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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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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2021 AUTUMN 126

정신력과 열정으로 이룬 쾌거 정신력과 열정으로 이룬 쾌거 최근 여러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한국 음악인들의 수상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이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일찍 음악을 시작하고,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 속에서 성장하며 음악적 재능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김수연(Kim Su-yeon 金秀姢)은 올해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한국인 피아니스트로서는 처음으로 1위를 차지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최고 연주자 과정에 재학 중인 그는 이어 10월에 열리는 쇼팽 콩쿠르에도 도전할 예정이다. ⓒ Denise Tamara, 금호문화재단 제공 2020년부터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는 클래식 음악계도 얼어붙게 만들었다. 특히 지난해에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3년마다 개최되는 리스트 콩쿠르(International Franz Liszt Piano Competition)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5년에 한 번 열리는 쇼팽 콩쿠르(International Frederick Chopin Piano Competition)가 예정되어 있었다. 전자는 연기를 거쳐 결국 취소되었으며, 후자는 올해 가을로 연기되었다. 올해는 사정이 조금 나아져 각종 콩쿠르가 재개되었는데, 우수한 성적을 올린 한국인 연주자들의 소식이연이어 들려왔다. 이 외에도 바리톤 김기훈(Kim Gi-hoon 金基勳)이 영국 BBC 카디프 세계 성악가 콩쿠르(BBC Cardiff Singer of the World)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성악 콩쿠르로서 이 대회의 권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과거에 가곡 부문에서 한국인이 1위를 차지한 적은 있었지만, 본상 우승은 그가 처음이다. 퀸 엘리자베스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한국인들이 해마다 늘어나자, 2011년 벨기에 국영 RTBF 방송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집중 취재해‘한국 음악계의 미스터리’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한국 연주가들이 콩쿠르에 강한 이유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조기 교육과 치열한 경쟁을 꼽는다. 성악 분야를 제외하면 대개 어릴 때부터 음악을 시작해 일찌감치 재능을 찾아내고, 그런 과정을 통해 경험을 쌓아간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이 대표적인 영재 교육기관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 입학 자격을 얻게 되는데 입학 후에도 1년마다 치러지는 오디션에서 탈락자가 생길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현재의 기량보다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고 선발한 학생들이 결국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런가 하면 한국인들의 강한 정신력도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된다. 또한 과거에 비하면 국제 콩쿠르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늘어나 재능을 발현할 기회가 많아진 것도 큰 변화이다. 피아니스트 김수연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Montreal International Musical Competition)는 만 33세 이하 젊은 음악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대회다. 성악, 바이올린, 피아노 부문이 한 해씩 돌아가면서 열린다. 바이올린과 성악 부문에서는 한국 연주자들이 그동안 수차례 수상한 전력이 있었지만, 피아노 부문에서는 올해 1위를 차지한 김수연(Kim Su-yeon 金秀姢)이 처음이다. 지난해 말 김수연은 2021년으로 연기된 콩쿠르가 결국 온라인으로 치러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별된 27명의 연주자들이 각각 다른 도시에서 녹음을 하고, 결과 발표 후 추가로 결선 무대를 촬영하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낯선 진행 방식이 다소 염려스럽기는 했지만, 담담하게 연습을 이어갔다. 첫 촬영은 4월 초, 자신이 살고 있는 잘츠부르크에서 조금 떨어진 빈에서 녹음을 마쳤다. 이후 4월 말 파이널리스트 결과가 발표됐고, 결선 연주는 일주일 후 브뤼셀에서 촬영됐다. 이때 그녀는 베토벤의 와 스크랴빈의 , 라벨의 를 연주했고 콩쿠르 위촉곡인 캐나다 작곡가 존 버지의 도 포함됐다. 그녀는 같은 시기 브뤼셀에서 진행된 퀸 엘리자베스 국제 음악 콩쿠르(Queen Elizabeth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에서도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준결선에 진출한 상태였다. 두 개의 콩쿠르를 동시에 준비하며 영상 촬영까지 해야 하는 과업이 주어졌다. 그녀는 “청중 앞에 서는 것이 아니어서 현장에서 느끼는 긴장감은 덜했지만, 온라인 연주를 위해 카메라와 녹음기 앞에서 연주하는 게 다소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마치 빈 벽을 상대방으로 여기고 감정을 담아서 연기해야 하는 배우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는 뜻이다. 김수연은 이번 대회를 통해 “주목할 만한 세련된 테크닉과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아티큘레이션, 미니어쳐 밸류를 가진” 연주자로 평가됐다. 그녀는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서 폭넓은 레퍼토리를 배우며 음악적 상상력을 키웠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최고 연주자 과정에 재학 중이다. 이번 대회는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치러졌지만, 실전 무대만큼 엄격했다. 김수연은 결선 무대에서 베토벤, 스크랴빈, 라벨, 그리고 캐나다 작곡가 존 버지의 작품을 연주했다. ⓒ 2021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 유튜브 영상 캡처 첼리스트 한재민과 피아니스트 박연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열리는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George Enescu International Competition)는 루마니아 출생의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제오르제 에네스쿠를 기념하여 1958년 시작됐다. 창설 당시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부문을 대상으로 진행됐고, 이후 성악과 작곡 부문이 추가되어 1971년까지 3년 주기로 열렸다. 2009년부터는 첼로 부문이 추가되며, 2년 주기로 총 네 부문을 대상으로 열리고 있다. 동유럽권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열리는 제오르제 에네스쿠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진행된다. 한국인 수상자가 수차례 배출된 이 대회는 지난해 개최 예정이었다가 올해로 연기되었는데, 연도를 변경하지 않고 원래대로 ‘2020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로 표기했다. 지난 3월, 한경필하모닉 정기 연주회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을 연주하는 첼리스트 한재민(Han Jae-min 韓載慜)을 보고 깜짝 놀랐다. 14세 소년이 거침없이 성숙한 기교로 곡을 해석해 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2개월 뒤 그의 제오르제 에네스쿠 우승 소식을 접했을 때는 덜 놀랐다. 그는 이 대회 역사상 모든 부문을 통틀어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웠는데, 그럴 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재민은 그동안 다비드 포퍼 국제 첼로 콩쿠르(David Popper IX. International Cello Competition), 돗자우어 국제 콩쿠르(International Dotzauer Competition for Young Cellists)에서 1위를 수상했는데, 성인 대상 콩쿠르에 나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내 실력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싶었고, 경험 삼아 도전했다”고 말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피아노 반주자를 동반한 데 반해 그만이 주최 측에서 정해 준 루마니아 피아니스트와 함께 연주했다. 덕분에 세미 파이널에서 에네스쿠의 를 연주할 때 루마니아적인 정서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요즘 이슈트반 바르더이와 지안 왕의 연주를 즐겨 듣는다는 그는 “앞으로 나이 제한에 근접할 때까지 할 수 있는 한 많은 콩쿠르에 나가 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음악인 집안에서 태어난 한재민은 5세 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바이올린보다 큰 악기의 울림에 흥미를 느껴 첼로로 전공을 바꿨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는 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최연소로 입학했다. 이 대회의 피아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박연민(Park Yeon-min 朴淵敏)은 서울대 음대와 하노버 국립 음대 석사 과정 졸업 후 최고 연주자 과정에 재학 중이다. 그녀는 지난해 열릴 예정이던 프란츠 리스트 국제 콩쿠르의 14명 준결선 진출자 중 하나였지만, 코로나19로 콩쿠르가 취소되고 말았다. 마음을 다잡고 참가한 이번 대회에서 어렵기로 유명한 라흐마니노프의 을 선택했는데, 압도적인 힘과 열정으로 연주한 끝에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올해 14세인 첼리스트 한재민(Han Jae-min 韓載慜)이 지난해 개최 예정이었다가 올해로 연기된 ‘2020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첼로 부문에서 우승했다. 1958년에 시작한 이 대회 역사상 모든 부문을 통틀어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운 그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재학 중이다. ⓒ Andrei Gindac, George Enescu International Competition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개최된 2020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1등을 차지한 박연민(Park Yeon-min 朴淵敏)이 라흐마니노프의 을 연주하고 있다. 2014년 금호영아티스트 콘서트로 데뷔한 그는 현재 하노버 국립음대 최고연주자 과정에 재학 중이다. ⓒ Andrei Gindac, George Enescu International Competition 한국 연주가들이 콩쿠르에 강한 이유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조기 교육과 치열한 경쟁을 꼽는다. 성악 분야를 제외하면 대개 어릴 때부터 음악을 시작해 일찌감치 재능을 찾아내고, 그런 과정을 통해 경험을 쌓아간다. 피아니스트 이동하와 아레테 스트링 콰르텟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콩쿠르(Prague Spring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는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과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멤버들이 1946년 창설했다. 만 30세 이하의 젊은 음악인들을 대상으로 두 부문씩 매년 번갈아가며 열린다. 올해는 피아노와 현악 4중주 부문에서 경연이 펼쳐졌고, 각각 이동하(Lee Dong-ha 한자)와 아레테 스트링 콰르텟(Arete String Quartet)이 1위에 올랐다. 이동하는 연세대 졸업 후 하노버 국립 음대 석사를 거쳐 뮌스터 국립 음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국제 콩쿠르에 처음 참여한 그는 이번 대회를 위해 평소 좋아하던 곡들을 선택했는데, 많은 연주자들이 연습하는 곡들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음악적 해석에 더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 지난 5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예정보다 한 달가량 앞당겨진 일정 때문에 여러모로 힘들었지만, 심사위원들로부터 자신의 연주에 대한 객관적이고 상세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던 점이 뜻깊었다고 말했다. 아레테 스트링 콰르텟은 바이올리니스트 전채안(Jeon Chae-ann 全彩顔)과 김동휘(Kim Dong-hwi 金東暉), 비올리스트 장윤선(Jang Yoon-sun 張允瑄), 첼리스트 박성현(Park Seong-hyeon 朴星昡)으로 구성됐으며 2019년 9월 창단했다. 2020년 금호 영체임버 콘서트를 통해 데뷔한 이들의 데뷔 실황 연주는 신예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KBS 라디오 클래식 FM에 소개되었다. 이들은 현재 노부스 콰르텟, 에스메 콰르텟의 뒤를 잇는 차세대 콰르텟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이 팀은 무려 16년 만에 열린 현악 4중주 부문에서 우승 외에도 5개의 특별상을 차지했다. 피아니스트 이동하(Lee Dong-ha 李東夏)가 2021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연주하고 있다. 국제 콩쿠르에 처음 출전한 그는 1위라는 수상 결과보다 훌륭한 심사위원들로부터 조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더 값지다고 말했다. 연세대 졸업 후 하노버 국립 음대 석사를 거쳐 현재 뮌스터 국립 음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 Petra Hajská, Prague Spring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2021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콩쿠르 현악사중주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아레테 스트링 콰르텟(Arete String Quartet)은 특별상까지 포함해 이번 대회에서 6관왕을 차지했다. 2019년 창단한 이 그룹은 국내 실내악 분야를 이끌어 갈 차세대 콰르텟으로 주목받고 있다. ⓒ Petra Hajská, Prague Spring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류태형(Ryu Tae-hyung 柳泰衡)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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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2021 SUMMER 407

DILKUSHA ‘기쁜 마음의 궁전’ 1919년 3.1운동을 해외에 최초로 알린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와 그의 영국인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1889-1982)가 살았던 집‘딜쿠샤(Dilkusha)’가 여러 해에 걸친 복원을 끝내고 올해 3월 1일 기념관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그들의 꿈과 사랑, 그리고 한국의 독립을 도우려는 열정이 담긴 보금자리가 옛모습으로 돌아왔다.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영국인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가 1923년 서울 행촌동에 지은 서양식 벽돌집 ‘딜쿠샤.’2009년서울시가 펴낸 『돈의문 밖, 성벽 아랫마을: 역사·공간·주거』에 실린 옛 모습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딜쿠샤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이루어졌으며 20세기 초 한국에 지어진 서양식 가옥의 건축 기법을 보여 준다. 특히 외벽에는벽돌의 옆면과 마구리를 번갈아 가며 쌓는 프랑스식 공법(rat-trap bond)이 적용되었다. 1890년대 말, 아버지, 동생과 함께 금광 채굴 사업 차 한국에 온 앨버트 테일러는 일본에 공연 여행 온 영국인 연극 배우 메리린리를 만나 결혼한 후 1942년 일본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 딜쿠샤에서 살았다. 영국인 연극 배우 메리 린리 서울 행촌동 언덕의 빽빽한 주택가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특이한 건물 하나가 있다. 머릿돌에 ‘DILKUSHA1923’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이 집의 내력은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미국인 조지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 1829~1908)와 그의 두아들 앨버트, 윌리엄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대한제국 선포 즈음인 1890년대 말이었다. 입국 목적은 당시 평안북도에 있던 운산(雲山) 금광 채굴 사업을 위해서였다. 앨버트는 그 후영국인 배우 메리 린리(Mary Linley)와 결혼한 뒤 신혼살림을 위해 서양식 주택을 짓고, 그 이름을 딜쿠샤라 했다. 신혼여행 중에 방문했던 북부 인도의 궁전 이름으로,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Palace of Heart's Delight)’이라는 뜻이다. 잊힌 집 앨버트는 단순히 금광 개발업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 중심 소공동에 테일러상회(W. W. Taylor& Company)를 세워 미국산 자동차를 비롯해 다양한 생활용품과 건축 자재를 수입 판매했는가 하면, UPI와 AP 서울 통신원을 맡아 이곳 소식을 미국에 타전하는 역할도했다.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1919~2015)가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난 날은 1919년 2월 28일로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저항해 전 국민이 일어선 3.1운동이시작되기 하루 전이었다. 메리 린리 테일러가 쓴 회고록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The Book Guild Ltd., 1992)에 의하면, 조선인 간호사들이 일본경찰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어떤 서류 뭉치를 갓 태어난 아기의 강보 밑에 감춰 놓았다고 한다. 저녁 무렵 남편 앨버트가 와서야 비로소 그것이 「기미독립선언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독립선언서’잖아! 그가 놀라서 소리쳤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서운한 마음에 그날의 일을 힘주어 말한다. 당시 갓 신문 기자가 된 브루스는 아들을 처음 만난 것보다 그문서를 발견한 것에 더 흥분했다고 말이다. 바로 그날 밤, 시동생 빌이 독립선언문 사본과 그에 관해 브루스가 쓴 기사를 구두 뒷축에 감춘 채 서울을 떠나 도쿄로 갔다. 금지령이 떨어지기전에 그것을 전신으로 미국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he exclaimed, astonished. To this day,I aver that, as a newly fledged newspaper correspondent, he was more thrilled to find those documentsthan he was to find his own son and heir. That very night, Brother Bill (Albert’s younger brother) leftSeoul for Tokyo, with a copy of the Proclamation in the hollow of his heel, to get it off, with Albert’sreport, over the cables to America, before any order could be issued to stop it.)” 당시 온 국민이 제국주의세력에 대항해 봉기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식민 지배가 시작된 지 9년 만에 조선에서는 대대적인 민중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앨버트가 타전한 기사를 받아 3월4일 중국의 영문 매체 『대륙보(China Press)』를 시작으로, 10일에 미국 인디애나 『사우스벤드 뉴스 타임스(South Bend News-Times)』, 13일에는『뉴욕타임스』에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다 (Koreans Declare For Independence)’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는 이후 3.1운동 진압 과정에서 일본이자행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과 방화 사건들도 열심히 취재해 보도했다. 사업가로서 일본 당국으로부터 여러 면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개인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의 무력적인 탄압행위를 세상에 알리고, 조선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한 것이다. 그런 활동은 일본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다. 결국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적성국시민’의 거주를 허용하지 않았고, 앨버트는 그해 12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 부근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부부가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이후 그와 그의 가족은한국인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브루스 테일러와 그의 딸 제니퍼 테일러(1958~)가 2006년 방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테일러 부부가 추방된 지 64년 만의 일이었다. 딜쿠샤 2층 거실. 테일러 부부가 거주하던 당시의 모습을 사진 자료를 통해 그대로 재현했다. 풍경화, 화병, 램프, 의자, 삼층장등 가구와 장식품에 동서양 문화가 혼합되어 있다. 테일러 가족의 방문 필자가 10여 년 전 방문했을 때만 해도 딜쿠샤는 건물 내외부가 모두 쇠락한 상태였다. 안전 진단 결과더 이상 거주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육안으로 대충 보아도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벽돌이며 부서진 콘크리트 사이로 보이는 철근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추방 전 일본 군인들이 체포하러 왔을 때테일러 가족이 몸을 숨겼다는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 아래 공간, 2층 서재의 벽난로, 현관과 계단, 마룻바닥, 창틀 등 내부 시설은 함부로 없애거나 덧댄 나머지 누더기처럼 변해 있었다.비가 새는 지붕에는 얼기설기 비닐 천막이 덮여 있었다. 서울시와 중앙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즈음이었다. 브루스 부녀의 방한으로 딜쿠샤의 내력이 알려지자, 더이상의 훼손을 막고 역사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2017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되었다. 이듬해 건물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고 내부 시설을 갖춘 후 2021년 3월 1일 일반에 개방되었다.글렌우드 난로(Glenwood Heater)를 비롯해 메리가 남긴 사진들을 기반으로 재현한 가구와 화병, 촛대 등 소품에 이르기까지 마치 192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살렸다. 특히앨버트 부부의 생활 유품과 옛 사진을 비롯한 1,026건에 달하는 자료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면서 딜쿠샤는 더욱 풍성한 전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집은 단순히 한외국인 가족이 살았던 공간이 아니다. 딜쿠샤는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 그리고 세계 만방에 식민지 민중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 주인공의 보금자리였다. 일생을통해 미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었던 앨버트는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고, 1948년 캘리포니아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있는자신의 아버지 묘 옆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그의 아내 메리가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미군 군함에 유골을 싣고 돌아와 소원을 이뤄준 것이다. 메리는 1982년 92세에세상을 떠나 캘리포니아에 묻혔다. 2006년 브루스와 제니퍼가 방한했을 때 메리의 묘에서 퍼온 흙을 앨버트의 묘에 뿌렸고, 그의 묘의 흙을 떠다가 캘리포니아의 메리 묘에 뿌린 것으로알려졌다. 딜쿠샤 1층 거실. 고증을 거쳐 2년여 동안 꼼꼼하게 재현되었다.ⓒ 이정우(Lee Jeong-woo 李政雨) 이 집은 단순히 한 외국인 가족이 살았던 공간이 아니다. 딜쿠샤는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 그리고 세계 만방에 식민지 민중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주인공의 보금자리였다. 이방인 조력자들 앨버트 테일러뿐만 아니라 당시 외국인 중에 음으로 양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운 이들이 적지 않았다.딜쿠샤에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살았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 Bethell 1872-1909)은 1904년 조선에 들어와 언론인 양기탁(梁起鐸1871~1938) 등과 함께 『대한매일신보(Korea Daily News)』를 발행했다. 그는 언론 활동을 통해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정부에 떠안긴 거액의 외채를 조선인들 스스로 십시일반 모금해 갚자는 국채보상운동 때에도 전면에 나서서 지원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 기자프레데릭 매켄지(Frederick Mackenzie 1869-1931)는 1906년부터 1907년 사이 경기도와 충청도, 강원도의 산중을 찾아다니며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들을 만나취재했다. 그 결과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1908),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1920) 등의 저서를남겼다. 이 책들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일반 민중까지도 치열한 게릴라 항전을 이어갔음을 증명해 주는 귀중한 사료다. 또 영국 태생의 캐나다 선교사이며 의학자인 프랭크스코필드(Frank Schofield 1889-1970)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로 봉사하며 한편으로 일본의 조선인 학살을 취재해 해외 언론에 알리기도 했다. 이를 구실로 1920년강제 출국 당했다가, 1969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최초의 외국인이다. 이 외에도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변호한 일본인 인권 변호사후세 다쓰지(布施辰治 Datsuji Fuse 1880-1953)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운 중국인 저보성(褚輔成 Chu Fucheng 1873-1948), 한국광복군의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한 중국인 쑤징허(蘇景和 Su Jinghe 1918-2020) 등 외국인들의 조력이 있었다. 딜쿠샤는 그런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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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2021 SPRING 499

[세한도], 국민의 보물로 정착하다 는 조선 후기의 뛰어난 학자 김정희가 유배지 제주도에서 1844년에 그린 그림으로, 흔히 한국 문인화의 정수로 불린다. 개인 소장품이었던 이 유명한 그림이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자, 정부는 이를 문화훈장으로 치하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은 특별전을 열어 긴 여정의 끝에 국민의 품에 안긴 국보를 환영했다. 2020년 12월 8일, 정부는 13명의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날 수훈자 중 가장 눈길을 끈 이는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孫昌根) 씨였다. 유일하게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데다가 이 훈장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는 경우도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수집한 국보•보물급 문화재를 아무런 조건 없이 국가에 기증해 왔으며, 특히 2020년 1월엔 값을 매길 수 없는 국보 를 국민 모두의 자산이 되게 해 국민 문화 향유 증대에 기여했다.” 문화재청은 손 씨에 대한 훈장 수여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는 2018년에도 수백 점의 미술품과 문화재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소장하고 있던 미술품 전체를 기증하려다가 마지막 순간 빼놓은 한 점이 바로 였다. 그만큼 애착이 컸다는 얘기다. . 김정희. 1844. 종이에 수묵. 23.9 × 70.4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두루마리 중 가로 약 70cm 길이의 그림 부분이다. 작가가 『논어(The Analects of Confucius)』의 한 구절에 자신의 처지와 마음을 빗댄 발문을 왼쪽에 써서 붙였다. 소나무와 측백나무,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오두막집으로 유배지 제주도의 외롭고 황량한 풍경을 묘사한 이 그림은 조선 시대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 허련(許鍊 1808~1893). 19세기. 종이에 채색. 79.3 × 38.7 cm.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 Amorepacific Museum of Art) 소장. 조선 후기 산수화의 대가 허련이 그린 제주에서 유배 생활 중인 스승 김정희의 모습. 중국의 시인 소동파를 그린 가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허련은 평소 소동파를 존경했던 스승을 위해 에 스승의 모습을 투영했다. 유배지 스승의 선물 1974년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 두루마리’는 다 펼치면 전체 길이가 1,469.5㎝에 이른다. 이 중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그린 가로 약 70㎝ 길이의 그림이 이며, 나머지 대부분은 여러 사람의 감상평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와 후일 덧붙여 장정된 두루마리를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해서 그림보다 감상문이 더 긴 두루마리가 만들어진 것일까? 김정희가 태어난 18세기 말 한반도는 조선 왕조(1392~1910)가 통치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선 루이 16세에 반기를 든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됐고, 미국은 독립을 선언하고 8년간의 전쟁 끝에 1783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았다. 조선은 이러한 세계사적 격변과 동떨어진 채 아직도 이웃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유교 국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실용주의 학문이 활기를 띠면서 근대가 서서히 태동하고 있었다. 왕실의 먼 친척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희는 고증학과 금석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 일찍부터 선진 학문을 익혔고, 24세 땐 사신으로 청나라를 방문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연경(현재의 북경)에 가서 석학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추사, 또는 완당이라는 아호로도 널리 알려진 그는 문인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로 요구됐던 시•서•화 모두에 뛰어났으며, 특히 독창적 서체인 ‘추사체’를 창안했다. 19세기 조선은 어린 왕들이 잇따라 즉위하면서 외척의 세도가 극에 달했던 정치적 혼란기였다. 실학과 천주교 같은 신식 사상이나 새로 유입된 종교는 보수적인 지배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정적들을 내쫓아 먼 곳으로 유배시키는 일이 흔했다. 김정희도 모함을 받아 1840년, 55세의 나이에 귀양지 중 가장 멀고 험한 지역이었던 제주도에 유배됐다.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혹독한 귀양살이는 8년 4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는 유배 기간 동안 끊임없이 질병에 시달렸고 아내가 사망하는 슬픔까지 겪어야 했지만, 절망 속에서도 글씨와 그림에 몰두했다. 그런 그에게 역관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 배편으로 보내 주는 귀한 서적과 연경의 최신 정보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상적은 중국을 왕래하며 어렵게 사 모은 서적들을 유배지에서 외롭게 지내는 스승에게 보내오곤 했다. 는 이 시기 김정희가 이상적에게 선물한 그림이다. 화폭 속에는 한 채의 소박한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는 텅 빈 여백으로 처리되었다. 그림 왼쪽에는 다른 종이를 이어 붙이고 칸을 그려 그동안 책을 보내준 일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정갈한 필체로 적었다. 이어 『논어(論語 The Analects of Confucius)』의 「자한(子罕 Zi Han)」 편에 나오는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When the year becomes cold, then we know how the pine and the cypress are the last to lose their leaves; 번역 James Legge)”는 구절을 인용했다. 그림 제목은 이 인용문의 첫 두 글자에서 왔다. 제주도 고독한 유배살이를 ‘추운 계절’로 은유하면서 역경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제간 우정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총 길이 1,469.5cm에 이르는 두루마리에는 김정희로부터 이 그림을 선물로 받은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중국 지식인 16명에게 받은 감상문이 이어져 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 그림이 품고 있는 의미를 새기면서 군자가 지조를 지키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술회했다.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이기도 했던 김정희는 그림 왼쪽에 다른 종이를 이어 붙여 제자 이상적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비롯해 유배 중인 자신의 심경을 적었다. 이 그림의 세 번째 소장자였던 김준학(金準學 1859~?)이 1914년에 쓴 ‘완당세한도’ 다섯 글자와 감회를 적은 시(詩). 국경을 넘은 긴 여정 스승에게서 를 받았을 때 이상적은 중국 출장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감격한 그는 이 그림을 들고 연경으로 향했다. 그의 방문을 환영하는 모임에 중국의 지식인 17명이 모였는데, 이상적은 그들에게 스승의 그림을 보여 주며 감상문을 부탁했고, 그중 16명이 글을 써 주어 지금까지 전해 오게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군자가 지조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과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이 두루마리에는 총 20명의 감상문이 적혀 있는데, 중국인 16명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은 한국인이다. 여기에도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 이 그림은 첫 번째 소유자였던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와 그 아들에게 대물림되었다가 또 다른 주인을 거쳤고, 20세기 전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Chikashi Fujitsuka 1879~1948 )의 손에 들어갔다. 경성제국대학 중국 철학과 교수였던 그는 김정희에 관한 연구에 심취해 그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 그림을 소유하게 되었고, 1940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편 김정희의 서화를 연구했던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은 일본으로 건너간 이 그림을 돌려받기 위해 1944년 도쿄 대동문화학원(大東文化学園) 원장으로 있던 후지쓰카를 찾아갔다. 그는 “원하는 대로 다 해 드리겠으니 작품을 양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후지쓰카는 자신도 김정희를 존경한다며 그의 간곡한 제안을 거절했다. 뜻을 접지 않은 손 씨는 두 달간 매일 후지쓰카를 찾아갔고, 마침내 그해 12월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당신”이라는 말과 함께 아무런 대가 없이 작품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이듬해 3월 도쿄는 미군의 폭격을 받았고, 후지쓰카의 연구 자료 대부분이 이때 화재로 손실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35년의 일제 강점에서 해방됐다. 손재형은 이 기쁜 마음을 담아 세한도 두루마리에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 정치인 3명에게서 감상문을 받았다. 이들은 나라를 되찾은 감격과 함께 일본인에게서 를 되찾아온 손재형을 상찬하는 글을 남겼다. 당시 그는 비단 두루마리를 새로 단장하면서 군데군데 여백을 남겨 놓았다. 아마도 더 많은 글을 받으려 했으나 실현되지 않은 듯 두루마리의 상당 부분이 지금도 비어 있다. 이후 손재형은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면서 자금이 필요해 이 그림을 포함해 많은 서화 소장품들을 내놓게 됐다. 이를 인수한 이가 인삼 무역으로 크게 성공한 개성 출신 사업가 손세기(孫世基 1903~1983)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뛰어난 안목을 지녔던 그는 김정희의 작품을 특별하게 여겼다. 그의 수집품을 물려받은 이가 바로 지난해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장남 손창근 씨다. 두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 중국으로, 다시 일본을 오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던 가 디지털 시대 새로운 작품의 소재로 재해석된 것이다. 미디어 아티스트 장-줄리앙 푸스(Jean-Julien Pous)는 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흑백 영상 작품 을 통해 표현했다. 두루마리의 끝부분에는 20세기 학자, 정치인 등 한국인 4명의 감상평도 실려 있다. 두루마리의 맨 끝에는 한학자 정인보(鄭寅普 1893~1950)의 매우 긴 감상평이 적혀 있다. 그는 김정희의 심경을 헤아리는 한편 이 그림과 함께 나라를 되찾은 기쁨에 대해서도 적었다. 서예가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은 2차 대전 막바지에 포탄이 떨어지는 도쿄에서 이 그림을 어렵게 가지고 돌아온 손재형의 용기를 크게 칭찬했다. 『몽고유목기(蒙古游牧記)』 등을 저술한 중국 학자 장목(張穆 1805~1849)은 김정희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신하는 감상평을 남겼다. 21세기 프랑스인의 해석 2020년 11월 말 국립중앙박물관은 세한도 두루마리 기증을 기념하는 특별전 전을 열었다. 그림이 전시된 적은 몇 차례 있었지만, 두루마리 전체를 공개한 것은 2006년 이후 처음이다. 오는 4월 4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회에서 특히 눈여겨볼 게 있다. 인트로 성격으로 제작된 흑백 영상물 이다. 이 7분짜리 영상에는 제주의 바람과 파도, 쉼 없이 줄을 잣는 거미와 무성한 소나무숲 등이 고독하게 담겼다. 이 영상을 제작한 미디어 아티스트 장-줄리앙 푸스(Jean-Julien Pous)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세한도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겠지만 외로움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La peinture Sehando me fait ressentir plusieurs émotions, mais peut-être est-ce le sentiment de solitude le plus fort.)”면서 “요즘 우리도 코로나19 때문에 외로운 도시에 사는 상황이라서 더 크게 와 닿았다(Ce sentiment est sans doute exacerbé par la Covid-19, qui nous fait sentir d'autant plus seuls dans une grande ville.)”고 설명했다. 정밀한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21세기 프랑스인이 에 남긴 감상문이라 하겠다. 두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 중국으로, 다시 일본을 오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던 가 디지털 시대 새로운 작품의 소재로 재해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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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2020 WINTER 1073

K-Pop 뮤직비디오, 새로운 출발선에 서다 BTS와 블랙핑크로 대표되는 K-pop 뮤직비디오가 수억 뷰를 기록하며 YouTube를 석권하고 있다. 상상을 뛰어넘는 기발한 기획, 화려한 의상과 배경, 매혹적인 퍼포먼스가 온 세계 팝 뮤직 팬들을 즐겁게 하며 동영상을 통한 하나의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장르를 개척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2020년 9월 8일, 블랙핑크의 신곡 가 공개 73일 만에 5억 뷰를 돌파하며 K-pop 사상 최단 시간 유튜브 조회 신기록을 세웠다. 이들이 2019년 발표한 보다 43일 빨랐다. 이에 앞서 은 6월 26일 첫 공개 이후, 유튜브 역대 최초로 불과 32시간 만에 1억 뷰를 달성하고, 기네스 월드 레코드 5개 부문에 올라 화제가 되었다. 이 같은 신기록 행진은 BTS와의 열띤 경쟁 결과 이룩한 쾌거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2020년 9월 기준, 10억 뷰가 넘는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K-pop 그룹은 BTS와 블랙핑크 단 두 팀뿐이다. 블랙핑크의 가 지난해 4월 K-pop 최초로 10억 뷰를 돌파했고, 그 뒤를 바짝 쫓던 BTS의 가 곧이어 10억 뷰를 넘었다. 1억 뷰의 의미 이 두 그룹 때문에 1억 뷰라는 숫자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사실 전 세계 대중음악 아티스트들에게 이것은 꿈의 숫자다. K-pop 뮤직비디오 역사상 최초로 1억 뷰를 달성한 것은 그룹 소녀시대의 대표곡 였다. 2009년 1월 발매 이후 6월 유튜브를 통해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이 노래는 약 3년 10개월 만인 2013년 4월 조회 수 1억 뷰를 넘어서며 업계 안팎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이것은 그저 신호탄에 불과했다. 당시를 전후로 해외 시장에서 인기를 서서히 높여 가던 K-pop은 영상 언어의 증폭과 더불어 놀라운 속도로 성장해 갔다. 빅뱅, 엑소, 세븐틴, 트와이스 등 다수의 그룹들이 상승세를 이어갔고, 여기에 지드래곤, 태양, 현아(HyunA 泫雅), 태연(Taeyeon 太軟), 아이유 등 솔로 가수들의 활약까지 더해졌다. 유튜브 뮤직비디오 조회수 1억 뷰는 이제 인기 있는 K-pop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지표가 되었다. 아이돌 그룹과 뮤직비디오 우리 대중음악계에서 뮤직비디오의 중요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영국의 뉴웨이브 그룹 버글스(The Buggles)가 자신들의 히트곡 에서 노래한 것처럼 1981년 미국의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 MTV의 개국과 함께 전 세계 대중음악 팬들의 눈과 귀가 온통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영상에 쏠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상상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소리의 시각화’에 성공한 영상 음악의 질주는 거침이 없었다. 24시간 동안 쉼 없이 쏟아지는 화려하고 자극적인 영상과 음악 속에서 마돈나, 마이클 잭슨, 프린스 등 1980년대 미국 팝 시장에 돌풍을 일으킨 월드 스타들이 차례로 탄생했다. 이들과 함께 한국 팬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던 듀란듀란, 컬쳐 클럽, 유리스믹스 등 개성 있는 비주얼과 음악성을 겸비한 영국 그룹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뮤직비디오의 흥행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이후 뮤직비디오는 음악인들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 영상과 음악의 만남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고 있는 장르가 다름 아닌 K-pop이라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K-pop은 실질적으로 ‘한국의 아이돌 팝’과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K-pop 아이돌 그룹의 경우, 멤버 가운데 수려한 외모나 뛰어난 댄스 능력을 가진 멤버가 따로 존재할 정도로 그룹 구성 단계부터 비주얼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보는 음악’에 대한 고민이 남긴 흔적은 흔히 1세대 아이돌이라 불리는 H.O.T와 S.E.S, 핑클(Fin.K.L)과 젝스키스 같은 그룹의 뮤직비디오를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장 기본이 된 것은 관객이 보는 순간 즉각적으로 매력을 느끼게 하는 1차원적 이미지를 활용한 접근이었다. 얼굴을 극도로 클로즈업하거나 퍼포먼스의 특징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각 멤버들이 가진 최고의 무기를 극대화해 담아내는 감각적인 영상이 대표적인 예였다. 그러다가 H.O.T의 이나 핑클의 처럼 같은 세대를 향한 메시지나 그룹의 고유한 서사를 강조한 드라마 형식의 뮤직비디오가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노래에 담긴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자주 활용되던 드라마 풍의 뮤직비디오가 점차 영역을 확장하며 진화해 갔다. 한국의 뮤직비디오가 노래 한 곡의 내용을 담는 짧은 영상물을 뛰어넘어 그룹 또는 앨범 전체의 메시지를 상징하는‘세계관’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2012년 그룹 엑소 때부터였다. ‘엑소플래닛(exoplanet)’이라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멤버들에게 부여된 초능력을 풀어가는 서사를 대중에게 설득시키려 했던 그들은 자신들이 제시한 판타지적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초능력을 묘사한 컴퓨터 그래픽은 물론 평행세계, 생명의 나무, 두 개의 태양 등 한때 ‘엑소학(學)’이라 불릴 정도로 심오한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한 각종 티저 영상까지 무수한 종류와 형태의 최첨단 영상들을 쏟아냈다. 한국의 뮤직비디오가 노래 한 곡의 내용을 담는 짧은 영상물을 뛰어넘어 그룹 또는 앨범 전체의 메시지를 상징하는‘세계관’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2012년 그룹 엑소 때부터였다. 앞으로의 과제 BTS를 지금의 월드 스타 자리에 오르게 한 주춧돌이었던 시리즈의 청춘 세계관은 Part 1과 2, 그리고 ‘EPILOGUE: Young Forever’로 이어진 뮤직비디오들과 함께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블랙핑크 역시 마찬가지다. 데뷔 싱글에 수록된 과 의 뮤직비디오가 보여준 이들의 강렬한 이미지는 두 개의 탄탄한 축으로 지탱되고 있다. 한 축은 ‘K-pop 인베이전’ 이전부터 영미권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온 소속사 YG 엔터테인먼트 특유의 쿨하고 힙한 뮤지션의 이미지이고, 또 다른 한 축은 유행을 선도하는 패셔니스타, 압도적인 숫자의 팔로워를 자랑하는 국제적 인플루언서로서 네 명의 멤버들이 각자 내뿜고 있는 존재감의 시각적 구현이다. K-pop 뮤직비디오는 이제 단순히 음악과 조화된 영상을 뛰어넘어 세계 음악 시장의 큰 구조를 바꿔나가는 대표적 매체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2년 지구촌을 ‘말춤’으로 휩쓸었던 싸이의 열풍이 지난 뒤, 빌보드는 싱글 차트인 HOT 100에 유튜브 뮤직비디오 조회수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미국 시장 진출을 꿈꾸는 K-pop 가수들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 있다. 다만 놀랍게 높아진 K-pop의 위상은 그에 따른 책임도 함께 요구하고 있다. 한국의 뮤직비디오를 생산하는 크리에이터들은 지금 유행하고 있는, 또는 아직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그 무엇을 누구보다 발 빠르고 세련되게 풀어내야 한다는 공통의 목표 의식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또한 그런 중압감으로 인한 무분별한 표절이나 특정 문화에 대한 몰이해, 문화적 전유 현상에 대한 비판과 마주할 가능성도 상시 존재한다. 이는 K-pop 뮤직비디오가 세우고 있는 각종 신기록만큼이나 신중하게 다뤄져야 할 이슈다. 이런 의미에서 K-pop 뮤직비디오는 지금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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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2020 AUTUMN 354

전쟁터에서 문화재를 지켜 낸 사람들 국립중앙박물관이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준비한 <6.25 전쟁과 국립박물관 - 지키고 이어가다>는 COVID-19로 인해 6월 25일 온라인으로 먼저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문화재 소개(疏開)와 보존 노력의 선두에 있었던 김재원(金載元 1909~1990) 박사의 딸이자 후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영나 교수가 당시 상황을 돌아본다. 전쟁은 인간의 생명뿐 아니라 중요한 문화재와 미술품들도 파괴하기 마련이다. 약탈 행위도 서슴없이 일어난다. 패전국의 문화재를 파괴하고 ‘문화’를 그들의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행위는 정체성을 없애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는 문화재 약탈 전담 기구를 꾸려 유럽 각국에서 체계적으로 예술품과 역사적 문서, 서적을 약탈했다. 그 수는 미술품만 약 25만 점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서적이나 기록물, 다른 유물들을 합치면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행위는 후일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전쟁 범죄로 인정되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 중에도 북한군에 의한 문화재 약탈 시도가 있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약탈하려는 그들의 시도를 막고, 그 이후 임시 수도 부산으로 소장품을 소개(疏開)시키고 수호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국내외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52년, 국립박물관 직원들이 전시 수도 부산 임시 청사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중앙 정면에 김재원 관장이 보인다(왼쪽에서 여섯 번째). ⓒ 국립중앙박물관 1915년, 경복궁 경내에 서양식으로 지어진 조선총독부 박물관. 오른쪽으로 경복궁의 전각들과 동문인 건춘문, 그리고 왼쪽 하단에 근정전 회랑이 보인다. ⓒ 국립중앙박물관 북한군의 서울 점령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때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유한 문화재를 지켜 내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당시 초대 관장으로 일하고 있던 김재원이었다. 그는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친 독일 뮌헨대학 유학 시절 히틀러 집권 아래서 정치적 혼란을 목격했고, 그 후 벨기에 겐트대학의 동양고고학실에서 칼 헨쩨(Karl Hentze) 교수의 연구 조수로 있다가 1940년에 귀국했다. 보성전문학교(현재의 고려대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던 그는 1945년 12월 미군정에 의해 일제의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할 초대 국립박물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1915년, 경복궁 내에 서양식 건물로 지어진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궁 내 건물 몇 채를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해방 후 박물관을 인수할 책임자를 찾던 미군정은 독일 유학생 출신의 이 고고학자를 적임자로 판단했다. 독립 후 새로운 박물관 정립을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직원들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범했고, 서울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3일 후인 6월 28일 아침, 박물관에는 북한 인민공화국 기가 올라갔고 직원 중 한 명이 이승만 대통령 타도를 외치며 나섰다. 다음 날 관장 자리에서 쫒겨난 후 김재원은 요인 납치를 위해 그를 찾아다니는 북한군을 피해 지인의 집에 숨어 지내야 했다. 국립박물관을 장악한 북한 요원들은 이 박물관의 소장품뿐 아니라 간송미술관 창립자인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의 수집품도 함께 북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박물관 직원들에게 1급 문화재를 모두 포장해 시내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독촉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포장할 종이가 부족하다”거나 “궤짝을 짤 재료가 부족하다”는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작업을 지연시켰다. 그러는 사이 3개월이 지나고 9월 28일 서울이 다시 유엔군에 의해 탈환되자, 북한 요원들은 계획을 포기하고 황급히 북으로 도망쳤다. 대부분의 문화재들이 이미 포장되어 덕수궁에 쌓여 있었지만, 퇴각하는 군인들을 태우기에 바빠 문화재를 운송할 트럭을 구할 여력이 없었다. 북한군 점령 하에 경복궁은 폭격으로 크게 파손되었고, 박물관 소장품이 있었던 건물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국립박물관 초대 관장 김재원(金載元 오른쪽) 박사와 한국전쟁 당시 부산 미국공보원 원장으로 근무하던 유진 크네즈(Eugene I. Knez). 크네즈가 문화재 운송을 위한 차량을 비밀리에 마련해 줌으로써 김 관장은 국립박물관 소장 문화재들을 부산으로 무사히 소개할 수 있었다. 비밀 작전 9.28 서울 수복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을 향해 진격해 올라갔다. 그러나 곧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고 말았다. 10월 말 김재원 관장은 미군 장교에게 북진하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부딪쳐 후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11월에는 수십 대의 미군 탱크가 후퇴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그는 문교부 장관 백낙준(白樂濬 Paek Nak-chun)에게 “박물관 소장품을 아직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는 한반도 최남단 도시 부산으로 피난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만약 다시 한 번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면 문화재를 영영 구할 수 없을 것이란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에 백 장관은 비밀 유지를 위해 영문으로 작성된 승인 편지를 김 관장에게 써 주었다. 장관의 허락은 떨어졌지만 문제는 수송 수단이었다. 군병력과 피난민을 수송할 운송 수단도 턱없이 부족한 터에 문화재 운송을 위한 차량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길을 터 준 사람은 부산 미국공보원(US Information Service)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유진 크네즈(Eugene I. Knez 1916~2010)였다. 인류학자였던 그는 당시 미국대사였던 존 무초(John J. Muccio 1900~1989)의 승인을 받아야 했으나, 사안의 긴박성을 감안해 비밀리에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했다. 군수품을 실어 나른 미군의 화물 기차가 대개 빈 채로 부산에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았던 크네즈는 담당 미군 장교를 설득해 기차 편을 확보했고, 미군 수송부에서는 서울역까지 수송 트럭을 마련해 주었다. 12월 6일 김재원 관장은 백낙준 장관에게 출발을 보고하고, 몇몇 박물관 간부들과 그의 식구 등 일행 16명이 함께 기차에 올랐다. 이들은 비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정차한 역에서 몇 시간씩 쉬기도 하면서 지금이면 2시간 반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의 부산을 4일이나 걸려 도착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월 4일, 서울은 다시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서울이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재수복된 것은 그로부터 2달이 지난 후였다.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던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문화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쟁이 더 확산되면 부산에 있던 문화재를 다시 국외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해 미국 국무부의 의중을 타진했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에서는 미국이 한국 문화재를 약탈했다는 악의적 선전에 휘말릴 것을 염려해 일본으로 옮길 것을 추천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다행스럽게도 1951년 전세가 한국과 유엔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그런 논의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 하나가 더 있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국방부 김일환(金一煥) 대령에게 지시해 국립박물관 경주 분관에 있던 금관을 비롯한 주요 문화재 139점을 한국은행의 금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 금고로 보냈다는 사실이다. 이 문화재들은 1957~58년에 미국 8개 도시를 순회한 전시 때 포함되었고, 휴전 이후인 1959년에 다시 안전하게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은 김재원 관장처럼 국제적인 경험, 뛰어난 언어 능력, 빠른 판단과 사명감을 가진 리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또한 그와 함께 목숨을 걸고 문화재를 지킨 박물관 직원들, 국적을 떠나 문화재의 가치를 존중했던 조력자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57~58년 미국 8개 도시에서 열렸던 최초의 한국 문화재 해외 순회전 의 도록. 이 전시는 한국이 전쟁의 피해를 딛고 부흥하고 있음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도록에 실린 사진은 보물 제339호인 서봉총 금관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 흙. 145 × 57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6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조성된 투르판 지역 최대 석굴사원인 베제클리크 제15굴에서 출토한 서원화 중 하나이다. 석가모니의 전생 모습이며 양손에 푸른색 꽃을 들고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의 가치 한편 임시 수도 부산에 있던 김재원은 서울에 여전히 남아 있던 세계적 문화재 때문에 애를 태워야 했다. 그것은 중앙아시아의 벽화들(Murals from Central Asia) 60여 점이었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이 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한 이 벽화들은 토벽 위에 그린 것으로 너무 무겁고 두꺼워 부산으로 가져갈 수 없었다. 수송이 어려운 벽화는 전시에 훼손되기 쉬운 작품이다. 일례로 독일 베를린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었던 또 다른 중앙아시아 벽화들은 전시 효과를 높이기 위해 진열실에 벽을 만들고 그 속에 끼워 전시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다른 진열품들처럼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없어 30%가량이 파손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때 박물관의 벽화 책임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 작품을 구하기 위해 나선 김재원 관장과 박물관 직원 몇 명은 1951년 4월과 5월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북한군의 춘계 대공세로 대포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이 벽화들을 포장해 부산으로 옮겼다. 이때 포장과 서울역까지의 수송을 도운 인물은 유진 크네즈의 부탁을 받은 먼스키(Charles R. Munske) 대령이었다. 이로써 전쟁이란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던 우리 문화재 총 1만 8,883점이 430개의 상자에 실려 안전하게 지켜질 수 있었다. 온 국민이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혼란기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은 박물관 본연의 역할인 발굴과 전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3년 휴전이 되자 정부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부산에 있던 문화재 역시 서울로 옮겨져 1955년 박물관의 새 터전이 된 덕수궁 석조전 재개관 당시 전시되었다. 나는 김재원 관장의 막내딸로 부산 피난 시절에 태어났다. 부산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지만, 2011년부터 약 5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면서 전시실을 돌아볼 때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문화재를 지켜 낸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김재원 관장처럼 국제적인 경험, 뛰어난 언어 능력, 빠른 판단과 사명감을 가진 리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또한 그와 함께 목숨을 걸고 문화재를 지킨 박물관 직원들, 국적을 떠나 문화재의 가치를 존중했던 조력자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5년, 국립박물관을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하여 개관했을 당시 전시실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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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2020 SUMMER 272

봉준호식 질문과 근심 봉준호(Bong Joon-ho 奉俊昊) 감독의 두 영화 (2013)와 >기생충(Parasite)>(2019)은 유사성을 갖고 있다. 두 영화 속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의 갈등이 있다. 또한 각각 열차라는 수평적 공간과 계단이라는 수직적 공간이 설정된다. 하지만 두 영화는 이런 설정의 경계를 너머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의 메시지를 던진다. 한국 상업 영화 중에는 참신하고 창의적인 작품도 많지만, 설정에서 시작해 설정으로 끝나버리는 영화도 적지 않다. 나는 이런 영화를 ‘콘셉트 무비’라 부르곤 한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계에는 이런 작품들이 넘쳐났는데, 이른바 ‘조폭 코미디’가 대표적인 예다. 폭력 조직 두목이 고등학교에 입학해 학창 생활을 다시 겪는다든지 검사 여주인공의 결혼 상대 가문이 폭력배 집단이라든지 하는 설정으로 대중의 흥미를 끌어 흥행에 크게 성공한 사례들이 생기자 수년간 아류작들이 쏟아졌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같은 아류작의 행진은 멈췄지만, 단지 독특한 설정만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멈추지 않고 있다. 관객의 호기심을 유발하려는 의도 자체는 당연하지만, 문제는 관객들이 익히 아는 공식을 벗어나지 않은 채 뻔한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상투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는 있어도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는 어렵다. 봉준호 감독은 이들과 다른 작업을 해왔다. 그는 언제나 흥미로운 설정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자신이 마련한 설정을 스스로 넘어서며 장르 영화의 새 영역을 개척해 왔다. 이것이 한국 영화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이다. 봉준호 (Bong Joon-ho 奉俊昊) 감독은 7번째 장편 영화 으로 제92회 미국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감독상에 이어 작품상까지 모두 4개의 오스카상을 수상하며 한국 영화 100년의 역사를 다시 썼다. 그는 이에 앞서 같은 영화로 제72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gettyimages 설정을 뒤엎는 연출 이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에 이어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최고의 영예를 차지하면서 이 영화가 설정한 수직적 공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덩달아 기차를 배경으로 한 의 수평적 공간도 다시 화제에 올랐다. 에서는 가로축을 바탕 삼아 열차 꼬리칸의 하층민들이 앞쪽 칸으로 진격해 나간다. 에서는 세로축을 기둥 삼아 반지하에 살던 가난한 이들이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오르락내리락한다. 이런 설정만 보면 자칫 두 영화의 공간적 맥락을 1:1 대응으로 파악하기 쉽다. 즉 에서 꼬리칸은 피지배층을, 머리칸은 지배층을 의미하는 것으로, 에서는 지하를 가난으로, 지상을 부유함으로만 이해하고 넘어가기 십상이다.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이는 봉준호의 영화를 가장 재미없게 보는 방식일 수 있다. 관객 개개인이 간직한 천차만별의 기억과 영화 속 이미지가 만나면서 불러일으킬 드넓은 상상의 가능성을 배제하게 되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영화 속에는 하나의 정답이 아닌 수많은 질문과 제안이 넘친다. 따라서 그의 영화를 풍성하게 즐기고 싶다면 눈앞에 제시된 설정에 얽매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상 기후로 인류가 멸망한 뒤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한 대의 열차에 탑승한다. 이들은 계급에 따라 꼬리칸부터 머리칸까지 철저히 나뉜다. 인간 이하의 처우에 고통받던 꼬리칸 사람들은 반란을 도모하고, 머리칸을 향해 나아간다. 의 인물들은 이 같은 설정에 따라 ‘앞’으로 한 칸씩 이동한다. 이뿐이라면 이 영화 역시 여느 ‘콘셉트 무비’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봉 감독은 자신의 설정을 스스로 배반하며 ‘옆’으로 방향을 튼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 일행이 앞쪽 칸의 문을 하나씩 열며 목표를 수행해 나가는 동안, 이 문들을 열어 주는 기술자 남궁민수{Namgoong Min-soo 南宫民秀[송강호(Song Kang-ho 宋康昊) 분]}의 목표는 옆쪽 문이었음이 드러난다. 그 뜻을 파악하려면 봉 감독의 ‘설정 속 설정’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가난한 가장 기택(Ki-taek 基澤)이 자신의 반지하 집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는 의 초반장면. 1980년대 한국 중산층 주택의 일반적 형태였던 2층 단독주택의 반지하 공간은 애초 전시 피난 공간으로 의무화되어 주로 보일러실이나 창고로 쓰였으나,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개조 후 임대가 허용되었다. 이후 많은 연립주택에 반지하 주거 공간이 생겨 주로 저소득 도시 주민들이 살고 있다. ⓒ CJ ENM 영화 속 박 사장의 대저택은 빈부의 격차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4분기 가계동향조사(소득부문) 결과’에 의하면 국내 가구 월평균 소득이 하위 20%는 약 132만 원이고 상위 20%는 약 945만 원으로 두 계층 간 소득 격차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 CJ ENM 기우(基宇)와 기정(基婷) 남매가 반지하 집 화장실에서 와이파이 신호를 찾기 위해 애쓰는 장면. 매설된 정화조보다 화장실이 낮으면 오물이 역류할 수 있기때문에 반지하 집은 대개 화장실을 높이 올려 짓는다. © CJ ENM 바깥세상의 변화 기차는 근대의 상징이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이것이 옷감을 대량생산하는 기계로, 대중교통 수단으로 개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모이게 됐다.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던 인류에게는 다수의 사람들을 통제할 시간 약속이 필요해졌다. 공장은 출퇴근과 교대 시간을 정해야 했고, 기차는 약속된 시간에 도착해야 했다. 사람 100명이 하던 일을 기계 1대가 해내면서 기계의 가치가 우대받았고, 사람은 기계를 닦고 조이고 기름 쳐야 했다. 각각의 부속품이 정확히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야 유지되는 설국열차의 엔진과 그 지배층처럼 20세기의 인류는 기계를 숭배했다. 그리고 기계를 소유하는 소수의 엘리트가 세상을 지배했다. 찰리 채플린이 (1936)를 통해 지적했듯 다수의 노동자들은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이 되었다. 에서는 고장난 부속품을 대신해 어린아이를 엔진 속에 끼워 넣는 것으로 계층의 구별을 표현했다. 지배층인 메이슨(틸다 스윈튼 분)은 반항하는 피지배층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설교한다. 또 열차의 지배자 윌포드(에드 해리스 분)는 커티스를 만나 “모두에겐 각자의 위치가 정해져 있다”고 강조한다. 지배층은 열차의 기계 장치뿐 아니라 그 안의 사람과 동물들의 개체 수를 통제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인구 조절 작업까지 진행해 왔다. 이는 기계와 생산 자본이 지배해 온 근대의 비인간적 논리였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 들어 세상은 바뀌기 시작했다.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이념의 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또한 IT 혁명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데이터들이 공간 제약 없이 이동했고, 돈과 권력도 이를 뒤따랐다. 금융 자본과 디지털 권력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기계의 시대는 인터넷이 대표하는 정보의 시대로 바뀌었다. 이제 피지배층이 투쟁할 상대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공간으로 숨어든 것처럼 보였다. 열차 속 하층민들이 20세기 방식의 투쟁을 계속하는 동안 바깥세상이 변한 것이다. 이를 상징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앞쪽 문만을 바라보는 커티스와 달리 옆쪽 창에 자주 눈길을 주고 있던 남궁민수의 눈에 유유히 떠도는 눈송이 하나가 보인다. 조그만 눈송이는 대기의 온도와 습도, 공기 흐름과 주변 생명체들의 호흡에 이르기까지 복잡계 환경에 영향 받으며 시시각각 위치를 바꾼다. 직진으로 일관하던 영화의 초반 설정과는 다른 움직임이다. ‘각자의 위치가 정해져 있던’ 근대로부터 탈출해 나온 디지털 신호처럼 말이다. 앞을 바라보며 수평 이동하는 영화의 설정에 스스로 의문을 던지며 이를 넘어 옆, 즉 바깥세상의 변화를 보자는 봉 감독의 제안이다. 봉준호의 영화 속에는 하나의 정답이 아닌 수많은 질문과 제안이 넘친다. 따라서 그의 영화를 풍성하게 즐기고 싶다면 눈앞에 제시된 설정에 얽매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장 마르크 로셰트와 자크 로브의 동명의 프랑스 만화를 영화화한 봉준호 감독의 2013년 SF 액션 스릴러 의 한 장면. 기상 이변으로 빙하기가 찾아온 지구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태운 기차가 끝없는 궤도를 달리고 있다. ⓒ CJ ENM 눈에 보이지 않는 힘 의 수직적 공간 역시 설정에 불과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계단’도 지난 세기 할리우드의 장르 관습과 이념 시대의 사고방식, 그리고 급변한 세계 속 우리의 처지를 직시하자고 제안하기 위해 감독이 던진 미끼였을 뿐이다. ‘가난한 가족이 부잣집에서 일하며 벌어지는 일’이라는 단순한 광고 문구에서 관객은 당연히 부자와 가난한 자의 투쟁을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영화의 중반을 지나고 보니 그 중심에는 가난한 가족과 더 가난한 가족의 아귀다툼이 등장했다. 오히려 영화 속 부자 가족은 아무것도 모른다. 심지어 언론이나 경찰도 사태의 실체를 알아내지 못한다. 사회 지배층이 ‘성찰 없는 성실함’으로 제 역할에만 몰두해 있는 동안 세상은 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시대, 즉 근대 이전으로 돌아간 것인가? 영화가 일자리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는 동안 관객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해고된 자와 해고를 면한 자, 영세 자영업자와 아르바이트생 사이의 원치 않는 갈등을 떠올리게 된다. 줄곧 앞만 보고 달리던 속의 하층 인물들이 어느 순간 다른 방향을 돌아봐야 했던 결말처럼 위쪽을 향하려던 의 가난한 가족들도 끝내 아래쪽으로 떨어지다가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기택(Ki-taek 基澤) 가족이 자신들보다 더 비참한 가족을 만나 처참한 싸움을 벌인 뒤 탈출하는 대목에서 폭우 속 계단을 내려가던 아들 기우(Ki-woo 基宇)는 문득 발길을 멈추고 골똘해진다. ‘왜 나는 나보다 더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하고만 싸우게 됐을까?’ 이렇듯 영화 속 계단들은 결국 약자들끼리 투쟁하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 질문한다. 그것은 마치 부자 가족의 박 사장이 글로벌 IT 업체를 경영하며 개발하는 가상현실 기기처럼 사이버 공간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알기 어려운 힘일 수도 있다. 20세기를 반성한 에 비해 21세기를 바라본 이 한 발 더 비관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듯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위기, 일자리의 급격한 지각 변동, 반생태적 자연 개발과 그로 인한 괴물의 등장 – 봉준호 감독의 지속적인 관심사들이다. 인터넷을 통해 온 지구가 하나로 연결돼 있으면서도 국가 단위에 갇힌 의사결정 구조는 인류가 공통적으로 당면한 이런 문제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이 현실 세계에 대한 최첨단 질문이자 인류애 가득한 근심으로 이어지는 이유일 것이다. 혁명을 꿈꾸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에게 꼬리칸의 지도자 자리를 물려주려는 길리엄(존 허트)이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 CJ ENM 머리칸 사람들은 꼬리칸 사람들의 희생을 동력으로 삼아 풍요로운 일상을 영위한다. ©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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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2020 SPRING 194

고통을 말하는 두 가지 방식 『소년이 온다』(2014)는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바 있는 한강(Han Kang 韓江)이 1980년 5월 광주의 민주화 운동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 두 편이 2019년 말 한국과 폴란드에서 비슷한 시기에 무대에 올랐다. 역사의 격변기에 참혹한 경험을 한 두 나라의 연극인들이 이 작품을 해석하고 무대에 올리고 교류하며 올 5월과 11월에는 양국에서 나란히 번갈아 공연할 예정이다. 2019년 남산예술센터 시즌 프로그램의 마지막 작품인 (Human Fuga)는 1980년 5월 광주 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벌어졌던 투쟁과 학살의 참혹한 사건을 다뤘다. 남산예술센터와 공연 창작 집단 ‘뛰다’(Performance Group TUIDA)가 공동 제작한 이 작품은 한강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가 원작인데, 원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원작이 있었기 때문에 연극적 접근이 쉽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의 참사를 상징하는 단어가 된 ‘광주’ 문제가 아직 일단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제작진은 어떤 길로 가야 할지 고민이 깊었다. 2019년 11월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상연된 연극 의 한 장면. 한강의 원작 소설 의 서사를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배우들의 몸짓과 음악, 무대 장치를 통해 인물들의 내면 세계를 표현했다. 이승희 촬영, 남산예술센터 제공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국내에서는 일반적으로 한 작품을 준비하는 데 대략 3개월 정도 시간이 걸린다. 역시 우리 시대의 주요 화두를 다루었던 남산예술센터의 2019년도 두 작품 —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건을 다룬 <7번 국도>와 세월호 참사 5주기를 기념하는 — 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무대에 올리기까지 10개월 이상 소요된 이 작품은 매우 이례적이다. 의 제작진과 배우들은 2019년 11월 공연을 위해 1월부터 광범위한 리서치와 토론, 연습을 계속했다. 우리는 소설의 서사를 그대로 재현한다면 이 사건과 원작의 의미를 퇴색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써 설명하거나 연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배우들은 절제된 몸짓을 통해, 때로는 무용수의 춤사위 같은 격정적인 몸부림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와 고통 받고 있는 내면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고통을 대사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의 몸짓을 통해 관객들이 느끼도록 했다. 또한 하나의 주제를 자유롭게 모방하는 음악 형식인 푸가처럼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생겨난 고통이 여러 사람들의 삶을 통해 반복되면서 변주되도록 극을 구성했다. 이런 연유로 서사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어 관객들은 각 등장인물의 기억과 증언을 그때그때 단편적으로 따라가야 하지만, 각 인물들의 감정은 더 직접적으로 체감될 수 있었다. 이런 노력이 빛을 본 덕분에 는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광주 문제를 신체를 통해 연극, 춤, 설치예술을 포괄하면서 혼신의 힘으로 창작한 품격 있는 공연”이라는 평을 받으며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 선정됐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이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광주를 오갈 적에 저 멀리 타국에서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광주를 수도 없이 들여다보았던 다른 팀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국내 한 일간지를 통해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하는 다른 공연 소식을 듣게 됐다. 이 소설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은 폴란드 연출가 마르친 비에슈호프스키(Marcin Wierzchowski)가 연극으로 각색할 생각을 하고 5․18기념재단을 통해 한강 작가와 접촉한 것이었다. 같은 소설을 토대로 삼은 두 편의 연극이 한국과 폴란드에서 비슷한 시기에 상연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우리는 두 공연을 양국에서 함께 선보이면 어떨까 생각했다. 이메일과 국제전화를 통해 공연 교류 프로젝트를 준비하다가 서로의 공연을 직접 보기로 했다. 광주의 아픔이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는 한국 사회와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의 아픔을 가진 폴란드 사회가 공유하는 정서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원작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제작 의도나 연출 방향까지 같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2019년 10월에는 한국 제작진이 폴란드를, 11월에는 폴란드 제작진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배요섭이 연출한 (왼쪽)와 마르친 비에슈호프스키가 연출한 의 포스터. 의 포스터는 광주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을 담았고, 의 포스터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을 촬영한 사진 기자 김녕만(Kim Nyung-man 金寧万)의 작품이 등장한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2019년 10월 폴란드 크라쿠프의 스타리국립극장에서 막을 올린 1부에서 전남도청 앞 광장에 시민군 시신을 안치했던 5.18 당시 상황을 재현한 장면이다. 이 연극은 와 달리 원작의 서사를 따라 장면을 구성했다. Magda Hueckel 촬영, 스타리국립극장 제공 하나의 원작, 전혀 다른 연출 국내 관계자들이 폴란드 크라쿠프(Krakow)에 방문해 관람한 은 장장 5시간 동안 진행되는 긴 공연이었다. 1부는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구성했고, 2부에서는 폴란드의 현실을 반영한 두 가족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이 공연은 1781년 설립되어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인 스타리국립극장(National Stary Theater)의 여덟 군데 공간을 이동하며 진행됐다. 소설의 각 장면이 공간을 따라가며 아주 세밀하게 그려졌다. 마르친 비에슈호프스키는 이 소설을 통해 광주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폴란드 관객들에게 국가적 폭력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고 한다. 광주의 비극이 한국에만, 1980년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시공간을 뛰어넘어 폴란드는 물론 언제 어디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은 와 달리 원작의 서사를 세밀히 전달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2019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비에슈호프스키는 를 관람한 후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말하며 연출가 배요섭(Bae Yo-sup 裵曜燮)을 끌어안았다. 이어 관객과의 대화에 패널로 참석한 그는 이 소설을 읽게 된 계기에 대해 “내 쇼핑 메이트인 아마존이 나를 그 소설과 연결해 주었다”며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연출한 에 대해서도 짧게 설명해 주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한국 관객들은 양국의 상이한 연출 경향에 매우 흥미로워했다. 최근 국내 연극계에서는 사건의 재현을 지양하는 대신 감각을 강조하는 특성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인물들의 내면 세계를 섬세하게 해부했던 우리와 달리 폴란드에서는 광주를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보고 그 잔인함을 어떻게 하면 더 세밀하게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의 2부에서는 정치 권력에 의해 벌어진 대량 학살로 인해 두려움에 떠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Magda Hueckel 촬영, 스타리국립극장 제공 연극을 통해 ‘광주’와 대면하다 양측의 프로덕션은 비슷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폴란드에서도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와 유사한 사건의 영상, 영화들을 보면서 작업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두 편의 연극이 사뭇 달랐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현재 두 나라의 연극계가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국내 연극계에서는 사건의 재현을 지양하는 대신 감각을 강조하는 특성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인물들의 내면 세계를 섬세하게 해부했던 우리와 달리 폴란드에서는 광주를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보고 그 잔인함을 어떻게 하면 더 세밀하게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2019년 11월 6일부터 17일까지 상연되었던 는 전 회차가 매진되었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정말 값졌던 것은 “이 연극을 보고 광주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됐다”고 털어놓는 관객들의 소감과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 해 주어서 기쁘다”고 전한 5.18 생존자들의 말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이 벌어졌던 1980년 5월 이후 40년 세월이 지났다. 2019년 말 구(舊) 광주교도소 일원에서 신원 불명의 유골들이 발견되었을 때 한 실종자 가족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아들 뼈가 나오면 난 춤을 추죠. 진짜로. 내 원한을 푸니까.”라고 말했다. 40년간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은 그때 그 시간 속에 머물러 있어야 했지만,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망각과 오도로 광주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광주의 아픔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아직 밝히지 못한 진실이 남아 있다. 202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서울 남산예술센터와 광주 빛고을시민문화관에서 와 이 차례로 관객과 만난다. 그리고 올해 11월에는 가 폴란드를 찾을 것이다. 한 권의 소설에서 시작된 두 프로덕션의 만남이 두 나라의 관객들을 통해 더 빛나는 가치를 얻으며 더 멀리 퍼져나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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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2019 WINTER 336

괴물, 사이보그, 유토피아의 희망과 절망 사이 이불(Lee Bul 李昢)은 예리한 사회 비판과 역사 의식, 유토피아에 대한 인본주의적 탐구 속에 자신의 개인적 서사를 투영하는 작업을 해 왔다. 얼핏 괴기하고 섬뜩하지만 동시에 장엄한 느낌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그의 작품들은 이미 오래전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올해 5월 호암재단으로부터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한 그의 최근 행보와 작품 세계를 들여다본다. “취약할 의향 – 메탈라이즈드 벌룬 V3” 2015-2019. 나일론 타프타 천, 은박 폴리에스터, 송풍기, 전선, 폴리카보네이트 미러. 230 x 1000 x 230 cm. ‘인카운터스’ 섹터, 2019 홍콩 아트바젤. 사진 제공: 작가, 리만 머핀 갤러리, PKM 갤러리,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런던의 헤이워드 갤러리는 개관 50주년을 맞아 작년 6월부터 8월까지 특별 기획전으로 "이불: 크래싱(Lee Bul: Crashing)을 개최했다. 한국의 대표적 현대 작가 이불의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30년 예술 활동을 100여 점의 작품을 통해 돌아본 이 대규모 회고전은 이어서 베를린의 마틴-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으로 옮겨 "이불: 크래시(Lee Bul: Crash)라는 제목으로 작년 9월부터 올 1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불은 올해도 활발한 행보를 이어나갔다. 3월에는 아시아 최대의 미술 축제인 아트바젤 홍콩의 요청으로 홍콩컨벤션센터 1층 전시장 입구에 은빛 비행선을 띄웠다. 이 설치 작품은 헤이워드 갤러리와 마틴-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 전시에서도 선보인 바 있는 "취약할 의향 - 메탈라이즈드 벌룬(Willing To Be Vulnerable - Metalized Balloon 2015~2016)으로 관람객들이 작품을 배경으로 앞다퉈 사진을 찍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 2019년 아트바젤 홍콩의 테마 ‘Still We Rise’는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들어 그의 가장 뜻깊은 활동은 역시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 참여일 것이다. 1999년 한국관 대표 작가로 참여한 그는 당시 특별상을 받았는데, 이번 전시로 그는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두 번 초대된 최초의 한국 작가가 되었다. 이처럼 이불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가 된 이유는 아마도 그의 도발적인 문제 의식과 이를 표현하는 정력적인 창작 활동에 대한 놀라움과 공감 때문일 것이다. “히드라 II (모뉴먼트)” 1999. 비닐에 사진 프린트, 에어 펌프. 1200 × 700 × 600 cm. "핫 에어전, 일본 시즈오카 그란십센터. 야스노리 타니오카 촬영, 난조 앤 어소시에이츠 제공 전위와 파격 내가 이불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미술관이 아니라 1990년대 말 발행된 한 패션 잡지에서였다. 두 면에 걸쳐 커다랗게 실린 사진 속 여자는 보디수트와 망사 스타킹, 비단 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구슬 장식을 주렁주렁 매단 채 가죽 부츠를 신고 서 있었다. 압권은 보디수트에 붙어 있는 3개의 아기 인형 머리였다. 참으로 기괴하면서도 관능적이고, 무시무시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웠다. 당시에는 그저 전위적인 패션 화보인 줄로 알았지만, 몇 년 후에야 그것이 이불의 초기 대표작인 풍선 설치 작품 "히드라: 모뉴먼트"(Hydra: Monument, 1998)에 프린트하기 위해 찍은 작가 자신의 사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히드라’는 그리스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가 물리친 9개의 머리를 가진 물뱀인데,머리 하나를 자르면 두 개가 더 생기는 재생력을 가진 공포스러운 괴물이다. 이불은 그런 히드라를 동서양 잡종 문화와 오리엔탈리즘 판타지로 뒤덮고는, 마냥 순종적일 것이라는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강렬한 이미지로 반격했다. "히드라: 모뉴먼트"와 함께 내 머리에 이불이라는 이름을 깊게 각인시킨 작품은 구슬꽃으로 곱게 치장한 날생선들이 천천히 썩어가는 "화엄"(Majestic Splendor, 1991)이다. "화엄"은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 설치되었다가 지독한 냄새로 인해 위층에서 열리는 미국 유명 작가의 전시 오프닝 직전 철거되면서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격년으로 수여하는 휴고 보스상의 1998년도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이불의 세계적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그 후 20년간 전시되지 않다가 2016년 서울 아트선재센터의 "커넥트 1: 스틸 액츠(Connect 1: Still Acts) 전시를 위해 다시 제작됐기 때문에 실물을 보고 싶었던 내 열망은 그때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내가 "화엄"에 큰 흥미를 느낀 이유는 그것이 동서양 미술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포스트모던한 도발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휘황찬란한 구슬꽃에 둘러싸여 부패해 가는 생선은 17세기 유럽의 바니타스 정물화와 닮아 있으며, 일본 불화 구상도(九相圖)와도 일맥상통한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아름다운 사치품들이 해골, 촛불, 모래시계 등과 함께 놓여 있는 그림으로 죽음 앞에 모든 것이 덧없음을 상징한다. 구상도 또한 아름다운 여인의 시신이 부패해 가는 과정을 아홉 단계로 그려내 만물이 무상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듯 낯선 시도가 아니었음에도 "화엄"이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것은 ‘신전’이 된 미술관에 생명의 부패 과정과 그에 따른 지독한 냄새를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진정한 힘은 생선이 부패하면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할 때이고, 이는 후각이 배제되었던 시각예술의 관습적 위계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이 냄새 때문에 "화엄"을 철거한 것은 역설적으로 이 작품의 의미를 방증한 셈이다. 이불은 자신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구슬을 꿰었던 작업에서 생선의 구슬 장식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군사독재 시절 반정부 운동가로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어려운 생활을 했고, 구슬 가방 만들기 같은 가내노동으로 생계를 꾸렸다. 왼쪽부터 : "사이보그 W1". (왼쪽 첫 번째) 1998. 캐스트 실리콘, 폴리우레탄 충전물, 페인트 피그먼트. 185 × 56 × 58 cm. "몬스터: 핑크". (왼쪽 두 번째) 1998. 패브릭, 섬유 충전물, 스테인리스 스틸 프레임, 아크릴 물감. 210 x 210 x 180 cm. "사이보그 W2". (가운데) 1998. 캐스트 실리콘, 폴리우레탄 충전물, 페인트 피그먼트. 185 × 74 × 58 cm. "사이보그 W4". (오른쪽 끝) 1998. 캐스트 실리콘, 폴리우레탄 충전물, 페인트 피그먼트. 188 × 60 × 50 cm. "이불"전 전시 전경, 서울 아트선재센터, 1998 이재용 촬영, 아트선재센터 제공 경계를 초월한 잡종 2000년 전후까지 이불의 작업에서는 여성이자 아시아인으로서 정체성 인식과 관습적 통념을 전복하려는 시도가 처절하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주로 신체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의 조각 연작 "몬스터"(Monster, 1998)를 보자. 인체, 문어, 말미잘, 인삼 뿌리 같은 여러 동식물이 융합된 듯한 형태와 부드러운 촉감을 가진 촉수 괴물들은 매우 육감적이면서 거부감과 매혹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본래 작가가 1990년 전후 야외 퍼포먼스에서 착용했던 괴물 의상들이 독립된 조각으로 변형, 발전된 것이다. 그는 날고기 같은 붉고 하얀 근육에 여러 개의 팔다리와 촉수가 달린 옷을 입고, 12일 동안 도쿄 거리를 활보했다. 그의 거리 퍼포먼스 "수난유감 -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낀 줄 아냐?(Sorry for suffering – You think I’m a puppy on a picnic?)는 인간과 괴물,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 등 관습적 이분법에 대한 신랄한 문제 제기였다. 그는 "몬스터" 연작과 동시에 또 다른 대안적 신체인 "사이보그"(Cyborg 1997~2011) 연작도 선보였는데, 이 작품들은 런던과 베를린 회고전에도 "몬스터" 연작과 함께 전시되었다. "사이보그" 연작은 일본 애니메이션 풍으로 가슴과 엉덩이는 두드러지고 허리는 잘록한 과장된 체형의 여성 로봇들이다. 마치 그리스 조각을 대체할 듯한 순백의 여신상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팔다리가 하나씩 결여된 불완전한 모습으로 공중에 매달려 있다. 이 연작은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페미니스트 과학 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의 유명한 에세이 「사이보그 선언문」(A Cyborg Manifesto, 1985)에서 영향을 받았다. ‘cybernetic organism’의 준말인 사이보그는 한마디로 유기체와 기계가 결합된 존재를 말한다. 해러웨이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그리는 SF 영화들과 달리 사이보그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데, 그 까닭은 사이보그를 통해 “그간의 성별·인종 등의 차별적 경계와 구분을 초월하여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키고 새로운 정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사이보그적 연립-친화로 일상생활의 경계를 재구축하는 것이 향후 페미니즘 정치의 나아갈 길이라고 말하며, “나는 여신보다 차라리 사이보그가 되겠다”(I would rather be a cyborg than a goddess.)라는 유명한 말로 에세이의 끝을 맺는다. 이불이 촉수 달린 괴물 의상을 입고 거리를 활보한 것은 ‘경계를 초월하는 잡종’으로서 넓은 의미에서 사이보그적 정체성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몬스터"와 "사이보그" 연작의 융합이자 진화라고 할 수 있는 "아나그램(Anagram, 1999~2006) 연작은 곤충, 식물, 기계를 결합시킴으로써 더욱 확장된 정체성을 지니며, 이는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과 아주 잘 어울린다. 이불의 작업 전반에는 아름다움과 공포, 연약함과 힘의 독특한 병치가 나타난다. 그것은 패배주의와는 다른, 지속적인 희망과 절망의 공존을 상징한다. 이불은 역사적, 사회적 현상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고유한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으며, 동시대 미술계를 선도하는 예술가로 주목받고 있다. 리 판 촬영, 이불 스튜디오 제공(Photo by Le Pan, Courtesy of Studio Lee Bul) "마제스틱 스플랜더" (부분). 1997. 생선, 장식 구슬, 과망가니즈산칼륨, 마일러 백. 로버트 푸글리시 촬영, 이불 스튜디오 제공 역사와 시대에 대한 성찰 사이보그를 통해 신체와 사회적 억압의 상관 관계를 탐색했던 이불은 "나의 거대 서사"(Mon Grand Récit, 2005~) 연작에 이르러 또 다른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 연작은 유토피아를 지향한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대표적 건축물과 발명품을 모티프로 하는데, 그는 여기에 폐허 같은 풍경을 접목시킴으로써 실패한 유토피아의 꿈을 다룬다. 한때 기술 진보와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었으나 1937년 폭발로 대참사를 일으킨 힌덴부르크 비행선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이 대표적인 예다. 이 작품들은 2014년에 열렸던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이불" 전에 등장했다. "나의 거대 서사" 연작에서 이불은 격변을 겪어온 한국 사회의 풍경에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녹여낸다. 그는 모더니즘 시대의 ‘거대 서사’에 회의와 불신을 표명했던 철학자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의 말에 주목하며 역사와 시대를 성찰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소개글에 의하면 “작가는 거대 서사의 불가능성을 인식, 이에 파편화되고 완전하지 않으며 미해결된 채 지속적으로 부유하는 ‘작은’ 이야기들”을 다루고자 했으며, “역사에서 드러난 부패의 흔적, 모더니즘 이상주의의 실패,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들의 의식과 일상에 등장하는 모던 망령들에 대해 관객들이 새삼 숙고하게끔” 유도했다.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려 인간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고 유토피아를 이루려 하는 희망과 그 좌절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사이보그" 연작으로 대변되는 2000년대 초까지의 작품들과 그 이후의 "나의 거대 서사" 연작은 외관상 달라 보이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연결된다. 지난해 런던과 베를린의 회고전을 기획한 스테파니 로젠탈(Stephanie Rosenthal)이 말한 것처럼 이불의 작업 전반에는 “아름다움과 공포, 연약함과 힘의 독특한 병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패배주의와는 다른, 지속적인 희망과 절망의 공존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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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2019 AUTUMN 242

봉준호, 하나의 장르가 된 이름 한국 영화가 드디어 칸 국제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 시대 자본주의의 풍경을 치밀하고 냉정하게 그려내 국제 사회의 보편적 관심을 이끌어낸 봉준호(Bong Joon-ho 奉俊昊) 감독의 수상작 과 그의 영화 세계를 들여다본다. 봉준호 감독은 7번째 장편 영화 으로 2019년 제72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한국 영화를 기념이라도 하듯 봉준호 감독의 이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 영화에서 송강호(Song Kang-ho 宋康昊)가 맡은 역할 기택(Ki-taek 基澤)의 이 대사는 이 영화 자체에도 적용된다. 은 칸에서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이미 영화제 기간 중 192개국에 판매되며 한국 영화 역사상 최다국가 판매 기록을 세웠다. 특히 가장 먼저 이 영화를 개봉한 프랑스에서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과 를 각각 2위와 3위로 밀어내고 프랑스 전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더욱 흥미로웠던 점은 프랑스에서 2종으로 제작된 개봉 포스터 중 박 사장이 부인에게 귓속말하는 장면으로 만든 포스터였다. 프랑스 관객들에게 이선균(Lee Sun-kyun 李善均)과 조여정(Cho Yeo-jeong 曺如晶)은 낯선 배우이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영화 개봉 포스터에 큰 서체의 카피를 쓰는 일이 드물다는 점을 감안하면, 귓속말 장면에 마치 말풍선을 넣은 것처럼 “너 스포일러 하면 죽여 버린다!(Si tu me spoiles la fin. Je te tue!)”라는 카피를 큼지막하게 넣은 것은 무척 위트 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영화제 뉴스를 통해 이미 많은 프랑스 관객들이 은 스포일러를 조심해야 하는 영화라는 것을 알고 있음을 전제한 구상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꿈을 이루다 칸 국제영화제는 오랜 시간 한국 영화인들에게 꿈의 무대였다. 이두용(Lee Doo-yong 李斗鏞) 감독의 (1983)가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최초로 초청된 이후 임권택(Im Kwon-taek 林權澤) 감독이 (2000)으로 한국 영화 감독 최초로 경쟁 부문에 초청을 받았다. ‘국민 감독’으로 불렸던 임 감독은 (2002)으로 또 한 번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한국 영화를 해외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그의 뒤를 이어 박찬욱(Park Chan-wook 朴贊郁) 감독이 (2003)로 심사위원 대상을, 이창동(Lee Chang-dong 李滄東) 감독이 (2010)로 각본상을 수상하면서 한국 영화는 칸을 통해 비로소‘글로벌’한 외투를 입게 됐다. 물론 김기영(Kim Ki-young 金綺泳) 감독의 (1960)를 리메이크한 (2010)와 (2012)으로 연달아 경쟁 부문에 초청됐던 임상수(Im Sang-soo 林常樹) 감독도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이 경쟁 부문에 초청된 이래 올해 의 황금종려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한국 영화계의 오랜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1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영화는 소재와 배경, 그리고 기법에서 세대를 넘어 이전보다 더욱 풍요로워졌다. 수상 소감으로 “중학생 시절부터 영화감독을 꿈꾸었다”고 밝힌 봉준호 감독은 대학 시절 영화 동아리에서 단편 (1994)을 만들었다. 바로 그 단편을 포트폴리오 삼아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로 들어간 그는 단편 (1994)로 밴쿠버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며 주목을 받았고, (1997) 연출부와 (1999)의 각본 작업을 거치며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한국 영화 100년의 역사 안에서 최근 20여 년의 시간 동안 그가 보여 준 변화와 진화의 궤적은 영화를 향한 대중의 기대와 욕망의 지도와도 일치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봉준호는 한국 영화계의 가장 뜨거운 이름 중 하나다. 새로운 국면 2000년 개봉된 봉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시작하는 한국 영화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영화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뒤섞여, 이전 한국 영화들로부터 멀리 나아가는 돌발적인 에너지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이라는 견고한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종횡무진 누비는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줬다. 당시 그는 “한국 영화 감독들 중에서 김기영을 가장 좋아한다”며 그의 영화를 “비디오테이프로 무려 10개 이상 가지고 있다”고 했다. 또한 어린 시절에는 극장보다는 주로 집에서 TV 영화 프로그램이나 AFKN을 통해 영화를 접했다고 했으며, ‘연출’의 개념을 일본 애니메이션 을 통해 익혔다고도 했다. 특히 시리즈를 쭉 이어 놓으면 총 14시간 분량이 되는 이 만화 영화를 “영화아카데미 시절 우울할 때마다 하루 종일 봤다”고도 했다. 당시 한국 영화의 교란자 혹은 소수자처럼 보였던 그는 결국 한국 영화의 중심이 됐다. 대학가에서 학생 운동의 분위기가 점차 사그라들던 시점에 학창 시절을 보내고, 만화나 B급 영화 같은 대중문화를 극장이 아닌 대여점과 TV를 통해 잡식성으로 흡수한 세대가 영화계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즉 봉준호는 이전 한국 영화 감독들과는 감성의 결 자체가 달랐다. 가 개봉된 2000년에 를 만들었던 박찬욱, 의 김지운(Kim Jee-woon 金知雲), 의 류승완(Ryoo Seung-wan 柳昇完)과 더불어 봉준호는 이른바 ‘영화광 감독’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이후 그는 (2006)로 제59회 칸 국제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 받았고, 미셸 공드리, 레오스 카락스와 함께 만든 옴니버스 영화 (2008)와 (2009)로 제61회, 제62회 두 해에 걸쳐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연속 초청, 그리고 넷플릭스 제작 영화 (2017)로 제70회 경쟁 부문에 진출한 뒤 올해 다섯 번째 칸 방문에서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연쇄 살인 실화를 다룬 (2003)은 보고타 영화제 등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주최한 한국 영화 특별전에 초대되었다. (2009)는 살인 용의자로 몰린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제62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었다. 누적 관객수 1,300만 명을 넘은 (2006)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중 흥행 성적이 가장 높은 작품이며 제59회 칸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 받았다. (2019)은 세심한 디테일 묘사, 이질적 요소들의 충돌, 자본주의의 불쾌한 풍경 등 봉준호 영화의 특징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디테일과 엇박자 ‘봉테일’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세심한 디테일 묘사, 프랑스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가 ‘삑사리의 미학(L'art du piksari)’으로 이름 지은 ‘엇박자 연출’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두 가지 특징으로 굳어졌다. 감독으로서 그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두 번째 장편영화 (2003)에서 시대 재현을 위해 그가 미술감독에게 제안한 아이디어들은 프로덕션 디자인의 정석을 넘어선 수준이었다. 옛날 담배와 자동차 등은 그리 특별한 요구가 아니었을 수도 있으나, 방범초소 벽에 그려진 야한 낙서나 무당집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과자 박스는 단순한 시대 재현을 넘어 이야기 전개에 탄력을 부여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물론 그 모든 효과는 영화가 그리는 시대의 억압적이고 우중충한 분위기를 살리느라 원색을 통제해서 사용한 결과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원색은 선풍기의 파란 날개, 시체의 빨간 팬티뿐이다. 지하 취조실에 있는 거대한 보일러 역시 미술팀이 새로이 조립한 것이다. 봉준호의 디테일은 쉽게 알아채기 힘들기 때문에 세련되고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가 하면 에서 현장 검증이 이뤄지는 논두렁으로 수사반장이 미끄러져 굴러 떨어지고, (2006)의 괴물 또한 등장과 동시에 사람들을 쫓다가 발이 꼬여 계단에서 미끄러지기도 한다. 그러한 ‘삑사리’는 결국 이질적인 요소들의 충돌을 낳으며 그의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특유의 매력이 된다. 더 나아가 칸 국제영화제 공개 당시 “봉준호 자체가 장르”(The giddy, brilliant, and totally unclassifiable “Parasite” proves that Bong Joon-ho has become a genre unto himself.)라는 미디어 전문 온라인 매체 「인디와이어(IndieWire)」의 평가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특유의 장르적 여정을 보여주는 은 완벽하지 않은 세상을 담아내기 위해 완벽주의자가 된 감독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동시대에 대한 천착 봉준호 영화의 또 다른 주요한 특징이라면 에서 확연히 드러나듯 가족애와 계급 구조 등 한국적 현실에 대한 치밀한 천착이다. 의 아파트, 의 경기 남부 연쇄살인 사건, 의 한강, 의 모성애는 결국 공간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한국 사회를 이루고 있는 상징적 요소들이다. 그는 을 두고 ‘주인공 강두(Gang-du 阿斗)의 성장 영화’라고 얘기했는데, 강두가 정신 차리는 과정은 딸의 죽음이라는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이뤄진다. 게다가 그의 영화에는 늘 공권력의 부재나 무능함이 중요한 환경으로 등장하는데, 이 영화의 경우 국가나 사회로부터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는 약자들끼리 사건을 해결한다. 이에 대해 그는 한 인터뷰에서 “약자들끼리 보호의 릴레이를 펼친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는 그런 가운데 스스로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엄마를 등장시켰다. 소녀의 죽음을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만 접근하는 경찰들의 심드렁한 태도에 맞서, 아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엄마는 홀로 치열하게 움직여야 했다. 이어 의 백수 가족 또한 한국 사회에 대한 냉정한 풍경화다. 모두가 백수인 이 가족의 장남에게 고액 과외 자리가 생기고 온 가족이 박 사장네 집으로 향한다. 그렇게 두 가족이 만나게 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공생’은 결코 꿈꿀 수 없다는 비관적 전망이 엄습한다. 인종과 국경을 넘어 ‘우리 시대 자본주의의 풍경’을 그렸다는 것이 바로 칸이 이 영화를 최고상 수상작으로 선정한 이유였다. 로 시작하여 에 이르는 20여 년 동안 봉준호가 한국 영화계에서 어떤 존재로 자리 잡아 왔는가 하는 질문의 대답은 이제 자명해 보인다. 한국 영화 100년의 역사 안에서 최근 20여 년의 시간 동안 그가 보여 준 변화와 진화의 궤적은 영화를 향한 대중의 기대와 욕망의 지도와도 일치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봉준호는 한국 영화계의 가장 뜨거운 이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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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2019 SUMMER 154

남북 공동의 인류무형유산 씨름 오랜 역사를 가진 민속 경기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씨름이 2018년 사상 처음 남북한 공동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를 계기로 향후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새로운 물꼬가 트일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5세기 전반 고구려 시대 고분 각저총 벽화의 한 부분으로 씨름꾼들의 동작이 오늘날과 같다. 씨름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박홍순 제공 씨름은 두 사람이 상대방의 허리와 다리에 감은 천인 샅바를 잡고 힘을 겨루는 운동이다. 손과 발, 허리 등 몸 전체의 근육과 기술을 고루 사용하여 상대 선수의 무릎 이상의 신체 부위를 모래판에 먼저 닿게 하는 편이 이긴다. 강한 근력과 순발력, 지구력이 요구되며 다양한 손 기술과 발 기술, 허리 기술에 강인한 정신력까지 필요하다. 한국인에게 씨름은 단순한 전통 스포츠 종목 그 이상이다. 예로부터 주요 절기에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고 구경해 온 대표적 민속 놀이였기 때문이다. 즉, 주요 명절에 사람들의 흥을 돋우던 놀이였다. 그러므로 마을에 씨름판이 열린다는 것은 본격적인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축제의 시작 씨름은 여러 측면에서 개인의 기량과 취향을 넘어서는 사회적, 집단적 의미를 지녔다. 그래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온 민족이 나라를 잃고 고통에 신음하던 시절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전국적 규모의 씨름 대회가 무려 1개월에 걸쳐 열린 적이 많았다. 식민 통치 말기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기 전까지 씨름은 민족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일조했다. 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으로 민족이 갈라진 뒤에도 양쪽에서 모두 주요 전통 유산으로 명맥이 활발히 이어졌다. 남한에서는 정부 수립 이전부터 전국체육대회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지금도 해마다 전국 및 지역 단위의 각종 씨름 대회가 열리고 있다. 예전보다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각급 학교 씨름부는 물론이고, 지역과 기업을 대표하는 씨름 팀에서 많은 선수들이 활동 중이다. 그런가 하면 북한에서도 매년 추석에 전국적인 씨름 대회가 열리고,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마을 단위의 씨름 경기가, 6월 1일 국제아동절에는 소년 씨름 경기가 여전히 국가의 주요 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씨름에 대한 가장 오래된 사료는 고구려(37 BC~AD 668) 고분인 각저총 벽화에서 볼 수 있다. 중국 지린성 지안현 옛 고구려 영토에 있는 이 고분 속 벽화의 씨름 선수들은 상대방의 샅바를 잡고 어깨를 맞댄 채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있어, 그 자세가 현재의 경기 방식과 차이가 없다. 고대 경기 방식이 원형에 가깝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씨름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5세기 초반 벽화에 상당한 비중으로 묘사돼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즐겨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 벽화는 고대 한국 사회에서 씨름이 단순한 놀이나 운동 경기 이상의 의미를 가졌음을 알려준다. 그림 왼쪽에 등장하는 나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사회에서 널리 숭배의 대상이었던 ‘성스러운 나무’다. 이 나무는 생명의 원천이자 땅과 하늘을 잇는 통로이며, 나무 위에 앉은 새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상징이다. 그런 나무 옆에서 씨름판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씨름이 스포츠를 넘어 사회적 의식이었음을 말해 준다. 게다가 나무 밑동에 기대고 있는 곰과 호랑이는 한반도 최초의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주요 상징 동물들이다. 즉 씨름이 민족의 정체성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씨름이 각저총뿐만 아니라 여러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왕족이나 귀족 등 상류층에게 인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특정 계층만이 향유하던 문화는 아니었다. 벽화에 묘사된 씨름꾼들의 모습에서 특별히 귀족의 복장이나 머리 모양을 볼 수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일반 평민들에게도 널리 사랑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대표적인 고대 역사서 『삼국사기』(1145)에 의하면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겨뤘던 신라의 왕족 김춘추와 귀족 김유신이 씨름을 하다가 옷고름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사』(1451)는 14세기 초중반에 이르러서는 왕을 위시하여 신하들이나 무사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씨름을 즐겼다고 적고 있다. 이 시기 한반도가 몽골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족 고유의 전통 놀음을 통해 내부의 정체성과 단결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단원 풍속도첩≫, 김홍도,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26.9 × 22.2 ㎝.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 중 대표적 작품으로 양반과 서민,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씨름 경기를 즐기고 있는 장면이다. 원형의 짜임새 있는 구도에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이 잘 살아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공동체의 연대 18세기 조선 시대의 화가 김홍도의 풍속화 도 신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사회 구성원들을 하나로 연결해 주던 씨름의 사회적 기능을 잘 보여 준다. 씨름을 묘사한 옛 그림 가운데 한국인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 그림은 승부의 결정적 순간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림 속 뒤편의 선수는 다리를 잡아채는 손 기술을 이용해 상대 선수를 쓰러뜨리려 하고 있다. 한편 앞쪽의 선수는 상대의 몸을 들어 올리며 허리 힘을 이용해 모래판에 메다꽂을 기세다. 주변에 빙 둘러앉아 있는 구경꾼들도 매우 흥미롭다. 신분 제도가 엄격했던 시대에 양반과 평민, 어른과 아이가 섞여 앉아 함께 경기를 즐기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2018년 11월 26일 모리셔스 포트 루이스에서 열린 제13차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 회의에서 24개 위원국의 만장일치로 씨름의 남북한 공동 등재가 결정되었다. 정식 명칭은 ‘씨름, 한국의 전통 레슬링’(Traditional Korean Wrestling, Ssirum/Ssireum)이다. 이로써 남한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20건, 북한은 3건을 보유하게 됐다. 등재 과정에서도 앞서 말한 씨름의 사회적 의미와 남북한 양쪽 지역에서 모두 1600여 년에 걸쳐 원형이 변하지 않고 활성화되어 내려오고 있는 점 등이 인정되었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남북 씨름이 연행과 전승 양상,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의미에서 공통점이 있다”(Different regions have developed variants of ssireum based on their specific backgrounds, but they all share the common social function of ssireum – enhancing community solidarity and collaboration)고 평가했다. 공동 등재 배경으로 “평화와 화해를 위한 차원”(The joint inscription marks a highly symbolic step on the road to inter-Korean reconciliation)이라고 언급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씨름이 남북한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완화시키고 평화와 화해를 위한 길을 여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남북한 주민들이 참여하는 정기적인 대회 개최에 대한 합의에 도달한다면 그야말로 평화와 화해를 향한 더 큰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9월 평양 능라도 씨름 경기장에서 열린 ‘제12회 대황소상 전국민족씨름경기’에서 우승한 조명진 선수가 황소에 올라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상징적 발걸음 남한과 북한은 서로 상이한 사회 체제를 가지고 70년에 걸쳐 정치적, 군사적 대립을 이어 왔기 때문에 사회 제도나 운영 방식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요소가 깊게 자리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씨름의 등재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막연한 유대감을 넘어, 각 구성원들이 동질감을 갖고 화해의 과정에 구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실질적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에도 탁구나 청소년 축구, 아이스하키 등의 종목에서 남북한이 단일팀을 구성하여 국제대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특정 대회를 염두에 둔 일시적 행사였고, 또한 승부 이외의 정서적 공유의 부족이라는 한계가 분명했던 일회성 이벤트의 성격이 강했다. 이미 남북한 당국과 체육 단체 사이에 향후 공동으로 개최할 수 있는 씨름 대회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만약 남북한 주민들이 참여하는 정기적인 대회 개최에 대한 합의에 도달한다면 그야말로 평화와 화해를 향한 더 큰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조속한 시일 내에 남북한 각 지역에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예선 경기가 열리고, 광역 지역 우승자끼리 전국 대회에서 최종 승부를 가리는 큰 행사가 열렸으면 한다. 나아가 씨름을 세계인이 즐기는 놀이이자 운동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의 공동 노력도 이뤄지길 기대한다. 2018년 11월 26일, 안동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된 ‘천하장사 씨름 대축제’에서 두 선수가 치열한 경기를 펼치고 있다. 이 날 모리셔스의 수도 포트루이스에서 열린 제13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는 씨름의 남북한 공동 등재가 결정되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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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2019 SPRING 323

사전에서 시대의 변화를 읽다 언어를 통해 한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사전은 문명의 변천사까지 알 수 있게 한다. 국립한글박물관이 주최한 특별 전시 은 근대 이후 140여 년에 걸친 한국어 사전 편찬의 발자취와 함께 사전이 각 시기 사회와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고 기록했는지도 살펴볼 수 있는 뜻깊은 기회였다. 국립한글박물관이 2018년 9월 20일부터 2019년 3월 3일까지 주최한 특별 전시 의 전시장에서 한 관람객이 우리말 사전에 담긴 다양한 문화를 살펴보고 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출판해 온 옥스퍼드대학교 출판부는 2010년 8월 29일 ‘종이 사전의 종말’을 고했다. 인쇄판 사전 시장이 연간 수십 퍼센트씩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나올 제3판은 인쇄판 대신 온라인으로만 낼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인쇄판 수요 감소에 따른 고육지책이었다. 1884년 제1권이 출판된 이 사전은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사전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사전일 뿐 아니라‘한글’, ‘태권도’, ‘김치’, ‘막걸리’, ‘온돌’을 비롯해 행정구역 단위인 ‘면’, 화폐 단위인 ‘원’ 등 우리말 10여 개도 표제어로 수록되어 있다. 한국은 영국보다 좀 더 이르게 종이 사전의 조종(弔鐘)을 울렸다. “국립국어원에서 1999년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의 개정판을 인터넷 사전으로만 편찬할 예정입니다.” 2006년 10월 9일 한글날을 기해 국립국어원은 향후 나올 개정판을 온라인으로만 발간하겠다고 밝혔다. 그 대신에 국립국어원은 웹 사전의 기능을 한층 강화하여 누구나 참여해 새로운 말을 올리고 설명을 달 수 있는 쌍방향 개방형 사전 ‘우리말샘(Urimalsaem)’을 운영하고 있다. 종이 사전에서 웹 사전으로의 변천은 당연히 과학 기술의 발달과 궤를 같이해 왔다. 컴퓨터와 휴대폰이 일상 용품이 된 디지털 시대에는 ‘내 손 안의 사전’이 가능해졌다. 첨단 디바이스들이 터치 스크린으로 들여다보는 전자 사전이나 검색어를 넣으면 바로 알려주는 인터넷 사전의 편의성을 극대화시켰다. 반면에 책장을 넘기고 밑줄을 그어 가며 단어를 찾아보던 종이 사전의 감성은 사라졌다. 이러한 때에 서울 용산에 위치한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열린 은 퍽 인상적이었다. 19세기 말 조선의 개화기부터 최근까지 우리말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던 이 전시회는 2018년 9월 20일에 시작되어 12월 말에 막을 내릴 예정이었으나, 관람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2019년 3월 3일까지 연장되었다. 국어학자 주시경(1876~1914)이 1911년부터 제자들과 함께 집필한 최초의 우리말 사전 원고이다. 현재 원고 일부가 남아 있다. © 국립한글박물관 1921년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어학회가 1929년에 시작해 13년에 걸쳐 우여곡절 속에 엮은 『조선말 큰사전』 원고의 최종 수정본이다. 1942년 일본 경찰에 압수되었다가 1945년 해방 후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 한글학회 최초로 공개된 희귀 자료들 사전은 단지 말뿐만 아니라 사회 변천상까지 담고 있는 보물 창고이다. 그래서 종이 사전이 거쳐 온 변화의 과정은 우리 사회의 발전과 문화, 역사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그렇기에 사전의 변천과 낱말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면서 100년 전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만든 이 전시회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조선의 제4대 군주 세종이 1443년 창제한 한글이 무려 4세기 반이나 지난 1894년 조선 정부의 칙령 제1호로 국문(國文)의 위치에 오른 후 우리말 사전 만들기는 국운이 기울었던 암울한 근대의 민족적 과제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최초의 우리말 사전은 그보다 앞서 기독교 포교를 목적으로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먼저 만들어졌다. 1880년 『한불자전』(Dictionnaire Coréen-Français)이 발간되었고, 1890년에는 『한영자전』, 1891년에는 『영한사전』 등 일련의 대역사전들이 속속 출간되었다. 1957년 10월 9일 『큰사전』 간행을 기념하는 한글학회 회원들의 기념 사진이다. 1929년 시작된 『조선말 큰사전』은 사전 편찬 관계자들의 투옥으로 중단되었으나, 조선어학회의 후신인 한글학회가 편찬 작업을 이어받았다. © 한글학회 이번 전시에는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한불자전 필사본’(1878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이 모습을 드러내 주목을 끌었다. 이 필사본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한국선교단의 펠릭스 클레르 리델(Félix-Clair Ridel) 주교가 1880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판한 『한불자전』의 원고본이다. 『한불자전』은 최초의 한불사전이자 한국어 대역사전의 효시라고 평가되는 역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다. 이번 전시를 통해 출판되기 이전에 작성된 필사본과 활자 인쇄본의 차이점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 또한 이 전시를 통해 독립운동가이자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 박사가 영한사전을 펴내려 했다는 재미있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구한말 한성감옥에 갇혀 있을 때 ‘신영한사전 초고(1903~1904,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소장)’를 남겼다. A부터 F까지 집필한 이 자료는 이 박사가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독립정신』(The Spirit of Independence) 집필에 매달리느라 출판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런가 하면 19세기 말 서구 열강이 각축을 벌였던 조선에서 국영문 일간지 「독립신문」을 운영한 서재필 박사의 육필 사전 원고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A부터 P까지 작성한 ‘영한사전 초고(1898, 독립기념관 소장)’가 그것이다. 이들 미완성 사전 친필 원고본 또한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Félix-Clair Ridel, 1830~1884) 주교의 주도 아래 파리외방선교회 한국선교단에서 1880년 편찬한 한불자전이다. 한국어를 올림말로 한 최초의 대역사전이며 약 2만 7,000여 개의 한국어가 알파벳 순서로 배열되었다. © 국립한글박물관 근대 문명사의 자취 한편 이 전시회는 시대별로 사전의 낱말 표기와 뜻풀이 변화를 함께 살펴보는 재미도 선사했다. 개화기 이후 전개돼 온 사회문화적 발전이 사전에 어떻게 반영됐고, 한국인의 인식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돌아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단편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유명한 염상섭은 한국의 근대 초기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인데, 그가 1925년 발표한 단편소설 「전화(電話)」에는 당시 최첨단 과학의 산물이었던 전화기의 도입과 이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과시욕, 사생활 노출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전화기가 우리나라에 첫선을 보인 것은 1898년이었다. 처음에는 영어 단어 ‘telephone’의 발음을 한자식으로 음역해 ‘덕률풍(德律風, deongnyulpung)’이라 불렀다. ‘덕을 펼치는 바람’이란 뜻으로 이름을 그럴듯하게 지었다. 전화기는 그 용도를 따져서 말 전하는 기계라는 뜻의 ‘전어기(傳語機)’라고도 불렀다. 이 문명의 이기가 1920년대에 이르러 염상섭의 소설 제목처럼 ‘전화’로 불릴 때까지 telephone 을 제대로 옮긴 우리말 표기법이 없었다. ‘전화기’란 단어가 사회적으로 공인된 것은 1938년 국어학자 문세영(文世榮; 1888~?)이 10만여 어휘를 정리하여 『조선어사전』을 펴내면서였다. 그때 비로소 전화기란 단어가 이 사전의 표제어로 올라 우리말에 추가된 것이다. 특히 이 사전은 식민지 시대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우리말 사전 편찬에 평생을 바친 문세영의 노고가 결집된, 한국인에 의해 탄생한 최초의 국어사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깊다. 19세기 말부터 일부 대역사전들이 나왔지만, 이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만든 것이라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사전이라 할 수는 없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20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사전 역시 일제의 식민 지배를 위한 문화 사업의 일환이어서 우리 사전이라고 볼 수 없다. 이 전시에서는 자동차, 텔레비전, 전기 같은 과학 기술에 따른 새로운 단어들이 우리 사회에서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지도 사전의 변천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모던 보이, 모던 걸, 자유부인 같은 사회적 양상을 상징하는 신조어들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도 돌아보게 해 주었다. 종이 사전이 거쳐 온 변화의 과정은 우리 사회의 발전과 문화, 역사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그렇기에 사전의 변천과 낱말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면서 100년 전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만든 이 전시회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구한말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가 1898년 A부터 P까지 작성한 ‘영한사전’ 초고이다. © 독립기념관 IT 강국과 한글 1999년 간행된 『표준국어대사전』은 국어 사전사에 큰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 정부가 나서서 1992년부터 8년여에 걸쳐 120여 억 원을 투입한 대사업이었다. 이 사전은 상∙중∙하 세 권에 총 7,000여 쪽이 넘고, 올림말 역시 표준어를 비롯해 북한어, 사투리, 옛말 등 50여 만 단어를 수록한 방대한 책이다. 이후 대부분의 시중 출판사들이 이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사전을 펴냈다. 각종 정보가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디지털 시대다. 우리는 그동안 빠르고 간편한 세상에 취해 사전의 사회적 역할을 잊고 살았다. 국립한글박물관의 이번 전시회는 세상의 길잡이가 돼 온 사전의 가치를 되새기고, 마음의 양식을 쌓을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또한 우리의 굴곡진 역사와 함께 한글의 의미와 우수성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한국의 고유 문자인 한글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매우 과학적이고 편리한 문자이다. 또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옛 이름 속에 수많은 난관을 뚫고 이 같은 문자를 만들어 낸 세종의 애민 정신과 실용주의 사상이 담겨 있는 한글은 글자를 만든 주체와 시기, 창제 목적이 밝혀진 유일한 문자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유네스코는 1997년 『훈민정음 해례본』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또 세종대왕이 태어난 날인 9월 8일을 ‘세계 문맹 퇴치의 날’로 정했으며, 문맹 퇴치에 기여한 개인과 단체에는 ‘세종대왕 문해(文解)상’을 수여하고 있다. 한국이 오늘날 휴대폰과 인터넷이 발달한 IT 강국이 된 배경에 문자의 구성이 과학적이고 간결하여 누구나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는 한글이 있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1938년 국어학자 문세영이 펴낸 『조선어사전』의 속표지와 본문 첫 면. 10여 만 개의 어휘가 수록되어 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하여 표기한 최초의 사전이다. 약 1만 단어를 추가하고 일부 주석을 보완해 1940년 수정 증보판을 출간했다. © 국립한글박물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젊은 시절 옥중에서 쓴 미완성의‘신영한사전 초고’. ©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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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2018 WINTER 258

잊어버린 왕국 고려를 돌아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GORYEO: The Glory of Korea)은 5세기에 걸쳐 한반도를 지배했던 중세 통일 국가 고려(918∼1392)의 미술을 종합적으로 돌아보는 최초의 대규모 전시이다. 내년 3월 3일까지 계속되는 이 특별전은 해외 4개국 11개 기관을 비롯해 국내외 45개 기관의 주요 소장품 총 450여 점을 보여 준다. , 10~11세기, 청동, 높이 138.3 cm. 한국 역사상 현존하는 유일한 왕의 초상 조각으로 개성역사유적지구 내 현릉에서 1992년 출토되었다. 비단 의상은 부식되고 나신상과 옥으로 만든 과대만 발견되었다. © 평양조선중앙역사박물관 , 10세기, 목조 건칠, 높이 82 cm. 해인사 조사(祖師)였던 희랑대사의 진영상은 국내에서 유일한 승려의 진영 조각이다. 조성, 봉안 이후 이번 전시를 위해 첫 바깥 나들이를 했다. 보물 제999호로 지정되어 있다. © 해인사 성보박물관 고려는 출발부터 다양성을 존중했다. 주변국들과 다원적 외교 관계를 이루었고, 외국인을 재상으로 등용할 만큼 개방성과 포용성, 그리고 통합 정신을 실천해 나갔다. 한국의 영문 명칭인 ‘코리아’가 ‘고려인이 사는 나라’, ‘고려인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됐듯 고려 시대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배양한 시기였다. 그러나 고려 역사 500년은 많은 것들이 베일에 싸여 있다. 오늘날 남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고려의 구체적 지명이나 유적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남북 분단이라는 불행한 근현대사와 연관된다. 고려의 이미지가 막연한 것은 수도 개경(오늘의 개성)을 비롯해 정치, 종교, 문화, 통상의 중심지가 대부분 북한에 있어 접근할 수 없고, 그렇다 보니 많은 부분이 공동체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만월대는 건국 이듬해인 919년 태조 왕건이 송악산 남쪽에 궁궐을 창건한 이래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고려 왕들의 주된 거처였다. 1918년 일제가 조선 고적 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촬영한 사진에서 보듯이 만월대는 폐허로 남아 있다. 마침 사진이 촬영되던 이 해는 고려 건국 1,000년이 되는 시기였지만, 일제 강점기에 어느 누구도 그것을 기념할 수 없었다. 1,000년을 기념할 기회를 놓친 우리에게 찾아온 1,100주년은 그래서 더욱 값지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기념하고 그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올해 전국에서 다양한 전시와 학술 행사가 개최되었다. 12월 4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시작된 특별전은 미국, 영국, 이탈리아, 일본을 포함하여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주요 고려 유물의 상당수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다는 점에서 그중 백미라 할 수 있다. 고려는 앞선 왕조가 이룬 문화적 전통을 배척하지 않고 다원적인 태도로 융합했으며, 주변국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아름답고 창의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왕과 스승의 조상(彫像) 이번 특별전에서 기대되는 것은 고려 태조 왕건과 희랑대사의 ‘만남’이다. ‘북한에서 온 왕’과 ‘남한에 있던 왕의 스승’이 11세기를 뛰어넘어 서울에서 만나게 되기를 소망한다. 우선 ‘청동 태조 왕건상’은 개성 소재 왕건과 그의 제1비 신혜왕후의 무덤인 현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한국 역사상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왕의 초상 조각이다. 높이가 138.3cm인 이 청동 조상은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며 만든 이 조각은 사찰에 봉안되어 제례의 대상이 되었다. 매납(埋納) 당시에는 비단 옷에 허리에는 옥으로 만들어진 과대를 착용하고 있었으나, 1992년 발굴될 때는 옷은 부식되고 청동상과 과대만 출토되었다. 현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개성역사유적지구의 일부이다. , 1098년, 목재, 24 × 69.6 ㎝. ‘고려대장경’과 함께 고려 시대 판각 기술을 알 수 있는 ‘고려목판’은 국가 기관에서 제작한 고려대장경과 달리 사찰이나 지방 관청에서 만들었으며 불교 경전뿐 아니라 고승들의 저술, 시문집 등도 새겨져 있다.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목판은 총 54종 2,835판으로 그중 ‘대방광불화엄경판 수창연간판’은 간행 기록이 남아 있는 고려목판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가치가 높으며 고려 시대 길고 긴 대장경의 역사를 보여 준다. © 하지권(Ha Ji-kwon 河志權) 한편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희랑대사의 건칠목조상 또한 93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승려의 진영 초상 조각으로는 국내 유일한 사례이다. 스님의 실제 모습을 담아 인간적 면모까지 느낄 수 있는 이 조각상은 해인사에 봉안된 후 사찰 바깥에서는 최초로 일반에 공개된다. 이 두 점의 진귀한 유물이 각별한 이유는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희랑대사는 왕건의 정신적 지주로 후삼국 시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렸던 왕건을 도왔으며, 고려 건국 이후에는 왕의 스승이 되었던 인물이다. 고려의 정치적 상징인 태조 왕건상과 정신적 가치를 상징하는 희랑대사상은 조성된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전시 오픈 이후에도 태조 왕건상이 오면 전시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 14세기, 비단에 채색, 104.3 × 55.6 ㎝.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지장보살을 그린 불화로 상단에 본존불을 강조하고 하단에 여타 인물들을 배치하는 고려 불화의 일반적 구도를 따르고 있다. 보물 제784호. © 삼성미술관 리움 금속활자와 대장경판 이번 전시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점은 산문을 나선 적 없던 고려 대장경판이 이번에 공개된다는 것이다. 경판이 보관된 해인사를 방문해도 실제로 마주 하기 힘든 귀한 전시품이다. 고려는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를 만들어 낼 만큼 뛰어난 출판의 역사를 자랑한다. 중세 유럽 수도사들의 일과가 기도와 성경을 베껴 쓰는 일을 포함했듯, 고려의 승려들에게도 경전을 손으로 베껴 쓰는 사경(寫經)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 오랜 필사의 전통에서 인쇄로의 전환은 세계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쇄 문화는 수도원과 사찰에서 성경과 경전을 매개로 꽃피었다. 구텐베르크의 성서가 서양 문화사에서 인쇄된 책의 시대를 열어 준 혁명의 상징적 아이콘이 되었듯이, 대장경은 불교 성전의 총합체인 동시에 당시 아시아의 지혜와 지식을 집대성한 획기적 출판물이었다. 971년 송나라 태조가 시작해 983년 완성된 개보장(開寶藏)은 송 황실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기념 사업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소실되어 현존본이 극히 적다. 반면에 고려는 총 세 차례에 걸쳐 국가적 사업으로 대장경을 간행했다. 초조대장경은 개보장에 이어 세계 역사상 두 번째로 판각된 대장경으로, 1011년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이뤄진 거사였다. 이후 고려의 대장경 간행에 자극받아 만들어진 것이 거란대장경이다. 초조대장경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불탄 후 고려는 기존의 송본, 초조본, 거란본의 내용을 종합한 재조대장경을 간행했다. 이때 간행한 대장경판이 무려 16만 쪽을 양면에 판각한 8만 장에 이르기 때문에 이를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해인사에 700년간 보존되어 온 팔만대장경판은 동아시아 불교 문헌을 집대성한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경판이다. 중세 동아시아에서 대장경의 위력은 지금의 핵무기 경쟁에 못지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도 대장경 간행은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대규모 사업이었고, 목판으로 대량 인쇄해 전국의 사찰에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다지고 국민을 통합할 수 있었다. 또한 인근 나라에 인쇄본을 나누어 줌으로써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외교적으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 대장경을 요청하고 이를 하사받은 과정의 기록, 목판을 얻고자 노력한 기록을 보면 국제 정세 속 대장경을 통한 고려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포용과 융합 3개월 동안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크게 3가지 주제로 구성된다. 1부는 ‘국제 도시 개경과 왕실의 미술품’으로 활발했던 해상 교류와 다양한 물산에 대해 살펴본다. 국제 도시였던 수도 개경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다. 고려 인종 재위 시절인 1123년에는 송나라 사절단 일행이 도착했다. 휘종이 보낸 200여 명의 사절을 이끌고 온 사신 서긍도 그중 하나였다. 서긍은 고려에서 보낸 한 달을 『선화봉사고려도경』이란 책에 담았다. 그는 개경에서 보고 들은 문물을 상세히 기록하고 직접 그림을 그려 황제에게 올렸으나, 몇 년 후 북송이 금에 의해 멸망하면서 그림들은 전란 속에 사라지고 문장만이 전한다. 관람객들은 이 전시를 통해 지금은 찾아갈 수 없는 고려의 중심 개경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2부에서는 왕실과 더불어 미술품의 주된 소비 장소였던 ‘사원의 미술’로 구성되었다. 불교는 국가의 종교이자 사상이었고, 삶과 정신의 중심이자 생활 그 자체였다. 고려가 이룬 문화적 성취는 불교 문화에 기반하여 정점을 이루었다. 고려 이전과 이후의 어떤 왕조도 고려만큼 불교의 정신과 가치를 이해하고 꽃피우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3부는 ‘고려의 멋, 고려의 미술’이 주제이다. 고려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중국 본토의 송뿐 아니라 북방의 거란족이 건립한 요, 여진족의 금과도 200년 이상에 걸쳐 국교를 유지하며 교류했다. 한편 고려의 후반기는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대제국을 건설한 원이 다스리던 시기였다. 이렇듯 고려의 주변 정세는 늘 요동치며 크고 작은 전쟁이 숱하게 벌어졌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전쟁의 길은 문화가 오고 간 교류의 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격변의 시기에 고려의 뛰어난 공예품은 기술의 수용과 교류, 이질적인 요소들과의 융합을 거치면서 활발히 유통되었다. , 12세기, 은에 도금, 주자: 높이 34.3 cm, 바닥 지름 9.5 cm; 승반: 높이 16.8 cm, 입 지름 18.8 cm, 바닥 지름 14.5 cm. 화려한 연꽃 무늬와 봉황 장식으로 뚜껑을 장식한 주자와 승반으로 고려 시대 금속 공예의 정수를 보여 준다. 청자와 금속 공예의 형태 및 장식이 서로 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명품이다. ©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 12세기, 높이 15.3, 대좌 지름 11.5 cm. 상감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 고려 청자의 대표적 명품 중 하나이다. 향이 빠져나가는 뚜껑과 향을 태우는 몸통, 받침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양한 기법이 사용돼 장식적 요소가 많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형적 비례가 조화를 이룬다. 국보 제95호. © 국립중앙박물관 불변하는 가치의 재발견 역사서는 이런 교류에 대해 단편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미술품들은 고려가 중국, 일본의 여러 왕조와 활발하게 교류했던 모습을 풍부하게 보여 준다. 따라서 이번 특별전은 미술품을 통해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창출된 고려의 문화적 성취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고려는 앞선 왕조가 이룬 문화적 전통을 배척하지 않고 다원적인 태도로 융합했으며, 주변국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아름답고 창의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고려인들은 인간의 정서와 감정을 포착하고 그것을 색과 재료, 기술적 성취를 통해 뛰어난 미술로 구현했다. 이는 때로는 강력하지만 때로는 극히 우아하고 섬세하여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관람객들은 이번 전시에서 잊고 있었던 고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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