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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가족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

Lifestyle 2024 WINTER

가족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 낯선 도시에서 실패 없는 식사를 하려면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라는 말도 있다. 어디로든 이동이 가능한 기사들은 곳곳에 위치한 가성비 좋은 음식점들을 훤히 꿰고 있을뿐더러 시간과 경험을 바탕으로 검증된 리스트이니 신뢰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감나무집 기사식당’은 맛집에 밝은 기사들의 발길이 밤낮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감나무집 기사식당 주인 장윤수 씨가 손님상에 내 놓을 음식을 서빙하고 있다. 한국에서 기사식당은 말 그대로 기사, 그중에서도 택시 기사들을 위한 식당이다. 기사들을 주 고객으로 맞이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우선 차를 댈 수 있는 넉넉한 주차 공간이 필요하다. 메뉴는 다양할수록 좋지만, 시간이 걸리면 곤란하다. 직업의 특성상, 새벽이나 밤중에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저렴한 가격, 푸짐한 양, 변함없는 맛이 더해져야 한다. 365일, 24시간 열려있는 식당 감나무집 기사식장의 주인인 장윤수(張倫秀) 씨의 하루의 시작은 매일 다르다. “새벽부터 나올 때도 있고, 시장을 가는 날이면 좀 늦을 때도 있고. 시간을 정해두고 일을 하지는 않아요. 집에서 잠시 쉴 때도 모니터로 가게를 수시로 들여다봐요. 모니터링하다가 손님이 많다 싶으면 만사 제쳐두고 냅다 뛰어가죠.” 한국의 기사 식당은 주차장 구비, 푸짐한 한 상, 빠른 회전 등이 특징이다. 주차장, 식당, 살림집이 나란히 붙어 있는 구조다. 일과 휴식을 분리할 수 없는 이 구조는 장 씨에게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집이 가까워야 통제가 돼요. 바쁘다고 호출하면 금방 갈 수 있으니까. 24시간 전천후지.” 한 번에 70여 명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은 점심식간이면 순식간에 만석이 된다. 연중무휴, 24시간 영업 중인 감나무집이 문을 연 건 25년 전이다. “다른 데서 한정식집도 하고, 갈빗집도 했는데 잘 안됐어요. 다 털어먹고 집으로 들어왔지. 여긴 우리 집이니까. 처음에는 함바집(건설 현장에 임시로 지어 놓은 식당)을 했어요. 일꾼들이 일을 일찍 시작하니까 우리도 새벽 장사를 했는데 그러다 보니 근처를 오가던 택시기 사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 사람들이 더 늦게까지 장사하면 좋겠다고 해서 24시간 문을 열기 시작한 거죠.” 언제 찾아가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데다 값은 저렴하고 음식은 맛있다. 국과 반찬도 매일 바뀐다. 당연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근처에 기사식당이 많았는데 순댓국, 설렁탕 같은 단일 메뉴만 있었어요. 우리는 백반집이었지. 당시 기사들은 대부분 형편이 좋지 않고 맞벌이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일하다 보면 집에서 밥을 못 챙겨 먹으니까, 집밥이 그리웠겠죠. 사 먹는 음식은 혼자 먹기도 어렵고, 비싸기도 했으니까요. 여기 오면 미역국, 된장국, 콩나물국처럼 집에서 늘 먹는 국과 반찬이 있으니까 좋아하더라고요.” 집에서 먹던 음식 그대로 장윤수 씨의 고향은 충청도이다.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대가족 속에서 살았다. 농사를 크게 짓느라 집은 언제나 일꾼들과 가족들로 북적거렸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할머니와 어머니는 늘 주방에서 밥을 짓고, 김치를 담그고, 나물을 무쳤다. “맨날 다듬고 무치고, 그거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어요. 친구들이 놀러 오면 배추 뽑고 오이 따서 잘라보고 무쳐보고 짜다, 싱겁다, 이거 넣어보자, 저거 넣어보자면서 놀았죠. 국물 내고 밀가루 반죽해서 칼국수도 만들고…. 어른들이 먹어보고 맛있다고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어요. 엄마가 가서 공부하라고 혼내면 도망 다니고…. 재미있는 게 따로 있는데 공부가 되겠어요? 나는 요리사하고 음식 장사 하련다, 그거 하면서 재미있게 살련다, 생각했죠.” 집에서 해 먹던 음식 그대로 만들어 손님에게 내놓는다. 강원도에서 농사지은 콩으로 된장도 직접 담근다. 감나무집의 인기 메뉴인 돼지불백과 오징어볶음 “기사들에게 빨리 내놓을 수 있는 음식, 그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 저렴하지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뭘까 하고 연구 많이 했어요. 그래서 나온 게 돼지불백이죠.” ‘돼지불백’ 즉 ‘돼지불고기백반’은 이곳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이다. 메인 메뉴인 돼지불고기를 푸짐하게 쌈 싸 먹을 수 있게 상추, 배추같은 야채도 함께 낸다. 여기에 밑반찬 서너 가지와 계란프라이, 잔치 국수가 쟁반에 함께 나온다. 밥이 가득 담긴 밥솥이 식당 한쪽에 있어 추가로 주문하지 않아도 밥을 양껏 먹을 수 있다. 메인 메뉴인 돼지불고기를 제외한 나머지 반찬과 국 등도 리필할 수 있다. 식사 후에는 자판기의 무료 커피와 건빵으로 입가심도 할 수 있다. 연말에는 택시 안에 놓아둘 수 있는 작은 달력을 만들어 나눠준다. “전에는 눈대중, 손대중으로 내가 간을 보면서 만들었는데, 우리 아들이 군대 가기 전에 내 레시피를 다 문서로 만들었어. 옛날 맛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거지.” 레시피와 일일 판매량은 ‘일급비밀’이다. 집 같은 식당, 가족 같은 손님 이전에는 감나무집을 찾는 손님은 단연 기사들이 많았는데, 요즘엔 일반인들의 비중이 훨씬 많다. 다양한 반찬을 맛볼 수 있는 백반집이 점점 사라져 있는 요즘, 집에서 해 먹는 것보다 가성비 있게 즐길 수 있어 젊은이들이나 아이가 있는 가족들도 많이 찾는다. 또 한국의 집밥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외국인 여행객들도 많이 찾는다. 장윤수 씨의 하루는 손님이 많은 때와 적은 때로 나뉜다. 매일 새벽 시장을 봐서 가게로 온다. 바쁜 아침 시간에는 식사를 거르고 손님이 뜸해지는 오후 두 시경에 점심을 먹는다. 세 시부터 일곱 시까지는 가능하면 휴식을 취한다. 휴대전화를 잠깐 들여다보고 모자란 잠을 보충한다. 주말 저녁 시간이 제일 바쁘다.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손님의 행렬이 새벽까지 이어진다. 주방과 홀을 오가며 손님들의 상을 살피면서 부족한 것은 채우고 필요한 것은 가져다준다. 어떤 걸 잘 먹는지, 무엇을 남기는지 체크하여 더하고 덜할 반찬을 정한다. 밤 열 시쯤 늦은 저녁 식사를 한다. 최근에는 택시기사뿐만 아니라 집밥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 한국의 집밥을 체험해보고자 하는 외국인 등 다양한 손님이 24시간 방문하고 있다. 평일에는 새벽 한 시쯤 식당을 나서지만 주말에는 새벽 서너 시가 되어서야 손을 털 수 있다. 남편은 함께 장을 보고 바쁜 시간이면 주차장도 관리한다. 엄마를 닮아 요리를 좋아하는 아들은 든든한 동지가 되어 함께 일한다. 일일 2교대 또는 3교대로 일하는 직원은 스무 명이 넘는데 십 년 넘게 일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모두가 가족이고 ‘한집에서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하는’ 식구이다. 집밥을 먹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까지. 돼지불백, 순두부찌개, 생선구이 세 가지로 시작한 메뉴는 이제 열 가지로 늘었다. 다양한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기사들을 위해 줄기차게 연구한 결과물이다. “후회는 안 해요. 지금도 요리하는 거 좋아하고,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그렇게 행복해요. 여기에 밥 먹으러 오는 이들도 나한텐 식구나 다름없어요. 가족 밥 해 먹이는 일이 이렇게 좋아. 난 피곤한 줄도 모른다니까.” “돼지불백 하나요!” 성미 급한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앉기도 전에 외친다. 장윤수 씨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번진다.

석탄산업이 진 자리에 눈꽃여행을 피운 정선

Lifestyle 2024 WINTER

석탄산업이 진 자리에 눈꽃여행을 피운 정선 정선은 사계절 모두 매력이 넘치는 고장이지만, 그중에서도 겨울 여행에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검디검은 저탄장(貯炭場)과 대비되는 순백색의 눈, 그리고 구름까지 벗 삼아 걷는 트레킹, 거기에 전국 최대 규모의 정선 오일장 등 토속적이면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산촌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강원도 정선군(旌善郡)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57년 3월 9일 열린 함백역(咸白驛) 개통식 때였다. 한국 정부를 대표해 이종림(李鍾林) 교통부장관과 김일환(金一煥) 상공부장관이 참석했다. 그런데 손님이 더 있었다. 월터 다울링(Walter C. Dowling) 주한미국대사와 왕둥위안(王東原) 주한자유중국대사가 그들이었다. 궁벽한 오지에 위치한 역 개통식에 주한 외국 대사들까지 참석했다. 그 이유는 함백역의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석탄산업의 중심지 함백역은 물론 당시 이 지역을 관통했던 함백선(咸白線) 철도는 주민 이동을 돕는 교통수단이기도 했으나, 주된 용도는 석탄 운반용이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석탄은 전기를 만들고, 공장을 돌리고, 학교를 운영하고,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난방에 필수 불가결인 에너지원이었다. 정선은 지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No. 1’ 에너지의 공급처였다. 정선이 있었기에 지금의 발전이 가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정선은 민영 탄광의 중심지였다. 한국 최대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東原炭座) 사북(舍北)광업소를 비롯해 삼척탄좌(三陟炭座) 정암(淨岩)광업소, 자미원(紫味院)탄광, 묵산(墨山)탄광 등 한창 때는 36개에 달하는 탄광들이 오랜 기간 활황을 이어왔다. 전국적인 엄청난 석탄 수요는 전에 없던 호황을 가져오기도 했다. 전국 택시 최고의 황금 노선이 정선 사북에 있다는 말이 돌았고, 한때 한 전자제품 대리점 기준 가장 많은 판매량을 자랑했던 곳도 이곳이었다. 심지어 “지나다니는 개도 1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던 곳이 정선이다. 구공탄 시장의 이름은 구멍이 9개인 연탄에서 유래했다. 시장 곳곳에서 구공탄과 광부를 테마로 한 다양한 예술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1980년대 중후반 들어서였다. 유가가 안정되는 데 반해 석탄 채굴 비용은 나날이 증가하고, 석탄 수요는 감소가 예상되는 시점이었다. 결국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이 도입되었다. 채산성이 맞지 않는 탄광은 폐광을 유도하는 조치였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347곳에 이르렀던 탄광 대부분이 1990년대를 지나며 문을 닫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태백(太白) 장성(長省)광업소가 2024년 9월 폐광됐고, 2025년에는 삼척(三陟) 도계(道溪)광업소가 문을 닫는다. 그 이후 한국 탄광은 민간이 운영하는 삼척 경동(慶東)탄광 단 한 곳만 남을 예정이다. 예술공간으로 되살아난 석탄 광산 그렇다고 광산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한국인 특유의 기질은 산업 대전환으로 버려진 공간마저도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시켜 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삼탄아트마인(SAMTAN ART MINE)이 대표적인 사례다. 삼탄(三炭)은 삼척탄좌의 줄임말이고, 아트는 말 그대로 예술이다. 1964년부터 2001년까지 무려 38년 가까이 운영되다 문 닫은 삼척탄좌 정암광업소를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낸 것이다. 독특한 것은 옛 산업 흔적은 최대한 보존하면서 그 위에 예술을 덧입혔다는 점이다. 아트 마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이다. 삼탄아트마인은 1964년부터 2001년까지 운영됐던 삼척탄좌 시설을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국내 첫 예술광산 시설이다. 제일 먼저 돌아볼 곳은 삼척탄좌 시절 종합사무동으로 썼던 삼탄아트센터본관이다. 일단 공동 샤워실부터가 압도적이다. 1천 명이 넘는 광부들이 한꺼번에 이용할 수 있는 대형 샤워실이다. 천정에는 네 방향으로 한 번에 물을 뿜어낼 수 있는 샤워기가 붙어 있다. 그 아래로 다양한 현대미술과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최근까지 다른 광산에서 석탄을 캐내던 광부의 모습을 찍은 사진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다. 검게 변한 작업화를 씻던 세화장과 작업복을 빨던 세탁실, 전체적인 기계설비를 관장 운영했던 종합운전실 등도 갤러리로 변신했다. 옛것과 새것, 산업시설과 예술 작품이 한데 어우러지니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한쪽에는 삼척탄좌의 영화로웠던 과거를 실제 채굴 도구와 당시의 사진, 자료 등을 통해 보여주는 박물관도 있다. 본관 뒤쪽에 있는 건물에는 레일바이뮤지엄(Rail by Museum)이 있다. 삼탄아트마인 입구에서 보이는 53m 높이의 육중한 철탑이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이다. 그 안에는 2기의 수직 권양기(捲揚機)가 설치되어 있다. 권양기는 캐낸 석탄을 지상으로 끌어올리거나 광부들이 수직 갱도를 오르내릴 때 사용하던 일종의 산업용 엘리베이터로, 한 번에 광부 400명씩, 석탄은 4분마다 20톤을 운송할 수 있는 시설이다. 권양기 바로 아래에 있는 지름 6m의 수직갱도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깊이 가늠이 안 될 정도다. 큐레이터에 따르면 수직갱도의 깊이는 지표면에서 땅속으로 무려 653m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서울의 롯데월드타워 높이가 556m이다. 중국 상하이타워가 632m,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아브라즈 알 바이트가 601m, 프랑스 파리 에펠탑은 324m 라고 하니, 수직 갱도의 깊이가 그제야 가늠이 된다. 그 앞에 서 있자니 지금의 한국을 일궈낸 ‘땅 속의 산업 전사들’이 경험했을 엄청난 지열과 습도, 그리고 끝 모를 공포감이 느껴지는 듯 하다. 금방이라도 레일 위를 움직일 것 같은 광차(鑛車, mine tub)와 컨베이어, 수직 갱도의 철 구조물과 강철로프 등 유기적으로 움직이던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해 두었다. 삼척탄좌 장암광업소의 옛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이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 되어 커다란 감동을 준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와 비슷한 공간이 하나 더 탄생할 예정이다. 옛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 들어서는 사북탄광문화공원이 그것이다. 2025년 상반기 개관을 목표로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한다. 구름도 탄식하며 넘는 길 삼탄아트마인과 사북탄광문화공원이 역사 유산을 활용해 예술과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경험할 수 있는 곳도 있다. 과거 석탄을 운반하던 길인 ‘운탄고도(運炭高道)’이다. 겨울 눈꽃 산행으로 인기 있는 함백산을 오르고 있는 등산객 운탄고도는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뚫은 고지대 도로’라는 뜻으로, 실제로 길이 지나는 곳의 평균 해발고도가 546m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만항재의 해발고도 1,330m를 따 공식 명칭은 ‘운탄고도1330’이다. 운탄고도는 정선을 포함해 크게 4개 지자체를 지난다. 정선 서쪽의 영월에서 시작해 정선과 태백을 지나 동해변에 위치한 삼척으로 이어지는 장장 173km가 넘는 길이다. 전체 9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핵심은 정선을 지나는 4코스와 5코스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에 걸맞게 석탄을 운반하던 당시의 흔적이 잘 남아 있고, 석탄산업 합리화정책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자연 회복 속도도 빠른 곳이어서다. 먼저 4코스는 정선 예미역(禮美驛)에서 출발해 꽃꺼끼재(화절령 花絶嶺)까지 이어지는 28.76km 구간이다. ‘운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길이지만, 지금은 천혜의 트레킹 코스라 해도 될 만큼 걷기 좋은 길이다. 특히 전지현(全智賢 Gianna Jun)과 차태현(車太鉉Cha Taehyun)이 주연한 영화 (2001)에 나오는 소나무가 있는 타임캡슐공원에서 새비재(鳥飛峙)를 오르다 보면 주변 풍광 덕에 트레킹의 묘미가 한껏 깊어진다. 평균 9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길로 403m에서1,197m로 고도가 꾸준히 높아진다. 함백산 만항재는 한국에서 차를 타고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도로다. 덕분에 고생스럽게 산을 오르지 않아도 편하게 설국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5코스는 꽃꺼끼재에서 만항(晩項)재까지 이어진다. 꽃꺼끼재를 지나자마자 있는 도롱이(도룡뇽)연못은 1970년대 석탄 채취로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생겼다. 이후 광부 남편을 둔 아내들이 연못에 사는 도롱뇽에게 남편의 무사귀환을 빈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연못 물이 빠지면 갱도가 침수됐거나 무너졌다는 뜻일 테고, 그러면 도롱뇽은 물론 광부들 또한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데서 유래한 이야기일 것이다. 5코스 길이는 15.7km로, 천천히 걸어도 6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해발고도 1,067m에서 한국에서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 1,330m 만항재까지는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고도가 점점 높아진다. 꽤 힘이 들 것 같지만, 오른쪽 산 밑 경관을 바라보면서 힘든 줄도 모르고 걷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4코스든 5코스든 운탄고도는 공통점이 있다. 세계 여느 트레킹 코스와 다르게 경사가 완만하고 표면이 평탄하다는 점이다. 애초 트레킹 루트로 개발한 것이 아니라 석탄 운반을 위해 대형 트럭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길이다 보니 그렇다. 그래서 트레킹만이 아니라 마운틴 러닝이나 산악자전거(MTB) 등을 즐기는 이들에게도 더없이 훌륭한 여행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노르딕 스키는 물론 눈썰매를 갖고 와 즐기는 여행자들도 있다. 또 중간중간 넓은 대지가 있어 텐트와 침낭 등을 구비해 걷는 백패커들의 성지로도 이름이 높아지고 있다. 과거 맑은 날에는 흩날리는 석탄 가루로 하늘과 땅이 까맸고, 비가 오면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는 말 그대로 진창길로 변했던 곳이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석탄 나르던 운탄(運炭)고도에서 구름(雲)도 탄(歎)식하며 넘는 길, 즉 운탄고도(雲歎高道)로 위상이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겨울에 운탄고도를 걷고 있노라면 발 위에는 흰 구름이, 발 아래는 흰 눈이 소복하게 덮여 있어 온천지가 하얗게 빛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병방치 전망대에서는 한반도 모양을 한 섬 둘레를 동강 물줄기가 감싸 안고 흐르는 비경을 만날 수 있다.

LP로 맺어진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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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로 맺어진 인연 커티스 캄부는 모험심으로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대학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오게 되었다. 12년 후 그는 자신이 두 개의 음반 레이블을 운영하고, 한국의 유명 뮤지션 박지하와 결혼하여, 중고 레코드 가게 두 곳을 운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울 마포구 상수역 근처에 위치한 두 번째 빈티지 음반 가게 모자이크 웨스트에서 음반을 듣는 커티스 캄부.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에는 스포티파이, 애플뮤직, 유튜브 뮤직 등의 플랫폼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손쉽게 스트리밍할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LP 앨범이 다시 유행하고 있으며, 그 추세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레코드산업협회에 따르면, 세계 최대 규모의 음악산업을 보유한 미국에서는 지난 해 LP 판매량이 CD 판매량을 앞섰다. 글로벌 팝 스타부터 한국 현대 음악가까지 많은 아티스트들이 LP로 앨범을 발매하고 있으며, 젊은 층이 LP 구매를 주도하고 있다. 서울에서 두 개의 빈티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커티스 캄부 씨에게는 이러한 트렌드가 낯설지 않다.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난 그는 17살에 고향을 떠나 파리로 갔다. 이후 전 세계를 돌아다니기로 결심하면서 뉴욕, 도쿄 등을 제쳐놓고 가장 낯선 도시인 서울을 택했다. 캄부 씨는 2012년 한국에 도착해 교환학생 과정을 마친 후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는 음악 덕분에 자신의 사업적 감각을 발견하게 되었다. 음악 애호가로서 몇 년 동안 중고 음반 업계 사람들과 인맥을 쌓으면서 그의 음반 컬렉션은 점점 늘어났다. 2020년에는 광희문 근처 신당동 뒷골목에 자신의 첫 번째 빈티지 레코드 숍인 모자이크를 오픈했다. 신당동 일대가 유명세를 타기도 전이었다. 첫 매장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온라인 판매 사업을 시작했고, 지난해 홍대 근처에 두 번째 오프라인 매장을 오픈했다. 재능은 있지만 해외에 판매 채널이 부족한 국내 아티스트들을 알리고 싶어서, 브레인댄스레코즈를 통해 한국 일렉트로닉 아티스트의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또한, 대한일렉트로닉스를 만들어 오래된 음반을 재발매하거나 국내 아티스트의 새 앨범을 발매했다. 그는 이 앨범에 대해 “세월의 흐름에 잊힐 뻔했다가 구해낸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매장도 관리하고, 벼룩시장에서 레코드를 찾고, 매주 사무실에 입고되는 수천 장의 레코드도 분류하느라 바쁘게 보내지만, 여유가 있을 때는 그의 오랜 취미인 디제잉을 즐기기도 한다. 음악은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나? 어렸을 때 어머니가 LP판과 CD를 가지고 계셔서 항상 음악을 찾았다. 어머니는 친구들이 준 믹스 테이프를 차 안에서 들으시곤 했다. 소울을 특히 좋아하셨고, 디페쉬 모드, 더 휴먼 리그 같은 영국 신스팝을 많이 들으셨다.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가 있는지? 젊었을 때는 힙합을 많이 들었다. 집에서는 주로 빅 웨더, 마빈 게이, 샤데이 등 정통 소울 음악을 즐겼다. 그러다 사이키델릭 록 장르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이것저것 다양하게 들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 한 장르만 듣다가 다른 장르로 넘어가곤 했다. 한국에 왔을 때는 아방가르드, 실험 음악, 일렉트로닉 음악 등 다소 특이한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 머무르게 된 계기는? 콕 짚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사회에서 나의 역할을 찾았다랄까. 한국의 음악 산업은 블루오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름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돕고, 사람들은 나에게 도움을 준다. 나만의 방식으로 사회에 녹아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정착하게 되었다. 졸업 후에는 어떤 일을 했나? 현대카드에서 스페이스 마키팅팀에서 일했고, 이후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로 부서를 옮겨 부매니저로 일했습니다. 어떻게 음반 레이블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주변에 해외 발매를 할 만한 수준의 아티스트들이 있었지만, 인맥이 없어서 해외에서 음반을 발매하지 못하고 있었다. 메이저 회사에는 인맥이 있는 분들이었지만, 언더그라운드의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배급사나 음반사 대표들을 꽤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음반을 발매 및 배급하기로 결정하고 진행하게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나에게 최고의 프로젝트는 퓨어디지탈사일런스(PDS)라는 밴드였다. 정말 실력이 좋은 친구들이었는데, 내가 그들을 만났을 때는 콘서트를 쉰 지 한참 됐을 때였다. 여전히 소음 실험을 하는 두 명의 남자들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밴드를 다시 모아 웰메이드 앨범을 발매하게 되었다. 앨범은 한 학생이 1990년대 후반 퓨어디지털사일런스 밴드에 대해 만든 아마추어 다큐멘터리를 리마스터링한 것이었다. 전부 영어로 번역하고 프로젝터를 구해 20년 만에 처음으로 라이브로 상영했다. 정말 많은 분이 찾아주셔서 전 좌석 매진을 기록했다. 큰 모험이었지만 나에게는 인생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 해외에서의 반응은 어땠나? 많은 분들, 특히 재미교포들로부터 감사하다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한국어가 유창하진 않았지만, 반응은 한결같았다. 자신에게 한국적인 정체성이 있다고 느끼고 있지만, 한국에도 비주류 문화를 함께 즐기는 커뮤니티가 있기를 바랐다는 것이었다. 어떤 계기로 빈티지 레코드 샵을 운영하게 되었는지? 원래는 퓨어디지탈사일런스의 2집 앨범을 발매하려고 했지만, 당시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배송비가 문제였다. 배급사에 보내면 손해가 막심할 것 같았다. 현대카드에서 이직하고 사회통합프로그램을 통해 거주 비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소소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몇 백만 원씩 투자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비자가 나온 후에는 지금의 빈티지 레코드 숍인 모자이크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서울 중구 신당동의 오래된 주택가 골목에 있는 모자이크 서울  ⓒ 모자이크 매장 위치로 신당동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신당동에서 멀지 않은 창신동에서 산 적이 있다. 그리고 자리를 빨리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예산이 많이 부족했는데 아내는 광희문 일대가 좋다고 했다. 그래서 부동산 몇 군데를 찾아다니며 물어봤지만, 그들에게서 “없어, 없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나는 나이 드신 분들을 많이 만나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나만의 기술이 있었다. 그 후 몇 주 동안 비타민 병 음료를 사 들고 부동산에 여러 번 찾아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왔다. 직접 가보니 아직 공개 매물로 나오지 않은 곳이었다. 가서 보자마자 느낌이 딱 왔다. 가격도 좋고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모자이크의 인기 비결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다양성과 퀄리티, 그리고 꾸준하게 새로운 앨범을 들여오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대량으로 레코드가 입고된다. 진짜 최고 중의 최고의 음반은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음반들만 들여오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객의 일반적인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지? 꽤 다양하지만, 20대~40대가 대부분이다. 40대는 40~49세까지 다양하다. 그와 직원들은 매장에 진열된 앨범과 책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손 글씨로 메모해 놓기도 한다. 두 매장은 어떻게 차별화되어 있는가? 1호점은 아프리카, 브라질, 레게, 희귀한 그루브(미국 1960~70년대, 소울, 펑크 등) 등 월드뮤직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재즈 음반도 많이 선보인다. 2호점은 좀 더 ‘길거리’ 음악에 가깝다. 힙합, 하우스, 테크노, 디스코, 1980년대 댄스 음악, 뉴욕에서 형성된 다양한 음악들과 얼터너티브 록, 인디, 뉴웨이브, 포스트 펑크, 펑크 메탈, 트래시, 하드록, 록 클래식도 다수 갖추고 있다. 매장을 찾는 손님들이 어떤 경험을 하기를 바라는지 궁금하다. 사람들이 레코드 매장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도서관과 비슷하다. 우리가 세심하게 나눠 놓은 다양한 장르별로 직접 음반을 찾아보고 들으면서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현재 함께 일하고 있는가. 5년 전에 만났다. 아내의 앨범을 발매하고 싶었지만 결국 발매하지는 않았다. 아내의 음반사에서 이미 역할을 잘하고 있더라. 아내는 그 분야에서는 꽤 유명인이다. 아마존 MGM 스튜디오에 개봉한 (2023)이라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기도 했다. 많은 프로젝트에서 협업 제안을 받고 있어서, 해외 작업에서는 내가 영어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고 있다. 그는 모자이크를 통해 많은 이들이 다양한 음악을 경험해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향후 계획이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중고 음반 산업이 하나의 비즈니스로서 제대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한국에서는 아직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정식 사업으로 인정받고 국내에 더 많은 매장이 생겨서 젊은이들이 일하고 싶어 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지구가 좋아하는 제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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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좋아하는 제빵소 특별한 제빵소가 있다. 빵틀, 오븐 등 일반 제빵소와 사용하는 기구는 같지만 이곳에서는 밀가루 대신 플라스틱 병뚜껑으로 빵을 만든다. 버려진 플라스틱은 타르트가 되고, 카눌레도 된다. 사람이 먹을 순 없지만, 쓰레기가 새로운 쓸모를 가진 물건으로 탄생하는 순간이다. 지구가 건강해지는 제빵소 플라스틱 베이커리(廢高分子 製菓店 Plastic bakery)를 소개한다. 고순도 플레이크를 활용해 와플, 카눌레, 타르트 같은 다양한 형태로 만든 상품은 인센스, 화분, 트레이 등의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할 수 있다. ⓒ 플라스틱 베이커리 플라스틱(Plastic)이라는 단어는 ‘플라스티코스(Plastikos)’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원하는 모양으로 가공할 수 있는’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플라스틱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없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라. 텀블러, 의자처럼 눈에 보이는 물건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자동차 내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어디든 플라스틱이 있다. 플라스틱으로 굽는 빵 1907년 리오 베이클랜드(Leo Baekeland 1863~1944)가 플라스틱을 발명한 이후 1920년대 들어 합성 플라스틱을 본격 응용한 다양한 제품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플리스틱 베이커리가 문을 열었다. 플라스틱 베이커리는 폐플라스틱 병뚜껑을 빵 모양의 소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기업이다. 베이커리라는 사명처럼, 이곳에서는 빵을 굽듯 플라스틱을 굽는다. 100% 수제다. 사람이 직접 분쇄된 플라스틱을 계량하고, 일정 시간 굽거나 틀에 찍어낸다. 공정을 거친 폐플라스틱은 독특한 무늬의 빵으로 재탄생한다. 플라스틱 베이커리가 버려진 플라스틱 병뚜껑으로 빵을 굽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플라스틱 베이커리 박형호 대표(朴亨鎬 Park Hyong-ho)는 요리사도 미술 전공자도 아니다. 그는 대학에서 전기를 전공했지만, 대학원에서 스마트디자인엔지니어링을 공부하면서 지속 가능한 발전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대학원생 시절, 홍콩과학기술대학교와 홍익대학교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이 공동주최하는 순환경제디자인워크숍(Circular economy design workshop)에 참가했습니다. 홍콩에서 열린 그 워크숍에서 자원 순환이 전세계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이슈인지 알게 되었죠. 특히 플라스틱을 재활용해 가치 있는 자원으로 만드는 ‘프레셔스 플라스틱(Precious Plastic)’ 프로젝트에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이후 한국에서 자원 순환 프로젝트를 계획해 실천해 봐야겠다고 결심했죠.” 박 대표는 귀국 후 본격적으로 친환경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자 고심하던 어느 날, 그의 눈에 빵틀이 보였다. 당시 플라스틱 베이커리 사무실은 서울 중구 을지로의 방산종합시장 근처에 있었다. 방산종합시장은 각종 산업 부자재와 포장 용품 등을 판매하는 종합시장으로, 제빵 기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그곳에서 제빵 도구를 본 박형호 대표는 플라스틱을 빵처럼 굽는다면, 뭔가 재미있는 작품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플라스틱 베이커리의 시작이었다. 플라스틱 베이커리만의 도전과 협업 박형호 대표는 와플기기, 오븐 등을 이용해 플라스틱을 굽고 또 구웠다. 플라스틱에 열과 압력을 가하니 쉽게 변형됐다. 그러나 최적의 온도와 압력, 시간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온도가 너무 높으면 표면에 구멍이 생기고, 너무 낮으면 원하는 모양을 만들기 어려웠다. 그는 수백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플라스틱의 색, 물성에 꼭 맞는 최적의 온도와 압력, 시간을 찾았다. 금형의 파트 별 온도를 달리 조절하는 것도 플라스틱 베이커리만의 노하우다. 재료는 플라스틱 병뚜껑을 이용했다. 비교적 활발하게 재활용되는 투명 페트병과 달리 병뚜껑은 작고 따로 분리수거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재활용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형호 대표와 팀원들도 처음에는 인근 주택단지 분리수거장에 쪼그려 앉아 일일이 병뚜껑을 회수해 사용했다. 그러다 2023년부터는 춘천지역자활센터에서 병뚜껑을 직접 모아 씻어 말린 후 분쇄 플레이크 형태로 제공해 주고 있다. 플라스틱 베이커리는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통해 실용성과 심미성에 재활용이라는 의미까지 더해 지속가능한 내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 플라스틱 베이커리 플라스틱 베이커리는 고순도 플레이크를 활용해 와플, 카눌레, 타르트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진 상품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인센스, 화분 등 인테리어 소품으로 새로운 기능을 얻었다. 플라스틱 베이커리의 아이디어와 상품의 가치는 유수의 기업에서 먼저 알아봤다.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록시땅은 플라스틱 베이커리와 협업해 자사의 공병 플레이크로 타르트 모양의 재활용 비누 받침대를 제작했다. 실용성과 심미성에 재활용이라는 의미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컴퓨터 주변기기 전문기업 로지텍은 플라스틱 베이커리의 카눌레 모양 연필꽂이와 조약돌 모양 명함 거치대를 자사 제품과 함께 패키지로 선보였다. 기아자동차와 LG생활건강, 러쉬 등도 플라스틱 베이커리와 협업했다. 제품 전시와 임직원 및 일반인 대상 워크숍에 대한 의뢰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좋은 뜻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대중도 공감해 줄까?’, ‘잘 팔릴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이익이 남지 않는다면, 기업 운영을 이어갈 수도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다행히 제품을 선보인 후 많은 기업에서 협업을 제안해 준 덕분에 플라스틱 베이커리만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제품을 대량 생산하기보다는 플라스틱의 재활용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시도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제품’과 ‘작품’의 경계에 있겠다는 선택이었죠. 이처럼 상업성을 인정받으려는 욕심을 버렸더니 다양한 분야에서 계속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현재 플라스틱 베이커리에서는 기존 빵 모양 소품에 3D 펜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넣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상품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때 활용되는 필라멘트 또한 플라스틱을 재활용해 만든다. 최근에는 플라스틱 병뚜껑을 충전재로 쓴 빈 백(Bean Bag)도 선보였다. 또 재활용 제품을 활용한 공간 디자인도 선보인다. 플라스틱이 가진 가능성을 지속 가능성으로 플라스틱 베이커리에게 플라스틱이란 ‘가능성’의 또 다른 말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플라스틱은 이곳에서 무엇으로든 재탄생한다. 자연 분해되기 어렵다는 플라스틱의 단점이 오히려 기회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플라스틱이 가져올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도 박형호 대표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플라스틱을 오븐에 구워 만드는 카눌레, 타르트, 와플 등은 상품별로 굽는 시간과 온도가 다르다. ⓒ 플라스틱 베이커리 “플라스틱은 우리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여 주었습니다. 인간뿐만이 아닙니다. 무수히 많은 생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죠. 플라스틱이 상아의 대체제로 쓰이면서 코끼리의 멸종을 막았고, 목재 사용을 줄여 아마존 원시림 파괴 속도를 늦췄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플라스틱 ‘덕분에’가 아닌 ‘때문에’ 우리 삶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플라스틱이 인류의 멸망을 부추길 것처럼 여기죠. 플라스틱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면 당장 사람들에게 자극을 줄 수는 있지만 피로감이 쌓이고, 지속 가능한 프로젝트가 지속성을 잃게 됩니다. 그러니 플라스틱이 불러온 긍정적인 효과와 역사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좋겠어요. 그걸 인정해야만 플라스틱과 공생할 수 있습니다.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자연 순환이 어려운 플라스틱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입니다. 환경 문제를 감정적으로 바라보고 대응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쓸 것인가?’, 또 ‘어떻게 다시 쓸 것인가?’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박형호 대표는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활동하는 작가와 기업에 “충분한 고민과 연구를 거치라”라고 조언한다. 충분히 연구하지 않고 만든 물건은 오히려 새로운 쓰레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대표 역시 기존의 제빵 기법을 개선하는 동시에 새로운 형식의 자원 순환 방법을 발굴하고자 계속 노력할 계획이다. “노 플라스틱 선데이(No plastic sunday), 우쥬러브(Would you love), 로우리트(Low-lit) 등 자원 순환에 관심을 두고, 각자의 영역에서 괄목할 성과를 내는 기업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플라스틱 베이커리도 브랜드로서 가치와 인지도를 높여 플라스틱의 순환 가능성을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가능과 불가능을 결정짓는 것은 인간의 선택이다. 플라스틱 베이커리는 ‘가능’을 선택한다. 플라스틱과 지구의 지속 가능성을 말이다. 그 선택은 분명 플라스틱에 제2의 전성기를 가져다줄 것이다.

누구나 그리고 즐기는 민화의 즐거움

Lifestyle 2024 AUTUMN

누구나 그리고 즐기는 민화의 즐거움 과거 민화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민화 수집가나 연구가들이 등장하고 민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화가들의 작품이 주목 받으며 관심이 높아졌다. 최근에는 취미로 민화를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고, 공모전, 아트페어, 갤러리를 중심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민화 강사 신상미 씨는 취미로 시작했던 민화의 매력에 빠져 지금은 민화를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 직장인에서 민화 강사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신상미 씨. 열의에 가득 찬 수강생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이 공간의 이름은 모리화(毷離畫)이다. 번민 모, 떠날 리, 그림 화 즉 ‘일상의 근심을 떠나 보내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민화’를 배운다. 민화는 조선시대 때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한 실용화이다.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을 위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이라는 의미에서 ‘민화’로 불린다. 한 겹 한 겹 색을 쌓다 신상미(申湘媄) 씨에게는 두 종류의 ‘날’이 있다. 수업이 있는 날과 수업이 없는 날. 일주일 중 사흘은 수업이 있고, 사흘은 없다. 나머지 하루는 ‘배우는 날’이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7시쯤 일어나 중학생인 딸을 학교에 보낸 후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작업실로 간다. 경복궁 근처에 있는 21평짜리(69m²) 오피스텔로,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처음에는 집에서 동네 분들 모아놓고, 돈도 안 받고 가르쳤어요. 본격적으로 수업을 해보자 마음먹고 일 년 전쯤 작업실을 얻었어요. 경복궁 근처라 임대료는 비싸지만, 그 덕분인지 전국에서 배우러 와요.” 작업실에 도착하면 전기차를 충전시켜 놓고 강아지들과 산책을 한다. 이후 작업실로 돌아와 작업용 앞치마를 메고 화분에 물을 준 다음 수업 준비를 한다. 첫 수업은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해 3시간을 꽉 채우고 끝이 난다. “처음에는 책상 다섯 개를 놓고 시작했어요. 지금은 여덟 개가 되었죠. 한 클래스에 8명 정도 들어오시고, 총 여섯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어요. 자리가 나면 들어오려고 대기하고 있는 분들도 많아요.” 민화는 전공자, 비전공자의 차이가 별로 없다. 밑그림이 있어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골라 채색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추어도 쉽게 시작할 수 있고 결과물도 좋은 편이다. 신 씨의 수강생들이 그린 작품들. 같은 밑그림이라도 그리는 이의 취향과 선호하는 색 등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로 완성된다. “민화는 가루 물감을 아교로 개어 한 겹 한 겹 색을 계속 쌓아가는 작업이에요. 한 작품 완성하는 데 몇 개월씩 걸리는데, 명상하듯이 천천히 하다 보면 계속하고 싶어지는 매력이 있어요.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문화죠. 다들 재미있게 다니세요.”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이 없어도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난다. 일상의 소소한 근심을 까맣게 잊고 온전히 몰두하는 시간이다. 밥 먹고 그림만 그렸다 민화 강사가 되기 전, 신상미 씨는 20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다. 대기업에서 벽지, 바닥재, 가구 필름 등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였다. “2000년 초반, 컬러와 패턴 등 디자인이 다양한 장판(壯版 한국의 주택에서 방바닥에 까는 PVC로 된 시트) 시장이 어마어마했어요. 장판에 민화 나비를 넣어보고 싶어서 민화 작가를 소개받았어요.” 그것이 처음 만난 민화였다. “직장을 정말 열심히 다녔어요.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일요일에도 일을 했죠. 그러다가 4년 전쯤 아이가 아파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어요. 수십 년 동안 매일 하던 일을 갑자기 안 하게 되니 스트레스가 컸어요. 몸도 마음도 엉망이었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어디 가서 꽃이라도 그리자’ 하고 집 앞 공방을 찾아갔어요. 그때부터 민화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재미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정말 밥 먹고 그림만 그린 나날이었다. 한 곳에서 그릴 수 있는 민화가 한계가 있다 보니 화실을 서너 군데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그렸다. 그러다 보니 실력이 늘어갔다. 남들이 10년 걸려 배울 걸 2~3년 만에 익혔다. 어느 순간 병풍 하나 정도는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병풍 그리기를 시작했다. 1년쯤 걸리는 작업을 3개월 만에 끝냈다. 그때 그린 병풍으로 ‘제 15회 대한민국 민화공모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 정도면 화실을 차려도 될 것 같아 작업실을 열고 수강생을 받기 시작했다. “저는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안 맞는 사람이더라고요. 뭔가를 시작하면 몸이 상할 정도로 몰두해요. 칭찬받고 싶고, 잘하고 싶고. 그림을 시작하면서 활력이 생기고 아이를 돌볼 시간도 생겨서 아이도 저도 건강해졌어요.” 빠른 시간 안에 민화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힌 이유 중 하나는 직장생활 때의 경험이었다. 벽지, 바닥재, 가구 필름 등을 디자인하면서 빨강, 노랑, 파랑으로 색을 조합하는 작업만 20년을 했다. “제가 색을 만드는 데 특화되어 있었던 거죠. 민화는 정해진 색이 없어요. 같은 그림이라도 작가마다, 공방마다 색이 다르죠. 여러 색을 실험해 보고 칠해보면서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는 거예요. 오방색(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청색, 흰색, 적색, 흑색, 황색)을 화려하게 써야 민화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간색’이라고 불리는 중간색을 적극적으로 쓰는편이죠. 오방색은 한옥에는 어울리지만, 현대적인 인테리어와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제가 출품한 병풍도도 출품작 중 제일 어두운 그림이었어요. 요즘은 톤 다운된 노란색, 겨자색에 꽂혀 있어요.” 매주 화요일은 민화 명장 스승님께 전통 민화 그림을 배우러 간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1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듣는다. “시상식 날 원로 선생님들께서 앞 줄에 앉아 계셨는데, 아빠랑 너무 비슷하게 생기신 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분한테 가서 ‘저 좀 받아주세요’ 했어요. 그림 속 꽃 하나, 나비 하나에도 다 의미가 있거든요. 그리다 보면 알고 싶어져요. 그래서 책도 많이 읽고 수업도 듣는 거죠. 수업 중간에 밥도 먹고 막걸리도 한잔하면서 선생님께 수업을 받고 있어요.” 어설픔도 맛이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작업실에 나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여기서 제 작업도 해야지 싶었는데, 점점 회사처럼 되다 보니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져요. 그래서 개인 작업은 집에서 해요. 그런데 이제는 화실 이름도 걸려 있고, 제가 가르치는 사람이 되니 그림에 힘이 들어가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그림 그리는 것이 예전만큼은 재미가 없어요. 회원들 그림 봐 드리고, 그 그림들이 점점 나아지는 걸 보는 게 훨씬 좋아요.” 수강생은 주로 40~50대 여성들이다. 작업대에 그림과 재료를 잔뜩 펼쳐놓고 수다를 떨며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인다. 그렇게 세 시간 동안 스트레스를 날린다. 민화는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는 그림이다. 그래서 전공자, 비전공자 할 것 없이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문화라고 말한다. “혼자서 작업을 하면 그야말로 무념무상이에요. 쉬는 날에 종일 미적거리다가 저녁에 시작할 때가 많은데 정신차려보면 새벽이에요. 저희 엄마가 70대인데 엄마도 제 수강생이에요.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고, 아마추어의 어설픔도 민화의 맛이에요. 저희 화실은 아직 회원전을 연 적은 없지만, 회원전을 열면 작품도 절 팔린다고 하더라고요.” 수강생들의 즐거움이 신 씨의 보람이자, 회사 다닐 때는 몰랐던 기쁨이 된다. 새벽 서너 시까지 그리고, 서너 시간 자고, 하루 아홉 시간 수업이 있는 날에는 한 끼 챙겨 먹기도 힘들지만, 모든 게 감사하다. 열정을 쏟았던 직장생활의 끝에 새롭게 찾은 길이 감사하고, 경력이 짧은 자신에게 배우기 위해 먼 길을 오는 사람들이 감사하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최근 아버지를 위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겨자색, 그리고 파란색으로요.”

노잼도시 대전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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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잼도시 대전의 재발견 한반도에서 대전광역시는 중심에 있다. 위에서 내려오거나 아래에서 올라가도 그렇다. 게다가 주요 고속도로와 철도 노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부터 지금까지 대전은 한반도 교통의 길목이자, 중심에 있다. ⓒ 대전관광공사 편리한 교통 입지는 이곳에 한국 최대의 과학연구단지가 자리잡는 계기로 작용했다. 인재를 모으는 데 유리하고, 여러 지역의 공업단지와 연계하기 좋으며, 근처 금강(錦江)에서 용수를 끌어다 쓰기에도 좋은 입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선 것이 1970년대 초반 첫 삽을 뜬 대덕(大德)연구단지, 지금의 대덕연구개발특구(INNOPOLIS DAEDEOK)다. 한국 최대 과학의 도시 1984년에 설립돼 오늘에 이르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한국 과학 발전의 초석 역할을 해오고 있다. 또한 1993년에 개최된 대전엑스포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대전하면 과학’을 떠올리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특히 대전엑스포에는 세계 108개국, 33개 국제기구, 국내 200여 개 기업이 참가해 88서울올림픽만큼이나 성대하게 치뤄졌다. 당시 학생이었다면 학교단체여행으로 대전엑스포를 방문한 덕에 대전엑스포 ‘꿈돌이’는 한때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대전 도심을 가로지르는 갑천 위의 엑스포다리는 당시의 추억을 여전히 전하고 있으며,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른 엑스포 과학공원은 대전시민들의 쉼터로, 엑스포 한빛탑은 야경 명소로 인기다. 대전엑스포93 기념관과 엑스포과학공원의 상징인 한빛탑, 물빛광장 음악분수 등이 있는 엑스포과학공원은 대전 시민의 휴식처이자 야경 명소가 되었다. ⓒ 신정식 2022년 12월말 기준, 현재 대덕에 위치한 연구기관 및 기업은 2,397개에 이르며, 국내외 특허 출원 건수만 119,683건에 달한다. 대덕연구개발특구는 한국 과학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온 구심점이자 이러한 과학 발전은 한국 경제를 성장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전에서 과학을 어렵지 않게 경험하고 싶다면 대덕연구개발특구 한복판에 자리한 국립중앙과학관을 방문하면 된다. 한국의 첫 우주발사체인 나로호를 실물 크기로 전시한 모형이 방문객들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고, 로봇으로 재탄생한 대전 과학 엑스포의 마스코트였던 꿈돌이를 만나볼 수 있는 등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과학이 즐거운 놀이가 되는 국립중앙과학관. 이곳에는 자연사, 인류, 천체, 과학기술,미래기술 등 과학을 흥미롭게 풀어낸 공간이 많다. 밀가루가 낳은 새로운 음식문화 대전의 음식문화는 밀가루와 함께 탄생하고 발전해왔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한국 기후의 한계 탓에 메밀가루나 칡전분만이 이 땅에서 면을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이(唯二)한 재료였다. 그런데 밀가루라는 새로운 식재료가 출현한 것이다.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전 국토가 파괴되어 주식인 쌀이 매우 부족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민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미국이 원조한 밀이나 옥수수 등으로 만든 식량을 섞는 혼분식(混粉食)을 장려했다. 애초 쌀로 만드는 음식일지라도 무조건 밀가루로 만든 재료를 섞도록 했다. 한국내 어느 식당에서든 설렁탕이나 돼지국밥 등을 주문하면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함께 말아져 나오는 것이 바로 이 시대의 흔적이다. 대전이 예부터 밀가루와 관련된 음식이 발전한 것은 부산항이나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미국산 밀을 제분해 전국으로 배송할 때 중간보관소 및 분기점 역할을 했던 교통 요지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1960~1970년대 대전 서쪽의 서해안 간척사업 당시에는 노임을 미국이 원조한 밀가루로 지급했다. 그 밀가루를 현금으로 바꿔주던 교환장이 대전에 들어선 것도 한몫했다. 이처럼 풍성한 밀가루 공급으로 다채로운 음식문화를 꽃피웠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칼국수다. 칼국수는 익반죽해 썬 밀가루 면을 숙성 과정 없이 해산물, 또는 고기 육수를 베이스로, 채소와 함께 끓여 먹는 음식이다. 특히 육수와 고명, 면 굵기 등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지금은 전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칼국수가 최초로 탄생한 곳이 바로 대전이었다. 누가 최초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1960년대 들어 각종 미디어에 전국 최초로‘대전 칼국수’라는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명성을 뽐내듯 2023년 말 기준 대전에는 칼국수 전문점이 무려 727개에 달한다. 이는 인구 1만 명당 5개 꼴로,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많은 수치다. 이와 같은 대전의 칼국수 자부심은 2017년 이래 매년 10월마다 열리는 대전칼국수축제로 이어지고 있다. 칼국수가 최초로 탄생한 대전에는 다양한 칼국수 전문점이 있다. 사진은 사골과 멸치육수를 베이스로 한 칼국수이다. 대전을 대표하는 베이커리 대전을 대표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2023년 연매출만 1,243억에 순이익 315억 원으로, 단일 베이커리로는 세계 최상급 실적을 쌓아가고 있는 성심당(聖心堂)이다. 성심당이 문을 연 것 역시 미국으로부터 밀 원조가 들어오기 시작한 1956년이었다. 앞서 1950년 벌어진 한국전쟁 당시 극적으로 월남한 이들 중에는 지금의 성심당을 창업한 부부도 있었다. 부부는 훗날 대전에 정착했는데, 당시 가톨릭 신부로부터 밀가루 두 포대를 받아 찐빵을 만들어 판 것이 성심당의 출발이 되었다. 전쟁의 포연을 헤치고 창업한 빵집 답게 이들 눈에는 사회적 약자들이 남달리 보였다 한다. 팔고 남은 빵을 빈곤에 허덕이던 이들에게 매일 같이 베풀기 시작했다. 창업 이래 7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남는 빵을 복지관에 기부하며, 기부할 빵이 부족하면 새로 만들기까지 할 정도다. 제품 개발에도 열심이다. 단팥빵의 달콤함과 소보로의 고소한 맛, 그리고 도너츠의 바삭한 느낌을 한 번에 맛볼 수 있는 튀김소보로 등 이전에 없던 제품들을 만들어냈다. 이 튀김소보로는 성심당을 대표하는 빵 중 하나로, 현재까지 무려 8천만 개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만약 대전 시내를 걷다가 수십 미터, 때로 수백 미터의 줄을 발견한다면 십중팔구 성심당 매장일 확률이 크다. 성심당 매장은 대전에만 있어 빵과 케이크를 맛보기 위해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무조건 대전으로 가야만 한다. 이 때문에 빵을 좋아하는 이른바 빵순이들의 퀵턴여행(바로 돌아오는 여행, 즉 짧은 당일치기 여행)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전국 최대의 칼국수 식당 수와 성심당 밖의 기나긴 대기 행렬은 절박했던 한국인들을 구제해낸 그 옛날의 밀가루가 이제는 ‘노맛 도시’ 대전을 ‘꿀맛 도시’로 재탄생시켰음을 증명하는 풍경이다. 오는 9월 28일부터 이틀 간 열릴 예정인 대전빵축제에서 대전 사람들의 이른바 ‘빵부심’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전의 명물인 성심당. 제철 과일이 산처럼 쌓인 시루케이크, 시그너처 빵 등을 구입하려 매일 인산인해를 이룬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이렇다 할 대표 관광지가 없어 그 동안 ‘노잼 도시’로 알려졌던 대전은 최근‘유잼 도시’로 변신하고 있다. 예컨대 20세기 초반부터 철도산업 종사자들이 모여 살았던 소제동 관사촌은 맛과 멋이 즐비한 거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물론 본래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은 아니었다. 전쟁과 신도시 개발로 소외된 이래 빈집만 2천 채가 넘는 곳이었다. 변화의 움직임은 2010년 한 예술가가 옛 철도원 관사를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면서 시작되었다. 대전에서 유일하게 근대기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 지역의 가치에 주목한 것이다. 연극제와 노래자랑 등 예술 활동을 진행하면서 과거에 머물러 있던 관사들이 하나둘 갤러리나 카페, 레스토랑 등으로 바뀌어갔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겉모습은 언뜻 낡고 허술해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울창한 대숲을 대문으로 삼은 카페부터, 온천탕을 옮겨온 것 같은 정원이 인상적인 레스토랑까지, 독특한 아이디어와 현대적인 디자인이 더해져 다른 지역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낯선 경관이 펼쳐진다. 이와 비슷한 공간인 테미오래도 있다. 1930년대 대전 원도심에 만들어진 근대건축물을 리모델링한 곳으로, 옛 충남도지사 공간을 비롯한 9개 관사를 활용해 대전의 근대 역사와 문화, 예술 전시를 볼 수 있는 복합문화 예술공간이다. 소제동에 있는 옛 관사촌의 원형을 살려 만든 카페거리. 외관을 비롯해 지붕, 천장, 기둥 등 핵심 구조물은 그대로지만 각 스폿마다 색다른 개성과 취향으로 꾸며져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문화와 어우러진 대전 대전이 단순히 교통 요지이자 맛있는 먹거리만 많은 곳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문화적 향취와 자연의 깊이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곳이 대전이다. 먼저 대전 도심에 자리한 전국 최대의 도심 속 수목원인 한밭수목원을 빼놓을 수 없다. 방문객들은 울창한 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거나 산책을 즐기기도 한다. 수목원은 이응노(李應魯; LEE, Eung-no; 1904-1989) 미술관과 대전시립미술관과도 접해있다. 그 중에서도 이응노 미술관은 『문자추상(文字抽象)』과 『군상(群像)』 연작 등 한국화를 기반으로 서양의 추상화를 동양 서예로 녹여내며 독특한 미술세계를 만들어간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응노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유독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그가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던 당시의 나이가 50대 중반이었다는 점이다. 명성과 부에 안주하며 살 수 있었음에도 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스스로 나아갔다. 더욱이 1960년대 후반 한국내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음에도 그는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대전교도소 등에 수감돼 있는 중에도 밥풀 등을 이용해 3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오히려 국경과 민족을 뛰어넘는 예술의 가치와 위대함을 찾아 더욱 열정적으로 그렸다. 그 중에서도 1970년대 후반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군상(群像)』 연작은 당시 한국은 물론 전세계 양심적인 시민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자유분방한 개인들이 모여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그림에서 한국인들은 오늘의 민주화된 한국을 만들어낸 에너지를 읽어냈다. 시민을 위한 지역 대표 미술관이자 이응노(Lee Ungno) 화백의 예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이응노 미술관 ⓒ ARCHFRAME.NET 시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인 개입과 노력 속에서 노맛에서 꿀맛, 노잼에서 유잼으로 이미지 자체가 바꾸어가고 있는 대전은 언뜻 보면 밋밋할 것 같지만 과학, 문화, 근현대, 예술, 자연 등 여행의 목적에 따라 스팟들이 즐비한 곳. 그렇기에 대전은 하루이틀만에 둘러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대전의 옛 지명이 크고 너른 평야를 뜻하는 ‘한밭’인 것처럼 대전을 여행한다면 그날의 여행 주제를 정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대전을 여행할 수 있다. 장태산 자연휴양림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메타세쿼이아 숲이 울창하게 형성되어 있어 이국적인 경관 더불어 산림욕을 즐기기에 좋다. ⓒ 한국관광공사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미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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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미용실 일본인 나카야시키 겐타(NAKAYASHIKI KENTA, 中屋敷) 씨에게 미용사는 다양한 사람들과 따뜻하게 소통하는 직업이다. 그가 한국에서 활동한 지는 이제 6년 조금 지났지만, 이 나라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오래도록 같이 나이 들어가길 꿈꾼다. 나카야시키 겐타(NAKAYASHIKI KENTA, 中屋敷 健太) 씨에게 오는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그는 한 번에 한 명의 손님 만을 받는다. 오롯이 그 사람에게 집중하기 위해서다. 겐타 씨의 미용실에선 누구나 주인공이 된다. 동시에 여러 손님을 받는 대신 한 사람씩 예약제로 고객을 맞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두 사람이다. 가족이 함께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는 극소수의 손님에게 자신의 시간을 오롯이 내어준다. 미용실 창밖엔 나무들이 울창하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서울 강남구(江南邱)에 자리하고 있지만, 바깥에 작은 공원이 있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철마다 누릴 수 있다. 고객과 마음을 나누기에 더없이 좋다. “미용사는 누군가와 만나서 가까워지는 직업이에요. 미용실 운영으로 큰돈을 벌기보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좋은 사람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서 한국에 오기 전엔 일본 도쿄의 번화가인 오모테산도(Omotesando 表参道)에서 미용사로 일했다. 그가 고용된 미용실엔 손님이 아주 많았다. 한 시간에 무려 14명이나 커트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밀려드는 고객들을 상대하기 바빠 그는 손님의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게 너무 부끄러웠다. 그가 미용사가 된 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어서였다. 그랬던 첫 마음과 너무 멀어져 있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했어요. 잠을 거의 못 잤죠. 그렇게 6년쯤 일하다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겨우 스물일곱 살에요. 계속 이렇게 살다 간 죽을 수도 있겠다 싶던 차에 새로운 기회가 생겼어요. 제가 일했던 미용실 부사장님이 한국에서 미용실을 차려보라고 권하셨거든요. 때마침 한국에 관심이 생겼던 터라 별 망설임 없이 날아왔어요.” 한국으로 이끈 한정판 운동화 한 켤레 그게 2018년이었다. 사실 그전까지 그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 그가 한국에 관심을 품게 된 건 한정판 운동화를 사러 도쿄의 한 매장에 들렀을 때였다. 어느 젊은 남성과 같은 신발을 동시에 집으면서 눈이 마주쳤는데, 머리부터 신발까지 일본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남성이 누구인지는 얼마 뒤 TV를 보다 알게 됐다. K-팝스타 지드래곤(G-Dragon 보이그룹 ‘빅뱅’의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이 바로 그였다. 미디어에 비친 그는 음악도 패션도 기존의 틀을 모두 뛰어넘고 있었다. 그런 아티스트가 존재하는 나라에 문득 깊은 호기심이 생겼다. “도쿄 오모테산도가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라 여겨왔는데, 그보다 더 앞서나가는 곳이 한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이후로 우리 미용실에 오는 한국인 손님들을 유심히 봤어요. 일본으로 유학 온 손님도, 일 때문에 건너온 손님도, 하나같이 자기 삶을 멋지게 가꾸는 분들이더라고요. 이런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면 몇 년 안에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겠구나 싶었어요. 직접 가보고 싶어졌죠.”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인사말도 모르고 온 그에게 가장 큰 언어 선생님은 다름 아닌 고객이었다. 어학원을 찾아가는 대신 혼자 한국어 교재를 사서 공부하길 선택했지만, 손님들과의 대화 덕분에 그의 한국어 실력은 금세 늘어났다. 서울의 몇몇 동네에서 일하다 3년 전 이곳 도곡동(道谷洞 Dogok-dong)에 미용실을 냈다. 별도의 홍보를 하지 않고도 이전 미용실의 고객이 또 다른 고객을 소개해 줘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이곳의 고객들은 열 살이 안 되는 어린이부터 칠십 대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직업도 제각각이다. 그 덕분에 미용실에 가만히 있어도 드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그를 처음 만난 손님에겐 세번쯤 와줄 것을 권한다. 헤어 스타일, 모발 상태 등에 따라 처음부터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연을 이어가며 손님과의 합을 맞춰나가는 것이 그에겐 중요한 작업 중 하나다. 한국인의 정(情)에 빠지다 “일본 사람들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아요. 진심을 알기가 어렵죠. 하지만 제가 만난 한국인들은 거의 모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더라고요. 그래서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서 편할 때가 더 많아요. 제가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으니까요.” 그는 한국인들을 흥(興) 많고 정(情) 많고 화(火) 많은 사람으로 표현한다. 그 가운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한국인 특유의 정(情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이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한국인들이 자기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에 매우 놀랐다. 일본에선 누군가를 함부로 돕는 것이 큰 실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한국인들의 넓은 오지랖(이 일 저 일에 관심도 많고 참견도 많이 한다는 뜻)이 아주 좋다. 따뜻한 마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잘 아는 까닭이다. “일본에선 미용사와 고객이 평생을 함께하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한국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 문화만큼은 일본의 것을 옮겨 오고 싶어요. 저는 우리 미용실에 처음 오는 고객들에게 지금 당장 손님 마음에 들게 해드릴 순 없다고 이야기해요. 손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함께 만들어갈 테니, 속는 셈 치고 세 번만 와 달라고 부탁하죠. 거의 모든 고객이 그 이야기를 따라줘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대신 그는 손님들이 건네 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매번 최선을 다해 들어준다. 미용사의 자질에는 고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절한 순간에 알맞은 공감을 표시하는 게 그만의 무기다. 고객의 머리를 예쁘게 해 주는 것만큼 고객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에서 그는 큰 보람을 느낀다. 차분하면서도 정돈된 나카야시키 겐타 씨의 성격을 닮은 듯한 미용실 일본에 있을 때보다 훨씬 적은 수의 고객을 만나는데도 그의 수면시간은 여전히 짧다. 새벽 네다섯 시에 잠들고 아침 여덟 시 반쯤 눈을 뜬다. 침대에서 벗어나면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패션 또는 헤어 관련 유튜브를 본다. 업계의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열 시쯤 미용실로 출근해 열한 시에 영업을 시작하지만, 퇴근 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손님들의 예약 시간이 제 각각이라서다. 별도의 휴일이 없는데도 그는 별 불만이 없다. 오늘은 또 어떤 만남을 갖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이 그보다 늘 더 크다. 손님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는 꿈 그의 고향은 일본 도호쿠 지방에 자리한 이와테현(岩手県 Iwate-ken)이다. 지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도 일찌감치 대도시에서의 삶을 꿈꿨다. 이왕이면 ‘멋’을 삶의 중심에 두고 싶었고, 만 18세에 도쿄 하라주쿠의 한 미용학교에 입학해 꿈을 향해 출발했다. 그 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는 동안 이자카야 서빙, 콜센터 상담원, 옷 가게 판매원 등 10여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그 경험들이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지금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선배에게 물려 받아 17년 째 사용하고 있는 그의 가위 “일본에서도 아직 활동해요. 세 명의 유명 아티스트와 한 팀의 아이돌 그룹을 담당하고 있어서 요즘도 틈틈이 일본에 가요. 그래도 한국에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요. 손님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는 게 꿈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국에서 계속 살게 될 것 같아요.” 그는 선배한테 물려받은 가위를 17년째 쓰고 있다. 모든 것들이 점점 빨라지는 시대에 오래된 가위를 손에 쥐고 오래가는 인연을 꿈꾸며 산다. 자기만의 속도를 지키는 그의 얼굴에 자기다운 행복이 흐르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지속 가능한 일상을 만드는 동구밭

Lifestyle 2024 AUTUMN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지속 가능한 일상을 만드는 동구밭 소비자는 현명하다. 샴푸 하나도 성분, 가격, 제형 등을 까다롭게 따져보고 구매한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는지, 동물실험에 반대하는지 등 회사의 철학에 관한 기준도 명확하다. 동구밭((株)打勾吧, DONGGUBAT Inc)은 소비자의 깐깐한 기준을 충족하는 기업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도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장애인, 비장애인과 함께 지속 가능한 일상을 제안하는 기업, 동구밭을 소개한다. 동구밭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지속가능한 일상을 만들어 간다. 특히 발달장애인 근속년수 해결이라는 미션을 가지고, 매출이 늘어날 때마다 회사는 발달장애 사원을 추가로 고용하고 있다. ⓒ Donggubat Inc. 시골 마을 입구를 떠올려 보라. 야트막한 언덕 위 커다란 나무, 옆으로 펼쳐진 논과 밭, 구불구불한 오솔길. 따뜻하고 정겨운 이미지의 공간이 그려질 것이다. 한국에서는 동네로 들어가는 어귀를 ‘동구(洞口)’, 그곳에 자리해 사람들을 맞이하는 밭을 ‘동구밭’이라고 부른다. 이름처럼 동구밭은 사람들, 특히 발달장애인에게 포근한 자리가 되어주고자 만들어진 회사다. 동구밭에서는 장애인의 꿈이 자란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이 발표한 「2023년 하반기 장애인경제활동실태조사」에서 6대 장애유형별 경제활동상태를 분석한 결과를 살펴보면, 시각장애인 고용률이 43.3%로 가장 높고, 지체장애인(43.0%), 청각장애인(27.3%), 발달장애인(26.2%), 기타장애인(23.0%), 뇌병변장애인(12.2%)순으로 이어졌다. 장애인 취업자의 현재 직장(일자리) 근속기간도 전체 평균이 11년인 것과 비교해 발달장애인의 평균 근속기간은 4년 10개월로 짧았다. 언어, 인지, 운동, 사회성 등의 지연 및 이상을 보이는 발달장애인은 사회활동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들이 사회에 적응하고 경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사회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발달장애인이 직접 일해 수익을 내게 할 순 없을까?” 사업 초기 동구밭은 고민 끝에 비누를 만들기로 했다. 비누는 제조법이 간단하고, 적은 생산 비용과 인원만으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행히 시장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발달장애인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편, 친환경, 비건 등 소비자의 요구에 맞춰 고품질의 제품을 선보인 덕분이었다. 회사가 성장할수록 고용할 수 있는 장애인 수도 늘었다. 2024년 4월 기준 동구밭 임직원 수 130여 명, 발달장애인 직원 수는 50여 명에 이른다. 발달장애인 직원은 동구밭 자체 직무 역량 개발 프로그램을 거친 뒤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공장에서 제조, 배송 업무 등을 수행한다. 땅값이 비싼 도심에 공장을 둔다는 것은 회사 입장에서 분명 손해가 나는 일이다. 하지만 발달장애인 직원이 원활하게 출퇴근할 수 있도록 동구밭은 기꺼이 손해를 감수한다. 동구밭에 없는 세 가지 동구밭은 발달장애인을 고용하기 위해 태어난 회사다. 하지만 장애인 고용을 방패로 삼지 않는다. 즉 동구밭에는 핑계가 없다. “장애인이 만들었으니 부족해도 이해해 달라”라고 선의에 기대는 것이 아닌, 당당히 제품력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박상재(朴祥宰, Park Sangjae) 공동 대표는 이것이 “회사가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말한다. “장애인과 오래 함께할 수 있으려면, 회사가 자체적으로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비자가 좋아서 다시 찾는 브랜드를 만들어야 했죠.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임상’이었습니다. 사실 설립 초기에는 비누 제작에 있어 전문가라고 할 만한 인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한계를 두지 않고 마음껏 연구‧개발할 수 있었어요. 전국 각지의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노하우를 전수받고요. ‘지구와 사람에게 해롭지 않아야 한다’라는 가이드라인만 엄격하게 두고 최적의 원료와 배합 방법을 찾기 위해 직접 부딪쳤습니다. 동구밭 샴푸바의 유사 제품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이러한 진심과 노력이 있었기에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동구밭은 동물성 원료를 사용하지 않고, 동물 실험도 하지 않는다. 대신 옥수수, 아보카도, 레몬, 케일, 가지, 다시마 등 식물 유래 성분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전성분과 원료 배합에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한 덕분에 동구밭의 생산공장은 프랑스 이브 비건(EVE Vegan®) 인증과 환경경영시스템 인증(ISO 14001)을 받았다. 천연 원료만을 고집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인체 안전성을 인증받은 성분인지를 먼저 꼼꼼히 따져 소비자의 건강과 안전을 지킨다. 저온 숙성 공법(Cold Press, CP)도 차별점이다. 해당 공법을 적용하면, 재료의 좋은 성분이 열에 파괴되지 않는 반면 보습력은 강해진다. 유기농 녹차를 함유한 비건 설거지바 ⓒ Donggubat Inc. 마지막으로 동구밭은 플라스틱 프리를 실천한다. 동구밭은 액체, 가루 등의 제품군 포장재를 제외하고는 성분, 패키지, 완충재 등에 플라스틱 사용을 배제한다. 대신 제품은 비접착 재생 용지 패키지에 담아 판매한다. 동구밭 제품 1개를 사용했을 때 줄일 수 있는 플라스틱 배출량은 16.2g. 현재까지 누적 판매한 제품 수를 대입해 계산하면, 총 381,251㎏의 플라스틱 배출을 막은 셈이다. 소비자는 이러한 동구밭의 제품을 신뢰하고, 회사를 지지한다. 동구밭은 현재 샴푸바, 린스바, 세안비누, 거품 입욕제, 설거지 비누 등 월 50만 개의 제품을 제조 및 판매‧납품하고 있다. 많은 회사가 협업을 제안하면서, 주문자위탁생산(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OEM)과 제조업자개발생산(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 ODM) 방식으로도 다양한 제품을 생산한다. 동구밭의 성장은 기업에 다음의 메시지를 남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일회용 여행용품을 대신하는 플라스틱 프리 고체 여행용 키트. 샴푸바, 린스바, 바디&페이셜바로 구성되어 있다. ⓒ Donggubat Inc.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지속 가능한 일상을 위한 노력 동구밭은 회사 밖에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 동구밭은 2021년 10월 서울 강동구 암사동 광나루한강공원에 400그루의 나무를, 이듬해 11월에는 산불 피해 지역인 강원도 강릉시에 1,250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2022년과 2023년 6월에는 산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피해목으로 인센스 홀더를 제작해 보급하기도 했다. 장애인의 날과 장애인 직업 재활의 날에도 캠페인을 진행한다. 지난 4월에는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 화장실 이용 인식개선을 위한 ‘모두의 화장실’ 캠페인을 전개했다. 캠페인 기간 내 특정 제품 매출의 1%를 기부하고, 서울시와 함께 수리가 필요한 공공 장애인 화장실을 개‧보수하기로 한 것이다. 이외에도 연중 많은 기업과 지속 가능 발전(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 ESG) 관련 협업을 기획‧진행하고, 사회복지단체에 물품 기부도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구밭은 직원의 50% 이상을 발달장애인으로 고용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더불어 발달장애인 고용 문제에 관심을 두고, 해결에 동참하는 회사가 더 많아지도록 본보기가 되고자 노력한다. 이를 위해 일반 회사에서 직원 능력을 발굴하고 적재적소에 투입하듯 동구밭은 발달장애인이 어떤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검토 및 연구하고, 그들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박상재 공동대표는 “발달장애인 고용에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선 장애인 직원만을 무조건 배려하거나 비장애인 직원을 역차별해선 안 된다. 강요가 아닌 설득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한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없는 브랜드 동구밭의 비누바를 만드는 모습. ⓒ Donggubat Inc. “동구밭이 사회에 큰 변화를 이끌었다고는 아직 생각하지 않습니다. 갈 길이 멀죠. 다만 화장품, 생활용품 패키지나 기업 대표 명함에 점자가 인쇄되기 시작한 것을 두고 업계 사람들은 ‘동구밭 덕분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뿌듯합니다. 앞으로도 동구밭은 더 많은 발달장애인을 고용하고, 그들이 일할 수 있는 가능성과 사회의 관심을 키울 것입니다.” 스스로를 ‘마을 어귀’라고 칭했듯 동구밭의 노력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지속 가능한 일상을 만드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인간과 동물, 환경 등. 드넓은 동구밭 안에서 수많은 가치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날을 그려본다.

동네 사랑방이 되어가는 약국

Lifestyle 2024 SUMMER

동네 사랑방이 되어가는 약국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 그늘처럼 아무 때나 잠시 쉬어가거나 이웃끼리 마음을 나누는 장소를 일컬어 한국인들은 ‘동네 사랑방’이라고 표현한다. 동네 사랑방은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오가며 안부를 묻고 정을 쌓아가기 때문이다. 정초롱(丁초롱 Jeong Cho-rong) 약사가 고향 영월에 차린 그녀의 약국은 도시화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영월에서 작은 약국을 운영하는 정초롱 약사. 그녀의 약국은 약을 구입하려는 손님뿐만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할머니,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 짐을 맡겨놓는 사람들도 오가며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다. 그녀의 하루는 단순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매우 바쁘다. 휴일인 주말을 제외하면 아침 9시에 출근해서 퇴근하는 오후 6시까지 약국에서 손님들을 만난다. 조금 한가할 때면 틈틈이 피로회복제 같은 상품 스티커나 약국에 붙일 포스터 디자인 작업을 한다. 오며 가며 쉬어가는 곳 약국 안에서 늘 정신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기 일쑤지만 그녀는 안에 있어도 사계절을 오롯이 느낀다. 약국 안 커다란 통유리 바깥으로 나무들이 철마다 옷을 갈아입기 때문이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건 자연만이 아니다. 이 약국에는 잠시 짐을 맡기고 가는 고객들이 꽤 있다. 근처 시장이며 마트에서 장 본 것을 이곳에 둔 뒤 병원, 은행, 군청 등에서 볼일을 보고 오는 단골손님들이다. 그들이 맡겨 둔 장바구니 안에는 지금의 계절을 알 수 있는 채소며 과일이 들어있다. “이것 좀 맡아달라고 말씀하실 때 어머님들 표정이 참 귀여우세요. 이 공간을 편하게 생각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한 마음이에요. 제가 꿈꿨던 모습이거든요.” 약국에는 손님들을 위한 휴식 테이블이 있다. 간식도 비치되어 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쌍화탕(雙和湯 피로 해소와 감기 완화에 좋은 한방 드링크제)과 약과(藥果 한국의 전통 과자), 비타민이나 자일리톨이 함유된 캔디 같은 것들이다. 약이 나올 때까지 잠시 앉아 기다리는 테이블이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손님들도 많다.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를 기다리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갈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亭子나무, 집 근처에 있는 큰 나무) 그늘처럼, 손님들이 아무 때나 쉬어가며 오가는 이들과 마음을 나눈다. 약사세요 악국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동네 ‘사랑방(舍廊房)’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복약 상담 “단골손님이 대부분이라 방문하시는 손님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 건강도 상담하기도 해요. 되도록 자세하게 설명해 드려서, 우리 약국을 이용하는 분과 그 가족이 좀 더 건강한 삶을 사시도록 돕고 싶어요.” 한국에선 약국과 약사의 역할이 크다.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약국에서 약사의 설명을 듣고 약을 구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병원이나 의원이 많지 않은 시골에선 당장 병원을 가야 할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약국의 역할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숙취 해소, 피로회복제 등 증상에 따라 필요한 약을 묶은 패키지에 직접 디자인한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정초롱 약사. 특히 이곳 영월군(寧越郡)에는 젊은이들보다 노인 인구가 많아 약사의 복약지도도 아주 중요하다. 정초롱 약사는 그 임무에 충실한 약사다. 평소 어떤 불편을 겪는지, 어떤 음식을 즐겨 먹고 어떤 약들을 복용 중인지 꼼꼼히 묻고 답한다. 손님이 잘못 알아들을까 봐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일이 그녀에겐 전혀 번거롭지 않다. 정확한 상담으로 환자의 건강 상태가 좋아질 때마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잊지 못할 일들이 많아요. 어느 날은 모자를 쓰고 오신 중년 여성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분이 항암 치료 중인 걸 알게 됐어요. 잘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를 드리고 싶어 손을 꼭 잡아 드렸는데 왈칵 눈물이 나더라고요. 당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곤 손을 잡아 드리는 것이 전부였는데도, 그분이 정말 고마워하셨던 기억이 나요. 지금은 완치하셔서 건강한 모습으로 약국을 찾아오시고 있어요. 뵐 때마다 애틋해요.” 치매 관련 영양제를 사러 왔던 중년의 여성분도 기억에 남는다. 약을 추천하기 위해 그녀가 이런저런 질문을 건넸더니, 손님의 어머니가 치매를 앓아 곧 요양원에 가신다고 했다. 그날도 그 손님과 같이 울었다. 건넬 수 있는 위로의 말이 없어 마음 아팠지만, 속상한 마음을 나누며 함께 울고 난 뒤 손님이 보여준 미소가 여태 기억에 남아 있다.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병을 치료할 순 없지만, 상대방이 다시 힘낼 수 있는 마음을 건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가 경청과 공감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이유다. 고향에서 누리는 행복 영월군은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이다. 강원도 남부에 자리한 작은 도시로 산과 계곡, 강과 호수가 수려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 눈부신 땅에서 그는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도시의 약학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다가, 2019년 4월 이곳에 약국 문을 열면서 다시 왔다. “대학 졸업 후엔 도시의 약국에서 근무 약사로 2년 반 정도 일했어요. 처방전을 받아 약을 짓는 게 주된 업무였는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밀려드는 처방전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손님들께 약에 대한 설명조차 제대로 해드리지 못했거든요. 어느 날 문득 기계처럼 약을 짓는 것 말고 약 하나를 드리더라도 손님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만의 약국을 열기로 결심한 거죠.” 처음엔 일하고 있던 충주시(忠州市)에 약국을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땅한 자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고심이 깊어 가던 어느 날 영월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30년 넘게 옷 가게였던 지금의 약국 자리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시골 약사로 지내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먹었다. 따뜻하게 소통하는 약국을 만들기에 고향처럼 적합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어느 집 딸인지 잘 아는 손님들은 자식 같고 조카 같은 그녀를 진심으로 반겼다. “개업한 뒤 1년이 채 안 돼 코로나19로 난리였어요. 마스크 대란이나 진통제 품절 같은 일들을 차례로 겪으며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손님들과 함께 견뎌내면서 더 단단한 유대감이 생긴 것 같아요.” 일상으로 돌아온 요즘, 지난 몇 년과는 다르게 약국에서도 잘 팔리는 약이 달라졌다. 전에는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 주로 팔렸다면, 요즘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약의 판매가 크게 늘었다. 면역력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커진 것이다. 그는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건강정보를 기억하고 고객별로 기록도 해둔다. 아는 만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옆집의 수저 개수도 안다’는 우리의 옛말처럼,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웃들의 정보가 쌓여간다. 웃음이 또 하나의 치료제가 되다 약사세요 약국에는 익살스러운 풍경이 곳곳에 있다. 뇌, 눈, 간, 위 등의 장기가 그려진 캐릭터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 캐릭터는 도시에서 근무 약사로 일할 때 SNS(www.instagram.com/yaksaseyo_pharmacy)에 재미 삼아 연재하기 시작한 웹툰 속 주인공이다. 손님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방법을 고민하다, 단발머리 시절의 본인 모습을 캐릭터로 만들어 몸속 장기와 해당 약품을 벽면에 부착했다. 직접 디자인한 스티커도 퍽 재치 있다. 숙취해소제나 피로해소제 등에 손수 그린 캐릭터 스티커를 붙여 판매하니 손님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 그녀는 직접 만든 캐릭터로 SNS에 웹툰을 연재하고 있다. 약국을 열게 된 이야기부터 약국 손님 유형, 약의 사용법 등 다양한 스토리가 있다. © yaksaseyo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영월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에 만화를 연재하고 있어요. 약국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만화에 담고 있죠. 독자들이 제 만화를 보며 잠시라도 웃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손님들과 따뜻한 마음과 공간을 나누고, 그녀를 닮은 캐릭터로 위트를 전하며, 복약상담으로 건강을 책임진 그녀가 약국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 낮에 틈틈이 구상한 디자인 작업과 만화 작업 마무리를 하다 보면 어느새 영월의 하늘이 별빛으로 가득 차 그녀의 밤을 예쁘게 물들인다.

조화로운 도시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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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도시 전주 한국인에게 가장 전통이 잘 보존된 도시가 어디냐 물어본다면 전북 전주(全州)라 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특유의 목조건물인 한옥(韓屋)이 유독 많은 도시가 전주다. 하지만 전주는 과거 전통에만 안주하는 도시가 아니다. 잘 보존한 과거 위에 다양한 문화와 혁신을 고루 섞어 비빔밥처럼 잘 비벼진 조화로운 도시다. ⓒ 셔터스톡 전주한옥마을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곳 중 하난 오목대(梧木臺)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평평한 대지 위에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전주한옥마을을 한눈에 조망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아니 유일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약 30만 제곱미터에 무려 700채가 넘는 한옥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전주가 국내 최대 규모의 전통 한옥마을로 손꼽히는 까닭이다. 촘촘히 박혀 있는 기와지붕들은 마치 검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조선왕조의 시작 오목대가 전망대 구실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정자 안에 들어가면 현판들이 걸려 있는데, 그 중< 대풍가(大風歌) >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다. 大風起兮雲飛揚 큰바람 일자 구름이 흩날리네. 威加海內兮歸故鄉 온 천하에 위풍을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노라. 安得猛士兮守四方 어떻게 용사를 구해 천하를 지키랴! 오목대 < 대풍가 >의 주인공은 1392년 조선(朝鮮)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재위 1392∼1398)다. 고려(高麗) 말 장수였던 그가 왜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상경하는 길에 전주에 들러 불렀다는 것이다. 훗날 사람들이 이성계가 전주 오목대에 이르러 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새로 세울 조짐을 드러냈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즉 조선왕조의 시작점이 전주였다는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은 서울 북촌한옥마을과 함께 대표적인 한옥보존지구이다. 오목대에서 한옥마을을내려다보면 빼곡한 기와지붕이 마치 검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모습이다. 조선왕조와 전주의 연결고리는 오목대만이 아니다. 한옥마을 남쪽 끝에는 경기전(慶基殿)이 있다. 이때 경기는 경사스러운(慶) 터전(基)이라는 뜻으로, ‘조선왕조가 시작된 곳’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조선 개국 직후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 재위 1400∼1418)이 전주이씨(全州李氏) 가문의 본향(本鄕)인 전주를 비롯해 평양(平壤)과 개성(開城), 경주(慶州), 영흥(永興) 등 주요 도시에 아버지의 어진(御眞)을 모시는 건물을 지었다. 그중 전주에 세운 것이 경기전이다. 한복을 입고 경기전(慶基殿)을 산책 관람 중인 시민들. 경기전은 경기는 경사스러운(慶) 터전(基)이라는 뜻으로, 조선 왕조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기념 장소 역할을 했다. 공간은 크게 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正殿)은 태조의 어진을 모셨던 곳으로, 경기전의 중심 영역이다. 현재 정전에 있는 어진은 모사본(模寫本)이고, 원본(原本)은 정전 뒤 어진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정전 북쪽에 있는 조경묘(肇慶廟)는 태조의 22대조이자 가문의 시조인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하려고 지은 건물이다. 그리고 그사이에 사고(史庫)가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라는, 조선 건국 이래 자그마치 472년 동안의 역사를 매일 같이 수록한 책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 중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에 걸쳐 작성된 기록물로서, 왕조 시절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세계 유일 사례다. 대한민국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언뜻 비장해 보이는 공간이지만, ‘하마비(下馬碑)’와 ‘드므(순우리말. ‘頭毛’라 음차하기도 한다)’에서는 옛사람들의 위트가 엿보인다. 하마비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기서부터는 하마, 즉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라’라는 뜻에서 세운 비다. 경기전 정문 앞에 놓여 있는데, 비를 받치고 있는 두 마리의 사자(獅子) 또는 해치(獬豸) 모습에서 엄숙함보다 조선 석물 특유의 익살스러움이 묻어난다. 정전 뜰에 놓여있는 6개의 드므는 방화수를 담아뒀던 수조들이다. 행여 화마(火魔)가 건물 가까이 오더라도 물 표면에 반사된 자신의 흉측함에 놀라 도망가길 원하는 바람이 녹아 있다.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는 하마비 (下馬碑). 뿐만 아니라 500년에 가까운 조선왕조 내내 지금의 전북과 전남, 그리고 제주도 일대를 총괄하던 행정 관청이었던 전라감영(全羅監營), 전주부성(全州府城) 시설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풍남문(豐南門) 등은 오목대와 경기전, 그리고 한옥마을과 함께 전주의 역사와 전통, 나아가 위상을 상징하는 문화유산들이다. 전통 속에 녹아있는 교류의 자취 전주에 오로지 수백 년 전의 옛것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포용력을 바탕으로 하는 변화의 증거들도 적지 않다. 경기전 바로 맞은편에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는 건물이 우뚝 서있다. 전동성당(殿洞聖堂)이다. 한반도 최초의 순교(殉敎) 현장에 들어선 성당으로, 지난 1914년 완공되었다. 그런데 이 건물을 지은 주요 인부들은 조선인 혹은 한국인이 아니었다. 『전동성당 100년사』에 따르면, 성당 건축을 위해 중국인 목수 5명과 석공 100여 명이 가마를 설치해 65만 장의 벽돌을 찍어냈다고 한다. 그들을 이끈 인물은 강의관(姜義寬)이라는 이였는데, 쌍흥호(雙興號)라는 건축회사를 운영하며 다양한 천주교 관련 건물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라고 하면 으레 조선왕조와 전통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곤 하지만, 알고 보면 오랜 교류의 자취도 숨어있다. 1914년 준공된 전주 전동성당(全州 殿洞聖堂)/ 로마네스크 양식이 돋보이는 건물로, 초기 천주교 성당중에서 그 규모가 크고 외관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전주 하면 중국과의 교류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인들이 전주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의 일이다. 1899년 전주에서 약 5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군산(群山)이 개항(開港)되며 ‘쿨리(苦力)’라 불렀던 인부를 비롯해 상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눈에 군산보다 상업과 문화, 행정 등 여러 방면에서 상위 도시였던 전주가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점차 정착하는 이들이 많아졌고, 그들은 지금의 다가동(多佳洞) 차이나 거리를 중심으로 화교(華僑) 공동체를 일구어 나갔다. 당시 화교들 중에는 해운업이나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60%에 달하는 이들은 요식업과 주단포목(紬緞布木)을 거래하는 상업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전통의 도시에 화교의 유입에 따른 문화적 접변(接變)은 특히 요식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화요리(中華料理)’라는 전에 없던 음식들이 한반도에 전래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화요리는 새 정착지의 식재료를 이용해 현지화되고, 이내 현지인의 입맛을 사로잡아 대중화의 길을 걷는 특성이 있다. 소스인 춘장(春醬)만 중국에서 왔을 뿐 지금은 한국식 중화요리의 대표주자가 된 ‘짜장면’이 대표적인 경우다. 전주 화교는 그 짜장면에 또 한 번 혁신을 가했다. ‘물짜장’이라는 새로운 음식으로 변주해 낸 것이다. 물짜장에는 춘장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기름기 많은 짜장면을 부담스러워하는 한국 손님을 위해 춘장 대신 간장을 주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즉 간장 베이스에 전분을 넣어 걸쭉한 소스를 만든 뒤, 삶은 해물과 밀가루 면 위에 얹은 것이다. 원래의 짜장면과는 전혀 다르게 해물잡탕면에 가까운, 또 하나의 한국식 중화요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대히트를 친 물짜장은 멈춰 있지 않았다. 또다시 ‘순한맛’과 한국인이 좋아하는 ‘매운맛’으로 분화되어 갔다. 그러고는 이내 군산시(群山市)와 익산시(益山市), 완주군(完州郡) 등 인근 도시로도 번져나갔다. 전주에서는 전주화교소학교(全州華僑小學校) 교장이기도 한 화교 류영백(劉永伯) 씨가 운영하는 진미반점(真味飯店), 역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보장(大寶莊) 등이 물짜장 명맥을 잇고 있는 식당으로 정평이 나 있다. 사실 화교의 유입은 전주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식문화를 진일보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불고기나 갈비탕, 잡채, 심지어 순대에까지 들어가는 당면(唐麵) 등 다양한 식재료들이 화교들을 통해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 한국의 식재료와 요리법이 접목되면서 음식문화의 폭발적인 융성을 가져왔다. 그런 면에서 이제는 화교와 전주, 화교와 한국을 굳이 구분해 생각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문화에는 위아래도, 내 것 네 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문명이든 다른 문명을 다각적으로 받아들여 융합하는 과정에서 그간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며 발전을 도모해 왔을 뿐이다. 전주는 그와 같은 교류를 품어주는 품 너른 고장이었으며, 그런 교류의 결과가 곧 전주다. 혁신 끝에 탄생한 전주비빔밥 태초부터 당연한 것도 없었다. 비빔밥 역시 그러하다. 그중에서도 고급스러운 색과 맛, 그리고 고소한 풍미가 일품인 전주비빔밥을 궁중음식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전주비빔밥이 이토록 인기를 얻게 된 데에도 지치지 않는 혁신의 노력이 있었다. 전주 향토 음식인 전주비빔밥은 전주는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전주 비빔밥의 종류는 30여 가지로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현재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주비빔밥 식당은 1951년 문을 연 ‘한국집’이다. 다만 당시에는 비빔밥이 아니라 ‘한국떡집’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떡과 정과(正果)를 판매했다고 한다. 그 뒤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식사 메뉴로 떡국을 팔기 시작했다. 문제는 당시에는 떡국이 주로 겨울에만 먹는 음식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그때 떠올린 것이 사철 장사가 가능한 ‘뱅뱅돌이’였다. 뱅뱅돌이는 전주지역에서 비빔밥을 일컬었던 말로, 주걱이나 숟가락으로 뱅뱅 돌려가며 밥을 비비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이름이다. 당시 시장에서는 대형 그릇에 온갖 나물을 넣어 한꺼번에 비빈 뒤, 손님 주문에 따라 1인분씩 덜어주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전주 역사에 조예가 깊은 한학자 고(故) 조병희(趙炳喜 1910~2003) 씨는 1988년에 전주문화원이 발간한 『전주풍물기 (全州風物記)』라는 책에 실은‘1920년대 남밖장’이라는 글에서 뱅뱅돌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음식점에 들르게 되면 건장한 일꾼이 커다란 양푼을 손에 받쳐 들고 옥 쥔 숟가락 두어 개로 비빔밥을 비벼 대는데, 흥이 나면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빙빙 돌리던 양푼이 허공에 빙빙 돌다가 다시 손으로 받쳐 들고 비벼대는 솜씨는 남밖장만이 가지고 있는 정경이랄까?” 남밖장은 전주부성의 남문, 즉 풍남문 밖에 있는 시장을 가리키는 말로, 지금은 전주남문시장이라 불린다. 낮 시간대 시장도 인상적이지만 매일 밤 열리는 야시장 때문에라도 여행자들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아무튼 남밖장의 이런 뱅뱅돌이를 콩나물과 고사리, 애호박, 표고버섯 같은 채소에 쑥부쟁이와 꽃버섯 등의 계철 채소, 그리고 쇠고기 육회를 얹는 식으로 고급스럽게 재해석해 낸 것이 바로 한국집이었다. 현재 전주에 비빔밥 식당으로 한국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은행과 밤, 대추 등 영양식 재료를 넣은 비빔밥을 돌솥에 담아내는 하숙영 가마솥비빔밥(전 중앙회관), 밥을 미리 초벌 볶음을 해서 내는 성미당 등도 사랑을 받고 있다. 1950년대초 한국집이 비빔밥을 고급화한 이래 셀 수 없이 많은 비빔밥 식당이 자신만의 변주와 혁신을 이어가며 1960~1970년대부터 이미 ‘비빔밥 골목’을 형성하기 시작한 곳이 전주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전주 시민은 물론 전주를 찾는 거의 모든 여행자의 필수 방문지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심지어 2007년 이래 매년 가을이면 전주비빔밥축제도 열리고 있다. 지난 5월 영화의 거리를 비롯해 전주 곳곳에서 진행된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10일간 총 43개국 232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당연한 풍경 너머의 새로운 발견 전주에 가면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5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여러 모순을 극복하며 지탱해 온 조선왕조의 기반에서부터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해 더욱 풍성한 문화를 살찌워온 역사, 그리고 전통에 기반을 두되 한순간도 안주하지 않고 변주에 변주,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며 발전해 온 한국 사회의 저변을 만날 수 있다. 2010년 인구 50만 이상의 대도시 가운데 세계 최초로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된 연유, 2012년 세계에서 4번째로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로 선정된 비밀도 바로 거기에 숨어 있다. 다시 말하건대 전주는 역사와 전통을 단순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성을 바탕으로 발전적으로 ‘계승’해야 하는 이유를 일깨워주는 여행지이다. 모든 사진 © 한국관광공사

한국 재료로 즐기는 파인 다이닝

Lifestyle 2024 SUMMER

한국 재료로 즐기는 파인 다이닝 셰프인 조셉 리저우드는 한국의 식재료를 사랑한다. 여러 상을 받은 그의 레스토랑은 한식 메뉴의 가능성을 재정의하며, 기억에 남는 경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식의 매력에 빠져 한국에 정착한 뒤 퓨전 한식 레스토랑 에빗을 운영 중인 조셉 리저우드(Joseph Lidgerwood). 그는 전국 각지를 돌며 재료를 채집하고, 새로운 식재료를 탐색하는 일에 진심이다. 14개월 가까이 안정적인 수입이나 일상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 조셉 리저우드는 제주도 해변에 앉아 있었다. 산소통도 없이 해산물을 채취하는 제주 해녀들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제가 해녀에게 질문을 할 때마다 그녀는 제 입에 성게를 넣어 주셨어요. 그래서 그냥 거기에 앉아 먹기만 했죠. 해녀들이 물질을 끝내고 잠수복을 입은 채로 스쿠터에 올라타 휑하고 가버리는 장면은 제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라며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호주 태즈매니아 섬에서 자란 리저우드는 집 안의 냉동실을 가득 채울 만큼 해산물을 잡을 수 있는 곳에서의 가족 여행을 즐겼다. 그렇지만 냉동실을 가득 채운 해산물과는 달리 그가 평소에 주로 먹는 음식은 고기와 삶은 야채 그리고 으깬 감자였다. “외식은 약 5~6달러를 내고 펍(Pub) 음식을 먹는 것이었고, 그것이 그 당시 저에게는 최고의 ‘파인 다이닝 경험’이었어요.” 햄버거 뒤집기부터 시작해 실력 있는 셰프가 되기까지 리저우드가 십대가 되었을 때, 그는 어머니를 도와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호주 정부에서는청소년들에게 진로 결정을 위한 교류 프로그램을 장려했는데, 그는 여느 친구들처럼 전기기사나 정비사가 되는 것보다 요리사가 되는 것이 멋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첫 직장은 강가에 있는 도시 프랭클린의 고급 카페였고, 그곳에서 햄버거를 굽는 일을했다. 그 후 그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일했다. 주로 ‘중간에 블루치즈가 들어간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전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직장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스테이크하우스의 셰프 중 한 명이 당시 막 영국에서 돌아왔는데 그에게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은 “지옥 같았지만 보람 있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리저우드가 영국으로 갈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런던에서 그의 첫 직장은 프랑스 요리를 다루는 곳이었고, 그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 필립 하워드가 공동 소유한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더스퀘어(The Square)에서의 일이 포함되었다. 그 다음에는 하워드가 공동으로 소유한 또 다른 런던의 아이콘인 레드버리(Ledbury) 레스토랑에서도 일했다. “그 레스토랑의 주방 일은 완전 미쳤어요. 네 시간 자고 일하는 데 적응하느라 오래 걸렸어요. 어떤 사람들은 한달 만에 그만두기도 했어요. 그냥 레스토랑을 떠나는 게 아니라 아예 요리하는 걸 그만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36세인 리저우드는 여전히 당시 레스토랑에서의 경험이 그의 열정, 헌신, 집중력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엄청난 경험이긴 했지만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죠. 그때 사용한 레시피 중 어떤 것도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요. 다만 당시 배운 것 중 여전히 유효한 것은 어떻게 나의 하루를 더 잘 관리하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깨끗하고, 체계적이고, 빠르고, 정확하게 일하는 실력 있는 셰프가 될 것인가 하는 거죠.” 원스타 하우스 파티 2016년, 리저우드는 색다른 프라이빗 다이닝 서비스 론칭 계획을 하고 있는 친구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며 팝업 다이닝 경험을 제공하는 ‘원스타 하우스 파티(One Star House Party)’를 만들었다. 비교적 간단한 요리, 보통 서너 가지의 요리만 제공했으며, 미식계의 최상층을 목표로 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이들만의 방식은 빠르게 열렬한 팬들 만들어냈다. 이벤트가 매번 매진될 정도였다. 이들이 시도한 독특한 지역 중에는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손님이 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승객들이 이층침대에서 네 가지 코스 요리를 먹었던 베트남의 야간열차도 있었다. 한국의 첫 방문 서울에서 열릴 원스타 하우스 파티를 앞두고 그는 제주도를 방문했다. 이는 그가 경험한 첫 한국이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해녀들과 함께 조개를 채취하고 싶었지만, 해녀들은 경험 없는 그들을 데려가면 작업이 느려질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래서 리저우드는 결국 해변에 앉아 곧 다가오는 다이닝 이벤트를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그가 해녀들의 생활이나 한국 식재료에 관해 물어보려 할 때마다 해녀들은 그의 입에 성게를 넣어주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저우드는 서울의 원스타 하우스 파티를 마치고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서울 행사에 참석했던 한 고객이 서울에 새로 지은 자신의 건물에 공간을 제공하겠다고 연락해왔다. 2019년에 아내 지니의 지지를 받아 리저우드는 레스토랑 에빗(EVETT)을 열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대부분은 푸아그라와 캐비어 같은 고급 재료에 의존하던 시기였는데, 에빗은 약간 색다른 것을 제시했다. 호주 출신 셰프가 한국 식재료를 중심으로 만든 메뉴를 선보인 것이었다. 한국 사람조차 잘 몰랐던 한국 식재료에 대한 탐구와 발효를 접목한 요리로 에빗은 오픈1년 만에 미쉐린 가이드 1스타에 이름을 올렸다. “저희 요리는 퓨전이 아닙니다. ‘혁신적인 한국 요리’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놀라운 지역의 식재료의 가치입니다. 그 식재료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라고 그는 설명한다. 리저우드 셰프는 한국 음식 중 발효의 역할에 경의를 표한다. 또 그는 정기적으로 즐기는 채집활동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이 채집활동을 ‘산에서 훔치기’라고 표현한다. 그는 한국 고유의 식재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며 좀 더 자세히 말했다. “재료가 사용되는 방식이나 음식이 요리되는 방식, 그리고 층층이 쌓이는 맛을 경험하는 것, 바로 이곳 한국에서만 가능하죠. 모든 것이 너무나 역동적이에요. 그리고 사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할 수 없어요. 간장게장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호주에서 식품법상으로 가능하지 않아요. 막걸리 역시 다른 곳에서 만들어지기 어렵죠. 미생물들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어서 프랜차이즈를 내거나 과도하게 위생적으로 만들면 그 마법이 사라져 버려요. 기술적으로는 한국 음식일지 모르지만, 진짜 한국 음식은 아니게 되는 거죠.” 리저우드의 최근 요리 중에는 모과 동치미가 있는데, 일종의 물김치인 이 메뉴를 만들기 위해 그는 멍게, 제주 감귤, 염소젖, 그리고 당귀 뿌리를 사용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맛의 조합 중 하나라고 말한다. 가족 같은 에빗 에빗에는 9개의 테이블이 있고 한 번에 약 25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다. 메뉴는 코스요리로만 제공되는데, 리저우드는 “몇 가지 시그너처 요리를 더해 완성도를 높였다”라고 설명한다. 레스토랑에서는 15명의 셰프가 테이블에서 요리에 대해 직접 설명하고 마무리한다. 리저우드는 복잡하고 정교하게 정제된 음식은 그의 팀이 끊임없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최고의 메뉴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쓴 결과를 보여준다고 믿는다. 그는 외국인이 한국 음식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웠지만, 오픈 이후 그의 레스토랑은 음식비평가와 고객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이 우리가 한국의 식재료를 사랑하는 것을 아주 좋게 봤다는 것이었어요. 큰 동기부여가 되었죠. 저희 음식이 항상 멋지거나 놀랍지는 않지만, 고객들이 음식의 진가를 알아주죠.” 2020년 미쉐린 1스타를 비롯해 여러 가지 상과 찬사를 받은 레스토랑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한국의 파인 다이닝 요리 현장의 절정에 있다. 레스토랑을 리모델링하고, 최근에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으로 이전했는데. 올해 미쉐린 2스타를 받지 못한 것엔 실망했지만, 그는 레스토랑의 성공이 미슐랭 평가에 달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스토랑의 현 상태와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합니다. 멋진 고객들을 모시고 있으며, 그들은 저희 음식을 정말 좋아합니다. 또 저는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식재료를 발견하고요.” 그의 수준 높은 한국 요리를 칭찬하는 긍정적인 리뷰가 넘쳐나지만, 가장 의미 있는 건 비평가들의 절제된 평가이다. 한 평론가는 에빗에서 식사하는 것이 가족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캐러맬라이즈 된 크림을 가득 채운 후 흑마늘 멸치와 수수떡을 올린 메주 도넛이다. 한국 발효의 핵심인 메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요리로, EVETT의 요리를 대표하는 디쉬가 되었다. ⓒ 에빗 특별한 경험 10코스 이상의 메뉴와 전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한국의 술을 곁들여 제공하는 메뉴는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요리사들은 끊임없이 창작의 압박을 받는다. 어떻게 하면 고객에게 기억 남는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끊임없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모든 테이블의 고객들은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지만, 모든 고객이 각 요리와 그 재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리저우드 셰프는 고객들이 좋아하고 가치 있게 여길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각 테이블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가장 좋은 사례는 에빗에서 식사를 한 근처 치킨집 가게 주인 이야기일 것이다. 리저우드 셰프는 맥주 몇 병을 마시며 그에게 레스토랑의 철학을 설명했다. 치킨집 주인은 왜 호주 출신 셰프가 한국 식재료를 이용해 요리하길 원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후 치킨집 사장은 그의 아내와 에빗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음식이 “나쁘지 않네”라고 말했다. 리저우드에게 이 평가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 말은 제 마음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는 말이었어요. 저희가 한국의 식재료가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주기 위한 원동력이 되어주는 말이었죠.”

농업의 미래를 이끄는 만나 CEA(Manna C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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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의 미래를 이끄는 만나 CEA(Manna CEA) 만나CEA는 기술로 농업의 미래를 이끈다. 환경제어시스템과 아쿠아포닉스 농법을 결합해 환경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농업의 불확실성을 보완하고, 나아가 기후위기로 인한 세계 식량 부족을 해결할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환경제어시스템과 아쿠아포닉스 농법 기술로 농업의 미래를 이끄는 만나 CEA의 전경 ⓒMANNA CEA 만나CEA 전태병 대표는 충북 진천에서 40종의 작물을 재배하는 30대 젊은 농부다. 그러나 전 대표는 작물에 직접 물과 비료를 주지 않는다. 그가 귀농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제어시스템이 알아서 작물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또 농업용수 부족과 비룟값 인상, 인력 부족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농부인 동시에 공학자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로운 기술의 탄생 전태병 대표는 창업 전까지 농사를 지어본 적 없었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졸업을 앞두고 로스쿨 진학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 대표는 우연히 적정기술을 알게 되었다. 적정기술이란, 기술이 사용되는 공동체의 정치‧문화‧환경적 측면을 고려해 만들어진 기술을 말한다. “적정기술에 대해 들었을 때, 평소 관심을 두었던 농업과 전공 분야인 시스템제어기술을 접목한다면, 세상에 이로운 기술이 탄생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기후 변화, 농촌 인구 고령화 등 농업 위기에 대한 우려가 계속되고 있었거든요. 재배 환경을 시스템으로 관리할 수 있다면, 농촌이 안고 있는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전 대표는 먼저 대학교 창업보육센터에 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유기농법 전문가, 환경제어기술 전문가 등을 만나 농사 환경에 맞는 제어시스템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센서를 통해 온실 속 온도, 습도, 빛, 이산화탄소의 양과 암모니아, 칼륨, pH 농도 등 식물에 필요한 다량원소와 미량원소를 디지털 데이터로 수집‧관리하는 시스템이다. 그는 시스템 개발에 성공한다면, 세계 어느 지역에서든 최적화된 생장 환경을 구현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회사 이름도 지었다. 만나 CEA의 ‘만나’는 성경에 나오는 단어로 ‘하늘에서 내린 음식’을 뜻하며, CEA는 환경제어농법(Controlled Environment Agriculture)의 약자다. 하늘에서 음식을 내려주듯 농업기술을 발전시켜 전 세계에 굶은 사람이 없게 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친환경 농업의 미래, 아쿠아포닉스 시스템 시스템 개발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특히 작물에 공급하는 유기물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화학비료를 사용하면 쉽지만, 그것은 만나 CEA가 지향하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기술’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던 중 전태병 대표는 아쿠아포닉스(Aquaponics) 농법을 알게 되었다. 아쿠아포닉스는 물고기 양식(Aquaculture)과 수경 재배(Hydroponics)를 결합한 합성어로, 물고기를 키우면서 식물을 재배할 수 있는 친환경 농법을 말한다. 아쿠아포닉스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물고기가 수조 안에서 자라며 배설한다. 이 배설물은 미생물 발효를 거쳐 식물에 필요한 영양분 형태로 공급한다. 영양분과 함께 공급한 물이 농장 바닥에 모이면, 이 물은 정수 필터를 거쳐 다시 수조 안으로 들어간다. 쉽게 말해, 작물 재배와 물고기 양식에 필요한 물을 계속 순환해 사용하는 것이다. 아쿠아포닉스 농법의 장점은 첫째, 물을 절약할 수 있다. 토양 재배의 경우 물을 뿌리면 그대로 땅에 스며들어 재사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아쿠아포닉스 시스템에서는 작물 재배와 물고기 양식에 사용한 물이 순환‧공급되기 때문에 물을 영구적으로 재사용할 수 있다. 실제로 만나 CEA는 2014년부터 10년간 농장을 운영하면서 물 한 방울 버린 적 없다. 또 자연 증발하는 만큼의 물만 추가하면 되기 때문에 일반 농가가 사용하는 물양의 5%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둘째, 유기농법이다. 일반적인 수경재배는 작물의 생육을 촉진하기 위해 화학비료를 사용한다. 그러나 만나 CEA에서는 농약과 합성 물질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물고기의 배설물에서 식물 배양액을 추출해 사용한다. 또 일반 수경재배 시 사용한 물은 화학비료가 녹아들어 재사용하기 어렵지만, 아쿠아포닉스 시스템에서는 물속 유기물 농도를 모니터링해 정화하여 재사용할 수 있다. 데이터 기반의 제어시스템으로 유기물 농도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만나 CEA에서 재배되고 있는 딸기.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에 대비하여 환경 및 생육 데이터를 기반으로 환경을 제어하고 에너지 효율적인 방식을 이용해 사계절 내내 딸기를 생산하고 있다. ⓒ MANNA CEA 소비자도 농부다 환경제어시스템과 아쿠아포닉스 시스템을 실제 농장 안에 구현할 계획을 세웠을 때, 전태병 대표는 충북 진천에서 유리온실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 연고도 없었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달려갔다. 젊은 농부의 새로운 꿈이 자라날 온실을 향해서 말이다. 만나 CEA의 제어시스템을 온실에 적용하자 작은 규모의 온실 속에서 많은 농산물이 생산됐다. 전태병 대표는 “이것이 만나 CEA가 제안하는 농법의 세 번째 장점”이라고 설명한다. “만나 CEA에서는 기존 노지재배와 비교해 일반 작물은 120%, 특정 작물은 1,500% 이상 많은 양의 농산물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자연재해, 병충해 위험도 없고요. 배양액, 온‧습도 제어시스템과 광연시스템을 활용해 일정한 환경에서 작물을 재배하기 때문에 매년 일정한 생산량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아쿠아포닉스 농법으로 기른 물고기는 추가 수익원이 됩니다.” 누군가는 “그 많은 농산물을 어떻게 판매하느냐?”라고 물을 수도 있다. 소비자에게 신선한 농산물을 제공하기 위해 만나 CEA에서는 첫째, 체험농장을 운영한다. 일반 농가에서는 재배, 수확, 포장, 판매 등 과정에서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만나 CEA에서는 체험농장을 운영해 어린이들이 싱싱한 딸기를 직접 따먹도록 한다. 그럼 인력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체험농장 운영 수입을 추가로 얻을 수 있다. 둘째, 생산한 농산물을 샐러드로 만들어 친환경 패키지에 담아 판매한다. 만나 CEA 운영하는 뤁스퀘어에도 재료를 공급한다. 뤁스퀘어는 진천에 있는 미래 농업 복합문화공간으로 카페, 레스토랑 등 외식사업, 숙박업과 농업을 연결한 공간이다. 농업 교육도 이루어진다. 체험농장과 뤁스퀘어를 찾는 고객 수는 월평균 1만 명에 이른다. 팜스테이를 할 수 있는 숙박 시설을 비롯해 뤁스퀘어 내의 건축물들은 국제적인 건축 전람회 코리아 하우스 비전(Korea House Vision) 출품작이다. 하우스 비전은 집을 교통, 의료, 기술과 삶이 교차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담긴 플랫폼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미래 생활을 제안하는 프로젝트다. 2022년 한국 진천에서 열린 하우스 비전은 ‘농(農)’이라는 주제로 일본의 유명 디자이너인 하라 켄야(はらけんや, 原研哉, Hara Kenya)가 총괄하고 만나 CEA가 공동주최한 가운데 뤁스퀘어에서 열렸다. 농촌의 미래 주거 플랫폼을 우리는 여전히 뤁스퀘어에서 만날 수 있다. 농업과 문화가 연결되는 공간인 뤁스퀘어 실내 모습. 농업과 기술, 문화가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으로, 실내 정원, 카페, 체험농장, 스테이, 스마트 팜 등 미래의 농촌을 볼 수 있는 다채로운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 김동규 친환경 산업이자 엔지니어링 산업인 농업 전태병 대표는 만나 CEA를 ‘농업인을 위한 농업 관련 시설과 보조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는 회사’라고 정의한다. 농산물이 아니라, 미래 농업인을 위한 기술을 판매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뤁스퀘어에서 농촌의 미래 가능성을 발견하길 바란다. “귀농하고 싶어도 경험이 없어서 또는 인력, 자본 문제 등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농사 경험과 인력의 부족 문제는 환경제어시스템을 통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 판로 개척이 어렵다면, 사람들을 농장으로 끌어들이면 되고요. 자본이 없다면 농업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들을 투자자로 모집해 공동으로 농장을 운영하고, 수익을 공유해도 됩니다. 생각을 바꾸면, 농촌 안에서도 얼마든지 문제점 대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가 만나 CEA를 통해 농업의 미래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만나CEA가 구축한 기술은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카자흐스탄 등에 수출되고 있다. 아시아 최초 미국 농무부(USDA)로부터 오가닉 인증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최초 식물 공장 건립을 완성하고 추가 수주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나 전태병 대표의 목표는 더 높은 곳에 있다. “저의 목표는 만나 CEA를 최고의 솔루션 회사로 만들고, 농업을 친환경 산업이자 엔지니어링 산업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앞으로도 농촌 문제를 해결하고, 농업기술을 혁신하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연구하겠습니다.” 6,000년 전 농업혁명 발생 이래 인류는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제 만나 CEA로부터 새로운 혁명이 시작될 것이다. 모든 인류가 식량 걱정 없이 살게 되는 초록빛 혁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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