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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젊어진다

Image of Korea 2021 SUMMER 53

산이 젊어진다

산이 젊어진다

가끔 한밤중에 잠이 깰 때면 나는 어둠 속에 누워 마음속의 산길을 오른다. 집들이 멀어지고 숲이 시작되는 비탈길. 숲길에서 숨을 고른다. 왼발, 오른발. 빛과 그늘의 교차. 빠른 심장 박동, 이마와 등에 흐르는 땀. 정상의 큰 바위. 건듯 불고 지나가는 산바람과 함께 맛보는 해방감과 열린 풍경의 광대함을 상상한다.

© Yang Su-yeol

무려 4000개가 넘는 산들이 솟아 있는 이 나라에서는 어디를 가나 뒷산 혹은 앞산이 보인다. 특히 인구 1000만이 넘는 서울은 남산을 품에 안고 안산, 인왕산, 관악산, 불암산, 도봉산, 북한산에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한 시간 안에 도달하는 도심의 대자연, 특별한 준비 없이 간편한 차림으로 당일에 다녀올 수 있다. 산길은 안전하다. 범죄나 야생 동물의 공격에 노출되는 일이 거의 없다. 잘 정비되고 친절하게 안내된 등산로에는 대피소가 갖추어져 있어서 여유롭게 자연 경관과 도시 전경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등산의 풍경도 변했다. 40~60대 중년들의 취미였던 산행에 온라인 커뮤니티, 취미 플랫폼을 매개로 20~30대 젊은 등산 마니아들이 나섰다. 젊은이들은 등산 패션에서도 그들 특유의 강한 개성을 자랑한다. 울긋불긋 비슷한 아웃도어 패션 대신 스타일리시한 레깅스, 산악 러닝화를 애용한다. 인스타그램에 자신만의 등산 모습을 올린다. 어떤 젊은이들은 취미를 공유하는 플랫폼을 만들어 새로운 관계를 맺고, 쓰레기 줍기 같은 ‘클린 하이킹’에도 나선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하여 해외로 떠나지 못하고 갇혀 지내게 되자 폐쇄적 환경에서 벗어나고 암울한 청년기의 고빗길을 넘기 위한 돌파구로 밀레니얼 세대는 산과 숲으로 간다. 금년 3월 북한산 국립공원 탐방객은 67만 명, 전년 같은 기간보다 41% 증가했다고 한다.

비대면 여행 취미로 산의 풍경이 젊어졌다. 나는 어둠 속에 누워, 간편한 차림으로 혼자 산정에 올라 광대한 세계와 대면하는 젊은이들을 부러워하며 젊어진 산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나도 걷는다, 왼발 오른발….

김화영(Kim Hwa-young 金華榮)/문학평론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DILKUSHA ‘기쁜 마음의 궁전’

Focus 2021 SUMMER 151

DILKUSHA ‘기쁜 마음의 궁전’

1919년 3.1운동을 해외에 최초로 알린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와 그의 영국인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1889-1982)가 살았던 집‘딜쿠샤(Dilkusha)’가 여러 해에 걸친 복원을 끝내고 올해 3월 1일 기념관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그들의 꿈과 사랑, 그리고 한국의 독립을 도우려는 열정이 담긴 보금자리가 옛모습으로 돌아왔다.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영국인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가 1923년 서울 행촌동에 지은 서양식 벽돌집 ‘딜쿠샤.’2009년서울시가 펴낸 『돈의문 밖, 성벽 아랫마을: 역사·공간·주거』에 실린 옛 모습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딜쿠샤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이루어졌으며 20세기 초 한국에 지어진 서양식 가옥의 건축 기법을 보여 준다. 특히 외벽에는벽돌의 옆면과 마구리를 번갈아 가며 쌓는 프랑스식 공법(rat-trap bond)이 적용되었다.

1890년대 말, 아버지, 동생과 함께 금광 채굴 사업 차 한국에 온 앨버트 테일러는 일본에 공연 여행 온 영국인 연극 배우 메리린리를 만나 결혼한 후 1942년 일본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 딜쿠샤에서 살았다.

영국인 연극 배우 메리 린리

서울 행촌동 언덕의 빽빽한 주택가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특이한 건물 하나가 있다. 머릿돌에 ‘DILKUSHA1923’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이 집의 내력은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미국인 조지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 1829~1908)와 그의 두아들 앨버트, 윌리엄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대한제국 선포 즈음인 1890년대 말이었다. 입국 목적은 당시 평안북도에 있던 운산(雲山) 금광 채굴 사업을 위해서였다. 앨버트는 그 후영국인 배우 메리 린리(Mary Linley)와 결혼한 뒤 신혼살림을 위해 서양식 주택을 짓고, 그 이름을 딜쿠샤라 했다. 신혼여행 중에 방문했던 북부 인도의 궁전 이름으로,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Palace of Heart's Delight)’이라는 뜻이다.

잊힌 집
앨버트는 단순히 금광 개발업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 중심 소공동에 테일러상회(W. W. Taylor& Company)를 세워 미국산 자동차를 비롯해 다양한 생활용품과 건축 자재를 수입 판매했는가 하면, UPI와 AP 서울 통신원을 맡아 이곳 소식을 미국에 타전하는 역할도했다.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1919~2015)가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난 날은 1919년 2월 28일로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저항해 전 국민이 일어선 3.1운동이시작되기 하루 전이었다. 메리 린리 테일러가 쓴 회고록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The Book Guild Ltd., 1992)에 의하면, 조선인 간호사들이 일본경찰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어떤 서류 뭉치를 갓 태어난 아기의 강보 밑에 감춰 놓았다고 한다. 저녁 무렵 남편 앨버트가 와서야 비로소 그것이 「기미독립선언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독립선언서’잖아! 그가 놀라서 소리쳤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서운한 마음에 그날의 일을 힘주어 말한다. 당시 갓 신문 기자가 된 브루스는 아들을 처음 만난 것보다 그문서를 발견한 것에 더 흥분했다고 말이다. 바로 그날 밤, 시동생 빌이 독립선언문 사본과 그에 관해 브루스가 쓴 기사를 구두 뒷축에 감춘 채 서울을 떠나 도쿄로 갔다. 금지령이 떨어지기전에 그것을 전신으로 미국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he exclaimed, astonished. To this day,I aver that, as a newly fledged newspaper correspondent, he was more thrilled to find those documentsthan he was to find his own son and heir. That very night, Brother Bill (Albert’s younger brother) leftSeoul for Tokyo, with a copy of the Proclamation in the hollow of his heel, to get it off, with Albert’sreport, over the cables to America, before any order could be issued to stop it.)”

당시 온 국민이 제국주의세력에 대항해 봉기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식민 지배가 시작된 지 9년 만에 조선에서는 대대적인 민중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앨버트가 타전한 기사를 받아 3월4일 중국의 영문 매체 『대륙보(China Press)』를 시작으로, 10일에 미국 인디애나 『사우스벤드 뉴스 타임스(South Bend News-Times)』, 13일에는『뉴욕타임스』에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다 (Koreans Declare For Independence)’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는 이후 3.1운동 진압 과정에서 일본이자행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과 방화 사건들도 열심히 취재해 보도했다. 사업가로서 일본 당국으로부터 여러 면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개인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의 무력적인 탄압행위를 세상에 알리고, 조선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한 것이다. 그런 활동은 일본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다. 결국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적성국시민’의 거주를 허용하지 않았고, 앨버트는 그해 12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 부근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부부가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이후 그와 그의 가족은한국인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브루스 테일러와 그의 딸 제니퍼 테일러(1958~)가 2006년 방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테일러 부부가 추방된 지 64년 만의 일이었다.

딜쿠샤 2층 거실. 테일러 부부가 거주하던 당시의 모습을 사진 자료를 통해 그대로 재현했다. 풍경화, 화병, 램프, 의자, 삼층장등 가구와 장식품에 동서양 문화가 혼합되어 있다.

테일러 가족의 방문
필자가 10여 년 전 방문했을 때만 해도 딜쿠샤는 건물 내외부가 모두 쇠락한 상태였다. 안전 진단 결과더 이상 거주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육안으로 대충 보아도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벽돌이며 부서진 콘크리트 사이로 보이는 철근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추방 전 일본 군인들이 체포하러 왔을 때테일러 가족이 몸을 숨겼다는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 아래 공간, 2층 서재의 벽난로, 현관과 계단, 마룻바닥, 창틀 등 내부 시설은 함부로 없애거나 덧댄 나머지 누더기처럼 변해 있었다.비가 새는 지붕에는 얼기설기 비닐 천막이 덮여 있었다.

서울시와 중앙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즈음이었다. 브루스 부녀의 방한으로 딜쿠샤의 내력이 알려지자, 더이상의 훼손을 막고 역사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2017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되었다. 이듬해 건물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고 내부 시설을 갖춘 후 2021년 3월 1일 일반에 개방되었다.글렌우드 난로(Glenwood Heater)를 비롯해 메리가 남긴 사진들을 기반으로 재현한 가구와 화병, 촛대 등 소품에 이르기까지 마치 192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살렸다. 특히앨버트 부부의 생활 유품과 옛 사진을 비롯한 1,026건에 달하는 자료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면서 딜쿠샤는 더욱 풍성한 전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집은 단순히 한외국인 가족이 살았던 공간이 아니다. 딜쿠샤는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 그리고 세계 만방에 식민지 민중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 주인공의 보금자리였다. 일생을통해 미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었던 앨버트는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고, 1948년 캘리포니아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있는자신의 아버지 묘 옆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그의 아내 메리가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미군 군함에 유골을 싣고 돌아와 소원을 이뤄준 것이다.

메리는 1982년 92세에세상을 떠나 캘리포니아에 묻혔다. 2006년 브루스와 제니퍼가 방한했을 때 메리의 묘에서 퍼온 흙을 앨버트의 묘에 뿌렸고, 그의 묘의 흙을 떠다가 캘리포니아의 메리 묘에 뿌린 것으로알려졌다.

딜쿠샤 1층 거실. 고증을 거쳐 2년여 동안 꼼꼼하게 재현되었다.ⓒ 이정우(Lee Jeong-woo 李政雨)

이 집은 단순히 한 외국인 가족이 살았던 공간이 아니다. 딜쿠샤는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 그리고 세계 만방에 식민지 민중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주인공의 보금자리였다.

이방인 조력자들
앨버트 테일러뿐만 아니라 당시 외국인 중에 음으로 양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운 이들이 적지 않았다.딜쿠샤에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살았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 Bethell 1872-1909)은 1904년 조선에 들어와 언론인 양기탁(梁起鐸1871~1938) 등과 함께 『대한매일신보(Korea Daily News)』를 발행했다. 그는 언론 활동을 통해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정부에 떠안긴 거액의 외채를 조선인들 스스로 십시일반 모금해 갚자는 국채보상운동 때에도 전면에 나서서 지원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 기자프레데릭 매켄지(Frederick Mackenzie 1869-1931)는 1906년부터 1907년 사이 경기도와 충청도, 강원도의 산중을 찾아다니며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들을 만나취재했다. 그 결과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1908),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1920) 등의 저서를남겼다. 이 책들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일반 민중까지도 치열한 게릴라 항전을 이어갔음을 증명해 주는 귀중한 사료다.

또 영국 태생의 캐나다 선교사이며 의학자인 프랭크스코필드(Frank Schofield 1889-1970)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로 봉사하며 한편으로 일본의 조선인 학살을 취재해 해외 언론에 알리기도 했다. 이를 구실로 1920년강제 출국 당했다가, 1969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최초의 외국인이다.

이 외에도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변호한 일본인 인권 변호사후세 다쓰지(布施辰治 Datsuji Fuse 1880-1953)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운 중국인 저보성(褚輔成 Chu Fucheng 1873-1948), 한국광복군의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한 중국인 쑤징허(蘇景和 Su Jinghe 1918-2020) 등 외국인들의 조력이 있었다. 딜쿠샤는 그런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장소이다.

마음의 실을 이어 하늘의 수를 놓다

Guardian of Heritage 2021 SUMMER 184

마음의 실을 이어 하늘의 수를 놓다

자수장 최유현(Choi Yoo-hyeon 崔維玹)은 70여 년 동안 바늘과 실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아왔다.
그는 불화(佛畫)를 바탕으로 한 대작과 독창적 기법으로 한국 자수의 차원을 한층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삼세불도(三世佛圖)⟩ 중 ‘석가모니불도’(부분). 257 × 128 ㎝. 비단에 명주실.
자수장 최유현(Choi Yoo-hyeon 崔維玹)은 1970년대 중반부터 불화를 자수로 표현하는 수불(繡佛)에 도전했다.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를 표현하는 ⟨삼세불도⟩는 완성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아름답고 섬세한 자수 작품을 대하면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되지만, 수틀 앞에 앉아 바늘로 한 땀 한 땀 그림을 만들어 나가는 작업은 매우 고되고 지루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특히 전통 자수는 현대 자수에 비해 대체적으로 제작 과정이 더 복잡하고 기법 또한 다양한 데다가 그 안에 담긴 정신까지 표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수가 힘들고 지루하기만 했다면 어떻게 평생 이 일을 했겠어요? 재미있고 즐거우니까 했죠.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 자수를 내 손으로 복원하고 싶다는 바람도 컸고요.”고생스럽지 않냐는 질문에, 최유현 자수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본질에 천착하다
“제 나이가 이제 80이 훨씬 넘었어요. 우리 어렸을 땐 바느질이 일상이었어요. 집집마다 옷도 손수 만들어 입고, 혼수에 들어가는 수도 직접 놓았죠. 제가 7남매 중 막내인데, 어머니가 늘 수를 놓고 계시니 저도 자연스레 옆에서 따라 하게 됐어요. 10대 때 학교 숙제로 자수를 해 갔다가 칭찬을 받은 게 재미를 붙이는 계기가 됐고요. 한때는 하루 스무 시간 넘게 수틀 앞을 떠나지 못한 적도 있어요. 밥 먹는 시간, 세수하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매달렸죠.”

열일곱 살에 당시 자수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던 권수산(権寿山) 선생을 만나 체계적으로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자수를 시작하게 될 무렵, 한국 전통 자수는 암흑기였다. 그 당시 자수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여성들이었고, 이들은 귀국 후 여자대학교 가정과나 양장학교에서 일본풍의 자수나 생활 소품에 치중된 자수를 가르쳤다. 이런 경향은 오랫동안 지속됐다.최 자수장은 1960년대 초반 자수 학원을 열어, 전통 자수의 본질에 천착하고 우리 것을 되찾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베갯모나 방석 같은 생활 소품에 전통 문양을 수놓는 수준이었지만, 점차 소재를 전통 회화로 확대해 나갔다.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옛 미술품들을 재해석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확립해 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자수는 바늘 다루는 솜씨와 타고난 색감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따라 하기만 해선 자신만의 독창적 세계를 구축할 수 없어요. 한국 전통 도자기와 산수화, 민화 등을 밑그림으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1. ⟨연화장세계도(蓮華藏世界圖)⟩. 270 × 300 ㎝. 비단에 명주실.
경상북도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만다라를 자수로 표현한 작품으로 최 자수장에게 1988년 제1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안겨 주었다.ⓒ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도전과 성취
사회 일반적으로 한국 고유의 전통 문화가 경시되었던 시절, 그의 이 같은 노력은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전통 자수에 매혹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다. 특히 그의 작품은 외국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당장의 경제적 이익보다 전통 자수의 발전을 먼저 생각했던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는 작품 판매보다는 전통 자수 연구와 전시 활동에 집중했으며, 불화를 자수로 표현하는 수불(繡佛)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불교 미술이야말로 전통 예술의 총화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중 석가모니의 일생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팔상도(八相圖)⟩와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를 아우르는 ⟨삼세불도(三世佛圖)⟩는 그의 70여 년 자수 인생을 대표하는 화룡점정이라 할 만하다. 전통 기법과 창작 기법이 화려하게 어우러졌을 뿐 아니라, 재료도 명주실은 물론 면사, 양모사, 인견사 등을 활용해 질감을 다양하게 살렸다. 두 작품 모두 완성하는 데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스님들이 수행과 정진에 힘쓰듯 참선하는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았어요. 특히 ⟨팔상도⟩는 통도사에서 처음 그림을 접한 후 10년간 ‘이 작품을 내 자수로 짓게 해 달라’고 기원을 드렸습니다. 가까스로 절의 승인을 받아 제작에 착수했는데, 높이 2미터가 넘는 작품 8점을 수놓다 보니 완성하는 데 12년이 걸렸어요. 그나마 제자들과 함께했기에 망정이지 저 혼자였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남다른 열정과 집념은 큰 상의 수상으로 이어졌다.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만다라를 수놓은 ⟨연화장세계도(蓮華藏世界圖)⟩로 1988년 제1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1996년에는 마침내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2. ⟨팔상도(八相圖)⟩ 중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236 × 152 ㎝. 비단에 명주실.
이 작품은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팔상도를 밑그림으로 삼았으며, 자수 표현이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크게 여덟 가지 장면으로 나누어 보여 주는 ⟨팔상도(八相圖)⟩는 한 화면에 여러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효제충신도(孝悌忠信圖)⟩ 8곡 병풍 중 ‘염자도(廉子圖)’(부분). 128 × 51 ㎝. 비단에 명주실.
1960년대, 한국 전통 자수의 본질에 천착하게 된 장인은 문자도를 포함한 민화의 재해석에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보존과 계승
한국 전통 자수의 역사는 삼국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한국 문화에 대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은 고대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이 수를 놓은 화려한 옷을 입었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에는 궁궐에 자수 장식을 전담하는 수방(繡房)을 설치해 왕실의 의복과 장식품에 수를 놓았고, 민간에서는 가정마다 가풍에 따라 전승되는 자수 양식이 있었다.

최 자수장의 예술 철학은 ‘심선신침(心線神針)’이라는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2016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전시회의 제목이기도 했던 이 말은 ‘마음의 실을 이어 하늘의 수를 놓는다’는 뜻이다.

“작품 한 점 한 점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됩니다.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면서 자수로 재현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해 본을 뜨기까지 그 과정도 만만치 않지만, 어떤 질감과 색감의 천과 실을 사용할지, 색 배합은 어떻게 할지, 어떤 기법을 사용할지, 머릿속에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가며 작업해야 해요. 구성과 위치에 따라 실의 굵기를 달리해야 하니 실도 직접 꼬아야 하고, 마음에 드는 기법과 색감을 찾을 때까지 수를 놓았다가 뜯어내 버리는 과정을 숱하게 반복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뭐 하나 대충 넘기는 법이 없다. 언제나 기본을 강조하며 전통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후대에 제대로 전수하기 위해서다. 이는 그가 부산대학교 한국복식문화연구소 석좌교수로 출강하며 후학 양성에 열과 성을 다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 자수가 아름답고 좋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선뜻 해 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도 부지기수고요. 제대로 교육받았다 해도 부단한 인내로 오랜 수련을 거쳐야만 비로소 작가로 거듭날 수 있어요.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도전 자체를 꺼리는 거죠.”

그는 자신의 자수 인생을 돌아보는 자서전 『최유현 자수사』의 발간을 앞두고 있다. 생활 소품에서 민화, 다시 불화로 변화를 거듭해 온 그간의 여정을 시기별로 정리한 책이다. 제자들을 위한 교육용 자료 편찬 작업도 서두르고 있다. 이미 100여 점이 넘는 작품에 주석을 달아 정리한 작품집을 여러 권 펴냈고, 자신이 개발한 독창적 기법에 이름을 붙여 상세하게 기록한 책도 조만간 출간할 계획이다. 그런가 하면 대작으로선 마지막 작품으로 예상되는 양산 신흥사(新興寺) 대광전(大光殿) 벽화를 모본으로 하는 ⟨관세음보살도⟩도 완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색(紫色) 천에 금색 실로만 수를 놓은 이 작품은 그 정교함과 화려함이 가히 극치에 달한 느낌이다. 지난 3년간 작업해 온 역작이다.

“앞으로 이처럼 대규모 작품은 더 이상 하기 힘들 것 같아요. 눈도 침침하고 체력도 달려서 2~3시간 작업하는 것도 힘에 부치거든요. 이젠 작품 제작보다 제자들 교육에 집중해야죠.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전수하는 게 제 남은 숙제니까요.”그가 거의 반세기 동안 팔지 않고 보관해 온 자신의 작품과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수백여 점의 전통 및 현대 작품이 문화재청 지원 아래 전주 국립무형유산원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머지않은 날 자수 전문 박물관이 건립돼 이 작품들을 오래도록 보존하고 전시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1. 최 자수장은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명주실, 면사, 양모사, 인견사 등 다양한 소재와 색상의 실을 사용해 질감을 표현하는 한편 전통 및 창작 기법을 두루 활용해 수를 놓는다.

2. 그는 지난 3년 동안 경상남도 양산 신흥사(新興寺) 대광전(大光殿) 벽화를 모본으로 하는 <관세음보살도> 를 작업 중이다. 이 작품은 자색 비단에 금색 명주실로만 수를 놓아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문화예술을 품은 서촌의 시간 속으로

On the Road 2021 SUMMER 351

문화예술을 품은 서촌의 시간 속으로

왕이 거닐던 옛 산수화 속 동네, 식민지 암흑시대 한 호리한 시인이 몸을 웅크린 채 저항시를 쓰던 동네,
서울의 옛 도심 빌딩 숲 한가운데 한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동네 서촌으로 떠났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으로 옛 서울의 경계를 이루었던 인왕산 자락 아래 동네들을 일컫는 별칭이다. 인왕산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눈을 돌리면 북악산 밑으로 경복궁과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다. 고즈넉한 한옥과 어울리며 제각기 멋을 풍기는 아담한 빌딩들이 들어선 서촌은 과거와 현재가 흥미롭게 공존하는 곳이다.

이 마을에선 오래된 한옥이 이국적인 디저트 카페로 다시 태어나고, 조선 시대(1392~1910)의 수묵화가 21세기 화가의 캔버스 위로 펼쳐진다. 사람의 훈기가 가득한 체부시장과 통인시장에서 수성(水聲)계곡으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들은 마치 실존주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집필실이 있던 체코의 황금소로 22번지 골목처럼 아늑하다. 때로는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뒷골목을 걷는 느낌도 든다.

북촌에 이어 서촌이 최근 서울의 명소로 떠올랐다. 아기자기한 골목과 맛있는 음식점, 감각적인 카페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예술을 자연스레 몸으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인왕산에는 코로나 19사태속에 홀로 하는 등산에 재미를 느낀 사람들이 찾아와 눈 앞에 펼쳐지는 서울의 경관에 빠져들기도 한다.

서촌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살았지만, 문화예술만은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이곳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문화예술이 형형색색 모여 미로 같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옥인동에 위치한 수성계곡은 나무 그늘과 물소리가 시원해 예로부터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장소이다.

한양도성은 14세기 조선 건국 직후 왕도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데, 서쪽 벽이 인왕산을 가로지르며 서촌을 품고 있다.

옛 사람들의 자취

2013년 9월에 설립된 박노수 미술관은 이 곳에서 40여 년간 거주하던 박노수 화백의 기증작품과 컬렉션 등 1000여 점의 예술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1941년 연희전문 학생이던 윤동주는 자신이 존경하던 소설가 김송(金松·1909~1988) 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며 시를 썼다. 이 곳에서 ‘별을 헤는 밤’을 비롯한 대표작을 썼으나 당시의 집은 남아 있지 않다.

서촌의 높은 곳에 올라 펜으로 길거리와 마을의 풍경을 담는 김미경 화가. 그는 20년의 기자생활을 끝낸 후 2005년 뉴욕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다시 2012년 서촌에 자리를 잡고 그림 그리며 ‘옥상화가’로 알려졌다.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에 인접한 서촌은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 즉 후일의 세종대왕 (1397~1450 世宗大王)을 비롯한 여러 왕자들이 나고 자란 동네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곳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왕실군락지’였다. 서촌이 배경인 산수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 安平大君)이 꿈에 도원에서 노니던 광경을 화가 안견(安堅)에게 설명해서 그리게 한 작품이다. 이 그림 속 옥인동 수성계곡은 안평대군뿐 아니라 세종의 둘째 형님 효령대군(1396~1486 孝寧大君)도 살았던 장소다. 학문과 덕성이 출중했던 그는 동생인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권력의 갈등에서 비켜나 불교의 중흥에 힘쓴 인물로 추앙 받는다.

또한 이 동네에는 겸재 정선(1676~1759 謙齋 鄭敾)이 살며 조선 문화 절정기였던 진경시대(眞景時代)의 걸작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1751)⟩를 그리기도 했다. 국보 제 216호인 이 유명한 그림은 고 이건희(1942~2020 李健煕) 삼성그룹 회장의 소장품이었는데, 최근 국가에 기증되어 다시 한번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조선 중기부터 서촌에는 왕실 가족보다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신분이었던 중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역관과 의관, 내시 등 궁중관리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즉, 현재의 사직동, 옥인동, 효자동 등 여러 동네를 아우르는 이 지역은 사대부가 살았던 북촌과 달리 궁궐의 운영에 필수적인 기능인들의 거주지였다. 그래서 북촌의 한옥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웅장한데 비해 서촌의 한옥은 아담하고 소박하다. 서촌에 실핏줄 같은 작은 골목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의 몰락에 이어 일제강점기(1910~1945)에 이르자 이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시인 윤동주(1917~1945 尹東柱), 이상(1910~1937 李箱), 노천명 (1911~1957 盧天命)과 소설가 염상섭(1897~1963 廉想涉)이다. 또한 화가 구본웅(1906~1953 具本雄), 이중섭 (1916~1956 李仲燮), 천경자(1924~2015 千鏡子)도 이곳에 살았다. 같은 시기 서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1858~1926 李完用)과 윤덕영(1873~1940 尹德榮) 같은 거물 친일파들의 호화로운 서양식 저택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을 일으키고 향유되는 문화예술은 어둠 속에서 껍질을 깨고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키는 새의 부화와 같다. 단단한 껍질에 포위된 채 살기 위해 쪼아야 하는 아기새처럼, 당시 예술가들은 치열한 창작 활동을 통해 가난과 절망의 시기를 탈출하려 노력했다. 이들의 흔적을 찾는 것이 이번 서촌 기행의 은밀한 화두이기도 하다.

1941년 효자동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위해 조성된 공설시장이 모태인 통인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서촌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지금의 시장 형태를 갖추게 됐다.

향기를 따라
나는 먼저 청운동의 ‘청운 문학도서관’과 ‘윤동주 문학관’이 자리한 ‘시인의 언덕’ 으로 향했다. 언덕 너머 서울 구 도심이 부채처럼 펼쳐지며 멀리 남산타워와 한강 너머 롯데타워도 보였다. 산비탈에 한옥을 잘 복원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청운 문학도서관에 비해 철문의 콘크리트 건물인 윤동주 문학관은 삭막한 감옥을 연상시켰다. 옥외에 카페 정원과 벤치가 있는 이 건물은 2013년 동아일보(東亞日報)와 건축전문지 ⟨SPACE⟩가 공동실시한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 조사에서 상위에 올랐다.

윤동주 문학관의 영상실 콘크리트 벽에는 식민지 시절 서촌에 살며 저항시를 썼고, 일본 유학 중 항일운동에 가담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시인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무기를 들고 직접 싸우지 못하고 골방에 숨어 고작 시나 써서 창피하고, 심지어 그 시가 잘 써지기까지 해서 더욱 창피하다’고 쓴 그의 일기가 떠올라 마음이 처연해진다.

이곳에서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나와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의 집’으로 갔다. 흔히 서촌 문화예술 탐방자들이 출발점으로 삼는 장소이다. 그런데 이상이 세 살에 양자로 들어가 이십여 년을 살았던 원래 집은 없어지고 집터만 남아서 지금의 이상의 집은 그의 사후에 새로 지은 집이다. 이곳에는 그의 친필 원고 등 주로 문학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수성동 계곡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청아한 산수화를 즐겨 그렸던 한국화가 박노수(1927~2013 朴魯壽)의 작품이 모여있는 ‘박노수미술관’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윤동주 시인이 대학생 시절에 살던 하숙집터도 나온다.

이제 마침내 서촌의 끝인 수성동 계곡에 당도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여성 화가가 마스크를 쓰고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서촌의 옥상화가’로 이름이 난 김미경 씨였다. 20년 경력의 신문기자였던 그는 8년 전 직장을 그만 두고 제도용 펜으로 후벼 파듯 서촌의 옥상 풍경들을 그리고 있다. 인왕산을 비롯해 한옥, 일본식 적산가옥, 빌라 등의 옥상으로 올라가 서울의 역사가 압축된 서촌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처음엔 그가 화가인 줄 모르던 주민들이 ‘지도를 그리는 간첩’으로 신고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이젠 그의 그림이 서촌의 여러 가게에 걸려있다. 문득 그가 앞으로 그려나갈 서촌의 미래 모습이 궁금해진다.

1941년 효자동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위해 조성된 공설시장이 모태인 통인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서촌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지금의 시장 형태를 갖추게 됐다.

1940년대에 지어진 보안여관에는 여러 화가와 문인들이 즐겨 묵었다. 2004년까지 여관으로 운영되다가 최근에 전시, 공연 등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윤동주 문학관

이상의 집

사직공원

경복궁

미로 속에 뒤를 돌아보다
마지막으로 통의동 보안여관에 들렀다. 화가 이중섭, 시인 서정주(1915~2000 徐廷柱) 등의 예술가가 묵었던 이 여관은 1942년에 지은 건물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 중이다. 1936년 서정주 시인이 동료 시인들과 힘을 모아 창간한 동인잡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 서니 역사의 자취가 곳곳에 묻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과 옹기종기 비좁은 전시실이 오래된 매력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 반가왔다.

보안여관의 최성우 대표는 화가의 꿈을 안고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미술경영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이 곳을 서촌을 대표하는 복합문화센터로 만들었다. 현재는 보안여관 바로 옆에 4층 건물을 지어 문화사업을 더욱 확장하고 있는데, 실험적인 젊은 국내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뿐만 아니라 해외프로젝트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보안여관 기획전에 앞으로는 외국 작가들도 초청할 계획이다. 4층 건물의 3, 4층이 게스트하우스이자 레지던스 작가들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서촌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살았지만, 문화예술만은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이곳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문화예술이 형형색색 모여 미로 같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골목길 여행의 장점은 미로 속에 자주 길을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낯선 길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또한 느닷없이 때때로 골목이 막혀 뒤돌아 나오며 자신의 발자취를 뒤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나는 이번 기행에서 자주 눈을 떴고 자주 뒤돌아보았다.

대오서점이 개점하던 1950년대에는 인근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책을 사거나 또는 팔러 오는 학생들로 붐볐다. 처음에는 한옥의 창고를 개조해 만든 책방이 점점 현관으로, 집안으로 확장됐다. 현재는 다시 규모가 줄었고, 뒤편 공간에는 북카페가 운영 중이다. ©Newsbank

‘먹자골목’으로 유명한 서촌의 체부동은 낮부터 밤까지 미식을 즐기러 찾아 드는 다양한 세대로 붐빈다. 아담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미로 같은 골목이 이어진다.

이산하(Lee San-ha 李山河) 시인

탈북민 환자들의 한의사

Tales of Two Koreas 2021 SUMMER 158

탈북민 환자들의 한의사

최초의 탈북 한의사 석영환(石英煥 Seok Yeong-hwan) 원장의 ‘영등포 100년 한의원’은 북한의 전통침술을 적용한 치료법으로 알려져 있다. 탈북민과 중국 교포들이 그의 북한식 진료의 혜택을 받고 있다.

100년 한의원은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북자병원’으로 불린다. 아픈 곳이 있어 찾아가면 주머니 걱정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석 원장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등포 100년 한의원’의 풍경은 여느 한의원과 조금 다르다. 실내 구조는 비슷하지만, 환자들이 맞는 침(鍼)이 사뭇 굵다. 얇고 가느다란 침만 보던 이들은 겁먹을 정도다. 이곳은 침술이 독특하다. 북한 전통침술인 ‘대침’, ‘불침’으로 유명하다. 지름 0.5cm 정도의 황금 침도 있다. 평양의 고위간부들이 많이 받던 치료법이라고 한다.

서울 문래동에 위치한 이 한의원의 석영환(55세) 원장은 남북한 한의사 면허 1호다. 진료실 책장에 꽂혀 있는 ⟨고려의학(高麗醫學)⟩ 같은 북한 책들이 말 해주듯 석 원장의 진료는 ‘고려의학’ (Koryo medicine), 즉 북한식 한방 요법에 따른다. 환자는 대부분 서울 시민이지만,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탈북민과 중국 교포도 많다. 중국 교포들은 식사나 생활습관이 북한 주민들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이곳에서 처방하는 약과 치료법이 제법 잘 맞는다고 한다.

100년 한의원이 광화문 부근에 있었을 때는 정부 고위인사들도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높아만 가는 건물 임대료를 견디다 못해 2017년 ‘광화문 100년 한의원’을 문래동으로 옮겨 ‘영등포 100년 한의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실내 규모는 과거보다 2배나 넓어져서 661㎡(200평) 가 되었다.

또 하나의 도전
석 원장의 고향은 양강도 갑산이다. 그는 1998년 10월 지금의 아내인 연인과 함께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 왔다. 그 후 결혼을 했고 현재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큰 아들, 고교생인 둘째 아들, 중학생인 딸을 두고 있다. 북한에 두고 온 부모와 삼 형제를 비롯한 가족의 소식은 끊긴 지 오래다. “연기도 없이 사라졌어요. 소리소문없이 증발했다고 해요.” 그저 간단히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탈북 당시 석 원장은 현역 군의관 신분이었다. 남한의 대위계급에 해당하는 북한군 88호 병원 응급실 진료부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소속인 평양의학대학 동의학부를 졸업하고 ‘고려의사’ 자격을 딴 그는 북한 기초의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기초의학연구소는 흔히 ‘만수무강연구소’로 불린다. 아버지가 호위사령부(청와대 경호실에 해당) 고급군관이어서 혜택을 누린 셈이라고 했다.

그가 북한의 현실에 절망을 느끼게 된 것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지방의 군부대병원으로 출장 가서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군인들을 보면서였다. 게다가 외국에서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료 의사들의 얘기를 들으며 남쪽으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함께 탈북을 결심했다. 제3국을 경유하지 않고 탈북 경로를 휴전선으로 선택한 것은 군 장교의 신분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홀몸이 아니었기에 더욱 커다란 모험이었다. 기차를 타면 검문을 받아야 했으므로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서 얻어 타는 등 온갖 수단을 써가며 평양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꼬박 2박 3일이 걸렸다.

그는 남한 정착 3년 만에 한의사국가자격시험에 합격해 의사 면허를 얻었다. 남북한 한의사 자격을 모두 따낸 최초의 기록을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탈북민의 의사자격 기준이 없었다. 1999년 대한한의학회 전문가들의 테스트와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교육부와 보건복지부에서 국가고시 응시 자격을 얻어냈다. 교회에서 만난 교수들로부터 대학 교재를 추천받고 한의사 국가고시 수험서를 사서 동네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어려운 한자가 가득한 남한의 한의학 교재를 읽는 게 힘들었다. 북한에서는 기초한자 정도만 배웠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도서관에서 옥편을 잡고 진땀을 흘리고 나자 한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한의사 자격을 딴 후 경희대 한의대학원에서 석사학위도 받았다.

2002년 마침내 ‘광화문 100년 한의원’을 열어 새 삶의 터전을 잡았다. 이후 19년 동안 그는 형편이 어려운 탈북민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고 있다. “어디가 아프다고 얘기해도 말이 달라 못 알아듣는 병원이 많다고 합니다. 나라도 알아주니 환자가 마음이 덜 불편하고 하소연도 할 수 있다고 하네요. 제가 그들보다 먼저 서울에 왔고, 같은 문제를 이미 겪었으니까요.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100년 한의원은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북자병원’으로 불린다. 아픈 곳이 있어 찾아가면 주머니 걱정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석 원장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한의학의 가장 큰 차이는 침 요법입니다. 북한의 침은 아주 크거든요. 그래도 맞고 나면 시원해 탈북민이 그리워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1. 석 원장은 자신이 힘들게 서울에 정착해 자격증을 따고 한의원을 개원하는 과정에서 남한사회에서 받은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무료진료 등의 봉사활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2004년부터 매주 이어온 봉사활동이 지금은 코로나 19로 잠시 보류되는 중이다.

2. 그가 창립하고 이사장으로 있는 ‘하나사랑협회’는 현재 남한과 북한 출신의 의사, 간호사를 비롯한 자원 의료 봉사 인원이 40명으로 늘어났다.

또 하나의 도전
석 원장의 고향은 양강도 갑산이다. 그는 1998년 10월 지금의 아내인 연인과 함께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 왔다. 그 후 결혼을 했고 현재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큰 아들, 고교생인 둘째 아들, 중학생인 딸을 두고 있다. 북한에 두고 온 부모와 삼 형제를 비롯한 가족의 소식은 끊긴 지 오래다. “연기도 없이 사라졌어요. 소리소문없이 증발했다고 해요.” 그저 간단히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탈북 당시 석 원장은 현역 군의관 신분이었다. 남한의 대위계급에 해당하는 북한군 88호 병원 응급실 진료부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소속인 평양의학대학 동의학부를 졸업하고 ‘고려의사’ 자격을 딴 그는 북한 기초의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기초의학연구소는 흔히 ‘만수무강연구소’로 불린다. 아버지가 호위사령부(청와대 경호실에 해당) 고급군관이어서 혜택을 누린 셈이라고 했다.

그가 북한의 현실에 절망을 느끼게 된 것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지방의 군부대병원으로 출장 가서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군인들을 보면서였다. 게다가 외국에서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료 의사들의 얘기를 들으며 남쪽으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함께 탈북을 결심했다. 제3국을 경유하지 않고 탈북 경로를 휴전선으로 선택한 것은 군 장교의 신분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홀몸이 아니었기에 더욱 커다란 모험이었다. 기차를 타면 검문을 받아야 했으므로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서 얻어 타는 등 온갖 수단을 써가며 평양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꼬박 2박 3일이 걸렸다.

그는 남한 정착 3년 만에 한의사국가자격시험에 합격해 의사 면허를 얻었다. 남북한 한의사 자격을 모두 따낸 최초의 기록을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탈북민의 의사자격 기준이 없었다. 1999년 대한한의학회 전문가들의 테스트와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교육부와 보건복지부에서 국가고시 응시 자격을 얻어냈다. 교회에서 만난 교수들로부터 대학 교재를 추천받고 한의사 국가고시 수험서를 사서 동네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어려운 한자가 가득한 남한의 한의학 교재를 읽는 게 힘들었다. 북한에서는 기초한자 정도만 배웠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도서관에서 옥편을 잡고 진땀을 흘리고 나자 한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한의사 자격을 딴 후 경희대 한의대학원에서 석사학위도 받았다.

2002년 마침내 ‘광화문 100년 한의원’을 열어 새 삶의 터전을 잡았다. 이후 19년 동안 그는 형편이 어려운 탈북민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고 있다. “어디가 아프다고 얘기해도 말이 달라 못 알아듣는 병원이 많다고 합니다. 나라도 알아주니 환자가 마음이 덜 불편하고 하소연도 할 수 있다고 하네요. 제가 그들보다 먼저 서울에 왔고, 같은 문제를 이미 겪었으니까요.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100년 한의원은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북자병원’으로 불린다. 아픈 곳이 있어 찾아가면 주머니 걱정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석 원장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한의학의 가장 큰 차이는 침 요법입니다. 북한의 침은 아주 크거든요. 그래도 맞고 나면 시원해 탈북민이 그리워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3. 석 원장은 북한의 한의학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다. 김일성 전 주석이 평소에 즐겨했던 자연요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김일성 장수건강법⟩도 그 중 하나이다.

4. 북한의 전통 한의학인‘고려의학’ 정보가 담긴 ⟨생명을 살리는 북한의 민간요법⟩.

북한 한의학에 대한 자부심
석 원장은 평양 기초의학연구소에서 심장·혈관계 연구원으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복용한 것으로 알려진 유심환(柔心丸), 태고환(太古丸)을 직접 만들고 있기도 하다. 두 가지 약은 각각 스트레스 질환과 노화 방지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는 고려의학에 대한 자부심도 크다. “고려의사는 한방과 양방을 함께 배우죠. 양방 외과에서 수술 집도까지 배웁니다. 북한에서는 보통 한방과 양방 검사를 같이해서 진단을 내립니다. 진맥과 양방 기본검사를 다 해서 그 자료를 바탕으로 진단을 하고 치료는 주로 한방으로 합니다. 제가 고려의학부를 졸업할 당시 제 학년이 30명이었는데 그 중 한 두 명 정도만 양방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교육 기간은 6년 6개월이고, 6개월은 임상실습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인턴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남한처럼 양의학 한의학을 엄격히 분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또 다른 차이점에 주목한다. “북한에서는 한글로 고려의학을 공부합니다. 남한의 한의학 교재는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어 어려웠습니다. 북한에서는 객관식 문제를 풀어본 일도 없었습니다. 북한의 시험은 모두 주관식이고, 답을 작성한 후 말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북한의 한의학은 조선시대 의관 허준(1539~1615 許浚)이 편찬한 ⟨동의보감(東醫寶鑑)⟩(1610)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남북이 분단된 이후 발전 양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북한은 치료의학이 발달했다. 조선 말기 한의사 이제마(1837~1900 李濟馬)의 사상의학을 토대로 체질을 분류해 치료한다. 만성 질환은 한방치료 대상으로 꼽는다. 체질을 개선해야 면역이 형성되고 병과 싸울 수 있어서다. “북한은 한약 처방이 잘 되고 있는 편입니다. 치료 위주의 약 처방이 구체적으로 체질에 따라 배분이 잘 돼 있지요. 임상시험을 통해 객관화·규격화가 돼 있고 효능도 비교적 좋습니다. 또한 침술이 뛰어납니다. 남한에서는 자극을 덜 주기 위해서 얇고 작은 침으로 쓰지만, 북한 침은 아주 굵습니다. 굵은 침이 더 아플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는 이어 ‘환자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본인의 정신력이 우선이고, 그 다음 어떤 의사한테 어떤 약과 치료법을 처방받는가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다.남북한 양쪽의 한의학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북한에 우수한 약재가 많아 남북간의 협력연구가 바람직하지만 현재의 모든 여건이 희망적이지 않아 아쉽다고 석 원장은 말한다.

봉사활동으로 보답
석 원장은 그사이 틈틈이 ⟨생명을 살리는 북한의 민간요법⟩(2003), ⟨등산도 하고 산삼도 캐기⟩(2003), ⟨김일성 장수건강법⟩(2004), ⟨북한의 의료실태⟩(2006) 등 4권의 책도 펴냈다. ⟨김일성 장수건강법⟩은 일본어로도 번역, 출판됐다. 늦었지만 박사학위까지 딸 계획이다.그가 외부 의료봉사를 이어온 지도 어느덧 17년째가 됐다. 한의원을 개원한 지 2년 만인 2004년 다른 탈북 한의사 한 사람과 어르신 무료진료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정착하는 과정에서 남한 국민 세금을 받고 남한 사회로부터 많은 배려를 받았습니다. 보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죠. 게다가 봉사를 하면 저 자신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냥 한없이 기분이 좋지요.”‘탈북의료인연합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봉사활동 조직은 2015년 ‘사단법인 하나사랑협회’로 확대 개편되었으나 석 원장이 줄곧 이사장을 맡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동안 탈북의료인수효가 늘어나고 취지에 공감한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봉사자와 후원자도 늘어났다. 한의사, 물리치료사 등 의료인력 30여 명을 포함해 모두 130여 명의 회원들이 봉사에 참여하고 있다.어떤 일이든 1호의 무게는 남다르다. 석 원장 역시 1호의 짐을 평생 짊어지고 갈 수 밖에 없는 듯하다.

People

대만족의 삶이라 말하는 니코

In Love with Korea 2021 SUMMER 173

대만족의 삶이라 말하는 니코 CULTURE & ART--> 대만족의 삶이라 말하는 니코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Kordonias Nikolaos) 셰프는 어린 시절 맛본 지중해 요리를 오랫동안 즐겁게 만들고 있다. 여러 해를 길 위에서, 다양한 부엌에서 보낸 후 정착한 서울에서 자신의 식당을 경영하며 요리하고 있다. 서울 중심지에 위치한 익선동에서 한 블록 떨어진 작은 골목길에 예상치 못한 그리스문화의 안식처가 손짓한다. 한옥에 들어선 ‘니코 키친’이 토착 그리스 요리를 선보이면서 단골손님을 만들어내고 있다.식당 주인인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셰프, ‘니코’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는 에게해에 있는 사모트라키섬에서 성장한 자신의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들려준다. 이 섬은 날개를 단 승리의 여신 니케를 비롯해 신화의 위대한 신들의 성소가 있는 곳이다.자신의 고향인 이 고대의 섬을 니코는 목가적으로 묘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얀색으로 칠해진 집들로 가득한 그리스의 섬을 떠올리게 한다. “아름답고 조용하고 사람들은 친절해요. 삶의 속도는 느리고요. 사람들은 느긋하고 여유롭죠. 걱정을 하지 않아요. 집이 있고 일이 있으니까요. 삶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아요. 하지만 원하는 대로 살고 있고 행복하죠.”물론 게다가 “아주 좋은 음식”도 있다. 대화에서는 유기농 생산품, 신선한 닭, 사모트라키섬 주위의 코발트 색 바다에서 잡은 맛있는 생선에 대해 풍부한 얘기가 오갔다. 성장기에 엄마와 할머니가 만든 음식이 그를 사로잡았다. “아마도 냄새였을 거예요.”라고 니코는 말한다.이 모든 게 현재의 그의 삶과 일에 대해 말해준다. 2004년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곧바로 다른 음식의 냄새를 알아차렸다. 곧 냄새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에서 요리하는 포장마차의 냄새였고, 아주 달랐어요. 고추, 김치 같은 냄새가 공기에 떠다녔죠.”라고 그는 기억을 되살린다.그는 국제적 정취로 가득한 서울의 이태원에 있는, 지금은 문을 닫은 그리스 식당 산토리노에 일자리를 얻었다. 어린 시절 태권도 수업 외에는 한국에 대한 경험이 없는 그는 한국이 어떤 곳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한국행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이동은 그에게 자연스러웠다. 지중해와 카리브해 지역의 항구 사이를 운행하는 크루즈 배에서 일한 후 그는 뉴욕의 요리학원에서 공부했고 맨해튼에서 명망 있는 셰프들과 일했다. 그 후 지인이 식당을 여러 개 운영하는 캐나다에서 6년을 보냈다. 오너 셰프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는 아침마다 서울 익선동에 자리한 레스토랑 니코키친의 한옥 문을 직접 연다. 그는 자신의 식당을 찾는 손님들이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곁들인 휴식을 즐기며 아름다운 그리스를 상상하길 바란다. 한국에 정착하다이태원에서 일하는 동안 니코 씨는 우연히 산토리노가 들어선 건물에서 일하는 서현경 씨를 만났다. 그들은 오가며 마주치다가 결국 결혼으로 골인했다. 니코는 그리스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서 씨는 이전에 여러 해를 살았던 일본으로 되돌아갈 계획을 보류하고 있었다. “어떤 일들은 그냥 운명적인 것 같아요.”라고 니코 씨는 서울에 완전히 정착하게 된 일에 대해 얘기했다.2018년에 니코 씨와 그의 아내는 ‘니코 키친’을 열었다. 특별히 한옥을 찾아 나선 건 아니었지만 한옥의 건축 양식이 마음에 들었다. 이 집을 샀을 때 불을 먹는 신화적 동물인 해태상 두 개가 있었는데 이전에 이곳에 입점한 카페에 남아 있었던 거였다. 해태상은 꽃나무 화분으로 가득한 작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지키고 있다.니코 키친은 조선왕조의 군인들이 종묘 주위를 순찰할 때 사용한 순라길에서 연결된 골목길에 위치한다. 종묘와 이어진 곳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이 있다. 가까이에는 역사가 오래된 불교 사원이 있고 골목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한국의 전통적인 색동천을 전시하는 색동박물관이 있다.식당은 매일 영업을 하며 니코 씨가 모든 요리를 한다. 그의 아내는 그가 일중독자라고 하지만 그는 아주 행복해 보인다. “이게 제 삶이고 저는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라고 그는 말한다. “저 자신이 음식을 좋아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제가 만든 음식을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또 방문하는 게 좋아요.”점심과 저녁 사이에 니코 씨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이때 그는 서울의 여러 곳을 걸어 다닌다. 궁궐이나 절, 서울 한복판을 흐르는 청계천에도 간다. 팬데믹 전에는 사우나에서 몸을 풀기도 했는데 지금은 참고 있다. 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여유 있게 식사하고 와인을 맛보고 긴장을 푼다. 바로 이것이 니코 씨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며 그가 원하는 식당의 분위기이다. 니코키친의 셰프는 오직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한 명이다. 그가 나고 자란 에개해의 작은 섬, 사모트라키섬의 맛과 가장 비슷한 맛을 내기위해 신선한 그리스식 재료와 레시피를 사용한다. 니코키친의 작은 공간 곳곳에는 그리스를 떠올리는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다. 냉장고의 한 면에는 그리스의 상징적인 지역 사진이 프린팅 된 귀여운 마그넷들이 붙어있다. 식도락가들이 발견한 곳 익선동에서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떨어진 조용한 골목에 위치한 니코 키친은 그냥 지나치다 들어오는 손님이 많지 않다. 그렇지만 이곳은 늘 예약이 꽉 차 있다. 요리 프로그램을 향한 한국인의 채워지지 않는 식욕이 이 식당으로 이어졌고, 니코 씨는 ‘여기GO’ ‘올리브쇼’(올리브 채널) 등 몇몇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손님으로도 심사위원으로도 출연했다. 미디어 노출이 많아지면서 아침 일찍부터 식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전화와 이메일 연락이 온종일 오게 되었다. 니코 씨는 텔레비전 출연의 혜택을 인정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요리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메뉴는 그리스 가정식을 바탕으로 한다. 가지와 다진 소고기로 만든 그리스 전통 음식인 무사카는 지속적으로 손님들이 찾는 요리다. 페타 치즈를 넣은 그리스 샐러드, 브라타 샐러드, 치킨 수블라키와 새우 사가나키도 인기 메뉴다.그리스 음식이 아직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기 때문에 피자나 파스타도 메뉴로 제공된다. 하지만 니코 씨 자신만의 스타일로 직접 만든 사워 반죽을 사용해 만든다. 퓨전 메뉴를 선택한 건 좀 더 자유롭게 요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기분이 날 때면 스페인 요리나 이태리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자유로움을 좋아한다.하지만 그가 만드는 음식의 핵심은 항상 같다. 건강한 지중해 스타일의 음식으로 신선하고 자연의 재료로 만든 음식이다. 대부분 채식이고 무설탕에 튀김은 최소로 한다. 과거에는 그리스 식재료를 구입하기 어려웠는데 요즘은 원하는 것을 온라인으로 모두 구할 수 있다. 특정한 치즈나 다른 재료를 급하게 구해야 하면 출근길에 그가 아직 살고 있는 이태원의 가게에 들르면 된다.대부분의 식당처럼 니코 키친 역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경영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리스 대사관의 직원들과 근처 절의 스님들을 포함해 많은 손님들이 단골이다. 불교 경전의 여러 장면을 묘사한 다채로운 색의 절 외관이 식당의 정문 위 너머로 보인다. 니코키친은 테이블 4~5개가 전부인 작은 레스토랑이고 모든 좌석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니콜라오스와 그의 아내는 이 곳을 찾는 모든 손님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니코키친은 테이블 4~5개가 전부인 작은 레스토랑이고 모든 좌석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니콜라오스와 그의 아내는 이 곳을 찾는 모든 손님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앞날들자신이 선택한 제2의 고향인 한국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본 후 니코 씨는 잘 관리된 빌딩과 거리, 그래피티 같이 공공 지역의 흉물이 없는 것, 그리고 교양 있고 친절한 한국인에 대해 얘기했다. “여기는 천국 같아요. 완벽한 곳이에요. 그래서 이곳에 사는 게 행복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그는 그리스를 많이 그리워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팬데믹이 지나가고 일상이 회복되면 사모트라키섬에 가보고 싶어 한다. 좀 쉬면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좋은 음식을 맛보고 바다낚시도 하고 싶다. 그는 자기 인생의 다음 단계를 그려보기도 한다. 그건 퓨전 음식 없이 온전히 그리스 요리만을 제공하는 좀 더 큰 식당을 여는 것이다. 그동안 상황을 살펴왔고 이제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한 곳에서 모두 실현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요. 물론 돈도 벌고요.”라고 그는 말한다.“좋은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이것이 니코 씨의 간단한 철학이다. 그렇게 말하자 그의 아내가 끼어들어 응수하며 비밀을 폭로했다. 니코 씨가 햄버거를 좋아하고 가끔은 켄터키 프라이 치킨을 즐긴다고. 음식이 그를 한국으로 이끌었고, 그를 여기에 붙들어 두었으며 그를 행복하게 한다. “하루 일과가 끝날 때 만족스럽지 않으면 피곤해집니다. 하지만 만족스러워 미소 지을 수 있으면 모든 문제와 피로는 사라지죠.” 조윤정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추억을 선물하는 가게

An Ordinary Day 2021 SUMMER 177

추억을 선물하는 가게 CULTURE & ART--> 추억을 선물하는 가게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젊은층에게는 새로움을 안겨주는 ‘레트로’가 주요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서울의 옛 도심 종로의 레트로 열풍을 이끌고 있는 한 레코드 가게를 찾았다.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는 러시아의 문학 이론가이며 작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Victor Shklovsky 1893~1982)가 처음 사용한 문학용어이다. 익숙한 이야기 구조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친근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지루함을 줄 수도 있다. 반면 어려운 형식의 구조는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키고 흥미와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세상은 쉽고 편리하고 간단한 것을 지향하고 있는 듯하지만, 인간의 심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곳을 꿈꾸고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기대한다.레트로스펙트(retrospect), 또는 요즘 ‘레트로’라고 줄여서 쓰이는 말은 회상, 추억이라는 의미지만 ‘과거의 추억이나 전통 등을 그리워하며 그것을 본뜨려는 성향’이란 의미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새것은 헌것이 되고 헌것은 새로운 세대의 새로움이 된다. 노년은 젊음을 그리워하고 젊음은 노년이 누렸던 것을 동경한다. 역시 인간은 복잡하다. 레트로 감성이 한껏 풍기는 턴테이블이 돌고 LP판 위에 스타일러스를 올리는 순간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서울레코드를 채운다. 요즘처럼 깨끗한 음질은 아니지만 턴테이블이 주는 특유의 감성적인 사운드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황승수 대표 역시 오프라인 레코드 시장이 부활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세대를 뛰어넘어 서울레코드를 찾는 손님들을 위해 클래식, 재즈, 국악, 트로트, 로큰롤, 올드팝, 뮤지컬, OST, K-팝 등 장르별로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새롭게 주목받는 LP 제2의 성황기를 맞은 서울레코드는 항상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이곳을 찾는 누군가는 추억에 젖고 누군가는 아날로그 감성이 주는 매력에 빠진다. 1980년대 CD가 보급되기 전까지 비닐은 20세기 음악 재생의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 CD와 MP3, 음원 생산으로 쇠퇴기를 맞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비닐이 주는 따뜻한 감성을 찾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서울레코드의 내부는 리모델링을 통해 현대적으로 꾸며졌지만, 단층짜리 옛 건물은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종로3가 거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종로3가에 있는 ‘서울레코드’는 낯설고도 익숙하고, 오래된 동시에 새로운 공간이다. 1976년에 문을 열었고 지금의 황승수(黃昇洙) 대표는 이곳의 네 번째 주인이다. LP와 카세트테이프가 CD로 바뀌고, DVD가 반짝 성황을 누리다가 사라진 이후 스트리밍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음반업계의 전망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 와중에 45년을 한자리에서 버틴 40평 남짓한 레코드가게는 그 어떤 레코드보다 희귀할지도 모르겠다.“첫 번째 사장님이 2000년까지 하다가 mp3가 나오면서 가격경쟁이 안 돼서 정리하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음반은 소유하는 것보다 듣기 위한 게 목적이었으니까 사람들이 더 이상 앨범을 사지 않을 것 같았죠. 당시 직원이었던 분이 가게를 인수하면서 두 번째 사장님이 됐어요.처음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한류가 시작되면서 외국손님들이 많이 왔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운영을 하다가 세 번째 사장님에게 가게를 넘겼어요. 두 번째 사장님 밑에 있던 부장님이 가게를 계속 운영했는데 그때 제가 직원으로 들어왔어요. 제가 일을 시작하고 3년째 되었을 때 세 번째 사장님이 가게를 정리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갑자기 인수받게 되었어요.”2015년의 일이었고 그는 40대 초반이었다.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으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돈을 벌 궁리를 해야 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다가 ‘하고 싶은 일보다 잘 알고 있는 일’을 하게 되었다.“형이 비디오 유통업체에 있었어요. 비디오, CD, DVD 같은 것들은 유통구조가 다 연결되어 있거든요. 어릴 때는 아버지가 전축 시스템 가져오셔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10대 때는 형을 따라 레코드 회사에도 가봤어요. 그러면서 이쪽 세계를 잘 알게 되었어요.”처음 직원으로 일하던 시기에는 손님의 연령대가 꽤 높았다. 가게 뒤에는 세운상가(1968년 완공된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 길 건너에는 종묘(宗廟 1394년에 착공한,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 옆에는 탑골공원(塔골公園 1897년, 영국인 브라운(J. M. Brown)의 설계로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내 공원)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젊은 세대들은 보기 힘든 동네이기도 하다. LP를 찾는 40, 50대가 그나마 젊은 쪽이었고 카세트테이프를 사려는 노인들이 주고객이었다. 그러다가 분위기가 바뀌었다. ‘힙(hip)’하다는 의미에서 ‘힙지로’로 불리게 된 을지로, 새로운 핫스팟으로 떠오른 한옥마을을 찾는 외국인과 젊은이들이 늘어났고, 음반업계에서 완전히 사라질 줄 알았던 LP가 신선한 아이템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손님들의 연령대가 낮아졌다. 어쩌면 손님들은 물건이 아니라 추억을 구하러 오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세상에서 익숙한 것을 구하고, 익숙한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다. 추억의 공유“우리 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서 듣는 게 중요했어요. 지금은 스마트폰과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으니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음반업계는 소멸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제 듣는 것보다 소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긴 거예요. 스마트폰 화면에 음반 재킷 하나 떠 있는 걸로 성이 안 차는 거죠. 그래서 LP를 사는 게 아닐까요? 젊은 사람들이 와서 LP에 바늘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걸 보면서 저도 놀랐어요. 조금 더 깨끗한 소리를 위해 CD가 나온 거잖아요. 세상은 이렇게도 바뀌고 저렇게도 바뀌는구나 싶어요.”이제는 특정 세대가 아니라 다양한 세대가 이곳을 찾는다. 딸들이 아버지를 데려오기도 하고, 부모가 아이들을 데려와서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고른다.“어릴 때 듣고 좋아하던 곡인데, 가사도 조금 알고 멜로디도 기억하는데 제목은 모른다며 물어보는 분들이 있어요. 나이가 들어 컴퓨터도 할 줄 모르고 혼자 사시는 분들이에요. 이렇게 저렇게 추리해서 찾아드리면 감동하시고, 그걸 보면 저도 기분이 좋죠.”1960년대에 유명세를 떨쳤던 밴드의 곡이 혹시 있느냐고 물어본 사람이 있었다. 곡을 찾아서 틀었는데 놀랍게도 노래를 부른 사람과 손님의 목소리가 흡사했다. 혹시 본인이 부른 곡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음반을 찾아다녀도 없어서 듣고 싶어도 못 들었던 곡이라 했다. “어릴 때부터 이 동네에서 살던 분인데, 집안이 어려워서 학교를 못 다니고 영화 포스터 붙이는 일을 했다는 손님도 있었어요.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밥을 굶고 영화를 봤다는 거예요.” 길고도 복잡한 타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손님으로 왔다가 추억을 공유하게 된 사람들은 마음에 온기를 품고 돌아가고, 사탕이나 귤, 음료수 같은 걸 들고 다시 찾아와 정을 나눈다. 아름다운 배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아홉 시 반에서 열 시 사이에 서울레코드의 셔터가 올라간다. 문은 아내가 열고 황대표는 영두 시에서 한 시 사이에 나와서 교대한다. 저녁 일곱 시 반에 문을 닫는데, 장사가 안 되는 날은 더 늦게까지 열어두기도 한다. 저녁 일곱 시 반 이후, 셔터가 내려진 레코드가게 앞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이른바 ‘내일의 신청곡’ 시간이다.“가게 앞에 빨간 우체통이 있어요. 신청곡을 써서 넣으면 틀어드려요.”하루 동안 들어온 신청곡을 비롯해 비슷한 분위기의 곡들을 더해서 파일을 만들고, 가게 문을 닫은 후 틀어 놓는다. 음악은 밤 열두 시까지 흘러나온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춤을 추기도 한다. 어둠이 내린 밤의 거리,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삶은 어떻게든 흘러간다는 생각이 든다.“이 안에서 놀거리를 찾는 거예요. 일주일에 일요일 하루 쉬는데, 그날도 음악 듣고 오디오 만지작거리고 영화 보고 그래요. 어떻게 보면 취미를 다 여기 가져다놓은 거예요. 아내가 그래요. ‘너 놀려고 이거 차린 거지?’”옆에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사장님의 놀이터를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하고 한마디 거든다.“처음부터 크게 돈을 벌겠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저 유지하면서 좋아하는 음악 듣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저는 여기서 놀고 손님들은 찾던 음악을 구해가고요.”어쩌면 손님들은 물건이 아니라 추억을 구하러 오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세상에서 익숙한 것을 구하고, 익숙한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다. 그의 말처럼 세상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흘러간다. 그 흐름 안에 아름답고 정다운 음악이 있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Ahn Hong-beomPhotographer

아픔이 불러일으키는 보편적 공감

Interview 2021 SUMMER 173

아픔이 불러일으키는 보편적 공감 CULTURE & ART --> 아픔이 불러일으키는 보편적 공감 그래픽노블 작가 김금숙(Keum Suk Gendry-Kim 金錦淑)은 역사적 소재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그려 왔다. 제주 4.3 항쟁의 비극을 그린 『지슬(Jiseul)』(2014),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다룬 『풀(Grass)』(2017), 조선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의 삶을 기록한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2020) 등 여러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해외에서 출판되었다. 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얘기를 다룬 김금숙(Keum Suk Gendry-Kim 金錦淑) 작가의 그래픽 노블 『풀』의 한 장면.2. 그는 주로 굵직한 역사적 주제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화에 담는다. 지난해 10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유례없이 온라인 중계로 진행된 뉴욕 코믹콘(New York Comic Con)에서 하비상(Harvey Awards) 수상작들이 발표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그린 그래픽노블 『풀(Grass)』도 그중 하나였는데, 이 작품은 ‘최고의 국제도서(Best International Book)’ 부문에서 수상했다.2017년 국내에서 출판된 『풀』은 2019년 캐나다의 만화 전문 출판사 Drawn and Quarterly에서 영어판이 출간된 이래 지속적으로 반향을 일으켰고, 2019년 『뉴욕타임스』와 『더 가디언』이 각각 ‘The Best Comics of 2019’와 ‘The Best Graphic Novels of 2019’로 선정했다. 이듬해에도 크라우제 에세이상(The Krause Essay Prize), 카투니스트 스튜디오 최우수 출판만화상(Cartoonist Studio Prize)을 수상하는 등 10곳에서 상을 받았다.작가는 하비상 수상자로 발표된 뒤 두 달이 지난 2020년 12월에야 태평양을 건너 도착한 트로피를 받았다. 코로나19 때문에 실제 트로피를 받는 데도 우여곡절을 겪은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은 여러 언어로 번역돼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풀』은 최근 포르투갈어와 아랍어로도 번역돼 출간됐고, 지난해 가을 나온 신작 『기다림(The Waiting)』은 프랑스어판이 출간되었으며 영어, 포르투갈어, 아랍어, 이탈리아어 출판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 4월 김 작가를 그가 살고 있는 강화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회화와 설치미술을 전공했는데 그래픽노블 작가로 이름을 얻게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한국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스트라스부르 고등장식미술학교(École supérieure des arts décoratifs de Strasbourg)에서 설치미술을 배웠어요. 생활고 때문에 한국 만화가들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을 아르바이트 삼아 맡았는데,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게 되어 그곳에 소개한 한국 만화 작품이 100권이 넘어요.그러던 어느 날 현지 한인 신문사로부터 만화를 그려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저 역시 만화 번역을 하면서 이 장르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참이었죠. 작가의 생각을 종이와 연필만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낀 거예요. 하나씩 그리다 보니 연재 작품 수도 여럿 늘어났죠. 만화를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말풍선이나 대화 표현을 어떻게 해야 더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과 노력을 많이 했어요.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있나요? 스토리 면에서는 한국 작가들의 영향이 있었죠. 특히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만화로 잘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이희재(李喜宰), 오세영(吳世榮) 같은 작가들이 떠오르네요. 그림 쪽으로 보면 저는 구상보다는 추상, 그리고 설치나 조각 작업을 주로 했기 때문에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화풍에 있어서 제게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에드몽 보두앵(Edmond Baudoin)이나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그래픽노블로 그린 호세 뮈누즈(Jose Munoz)가 있어요. 특히 흑백의 붓터치를 강조한 부분에서요. 그밖에도 조 사코(Joe Sacco)나 타르디(Tardi)도 제게 여러모로 영향을 줬어요.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 많은 편인데, 초기작 중에서 가장 소개하고 싶은 작품을 꼽는다면요.저는 자전적인 이야기, 일상을 겪으면서 느낀 점들, 또 제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두루 엮습니다.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소재들을 제가 겪은 일들과 연결시키면서 간절하게 와닿는 이야기들을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하죠. 그중 『아버지의 노래(Le Chant De Mon Pere)』(2013)는 한국의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평범한 가족이 경제적 이유 때문에 서울로 이주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았어요. 그 시절 힘들었던 가족사에 당시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모습을 투영했죠. 어린 시절의 추억도 담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판소리를 하셔서 어릴 적 마을에서 누가 돌아가시면 아버지가 상여 소리를 도맡곤 하셨죠. 하지만 서울에 와서는 동네 누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아버지가 소리를 하실 일도 없었어요. 초기작에서 아버지를 다뤘다면 최근작에서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기다림』(2020)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작품이에요. 20년 전 파리 유학 당시 어머니가 오셨는데, 그때 진중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어머니의 언니, 제게는 큰이모 되시는 분이 북한에 계시다고요. 외가댁 식구들이 고향인 전남 고흥을 떠나 만주로 가던 길에 평양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그때 일이 생겨 어머니는 남쪽으로 내려오고 큰이모는 그곳에 남았던 거죠. 어머니가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 그런 가족사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이산가족 상봉 사업이 진행될 때도 우선순위에서 밀려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누군가 해야 하는데 내가 하자 마음먹었고, 어머니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가 됐죠. 그런데 이산가족 문제는 내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도 전쟁을 겪고 있는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인류 보편적인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궁극적으로 전쟁 때문에 약자들이 희생되고 난민이 되어 뿔뿔이 흩어지는 문제를 담고 싶었습니다. 『풀』 역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이 인류 모두의 비극이라는 시각에서 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구상한 시기를 따지고 올라가면, 1990년대 초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게 계기가 됐어요. 이후 프랑스에 가서도 위안부 문제에 관한 통역을 맡은 적이 있어서 자료를 읽으며 더 자세히 알게 됐고요. 그래서 2014년 앙굴렘 국제 만화페스티벌(Festival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inée d'Angoulême) 출품작으로 「비밀」이라는 단편을 냈어요. 위안부 피해자의 삶과 고통을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드러내고 싶어서요. 그런데 이 작품은 단편이라 무거운 주제를 다 담지 못해 아쉬웠어요. 그래서 꼬박 3년 동안 매달리며 더 많은 고민을 거쳐 장편으로 만들었어요. 위안부 피해자의 문제를 약자가 당하는 폭력, 그리고 제국주의와 계급적 문제로 접근했죠. 작품에 나오는 이옥선(李玉善) 할머니를 만나고 인터뷰하면서 안타까웠던 게 있어요. 할머니가 전쟁이라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희생자였는데, 전쟁 후에도 침묵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작품이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풀』만 해도 14개 언어로 번역됐는데 이처럼 여러 문화권에 넓게 파급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제 작품들은 프랑스에서 번역돼 나온 책이 제일 많긴 해요. 『풀』의 경우 일본어판을 낼 때 그곳 분들이 앞장서 크라우드 펀딩으로 출간에 도움을 준 일이 놀라웠어요. 무엇보다 번역가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해요. 제 이야기가 독특하고 또 사람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내용인데 그런 점을 다른 문화권에 전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준 메리 루(Mary Lou), 영어로 번역해 준 미국의 한인 번역가 자넷 홍(Janet Hong), 일본어 번역을 맡은 스미에 스즈키(Sumie Suzuki) – 이런 분들의 도움으로 각 나라 독자들에게 의미가 잘 전달되었어요. 지금 계획하고 있는 다음 작품이 있나요?키우는 개들을 매일 어김없이 산책시켜 주고 있어요.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강아지와 인간의 관계를 다룬 작품을 구상해 밑그림까지는 그려 놓았어요. 올해 여름 출판될 예정이고, 제목은 『개』로 정했어요. “위안부 피해자의 문제를 약자가 당하는 폭력, 그리고 제국주의와 계급적 문제로 접근했죠.” 1. 김 작가는 요즘 강아지와 인간의 관계를 다룬 작품 『개』를 준비하고 있다. 올 여름 서울에서 마음의숲(maumsup) 출판사에 의해 출간될 예정이며, 내년 초 프랑스 Futuropolis의 출간도 기다리고 있다. 2. 김 작가의 그래픽 노블(왼쪽부터 시계 방향): 2019년 캐나다 Drawn & Quarterly에서 출간된 『풀』 영어판, 지난해 국내 출판사 딸기책방(Ttalgibooks)에서 나온 신작 『기다림』, 지난해 국내 출판사 서해문집이 발간한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올해 5월 프랑스 Futuropolis에서 간행된 『기다림』 불어판, 올해 9월 Drawn and Quarterly가 출판할 예정인 『기다림』 영어판, 2017년 국내 보리 출판사에서 출판된 『풀』, 지난해 일본 Korocolor(ころから)가 발행한 『풀』 일어판, 지난해 브라질 Pipoca & Nanquim가 포르투갈어로 출간한 『풀』. 김태훈(Kim Tae-hun 金兌勳)『주간경향』 기자

주식에 빠진 2030세대

Lifestyle 2021 SUMMER 181

주식에 빠진 2030세대 CULTURE & ART--> 주식에 빠진 2030세대 코로나19로 인한 우려와 혼돈의 시간이 금융 투자를 부추기는 강력한 바람이 됐다. 팬데믹의 초기에 증시가 급락하면서 평소 주식에 무관심하던 이들까지 대거 투자에 뛰어든 것이다. 이 중심에‘2030세대’ 가 있다. 올해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29세 임수빈(Im Su-bin 林秀賓)씨는 최근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30만원으로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 계속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면서 일자리를 찾고 있는데, 인턴 자리는 구할 수 있으나 정규직 취업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절박한 상황에 우선 작은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주식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지난해 12월 예정됐던 결혼식을 올해 9월로 연기한 33세 프리랜서 번역가 김아람(Kim A-ram 金娥濫)씨도 얼마 전 주식에 입문했다. 계속되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결혼식 참석 인원이 50명 이하로 제한되어 꼭 참석할 가족, 친구들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결혼식을 미루게 되자, 신혼여행 때 쓰려고 모아둔 돈을 짧은 시간이지만 주식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는 “주식 시장이 호황이니 몇 십 만원이라도 벌어서 신혼살림에 보탤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주식 투자에 발을 들여놓은 2030세대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이런 현상을 나타내는 신조어도 잇달아 생겨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동학개미운동’이다. 젊은 개인투자자들이 기관과 외국인 투자자에 맞서 급락한 국내 주식을 대거 사들인 상황을 말하는데, 1894년 외세에 대항해 일어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에 빗댄 말이다. 여기서 ‘개미’는 월급 받으며 매일 일하는 젊은 회사원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주린이’이도 요즘 새로 등장한 말이다. ‘주식’과 ‘어린이’를 합한 단어로, 주식에 대해 잘 모르며 거래를 시작한 초보자를 가리킨다. 이 같은 현상은 숫자로도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예탁결제원(Korea Securities Depository 韓國預託決濟院)이 4월 1일 발표한 ‘12월 결산 상장법인의 소유자 현황’분석 결과에 따르면, 2020년 말 개인의 주식 보유액은 총 662조원으로 2019년 말 419조원에서 243조원 증가했다. 전체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개인의 비중도 전년에 비해 3.6%포인트 증가한 28%였다. 새로 주식 투자를 시작한 개인은 약 300만명으로 전체 개인 투자자 914만명의 32.8%에 달했다. 특히 지난해 주식 투자를 처음 시작한 300만명 중 53.5%인 160만명이 30대 이하였다. 성별로는 남성의 보유 금액이 489조원으로 여성의 173조원보다 많았다. 그러나 증가율로 보면 여성의 보유액이 전년 대비 77%(97조원→173조원) 늘어나, 남성의 증가율 52%(321조원→489조원)보다 높았다. 젊은 여성들도 새로이 주식 투자에 눈을 뜬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주식 투자에 뛰어든 2030대가 급격히 늘어나며 다양한 모바일 주식 어플리케이션들이 등장했다. 증권사들은 이들 ‘개미군단’을 타깃으로 고객 확보를 위해 저마다 이벤트도 펼치고 있다. ©freepik 젊은 개인 투자자들지난해 9월 미국 경제전문지 블룸버그(Bloomberg)가‘한국 밀레니얼 세대의 단타 투자 현상(Broke Millennials Turn to Day Trading to Strike It Rich in Korea)’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 젊은 세대의 절박한 투자 현상을 심층 분석했다. 즉 전년 대비 48% 증가한 개인 투자자의 거래가 코스피 시가총액의 65%를 차지하고 그 중의 대다수가 20대에서 30대 사이의 새내기 젊은 투자자들이며 이들 가운데 다수는 주식 투자를 위해 빚을 내고 있다는 얘기다.그렇다면 한국 2030세대는 왜 주식시장에 몰입하고 있을까. 첫 번째로는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주식 시장이 수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이다. 저금리가 굳어지면서 한동안 젊은 투자자들의 자금이 갈 곳을 잃었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상황 속에 가라 앉았던 주식시장으로 돈이 몰리면서 주가가 큰 폭으로 뛰었다. 이에 투자처를 고민하던 젊은층이 주식시장으로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2020년 1월 2일, 코스피지수는 2175.17을 기록한 뒤 같은 해 3월까지 하락세를 기록했다. 그러다가 각국 정부가 긴급 재난지원을 위한 자금을 풀고 백신 개발 소식이 이어지며 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주식시장이 눈에 띄게 활기를 찾았다. 올 1월 4일 코스피지수가 3000선을 넘으며 현재도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이와 함께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심리가 청년세대 투자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의 저변에는 하락하고 있는 청년층의 취업률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더욱 얼어붙은 2020년의 한국 고용시장은 특히 젊은 세대에게 가혹했다. 통계청의 고용동향 자료에 따르면 2020년 12월 현재 20대 취업자는 351만명으로 2019년 동기 대비 3.9%p 하락했다. 코로나19 사태로 모든 연령층의 고용률이 감소했지만 10대가 1.5%p, 30대가 1.9%p, 40대가 1.6%p, 60대 이상이 0.1%p 감소한 것과 비교하면 20대의 감소율이 가장 크다. 고용률의 하락에 따라 실업률은 상승했다. 2020년 12월 20대의 실업률은 전년도 동기 대비 0.9%p 늘었다. 절박한 노력취업난에 내몰린 젊은 세대를 더욱 절망케 하는 것은 급등하는 주택 가격이다. 정부의 잇따른 주택난 해결 대책에도 불구하고 한국 인구의 거의 절반이 모여 사는 서울의 아파트 시세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두 배까지 올랐다. 내 집 마련의 꿈이 멀어진 젊은 세대는 자연히 결혼도 미루게 된다. 실제 2020년 전국의 결혼 건수는 관련 통계가 시작된 1970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통계청 ‘2020년 혼인, 이혼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혼인 건수는 21만4000건으로 2019년보다 10.7% 감소했다. 온라인 서점 플랫폼 인터파크에 따르면 올 해 1월부터 3월까지 주식·투자·펀드 분야의 도서 판매량과 매출액이 전년 동기간 대비 각각 5배씩 증가했다. 열풍의 파장주식을 주제로 하는 TV 예능 프로그램도 최근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전에는 주로 경제 채널에서만 주식 방송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연예 전문 채널 프로그램에서도 주식 이야기하는 장면을 쉽게 만날 수 있다.대표적인 예로 카카오TV가 지난해 9월 시작한 ‘개미는 오늘도 뚠뚠’이 있다. 인기 연예인 노홍철(Noh Hong-chul 卢弘喆)과 딘딘(DinDin)이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출연자가 실제로 자신들이 개설한 증권사 계좌로 출연료를 받고, 이를 투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청자의 반응이 호의적이다. 특히 주식을 처음 시작하는 젊은층의 공감을 얻으며 방영 플랫폼을 확장해 넷플릭스를 통해서도 방영되고 있는데, 매회 평균 조회 수가 200 만회에 이른다. 지상파 방송국인 MBC도 올 3월 파일럿 형태로 주식 버라이어티 토크쇼 ‘개미의 꿈’을 선보였다. 2부작으로 편성된 이 프로그램에서는 경제 전문가와 연예인 패널들이 나와 주식 투자의 기본 지식을 자세히 설명했다. 한편 SBS의 오래 된 인기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은 올 2월, 특집으로 모의 주식투자 대회를 진행했고, 또 다른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는 3월 인기 호스트 유재석이 2030세대 주식 투자자 3명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여줬다. ‘주린이’들에게 주식에 대한 정보와 유머를 선사하는 예능 프로그램 이 시즌 4에 이를 정도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Kakao Entertainment) 취업 플랫폼 잡코리아의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중 3명이 주식 투자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 절반은 주식 투자를 시작한 지 채 1년이 안 됐다고 답했다. ©동대신문 경주 전문가들은 젊은 세대의 주식 열풍이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분석한다. 박성희 (Park Sung-hee 朴性熙) 한국트렌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차곡차곡 월급을 모아 자동차를 사고, 내 집 마련하기를 바라던 이전 2030세대와 지금의 2030세대는 완전히 다르다. 요즘 2030세대에게 자동차는 빌리면 되는 것, 치솟은 부동산은 너무 먼 이야기가 됐다”며 “취업이 어렵고, 평생직장도 사라지고 있어 요즘 젊은 세대는 먼 미래를 위한 저축보다는 소액으로 지금 바로 투자해서 수익을 낼 기회를 노린다. 특히 코로나19이후로 이 같은 추세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해외여행도 갈 수 없는 상황에 이들은 비대면 투자처를 알아보게 되고, 이 같은 갈증에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할 수 있는 주식 투자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라예진(Ra Ye-jin 羅禮眞)중앙일보 S 이코노미스트 기자 (Reporter, Economist, JoongAng Ilbo S)

온라인으로 즐기는 취미 생활

Lifestyle 2021 SPRING 467

온라인으로 즐기는 취미 생활 2019년 한국에는 취미로 뭉치는 소모임 활동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이 ‘살롱 문화’는 2020년,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온라인 활동으로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간편하게 배울 수 있는 자수 강좌는 온라인 클래스 플랫폼 ‘하비풀’의 인기 클래스다. 쉽게 배울 수 있고 집안 장식에도 도움이 되는 온라인 취미 클래스들이 늘고 있다. © HOBBYFUL 30대 직장인 이모씨는 와인을 좋아한다. 그는 와인의 향기와 맛을 음미하며 마음 맞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서 큰 즐거움을 느낀다. 홈베이킹도 온라인 취미 교실의 인기 종목이다. 그 밖에도 자수, 뜨개질, 언어, 음악, 요리 등 온라인 클래스의 영역이 점점 확장되는 추세다. © CLASS 101 2020년 9월 20일 군산월명체육관에서 열린 '2020 MG새마을금고 KBL 컵대회' 울산현대모비스와 창원LG의 경기에서 코로나 19로 경기장을 찾지 못한 '랜선 응원단'이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취미를 나누는 소모임 2019년 이씨는 와인을 더 깊이 알고자 한 작은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30대 남녀 10여 명으로 구성된 이 그룹은 매주 금요일 저녁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 장소에서 모임을 가졌다. 서로 안부를 묻고 가벼운 대화로 시작해 매주 다른 와인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눈 뒤, 함께 맛보는 순서로 이어졌다. 한때 스위스에 가서 좋은 와인에 맛있는 치즈를 먹는 꿈을 꾸었던 이씨는 이 모임을 통해 작은 소망을 이루어 가는 기쁨을 느꼈다. 비록 알프스행 비행기를 타지는 못했지만. 같은 취미를 가진 또래의 남녀가 비슷한 성비로 만나 분위기도 화기애애해서 한 주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고, 궁금증과 설렘으로 한 주를 보내곤 했다. 회사 밖에서 만날 수 있는 또래들과의 새로운 세상이었다. “언제 다시 모임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어요. 지금의 생활이 꿈이라면 얼른 깨어나기를 바랄 뿐이에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이 모임은 이제 마치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요즘 그의 낙이라고는 늦은 밤 거실에 앉아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며, 혼자 와인을 홀짝거리는 게 전부다. 퇴근 후 그저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는 날도 있다. 비슷한 나날이 해를 넘겨 이어지고 있다. 당장은 서로의 대화 온도나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래도 “재밌다”거나 “유익하다”는 참여자들의 리뷰를 보면 온라인 활동에 큰 장애물은 없어 보인다. 만날 수 없다면 화상으로 “화상 채팅 프로그램 줌(Zoom)으로 모임을 진행합니다.” 전체 회원 수 67명인 서울의 한 독서 모임은 최근 ‘소모임(Somoim)’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온라인으로 활동을 계속한다고 공지했다. 지난 해 말 정부가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두 번째 가장 높은 2.5단계로 연장한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방역조치에 따라 서로가 읽은 책의 감상을 온라인 대화로 나누고 소통하자는 제안이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회원들이 같은 테이블에 모여 앉아 떠오르는 영감을 공유했을 ‘글쓰기 모임’도 상황은 비슷하다. 전체 회원 234명인 서울의 한 글쓰기 모임은 비대면 화상회의를 제공하는 ‘구글 미트(Google Meet)’로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 처음에는 온라인으로 글쓰기 모임을 한다는 것이 낯설었던 회원들도 이내 서로의 글을 독서하듯 채팅으로 공유하는 방식으로 갈증을 풀게 되었다. 그 밖에도 ‘문토(Munto)’, ‘문래당(Moonraedang)’, ‘트레바리(Trevari)’, ‘프립(Frip)’ 등 국내에는 ‘소셜 살롱’을 표방하며 다양한 취미를 공유하는 커뮤니티 플랫폼들이 있다. 이들 중 ‘트레바리’는 독서에 특화한 플랫폼이다. 2015년 시작된 이 커뮤니티에서는 현재 400여 개의 독서 모임을 통해 6천 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 중이다. 이들은 대부분 한 달에 한 권 정도의 책을 읽으며, 매달 1회씩 총 4회 모임을 갖는다. 물론, 트레바리도 정부의 방역조치에 따라 현재는 오프라인 모임을 취소한 상태다. 원하는 회원들에게는 참가비의 일부를 돌려주고, 온라인 화상채팅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당장은 서로의 대화 온도나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래도 “재밌다”거나 “유익하다”는 참여자들의 리뷰를 보면 온라인 활동에 큰 장애물은 없어 보인다. 여가 활동 플랫폼 프립에서 살펴본 한 요리 모임은 마스크 착용과 손 소독제 비치, 발열 체크 등 철저히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이뤄지고 있다. 개인 별 조리도구, 장소와 재료 등이 필요해 대면활동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참가 인원 다섯 명을 넘지 않는 선에서 등산이나 트래킹 등을 하는 운동모임도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요리나 운동을 온라인 활동으로 병행하는 모임도 있다. 밀키트를 배송 받아 회원들이 각자의 집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등산’ ‘수영’ 등의 해시태그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남겨 수행 정도를 서로 공유하는 등 저마다 대책을 찾고 있다. 코로나 19로 휘트니스 센터에 갈 수 없어 스마트폰을 이용한 홈 트레이닝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유튜브 채널이나 온라인 클래스 플랫폼에는 실시간 새로운 홈 트레이닝 콘텐츠가 업로드된다. © LG유플러스 살롱 문화 2019년 4월,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Embrain Trend Monitor)가 전국의 만 19세~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활동 중인 모임’을 조사했다. 이 중 정기적으로 모임활동을 한다는 906명에게 모임의 성격을 묻자, ‘취미와 관심사에 따른 불특정 다수와의 모임’이라는 응답자가 26.2% 였다. 학교와 회사 등 기존 인간관계에서 파생된 형태라는 답변(67.6%)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지만 새로운 경향임에는 틀림없다. 평소 모임이나 동호회 활동의 필요성을 느낀다는 응답자(749명) 중 38.9%가 ‘취미, 또는 관심사’에 집중하는 모임 참석이 필요하다고 한 점도 눈여겨 볼만 하다. 어쩌면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탈출구를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대답에는 30대의 비중이 가장 높았는데, 이들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소규모 취미활동 커뮤니티, 즉 ‘살롱 문화’의 주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전체 응답자의 73.5%에 이르는 735명이 향후 여행 동호회에 참석하고 싶다고 했으며, 운동•스포츠(18.1%), 외국어•언어(15.9%), 봉사활동(15%), 영화(14.3%), 책•글쓰기(14.1%) 등의 모임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이런 인식은 개인화된 사회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나’를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내 취향과 관심사가 누군가를 만나는데 중요한 조건이 된 것이다. 와인, 독서, 여행, 음악, 요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살롱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이유다. 작은 개인적 경험 오프라인 모임이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온라인의 형태로 변화하는중에 필자도 온라인 강좌를 체험해보기로 했다. 시작하기 전에는 자신감도 있었다. 프립에서 ‘티매트(tea mat)’ 뜨개질 키트를 주문했다. 호스트의 안내 페이지에서 본 것처럼 뚝딱 작품을 만들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생전 처음 뜨개용품을 만지면서 자신감은 이내 자괴감으로 변했다. 호스트가 보낸 URL에서 영상을 봤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호스트의 손과 달리 내 손은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아, 직접 앞에서 수업을 들었다면 더 쉽고 자세하게 요령을 알 수 있었을 텐데’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영상만 보고 처음으로 뜨개질을 하려니 대면 수업의 필요성을 절절하게 느꼈다. 몇 차례 털실뭉치와 바늘을 가지고 씨름하다가 ‘티매트는 사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손으로 짠 예쁜 매트로 찻잔을 받쳐 우아하게 커피 한 잔 하겠다던 계획도 뒤로 미뤘다. 무슨 취미 활동이나 초보들은 나처럼 온라인 클래스의 벽을 느낄 수 있을 터이다. 반면 작은 경험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라면 문턱이 그리 높지 않을 것도 같다. 내 뭉쳐진 털실뭉치는 곧 서랍장으로 들어갔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직접 수업을 들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Review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Books & more 2021 SUMMER 207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Bluebeard's First Wife 작가 하성란, 번역 자넷 홍, 229쪽, 15.95 달러, 뉴욕: 오픈 레터 (2020) 하성란 작가의 단편집 는 인간관계의 가장 어두운 심연으로 가는 여정이다. 상실과 고립, 절망을 서정적으로 그리는 소설은 종종 꿈 속 같다. 엄격한 서사적 구조를 피하고 소품처럼 작은 이야기들이 고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데 이는 무언가를 강하게 선언하기보다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적합하다. 그래서 독자는 그녀의 이야기들이 아주 깊은 감정의 수위를 건드린다고 느낀다. 소설 속 많은 인물들이 경험하는 고통과 비통함을 나누게 되는 것이다. 하성란 작가의 인물들은 주위 세계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세상은 단순히 잔인하고 비인격적인 힘이 개인을 무자비하게 망가뜨리는 게 아니다. 이 세상은 다른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에 존재의 커다란 공포가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거리를 둔 ‘타인들’, 예를 들어 아파트 위층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 혹은 작은 산마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도시 밀렵꾼, 혹은 약혼자의 이상한 친구들이다. 어떨 땐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들이기도 하다. 남편, 아내, 딸, 아들처럼. 이 ‘타자들’이 가깝든 멀든,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요한 주제는 우리가 누군가를 진실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어떤 알지 못할 비밀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알려고 하지 않고 착각 속에 안전하게 머물기를 원할 수도 있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하는 행동을 봐서는 위의 해석이 가능하고 할 수 있다. 고립된 산마을로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은 마을사람들이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잔디밭이 깔린 전원풍의 삶을 원해 서울 외곽지역으로 이사한 부부는 걷지 못하는 장애인 아들보다 잔디밭에서 활개 치며 뛰어 다니는 개에게 더 신경을 쓴다. 이런 인물들에서 우리는 자신의 꿈과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을 피하려는 인간적 경향이 투영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이나 다른 주인공들이 공감력이 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들도 결국 인간일 뿐이라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또 다른 주제는 ‘외곽’이다. 소설 대부분의 배경이 서울의 외곽이거나 더 멀리 떨어진 시골이다. 도시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라도 종종 도시의 경계를 넘어 이동한다. 주변으로의 이 같은 이주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도시의 번잡함에서 도망치고 싶은 욕망이나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할 필요처럼. 어떤 경우에든 도시를 일단 떠나면 우리는 보통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불확실한 경계 공간에 있게 된다. 시골에 가면 밀렵꾼이 되는 도시 거주자가 어쩌면 이 같은 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하지만 이런 많은 이야기에서 그 현상은 다양한 차원에서 일어나는 걸 볼 수 있다. 하성란의 이야기는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 게 분명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이야기들이 하나의 문제점에 바로 도달하기를 (혹은 하나의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하기를 종종 거절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재독함으로써 책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한국 미술의 주요한 시기에 대한 연구서 한국 미술: 19세기부터 현재까지 저자 샬롯 홀릭, 264쪽, 60달러, 런던, 리액션 북스 (2017)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19세기말에서 21세기 초까지 100년 정도에 걸친 한국 미술을 “완벽하게, 백과사전처럼 읽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대신에 한국사에서 격동의 시기였던 이 기간 동안 이정표가 될 만한 중요한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전체적으로 홀릭은 미술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에 어떻게 관계하는지 파고든다.첫 장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몇 년을 조명하는데 이때 한국은 근대 국가로 변모하고 미술은 점점 더 정치화된다. 두 번째 장은 식민시기에 관한 것으로 이때 미술에 대한 이해가 엘리트의 독점물에서 모두에게 속한 것으로 변한다. 세 번째 장은 2차 대전 후 북한에서 김일성 이데올로기에 의해 추진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미술이 발전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네 번째 장은 앞 장과 병행해서 이 시기 남한의 경우를 다루는데 남한에서는 추상 미술이 대두한다. 다섯 번째 장에서는 1970년대 민중 미술이 소개된다. 마지막 장인 여섯 번째 장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예술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 한국 예술가들의 변화를 밝힌다.전체적으로 이 책은 한국 미술사에서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시기에 대한 입문서로서 환영할 만하다. 또한 영어로 쓰인 드문 저서로도 인정을 받을 만 하다. 익숙함과 신선함이 섞인 파스텔 2020 JAZZ KOREA FESTIVAL LIVE at Boomiz 송하철 퀄텟, CD (27분), 서울: 게이트포 뮤직 앤 아트 Gatefor Music & Art 송하철(Song Ha-chul)은 자신의 길을 일찍 찾았다. 어린 시절 클라리넷을 불며 음악에 입문했고 15세 때 재즈 색소폰을 시작했다. 1년 만에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고 17세에 경희대 포스트모던음악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그는 뮤지션을 향해 질주했다. 2015년 재즈 전문 매거진 의 ‘라이징 스타’로 선정됐고 ‘자라섬 국제 재즈 페스티벌’, EBS 프로그램 등 여러 무대에서 인정받는 프로페셔널 색소포니스트로 명성을 얻었다.송하철 퀄텟(Song Ha Chul Quartet)의 EP앨범 ‘2020 JAZZ KOREA FESTIVAL LIVE at Boomiz’는 2021년 2월에 발매되었으며 코로나 19로 인해 2020년 11월 온라인으로 진행된 앙카라의 주터키한국문화원 주최 ‘재즈 코리아 페스티벌’의 공연 실황이다.음반의 첫 곡은 2017년 발표한 데뷔앨범 의 타이틀곡이기도 한 ‘Straight Life’다. 위풍당당하고 펑키한 서수진(Suh Soo-jin)의 드럼 연주 뒤에 행크 모블리(Hank Mobley 1930~1986)를 연상시키는 송하철의 색소폰 연주가 굵직하고 뚜렷하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각인시킨다.‘Marionette’는 임채선(Yim Chae-sun)의 몽환적인 피아노 위에 깔리는 송하철의 색소폰이 유독 아름다운 곡이다. ‘카니발의 아침(Manha De Carnival; 1991)’에서 스탄 게츠(Stan Getz 1927~1991)가 자아냈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매일 낡아가는 익숙한 일상의 시간처럼, 곡은 쓸쓸하게 흘러가다 마친다.‘Going Up’에서는 이동민(Lee Dong-min)의 덤덤한 베이스가 포문을 열면 송하철의 솜사탕같이 부풀어 오른 음색의 색소폰이 뒤따른다. 이어지는‘Somebody's Gold Fishery’에서 송하철의 색소폰 음색은 민첩함과 포근함을 함께 지니며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연주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다.‘한국의 재즈’ 라기 보다는 재즈에 익숙한 모든 이에게 깨끗한 파스텔 톤으로 다가올 앨범이다. 재즈가 처음인 사람도 이끄는 힘을 가졌다. Charles La Shure Professor, Department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Seoul National University 류태형(Ryu Tae-hyung 柳泰衡)음악 칼럼니스트

어둠 속에 함께 빛나는 별들

Art Review 2021 SUMMER 148

어둠 속에 함께 빛나는 별들 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올해 첫 기획전으로 1930~50년대 활발했던 예술가들을 조명한다. 특히 이 전시는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었던 불행한 시대에 화가와 문인들의 교류가 어떤 예술적 성취를 낳았는지에 초점을 맞춰 큰 화제가 되었다. 1. . 구본웅(具本雄 1906~1953). 1937. 캔버스에 유채. 71.4× 89.4 ㎝.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구본웅은 인상파 위주의 아카데미즘이 유행하던 시기에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화면에 그려진프랑스 미술 잡지 『Cahiers d’Art』를 통해 알 수 있듯 구본웅과 그의 지인들은 서구의 새로운 문화 예술 경향을 동시대적으로 향유했다. 1930년대는 일제 식민 통치가 더욱 혹독해진 암흑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근대화가 진행되며 한국 사회에 그 어느 때보다 큰 변화가 일어난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경성(일제 강점기의 서울)은 신문물이 다른 지역보다 먼저 유입되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포장된 도로에는 전차와 자동차가 달리고, 화려한 고급 백화점들이들어섰다. 거리에는 새로운 유행을 앞서 받아들여 뾰족구두를 신은 모던 걸과 양복 차림의 모던 보이들이 가득했다. 현실에 대한 절망과 근대의 낭만이 혼재했던 경성은 예술가들의도시이기도 했다. 당시 경성의 예술가들은 너나없이 다방으로 모여들었다. 중심가 골목 곳곳에 즐비한 다방은 단순히 커피만 파는 가게가 아니었다. 예술가들은 이국적 실내 장식과 커피 향기속에 울려 퍼지는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의 노래를 들으며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해 이야기했다. 카루소와 아방가르드 예술식민지 국민의 가난과 절망이 예술의 혼마저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난 속에 피어난 창작의열정 뒤에는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았던 예술가들의 우정과 협업이 있었다.이 ‘역설적 낭만’의 시대를 돌아보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전시는 연일 많은 관람객들을 불러 모았다. 근대를 대표하는 50여 명의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이 전시는 제목이 말해주듯 화가와 시인, 소설가들이 장르의 벽을 넘어 서로 어떻게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예술적 이상을 펼쳐냈는지 돌이켜본다. 전시는 4개의 주제로 요약된다. ‘전위와 융합’을 주제로 한 제1 전시실은 시인이며 소설가, 수필가이기도했던 이상(李箱 1910~1937)이 운영한 다방 ‘제비’와 그곳을 사랑했던 예술가들의 관계에 집중한다. 건축을 전공한 이상은 학교 졸업 후 한동안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일하기도했는데, 폐결핵으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고 다방을 차렸다. 단편소설 「날개」와 실험주의적 시 「오감도」 등 강렬한 초현실주의적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개척한 대표적 작가로 평가받는다. 제비는 희멀건 벽에 이상의 자화상 한 점과 어릴 적부터의 친구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의 그림 몇 점만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별다른 실내 장식도 없는 초라한 공간이었지만 이곳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구본웅을 위시해 이상과 친분이 두터웠던 소설가 박태원(朴泰遠 1910~1986),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김기림(金起林 1908~?) 등이 이곳에 주로 드나들었다. 이들은 이 다방에 모여 앉아 문학과 미술뿐 아니라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최신 경향과 작품에 대해대화를 나누며 영감을 얻었다. 이들에게 제비는 단순한 사교 공간이 아니라 최첨단 사조를 흡수하며 예술적 자양분을 얻었던 창작의 산실이었다. 특히 장 콕토(Jean Cocteau)의 시와르네 클레르(René Clair)의 전위적인 영화는 이들에게 큰 관심사였다. 이상은 장 콕토의 경구들을 다방에 걸어두었으며, 박태원은 파시즘을 풍자하는 르네 클레르의 (1934)를 패러디해 식민지 현실을 위트 있게 꼬집은 작품 「영화에서 얻은 콩트: 최후의 억만장자」를 쓰기도 했다. 이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서로의 흔적과 친밀했던 관계가 매우 흥미롭다. 구본웅이 그린 (1935) 속 삐딱한 인상의 주인공은 이상이다. 둘은 네살의 나이 차이가 났지만, 학창 시절부터 항상 붙어 다니며 죽이 잘 맞았다. 김기림은 구본웅의 파격적인 야수파 화풍에 누구보다 찬사를 보낸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이상이 27살의 젊은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이를 안타까워하며 그의 작품을 모아 『이상 선집』(1949)을 냈는데, 이것이 이상의 첫 작품집이었다. 이상 역시 김기림의 첫 번째 시집『기상도(氣象圖)』(1936)의 장정을 맡았다. 그런가 하면 이상은 박태원의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될 때 삽화도 그렸다. 박태원의 독특한 문체와이상의 초현실적인 삽화는 독창적인 지면을 만들어 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 황술조(黃述祚 1904~1939). 1939. 캔버스에유채. 31.5 × 23 ㎝. 개인 소장. 구본웅과 함께 같은 미술 단체에서 활동했던 황술조는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독특한 화풍을 이루었다. 이 작품은 35세 젊은 나이에 요절하던 해에 그린 것이다. 1920~40년대 인쇄 미술의 성과를 보여주는 제2 전시실. 이 시기 간행되었던 표지가 아름다운 책들을 비롯해 신문사들이 발행했던 각종 잡지와삽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청색지(靑色紙)』 제5집. 1939년 5월 발행. (왼쪽)『청색지(靑色紙)』 제8집. 1940년 2월 발행. ⓒ 아단(雅丹)문고(Adanmungo Foundation)ⓒ 근대서지연구소1938년 6월창간되어 1940년 2월 통권 8집을 마지막으로 종간된 『청색지』는 구본웅이 발행과 편집을 맡은 예술 종합 잡지이다. 문학을 위주로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분야를망라했으며 당대의 유명 필진들이 참여하여 수준 높은 기사를 제공했다. 시와 그림의 만남소설에 삽화를 곁들이는 방식은 예술가들에게 한시적으로나마 일정한 수입을 만들어 주었다. 동시에 신문이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 감각을 보여 주는 매체로 인식되는 데 기여했다.정갈한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제2 전시실은 1920~40년대 발행된 신문과 잡지, 책을 중심으로 당시 인쇄매체가 이뤄낸 이 같은 성과를 집대성했다. ‘지상(紙上)의 미술관’을 제목으로 한 이 전시는 안석주(安碩柱 1901~1950)를 필두로 대표적인 삽화가 12명의 작품을 곁들인 신문 연재소설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 있도록 구성해 색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당시 신문사들은 잡지도 발간했는데, 이를 통해 시에 삽화를 입힌 ‘화문(畵文)’이라는 장르가 본격등장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白石 1912~1996)의 시 에 정현웅(鄭玄雄1911~1976)이 그림을 그린 1938년도 작품이 대표적이다. 주황색과 흰 여백이 인상적인 이 그림은 백석의 시를 닮아 아련한 정감 속에 묘한 공허감을 자아낸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이같이 만들었던 조선일보사 발행 문예잡지 『여성』에 실렸다. 세련된 언어 감각을 바탕으로 향토색 짙은 서정시들을 발표했던 백석과 삽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화가 정현웅은 신문사동료로 시작한 관계였음에도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현웅은 옆자리에 앉아 일하는 백석을 종종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열심히 일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 얼굴이‘조상(彫像)과 같이 아름답다’는 찬사를 쓴 짧은 글 「미스터 백석」(1939)을 『문장』이라는 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들의 우정은 직장을 떠나서도 이어졌다. 1940년 훌쩍 만주로떠나버린 백석은 「북방에서 – 정현웅에게」라는 시를 지어 보냈고, 남북 분단 이후 1950년 월북한 정현웅은 북에서 백석과 다시 만나 그의 시를 꾸려 시집으로 엮어냈다. 그 시집의뒤표지에는 ‘미스터 백석’보다 더 중후한 모습의 백석이 그려져 있다. 식민지 국민의 가난과 절망이 예술의 혼마저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난 속에 피어난 창작의 열정 뒤에는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며 함께살아갈 방도를 찾았던 예술가들의 우정과 협업이 있었다. 2.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白石 1912~1996), 정현웅(鄭玄雄1911~1976). 아단문고 제공.시인 백석이 조선일보사가 발행하던 잡지 『여성(女性)』 제3권 제3호(1938년 3월 발행)에 발표한 시에화가 정현웅이 그림을 곁들인 ‘화문(畵文)’이다. 당시에는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룬 화문이라는 장르를 통해 문인과 화가들이 서로 교류하는 일이 잦았다. 3. . 이중섭(李仲燮 1916~1956). 1955.종이에 연필, 유채. 32 × 49.5 ㎝. 개인 소장. 한국전쟁 직후 시인 구상의 집에서 기거하던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그리워하며친구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1. 현대문학사에서 1955년 1월 창간한 문학 잡지 『현대문학』의 표지들. 장욱진(張旭鎭 1918~1990), 천경자(千鏡子1924~2015), 김환기(金煥基 1913~1974) 등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그림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화가의 글과그림‘이인행각(二人行脚)’을 주제로 한 제3 전시실은 1930~50년대로 시대적 배경을 확장해 예술가들의 개인적 관계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 동시대의문인과 화가들은 물론 다음 세대 예술가들과의 인적 관계에서도 중심에 섰던 인물은 김기림이었다. 그는 신문 기자라는 위치를 십분 활용해 많은 예술가들을 발굴하는 데 앞장섰으며,평론을 통해 뛰어난 작품들을 소개했다. 그런 역할을 이어받았던 이로 김광균(金光均 1914~1993)을 들 수 있다. 시인인 동시에 사업가였던 그는 우수한 예술가들을 경제적으로지원했다. 그래서 이 전시실의 여러 작품들이 그의 소장품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곳에서 많은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림은 단연코이중섭(李仲燮 1916~1956)이 그린 (1955)일 것이다. 그림 속 이중섭은 구상(具常 1919~2004)의 가족을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다.한국전쟁 중 생활고로 인해 일본의 처가로 떠난 가족과 헤어져 지내던 시기, 이중섭은 작품을 팔아 돈을 벌어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렵게 개최한 전시회가계획했던 대로 돈을 마련하는 데 실패하자 자포자기했고, 당시 그런 심경이 이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일본인 아내가 남편의 소식을 궁금해하며 구상에게 보낸 편지가 나란히전시되어 있어 전쟁이 가져온 가난과 병고 속에서 일찍 세상을 떠난 천재 화가와 그 가족의 사연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화가의 글∙그림’을 보여 주는 마지막전시실에서는 일반적으로 화가로 알려져 있으나 글쓰기에도 남다른 경지에 이르렀던 6명의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 단순하고 순수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던 장욱진(張旭鎭1918~1990), 평생 산을 사랑했던 박고석(朴古石 1917~2002), 독특한 화풍뿐 아니라 내면에 솔직한 글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천경자(千鏡子 1924~2015)가포함되었다. 그중 전시의 말미에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김환기(金煥基 1913~1974)의 ‘전면점화’ 네 작품이다. 가까이 다가가 수많은 작은 점들이 빼곡히 박힌 소우주를 바라보고있으면 앞서 지나온 문인과 화가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어두운 시대에 별처럼 빛났던 그들을 이제 비로소 한자리에 불러 모은 듯하다. 2. <18-II-72 #221>. 김환기. 1972. 코튼에 유채. 49 × 145 ㎝.ⓒ환기재단․환기미술관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화가 김환기는 여러 잡지에 삽화를 곁들인 수필을 발표했으며, 시인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말년의 김환기를 대표하는서정적인 추상화 ‘전면점화(全面點畵)’는 그가 뉴욕에 머무르던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데, 그 시기 시인 김광섭(金珖燮 1906~1977)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단초가발견된다.

‘위안부’ 진실에 대한 끔찍한 증언

Books & more 2021 SPRING 412

‘위안부’ 진실에 대한 끔찍한 증언 ‘위안부’ 진실에 대한 끔찍한 증언 『한 명』 작가, 김 숨. 브루스 & 주찬 풀턴 번역, 224쪽, 19.95달러, 시애틀, 워싱턴 대학 출판부, 2020 이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제국주의 군대는 전쟁 기간의 강간율을 낮추기 위해 윤락업소 체제를 만들었다. “위안소”라 불린 곳에서 자발적으로 지원한 매춘부가 일하는 것처럼 했지만 그곳에서 일했던 대다수의 여성은 억지로 끌려오거나 보수가 좋은 공장일이라 약속 받거나 다른 계략에 빠져 성노예 일을 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희생된 여성들은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었다. 현대 한국문학에서 한국인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들이 있었지만 위안부 는 대체로 무시되어 왔다. 작가 김숨의 이 소설은 예외적이다. 이 작품은 자신의 경험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한 명의 생존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위안부의 경험을 날것 그대로 움츠려들지 않고 묘사한다. 생존하는 마지막 위안부로 알려진 여성의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공포와 침묵 속에서 삶을 이어갈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할지 결정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된다. 마음이 약하거나 예민한 영혼을 가진 이들에게 소설은 읽기 쉽지 않다. ‘위안부’라는 명칭과는 대조적으로 이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이 겪은 고통과 굴욕과 수모는 한 치의 미화 없이 그대로 묘사된다. 책 속에 언어로 표현된 묘사가 아무리 끔찍하고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이 여성들이 견뎌야했던 고통의 바다에 비하면 단지 물 한 방울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충격은 더 커진다. 소설은 재개발이 계획된 적막한 동네의 슬레이트지붕 집에 살고 있는 90세 할머니의 현재와 굶주리는 가족을 위해 달팽이를 줍던 13세 소녀가 일본인에 의해 성노예로 만주로 끌려가게 되는 과거를 오가며 전개된다. 하지만 곧 이 모든 게 단순히 회상에 머무르지 않음이 명백해진다. 주인공은 단순히 과거를 ‘되돌아보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과거를 ‘재체험’한다. 위안소에서 보낸 7년의 시간은 오래 전에 끝났지만 그 경험의 고통과 트라우마는 그녀를 떠난 적이 없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소설이 사실과 허구 사이의 균형을 잡는 방식이다. 작가의 창작품으로 소설이긴 하지만 300개 이상의 각주가 실제 생존했던 위안부의 증언을 출처로 밝히고 있다. 이로 인해 번역자가 후기에 밝히고 있듯이 소설은 장르적 구분을 짓기가 어려워 명확하게 하나의 범주로 마케팅 홍보를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독자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책은 허구적 소설인가 아니면 역사물인가? 사실 둘 다이며 그 자체로 책은 고통스러운 진실을 전달하는 픽션의 힘을 증언한다고 할 수 있다. 위안부의 고통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독자라도 이 책을 읽으면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진실을 직시하는 것이 치유를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조부모가 주는 아름다운 글과 그림으로 만들어진 선물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 마리나 할머니 (안경자) 글, 찬 할아버지(이찬재) 그림, 번역 소피 브라운, 304쪽, 20달러, 런던, 파티큘러북스, 2020 1960년대 대학에서 만난 찬 할아버지와 마리나 할머니의 이야기는 낭만적 사랑을 다룬 이야기책에서 볼 법하다. 그녀는 시화전을 위해 시를 썼고, 무작위로 정해진 대로 그는 그녀의 시에 삽화를 그렸다. 자신들의 예술을 통해 서로 연결이 되었고 이 씨앗은 사랑으로 꽃을 피워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들이 브라질에 정착해 살고 있던 중 2015년에 딸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뉴욕에 살고 있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시 그림을 그리라고 제안했다. 오래 전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되돌아보면서 마리나 할머니는 그림과 함께 할 글을 썼고, 이것을 자신들의 인스타그램 “나의 손주들을 위한 그림”에 올렸다. 인스타그램에서 화면으로 볼 수 있었던 이 부부의 그림과 글은 이제 책이 되었다. 책은 느슨하게 사계절로 나뉘어 있고 중간 중간에 내셔널지오그래픽 팀과 동행한 찬 할아버지의 갈라파고스섬 여행과 젊은 시절의 기억도 짧게 들어가 있다. 책은 손주들과 관련된 내용에서부터 공룡과 다른 동물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자연스럽게 나이듦과 죽음과 상실에 대한 생각들도 꽤 들어있다. 찬 할아버지 그림의 색이 다채롭고, 표현이 풍부하고 영감을 준다면 마리나 할머니의 글은 거의 아이 같은 천진함과 세월이 주는 지혜로움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 두 사람의 글과 그림이 함께 함으로써 그 합은 각 부분의 합보다 더 큼을 볼 수 있다. 초기 인쇄 역사에 대한 영어판 웹 사이트 ‘Jikji World’ http://www.cheongju.go.kr/app3/jikjiworld/content/eng_main/index.html 청주: 청주고인쇄박물관 이 웹 사이트는 일반적으로 ‘직지’로 알려진 책에 대한 정보를 주는 사이트의 새 영어 버전이다. 직지는 금속 활자로 인쇄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책이다. 구텐베르크 성경보다 78년 더 일찍 만들어진 이 책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사이트는 중세 불교서 자체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보고이며 서지정보와 인쇄에 사용된 기술에 대한 상세한 내용뿐 아니라 한국의 금속활자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과 청주 고인쇄박물관에 대한 소개도 담고 있다. 박물관 자체의 가상현실체험은 이 글을 쓰는 동안 유감스럽게도 작동이 되지 않았지만 “직지”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 사이트의 정보는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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