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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AUTUMN
누구나 그리고 즐기는 민화의 즐거움
과거 민화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민화 수집가나 연구가들이 등장하고 민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화가들의 작품이 주목 받으며 관심이 높아졌다. 최근에는 취미로 민화를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고, 공모전, 아트페어, 갤러리를 중심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민화 강사 신상미 씨는 취미로 시작했던 민화의 매력에 빠져 지금은 민화를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
직장인에서 민화 강사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신상미 씨.
열의에 가득 찬 수강생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이 공간의 이름은 모리화(毷離畫)이다. 번민 모, 떠날 리, 그림 화 즉 ‘일상의 근심을 떠나 보내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민화’를 배운다.
민화는 조선시대 때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한 실용화이다.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을 위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이라는 의미에서 ‘민화’로 불린다.
한 겹 한 겹 색을 쌓다
신상미(申湘媄) 씨에게는 두 종류의 ‘날’이 있다. 수업이 있는 날과 수업이 없는 날. 일주일 중 사흘은 수업이 있고, 사흘은 없다. 나머지 하루는 ‘배우는 날’이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7시쯤 일어나 중학생인 딸을 학교에 보낸 후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작업실로 간다. 경복궁 근처에 있는 21평짜리(69m²) 오피스텔로,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처음에는 집에서 동네 분들 모아놓고, 돈도 안 받고 가르쳤어요. 본격적으로 수업을 해보자 마음먹고 일 년 전쯤 작업실을 얻었어요. 경복궁 근처라 임대료는 비싸지만, 그 덕분인지 전국에서 배우러 와요.”
작업실에 도착하면 전기차를 충전시켜 놓고 강아지들과 산책을 한다. 이후 작업실로 돌아와 작업용 앞치마를 메고 화분에 물을 준 다음 수업 준비를 한다. 첫 수업은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해 3시간을 꽉 채우고 끝이 난다.
“처음에는 책상 다섯 개를 놓고 시작했어요. 지금은 여덟 개가 되었죠. 한 클래스에 8명 정도 들어오시고, 총 여섯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어요. 자리가 나면 들어오려고 대기하고 있는 분들도 많아요.”
민화는 전공자, 비전공자의 차이가 별로 없다. 밑그림이 있어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골라 채색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추어도 쉽게 시작할 수 있고 결과물도 좋은 편이다.
신 씨의 수강생들이 그린 작품들. 같은 밑그림이라도 그리는 이의 취향과 선호하는 색 등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로 완성된다.
“민화는 가루 물감을 아교로 개어 한 겹 한 겹 색을 계속 쌓아가는 작업이에요. 한 작품 완성하는 데 몇 개월씩 걸리는데, 명상하듯이 천천히 하다 보면 계속하고 싶어지는 매력이 있어요.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문화죠. 다들 재미있게 다니세요.”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이 없어도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난다. 일상의 소소한 근심을 까맣게 잊고 온전히 몰두하는 시간이다.
밥 먹고 그림만 그렸다
민화 강사가 되기 전, 신상미 씨는 20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다. 대기업에서 벽지, 바닥재, 가구 필름 등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였다.
“2000년 초반, 컬러와 패턴 등 디자인이 다양한 장판(壯版 한국의 주택에서 방바닥에 까는 PVC로 된 시트) 시장이 어마어마했어요. 장판에 민화 나비를 넣어보고 싶어서 민화 작가를 소개받았어요.”
그것이 처음 만난 민화였다.
“직장을 정말 열심히 다녔어요.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일요일에도 일을 했죠. 그러다가 4년 전쯤 아이가 아파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어요. 수십 년 동안 매일 하던 일을 갑자기 안 하게 되니 스트레스가 컸어요. 몸도 마음도 엉망이었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어디 가서 꽃이라도 그리자’ 하고 집 앞 공방을 찾아갔어요. 그때부터 민화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재미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정말 밥 먹고 그림만 그린 나날이었다. 한 곳에서 그릴 수 있는 민화가 한계가 있다 보니 화실을 서너 군데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그렸다. 그러다 보니 실력이 늘어갔다. 남들이 10년 걸려 배울 걸 2~3년 만에 익혔다. 어느 순간 병풍 하나 정도는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병풍 그리기를 시작했다. 1년쯤 걸리는 작업을 3개월 만에 끝냈다. 그때 그린 병풍으로 ‘제 15회 대한민국 민화공모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 정도면 화실을 차려도 될 것 같아 작업실을 열고 수강생을 받기 시작했다.
“저는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안 맞는 사람이더라고요. 뭔가를 시작하면 몸이 상할 정도로 몰두해요. 칭찬받고 싶고, 잘하고 싶고. 그림을 시작하면서 활력이 생기고 아이를 돌볼 시간도 생겨서 아이도 저도 건강해졌어요.”
빠른 시간 안에 민화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힌 이유 중 하나는 직장생활 때의 경험이었다. 벽지, 바닥재, 가구 필름 등을 디자인하면서 빨강, 노랑, 파랑으로 색을 조합하는 작업만 20년을 했다.
“제가 색을 만드는 데 특화되어 있었던 거죠. 민화는 정해진 색이 없어요. 같은 그림이라도 작가마다, 공방마다 색이 다르죠. 여러 색을 실험해 보고 칠해보면서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는 거예요. 오방색(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청색, 흰색, 적색, 흑색, 황색)을 화려하게 써야 민화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간색’이라고 불리는 중간색을 적극적으로 쓰는편이죠. 오방색은 한옥에는 어울리지만, 현대적인 인테리어와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제가 출품한 병풍도도 출품작 중 제일 어두운 그림이었어요. 요즘은 톤 다운된 노란색, 겨자색에 꽂혀 있어요.”
매주 화요일은 민화 명장 스승님께 전통 민화 그림을 배우러 간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1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듣는다.
“시상식 날 원로 선생님들께서 앞 줄에 앉아 계셨는데, 아빠랑 너무 비슷하게 생기신 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분한테 가서 ‘저 좀 받아주세요’ 했어요. 그림 속 꽃 하나, 나비 하나에도 다 의미가 있거든요. 그리다 보면 알고 싶어져요. 그래서 책도 많이 읽고 수업도 듣는 거죠. 수업 중간에 밥도 먹고 막걸리도 한잔하면서 선생님께 수업을 받고 있어요.”
어설픔도 맛이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작업실에 나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여기서 제 작업도 해야지 싶었는데, 점점 회사처럼 되다 보니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져요. 그래서 개인 작업은 집에서 해요. 그런데 이제는 화실 이름도 걸려 있고, 제가 가르치는 사람이 되니 그림에 힘이 들어가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그림 그리는 것이 예전만큼은 재미가 없어요. 회원들 그림 봐 드리고, 그 그림들이 점점 나아지는 걸 보는 게 훨씬 좋아요.”
수강생은 주로 40~50대 여성들이다. 작업대에 그림과 재료를 잔뜩 펼쳐놓고 수다를 떨며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인다. 그렇게 세 시간 동안 스트레스를 날린다.
민화는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는 그림이다. 그래서 전공자, 비전공자 할 것 없이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문화라고 말한다.
“혼자서 작업을 하면 그야말로 무념무상이에요. 쉬는 날에 종일 미적거리다가 저녁에 시작할 때가 많은데 정신차려보면 새벽이에요. 저희 엄마가 70대인데 엄마도 제 수강생이에요.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고, 아마추어의 어설픔도 민화의 맛이에요. 저희 화실은 아직 회원전을 연 적은 없지만, 회원전을 열면 작품도 절 팔린다고 하더라고요.”
수강생들의 즐거움이 신 씨의 보람이자, 회사 다닐 때는 몰랐던 기쁨이 된다. 새벽 서너 시까지 그리고, 서너 시간 자고, 하루 아홉 시간 수업이 있는 날에는 한 끼 챙겨 먹기도 힘들지만, 모든 게 감사하다. 열정을 쏟았던 직장생활의 끝에 새롭게 찾은 길이 감사하고, 경력이 짧은 자신에게 배우기 위해 먼 길을 오는 사람들이 감사하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최근 아버지를 위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겨자색, 그리고 파란색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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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AUTUMN
노잼도시 대전의 재발견
한반도에서 대전광역시는 중심에 있다. 위에서 내려오거나 아래에서 올라가도 그렇다. 게다가 주요 고속도로와 철도 노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부터 지금까지 대전은 한반도 교통의 길목이자, 중심에 있다.
ⓒ 대전관광공사
편리한 교통 입지는 이곳에 한국 최대의 과학연구단지가 자리잡는 계기로 작용했다. 인재를 모으는 데 유리하고, 여러 지역의 공업단지와 연계하기 좋으며, 근처 금강(錦江)에서 용수를 끌어다 쓰기에도 좋은 입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선 것이 1970년대 초반 첫 삽을 뜬 대덕(大德)연구단지, 지금의 대덕연구개발특구(INNOPOLIS DAEDEOK)다.
한국 최대 과학의 도시
1984년에 설립돼 오늘에 이르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한국 과학 발전의 초석 역할을 해오고 있다. 또한 1993년에 개최된 대전엑스포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대전하면 과학’을 떠올리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특히 대전엑스포에는 세계 108개국, 33개 국제기구, 국내 200여 개 기업이 참가해 88서울올림픽만큼이나 성대하게 치뤄졌다. 당시 학생이었다면 학교단체여행으로 대전엑스포를 방문한 덕에 대전엑스포 ‘꿈돌이’는 한때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대전 도심을 가로지르는 갑천 위의 엑스포다리는 당시의 추억을 여전히 전하고 있으며,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른 엑스포 과학공원은 대전시민들의 쉼터로, 엑스포 한빛탑은 야경 명소로 인기다.
대전엑스포93 기념관과 엑스포과학공원의 상징인 한빛탑, 물빛광장 음악분수 등이 있는 엑스포과학공원은 대전 시민의 휴식처이자 야경 명소가 되었다. ⓒ 대전관광공사
2022년 12월말 기준, 현재 대덕에 위치한 연구기관 및 기업은 2,397개에 이르며, 국내외 특허 출원 건수만 119,683건에 달한다. 대덕연구개발특구는 한국 과학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온 구심점이자 이러한 과학 발전은 한국 경제를 성장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전에서 과학을 어렵지 않게 경험하고 싶다면 대덕연구개발특구 한복판에 자리한 국립중앙과학관을 방문하면 된다. 한국의 첫 우주발사체인 나로호를 실물 크기로 전시한 모형이 방문객들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고, 로봇으로 재탄생한 대전 과학 엑스포의 마스코트였던 꿈돌이를 만나볼 수 있는 등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과학이 즐거운 놀이가 되는 국립중앙과학관. 이곳에는 자연사, 인류, 천체, 과학기술,미래기술 등 과학을 흥미롭게 풀어낸 공간이 많다.
밀가루가 낳은 새로운 음식문화
대전의 음식문화는 밀가루와 함께 탄생하고 발전해왔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한국 기후의 한계 탓에 메밀가루나 칡전분만이 이 땅에서 면을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이(唯二)한 재료였다. 그런데 밀가루라는 새로운 식재료가 출현한 것이다.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전 국토가 파괴되어 주식인 쌀이 매우 부족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민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미국이 원조한 밀이나 옥수수 등으로 만든 식량을 섞는 혼분식(混粉食)을 장려했다. 애초 쌀로 만드는 음식일지라도 무조건 밀가루로 만든 재료를 섞도록 했다. 한국내 어느 식당에서든 설렁탕이나 돼지국밥 등을 주문하면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함께 말아져 나오는 것이 바로 이 시대의 흔적이다.
대전이 예부터 밀가루와 관련된 음식이 발전한 것은 부산항이나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미국산 밀을 제분해 전국으로 배송할 때 중간보관소 및 분기점 역할을 했던 교통 요지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1960~1970년대 대전 서쪽의 서해안 간척사업 당시에는 노임을 미국이 원조한 밀가루로 지급했다. 그 밀가루를 현금으로 바꿔주던 교환장이 대전에 들어선 것도 한몫했다.
이처럼 풍성한 밀가루 공급으로 다채로운 음식문화를 꽃피웠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칼국수다. 칼국수는 익반죽해 썬 밀가루 면을 숙성 과정 없이 해산물, 또는 고기 육수를 베이스로, 채소와 함께 끓여 먹는 음식이다. 특히 육수와 고명, 면 굵기 등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지금은 전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칼국수가 최초로 탄생한 곳이 바로 대전이었다. 누가 최초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1960년대 들어 각종 미디어에 전국 최초로‘대전 칼국수’라는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명성을 뽐내듯 2023년 말 기준 대전에는 칼국수 전문점이 무려 727개에 달한다. 이는 인구 1만 명당 5개 꼴로,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많은 수치다. 이와 같은 대전의 칼국수 자부심은 2017년 이래 매년 10월마다 열리는 대전칼국수축제로 이어지고 있다.
칼국수가 최초로 탄생한 대전에는 다양한 칼국수 전문점이 있다. 사진은 사골과 멸치육수를 베이스로 한 칼국수이다.
대전을 대표하는 베이커리
대전을 대표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2023년 연매출만 1,243억에 순이익 315억 원으로, 단일 베이커리로는 세계 최상급 실적을 쌓아가고 있는 성심당(聖心堂)이다.
성심당이 문을 연 것 역시 미국으로부터 밀 원조가 들어오기 시작한 1956년이었다. 앞서 1950년 벌어진 한국전쟁 당시 극적으로 월남한 이들 중에는 지금의 성심당을 창업한 부부도 있었다. 부부는 훗날 대전에 정착했는데, 당시 가톨릭 신부로부터 밀가루 두 포대를 받아 찐빵을 만들어 판 것이 성심당의 출발이 되었다.
전쟁의 포연을 헤치고 창업한 빵집 답게 이들 눈에는 사회적 약자들이 남달리 보였다 한다. 팔고 남은 빵을 빈곤에 허덕이던 이들에게 매일 같이 베풀기 시작했다. 창업 이래 7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남는 빵을 복지관에 기부하며, 기부할 빵이 부족하면 새로 만들기까지 할 정도다. 제품 개발에도 열심이다. 단팥빵의 달콤함과 소보로의 고소한 맛, 그리고 도너츠의 바삭한 느낌을 한 번에 맛볼 수 있는 튀김소보로 등 이전에 없던 제품들을 만들어냈다. 이 튀김소보로는 성심당을 대표하는 빵 중 하나로, 현재까지 무려 8천만 개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만약 대전 시내를 걷다가 수십 미터, 때로 수백 미터의 줄을 발견한다면 십중팔구 성심당 매장일 확률이 크다. 성심당 매장은 대전에만 있어 빵과 케이크를 맛보기 위해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무조건 대전으로 가야만 한다. 이 때문에 빵을 좋아하는 이른바 빵순이들의 퀵턴여행(바로 돌아오는 여행, 즉 짧은 당일치기 여행)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전국 최대의 칼국수 식당 수와 성심당 밖의 기나긴 대기 행렬은 절박했던 한국인들을 구제해낸 그 옛날의 밀가루가 이제는 ‘노맛 도시’ 대전을 ‘꿀맛 도시’로 재탄생시켰음을 증명하는 풍경이다. 오는 9월 28일부터 이틀 간 열릴 예정인 대전빵축제에서 대전 사람들의 이른바 ‘빵부심’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전의 명물인 성심당. 제철 과일이 산처럼 쌓인 시루케이크, 시그너처 빵 등을 구입하려 매일 인산인해를 이룬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이렇다 할 대표 관광지가 없어 그 동안 ‘노잼 도시’로 알려졌던 대전은 최근‘유잼 도시’로 변신하고 있다. 예컨대 20세기 초반부터 철도산업 종사자들이 모여 살았던 소제동 관사촌은 맛과 멋이 즐비한 거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물론 본래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은 아니었다. 전쟁과 신도시 개발로 소외된 이래 빈집만 2천 채가 넘는 곳이었다. 변화의 움직임은 2010년 한 예술가가 옛 철도원 관사를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면서 시작되었다. 대전에서 유일하게 근대기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 지역의 가치에 주목한 것이다.
연극제와 노래자랑 등 예술 활동을 진행하면서 과거에 머물러 있던 관사들이 하나둘 갤러리나 카페, 레스토랑 등으로 바뀌어갔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겉모습은 언뜻 낡고 허술해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울창한 대숲을 대문으로 삼은 카페부터, 온천탕을 옮겨온 것 같은 정원이 인상적인 레스토랑까지, 독특한 아이디어와 현대적인 디자인이 더해져 다른 지역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낯선 경관이 펼쳐진다.
이와 비슷한 공간인 테미오래도 있다. 1930년대 대전 원도심에 만들어진 근대건축물을 리모델링한 곳으로, 옛 충남도지사 공간을 비롯한 9개 관사를 활용해 대전의 근대 역사와 문화, 예술 전시를 볼 수 있는 복합문화 예술공간이다.
소제동에 있는 옛 관사촌의 원형을 살려 만든 카페거리. 외관을 비롯해 지붕, 천장, 기둥 등 핵심 구조물은 그대로지만 각 스폿마다 색다른 개성과 취향으로 꾸며져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문화와 어우러진 대전
대전이 단순히 교통 요지이자 맛있는 먹거리만 많은 곳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문화적 향취와 자연의 깊이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곳이 대전이다.
먼저 대전 도심에 자리한 전국 최대의 도심 속 수목원인 한밭수목원을 빼놓을 수 없다. 방문객들은 울창한 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거나 산책을 즐기기도 한다. 수목원은 이응노(李應魯; LEE, Eung-no; 1904-1989) 미술관과 대전시립미술관과도 접해있다. 그 중에서도 이응노 미술관은 『문자추상(文字抽象)』과 『군상(群像)』 연작 등 한국화를 기반으로 서양의 추상화를 동양 서예로 녹여내며 독특한 미술세계를 만들어간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응노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유독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그가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던 당시의 나이가 50대 중반이었다는 점이다. 명성과 부에 안주하며 살 수 있었음에도 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스스로 나아갔다.
더욱이 1960년대 후반 한국내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음에도 그는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대전교도소 등에 수감돼 있는 중에도 밥풀 등을 이용해 3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오히려 국경과 민족을 뛰어넘는 예술의 가치와 위대함을 찾아 더욱 열정적으로 그렸다.
그 중에서도 1970년대 후반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군상(群像)』 연작은 당시 한국은 물론 전세계 양심적인 시민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자유분방한 개인들이 모여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그림에서 한국인들은 오늘의 민주화된 한국을 만들어낸 에너지를 읽어냈다.
시민을 위한 지역 대표 미술관이자 이응노(Lee Ungno) 화백의 예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이응노 미술관 ⓒ ARCHFRAME.NET
시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인 개입과 노력 속에서 노맛에서 꿀맛, 노잼에서 유잼으로 이미지 자체가 바꾸어가고 있는 대전은 언뜻 보면 밋밋할 것 같지만 과학, 문화, 근현대, 예술, 자연 등 여행의 목적에 따라 스팟들이 즐비한 곳. 그렇기에 대전은 하루이틀만에 둘러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대전의 옛 지명이 크고 너른 평야를 뜻하는 ‘한밭’인 것처럼 대전을 여행한다면 그날의 여행 주제를 정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대전을 여행할 수 있다.
장태산 자연휴양림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메타세쿼이아 숲이 울창하게 형성되어 있어 이국적인 경관 더불어 산림욕을 즐기기에 좋다. ⓒ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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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AUTUMN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미용실
일본인 나카야시키 겐타(NAKAYASHIKI KENTA, 中屋敷) 씨에게 미용사는 다양한 사람들과 따뜻하게 소통하는 직업이다. 그가 한국에서 활동한 지는 이제 6년 조금 지났지만, 이 나라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오래도록 같이 나이 들어가길 꿈꾼다.
나카야시키 겐타(NAKAYASHIKI KENTA, 中屋敷 健太) 씨에게 오는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그는 한 번에 한 명의 손님 만을 받는다. 오롯이 그 사람에게 집중하기 위해서다.
겐타 씨의 미용실에선 누구나 주인공이 된다. 동시에 여러 손님을 받는 대신 한 사람씩 예약제로 고객을 맞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두 사람이다. 가족이 함께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는 극소수의 손님에게 자신의 시간을 오롯이 내어준다. 미용실 창밖엔 나무들이 울창하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서울 강남구(江南邱)에 자리하고 있지만, 바깥에 작은 공원이 있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철마다 누릴 수 있다. 고객과 마음을 나누기에 더없이 좋다.
“미용사는 누군가와 만나서 가까워지는 직업이에요. 미용실 운영으로 큰돈을 벌기보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좋은 사람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서
한국에 오기 전엔 일본 도쿄의 번화가인 오모테산도(Omotesando 表参道)에서 미용사로 일했다. 그가 고용된 미용실엔 손님이 아주 많았다. 한 시간에 무려 14명이나 커트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밀려드는 고객들을 상대하기 바빠 그는 손님의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게 너무 부끄러웠다. 그가 미용사가 된 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어서였다. 그랬던 첫 마음과 너무 멀어져 있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했어요. 잠을 거의 못 잤죠. 그렇게 6년쯤 일하다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겨우 스물일곱 살에요. 계속 이렇게 살다 간 죽을 수도 있겠다 싶던 차에 새로운 기회가 생겼어요. 제가 일했던 미용실 부사장님이 한국에서 미용실을 차려보라고 권하셨거든요. 때마침 한국에 관심이 생겼던 터라 별 망설임 없이 날아왔어요.”
한국으로 이끈 한정판 운동화 한 켤레
그게 2018년이었다. 사실 그전까지 그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 그가 한국에 관심을 품게 된 건 한정판 운동화를 사러 도쿄의 한 매장에 들렀을 때였다. 어느 젊은 남성과 같은 신발을 동시에 집으면서 눈이 마주쳤는데, 머리부터 신발까지 일본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남성이 누구인지는 얼마 뒤 TV를 보다 알게 됐다. K-팝스타 지드래곤(G-Dragon 보이그룹 ‘빅뱅’의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이 바로 그였다. 미디어에 비친 그는 음악도 패션도 기존의 틀을 모두 뛰어넘고 있었다. 그런 아티스트가 존재하는 나라에 문득 깊은 호기심이 생겼다.
“도쿄 오모테산도가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라 여겨왔는데, 그보다 더 앞서나가는 곳이 한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이후로 우리 미용실에 오는 한국인 손님들을 유심히 봤어요. 일본으로 유학 온 손님도, 일 때문에 건너온 손님도, 하나같이 자기 삶을 멋지게 가꾸는 분들이더라고요. 이런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면 몇 년 안에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겠구나 싶었어요. 직접 가보고 싶어졌죠.”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인사말도 모르고 온 그에게 가장 큰 언어 선생님은 다름 아닌 고객이었다. 어학원을 찾아가는 대신 혼자 한국어 교재를 사서 공부하길 선택했지만, 손님들과의 대화 덕분에 그의 한국어 실력은 금세 늘어났다.
서울의 몇몇 동네에서 일하다 3년 전 이곳 도곡동(道谷洞 Dogok-dong)에 미용실을 냈다. 별도의 홍보를 하지 않고도 이전 미용실의 고객이 또 다른 고객을 소개해 줘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이곳의 고객들은 열 살이 안 되는 어린이부터 칠십 대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직업도 제각각이다. 그 덕분에 미용실에 가만히 있어도 드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그를 처음 만난 손님에겐 세번쯤 와줄 것을 권한다. 헤어 스타일, 모발 상태 등에 따라 처음부터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연을 이어가며 손님과의 합을 맞춰나가는 것이 그에겐 중요한 작업 중 하나다.
한국인의 정(情)에 빠지다
“일본 사람들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아요. 진심을 알기가 어렵죠. 하지만 제가 만난 한국인들은 거의 모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더라고요. 그래서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서 편할 때가 더 많아요. 제가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으니까요.”
그는 한국인들을 흥(興) 많고 정(情) 많고 화(火) 많은 사람으로 표현한다. 그 가운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한국인 특유의 정(情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이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한국인들이 자기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에 매우 놀랐다. 일본에선 누군가를 함부로 돕는 것이 큰 실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한국인들의 넓은 오지랖(이 일 저 일에 관심도 많고 참견도 많이 한다는 뜻)이 아주 좋다. 따뜻한 마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잘 아는 까닭이다.
“일본에선 미용사와 고객이 평생을 함께하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한국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 문화만큼은 일본의 것을 옮겨 오고 싶어요. 저는 우리 미용실에 처음 오는 고객들에게 지금 당장 손님 마음에 들게 해드릴 순 없다고 이야기해요. 손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함께 만들어갈 테니, 속는 셈 치고 세 번만 와 달라고 부탁하죠. 거의 모든 고객이 그 이야기를 따라줘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대신 그는 손님들이 건네 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매번 최선을 다해 들어준다. 미용사의 자질에는 고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절한 순간에 알맞은 공감을 표시하는 게 그만의 무기다. 고객의 머리를 예쁘게 해 주는 것만큼 고객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에서 그는 큰 보람을 느낀다.
차분하면서도 정돈된 나카야시키 겐타 씨의 성격을 닮은 듯한 미용실
일본에 있을 때보다 훨씬 적은 수의 고객을 만나는데도 그의 수면시간은 여전히 짧다. 새벽 네다섯 시에 잠들고 아침 여덟 시 반쯤 눈을 뜬다. 침대에서 벗어나면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패션 또는 헤어 관련 유튜브를 본다. 업계의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열 시쯤 미용실로 출근해 열한 시에 영업을 시작하지만, 퇴근 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손님들의 예약 시간이 제 각각이라서다. 별도의 휴일이 없는데도 그는 별 불만이 없다. 오늘은 또 어떤 만남을 갖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이 그보다 늘 더 크다.
손님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는 꿈
그의 고향은 일본 도호쿠 지방에 자리한 이와테현(岩手県 Iwate-ken)이다. 지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도 일찌감치 대도시에서의 삶을 꿈꿨다. 이왕이면 ‘멋’을 삶의 중심에 두고 싶었고, 만 18세에 도쿄 하라주쿠의 한 미용학교에 입학해 꿈을 향해 출발했다. 그 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는 동안 이자카야 서빙, 콜센터 상담원, 옷 가게 판매원 등 10여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그 경험들이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지금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선배에게 물려 받아 17년 째 사용하고 있는 그의 가위
“일본에서도 아직 활동해요. 세 명의 유명 아티스트와 한 팀의 아이돌 그룹을 담당하고 있어서 요즘도 틈틈이 일본에 가요. 그래도 한국에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요. 손님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는 게 꿈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국에서 계속 살게 될 것 같아요.”
그는 선배한테 물려받은 가위를 17년째 쓰고 있다. 모든 것들이 점점 빨라지는 시대에 오래된 가위를 손에 쥐고 오래가는 인연을 꿈꾸며 산다. 자기만의 속도를 지키는 그의 얼굴에 자기다운 행복이 흐르고 있다.
Lifestyle
2024 AUTUMN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지속 가능한 일상을 만드는 동구밭
소비자는 현명하다. 샴푸 하나도 성분, 가격, 제형 등을 까다롭게 따져보고 구매한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는지, 동물실험에 반대하는지 등 회사의 철학에 관한 기준도 명확하다. 동구밭((株)打勾吧, DONGGUBAT Inc)은 소비자의 깐깐한 기준을 충족하는 기업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도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장애인, 비장애인과 함께 지속 가능한 일상을 제안하는 기업, 동구밭을 소개한다.
동구밭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지속가능한 일상을 만들어 간다. 특히 발달장애인 근속년수 해결이라는 미션을 가지고, 매출이 늘어날 때마다 회사는 발달장애 사원을 추가로 고용하고 있다. ⓒ Donggubat Inc.
시골 마을 입구를 떠올려 보라. 야트막한 언덕 위 커다란 나무, 옆으로 펼쳐진 논과 밭, 구불구불한 오솔길. 따뜻하고 정겨운 이미지의 공간이 그려질 것이다. 한국에서는 동네로 들어가는 어귀를 ‘동구(洞口)’, 그곳에 자리해 사람들을 맞이하는 밭을 ‘동구밭’이라고 부른다.
이름처럼 동구밭은 사람들, 특히 발달장애인에게 포근한 자리가 되어주고자 만들어진 회사다.
동구밭에서는 장애인의 꿈이 자란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이 발표한 「2023년 하반기 장애인경제활동실태조사」에서 6대 장애유형별 경제활동상태를 분석한 결과를 살펴보면, 시각장애인 고용률이 43.3%로 가장 높고, 지체장애인(43.0%), 청각장애인(27.3%), 발달장애인(26.2%), 기타장애인(23.0%), 뇌병변장애인(12.2%)순으로 이어졌다. 장애인 취업자의 현재 직장(일자리) 근속기간도 전체 평균이 11년인 것과 비교해 발달장애인의 평균 근속기간은 4년 10개월로 짧았다. 언어, 인지, 운동, 사회성 등의 지연 및 이상을 보이는 발달장애인은 사회활동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들이 사회에 적응하고 경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사회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발달장애인이 직접 일해 수익을 내게 할 순 없을까?” 사업 초기 동구밭은 고민 끝에 비누를 만들기로 했다. 비누는 제조법이 간단하고, 적은 생산 비용과 인원만으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행히 시장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발달장애인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편, 친환경, 비건 등 소비자의 요구에 맞춰 고품질의 제품을 선보인 덕분이었다.
회사가 성장할수록 고용할 수 있는 장애인 수도 늘었다. 2024년 4월 기준 동구밭 임직원 수 130여 명, 발달장애인 직원 수는 50여 명에 이른다. 발달장애인 직원은 동구밭 자체 직무 역량 개발 프로그램을 거친 뒤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공장에서 제조, 배송 업무 등을 수행한다. 땅값이 비싼 도심에 공장을 둔다는 것은 회사 입장에서 분명 손해가 나는 일이다. 하지만 발달장애인 직원이 원활하게 출퇴근할 수 있도록 동구밭은 기꺼이 손해를 감수한다.
동구밭에 없는 세 가지
동구밭은 발달장애인을 고용하기 위해 태어난 회사다. 하지만 장애인 고용을 방패로 삼지 않는다. 즉 동구밭에는 핑계가 없다. “장애인이 만들었으니 부족해도 이해해 달라”라고 선의에 기대는 것이 아닌, 당당히 제품력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박상재(朴祥宰, Park Sangjae) 공동 대표는 이것이 “회사가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말한다.
“장애인과 오래 함께할 수 있으려면, 회사가 자체적으로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비자가 좋아서 다시 찾는 브랜드를 만들어야 했죠.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임상’이었습니다. 사실 설립 초기에는 비누 제작에 있어 전문가라고 할 만한 인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한계를 두지 않고 마음껏 연구‧개발할 수 있었어요. 전국 각지의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노하우를 전수받고요. ‘지구와 사람에게 해롭지 않아야 한다’라는 가이드라인만 엄격하게 두고 최적의 원료와 배합 방법을 찾기 위해 직접 부딪쳤습니다. 동구밭 샴푸바의 유사 제품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이러한 진심과 노력이 있었기에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동구밭은 동물성 원료를 사용하지 않고, 동물 실험도 하지 않는다. 대신 옥수수, 아보카도, 레몬, 케일, 가지, 다시마 등 식물 유래 성분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전성분과 원료 배합에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한 덕분에 동구밭의 생산공장은 프랑스 이브 비건(EVE Vegan®) 인증과 환경경영시스템 인증(ISO 14001)을 받았다. 천연 원료만을 고집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인체 안전성을 인증받은 성분인지를 먼저 꼼꼼히 따져 소비자의 건강과 안전을 지킨다. 저온 숙성 공법(Cold Press, CP)도 차별점이다. 해당 공법을 적용하면, 재료의 좋은 성분이 열에 파괴되지 않는 반면 보습력은 강해진다.
유기농 녹차를 함유한 비건 설거지바 ⓒ Donggubat Inc.
마지막으로 동구밭은 플라스틱 프리를 실천한다. 동구밭은 액체, 가루 등의 제품군 포장재를 제외하고는 성분, 패키지, 완충재 등에 플라스틱 사용을 배제한다. 대신 제품은 비접착 재생 용지 패키지에 담아 판매한다. 동구밭 제품 1개를 사용했을 때 줄일 수 있는 플라스틱 배출량은 16.2g. 현재까지 누적 판매한 제품 수를 대입해 계산하면, 총 381,251㎏의 플라스틱 배출을 막은 셈이다.
소비자는 이러한 동구밭의 제품을 신뢰하고, 회사를 지지한다. 동구밭은 현재 샴푸바, 린스바, 세안비누, 거품 입욕제, 설거지 비누 등 월 50만 개의 제품을 제조 및 판매‧납품하고 있다. 많은 회사가 협업을 제안하면서, 주문자위탁생산(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OEM)과 제조업자개발생산(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 ODM) 방식으로도 다양한 제품을 생산한다. 동구밭의 성장은 기업에 다음의 메시지를 남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일회용 여행용품을 대신하는 플라스틱 프리 고체 여행용 키트. 샴푸바, 린스바, 바디&페이셜바로 구성되어 있다. ⓒ Donggubat Inc.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지속 가능한 일상을 위한 노력
동구밭은 회사 밖에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 동구밭은 2021년 10월 서울 강동구 암사동 광나루한강공원에 400그루의 나무를, 이듬해 11월에는 산불 피해 지역인 강원도 강릉시에 1,250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2022년과 2023년 6월에는 산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피해목으로 인센스 홀더를 제작해 보급하기도 했다.
장애인의 날과 장애인 직업 재활의 날에도 캠페인을 진행한다. 지난 4월에는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 화장실 이용 인식개선을 위한 ‘모두의 화장실’ 캠페인을 전개했다. 캠페인 기간 내 특정 제품 매출의 1%를 기부하고, 서울시와 함께 수리가 필요한 공공 장애인 화장실을 개‧보수하기로 한 것이다. 이외에도 연중 많은 기업과 지속 가능 발전(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 ESG) 관련 협업을 기획‧진행하고, 사회복지단체에 물품 기부도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구밭은 직원의 50% 이상을 발달장애인으로 고용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더불어 발달장애인 고용 문제에 관심을 두고, 해결에 동참하는 회사가 더 많아지도록 본보기가 되고자 노력한다. 이를 위해 일반 회사에서 직원 능력을 발굴하고 적재적소에 투입하듯 동구밭은 발달장애인이 어떤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검토 및 연구하고, 그들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박상재 공동대표는 “발달장애인 고용에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선 장애인 직원만을 무조건 배려하거나 비장애인 직원을 역차별해선 안 된다. 강요가 아닌 설득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한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없는 브랜드 동구밭의 비누바를 만드는 모습. ⓒ Donggubat Inc.
“동구밭이 사회에 큰 변화를 이끌었다고는 아직 생각하지 않습니다. 갈 길이 멀죠. 다만 화장품, 생활용품 패키지나 기업 대표 명함에 점자가 인쇄되기 시작한 것을 두고 업계 사람들은 ‘동구밭 덕분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뿌듯합니다. 앞으로도 동구밭은 더 많은 발달장애인을 고용하고, 그들이 일할 수 있는 가능성과 사회의 관심을 키울 것입니다.”
스스로를 ‘마을 어귀’라고 칭했듯 동구밭의 노력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지속 가능한 일상을 만드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인간과 동물, 환경 등. 드넓은 동구밭 안에서 수많은 가치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날을 그려본다.
Lifestyle
2024 SUMMER
동네 사랑방이 되어가는 약국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 그늘처럼 아무 때나 잠시 쉬어가거나 이웃끼리 마음을 나누는 장소를 일컬어 한국인들은 ‘동네 사랑방’이라고 표현한다. 동네 사랑방은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오가며 안부를 묻고 정을 쌓아가기 때문이다. 정초롱(丁초롱 Jeong Cho-rong) 약사가 고향 영월에 차린 그녀의 약국은 도시화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영월에서 작은 약국을 운영하는 정초롱 약사. 그녀의 약국은 약을 구입하려는 손님뿐만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할머니,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 짐을 맡겨놓는 사람들도 오가며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다.
그녀의 하루는 단순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매우 바쁘다. 휴일인 주말을 제외하면 아침 9시에 출근해서 퇴근하는 오후 6시까지 약국에서 손님들을 만난다. 조금 한가할 때면 틈틈이 피로회복제 같은 상품 스티커나 약국에 붙일 포스터 디자인 작업을 한다.
오며 가며 쉬어가는 곳
약국 안에서 늘 정신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기 일쑤지만 그녀는 안에 있어도 사계절을 오롯이 느낀다. 약국 안 커다란 통유리 바깥으로 나무들이 철마다 옷을 갈아입기 때문이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건 자연만이 아니다. 이 약국에는 잠시 짐을 맡기고 가는 고객들이 꽤 있다. 근처 시장이며 마트에서 장 본 것을 이곳에 둔 뒤 병원, 은행, 군청 등에서 볼일을 보고 오는 단골손님들이다. 그들이 맡겨 둔 장바구니 안에는 지금의 계절을 알 수 있는 채소며 과일이 들어있다.
“이것 좀 맡아달라고 말씀하실 때 어머님들 표정이 참 귀여우세요. 이 공간을 편하게 생각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한 마음이에요. 제가 꿈꿨던 모습이거든요.”
약국에는 손님들을 위한 휴식 테이블이 있다. 간식도 비치되어 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쌍화탕(雙和湯 피로 해소와 감기 완화에 좋은 한방 드링크제)과 약과(藥果 한국의 전통 과자), 비타민이나 자일리톨이 함유된 캔디 같은 것들이다.
약이 나올 때까지 잠시 앉아 기다리는 테이블이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손님들도 많다.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를 기다리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갈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亭子나무, 집 근처에 있는 큰 나무) 그늘처럼, 손님들이 아무 때나 쉬어가며 오가는 이들과 마음을 나눈다. 약사세요 악국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동네 ‘사랑방(舍廊房)’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복약 상담
“단골손님이 대부분이라 방문하시는 손님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 건강도 상담하기도 해요. 되도록 자세하게 설명해 드려서, 우리 약국을 이용하는 분과 그 가족이 좀 더 건강한 삶을 사시도록 돕고 싶어요.”
한국에선 약국과 약사의 역할이 크다.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약국에서 약사의 설명을 듣고 약을 구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병원이나 의원이 많지 않은 시골에선 당장 병원을 가야 할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약국의 역할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숙취 해소, 피로회복제 등 증상에 따라 필요한 약을 묶은 패키지에 직접 디자인한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정초롱 약사.
특히 이곳 영월군(寧越郡)에는 젊은이들보다 노인 인구가 많아 약사의 복약지도도 아주 중요하다. 정초롱 약사는 그 임무에 충실한 약사다. 평소 어떤 불편을 겪는지, 어떤 음식을 즐겨 먹고 어떤 약들을 복용 중인지 꼼꼼히 묻고 답한다. 손님이 잘못 알아들을까 봐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일이 그녀에겐 전혀 번거롭지 않다. 정확한 상담으로 환자의 건강 상태가 좋아질 때마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잊지 못할 일들이 많아요. 어느 날은 모자를 쓰고 오신 중년 여성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분이 항암 치료 중인 걸 알게 됐어요. 잘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를 드리고 싶어 손을 꼭 잡아 드렸는데 왈칵 눈물이 나더라고요. 당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곤 손을 잡아 드리는 것이 전부였는데도, 그분이 정말 고마워하셨던 기억이 나요. 지금은 완치하셔서 건강한 모습으로 약국을 찾아오시고 있어요. 뵐 때마다 애틋해요.”
치매 관련 영양제를 사러 왔던 중년의 여성분도 기억에 남는다. 약을 추천하기 위해 그녀가 이런저런 질문을 건넸더니, 손님의 어머니가 치매를 앓아 곧 요양원에 가신다고 했다. 그날도 그 손님과 같이 울었다. 건넬 수 있는 위로의 말이 없어 마음 아팠지만, 속상한 마음을 나누며 함께 울고 난 뒤 손님이 보여준 미소가 여태 기억에 남아 있다.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병을 치료할 순 없지만, 상대방이 다시 힘낼 수 있는 마음을 건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가 경청과 공감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이유다.
고향에서 누리는 행복
영월군은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이다. 강원도 남부에 자리한 작은 도시로 산과 계곡, 강과 호수가 수려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 눈부신 땅에서 그는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도시의 약학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다가, 2019년 4월 이곳에 약국 문을 열면서 다시 왔다.
“대학 졸업 후엔 도시의 약국에서 근무 약사로 2년 반 정도 일했어요. 처방전을 받아 약을 짓는 게 주된 업무였는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밀려드는 처방전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손님들께 약에 대한 설명조차 제대로 해드리지 못했거든요. 어느 날 문득 기계처럼 약을 짓는 것 말고 약 하나를 드리더라도 손님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만의 약국을 열기로 결심한 거죠.”
처음엔 일하고 있던 충주시(忠州市)에 약국을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땅한 자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고심이 깊어 가던 어느 날 영월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30년 넘게 옷 가게였던 지금의 약국 자리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시골 약사로 지내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먹었다. 따뜻하게 소통하는 약국을 만들기에 고향처럼 적합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어느 집 딸인지 잘 아는 손님들은 자식 같고 조카 같은 그녀를 진심으로 반겼다.
“개업한 뒤 1년이 채 안 돼 코로나19로 난리였어요. 마스크 대란이나 진통제 품절 같은 일들을 차례로 겪으며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손님들과 함께 견뎌내면서 더 단단한 유대감이 생긴 것 같아요.”
일상으로 돌아온 요즘, 지난 몇 년과는 다르게 약국에서도 잘 팔리는 약이 달라졌다. 전에는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 주로 팔렸다면, 요즘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약의 판매가 크게 늘었다. 면역력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커진 것이다.
그는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건강정보를 기억하고 고객별로 기록도 해둔다. 아는 만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옆집의 수저 개수도 안다’는 우리의 옛말처럼,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웃들의 정보가 쌓여간다.
웃음이 또 하나의 치료제가 되다
약사세요 약국에는 익살스러운 풍경이 곳곳에 있다. 뇌, 눈, 간, 위 등의 장기가 그려진 캐릭터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 캐릭터는 도시에서 근무 약사로 일할 때 SNS(www.instagram.com/yaksaseyo_pharmacy)에 재미 삼아 연재하기 시작한 웹툰 속 주인공이다. 손님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방법을 고민하다, 단발머리 시절의 본인 모습을 캐릭터로 만들어 몸속 장기와 해당 약품을 벽면에 부착했다. 직접 디자인한 스티커도 퍽 재치 있다. 숙취해소제나 피로해소제 등에 손수 그린 캐릭터 스티커를 붙여 판매하니 손님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
그녀는 직접 만든 캐릭터로 SNS에 웹툰을 연재하고 있다. 약국을 열게 된 이야기부터 약국 손님 유형, 약의 사용법 등 다양한 스토리가 있다. © yaksaseyo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영월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에 만화를 연재하고 있어요. 약국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만화에 담고 있죠. 독자들이 제 만화를 보며 잠시라도 웃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손님들과 따뜻한 마음과 공간을 나누고, 그녀를 닮은 캐릭터로 위트를 전하며, 복약상담으로 건강을 책임진 그녀가 약국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 낮에 틈틈이 구상한 디자인 작업과 만화 작업 마무리를 하다 보면 어느새 영월의 하늘이 별빛으로 가득 차 그녀의 밤을 예쁘게 물들인다.
Lifestyle
2024 SUMMER
조화로운 도시 전주
한국인에게 가장 전통이 잘 보존된 도시가 어디냐 물어본다면 전북 전주(全州)라 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특유의 목조건물인 한옥(韓屋)이 유독 많은 도시가 전주다. 하지만 전주는 과거 전통에만 안주하는 도시가 아니다. 잘 보존한 과거 위에 다양한 문화와 혁신을 고루 섞어 비빔밥처럼 잘 비벼진 조화로운 도시다.
ⓒ 셔터스톡
전주한옥마을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곳 중 하난 오목대(梧木臺)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평평한 대지 위에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전주한옥마을을 한눈에 조망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아니 유일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약 30만 제곱미터에 무려 700채가 넘는 한옥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전주가 국내 최대 규모의 전통 한옥마을로 손꼽히는 까닭이다. 촘촘히 박혀 있는 기와지붕들은 마치 검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조선왕조의 시작
오목대가 전망대 구실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정자 안에 들어가면 현판들이 걸려 있는데, 그 중< 대풍가(大風歌) >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다.
大風起兮雲飛揚 큰바람 일자 구름이 흩날리네.
威加海內兮歸故鄉 온 천하에 위풍을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노라.
安得猛士兮守四方 어떻게 용사를 구해 천하를 지키랴!
오목대 < 대풍가 >의 주인공은 1392년 조선(朝鮮)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재위 1392∼1398)다. 고려(高麗) 말 장수였던 그가 왜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상경하는 길에 전주에 들러 불렀다는 것이다. 훗날 사람들이 이성계가 전주 오목대에 이르러 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새로 세울 조짐을 드러냈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즉 조선왕조의 시작점이 전주였다는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은 서울 북촌한옥마을과 함께 대표적인 한옥보존지구이다. 오목대에서 한옥마을을내려다보면 빼곡한 기와지붕이 마치 검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모습이다.
조선왕조와 전주의 연결고리는 오목대만이 아니다. 한옥마을 남쪽 끝에는 경기전(慶基殿)이 있다. 이때 경기는 경사스러운(慶) 터전(基)이라는 뜻으로, ‘조선왕조가 시작된 곳’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조선 개국 직후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 재위 1400∼1418)이 전주이씨(全州李氏) 가문의 본향(本鄕)인 전주를 비롯해 평양(平壤)과 개성(開城), 경주(慶州), 영흥(永興) 등 주요 도시에 아버지의 어진(御眞)을 모시는 건물을 지었다. 그중 전주에 세운 것이 경기전이다.
한복을 입고 경기전(慶基殿)을 산책 관람 중인 시민들. 경기전은 경기는 경사스러운(慶) 터전(基)이라는 뜻으로, 조선 왕조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기념 장소 역할을 했다.
공간은 크게 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正殿)은 태조의 어진을 모셨던 곳으로, 경기전의 중심 영역이다. 현재 정전에 있는 어진은 모사본(模寫本)이고, 원본(原本)은 정전 뒤 어진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정전 북쪽에 있는 조경묘(肇慶廟)는 태조의 22대조이자 가문의 시조인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하려고 지은 건물이다. 그리고 그사이에 사고(史庫)가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라는, 조선 건국 이래 자그마치 472년 동안의 역사를 매일 같이 수록한 책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 중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에 걸쳐 작성된 기록물로서, 왕조 시절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세계 유일 사례다. 대한민국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언뜻 비장해 보이는 공간이지만, ‘하마비(下馬碑)’와 ‘드므(순우리말. ‘頭毛’라 음차하기도 한다)’에서는 옛사람들의 위트가 엿보인다. 하마비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기서부터는 하마, 즉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라’라는 뜻에서 세운 비다. 경기전 정문 앞에 놓여 있는데, 비를 받치고 있는 두 마리의 사자(獅子) 또는 해치(獬豸) 모습에서 엄숙함보다 조선 석물 특유의 익살스러움이 묻어난다. 정전 뜰에 놓여있는 6개의 드므는 방화수를 담아뒀던 수조들이다. 행여 화마(火魔)가 건물 가까이 오더라도 물 표면에 반사된 자신의 흉측함에 놀라 도망가길 원하는 바람이 녹아 있다.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는 하마비 (下馬碑).
뿐만 아니라 500년에 가까운 조선왕조 내내 지금의 전북과 전남, 그리고 제주도 일대를 총괄하던 행정 관청이었던 전라감영(全羅監營), 전주부성(全州府城) 시설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풍남문(豐南門) 등은 오목대와 경기전, 그리고 한옥마을과 함께 전주의 역사와 전통, 나아가 위상을 상징하는 문화유산들이다.
전통 속에 녹아있는 교류의 자취
전주에 오로지 수백 년 전의 옛것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포용력을 바탕으로 하는 변화의 증거들도 적지 않다.
경기전 바로 맞은편에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는 건물이 우뚝 서있다. 전동성당(殿洞聖堂)이다. 한반도 최초의 순교(殉敎) 현장에 들어선 성당으로, 지난 1914년 완공되었다. 그런데 이 건물을 지은 주요 인부들은 조선인 혹은 한국인이 아니었다. 『전동성당 100년사』에 따르면, 성당 건축을 위해 중국인 목수 5명과 석공 100여 명이 가마를 설치해 65만 장의 벽돌을 찍어냈다고 한다. 그들을 이끈 인물은 강의관(姜義寬)이라는 이였는데, 쌍흥호(雙興號)라는 건축회사를 운영하며 다양한 천주교 관련 건물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라고 하면 으레 조선왕조와 전통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곤 하지만, 알고 보면 오랜 교류의 자취도 숨어있다.
1914년 준공된 전주 전동성당(全州 殿洞聖堂)/ 로마네스크 양식이 돋보이는 건물로, 초기 천주교 성당중에서 그 규모가 크고 외관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전주 하면 중국과의 교류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인들이 전주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의 일이다. 1899년 전주에서 약 5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군산(群山)이 개항(開港)되며 ‘쿨리(苦力)’라 불렀던 인부를 비롯해 상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눈에 군산보다 상업과 문화, 행정 등 여러 방면에서 상위 도시였던 전주가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점차 정착하는 이들이 많아졌고, 그들은 지금의 다가동(多佳洞) 차이나 거리를 중심으로 화교(華僑) 공동체를 일구어 나갔다.
당시 화교들 중에는 해운업이나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60%에 달하는 이들은 요식업과 주단포목(紬緞布木)을 거래하는 상업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전통의 도시에 화교의 유입에 따른 문화적 접변(接變)은 특히 요식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화요리(中華料理)’라는 전에 없던 음식들이 한반도에 전래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화요리는 새 정착지의 식재료를 이용해 현지화되고, 이내 현지인의 입맛을 사로잡아 대중화의 길을 걷는 특성이 있다. 소스인 춘장(春醬)만 중국에서 왔을 뿐 지금은 한국식 중화요리의 대표주자가 된 ‘짜장면’이 대표적인 경우다. 전주 화교는 그 짜장면에 또 한 번 혁신을 가했다. ‘물짜장’이라는 새로운 음식으로 변주해 낸 것이다.
물짜장에는 춘장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기름기 많은 짜장면을 부담스러워하는 한국 손님을 위해 춘장 대신 간장을 주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즉 간장 베이스에 전분을 넣어 걸쭉한 소스를 만든 뒤, 삶은 해물과 밀가루 면 위에 얹은 것이다. 원래의 짜장면과는 전혀 다르게 해물잡탕면에 가까운, 또 하나의 한국식 중화요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대히트를 친 물짜장은 멈춰 있지 않았다. 또다시 ‘순한맛’과 한국인이 좋아하는 ‘매운맛’으로 분화되어 갔다. 그러고는 이내 군산시(群山市)와 익산시(益山市), 완주군(完州郡) 등 인근 도시로도 번져나갔다. 전주에서는 전주화교소학교(全州華僑小學校) 교장이기도 한 화교 류영백(劉永伯) 씨가 운영하는 진미반점(真味飯店), 역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보장(大寶莊) 등이 물짜장 명맥을 잇고 있는 식당으로 정평이 나 있다.
사실 화교의 유입은 전주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식문화를 진일보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불고기나 갈비탕, 잡채, 심지어 순대에까지 들어가는 당면(唐麵) 등 다양한 식재료들이 화교들을 통해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 한국의 식재료와 요리법이 접목되면서 음식문화의 폭발적인 융성을 가져왔다.
그런 면에서 이제는 화교와 전주, 화교와 한국을 굳이 구분해 생각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문화에는 위아래도, 내 것 네 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문명이든 다른 문명을 다각적으로 받아들여 융합하는 과정에서 그간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며 발전을 도모해 왔을 뿐이다. 전주는 그와 같은 교류를 품어주는 품 너른 고장이었으며, 그런 교류의 결과가 곧 전주다.
혁신 끝에 탄생한 전주비빔밥
태초부터 당연한 것도 없었다. 비빔밥 역시 그러하다. 그중에서도 고급스러운 색과 맛, 그리고 고소한 풍미가 일품인 전주비빔밥을 궁중음식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전주비빔밥이 이토록 인기를 얻게 된 데에도 지치지 않는 혁신의 노력이 있었다.
전주 향토 음식인 전주비빔밥은 전주는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전주 비빔밥의 종류는 30여 가지로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현재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주비빔밥 식당은 1951년 문을 연 ‘한국집’이다. 다만 당시에는 비빔밥이 아니라 ‘한국떡집’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떡과 정과(正果)를 판매했다고 한다. 그 뒤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식사 메뉴로 떡국을 팔기 시작했다. 문제는 당시에는 떡국이 주로 겨울에만 먹는 음식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그때 떠올린 것이 사철 장사가 가능한 ‘뱅뱅돌이’였다.
뱅뱅돌이는 전주지역에서 비빔밥을 일컬었던 말로, 주걱이나 숟가락으로 뱅뱅 돌려가며 밥을 비비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이름이다. 당시 시장에서는 대형 그릇에 온갖 나물을 넣어 한꺼번에 비빈 뒤, 손님 주문에 따라 1인분씩 덜어주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전주 역사에 조예가 깊은 한학자 고(故) 조병희(趙炳喜 1910~2003) 씨는 1988년에 전주문화원이 발간한 『전주풍물기 (全州風物記)』라는 책에 실은‘1920년대 남밖장’이라는 글에서 뱅뱅돌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음식점에 들르게 되면 건장한 일꾼이 커다란 양푼을 손에 받쳐 들고 옥 쥔 숟가락 두어 개로 비빔밥을 비벼 대는데, 흥이 나면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빙빙 돌리던 양푼이 허공에 빙빙 돌다가 다시 손으로 받쳐 들고 비벼대는 솜씨는 남밖장만이 가지고 있는 정경이랄까?”
남밖장은 전주부성의 남문, 즉 풍남문 밖에 있는 시장을 가리키는 말로, 지금은 전주남문시장이라 불린다. 낮 시간대 시장도 인상적이지만 매일 밤 열리는 야시장 때문에라도 여행자들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아무튼 남밖장의 이런 뱅뱅돌이를 콩나물과 고사리, 애호박, 표고버섯 같은 채소에 쑥부쟁이와 꽃버섯 등의 계철 채소, 그리고 쇠고기 육회를 얹는 식으로 고급스럽게 재해석해 낸 것이 바로 한국집이었다.
현재 전주에 비빔밥 식당으로 한국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은행과 밤, 대추 등 영양식 재료를 넣은 비빔밥을 돌솥에 담아내는 하숙영 가마솥비빔밥(전 중앙회관), 밥을 미리 초벌 볶음을 해서 내는 성미당 등도 사랑을 받고 있다. 1950년대초 한국집이 비빔밥을 고급화한 이래 셀 수 없이 많은 비빔밥 식당이 자신만의 변주와 혁신을 이어가며 1960~1970년대부터 이미 ‘비빔밥 골목’을 형성하기 시작한 곳이 전주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전주 시민은 물론 전주를 찾는 거의 모든 여행자의 필수 방문지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심지어 2007년 이래 매년 가을이면 전주비빔밥축제도 열리고 있다.
지난 5월 영화의 거리를 비롯해 전주 곳곳에서 진행된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10일간 총 43개국 232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당연한 풍경 너머의 새로운 발견
전주에 가면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5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여러 모순을 극복하며 지탱해 온 조선왕조의 기반에서부터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해 더욱 풍성한 문화를 살찌워온 역사, 그리고 전통에 기반을 두되 한순간도 안주하지 않고 변주에 변주,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며 발전해 온 한국 사회의 저변을 만날 수 있다.
2010년 인구 50만 이상의 대도시 가운데 세계 최초로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된 연유, 2012년 세계에서 4번째로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로 선정된 비밀도 바로 거기에 숨어 있다. 다시 말하건대 전주는 역사와 전통을 단순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성을 바탕으로 발전적으로 ‘계승’해야 하는 이유를 일깨워주는 여행지이다.
모든 사진 © 한국관광공사
Lifestyle
2024 SUMMER
한국 재료로 즐기는 파인 다이닝
셰프인 조셉 리저우드는 한국의 식재료를 사랑한다. 여러 상을 받은 그의 레스토랑은 한식 메뉴의 가능성을 재정의하며, 기억에 남는 경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식의 매력에 빠져 한국에 정착한 뒤 퓨전 한식 레스토랑 에빗을 운영 중인 조셉 리저우드(Joseph Lidgerwood). 그는 전국 각지를 돌며 재료를 채집하고, 새로운 식재료를 탐색하는 일에 진심이다.
14개월 가까이 안정적인 수입이나 일상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 조셉 리저우드는 제주도 해변에 앉아 있었다. 산소통도 없이 해산물을 채취하는 제주 해녀들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제가 해녀에게 질문을 할 때마다 그녀는 제 입에 성게를 넣어 주셨어요. 그래서 그냥 거기에 앉아 먹기만 했죠. 해녀들이 물질을 끝내고 잠수복을 입은 채로 스쿠터에 올라타 휑하고 가버리는 장면은 제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라며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호주 태즈매니아 섬에서 자란 리저우드는 집 안의 냉동실을 가득 채울 만큼 해산물을 잡을 수 있는 곳에서의 가족 여행을 즐겼다. 그렇지만 냉동실을 가득 채운 해산물과는 달리 그가 평소에 주로 먹는 음식은 고기와 삶은 야채 그리고 으깬 감자였다. “외식은 약 5~6달러를 내고 펍(Pub) 음식을 먹는 것이었고, 그것이 그 당시 저에게는 최고의 ‘파인 다이닝 경험’이었어요.”
햄버거 뒤집기부터 시작해 실력 있는 셰프가 되기까지
리저우드가 십대가 되었을 때, 그는 어머니를 도와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호주 정부에서는청소년들에게 진로 결정을 위한 교류 프로그램을 장려했는데, 그는 여느 친구들처럼 전기기사나 정비사가 되는 것보다 요리사가 되는 것이 멋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첫 직장은 강가에 있는 도시 프랭클린의 고급 카페였고, 그곳에서 햄버거를 굽는 일을했다. 그 후 그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일했다. 주로 ‘중간에 블루치즈가 들어간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전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직장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스테이크하우스의 셰프 중 한 명이 당시 막 영국에서 돌아왔는데 그에게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은 “지옥 같았지만 보람 있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리저우드가 영국으로 갈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런던에서 그의 첫 직장은 프랑스 요리를 다루는 곳이었고, 그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 필립 하워드가 공동 소유한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더스퀘어(The Square)에서의 일이 포함되었다. 그 다음에는 하워드가 공동으로 소유한 또 다른 런던의 아이콘인 레드버리(Ledbury) 레스토랑에서도 일했다.
“그 레스토랑의 주방 일은 완전 미쳤어요. 네 시간 자고 일하는 데 적응하느라 오래 걸렸어요. 어떤 사람들은 한달 만에 그만두기도 했어요. 그냥 레스토랑을 떠나는 게 아니라 아예 요리하는 걸 그만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36세인 리저우드는 여전히 당시 레스토랑에서의 경험이 그의 열정, 헌신, 집중력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엄청난 경험이긴 했지만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죠. 그때 사용한 레시피 중 어떤 것도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요. 다만 당시 배운 것 중 여전히 유효한 것은 어떻게 나의 하루를 더 잘 관리하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깨끗하고, 체계적이고, 빠르고, 정확하게 일하는 실력 있는 셰프가 될 것인가 하는 거죠.”
원스타 하우스 파티
2016년, 리저우드는 색다른 프라이빗 다이닝 서비스 론칭 계획을 하고 있는 친구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며 팝업 다이닝 경험을 제공하는 ‘원스타 하우스 파티(One Star House Party)’를 만들었다. 비교적 간단한 요리, 보통 서너 가지의 요리만 제공했으며, 미식계의 최상층을 목표로 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이들만의 방식은 빠르게 열렬한 팬들 만들어냈다. 이벤트가 매번 매진될 정도였다. 이들이 시도한 독특한 지역 중에는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손님이 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승객들이 이층침대에서 네 가지 코스 요리를 먹었던 베트남의 야간열차도 있었다.
한국의 첫 방문
서울에서 열릴 원스타 하우스 파티를 앞두고 그는 제주도를 방문했다. 이는 그가 경험한 첫 한국이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해녀들과 함께 조개를 채취하고 싶었지만, 해녀들은 경험 없는 그들을 데려가면 작업이 느려질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래서 리저우드는 결국 해변에 앉아 곧 다가오는 다이닝 이벤트를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그가 해녀들의 생활이나 한국 식재료에 관해 물어보려 할 때마다 해녀들은 그의 입에 성게를 넣어주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저우드는 서울의 원스타 하우스 파티를 마치고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서울 행사에 참석했던 한 고객이 서울에 새로 지은 자신의 건물에 공간을 제공하겠다고 연락해왔다. 2019년에 아내 지니의 지지를 받아 리저우드는 레스토랑 에빗(EVETT)을 열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대부분은 푸아그라와 캐비어 같은 고급 재료에 의존하던 시기였는데, 에빗은 약간 색다른 것을 제시했다. 호주 출신 셰프가 한국 식재료를 중심으로 만든 메뉴를 선보인 것이었다.
한국 사람조차 잘 몰랐던 한국 식재료에 대한 탐구와 발효를 접목한 요리로 에빗은 오픈1년 만에 미쉐린 가이드 1스타에 이름을 올렸다.
“저희 요리는 퓨전이 아닙니다. ‘혁신적인 한국 요리’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놀라운 지역의 식재료의 가치입니다. 그 식재료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라고 그는 설명한다.
리저우드 셰프는 한국 음식 중 발효의 역할에 경의를 표한다. 또 그는 정기적으로 즐기는 채집활동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이 채집활동을 ‘산에서 훔치기’라고 표현한다.
그는 한국 고유의 식재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며 좀 더 자세히 말했다. “재료가 사용되는 방식이나 음식이 요리되는 방식, 그리고 층층이 쌓이는 맛을 경험하는 것, 바로 이곳 한국에서만 가능하죠. 모든 것이 너무나 역동적이에요. 그리고 사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할 수 없어요. 간장게장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호주에서 식품법상으로 가능하지 않아요. 막걸리 역시 다른 곳에서 만들어지기 어렵죠. 미생물들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어서 프랜차이즈를 내거나 과도하게 위생적으로 만들면 그 마법이 사라져 버려요. 기술적으로는 한국 음식일지 모르지만, 진짜 한국 음식은 아니게 되는 거죠.”
리저우드의 최근 요리 중에는 모과 동치미가 있는데, 일종의 물김치인 이 메뉴를 만들기 위해 그는 멍게, 제주 감귤, 염소젖, 그리고 당귀 뿌리를 사용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맛의 조합 중 하나라고 말한다.
가족 같은 에빗
에빗에는 9개의 테이블이 있고 한 번에 약 25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다. 메뉴는 코스요리로만 제공되는데, 리저우드는 “몇 가지 시그너처 요리를 더해 완성도를 높였다”라고 설명한다. 레스토랑에서는 15명의 셰프가 테이블에서 요리에 대해 직접 설명하고 마무리한다. 리저우드는 복잡하고 정교하게 정제된 음식은 그의 팀이 끊임없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최고의 메뉴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쓴 결과를 보여준다고 믿는다.
그는 외국인이 한국 음식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웠지만, 오픈 이후 그의 레스토랑은 음식비평가와 고객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이 우리가 한국의 식재료를 사랑하는 것을 아주 좋게 봤다는 것이었어요. 큰 동기부여가 되었죠. 저희 음식이 항상 멋지거나 놀랍지는 않지만, 고객들이 음식의 진가를 알아주죠.”
2020년 미쉐린 1스타를 비롯해 여러 가지 상과 찬사를 받은 레스토랑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한국의 파인 다이닝 요리 현장의 절정에 있다. 레스토랑을 리모델링하고, 최근에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으로 이전했는데. 올해 미쉐린 2스타를 받지 못한 것엔 실망했지만, 그는 레스토랑의 성공이 미슐랭 평가에 달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스토랑의 현 상태와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합니다. 멋진 고객들을 모시고 있으며, 그들은 저희 음식을 정말 좋아합니다. 또 저는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식재료를 발견하고요.”
그의 수준 높은 한국 요리를 칭찬하는 긍정적인 리뷰가 넘쳐나지만, 가장 의미 있는 건 비평가들의 절제된 평가이다. 한 평론가는 에빗에서 식사하는 것이 가족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캐러맬라이즈 된 크림을 가득 채운 후 흑마늘 멸치와 수수떡을 올린 메주 도넛이다. 한국 발효의 핵심인 메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요리로, EVETT의 요리를 대표하는 디쉬가 되었다. © 에빗
특별한 경험
10코스 이상의 메뉴와 전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한국의 술을 곁들여 제공하는 메뉴는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요리사들은 끊임없이 창작의 압박을 받는다. 어떻게 하면 고객에게 기억 남는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끊임없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모든 테이블의 고객들은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지만, 모든 고객이 각 요리와 그 재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리저우드 셰프는 고객들이 좋아하고 가치 있게 여길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각 테이블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가장 좋은 사례는 에빗에서 식사를 한 근처 치킨집 가게 주인 이야기일 것이다. 리저우드 셰프는 맥주 몇 병을 마시며 그에게 레스토랑의 철학을 설명했다. 치킨집 주인은 왜 호주 출신 셰프가 한국 식재료를 이용해 요리하길 원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후 치킨집 사장은 그의 아내와 에빗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음식이 “나쁘지 않네”라고 말했다. 리저우드에게 이 평가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 말은 제 마음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는 말이었어요. 저희가 한국의 식재료가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주기 위한 원동력이 되어주는 말이었죠.”
Lifestyle
2024 SUMMER
농업의 미래를 이끄는 만나 CEA(Manna CEA)
만나CEA는 기술로 농업의 미래를 이끈다. 환경제어시스템과 아쿠아포닉스 농법을 결합해 환경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농업의 불확실성을 보완하고, 나아가 기후위기로 인한 세계 식량 부족을 해결할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환경제어시스템과 아쿠아포닉스 농법 기술로 농업의 미래를 이끄는 만나 CEA의 전경 ⓒ MANNA CEA
만나CEA 전태병 대표는 충북 진천에서 40종의 작물을 재배하는 30대 젊은 농부다. 그러나 전 대표는 작물에 직접 물과 비료를 주지 않는다. 그가 귀농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제어시스템이 알아서 작물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또 농업용수 부족과 비룟값 인상, 인력 부족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농부인 동시에 공학자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로운 기술의 탄생
전태병 대표는 창업 전까지 농사를 지어본 적 없었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졸업을 앞두고 로스쿨 진학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 대표는 우연히 적정기술을 알게 되었다. 적정기술이란, 기술이 사용되는 공동체의 정치‧문화‧환경적 측면을 고려해 만들어진 기술을 말한다.
“적정기술에 대해 들었을 때, 평소 관심을 두었던 농업과 전공 분야인 시스템제어기술을 접목한다면, 세상에 이로운 기술이 탄생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기후 변화, 농촌 인구 고령화 등 농업 위기에 대한 우려가 계속되고 있었거든요. 재배 환경을 시스템으로 관리할 수 있다면, 농촌이 안고 있는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전 대표는 먼저 대학교 창업보육센터에 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유기농법 전문가, 환경제어기술 전문가 등을 만나 농사 환경에 맞는 제어시스템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센서를 통해 온실 속 온도, 습도, 빛, 이산화탄소의 양과 암모니아, 칼륨, pH 농도 등 식물에 필요한 다량원소와 미량원소를 디지털 데이터로 수집‧관리하는 시스템이다. 그는 시스템 개발에 성공한다면, 세계 어느 지역에서든 최적화된 생장 환경을 구현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회사 이름도 지었다. 만나 CEA의 ‘만나’는 성경에 나오는 단어로 ‘하늘에서 내린 음식’을 뜻하며, CEA는 환경제어농법(Controlled Environment Agriculture)의 약자다. 하늘에서 음식을 내려주듯 농업기술을 발전시켜 전 세계에 굶은 사람이 없게 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친환경 농업의 미래, 아쿠아포닉스 시스템
시스템 개발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특히 작물에 공급하는 유기물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화학비료를 사용하면 쉽지만, 그것은 만나 CEA가 지향하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기술’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던 중 전태병 대표는 아쿠아포닉스(Aquaponics) 농법을 알게 되었다. 아쿠아포닉스는 물고기 양식(Aquaculture)과 수경 재배(Hydroponics)를 결합한 합성어로, 물고기를 키우면서 식물을 재배할 수 있는 친환경 농법을 말한다.
아쿠아포닉스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물고기가 수조 안에서 자라며 배설한다. 이 배설물은 미생물 발효를 거쳐 식물에 필요한 영양분 형태로 공급한다. 영양분과 함께 공급한 물이 농장 바닥에 모이면, 이 물은 정수 필터를 거쳐 다시 수조 안으로 들어간다. 쉽게 말해, 작물 재배와 물고기 양식에 필요한 물을 계속 순환해 사용하는 것이다.
아쿠아포닉스 농법의 장점은 첫째, 물을 절약할 수 있다. 토양 재배의 경우 물을 뿌리면 그대로 땅에 스며들어 재사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아쿠아포닉스 시스템에서는 작물 재배와 물고기 양식에 사용한 물이 순환‧공급되기 때문에 물을 영구적으로 재사용할 수 있다. 실제로 만나 CEA는 2014년부터 10년간 농장을 운영하면서 물 한 방울 버린 적 없다. 또 자연 증발하는 만큼의 물만 추가하면 되기 때문에 일반 농가가 사용하는 물양의 5%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둘째, 유기농법이다. 일반적인 수경재배는 작물의 생육을 촉진하기 위해 화학비료를 사용한다. 그러나 만나 CEA에서는 농약과 합성 물질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물고기의 배설물에서 식물 배양액을 추출해 사용한다. 또 일반 수경재배 시 사용한 물은 화학비료가 녹아들어 재사용하기 어렵지만, 아쿠아포닉스 시스템에서는 물속 유기물 농도를 모니터링해 정화하여 재사용할 수 있다. 데이터 기반의 제어시스템으로 유기물 농도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만나 CEA에서 재배되고 있는 딸기.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에 대비하여 환경 및 생육 데이터를 기반으로 환경을 제어하고 에너지 효율적인 방식을 이용해 사계절 내내 딸기를 생산하고 있다. ⓒ MANNA CEA
소비자도 농부다
환경제어시스템과 아쿠아포닉스 시스템을 실제 농장 안에 구현할 계획을 세웠을 때, 전태병 대표는 충북 진천에서 유리온실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 연고도 없었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달려갔다. 젊은 농부의 새로운 꿈이 자라날 온실을 향해서 말이다.
만나 CEA의 제어시스템을 온실에 적용하자 작은 규모의 온실 속에서 많은 농산물이 생산됐다. 전태병 대표는 “이것이 만나 CEA가 제안하는 농법의 세 번째 장점”이라고 설명한다.
“만나 CEA에서는 기존 노지재배와 비교해 일반 작물은 120%, 특정 작물은 1,500% 이상 많은 양의 농산물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자연재해, 병충해 위험도 없고요. 배양액, 온‧습도 제어시스템과 광연시스템을 활용해 일정한 환경에서 작물을 재배하기 때문에 매년 일정한 생산량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아쿠아포닉스 농법으로 기른 물고기는 추가 수익원이 됩니다.”
누군가는 “그 많은 농산물을 어떻게 판매하느냐?”라고 물을 수도 있다. 소비자에게 신선한 농산물을 제공하기 위해 만나 CEA에서는 첫째, 체험농장을 운영한다. 일반 농가에서는 재배, 수확, 포장, 판매 등 과정에서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만나 CEA에서는 체험농장을 운영해 어린이들이 싱싱한 딸기를 직접 따먹도록 한다. 그럼 인력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체험농장 운영 수입을 추가로 얻을 수 있다.
둘째, 생산한 농산물을 샐러드로 만들어 친환경 패키지에 담아 판매한다. 만나 CEA 운영하는 뤁스퀘어에도 재료를 공급한다. 뤁스퀘어는 진천에 있는 미래 농업 복합문화공간으로 카페, 레스토랑 등 외식사업, 숙박업과 농업을 연결한 공간이다. 농업 교육도 이루어진다. 체험농장과 뤁스퀘어를 찾는 고객 수는 월평균 1만 명에 이른다.
팜스테이를 할 수 있는 숙박 시설을 비롯해 뤁스퀘어 내의 건축물들은 국제적인 건축 전람회 코리아 하우스 비전(Korea House Vision) 출품작이다. 하우스 비전은 집을 교통, 의료, 기술과 삶이 교차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담긴 플랫폼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미래 생활을 제안하는 프로젝트다. 2022년 한국 진천에서 열린 하우스 비전은 ‘농(農)’이라는 주제로 일본의 유명 디자이너인 하라 켄야(はらけんや, 原研哉, Hara Kenya)가 총괄하고 만나 CEA가 공동주최한 가운데 뤁스퀘어에서 열렸다. 농촌의 미래 주거 플랫폼을 우리는 여전히 뤁스퀘어에서 만날 수 있다.
농업과 문화가 연결되는 공간인 뤁스퀘어 실내 모습. 농업과 기술, 문화가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으로, 실내 정원, 카페, 체험농장, 스테이, 스마트 팜 등 미래의 농촌을 볼 수 있는 다채로운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 김동규
친환경 산업이자 엔지니어링 산업인 농업
전태병 대표는 만나 CEA를 ‘농업인을 위한 농업 관련 시설과 보조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는 회사’라고 정의한다. 농산물이 아니라, 미래 농업인을 위한 기술을 판매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뤁스퀘어에서 농촌의 미래 가능성을 발견하길 바란다.
“귀농하고 싶어도 경험이 없어서 또는 인력, 자본 문제 등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농사 경험과 인력의 부족 문제는 환경제어시스템을 통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 판로 개척이 어렵다면, 사람들을 농장으로 끌어들이면 되고요. 자본이 없다면 농업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들을 투자자로 모집해 공동으로 농장을 운영하고, 수익을 공유해도 됩니다. 생각을 바꾸면, 농촌 안에서도 얼마든지 문제점 대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가 만나 CEA를 통해 농업의 미래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만나CEA가 구축한 기술은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카자흐스탄 등에 수출되고 있다. 아시아 최초 미국 농무부(USDA)로부터 오가닉 인증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최초 식물 공장 건립을 완성하고 추가 수주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나 전태병 대표의 목표는 더 높은 곳에 있다.
“저의 목표는 만나 CEA를 최고의 솔루션 회사로 만들고, 농업을 친환경 산업이자 엔지니어링 산업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앞으로도 농촌 문제를 해결하고, 농업기술을 혁신하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연구하겠습니다.”
6,000년 전 농업혁명 발생 이래 인류는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제 만나 CEA로부터 새로운 혁명이 시작될 것이다. 모든 인류가 식량 걱정 없이 살게 되는 초록빛 혁명 말이다.
Lifestyle
2024 SPRING
보물이 된 누군가의 쓰레기
우리의 일상은 이미 플라스틱을 배제하고는 살아갈 수 없다. 져스트 프로젝트는 폐플라스틱, 비닐 등의 쓰레기를 편애하고 수집하며, 이를 소재로 일상의 물건을 만든다. 쓰레기가 ‘애물’에서 ‘보물’로 자리매김하는 그날까지 진지하게 연구하고 디자인한다.
리사이클 플라스틱으로 제작한 블록 세트. 4개의 피스가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장식품, 비누 등을 놓는 트레이나 티코스터 등으로 사용할 수 있다. ⓒ 져스트 프로젝트
지속적 팽창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를 연속시킨다. 이에 따라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가 만연해진 시대가 됐다. 생산과 유통, 소비와 폐기까지 이 모든 과정에는 탄소 배출이 수반된다. 기후 위기를 초래한 주요 원인으로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가 명백하게 지목된 이유다.
생산과 소비에 윤리적 관점 더하기
탄소 중립으로 향하기 위해 생산과 소비 과정에 윤리적 관점을 곁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생산 방식에 있어서는 버려지는 자원에 디자인을 더하거나 활용 방법을 바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는 업사이클 문화가 영향력 있는 움직임으로 자리 잡았다. 업사이클은 2002년 미국의 건축가 윌리엄 맥도너(William McDonough)와 독일의 화학자 미하엘 브라운 가르트(Michael Braungart)가 던진 화두다. 이들은 2003년 발간된 『요람에서 요람으로(cradle to cradle)』라는 책을 통해 생태계의 순환 과정을 제품 설계에 적용해 산업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쓸 만하고 유용한 소재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생을 마감하지 않고 새로운 제품으로 재탄생할 수 있도록 기술과 디자인으로 자원순환 아이디어를 모색하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한 편에서는 윤리적 생산이 이루어진다면 윤리적 소비가 수반되어야 한다. 져스트 프로젝트같은 브랜드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그 실천의 하나다.
리사이클 플라스틱으로 제작한 큐브형 홀더. 가운데 홈이 있어 명함, 사진, 인센스 스틱 등을 꽂아 사용할 수 있다. ⓒ 져스트 프로젝트
하고 싶은 일로 만드는 변화
자원순환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간추려 말하면 어떤 물건을 아껴 사용하고, 다시 사용하고, 재활용하는 방법이다. 이 모든 영역에서 활발하고 지속적인 실천이 이뤄져야 탄소중립에 유의미한 순환이 이뤄진다. 져스트 프로젝트는 올해로 12년 차인 기업으로 지속가능성에 대한 메시지를 꾸준히 전하고 있는 디자인 브랜드이다. 쓰레기를 소재와 자원으로 바라보고 수집하여 쓸모 있는 물건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그들의 주요 일이다. 이외에도 업사이클링에 관한 전시와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한다. 또한 매거진을 발행해 자원순환을 위한 생태계를 조망한다거나 다양한 워크숍을 통해 업사이클링 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힘쓴다. 져스트 프로젝트의 움직임이 눈에 띄는 이유는 이영연(李永緣, Yi Young-yeun) 대표가 정의하는 브랜드 방향성에 있다. 져스트 프로젝트를 환경 운동의 하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들에게는 영감을 주거나, 소비자의 기호와 취향에 따라 필요한 제품을 제안하는 디자인 브랜드로 정의한 것이다. 지구를 지키겠다는 거창한 의무나 의욕이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물건을 만드는 데 의미를 두는 것이다. 마치 ‘그냥(져스트)’이라는 이들의 이름처럼 말이다.
져스트 프로젝트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 쓰레기 > 는 쓰레기를 좋아하고 모으고 탐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잡지의 표지는 버려진 전단지나 인쇄물 등을 사용하여 같은 표지가 하나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 져스트 프로젝트
쓰레기의 변신
져스트 프로젝트가 선보이는 제품들은 어떤 쓰레기를 재활용해 만들었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그들이 디자인한 제품을 보면 어떤 쓰레기를 활용했는지가 제품명에서도 드러난다. ‘I was t-shirts’, ‘I was lavel’, ‘I was foil’, ‘I was straw’처럼 말이다. 버려진 티셔츠로 만든 러그, 버려진 라벨로 만든 가방, 버려진 과자봉지와 빨대로 만든 지갑과 파우치 등이다. 이들은 쓰레기가 영감의 소재이자 즐거움의 대상이라고 말할 정도로 쓰레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남다르다. 우리가 흔히 먹고 버리는 과자 봉지만 봐도 그렇다. 과자 봉지는 삼중지 이상으로 다른 플라스틱 소재가 접합되어 있어 재활용이 어렵다. 그러나 져스트 프로젝트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과자 봉지는 튼튼하고 방수 기능까지 겸비한 질 좋은 소재다. 버려진 과자 봉지를 활짝 펴고 기름기를 깨끗이 닦아낸 후, 다양한 크기와 용도로 만들어낸 파우치는 생각보다 탄탄하고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여러 종류의 과자 봉지로 만들어진 만큼 결과물 역시 모두 다른 모습, 하나하나 살펴보며 취향에 따라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과자 봉지로 만든 파우치가 ‘I was foil’이라면 ‘I was t-shirts’는 러그다. 한눈에 봐도 탄탄함이 느껴지는 이 멋스러운 러그는 헌 티셔츠를 길게 자르고 손베틀로 직조한 뒤 손수 바느질해 마무리했다. 여기에 사용되는 티셔츠를 고를 때는 면 티셔츠만 선별하기 때문에 완성된 제품 역시 세탁기에 돌려 쉽게 세탁할 수 있고, 소재의 특성상 각기 다른 패턴이 만들어져 유니크한 디자인으로 완성된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손베틀로 촘촘하게 원단을 엮는 제작 방식 덕분에 쓰레기로 만든 러그라는 사실을 차치할 정도로 예쁘고 퀄리티 또한 우수하다. 져스트 프로젝트에게 쓰레기는 자원이고 보물이자, 아이디어의 출발이라는 설명에 수긍이 간다.
플라스틱의 가능성
져스트 프로젝트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단단하게 성장해 온 비결은 비단 쓰레기를 이용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해온 것 때문만은 아니다. 다양한 브랜드와 기업, 사회공헌 팀과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져스트 프로젝트가 가진 역량을 필요한 곳에 적극적으로 발휘해 온 궤적에서 그 비결을 알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2022년 서울 디자인페스티벌에서 노플라스틱선데이와 함께 기획한 플라스틱 전시가 손꼽힌다. 노플라스틱선데이는 플라스틱 쓰레기의 지속가능한 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힘쓰는 브랜드다. 져스트 프로젝트는 기획으로 참여해 국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구/산업 디자이너를 집합시키고 재생 플라스틱을 주제로 각자의 디자인 언어를 반영한 가구를 만들도록 제안했다. 참여 디자이너는 저마다 익숙하게 사용하던 재료 대신 재생 플라스틱 판재를 이용해 아름답고 유용한 가구를 만들어냈다. 이 프로젝트는 참신한 디자인으로 재생 플라스틱에 대한 가능성을 활짝 연 이벤트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환경 기후 문제에서 늘 커다란 문제이자 화두로 다뤄진 폐플라스틱의 기능적이고 심미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다. 이외에도 NGO단체인 팀앤팀과 함께 만든 다이어리도 인상적이다. 다이어리 커버로 폐페트병을 100% 재활용한 리사이클 폴리에스터 소재를 사용하고 이후 파우치로도 재사용이 가능하도록 디자인한 것이 특징으로 제품의 탄생부터 폐기까지 생애주기를 고심한 결과다. 이렇게 만든 다이어리의 수익금은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동아프리카 주민들의 식수 자원을 위해 사용되어 더욱 뜻 깊은 프로젝트였다.
‘Plastics’는 져스트 프로젝트와 노플라스틱선데이가 기획한 프로젝트로, 2022년 10명의 아티스트와 함께 작업한 작품을 선보였다. ⓒ 져스트 프로젝트
좋은 물건의 재정의
날로 증가하는 어마어마한 쓰레기 문제는 환경 오염과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큰 화두라는 것뿐 아니라 생산과 소비 시스템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갖게 한다. 모두가 탄소중립이라는 공통된 지향점을 향해 방향을 바로잡고 물건을 기획하는 단계, 소재를 고르고 디자인하는 과정, 물건의 쓰임을 다한 후 폐기되는 모든 물건의 여정을 고려하는 것을 기본으로 다양한 시도와 실험이 이뤄져야 할 때다. 져스트 프로젝트는 지난 10여년 간 좋은 물건, 제안하고 싶은 디자인을 정의하고 ‘그냥’ 밀고 나가는 방식으로 행보를 꾸준히 이어왔다. 이들의 방식은 재활용, 업사이클 문화를 더욱 전달력 있게 제시하는 사례로도 인상 깊지만, 소비자들에게 좋은 브랜드의 기준을 다시 생각해 보게끔 한다.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한 예술가의 런치박스‘쓰레기 뷔페’. 품질이 고르지 못해 선택받지 못한 식재료로 만든 식사와 유리, 패브릭, 플라스틱 등 다양한 쓰레기를 취향과 기호대로 고를 수 있도록 한 프로그램이다. ⓒ 져스트 프로젝트
유다미(Yoo Da-mi 劉多美) 라이터
Lifestyle
2024 SPRING
수많은 작업이 집약된 푸드 스타일링 세계
푸드 스타일리스트는 음식과 식기 등으로 테이블 공간을 연출하는 일을 한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음식의 질감, 맛, 향 그리고 매무새까지 전달해야 한다. 노력과 창의력을 동시에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모니터로 레퍼런스를 꼼꼼히 확인하며 준비한 음식을 세팅하고 있는 푸드스타일리스트 보선(金甫宣) 씨. 클라이언트의 컨펌은 음식을 준비하고 스타일링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이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큰길에서 살짝 벗어난 골목 안쪽에 지은 지 오십여 년쯤 된 이층집이 있다. 대문은 없고 마당 한쪽에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근처 성미산에 사는 새들이 날아와 쉬어가는 곳이다. 감나무가 환히 내다보이는 통창 안쪽에는 새벽 세 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스튜디오가 있다. 사람들과 온갖 물품이 분주히 드나들고, 환한 조명이 켜졌다가 꺼지고,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호기심 많은 동네 강아지들과 고양이들이 기웃거리는 이곳은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보선 씨(金甫宣)의 작업실이다.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영역은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음식을 직접 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비자 시장을 조사하거나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메뉴도 개발한다. 일의 영역이 넓으니 일과도 바쁘게 돌아간다. 이십 년 넘게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살아온 김보선 씨의 하루하루도 다양한 일들로 촘촘하게 채워진다.
뭐든 잘해야 하는 직업
김보선 씨는 작업실 근처에 있는 집에서 걸어서 출근한다. 보통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서 아홉 시에 작업실의 문을 여는데 외부 촬영이 있는 날은 예외다. 촬영 시작이 아홉 시라면 다섯 시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예전에는 잡지에 실릴 음식을 촬영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판도가 달라졌다. “잡지가 많이 없어지고 광고 시장도 대부분 디지털로 옮겨갔어요. 요즘 들어오는 일은 브랜드SNS 작업, 전시 세팅, 행사 세팅 등이 주를 이루고 주방가전 신제품이 나오면 그 제품을 테스트하고 메뉴를 개발하고 소책자를 만드는 일도 해요.” 이전에는 요리 따로, 스타일링 따로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의뢰인 대부분이 요리까지 다 할 줄 아는 스타일리스트를 찾는다. “요리를 알고 스타일링을 하느냐, 모르고 하느냐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달라져요. 요리가 받쳐 주지 않으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어서 결국 요리를 배우게 되죠. 예를 들어 완성된 볶음요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기름칠을 할지 물엿을 바를지 결정해야 하는데, 그 판단을 하려면 요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해요. 또 고기 종류에 따라 가장 맛있어 보이는 온도가 몇 도인지도 알아야 하죠. 그래서 요리뿐만 아니라 식재료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해요.” 한식, 양식, 중식, 일식 등 요리의 장르도 다양하고 그에 따른 식재료도 무궁무진하다. 그중 특정한 분야만 잘해서는 일을 맡을 수가 없다. “어떤 일이 들어올지 모르니까요. 전반적으로 다 할 줄 알아야 하고 잘해야 해요.” 잘해야 하는 건 요리만이 아니다. 촬영에 필요한 각종 소품도 준비해야 한다.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그릇부터 시작해 그와 어우러지는 테이블보, 냅킨, 수저, 양념통, 꽃 등…. “시안이 촬영 하루 전날 오는 경우도 많아서 뭘 사러 갈 시간도 없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평소 시간 날 때마다 준비해야죠.” 요리연구가, 플로리스트, 코디네이터, 디자이너를 모두 합한 직업이 푸드 스타일리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최고의 바게트 전문가를 가리는 ‘르빵 바게트 챔피언십 2023’의 공간을 연출한 모습. 8m에 달하는 대형 테이블은 수십 여 종류의 바게트와 각종 오브제로 채웠다. ⓒ 김보선(金甫宣)
스물두 살에 찾은 꿈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을 통해 푸드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원래 요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요리 관련 일을 하고 싶었는데 식당에서 일을 하면 같은 요리만 하잖아요. 매번 새로운 요리를 하고 더 맛있어 보이게 연출하고 또 화보로 작업물을 만들어 내는 푸드 스타일링이라는 일이 재미있어 보였어요.” 결심이 선 이후 앞만 보고 달렸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한 다음 본격적으로 꿈을 좇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는 푸드 스타일링을 위한 학교도 아카데미도 없었다. “당시 요리연구가이자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던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하는 클래스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선생님 스케줄이 있으면 수업이 없어지거나 미뤄졌죠.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클래스였는데, 한 달에 겨우 한 번 할 때도 있었어요.” 푸드 스타일링을 배우다 보니 요리를 모르면 안 되겠다 싶어 신라호텔 조리 교육센터에 들어갔다. “거기서 양식을 배운 이후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어시스턴트로 들어가 일을 더 배우려고 했어요. 그런데 배우려는 사람은 많고 자리는 없으니까 조리 경력이 있으면 남들보다 유리하겠다 싶어 파스타 전문점에 들어가서 일을 했어요.” 그 경력을 발판으로 어시스턴트가 되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수업을 일주일에 하루로 몰고 나머지 시간 내내 일을 했다. 졸업 후 다음 단계를 고민하던 그녀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요리 종류와 식재료가 다양했어요. 디저트, 와인 등 다루는 범위도 넓었고요. 견문을 넓힐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일본에서 생활비, 학비,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세 개를 하며 일을 배웠다. 200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부모님이 계신 집 반지하에 조그마한 작업실을 차려 푸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일은 없었어요. 삼 개월에 하나 들어올까 말까 했죠. 멍하니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도서관, 서점에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했어요. 그러다 일이 하나라도 들어오면 연습을 엄청 많이 했어요.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여러 번 테스트하고, 한 컷을 찍는 촬영에도 플랜C까지 만들었어요. 한 번 일을 맡긴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고, 주위에 소개해 주고, 그럭저럭 자리를 잡기까지 5년 정도 걸렸어요.”
원물 자체가 싱싱하고 좋아야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늘 식재료 공수에 심혈을 기울인다. ⓒ 김보선(金甫宣)
먹는 것도 일, 쉬는 것도 일
반지하에서 작업실을 시작한 이후 서너 번을 옮겼고, 지금의 작업실은 8년 전에 이사한 곳이다. 촬영은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잡힌다. 촬영이 없는 날에는 촬영 준비로 분주하다. 시안을 파악하고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고 스태프들에게 할 일을 지시한다. ‘북유럽의 삭힌 청어요리’처럼 생소한 음식을 만들어야 할 때면 식재료를 준비와 레시피 연구, 그리고 테스트도 해야 한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날에는 영수증과 세금계산서 등을 정리한다. 아침은 삶은 달걀이나 고구마로, 점심과 저녁은 거의 배달 음식으로 때운다. “냉장고에 좋은 식재료들이 많지만, 저를 위해 요리하거나 정리할 시간도 여유도 없어요. 거의 매일 새벽에 일이 끝나거든요. 집에선 잠만 자요. 하루 네 시간 정도 자나 봐요.” 가끔 시간이 날 때면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김보선 씨에게는 일의 연장이다. 맛깔스러운 음식을 보면 자동으로 몸이 반응한다. 요리조리 보며 조리법을 탐색하고 또 언제가 같은 음식의 스타일링을 제안 받게 되면 직접 만들어봐야 하니까 말이다. “아이디어가 떠올라야 정리가 되고 실행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한 일이에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을 한다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일을 분리하는 게 불가능해요. 좋아하지 않으면 못 하는 일이죠. 원래 뭐든 조금 하다 금방 포기하는 성격이었는데 이 일은 저한테 맞아요. 할수록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당의 감나무로 날아드는 새들을 바라보는 일이 김보선 씨에겐 짧은 휴식이고 위로이다. 아니 어쩌면 그 역시 또 다른 아이디어의 온상일 것이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Lifestyle
2024 SPRING
소셜미디어 인류학자
이야기와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큰 키의 바트 반 그늑튼(Bart van Genugten) 씨는 2014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이후 그는 결혼하고 인기 많은 유튜브 채널 ‘아이고바트(iGoBart)’를 운영하고 있다. 채널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네덜란드 참전용사에 대해 알려주고 한국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들을 종종 소개한다.
유튜브 채널 아이고바트를 운영하는 바트 반 그늑튼 씨. 그는 유튜브 콘텐츠를 촬영할 때 주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며, 손에 쥐기 편한 작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
바트 반 그늑튼 씨의 첫 한국 여행은 생각보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2014년 스페인 말라가(Malaga)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동안 그는 한국인 여학생과 데이트하고 있었고, 이를 계기로 서울의 성균관대학교 한국어학당에 등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울에 사는 대신 인천의 부평구 서쪽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공공 표지판은 외국인 방문객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인구 8,500여 명인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그레이브(Grave)에서 자란 그에겐 도시 탐색의 기술이 필요치 않았다. “출구가 아주 많은 지하철역은 익숙해지기 어려웠어요. 한국어를 읽을 수 없으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죠”라고 반 그늑튼 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대도시의 젊은이가 되기 위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그렇지만 한국은 지속해서 그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다.
다시 아시아로
석 달 후 반 그늑튼 씨는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일을 시작했다. 일 년이 지난 후 그는 자신이 직장 생활에 완전히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을 그만두고 아시아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몇 주를 보낸 후 6개월 동안 중국, 대만, 미얀마, 베트남, 태국, 필리핀을 돌아보는 배낭여행을 했다. 하지만 그의 여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시아를 돌아보는 여행이 대체로 꽤 심심했어요. 늘 혼자 다녔죠. ‘이게 무슨 삶인가?’라고 자문했어요. 여전히 어딘가를 가고 싶었는데 한국이 가장 익숙했어요. 한국은 저에게 새롭고 완전히 낯설면서도 동시에 아주 편안한 느낌을 주는 묘한 곳이었어요. 서구와 아시아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룬 곳이죠.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었어요.”
결혼과 문화
반 그늑튼 씨는 2017년 초 한국에 되돌아오게 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첫째로, 그는 나중에 그와 결혼하게 될 여성인 김휘아(金輝妸 Kim Hwi-a) 씨를 만났다. “우리는 데이트 앱에서 만났어요. 그녀는 상수동에, 나는 합정동에 살고 있어서 거의 이웃이었죠. 우리는 서로 잘 맞았어요. 근데 그녀를 만났을 때가 네덜란드로 돌아가기 얼마 전이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좀 더 머물러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죠. 서로에 대한 모든 것을 좋아했기에 결혼을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혼했죠.” 2019년에 결혼을 한 후 반 그늑튼 씨와 그의 아내는 서울 마포구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은 한강 옆으로 산책길과 자전거길이 있었고 주변에 여러 대학과 예쁜 가게들, 그리고 젊은이들이 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장소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한국의 급격한 변화는 반 그늑튼 씨에게 끊임없는 매력의 원천이었다. “일제강점기 억압과 한국전쟁을 겪은 나라가 경제적 성공과 민주화를 이루어낸 게 아주 흥미로웠어요. 그 후 아시아 경제위기를 맞고도 10년도 채 되지 않아 세계에 알려진 곳 중 하나가 된 것도요. 저는 인간과 환경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인문지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한국이 어떤 식으로든 더 커지게 될 거라고 느꼈어요.”
그는 한국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동네 고유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며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 귀 기울인다.
유튜브에 도전하다
2018년에 아내의 도움을 받아 반 그늑튼 씨는 ‘섹시그린(Sexy Green)’이라는 유튜브를 시작했다. 환경 이슈에 초점을 맞춰 원래는 친환경 물품을 파는 회사를 시작하는 게 목적이었고 채널의 콘텐츠를 통해 제품을 홍보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행과 다양한 문화에 대한 그의 열정과 관심이 곧 채널의 이름과 방향을 바꾸게 했다. 그렇게 해서 ‘아이고바트(iGoBart)’가 탄생했다. ‘아이고’는 새로운 곳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 반 그늑튼 씨의 욕구를 표현하는 동시에 언어유희이기도 하다. 한국어에서‘아이고’는 감탄사로 놀람과 공감 혹은 슬픔까지 표현한다. 300편이 넘는 유튜브 영상은 3,200만 뷰를 기록했다. 가장 인기 있는 영상 중에는 한국전쟁에서 싸운 네덜란드 참전용사의 인터뷰와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들이 있다. 이 시리즈는 그가 2018년에 북한을 방문한 후 만든 영상으로 시작한다. 그에게 이 시리즈는 네덜란드와 한국 사이의 가장 중요한 관계 중 하나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남자들이 이곳에 와서 싸웠고 그들 중 일부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이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생존하는 참전용사 대부분의 나이가 여든이거나 그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의 채널에 나왔던 이들 중 일부는 이후 돌아가셨다. 이제 살아 있는 네덜란드 참전용사가 100명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마음은 다급하다. 이 시리즈는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기억을 끌어내는 것보다는 참전용사들에게 그들의 희생을 고맙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반 그늑튼 씨는 천생 이야기꾼이다. 혹자는 그를 인플루언서라고 부르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를 ‘기록자’, ‘영상 제작자’, 그리고 ‘유튜버’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이들이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믿는다.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해요. 그것이 저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제 아버지는 10형제 중 막내이고 이미 70세이세요. 아버지의 부모님은 15년 전에 97세로 돌아가셨어요. 그의 조부모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싸웠던 사람들을 알고 있었죠. 이제는 도달할 수 없는 역사죠.”
그가 작업 중인 ‘웰컴 투 마이 동(Welcome to my DONG)’은 서울의 467개 행정구역을 탐구하는 프로젝트다. 벽 한쪽에 그려놓은 지도에 다녀온 동네를 색칠하고 그가 느낀 동네의 특징을 적어놓는다.
발견의 2,000킬로미터
2021년, 반 그늑튼 씨는 번아웃이 왔다. 매주 콘텐츠를 올려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결과물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영상들은 그가 만들고 싶어 하는 것들보다 뷰어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반영했다. 그의 아내는 “인생이 당신에게 뭘 주는지 가봐!”라는 영감을 주는 말과 함께 자전거 여행을 제안했다. 2021년 7월부터 10월까지 그는 약 2,000킬로미터를 해변을 따라 한국을 자전거를 타고 돌았다. 그는 외딴 지역의 풍경과 해안의 경치를 즐겼고, 시간이 멈춘 듯한 곳들을 방문했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시골 지역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여행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선택한 제2의 고향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들었다. “제 아내가 최고라는 걸 배웠죠.” 반 그늑튼 씨는 또한 한국 문화에 대한 사랑을 더 깊이 깨닫는 경험을 했다. 어떤 것도 억지로 꾸며 말하거나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 명쾌하게 표현하는 그는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은 외부 세계에 판매되고 있는 ‘완벽한 이미지’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인종주의와 차별이 있었어요”라고 그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저를 집으로 초대한 아주 친절한 분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여기 내 마을에서 뭐 하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러니까 모든 게 조금씩 다 있었어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하지만 그런 불완전함이 저를 매료시켜요.”
문화 차이
자신을 ‘시골 아이’라고 말하는 반 그늑튼 씨는 시골에서 자라서 이방인에게 인사하는 관습에 익숙했는데 한국의 대다수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저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걸 좋아해요. 젊은이들과 그렇게 하는 게 때때로 힘들지만, 나이 든 분들은 종종 시간을 내서 이야기를 나누죠”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네덜란드 사람들은 아주 솔직하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바로 친구가 되고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한다. 또 자신의 종교, 정치적 소속, 심지어 성생활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네덜란드와 한국의 문화 차이가 특히나 강하다.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어느 순간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고, 대통령에 대해서 혹은 누구를 뽑을 것인지 묻고 싶어요. 네덜란드에서는 이런 이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마도 격렬할 수는 있겠지만요. 서로 반대 입장이어도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여전히 친구로 남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게 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반면에 그가 네덜란드로 돌아갔을 때는 대화 하는 상대방을 배려하여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는 한국의 예절이 그에게 영향을 미친다. “제가 한국 사람이 된 느낌이에요. 사람들의 감정을 좀 더 배려하게 되었죠. 한국에 살면서 나 자신을 좀 더 인식하게 되었어요. 두 나라의 좋은 점들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런데도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이 그저 “네덜란드 사람으로 이곳에 살면서 이 나라에 대해 배우고 있다”라고 말한다. 정말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이 나라의 행복한 이방인이에요. 사람들이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이웃으로 환영하다
작년에 반 그늑튼 씨는 서울 서대문구 가좌동에 있는 전통 시장에 간 적이 있었다. 시장은 특별히 매력이 있거나 깨끗하진 않았지만 그를 끌어당겼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니!’하고 생각했어요. 덜 알려졌지만, 주목할 만한 장소들이 아주 많고 이곳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배울 기회가 많다고 느꼈어요.” 그의 가장 야심적인 유튜브 프로젝트가 뒤따랐다. 서울의 467개 행정 구역인 동에 대한 영상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미 약 40개 동을 찍었다. “지역들이 모두 자기만의 이야기와 역사가 있어요. 각 지역을 흥미롭게 만드는 이 작은 조각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매력적이에요”라고 그는 말한다. 지금까지 만든 동 콘텐츠 중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뽑아 달라고 하자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포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곳은 한국에서의 제 고향입니다. 제가 자란 곳 같은 곳이죠. 길들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잘 알아요. 그래서 고향 같고 그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그는 궁극적으로는 전문가나 지역 주민들과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하며, 유튜브 시리즈를 보완해 책으로 내기를 바란다. 많은 한국 시청자가 댓글로 반 그늑튼 씨는 외국인이지만 한국에 대해 자신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부인한다. “아마 그렇지 않을 거예요. 저는 그저 계속해서 배우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는 교수가 아니에요. 저는 그저 소셜미디어 인류학자라고나 할까요.”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의 열정과 배움의 여정을 공유하길 원한다. “저의 목표는 구독자를 모으는 것이었지만, 그건 아주 표면적인 것일 뿐이에요. 왜냐하면 그다음엔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세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에게 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지 묻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시청하고 즐길 뿐이죠. 사람들이 제 채널에서도 그러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Daniel Bright 에디터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Lifestyle
2024 SPRING
살기 좋은 마을의 비결
경상북도 예천(醴泉)은 산악 오지인 동시에 낙동강이 휘돌아나가는 물의 고장이다. 또 조선시대 사회의 난리를 피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여 곳의 피난처를 꼽은 ‘십승지지(十勝之地)’ 마을도 있다. 자연환경에서 비롯되는 풍요로움과 공동체 결속을 위한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예천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이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 한국관광공사
예천의 지리적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가볼 곳이 있다. 회룡포(回龍浦) 전망대이다. 장안사(長安寺)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언덕길을 10분 정도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강인 낙동강(洛東江)의 지류, 내성천(乃城川)을 조망할 수 있다. 동쪽에서 흘러온 물길이 180도 휘어지더니 다시 180도를 돌아 나가는데, 유장하게 흘러가는 그 모습이 마치 비상하는 용의 몸짓을 닮았다. 회룡포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이다.
강들이 만나는 물류망의 핵심
회룡포에서 직선거리로 2킬로미터 남짓한 곳에 삼강주막(三江酒幕)이 있다. 세 개의 물길, 즉 회룡포를 지나 흘러온 내성천과 북서쪽에서 내려온 금천(錦川), 그리고 동쪽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주막이다.
지금이야 고속도로와 철도, 항공로가 주요한 물류 루트지만, 지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물류는 주로 물길로 이어졌다. 수레나 등짐보다 평평한 나룻배나 뗏목을 이용하면 그 어떤 교통수단보다 많고 무거운 물량을 상대적으로 쉽게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룻배나 뗏목이 못 갈 정도로 얕다면 그때부터는 완만한 하천 주변 길을 이용하면 되었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역사가 깊은 도시들의 이름은 ‘주(州)’ 자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巛 또는 川)과 그 사이의 하중도(河中島)를 본뜬 상형자로서, 이후에는 마을을 거쳐 도시를 상징하는 어휘로 확장되었다. 여러 나라들이 그러했듯 한반도 역시 옛 도시들은 거의 모두 하천을 끼고 탄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예천도 마찬가지였다. 삼강주막이 그 상징이다. 지난 1900년까지만 하더라도 나룻배들이 하루에 서른 번 넘게 왕래했던 발 디딜 틈 없이 바쁜 물류의 중심이자 휴게소, 그리고 식당과 숙소였다. 다만 1934년 대홍수로 근방의 건물들이 모두 사라졌고, 지금은 삼강주막과 그 옆에 있는 수령 500여 년의 회나무 한 그루만이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다행히 그 시절 나그네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을 배추전과 막걸리를 옛 삼강주막 바로 옆에 새로 지은 주막에서 맛볼 수 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삼강주막. 과거 삼강나루를 왕래하는 사람들과 보부상, 사공에게 식사를 해주거나 숙식을 제공하던 건물이다. ⓒ 예천군
예천의 대표 축제로 자리잡은 삼강주막 나루터 축제에서 전통놀이를 즐기고 있는 모습 ⓒ 예천군
살기 좋은 마을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을 담아 살기 좋은 곳으로 꼽은 십승지지(十勝之地)는 대개 골 깊은 내륙 오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옥토가 펼쳐져 있고 물류망도 잘 갖춰져 있어 예부터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경상북도 예천에도 십승지지 중 한 마을이 있다.
삼강주막에서 자동차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금당실(金塘室)마을이 십승지지 중 한 곳이다. 마을 안팎에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산재해 있을 만큼 이미 오래전부터 거주지로서 주목을 받아온 금당실마을은 현재 수십 채의 고풍스러운 한옥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한옥들은 약 7킬로미터에 달하는 돌담길로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유유히 마을을 걷다 보면 이내 왜 이곳이 십승지지 중 한 곳으로 일컬어지는지 알 수 있다. 북쪽은 높은 소백산맥(小白山脈)으로 막혀 있고, 마을 주변에는 논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물류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도, 주요 도시 간의 이동로에서는 빗겨나 있어 군사상의 중요성은 작아 보이는 위치다. 순탄하고 풍요롭게 살아가기에 더없이 훌륭한 지리적 장점을 갖고 있다.
마을 북서쪽 끝에 있는 송림(松林)에서는 안전한 마을을 만들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도 엿볼 수 있다. 이 송림에는 900여 그루의 소나무가 800미터에 걸쳐 자라고 있다. 마을 앞을 흘러가는 금당천(金塘川)이 종종 범람하자, 주민들이 수해(水害) 방지를 위해 힘을 합쳐 조림한 숲이다. 수령이 100~200년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그 오랜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풍광도 뛰어나고 역사성도 있어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그리고 요즈음 같은 봄에는 송림도 송림이지만, 송림 근처 용문사(龍門寺)까지 7킬로미터 남짓한 구간을 수놓는 벚꽃길도 일품이다. 금당실마을에 들를 예정이라면 시간을 충분히 잡아야 하는 이유다. 한옥에서 숙박하며 송림 산책을 하고, 이어 벚꽃길도 걸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주민들이 이 마을에서 그저 안빈낙도(安貧樂道)에 안주하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송림의 경우에서처럼 범람과 같은 자연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아가 십승지지 특유의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문화도 발전시켜 왔다. 그 예를 살펴보기 위해 벚꽃길 중간쯤에 있는 초간정(草澗亭)으로 가보자.
조선시대 전통가옥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금당실마을. 청동기 시대 고인돌과 고택 각종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며, 미로 같이 이어진 돌담길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송림도 마을의 볼거리다. ⓒ 예천군
풍요를 바탕으로 꽃피운 문화 초간정은 16세기 조선의 문신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 1534~ 1591)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심신 수양을 위해 세운 정자이다. 계곡 한쪽의 수직 암반 위에 지어 올렸는데, 그 모습이 원래부터 그곳에 있던 것처럼 모나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일교차가 큰 봄에 물안개까지 피어오르면 신비로움이 배가 되는데, 이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사는 십승지지를 넘어 마치 신선이 노니는 상상 속 이상향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초간정이 겉모습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곳은 권문해가 한반도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일컬어지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편찬한 서재이기도 하다. 이 사전은 고대부터 15세기까지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 인물, 동식물, 설화 등을 총망라한 것으로, 모두 20권(卷) 20책(冊)으로 이뤄져 있다. 옛 책을 헤아릴 때 쓰는 단위 중 ‘권’은 내용 분류에 따른 장(章, chapter)의 개념이고, ‘책’은 오늘날 쓰는 낱개 수량을 뜻한다. 즉 『대동운부군옥』은 20가지의 주제를 20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말이다.
권문해의 아들 권별(權虌 1589~1671)이 『대동운부군옥』에서 벼슬을 지낸 이들의 이야기만을 선별해 만든 인물사전식 문헌설화집인 『해동잡록(海東雜錄)』을 저술한 곳도 초간정이었다. 19세기 중반에는 배상현(裴象鉉 1814~1884)이 형법과 논밭과 관련한 여러 제도와 지리 등을 정리한 『동국십지(東國十志)』를, 박주종(朴周鍾 1813~1887)은 조선의 전통문화를 14개의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한 『동국통지(東國通志)』 등을 잇달아 편찬했다.
그런 면에서 예천은 백과사전의 보고(寶庫)와도 같다. 예천의 사대부들은 풍요로움을 향유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것을 바탕으로 지식과 노하우를 타인, 나아가 후세대에 전수하기 위해 애썼고, 실제 이루어냈다.
인공적으로 만든 원림과 조화를 이루며 조선시대 정자 문화를 잘 보여주는 초간정(草澗亭)의 모습. ⓒ 예천군
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지혜 공동체의 안녕과 결속을 위한 절묘한 지혜들도 놀랍다. 예천에는 무려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나무가 두 그루나 있다. 퍼진 가지의 너비가 동서 23미터, 남북 30미터에 달하는 ‘석송령(石松靈)’이라는 거대한 소나무와 그에 준하는 ‘황목근(黃木根)’이라는 팽나무다.
수령 600년이 넘는 석송령이 한국 최초의 재산을 소유한 나무가 된 연유는 이렇다. 이수목(李秀睦)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에겐 자식이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1927년 본인의 토지 6,600㎡를 이 소나무에 상속 등기한 뒤, ‘영험한 소나무’라는 뜻에서 석송령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자식이 없어도 그렇지, 토지를 일가친척이나 친한 이웃 등에게 상속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비밀의 실마리는 나무가 소유한 토지를 임대해 사용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가 꼬박꼬박 임대료를 내고 있으며, 그 임대료로 마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수목은 특정 개인에게 상속함으로써 마을에 분란의 소지를 만드는 것보다는 이웃들이 나무와 토지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으로는 공공의 번영을 위해 쓰이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뜻이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주민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석송령을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행여 아래로 쳐진 석송령의 가지가 부러지지 않게 돌로 가지를 받치고, 겨울이면 가지에 눈이 무겁게 쌓이기 전에 쓸어낸다. 벼락이라도 맞을까 봐 피뢰침도 설치해 두었다. 그동안 석송령의 장학금으로 학업을 마친 학생이 수십 명에 달하기 때문이며, 지금도 혜택을 받는 청소년들이 있어서이다.
석송령에서 자동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황목근도 비슷한 경우다. 매년 5월이면 나무 전체에서 노란 꽃을 피워 황목근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팽나무는 보유 토지의 면적이 석송령의 두 배가 넘는 13,620㎡나 된다. 다만 특정 개인에 의한 상속의 결과는 아니다. 마을의 공동재산이던 토지를 1939년 황목근 앞으로 이전등기(移轉登記)하면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당연히 황목근 소유의 토지에서도 임대료가 발생하는데, 마을의 중학생들에게 매년 30만 원 정도씩 장학금으로 전달된다고 한다.
사실 황목근이 있는 금원(琴原) 마을에서는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각 가정마다 밥을 짓기 전에 쌀을 한 수저씩 떠 모아 공동 재산을 형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1903년의 ‘금원계안(琴原契案) 회의록’과 1925년의 ‘저축구조계안(貯蓄救助契案) 임원록’ 등이 그것이다. 마을 공동체 구성원 가운데 누구에게라도 어려운 일이 닥칠 때를 대비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주는 나무인 석송령. 나무의 키에 비해 가지의 길이가 무려 세 배에 달하는 기이한 모습이다. 옆으로 길게 뻗은 가지를 지탱하기 위해 돌기둥을 받쳐두었다. ⓒ 권기봉(權奇鳯)
진정한 십승지지의 요건 공동체의 결속과 평화를 위해 서로를 배려하는 지혜는 예천의 남쪽에서 절정에 달한다. 거기에 ‘말무덤(言塚)’이라는 것이 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언덕 같아 보이지만, 인공적으로 바위와 흙을 돋워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만든 구조물이다. 오랜 옛날 주민들 사이에 크고 작은 다툼이 그치지 않자, 말(言)을 묻어 버리자며 무덤(塚)을 만든 것이다. 본디 모든 싸움의 씨앗은 말이기 때문이다.
고즈넉하면서도 들이 넓고 물류망이 잘 갖춰져 있어 예부터 십승지지로 이름 높았던 금당실마을과 예천의 곳곳…. 그러나 십승지지는 자연과 지리적 요건이 갖춰졌다고 해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공감,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관심과 배려가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십승지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경북 예천을 여행하다 보면 비록 정답은 아닐지언정 그와 관련한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마을 주민들 간 싸움이 잦자 싸움의 시작이 되는 말(言)을 묻자는 것에서 시작된 말(言)무덤. 이곳에는 무덤과 함께 말조심을 표현하는 각종 문구가 돌에 새겨져 있다. ⓒ 신중식(申中植)
ⓒ KOREA TOURISM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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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cheonCountry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 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