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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2 WINTER

아름다운 스토리가 아름다운 공간을 만든다

큰 인기를 끈 드라마는 촬영지를 명소로 만든다. 드라마에서 감동적인 이야기가 펼쳐진 장소가 멋진 여행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평범하거나 무서운 스토리로 전개되는 드라마 속 공간들은 그다지 매력이 없다. 장소 자체가 지니는 특성보다는 드라마에 얼마나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불시착>의 촬영지 중 하나인 충주 비내섬의 설경. 하천 습지인 이곳은 남한강 중상류 지역에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섬이다. 멸종위기종 15종을 비롯해 865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환경부가 습지 보호 지역으로 지정했다.
ⓒ forfood.tistory.com



드라마에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공간이 필요하다. 각각의 상황에 부합하는 장소는 작품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줄 뿐더러 미술 세트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청자들을 몰입시키는 핵심 요소가 된다. 그래서 어떤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 많은 사람들이 포털 사이트에서 촬영 장소를 검색한다.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방문해 SNS에 인증샷을 남기기도 한다. 드라마 시청뿐만 아니라 세트장이나 주요 배경이 된 장소를 방문하는 것도 드라마를 즐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2000년 이전에는 국내 드라마들이 한정된 장르로 제작되다 보니 비슷비슷한 내용과 진부한 설정이 많았다. 영상 기술도 부족했다. 하지만 한류 드라마가 해외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제작자나 연출가들이 드라마의 영상미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드라마에 적합한 배경을 찾는 일이 중요해졌다.
최근 K-드라마가 부흥기를 맞고 있는데, 현장에서 일하는 로케이션 매니저들도 이를 실감하는 중이다. 다양한 장르와 소재에 걸맞은 더 놀랍고 흥미로운 장소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이 드라마 속 이야기에 빠져들기 위해서는 진짜 그럴싸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 드라마에 적합한 공간을 찾는 로케이션 매니저들에게는 이야기의 배경을 찾는 것이 늘 새로운 도전 과제다. 그렇게 찾아낸 장소들은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감동을 주었던 명장면들을 곱씹게 한다.


공간의 변신
최근 몇 년 동안 크게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들 중 <쓸쓸하고 찬란하신(神) 도깨비(Guardian: The Lonely and Great God, 孤單又燦爛的神: 鬼怪)>(2016~2017), <미스터 션샤인(Mr. Sunshine, 陽光先生)>(2018), <사랑의 불시착(Crash Landing on You, 愛的迫降)>(2019~2020) 세 드라마 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또한 기존 한류 드라마들이 가지고 있었던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있다.
우선 <쓸쓸하고 찬란하신(神) 도깨비>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90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 발단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고려(918~1392)의 장군인 김신(공유 분)은 자신이 섬기는 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불멸의 존재가 되어 900년 동안 가슴에 검이 박힌 채로 살고 있다. 도깨비 신부를 만나야만 검을 뽑고 영겁의 삶을 끝낼 수 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도깨비 신부 지은탁(김고은 분)이 도깨비를 불러내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강릉에 위치한 작은 바닷가 영진(領津)해변에서 촬영됐다. 드라마 촬영 이전에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방사제(防沙堤)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방문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사진을 찍는 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드라마가 한창 인기였을 때는 근방의 상점에서 여주인공이 목에 둘렀던 것과 같은 빨간 목도리와 메밀꽃을 저렴한 가격에 대여해 주기도 했다. 방문객들은 목도리와 꽃을 들고 멋진 기념 사진을 찍기 위해 상점 앞에서 또 줄을 서곤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사람들이 이곳을 좋아하고 방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드라마를 통해 가슴 설레는 아름다운 사연이 깃들어 있는 장소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드라마는 평범한 공간을 경이롭게 변신시키도 한다.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지 중 하나인 안동 만휴정(晩休亭)은 조선 시대의 문신 김계행(金係行, 1431~1517 )이 만년을 보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드라마 방송 이후 관광객들이 정자 앞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설 정도로 유명해졌다.
ⓒ 홍커뮤니케이션즈(Hong Communications, inc.)

 



새로운 의미
드라마의 감동이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사례는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드라마는 일제 강점기(1910~1945)를 배경으로 명망 높은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손녀딸 고애신(김태리 분)과 미 해병 장교 유진 초이(이병헌 분)의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병들에 대한 이야기도 드라마의 또 다른 축을 이룬다.
이 작품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영상미다. 장면 하나하나가 그림 같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김은숙(Kim Eun-sook 金銀淑) 작가 특유의 찰지고 재미있는 대사도 드라마 보는 맛을 한층 배가했다. 이 작품은 논산에 있는 세트장에서도 촬영되었지만, 아름다운 배경의 로케이션 장소도 많다. 일례로 유진 초이와 고애신의 데이트 장면은 많은 시청자들을 설레게 만들었는데, 이들이 뱃놀이를 즐겼던 장소가 안동의 고산정(孤山亭)이다. 16세기에 지어진 이 정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드라마 방영 이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또한 극 중에서 고애신의 집으로 나오는 함양의 일두고택(一蠹古宅)도 눈에 띈다. 국가민속문화재인 이곳은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후손들이 살았던 집으로, 여러 차례의 중건과 개축을 거쳐 현재까지 보존돼 있다. 조선 시대 양반 가옥의 기품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어, 드라마 속 애신 아씨가 정말로 이 집에 살았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름다움을 추억하다
<사랑의 불시착>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들의 사랑도 순탄하지 않다. 900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나라를 빼앗긴 것은 아니지만, 남북 분단이라는 엄중한 현실이 이 연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다. 이 드라마 또한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드라마의 인기와 비례해 촬영지에 대한 궁금증도 커져갔다. 그중 시청자들이 가장 궁금하게 여긴 것은 드라마 초반부의 주요 무대가 된 북한 마을이 과연 어디인가였다.
일반적으로 규모가 큰 마을 세트를 짓기 위해서 지자체가 제공하는 세트 부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 드라마도 태안과 횡성에 세트장을 지어서 촬영했다. 지금은 세트장이 철거되어 아쉽지만, 충주의 비내섬이 그 아쉬움을 달래 준다. 이 섬은 여주인공 윤세리(손예진 분)가 북한군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갔던 곳으로, 인공적인 시설이 전혀 없어 북한의 어느 강가로 설정했다고 한다. 강모래 등이 쌓이면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이 섬은 면적이 92만 484㎡에 이르는데,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생물을 포함해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점을 인정받아 환경부가 2021년 말 습지 보호 지역으로 지정했다. 로케이션 매니저는 이런 희귀한 장소를 찾기 위해 전국을 대상으로 후보지를 물색하며 좁혀 나간다.
많은 이들이 K-드라마의 핵심 동력으로 꼽는 것 중 하나가 소재의 다양성이다. 시간을 거스르고 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흥미진진하다. 이렇게 다양한 소재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잘 살려주는 배경이 필요하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잘 보존되고 있는 문화유산들과 수려한 자연 경관이 있다. 창작자들이 상상력을 폭넓게 펼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는 편이다.
때로는 그리 특별한 게 없는 평범한 장소가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사랑받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좋은 작품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일수록 더 오래 기억된다. 드라마 속에서 끔찍하고 잔혹한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가 명소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람들이 드라마 촬영지로 여행을 떠나고,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그 공간을 오랫동안 추억하는 이유는 그곳에 함께 나누고 싶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院垈里) 자작나무숲의 설경. 인제를 대표하는 생태 관광지인 이곳은 1974년부터 20여 년 동안 자작나무 약 70만 본을 조림하여 만들어졌다. <킹덤>(2020) 시즌 2를 비롯해 드라마 촬영 장소로 애용되는 곳이다.
ⓒ 한국관광공사

 



김태영(金泰暎) 미디어 콘텐츠 기업 로마로(LOMARO) 대표, 로케이션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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