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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WINTER

조형 예술 장르가 생존하는 방법

시각 예술에서 기술은 언제나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이다. 예술의 형식과 내용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그 정의까지 바꾸기 때문이다. 디지털 생태계가 공고해진 지금, 아날로그 제작 방식에 의존하던 회화, 조각, 공예 같은 예술 장르들도 이제는 기존 문법에서 벗어나 디지털 기술을 수용하며 변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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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서울 서초동의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렸던 잭슨 홍의 개인전 < Autopilot > 전시 전경. 작가는 디자인과 순수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으며, 그가 만들어 내는 오브제들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새로운 의미들을 발생시킨다.
ⓒ 페리지갤러리


조형 예술 분야에서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기 시작한 시기는 애플사가 매킨토시 컴퓨터를 널리 보급하던 1990년대이다. 2000년대에는 CNC 기술과 3D 프린터가 수용되었고, 2020년 이후에는 이미지 인공지능(AI image generator) 상용화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디지털은 세상을 정보화하고 탈(脫)사물화한다. 그래서 사물화를 통해 물질성을 부여하는 데 집중하는 조형 예술 작품은 일견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고전적인 예술 장르들도 기술을 적극적으로 비평하고 재해석함으로써 해법을 모색한다. 특히 데이터에 의존하는 디지털 기술은 작업의 효율성을 높여 주고 노동 강도를 줄여 주기 때문에 동시대 작가들의 기술 수용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1980~90년대에 출생한 젊은 작가들 중에는 디지털 기술의 한계를 실험하며 독특한 작품 세계를 선보이는 이들이 상당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기술 수용으로 인해 장르 간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통적 미술 장르의 존립에 위협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하며 예술의 존재 조건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회화는 조각이 되고, 조각은 데이터가 되며, 공예는 회화가 된다. 재료와 기법이 중요했던 전통적 미술의 규범에서 벗어나 데이터와 사물을,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자유롭게 오가는 작업들은 이 시대 전통 장르들의 현주소를 보여 준다.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

김한샘은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캔버스에 유화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낯설었다”고 밝혔다. 디지털 세대인 그에게는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 졸업 후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방법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는 16비트 RPG 그래픽 게임 형식으로 자신의 디지털 드로잉을 디자인한다. 우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그림을 그린 후 이 데이터를 종이에 출력한다. 그리고 인쇄물을 돌이나 크리스털, MDF 같은 물질적 매제와 결합함으로써 데이터를 디지털 세계에서 아날로그 환경으로 옮겨 온다. 그는 출력물을 부착할 액자나 태블릿도 직접 제작하는데, 이것 또한 그림과 함께 작품의 서사를 구성한다. 그의 수공예적인 작업 방식은 보는 이들에게 촉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만질 수 있는 데이터’라는 매우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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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 인어) > . 김한샘. 2022. 유리, 금박, 피그먼트 프린트, 레진, 사금석(砂金石). 7.5 × 7.5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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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덤벼 > . 김한샘. 2022. 유리, 금박, 피그먼트 프린트, 레진, 무카이트(mookaite). 5 × 9.5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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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속의 보석 > . 김한샘. 2021. 아크릴, 금박, 피그먼트 프린트, 레진. 54 x 31 x 16 cm.
김한샘은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접했던 하위문화, 그 중에서도 중세 판타지 서사를 픽셀 그래픽으로 구현하며 이 과정에서 데이터가 촉각적인 물성으로 변환한다.
ⓒ 김한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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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 속의 악마 > . 김한샘. 2021. 알루미늄박, 피그먼트 프린트, 레진. 97 x 80 x 11 cm.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잭슨 홍은 디자인과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이다. 그는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사물의 가변성, 그리고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해 왔다. 또한 사물이 제조되는 방식을 시각화하는 데도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이는 작품의 기초가 데이터이기에 가능하다. 작가는 산업디자이너가 제품을 디자인하는 것처럼 데이터를 먼저 구축한 후 이를 현실로 불러들인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데이터는 장인 정신과 기술이 필요한 제작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철판은 데이터에 따라 CNC 기계를 통해 재단되고, 기술자의 손길을 거쳐 절곡(折曲), 용접되면서 형태를 드러낸다.

잭슨 홍의 작품에서 데이터는 완벽한 도구인 동시에 엄격한 질서와 규범을 비껴가려는 작가의 의지도 표출한다. 예를 들어 < Cross Hatching > 연작의 경우 의도적인 디지털 오류를 활용하여 도면을 제작했다. 규격화와 오차 없음에 저항하며 다른 해석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의 도면은 단순한 직능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작품이며 상상 속의 엑스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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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2018년 열린 < 잭슨 홍의 사물 탐구 놀이 > 전시 풍경.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 전시에서 작가는 사물의 용도를 뒤바꿈으로써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사진 김상태(金相泰)

 

3D 프린팅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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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족이 프로젝트 > . 김지민. 2021. PLA 필라멘트, 스테인리스강선. 가변 설치.
2021년,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유아트스페이스에서 열렸던 김지민의 개인전 <𝑬𝑵𝑽𝒚⁷>의 전시 모습. 그는 최근 3D 프린팅을 적용해 현대 사회의 소비 욕망을 풍자하는 작업들을 보여 준다.
김지민 제공

김지민은 조각을 전공했는데, 브랜드 라벨을 노동집약적인 바느질 수공으로 이어 붙이던 제작 방식을 오랫동안 선보였다. 최근 소비 사회의 심리 현상을 작품 주제로 삼으면서 작업 형태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했다. 특히 < 만족이 >프로젝트는 3D 프린팅이 매우 유효한 전략이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동일한 형상의 아이콘들을 빠르게 제작할 수 있었기에 군집 표현이 가능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주제 의식을 유머러스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3D 프린팅이 만능일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전통적인 조각 제작 방식도 결합한다. 예컨대 < Skull >연작에서는 전통적인 조소 기법으로 원본을 제작했고, 이 원본을 3D 스캔을 통해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하여 또다른 작품인 < Coloring N. 108 > 을 출력했다. 작가는 < Inside Out >같은 대형 작업에도 동일한 데이터를 적용했다. 디지털 데이터는 얼마든지 다른 스케일로 출력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동양화와 금속 공예를 공부한 오세린은 다양한 요소와 기술을 결합하여 초현실적인 시각 효과를 만들어 낸다. 지난해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바이파운드리에서 열렸던 개인전 < 숲 온도 벙커 > 는 도자(陶瓷) 작업과 3D 프린팅 출력물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구성한 전시였다. 환경 문제를 대하는 인간의 모순을 우화적으로 해석한 전시작들은 ‘모방과 속임수’라는 초기 작업의 주제 의식과 여전히 맞닿아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멀리서 봤을 때 어느 부분이 도자 작업이고 어떤 부분이 3D 프린팅으로 제작되었는지 구분하기 어렵다. 작가는 이 작업의 3D 프린팅을 위해 인터넷상의 오픈소스 공간 모델링 데이터를 사용했다. 3D 소프트웨어를 통해 데이터를 결합 및 변형했고, 이 데이터를 FDM(Fused Deposition Modeling, 재료를 녹는점 이상의 온도로 녹인 후 일정한 두께로 선을 그리면서 형상을 제작하는 방식) 타입의 프린터로 출력했다. 결과물은 초현실적으로 보이는데, 이는 해상도가 다른 요소들을 동일한 조건으로 출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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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린은 ‘원본’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어떻게 복제되고 변형되는지를 관찰해 온 작가이다. 최근에는 전통 공예 기법과 최신 기술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주제 의식을 확장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이태원 바이파운드리에서 2022년 열렸던 개인전 < 숲 온도 벙커 > 의 전시 장면.
ⓒ 노경(Roh Kyung, 盧京)

 



직조된 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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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dden Rules-Bay-2 > . 차승언. 2017. 폴리에스테르사(絲), 염료. 230 × 455 ㎝.
차승언의 작품은 언뜻 보면 평면 회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직조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20세기 미술의 유산을 되돌아보는 한편 동양과 서양, 시각과 촉각, 정신과 물질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오늘날 의미 있는 추상회화가 무엇인지 탐구한다.
ⓒ 차승언

차승언은 전통적인 직조 기술을 현대적인 맥락으로 재해석한다. 섬유예술과 회화를 전공한 작가는 “직조(織造)의 방법으로, 20세기 추상회화 중 관심 있는 작품들을 다시 만들어 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헬렌 프랑켄탈러의 < The Bay > 와 한국 이성자 작가의 < 갑작스러운 규칙 > 을 뒤섞은 < Sudden Rules-Bay-2 > 가 대표적이다. 그는 컴퓨터로 이성자 작가의 작품을 데이터화하여 픽셀의 면 구성에 따라 직조 데이터로 다시 설계한 다음 자카드 직기로 출력했다. 그런 다음 출력된 직물에 프랑켄탈러의 캔버스 얼룩 빨아들이기 기법을 적용했다. 이는 직조와 염색을 통해 질서와 우연이 한 화면에 공존하도록 의도한 실험이었다.

그녀의 작업에서는 언어와 직조의 관계에 대한 질문도 중요하다. 작가는 언어를 데이터화하고 코드화하여 직조 대상으로 사용했다. “Before your birth”와 “Your love is better than life.” 같은 문장을 변환기로 코드화하고, 이를 직조 도면으로 설계한 후 이를 토대로 직조했다. 언어와 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실험인 셈이다.



조새미(Cho Sae-mi) 미술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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