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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SUMMER

저마다 역사를 지닌 조선의 궁궐들

서울에는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위치에 다섯 궁궐들이 자리 잡고 있다. 14세기 말 조선 개국 이후 가장 처음 세워진 경복궁을 비롯해 이 궁궐들은 저마다 다른 시대적 배경과 필요에 의해 세워졌고, 조선의 역사와 함께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仁政殿)은 왕의 즉위식을 비롯해 다양한 국가 행사가 치러지던 공간이다. 외관상으로는 2층 구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통층이어서 내부 천장이 매우 높고 화려하다. 인정전 앞마당은 긴 회랑에 둘러싸여 있다.
ⓒ 국립고궁박물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는 역대 조선 왕과 왕비들의 신주(神主)를 모신 유교 사당이다. 좌우로 길게 지은 건물은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단순한 구조로 건축되었으며, 경건함을 강조하기 위해 단청도 하지 않았다.
ⓒ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동아시아의 궁궐들은 특정한 모델을 공유하고 있어 서로 유사한 점들이 많다. 하지만 각 시대와 지역에 따른 특징 또한 존재한다. 한반도에 들어섰던 역대 왕조들도 저마다의 방식대로 궁궐을 만들어 국가 운영의 중심 공간으로 삼았다. 조선 왕조 또한 고유의 특성을 지닌 궁궐에서 500여 년 동안 통치를 이어갔다.

조선의 궁궐에 대한 가장 흔한 질문은 ‘서울에는 왜 이렇게 궁궐들이 많은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한 것 같지만, 조선 시대 궁궐 역사의 흐름을 함축한다. 서울에 궁궐들이 많은 이유는 단일 왕조 조선의 역사가 매우 길었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과 외세의 침탈, 전쟁 같은 큰 사건들을 겪으면서 하나의 궁궐만을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궁궐의 등장과 소멸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내부에 설치된 어좌(御座). 왕의 권위와 존엄을 강조하기 위해 높은 단 위에 화려하게 장식한 어좌를 두었으며, 뒤편에는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을 둘렀다.
ⓒ 셔터스톡

현재 남아 있는 조선의 궁궐들은 건립 연대가 각기 다르다. 경복궁은 조선 개국과 함께 건립되었고, 창덕궁은 그로부터 불과 10년이 지나지도 않아 새로 건축됐으며, 창경궁은 15세기 말에 세워졌다. 한편 경희궁은 17세기 초에 건설되었고, 덕수궁은 19세기 말에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역사상 많은 이궁(離宮)들이 존재했다.

조선 궁궐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개 두세 개의 궁궐들이 동시에 존재하였고, 선택적으로 사용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과 창덕궁 및 창경궁이, 임진왜란으로 도성 안 모든 궁궐들이 소실된 이후에는 복구된 창덕궁과 창경궁, 새로 건설한 경희궁이 함께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후반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은 궁궐의 기능을 상실했고, 이후 덕수궁이 등장하면서 경복궁도 쓸모를 잃었다.

복수의 궁궐은 유용하다. 하나의 궁궐만이 존재한다면, 화재나 전염병 등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궁궐의 등장과 소멸이 복잡하게 전개되었던 조선 시대의 다섯 궁궐들은 현재 문화유산으로서 동시대에 존재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조선 전기부터 있었던 궁궐들은 모두 서울의 중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청계천과 종로의 북쪽 중심부에 위치한다. 반면 경희궁과 덕수궁은 도시의 서쪽과 남쪽에 치우쳐 있다는 특징이 있다.

조선 최초의 궁궐

경복궁 강녕전(康寧殿)은 왕이 일상생활을 하던 침전이다. 대청과 툇마루 사이에 위로 올려 개방할 수 있는 분합문(分閤門)을 달아 공간을 개폐할 수 있도록 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경복궁은 조선이 개국되고 3년이 지난 1395년에 완성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재위 1392~1398)는 한양(서울의 옛 지명)으로 새로운 수도를 정하고 종묘와 사직, 경복궁을 세웠다. 그리고 성곽을 둘러 유교주의 국가의 수도가 가져야 할 모습을 완성하였다.

경복궁은 남북으로 길고 비교적 평탄한 대지 위에 지어졌다. 남쪽으로 난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으로부터 주요 전각인 근정전(勤政殿), 강녕전(康寧殿), 교태전(交泰殿)을 거쳐 후원인 아미산(峨嵋山), 향원정(香遠亭)에 이르는 남북 방향의 축선은 경복궁 건축 배치의 핵심이다. 이러한 배치법은 고대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일종의 표준이라 할 수 있다. 이 축선은 남쪽으로는 경복궁 앞의 관청가와 도시의 남문인 숭례문, 북쪽으로는 높고 인상적인 산봉우리를 연결하는 도시의 선이기도 하다.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法宮)이다. 법궁은 국가적 의전의 무대이기에 세종(재위 1418~1450) 대를 거치면서 조선의 국가 의식에 맞추어 정비되었다. 그러나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불타 사라졌고, 이후 약 3세기 동안 복구되지 못하였다. 유명무실했던 경복궁은 1865년 중건을 시작해 1867년 복구가 완료되었으며, 이듬해 고종(재위 1863~1907)은 창덕궁에서 이곳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1895년 외세에 의해 왕후가 시해되는 사건을 발단으로 궁궐의 지위를 잃고 만다. 이후 경복궁은 일제 강점기에 많은 건물들이 훼손됐다. 현재도 복원 정비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이 궁궐의 모습은 원래의 일부에 불과하다.

 



가장 오래 존재한 궁궐

창덕궁은 1405년 경복궁의 이궁으로 건설되었다. 이미 경복궁이 있었지만, 따로 규모가 작은 창덕궁을 만든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당시 임금이었던 태종(재위 1400~1418)이 형제 간 왕위 계승 다툼이 있었던 경복궁을 꺼려했거나 왕위에서 물러난 부친 태조가 아직 생존해 있었다는 점이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창덕궁의 건립으로 조선 왕실은 복수의 궁궐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창덕궁 부지는 그리 넓지 않다. 북쪽으로 산자락이 가깝게 붙어 있고 남쪽은 시가지여서 넓은 땅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경사도 심해서 경복궁과 같은 정연한 배치를 만들어 낼 수도 없었다. 정문 돈화문(敦化門)을 지나 궐내로 들어서면 여러 번 방향을 꺾어야 비로소 궁궐의 깊은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유다. 각각의 건물과 마당이 경복궁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인데도 워낙 땅이 좁아 충분히 많은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대신 궁궐의 북편 언덕으로 매우 넓은 정원을 만들었는데, 이는 조선 왕실 정원 건축의 가장 뛰어난 풍경이 되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시기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가장 오랫동안 존재했고, 가장 많은 왕들이 머문 궁궐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복구되지 않은 경복궁을 대신하여 법궁의 역할을 하였으며, 왕조가 끝나는 순간까지 궁궐로 사용된 곳이다. 또한 그 배치법이나 조경 수법이 다른 나라에서는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워 조선 궁궐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특징을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경궁 명정전(明政殿)은 경복궁과 창덕궁의 정전(正殿)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건축적 형식은 대동소이하다. 세 정전 모두 화재로 소실되어 여러 차례 재건되었는데, 그중 이곳 명정전의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
ⓒ 문화재청

부침의 역사

 

창경궁은 1483년 성종(재위 1469~1494)에 의해 완성됐다. 성종은 세 명의 대비를 모셔야 했는데, 그가 머물고 있던 창덕궁은 너무 좁아 별도의 궁궐이 필요했다. 그래서 창경궁의 중심부는 대비들의 침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고 이곳에 대비들을 위한 침소만 있지는 않다. 임금이 정치 행위를 하면서 머물 수 있는 전각들도 함께 세워져 독립적 궁궐의 면모도 갖추었다. 또한 왕세자를 위한 공간도 두었다. 비극적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재위 1776~1800)는 창경궁에 머물면서 이 궁궐 맞은편에 아버지의 사당을 마련하고 자주 찾았다.

창덕궁과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연결된 창경궁 남쪽으로는 역대 왕과 왕비들의 신주를 모신 유교 사당인 종묘가 있다. 그래서 창경궁의 정문은 보통의 경우처럼 남쪽으로 내지 못하고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창경궁 터는 동남쪽으로 완만하게 내려가는 경사지이고, 서쪽으로는 언덕이 있어 창덕궁과 구분된다. 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었으며,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한 이 두 궁궐들을 합쳐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창경궁은 일부 중요한 건물들이 동쪽을 향하고 있고, 대부분의 건물들은 남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동편에 정치 공간을 두고 서편으로 생활 공간을 두었다. 이는 궁궐 배치법으로 보면 이례적인 경우에 속한다.

창경궁은 일제 강점기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설치되는 등 궁궐로서 그 기능을 잃었다. 동물원은 이전됐지만 식물원의 유리 온실은 여전히 후원에 남아 있다. 훼손되기 이전 창덕궁과 창경궁의 온전한 모습은 <동궐도(東闕圖)>라는 그림에 잘 남아 있다. 채색된 투상도 형식의 이 그림은 폭이 6미터에 가까운 크기로, 두 궁궐의 전각이나 조경 등이 매우 상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한편 남아 있는 전각 수가 가장 적은 경희궁의 옛 모습은 <서궐도안(西闕圖案)>이라는 그림에 남아 있어 그 원형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듯 조선의 여러 궁궐들은 각각의 역사성을 간직한 채 오늘도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조재모(Cho Jae-mo, 曺在謨) 경북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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