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학적으로 우수하고 품종도 다양한 감자는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주식 대용 식품이면서 동시에 반찬이고 간식이기도 하다. 원산지 남미를 떠나 유럽과 중국을 거쳐 19세기 초 이 땅에 전파된 감자가 주요 작물로 자리 잡기까지 그 역사와 의미를 되돌아본다.
강원도 태백의 한 감자밭에서 아낙네들이 감자를 캐고 있다. 국내에서 감자가 가장 많이 재배되는 곳은 지역의 대부분이 산간 지대인 강원도이며, 보통 6월 하순부터 시작해 8월 말까지 수확한다. ©TOPIC
거칠고 투박한 인상에 인체 비례도 맞지 않는다. 마치 만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얘기다. 이 작품은 처음 그렸을 당시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밀레의 뒤를 이어 가난한 농부들의 소박한 삶을 중요한 주제로 여겼던 고흐는 이 그림을 자신의 최초의 야심작으로 생각했다.
밀이나 쌀, 보리는 때로 기만적이다. 땅속에 씨를 심으면 땅 위 줄기에 이삭이 달린다. 추수철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곡식에 가려 정작 길러준 흙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감자는 정직하다. 흙 속에 심고, 흙 속에서 거둔다. 작은 등불 아래 둘러앉아 감자를 집어먹는 농부들의 모습은 그래서 진실하다. 손가락 마디는 땅을 파느라 두꺼워졌고, 낯빛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감자처럼 흙갈빛이다. 그러니 그들은 흙냄새가 모락모락 나는 삶은 감자를 먹을 자격이 있다.
고흐가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은 거룩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이지만, 16세기 남미 안데스 산지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감자가 처음부터 농민들의 음식으로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고흐의 그림이 후대에서야 제대로 평가받은 것처럼 감자가 널리 보급되어 사랑을 받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지에서 퍼져 나온 감자는 탄수화물이 풍부하며 무기질, 엽산, 비타민과 함께 식이섬유도 함유되어 영양학적으로 우수한 식품이다. 특히 감자의 비타민 C는 익혀도 쉽게 파괴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기근이 감자를 퍼뜨리다
감자는 영양학적으로 우수한 식품이다. 감자를 먹으면 풍부한 탄수화물에 더해 칼륨, 마그네슘, 망간과 같은 무기질, 그리고 엽산, 비타민 B1, B6 등의 다양한 영양소와 식이섬유를 섭취할 수 있다. 특히 감자 속의 비타민 C는 과일에 비하면 함량이 적긴 하지만, 주식으로 먹으면 괴혈병을 예방하기에 충분한 양이다. 아직 비타민이라는 물질 자체가 발견되기 한참 전이었지만, 18세기 유럽의 정부와 학자들은 감자의 영양학적 가치를 알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감자대왕’으로 유명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프랑스에 감자를 열성적으로 전파한 앙투안 파르망티에는 당시 감자의 보급에 기여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하지만 정작 감자를 먹어야 할 농민들은 이 새로운 음식을 경계하며 저항했다. 심지어 감자가 결핵, 나병, 콜레라 같은 질병을 일으킨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손대는 것조차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감자로 빵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도 그들이 감자를 기피하는 데 한몫했다. 유럽 농민들이 감자의 가치를 깨닫고 주요 작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기근이 들자 문제가 쉽게 풀렸다. 감자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한반도에 감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세기 초로, 산삼을 찾으러 온 청나라 사람들이 식량으로 가지고 와서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미식가 장 앙텔름 브리야-사바랭이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바로 그 무렵이다. 이 말은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당시에는 빈곤한 하층 농민과 부유한 상류층의 음식이 명확히 구분됐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그의 신분과 계층에 따라 결정되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식문화는 무엇을 먹느냐보다 어떻게 먹느냐를 통해서 종종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유럽인이나 한국인이나 감자를 식품으로 받아들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먹는 방식은 확실히 다르다.
빵이 주식이던 시대에 감자로 빵을 만들어 먹으려 했던 과거 유럽인들과 달리 현대 한국인의 감자 소비는 전통적 주식인 밥을 중심에 놓고 두 갈래로 나뉜다. 한국인들에게는 밥을 대신해 먹는 감자가 있고, 반찬으로 밥과 함께 먹는 감자가 따로 있다는 얘기다.
감자를 갈아 번철에 노릇노릇하게 지져 낸 감자전은 술안주로 인기가 높지만 좋은 간식거리이기도 하다. 강원도에서는 강판에 갈은 감자만으로 전을 부치는 데 반해 지역에 따라 부추나 당근, 양파 같은 채소와 버섯을 소량 넣기도 한다.
밥을 중심에 둔 감자 소비
빵이 주식이던 시대에 감자로 빵을 만들어 먹으려 했던 과거 유럽인들과 달리 현대 한국인의 감자 소비는 전통적 주식인 밥을 중심에 놓고 두 갈래로 나뉜다. 한국인들에게는 밥을 대신해 먹는 감자가 있고, 반찬으로 밥과 함께 먹는 감자가 따로 있다는 얘기다. 곡식이 귀하던 시절에는 찐 감자나 삶은 감자로 밥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쌀을 재배하기 어려운 지리적 환경의 강원도에서 많이 길러서 먹었다. 그로 인해 요즘에도 강원도를 여행하다 보면 옹심이, 감자떡처럼 감자로 만든 색다른 토속 음식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밥에 곁들여 반찬으로 먹는 일이 더 흔하다. 양념을 넣고 간장에 졸여 ‘감자 조림’을 해 먹든, 돼지 등뼈와 함께 여러 가지 야채를 넣어 끓여 ‘감자탕’으로 먹든, 혹은 된장찌개나 고추장찌개에 넣어 먹든 감자를 밥과 함께 먹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감자를 길게 채로 썰어 볶은 요리에 ‘감자나물’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본래 나물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 따위를 삶거나 볶거나 날것으로 양념하여 무친 음식’을 말한다.
그러나 감자의 줄기나 잎으로는 나물을 만들어 먹을 수 없다. 가지과 식물인 감자의 푸른 줄기와 싹에는 글리코알칼로이드라는 독성물질이 들어 있어 설사, 구토, 복통 등의 증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심하면 환각, 마비에 이어 사망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럼에도 감자나물이라 부르는 것은 아마도 다른 나물처럼 밥과 함께 먹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푸른빛이 도는 감자를 피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감자는 상처가 나거나 햇빛에 노출되면 살 속의 엽록소가 작동을 시작하여 녹색을 띠며, 독성 알칼로이드가 만들어진다. 감자 싹의 독성 물질은 가열해도 사라지지 않으므로 녹색으로 변한 부분은 잘 제거하고 먹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해로운 감자의 독성이 감자에게는 유용한 성분이다. 야생 감자에서 만들어지는 솔라닌과 토마틴이라는 독성 물질은 세균과 진균, 동물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가 되기 때문이다.
안데스인들은 일찍이 육종을 통해 야생 감자의 독성을 낮추고 작물화하여 우리를 포함한 세계 여러 지역민들이 이 값진 땅속줄기를 맛볼 수 있도록 변화시켰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진흙을 감자와 함께 먹으면 감자 속 독성 물질의 해를 줄일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캐나다 맥길대학교 영양학 교수 티모시 존스에 의하면, “안데스 산지의 진흙 속에는 감자 속 천연 독성 물질과 결합해 독성을 무력화할 수 있는 성분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다.
안데스 사람들에게는 추뇨(chuño)’라는 동결 건조 식품이 있다. 이 또한 그들이 먹는 쓴 감자(papa amarga)의 독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인데, 밤에는 해발 3,500미터 고원 지대의 차가운 공기를 이용해 감자를 얼렸다가, 낮에는 뜨거운 햇볕에서 말리면서 수분을 빼내어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도록 가공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츄뇨는 무려 20년까지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장기 보관이 가능했던 추뇨는 8세기 전 잉카제국이 주변 지역을 제압하고 국가를 운영할 수 있었던 군사력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흉년에 기근을 버틸 수 있도록 해 주는 저장 식량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지구 이 편에서 저 편으로 식재료가 전해질 때 그 식재료를 요리하고 가공하는 방법이 함께 따라가는 경우는 드물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거쳐 마침내 아일랜드까지 감자가 전해졌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감자 전분을 반죽해 녹두 소를 넣고 빚어서 찐 감자떡은 산이 많은 강원도의 향토 음식으로 은은한 맛에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특징이다.
다양한 품종, 다양한 맛
남미 사람들이 추뇨를 만들어 먹는 기술이 아일랜드까지 전해졌더라면, 아마도 19세기 중반 감자마름병의 대재앙이 닥쳤을 때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일랜드 사람들이 받아들인 것은 그저 감자 그 자체뿐이었다. 그마저도 럼퍼(Lumper)라는 단일 품종이었으므로 전국의 모든 감자가 똑같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 품종은 감자마름병에 취약했다. 단 하나의 전염병이 2년 만에 전국 감자의 90퍼센트를 썩게 만든 이유다. 원산지인 안데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감자 맛을 즐기기 위해 여러 품종의 감자를 함께 재배했기 때문이다.
1995년에 진행된 한 연구 조사에 의하면, 페루에서는 산지마다 평균 10.6종의 감자를 재배하고 있으며, 리마의 국제감자센터(International Potato Center)에는 약 5,000여 종의 씨감자가 보관되고 있다. 덕분에 아일랜드에 닥쳤던 대재앙이 전 세계적으로 반복될 가능성은 낮다. 그러니 매일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고 있으며, 쌀과 밀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한 작물인 감자가 재배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안데스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30종이 넘는 품종의 감자가 생산되는데, 일반적으로 조리 후 식감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나눈다.
전분 함량이 높고 익히면 포슬포슬 부서지는 것이‘분질 감자’이고, 상대적으로 전분 함량이 적고 수분기가 많아 촉촉하며 익혀도 단단한 느낌이 드는 것이‘점질 감자’이다. 그동안 국내 감자의 대세는 둘의 중간적 성질을 지닌 ‘수미 감자’였지만, 요즘 들어 품종에 따라 다양한 맛의 감자를 구별해서 먹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인들이 원산지 사람들의 지혜를 따르는 현명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