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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AUTUMN

강릉을 보는 세 가지 시선

강릉을 단순히 바닷가 도시라고만 표현하기엔 아쉽다. 그곳엔 시대를 앞서간 문인들의 문학이 있고,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화폐 모자가 태어난 고장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향긋한 커피 향이 퍼지는 도시다.

강릉의 커피 거리는 1980년대, 작은 어촌마을 ‘안목(Anmok 安木)’에 생긴 최초의 자판기에서 시작됐다. 이후 저마다 맛을 차별화 한 수십 대의 자판기 사이로 카페가 생기기 시작해 지금은 외국인들도 자주 찾는 강릉의 대표 커피 거리가 되었다.

첫 강릉 여행에서 동생과 서로의 신발을 경포대 모래밭에 파묻고 놀다가 잃어버린 적이 있다. 조선시대 정치가이자 문인인 정철(鄭澈, 1536~1593)이 “십 리나 펼쳐진 흰 비단”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끝없는 해안가 중 어느 곳에 신발을 묻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파도를 보며 발을 구르던 기억이 난다. 해 질 무렵이라 신발 사는 걸 포기하고, 저녁 내내 맨발인 채였다. 그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한 건 걸을 때마다 발바닥을 간질이던 따뜻한 모래알 때문이다. 그날 강릉의 모래가 마치 강릉의 살갗처럼 느껴졌다.


 

조선 중기 시인 허난설헌(1563~1589)은 아름다운 용모에 문학적 자질까지 뛰어났지만, 불우한 가정사로 그의 작품 213수 중 128수는 세상을 떠나 신선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내용을 담고 있다.

느리게 걷는 여행
작가가 되고 난 후, 강릉에서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쓴 허균(Heo Gyun 許筠, 1569~1618)과 그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생가였다. 허균은 그의 소설에서 세상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사는 이상사회인 ‘율도국’을 꿈꾸던 조선의 아웃사이더였다. 그는 “나는 성격이 곧아서 남이 틀린 짓을 하면 참고 보지 못하고, 속된 선비들의 멍청한 짓은 비위가 상해 견딜 수 없었다”라고 말했고, 올곧은 성격이 문제가 돼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그는 성리학 이외에 다른 학문이 설 자리가 없던 조선에 천주교 서적을 들여왔고, 서산대사 같은 승려들과도 교류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건 누이의 재능을 알아본 그의 혜안이었다. 그는 27세에 요절한 누이의 이른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녀가 쓴 시를 모아 유고 시집을 냈다. 이는 조선시대엔 극히 희귀한 일이었고, 허난설헌의 시집은 중국에 먼저 알려졌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許筠•許蘭雪軒 記念公園)에는 경주 삼릉에 비견할 만한 소나무 군락지가 있었다. 한 눈에도 수백 그루는 될 법한 소나무에 일일이 번호가 적혀 있는 게 신기해서 소나무에 걸린 숫자를 하나씩 헤아리다가, 590번째 소나무 근처에서 강릉 바우길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만났다. 찾아보니 ‘바우(BAU)’는 강릉 말로 바위라는 뜻인데, 공교롭게도 손으로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쓰러져 가는 사람을 살아나게 하는 능력이 있는 바빌론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과 같았다. 이 길을 치유의 길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았다.

바우길은 대관령에서 해안, 옥계에서 주문진, 강릉의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17개 구간 총 280km의 장대한 길이었다. 걷기에 좋은 날이라 작정하고 걸어보기로 했다. 얼마 안 돼 홍길동 조각상이 놓인 다리 하나를 만났고, 허난설헌이 쓴 시 「죽지시(竹枝詞)」가 새겨진 기념비가 보였다.

우리집은 강릉땅 갯가에 있어(家住江陵積石磯)
문 앞 흐르는 물에 비닷옷 빨았지요.(門前流水浣羅衣)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배 매어 놓고(朝來閑繫木蘭棹)
짝지어 나는 원앙새를 부럽게 보았지요.(貪看鴛鴦相伴飛)


시 한 수 읽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갈대밭을 낀 커다란 현대식 건물이 아르떼 뮤지엄(ARTE MUSEUM)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진 찍기에 지금 이곳보다 핫한 공간은 없다!”라는 리뷰와 함께 최근 MZ 세대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관이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근처에 있었다. 예약 없이 보기 힘든 전시라는 말을 들었던 터라, 입장 대기 줄이 없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전시관에 들어갔다가 가득한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 너나 할 것 없이 핸드폰을 들고 촬영하는 관람객들의 손들이 어두운 전시관 안에선 하나의 오브제처럼 보였다. 눈앞까지 덮쳐오는 빛과 소리에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 또한 이곳에선 일종의 행위 예술처럼 느껴졌다.

제주, 여수에 이은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 아르떼뮤지엄 강릉. 전시관 내 천둥(THUNDER)은 이곳에서 처음 선보이는 작품 중 하나로, 천둥의 가운데서 거대한 번개를 경험할 수 있다.
ⓒ 아르떼 뮤지엄

허균의 생가터에 있다가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뮤지엄에 오니 ‘올드 앤 뉴’라는 말이 떠올랐다. 자연을 모티브로 한 미디어 아트 속을 걷다 보니 눈앞으로 쏟아지는 폭포와 파도 안에 갇힌 사람이 되기도 하고, 전설 속의 백호랑이를 마주한 밀림 속 방랑자가 되었다가,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시간 여행자가 되기도 했다. 입장료가 아깝지 않았던 건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수백 장의 사진이 증명한다.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했던 건 뮤지엄을 나온 후 다리 끝에서 만난 광활한 물이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는 사실이었다. 강릉을 오랫동안 바다의 도시라고만 생각했던 내겐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가 바다와 함께 있는 풍경이 놀라웠다. 바닷물이 해안의 모래를 밀어 생긴 둑 모양의 사주가 바다를 차단하면서 생긴 호수를 ‘석호’라고 부르는데, 강릉의 경포호가 바로 석호다.걷는 속도로 본 세상은 가장 아름답다. 달리거나 뛸 때는 볼 수 없었던 무수한 풍경이 천천히 걸을 때 비로소 보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경포가시연습지와 날아든 작은 나비와 풍뎅이도, 시간에 따라 너울대는 긴 그림자와 그늘을 바라보는 일 역시 걷는 속도에 따라 머문다. 바쁜 일상이 아닌 한적한 여행에서 느린 걸음이 주는 선물이다.

경포가시연습지는 멸종위기종인 가시연꽃의 복원작업이 성공하여 군락을 이룬 곳이다. 습지와 습지 사이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수달을 포함한 다양한 희귀조류 철새들이 찾아온다.

검은 대나무의 집
한 나라를 상징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은 무엇일까. 캐나다의 단풍나무나 브라질의 삼바, 프랑스의 에펠탑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화폐라고 생각한다. 세계 기축 통화인 ‘달러’ 중 가장 큰 단위인 100달러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최고액권인 5만 원에는 누가 있을까? 바로 신사임당(Sin Saimdang 申師任堂, 1504~1551)이 있다.

우리나라 화폐 속 인물은 총 다섯 명인데 그중 두 명이 조선 최고의 사상가이자 영의정이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이다. 말하자면 세계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모자 화폐 인물인 셈이다. 1972년 율곡이 오천 원권 화폐 인물로 채택된 후 그가 태어난 집, 오죽헌(烏竹軒)은 화폐의 한 자리를 지금까지 꿰차고 있다. 오죽(烏竹)은 수피가 검은 대나무의 일종으로 오죽헌은 뜰 안에 오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사업으로 조성된 것이다. 이후 1998년 강릉시립박물관과 통합되면서 강릉의 변천사와 역사, 문화, 유적 등 볼거리가 풍성해져 연간 80~90만 명의 사람들이 찾고 있다.

오죽헌으로 향하는 입구에 선 사람들이 율곡과 신사임당의 화폐 기념물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연인은 화폐 전시물 앞에서 준비해온 5만 원과 5천 원을 꺼내어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유명인의 생가를 둘러보는 일은 그 인물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비가 온 직후 오죽헌의 검은 기와와 초록의 숲은 그 색이 한층 짙어져 오가는 이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이따금 바람에 흔들리는 청량한 검은 대나무 소리는 더위를 식혀 주었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으로, 한국 주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모자는 국내 화폐 중 5만 원권과 5천 원권에 삽화된 인물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셔터스톡

오죽헌은 집 주위로 검은 대나무가 많다고 하여 까마귀 '오(烏)’와 대나무 ‘죽(竹)’ 한자를 사용해 이름 지어졌다

커피의 도시
강릉의 커피 거리는 1980년대, 작은 어촌마을 안목(Anmok 安木)에 생긴 최초의 자판기에서 시작됐다. 안목항에 들른 사람들 사이에서 자판기 커피가 유독 맛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안목 해변 도로에 하나둘 자판기들이 생겼다. 자판기 주인들은 자신들만의 노하우로 커피 맛을 차별화했고 이를 설명하는 빼곡한 안내문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후 수십 대의 자판기 사이로 카페가 생기기 시작해 지금은 외국인들도 자주 찾는 강릉의 대표 커피 거리가 되었다.

경포대 일대는 1982년 지정된 경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바다와 분리된 경포호와 송림, 흰 모래, 푸른바 다가 조화를 이루는 경포해수욕장은 동해안 최대 해변으로 유명하다

1980년대 태어난 세대에겐 강릉을 대표하던 것이 경포대와 같은 바다였다면, MZ세대에게 강릉은 커피의 도시다. 인구 20만 명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에 500여 개에 이르는 카페가 있다. 카페 ‘보헤미안 박이추’는 강릉의 커피가 유명해지게 된 시발점이다. 한국의 커피 역사를 말할 때 박이추(朴利秋)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는 건 그가 생두에 열을 가해 볶는 로스팅을 처음 시도했기 때문이다. 로스팅의 단계에 따라 커피 맛과 향이 달라지는데, 특유의 쓴맛 때문에 커피를 거부하던 사람들도 커피를 ‘맛’을 넘어 ‘향’으로 즐기는 법을 알게 되면서, 그의 커피는 점점 유명해졌다.

혜화동과 안암동에 처음 문을 연 카페 보헤미안은 2001년 갑자기 강릉의 경포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에 분점을 내는 대신, 지방을 선택한 건 파격적이었다. 늘 내 관심을 끄는 건 누군가의 이런 작은 선택 하나가 나비효과를 일으키며 도시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 놓는 일이다. 미국의 포틀랜드가 뉴욕이나 LA 같은 도시의 복잡함에 질린 사람들의 안전지대가 됐던 것처럼 박이추에게 강릉은 자신을 품어줄 완벽한 도시로 보였다.

이제 사람들은 강릉에 가면 기념품을 사듯 커피 전문점에 들러 원두를 구입하고 대형 로스팅 기계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또 커피 박물관 커피키퍼에 들러 커피의 역사와 다양한 품종의 커피나무를 관찰한다. 야근을 거듭하는 밤에는 잠을 깨기 위해 달콤한 믹스 커피를, 아침 출근길에는 아메리카노를, 낮에 졸음 밀려오거나 허기를 느낄 때면 라떼를 마시는 것이 일상이 됐다. 이러한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세계에서 도시 대비 가장 많은 카페가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한 잔에 담긴 커피가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문화와 도시를 만든 셈이다.

1980년대 자판기 커피 맛집으로 명성을 얻은 안목 카페 거리는 1990년대 들어서며 커피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500여 미터의 안목해변을 따라 줄지어 있는 카페에는 사시사철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박이추 씨는 한국에 커피 문화를 알린 1세대 바리스타 중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바리스타이다. 2000년에 강릉에 오픈한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는 강릉이 커피의 도시로 발돋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백영옥(Baek Young-ok 白榮玉)소설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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