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부채를 만드는 기능을 보유한 사람이 선자장(扇子匠)이다. 김동식(Kim Dong-sik 金東植) 장인은 전라북도 전주에서 4대째 가업을 이어 부채를 만들고 있다. 60년 넘게 전통 방식으로 작업을 해 오고 있는 그는 2015년 국가무형문화재 선자장으로 지정되었다.
선풍기와 에어컨이 없던 시절 부채는 여름을 나는 생활필수품이었다. 바람을 일으키는 용도 외에도 신분을 드러내는 장식품으로, 혼례나 상례 같은 예식 때도 의례용으로 들고 다니는 휴대품이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은 둥근 부채보다 접부채, 그중에서도 합죽선(合竹扇)을 사랑했다. 바람 이는 소리와 함께 폼 나게 펴서 부쳤다가 순식간에 접어 도포 자락에 집어넣는 신공을 즐겼다. 부채에 그림을 그려 화첩 삼아 들고 다녔고, 등이 가려울 땐 효자손으로, 비상시엔 무기로도 요긴했다. 남녀가 은밀히 만날 때는 얼굴을 가리는 도구로 필수적이었다.
한국의 부채는 형태에 따라 둥근 모양의 부채[團扇]와 접고 펼 수 있는 접부채[接扇]로 나뉜다. 단선은 손잡이를 중심축으로 부챗살이 방사형으로 이어진다. 접선은 부챗살의 개수와 재료, 부채 바탕의 꾸밈, 부속품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그중 합죽선은 고려 시대부터 나전, 금속, 칠, 옥 공예 등과 접목돼 대표적인 국교품으로 발전해 왔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부챗살 수도 제한했다. 왕실 직계만이 50개를 넣을 수 있었고, 사대부는 40개, 그 아래 중인과 상민 계층은 그보다 살이 적은 부채를 사용했다. 조선 후기의 학자 홍석모(洪錫謀 1781~1857)가 펴낸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단오(음력 5월 5일)에 단오부채를 만들어 진상하면 왕은 이것을 재신과 시종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나라에서는 선자청(扇子廳)이라는 기구를 두어 부채 만드는 일을 관리 감독하고, 전라감영(옛 전라도청)에서는 각 지역에서 제작된 부채를 모아 임금에게 올렸다.
지난한 공정
크고 작은 대나무 조각들이 빼곡히 들어찬 작업실에서 한창 일하던 김동식 장인이 얇게 깎은 대나무를 들어 보여 준다.
“합죽선은 이렇게 얇게 깎아 낸 대나무 겉대를 두 개씩 맞붙여서 만든 부채입니다. 속대만 사용하는 중국, 일본의 접선과 달리 합죽선은 견고해서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요. 우리 전통 부채만의 특징입니다.”
합죽선 하나를 만드는 데는 140~150번의 공정을 거친다고 한다. 우선 적합한 대나무를 찾아야 한다. 대나무는 첫해에 훌쩍 다 자라고 이후에는 속으로 여물기만 하는데 3년은 되어야 적당히 단단해진다.
“새로 난 대나무가 보기에는 멋져 보이지만 짜개 보면 속이 물렁해서 쓸 수가 없어요. 3년 된 대나무가 가장 알맞습니다. 또 습기가 차면 좀이 슬기 때문에 건조한 12월과 1월에 일 년치 재료를 마련해야 합니다. 집 지을 때 겨울철에 벌목한 목재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죠.”
색깔이 깨끗한 대나무를 골라 부챗살 치수에 맞게 쪼갠 다음 겉대를 물에 담가 5일 정도 불린다. 그러면 초록빛이 돌던 겉대가 부챗살 특유의 누런색을 띠게 된다. 다음부터가 핵심이다. 대나무 겉대를 끓는 물에 담가 불려 가면서 0.3~0.4mm 두께로 속대 쪽을 얇게 깎아낸다. 이 단계까지 깎여 나간 대나무 양이 3분의 2 정도 된다.
“합죽선 만드는 과정에서 이 작업이 제일 힘들어요. 빛이 투과할 만큼 얇게 깎아 내야 접고 펴는 게 부드럽고 탄력도 좋아 바람을 더 시원하게 몰고 옵니다. 겉대는 잘 썩지 않고 단단해서 관리만 잘하면 500년도 가죠.”
얇게 깎아 낸 대나무 겉대 2개를 풀로 맞붙인 다음 부채 형태를 잡아 일주일 정도 말린다. 이때 민어의 부레를 말려서 끓인 부레풀과 동물의 뼈와 힘줄, 가죽 등을 고아 만든 아교풀을 4:6 비율로 섞어서 사용한다. 그래야 떨어지지 않고 오래간다. 부채 골격이 만들어지면, 불에 달군 쇠붙이로 부챗살 아래쪽에 하나하나 문양을 새겨 넣는다. 주로 박쥐, 매화, 용 등의 그림을 넣어 예술성을 높인다.
그다음, 손잡이 부분에 사용할 재료를 깎고 다듬는데 주로 대추나무, 먹감나무, 박달나무 등을 사용해 그 위에 얇게 깎은 대나무 겉대를 붙이거나 나전과 함께 옻칠 또는 주칠로 화려하게 마무리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상아나 우족도 사용하고 거북이 등껍질을 붙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매끄럽게 광을 낸 다음 부챗살에 고루 풀을 입히고 미리 재단해 놓은 한지를 붙인다. 마지막으로 황동, 백동, 은 등 금속으로 고리 장식을 만들어 손잡이를 고정시키면 비로소 한 개의 합죽선이 완성된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이러한 작업을 6개 부문으로 나눠 여러 사람들이 분업했다고 한다. 정교한 작업인 만큼 손이 많이 가고 수요도 많았던 시절 얘기다.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김동식(Kim Dong-sik 金東植) 선자장은 합죽선을 만드는 과정에서 대나무를 얇게 깎아내는 작업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최장수 합죽선 명가
합죽 작업까지 마치면 부채 형태를 만들고 장식하는 이후의 공정은 별도의 공방에서 작업한다. 김 장인이 밥 먹는 시간 외에 하루 종일 기거하는 방이다. 한쪽 벽면에 가지런하게 정렬된 무쇠 칼들과 연장들, 세월을 가늠키 어려운 작업대에서 60년 넘는 내공이 단번에 느껴진다.
“원래는 넓적하던 무쇠가 20년 갈아서 쓰다 보니 이렇게 회칼처럼 가늘어진 겁니다. 이 줄칼은 제 외할아버지가 만들어 쓰시다 제게 물려주셨죠.”
선반과 문틀 사이 벽에 걸린 빛바랜 흑백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조선 말 고종 황제에게 진상할 만큼 솜씨가 당대 최고였다고 합니다. 다행인지 저는 어린 나이에 배우기 시작해 기초부터 세부적인 모든 기술을 외할아버지 곁에서 보고 익혔죠.”
김 장인의 집안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 합죽선을 대물림해 만들고 있다. 1대 외증조할아버지에서 시작해, 흑백사진 속 외할아버지인 2대 라학천(羅鶴千), 3대 외삼촌 라태순(羅泰淳)을 거쳐 김 장인이 4대를 잇고 있다. 그가 합죽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열네 살이던 1956년부터다.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외가에서 살다시피 하며 배웠다. 당시 외가가 있던 마을은 부채 장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던 곳으로, 부채의 주재료인 대나무와 한지를 만드는 닥나무가 풍부했다고 한다.
“부채가 생활필수품이었던 때라 착실히 배우면 먹고살 만했죠. 처음엔 허드렛일만 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웠습니다. 손재주가 있었는지 대나무를 힘 안 들이고 예쁘게 깎는 걸 어른들이 보시더니 그제야 제대로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제가 우직한 성격이라 배운 대로 곧잘 만들어 내니까 칭찬을 많이 해 주셨어요. 그 바람에 정말 열심히 배웠죠.”
단순한 기술자와 장인의 차이는 발심(發心)에 있는 것일까. ‘이왕 일을 시작했으니 멋진 작품을 만들자’고 다짐한 그는 외할아버지에게 배운 정교한 제작 방식을 그대로 재연하면서 자신만의 합죽선을 만들고 싶었다. 그의 부채는 손에 쥐면 부드럽게 감기고 펼쳤을 때 부챗살과 정확히 반원 대칭이 된다. 그의 합죽선이 특별히 우아하고 품격이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포기할 뻔한 적도 있었다. 한번은 보증 선 게 잘못되어 수중에 재료 살 돈은커녕 당장 먹고 살 돈도 없을 때였는데, 한 친구가 선뜻 돈을 빌려주며 그에게 했던 말을 평생 잊지 못한다.
“너는 부채 만드는 재주를 타고 났으니 절대 놓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가슴에 박혀 이후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2019년 이수자가 된 아들 김대성(Kim Dae-sung 金大成) 씨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으며 전통 부채의 명맥을 잇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김 장인은 지금도 합죽선 만드는 전 과정을 직접 손으로 해내고 있다. 명품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버텨 왔으나 경제적 위기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부채를 만들어서 생활이 제대로 안 되니 젊은이들이 이 일을 하려고 하질 않아요. 그렇다고 제 대에서 이 전통이 끊어지게 할 수 없어서 다른 일을 하던 아들에게 넌지시 의향을 물었죠. 고맙게도 선뜻 해 보겠다고 하더라고요.”
2007년부터 5대째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아들 김대성(Kim Dae-sung 金大成)은 늦게 시작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자라서인지 빠르게 배워 나갔다. 장인은 대를 잇는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우리 고유의 기술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이라도 받고자 문화재 신청을 했다. 3년에 걸쳐 관련 기록들을 정리하고 만들기 공정을 체계화해서 마침내 2015년 국가무형문화재 ‘선자장 1호’로 지정받았다. 그가 부채 기능인으로서는 최초로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음으로써 전통 부채의 명맥을 잇는 몇 안 되는 장인들에게도 동력이 되었다. 이어서 아들도 2019년 이수자가 되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작업실 한켠에서 줄곧 대나무를 깎고 있던 청년이 일을 마치고 인사한다. 김대성의 아들, 김 장인의 손주다.
“대학교에 갓 입학한 손주가 만들어 보고 싶다며 다니고 있긴 한데, 제가 딱히 하라고도 하지 말라고도 못 하는 형편입니다.”
장인은 손주가 대견하면서도 자식들 외에 합죽선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없는 게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