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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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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021 SPRING 239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아리랑’ 나윤선(Nah Youn-sun [Youn Sun Nah] 羅玧宣)은 유럽에서 가장 인정받는 재즈 아티스트로 세계 무대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쳐 왔다.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해 국내에 머물게 된 그가 음악 감독을 맡고 여러 나라 뮤지션들이 협업으로 만든 앨범 이 지난 12월에 출시되었다. 전통 민요 ‘아리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의 음악감독을 맡은 나윤선(Nah Youn-sun [Youn Sun Nah] 羅玧宣 가운데)이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Heo Yoon-jeong [Yoon Jeong Heo] 許胤晶 왼쪽)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녹음 작업을 하고 있다. ⓒ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음반에 참여한 뮤지션들은 원격으로 진행된 이번 작업이 서로의 음악과 소리에 더 집중하고 탐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나윤선은 ‘아리랑’이 힘든 상황에서도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추동력을 지닌 음악이라고 말한다. 나윤선의 공연 무대를 보고 있으면 마치 그가 하나의‘악기’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 독보적인 악기가 들려주는 음률은 섬세하고 예리해서 듣는 이의 심장을 파고든다. , , , 같은 노래를 들으면 그가 목청으로 추는 눈물의 검무를 실감할 수 있다. 그는 유럽 최고의 재즈 보컬리스트로 평가받으며 세계 최정상급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서 왔으며,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두 차례 받았다. 2009년부터 독일의 ACT에서, 그리고 2019년부터는 미국의 워너뮤직그룹에서 음반을 내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알려 왔다.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한 나윤선은 1994년 록 뮤지컬 의 배우로 무대에 데뷔했다. 이듬해 훌쩍 프랑스로 음악 유학을 떠났는데, 당시 그는 재즈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저 노래를 배우고 싶었던 그는 불과 5년 만인 2000년 파리의 유수한 재즈학교 CIM에서 동양인 최초로 교수가 됐다. 나윤선에게 있어 음악적 대동맥은 미국의 블루스보다 한국의 아리랑과 근접해 있어 보인다. 3년 전 서울에서 만났을 때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슬픈 샹송을 부를 때 저는 원곡보다 훨씬 더 슬프게 부르게 돼요. 한국인들은 주변에서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세상이 끝난 듯 울잖아요. 지금껏 그 감성으로 노래를 불렀어요.” 그는 자신의 7집 과 8집 에 아리랑을 실었으며,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 무대에서도 아리랑을 불렀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예 아리랑을 소재로 한 앨범 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35분짜리 이 음반에는 가야금 연주자 박경소(Park Kyung-so [Kyungso Park] 朴京素)와 영국인 색소포니스트 앤디 셰퍼드(Andy Sheppard), 거문고 주자 허윤정(Heo Yoon-jeong [Yoon Jeong Heo] 許胤晶)과 노르웨이 트럼펫 연주자 마티아스 에이크(Mathias Eick)의 협업 등 여러 나라 뮤지션들이 원격으로 호흡을 맞춰 만든 6곡의 새로운 아리랑이 담겼다. 지금까지 여러 음악가가 다채로운 색깔로 아리랑을 재해석했습니다. 이번 음반은 어떻게 다른가요? 지난해 우리 모두 코로나19로 특별히 힘든 한 해를 보냈잖아요. 음악가, 제작사, 에이전시 모두 무대가 사라지면서 대단히 어려운 상황을 맞았어요. 그래도 “이제 끝났어”라고 말하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어요. ‘Stay creative’나 ‘Keep creative’가 모두의 캐치프레이즈였죠. 그들의 긍정적인 태도에서 제가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기쁘고 밝은 아리랑으로 작위적인 희망을 노래하지는 말자고 생각했죠. 지금의 세상을 그대로 반영한,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아리랑을 만들어 보자고 음악가들을 독려했습니다. 모두 동감하며 제 뜻에 따라 줬고, 이번 음반에 참여한 음악가들이나 저나 작업 과정에서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음악가를 섭외할 때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협업에 열려 있는 뮤지션, 그리고 아리랑이 뭔지 알 만한 뮤지션을 골랐어요. 앤디 셰퍼드는 박경소 씨와 영국 ‘K-뮤직페스티벌(K-Music Festival)’에서 함께 공연한 적이 있어요. 마티아스 에이크는 저와 듀오로 순회 공연도 해 본 적이 있는데 다재다능한 연주자예요. 트럼펫, 콘트라베이스, 드럼, 건반, 전자음악을 섭렵했죠. (나윤선은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며 동료 음악인들 사이에 아리랑이 재즈 스탠더드처럼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핀란드의 이로 란탈라(Iiro Emil Rantala 피아노)와 스웨덴의 울프 바케니우스(Ulf Wakenius 기타)는 2017년 듀오 앨범 에 이란 곡을 담았는데 이는 의 멜로디를 변형한 것이다. 바케니우스는 2000년대 초반부터 나윤선과 활동하며 밀양, 진도, 정선의 아리랑을 깊숙이 익혔다.) 해외 음악가들은 아리랑을 음악적으로 어떻게 느끼나요? 일단은 아리랑의 멜로디 자체를 정말 좋아해요. 이번 앨범에서 듀오 ‘첼로가야금(CelloGayageum)’과 함께 라는 곡을 만든 트롬본 연주자 사무엘 블라제(Samuel Blaser 스위스)에게 제가 한국의 지역별 아리랑을 들려줬어요. 그랬더니 그 모든 아리랑에서 영감이 넘쳐흐른다면서 자신이 재해석한 곡들을 제게 수시로 보내줬어요. 아리랑의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기본적으로는 포크송, 즉 민요의 힘이라고 봅니다. 또 외국인에게는 새롭기도 하고요. 전에는 모르던 새로운 음악적 화두인 셈이니까 흥미가 강하게 생기는 거죠. 아리랑 자체가 뼈대는 심플하지만 리드미컬한 특성이 있어요. 그래서 음악가들이 각자 원하는 것을 시도해 볼 수 있죠. 특히 재즈 음악가들은 본인들이 느끼는 것이 백 가지면 백 가지를 모두 다르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 더욱 그렇고요. 5박, 7박 같은 변칙적인 박자에도 관심이 많아요. 이번 앨범을 원격으로 작업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각자 서로 물리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는 데다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모일 수도 없는 처지였어요. 그래서 한국 음악가들이 먼저 아리랑을 기반으로 곡을 창작해 녹음했어요. 이것을 직접 또는 저를 통해 해외의 협업 음악가에게 이메일이나 인터넷 메신저, SNS 등을 통해 보냈죠. 해외 음악가들은 그 파일을 듣고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 연주를 다시 보내 줬고요. 당연히 한 번에 되지는 않았어요. 모두가 만족해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이런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다듬어 갔죠. 시차가 있지만 공동 작곡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부는 제가 직접 최종 편집을 하기도 했어요. 해마다 연주 여행 일정이 빼곡했는데, 2020년은 어땠나요? 부모님과 그처럼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근 20년 만에 처음이었어요. 전에는 한국의 집이 호텔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었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우울함과 불안감도 찾아왔어요. 느닷없이 ‘내가 지금 생의 어디까지 와 있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 제가 감수성이 예민해서인지 이런 상황이 너무 아프게 느껴졌어요. 주위에서 “이럴 때는 소셜미디어를 잘 활용하라”고 조언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팬데믹 초반에는 음악을 듣는 대신 청소하고 정리하며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는 데에만 집중했죠. 다시 음악을 듣기 시작했을 때는 유럽 음악을 재발견했어요. 어쩐지 모든 음반이 영화음악처럼 다가오더군요. 그동안 스티비 원더, 허비 행콕을 들으면서 짜릿함을 느꼈었지만 이렇게 집 안에서 느린 속도로 앨범을 통째로 듣게 되니 음악도 하나의 긴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일 수 있겠다는 깨달음이 들었어요. 물론 예전에도 음반의 곡 순서를 정할 때 기승전결에 신경 썼지만, 이번 기회에 그 중요성을 좀 더 깊이 깨닫게 됐죠. 예술과 음악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 시간이기도 했어요. 이번 음반을 지휘하면서 “곡을 짧게 쓰지 말라. 되도록 길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담아라” 하고 주문했어요. (첫째 줄 왼쪽부터) 허윤정의 거문고 연주, 드러머 미켈레 라비아(Michele Rabbia 이탈리아), 색소포니스트 앤디 셰파드(Andy Sheppard 영국), 경기민요 소리꾼 김보라(Kim Bo-ra [Bora Kim]); (둘째 줄 왼쪽부터) 아코디언 연주자 뱅상 페라니(Vincent Peirani 프랑스),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 플루티스트 조스 미에니엘(Joce Mienniel 프랑스), 대금 연주자 이아람(Lee Aram [Aram Lee]); (셋째 줄 왼쪽부터) 판소리 춘향가 소리꾼 김율희(Kim Yul-hee [Yulhee Kim]), 가야금 연주자 박경소(Park Kyung-so [Kyungso Park] 朴京素), 트럼펫 연주자 마티아스 에이크(Mathias Eick 노르웨이), 타악기 연주자 황민왕(Hwang Min-wang [Min Wang Hwang]). 이 외에도 듀오 그룹 첼로가야금(CelloGayageum)과 트롬본 연주자 사무엘 블레이저(Samuel Blaser 스위스)가 이번 앨범 작업에 참여했다. ⓒ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아리랑 자체가 뼈대는 심플하지만 리드미컬한 특성이 있어요. 그래서 음악가들이 각자 원하는 것을 시도해 볼 수 있죠. 특히 재즈 음악가들은 본인들이 느끼는 것이 백 가지면 백 가지를 모두 다르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 더욱 그렇고요. 5박, 7박 같은 변칙적인 박자에도 관심이 많아요.” 이번 아리랑 음반을 들으면서 홈트레이닝이나 요가의 배경 음악으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도 좋겠네요. 굳이 집중해서 들으시지 않아도 돼요. 설거지하거나 집안일을 할 때, 때론 아무것도 안 할 때 그냥 틀어 놓고 쓱 지나치는 음악으로도 좋아요.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깊이 집중해 감상해 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2019년 발매한 열 번째 정규 앨범 이 최근작이었죠. 올해 계획이 궁금합니다. 워너뮤직과 계약 후 두 번째 앨범을 준비합니다. 제 앨범으로는 11번째인데, 1~2월에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초반 작업을 할 예정이에요. 4월에는 녹음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거고요. 다시 어쿠스틱 음악으로 가 볼까 하는 생각도 있는데,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 색다른 포맷의 음악을 기대하고 있어요. 그리고 코로나19 상황이 호전된다면 3월에 잡혀 있는 유럽 지역 10개 공연도 가능하겠죠. 올해는 모든 음악가, 예술인,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한 나날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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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020 WINTER 106

낮은 곳으로 임하는 예술 설치 작가 최정화(Choi Jeong-hwa 崔正化)는 자신이 작가로 불리는 것을 반갑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이 ‘디자이너’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그는 미술관보다 전통 시장이나 벼룩시장이 더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9월 마지막 주, 추석 연휴를 앞두고 남쪽 지방 도시의 한 청과시장에 지름 2~8m의 거대한 과일 풍선들이 등장했다. 커다란 석류, 복숭아, 딸기 모양의 이 풍선들은 의 일환으로 선보인 최정화의 설치 작품이었다. 최정화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소재를 높이 쌓거나 커다랗게 확대해 공공장소에 내놓는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에서는 시민들이 기증한 식기 7,000여 개를 모아 높이 9m의 작품 를 만들었다. 올해는 대구미술관에 녹색과 빨간 플라스틱 소쿠리 5,376개를 쌓은 (2013년)를 전시하기도 했다. 이런 방법들은 앤디 워홀의 나 클래스 올덴버그의 거대한 조각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그 소재가 플라스틱 소쿠리나 냄비 등 한국인에게 익숙하다는 점이 다르다. 화려한 색과 친근한 소재는 누구나 한번쯤 눈길을 주게 만든다. 이 때문에 최정화라는 이름은 몰라도 그의 작품을 스치듯 본 사람은 적지 않다. ‘한국적 팝’으로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그를 서울 종로구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최정화 하면 ‘쌓기’가 떠오릅니다. 그 시작이 언제인가요? 1990년대 초반 개인전 를 열면서 초록색 소쿠리로 쌓은 탑 여러 개를 내놓았어요.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하려는 시도였어요. ‘플라스틱 소쿠리를 미술관 전시장에 가져다 놓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장난기 어린 생각으로 시도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왜 하필이면 플라스틱 소쿠리였을까요? 저는 원래는 그림을 그렸고, 대회에서 상도 탔었죠. 그런데 회의를 느끼고 있었어요. 그래서 전시 제안이 와도 거절하다가 3년 만에 응하려는 순간, 우리 집에 있는 빨간 소쿠리가 눈에 들어왔어요. 시장에 가도 쌓여 있고, 어느 집에나 소쿠리 하나쯤은 있잖아요. 누구나 있는 재료를 써보자는 생각에서 시작된 거죠. 예술적 재주를 부리지 않을 방법을 찾다가 생활 재료를 사용하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택하는 방법이나 주제는 대부분 바깥에서 놀고, 바깥에서 설치하는 거예요. 2015년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연 개인전 제목은 이었죠. 박물관 주변 폐가에서 가구를 모아 밥상 탑을 만들기도 했고요. 예술로만, 미술로만 놀지 않기를 시도하는 거죠. 자칫 잘못하면 ‘그들만의 리그’가 되니까요. 제 표현으로는 ‘삶이 예술이 되는 놀이터’를 만들려고 해요. 그러면 누구나 자신의 기억이나 추억을 떠올리며 즐거워할 수 있죠. 근본적으로 예술은 모두의 것인데 특정한 부류의 1%만 향유한다는 데 불만이 있었어요. ‘불만’은 평소 잘 쓰지 않는 표현인데요. 사실 지금도 저에겐 현대 미술이 어려워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요. 하물며 일반 관람객들은 어떻겠어요. 굉장히 솔직한 말씀이시네요. 사실인걸요. 얼마 전 P21 갤러리에서 열렸던 개인전에서도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이 전시는 최정화의 예술 상품전, 부적전”이라고요. 예술가가 만드는 것이 결국은 상품 아니냐는 이야기에요. 저는 상품을 만들었고, 테스트를 해보았더니 관객의 호응이 있었던 거죠.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인가요? 결론적으로 보면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전문가를 겨냥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처음 전시할 때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보시더니 “소쿠리 예쁘네. 나도 하나 줘” 하고 말을 걸었어요. 제 나름대로의 소통 방법이 성공한 것 아닌가 생각해요. 영화나 무대 미술감독, 인테리어 디자이너로도 활발하게 활동하셨는데요. 패션숍이나 클럽, 바 인테리어를 했어요. 그러다 현대무용가 안은미(安恩美)를 만나 무대 미술을 하고, 시인 겸 소설가 장정일(蔣正一)의 작품을 영화화한 <301 302>(1995년)로 미술감독을 시작했어요. 이 영화는 거식증과 폭식증에 걸린 두 여성이 한 아파트에 이웃으로 살면서 생기는 일을 그렸죠. 처음엔 미술만 맡으려고 하다가 제가 총괄 감독을 하겠다고 제안해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일을 했어요. 사실 그 이전에 제가 1980년대 후반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을 했고, 직접 회사를 만들기도 했죠. 그때 제가 했던 것은 ‘눈이 부시게 하찮은’ 것들이에요. 일반적인 패션숍에서는 쓰지 않는 재료를 쓰거나, 철거된 것들을 그대로 놔뒀죠. ‘치밀하게 엉성한’ 것이기도 하구요. 그때의 재료, 공간 경험이 지금을 만들었어요. 시리즈를 ‘부적’에 비유하는 것은 기복적인 의미인가요? 알케미가 말 그대로 연금술이니까요. 제가 만든 플라스틱 기둥이 그 이상의 것이 된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실제로 황금을 만들 수는 없지만, 물질이 정신이 되는 과정이에요. 시장 상인들이 물건을 쌓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감탄이 나오죠.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엄청난 내공이 느껴져요. 무수히 쌓인 플라스틱에서 숭고미를 느끼는 거죠. 기복을 왜 중요하게 생각하나요? 글쎄요. 어릴 때 못 살아서 그런 걸까요? 찢어지게 가난했고, 국민학교 6년 동안 여덟 번이나 전학을 다니는 바람에 한곳에 정착하지 못했죠. 그래서 유년 시절의 기억이 없어요. 완전한 암흑, 공백이에요. 기억이 없다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시절을 이용했다고 생각해요. 잦은 이사로 같이 놀 친구가 없다 보니, 혼자 쓰레기나 물건을 줍는 습관이 생겼어요. 대학생이 되어서는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에서 어마어마한 감동을 받곤 했죠. 고물상, 공사 현장이 있었거든요. 언젠가는 황금 덩어리도 주웠어요. 그러나 학교에 가면 먹먹하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를 잘 아는 작가들은 제 작품이 슬프다고 해요.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건 위험한 생각이지만, 저는 길바닥에서 예술을 했어요. 예술이 저 높은 곳에 있을 때 “내려와라, 놀자”, “예술은 당신 옆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죠.” 작품에 어머니의 영향이 있어 보여요. 제가 미대에 가는 걸 아버지가 반대하셨어요. 그림을 못 그리게 붓도 분질러서 경기공전(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디자인과를 갔죠. 그런데 어머니께서 몰래 미대 입시를 도와주셨어요. 화실비가 없으니 대신 화실에 김치를 갖다주기도 했고요. 홍익대 미대에 간 것은 다 어머니 덕분이죠. 어머니는 제게 창조주이자 여신이죠. 실제로 정말 재주가 많으시고요. 현재 진행 중인 경남도립미술관 개인전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청과물 시장에서 쓰던 50~70년된 리어카가 미술관으로 들어와 작품이 됩니다. 시장의 알록달록한 파라솔은 샹들리에로 바뀌고요. 바닷가에 버려진 배도 등장하죠. 더 중요한 것은 지역 재생 활동하는 분들을 작가로 초청해 그들의 프로젝트를 소개한다는 거예요. 앞으로의 활동은 어떻게 될까요?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건 위험한 생각이지만, 저는 길바닥에서 예술을 했어요. 예술이 저 높은 곳에 있을 때 “내려와라, 놀자”, “예술은 당신 옆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죠. 지금은 ‘재생’에 관심이 많아요. 이제는 다시 근본, 근원에 대한 회귀를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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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020 AUTUMN 94

버려진 것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다 섬유 디자인을 전공한 두 젊은 디자이너가 의기투합해 2010년 디자인 스튜디오 ‘패브리커(Fabrikr)’를 만들었다. 이들은 소재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며 가구와 공간 디자인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특히 이들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난 공간들은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가구에서 출발해 공간 디자인으로 활동 영역을 넓힌 디자인 스튜디오 패브리커의 공동 창업자 김성조(왼쪽), 김동규 씨가 자신들이 디자인한 서울 성수동 소재 카페 어니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디자이너 김동규(Kim Dong-kyu 金東奎)와 김성조(Kim Sung-jo 金成晀)가 패브리커라는 이름으로 디자인 스튜디오를 만들고 나서 처음 발표한 작품은 의자 였다. 버려진 천과 나무에 에폭시를 입혀 만든 작품이었다. 버려진 것들을 그러모아 가구를 만들었던 이들은 이윽고 방치된 공간에도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공장, 우체국, 한옥, 목욕탕이 카페와 안경점으로, 브랜드 쇼룸으로 탈바꿈되었다. 단지 공간의 용도만 바뀐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오랫동안 머물고 싶어 했다. 그 공간들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번화한 도시에 사는 젊은이들의 감성과 생각을 이해하고 싶다면, 지금 서울의 시류를 이끌고 있는 핫플레이스가 궁금하다면 패브리커의 손길이 닿은 공간에 가 보면 된다. 그곳들이 답을 알려줄 것이다. 버려진 것들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가? 김동규: 우리는 대학에서 섬유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섬유라는 물성의 한계를 넘어보고 싶었고, 다양한 천을 사용해 가구와 오브제를 만들어 보려고 했다. 필요한 재료를 구입해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는 버려진 것이 우리의 손을 거쳐 새로운 생명을 얻고 무엇인가로 창조된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 2014. Musical instruments, furniture, neon light. 9.5 × 20 × 3.2 m (WDH). . 2014. Prism film, wire, mirror. 9.5 × 15 × 3.2 m (WDH).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의 두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는 2, 3층에 쇼룸이 있으며 1층은 프로젝트 공간으로 운영된다. 패브리커는 이곳에서 1년 동안 15일에 한 번씩 다른 콘셉트의 공간 디자인을 보여 주었다. ⓒ 패브리커 ‘업사이클’과 ‘버려진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다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무엇이 다른가? 김동규: 스위스 브랜드 프라이탁(Freitag)은 방수 기능이 있는 산업 폐기물을 활용해 가방으로 제품화했고,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었다. 그런데 업사이클링 브랜드는 제작 공정에 엄청난 노고가 들어가기 때문에 비싼 값을 매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잘 팔린다는 얘기는 그만큼 기획력이 좋다는 뜻이다. 상품화는 브랜드가 품고 있는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소비자가 기꺼이 돈을 지불할 만큼 제품에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려진 재료 자체에 더 집중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설정했다. 상업 제품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작품, 오브제를 만든 이유다. 초기에 소재나 작업 방식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경계를 두지 않고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동규: 기조가 바뀐 것은 아니다. 경계를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구, 설치 작품, 공간을 만들었고 지금은 건축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계속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우리만의 방식으로 풀어 보고 싶다. 김성조: 가구나 공간 모두 기획하고 구상하는 과정은 같다. 대상이 먼저냐,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먼저냐의 차이다. 버려진 의자, 버려진 천, 버려진 공간 등 대상이 정해지면 그 안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고민한다. 다만 가구는 우리 둘만의 생각을, 공간은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하는 점에 차이가 있다. 공간 디자인에서는 사람들을 어떻게 움직이게 할 것인지 동선을 고민한다. 가끔 우리가 아마추어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작업 과정 중에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서슴없이 수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우리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초기작부터 최근 프로젝트까지 살펴보면 가구와 공간에 에폭시를 즐겨 사용하는 것 같다. 김성조: 에폭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작업의 관점을 잘 투영해 주는 물성을 가졌다. 과거를 담을 수 있고, 세련되면서도 미래적이지만 만져 보면 유리와 다르게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을 지녔다. 세월이 지날수록 색이 변하는 것도 마음에 든다. 액체였다가 고체가 되는 물성도 흥미롭다.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르게 기존의 것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재료이기도 하다. 우리 작품을 예로 들면, 의자 은 부러진 팔걸이 부분을 에폭시를 이용해 부목처럼 대체해 준 작품이다. 같은 수종의 나무를 덧댔다면 ‘복원’이 되겠지만, 우리는 에폭시로 따뜻한 인공 팔을 추가해 미래적인 이미지를 연출했다. 김동규: 나는 에폭시가 한국적이라고 느낀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멋스럽고 주변의 것과 어우러지면서도 힘이 있다. 10년 가까이 에폭시를 쓰고 있는데 아직까지 대체재를 발견하지 못할 만큼 매력적인 재료다. 첫 번째 공간 프로젝트는 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와 함께했다.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패브리커를 각인시킨 것 같다. 김성조: 2011년 젠틀몬스터가 아티스트와 컬래버레이션 안경을 만든다며 우리에게 연락했다. 2년 후에는 논현동에 플래그십 스토어 1호점을 오픈한다며 마당에 놓을 설치물을 의뢰했다. 초기 아이디어는 대천해수욕장에 버려진 폐선박을 가지고 오는 것이었는데, 의논을 하다 보니 아이디어가 확장되어 공간으로 이어지게 됐다. 배를 그저 오브제로만 둘 것이 아니라 매장 내부를 연결하는 입구가 되고, 배를 통해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게 만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젠틀몬스터 홍대 매장은 공간을 통해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방법을 고민한 결과물이다. 다양한 소재와 기법, 연출을 통해 1년 동안 보름에 한 번씩 매장을 새롭게 꾸몄다. 그 결과 젠틀몬스터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한 브랜드가 되었으며, 젠틀몬스터 매장 방문은 단순히 안경 구매가 아니라 공간을 경험하는 문화적 의미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1. . 2010. Fabric, formica, wood. 60 × 60 × 85 ㎝ (WDH). 2. . 2013. 버려진 의자에 에폭시. 64 × 54 × 100 cm (WDH). 뒤이어 진행한 프로젝트 카페 어니언도 성수점을 비롯해 미아점, 안국점 모두 사랑받고 있다. 김성조: 성수점은 1970년대에 지어진 건물로 정비소, 슈퍼마켓, 숙박업소 등으로 쓰이면서 용도에 따라 불법 증축했던 흔적이 벽과 바닥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 흔적을 디자인 방향으로 잡았다. 성수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사랑받게 되면서 두 번째 매장도 오픈하게 되었는데, 어니언 대표는 어니언이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문화적인 브랜드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우체국 건물에 미아점을 만들었고, 사람들이 모여서 소통하는 ‘광장’을 콘셉트로 잡았다. 우리에게 어니언 미아점은 설치미술 같은 작업물이다. 가장 최근에 오픈한 어니언 안국점은 한옥이 주는 힘이 보인다. 김성조: 한국의 카페 시장이 세계 3위라고 한다. 해외 관광객들이 한국에서 카페 투어를 할 정도로 성황이고, 디자인적으로도 볼거리가 많다. 미아점 이후 어니언은 서울을 대변할 수 있는 카페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마땅한 공간을 계속 찾아보다가 발견한 것이 지금의 안국동 자리였다. 마룻바닥과 기둥, 지붕 등 한옥의 특징을 최대한 살렸다. “버려진 의자, 버려진 천, 버려진 공간 등 대상이 정해지면 그 안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고민한다. 다만 가구는 우리 둘만의 생각을, 공간은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하는 점에 차이가 있다.” 서울 강북우체국의 자투리 공간을 재생한 카페 어니언 미아는 ‘광장’ 콘셉트를 구현하기 위해 노출 콘크리트를 그대로 살리고 최소한의 테이블만 배치했다. ⓒ hugefabio 최근 관심 갖는 재료나 주제가 있다면? 김성조: 카페 어니언을 시작하면서 빛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휴식을 위한 공간에서 빛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요즘 빛의 효과를 연구하는 미국의 설치미술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에게 관심이 많다. 앞으로 확장해 보고 싶은 영역이나 도전해 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다면? 김성조: 정해 놓은 것은 없다. 건축을 넘어 ‘지역’을 만들어 보고 싶고, 가구보다 작은 물건을 만들어 보고 싶기도 하다. 경계를 생각하지 않고 일할 때 사고가 더 확장되는 것 같다. 패브리커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김동규: 명료하게 한 문장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 떠오르는 단어는 사람과 시간이다. 김성조: 어니언의 아트디렉터를 맡게 되면서 브랜드가 함께하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문화 분야에 한국 브랜드라고 할 만한 것이 너무 적은 것 같다. 한국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어니언과 패브리커의 목표이고, 함께 팀을 만들면서 꿈을 꾸고 힘을 모으는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최근에 인상 깊었던 공간이나 여행지가 있었다면 어디인가. 김동규: 2년 전 어니언 안국점을 만들 때 한국적인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우연히 미술사학자 최순우(崔淳雨) 선생이 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고 부석사에 가 보았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한국적인 건축과 전통의 멋을 느꼈다. 자연 안에 놓인 건축물들과 동선에 따른 시점의 변화를 느끼며 큰 감명을 받았다. 1970년대 금속 부품 공장으로 사용되었던 폐공장을 재생해 만든 어니언 성수는 2016년 오픈 이후 서울의 대표적 카페 성지로 거듭났다.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살린 외벽과 카페로 개조된 실내 공간이 도회적 감수성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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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020 SUMMER 99

바이러스 유행에 맞서는 두 가지 백신 통섭을 주창하는 사회생물학자 또는 동물행동학자이기도 한 이화여자대학교 최재천(崔在天 Choe Jae-chun) 교수는 인류의 생태계 파괴가 초래할 위험에 대해 줄곧 경고해 왔다. COVID-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사상 초유의 혼란을 겪고 있는 지금 그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준비를 위해 무분별한 자연 훼손을 멈출 것을다시 한 번 강조한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 생태계를 파괴해 온 관행을 반성해야 합니다. 자연을 보호하는 일이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에요. 그리고 생태 백신이 바이러스 유행을 막는 근본적 처방임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다양성재단의 초청으로 2017년 한국을 방문한 제인 구달 박사가 최 교수와 함께 강원도 대암산 용늪을 방문해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이끌고 있는 이 재단은 동물과 환경 관련 학문의 연구 지원, 환경 보호 및 문화 콘텐츠의 개발, 교육, 보급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대암산 용늪은 산꼭대기에 형성된 늪으로 한국이 람사르 협약에 가입한 후 가장 먼저 습지보호지역으로 등록된 곳이다. ⓒ 내친구봄이 조수정(Cho Soo-jeong 趙受貞) 충청남도 서천군에 위치한 국립생태원의 스타는 단연 ‘잎꾼개미(leafcutter ants)’다. 중남미 열대 지역에서 서식하는 이 개미는 나뭇잎을 잘라서 둥지로 가져와 잘게 씹은 후 농사를 짓는 비료로 사용한다. 이들은 가축 사육과 농사를 시작한 지 고작 1만 년밖에 안 된 인간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농사꾼으로 살아왔다. 잎꾼개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얀 가루를 뒤집어쓰고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들이 있다. 이 가루는 항생 물질을 내놓는 세균(bacteria)이다. 잎꾼개미는 이 세균에게 먹잇감을 제공하고, 세균이 내놓은 항생 물질로 농사 지은 버섯을 공격하는 곰팡이균을 소독한다. 수천만 년을 이어 온 잎꾼개미와 미생물의 공생이다. 이 개미를 국립생태원으로 데려온 주인공은 바로 ‘개미 박사’로 유명한 초대 원장이자 생태학자인 최재천 교수다. 그는 “생명 다양성(biodiversity)을 지키려면 기후 위기(climate crisis)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개나리가 활짝 핀 어느 봄날, 대학 교정에서 그를 만났다. 생태학자 최재천(崔在天) 박사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이화여대 캠퍼스 안 자신의 연구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그는 오래전부터 생명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류가 기후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바이러스가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이런 사태를 경고해 오셨지요? 생태와 진화를 연구하는 생물학자로서 인간과 바이러스의 불화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죠. 우선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인간과 바이러스가 경쟁하면, 인간이 바이러스를 이길 수 없습니다. 바이러스는 지구에서 인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존재해 왔고, 지금도 수많은 종이 지구 곳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기회만 있으면 인간을 숙주로 삼으려고 돌연변이를 시도합니다. 대부분은 실패하죠. 그런데 기막히게 똑똑한 놈이 나타난 거예요. 증상이 약한 상태에서도 전파가 쉽게 되면서도 살상력이 너무 세지는 않아서 순식간에 인간을 숙주로 삼아 세계 곳곳으로 전파가 되었죠. 지금 전 세계가 바이러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인류가 어떻게든 이번 유행은 극복하겠죠. 더 큰 문제는 이번이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을 숙주로 삼으려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나타날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행하는 코로나19의 백신을 18개월 걸려 개발한다고 하더라도, 그 백신이 개발될 즈음에는 또다시 다른 바이러스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럼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바이러스 유행에 대응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나는 그것을 ‘생태 백신(eco-vaccine)’과 ‘행동 백신(behavior vaccine)’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행동 백신은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조한 것으로 들립니다. 맞아요. 사회적 거리 두기가 바로 훌륭한 행동 백신입니다.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전 세계가 더도 말고 딱 2주만 멈추면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파 경로가 차단되기 때문에 이미 감염된 사람들만 치유하면 됩니다. 세계가 합의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모두가 함께 멈출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확실한 백신은 없겠지요. 사회적 거리 두기의 강력한 효과는 한국 시민들의 실천을 통해서도 확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생태 백신은 뭔가요? 인류가 그동안 거리낌 없이 저질러 온 자연 생태계 파괴를 멈춰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바이러스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숙주로 삼아왔던 자연 생태계의 동식물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은 숲속 동굴 박쥐의 몸속에 살던 바이러스와 인간이 마주칠 일이 없었어요. 박쥐, 사향고양이, 낙타, 천산갑이 우리에게 먼저 악수를 청할 리 없죠. 숲을 파괴하고, 야생 동물을 잡아먹고 사육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그런 일이 생긴 겁니다. 앞으로는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건너오지 못하도록 야생동물을 건드리지 않아야 합니다. 기후 변화와 그로 인해 사라질 생물 다양성, 그 두 문제가 바이러스 유행과 연결돼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2015년 4월, 최재천 교수가 국립생태원의 전을 관람하고 있는 초등학생들에게 개미의 생태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국립생태원의 초대 원장을 역임했다. ⓒ 문화일보 이제까지 인류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 자연 생태계 파괴를 도구로 삼아 왔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경제 성장만을 좇으면서 생태계 파괴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바이러스 유행 때문에 전 세계 경제가 멈춰 섰고 상상할 수 없는피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 생태계를 파괴해 온 관행을 반성해야 합니다. 자연을 보호하는 일이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에요. 그리고 생태 백신이 바이러스 유행을 막는 근본적 처방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장에 취해 있었던 인류가 이번 기회에 다른 길을 갈 수 있을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인간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유행이 끝나면 또 하던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겠죠. 하지만 분명히 이번 바이러스 유행이 생태적 각성의 계기가 되어 실천에 나서는 사람이 하나둘씩 늘어날 겁니다. 그런 사람들의 실천이 모여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야죠. 아까 행동 백신 말씀을 하셨죠? 앞으로도 사회적 거리 두기를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비대면 사회의 도래가 예고된 것 같습니다. 인간은 지구상의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굉장히 많은 동종의 낯선 개체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죠. 스타벅스에 모르는 사람 20~30명이 앉아 있어도 겁 없이 혼자 들어갈 수 있어요. 만약 침팬지 세계에서 그런 행동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침팬지 무리가 달려들어 1분 내에 목숨을 잃게 될 거예요. 개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바이러스 때문에 당분간은 우리가 서로 거리를 두게 되겠지만, 그런 삶이 끝없이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우리는 경이로운 진화의 산물인 만큼 미래에도 끊임없이 뭉치고, 만나고, ‘스킨십’할 겁니다. 다만 바이러스 대유행이 빈번해지면 그때마다 거리 두기를 반복하게 되겠죠.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한층 더 사랑하며 끈끈하게 지내게 될 겁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대학도 개학을 하지 못하고 온라인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몇 년 만에 가장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정되었던 국내외 다양한 강연과 회의가 대부분 취소되었어요. 온라인 강의로 학생들을 만나면서 뜻밖의 여유를 즐기고 있습니다. 덕분에 바쁜 일정 때문에 미뤄두었던 책의 집필을 거의 마무리했어요. 조만간 세상에 선보일 것 같아요. 그간 여러 권의 책을 펴내셨어요. 이번에 내는 새 책은 어떤 책입니까? 토론을 잘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생물학자와 어울리지 않는 책처럼 보이죠?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계의 많은 동물이 학습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학습하는 수많은 동물 가운데 우리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 되었어요. 그 결정적인 이유는 인간이 출발선을 들고 다니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출발선을 들고 다니는 동물이요? 여러 동물 가운데 인간만이 축적한 지식을 기록해서 전합니다. 인간은 앞선 세대가 성취한 만큼 출발선을 옮겨 놓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앞선 세대로부터 배우고, 서로 신뢰하면서 그것을 공유하는 일이죠. 그러려면 토론을 잘해야 하고요. 생물학자가 토론을 잘하는 법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죠. 출발선을 들고 다니는 동물인 인간이 이번 바이러스 유행을 통해서도 바뀌면 좋겠습니다. 항상 희망을 얘기하시는 제인 구달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얼마 전 제 안부를 물으면서 “좋은 일도 있을 거야. 벌써 몇 번째 겪는 일인데, 이제는 드디어 사람들이 자연을 가능하면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게 우리에게 좋다는 걸, 어쩌면 그 계산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셨어요. 저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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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020 SPRING 68

끝없는 자유를 향한 실험 등장하는 무대마다 화제를 몰고 다니는 파격의 아이콘이지만, 그가 추구하는 것은 새로움이 아니라 자신만의 소리라고 한다. 전통 민요를 제대로 배우고 장르를 훌쩍 뛰어넘는 실험적인 퍼포먼스로 관객에게 즐거움과 놀라움을 함께 선사하는 이희문 (Lee Hee-moon 李熙文)— 그의 얘기를 들어본다. 2017년, 런던 로열 앨버트홀(Royal Albert Hall) 엘가룸(Elgar Room)에서 공연하는 이희문. 주영한국문화원이 주최한 제4회 K-뮤직 페스티벌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는 이희문과 재즈 밴드 프렐류드(Prelude)가 공동으로 기획했으며, 소리꾼 듀오 놈놈(NomNom)이 함께 출연했다. 2016년 국립극장에서 처음 선보인 이 공연은 경기 민요와 재즈를 접목시켜 큰 호응을 얻었다. Kii Studios Photography & Film 촬영, 이희문컴퍼니 제공 2017년 9월, 정체불명의 한 밴드가 미국 공영방송 NPR의 사무실을 뒤흔들어 놨다. 전 세계 음악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음악 채널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Tiny Desk Concert)’는 이름대로 스튜디오가 아닌 방송국 사무실에서 진행된다. 호주의 싱어송라이터 태시 술타나(Tash Sultana)부터 미국 출신의 가수 겸 배우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뮤지션이 이곳에서 라이브 공연을 펼친다. 이날 출연자는 한국에서 온 6인조 그룹 씽씽(SsingSsing)이다. 한국의 전통 민요에 록, 디스코, 사이키델릭 등을 뒤섞은 음악, 뮤지컬 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으로 충격을 주었다. 워싱턴 D.C.의 존 F. 케네디 센터에서도 공연하며 끓는점을 향해 가던 이 그룹은 2018년 돌연 해체했다. 몹시 추웠던 지난 겨울 어느 날, 서울 이태원에서 씽씽의 리드 보컬이었던 이희문을 만났다. 그는 말문을 막 뗀 꼬마 시절부터 소리꾼 어머니 고주랑(高柱琅) 명창의 레코드를 들으며 민요를 따라 불렀다. 그러다 TV에 나오는 민해경(閔海瓊)과 마돈나에게 홀딱 반해 춤을 추며 노래하는 대중가수를 꿈꾸기도 했다. 일본에 유학해 영상을 전공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뮤직비디오 조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0대 후반에야 ‘접신하듯’ 민요에 빠져들었다. 씽씽의 보컬리스트는 그가 가진 여러 모습 중 하나일 뿐이다. 그는 지금도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돌풍을 몰고 온 밴드 임: 처음 씽씽을 봤을 때 이 떠올랐습니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이: 영화 나 가수 마돈나, 민해경…. 그리고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안무가 안은미(Ahn Eun-me 安恩美) 선생의 영향도 컸죠. 그는 강력한 비주얼의 선두주자니까요. 안은미 씨가 제작한 2007년 초연작 에서 제가 바리공주 역을 맡았어요. 처음에는 여자 역을 맡겨 질색했는데 차츰 제가 잘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됐죠. 억지로 하면 연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 제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었어요. 임: 씽씽은 결성 이후 국내의 크고 작은 다양한 무대에 섰습니다. 하지만 NPR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 녹화는 좀 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어땠나요? 이: NPR이 뭔지도 모르고 가서 대충 해 버리고 온 느낌이에요. 방송국 사무실 한편에서 모니터, 스피커도 없이 허공에다 노래를 하라니 좀 당황했어요. 이렇게 화제가 되고 유튜브로 평생 남을 건 줄 알았으면 더 잘할 걸 그랬어요. 심지어 을 부를 때는 가사도 틀려서 즉흥적으로 지어 불렀어요. 그래도 음향 엔지니어가 베테랑이어서인지 여러모로 아주 잘 나오긴 했더라고요. 임: 씽씽이 싸이의 이후에 세계적으로 뭔가 또 큰일을 저지르겠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정점에서 팀을 해체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 멤버 여섯 명의 개성이 너무 뚜렷했어요. 함께할 때는 그것이 장점이었죠. 저희는 무대에서 누가 무엇을 하든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각자 마음대로 했거든요. 하지만 그런 성향은 남녀가 만나 언젠가 이별하듯 자연스럽게 각자의 길을 가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더군요. 이제 각자의 개성을 살려 장영규(Jang Young-gyu 张英圭) 음악감독은 ‘이날치’라는 새로운 팀을 통해 음악적으로 못 다한 이야기를 하고 있죠. 추다혜, 신승태 씨 등 다른 멤버들도 나름의 활동을 하고 있고,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임: 이제 시간을 돌려서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씽씽은 어떻게 만들어진 팀이었나요? 이희문: 2014년에 굿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라는 공연을 했는데, 그때 음악감독이었던 장영규 씨가 민요를 클럽에서 불러 보자고 제안했어요. 이후에 장영규와 기타리스트 이태원, 드러머 이철희, 소리꾼 신승태와 추다혜, 그리고 저까지 6명이 모여 씽씽을 만들었죠. “제 노래가 담긴 유튜브 영상에 누군가가 ‘너무 경쾌한데 왜 눈물이 날까요’란 댓글을 달았던데, 그분은 경기민요의 특징을 직감적으로 알아채신 겁니다.” 나만의 소리 2019년 5월, 국립무형유산원 대공연장에서 진행된 초연 장면. 이희문은 소리의 본질로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 선율 악기를 배제하고 장구, 드럼, 모듈러 신시사이저 3가지 리듬 악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얹어 냈다. 곽기곤(Kwak Ki-gon) 촬영, 이희문컴퍼니 제공 임: 최근엔 (Project NAL)이라는 공연 활동을 하고 계시더군요. (OBANGSINGWA)라는 앨범도 냈죠. 분주해 보입니다. 자신이 어떤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이: 씽씽의 누구라는 꼬리표를 떼고 진짜 제 소리로 승부를 걸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실험적인 무대에 스스로를 던져두고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어요. ‘프로젝트 날’은 한국의 리듬 악기 장구, 서양의 리듬 악기 드럼, 그리고 모듈러 신시사이저까지 세 가지 사운드 퍼포먼스에 저의 소리를 얹어 내는 작업입니다. 씽씽 때처럼 노래의 바탕은 경기민요지만, 민요·잡가·산타령·회심곡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져다 씽씽 때와는 다른 방법론으로 풀어냅니다. 임: 의 시각 연출은 씽씽과 어떻게 다른가요? 이: 막 결혼한 신부의 이미지를 차용했어요. 씽씽을 벗어나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죠. 하얀 남성용 양복 뒤로 하얀 치마를 덧붙이고, 얼굴에는 신부 화장을 곱게 했어요. 임: 시간을 다시 한 번 돌려 보죠. 민요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이: 뮤직비디오 조감독을 하던 시절에 우연찮게 어머니를 따라 민요 공연을 보러 갔는데, 공연을 보면서 제가 무의식적으로 따라 불렀어요. 그 자리에 어머니 친구인 이춘희(Lee Chun-hee 李春羲) 명창도 함께 계셨는데, 제가 흥얼거리는 걸 유심히 들으셨던가 봐요. 며칠 뒤 제게 연락을 해서는 조심스레 “소리 해 볼래?” 물으시더군요. 어머니 몰래 하신 전화였어요. 예인의 길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들이 그 길을 가지 않기를 바라셨고, 이 명창도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알기에 고심하다가 연락을 하신 거죠. 결국 그때 이 명창께 소리를 배우기 시작해서 20대 후반 뒤늦은 나이에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하게 되었어요. 소리꾼은 보통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는데 저는 상당히 늦었던 셈이죠. 임: 씽씽의 리드 보컬 이전에 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 이희문으로 알려지셨습니다. 늦은 나이에 인생의 항로를 바꿀 만큼 민요의 매력이 그렇게 대단했나요? 이: 경기민요는 화려하고 아주 간드러지죠. 기교가 많아요. 악곡 자체는 굉장히 경쾌하고 흥이 나는데 듣고 있으면 왠지 눈물이 나고 가슴이 저며오기도 하죠. 예를 들어 의 가사를 보면, “세월이 가기는 물 같고, 사람이 늙기는 바람결 같구나”라는 대목이 나와요. 그런 노랫말을 어깨춤 추며 부르다 보면 복잡한 생각이 들어요. 블랙코미디 같죠. 이것이 경기민요와 남도 소리의 차이점이에요. 판소리는 계면조라고 해서 기본적으로 단조입니다. 한이 서리고 슬픈 감정이 표면부터 흘러넘치죠. 반면에 경기민요는 슬픔을 슬프게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흥겹게 표현하죠. 제 노래가 담긴 유튜브 영상에 누군가가 “너무 경쾌한데 왜 눈물이 날까요”란 댓글을 달았던데, 그분은 경기민요의 특징을 직감적으로 알아채신 겁니다. 흥겨움 속의 눈물 임: 혹시 무대 위에서 노래하다가 스스로 울컥할 때도 있나요? 이: 2019년 5월, 전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초연을 하던 날이었어요. 사운드를 잘 잡기 위해 객석을 놔두고 관객 250명을 전부 무대 위에 앉혔죠. 마지막 곡으로 를 하는데 그렇게 가까이 앉은 관객들이 박수로 리듬을 맞추고 후렴을 함께 부르는데 형언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어요. 사실 이 곡은 씽씽 때 재해석본을 만들어 둔 곡인데 제대로 공연을 못 한 채 해체했거든요. 임: 무대 위에서 무당이나 그에 준하는 영적인 존재로 분하는 느낌입니다. 스스로 무아지경에 빠질 때도 있나요? 이: ‘이건 내가 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어요. 관객이 에너지를 주는 거예요. 그걸 받아 다시 돌려주다 공연이 끝나면 완전히 방전이 되죠. 얼마 전 홍대 앞 ‘생기(生氣)스튜디오(Senggi Studio)’에서 공연할 때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차 공간에 산소가 부족했는지 실제로 호흡이 딸리더군요. 그 느낌을 공연 말미에 기절해 버리는 퍼포먼스로 응용해 버렸어요. 임: 앞으로 또 어떤 퍼포먼스, 어떤 음악을 선보일지 계획이 궁금합니다. 이: 올해는 재즈와 민요를 즉흥적으로 결합하는 공연 시리즈 (ego project)를 계속 진행할 예정이고요. 또 1인 음악극을 슬슬 준비해 보려 합니다. 얼마 전 우연히 『강남의 탄생』이란 책을 읽었는데 각색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 역시 강남에서 줄곧 자랐는데, 강남에서 자란 청년이 민요를 하는 스토리라면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2017년 9월,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공영방송 NPR 사무실에서 씽씽이‘타이니 데스크 콘서트’를 녹화하고 있다. , 등 경기 민요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불러 큰 화제를 일으켰다. 뒷줄 드러머 이철희, 음악감독 장영규, 기타리스트 이태원. 앞줄 신승태, 이희문, 추다혜. NPR Music 유튜브 영상 캡처 2018년 5월, 이희문컴퍼니가 서울 옥인동에 위치한 소극장 ‘서촌공간 서로’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근대 이후 등장한 여성 소리꾼들을 주제로 한 이 공연은 이희문이 2016년부터 3년에 걸쳐 제작하고 발표한 의 마지막 프로젝트이다. 오른쪽 연주자가 이희문. 이진환(Lee Jin-hwan) 촬영, 이희문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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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019 WINTER 53

도시에 자연을 들여놓다 방송 작가 오경아(Oh kyung-ah 吳京兒) 씨는 30대 후반에 하던 일을 접고 훌쩍 영국으로 떠나 에식스대학교에서 조경 설계를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자신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선택한 제2의 인생이었다. 그는 요즘 고층 빌딩이 밀집해 있는 도심에 정원을 들여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돕는 일에 큰 보람을 느낀다.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 씨가 강원도 속초에 있는 자신의 집 별채 “오경아 정원학교”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한 달 만에 돌아오니 엉망이 돼 있네. 어떡해.” 아프리카 케냐에서 일하는 딸을 방문하느라 장기간 집을 비웠던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 씨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작업 채비부터 했다. 강원도 속초에 위치한 그의 집 정원은 660㎡쯤 되는 땅에 100여 종의 식물이 자란다. 어떤 식물들인지 묻자 그가 순우리말과 외국어로 된 고유명사들을 줄줄 외기 시작했다. 그의 집 별채는 ‘오경아 가든디자인 연구소’의 강의실로 꾸며져 있다. 이곳에서 그는 비정기적으로 수강생을 받아 가든 디자인과 원예를 가르친다. 그렇다고 그가 일반인들에게 소소한 취미만 장려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2013년 열린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에 ‘씨드뱅크가든’을 조성한 데 이어 최근에는 경기도에 있는 한 대형 복합쇼핑몰 옥상 정원 설계를 맡는 등 굵직한 프로젝트도 수행하고 있다. 별채의 내부. 그는 이곳에서 비정기적으로 수강생들을 받아 가든 디자인과 원예를 가르친다. 자신이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는 일 임희윤: 예전에는 라디오 작가로 일하셨다고요? 오경아: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했어요. 졸업하자마자 방송 일을 시작했고요. 출산 휴가를 빼면 1989년부터 2005년까지 쉼 없이 일했네요. 임: 2003년에는 MBC 방송연예대상 ‘올해의 작가상’도 받으셨더군요. 커리어의 정점에서 갑자기 가든 디자인으로 눈을 돌린 계기는 뭔가요? 오: 많을 때는 A4 10여 장 분량씩 매일 방송 글을 쓰다 보니 정신적 소모가 너무 심했어요. 몸도 안 좋아져서 축농증과 잦은 기침까지 잔병치레가 심했죠. 그러던 어느 날, 차를 몰고 마포대교를 건너려다가 여의도 상공에 스모그가 시꺼멓게 끼어 있는 모습을 봤어요. 그때 늙어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 그것이 정원 일이었던 건가요? 오: 네. 저는 마당 있는 집에서 자랐어요.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고 장미 넝쿨이 담장을 넘어갔죠. 정원 일에 재미를 들인 건 결혼한 후였어요. 방송국에서 퇴근하면 거실에 가방을 던져두고 바로 정원으로 나갔어요. 남편이 “당신, 방송 일 할 때는 날카로운데 정원에 들어가면 표정도 말투도 편안해져”라고 하더군요. 그때 제2의 직업으로 정원과 관련된 일을 찾아보자고 생각했죠. 막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가든 디자인을 알게 됐어요. 학창 시절에 글짓기로는 못 받은 상을 미술로는 많이 받았는데 좋아하는 정원 일에 디자인까지 접목한다고 생각하니 이만한 게 없겠단 판단이 들었어요. 곧장 영국의 학교에 원서를 썼어요. 그때가 제 나이 서른여덟 살이었죠. 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막상 부딪쳐 보니 어떻던가요? 오: 공부가 적성에는 잘 맞았는데 정말이지 징그럽게 힘들었어요. 남편은 한국에 두고 저 혼자 갓 초등학교 졸업한 딸 둘을 데려갔거든요. 영어가 서툴러 은행 계좌 하나 만드는 데도 진땀을 뺐는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보살피는 과정까지 더해지니 정말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에피소드의 연속이었어요. 아침에 눈 뜰 때마다 오늘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걱정부터 앞섰죠. 영국 생활 7년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어요. 임: 가든 디자인 공부는 실제로 해 보니 어땠습니까? 오: 식물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니 디자인은 아예 불가능했어요. 교수와 의논해 1년간 인턴십 경험을 해 보기로 했어요.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식물원인 런던 큐가든에 인턴 정원사로 들어갔어요. 그 1년은 아직까지도 제게 가장 큰 자산이에요. 단순히 관상용이 아니라 연구 목적으로 식물을 기르는 곳이거든요. 자원해서 열대식물부터 야외 초본식물까지 다양한 부서를 돌며 일했어요. 그때 물 주기부터 병충해 방지, 가지치기까지 현장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두루 했죠. 임: 가든 디자이너는 정원사나 조경사와 다른 직업인가요? 오: 조경 설계사는 일반적인 조경사와 전혀 달라요. 건축가의 영역인 건축물 외 나머지 공간 전체를 설계하는 직업이죠. 관목과 초본의 그루 수, 식물 색의 대비, 나뭇잎의 질감 등을 이용해 건축적 물성과 식물의 물성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도록 공간을 디자인해요. 필요한 경우 화분과 조각 디자인을 직접 의뢰하기도 해요. 주거지 전체를 광범위하게 디자인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돼요. 오경아 씨가 서울 광화문 KT빌딩 앞에 방치돼 있던 낡은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정원이 시민들에게 도심 속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 왕규태 “도시에 벌과 나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시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그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죠.” 정서적 충만감을 위한 공간 임: 요즘에는 강의도 하시는데, 수강생들이 주로 무엇에 관심을 갖나요? 오: 식물을 죽이지 않고 키우는 법에 대한 질문이 많아요. 식물은 기르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도 많은 원인으로 죽게 돼 있어요. 도시에서 키우는 식물은 일단 자생지를 떠나온 것들이거든요. 그러니 백과사전에 적힌 평균 수명을 채울 수가 없어요. 가정에서 식물을 기르고 싶어 하는 분들은 행여 죽일까 하는 두려움 없이 일단 시도해 봤으면 해요. 한국은 식물 값이 정말 저렴하기도 해요. 임: 그렇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도시에, 그것도 아파트에 살잖아요. 그런 환경에서 식물 키우기는 사치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오: 절대 아니에요. 식물은 우리의 정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데 꼭 필요해요. 요즘 인터넷 댓글을 보면 사람들의 정서가 지나치게 날카로워요. 세계 정신의학계에서도 정원 일을 강력히 추천하고 있어요. 맨땅에서 새싹이 돋는 것을 보면 힐링 호르몬이 체내에서 생성된다고 해요. 아이가 첫 발을 뗄 때 그 모습을 보는 부모에게서 나오는 것과 같은 성분이래요. 영국에서는 몇 년 전 의사협회가 공식적으로 ‘정원 일 처방’을 가능하게 했어요. 일주일에 두 번, 하루에 두 시간씩 정원에서 일하는 것이 진통제나 신경안정제 몇 알을 먹는 것보다 나은 효과를 준다는 거죠. 실내에서 키울 만한 식물도 많아요. 실내 식물은 기본적으로 아열대나 사막 기후에서 자라는 종이많은데, 잎이 큰 고무나무나 또는 관음죽 같은 것들이 여기 포함됩니다. 임: 최근에는 경기도의 대형 복합쇼핑몰에서 옥상 정원 일을 하신다고요? 요즘 옥상 정원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오: 쇼핑몰이 이제 막 문을 열어서 건축 자재가 아직 널려 있는데, 식물을 조금 심자마자 나비와 벌들이 어디 숨어 있다 왔는지 날아왔어요. 그러니까 도시에 벌과 나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시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그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죠. 최근에는 상업 공간에 정원을 도입해 고객들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시도가 늘고 있죠. 정원이 가장 절실한 곳은 도심의 빌딩 밀집 지역이에요. 이 근처 양양군 인구가 2만 명인데요. 대강 도시의 아파트 3개 단지 거주자 수와 비슷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밀집해 살고 있으니 매사에 정서적으로 불안한 거라고 생각해요. 자투리 공간에라도 자연을 들여놓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강원도 속초 중앙산부인과 병원 건물 내에 설치된 정원.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장소라서 고사리와 이끼류 같은 음지성 식물과 옥잠화처럼 그늘에서도 생육이 좋은 식물을 엄선해 디자인했다. ⓒ 월간 가드닝(Gardening Magazine Korea, 月刊 韓國庭園) 하나금융그룹과 협업해 2014년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출품했던 아트가든 쉼터의 스케치. ⓒ 월간 가드닝(Gardening Magazine Korea, 月刊 韓國庭園) 즐거운 계획들 임: 여행 가는 도시마다 유명한 정원을 둘러보시나요? 오: 맞아요. 비행기를 예약할 때 일부러 그런 도시들을 거쳐가기도 해요. 이번에 케냐에 갈 때도 잠시 태국 농눅(Nongnooch)가든에 들렀고요. 유명한 휴양지에 가서 해변은 안 보고 정원만 보고 온 적도 있어요. 경유지로 많이 택하는 두바이에도 대단한 정원이 있어요. 임: 국내에서 가볼 만한 특색 있는 정원을 추천하신다면 어디인가요? 오: 경기도 가평의 아침고요수목원, 강원도 춘천의 제이드가든, 경남 남해의 섬이정원, 거제의 외도 등 아주 많죠. 특히 섬이정원은 한국에서 보기 드물게 초본 식물 위주로 구성한 영국식 정원이어서 자주 가 보는 편이에요. 물론 한국 전통 정원도 좋죠. 전남 담양의 소쇄원이나 완도군 보길도의 세연정, 경북 영양의 서석지 같은 곳들요. 임: 정원을 관람할 때 어떤 점을 유념하면 더 즐겁게 볼 수 있을까요? 오: 먼저 전체적인 색감과 색의 조화부터 보세요. 어떤 곳은 흰색과 연분홍만 써서 파스텔 색감으로 정원 전체를 꾸미기도 하고, 또 어떤 곳은 울긋불긋하거나 알록달록한 색감을 주제로 삼기도 해요.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화분의 색까지 봐야 해요. 또 꽃 없이 잎의 질감만으로 개성 있는 연출을 하기도 하고, 형태로도 연출하죠. 둥근 계열의 꽃을 모아 놓고 구체의 조각품을 곁들이는 식으로요. 임: 혹시 정원이 인상적으로 그려진 영화가 있을까요? 오: 글쎄요, 저는 SF영화를 주로 봐서요. 아, 그런데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The Draughtman’s Contract는 한국에서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으로 제목을 붙였는데 잘못된 제목이에요. 배경이 된 나라는 영국이지만 거기 등장하는 정원은 아주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프랑스 정원이거든요. 임: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오: 올해는 외부 출장이 너무 많았어요. 내년에는 속초에 좀 더 머물면서 정원 생활도 더 많이 하고, 올해 문을 연 정원 카페 ‘더 쉐드(The Shed)’도 완전한 모습으로 꾸밀 생각이에요. 어린이를 위한 책도 쓰고 싶어요. 동화이면서 약간의 정원 상식이 들어간 시리즈를 내려고 해요. 어른이 된 다음 정원에 대해 배우려면 늦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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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019 AUTUMN 99

한옥에 접목하는 오늘날 삶의 형상 오늘날 한옥은 이중적 제약 아래 놓여 있다. 고유의 형식과 소재를 훼손하면 안 된다는 전통의 신화화와 현대 건축가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분야라는 선입견이 동시에 존재한다. 조정구(Cho Jung-goo 趙鼎九)는 이런 통념 속에서도 한옥을 박제된 전통이 아니라, 살아 있는 건축 양식으로 해석하며 새로운 시도를 지속하는 건축가로 주목받고 있다. 신라의 고도 경주에 있는 호텔 라궁은 국내 최초의 한옥 호텔로 한국 전통 건축이 시대에 맞게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으로 평가된다. 한옥은 목구조를 기반으로 한 한국의 전통적인 주거 양식이다. 근대 이후 한옥은 보편적 주거 양식으로써 그 기능을 잃고, 보존되어야 할 유산 또는 소수가 향유하는 문화 양태로 명맥을 이어 왔다. 변화는 2000년대 이후에 왔다. 고유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지키려는 노력을 통해 한옥이 오늘의 주거 양식으로 되살아나는 중이다. 조정구는 2000년 구가도시건축(guga Urban Architecture)을 설립하던 해부터 지금까지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 곳곳을 답사하며, 동네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도시의 모습을 기록해 왔다. 20년 가까이 이런 노력을 지속해 오는 동안 어떤 곳들은 변하고, 어떤 곳들은 사라졌다. 그 경험을 통해 그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균형을 잡고 공존하는 도시야말로 좋은 도시라는 믿음이 생겼다. 사람의 삶을 담는 건축을 지향하는 그는 한옥 또한 도시에 살아 있는 삶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한옥에 대한 재인식 임진영: 현대 건축가의 시선으로 한옥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조정구: 처음부터 한옥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랜 답사를 통해 서울을 찬찬히 봐 오면서 근현대기에 지은 도심 한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통 건축으로서의 한옥이 아니라, 도심형 한옥이 내 관심의 출발점이었다. 이후 북촌 한옥 설계에 참가하게 되면서 한옥의 체계를 익혔다. 임: 전통 건축에 대한 실무를 현장에서 배운 셈인가? 조: 그렇다. 한옥은 대개 책에 나오는 건축 역사를 통해 배우는데, 나는 직접 오래된 집들을 고쳐 나가면서 많이 배웠다. 중요한 건 한옥이 서울의 도시 건축에 살아 있었다는 점이다. 한옥 프로젝트가 늘면서 집뿐만 아니라 레스토랑 같은 작업도 했다. 그러다가 한옥이 현대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했고, 건축가가 그런 요구를 해결해 줘야겠구나 싶었다. 2005년 호텔 라궁을 설계하게 되면서는 건축가가 전통 건축 언어로 한옥을 설계할 수 있고, 현대 한옥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스스로도 경계를 넘어선 것 같았다. 임: 호텔 라궁은 당시 한옥을 재구성했다는 점이 인상적인 프로젝트였다. 조: 만약 누군가 건축사를 쓸 때 현대 한옥을 규정한다면, 라궁이 최초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대적인 프로그램을 전통적인 건축 언어로 새롭게 조합한 작업이기 때문에 건축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전통 건축이 건축 설계 영역과 통합된 계기가 되었다. 그런 점이 시장에서도 인정받았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임: 한옥이라는 단어가 폭넓게 쓰이다 보니 그 의미와 범위가 광범위하다. 건축가로서 한옥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조: 보통은 ‘전통 목구조로 지은 기와집’이라는 정의를 내린다. 내가 생각하는 한옥의 정의는 ‘돌, 나무, 종이 등 자연의 소재로 지은 마당집’이다. 최근 파주에 목조주택을 지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한옥집’이라 부른다. 사람들 의식 속에 있는 한옥의 원형을 끄집어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구나 싶었다. 호텔 라궁은 소규모 부티크 호텔의 기능을 전통적 조형미와 조화시켰는데, 각각의 객실에 딸린 누마루에서 바깥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지어졌다. 건축가 조정구는 본인이 설립한 건축사무소 구가도시건축 직원들과 함께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 곳곳을 답사하며 살아 있는 건축 양식으로서 한옥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간단하면서도 합리적인 구성 임: 그렇게 현장에서 알게 된 한옥 구조의 특성은 무엇인가? 조: 한옥 구조의 흥미로운 점은 첫째 간단하다는 것이다. 어려운 구조가 아니다. 두 번째는 굉장히 합리적인 구성을 하고 있다. 공간 구성에서 구법까지 합리성과 단순성(simplicity)이 결합되어 있다. 근대 한옥이 어떻게 도시에 대응했는지, 지붕과 바닥 레벨의 미묘한 변화가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간단하고 편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단순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임: 새로운 시도를 할 때도 지켜야 할 한옥의 DNA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조: 한옥의 DNA는 마당과 처마인 것 같다. 마당과 집 사이에 처마라는 중간 영역이 필요하다. 처마는 그늘을 만들 뿐만 아니라 밖에 나와 마당을 볼 수 있는 중간 공간이다. 또 단순함이 중요하다. 한옥 평면을 보면 아이들이 그린 집처럼 간단하게 방이 그려진다. 그런 면에서 요즘 짓는 현대 한옥의 구성이 복잡해지는 것은 아쉽다. 외관은 한옥의 느낌을 지키려고 하지만, 내부를 무리하게 설계하기 때문에 내재된 단순함이 파열되는 느낌이다. 잘 지은 한옥을 보면 공간이 자연스럽게 서로 이어져서 흐르는 느낌이 있다. 이러한 공간의 흐름에 다시 주목해야 한다. 임: 한옥에 대해 양가적 태도가 존재한다. 전통으로서 한옥을 변형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과 근대 도시 한옥은 가치가 없으며 건축가가 할 일이 아니라는 비판이 동시에 존재한다. 조: 내 입장이 딱 그렇다. 그 두 가지 비판을 다 받는다. 현대 건축가들은 “왜 죽어 있는 것을 살리느냐?”라고 비판하는데, 좋은 관점은 아닌 것 같다. 현대 도시를 보면 여전히 한옥은 존재하고 살아 있다. 반면 그렇게 설계한 결과물이 과연 한옥인가라는 질문도 많이 듣는다. 한 예로 은평구 낙락헌(樂樂軒) 같은 경우, 콘크리트 구조로 필로티를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얹었는데 건축상은 탔어도 우수 한옥으로 지정되지는 않는다. 콘크리트 기단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 신념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 문화가 다시 전통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자리로 가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기술적, 사회적 진보를 이루며 나아가야 한다. 결국 우리 삶을 담은 한옥을 새로 짓는다면, 문화재 같은 집만 있을 수는 없다. 한옥이 살아 있으려면 다른 모습으로 진화해야 한다. 때문에 다양한 시도가 있어야 한다. “건축가로서 나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지나는 선을 긋는다고 생각한다. 과거로부터 연장해서 현재 삶의 모습을 잘 관찰하고 미래로 다리를 놓는 사람인 것 같다.” 제주 토산리 주택은 비스듬히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살려 거실과 방, 부엌과 다이닝 공간의 높이를 다르게 구성했다. 제주의 전통 가옥은 강한 바람에 견디기 위해 돌로 담장과 벽을 쌓고 낮은 지붕 아래 가로로 긴 형태를 띠는 것이 특징인데, 토산리 주택은 이러한 제주의 풍토와 가옥의 형태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보편적 삶의 구현 임: 현대 건축가 입장에서 한옥은 하나의 유형이다. 이 유형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 특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조: 우리 회사의 철학은 보편적 창의에 있다. 어떤 것을 만들든 보편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건축을 하려 애를 쓴다. 새로운 주거로서의 유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계속 한옥과 현대 건축의 경계가 부서져야 한다고 본다. 한옥은 설계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건축가들이 자신의 시각으로 다양하게 도전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하는 접근법만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접근하면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거다. 건축가가 우리 시대의 집을 짓는 것이 큰 과제라고 생각하는데, 많은 부분 한옥의 현대화와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북한산이 눈앞에 펼쳐지는 낙락헌(樂樂軒)은 전통과 현대의 건축 양식이 공존하는 새로운 주거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콘크리트 구조로 필로티를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얹은 낙락헌은 누마루 아래에 현관과 주차 공간을 두어 요즘 생활에 맞도록 설계되었다. 임: 대구 임재양 외과에서 한옥과 일식 가옥에 대한 도시의 기억을 다루었다면, 인제 미명재의 방사형 한옥, 롯데 부여리조트 원형 회랑 등 기존 구법을 새롭게 변형하고 시도하는 작업도 있었다. 한옥의 전형적인 형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통 방식으로 새롭게 디자인하는 건축가의 접근인 것 같아서 흥미롭다. 조: 그렇다. 한옥은 그냥 내가 생각하고 쓸 수 있는 내 언어다. 중요한 것은 장소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또 사람들은 무엇을 바랄까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형태는 거기서 나오는 것 같다. 천리포 수목원 디지털 센터는 한옥을 진화시킨다는 개념보다 단순한 구조로 전통 한국식 지붕의 느낌이 나는 건물을 짓고자 했다. 한편 제주도 토산리 주택에서는 현대 언어로 재해석하기보다 실체를 직접 들여와서 적용하기도 했다. 의뢰인은 한옥다운 집을 원했지만 실제로 한옥에 살 자신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제주 민가의 느낌을 살리고 한실을 직접적으로 적용했다. 결국 진화적 회귀라고 생각한다. 임: 건축가로서 한국의, 그리고 우리 시대의 집은 무엇을 담은 집이라고 생각하는가? 조: 한옥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 있다면 ‘겸손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깊은 내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세우지 않고 안아 주고 포용해 주는 집, 그것이 내가 꿈꾸는 집이다. 거기에 앞서 이야기한 처마 아래서 내다보는 풍경, 단순함을 가진 마당집이 중요하다. 그래야 집이 사람을 지배하지 않고 편하게 해 준다고 생각한다. 임: 도시 답사와 한옥에 대한 꾸준한 실험을 계속해 오면서 ‘보편적 삶의 건축’이란 지론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조: 나는 한옥 건축가는 아니다. 스스로 건축가로서 진지하게 내 인생의 경로를 따라서 작업하고 있을 뿐이다. 한옥도 운명 속으로 들어온 것일 뿐이다. 건축가로서 나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지나는 선을 긋는다고 생각한다. 과거로부터 연장해서 현재 삶의 모습을 잘 관찰하고 미래로 다리를 놓는 사람인 것 같다. ‘삶의 형상을 찾아서’라는 내 모토가 말해 주듯 답사를 통해 삶의 형상을 계속 조사해 왔고, 결국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많은 것들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봐 왔다고 생각한다. 거기서부터 미래로 조금씩 다리를 놓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우리 시대의 집, 우리 시대의 자양과 풍토에 맞는 공간을 많이 만든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감사한 일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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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019 SUMMER 20

‘백남준의 손’으로 불리는 사람 세계적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Nam June Paik 白南準)은 십 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그의 작품을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바쁜 사람이 있다. 서울 세운상가에서 전파상을 운영하던 이정성(Lee Jung-sung 李正成)씨는 백남준을 만나 전담 엔지니어가 되었고 그의 둘도 없는 협력자이자 아이디어 메이트로 함께 일했다. 백남준 작품 설치 전문가 이정성 씨가 2010년 인천 송도의 트라이보울에 전시된 앞에 앉아 있다. 1991년 제작된 이 작품은 가로 9.6m 세로 3.3m의 대형 비디오 월이며 총 94개의 모니터로 구성돼 있다. © 뉴스뱅크 세계 최초의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뒤에는 이정성 씨가 있었다. 이 콤비의 출발은 무려 1,003개의 TV 수상기를 쌓아 올린 작품 (1988)이었다. 그후 18년 동안 이 씨는 백남준의 수많은 비디오 설치 작품에 TV 설치 기술자로 참여하며 함께 세계를 누볐다. 그러는 동안 그는 점차 기술자를 넘어 백남준의 둘도 없는 협력자이자 아이디어 메이트가 되어 갔다. 백남준의 뇌는 ‘이정성의 손’이라는 날개를 달았고, 이정성의 손은 ‘백남준의 뇌’가 있어 질주가 가능했다. 이정성 씨를 만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에 위치한 세운상가를 찾았다. 6층에 있는 사무실 겸 작업실에 그가 있었다. 오래된 TV와 TV 부품이 늘어선 선반, 백남준 관련 저서가 꽂힌 서가가 세로로 길게 이어진 공간 끝에 그의 책상이 놓여 있었다. 을 매만졌던 그 손이 내 손을 뜨겁게 잡았다. 신뢰의 시작 임희윤: 언제부터 이곳에서 일하셨나요? 이정성: 이 상가는 1968년에 완공됐지만 저는 1961년부터 이 동네에 있었죠. 그때는 종묘 앞에서 퇴계로까지 여러 블록에 걸쳐 다닥다닥 늘어선 가건물에 고물이나 전자 부품을 취급하는 상점과 작업장이 모여 있었어요. 제 일의 시작은 부산에 계셨던 작은형의 진공관 라디오에서 비롯되었어요. 임: 라디오에서 TV로? 서울에는 언제 오셨나요? 이: 저는 어려서부터 형의 그 라디오가 그렇게 좋았어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밤새 틀어놓고 잤으니까요. 그러니 배터리 값이 감당이 안 됐고, 형한테 야단을 맞기 일쑤였죠. 라디오가 하도 신기해서 급기야는 뚜껑을 열고 속을 들여다보는 데 맛을 들였어요. 가족들에게 “이걸 배워보겠다”고 했죠. 누님이 영등포에서 단칸 셋방에 살았는데 “쪽마루에서 잘 테니 밥만 먹여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렇게 을지로 2가의 국제TV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게 열여덟 살 무렵이에요.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한 뒤 세운상가에 들어와 일하게 됐죠. 그때만 해도 일반 가정에는 TV가 없었죠. KBS TV 방송국이 생기기 전이니까. 돈 있는 집에서는 미군 방송을 보려고 TV를 샀어요. 저는 그런 집을 상대로 TV 설치와 수리 일을 시작했어요. 임: 백남준 씨는 어떻게 만나게 된 겁니까? 이: 그 전에 이 얘기부터 해야 해요. 우리나라에서 가전박람회가 처음 시작된 해가 1986년이죠. 지금의 삼성동 코엑스 자리에서 서울국제무역박람회가 열렸는데 삼성과 LG의 경쟁이 치열했어요. 오프닝에 어떤 획기적인 전시를 터뜨릴지를 놓고 서로 철저한 보안 속에 두뇌 싸움을 벌였죠. 당시 삼성 쪽에서 제게 ‘TV wall’ 설치를 맡겼어요. 단시간에 528대의 TV 벽을 완벽하게 쌓아 냈더니, 이후 서울 주요 삼성전자 대리점의 디스플레이를 저에게 맡기더군요. 그러다 1988년이 됐어요. 백남준 선생이 을 만들기 위해 기술자를 수소문하다가 삼성 일을 맡고 있던 저에게 연락이 닿은 거예요. “1,003대짜리를 해 줄 수 있냐”고 물으시더라고요. “할 수 있다”고 했죠. “528대도 했는데, 두 배로 는다고 못할 게 뭐야?” 하는 생각이었죠. 그때만 해도 백 선생이 얼마나 큰 인물인지, 이게 실패하면 세계적 망신이 될지, 이런 건 전혀 알지 못했어요. 모르면 용감하다고 하잖아요. 임: 그래서 작업은 순조롭게 잘 진행이 됐나요? 이: 백 선생이 저한테 1,003대 설치를 시켜 놓고는 잘하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미국으로 훌쩍 가 버렸어요. 믿으면 화끈하게 믿는 분이에요, 그분이. 당시 대규모 TV 설치에 있어 가장 큰 과제는 비디오 분배기를 어떻게 마련하느냐였어요. 일본에도 TV 6대를 동시에 연결하는 분배기밖에 없었죠. 그것도 개당 500달러로 비쌌어요. 그래서 제 스스로 분배기를 만들기 시작했죠. 결국 약속한 생방송 날짜에 1,003대가 완벽하게 작동했어요. 기분 최고였죠. 백 선생도 놀라셨나 봐요. 나중에 한국에 오셔서 “나 사실 그거 반 정도만 작동해도 잘된 거라고 봤다”고 털어놓으시더라고요. 그러고는 물으셨죠. “뉴욕에서 작품 하나 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나?” 하고. 저는 “네, 뭐, 하죠”라고 대답했어요. 그게 1989년 휘트니미술관에 설치한 작품 였어요. 그걸 한 다음에는 백 선생이 저를 말도 안 통하는 스위스로 파견했어요. TV 80대를 일주일 만에 설치해야 하는 작업이었는데, 커다란 부품 가방 때문에 취리히 공항에서 세관원과 손짓 발짓, 한국어로 옥신각신했죠. 미술관 쪽이랑 협의해서 폐관 이후까지 작업 시간 연장을 관철시켰죠. 5일도 되지 않아 작업 다 끝내고 관광까지 하고 왔더니 백 선생이 제 담력과 임기응변을 완전히 믿게 된 거예요. 1994년 서울 사무실에서 백남준이 이정성 씨와 함께 의 초기 버전을 시험하고 있다. 이정성 제공 의견 교환 임: 백 선생은 예술가이고 이 선생은 기술자인데, 작업을 위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나요? 이: 백 선생과 저 사이엔 정식 도면이란 게 없었어요. 둘이서 레스토랑과 카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세계 어디엘 가든지요. 몇 시간이고 앉아 토론하면서 레스토랑의 냅킨이나 테이블보에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곤 했죠. 때로는 레코드판 속지나 담배 껍데기에도 그렸죠. 괴발개발 그린 그림과 글이 마치 간첩의 난수표 같았지만, 나만 알아보면 되니 괜찮았어요. “그때 프랑스 카페에서 얘기한 거 있잖아. 그거 해 볼까?” “뉴욕에서 대화 나눈 거, 그거 한번 만들어 보자!” 이런 식으로 작품이 시작되곤 했어요.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비디오 영상과 함께 디스플레이한 (1995)의 아이디어도 그런 식으로 나왔죠. 하루는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전시가 끝나고 리셉션을 하는 날이었어요. 우리 둘은 퐁피두센터 관장에게 몸이 안 좋다고 둘러대고는 밖으로 나왔죠. 그 길로 몽파르나스 기차역 인근 카페의 명당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그 자리에서는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대형 네온 광고판이 한눈에 보였죠. 웨이터에게 선불 팁까지 주면서 맡은 창가 자리였어요. 둘이 앉아 창밖을 보면서 그 작품을 구상했죠.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들의 도면. 독일관 대표로 참여했던 백남준은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이정성 제공 백남준이 이정성 씨에게 선물로 그려준 그림 중 하나. 이정성 제공 파리 몽파르나스 기차역 인근 카페에서 백남준이 테이블 페이퍼에 그린 의 콘셉트 도면. 1호는 워싱턴 스미소니언미술관, 2호는 서울시립미술관, 3호는 서울 소마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정성 제공 2018년 상하이 하우 아트뮤지엄(HOW Art Museum)에서 열린 (LETTRES DU VOYANT: Joseph Beuys×Nam June Paik 见者的书信:约瑟夫·博伊斯×白南准)에 전시된 작품 중 하나인 2001년작 이다. 이정성 씨가 약 보름 동안 전시 작품들을 설치했다. 임: 선생께서는 기술자로 시작했는데, 당시 예술계 일각도 좇아가지 못했던 백 선생의 예술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나요? 이: 제가 되물을게요. 피카소 그림 이해하세요? 예술 작품을 받아들이는 데 정답은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 작품을 왜 좋아할까 궁금해할 것도 없어요. 그저 ‘재밌네’, ‘예쁘네’ 스스로 느끼면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저도 백 선생이 시키는 대로만 수동적으로 만들었죠. 그런데 언젠가부터 저도 허심탄회하게 제 아이디어를 제안하게 됐어요. “선생님, 이런 거 추가하면 좋을 텐데 어떠세요?” 하면 백 선생은 “야, 임마, 진작에 얘기를 하지” 하는 거예요. 그때 ‘아, 미리 얘기하면 내 아이디어도 받아들여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전시장 환경과 기술적 한계를 감안해 제가 드리는 조언을 백 선생은 적극적으로 수용해 주셨어요. 그렇게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며 예술 세계에 함께 빠져들게 됐어요. 외국에 같이 가면 대개 밤새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를테면 뉴욕 한인타운에 가면 백 선생은 식당에서 6인용 테이블을 잡아요. 둘이 가서 식사를 6~8인분 시켜 놓고 새벽 4~5시까지 수다를 떨었어요. 백 선생은 주로 정오에 기상해서 밤에 일하는 게 일상이니 새벽 2~3시에도 눈이 반짝거렸거든요. 임: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나눴나요? 백 선생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이: 화제가 콩 튀고 팥 튀듯 튀어 다녔어요. 자기 동창이 어떻게 사는지, 한국 정치가 어찌 돌아가는지 이야기하다 갑자기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 줄거리가 어떻게 되냐”로 옮겨 가기도 했죠. 백 선생은 한국의 상황에 대해 해박했는데, 신문을 어마어마하게 읽은 덕이었어요. 그분의 실력은 신문에서 많이 나온 셈이죠.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부터 한국의 여러 신문까지 한 보따리를 묶어서 매일 선생 댁에 갖다드리는 것도 제 일이었거든요. 그 많은 신문을 꼼꼼하게 다 보셨죠. 제가 백 선생 생전에 여쭌 적이 있어요. “나중에 TV 고장 나면 어떡해요?” 하고요. “그때 잘 나오는 TV로 갈면 되지” 하시더군요. 보존과 복원 임: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에 불이 꺼진 지 오래입니다. 모니터 교체를 포함한 복원 방안을 둘러싸고 미술계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 맞서면서 상황이 정체돼 있더군요. 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째는 브라운관 교체죠. 그러나 실행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안이에요. 높이 19m의 피라미드형이어서 그렇죠. 지지대와 발판을 세우는 것부터가 큰일이니까요. 제가 지지하는 방법은 낡은 브라운관을 LCD로 교체하는 거예요. 하지만 평면 LCD로 바꾸면 브라운관이 가진 원작의 곡선을 해친다는 의견이 맞서더군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미디어아트에서 작가의 정신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 들어 있는 거 아닌가요. 서울시립미술관의 (2001)만 해도 평면 아닙니까. 백 선생이 을 만들 때는 브라운관이 좋아서 쓴 게 아니고 당시에는 그것밖에 없으니 할 수 없어 쓴 거예요. 그러니까 원본을 손상시킨다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그런 논리라면 회화 작품의 복원도 반대해야죠.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있는 다빈치의 도 윤곽선만 남은 것을 수년에 걸쳐 다시 그린 것인데, 그렇다면 그 작품에도 손을 대지 말라고 해야 맞는 것 아닌가요? 제가 백 선생 생전에 여쭌 적이 있어요. “나중에 TV 고장 나면 어떡해요?” 하고요. “그때 잘 나오는 TV로 갈면 되지” 하시더군요. 아마 지금 상황을 백 선생이 보신다면 깔깔거리며 웃었을 거예요. 일각에서는 아예 철거하자는 의견도 내비치던데, 그리 한다면 필경 국제 사회의 조롱거리가 될 겁니다. 임: 백 선생의 작품을 관리하는 일은 많은가요? 또 그 외에 요즘 하시는 일이 있다면요? 이: 얼마 전에는 경주에 있는 작품 <108번뇌>(1998)가 너무 많이 망가져서 일주일간에 걸쳐 복원했고, 대전시립미술관의 (1993)도 손봤죠. 최근 뉴욕 휘트니미술관에도 가서 의 보수 작업을 마치고 왔어요. 그 외에는 젊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조언도 하고, 가끔 강의도 하죠. 올 가을쯤에는 중국 난징에서 백남준 전시회를 크게 여는데 그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선생님의 아카이브 정리에도 계속 심혈을 기울여야 하고요. 임: 바야흐로 유튜브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백남준 아트를 어떻게 돌아보시나요? 이: 획기적인 작품을 만드느라 빚을 지고 다니셨는데 현재의 기술력이면 정말 희한한 작품을 많이 만드셨겠죠. 말년에 TV 아트를 그만 두고 레이저 아트를 하려고 하셨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어요. 군수용 레이저를 겨우 쓰는 정도였죠. 만약 백 선생 시절에 레이저와 LED가 활성화됐다면 아마 우린 백남준을 한 명 더 가진 셈이 됐을지도 몰라요. 임: 지금도 가끔 백 선생과 작업하던 때가 떠오르나요? 이: 그럼요. 일개 기술자였던 제가 백 선생을 만나 함께 예술 작업을 했으니 원 없는 세상을 살았죠. 실은 지금도 한 달에 두세 번씩은 꿈에서 백 선생을 만나 함께 작업해요. 완전히 새로운 작업 말이에요. 꿈속에선 옛날에 했던 작업을 다시 하는 법은 없어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백 선생 고집이 아직도 살아 있어 그런 걸까요? 서울 세운상가에 있는 이정성 씨의 작업실에는 그가 수집한 낡은 TV와 전자 부품 등이 가득하다. 백남준의 뇌는 ‘이정성의 손’ 이라는 날개를 달았고, 이정성의 손은 ‘백남준의 뇌’가 있어 질주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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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019 SPRING 94

도전이 재미있는 영화음악 감독 달파란 늘 새로운 장르의 선두에 서 있던 대중음악가 달파란이 현재 머물고 있는 곳은 영화음악의 세계이다. 1997년 자신을 영화음악으로 이끌었던 첫 작품 이후 그는 끊임없이 독창적인 사운드 디자인을 통해 주목받는 성과를 일궈 왔지만,“아직 성에 차지 않는다”며 의욕에 넘쳐 있다. 달파란이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에 한창이다. 그는 “음악이 영화를 앞질러서는 안 되며, 영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것을 ‘디자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달파란(본명 강기영 姜基英)은 늘 ‘혁명’을 몰고 다녔다. 한때 국내 최고의 헤비메탈 밴드, 얼터너티브 록 밴드의 일원이었다가 전자음악 DJ로 전향하더니, 금세 한국 영화계에서 뺄 수 없는 작곡가 반열에 올랐다. ‘파란 달’의 뒷면을 보기 위해 그의 작업실이 있는 경기도 파주로 향했다. 별난 예명을 가진 이 음악가는 홀로, 또는 동료인 장영규(张英圭) 감독과 함께 21세기 한국 영화의 독창적 소리 풍경들을 일궈 냈다. (2005), (2008), (2010), (2015), (2016), (2018) — 그가 음악을 만든 영화의 목록은 길고 알차다. 그 치열한 전투들이 벌어졌던 작업실은 악기로 둘러싸인 작은 요새처럼 보였다. 정면에는 커다란 스크린의 벽걸이 TV가 붙어 있는데, TV를 올려다볼 수 있는 요지(要地)는 컴퓨터와 큰 건반이 장악했다. 그것을 다시 날개처럼 호위하며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와 모듈러 신시사이저들, 펜더 재규어 모델을 포함한 몇 대의 전기 기타와 베이스 기타들이 열병해 있다. 그렇지만 달파란의 음악 역사는 베이스 기타에서 시작됐다. “신중현(申重鉉) 선생의 아들 대철(大澈)이와 고교 때부터 가까운 친구였어요. 서로 실력을 알고 있었으니 한번 같이 해 보자, 의기투합을 했었죠.” 록의 전설 그들이 1980년대에 이끌었던 록 밴드 시나위는 두 사람 외에도 김종서(金鍾書), 임재범(任宰范), 서태지(徐太志) 같은 거물 음악인들을 배출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에 깊은 족적을 남기게 된다. 달파란은 스스로를 두고 “싫증을 잘 느끼는 편”이라고 했다. 시나위 이후 그는 한국에서 선구적인 모던 록을 구사한 밴드 ‘H2O’에 뛰어들더니 1990년대 중반에는 전위적 록으로 가요계에 충격파를 던진 삐삐밴드에 있었다. 곧 이어 밴드 삐삐롱스타킹을 거쳐 급기야 DJ로 전향해서는 테크노와 트랜스 음악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싫증을 잘 느낀다는 그의 자평은 사실처럼 보인다. “삐삐밴드 2집에 란 노래가 있어요. 그 곡을 들었다면서 장선우(張善宇) 감독이 저를 찾아왔죠. 같은 제목의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음악을 만들어 줄 수 있겠냐면서요. 별 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죠. 그땐 그냥 돈이 되니까 했던 것 같아요. 영화음악가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그렇게 해서 1997년작 가 달파란의 영화음악 감독 데뷔작이 됐다. 하지만 2년 뒤 을 작업할 때까지만 해도 건반 앞에 앉으면 막막했다.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으로 만든 영화 이나 반젤리스가 음악을 담당한 를 감명 깊게 봤고, MTV 세대로서 뮤직비디오를 열심히 보긴 했지만 영화음악에 대한 전문적 식견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어떻고, 한스 치머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에도 별 관심이 없었어요. 게다가 그 당시 한국 영화음악에는 이렇다 할 만한 체계가 없었거든요. 기댈 것도 없이 그저 부딪쳤어요.” 하지만 황야의 무법자는 홀로 다니는 법이 없지 않는가. 그 무렵 달파란에겐 다행히 비슷한 처지, 또래 방랑자 무리가 있었다. 방준석(方俊錫), 장영규, 이병훈(李炳勳)은 ‘유앤미블루(U & Me Blue)’, ‘어어부프로젝트(Uhuhboo Project)’, ‘도마뱀’ 같은 밴드에서 각기 활동하며 저마다 한국 인디음악의 전위를 형성하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 달파란은 이들과 ‘복숭아 프로젝트’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복숭아’는 별 뜻 없이 붙인 말이었지만, 이 ‘느슨한 도원결의’는 21세기 한국 영화음악의 신선한 꽃을 틔운 건강한 토양이 됐다. 2011년 7월 서울 강남의 LIG 아트홀에서 있었던 (Six Mannequins) 공연의 한 장면. 달파란(맨 오른쪽)이 국내 대중음악에 모던록과 펑크의 지평을 열었던 ‘삐삐롱스타킹’밴드 시절의 동료 권병준과 함께 기획한 공연이다. Courtesy of Dalparan 방랑자의 무리 “그땐 인터넷도 별로 발달하지 않아서 서로 답답한 부분에 대한 정보 공유를 하면서 자연스레 만났어요. 다들 특이한 걸 좋아한다는 데서도 통했지만, 더한 공통점은 당시 한국 영화음악계에 대한, 뻔한 음악들에 대한 불만이었죠. 지금 돌아보면 다들 영화계에 발을 조금씩만 담그고 있었기에 비판적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그런 생각들이 궁극적으로 창작을 향한 긍정적 마인드로 전환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건강한 땅은 맛난 열매를 선물한다. 달파란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김지운(金知雲) 감독과 함께 작업한 이 스페인 시체스에서 개최된 카탈루나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수상한 것이다. “김 감독님이 전화를 해서 상을 탔다고 하는데 처음엔 ‘무슨 농담을 하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그 정도로 제겐 느닷없는 일이었죠.” 복숭아 프로젝트 멤버들 가운데서도 장영규는 그의 단짝으로 남았다. 만주를 배경으로 이른바 ‘김치 웨스턴’ 장르를 개간해 낸 액션 영화 의 음악도 그와 공동 작업이었다. 두 사람은 당시 연출자 김지운 감독의 호출로 중앙아시아의 위구르 지역으로 향했다. “현지 시장에서 파는 조악한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들으면서 위구르 음악을 익혔어요. 중동 음악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음계를 사용하더군요. 시장에서 산 현악기와 타악기도 녹음에 활용했죠. 엔니오 모리코네 풍의 마카로니 웨스턴 스타일에 동양적인 음계를 섞어 본 거죠.” , , …. 달파란 앞에는 그 이후 한국 근현대사와 동아시아라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시공간이 숙제로 종종 던져졌다. “영화적 장치로서 당시의 음악을 꼭 써야할 때도 있죠. 하지만 거기 구애받지는 않아요. 다른 방식으로도 영화가 내려는 분위기를 풍기며 그 시대를 설명할 수 있거든요. 어쨌든 영화는 현실이 아니거든요. 정해진 법칙이란 없는 거죠.” 10대 때부터 30대까지, 헤비메탈부터 테크노까지 두루 섭렵한 지그재그의 커리어는 어느새 달파란에게 두터운 양분이 돼 있었다. 그의 말처럼 “영화라는 게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스타일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실 오른쪽 벽에는 공공건물에나 붙어 있을 법한, 시간을 초 단위까지 보여 주는 디지털 벽걸이 시계가 걸려 있다. ‘6:32.06 PM’ 새빨갛게 발산되는 고딕체의 숫자는 공간 전체를 장악한 숨 막히는 독재자처럼 보였다. “매 작품마다 힘들지요. 제 개인 작업이라면 뭔가 괜찮은 게 떠오를 때까지 가만히 있을 텐데…. 영화는 마감이 있고 개봉일이 있으니까 생각이 안 나면 억지로라도 완성해야 하죠. 결국엔 어떻게든 뭔가가 나오더라고요. 작업 과정 자체는 보통 일이 아니죠. 굉장히 힘든 일이에요. 그게 재미없고 안 맞아 결국 포기하는 친구들도 여럿 봤어요. 영화음악을 만들다 과로로 쓰러지는 친구도 봤고요. 저는 고통보다 재미가 더 컸어요. 하나씩 끝냈을 때마다 뭔가를 해냈다는 느낌도 너무 좋았고요. 할수록 재미가 느껴졌어요.” “영화적 장치로서 당시의 음악을 꼭 써야할 때도 있죠. 하지만 거기 구애받지는 않아요. 다른 방식으로도 영화가 내려는 분위기를 풍기며 그 시대를 설명할 수 있거든요. 어쨌든 영화는 현실이 아니거든요. 정해진 법칙이란 없는 거죠.” 작품마다 새로운 투쟁 3단으로 쌓인 아날로그 신시사이저 뒤쪽으로는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가 서 있다. 얼핏 보면 악기라기보다 인체 해부도를 닮았다. 앞판을 떼어내 해머와 현이 갈빗대처럼 고스란히 드러나서다. 다양한 소리를 실험하기 위한 영화음악가적인 장치다. 그 피아노 위에 트로피 세 개가 서 있다. 대종상과 청룡영화상에서 수상한 트로피들이다. 그중 하나엔 이라 써 있다. 달파란은 장영규와 함께 호러와 스릴러, 현실과 초현실, 무속과 살기가 기이하게 뒤섞인 이 영화에 예술적 사운드 디자인을 정교하게 녹여냈다. “영화는 2차원이잖아요. 모든 것은 평평한 스크린에서 벌어지죠. 하지만 관객이 그것을 입체적 경험으로, 즉 현실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데는 사운드 효과도 일조한다고 봐요. 에 대한 해외 평론가의 글 가운데 음악의 공간감을 지적한 부분이 있더군요. 맞아요. 설치 미술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타협을 하면서 사운드 아트적인 요소를 첨가해 봤습니다. 언젠가는 이런 시도를 꼭 해 보고 싶었는데 다행히 에너지 넘치는 영화를 만났죠.” 달파란은 이 영화에 죄르지 리게티 같은 현대 음악가가 사용하는 음향 클러스터 기법을 조심스레 도입했다. “왜곡에서 오는 파장이 있거든요. 음과 음을 비틀어 새로운 음향적 요소를 자아내는 식이죠. 이런 효과에 주로 아날로그와 모듈러 신시사이저들을 사용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만주 벌판을 배경으로 한 한국형 웨스턴 영화 (2008)은 서사에 대한 기대를 품게 만드는 강렬한 음악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특히 니나 사이몬의 1964년도 원곡 를 웨스턴풍의 빠른 라틴댄스 곡으로 편곡한 타이틀곡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 CJ ENM 은 2018년 개봉된 상반기 한국 영화 가운데 가장 큰 이슈와 흥행을 기록한 작품인데, 등장인물의 내면 세계를 음악으로 잘 표현해 냈다는 평을 받았다. 달파란은 이 작품으로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과 청룡영화상에서 음악상을 받았다. © 넥스트 엔터테인먼트 월드(Next Entertainment World) 이런 측면에서 달파란이 최근 가장 관심을 가졌던 영화음악가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아이슬란드 작곡가 요한 요한손이다. 때부터 요한손을 주목했다고 했다. “영화의 폭력적 요소를 표현하는 데 있어 음향적 왜곡을 이용했잖아요. 현대 음악에 관해 지식이 전혀 없는 일반 관객조차 직관적으로 느끼도록 표현해 냈어요. 요한손의 실험이 대단한 이유죠. 그의 다른 작품 도 그렇죠. 그런 실험을 단순한 음향 효과를 너머 음악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주 흥미로웠어요. 최근 해외에서 이런 시도가 있는 건 사실이에요. 사실 마블의 슈퍼히어로 영화에도 그런 효과들이 살짝살짝 나오는데 요한손의 작업 수준에는 미치지 못해요. 서라운드부터 애트모스까지 극장의 입체적 음향 시스템을 충분히 이용한 영화가 한국에는 아직 없어요.” 달파란은 요한손이 한번도 만나 보지 않은 동료이자 친구처럼 여겨진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너무 안타깝다고 애석하다고 했다. 나이도 비슷한 데다 본인이 늘 하고 싶었던 작업을 대담하게 상업영화에서 앞서 해 나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달파란의 최근작은 과 이다. 역시 청룡영화상 음악상을 받았고, 관객들의 이례적 요구로 CD로 OST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그는 스릴러 공포물인 에 선율보다 음향적인 요소를 더 넣어 봤다. 그러나 아직 완벽히 성에 차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올해 작업할 다음 작품들이 그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한글을 창제하는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다룬 송강호 주연의 , 서로 다른 시간에 살고 있는 두 여자가 한 통의 전화로 연결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스릴러 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에 새로운 시도를 담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새로운 도전은 더 있다. 그로서는 첫 드라마 작업이 될 넷플릭스 제작의 조선 시대 좀비물 시즌 2가 그것이다. “시즌 1을 미리 조금 봤는데 꽤 흥미로웠어요. 관객 동원의 압박감이 없기 때문에 넷플릭스와의 협업은 감독에게도 연출 의도를 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예요. 해 보고 싶은 걸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그는 자신이 한번 작업에 몰두하면 식욕이 사라지는 편이라고 털어놨다. 힘들면 비타민을 챙겨 먹기보다 산책을 하는데,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많다”고 했다. 영화음악가로서 “현재 대중음악과 순수음악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잡지와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음악과 접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2017년 젊은 인디 밴드 ‘실리카겔’의 리믹스 작업에 흔쾌히 참여한 것도 그들의 음악을 진작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으로 앨범을 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그림은 없다. 당분간은 영화음악에 전념할 작정이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계를 위해서는 좋은 소식이다. 달의 뒷면 이 질문은 마지막까지 아껴 두고 싶었다. 입안에 맛있게 맴돌았기 때문이다. 달파란이란 기이한 이름은 대체 어디서 난 걸까. “삐삐밴드 시절 이야기인데, 어느 날 하늘을 올려다봤더니 보름달이 참 괜찮더라고요. 달은 만날 한 면만 보여 주잖아요. 근데 또 안 보이는 뒷면을 가지고 있고요. 어떻게 보면 좀 가짜 같기도 하고…. 나도 저 달처럼 재미난 생각이 들게 해 주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달’이라고 하면 재미없잖아요. 느낌 있는 ‘파란(blue)’을 붙여 봤어요. 발음이 재밌더라고요. 하하.”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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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018 WINTER 88

옷으로 열연하는 아티스트 “시나리오를 받는 순간부터 무당이 된다”고 말하는 조상경(Cho Sang-kyung 趙常景)은 언제나 작품을 집요하게 해석하고 철저하게 고증한다. 를 비롯해 수많은 영화의 의상을 만들어 온 그녀가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TV 드라마 으로 다시 한번 한국을 대표하는 의상감독으로 떠오른 이유이다. 한국의 대표적 의상감독인 조상경은 작업의 완성도를 높이고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의상을 만들기 위해 발로 뛰며 관련 문헌과 영상 자료를 집요하게 뒤지고 또 뒤진다. 처음 만나는 사람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기란 쉽지 않다. 수줍어하는 성격이 아니라도 그렇다. 에티켓을 가르치는 책에 “초면인 사람을 대할 때는 시선을 상대방의 눈과 눈 사이에 두라”는 조언이 나오는 까닭이다. 그런데 조상경은 어찌나 시선을 바로 주던지 눈이 부시다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과도 정면 대결을 벌였다. 조상경은 (2003), (2005), (2006) 같은 해외 영화제 수상 작품들을 비롯하여 , 등 최근의 대표적인 블록버스터의 의상을 도맡아 왔다. 그중에서도 그녀의 작품들이 더욱 빛을 발한 건 시대극에서였는데, 영화보다 훨씬 대중적인 매체인 TV 드라마를 통해 아는 사람만 알던 자신의 이름을 비로소 널리 알리게 되었다. 조상경 감독이 최근 영화 에 나오는 염라대왕의 의상을 점검하고 있다. 실재하지 않는 인물의 의상을 만들기 위해 그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철저한 고증 작가와 연출가가 10여 년 동안 대본을 숙성시켜 왔다는 은 애초에 ‘상품’이 아니라 ‘작품’을 목표로 제작된 드라마다. 숱한 영화와 무대 공연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작업해 온 조상경에게 TV 드라마는 생소한 장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햇살’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 내기로 결심했다. 힘든 만큼 큰 도전이 될 것 같았고, 정말로 ‘작품’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꼼꼼하기로 유명한 조상경이 사전 제작 기간이 11개월이나 되었던 이 드라마를 얼마나 지독하게 준비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사전 제작 기간은 길었지만, 정작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해야 한 달 남짓이었다. 게다가 애당초 16부작으로 기획되었던 작품이 20회로 연장 결정이 나더니 다시 24회로 늘어나면서 그 짧은 기간에 그녀가 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났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완결된 대본을 두고 시작하는 데다가 그러고도 다섯 달 남짓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가진다. 그러나 은 TV 드라마라는 특성상 이야기 전개에 대한 감독의 간략한 설명과 첫 2회분의 대본만을 가지고 전체 의상 콘셉트를 잡아야 했다. 그런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철저함은 드라마 여기저기에서 빛났다. 미 해병대 장교 유진 초이 역할로 나오는 주연 이병헌의 군복 이야기를 들어 보자. “처음에 저는 유진 초이의 소속을 해병대가 아니라 해군으로 하자고 제안했어요. 그 당시 해병대 군복보다 해군 군복이 훨씬 멋지거든요.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솔직히 아직도 주인공의 의상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렇지만 군복 모양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잖아요. 작품 배경이 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 해병대 군복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애썼는데도 결국 민원이 들어왔다니까요. 군복의 엠블럼 위치가 다르다고요. 별 수 있나요, 잘못했다고 사과했어요.” 조상경은 최대한의 리얼리티를 위해 미국에 군복 제작을 의뢰했다. 그것도 옷 따로, 모자 따로, 신발 따로 전문가들에게 맡겨 완벽을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군복에 대한 그녀의 연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2010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으로 군복을 처음 디자인해야 했을 때 그녀는 이른바 ‘밀리터리 덕후’를 만났다. 덕후들이 박물관보다 훨씬 더 많은 군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는 온라인 ‘밀리터리, 군사무기 카페’ 운영자의 집에 별 기대 없이 따라갔다가 깜짝 놀랐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매트리스를 제외하고 아파트 한 채가 온통 군용품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군복, 군모, 메달, 배지에 이르기까지 과연 덕후는 덕후였다. 군대 이야기를 광적으로 하는 그의 열정이 버거워 두 번째 만나러 갈 때는 그의 이야기를 받아 줄 팀장과 동행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덕후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아 동부전선 최전방 ‘애록고지’(백마고지를 모티브로 KOREA를 거꾸로 해서 만든 가상의 전투현장)에서 싸우는 군인들을 생생하게 재현해 낼 수 있었다. 발품은 영화 의상 디자인의 처음이고 끝이다. 영화 (2005)는 13년 동안 교도소에서 복역한 후 출소한 여주인공이 치밀하게 준비한 복수를 실행하는 내용이다. 복잡한 내면을 지닌 주인공을 표현하기 위해 조상경 감독은 그의 과거와 현재, 친절함과 복수심 사이의 간극을 복고적 의상으로 표현해 냈다. © CJ ENM 또 다른 드라마 발품뿐 아니다. 문헌이나 영상 자료도 집요할 만큼 뒤진다. 극 중에서 유진 초이가 참가하는 미서전쟁의 레퍼런스를 찾기 위해 스페인 영화와 다큐멘터리들을 뒤졌다. 그런데 당시 다큐멘터리들은 흑백으로 제작된 터라 도무지 군복 색깔을 알 수 없었다. 간신히 컬러 화면을 하나 찾아서 그대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 미서전쟁 장면은 다 합쳐야 고작 5분이나 될까? 단 몇 분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해외에 주문을 한다고 모든 옷이 쉽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영화 (2015)에 등장하는 일본제국 군복의 샘플은 일본에서 직접 사오려고 했다. 그렇지만 일본의 군복 마니아들은 대체로 극우파인 경우가 많아, 아무에게나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중개인을 사이에 두고 어렵게 거래를 해야 했다. 이쯤 되면 의상 제작은 과정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인 셈이다. 고증의 엄중함을 신념으로 가지고 일하는 그녀지만 때로 오해도 받는다. 영화 (2012)은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 못지 않게 의상이 주목받았던 작품이었다. 후궁들이 입고 나온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상들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탄생했다. 논문 자료들을 비롯해 박물관 소장품까지 수많은 자료들을 토대로 디자인한 옷들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 옷이 아닐 것이다”라는 편견을 가졌고, 심지어 ‘왜색풍’이라는 비난까지 들었다. 다행히도 한복 전문가들이 그녀의 노력을 알아 주었다. “조선 중기의 의상을 보려면 영화 을 보라”는 말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한복 공부를 하면서 안타까웠던 점은 우리가 서양 복식사보다 우리 복식사를 더 모른다는 거예요. 한복은 뭉뚱그려져서 애매하게 이해되고 있어요. 조선 왕조 500년이라는 그 긴 시간 동안 한복 디자인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그녀는 한복 전문가들에게 당부하고 싶단다. 사극의 의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언해 주고 관여해 달라고 말이다. 책이나 강의보다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중적 매체를 통해 한복에 대해 알게 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복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그것을 올바르게 재현하려면 전문가들이 대중 매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상경은 무턱대고 당대의 사실성만을 옷에 담아 배우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성이 배우에게 딱 맞아떨어져 빛을 발할 수 있게끔 일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2016)의 한 장면이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가 배경인 이 영화에서 차갑고 비밀스러운 귀족 아가씨의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조상경 감독은 화려하면서도 동시에 절제된 매력을 보여 주는 25벌의 의상을 만들었다. © CJ ENM 시를 읽어라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패션 디자이너들이 대개 그 분야의 영어 단어들을 자주 쓰는 데 반해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동양화와 무대 미술을 공부한 그녀는 그 대신 탐독가의 면모를 드러냈다. “어렸을 때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친구가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책을 많이 읽었죠. 1남 4녀 중 셋째였는데, 어머니는 제가 하고 싶다는 건 다 지원해 주시는 편이었어요. 화실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림 그리는 게 익숙한 놀이가 되었죠. 사실 저는 패션은 잘 몰라요. 패턴 뜨는 것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으니까요.” 의아한 일이다. 한국 영화계의 내로라하는 의상 디자이너가 패션 디자인을 배워 본 적이 없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측면에서 의아함을 느낀다고 한다. “영화 의상을 만들겠다는 학생들이 시나리오 한 편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고 말할 때 정말 이상해요. 100명에 한 명 정도를 빼곤 대부분 시나리오를 읽지 않아요. 제가 콘셉트를 잡아 보자고 말하면 대뜸 포털 사이트부터 검색합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시를 읽으라고 조언해요. 저는 책을 빨리 읽는 편인데, 시는 빨리 읽어도 자꾸 복기하게 되더라고요. 시로 그림을 그린 적도 많아요. 시를 잘라서 재조합하는 일이 재미있었거든요.” 재조합만이 아니다. 그녀는 매개의 역할에도 능하다. 사극에서 배우들에게 옷을 입힐 때 그녀는 그 옷을 입고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왜 그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매개자 역할을 자처한다. 그래서 테스트 촬영이 매우 중요하다. 의상은 시대 정신도 담지만 무엇보다 그 배우에게 맞아야 한다. 그 배우를 빛나게 해 주어야 한다. 조상경은 무턱대고 당대의 사실성만을 옷에 담아 배우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성이 배우에게 딱 맞아떨어져 빛을 발할 수 있게끔 하는 일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2016)의 주연 김민희의 옷은 그녀를 옥죄어 행동 하나하나가 우아하면서도 지극히 절제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속옷까지도 그런 아가씨의 자세가 나올 수 있도록 디자인해서 입혔다. 하지만 모든 배우들에게 이런 역할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들을 자세가 되어 있는 배우들, 진지하게 물어 오는 배우들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왕 역할을 여러 번 했으면서도 언제나 왕의 옷에 대해 처음처럼 질문하는 한석규, 작품에 대한 진지한 접근 태도로 저절로 조언하게 만드는 이병헌이 그런 배우들이다. 최고의 배우들, 최고의 감독들과 함께 작업하는 일이 흥미진진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매일 밤 잠들 때 ‘내일 깨어나지 않을지도 몰라’ 하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래도 아무 문제 없나?’ 하고 하루를 찬찬히 돌아보곤 하죠. 그게 습관이 되어 버렸어요.” “이런 제가 이상한가요?” 하는 표정을 지으며 예의 그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매일 최선을 다하시나 봐요. 그래서 삶에 여한이 없으신가 봅니다. 당신 인생에 ‘새드 엔딩’은 없을 것 같아요’라고.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에 등장하는 쿠도 히나(工藤 陽花)의 의상 중 하나. 조상경 의상감독은 20세기 초 한성 최고의 호텔을 운영하는 부유한 미망인에게 어울리는 의상을 디자인했다. 의 여자 주인공 고애신은 외세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하기 위해 비밀리에 의병 활동을 하는 사대부 가문의 여성이다. 이 옷은 그녀의 사회적 신분을 기품 있게 표현하고 있다. 의 남자 주인공 유진 초이는 20세기 초반 미 해병대 소속 장교였다. 당시의 군복을 재현하기 위해 미국 현지에서 직접 제작해 공수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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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018 AUTUMN 61

사라지는 시간을 추억으로 돌려주다 펜화가 이미경(Lee Me-Kyeoung 李美京)은 끝나 가는 존재에 이끌린다. 지난 20여 년, 그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찾아낸 ‘쇠퇴와 소멸의 상징’은 구멍가게였다. 수십 년 동안 한 가게를 거쳐 간 사람들이 남긴 묵은 이야기를 그는 펜촉으로 한 올 한 올 되새김한다. 「제씨상회」, 2018년, Pen and acrylic ink on paper, 75 × 135.5 ㎝. 이미경 작가는 오른쪽 중지 윗마디가 유독 퉁퉁하다. 하루 10시간 넘게 펜을 잡고 수천 수만 번 선을 긋는 오랜 작업이 남긴 흔적이다. 아침마다 작업실에 출근하듯 들어선 순간부터 그는 펜을 잡은 노동자가 된다. 삭삭, 슥슥슥…. 펜촉이 종이 위를 지나가며 내는 소리가 그에겐 생의 동력이다. 반복되는 사각거림에 호흡을 맞추면서 그의 일상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요령 피워서는 펜화 못해요. 작고 여린 선이 쌓여서 만들어 내는 펜화의 질감을 붓질 몇 번이 따라올 순 없죠. 28색 아크릴 잉크를 조합해 여러 겹 배접하는 느낌으로 칠해요. 그러면 속 색이 맑고 투명하게 드러나죠. 텁텁하지 않으면서도 단단해져요. 풍화와 퇴락 속에 말갛게 변하는 구멍가게처럼 말이죠. 내용과 형식이 참 잘 맞아떨어졌구나 싶죠.” 그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독일 신표현주의가 유행하던 때였다. 학교 화실에서 하룻밤에 대작을 4점이나 그려 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그가 극도로 세밀한 펜화로 돌아서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두 돌 갓 지난 첫째 아이를 키우며 둘째를 임신했던 1997년 여름, 서울을 떠나 이사 간 경기도 광주의 한 마을에서 그는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구멍가게를 만났다. “둘째 아이를 낳고 맞은 봄이었어요.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아 펜을 들고 아무거나 그리며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던 중이었죠. 벚꽃이 눈처럼 흩뿌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찾은 그 구멍가게가 낯설면서도 매력적인 대상으로 다가왔어요. 적갈색 슬레이트 지붕은 시간에 따라 오묘한 빛을 발하고, 유리창에 무심한 듯 써 내린 ‘음료수’란 붉은 글씨조차 멋지더군요.” 가슴 뛰는 소재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펜을 들었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고 즐겁고 행복했다. 늘 무언가를 그려야 한다는 강박감에 쫓기듯 살았는데, 불현듯 그런 고통과 불안에서 벗어났음을 느꼈다. 평생 그리고 싶은 소재, 마음에 감기는 주제를 만난 것이다. ‘아 좋아, 그림은 이런 거지’ 하는 깨달음이 왔다. 그리고 눈에 꼭 차는 가게를 만날 때까지 기다리며 느릿느릿 그렸다. 그렇게 첫 10년 동안 겨우 15점을 만들어 냈다. 그는 어딘가에 ‘제대로 늙은’ 구멍가게가 있다는 소식만 들으면 길을 나선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낮과 밤이 다르고, 철따라 변하는 구멍가게의 멋까지 다 챙기고 싶어서다. 사진을 수십 장 찍어도 놓치는 구석은 있다. 눈이 아닌 가슴으로 챙기는 구멍가게는 또 다르다. 그가 구멍가게를 그리는 화가라는 소문이 나면서 아는 이들이 전해 주는 정보도 많아졌다. 몇 해 전에는 지인에게서 이런 문자가 왔다. ‘작가님, 우리 동네 유심슈퍼가 조만간 문을 닫는대요. 사진 안 찍으셨으면 얼른 다녀가세요.’ “유심슈퍼는 이미 두어 번 찾아가 인사드렸던 곳이었죠. 팔순이 넘은 할머니가 50년 넘게 해 온 장사를 드디어 접으시려는 모양이라고 짐작했어요. 서울의 오래된 가게 중 하나가 문을 닫는다니, 마음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는 듯 울컥했어요.” 그가 그림을 그리는 사이에도 많은 곳이 부서지고, 바뀌고, 새로 들어섰다. 소문 듣고 길을 나섰는데, 가 보면 그새 간판을 내린 곳도 부지기수였다. 구멍가게들이 자취를 감추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가 개발과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절로 셈하게 된다”고 작가는 말했다. 작고 여린 선이 중첩되어 만들어 내는 펜화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수천 수만 번 선을 그어야 한다. 하루 10시간 이상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이미경 작가의 오른쪽 중지는 늘 성치 않다. “가게 옆에 선 가로등 빛과 가게 안에서 번져 나오는 주광색 조명은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성인(聖人)의 밝은 눈빛 같았어요. 밤의 그늘과 등불이 만나 자아내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쇠락하는 가게에서만 볼 수 있는 처연한 아름다움이죠.” “스무 해 가까이 그렸던 그림을 모아 놓고 보니, 지역에 따라 건물의 구조와 지붕의 모양, 재료가 다 달라요. 오래된 점방을 만나면 맨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고 상상하는 버릇이 생겼죠. 예를 들어 슬레이트 지붕은 1970년대 초 새마을 운동의 소산이죠. 지붕이 높은 목조 주택인 일본식 가옥, 적산 가옥도 가끔 만났어요. 제 그림에서 지붕 부분만 따로 떼 내서 비교해 봐도 재미있을 겁니다. 그것들은 새것이 나오면 옛것은 무조건 갈아엎고 부수는 데 익숙한 우리 역사에서 보존과 복원의 가치를 넌지시 일러 주죠.” 이렇게 전국에서 발로 찾아낸 구멍가게들과 그 주인들의 모습이 그의 그림에 온전히 남는다.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에 더디고 꼼꼼한 그의 펜화는 한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보관소가 된다. 「풍년슈퍼」, 2017년, Pen and acrylic ink on paper, 35 × 35 ㎝. 기억, 그리고 공감 “어떤 분은 제게 물어요. 왜 그렇게 쇠락하는 가게 풍경을 그리느냐고요. 옛 향수에 머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요. 저는 제 기억 속에 빼곡히 저장해 두었던 이야기를 나와 함께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과 나누며 공감하고 추억하고 싶어요. 더 늦기 전에 우리와 한 시대를 더불어 살았던 소소하고 소박한 존재들과 눈빛을 나눌 기회를 놓치지 말고, 주위를 둘러보라는 저의 제안인 거죠. 정겨운 구멍가게, 엄마의 품, 반짇고리나 옛 그릇같이 잊고 있던 소중한 마음, 보통의 삶에 깃든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이 작가에게 구멍가게는 평범한 건물이 아니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 구멍가게도 일종의 인격체다. 그는 해남 땅끝마을을 찾았다가 우연히 만났던 한 이름 없는 가게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806번 국도 미륵사 옆 오르막 길을 오르던 중이었어요. 한눈에 연륜이 깊은 집이란 걸 알 수 있었죠. 시대의 애환을 등에 지고 있는 분위기였어요.” 어둑한 초저녁 하늘 아래 적막하게 앉아 있는 그 가게에는 이 작가가 찾아다니며 그려온 구멍가게의 이미지가 모두 담겨 있었다. 서서히 청자색 어둠이 깔리고 가게 뒤로 빼곡한 나무들이 병풍처럼 당당하게 존재감을 드러내자, 가게의 참모습이 드러났다. 「산척에서-겨울」, 2017년, Pen and acrylic ink on paper, 80 × 80㎝. “가게 옆에 선 가로등 빛과 가게 안에서 번져 나오는 주광색 조명은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성인(聖人)의 밝은 눈빛 같았어요. 밤의 그늘과 등불이 만나 자아내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쇠락하는 가게에서만 볼 수 있는 처연한 아름다움이죠. 제 작품의 모티브가 바로 거기에 응축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는 구멍가게 그림에 꼭 나무를 함께 그려 넣는다. 지역 따라, 계절 맞춰 다른 옷을 입혀 집과 어우러지게 한다. 사람에게 가족이 있듯 구멍가게에는 나무 한 그루쯤 있어야 제격이란다. 그림 속 시간은 멈춰 있지만 나무는 계속 성장한다. 오래된 가게일수록 커다란 나무가 친구처럼 우뚝 서 있다. “10년 전 만났던 전북 군산 석치상회는 제 그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구멍가게의 전형적인 모델이었어요. 가게 왼편에 큰 나무 두 그루가 서 있어 묘한 조화를 이뤘죠. 백발의 주인장은 신선 같은 모습으로 40년 된 가게와 함께한 사연을 말씀해 주셨어요.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이어 온 삶이 풍기는 감동이 컸죠. 몇 년 뒤 가게는 문을 닫았고 그곳엔 커다란 밤나무 두 그루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제 그 나무가 가족처럼 가게와 주인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옛 얘기를 전하게 된 거죠.” ” 느리게, 그리고 길게 지난 3월, 영국 BBC는 「사라져가는 한국 구멍가게의 매력」(The Charm of South Korea's Disappearing Convenience Stores)이라는 제목으로 이미경 작가의 펜화 10점을 소개했다. 그리고 5월에는 일본 ‘도쿄 인터내셔널 아트 페어’에 초청받아 작품을 냈다. ‘내수용’인 줄 알았던 구멍가게 그림이 여러 나라에서 온 화상(畵商)과 관람객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펜화 80여 점과 구멍가게에 얽힌 경험을 담아서 낸 책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또한 인기다. 6월에 프랑스와 대만에서 번역돼 나왔고, 일본어 판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오는 10월에는 서울에서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워낙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그림들인지라 전시회 여는 게 쉽지 않아요. 강한 체력이 필요해서 건강에도 신경 쓰면서 속도 조절을 해야 할 것 같고요. 그래서 내년에는 좀 쉬면서 마음의 뜸을 들이려 합니다.” 그 동안에도 할 일은 많이 있다. 지금까지 그린 200여 점의 구멍가게 그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그 그림들을 모아 자료 정리를 하고 싶고, 구멍가게와 더불어 오래된 책방들을 그릴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서두를 생각은 없다고 하면서 그가 이렇게 덧붙였다. “가늘고 길게, 느리고 촘촘하게…. 펜화가 가르쳐 준 삶의 지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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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018 SUMMER 58

‘디테일이 나의 힘이다’ 자신이 디자인한 점프슈트 작업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디자이너 이광호(Lee Kwang-ho 李光鎬)는 상상력으로 우주를 비행하는 파일럿처럼 보인다. “꿈꾸는 게 제 일이니까 꿈이 현실로, 생각이 결과로 나올 때 행복하다”는 젊은 디자이너 — 누구에게나 익숙한 일상적 소재, 단순한 접근, 꼼꼼한 수작업으로 만들어 내는 상쾌하고 즐거운 그의 작품들을 국제 미술계가 주목하고 있다. 「Osulloc Tea house」(부분), 서울, 이광호, Grav와 컬래버레이션, 2017년, 전선 시작은 마치 기적처럼 찾아왔다. 홍익대학교 금속조형디자인과에서 공부를 마친 청년 디자이너 이광호는 졸업 뒤 연 작품전에 아무 반응이 없자 실망했다. 호평도 악평도 없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이런 심정을 전해 들은 선배 하나가 자신이 직접 홍보할 수 있는 해외 디자인 사이트를 소개해 줬다. 그는 이제껏 만들어 온 작품들과 이력을 정리한 포트폴리오를 그 사이트에 올렸다. 절박한 심정이었지만 내심 자신감은 있었다. 유학파도 아닌 토종 디자이너였음에도 홀로 쌓아 온 재료 탐구와 수작업의 진심이 통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포트폴리오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캐나다 몬트리올의 커미세어 갤러리(Commissaires Gallery)에서 연락이 왔어요. 들뜬 마음으로 바로 날아갔죠. 그곳에서 만난 갤러리 디렉터 겸 대표인 피에르 라라미(Pierre Laramée)가 제 작품이 마음에 든다며 전시회를 제안했고요. 뭐가 좋았냐고 물었더니 ‘새롭고 특별했다’고 대답했어요. 그렇게 커미세어 갤러리에서 2008년 첫 개인전을 연 뒤 좋은 반응이 이어졌어요. 작품도 많이 팔리고요. 전시 중에 뉴욕의 존슨 트레이딩 갤러리(Johnson Trading Gallery), 벨기에의 빅터 헌트 갤러리(Victor Hunt Gallery)가 관심을 보여서 디자인 마이애미와 바젤 아트페어 등 굵직한 국제 전시회와 견본시(見本市)에 나가는 길이 열렸죠.” 특히 뉴욕 디자인 아트계의 대표 주자 격인 존슨 트레이딩 갤러리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한국에서 온 무명 디자이너의 작품이 세계 일류 감식안에 포착되었다는 뜻이었다. 그 문을 통과하자 베를린, 파리, 런던, 암스테르담, 밀라노 등 디자인의 선두 도시들에 거점을 둔 디자인 전문 화랑들에서 협업 요청이 쏟아졌다. 그리고 2009년 4월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 ‘주목받은 10인의 디자이너’에 선정되면서 그는 국제적인 작가로 거듭났다. 익숙한 재료의 재발견 “단순한 접근, 이 열쇳말이 저의 오늘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 조명디자인 수업 시간이 출발이었죠. 다른 학생들은 ‘조명 기구는 전구를 씌우는 갓을 변주하는 게 전부다’라고 생각하고, 갓의 형태나 소재를 바꾸는 데 그쳤죠. 하지만 저는 가장 기초 요소라 할 전기, 전선, 전구만 가지고 새롭게 만들 수 없을까 생각을 했어요. 그 결과 전선을 짜서 형태를 만들었죠. 매듭 연작(Knot Series)이나 집착 연작(Obsession Series)은 그렇게 태어난 겁니다.” 이광호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일상생활 속 재료를 다시 보게 하는 재주를 가졌다. 집 안 곳곳에 늘어져 있는 전선, 정원용 고무 호스, PVC 튜브를 손으로 하나하나 엮어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미감을 재발견하게 만든다. 이리저리 꼬인 채 천장에 길게 늘어뜨려진 전선은 날것처럼 싱싱하면서도 ‘꼬임의 미학’으로 아름답다. 이렇듯 대량생산된 산업 제품과 손뜨개질의 만남이 일구어 낸 조화는 상큼하면서도 유머러스하다. 어떤 이는 거기서 바닷가 배에 매달린 집어등을 떠올리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뜨개질을 연상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제 스웨터며 목도리를 정성껏 뜨개질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색색의 털실이 빚어내는 무늬와 질감이 놀라웠죠. 요즘도 그때를 떠올리며 한 가닥, 한 가닥 빈틈이 없도록 작업합니다. 결국 디자인의 성패 여부는 디테일에 있다고 믿으니까요. 세밀함의 싸움이자 누가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내놓느냐가 관건이죠. 제가 국제 무대에서 계속 승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완벽한 마무리에 있어요. 집중해야죠.” 이광호는 어린 시절에 자주 가던 경기도 청평 외갓집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는 방학이면 조부모 농장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몸으로 익혔다. 손자의 눈에 할아버지의 손은 신기하기만 했다. 싸리나무를 모아서 묶기만 했는데 반듯한 빗자루가 됐으니 말이다. 추수한 곡식의 단을 쌓아올리는 모습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는 평범하고 거친 재료들이 사람의 손과 만나는 과정 전체가 디자인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시골에서 보낸 유년시절이 그의 수작업 프로젝트의 원천인 셈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제 스웨터며 목도리를 정성껏 뜨개질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요즘도 그때를 떠올리며 한 가닥, 한 가닥 빈틈이 없도록 작업합니다. 결국 디자인의 성패 여부는 디테일에 있다고 믿으니까요.” 홍익대학교에서 금속조형디자인을 전공한 이광호는 대량생산된 일상의 평범한 재료들을 사용해 새로운 미감을 발견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완벽한 디테일’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디자인 “2011년 3월, 패션 브랜드 펜디와 진행한 ‘장인 정신의 진화, 그리고 미래(Fatto a Mano for the Future)’는 수작업에 대한 제 믿음을 다시 확인하는 기회였습니다. 펜디의 장인과 나란히 앉아 가죽 끈을 꼬면서 재료가 무엇이든 선(線)을 이어 나가는 반복 작업의 치밀함이 인류의 오래된 미래라는 걸 새삼 배웠어요. 그 치열한 얽음의 미는 누구에게나 감동을 줍니다. 그 단순한 행위가 시간도 잘 가게 하고 생각도 정리하게 도와주죠. 손이 움직이면서 형상이 생기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상상력에 불을 지펴 줍니다.” 꼬불꼬불 생김새가 라면을 닮아 일명 ‘라면 의자’라 불리는 집착 연작 소파는 세계 어느 도시의 갤러리에 내놔도 인기다. 아이들은 보자마자 달려가 앉아 보고 만져 보고 즐거워한다. 의자가 아니라 놀이터가 된다. 물건을 접하는 순간,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해 그 쓰임새를 다양화할 수 있는 유연함이 이광호의 디자인 특성이자 철학이다. 그는 놓이는 공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품은 가구를 지향한다. “결국 디자인도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을 부식시킨 작품에 제가 붙인 제목이 「강의 모양」(The Shape of River)입니다. 작업을 밀고 나가다 보면 저절로 제목이 떠오르죠. 단순하게 시작했는데 확장되는 모든 과정이 흥미로워요. 그런 단계가 거듭될수록 좋은 디자인이 나오죠.” 그는 지난해 서울 성수동 3층 연립주택을 개조해 작업실을 만들었다. 낡은 벽돌 건물의 원형을 살리면서도 금속 소재로 반듯하게 정리한 작업실의 단순미가 그의 디자인을 닮았다. 근처에는 그의 작업에 도움을 주는 공장이 모여 있어 최적의 장소에 위치해 있다. 그렇게 자신의 작업을 이해하고 마음도 맞는 용접공이나 플라스틱 가공업체와 10년 넘게 거래하고 있다. 그들은 이광호의 엉뚱하고 새로운 시도에 의기투합할 수 있고, 때로는 아이디어까지 주는 일종의 동지들이다. 「Obsession」시리즈, 이광호, 2010년, PVC 「Osulloc 1979」(부분), 이광호, Grav와 컬래버레이션, 2017년, 화강암, 에나멜, 구리, 알루미늄, 스테인리스 스틸, 스티로폼, 유리, 나무 확장되는 협업의 영역 그동안 그는 자신의 영어 이름 이니셜을 따 세운 ‘klo(kwangho lee office)’를 통해 크리스찬 디올, 스와로브스키, 오니츠카 타이거, 젠틀몬스터 등 여러 브랜드와 협업해 왔는데 최근에는 그 규모가 더 커지고 있다. 이전까지는 수공예 기법을 적용한 그의 작업이 패션의 원단 직조 방식과 닮아서 패션 브랜드들의 러브콜이 많았지만, 이제는 호텔이나 기업체에서도 작업을 의뢰하고 있다. 올해 완공된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디자인이 한 예다.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의 설계로 파격적 공간 구성을 선보인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의 구석구석에 이광호 디자인의 힘이 퍼져 있다. 꽤 넓은 1층 로비를 짜임새 있게 구획해 내방객을 편안히 쉬게 하는 그의 집착 연작 의자가 빨강, 파랑, 노랑, 초록, 갈색으로 빛난다. 오설록의 프리미엄 티룸인 ‘오설록 1979’와 ‘오설록 티하우스’의 공간 기획과 더불어 가구, 조명 등 집기 디자인도 손님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거대한 숲이나 동굴에 들어온 느낌을 주는 실내는 그 안에서 차를 마시며 휴식하는 사람들을 자연처럼 품어 안는다. “화강암에 압착된 알갱이가 좋아서 돌을 썼습니다. 오랜 시간이 모여 단면이 보이는 화강암은 가능성이 많은 재료입니다. 돌이 가진 물성과 질감, 무게감을 여러 형태와 기능의 작업물로 만들어 공간에 적용해 볼 수 있어 이번 아모레퍼시픽 프로젝트가 기억에 남아요. 스케일이 커지니까 작은 요소들의 완성도가 더 중요해집니다. 대형 건물에 필요한 공간 구조도 감안하긴 하지만, 결국 나의 완벽주의가 핵심이자 해결책임을 다시 확인하게 되죠. 그동안 다뤄 보지 못한 재료에 대한 경험을 축적하면서 정직하게 밀고 나가는 중입니다.” 「Shape of a River」 시리즈, 이광호, 2017년, 구리 2017년 브라질 디자인아트마켓(MADE)에서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하면서 다시금 국제적 시선을 받았던 그는 올해 하반기에는 뉴욕 살롱 94(salon 94)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밀려드는 프로젝트 제안에 바쁜 나날이지만, 그는 “좋은 직업을 택했고, 운이 좋았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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