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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Ingredi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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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Ingredients 2021 AUTUMN 121

토란에 숨겨진 신비 감자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끈적이는 점액질을 품어 쫀득한 식감을 동시에 가진 토란은 가을에 만날 수 있는 오래된 식재료다.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토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①주로 밭에서 키우는 토란은 굵은 줄기 끝에 큰 잎 한 장이 붙어있다. 토란은 버릴 것 없는 유익한 식재료다. 잘 말린 토란잎은 여름철 쌈이나 나물로 먹는다. 토란대는 살짝 말려 껍질을 벗긴 다음 짧게 삶은 뒤 들깨와 함께 볶으면 아삭한 식감의 좋은 밥반찬이 된다. 알토란은 특유의 미끌거리는 식감으로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어떤 식재료도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②토란의 단면에서 나오는 끈적이는 성분은 ‘뮤신’이라는 다당류 점액물질로 단백질을 분해해 소화와 흡수를 돕는다. 뮤신은 장어나 연근, 마에도 있는데 위와 장의 뛰어난 윤활제 역할을 한다. ③가려움을 유발하는 토란 껍질을 손질할 때에는 팔팔 끓인 쌀뜨물에 토란을 잠깐 삶으면 된다. 몇 번 문지르지 않아도 쉽게 토란 껍질을 깔 수 있다. 토란 속 전분과 함께 들어 있는 바늘 모양의 수산칼슘 결정이 가려움을 유발하고 아린 맛을 내기도 한다. ⓒ신혜우 음식은 수수께끼와 같다. 하나의 음식 속에는 여러 가지 사실이 숨겨져 있다. 토란이란 이름을 생각해보라. 껍질을 벗긴 알맹이의 모양이 감자와 비슷하다. 그런데 왜 토란이라고 불렀을까? 토란이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던 시기에는 ‘감자’라는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땅에서 나는 알처럼 생겼다’는 뜻으로 토란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문자 기록상 감자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시기는 조선시대인 1824년이다. 토란은 이보다 6백 년 앞선 고려시대 의서 (鄕藥救急方 Emergency Prescriptions in Local Medicine; 1236)에 등장한다.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문인 이규보의 시문집 (東國李相國集 Collected Works of Minister Yi of the Eastern State; 1241)에는 시골에서 토란국을 끓였다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토란국은 미끌미끌 넘어가는 토란 특유의 감촉을 잘 느낄 수 있는 음식이다. 소고기와 무, 토란을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해 끓인 맑은 국은 주로 추석 명절에 끓여 먹던 전통음식으로 담백하면서도 시원하고 깊은 맛이 있다. ⓒ KOREAN FOOD FROMOTION INSTITUTE 해독을 위한 지혜 감자와 마찬가지로 토란도 덩이줄기이다. 덩이줄기란 식물이 영양소를 저장하기 위해 줄기를 부풀린 형태를 말한다. 한국에서 토란은 추석 때 먹는 전통 음식이다. 구체적 조리법은 1920년대 방신영(方信榮 1890∼1977)의 조리서 (朝鮮料理製法 Recipes for Korean Dishes; 1917)에 나온다. 토란을 잘 씻어 먼저 한 번 삶는다. 맑은 장국이나 곰국에 토란을 넣어 끓이는데 다시마를 조금 썰어 넣고 끓인다. 서울식 토란국 조리법이다. 남도에서는 들깨를 갈아 넣은 고소한 맛의 국물에 토란을 넣어 끓인다. 국 속의 토란은 언뜻 보기에 감자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입에 넣고 씹을 때 식감은 감자와 전혀 다르다. 미끈거리면서 물렁물렁하다. 토란에 끈끈한 점액질 성분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감 때문에 토란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점액질 성분 대부분은 건강에 유익하다. 토란 속 점액질을 이루는 다당류는 장내 유익균의 먹이인 프리바이오틱스로 작용한다. 이들 다당류는 물을 쉽게 흡수하여 부풀어 오른다. 덕분에 점액 다당류를 이용해 입안에 넣으면 물 없이도 녹는 구강붕해정을 만들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수분을 제외하고 토란에 가장 많이 들어있는 성분은 전분이다. 토란에 있는 전분 알갱이의 크기는 작은 편이어서 소화가 잘 되지만 생으로 먹을 수 없다. 바늘처럼 날카로운 수산칼슘 결정(calcium oxalate crystals)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수산칼슘 결정은 토란잎이나 토란대에도 있는데 단백질 분해효소와 함께 저장되어 있어 날로 먹으면 아린 맛이 난다. 먼저 바늘 같은 결정이 피부 점막을 찔러 상처를 낸다. 설상가상으로 효소가 그 상처에 작용하여 염증, 통증을 일으킨다. 토란을 손질할 때 즙액이 손에 묻으면 가려우니 장갑을 끼고 다루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 이런 독성은 토란과 같은 천남성과(天南星科) 식물의 공통적 특징이다. 그대로 먹었다가는 점막을 자극하는 통증과 가려움증을 피할 수 없으므로 다른 동물은 천남성과 식물을 먹지 않고 피한다. 섬에서 염소를 방목해도 천남성은 무성하게 자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이다. 하지만 잡식 동물로서 인간은 독보적이다. 불이라는 강력한 도구로 음식을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인간에게 토란의 독성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다. 토란이나 토란대를 하루 전에 물에 담갔다가 삶아서 걸쭉한 물을 버리고 쓰면 된다. 이렇게 가열하면 토란 속의 효소는 변성하여 작동을 멈추고 수산 결정은 물에 녹아 제거된다.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자극을 줄여 먹기 좋은 정도로 만드는 데 충분하다. 이런 처리에 대해 잘 모르고 가을에 토란이나 토란대를 사다가 바로 국을 끓이면 아린 맛이 남아 있어 먹기 힘들다. 추석에 즐겨먹는 토란국 속에는 식재료의 독성을 제거하는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토란을 한입 크기로 썰고 꽈리고추와 통마늘을 곁들여 간장, 설탕을 넣고 졸인 토란조림이다. 자박한 국물과 함께 떠 먹으면 깊은 감칠맛을 느낄 수 있다. ⓒ 10000recipe 토란의 아린 맛을 빼기 위해 약간 삶은 후, 감자칩처럼 통째로 슬라이스해 구우면 바삭한 식감과 고소한 맛의 토란칩이 된다. 열량이 낮아 다이어트 간식으로도 좋다. ⓒ momcooking 다양한 요리와 디저트 ‘알토란 같다’는 말이 있다. 내용이 충실하거나 옹골차고 실속이 있다는 뜻이다. 원래 알토란은 너저분한 털을 다듬어 깨끗하게 만든 토란을 말한다. 접두사 ‘알’은 알밤, 알몸처럼 겉을 덮어 싼 것이나 딸린 것을 다 제거했다는 뜻이다. 감자와 고구마가 나타나기 전까지 토란은 농가에 매우 중요한 구황작물이었다. 그러니 속이 꽉 찬 알토란이 실속의 대명사가 된 것도 이해할 만하다. 역사가 긴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토란의 소비는 주로 가을 명절에 한정된다. 9월이면 시장에 토란이 쏟아져 나오지만 추석이 지나면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예전에는 토란국 외에도 찜, 구이, 송편, 장아찌 등으로 다양하게 요리해 먹었다. 토란을 쪄서 껍질을 벗기고 찹쌀가루와 섞어 기름에 지져 토란병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다른 채소와 함께 반죽해서 전으로 부쳐먹기도 한다. 요즘에는 토란 자체보다 육개장에 넣은 토란대를 찾아보기 쉬워졌다. 껍질을 벗기고 말린 토란대를 물에 삶고 여러 시간 우려내어 아린 맛 성분을 제거한 다음 여러가지 채소, 소고기와 함께 넣고 끓인다. 졸깃한 토란대를 씹는 맛이 고기의 식감과 묘하게 대비되면서 맛이 극대화된다. 토란의 대표 산지는 전남 곡성이다. 전국 토란 재배지의 절반이 곡성에 있고 생산량으로는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곡성은 다양한 토란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들깨 가루를 듬뿍 넣고 끓인 들깨 토란탕은 곡성의 대표 음식이다. 토란의 고소한 향기가 들깨, 소고기와 잘 어울린다. 맑은 토란국, 찐 토란, 토란 전병, 토란 미숫가루, 토란 누룽지도 먹어볼 만하다. 토란빵, 토란 스콘, 토란쿠키, 토란칩, 토란초콜릿칩과 같은 가공제품도 많다. 최근에는 토란을 넣은 아이스크림과 사과파이도 나왔다. 토란이 생소한 젊은 층을 위해 개발된 간식이다. 하지만 토란국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젊은이라도 이미 토란의 맛에 익숙할 것이다. 사실 토란은 열대 아시아와 태평양 제도가 원산지인 식물 타로(Colocasia esculenta)의 변종이다. 타로 버블티나 타로 밀크티를 마셔봤다면 토란을 맛본 것과 다름없다. 재배지역과 품종에 따라 흰색을 띄기도 하고 보랏빛일 때도 있지만 고소하고 달콤한 맛과 부드러운 질감은 타로와 토란의 공통적 특징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 태평양의 하와이 같은 섬나라까지 세계 전역에 타로를 이용한 요리와 디저트, 가공제품이 무수히 많다. 타로의 다양한 변주를 맛보면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도 될 정도이다. 토란국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젊은이라도 이미 토란의 맛에 익숙할 것이다. 토란은 열대 아시아와 태평양 제도가 원산지인 식물 타로(Colocasia esculenta)의 변종이다. 타로 버블티나 타로 밀크티를 마셔봤다면 토란을 맛본 것과 다름없다. 토란은 열대지방에서 재배하는 타로의 변종으로 Taro, Kalo, Talo, Dalo, Dasheen, Eddo 등 다양한 이름으로 전세계 식탁에 오른다. ‘열대성 감자’라고도 불리는 타로는 습한 기후에도 잘 자라며 늪지에서도 번식한다. 토란이 낯선 젊은 세대도 타로가루와 우유를 혼합해 만드는 타로티에는 익숙하다. 토란 꽃의 경고 토란을 토련이라고도 부른다. 두껍고 넓은 방패 모양의 잎이 마치 연잎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토란을 보면 시골에서 비오는 날 토란잎을 우산처럼 쓰고 다녔던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 반대로 토란꽃을 본 사람은 많지 않다. 토란꽃은 100년에 한 번 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희귀했다. 열대식물인만큼 온대기후인 한국에서는 꽃이 피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전국 여러 곳에서 매년 토란꽃이 피어나고 있다. 한반도의 기후가 고온다습한 아열대성으로 바뀌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지금은 지구 온난화의 위기에 빠르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때이다. 토란 꽃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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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Ingredients 2021 SUMMER 350

미나리의 보편성 미나리는 독특한 향미와 아삭한 식감이 매력적인 식재료다. 최근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Lee Isaac Chung) 감독의 자전적 영화 ‘미나리’가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미나리가 단순한 식재료를 너머 한국인의 강인한 적응력과 생명력의 상징이 되었다. 들판의 풀 대부분은 독성 물질을 함유하고 있어 입에 넣으면 쓰다. 어린이가 본능적으로 쓴맛을 거부하는 것도 이러한 독성 식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다. 인류의 식문화는 먹을 수 있는 식물과 먹을 수 없는 식물을 구분하는 지식의 기반 위에 성장해왔다. 미나리와 독미나리는 언뜻 보면 비슷한 모양이다. 줄기 속은 비어있고 잎의 가장자리에는 뾰족한 톱니가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미나리의 이파리는 달걀을 세로로 자른 모양인 반면 독미나리는 길고 끝이 뾰족한 창날 모양이다. 미나리는 식용이고 독미나리는 먹을 수 없다. 미나리와 독미나리는 같은 과 식물이다. 미나리에는 독성 물질이 들어있지 않아서 날로 먹을 수도 있고 익혀 먹을 수도 있으며, 독특한 향미로 인해 예부터 한국에서 인기 있는 식재료였다. 실제로 1920년대 신문에 미나리의 시장가격이 실릴 정도로 흔한 음식이었다. 미나리가 이렇게 인기 있었던 것은 다른 나물보다 향기가 진하면서도 상큼한 맛이 독특하기도 하지만, 공심채처럼 속이 빈 줄기채소라서 살짝 데쳐 입에 넣고 씹으면 아삭아삭한 느낌이 무척 상쾌하다. 달면서도 맵고 서늘한 성질의 여름 식재료 미나리는 비타민과 무기질, 섬유질이 풍부하다. 17세기 조선시대 의서 동의보감 에 따르면 미나리는 갈증을 풀어주고 머리를 맑게 해주며 두통이나 구토에도 효과적이다 © Shin Hye-woo 申惠雨 미나리 잎의 가장자리에는 뾰족한 톱니가 있는데, 자세히 보면 이파리의 모양이 달걀을 세로로 자른 것과 비슷하다. 수분을 머금어 탱탱한 미나리 줄기는 씹으면 아삭한 식감이 상쾌하다. 미나리는 크게 논미나리와 밭미나리가 있는데, 물에서 자라는 논미나리는 줄기 속이 비어있고 밭미나리는 비교적 차있다. 특별한 식감 19세기말 조선시대의 조리서 에 소개된 미나리강회 조리법을 살펴보자. 미나리를 뿌리와 잎을 떼고 다듬어 끓는 물에 데쳐 준비한다. 달걀 지단, 석이버섯, 붉은 고추, 양지머리를 가늘게 채 썰어서 가운데 잣을 넣고 데친 미나리로 돌돌 말아낸다. 이를 접시에 가지런히 담고 초고추장을 곁들여 먹는다. 이 요리의 중심에 있는 것은 다른 재료를 묶어주는 아삭아삭한 미나리이다. 우리는 왜 아삭한 식감을 사랑하는가? 신경문화인류학자 존 앨런(John S. Allen)은 자신의 책 에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인간이 오래 전부터 곤충을 즐겨 먹은 영장류라는 게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는 불을 이용한 조리로 식재료를 원래보다 더 바삭한 음식으로 만들어 먹으며 바삭한 식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마지막 이유는 신선한 식물이 아삭한 식감을 낸다는 것이다. 수분이 가득 차 세포벽이 부풀어 오른 채소는 씹으면 ‘아사삭’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면서 즙을 낸다. 반대로 오래 보관하여 수분이 빠져나간 채소는 흐물흐물하고 질긴 느낌이다. 수분을 머금어 탱탱한 미나리는 가볍게 데치거나 볶아도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다. 김치나 장아찌로 만들어주어도 아삭함이 유지된다. 새콤한 맛의 유기산이 세포벽을 단단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나리의 아삭한 맛을 더 확실히 즐기는 방법은 재배지로 가서 갓 수확한 미나리를 날 것 그대로 맛보는 것이다.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한재 마을에서 나는 한재미나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초현리, 음지리, 평양리, 상리 일원을 한재라고 부르는데, 배수가 잘 되는 화산암 토양 특성이 미나리 재배에 알맞다. 미나리는 크게 논미나리와 밭미나리로 나눈다. 자라는 내내 물속에서 재배하는 논미나리는 앞서 설명처럼 줄기 속이 비어있다. 반면 밭미나리는 줄기 속이 비교적 차있다. 한재 미나리는 두 가지를 절충한 방식으로 재배하여 속이 대부분 차있다. 아삭하면서 향이 좋다. 봄에 수확하는 미나리를 구운 삼겹살과 함께 쌈을 싸먹는다. 상추 대신 미나리를 날것 그대로 깔고 삼겹살, 마늘, 된장을 올려 먹으면 미나리의 상큼한 향이 돼지고기의 느끼함을 잡아준다. 불판에 고기를 구운 뒤에 미나리를 함께 올려서 살짝 익혀서 먹기도 한다. 매력적인 향기 미나리의 향기는 테르펜(terpene)이라고 불리는 휘발성 물질 때문이다. 미나리를 한입 넣고 씹을 때 소나무, 전나무, 개입갈나무(cedar)가 울창한 침엽수 숲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피넨(pinene), 미르센(myrcene) 같은 테르펜 물질이 입속에서 진동하기 때문이다. 감귤류 과일, 라임 껍질, 생강, 갈랑갈 느낌을 주는 향기 성분도 함께 들어있다. 그래서 미나리를 넣어주면 요리 속의 비린내를 줄여준다. 미나리를 매운탕 같은 생선 요리에 많이 쓰는 데는 이런 과학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미나리의 향긋한 냄새는 구수한 감칠맛을 내는 된장과도 잘 어울린다. 된장찌개에 미나리를 넣어 먹는 사람이야 이미 많이 있었지만, 1939년 4월 2일 조선일보에는 된장에 박은 미나리 요리법이 소개됐다. “미나리를 깨끗이 씻어 한 시간정도 더운 물에 담갔다가 대접에 된장을 깔고 그 위에 얇게 올린다. 그리고 또 다시 된장을 깔고 미나리를 올린 뒤 뚜껑을 덮어둔다. 이틀이 지나서 꺼내 먹으면 맛이 그럴 듯하다. 된장이 좋을수록 맛이 좋다.” 식물 속에 들어있는 이러한 향기 물질은 기본적으로 세균이나 곤충과 같은 외부 침입자들에게 저항하기 위한 무기이다. 그래서 미나리 향은 물속에서 보다 밭에서 기를 때가 더 강하다. 산이나 들판에서 자란 미나리에는 야생이라는 의미의 접두어 돌을 붙여 돌미나리라고 부른다. 돌미나리는 논, 밭에서 재배한 미나리보다 더 향이 강하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항성 향기 물질을 많이 만들기 때문이다. 미나리에는 향기 물질 외에도 다양한 항산화물질이 들어 있어 항염증, 항산화, 간장보호 효과 등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복어 요리에 미나리를 넣는 것도 미나리의 해독 효과로 혹시 복어 독이 남아있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나리를 넣는다고 복어의 독을 해독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맛을 더 좋게 하는 용도로 이해하는 게 맞다. 달걀지단, 쇠고기 볶음, 버섯 등 가늘게 채 썬 여러 재료를 데친 미나리로 돌돌 말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미나리강회는 조선 시대 궁중 수라상에 오르거나 연회에 차려지던 고급 음식이었다. ©(사)궁중음식연구원(Institute of Korean Royal Cuisine) 육즙 가득한 삼겹살과 신선하고 시원한 미나리는 매우 어울리는 식재료다. 깨끗이 씻은 생미나리를 구운 삼겹살에 곁들이거나, 처음부터 삼겹살과 함께 구워 먹어도 좋다. © 유은영(Yu Eun-young) 향이 강한 미나리는 ‘동양의 파슬리’라고도 불리며 최근에는 파스타의 재료로 많이 쓰이고 있다. ©이밥차 (2bob.co.kr) 다진 미나리를 올리브유에 절여 놓은 미나리 페스토는 파스타의 주재료는 물론 바질 페스토나 시금치 페스토처럼 빵에 발라 먹어도 맛있다. 강인한 생명력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란단다.” 정이삭(Lee Isaac Chung) 감독의 영화 에서 할머니가 손자에게 하는 말이다. 낯선 땅 아칸소에 도착한 한국인 가족에게 정착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곳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 이민자의 삶은 미나리를 닮았다. 얼핏 미나리는 그저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로만 보인다. 하지만 사실 미나리는 주변의 위협과 맞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미나리를 맛본 적 없는 사람에게 미나리와 그걸 먹는 사람이 생소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미나리는 알고 보면 누구에게나 가깝게 느껴질 만한 채소이다. 미르푸아, 소프리토에 사용하는 당근과 셀러리가 모두 미나리의 친척이다. 셀러리의 아삭한 식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미나리와도 금방 친해질 수 있다. 바질 대신 미나리를 넣어 페스토를 만들거나 오일 파스타에 미나리를 썰어 넣고 함께 볶아도 맛이 아주 잘 어울린다. 세계 여러 지역의 식문화를 비교해보면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속 이민 가족의 삶을 보면서 누구나 공감하게 되는 것도 인간이 공유하는 그런 보편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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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Ingredients 2021 SPRING 615

봄식탁의 보물, 두릅 쌉싸름하고 거칠고 서걱하면서도 탄력있는 식감이 매력인 두릅은 짧아진 봄처럼 빠르게 나타났다가 금새 몸을 감추는 봄나물이다. 요즘엔 한식과 양식의 경계를 두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되어 계절의 향기를 전한다. 채소를 많이 섭취하는 한국인에게 봄은 특별한 계절이다. OECD 국가 중 1인당 하루 채소 섭취량에서 한국인이 항상 선두권을 달리는 이유가 둘 있다. 하나는 채소를 발효한 김치, 다른 하나는 신선한 나물이다. 상당수의 나물은 봄에만 먹을 수 있다. 식물이 자랄수록 조직이 더 단단해지고 경우에 따라 독소가 생성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두릅나무의 새순을 잘라 나물처럼 살짝 데쳐서 먹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두릅은 벛꽃이 피는 때에 맞춰 수확한다. 들에서 재배하는 경우 남쪽에서는 4월 초순, 중북부에서는 4월 중하순에 수확한다. 모든 싹이 한 번에 올라오는 것은 아니어서 3~4회에 걸쳐 수확한다. 요즘은 온실에서 재배하여 이른 봄, 여름, 심지어 겨울에도 두릅이 나온다. 일년에 한 달, 4월에 수확해 먹는 두릅은 짧아진 봄처럼 강렬하게 왔다가 금세 떠나는 귀한 봄나물이다. © Shin Hye-woo 申惠雨 매력적인 식감 두릅은 쌉쌀한 맛에 나무 같기도 하고 풀 같기도 한 향미가 독특하다. 그러나 두릅이 가진 매력은 그 식감에 있다. 끓는 물에 살짝 데친 두릅을 입에 넣으면 부드러우면서도 서걱하게 씹힌다. 두릅에는 다른 봄나물에서 느껴지는 질깃한 식감이 없다. 표면에 잔 가시가 있어서 처음에는 조금 거친 느낌인데 치아에 부딪힐 때마다 일정한 탄력이 느껴지면서 가는 실뭉치처럼 끊어진다. 묘한 식감 때문에 두릅을 처음 먹는 사람은 자꾸 씹어보게 된다. 이런 식감으로 인해 두릅을 먹는 방법은 생선 회를 먹을 때와 아주 비슷하다.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데 오징어를 데쳐서 함께 먹기도 한다. 오징어와 두릅의 전혀 다른 식감이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오징어 대신 돼지고기를 삶아 만든 편육을 곁들여 먹기도 한다. 1924년 출간된 한국 최초의 컬러 인쇄판 요리책 (“Various New Korean Recipes”)에 소개된 조리법도 가볍고 단순하다. “생두릅을 무르지 않게 잠깐 삶아 약에 감초 쓰듯 어슷썰어 놓고 소금 치고 깨소금 뿌리고 기름을 흥건하도록 쳐서 주무르면 풋나물 중에 극상등이요, 아무든지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 두릅을 오래 삶으면 조직이 무르게 되어 지루하고 밋밋한 음식이 되어 버린다. 짧은 시간 삶아서 먹어야 풍미와 식감이 좋다. 땅두릅이라고 불리는 독활 순이나 개두릅이라 불리는 음나무 순도 모두 데쳐서 숙회로 먹는다. 1959년 4월 30일 동아일보에는 이렇게 깨소금과 기름에 두릅을 무쳐 먹는 요리법에 더해 껍질을 벗겨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곱게 다진 쇠고기와 함께 양념을 넣고 볶아 먹는 방법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방법이 제일 흔하지만 이 경우 소스 맛이 두릅 향을 가린다는 단점이 있다. 장아찌를 만들어 먹으면 자연 그대로의 두릅 향을 더 진하게 즐길 수 있다. 두릅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고 저장 용기에 켜켜이 쌓은 다음 간장, 식초, 설탕, 물을 1:1:1:1.5 의 비율로 섞어 끓여낸 소스를 부어 준 뒤 실온에서 이삼 일 숙성시켰다가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는다. 쓴맛은 줄어들고 나무와 약초를 섞은 듯한 향이 더 진해진다. 먹고 나면 왠지 더 건강해지는 듯한 맛이다. 새순을 잘라 살짝 데치면 두릅 숙회를 맛볼 수 있다. 두께가 두꺼운 두릅은 세로로 반을 자르거나 밑둥에 십자 모양으로 칼집을 내어 안까지 고루 데친다. © blog.naver.com/lovejnkm 식초, 설탕, 소금을 섞은 단촛물을 살짝 끓여 양념한 밥에 데친 두릅을 올리고 김으로 말아주면 봄 향기가 상쾌한 두릅 초밥이 완성된다. © blog.naver.com/magicpt78 비빔밥에 각종 나물과 함께 제철 두릅을 데쳐 올리면 독특하면서도 강한 풍미가 더해진다. © blog.naver.com/cgr61 다양한 활용 충북 제천의 두릅 재배자 천용호 씨는 두릅 순을 이용한 장아찌와 김치로 특허를 받았다. 장아찌 염장액에 사용하는 간장, 물, 설탕, 식초의 혼합 비율과 숙성 방법이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세 번에 걸친 숙성으로 완성된 두릅 순 장아찌는 진공 포장되어 냉장고에서 3년 이상 보관할 수 있다. 김치는 일반 김치와 동일한 방법으로 담그지만 두릅 순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쳤다가 물기를 짜낸 다음 사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릅을 소금에 절여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소금기를 빼서 먹기도 한다. 두릅은 아스파라거스와 유사한 면이 있다. 두 가지 모두 봄철에 나는 순이다. 살짝 데친 두릅의 식감은 데친 아스파라거스의 식감과 아주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하다. 파스타 면을 끓이고 남은 면수에 두릅을 잠시 데쳐서 앤초비 오일 파스타에 넣으면 동서양이 만나는 듯한 맛의 요리가 된다. 길쭉하게 썬 쇠고기를 두릅과 번갈아 꼬챙이에 끼워 구워먹던 70년대의 요리법이 요즘에는 햄이나 맛살에 아스파라거스를 끼워 만드는 산적으로 변화한 것도 아마 두릅과 아스파라거스의 유사점에 착안한 누군가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두릅에 얇은 반죽을 입혀 튀겨 먹는 일본에서는 아스파라거스도 템푸라로 튀겨 먹는다. 2018년 3월 17일 중앙일보에는 두릅 그라탱 레시피가 실렸다. 데친 두릅에 삶은 계란을 다져 섞은 후 베샤멜 소스를 더해 오븐에 구워낸 요리이다. 봄철 두릅은 서울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메뉴에도 자주 오른다. 지역 식재료에 한식 요리법과 다른 나라 요리법을 창의적으로 함께 응용하는 것은 봄의 향기를 만끽하고 싶은 미식가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살짝 데친 두릅의 식감과 데친 아스파라거스의 식감은 아주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하다. 파스타 면을 끓이고 남은 면수에 두릅을 잠시 데쳐서 앤초비 오일 파스타에 넣으면 동서양이 만나는 듯한 맛의 요리가 된다. 식재료의 정체성 두릅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뭐라고 말할까. 왜 나를 한식이 아닌 이탈리아식으로 또는 프랑스식으로 요리했냐고 물어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보다는 ‘내가 잘려서 당신의 식탁에 오르지 않았다면 어떤 모습으로 컸을지 아는가’ 묻지 않을까. 우리는 종종 어떤 음식이 하나의 생명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식재료로서 두릅나무의 순은 본 적이 있지만 그 순을 그대로 두면 어떤 나무로 자라게 되는지 본 사람은 드물다. 스테이크에 곁들인 아스파라거스는 수 없이 먹어봤지만 아스파라거스 순이 자라면 어떤 모습의 식물이 되는지 본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행히 두릅 순을 잘라내거나 아스파라거스를 채취한다고 그 식물이 죽지는 않는다. 수확하고 난 뒤에 가지를 잘라주고 적당한 수의 가지만 남겨주면 여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커다란 식물로 자라난다. 그대로 방치하면 두릅나무는 키가 3~4m가 되도록 자란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농부의 입장에서는 나무를 관리하고 두릅을 수확하기가 어려워진다. 가지를 자르고 싹을 솎아주고 줄기 수를 조절하면 나무의 키를 조절하면서 두릅 순의 수확량을 늘릴 수 있다. 온실에서 재배하는 경우에는 온도가 너무 높아지면 새순이 웃자라 살이 적어지고 맛과 향이 떨어지므로 농부는 밤낮으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주어야 한다. 마트에서는 두릅나무가 아닌 두릅 순만 볼 수 있으니 대부분의 소비자는 그 이상 알기 어렵다. 이제 식탁에 오른 두릅을 보면서 스스로 한번 물어 보는 것은 어떨까. 나는 두릅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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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Ingredients 2020 WINTER 392

명태, 버릴 것 하나 없는 생선 겨울이 제철인 명태는 등 푸른 생선보다 단백질이 풍부하고 지방량은 적은 특성을 지녀 건강 식품으로 손꼽히는 생선이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전통식 관혼상제 상차림에 빠지지 않는 상징성 높은 식재료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명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1871년에 탈고한 인문학 수필 총서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명태라는 이름의 유래가 나온다. 함경도 명천(明川)에 사는 어부 중에 태씨(太氏) 성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낚시로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 도백(道伯, 현재의 도지사)에게 바쳤다. “도백이 이를 매우 맛있게 여겨 물고기의 이름을 물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고 단지 태 어부(太漁父)가 잡은 것이다.”라고만 대답하였다. 이에 도백이 “명천의 태씨가 잡았으니, 명태라고 이름을 붙이면 좋겠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실제 어원이라기보다 누군가 상상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인 듯하다. 하지만 이어지는 필자의 말에서 당시 명태가 얼마나 일상적인 먹거리였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300년 뒤에는 이 고기가 지금보다 귀해질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제 그 말이 들어맞은 셈이다. 내가 원산(元山)을 지나다가 이 물고기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오강(五江, 지금의 한강 일대)에 쌓인 땔나무처럼 많아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17세기 사람인 민정중이 명태에 대한 예언을 했을 당시에는 이 물고기가 식용으로서 그다지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승정원 일기』 효종 3년(1652)의 기록에 명태가 등장하는데, 이때 강원도에서 진상하는 대구 어란에 명태 어란이 섞여 있어 문제로 삼았다는 것을 보면 그렇다. 하지만 300년이 지나 조선 말기에 이르면 명태는 이미 온 나라에 두루 퍼져 일상의 식재료로 대접을 받는 생선이 되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기에 이미 모든 계층의 백성들이 제사상에 올리는 대표적 생선이 되었다. 명태는 한국에서만 중요한 생선은 아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잡히는 물고기이며 식용 물고기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자원이다. 세계적으로 명태는 아직까지 지속 가능한 어업 자원이다. 건조 방식 현대식 냉장 기술이 보편화되기 전까지 한반도에서 명태는 한겨울이 아니면 주로 말린 건제품 형태로 유통되었다. 건조의 정도에 따라 코다리, 짝태, 북어, 황태, 백태, 먹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단지 이름만 다른 것이 아니라 건조 상태에 따라 맛과 식감도 서로 다르다. 명태의 내장과 아가미를 떼고 여러 마리를 한 코에 꿰어 반건조한 것이 코다리, 소금에 절여 말려서 쫄깃한 식감에 짭짤한 맛을 내는 것이 짝태다. 북어는 과거에는 명태의 또 다른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바닷가에서 해풍과 햇빛으로 단기간에 말린 것을 지칭한다. 이와 달리 황태는 내륙 산간이나 고원에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수개월 동안 서서히 건조한 다음 1년 동안 숙성시켜 만든다. 명태 속 수분이 밤에는 얼고 낮에는 녹으며 증발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어육 속에 수많은 빈 공간이 생기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펀지 같은 모양새다. 실제 수분 함량은 북어가 황태보다 더 높지만, 황태가 덜 질기고 잘 씹히는 것은 이런 다공질의 구조 때문이다. 또한 습도가 낮고 바람이 많이 부는 고지대의 기후 특성으로 인해 생선살 속의 수분이 이동하기 쉬워 건조가 더 잘 이뤄지면서도 딱딱하지 않아, 부드럽게 결에 따라 잘 찢어진다. 건조를 마치고 숙성하는 과정에서 명태 속 지방과 아미노산이 갈변되어 황금색을 띠는 황태로 변한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갈변되지 않고 하얀색을 띠면 백태, 말리는 과정에서 날씨가 너무 따뜻하여 갈변이 심해진 것은 먹태라고 부른다. 동해안에 인접한 대관령 덕장에서 말린 황태가 특히 널리 알려졌고 눈 덮인 덕장의 풍경이 사진 작가들을 불러 모으는 색다른 풍경을 만들기도 한다. 다양한 용도 명태는 다양한 이름만큼이나 먹는 방법도 매우 여러 가지다. 황태나 북어는 아무 양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불에 살짝 구워 술안주로도 먹고, 잘게 찢은 채를 물에 부드럽게 불린 후 고추장이나 간장 양념에 버무려 반찬으로도 즐겨 먹는다. 황태를 큼직하게 토막 내어 양파, 대파, 고추, 콩나물, 두부를 갖은 양념과 함께 넣고 물을 자작하게 넣고 끓이면 얼큰하고 감칠맛이 뛰어난 찜 요리가 된다. 비슷한 방식으로 요리한 코다리찜이나 북어찜은 황태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대중적 인기가 높다. 그런가 하면 물에 불린 황태에 고추장 양념을 발라 구워낸 황태구이도 술을 부르는 맛이다. 황태와 북어는 술안주로도 인기가 높지만 술 마신 다음 날 먹는 대표적인 해장 음식이기도 하다. 냄비에 황태와 네모나게 썬 무를 넣고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한 방울 두른 뒤 한차례 볶아내 물을 붓고 끓이면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온다. 여기에 두부를 넣고 달걀을 풀어 밥과 곁들인다. 땀을 흘리며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숙취로 불편했던 속이 개운해진다. 흔히 명태는 버릴 것이 없는 생선이라고들 말한다. 북어 껍질만 모아 볶아서 무쳐 먹기도 하고 튀겨 먹기도 하며 아가미, 창난, 알은 젓갈로 만들어 먹는다. 명란젓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식 명란 ‘멘타이코(明太子)’가 되기도 했다. ‘명태의 알’을 뜻하는 이름 그대로의 음식이다. 일본에서는 스파게티, 주먹밥, 바게트와 같은 다양한 요리에 명란을 넣어 먹기도 한다. 한국의 명란 생산 중심지는 부산이다. 명란을 연구, 개발하는 회사도 여러 곳 있다. 요즘에는 과거에 비해 덜 짠맛의 저염 명란을 먹는 경우가 많지만 과거 방식으로 염도를 높인 명란이나 명란을 바른 김, 튜브에 넣은 명란을 짜서 먹는 형태, 누룽지에 명란을 더한 명란 라이스칩과 같은 새로운 방식의 음식이 등장하면서 명란을 즐기는 방법도 다양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가장 맛있는 명태 요리로 손꼽는 것은 바로 생태탕이다. 싱싱한 하얀 속살이 입 안에서 층층이 부서지는 재미에 한입 씹어 삼키고 또다시 한입 씹어 삼키다 보면 어느새 식사가 끝난다. 바닷물 속에 사는 물고기는 중력에 거슬러 몸을 지탱해야 하는 육지의 동물과 달리 힘을 쓸 일이 적다. 생선이 육류에 비해 덜 질기고 지방이 적은 이유다. 동해의 특산품 특히 명태나 대구처럼 바다 밑바닥 쪽에 사는 물고기는 단백질은 풍부하면서도 등 푸른 생선에 비해 지방량이 더 적다. 물고기의 근섬유는 짧으며 얇은 조각 단위로 분리되는 근절(myotome)로 배열된다. 2019년 싱가포르 국립대학 연구에 따르면 생선 근육에 V자 모양의 패턴이 나타나는 데는 환경의 영향이 필요하다고 한다. 쉽게 말해 바닷물 속에서 헤엄치면서 받게 되는 물리적 마찰과 스트레스의 영향으로 물고기 근육에 특유의 V자 모양 패턴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명태살 속 갈매기 무늬는 바다에서 살았다는 증거인 셈이다. 명태는 한국에서만 중요한 생선은 아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잡히는 물고기이며 식용 물고기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자원이다. 대구가 멸종 위기에 처하면서 어획 제한이 되고 나서 명태가 대구를 대체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명태는 수리미(surimi)라고 불리는 가공 연육을 만드는 데도 많이 사용된다. 세계적으로 명태는 아직까지 지속 가능한 어업 자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근해에서는 명태를 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국내에서 유통되는 동태, 생태, 황태, 명란까지 이제는 거의 수입산이다. 지구 온난화로 수온이 변화하고 한때 명태 새끼인 노가리까지 남획하여 한반도 연안의 명태 씨가 마른 것이다. 17세기 문신 민정중이 예언하고 나서 400년이 지난 한반도의 명태는 귀하다기보다 매우 희귀해져 버렸다. 다행히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고, 2018년에는 2만 1000여 마리의 명태가 잡혔다.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와 어획 제한 같은 조치가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 명태가 땔나무처럼 쌓여 있는 모습은 못 보더라도 동해에서 잡은 생태가 우리 밥상에 오를 날만은 다시 오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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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Ingredients 2020 AUTUMN 275

새우가 먼 바다로 떠나는 이유 새우는 간단한 조리만으로도 훌륭한 음식이 된다. 크기가 20cm 정도 되는 대하는 구이용으로, 크기가 작은 젓새우는 발효시켜 갖가지 조미료로 활용된다. 단백질과 무기질 함유량이 높은 새우는 특유의 감칠맛으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사랑받고 있다. 새우는 특유의 감칠맛으로 세계 어디에서나 애용되는 식재료인데, 특히 아미노산 글리신의 체내 함량이 높아지는 늦가을부터 겨울에 더 맛이 좋다. © PIXTA 한반도 근해의 새우는 늦가을부터 겨울까지가 제철인데, 이는 갑각류의 생존 전략과 연관이 있다. 생선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더 기름지고 살찐 몸으로 변신하지만, 체지방량이 적은 새우 같은 갑각류는 차가운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몇 가지 전략을 취한다. 하나는 수온이 연안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먼 바다로 이동하는 것이다. 겨울 추위가 매서운 한반도 근해의 갑각류가 봄, 가을에는 연안에 서식하다가 겨울에 멀리 나가 사는 이유다. 또 다른 방법은 얼지 않는 체내 성분의 비율을 늘리는 것이다. 새우는 단맛을 내는 아미노산 글리신의 체내 함량을 높이고, 오메가-3 지방산의 비율을 높여서 추위에 대비한다. 그런 전략 덕분에 우리는 맛이 달고 영양이 풍부한 가을 새우를 먹을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의 온대 및 아열대 수역에 분포하는 대하는 냄비 바닥에 굵은 소금을 깔고 굽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요리가 된다. © 게티이미지 튀김은 구이와 함께 대하의 대표적인 조리 방법이다. 밀가루, 달걀, 빵가루를 묻혀서 기름에 튀겨 내는데 보통은 껍질을 까지 않고 통째로 튀긴다. © 게티이미지 국내 새우 어획량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작은 크기의 젓새우다. 비단 한반도뿐 아니라 전 세계 어획량으로 놓고 봐도 젓새우의 어획량이 가장 많다. 구이로 먹을 수 있는 대하와 달리 젓새우처럼 크기가 작고 연약하여 부패하기 쉬운 종류는 잡자마자 선상에서 소금에 절인다. 새우장과 새우젓 새우는 비교적 손이 덜 가는 식재료이다. 굵은 소금을 프라이팬에 깔고 통째로 굽거나 짧은 시간 삶거나 찌기만 해도 견과류처럼 고소하면서 달콤한 풍미를 즐길 수 있다. 단맛 가득한 새우 살은 날것 그대로 먹고 머리만 따로 익혀 먹기도 한다. 한반도 근해에 서식하는 새우 중에는 몸길이가 20cm를 넘는 도화새우가 있다. ‘복숭아꽃’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화려한 생김새에 달콤한 풍미와 탱탱한 식감을 자랑하는 도화새우는 파인다이닝 메인 코스의 하나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국내 새우 어획량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작은 크기의 젓새우다. 비단 한반도뿐 아니라 전 세계 어획량으로 놓고 봐도 젓새우의 어획량이 가장 많다. 구이로 먹을 수 있는 대하와 달리 젓새우처럼 크기가 작고 연약하여 부패하기 쉬운 종류는 잡자마자 선상에서 소금에 절인다. 세계 각국에서 작은 새우를 발효시켜 페이스트나 소스로 만들어 다양한 음식에 사용하는 조미료를 만든다. 홍콩의 하고(蝦膏 xia gao), 태국의 까삐(kapi), 말레이시아의 블라찬(belacan), 인도네시아의 트라시(terasi), 베트남의 맘 똠(mắm tôm)처럼 이름과 형태는 다양하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새우를 재료로 하여 만든다. 한국에서도 새우젓의 용도는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비슷하다. 요리에 양념으로 쓰기도 하고 김치를 담글 때 넣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의 새우장은 소스나 양념으로 쓰기 위한 장이 아니라 새우를 날것 그대로 채소와 향신료를 넣어 달인 간장에 담가 숙성시킨 음식을 말한다. 단맛, 감칠맛, 짠맛을 내는 간장과 새우의 맛이 합쳐져 만들어 내는 풍미가 일품으로 게장과 비슷한 반찬인데, 익힌 새우와 생새우의 중간 정도 되는 새우살의 색다른 식감이 무척 매력적이다. 갓지은 맨밥을 곁들이면 왜 한국에서 새우장을 ‘밥도둑’이라고 부르는지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는 새우를 날것 그대로 채소와 향신료를 넣어 달인 간장에 담가 숙성시킨 새우장도 즐겨 먹는다. © Shutterstock 작은 새우로 담근 새우젓은 여러 가지 요리의 양념으로 쓰이는데 특히 김치를 담글 때 빠질 수 없는 재료다. 또한 다진 청양고추와 마늘, 고춧가루, 통깨, 참기름 등 양념을 넣고 무친 새우젓은 더운 여름철 식욕을 돋우는 별미이다. © 궁중음식연구원 콜레스테롤 새우는 100g에 콜레스테롤이 189mg이나 들어 있을 정도로 콜레스테롤 함량이 높은 식품이다. 이렇게 콜레스테롤이 많이 들어 있는 이유는 새우의 성장에 꼭 필요한 영양 성분이기 때문이다. 즉, 탈피를 촉진하는 호르몬이 콜레스테롤에서 만들어진다. 콜레스테롤은 사실 사람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성분이다. 두뇌 발달에 필수적이고, 남성호르몬, 여성호르몬과 같은 성호르몬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성분이기도 하다. 일조량이 적은 겨울철에 부족하기 쉽다는 비타민 D도 콜레스테롤에서 만들어진다. 한편 사람은 체내에서 스스로 콜레스테롤을 만들 수 있는 반면에 갑각류는 그런 능력이 없다. 양식 새우든 자연산 새우든 간에 콜레스테롤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면 성장이 저해된다. 그래서 새우 양식을 위해서는 콜레스테롤이 적절히 배합된 사료가 필수이다. 콜레스테롤은 새우의 몸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새우살에는 상대적으로 함량이 적은 편이고 풍미가 뛰어난 머리에는 많다. 새우 머리는 정확히 말해 두흉부로, 머리와 몸통을 합한 부분이다. 맛좋은 내장이 들어 있는 만큼 지방과 콜레스테롤 함량이 높다. 내장만 따로 꺼내 먹는다면 그 속의 지방 함량은 새우살의 7배, 콜레스테롤 함량은 2~3배 정도이다. 흔히들 새우 똥, 영어권에서 ‘vein’이라고 부르는 소화관의 끝부분도 양은 얼마 안 되지만, 콜레스테롤 비율이 높은 편이다. 많은 음식에 속설이 있듯 새우에도 잘못된 믿음이 있다. 그중 하나가 새우 꼬리에 콜레스테롤 흡수를 방해하는 물질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우 꼬리에 특별한 약효가 있진 않다. 새우 껍질은 키틴질이라는 성분으로 이뤄져 있는데, 키틴질은 인체에서 소화 흡수되지 않는다. 키틴질에 강한 염기를 가해서 화학 처리를 해야만 키토산이라는 더 작은 분자들로 쪼개지고, 이 키토산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떨어뜨리는 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새우 껍질 또는 꼬리를 아무리 열심히 씹어도 키틴질이 키토산으로 분해되진 않는다. 새우 껍질을 먹는다고 건강에 특별한 효과를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새우 풍미를 제대로 즐기는 데는 훌륭한 방법이다. 껍질에는 새우 특유의 맛과 향을 내는 다양한 아미노산, 당, 색소 성분이 풍부하고 요리할 때 새우살 속의 맛 성분이 녹아 나가는 것을 막아 주는 방패 역할도 한다. 어획량 감소 과도한 콜레스테롤 섭취를 우려해 새우를 멀리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사람의 혈관을 돌아다니는 콜레스테롤 가운데 80% 이상은 체내에서 직접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사람이 식이 조절만으로 콜레스테롤 수치를 떨어뜨리기는 힘들다. 정작 콜레스테롤을 너무 많이 먹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사람이 아니고 새우가 해야 한다. 먹이 속 콜레스테롤 양이 0.5% 정도면 새우의 성장에 유리하다. 하지만 섭취 비율이 5%까지 높아지면 오히려 성장이 억제된다. 새우는 갈아서 전분 반죽에 섞어 얇게 튀긴 새우 크래커로도 즐겨 먹는데,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인기가 높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중하를 사용하다가 어획량 감소로 인해 이제는 꽃새우를 써서 새우 크래커를 만든다. 그러나 모든 자원이 그렇듯 새우도 무한한 식재료가 아니다. 바다 새우잡이와 새우 양식이 환경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과 지속가능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미래에는 지금처럼 다양한 새우를 맛보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고려 말기의 문인 이색(1328~1396)은 대하를 선물로 받고 감사 표시로 쓴 시에서 “몸을 굽혀서 서로 예를 차리니 깊이 음미하면 도가 살찌겠구나.”라고 썼다. 수염이 긴 새우가 몸을 굽힌 모습이 한 성리학자의 눈에는 마치 고개를 숙여 인사하듯이 도를 지킬 줄 아는 겸손한 생물로 비춰진 모양이다. 그렇다면 가을 새우의 깊은 맛을 즐기면서도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는 겸손한 자세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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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Ingredients 2020 SUMMER 284

더위를 씻어내는 메밀국수 한여름에 먹는 시원한 냉면은 더위에 지친 입맛을 돋우는 한편 원기도 회복시켜 준다. 냉면의 주된 재료인 메밀이 다른 곡류에 비해 월등히 많은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메밀을 빻아 묵을 쑤어 먹기도 하고 전을 부쳐 먹기도 하지만, 냉면을 가장 사랑한다. 살얼음이 떠 있어 보기만 해도 시원한 평양냉면. 갓 뽑아 삶은 메밀 국수를 차가운 육수에 말아 먹으면 면발에서 탄력이 느껴진다. ⓒ 연합뉴스 남북 정상 회담이 열렸던 2018년 4월 27일의 날씨는 섭씨 22도를 웃돌았다. 판문점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나란히 앉아 차가운 국물에 담긴 국숫발을 젓가락으로 집어 드는 장면이 국내외에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 모습을 지켜봤던 시민들은 냉면 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섰고, 즉석 냉면 판매량도 3배 이상 늘었다. 지금은 여름철 별미로 굳어졌지만 원래 냉면은 겨울에 즐겨 먹던 국수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차가운 국물을 만들 수 있는 얼음이나 동치미 국물이 겨울에나 구할 수 있는 재료였기 때문이다. 또한 국수의 재료인 메밀을 늦가을에 거둔 것도 그 이유이다. 메밀은 2~3개월이면 다 자라 수확할 수 있지만, 여름에 거두면 저장이 만만치 않다. 대부분의 곡물과 비교하여 2배에 달하는 지질이 들어 있어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저온에서 저장할 수 있는 겨울이 되어야 그나마 장기 보관이 가능했으니, 여름에 씨를 뿌려 늦가을에 거두는 것이 시기상 적절했다. 채 썬 오이와 무, 홍어회 무침이 매콤달콤한 양념장과 함께 곁들여진 함흥냉면. 국수 주재료로 녹말가루를 사용하기 때문에 평양냉면보다 면발이 더 가늘면서도 식감이 쫄깃쫄깃하다. ⓒ 뉴스뱅크 계절 별미 냉면이 겨울 별미로 여겨진 것은 추운 겨울날 뜨끈한 온돌방에 앉아 맛보는 차가운 국수의 운치 때문이기도 했다. 1929년 12월 1일자 대중잡지 『별건곤(別亁坤)』에 실린 김소저(金昭姐)라는 사람의 냉면 예찬을 보자. “살얼음이 뜬 진장 김칫국에다 한 저(箸) 두 저 풀어 먹고, 우루루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 평양냉면의 이 맛을 못 본 이요! 상상이 어떻소?” 이런 역설적 즐거움은 다시 1973년 1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로 이어진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예능 보유자 김선봉(金先峰 1922~1997) 씨는 아들과의 대화에서 휴전선 너머 고향 황해도의 겨울을 이렇게 추억한다. “밤 깊도록 윷놀이를 하다가는 밤참으로 얼음 동치미에 막국수를 말아 꿩고기로 구미를 해서 먹지. 그 맛이란 참! 이불을 목에까지 뒤집어쓰고 훌훌 소리 내며 먹으면 위에선 이가 시려 덜덜 떨리고 아랫도리는 방바닥이 뜨거워서 후꾼후꾼 달고….” 요즘에는 막국수를 강원도 음식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위 기사에서 볼 수 있듯 막국수는 냉면과 동일한 음식이다. 막국수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첫 번째는 막과자, 막소주처럼 거친 음식을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메밀을 막 갈아 만든 국수에서 명칭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둘 다 일리 있다. 껍질을 덜 깎은 겉메밀을 섞어 갈아 만든 메밀국수의 식감은 ‘막’이란 접두어의 뜻처럼 거칠다. 또한 메밀국수는 제분하자마자 ‘막’ 국수로 삶아 내야 한다. 메밀 속 지질은 분해되기 쉽고 휘발성 풍미 물질은 열을 가하면 날아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제분기가 과열되기라도 하면 견과류 같은 고소한 향미는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햇메밀이나 저온에서 보관한 통메밀을 갓 빻아 반죽에 사용하는 것이 제일 좋다. 반죽도 바로 사용해야 한다. 치댈수록 글루텐이 엉기며 쫄깃해지는 밀가루 반죽과 달리 메밀에는 글루텐이 들어 있지 않아서다. 메밀 속 80%를 차지하는 전분, 14%의 단백질과 약간의 점액질이 반죽을 결합시키긴 하지만 불안정하다. 그래서 메밀의 결합력을 보완하기 위해 전분이나 밀가루를 섞기도 하는데 함량에 따라 면의 조직감이 달라진다. 풍미와 조직감을 좋게 하려면 반죽을 만들자마자 즉시 국수틀에 통과시켜 면을 뽑아야 한다. 남북 정상 회담 만찬을 위해 평양 옥류관에서 판문점까지 제면기를 공수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제면기로 면을 뽑자마자 바로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서 익혀야 한다. 메밀국수는 2~3분 만에 익는다. 타이밍을 놓치면 금방 퍼져 버린다. 얼른 꺼내서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씻어 더 이상 익는 것을 막고 겉면의 전분을 씻어내어 달라붙지 않도록 해 줘야 한다. 이렇게 만든 면을 어떻게 담아내느냐에 따라 식감이 또 달라진다. 차가운 국물에 말아 먹을 때는 단단하면서도 탄력이 느껴지고, 매콤달콤한 양념장에 비벼먹을 때는 부드럽다. 메밀국수는 2~3분 만에 익는다. 타이밍을 놓치면 금방 퍼져 버린다. 얼른 꺼내서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씻어 더 이상 익는 것을 막고 겉면의 전분을 씻어내어 달라붙지 않도록 해 줘야 한다. 이렇게 만든 면을 어떻게 담아내느냐에 따라 식감이 또 달라진다. 전통 국수 틀을 이용해 막국수 면을 뽑고 있다. 메밀에는글루텐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반죽하는 즉시 면을 뽑아야 하며, 뽑아낸 면은 바로 뜨거운 물에서 빨리 익혀야 덜 퍼진다. ⓒ 연합뉴스 쓴메밀은 주로 볶아서 차로 만들어 마신다. 중국과 네팔을 비롯한 히말라야 고산 지대에서 재배되는 품종으로, 일반 메밀보다 루틴이 평균 70배 이상 함유되어 있어 건강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쓴메밀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 네이버 지식백과 미식 논쟁 여름철 공이를 눌러 국수를 뽑던 일은 이제 사람 대신 기계가 대신하게 되었고, 냉장, 냉동 기술의 발달로 냉면은 사시사철 어느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별건곤』 1931년 7월호에 이미 이런 설명이 실렸다. “평안도 같은 데는 여름보다 겨울 냉면을 더 맛이 있고 운치 있는 것으로 알지만 서울에서는 여름철에 냉면을 많이 먹는다. 아니 평안도에서도 실제 많이 먹기는 여름이다. 그것이야 어찌 되었든 여름철에 냉면 국수를 눌러먹고 사는 사람이야 냉면집밖에 또 무엇이 있으랴. 서울에도 지금은 냉면집이 해마다 늘어간다. 값으로 치면 어느 집이나 보통 15전이지만 솜씨를 따라서 맛이 각각이다.” 냉면은 오늘날에도 한국에서 미식 논쟁이 가장 치열한 음식 중의 하나다. 심지어 몇 해 전 ‘면스플레인[면(麵)과 explain의 합성어]’이란 신조어가 등장했을 정도다. 합성어 ‘mansplain’이 남성이 여성보다 더 해박하다는 생각에 일단 가르치려 드는 행위를 뜻하는 것처럼 이 단어 역시 무엇이 진정한 냉면인지 가르치려는 행동을 말한다. 논쟁의 중심에는 여전히 평안도식 냉면, 즉 평양냉면이 있다. 현재 평양에서 먹는 냉면이 평양냉면이냐 서울에서 먹는 냉면이 원형에 가까운 진짜 평양냉면이냐부터 시작해서 면과 육수에 대한 논쟁, 식초와 겨자에 대한 논쟁, 고명에 대한 논쟁이 이어진다. 냉면을 맛나게 먹으려면 선주후면(先酒後麵)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소리 높이기도 한다. 불고기, 닭무침, 편육과 같은 안주에 술 한 잔을 하고 나서 먹을 때 진정한 냉면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미식을 제대로 즐기려면 배가 적당히 부른 상태여야 한다. 지역별 특미 하지만 냉면의 참맛에 대한 소소한 규칙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다양한 냉면이 있다. 한국전쟁 전후 북한을 떠나 온 실향민이 정착하여 들여온 음식이지만 서울, 의정부, 인천의 평양냉면이 각기 다르고 대전, 대구의 평양냉면이 또 다르다. 진주에는 해물 육수에 육전이 올려진 진주냉면이 있으며, 부산에는 메밀 대신 100퍼센트 밀가루로 만든 밀면이 있다. 냉면 대신 막국수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는 강원도에서도 지역에 따라 면, 육수, 고명의 종류가 가지가지다. 대관령을 기준으로 서쪽인 영서 지방에서는 곱고 하얀 속메밀을 쓰고, 동쪽 영동 지방에서는 겉메밀을 섞어 거칠고 색이 거뭇한 면을 낸다. 육수도 지역에 따라 동치미, 고기 육수, 간장 육수로 달라진다. 휴전선 바로 남쪽 바닷가 속초에서는 함경도 실향민들이 고향의 맛을 그리며 명태회를 고명으로 올려 고추장 양념에 비벼 먹는 회냉면이 별미이다. 최근에는 일반 메밀보다 맛이 써서 쓴메밀이라 불리는 새로운 품종을 이용한 메밀국수의 소비도 늘고 있다. 본래 메밀에는 루틴이라는 항산화 물질이 들어 있다. 루틴은 혈관을 튼튼하고 유연성 있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플라보노이드인데, 일반 메밀보다 쓴메밀에 20배에서 100배 가까이 더 많다. 쓴맛을 줄이면서도 루틴 함량은 그대로 유지하는 가공 방법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여름날 차가운 메밀국수로 더위를 씻어내려는 미식가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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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Ingredients 2020 SPRING 292

식재료이자 음식인 나물 나물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전통적이며 일상적인 음식이다. 최근에는 나물이 주를 이루는 사찰 음식이 널리 소개되면서 많은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으며, 채식주의 열풍으로 고급 식당에서도 메뉴에 적극 활용하고 있는 추세다. 독일의 사우어크라우트, 영국의 피시 앤 칩스처럼 나라마다 대표적으로 떠올려지는 음식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멕시코 하면 타코밖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멕시코 음식이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는 그저 그 사람이 멕시코 음식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말해 줄 뿐이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한 나라의 식문화를 특정 음식 한두 가지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떤 외국인이 대표적인 한국 음식으로 나물을 꼽는다면 그가 한식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인들이 즐겨 먹는 대표적인 봄나물인 두릅, 냉이, 달래(왼쪽부터)는 이른 봄 산이나 들에서 자란다. 봄나물은 맛과 향이 좋아 겨울철 잃었던 입맛을 되찾아 준다. ⓒ imagetoday 한식의 진수 나물은 단어 자체의 뜻과 용법부터가 복잡하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나물을 찾아보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뜻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예를 들어 고사리, 도라지, 두릅, 냉이 따위가 있다고 설명한다. 두 번째 뜻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 따위를 삶거나 볶거나 또는 날것으로 양념하여 무친 음식’이라고 나와 있다. 즉, 나물이 첫 번째 뜻으로 쓰일 때는 식재료를 의미하고, 두 번째 뜻으로 쓰일 때는 요리한 음식을 가리킨다는 의미이다. 이때 요리의 재료는 사전적 범위보다 넓어서 풀이나 나뭇잎이 아니더라도 식물성 재료를 나물 방식으로 요리하면 나물이 된다. 감자는 덩이줄기, 가지는 열매로 풀이나 나뭇잎과는 다른 종류지만 이것들을 세로로 기다랗게 썰어서 소금이나 간장 같은 양념을 넣어 볶거나 또는 삶아서 양념을 넣고 무치면 감자나물, 가지나물이 된다. 호박나물, 무나물도 마찬가지로 재료는 나물이 아니지만 나물처럼 조리한 음식이다. 그런데 콩나물과 숙주나물은 두 가지 뜻이 다 가능하다. 콩이나 녹두를 시루에 담아 싹을 낸 재료와 그걸 무쳐낸 음식의 의미가 둘 다 포함되어 있다. 된장을 풀어 끓여 낸 냉잇국은 한 숟가락 입에 넣을 때마다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이 교차하는 날 이른 아침에 들판에서 촉촉하게 젖은 흙냄새를 맡으며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뜨린다. 봄철 재래시장에서는 갖가지 봄나물을 바구니에 담아 파는 상인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국내에서 채취할 수 있는 식용 산나물은 300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부분의 봄나물에는 비타민 C와 무기질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 연합뉴스 제철 음식 이처럼 나물은 말 자체가 복잡한 음식이다. 또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이라는 사전 속 설명은 짧지만 여기에는 복잡한 지식이 필요하다. 우선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독초의 어린순을 나물인 줄 알고 잘못 먹었다가 위험에 빠지는 일이 종종 뉴스에 나온다. 대표적 제철 음식인 나물은 채집 시기도 중요하다. 나물 하면 으레 봄을 떠올릴 정도로 봄철 새순이 막 돋아날 때만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식물이 성장하면서 질기고 단단해지면 더 이상 식용이 불가능하다. 물론 어린순이라고 무조건 나물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독성 물질을 제거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달래, 돌나물, 참나물, 취나물은 독이 없어서 날것으로 먹어도 무방하지만 고사리나 원추리처럼 반드시 익혀 먹어야 하는 것들도 있다. 그중 원추리는 관상용 식물로도 매력적이지만 다른 봄나물보다 단맛과 감칠맛이 두드러져 이른 봄 어린순을 즐겨 먹곤 한다. 하지만 원추리에는 콜히친이라는 물질이 들어 있다. 콜히친은 항염증 작용이 있어 급성 통풍이 있는 사람의 증상 완화에 사용되는 약이다. 최근에는 심근경색 후 심혈관질환이 발생할 위험을 낮추는 예방약으로서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원추리를 나물로 먹을 때 콜히친 성분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섭취하면 구토, 복통, 설사 같은 증상으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원추리가 성장할수록 콜히친 성분 함유량이 많아지므로 봄철 어린순만 먹어야 하고 끓는 물에 데친 뒤 차가운 물에 충분히 담그는 과정을 통해 수용성 콜히친을 제거한 뒤에 먹어야 식중독을 피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산이나 들에서 자라며 식용할 수 있는 식물을 산나물이라고 하는데 한국에 자생하는 산나물만 300종이 넘는다. 취나물 하나만 해도 자생종이 60여 종에 식용 가능한 것이 24종이다. 이렇게 다양한 나물을 제대로 즐기려면 언제 무엇을 채집해서 어떻게 먹어야 안전한가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냉이는 된장을 풀어 국을 끓여 먹거나 살짝 데쳐서 된장, 고추장, 다진 마늘과 파, 깨소금, 참기름 등 양념을 넣고 무쳐서 먹는다. © Getty Images 다양한 조리법 나물을 조리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다. 끓는 물에 살짝 데치기만 할 것인가, 데쳐서 찬물에 헹궈 쓴맛을 씻어낼 것인가, 볶을 것인가, 오랫동안 숙성시킬 것인가, 간장에 무칠 것인가, 된장에 무칠 것인가, 들기름을 더할 것인가, 참기름을 더할 것인가, 또는 깨소금을 뿌릴 것인가, 들깻가루를 뿌릴 것인가, 고춧가루를 섞을 것인가 등등을 결정해야 한다. 그렇게 요리한 나물의 맛과 향은 들판의 꽃과 풀만큼 다채롭다. 참취나물은 날것 그대로 맛보면 풋사과 같은 향이 나지만, 데쳐서 무치면 쌉싸름하면서도 씹을수록 고소한 향미가 올라온다. 방풍나물에도 기본적으로 쓴맛이 깔려 있는 점은 비슷하지만, 귤껍질과 박하를 섞은 듯한 달콤한 풍미는 참취나물과 확연히 구분된다. 봄나물의 대표주자인 달래와 냉이는 그 미묘한 맛과 향을 묘사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 냄새의 심리학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인지신경과학자 레이첼 허즈(Rachel Herz)는 자신의 책 『욕망을 부르는 향기』(The Scent of Desire: Discovering Our Enigmatic Sense of Smell)에서 어떤 언어든 후각 경험에만 한정해서 사용되는 단어는 다른 감각 경험에 한정되는 단어보다 훨씬 적다고 지적한다. 달래와 냉이는 허즈의 설명에 딱 들어맞는 나물들이다. 먹고 나서 후각 경험을 말로 설명하다 보면 언어적 한계를 느낀다. 달래는 마늘과 비슷하게 알리신을 함유하여 알싸한 맛을 내지만, 마늘과는 또 다른 상큼한 단맛을 품고 있다. 겨자과 식물인 냉이에도 황화합물 특유의 자극적 향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냉이의 향기를 제대로 묘사할 수 없다. 된장을 풀어 끓여 낸 냉잇국은 한 숟가락 입에 넣을 때마다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이 교차하는 날 이른 아침에 들판에서 촉촉하게 젖은 흙냄새를 맡으며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뜨린다. 물론 달래와 냉이 맛에 대해 백 번 말로 하는 것보다 한 번 맛보는 것이 낫다. 봄철 두릅나무에서 자라는 어린순을 두릅나물이라고 하며, 주로 끓는 물에 데쳐 내어 고추장과 식초, 설탕을 섞어 만든 초고추장을 바르거나 찍어서 먹는다. 비빔밥은 여러 가지 나물의 맛을 한번에 즐길 수 있는 한국의 대표적 음식이다. 밥 위에 각종 나물과 달걀 프라이, 소고기 고명을 얹은 후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비벼 먹는다. 이른 봄의 향기 각각의 나물을 음미하며 향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지만 고추장과 참기름을 조금 넣고 달걀 반숙을 얹어 밥과 함께 비벼 먹어도 좋다. 비빔밥은 한국 가정에서 반찬으로 만들어둔 나물로 누구나 손쉽게 해먹을 수 있는 요리이면서 국밥과 함께 가장 오래된 외식 메뉴 중 하나다. 맵고 달콤한 고추장의 맛이 지휘자처럼 중심에 서서 다양한 나물이 리듬에 맞춰 함께 섞여 내는 새로운 맛의 변주를 이끈다. 뒤섞어 먹는 비빔밥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간혹 있다. 하지만 나물을 아는 사람이라면 비빔밥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다. 갖가지 나물이 함께 모여 만들어 내는 비빔밥은 나물 속에 어우러진 다양성과 포용의 철학을 다시 한 번 끌어모은 한식의 진수이다. 한편 특정 지역에 가야만 맛볼 수 있는 나물도 많다. 울릉도 삼나물과 부지갱이처럼 지리적 표시 임산물로 지정된 것도 있다. 최근에는 나물에 대한 새로운 접근도 활발해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봄나물의 맛과 손질법, 조리법에 대한 체계적 연구 결과를 보고서로 펴낸 기업도 있다. 또 나물을 이용한 메뉴 개발에 힘을 쏟는 고급 식당도 늘고 있다. 그리하여 나물은 가장 전통적이면서 혁신적인 한식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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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Ingredients 2019 AUTUMN 248

배, 요리에도 요긴한 과일 해마다 추석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이 배를 선물로 주고받는다. 가을 낙엽을 연상시키는 황금빛으로 잘 익은 큼지막한 배는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과일 중 하나이자 요리에도 널리 사용되는 과일이며 전통 민간요법에도 자주 이용된다. 또한 최근에는 미세 플라스틱의 대체재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배는 생각만 해도 시원한 과일이다. 황금빛으로 잘 익은 큼지막한 배를 집어 들고 향기만 맡아도 이미 시원하고 달다. 익지 않은 상태에서 팔리는 서양 배와 달리 한국 배는 잘 익은 상태에서 판매되므로 집에 가져오자마자 바로 먹을 수 있다. 배는 수분과 당분에 더해 식이섬유, 칼륨, 비타민 C와 다양한 항산화물질도 함유하고 있다. 과당과 소르비톨이 들어 있어서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날 수 있긴 하지만, 반대로 변비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배는 변비 완화, 숙취 해소, 기침 완화 등의 용도로 이용되어 왔다. 최근에는 배의 높은 칼륨 함유량이 혈압 조정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은 2015년 여름 호주 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의 매니 노크스(Manny Noakes) 교수의 인터뷰였다. 그는 음주 전 한국 배 주스 한 컵을 마시면 숙취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아직 어떤 성분이나 이유 때문에 이런 효과가 나타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국 배 주스가 알코올 대사에 관련된 주요 효소의 활성을 높여 체내에서 알코올이 더 빨리 대사되도록 돕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술을 마시고 난 뒤 보다 음주 전에 배 또는 배 주스를 섭취해야만 이런 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국, 일본, 미국에서 공동으로 행한 이전 연구 결과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유전자형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도 한다. 장미과의 백색 과일 서구에서는 종종 사람의 체형을 ‘사과형’, ‘배형’으로 구분하는데 이 과일들의 생김새 차이 때문이다. 위쪽이 두툼하고 아래로 갈수록 홀쭉해지는 사과와는 반대로 배는 아래쪽이 불룩한 전구 같은 모양이다. 사과형은 대개 뱃살이 두둑하여 허리둘레가 굵고, 배형은 허리는 비교적 가늘지만 엉덩이에 지방이 많다. 사과형 체형은 주로 남성에게 많은데 허리둘레가 늘어나 있다는 것은 내장 지방이 많다는 의미여서 당뇨병, 심장병 위험이 높은 대사성 증후군일 가능성이 높다. 서양과 달리 한국에서 주로 먹는 사과와 배는 모양이 비슷하다. 그런 이유로 아시아 배를 ‘사과 배’라고 부르기도 한다. 통상 사과보다는 배가 큼지막하며 겉이 붉거나 푸른 사과와 달리 배는 황금빛으로 밝은 갈색을 띠고 있지만, 둥그스름한 모양만큼은 별 차이가 없다. 사실 사과와 배는 가까운 친척 관계로 둘 다 장미과에 속한다. 모두 유라시아를 원산지로 하며, 꽃받침이 부풀어서 만들어진 열매인 이과(pome 梨果)다. 하지만 한 입 깨물어 보면 질감만으로도 사과와 배를 바로 구분할 수 있다. 사과는 부피의 1/4을 공기가 차지하고 있어서 조금 퍼석한 느낌이 들지만, 배는 깨물자마자 수분이 터져 나온다. 배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후식용 과일 중 하나이면서 요리에도 자주 쓰인다. 또한 예로부터 기침 완화, 숙취 해소, 변비 완화 등의 효과가 있어 민간 요법에도 널리 사용되어 왔다. 음식 맛을 돋우는 고명 한국에서 배는 요리에도 자주 쓰인다. 배에는 단백질 분해 효소가 들어 있어서 불고기나 갈비를 양념에 재울 때 고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사용하기도 하고, 아삭하고 달콤한 식감 때문에 육회에 곁들여 먹기도 한다. 과거 기록을 보면 다양한 요리에 배를 채 썰어 고명으로 얹어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연중 행사와 풍속을 다룬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에는 “잡채와 배, 밤, 소고기, 돼지고기 썬 것과 기름, 간장을 메밀국수에 섞은 것을 골동면이라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근대 조리서인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 1921년판에는 비빔밥에 배를 얇게 저며서 채친 것을 고명으로 올려서 먹도록 권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인 1924년에 발간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잡채의 재료 중 하나로 배를 넣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배 하면 떠오르는 것은 시원한 동치미와 냉면이다. 20세기 초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요릿집이었던 명월관에서는 조선 왕실 방식으로 동치미말이 국수를 선보여 대성공을 거뒀다. 1900년대 초에 나온 『부인필지(夫人必知)』라는 책을 보면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무∙배∙유자를 얇게 저며 넣은 후 삶은 돼지고기를 얇게 썰고 달걀을 부쳐 채쳐 넣고, 후추∙배∙잣을 넣은 것이 바로 명월관 냉면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요즘 한식당에서는 비빔밥이나 잡채에 얹은 배 고명을 보기 어렵지만, 냉면이나 차가운 비빔국수에는 여전히 얇게 저민 배를 곁들여 낸다. 동치미를 담글 때 통배를 넣어 시원한 풍미를 더하는 것 역시 한국 가정 요리와 요식업에서 모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방식이다. 향이 진한 야생종 배 과거에는 배를 그대로 먹기에는 까칠하고 맛도 시큼한 편이었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의 가정 살림 백과사전인 『규합총서(閨閤叢書)』(1809)에는 배를 이용해서 만드는 ‘향설고’라는 별식이 등장하는데 조리법은 다음과 같다. “시고 단단한 문배를 껍질을 벗기고 길이로 등분하여 모양을 낸 다음 통후추를 많이 박는다. 솥에 꿀물을 부은 뒤 얇게 저민 생강과 함께 넣고, 빛이 붉어지고 꿀이 속속들이 밴 후 씨가 무를 때까지 뭉근한 불에 서서히 조리면 된다. 배가 시어야 빛이 붉게 되고 시지 않을 땐 오미자국을 조금 치면 좋다. 마른 정과에 곁들여 쓰려면 국물을 졸여 단단한 기운이 있게 하고, 수정과로 쓰려면 졸이는 것을 덜 졸여 꿀물을 넉넉히 해서 계피가루를 조금 타고 통잣을 뿌려서 쓴다.” 배를 조각내어 젓가락으로 구멍을 낸 다음 후추를 박고 생강, 꿀을 함께 넣고 끓여 만드는 배숙도 향설고와 비슷한 음식이다. 이들 요리에 사용되는 문배는 크기가 작고 단단하며 단맛은 덜하고 신맛이 강해서 지금 기준으로 보면 돌배라고 할 수 있다. 야생 배나무에 열리는 열매는 서양 배나 아시아 배 할 것 없이 모두 단단한 돌배다. 셀룰로스와 리그닌이 풍부한 석세포가 들어 있어서 모래알같이 까끌하다. 과육이 부드럽고 꿀물처럼 달콤하며 과즙이 풍부한 배는 육종 전문가들에 의한 품종 개량의 결과다. 맛은 개량한 배보다 덜하지만, 향만큼은 야생종에 가까운 문배가 더 진하다. 생강과 후추를 함께 넣고 끓여도 결코 눌리지 않는 향이다. 작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정상회담 만찬주로 함께한 문배주는 평안도 지역 재래종 돌배인 문배의 향이 난다고 하여 이름이 문배주이다. 문배가 재료로 들어가진 않았지만 그 향을 내니, 문배 맛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번 맛볼 만하다. 그런가 하면 전주 지방의 이강주는 배의 풍미를 녹여낸 술을 맛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다. 쌀과 누룩으로 발효 증류하여 만든 소주에 배, 생강, 율금, 계피, 꿀을 넣어 숙성시켜 만든다. 배는 아삭한 식감과 달콤한 맛 때문에 비릿한 육회에 곁들여 먹는다. 배에는 단백질 분해 효소가 들어 있어서 불고기나 갈비를 양념에 재울 때 고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사용하기도 하고, 아삭하고 달콤한 식감 때문에 육회에 곁들여 먹기도 한다. 미세 플라스틱 대체재 최근 한국에서는 배를 미세 플라스틱을 대체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전에 육종 전문가들이 배의 까끌까끌한 석세포를 줄여서 부드러운 식감을 내는 데 힘쓴 것과는 반대로 배의 석세포를 화장품과 치약에 들어가는 미세 플라스틱 대체재로 이용하려는 것이다. 까칠한 석세포는 식용으로는 인기가 없지만 화장품의 각질 제거제나 치약 속 연마제로 쓰이는 미세 플라스틱을 대신하기에는 훌륭하다는 것이다. 이 연구가 좋은 결실을 맺으면 주스나 통조림용으로 가공하고 남은 배나 땅에 떨어지거나 손상되어 먹을 수 없는 배를 버리지 않고 활용하면서 한편으로는 환경오염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얇게 채 썬 배는 물냉면을 비롯해 다양한 요리에 고명으로 쓰인다. 배에 후추를 박아 저민 생강과 함께 꿀물에 끓여 식힌 음료인 배숙은 기침 치료제로 쓰였던 궁중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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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Ingredients 2019 SUMMER 476

호박에 숨어 있는 시간 호박은 어릴적 밥상을 떠올리게 하는 친숙한 재료이고, 밑반찬은 물론 주식으로까지 활용할 수 있다. 또한 호박은 과육뿐 아니라 씨와 꽃, 넝쿨도 먹을 수 있어 쓰임새가 많다. 가을과 겨울이 제철인 늙은 호박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식재료이다. 추운 겨울철 찹쌀가루와 섞어 죽을 해 먹기도 하고, 산후 부기를 제거하는 데 효과가 있어 아기를 낳은 산모들이 즙을 마시곤 한다. Ⓒ 토픽 계절이 변하면 우리가 먹는 호박도 변한다. 얇은 껍질을 벗기지 않고 그대로 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육질의 호박은 여름을 의미하고, 단단하고 두꺼운 껍질 속에 고구마 같은 질감과 맛을 내는 노란 속살을 숨기고 있는 호박은 겨울을 의미한다. 그러나 수확 계절에 따라 호박의 특성을 나누는 이러한 구분이 모든 경우에 다 들어맞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흔히 호박을 애호박과 늙은 호박으로 구분하여 부르는데, 둘은 같은 품종일 수도 있고 다른 품종일 수도 있다. 여름철 연한 녹색 빛의 덜 자란 조선애호박과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럭비공처럼 커다랗게 자란 황갈색의 늙은 호박은 같은 품종이다. 하지만 요즘 늙은 호박은 청둥호박처럼 아예 다른 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늙은 호박을 밀어내고 인기를 구가하는 단호박도 연중 내내 구할 수 있기는 하지만 맛과 질감, 저장 기간에서 겨울 호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과 이야기에 등장하다 호박에는 또 다른 시간이 숨어 있다. 그림의 소재로 호박이 등장하면 그 그림이 어느 시기에 그려진 것인지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화가 바르톨로메오 빔비(Bartolomeo Bimbi)의 작품 (Giant Squash from the Ducal Gardens in Pisa)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약 80킬로그램이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호박을 보여 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호박을 화가의 작업실까지 운반하기 위해 두 명의 힘센 남자가 필요했고, 그 장면을 보려는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며 뒤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 그림 속 호박은 현대의 거대 호박에 비하면 그리 크진 않다. 세계 기록을 보유한 호박은 2016년 벨기에에서 수확되었는데 무게가 무려 1,190.5kg에 달했다. 여하튼 빔비의 그림 속 호박을 보고 우리는 그가 그림을 그린 시기가 적어도 16세기 이후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인 호박은 기원전 5000년 무렵부터 재배되었으나 유럽에 이 채소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빔비의 작품은 1711년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것이다. 밀라노 출신의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의 (Vertumnus)에는 호박을 비롯해 여러 채소와 과일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이 그려진 시기는 1590년경이다. 이 그림 속에서 호박은 옥수수와 함께 신세계에서 온 작물로 등장한다. 이야기 속에 호박이 처음 나타나는 시기도 비슷하다. 신데렐라 이야기 속 요정이 마법을 부려 호박을 황금마차로 변신시키는 장면은 옛날이야기 같지만 실은 오래 전부터 구전되던 이야기에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가 1697년 추가한 내용이다. 1597년경 쓰여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에도 호박이 등장한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포드 부인은 과식과 과음을 즐기는 호색가 폴스태프의 성격을 빗대 “물기가 많은 호박 같다(this unwholesome humidity, this gross watery pumpkin)” 고 말한다. 사람들이 아직 호박과 덜 친숙했던 시절의 유럽에서 커다란 늙은 호박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뚱뚱하고 자기 중심적인 성격의 인물을 묘사하는 데 적당했을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호박을 기념하는 축제를 열 정도로 호박을 사랑했지만,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처음에는 호박을 시골 가난뱅이의 먹거리로 멸시하곤 했다. 추억의 음식 오늘날 한국에서도 못생긴 사람을 종종 호박에 비유한다. 그러나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반들반들 윤기 나고 허리가 잘록한 애호박을 보면 뭐를 해 먹겠다는 생각 없이 일단 사고 본다고 했다. 또한 남의 집 담장이나 울타리를 타고 올라간 호박 덩쿨 사이에서 동그란 토종 애호박을 보면 어찌나 예쁜지 슬쩍 따 가고 싶은 마음까지 동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정말 사랑한 것은 호박이 아니라 호박잎이었다. 산문집 『호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싱싱한 호박잎을 잎맥의 까실한 줄기를 벗기고 깨끗이 씻어서 뜸들 무렵의 밥 위에 얹어 부드럽고 말랑하게 쪄내는 한편 뚝배기에 강된장을 지진다. 된장이 맛있어야 한다. 된장을 뚝 떠다가 거르지 말고 그대로 뚝배기에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마늘 다진 것, 대파 숭덩숭덩 썬 것과 함께 고루 버무리고 나서 쌀뜨물 받아 붓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풋고추 썬 것을 거의 된장과 같은 양으로 듬뿍 넣고 또 한소끔 끓이면 되직해진다. 다만 예전보다 간사스러워진 혀끝을 위해 된장을 양념할 때 멸치를 좀 부숴 넣어도 좋고, 호박잎을 밥솥 대신 찜통에다 쪄도 상관없다.” 호박잎은 여름부터 가을 찬바람 날 무렵까지 맛볼 수 있는 계절의 별미다. 말랑하지만 서걱거리는 호박잎 속에 감칠맛 가득한 강된장과 밥알이 씹힐 때 대비되는 맛과 질감은 그저 계속 먹을 수밖에 없이 매혹적이다. 그리하여 박완서의 표현처럼 “마침내 그리움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흐뭇하고 나른해진다.” 그에게 그 맛은 반세기 전 고향의 소박한 밥상과 호박 덩쿨이 기어 올라가던 울타리와 텃밭과 장독대, 그리고 고향에 당도했을 때의 피곤한 안도감까지 떠오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호박은 세상 누구에게나 추억의 음식이다. 호박을 넣은 라따뚜이 없는 프로방스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탈리아에서는 애호박 꽃을 즐겨 먹는 것이 오래된 전통인데, 16세기 빈첸초 캄피(Vincenzo Campi)의 그림 에는 과일, 채소와 함께 식용 호박꽃이 나온다. 호박의 원산지인 중남미에서도 예부터 호박꽃을 먹었다. 멕시코에서는 호박꽃을 넣은 수프나 호박꽃을 오악사카 치즈로 채운 요리가 인기 있다. 값이 싸고 맛도 좋은 애호박은 여름철 밥상 위에 자주 올라가는 반찬 재료인데, 열매는 물론 잎도 즐겨 먹는다. 연한 잎을 찌거나 데친 후 밥에 쌈장을 올려 싸 먹는다. 된장찌개에 넣어 먹고 국수 고명으로도 자주 사용하지만, 얇게 썬 호박에 밀가루와 달걀물을 묻혀 부쳐낸 호박전은 달콤한 풍미가 일품이다. 멥쌀가루에 늙은 호박 과육과 소금, 설탕을 넣고 찐 호박떡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별미 간식이다. 호박선은 지역마다 만드는 방법이 약간씩 다른데, 칼집을 낸 사이사이에 양념한 소를 넣고 익혀 먹는 방식은 공통적이다. 옛 문헌에도 조리법이 나온다. 호박전은 만드는 방법이 간단하고 맛이 있어 가정에서 즐겨 해 먹는 반찬이다. 애호박을 가로로 도톰하게 썰어 밀가루와 달걀 물을 입힌 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부친다. 여름 호박과 겨울 호박 호박은 추억의 음식이면서 동시에 최신 트렌드에 맞는 음식이기도 하다. 저지방, 저칼로리에 단백질, 탄수화물, 비타민A, 칼륨, 섬유질이 풍부하니 늘 체중과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현대인에게 매력이 충분하다. 스파이럴라이저로 국수 모양으로 뽑은 주키니를 밀가루 면 대신 먹는 것이 최신 유행이지만, 익히면 속살이 국숫발처럼 풀어지는 스파게티호박 품종도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존재했다. 여름 호박은 특히 품종이 다양하다. 길쭉하게 생긴 녹색의 주키니가 있는가 하면 모양은 같아도 버섯 풍미가 살짝 도는 노란색 주키니도 있다. 진한 푸른색, 노란색, 오렌지색, 황록색 등 색깔도 가지각색이지만 모양과 크기도 다양하다. 도토리처럼 생긴 도토리호박도 있고, 납작하게 눌러놓은 모양에 가장자리는 가리비처럼 생긴 패티팬호박도 있다. 요즘은 여름 호박이라도 연중 내내 구할 수 있지만 그래도 여름 호박은 여름철에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15~20cm 정도로 작고 어릴 때 딴 것이 물기가 적어서 맛이 더 달다. 된장찌개에 넣어 먹고 국수 고명으로도 자주 사용하지만, 얇게 썬 호박에 밀가루와 달걀물을 묻혀 부쳐낸 호박전은 달콤한 풍미가 일품이다. 호박은 감칠맛과 잘 어울린다. 19세기 말 조선의 상차림과 조리법을 정리한 책 『시의전서』(是議全書)에 나오는 호박선 조리법도 호박에 감칠맛을 더한 찜 요리다. 주먹만 한 크기의 어린 호박을 쪼개어 어슷어슷하게 등에 칼집을 내고 푹 쪄낸 다음 다진 쇠고기를 파, 마늘, 후춧가루, 기름, 꿀과 같은 양념으로 볶아 만든 소를 칼집 사이사이에 넣고 표고, 느타리, 석이버섯, 실고추, 달걀부침 채친 것을 얹어낸다. 100년 전 음식이지만 요즘 밥상에 올려도 손색이 없는 멋진 조리법이라 이를 재현해 보려는 사람이 많다. 새우젓과 애호박을 함께 볶아 들기름을 더해 먹는 방식도 한국인이 애용하는 호박 요리법이다. 보관 기간이 짧은 여름 호박에 반해 겨울 호박은 전분 함량이 높고 수개월까지 보관이 가능하다. 겨울 호박은 카로티노이드가 풍부하여 노란색, 오렌지색을 띤 것들이 주종이지만 녹색 줄무늬를 띄거나 알록달록한 것도 있다. 날로 먹기에는 단단하지만 익히면 달콤한 풍미를 내는 고구마처럼 변한다. 버터넛스쿼시 같은 겨울 호박을 오랫동안 천천히 가열하면 글루탐산이 녹아나오며 감칠맛이 더 풍부해진다. 서구에서 호박을 넣은 파이와 타르트, 수프를 즐겨 먹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겨울철이면 호박죽을 간식으로 먹는다. 오븐에 구워서 꿀을 뿌려 먹거나 그냥 쪄서 먹어도 맛있다. 호박과 함께 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못생긴 사람을 호박에 비기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도시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라는 박완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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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Ingredients 2019 SPRING 284

김, 감칠맛과 영양소의 결정체 오랜 동안 한국인의 밥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온 김은 맛도 좋고 영양가도 높은 식품이다. 또한 김은 참치와 함께 한국의 수산물 수출 1, 2위를 다투는 품목이기도 하다. 한때 ‘black paper’ 라고 부르며 김을 먹기 주저했던 서양인들 사이에서도 요즘에는 미량 영양소가 풍부하고 칼로리가 적은 스낵으로 점차 인기를 끌고 있다. 김은 국내에서 가장 많이 채취되고 소비되는 해조류다. 빛깔이 검고 광택이 나면서 불에 구웠을 때 파르스름하게 변하는 김이 상품이다. 종이 모양으로 말린 날김은 보통 100장을 한 톳으로 묶어 판매한다. ⓒ Topic 조미된 김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밥 반찬 중 하나이다. 마른 김에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바른 뒤 소금을 살짝 뿌려서 약한 불에 굽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 밥을 싸먹는다. 요즘에는 올리브 기름도 많이 사용된다. 맛있는 것은 누구나 안다는 말이 있다. 김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이다. 김속(Porphyra)에 속하는 해초는 약 70여 종이 있는데 이 해초들이 자라는 지역에서는 대부분 이를 식재료로 사용한다. 맛있기 때문이다.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바닷가에서도 바위에 붙은 김을 흔히 볼 수 있다. 김빵(laverbread)은 ‘웨일즈 사람의 캐비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맛이 뛰어난 음식인데,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즐겨 먹는 아침 메뉴다. 잘게 다진 돌김을 오랫동안 끓여 퓨레처럼 만들고 오트밀 가루를 묻혀 베이컨 지방에 프라이해서 만드는 김빵은 일반적인 빵과는 거리가 먼 형태지만, 아마도 해안가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음식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종이처럼 얇게 펴서 바짝 말린 김으로 밥을 싸 먹는다. 마른 김을 약한 불에 살짝 굽기도 하고, 참기름이나 들기름 또는 올리브 기름을 바른 뒤 소금을 뿌려 굽기도 한다. 종잇장처럼 얇은 김을 입속에 넣고 씹을 때 나는 아삭바삭한 소리는 청각으로 입맛을 자극한다. 그 밖에 구운 김을 잘게 부수어서 국수 위에 볶은 채소와 함께 고명으로 올리거나 깨소금과 함께 주먹밥 위에 뿌려서도 먹는다. 부순 김을 양념장으로 짭짤하게 무쳐서 만든 김자반도 인기 있는 반찬이고, 찹쌀풀을 바르고 튀겨서 만든 김부각을 스낵처럼 먹기도 한다. 생김이나 말린 김을 물에 넣고 끓여 간하고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살짝 뿌려 먹는 김국도 역시 별미다. 일본에서도 종이 모양으로 말린 김을 즐겨 먹는다. 특히 김은 스시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 가운데 하나다. 두툼한 구운 김 조각을 라멘 위에 얹어 먹는 장면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서는 둥글납작하게 뭉쳐서 말린 김 덩어리를 떼어 내 국이나 볶음 재료로 사용한다. 지주식 양식은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연근해에서만 가능하지만, 부표를 띄워 김발을 거는 부유식 양식은 먼 바다에서도 가능해 김 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 있게 되었다. 양식한 김은 보통 11월 말부터 이듬해 2월까지 여러 번 채취하여 말리는데, 요즘은 대개 공장에서 건조기로 말린다. 햇빛에 자연 건조하는 전통 방식은 인력이 많이 소요되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감칠맛의 삼중주 한국식 농담에 “국물 음식에 김 가루를 넣으면 반칙”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김에는 음식 맛을 좋게 하는 힘이 있다는 의미다. 알고 보면 김은 맛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음식의 감칠맛을 내는 대표적 성분은 MSG로 잘 알려진 ‘글루탐산’, 핵산계 조미료로 불리는 ‘이노신산(IMP)’, ‘구아닐산(GMP)’, 이렇게 세 가지이다. 동양에서 감칠맛을 내기 위해 주로 사용해 온 파와 다시마, 서양 요리에 자주 이용되는 양파, 당근, 토마토에는 MSG가 많이 들어 있다. 이노신산은 소고기, 닭고기, 닭뼈, 멸치에 풍부하다. 구아닐산은 표고버섯, 포르치니, 곰보버섯(모렐) 같은 버섯류에 많다. 그런데 김에는 글루탐산, 이노신산, 구아닐산이 모두 들어 있다. 이들 셋이 함께 만나 연주하는 감칠맛의 삼중주는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이다. 이노신산 하나만 추가해도 평소 감칠맛을 감지할 수 있는 글루탐산 농도의 1/60 수준에서 감칠맛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여기에 구아닐산까지 더해 주면 감칠맛 상승 효과는 폭발적이다. 그러니 김은 그야말로 감칠맛의 결정체다. 이뿐 아니라 김에는 다양한 유리당(free sugar)까지 들어 있어서 달고 좋은 맛을 낸다. “뿌리가 돌에 달라붙지만 가지는 없어서 바위 위에 넓게 퍼져 있다. 색은 자흑이며 맛은 달고 좋다.” 한국 최초의 해양생물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정약전(1758∼1816)의 『자산어보』에 나온 자채(紫菜)에 대한 설명이다. 길고 넓적한 풀잎 끝부분이 뿌리처럼 돌에 달라붙어 자라는 검붉은 색상의 홍조류인 자채, 즉 김의 모양과 색상, 맛에 대한 묘사가 정확하다. 빠르게 성장한 김은 표면에 반짝반짝 윤기가 돌며 엽록소, 카로티노이드, 피코빌린 같은 색소가 빛을 흡수하므로 검붉은 색을 띤다. 불에 구우면 열에 약한 카로티노이드와 피코빌린은 파괴되고 엽록소만 그대로 남아 숨겨져 있던 녹색이 드러난다. 김에는 글루탐산, 이노신산, 구아닐산이 모두 들어 있다. 이들 셋이 함께 만나 연주하는 감칠맛의 삼중주는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이다. 풍부한 미량 영양소 김은 영양 구성 면에서도 훌륭한 식재료다. 마른 김에는 단백질이 42%, 탄수화물이 36% 들어 있는데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양이 충분하진 않다. 하루에 마른 김 한 장(3g)을 먹어도 하루 단백질 권장량의 2%에 불과하다. 하지만 김에는 비타민과 미네랄 같은 미량 영양소가 풍부하다. 흙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육상 식물에 비해 해조류의 미네랄 함량은 대강 열 배에 달한다. 김은 베타카로틴, 비타민 C, 비타민 E뿐만 아니라 채식을 주로 하는 사람들에게 결핍되기 쉬운 비타민 B12와 철분,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하다. 또한 다른 해조류보다 함량이 적긴 해도 결핍을 막기에 충분한 양의 요오드가 들어 있다. 과거 영국에서 김이 약초처럼 여겨졌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웨일즈 지방 어머니들은 “더비셔 사람처럼 목이 붓지 않으려면 김빵을 먹어야 한다”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해산물 섭취가 부족한 영국 내륙의 더비셔 사람들이 요오드 결핍으로 인한 갑상선종(derbyshire neck)을 앓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두고 한 이야기다. 최근에는 김에 풍부한 다당류 성분인 포피란의 기능성 효과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포피란은 김의 세포와 세포 사이를 채우고 있는 물질로 썰물 때 김이 살아남도록 보호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은 조수간만의 차가 비교적 큰 해안가에서 주로 서식한다. 밀물 때는 짠 바닷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고, 썰물 때는 자외선과 공기에 그대로 노출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분을 최대 95%까지 잃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환경 변화가 급격하다. 이때 포피란은 수분을 붙잡아 김 세포가 말라붙지 않도록 하며 세포벽의 유연성을 유지하여 밀물과 썰물의 양극단에서도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이 성분이 사람의 장 속에 들어오면 식이섬유로 작용하여 암 발병을 줄이고 면역 조절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썰물 때 자외선에 노출되어 받는 산화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김 속의 다양한 항산화물질도 인체에 유익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김밥은 김 위에 흰밥을 얇게 펴고 그 위에 데쳐서 무친 시금치와 길쭉하게 썰어서 볶은 당근, 단무지, 다진 소고기 볶음, 달걀지단을 얹어 둥글게 말아서 만든다. 요즘은 취향과 입맛에 맞춰 재료와 형태가 매우 다양해졌다. 봄철에 김이 묵어 맛이 떨어질 때는 찹쌀풀을 바르고 말린 뒤 튀겨서 김부각으로 만들어 먹는다. © 궁중음식연구원 인공 양식법의 개발 이처럼 김은 맛과 영양 면에서 모두 훌륭한 식품이지만, 지금처럼 양식하여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김 양식은 기본적으로 자연을 흉내 내는 방식이다. 즉, 김이 돌이나 조개껍질에 붙어 자라는 것을 본떠 김 포자를 굴 껍데기나 나뭇가지로 만든 발에 붙이고 갯벌에 꽂아 양식한다. 기둥을 고정하고 김발을 쳐서 밀물 때는 물에 잠겨 성장하고, 썰물 때는 공기 중에 노출되도록 하는 지주식 양식은 돌김이 바위에 붙어 자라는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17세기 무렵에 한국, 일본, 중국의 얕은 바다에서 이런 식으로 김 양식이 시작되긴 했지만 씨 뿌리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어려움이 컸다. 여름이면 사라졌던 김이 도대체 어떻게 가을이 끝나갈 무렵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지 몰랐으니,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각포자(conchospores)를 기다렸다가 씨앗으로 거두어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949년 영국의 조류(藻類)학자 캐슬린 메리 드루베이커가 김의 생명 주기를 연구하여 그때까지 별도의 종으로 여겨졌던 Conchocelis rosea라는 조류가 실은 김의 생애 주기 중 한 단계임을 밝혀냈다. 김의 인공 채묘에 획기적인 돌파구를 만들어 준 것이다. 드루베이커의 연구 덕분에 김 양식의 생산성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고, 바다에만 의존하던 채묘가 육상에서 인공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일본 규슈의 우토 시에서는 김의 대량 양식을 가능케 한 기념비적 연구에 성공한 드루베이커를 ‘바다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그녀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식을 갖기도 했다. 이후 망사에 포자를 부착한 다음 냉동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바다에 설치하는 냉동망 방식이 개발된 이후로는 더 안정적인 대량 양식이 가능해졌다. 전에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연근해에서만 지주식 양식이 가능했지만, 부표를 띄워 김발을 거는 부유식 양식이 개발되면서 먼 바다에서도 양식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생산량은 더욱 크게 늘어났다. 한국은 일본, 중국과 함께 세계 3대 김 생산국이자 수출량에서 두 나라를 훨씬 앞서고 있다. 한국에서 생산된 김은 유럽과 미주, 아프리카까지 세계 100여 나라에 수출되면서 ‘바다의 반도체’라고도 불린다. 최근에는 여러 종류의 스낵 제품이 개발되어 한국의 수산물 수출 분야에서 1위를 점령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 양식은 여전히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극한 작업이고, 세계 시장은 더욱 다양한 제품을 요구할 것이다. 사계절 인기 음식 김 위에 흰밥을 얇게 펴서 깐 다음 그 중심에 여러 색깔의 볶은 채소와 길쭉하게 썬 단무지, 햄, 달걀지단을 놓고 말아서 만든 김밥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점심 메뉴이자 인기 높은 간식 중 하나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까만 김으로 둘러싼 밥과 다양한 재료가 입속에서 어울리며 환상적인 맛을 만들어 낸다. 김밥을 먹을 때마다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음식은 세계인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지식과 정보를 서로 교환하고 도우며 함께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에 감동하게 된다. 김은 그래서 더 맛있는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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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Ingredients 2018 WINTER 253

생강, 향신료이자 약이었던 식재료 생강은 김치를 비롯해 여러 한국 음식의 양념으로 쓰일 뿐 아니라 약성(藥性)으로 인해 차나 과자로도 만들어 즐긴다. 유럽에서는 생강이 한때 귀한 향신료의 대명사였는데, 미각적 이유보다는 대체로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용도였다. 생강은 중세 유럽에서 귀한 대접을 받던 향신료였으며, 한국에서는 식재료로 쓰이기 이전부터 오랜 동안 약재로 널리 활용되었다. 음식 재료에도 유행이 있다. 고대 로마의 요리책 『데 레 코퀴나리아』(Apicius: De Re Coquinaria)는 서구 최초의 요리서로 불린다. 이 책의 4세기 판본에 나오는 거의 모든 레시피에는 인도와 극동에서 수입된 향신료들이 등장하는데, 후추는 그 중 80%를 차지할 정도로 자주 쓰였다. 하지만 중세에 이르러서는 후추의 인기가 시들해졌고, 생강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생강은 중세 프랑스 귀족의 식탁에 권위를 부여했던 중요한 식재료였다. 14세기에 출판된 프랑스 최초의 요리책 『타유방의 요리서』(Le Viandier de Taillevent)에서 향신료 목록의 첫 줄을 차지한 것도 생강이었으며, 15세기 유럽 여러 지역의 요리법을 광범위하게 소개한 쉬퀴아르 아미즈코(Chiquart Amizco)가 왕실 만찬 준비에 필요한 향신료로 제일 먼저 언급한 것도 생강이었다. 이국의 낙원에서 얻은 진귀한 향신료 생강이 과거 유럽에서 이토록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염장한 고기나 부패한 식재료의 나쁜 맛을 가리기 위해서 또는 육류를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생강이 생선 비린내 같은 불쾌한 냄새를 줄여 주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요리에서 잡내를 없애려면 레몬 주스나 식초의 산성으로 휘발성 냄새 물질을 비휘발성 물질로 변화시키는 화학 반응을 이용하거나 장 담글 때 숯을 넣어 두는 것처럼 냄새 물질을 물리적으로 흡착시켜야 한다. 그런데 2016년 중국 과학자들이 잉어과 민물 생선인 초어(grass carp)에 생강을 넣고 실험한 결과에 의하면 생강에는 비린내 원인 물질을 직접 제거하거나 감소시키는 화학적, 물리적 효과가 없었다. 다만 생강의 강한 향기 물질이 다른 냄새를 맡지 못하도록 덮어 버리는 감각적 탈취 효과는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식재료의 냄새 제거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 생강을 널리 사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부유층에게는 신선한 육류와 생선을 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당일 잡은 사냥감이나 도축한 가축의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게다가 『파리의 살림살이』(Le Ménagier de Paris) 같은 책을 봐도 생강을 비롯한 향신료는 가능하면 조리의 마지막 순서에 넣으라고 권하고 있다. 이런 기록은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해 향신료를 사용했으리라는 추측과 상충된다. 과거 유럽에서 생강 같은 향신료가 욕망의 대상이 된 것은 향신료가 ‘동방의 지상낙원에서 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인들은 생강과 계피가 ‘신비의 지상낙원으로부터 나일강을 타고 흘러내려 오면 어부가 그물로 건져 올린다’는 전설을 믿었다. 신분을 과시하고 싶은 부르주아 계급이 귀족보다 더 향신료 사용에 집착했던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마치 오늘날 고급 레스토랑에서 송로버섯을 넣어 향을 낸 요리를 높이 평가하듯 중세 유럽인에게 생강은 진귀한 식재료였다. 예로부터 한국인들은 생강을 꿀이나 조청과 함께 졸여서 만든 정과(위)와 얇게 저며 물을 붓고 끓인 후 잣가루를 뿌린 생강편을 후식으로 즐겨 왔다. Ⓒ 궁중음식연구원 약재로 사용된 생강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김치를 담글 때 마늘과 함께 양념으로 넣을 정도로 흔하게 사용하는 생강을 두고 낙원을 운운하는 게 우습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 한국에서도 생강은 귀한 식재료였다. 동남아시아를 원산지로 하는 생강이 정확히 언제 국내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생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종은 북방 거란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에게 차와 생강, 베를 나눠 주도록 지시했다. 생강이 당시 귀중품에 속했던 차, 베와 동급의 귀한 식재료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도 생강이 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자가 식사 때마다 생강을 빠뜨리지 않고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논어』에 나와 있으니,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어찌 생강을 귀히 여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생강이 이토록 귀히 대접받은 것은 식재료 이전에 약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강을 먹으면 뱃속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드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은 생강이 소화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15세기에 조선에서 저술된 『산가요록』(山家要錄)이나 16세기의 『수운잡방』(需雲雜方) 같은 요리책의 방식대로 생강과 엿을 함께 넣고 졸여 만든 생강정과를 먹었던 사람들에게나 중세 영국과 독일에서 진저브레드를 먹었던 사람들에게나 생강은 맛 좋은 과자이면서 동시에 약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어린 시절 생강 맛이 나는 과자를 먹으며, ‘이렇게 매운 과자를 어른들은 뭐가 좋다고 먹는 건가’ 의아했던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이야기다. 생강은 향신료이자 동시에 약이었던 것이다. 생강 과자, 생강차, 진저에일은 구역질을 완화하기 위해서도 사용되곤 한다. 생강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아마도 얼얼한 맛을 내는 진저롤(gingerol) 성분에 의한 효과로 생각된다. 생강을 말리면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진저롤이 원래보다 두 배 더 매운 쇼가올(shogaols)이라는 물질로 바뀐다. 말린 생강이 더 얼얼한 이유다. 이들 성분이 위장 점막을 자극하면 혈관이 확장되면서 따뜻한 느낌을 주고 소화 기관이 더 잘 작동하도록 도와서 메스꺼움을 줄여 주는 것 같다. 항간에는 임신 중에 생강을 먹으면 안 된다는 설도 있으나 해롭다는 연구 결과는 없고, 오히려 입덧 완화에도 종종 사용된다. 예로부터 생강이 체온을 높여 주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2015년 일본 연구팀의 실험에서는 사람의 체온에 생강이 미치는 영향이 미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점은 고추와 같은 다른 매운맛 음식도 마찬가지인데 생강이나 마늘, 고추를 넣은 음식을 먹으면 온몸이 화끈거리고 땀이 나지만 실제로 체온이 오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매운맛 음식을 먹었을 때 인체의 반응은 체온이 상승했을 때와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마치 정말 열이 나는 것처럼 땀을 흘린다. 생강을 먹는다고 해서 다른 음식을 먹은 것 이상으로 체온이 높아지지는 않지만, 추운 겨울날이면 따끈한 생강차 한 잔이 생각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느낌만 따뜻해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은가. 생강을 먹는다고 해서 다른 음식을 먹은 것 이상으로 체온이 높아지지는 않지만, 추운 겨울날이면 따끈한 생강차 한 잔이 생각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생강의 체온 상승 효과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지만, 한국인들은 겨울철에 따끈한 생강차를 자주 마시면 추위와 감기를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 사회적 욕망의 변화 생강에는 나무향, 레몬향, 민트향을 내는 향기 물질이 풍부하다. 레몬과 생강은 특히 그 풍미가 잘 어우러져서 꿀과 함께 차로 만들어 마시기도 한다. 매운맛에 더해 달콤한 향기도 지니고 있어, 디저트의 풍미를 높이는 목적으로도 자주 사용된다. 각종 향신료를 세계에 전파시킨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생강과 그 사촌격인 갈랑갈(galangal)이 요리에 빼놓을 수 없는 식재료들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대 서구 식문화에서는 생강의 사용 범위가 디저트나 음료로 좁아졌다. 대량 수입으로 희소성이 떨어진 후추와 생강이 이제는 더 이상 상류층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18세기 프랑스에서부터 시작된 누벨 퀴진(nouvelle cuisine)의 영향으로 귀족과 부르주아가 ‘식재료 본연의 맛을 추구하는 게 고상한 취향’이라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자 메인 음식에는 자극적 향신료의 사용이 줄고, 단맛과 감칠맛의 구분이 시작되었으며, 뒤이어 짠맛과 감칠맛 중심의 식사 뒤에 달콤한 디저트를 즐기는 방식의 코스가 나타났다. 이러한 구분은 사회·문화적 변화일 뿐 미식의 차원에서 깨뜨리면 안 되는 법칙은 아니다. 유럽에서도 아시아의 향신료가 상대적으로 늦게 도입된 지역에서는 아직도 요리에 향신료를 많이 첨가하는 전통이 남아 있다. 고추, 마늘과 함께 생강의 자극성 강한 맛이 한식과 중식을 비롯한 아시아 음식에서 식재료 본연의 맛을 가린다는 불평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현대 서구 식문화에 치우친 편협한 관점에서 음식을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다. 중세 유럽에서의 과도한 향신료 사용이 음식 맛의 향상보다는 신분 과시용이었던 것처럼 이후 향신료 사용이 줄어든 현상 또한 미각 자체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적 욕망의 변화에 따른 결과이다. 서구의 기준으로 아시아의 음식을 평가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문화가 만들어 낸 다른 맛을 즐기는 것이 좋다. 기실 미식가에게는 생강을 넣은 음식이든, 넣지 않은 음식이든 맛있는 법이다. 다양성이야말로 삶의 양념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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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Ingredients 2018 AUTUMN 1110

단풍이 짙어지면 단맛도 깊어진다 게는 온 세계 사람들에게 익숙한 식재료이다. 그중 봄가을에 한국인들이 즐겨 먹는 꽃게는 특별한 조리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특유의 풍미를 만끽할 수 있다. 게살이 달고 맛있는 이유는 게의 생존 방식과 깊은 연관이 있다. 가을은 꽃게의 계절이다. 살이 꽉 차오른 꽃게는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암수를 구별하자면 가을은 수게의 계절이다. 교미를 앞둔 수게가 허물을 벗고 몸을 다지기 때문이다. 꽃게는 가열하여 익히면 껍질이 꽃처럼 붉게 변하는데 그런 이유로 ‘꽃게’라불리는 것은 아니다. 꽃게의 ‘꽃’은 등딱지에 꼬챙이처럼 생긴 뿔이 두 개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1563~1628 李晬光)이 편찬한 문화백과사전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꽃게의 이름 풀이에 더해 “뒷발이 납작하니 얇은데 노 모양으로 생겨 그것으로 물을 밀어 헤엄친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200년 뒤 정약전(1758 ~ 1816 丁若銓)이 저술한 당대 최고의 바다생물 백과사전 『자산어보』(玆山魚譜)에도 “대체로 게는 잘 기어 다니지만 헤엄은 능숙하지 않은데, 이 게만은 유독 부채 모양의 다리로 헤엄을 잘 친다”라고 적혀 있다. 영어로 꽃게를 ‘swimming crab’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다를 유영하는 꽃게의 모습이 신기했던 것은 매한가지였나 보다. 단맛의 비밀 꽃게가 헤엄치는 모습이야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뒤이어 정약전이 묘사한 꽃게 맛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할 만하다. 그는 그 맛이‘감미롭다’고 했다. 신선한 가을 꽃게는 달디달다. 하지만 설탕의 단맛과는 전혀 다르다. 짭짤한 바닷물 속에서 빚어 낸 섬세하고 복잡한 단맛이다. 꽃게만 그런 것은 아니다. 대나무 마디를 닮은 다리를 가졌다 하여 이름을 얻은 동해의 대게가 그렇고, 러시아산 킹크랩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게살이 단 이유는 설탕의 70% 정도로 단맛을 내는 아미노산인 글리신이 많이 들어 있어서다. 물론 바닷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게가 짜디짠 바닷물에서 생존하려면 소금의 농도와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물질이 필요하다. 바닷물보다 농도가 낮으면 삼투압으로 인해 체내 수분이 바닷물로 빠져나가 버릴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소금을 사용하여 농도를 맞출 수는 없다. 미네랄(electrolytes)이 지나치게 많으면 체내 효소의 활성에 지장이 있어 생명 활동을 이어 나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바닷물고기는 TMAO(trimethylamine oxide)라는 물질을 농도의 균형을 맞추는 용도로 사용한다. TMAO는 본래 무색 무취이지만, 유통이나 보관 중에 분해되면 생선 비린내의 원인이 된다. 게살에도 이 성분이 들어 있어 잘못 보관하면 생선 비린내 비슷한 냄새가 날 수 있다. 하지만 게와 같은 갑각류는 TMAO 대신 단맛 아미노산 글리신을 주로 사용하여 바닷물과 농도를 맞춘다. 해산물 뷔페에서 먹는 게살에서는 단맛이 훨씬 적게 느껴지는데, 물에 삶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글리신 성분이 씻겨 나가기 때문이다. 단맛의 비밀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게살에는 글리신 외에도 알라닌이라는 단맛 아미노산이 들어 있고, 글루탐산과 핵산 같은 감칠맛 성분도 풍부하다. 여기에 다양한 휘발성 물질이 더해져 게살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진한 풍미를 이끌어 낸다. 바닷물이 짤수록 바다의 염도에 맞추기 위해 게살 속의 글리신, 알라닌 같은 유리 아미노산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고 맛은 더 좋아진다. 또한 고랭지 무나 배추가 얼지 않기 위해 당 함량을 늘리듯 바다가 차가워지는 가을과 겨울 사이 게살 속 단맛 아미노산 함량도 늘어난다. 덕분에 가을 게 요리에는 복잡한 과정이 불필요하다. 그냥 쪄 내기만 해도 풍미가 차오른다. 마이야르 반응 덕분이다. 당과 아미노산을 함께 넣고 가열하면 둘이 반응하여 갈색으로 변하면서 원래의 식재료와는 다른 복합적 풍미를 만들어 내는 마이야르 반응은 원래 섭씨 120℃ 이상의 고온에서 잘 일어난다. 물에 삶은 수육에서 불에 구운 스테이크와 같은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없는 이치다. 하지만 게살은 예외로 단맛 아미노산과 당이 워낙 풍부하여 120℃ 이하에서 찌거나 삶아도 견과류와 유사한 고소한 향이 난다. 껍질째 익히면 향기 물질을 더 많이 잡아 가둘 수 있어 풍미가 더 깊어진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반찬 간장 게장은 마늘, 생강, 붉은 통고추 등 여러 양념을 넣고 끓여서 식힌 간장에 꽃게를 담가 숙성시켜 만든다. 주로 3~4월에 잡은 암꽃게를 사용한다. 자가소화를 이용한 조리법 게는 보관 과정에서 상하기 쉽다. 운반 도중에 죽기라도 하면 금방 살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먹을 수 없다. 게와 같은 갑각류에는 ‘간췌장’이라고 불리는 소화 기관이 있는데, 죽고 나면 여기 들어 있는 자가소화 효소가 퍼져 나와 살을 분해하기 때문이다. 집에 가져왔을 때까지 살아 있던 게도 죽고 나서 바로 조리하지 않으면 속살이 곤죽이 될 수 있다. 게를 낮은 온도에서 익히거나 덜 익혔을 때도 자가소화 효소의 활성이 증가해서 게살이 죄다 녹아 버린다. 꽃게를 잡자마자 급속 냉동하면 이런 현상을 막아서 연중 내내 살이 꽉 찬 꽃게를 즐길 수 있다. 자가소화를 거꾸로 이용한 음식이 한국인이 오랫동안 즐겨 온 간장 게장이다. 마늘, 양파, 생강 등을 넣고 끓인 간장을 식힌 다음 잘 손질한 꽃게가 잠기도록 부어 두었다가 익으면 먹는다. 꽃게의 자가소화 효소와 꽃게에 붙어 있던 미생물에 의해 게살과 내장이 분해되고, 이 과정에서 맛을 내는 유리 아미노산 함량이 높아진다. 간장 속 감칠맛 성분과 녹아내린 게살 속 감칠맛 물질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진미다. 가열하여 익힌 게살과는 또 다른 특유의 풍미가 ‘밥도둑’이란 별명을 만들어 낸 셈이다. 조선 시대에는 육즙이 풍부한 게장을 만들기 위해 “소고기나 닭고기를 게에게 먹인 다음 게장을 담갔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푸아그라 방식과 유사한 조리법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게의 알이라고 생각하고 먹는 것은 사실은 진짜 알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수정되지 않은 난소다. 이런 게는 먹어도 된다. 하지만 몸 바깥으로 짙은 갈색의 알이 덩어리져 나와 있는 게는 잡아서도, 먹어서도 안 된다. 암꽃게와 수꽃게가 교미하는 시기는 초가을이지만, 이때 바로 수정이 일어나진 않는다. 수게의 정자는 암게의 저정낭에 보관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난자와 만나 수정된다. 수정란은 날치알과 흡사한 모양으로 투명한 실에 줄줄이 매달려 있다. 바깥으로 삐져나온 알의 색깔은 처음에는 주홍빛이었다가 점점 더 짙은 갈색으로 변한다. 수정란을 밴 게는 꽃게든 대게든 킹크랩이든 먹어도 별맛이 없다. 번식을 위해 에너지를 쏟고 난 암게의 살이 꽉 찼을 리도 만무하지만, 알을 밴 암게는 환경 보전 차원에서도 잡지 말아야 한다. 보통 암게 한 마리가 75~300만 개의 알을 낳지만, 살아남는 것은 그중 단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니 금어기를 철저히 지킬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매년 연안의 꽃게 개체 수를 추정하기 위한 연구 조사를 벌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바다가 차가워지는 가을과 겨울 사이 게살 속 단맛 아미노산 함량도 늘어난다. 덕분에 가을 게 요리에는 복잡한 과정이 불필요하다. 그냥 쪄 내기만 해도 풍미가 차오른다. 수산물 시장에서 상인들이 갓 잡아 온 대게를 정리하고 있다. 껍질이 얇고 살이 통통하며 맛이 담백한 대게는 동해안 일대에서 많이 잡히는데, 어획 기간인 겨울부터 다음 해 봄까지 이 지역 식당들은 신선한 대게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가을 단풍을 닮은 이유 꽃게는 가을 단풍을 닮았다. 단풍은 날이 차가워지면서 나뭇잎의 엽록소가 파괴되어 그 초록빛에 가렸던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의 색소 물질이 드러나는 현상이다. 살아 있을 때는 ‘블루 크랩’이란 이름에 걸맞게 푸른빛을 띠는 꽃게 껍질도 가열하면 그 색소 성분이 단백질에서 풀려 나와 선명한 붉은빛을 나타낸다. 그래서 꽃게와 단풍은 닮았다. 한국의 들과 산에서는 초가을부터 단풍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때는 초목의 일부가 물드는 정도에 불과하다. 조금 더 기다려야 단풍이 절정에 이르러 산과 들이 붉은 단풍으로 뒤덮인다. 꽃게도 그렇다. 매년 8월 말이면 금어기가 풀리고 꽃게잡이가 시작되지만, 이때는 속이 텅 빈 물렁게가 많다. 게나 바다가재 같은 갑각류는 껍질보다 웃자랄 수 없다. 그래서 성장을 위해 주기적으로 허물벗기를 해 줘야 한다. 새집을 짓고 이사하는 데 드는 생물학적 비용은 크다. 이 과정에서 다량의 근육과 에너지를 소모하고 나면 절반은 살, 절반은 물이 찬 물렁게가 된다. 물로 찬 공간을 다시 살로 꽉꽉 채우고 껍질을 딱딱하게 만들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린다. 이를 거꾸로 이용해서 잡은 꽃게가 허물벗기를 기다렸다가 먹는 소프트크랩도 있지만, 바다에서는 알을 밴 암게처럼 물렁게도 포획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가을이 깊어져야 단풍의 멋도, 꽃게의 맛도 깊어진다. 멋과 맛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놔줄 땐 놔줄 줄 알고, 기다릴 땐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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