노는 걸 보면서 살구나무 곁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자신의 뿌리를 깊이 내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모들은 더 높이 건물을 올리거나 지하로 더 파고드는 꿈을 꾸겠지만 말이다. 카레나 씨는 한국이 빠른 기술 발달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으로 인해 미래 도시의 세계적인 실험실로 급부상할 것이라고 말한다. 작업을 위한 영감들 오토바이를 타고 람보르기니를 사랑하는 속도광인 카레나 씨는 “한국의 빠른 변화는 언제나 흥미진진합니다.” 그래서 카레나 씨는 그의 비즈니스 파트너인 마르코 브루노 씨와 함께 모토엘라스티코(MOTOElastico)를 설립했고 사무실을 서울의 오래된 전통 시장 중 하나인 광장시장에 오픈했다. 왜 한국에 있기로 결정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은 기술의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실험실과 같다고 생각해요. 현대의 건축과 전통 건축의 재발명이 어떻게 국가 정체성의 일부를 이루게 되는지 보는 거죠.”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디지털 도시화는 한국에서 훨씬 더 잘 수용되고 곳곳에서 체험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디지털의 이점을 잘 이해하고 있어요. 이탈리아에서는 사람들이 누군가 염탐하거나 상업적으로 이용당할까봐 두려워해요.” 모토엘라스티코의 프로젝트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묘사되어왔다. 한국의 지식(know-how)과 이탈리아의 적극성(why-not)이 결합하여 ‘슈퍼 로컬 문화’적 작품을 생산하게 되었다. 이 회사는 건축, 인테리어 디자인, 설치, 전시 디자인, 공공 디자인, 공연, 때때로 이 모든 것의 조합과 관련한 일을 한다. 한옥 더브 외에 특히 주목을 끈 작품은 하이스트리트 이탈리아(High Street Italia)와 서울시청의 시민청이다. 전자는 트랜디한 가로수길에 위치한 건물로 로마 수로(aqueduct)를 상기시키는 외부 디자인이 독특하고 이탈리아 제품을 진열해 놓았다. 시민청은 지하의 열린 공간에 각각의 공간 목적에 따라 색을 다르게 배치했다. “공공 영역을 디자인하는 건 연극을 위해 세트장을 만드는 것과 비슷해요. 어떤 종류의 코미디 혹은 비극이 그곳에서 공연되는지를 상상해야 합니다.”라고 카레나 씨는 말한다. 그는 연극과 같은 모든 행위는 그 나름대로 재미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의 많은 프로젝트는 재미나고 언어유희를 즐긴다. 예를 들어, 탱크방(Tank Bang)은 이동이 가능한 ‘방’으로 방모양의 구성물에서 벽 기능을 하는 경찰 방패를 들고 걷고 있는 사람으로 이루어졌다. 분홍색 방패에는 펠리스(Felice)라는 단어가 적혀 있고 이는 비슷한 음의 폴리스(Police)를 말장난한 것이다. 펠리스는 이탈리아어로 ‘행복’을 의미하고 또 카레네 씨의 첫째 아들 이름이기도 하다. 그의 둘째와 셋째 아들의 이름은 포르테(Forte)와 페르모(Fermo)이다. ‘방’은 모토엘라스티코 프로젝트에서 종종 눈에 띈다. “우리는 방을 좋아해요. 노래방, 피시방, 집 안의 다양한 방 등. 방은 이제 다른 곳에서 빌릴 수도 있구요. 이걸 보면 한국 사람들이 상당히 실용적인 사고를 하는 것 같아요.”라고 카레나 씨는 말한다. 그가 북촌에 시작하고 싶은 프로젝트는 공용 목욕실과 사우나가 함께 하는 찜질방이다. 이를 통해 한옥 되살리기를 위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찜질방은 지역주민과 관광객 모두 나눌 수 있는 것이죠.” 왔다 갔다 하며 카레나 씨는 자신이 아끼는 오토바이를 “안도 바깥도 아닌 둘을 합한 움직이는 방”이라고 묘사한다. 오토바이(motocycle) 이외에도 ‘모토(moto)’는 움직임(motion)을 의미한다. “역동적인 관점, 도시를 활기차게 접근하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모토는 한 장소에서 멀어졌다가 되돌아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가족은 이탈리아와 한국을 오간다. 2017년에 이탈리아 정부는 카레나 씨의 이탈리아-한국 관계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해 작위를 수여했다. 미래에 그의 가족은 다른 곳에서 기회를 누릴 수 있기 위해 한국을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우리는 돌아올 겁니다. 한국은 돌아오고 싶은 멋진 곳이에요.”라고 확신한다. 아이들이 리빙풀 공간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걸 보면서 살구나무 곁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자신의 뿌리를 깊이 내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모들은 더 높이 건물을 올리거나 지하로 더 파고드는 꿈을 꾸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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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2020 SPRING 301

카르마가 이끈 삶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한 지 삼십 년이 지난 지금 안톤 숄츠는 주목받는 한국 전문가로 광주에 거주하면서 언론인, 비즈니스맨, TV 방송의 인기 출연자로 열심히 살고 있다. 열여섯 살 때 안톤 숄츠는 태권도 도장의 문을 두드렸다. 운명 혹은 아시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신은 이를 카르마(업보)라고 부른다. 그 후 32년이 지난 지금 숄츠는 독일에서 한국 전문가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이다. “중학생일 때 철학, 종교, 문화와 관련해 동양 세계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라고 숄츠는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보낸 십대 시절을 떠올렸다. “저의 태권도 사범이었던 심부영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단지 격투 기술뿐 아니라 정신적인 수양인 도를 추구하는 방법을 가르쳤어요.” 태권도를 배우는 동안 숄츠는 불교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도장에 문을 두드렸던 중요한 순간 이후 6년이 지난 1994년에 독일을 방문 중이었던 한국 스님의 조언을 들었다. 그 조언에 따라 숄츠는 처음으로 한국이란 나라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원래는 1년 정도 있다가 독일로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근데 보시는 대로 저는 한국에서 제 인생의 반을 보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한국 체류 초기 몇 년간 그는 서울대에서 명상과 팔괘, 그리고 노자 사상을 파고들며 동아시아학 공부에 몰두하면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 후 독일로 돌아가 함부르크 대학에 입학했다. 함부르크 대학은 당시 한국학을 공부할 수 있는 몇몇 되지 않는 독일 대학 중 하나였다. 그가 입학한 첫해에 한국학 전공자는 그 혼자였다. 일본이나 중국이 아시아학과에서 더 인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온 후 숄츠는 컨설턴트, 저널리스트, 교사의 일을 바꿔가면서 혹은 동시에 해왔다. 그는 대체로 외국인이 한국에서 사업을 할 때 도움을 주고, 한국인들에게 독일에 대해 조언해 주는 일을 했다. 안톤 숄츠 씨가 광주광역시 장덕동에 있는 자신의 집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며 광주에 정착했고, 3년 전에 이 집을 지었다. 문화적 가교 숄츠 씨는 외국 사업체가 한국에 정착하고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원스톱 서비스 회사를 차렸다. 그의 회사는 2012년 여수엑스포,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2002년 한일 월드컵대회 결승전에서도 함께했다. 숄츠는 또 미디어회사를 차려 내한한 외국인 기자들을 위해 통번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숙식과 이동을 도왔다. 2003년에서 2011년까지 숄츠 씨는 조선대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독일어와 국제커뮤니케이션을 가르쳤다. 그때 그의 가족은 대학이 위치한 광주의 남서쪽에 둥지를 틀었다. 독일의 공영방송 ARD의 정식 프로듀서이기도 했던 그는 현재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TV 토론이나 토크쇼에 정기적으로 패널로 참석하고 신문에 논설문을 기고하고 있다. 그의 명함에는 ‘자유 한자동맹 도시 함부르크 명예 대표’라고 적혀 있다. “저는 일할 때 행복해요. 종종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게 유감이라는 생각을 하죠.”라고 숄츠 씨는 말한다. 자칭 일 중독자인 그가 노동 시간이 길기로 유명한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는 건 아마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 듯하다. 특히 남북한 관계가 세계의 주목을 끌고 세계 각지의 텔레비전 뉴스 담당자가 도움이 필요할 때 그는 아주 바쁘다. 외국 텔레비전 관계자들과 협업하면서 숄츠는 비공식적으로 문화 대사로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02년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을 공동으로 주최할 때였다. 그 당시 어떤 독일 방송의 스태프들이 일본을 선호한다고 하면서 한국인들이 종종 약속을 지키지 않고 매너가 나쁘다고 불평을 했다. “저는 아마도 오해로 인해 잘못된 인상을 갖게 되었을 거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주말에 그들을 데리고 한국의 유적지를 찾아 한국 문화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고요. 월드컵이 끝날 즈음에 제 독일 동료들은 한국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했죠.”라고 숄츠 씨는 뿌듯해했다. “저는 일할 때 행복해요. 종종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게 유감이라는 생각을 하죠.” 자신의 집 서재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안톤 숄츠. 그는 현재 프리랜서 기자와 컨설턴트로 일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한국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 그는 해외에 한국을 알리는 문화 사절 역할도 하고 있다. 솔직한 비판 난민에 대한 뉴스 기사를 예로 들었다. 난민들의 망명 신청으로 정부가 그들에게 법적 난민 지위를 제공해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면서 한국 사회에 논쟁을 불붙였다. “반대자들은 난민에 대한 혐오 정서를 선동하면서 가짜 뉴스를 퍼뜨렸어요.”라고 숄츠 씨는 아쉬워했다. “명망 있는 매스컴에서조차 팩트 체크를 하지 않고 자신들의 소셜미디어 사이트를 통해 기사를 그대로 전달했지요. 나중에 그 이야기 중 상당히 많은 부분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고요.” 뉴스 매체의 진실성에 대한 토론은 자연스럽게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독일 방송국 기자였던 힌츠페터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정부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된 광주 시민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의 용기 덕분에 세상은 계엄령 하에 고립된 한국의 한 도시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츠페터 씨를 존경합니다. 그는 훌륭한 저널리스트였죠.”라고 숄츠 씨는 말했다. “근데 저는 보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거는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지금도 있다고 믿고 있어요.” 숄츠 씨는 힌츠페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김만섭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2017년 영화 에서 작은 역을 맡기도 했다. 영화의 인물은 한츠페터가 광주에 대해 보도할 때 도움을 주었던 실제 인물인 택시 운전사 김사복 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2019년 6월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제10회 이데일리 전략 포럼에 패널로 참여한 안톤 숄츠(왼쪽에서 두 번째). ‘경제 전쟁,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라는 주제로 다른 참여자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다. ⓒ 이데일리 KBS의 에서 참가자들이‘노무현 전 대통령과 언론 개혁’에 대한 주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다. 숄츠는 날카로운 분석력과 직설적이고 솔직한 화법을 인정받아 TV 시사교양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고 있다. 영상 캡처 통일에 대한 팁 독일 통일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자 숄츠 씨는 서독과 동독이 열심히 목표를 향해 노력했고 약간의 운과 완벽한 타이밍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저는 남한과 북한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있는 주변 세력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상황은 좀 더 복잡하지만요.” 한반도의 통일은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숄츠 씨는 중국과 홍콩처럼 “한 국가 두 체제” 원칙이나 다른 통일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독일 식의 통일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한국인이 비판적인 조언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유감을 표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당신은 우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지만 종종 한국인들이 다른 의견과 해결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라고 숄츠 씨는 말했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과 관련해서는 교육에서 강조하는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교육의 질이 아니라 양에 초점을 두는 것처럼 보여요. 그렇게 함으로써 학생들의 창의력을 죽이고 있고요.” “한국은 아직 (정치와 무관한) 노벨상을 받은 적이 없어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아이들은 더 많이 놀고 더 적게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부는 어떤 것을 실제로 배우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지 단순히 시험을 위한 공부여서는 안 됩니다.” 한국에서 몇 십 년을 체류한 숄츠 씨는 제2의 고향을 즐기고 있지만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새롭게 두드리게 될 또 다른 문이 나타날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죠.”라고 그는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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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2019 WINTER 212

경계인의 삶 사카베 히토미는 십대 초반에 한국에 왔고 이제 자신의 고국 일본을 떠나 타지에서 더 많은 시간을 살아 온 셈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 동안 예술가이자 교수인 그녀는 다양한 경계를 가로질렀고 그때마다 최선의 상황을 만들고자 했다. 계명대학교 Artech College에서 시각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는 사카베 히토미 씨는 어린이책 삽화가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주로 방학이나 수업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 연구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로 한국과 일본은 오랫동안 서로를 수식해왔다. 예술가인 사카베 히토미 역시 이에 동의한다. 그녀가 보기에 두 나라는 세계의 이웃 나라들이 서로 다른 것보다 더 다르며 이는 무엇보다 두 나라의 국민성에서 두드러진다. 사카베가 일본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이러한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이 한국보다 현대미술의 역사가 더 길고 예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한국에 비교하면 일본은 훨씬 더 안정적이고 예측이 가능한 사회입니다. 거의 변하지 않죠. 한국은 아주 역동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곳이구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일본이 하나의 완료된 사회로 독특함을 보여준다면 한국은 일본보다 세계를 향해 좀 더 열려 있고 외국인과도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일본이 너무 폐쇄적이고 갑갑하게 느껴져요.” 그녀는 일본에 살았더라면 아마도 일을 하지 않고 있을 거라고 말한다. “제 친구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일본 여성들은 한국 여성과 비교하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내면화하고 일을 하고자 하는 동기부여가 덜 한 것 같아요.” 뿌리를 내리다 깊은 반감과 함께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복잡한 감정을 고려할 때 한국에 살고 있는 국외거주자 일본인이라면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보다 한국에 더 오래 살고 있는 사카베는 편하게 생각한다. 이제는 한국에 더 익숙해져서 고국인 일본을 방문할 때 오히려 문화충격을 받을 정도다. 도쿄에서 태어난 사카베는 일본의 중부 지방에 위치한 나고야 근처의 작은 해안가 마을에서 자랐다. 1996년 중학교 1학년 때 부모와 함께 한국에 왔다. 선화예술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현대미술과 디자인을 공부했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디자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카베는 대학 시절 만난 IT 종사자 한국인 남자와 결혼해 2010년생, 2015년생 두 자녀를 두고 있다. 첫 아이가 태어난 후 그녀는 어린이책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몇 권의 그림책을 출간했고 여러 나라에서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컴퓨터로 그린 깔끔한 직선보다 손으로 그린 부드러운 선을 더 좋아하는 그녀의 작품들은 울퉁불퉁하고 보드라운 형태와 어린 시절 기억을 되살리는 다채로운 풍경을 담고 있다. 자신을 ‘경계인’이나 ‘주변인’이라 부르는 사카베는 지금 시대에는 다양한 기술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멀티태스킹을 요구하는 이 시대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확장하려 노력해요. 불확실한 미래가 새로운 도전을 하도록 강요하는 거죠.” “제가 화가로서, 혹은 디자이너, 삽화가 중 하나의 직업에 전적으로 몰두한다면 좀 더 쉬웠을지도 몰라요. 하나의 주제를 선택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공부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하나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보니 제 자신을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 다른 영역을 탐색하게 됩니다.” 사카베는 자신의 1순위 주제와 관심을 ‘기록보관’, 즉 현재를 보존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사람들과 일상, 예를 들어 옷의 패턴 같은 것이 그녀가 선호하는 주제들이다. 대구 계명대학교 시각커뮤니케이션디자인과의 조교수인 그녀는 대구를 ‘한국의 나고야’라고 부른다. 두 도시가 각국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산업적 중요성에서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학생들을 돕기 위해 나의 강점을 어떻게 사용할지 늘 고민하지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방학 때나 수업이 끝나고 난 후에는 자신의 그림과 삽화에 전념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화가는 앙리 마티스다. 이 프랑스 작가의 발랄하고 기분을 즐겁게 만드는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고 한다. 냉정한 현실 현재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일본의 전쟁 징용 배상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더욱 악화된 상태다. 고통스러운 기억과 끓어오르는 분노가 잠재되어 늘 불편한 두 국가의 관계가 최근에 난국을 맞이한 것이다. 사카베가 고등학교 시절 한국사를 배울 때에 교사와 학생들 모두 일본인을 ‘쪽발이’라고 불렀다. 한국과 일본은 불행한 과거 때문에 여느 이웃 국가처럼 되기가 어렵다고 사카베는 생각한다. “저를 포함해서 한국에서 오래 산 일본인들은 일종의 ‘원죄’ 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어요.” 그녀는 20년 이상을 살아온 나라에서 가끔 이방인 느낌을 갖게 된다고 인정한다. “일반화 하기는 어렵지만 많은 일본인이 한국 사람은 거칠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한국인은 일본인이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제가 볼 때는 한국인과 일본인 둘 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민감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두 나라의 세대 간 관계를 예로 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나이를 매우 중요시해요. 한국에서는 나이 많은 가게 주인이 손님이 어리다는 이유로 막 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반면에 일본에서는 대학 교수도 학생들을 대할 때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해요.”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카베는 자신의 아이들이 한국인의 피를 갖게 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아이들보다 더욱 도전적이고 단단히 현실에 뿌리를 내리며 변화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방식에 익숙해진 그녀는 일본을 방문하면 가끔 당황할 때가 있다. “일본 사회는 나름의 규범을 고수하고 사람들은 그런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이 좀 더 개방적이고 국제적이라 할 수 있어요.”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는 이웃입니다. 개인은 이웃이 싫으면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 있어요. 하지만 국가는 그럴 수 없잖아요.” 2019년 여름 출간된 『외갓집은 정말 좋아!』는 히토미 씨의 아이들이 일본 외갓집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들을 담아낸 그림책이다. 아이들의 추억과 히토미 씨의 따뜻한 그림이 어우러졌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현재 두 국가가 겪고 있는 외교적 갈등에 대해 질문하자 사카베는 이 문제는 정치로만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인 지인들은 한일전 축구 경기가 벌어지면 자신의 아이들에게 어느 나라를 응원할 거냐고 묻지만 사카베는 국제 관계는 승패가 갈리는 스포츠와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는 이웃입니다. 개인은 이웃이 싫으면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 있어요. 하지만 국가는 그럴 수 없잖아요.” 사카베 가족이 일본을 방문할 때면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이 부모님 집 근처의 학교에 다니도록 조처한다. 한쪽으로 치우친 좁은 생각이 편견을 갖게 만들기에 아이들이 문화적 다양성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카베는 미래에 대해 거대한 포부가 있지 않고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지속할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라고 말한다. “저는 다양한 경계를 가로질러 왔고 미래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저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요. 반면에 경계인의 위치는 이점이 되기도 합니다. 가끔 약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활동하는 걸 보잖아요. 저 자신을 그런 다크호스로 생각하고 싶어요.” “우리 모두 누군가와 연결되길 바라며, 크고 작은 공동체와 사회를 이루려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다르지만 같고, 같지만 다른 우리.”라고 자신의 그림 에세이 "그렇게 삶은 차곡차곡"의 커버 뒷면에 사카베는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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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2019 AUTUMN 183

고속열차에서 파티세리로 궤도를 바꾸다 엘리트 엔지니어인 기욤 디에프반스(Guillaume Diepvens)는 한국 최초의 고속철도 시스템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일시적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다 고국 프랑스의 빵에 대한 사랑과 사업 정신으로 예기치 못한 직업의 궤도로 들어섰다. 서울에서 빵집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고속철도 엔지니어로 2002년부터 한국에서 일하게 된 기욤 디에프반스는 이후 진로를 바꿔 11년째 정통 프랑스빵을 만들고 있다. 당신이 예를 들어, 현대엔지니어링 건설회사의 한국인 엔지니어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곳에서 먹는 당신의 주식인 쌀밥과 김치가 만족스럽지 못해 하루라도 제대로 된 한국식 식사를 하고 싶어 하게 될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 가능하면 빨리 파견 근무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할 것이다. 그게 불가능하면 집밥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기 위해 가능하면 자주 한국에 다니러 오려고 할 수 있다. 기욤 디에프반스 씨는 한국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 프랑스인은 아주 다른 선택을 했다. 한국에 머무르면서 제대로 된 프랑스 빵집을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는가? 쌀이 주식인 아시아에 프랑스빵을 전파해야겠다는 의무감 때문에? 사업적 도약을 하고 싶은 오래되고 억눌렸던 욕망 때문에? 대기업에서 일하는 일이 피곤해져서? 아니면 이 모든 것들 때문에?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손님으로 찾아온 한국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디에프반스 씨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과 사랑에 빠진 것이냐는 질문에 44세의 이 프랑스인은 질문으로 응대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여기서 17년을 살았겠어요?” 그는 한국에 온 지 6년 만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 청담동에 프랑스 빵집 ‘메종 기욤’을 차렸다. 안전하고 편리한 나라 디에프반스 씨는 한국에서의 삶을 “캐주얼”이라는 말 한마디로 요약했다. 좀 더 설명을 덧붙여 달라는 말에 그는 한국이 외국인에게 “안전하고 편한” 곳이라고 했다. 특히 편리한 대중교통 시스템과 일상에 필요한 용품을 쉽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프랑스의 작은 농촌 마을 출신인 그는 파리에서 2년을 살고 미국에서 8개월 체류한 경험이 있는데 두 곳 모두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 “서울이 문화생활 측면에서 강남의 청담동을 벗어나면 고급스럽거나 화려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외국인에게는 유럽이나 미국의 대도시에서 사는 것보다 더 안전하고 편리합니다.”라고 디에프반스 씨는 말한다. 파리의 지하철 시스템에서 겪었던 불쾌한 상황을 서울에서 다시 경험하지 않은 것도 그에겐 또 하나의 이점이었다. “물론 한국을 사랑해요. 하지만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어요. 서서히 좋아하게 된 거죠.”라고 그는 말한다. 한국 체류 초기 시절의 가장 큰 문제는 한국어를 말하는 건 둘째 치고 전혀 알아듣지 못했던 거였다. 불어와 영어는 어휘나 문장 구조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는 완전히 낯선 언어에만 맞닥뜨린 게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 아주 달라요. 언어뿐만 아니라 사고 방식에서도요.”라고 그는 말한다. 디에프반스 씨는 2002년에 철도운송 관련한 프랑스 다국적 기업인 알스톰(Alstom)의 직원으로 한국에 왔다. 프랑스의 엔지니어라면 누구나 일하고 싶은 회사인 알스톰이지만 파리테크 국립고등기술공예학교(Arts et Métiers ParisTech) 졸업생인 디에프반스 씨에게 이 회사 취업은 레드 카펫을 밟는 것과 같았다. 1780년에 설립된 이 명망 높은 파리테크 학교는 8만 5,000명의 엔지니어를 배출했고 이들은 기초 산업에서부터 항공우주 산업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알스톰은 디에프반스 씨의 첫 직장이었고 서울은 그의 첫 근무지였다. 그의 과제는 KTX 고속철도 시스템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거였다. 하지만 6년 후에 이 엘리트 엔지니어는 알스톰을 떠나 서울 강남 지역에 파티세리 ‘메종 기욤’을 열고 이에 전념하게 된다. “한국 사람들이 정말 맛있는 프랑스빵을 맛보게 하기 위해 베이커리를 열고 싶었어요. 한국의 빵 중 프랑스빵에 상당히 가까운 것도 있지만 진짜는 아니에요.”라고 그는 설명한다. “한국 사람들이 정말 맛있는 프랑스빵을 맛보게 하기 위해 베이커리를 열고 싶었어요. 한국의 빵 중 프랑스빵에 상당히 가까운 것도 있지만 진짜는 아니에요.” 엔지니어링과 작별하다 축적 모형 대신 구이판과 오븐을 사용하기로 한 결정은 당연히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그의 이 같은 드라마틱한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디에프반스 씨는 빵 만드는 일에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었다. “저한테도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며칠 동안 결정을 고민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부모님은 처음엔 반대했지만 결국 받아들이게 되었다. “저의 부모님은 상당히 열린 사고를 갖고 계셨죠.”라고 그는 말한다. 디에프반스 씨는 프랑스로 돌아가 한 달 집중 코스를 통해 빵 만드는 법을 배운 후 경험 있는 파티시에 두 명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베이커리 운영을 돕게 했다. 마스터 제빵사들은 결국 프랑스로 돌아갔고 디에프반스 씨는 이제 두 개의 베이커리를 몇 명의 파트타임 프랑스 직원들과 운영하고 있다. 그의 두 번째 가게는 최근 서울의 남쪽에 위치한 판교에 문을 열었다. “프랑스 마스터 제빵사들이 한국을 떠난 주 이유는 문화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라고 디에프반스 씨는 설명한다. 그 차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하기는 삼갔다. 포도빵(pain aux raisins)과 마카롱, 밀푀유 등 메종 기욤에서 판매하는 프랑스빵들. 문화 차이 “저는 한국말을 못하고 한국식 문화를 모르는 프랑스 요리사는 경험자라도 더 이상 고용하지 않습니다.”라고 디에프반스 씨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마스터 요리사를 고용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 자신이 마스터 요리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분홍색 인테리어를 한 ‘메종 기욤’ 빵집에는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러운 프랑스빵과 여러 가지 디저트 쿠키가 우아하게 진열되어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먹기에 아까울 정도로 예쁜 파스텔 색의 마카롱, ‘천 장의 잎’으로 만들어진 파이인 밀푀유, 입 속에서 바로 녹는, 계란 흰자와 설탕으로 만든 귀여운 머랭이다. 메종 기욤의 정통 프랑스빵과 쿠키가 한국인의 입맛을 매료시키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008년에 문을 연 베이커리는 몇몇 사업체와의 경쟁에도 불구하고 시장 점유율 방어에 성공하며 지속적으로 번창했다. 디에프반스 씨의 성공 열쇠는 프랑스 요리법과 한국인의 입맛이 조화를 이루도록 끊임없이 ‘지역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는 에릭케제르(Erci Kayer)나 라뒤레(Ladurée) 같은 고급 프랑스 베이커리가 한국에 진출하는 것을 환영한다. 왜냐하면 이는 더 많은 한국인들이 프랑스 빵을 인정한다는 표시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 요리를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려고 애쓰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빵과 이와 관련된 식재료, 잼이나 크림 같은 품목에 계속해서 집중할 생각이다. 디에프반스 씨는 현재 서울역 근처의 오래된 동네인 후암동에 살고 있다. “독신도 아니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는 하이킹과 자전거 타기를 즐긴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한국 곳곳을 여행했다. “요즘은 시간이 날 때면 그냥 산책을 합니다. 종종 개를 데리고요.” 아마도 파티시에 일은 머리뿐 아니라 체력도 필요해 다른 운동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많이 남지 않는 듯하다. 2008년에 문을 연 메종 기욤은 한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서울 강남에 이어 최근에는 경기도 판교에 2호점을 냈다. 소박한 채식주의자 입맛 채식주의자인 디에프반스 씨는 비빔밥(그의 경우 고기는 빼고), 칼국수, 수제비 같은 간단한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 그는 가끔 동대문 근처의 광장시장에 들러 빈대떡을 사먹는다. 음식 기호로 따지면 그는 전형적인 한국의 노동자 계급이다.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뭐냐는 질문에 디에프반스 씨는 부족한 언어 능력과 한국인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에 대한 경험 부족을 들었다. “제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빵 만들기뿐 아니라 한국어를 먼저 배울 것 같아요.”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직업과 거주지를 바꾼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번 결정한 것은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제가 결정한 거니까요.” 현재로서는 치솟는 임대료가 서울에서 영업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걱정 중 하나이다. 그는 최근에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있는 가게 문을 닫아야 했는데 가게 주인이 짧은 기간 동안 임대료를 너무 많이 올렸기 때문이다. “임대료가 그냥 오르는 게 아니라 약간 과장하면 하루 밤새 두 배가 되어 버렸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디에프반스 씨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자이다.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문제는 현재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제가 살고 있는 후암동에 인기 장소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또 치솟을 임대료 때문에 걱정이 되네요.”라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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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2019 SUMMER 147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한 빛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삶을 사는 건 쉽지 않다. 먼 이국땅에서 그렇게 하기는 아마 더 어려울 것이다. ‘안광훈’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로버트 존 브레넌은 반세기도 더 전에 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뉴질랜드 출신의 브레넌 신부는 이제 ‘빈자의 친구’로 자신의 고향보다 한국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 영어로 시작된 대화는 거의 5분도 채 안 되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한국어로 바뀌었다. 놀랄 일은 아니다. 53년 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이후 로버트 존 브레넌 신부는 한국인들,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친구로 살며 그들의 언어로 소통했다. 그는 현재 ‘삼양주민연대’의 대표로 봉사하고 있다. 삼양주민연대는 서로 돕는 공동체 조직으로 강북의 가난한 동네인 삼양동 주민들에게 직업과 교육, 거주 관련 지원을 한다. ‘강북’이 암시하는 대로 이곳은 오래된 지역으로, 국제적으로 히트한 싸이의 에서 선보인 서울의 부와 최첨단 유행을 상징하는 ‘강남’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곳이다. 로버트 존 브레넌 신부는 뉴질랜드 출신으로 1966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이후 지금까지 가난한 이들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아 왔다. 한국인들에게는 ‘빈자의 친구 안광훈 신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공동체 상호 부조 삼양동은 강북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한 곳이다. 작년 여름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가난 체험’을 위해 한 달간 머물기 위해 선택한 곳이기도 하다. 옥탑방에 이사한 후 박 시장은 고 김수환 추기경의 추천으로 새로 생긴 교구 성당의 첫 주임신부가 되면서 1992년부터 삼양동 주민이 된 브레넌 신부에게 인사 전화를 했다. “제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언덕을 덮고 있는 판잣집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이곳에서도 곧 강제 철거가 시작되겠다고 생각했죠.”라고 브레넌 신부는 기억을 되살렸다. 그가 처음 해야 했던 일은 머물 수 있는 집을 빌리는 거였다. 3년 후 재개발로 이 지역의 집들이 철거되기 시작했다. 브레넌 신부의 집은 주민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는 장소가 되었다. “할 일이 많았어요.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교육하고 그들에게 임시 거주지를 마련하는 것을 포함해서요.”라고 그는 말했다. 이후 1997~98년에 아시아 경제 위기가 닥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들을 돕기 위해 브레넌 신부는 한국성공회가 운영하는 자선단체 ‘나눔의 집’과 협력해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직업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주거복지 센터와 마이크로크레딧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렇게 ‘삼양주민연대’가 시작되었다. “중요한 건 주민들이 하나가 되도록 격려하고 공동체를 형성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거였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재개발 프로젝트의 문제점이었던 것들, 폭력배를 동원해 주민들을 위협하고 세입자를 몰아내는 것 같은 일은 이제 많이 개선이 되었어요.”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그는 말한다. 요즘은 일상과 좀 더 밀접하게 연관되는 작은 활동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한다. “막 출산을 한 산모를 위해 사람을 보내 도와주거나 집안일 도우미 제공, 대학생 봉사자를 야간 학교와 연계시켜주는 일 등이죠.”라고 그는 설명했다. 브레넌 신부가 6·25 성골롬반 순교기념비에서 자신과 성이 같은 패트릭 브레넌 신부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정원에 있는 이 기념비는 한국전쟁 중에 목숨을 잃은 7명의 순교 신부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 뉴스뱅크 빈민가의 신부 철거민과 불법 거주자를 위한 브레넌 신부의 활동은 1980년대 서울 서쪽의 목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다가오면서 도시가 한창 정화되고 꾸며지고 있었죠. 그때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 중심가로 가는 길목에 있던 목동에는 낡은 집들이 빼곡했어요. 정부 관리자들의 눈에는 그게 눈엣가시였어요.” 브레넌 신부는 철거와 이주 대상이 된 주민들과 합세해 공무원들과 재개발업자, 그리고 이들이 고용한 폭력배들에게 저항했다. “그 사람들은 심지어 노인과 어린애들에게까지 폭력을 가했어요. 경찰들은 그 옆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고요.”라고 그는 말했다. 브레넌이 목동의 주민들과 맺은 인연은 오늘까지도 아름다운 결실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그 당시 함께 싸웠던 젊은 사람들의 결혼식 주례를 서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중년 부부가 되었고 그들의 아이들은 이제 서울올림픽 당시 부모의 나이가 되었다. “그들이 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이들은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할아버지 소리를 들으면 행복하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가족 중 한 가족은 그를 주말마다 집으로 초대하고, 그는 여느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의 ‘손자’와 ‘자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즐거워한다. 잊지 못한 일화도 있다. 삼양동에서 근근이 살아가기도 힘든 한 병들고 가난한 이가 있었다. 브레넌 신부는 봉사자들을 보내 그를 여러 방면으로 도와주었다. “몇 달 후에 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고백을 했어요. 자신이 목동에서 철거민을 괴롭혔던 폭력배 중 한 명이었다고요. 그는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었어요. 자신을 돌봐줘서 감사하다면서요.”라고 브레넌 신부는 일화를 들려줬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항상 약하고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걱정했고, 그들 옆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 애쓰셨죠.”라고 기억을 떠올리며 브레넌 신부는 추기경님이 자신을 서울에서 가장 궁핍한 지역 두 군데에 보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를 위한 교회는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는 사람들에게 오라고 말하면 안 되고, 그들에게 스스로 다가가야 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바로 이러한 생각이 1968년 한국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브레넌 신부를 이끌었다. 그가 처음 일했던 곳은 강원도 정선의 탄광 마을이었다. 그곳에는 광부와 그들 가족에게 의료적인 조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병원이 없었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 병원을 설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정선과 인근 항구 도시 삼척에서 1979년까지 봉직했다. 그는 강원도에서 11년간 지낸 후 안식년을 맞아 1년 동안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김수환 추기경이 그를 목동에 보냈다. “제 희망은 한국이 좀 더 인간적인 사회가 되는 거예요. 젊은이들은 노인을 배려하고, 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걱정하고, 배운 이들은 덜 교육 받은 이들을 이해하려 애쓰는 사회가 되는 것이죠.” 독실한 천주교 가족 로버트 존 브레넌은 1941년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천주교 가족의 다섯 형제 중 첫째로 태어난 그는 똑똑하고 성실한 아이였다. 부모님은 그에게 큰 기대를 했고 세속적인 직업을 갖게 되길 희망했다. 하지만 젊은 브레넌은 어머니가 구독하는 성당 뉴스레터에서 감동적인 기사를 읽게 된다. 그는 특히 한국이 일본 식민 지배 하에 있던 1933년에 한국에서 봉사를 시작한 뉴질랜드 신부들에 대한 기사에 끌렸다. 이후 한국전쟁 동안 일곱 명의 신부가 순교했다. “그 신부들 중 한 명이 나와 성(姓)이 같았어요. 그래서 마음을 먹었죠.”라고 그는 말했다. 브레넌은 1959년 호주 시드니에 있는 신학대학 골롬반선교회(Columban Mission Society)에 입학하기까지 부모님을 설득하느라 큰 곤경을 치렀다. 그곳에서 6년간 공부한 후 196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에 한국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첫 두 해는 언어를 비롯해 한국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는 프란체스코회 사제들이 운영했던, 지금은 없어진 정동의 명도언어학원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서울대 학생들과 친해졌고 이들이 그의 한국 이름 ‘안광훈’을 지어줬다. “그들이 ‘빛을 전파하고 가르친다’는 내 이름의 한자어 의미를 알려줬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본명보다 한국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브레넌 신부가 삼양주민연대 사무실 앞에서 주민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서울의 취약 지역 중 하나인 삼양동 주민들의 실업 및 주거 복지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창립된 주민 공동체의 대표를 맡고 있다. © 아산문화재단 사회 참여 1969년에 그는 원주에서 이제는 고인이 된 지학순 주교를 만난다. 지학순 주교는 힘없고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희생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또한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싸움으로써 존경받고 있었다. 지학순 주교는 처음 만난 이후 줄곧 브레넌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지금도 브레넌 신부는 교회 안팎에서 활동하면서 그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 “저는 공식적으로는 은퇴를 했지만 아직도 가끔 설교를 합니다. 제 설교를 처음 듣는 사람은 제가 해방신학을 연상시키는 일종의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라고 말하며 그는 빙그레 웃었다. “저는 항상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려고 노력하고, 사회적 이슈를 논합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의도는 없습니다. 대신에 사람들이 선거에서 옳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자신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개인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무엇이 나라 전체에 도움이 될지 생각해 보라고 하지요.” 브레넌 신부는 한국 정부의 도시 재개발 정책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했다. “재개발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다른 지역에서 온 부자들을 위한 비싼 아파트를 짓기 위해 주민들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좋은 재개발 프로젝트는 쇠퇴하는 지역을 갱생시키고 지역 주민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어야 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또한 노인들이 좀 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튀어나온 계단들이 있는 좁은 골목들을 새롭게 단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역시 시니어인 브레넌 신부는 젊은이들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노인들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을 때면 마음이 심란하다고 했다. “제가 처음 한국에 왔던 1960년대에 한국은 가난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좀 더 배려했었어요. 젊은이들도 노인을 좀 더 공경했고요.”라고 그는 말한다. “이제 한국은 부유해졌고 힘이 세졌어요.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인정이 없어졌어요. 제 희망은 한국이 좀 더 인간적인 사회가 되는 거예요. 젊은이들은 노인을 배려하고, 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걱정하고, 배운 이들은 덜 교육받은 이들을 이해하려 애쓰는 사회가 되는 것이죠.” “한국인들은 좋은 의미에서 억셉니다. 일본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기 위해 투쟁한 것처럼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끝까지 싸우죠. 또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심성을 갖고 있어요. 물론 그런 넉넉함이 아파트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상당히 줄었지만요.” 영구적 주거지 브레넌 신부는 한국에서 봉직하고자 결심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가끔 그는 자신의 형제와 자매가 살고 있고 그들의 자식들이 그를 열렬히 환영하는 뉴질랜드를 방문한다. 하지만 몇 년 전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고향을 찾는 일이 점점 드물어졌다. “물론 제 형제자매와 그들의 자식들이 저를 잘 대해주죠.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그곳에서 할 일이 없는 저는 지루해집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몇 년 전 세 번의 시도 후 브레넌 신부는 마침내 영주권을 얻었다. “쉽지 않았어요. 제가 한국에서 한 일이라곤 성당 일과 한국인들과 함께 살았던 것뿐이었기 때문이죠.”라고 그는 농담조로 말했다. “하지만 저는 떠나고 싶지 않아요. 이미 죽고 나서 묻힐 장소까지 준비해 두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삼양주민연대에서 일하는 봉사자 한 명은 신부님이 충청북도 제천에 있는 원주 교구 소속 천주교 성소 묘지인 배론성지에 자신의 안식처를 마련해 놓았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브레넌 신부는 젊었을 때 술과 담배를 즐겼다. 이제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가끔 좋아하는 치킨과 함께 소수 반 병이나 맥주 한두 잔을 마신다. 무릎이 약해지고, 공기 오염과 미세먼지 때문에 마른기침을 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건강상 문제는 없다. 또 걸어서 다니는 것 외엔 특별히 하는 육체적 활동은 없다. “집에서 성당이나 연대 사무소까지 오가며 걷기, 옷을 빨래하고 가끔 요리를 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어요. 가끔은 피곤해서 정말 은퇴를 하고 싶지만, 사람들이 못 하게 해요.”라고 그는 말했다. 삼양동의 이웃뿐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한국 사람이라면 브레넌 신부가 가능하면 오랫동안 건강하게 활동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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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2019 SPRING 191

[i]해금[/i] 소리에 응답한 젊은 터키인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탐 제브뎃은 짧은 시간 동안 그런 경험을 두 번 했다. 먼저 그는 먼 나라 한국에서 컴퓨터공학과 IT를 공부하기 위해 고국 터키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 전공을 한국 전통음악으로 바꿨다. 이런 변화는 끈기와 인내심, 그리고 손님으로 방문한 나라에 대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전환기가 순전히 우연의 일치에 의해 찾아온다. 운명의 여신이 흔드는 손짓처럼. 탐 제브뎃의 경우도 그랬다. 서울에서 거리를 걷다가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외로움을 느끼며 걷던 그는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멜랑콜리한 해금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당시 저는 열아홉 살이었는데 슬프고 외롭고 터키의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근데 한국의 전통 현악기가 저를 위해 울고 있는 것 같았어요.”라고 제브뎃은 말한다. 낯선 타국 악기와의 우연한 만남이 그의 인생 방향을 재설정했다. 해금 연주자 제브뎃 탐은 한국의 대중음악에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하며, 터키 음악가들이 터키의 전통 악기를 현대 음악에 자주 사용하는 것처럼 K-팝 작곡가들도 한국 전통 음악의 요소를 접목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수학에서 음악으로 고향인 터키에서 제브뎃은 수학 영재반 학생이었다. 그에 걸맞게 그는 엔지니어가 되고자 했고, 한국에서 컴퓨터공학과 정보기술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2012년 한국에 도착해 일 년간의 한국어 수업을 끝낸 후 제브뎃은 IT와는 전혀 무관한 곳에 있게 된다. 서울대학교 한국전통음악과에 입학해 해금을 전공하게 된 것이다. 어째서 타국의 오래된 전통 악기가 그토록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 악보를 읽을 줄도 몰랐던 열아홉 살의 청년이 어떻게 그토록 해금에 사로잡힌 걸까? “저 자신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어요.”라고 제브뎃은 솔직히 인정한다. “아마도 제 자신은 몰랐지만, 내 안에 음악에 대한 취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해금을 처음 봤을 때 터키의 비슷한 악기인 사즈(saz) 생각이 났어요. 아무튼 해금 소리가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좋아졌어요. 슬프고 애절하고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리,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아요.” 해금은 단순한 악기이다. 두 개의 현과 나무로 된 울림통과 막대 같이 좁고 긴 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주자의 무릎에 세워서 연주하는데 궁궐뿐 아니라 시골 뒷마당에서도 연주되면서 한국 전통음악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악기다. 악기를 만드는 데에는 여덟 가지 재료, 즉 나무, 쇠, 비단, 돌, 대나무, 박, 진흙과 가죽이 사용된다. 그래서 해금은 여덟 가지 소리라는 의미로 ‘팔음’이라고도 불린다. 또 다른 이름은 ‘깽깽이’로 높은 음조의 소리를 의성화한 것이다. 제브뎃의 갑작스런 전공 변경에 누구보다 놀란 건 그의 가족이었다. 가족들은 모두 여섯 형제 중 막내인 그가 한국에서 공부한 후에 돈을 잘 버는 엔지니어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음악을 공부하고 그것도 낯선 악기를 전공하겠다는 통보를 듣고 특히 아버지가 화가 났다. “처음에 아버지는 한 달 이상 저랑 얘기하지 않으셨어요. 제 결정을 온전하게 설득할 수 있을 때까지 거의 3년이 걸렸죠.”라고 제브뎃은 말한다. “아버지는 제가 열심히 공부하고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는 걸 보시고 천천히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제브뎃이 한국의 텔레비전에 나온 후 아버지의 불안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제가 터키를 한국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뿌듯하게 생각하셨어요.” 그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이제 그를 열렬히 지원한다. 하지만 터키는 한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족으로부터는 정신적인 도움밖에 받을 수 없다고 한다.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한국의 지인들이다. 몇 명은 그에게 부모님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한국의 후원자 그중 한 명이 제브뎃의 지도교수이기도 한 서울대학교 양영숙 교수다. “양 교수님은 제가 학부 시절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절 돌봐주셨는데 저에게 밥을 먹여 주시기도 하셨죠.”라고 제브뎃은 말했다. “저의 과에서는 매년 세 명의 학생이 해금을 전공했어요. 저는 다른 두 한국 학생을 따라잡기 바빴는데 교수님들이 저를 배려해 주셨어요. 그래서 학점 4점 만점에 3.2점을 받을 수 있었죠. 양 교수님은 어머님 같은 분이셨고, 교수님이 아니었으면 공부를 끝낼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제브뎃은 ‘한국 아버지’도 있는데 그가 밤에 DJ로 일했던 클럽의 경영인이다. 그는 제브뎃이 아프면 죽과 과일을 사들고 그의 집을 찾아온다. 때때로 제브뎃이 월세를 잘 내고 있는지, 다른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지 전화해서 물어보기도 한다.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온 이 젊은이를 한국인들이 도와주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뭘까? 그렇다. 제브뎃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면서 공부와 일에서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그의 태도에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어떤 시간도 낭비하지 않는다. 낮 동안에는 해금을 연습하고 작곡을 공부하고 밤에는 클럽에서 DJ나 서비스 직원으로 일을 한다. 외국의 전통음악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 예를 들어, 터키 전통 악기를 배우고 싶어 하는 한국의 젊은이에게 어떤 조언을 해 줄 거냐는 질문에 그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그 나라의 문화를 공부하는 것, 더 좋은 건, 그 문화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먼저 사람들의 사고 방식,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브뎃이 11명의 외국인이 모인 다중 언어 밴드인 ‘한글’에 가입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영국, 스페인, 터키, 일본에서 온 음악가도 포함된 이 밴드는 다양한 행사에서 공연하는데 먼저 자신의 모국어로 한 다음 한국어로 한다. ‘한글’이 한국어 문자 이름이기도 하지만 밴드 이름은 ‘한국’의 ‘한’과 ‘글로벌’의 ‘글’을 조합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 문화를 알리는 글로벌 아티스트’라는 의미를 갖는다. 제브뎃은 현재 엔터테인먼트 에이전시로 약 50명의 외국인을 관리하고 있는 에프엠지(FMG Foreign Manpower Group)에 소속되어 있다. 그는 때때로 한국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지만 고정 멤버는 아니다. 그는 인기 TV 쇼인 에 출연하고 싶어 한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에 사는 외국인 거주자가 자신의 고국 친구를 초대해서 시청자로 하여금 그들의 눈을 통해 한국을 재발견하게 해 준다. 지리적 거리와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터키는 오랫동안 서로를 ‘형제의 나라’로 여겼다. 무엇보다 한국전쟁 동안 유엔군으로 참전한 터키 군대 때문이다. “저는 낮에 공부하고 밤에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많아요. 하지만 제가 내린 결정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형제의 나라 제브뎃은 두 나라가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두 언어 모두 같은 문장 형태를 갖고 있는데 한국인과 터키인의 논리적 사고가 비슷할 수 있음을 의미할지도 몰라요. 게다가 서양인과 달리 한국인과 터키인은 집에 들어 갈 때 신발을 벗지요. 또 터키인들, 특히 남자들은 쉽게 흥분하지만 10분도 안 되어서 기분을 풀죠. 한국 남자들처럼요.” 무엇보다도 두 나라의 전통음악이 비슷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고 제브뎃은 말했다. “한국 노래처럼 터키 노래에도 슬프고 애절하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한탄하는 곡들이 많아요.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들의 노래 같은 것처럼요. 물론 터키는 한국만큼 자주 외세의 침략을 받고 지배받지는 않았지만 터키 역사에도 전쟁이 많았어요.” 양국의 전통음악 음계나 곡보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브뎃은 궁극적으로 한국과 터키의 음악을 조합한 곡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한국과 사랑에 빠졌는지, 만약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하자 제브뎃은 살짝 부끄러워했다. 그리곤 오히려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한국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한국과 한국의 문화를 외국인이 더 잘 이해하도록 애를 쓰겠어요?” 제브뎃은 한국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친절했기 때문에 한국에 살면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만큼 더 두드러지는 예외가 한 번 있는데, 한 클럽 주인이 약 백 만 원의 급료를 지불하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 거주자에게 친절하지만, 외국인을 무서워하거나 경계하는 경향이 있어요. 특히 서로 알아가는 초기 단계에서 그래요.”라고 제브뎃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잠재된 외국인 혐오증을 시사하며 말했다. 제브뎃 자신은 한국인 친구나 동료들과 잘 지낸다고 인정하지만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외국인들은 상당히 큰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인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특히 그렇다. “저는 한국에서 공부하거나 일하기를 원하는 외국인들에게 언어를 먼저 배우라고 충고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처럼 여기서도 일을 찾는 데에는 한국어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어요.” 이와 관련해 제브뎃은 한국 정부가 무료 혹은 적은 수강료의 한국어 강좌를 제공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한국 정부의 다문화 정책을 칭찬하지만 프로그램이 좀 더 실용적이어서 신입자들이 한국 문화와 생활 방식에 좀 더 쉽고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한다. “늘 그렇듯이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일을 얻고 비자 기간을 연장하는 것이죠.”라고 그는 말한다. 제브뎃 탐은 해금이 자신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연주자로서의 잠재력을 일깨워 주었다고 생각한다. 음악가로 한국에서 산다는 것 “한국에서 음악가로 사는 건 쉽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음악을 제브뎃의 갑작스런 전공 변경에 누구보다 놀란 건 그의 가족이었다. 가전공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집이 부유한 것처럼 보여요.”라고 그는 말한다. “저는 낮에 공부하고 밤에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많아요. 하지만 제가 내린 결정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제브뎃은 한국의 대중음악을 좋아하지만 가끔 한국인의 문화 활동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는 터키 건국의 아버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말을 인용했다.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모르는 민족의 미래는 어둡다.” 제브뎃은 터키 전통 악기인 사즈의 소리를 현대 음악에 사용하는 터키 음악가들을 예로 들기도 했다. “그런 것처럼 저도 케이팝 작곡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옛것과 새것의 퓨전이란 의미에서 한국 전통음악의 요소를 좀 더 사용했으면 좋겠어요.” 클럽 DJ 일을 파트타임으로 하고 있지만 제브뎃은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터키는 아시다시피 이슬람 국가예요. 그래서 우리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고 음식을 선택할 때도 아주 조심하죠. 돼지고기를 먹는 건 금지고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걸 제외하면 한국 음식은 거의 문제가 없어요. 경제적인 이유나 다른 이유로 외식보다 종종 직접 요리를 해서 먹습니다.” 5년 후에 자신이 어디에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제브뎃은 그때쯤에는 좀 더 나은 음악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가 현재 걷고 있는 길에 그대로 머문다면 우리는 2025년경에는 외국인이 작곡한 최초의 해금 소나타를 듣게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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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2018 WINTER 216

삼중의 성공을 위한 균형 잡기와 공유 이 미국인은 많은 한국인보다 두 가지 한국의 전통 분야, 즉 문학과 술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보통 외국의 문화를 반드시 사랑하지 않고도 그에 대해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존 프랭클의 경우는 달라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 전통 문화를 보전하고 개발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한국의 ‘미국화’를 한탄하지 않을 것이다. 존 프랭클 교수가 자신이 직접 빚은 술이 담긴 항아리들을 살피고 있다. 2010년부터 한국 전통 방식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그는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외면하는 가양주의 번거로움과 고유의 맛을 즐긴다. 고대로부터 한국인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학문과 무술 둘 다에 능해야 한다고 믿었다.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필수 항목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가지를 더한다. 미각이 그것이다. 존 프랭클은 이 세 가지 자격 조건을 다 충족시키는 것 같다. 프랭클은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국제대학에서 10년간 한국 문학을 가르쳐 온 교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인터넷에서 그를 검색하면 그의 이름이 한국의 많은 브라질리언 주짓수(BJJ) 도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이 무술 세계에서 잘 알려져 있다. 미각은 알코올과 관련되어 있다. 한국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니 악명이 높다. 하지만 프랭클은 한국의 전통주에 대해 자신만큼 애정과 지식을 갖고 있는 한국 친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단 브랜드로 술을 생산해 팔자는 제안을 받을 정도다. 그는 공부만 하는 따분한 사람, 싸움꾼, 그리고 술주정뱅이가 되지 않고 어떻게 이 완전히 서로 다른 영역에 몰입할 수 있을까? 균형과 절제가 키워드처럼 보인다. 프랭클은 “무엇이든 잘하지만 뛰어난 재주가 없다(Jack of all trades but master of none)”는 미국 속담을 잘 알고 있다. 이 말을 그에게 적용한다면 그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저는 한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기보다 세 종목에서 동메달을 따고 싶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좀 더 정확하게는 3종목 2세트라고 해야겠다. 프랭클은 학자, 무술자, 양조자뿐 아니라 교수, 남편, 아빠로서도 잘하고 싶다. “하나의 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해요”라고 그는 말한다. 세 개의 공을 저글링하기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예로 들어보자. 1999년에 프랭클은 일본의 유도에서 파생된 이 무술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그의 검은 띠 첫 제자들이 이후에 주짓수 도장을 오픈했고, 그들의 제자가 또 다시 검은 띠를 받은 후 주짓수 도장을 열었다. 도장들은 프랭클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도장 이름에 사용하지만 프랭클은 그들의 도장 운영에 개입하거나 수수료를 받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는 자신만의 주짓수 도장 체인을 만드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단지 직장에서 가까운 두 개의 주짓수 도장에서 연습을 할 뿐이고, 어떤 다른 직위를 갖는 일에 관심이 없다. 프랭클은 브라질리언 주짓수가 자신이 배워본 적 있는 가라데나 무에타이나 태권도보다 우수하고 건강을 위해서는 최고의 무술이라고 생각한다. “가라데, 무에타이, 태권도처럼 서서 주로 펀치나 킥을 사용하는 무술은 방어자뿐 아니라 공격자에게도 상처를 남깁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와 반대로 누워서 하는 주짓수에서는 상대방에게 신호를 보내 언제든지 항복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부상을 당하지 않아요.” 주짓수가 안전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고등학생 딸에게 배우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학자이자 운동 선수로 서로 대조되는 사회 활동을 하는 게 어느 하나도, 혹은 둘 다 완벽하게 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프랭클의 생각은 다르다. “저에게는 모든 게 균형인 것 같아요. 정신과 육체의 균형이죠. 저는 이 두 가지가 서로 상반되기보다 서로를 보강한다고 봐요.” 이런 균형적인 활동이 그에게 주짓수를 사업화할 시간을 허용하지 않고 그 역시 그럴 마음이 없다. 한국의 술과 증류주 프랭클의 모토인 균형과 절제는 자신이 만드는 술에도 적용되는 게 분명하다. 2010년에 그는 집에서 술을 증류하기 시작했다. 좀 더 맛있는 술을 만들기 위해 프랭클은 여러 비슷한 기관 중에서 한국가양주연구소의 초급반부터 고급반까지 등록했다. “당신이 직접 만든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마트에서 파는 술을 마시기가 힘들어져요. 이해할 수 없는 건 훌륭한 술과 증류주 전통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이 값싼 증류주인 소주에 만족하고 있는 거예요. 소주는 정말 밍밍하고 하나같이 똑같은 맛이에요”라고 그는 말한다. 프랭클은 집에서 증류한 소주 맛의 90퍼센트를 재료가 결정하고 나머지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잘 발효된 누룩과 질 좋은 쌀이 있으면 술의 맛은 거의 보장할 수 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찐 밥과 누룩과 물을 항아리에 넣고 상온에서 열흘 정도 발효시켜요. 그러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술을 얻을 수 있어요. 송화가루나 쑥 같은 계절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재료를 더해도 좋아요. 케이크에 당의(糖衣)를 입히는 것처럼요.” 잘 발효된 술은 더 맑은 청주를 만들기 위해 걸러지게 되는데 거르지 않고 우윳빛 나는 술은 막걸리로 알려진 탁주가 된다. 그리고 청주를 다시 가열하면 소주가 된다. 알코올 도수는 가열 온도에 의해 결정되는데, 80도(한국식으로는 40도)나 그 이상까지 갈 수 있다. “잘 걸러진 청주를 증류하면 약 4분의 1 분량의 소주를 얻을 수 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전통적인 증류주인 소주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만 하면 고급 술이 될 수 있어요.” 필자는 프랭클이 증류한 80도 소주 두 종류를 시음해 보았다. 중국의 고량주를 포함해 다른 도수가 높은 증류주처럼 첫 맛은 썼지만 뒷맛은 재료인 찹쌀 때문인지 깔끔했다. 독한 술을 마실 때 목을 넘어가는 불편한 뒷맛도 없었다. 1999년 한국에 최초로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소개한 프랭클 교수가 자신의 이름을 딴 도장에서 시범을 보이고 있다. 그는 학자와 무도인의 길을 동시에 가는 이유에 대해 정신과 육체의 균형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비싼 위스키를 마실 때도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 좋지 않아요.” 프랭클은 말을 이었다. “한국의 전통 소주는 도수가 높은 데도 불구하고 목넘김이 편합니다. 좋은 재료를 사용해 만든 소주는 아무리 많이 마셔도 숙취가 없어요.” 프랭클은 세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밤새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좋은 술과 좋은 사람, 그리고 좋은 분위기가 그것이다. 이 51세 교수는 술에 취해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걸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주정뱅이와 그들의 실수를 술 때문이라고 하면서 잘 받아 주는 것 같아요.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술을 탓하면 안 되죠. 문제는 술을 마신 사람이에요.” 한국의 음주 문화와 관련해서 프랭클은 중요한 변화를 감지했다. “요즘 한국 사람들은 술을 이전보다 덜 마시고 음주에 시간을 덜 쓰고 분위기도 차분해졌어요. 술을 마시고 만드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변화가 실망스럽긴 하죠”라고 그는 농담조로 말했다. 프랭클은 한국 사람들이 처음에는 한국 전통 술을 증류하는 외국인이라고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봤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가 만든 술과 제조법을 공유해달라고 부탁한다. 위스키의 본산인 스코틀랜드인을 비롯한 그의 몇몇 외국인 친구들도 한국의 소주와 제조 방법에 푹 빠졌다. “한국 술에서 가장 큰 이점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라고 프랭클은 말한다. 한국의 술이 고량주나 사케보다 더 나을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만든 것에 대한 자부심과 축적된 전통을 모아서 스토리텔링으로 옷을 입히는 거예요.” 그는 한국인들이 스카치 위스키 한 병에 수백만 원을 지불하고 프랑스 와인을 위해 백만 원을 낼 의향이 있지만, 소주나 막걸리에는 몇 천 원 이상 지불하는 걸 꺼린다고 꼬집는다. 한국의 술이나 증류주가 싸야 할 필요가 없고 한국인들도 비싼 고량주를 만들어 파는 중국인들한테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가양조 학원에서 배운 어떤 사람들은 작은 규모로 양조장과 증류장을 운영하면서 한국의 소주와 막걸리를 다양화시키고 있어요. 이 차별화 과정이 이제 시작되었지만 대중화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라고 그는 말한다. “마트나 편의점에서 볼 수 있는 소주나 막걸리 같은 싸고 약하고 맛없는 술과 증류주는 빈티지 소주, 청주, 그리고 (탁주에 밥알을 동동 띄우는) 동동주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라져야 합니다.” 프랭클은 가끔 자신의 이름으로 증류주를 론칭하자는 제안을 받기도 한다. “이런 제안에는 양가적인 마음을 갖고 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사업으로 술을 만들기 시작하면 취미로는 더 이상 즐길 수 없을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커다란 매장 선반에 저의 제품을 올려놓는 꿈을 꾸기도 하지요.” 하지만 굳이 말하면 프랭클은 파는 것보다 만드는 것의 즐거움이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학자이자 운동 선수로 서로 대조되는 사회 활동을 하는 게 어느 하나도, 혹은 둘 다 완벽하게 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프랭클의 생각은 다르다. 1989년 연세대학교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첫 방문했던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출신의 프랭클 교수가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국제대학에서 한국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획일성보다 다양성 존 마크 프랭클은 로스엔젤레스에서 태어났지만 캘리포니아의 산타크루즈에서 주로 성장했다. “고등학교 시절 제가 살았던 도시에는 한국인 거주자도 학생도 없었어요.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한 미국인도 없었구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대학에서 어쩌다 한국어를 제2 외국어로 선택했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졸업하려면 통과해야 하는 과목이었거든요.” 그는 1989년 처음 연세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왔고 계속해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이때 그는 한국의 현대문학과 당대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프랭클은 채만식, 염상섭, 현진건 같은 1920년대와 30년대에 활동한 작가를 선호했다. 이들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문학을 표방했는데 프랭클의 선호도는 문학 장르보다 개별적인 작가와 작품을 기준으로 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이상인데 특히 그의 산문을 좋아한다. 이상의 시나 소설은 그에게 너무 난해하다. 거의 15년을 한국에서 살고 있는 그는 물론 한국을 사랑한다고 한다. “하지만 당신도 알겠지만 완벽하게 100퍼센트 사랑이란 있을 수 없지요. 좋은 감정으로 95퍼센트 한국을 사랑하더라도 나머지 5퍼센트의 부정적인 면이 더 두드러지지요”라고 그는 말한다. 95퍼센트 좋은 감정에 대해서 그는 한국인들이 자신감 있고 개방적이라고 하면서 한국은 외국인 해외 체류자에게 친절하고 편리한 나라라고 말한다. 처음에 그는 한국인이 친해지기 어렵고 외국인에게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경향은 이제 많이 개선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부정적인 5퍼센트는 획일성, 또는 다른 말로, 억압된 개인주의다. “신촌이나 압구정을 방문할 때마다 뉴욕이나 도쿄와 별로 차이를 느낄 수 없어요. 한국인과 한국의 도시는 자기만의 매력, 고유성을 잃어가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래요. 세상은 빠르게 글로벌화되어 가고 있지요. 그렇지만 한국이 너무 미국처럼 될까 봐 걱정됩니다.” 한국인의 민족적 특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민족적 특성’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한국의 학교 선생들은 ‘단일 민족’이나 ‘순수 혈통’ 같은 신화를 아이들에게 주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대신에 한국인들은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찾고 국내 거주자든 국외에 사는 외국인이든 이들의 다른 점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제가 한국에 대해 가장 좋아하는 점은 다양한 방언과 풍경과 음식이 있다는 거예요. 자동차로 세 시간 정도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작은 나라에서 말이죠”라고 그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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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2018 AUTUMN 211

“결혼 이주 여성은 평등하고 자립적인 삶을 원한다.” 이레샤 페라라는 국적을 불문하고 불이익을 당하거나 차별받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비영리 시민단체인 톡투미를 이끌고 있다. 톡투미의 목적은 이들이 평등한 대우와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페라라가 사용하는 주요 도구는 결혼 이주 여성들의 예술적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려 애쓰는 것이다. 모니카 인형은 이레샤 페라라가 이끌고 있는 기혼 이주 여성 자조 단체 톡투미를 대표하는 사업이다. 회원들뿐 아니라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방문해서 인형을 만들 수 있으며, 판매 수익금은 이 단체의 활동비로 사용된다.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결혼 이주 여성은 30만 명이 넘는다. 국제 결혼은 특히 농촌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신혼의 4분의 1이 한국인 남편과 이주 여성 아내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 여성들을 한국어를 이상하게 말하거나,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아주 능숙하게 하는 ‘외국인’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들은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결혼 이주 여성은 이제 귀화한 한국 시민이며 약 80만 명으로 추정되는 다문화 가정의 기둥이다. 그들은 국적, 직업, 가족 등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한국인 남편의 아내가 되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렸다. 그래서 이들은 한국과 사랑에 빠진 결과로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크게 들릴 것이다. 현재 한국에는 태생이 외국인인 거주자가 200만 명 이상이고, 다문화가정 구성원의 수는 2020년에 100만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적응하고 이끌다 이레샤 페라라는 1999년 서울에 있는 한 방직회사에서 일하기 위해 왔다. 그녀의 계획은 패션디자인 경험을 얻은 후 석 달 후에 한국을 떠나는 거였다. 하지만 스리랑카 출신의 이 젊은 여성의 부지런함과 쾌활함이 집 주인 아주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아주머니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레샤를 소개했다. 2년 후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했다. “그렇게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어요. 제가 사랑에 눈이 먼 게 틀림없어요”라고 이레샤(그녀는 이렇게 불러주길 원했다)는 설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차별을 경험하게 되었고 결혼 생활이 틀어지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의 외국인 혐오를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스리랑카로 돌아가 버렸다. 얼마 있지 않아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설득해 한국에 돌아오게 했지만, 그때 그녀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서울의 위성 도시인 안양에 살면서 곧 이웃들, 특히 연장자들과 친교를 쌓았다. “이웃 어른들이 저를 좋아하셨고, 그래서 저는 그들과 섞이면서 한국어를 빨리 배웠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게 이전보다 제가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걸 훨씬 더 쉽게 만들었어요.” 그녀는 이웃을 위한 작은 자원봉사 모임을 꾸렸고 오랫동안 안양의 주민자치단체 이사회의 회원으로 일했다. 이레샤는 또한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지난 8년 동안 그녀는 결혼 이주 여성 자조 단체인 톡투미를 이끌어 왔다. 2006년에 서울과 인근 위성 도시에서 온 10명이 채 안 되는 결혼 이주 여성들이 모여 시작한 단체는 이제 온라인 회원이 4,000명, 오프라인 회원이 500명에 이른다. 이런 성격의 단체로는 한국에서 가장 크다. “단체의 이름은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와 대화를 시작해요’라는 회원들의 희망을 반영하고 있어요”라고 이레샤는 말한다. “이 단체는 중국, 일본, 필리핀, 러시아, 태국, 베트남, 스리랑카를 포함한 다양한 나라에서 온 여성들로 이루어진 자조 모임이에요. 우리는 결혼 이주 여성이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자조를 위한 노력 톡투미의 방문자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진열된 ‘모니카 인형’에 마음이 뺏기기 일쑤다. 인형은 단체의 세 가지 주요한 사업 중 하나이다. ‘모니카’라는 이름은 창작자의 원래 의도를 담고 있다. 모니카는 ‘멀리 있으니까’라는 의미의 한국어 ‘머니까’와 비슷하게 들린다. 그동안 7천 개 이상의 인형이 만들어졌고 하나하나 다른 색깔과 모양을 하고 있다. “어떤 것도 똑같지 않아요”라고 이레샤는 말한다. 각각 다른 모습은 “하나됨 속의 다양성”을 상징한다고 덧붙였다. 인형을 판매한 수익금은 단체의 활동비로 쓰인다. “모니카 인형은 재활용 재료를 사용해 우리의 문화적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의도를 상징합니다”라고 이레샤는 말한다.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상관없이 누구라도 단체에 가입할 수 있고 그냥 방문을 해서 인형을 만들 수도 있어요.” “많은 다른 결혼 이주 여성처럼 저도 죽고 나면 한국에 묻힐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국 사람으로 받아 주고 대우해 주는 거예요.” 그녀는 한국인들, 공무원과 일반 시민 모두가 자신과 단체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동정의 대상이나 일방적인 지원 대상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고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봐 주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톡투미의 또 다른 주요 활동은 ‘다문화 런치’로 다양한 국제 메뉴를 제공하는 케이터링 사업이다. 케이터링 운영은 단체의 활동을 지원하고 일부 음식은 독거노인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데 사용된다. 세 번째 주요 사업은 “이모나라 나눔여행”이다. 자원봉사자 그룹은 다른 나라를 방문해 그곳 아이들과 학교를 지원한다. 예를 들어, 몇 년 전에 톡투미 회원들과 울산대 학생들이 스리랑카의 초등학교를 방문해 시설과 놀이터를 수리해 줬다. 그들은 이후 학교 아이들과 계속 연락을 하고 있고, 이들이 열심히 일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도록 용기를 주고 있다. 고정관념 깨뜨리기 이레샤는 결혼 이주 여성들이 더 이상 “사회의 지원을 기다리는 외국인”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을 돌보는 강인한 개인들이며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자신의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그녀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 남성과 결혼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편견과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과거에는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아요.” 서울에는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결혼 이주 여성이 많이 살고 있다고 이레샤는 강조한다. “우리는 세금을 내는 한국의 시민입니다. 차별당하고 배제되어도 되는 외국인이 아니에요. 가끔 미디어를 통해 정치가나 거물 기업가가 거액의 돈이나 설비를 이주자에게 기부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지원은 종종 제대로 분배가 되지 않거나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합니다. 그렇게 잘못 유도된 복지는 결혼 이주 여성에게 상처를 주거나 이들이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 역효과를 불러옵니다. 우리는 소수자이긴 하지만 사회적 활동에서 약자는 아닙니다.” 이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직업을 갖는 것이다. “고용자들은 능력이 아니라 피부색 때문에 우리를 고용하길 꺼려합니다. 가끔 무료 급식소에 전화로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하면 그곳 직원들이 환영을 해요. 하지만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면 우리를 되돌려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이레샤 역시 직업을 찾는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19년 전 한국에 오도록 만든 자신의 꿈, 디자이너의 꿈을 여전히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특히 소수 인종을 위한 교육 지원이 부족한 현실이 유감이다. “중국이나 베트남, 태국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한국어를 잘하지만 스리랑카나 미얀마, 방글라데시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은 대체로 한국어를 잘 못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게 아주 큰 문제예요. 왜냐하면 우리들의 문제는 대부분이 소통이 부족해서 생기기 때문이죠.” 이레샤 페라라 대표가 다른 회원들과 함께 만두를 빚고 있다. 톡투미에서는 정기적으로 독거 노인들을 방문해 무료 급식 나눔 활동을 하고 있다. 비효율적인 정책 이레샤는 피상적이고 비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한국 정부의 다문화정책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정부에서 다문화에 대해 말할 때 그건 한국 문화를 외국인에게, 특히 개발이 되지 않은 나라 출신의 사람들에게 전파한다는 의미예요. 저는 한국인들이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중국과 일본 외의 다른 아시아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관용적이지 못한 한국인들의 마음은, 특히 급격하게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한국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이레샤는 생각한다. 한국인들이 좀 더 긍정적인 태도로 문화적 차이를 받아들이기를 조언한다. 지난 몇 십 년간 낮은 출산율로 인해 점점 더 드러나는 인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다른 결혼 이주 여성처럼 저도 죽고 나면 한국에 묻힐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국 사람으로 받아 주고 대우해 주는 거예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첫 세대 결혼 이주 여성들이 차별을 견뎌야 했던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2세대 결혼 이주 여성들이나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은 차별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호소는 큰 울림을 만들었다. 정부는 이제 다문화가족의 아이들에게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만, 전문가들은 한국의 이주 정책이 여전히 실패라고 지적한다. 많은 연구에 따르면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 70%가 언어적인 불리함과 사회적 차별로 인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게 된다고 한다. 어떤 다문화 커플은 가정을 이루는 것을 포기한다고 한다. 그들은 아이가 자신들이 경험한 고통을 똑같이 겪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레샤는 한국 정부가 결혼 이주 여성과 이들의 아이들을 좀 더 잘 돌봐 주길 희망한다. 특히 이 여성들이 남편들보다 훨씬 더 젊기 때문이다. “미래에는 이 여성들 중 많은 이들이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게 될 거예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개인적인 계획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계획이 무엇인가 묻자 이레샤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이, 특히 아이들이 훨씬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대부분 아이들을 위한 거예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레샤와 인테리어 디자인 사업에 종사하는 남편 사이에는 두 아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레샤는 결혼 이주 여성, 귀화한 한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할 작정임을 웅변했다. 혹시 기회가 주어지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정당이 그녀를 단순히 끼워 맞추기 식으로 초대한다면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레샤는 필리핀 출생의 국회의원 이 쟈스민 씨가 원했던 안건을 성취할 수 있도록 충분히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녀의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이레샤는 살림을 거의 혼자 해내야 한다. 그래서 인터뷰를 퇴근 후나 주말에 하길 꺼려했다. “하루에 거의 몇 시간 못 자요. 하지만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가정 살림은 혼자 해내려고 하죠”라고 그녀는 말한다. 집주인이었던 이레샤의 시어머니가 현명한 결정을 내린 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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