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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보물이 된 누군가의 쓰레기

Lifestyle 2024 SPRING

보물이 된 누군가의 쓰레기 우리의 일상은 이미 플라스틱을 배제하고는 살아갈 수 없다. 져스트 프로젝트는 폐플라스틱, 비닐 등의 쓰레기를 편애하고 수집하며, 이를 소재로 일상의 물건을 만든다. 쓰레기가 ‘애물’에서 ‘보물’로 자리매김하는 그날까지 진지하게 연구하고 디자인한다. 리사이클 플라스틱으로 제작한 블록 세트. 4개의 피스가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장식품, 비누 등을 놓는 트레이나 티코스터 등으로 사용할 수 있다. ⓒ 져스트 프로젝트 지속적 팽창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를 연속시킨다. 이에 따라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가 만연해진 시대가 됐다. 생산과 유통, 소비와 폐기까지 이 모든 과정에는 탄소 배출이 수반된다. 기후 위기를 초래한 주요 원인으로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가 명백하게 지목된 이유다. 생산과 소비에 윤리적 관점 더하기 탄소 중립으로 향하기 위해 생산과 소비 과정에 윤리적 관점을 곁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생산 방식에 있어서는 버려지는 자원에 디자인을 더하거나 활용 방법을 바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는 업사이클 문화가 영향력 있는 움직임으로 자리 잡았다. 업사이클은 2002년 미국의 건축가 윌리엄 맥도너(William McDonough)와 독일의 화학자 미하엘 브라운 가르트(Michael Braungart)가 던진 화두다. 이들은 2003년 발간된 『요람에서 요람으로(cradle to cradle)』라는 책을 통해 생태계의 순환 과정을 제품 설계에 적용해 산업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쓸 만하고 유용한 소재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생을 마감하지 않고 새로운 제품으로 재탄생할 수 있도록 기술과 디자인으로 자원순환 아이디어를 모색하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한 편에서는 윤리적 생산이 이루어진다면 윤리적 소비가 수반되어야 한다. 져스트 프로젝트같은 브랜드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그 실천의 하나다. 리사이클 플라스틱으로 제작한 큐브형 홀더. 가운데 홈이 있어 명함, 사진, 인센스 스틱 등을 꽂아 사용할 수 있다. ⓒ 져스트 프로젝트 하고 싶은 일로 만드는 변화 자원순환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간추려 말하면 어떤 물건을 아껴 사용하고, 다시 사용하고, 재활용하는 방법이다. 이 모든 영역에서 활발하고 지속적인 실천이 이뤄져야 탄소중립에 유의미한 순환이 이뤄진다. 져스트 프로젝트는 올해로 12년 차인 기업으로 지속가능성에 대한 메시지를 꾸준히 전하고 있는 디자인 브랜드이다. 쓰레기를 소재와 자원으로 바라보고 수집하여 쓸모 있는 물건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그들의 주요 일이다. 이외에도 업사이클링에 관한 전시와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한다. 또한 매거진을 발행해 자원순환을 위한 생태계를 조망한다거나 다양한 워크숍을 통해 업사이클링 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힘쓴다. 져스트 프로젝트의 움직임이 눈에 띄는 이유는 이영연(李永緣, Yi Young-yeun) 대표가 정의하는 브랜드 방향성에 있다. 져스트 프로젝트를 환경 운동의 하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들에게는 영감을 주거나, 소비자의 기호와 취향에 따라 필요한 제품을 제안하는 디자인 브랜드로 정의한 것이다. 지구를 지키겠다는 거창한 의무나 의욕이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물건을 만드는 데 의미를 두는 것이다. 마치 ‘그냥(져스트)’이라는 이들의 이름처럼 말이다. 져스트 프로젝트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 쓰레기 > 는 쓰레기를 좋아하고 모으고 탐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잡지의 표지는 버려진 전단지나 인쇄물 등을 사용하여 같은 표지가 하나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 져스트 프로젝트 쓰레기의 변신 져스트 프로젝트가 선보이는 제품들은 어떤 쓰레기를 재활용해 만들었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그들이 디자인한 제품을 보면 어떤 쓰레기를 활용했는지가 제품명에서도 드러난다. ‘I was t-shirts’, ‘I was lavel’, ‘I was foil’, ‘I was straw’처럼 말이다. 버려진 티셔츠로 만든 러그, 버려진 라벨로 만든 가방, 버려진 과자봉지와 빨대로 만든 지갑과 파우치 등이다. 이들은 쓰레기가 영감의 소재이자 즐거움의 대상이라고 말할 정도로 쓰레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남다르다. 우리가 흔히 먹고 버리는 과자 봉지만 봐도 그렇다. 과자 봉지는 삼중지 이상으로 다른 플라스틱 소재가 접합되어 있어 재활용이 어렵다. 그러나 져스트 프로젝트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과자 봉지는 튼튼하고 방수 기능까지 겸비한 질 좋은 소재다. 버려진 과자 봉지를 활짝 펴고 기름기를 깨끗이 닦아낸 후, 다양한 크기와 용도로 만들어낸 파우치는 생각보다 탄탄하고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여러 종류의 과자 봉지로 만들어진 만큼 결과물 역시 모두 다른 모습, 하나하나 살펴보며 취향에 따라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과자 봉지로 만든 파우치가 ‘I was foil’이라면 ‘I was t-shirts’는 러그다. 한눈에 봐도 탄탄함이 느껴지는 이 멋스러운 러그는 헌 티셔츠를 길게 자르고 손베틀로 직조한 뒤 손수 바느질해 마무리했다. 여기에 사용되는 티셔츠를 고를 때는 면 티셔츠만 선별하기 때문에 완성된 제품 역시 세탁기에 돌려 쉽게 세탁할 수 있고, 소재의 특성상 각기 다른 패턴이 만들어져 유니크한 디자인으로 완성된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손베틀로 촘촘하게 원단을 엮는 제작 방식 덕분에 쓰레기로 만든 러그라는 사실을 차치할 정도로 예쁘고 퀄리티 또한 우수하다. 져스트 프로젝트에게 쓰레기는 자원이고 보물이자, 아이디어의 출발이라는 설명에 수긍이 간다. 플라스틱의 가능성 져스트 프로젝트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단단하게 성장해 온 비결은 비단 쓰레기를 이용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해온 것 때문만은 아니다. 다양한 브랜드와 기업, 사회공헌 팀과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져스트 프로젝트가 가진 역량을 필요한 곳에 적극적으로 발휘해 온 궤적에서 그 비결을 알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2022년 서울 디자인페스티벌에서 노플라스틱선데이와 함께 기획한 플라스틱 전시가 손꼽힌다. 노플라스틱선데이는 플라스틱 쓰레기의 지속가능한 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힘쓰는 브랜드다. 져스트 프로젝트는 기획으로 참여해 국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구/산업 디자이너를 집합시키고 재생 플라스틱을 주제로 각자의 디자인 언어를 반영한 가구를 만들도록 제안했다. 참여 디자이너는 저마다 익숙하게 사용하던 재료 대신 재생 플라스틱 판재를 이용해 아름답고 유용한 가구를 만들어냈다. 이 프로젝트는 참신한 디자인으로 재생 플라스틱에 대한 가능성을 활짝 연 이벤트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환경 기후 문제에서 늘 커다란 문제이자 화두로 다뤄진 폐플라스틱의 기능적이고 심미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다. 이외에도 NGO단체인 팀앤팀과 함께 만든 다이어리도 인상적이다. 다이어리 커버로 폐페트병을 100% 재활용한 리사이클 폴리에스터 소재를 사용하고 이후 파우치로도 재사용이 가능하도록 디자인한 것이 특징으로 제품의 탄생부터 폐기까지 생애주기를 고심한 결과다. 이렇게 만든 다이어리의 수익금은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동아프리카 주민들의 식수 자원을 위해 사용되어 더욱 뜻 깊은 프로젝트였다. ‘Plastics’는 져스트 프로젝트와 노플라스틱선데이가 기획한 프로젝트로, 2022년 10명의 아티스트와 함께 작업한 작품을 선보였다. ⓒ 져스트 프로젝트 좋은 물건의 재정의 날로 증가하는 어마어마한 쓰레기 문제는 환경 오염과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큰 화두라는 것뿐 아니라 생산과 소비 시스템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갖게 한다. 모두가 탄소중립이라는 공통된 지향점을 향해 방향을 바로잡고 물건을 기획하는 단계, 소재를 고르고 디자인하는 과정, 물건의 쓰임을 다한 후 폐기되는 모든 물건의 여정을 고려하는 것을 기본으로 다양한 시도와 실험이 이뤄져야 할 때다. 져스트 프로젝트는 지난 10여년 간 좋은 물건, 제안하고 싶은 디자인을 정의하고 ‘그냥’ 밀고 나가는 방식으로 행보를 꾸준히 이어왔다. 이들의 방식은 재활용, 업사이클 문화를 더욱 전달력 있게 제시하는 사례로도 인상 깊지만, 소비자들에게 좋은 브랜드의 기준을 다시 생각해 보게끔 한다.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한 예술가의 런치박스‘쓰레기 뷔페’. 품질이 고르지 못해 선택받지 못한 식재료로 만든 식사와 유리, 패브릭, 플라스틱 등 다양한 쓰레기를 취향과 기호대로 고를 수 있도록 한 프로그램이다. ⓒ 져스트 프로젝트 유다미(Yoo Da-mi 劉多美) 라이터

수많은 작업이 집약된 푸드 스타일링 세계

Lifestyle 2024 SPRING

수많은 작업이 집약된 푸드 스타일링 세계 푸드 스타일리스트는 음식과 식기 등으로 테이블 공간을 연출하는 일을 한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음식의 질감, 맛, 향 그리고 매무새까지 전달해야 한다. 노력과 창의력을 동시에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모니터로 레퍼런스를 꼼꼼히 확인하며 준비한 음식을 세팅하고 있는 푸드스타일리스트 보선(金甫宣) 씨. 클라이언트의 컨펌은 음식을 준비하고 스타일링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이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큰길에서 살짝 벗어난 골목 안쪽에 지은 지 오십여 년쯤 된 이층집이 있다. 대문은 없고 마당 한쪽에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근처 성미산에 사는 새들이 날아와 쉬어가는 곳이다. 감나무가 환히 내다보이는 통창 안쪽에는 새벽 세 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스튜디오가 있다. 사람들과 온갖 물품이 분주히 드나들고, 환한 조명이 켜졌다가 꺼지고,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호기심 많은 동네 강아지들과 고양이들이 기웃거리는 이곳은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보선 씨(金甫宣)의 작업실이다.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영역은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음식을 직접 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비자 시장을 조사하거나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메뉴도 개발한다. 일의 영역이 넓으니 일과도 바쁘게 돌아간다. 이십 년 넘게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살아온 김보선 씨의 하루하루도 다양한 일들로 촘촘하게 채워진다. 뭐든 잘해야 하는 직업 김보선 씨는 작업실 근처에 있는 집에서 걸어서 출근한다. 보통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서 아홉 시에 작업실의 문을 여는데 외부 촬영이 있는 날은 예외다. 촬영 시작이 아홉 시라면 다섯 시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예전에는 잡지에 실릴 음식을 촬영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판도가 달라졌다. “잡지가 많이 없어지고 광고 시장도 대부분 디지털로 옮겨갔어요. 요즘 들어오는 일은 브랜드SNS 작업, 전시 세팅, 행사 세팅 등이 주를 이루고 주방가전 신제품이 나오면 그 제품을 테스트하고 메뉴를 개발하고 소책자를 만드는 일도 해요.” 이전에는 요리 따로, 스타일링 따로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의뢰인 대부분이 요리까지 다 할 줄 아는 스타일리스트를 찾는다. “요리를 알고 스타일링을 하느냐, 모르고 하느냐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달라져요. 요리가 받쳐 주지 않으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어서 결국 요리를 배우게 되죠. 예를 들어 완성된 볶음요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기름칠을 할지 물엿을 바를지 결정해야 하는데, 그 판단을 하려면 요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해요. 또 고기 종류에 따라 가장 맛있어 보이는 온도가 몇 도인지도 알아야 하죠. 그래서 요리뿐만 아니라 식재료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해요.” 한식, 양식, 중식, 일식 등 요리의 장르도 다양하고 그에 따른 식재료도 무궁무진하다. 그중 특정한 분야만 잘해서는 일을 맡을 수가 없다. “어떤 일이 들어올지 모르니까요. 전반적으로 다 할 줄 알아야 하고 잘해야 해요.” 잘해야 하는 건 요리만이 아니다. 촬영에 필요한 각종 소품도 준비해야 한다.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그릇부터 시작해 그와 어우러지는 테이블보, 냅킨, 수저, 양념통, 꽃 등…. “시안이 촬영 하루 전날 오는 경우도 많아서 뭘 사러 갈 시간도 없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평소 시간 날 때마다 준비해야죠.” 요리연구가, 플로리스트, 코디네이터, 디자이너를 모두 합한 직업이 푸드 스타일리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최고의 바게트 전문가를 가리는 ‘르빵 바게트 챔피언십 2023’의 공간을 연출한 모습. 8m에 달하는 대형 테이블은 수십 여 종류의 바게트와 각종 오브제로 채웠다. ⓒ 김보선(金甫宣) 스물두 살에 찾은 꿈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을 통해 푸드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원래 요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요리 관련 일을 하고 싶었는데 식당에서 일을 하면 같은 요리만 하잖아요. 매번 새로운 요리를 하고 더 맛있어 보이게 연출하고 또 화보로 작업물을 만들어 내는 푸드 스타일링이라는 일이 재미있어 보였어요.” 결심이 선 이후 앞만 보고 달렸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한 다음 본격적으로 꿈을 좇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는 푸드 스타일링을 위한 학교도 아카데미도 없었다. “당시 요리연구가이자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던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하는 클래스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선생님 스케줄이 있으면 수업이 없어지거나 미뤄졌죠.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클래스였는데, 한 달에 겨우 한 번 할 때도 있었어요.” 푸드 스타일링을 배우다 보니 요리를 모르면 안 되겠다 싶어 신라호텔 조리 교육센터에 들어갔다. “거기서 양식을 배운 이후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어시스턴트로 들어가 일을 더 배우려고 했어요. 그런데 배우려는 사람은 많고 자리는 없으니까 조리 경력이 있으면 남들보다 유리하겠다 싶어 파스타 전문점에 들어가서 일을 했어요.” 그 경력을 발판으로 어시스턴트가 되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수업을 일주일에 하루로 몰고 나머지 시간 내내 일을 했다. 졸업 후 다음 단계를 고민하던 그녀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요리 종류와 식재료가 다양했어요. 디저트, 와인 등 다루는 범위도 넓었고요. 견문을 넓힐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일본에서 생활비, 학비,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세 개를 하며 일을 배웠다. 200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부모님이 계신 집 반지하에 조그마한 작업실을 차려 푸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일은 없었어요. 삼 개월에 하나 들어올까 말까 했죠. 멍하니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도서관, 서점에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했어요. 그러다 일이 하나라도 들어오면 연습을 엄청 많이 했어요.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여러 번 테스트하고, 한 컷을 찍는 촬영에도 플랜C까지 만들었어요. 한 번 일을 맡긴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고, 주위에 소개해 주고, 그럭저럭 자리를 잡기까지 5년 정도 걸렸어요.” 원물 자체가 싱싱하고 좋아야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늘 식재료 공수에 심혈을 기울인다. ⓒ 김보선(金甫宣) 먹는 것도 일, 쉬는 것도 일 반지하에서 작업실을 시작한 이후 서너 번을 옮겼고, 지금의 작업실은 8년 전에 이사한 곳이다. 촬영은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잡힌다. 촬영이 없는 날에는 촬영 준비로 분주하다. 시안을 파악하고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고 스태프들에게 할 일을 지시한다. ‘북유럽의 삭힌 청어요리’처럼 생소한 음식을 만들어야 할 때면 식재료를 준비와 레시피 연구, 그리고 테스트도 해야 한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날에는 영수증과 세금계산서 등을 정리한다. 아침은 삶은 달걀이나 고구마로, 점심과 저녁은 거의 배달 음식으로 때운다. “냉장고에 좋은 식재료들이 많지만, 저를 위해 요리하거나 정리할 시간도 여유도 없어요. 거의 매일 새벽에 일이 끝나거든요. 집에선 잠만 자요. 하루 네 시간 정도 자나 봐요.” 가끔 시간이 날 때면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김보선 씨에게는 일의 연장이다. 맛깔스러운 음식을 보면 자동으로 몸이 반응한다. 요리조리 보며 조리법을 탐색하고 또 언제가 같은 음식의 스타일링을 제안 받게 되면 직접 만들어봐야 하니까 말이다. “아이디어가 떠올라야 정리가 되고 실행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한 일이에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을 한다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일을 분리하는 게 불가능해요. 좋아하지 않으면 못 하는 일이죠. 원래 뭐든 조금 하다 금방 포기하는 성격이었는데 이 일은 저한테 맞아요. 할수록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당의 감나무로 날아드는 새들을 바라보는 일이 김보선 씨에겐 짧은 휴식이고 위로이다. 아니 어쩌면 그 역시 또 다른 아이디어의 온상일 것이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소셜미디어 인류학자

Lifestyle 2024 SPRING

소셜미디어 인류학자 이야기와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큰 키의 바트 반 그늑튼(Bart van Genugten) 씨는 2014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이후 그는 결혼하고 인기 많은 유튜브 채널 ‘아이고바트(iGoBart)’를 운영하고 있다. 채널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네덜란드 참전용사에 대해 알려주고 한국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들을 종종 소개한다. 유튜브 채널 아이고바트를 운영하는 바트 반 그늑튼 씨. 그는 유튜브 콘텐츠를 촬영할 때 주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며, 손에 쥐기 편한 작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 바트 반 그늑튼 씨의 첫 한국 여행은 생각보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2014년 스페인 말라가(Malaga)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동안 그는 한국인 여학생과 데이트하고 있었고, 이를 계기로 서울의 성균관대학교 한국어학당에 등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울에 사는 대신 인천의 부평구 서쪽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공공 표지판은 외국인 방문객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인구 8,500여 명인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그레이브(Grave)에서 자란 그에겐 도시 탐색의 기술이 필요치 않았다. “출구가 아주 많은 지하철역은 익숙해지기 어려웠어요. 한국어를 읽을 수 없으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죠”라고 반 그늑튼 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대도시의 젊은이가 되기 위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그렇지만 한국은 지속해서 그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다. 다시 아시아로 석 달 후 반 그늑튼 씨는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일을 시작했다. 일 년이 지난 후 그는 자신이 직장 생활에 완전히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을 그만두고 아시아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몇 주를 보낸 후 6개월 동안 중국, 대만, 미얀마, 베트남, 태국, 필리핀을 돌아보는 배낭여행을 했다. 하지만 그의 여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시아를 돌아보는 여행이 대체로 꽤 심심했어요. 늘 혼자 다녔죠. ‘이게 무슨 삶인가?’라고 자문했어요. 여전히 어딘가를 가고 싶었는데 한국이 가장 익숙했어요. 한국은 저에게 새롭고 완전히 낯설면서도 동시에 아주 편안한 느낌을 주는 묘한 곳이었어요. 서구와 아시아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룬 곳이죠.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었어요.” 결혼과 문화 반 그늑튼 씨는 2017년 초 한국에 되돌아오게 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첫째로, 그는 나중에 그와 결혼하게 될 여성인 김휘아(金輝妸 Kim Hwi-a) 씨를 만났다. “우리는 데이트 앱에서 만났어요. 그녀는 상수동에, 나는 합정동에 살고 있어서 거의 이웃이었죠. 우리는 서로 잘 맞았어요. 근데 그녀를 만났을 때가 네덜란드로 돌아가기 얼마 전이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좀 더 머물러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죠. 서로에 대한 모든 것을 좋아했기에 결혼을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혼했죠.” 2019년에 결혼을 한 후 반 그늑튼 씨와 그의 아내는 서울 마포구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은 한강 옆으로 산책길과 자전거길이 있었고 주변에 여러 대학과 예쁜 가게들, 그리고 젊은이들이 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장소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한국의 급격한 변화는 반 그늑튼 씨에게 끊임없는 매력의 원천이었다. “일제강점기 억압과 한국전쟁을 겪은 나라가 경제적 성공과 민주화를 이루어낸 게 아주 흥미로웠어요. 그 후 아시아 경제위기를 맞고도 10년도 채 되지 않아 세계에 알려진 곳 중 하나가 된 것도요. 저는 인간과 환경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인문지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한국이 어떤 식으로든 더 커지게 될 거라고 느꼈어요.” 그는 한국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동네 고유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며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 귀 기울인다. 유튜브에 도전하다 2018년에 아내의 도움을 받아 반 그늑튼 씨는 ‘섹시그린(Sexy Green)’이라는 유튜브를 시작했다. 환경 이슈에 초점을 맞춰 원래는 친환경 물품을 파는 회사를 시작하는 게 목적이었고 채널의 콘텐츠를 통해 제품을 홍보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행과 다양한 문화에 대한 그의 열정과 관심이 곧 채널의 이름과 방향을 바꾸게 했다. 그렇게 해서 ‘아이고바트(iGoBart)’가 탄생했다. ‘아이고’는 새로운 곳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 반 그늑튼 씨의 욕구를 표현하는 동시에 언어유희이기도 하다. 한국어에서‘아이고’는 감탄사로 놀람과 공감 혹은 슬픔까지 표현한다. 300편이 넘는 유튜브 영상은 3,200만 뷰를 기록했다. 가장 인기 있는 영상 중에는 한국전쟁에서 싸운 네덜란드 참전용사의 인터뷰와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들이 있다. 이 시리즈는 그가 2018년에 북한을 방문한 후 만든 영상으로 시작한다. 그에게 이 시리즈는 네덜란드와 한국 사이의 가장 중요한 관계 중 하나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남자들이 이곳에 와서 싸웠고 그들 중 일부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이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생존하는 참전용사 대부분의 나이가 여든이거나 그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의 채널에 나왔던 이들 중 일부는 이후 돌아가셨다. 이제 살아 있는 네덜란드 참전용사가 100명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마음은 다급하다. 이 시리즈는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기억을 끌어내는 것보다는 참전용사들에게 그들의 희생을 고맙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반 그늑튼 씨는 천생 이야기꾼이다. 혹자는 그를 인플루언서라고 부르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를 ‘기록자’, ‘영상 제작자’, 그리고 ‘유튜버’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이들이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믿는다.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해요. 그것이 저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제 아버지는 10형제 중 막내이고 이미 70세이세요. 아버지의 부모님은 15년 전에 97세로 돌아가셨어요. 그의 조부모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싸웠던 사람들을 알고 있었죠. 이제는 도달할 수 없는 역사죠.” 그가 작업 중인 ‘웰컴 투 마이 동(Welcome to my DONG)’은 서울의 467개 행정구역을 탐구하는 프로젝트다. 벽 한쪽에 그려놓은 지도에 다녀온 동네를 색칠하고 그가 느낀 동네의 특징을 적어놓는다. 발견의 2,000킬로미터 2021년, 반 그늑튼 씨는 번아웃이 왔다. 매주 콘텐츠를 올려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결과물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영상들은 그가 만들고 싶어 하는 것들보다 뷰어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반영했다. 그의 아내는 “인생이 당신에게 뭘 주는지 가봐!”라는 영감을 주는 말과 함께 자전거 여행을 제안했다. 2021년 7월부터 10월까지 그는 약 2,000킬로미터를 해변을 따라 한국을 자전거를 타고 돌았다. 그는 외딴 지역의 풍경과 해안의 경치를 즐겼고, 시간이 멈춘 듯한 곳들을 방문했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시골 지역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여행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선택한 제2의 고향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들었다. “제 아내가 최고라는 걸 배웠죠.” 반 그늑튼 씨는 또한 한국 문화에 대한 사랑을 더 깊이 깨닫는 경험을 했다. 어떤 것도 억지로 꾸며 말하거나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 명쾌하게 표현하는 그는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은 외부 세계에 판매되고 있는 ‘완벽한 이미지’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인종주의와 차별이 있었어요”라고 그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저를 집으로 초대한 아주 친절한 분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여기 내 마을에서 뭐 하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러니까 모든 게 조금씩 다 있었어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하지만 그런 불완전함이 저를 매료시켜요.” 문화 차이 자신을 ‘시골 아이’라고 말하는 반 그늑튼 씨는 시골에서 자라서 이방인에게 인사하는 관습에 익숙했는데 한국의 대다수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저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걸 좋아해요. 젊은이들과 그렇게 하는 게 때때로 힘들지만, 나이 든 분들은 종종 시간을 내서 이야기를 나누죠”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네덜란드 사람들은 아주 솔직하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바로 친구가 되고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한다. 또 자신의 종교, 정치적 소속, 심지어 성생활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네덜란드와 한국의 문화 차이가 특히나 강하다.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어느 순간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고, 대통령에 대해서 혹은 누구를 뽑을 것인지 묻고 싶어요. 네덜란드에서는 이런 이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마도 격렬할 수는 있겠지만요. 서로 반대 입장이어도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여전히 친구로 남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게 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반면에 그가 네덜란드로 돌아갔을 때는 대화 하는 상대방을 배려하여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는 한국의 예절이 그에게 영향을 미친다. “제가 한국 사람이 된 느낌이에요. 사람들의 감정을 좀 더 배려하게 되었죠. 한국에 살면서 나 자신을 좀 더 인식하게 되었어요. 두 나라의 좋은 점들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런데도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이 그저 “네덜란드 사람으로 이곳에 살면서 이 나라에 대해 배우고 있다”라고 말한다. 정말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이 나라의 행복한 이방인이에요. 사람들이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이웃으로 환영하다 작년에 반 그늑튼 씨는 서울 서대문구 가좌동에 있는 전통 시장에 간 적이 있었다. 시장은 특별히 매력이 있거나 깨끗하진 않았지만 그를 끌어당겼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니!’하고 생각했어요. 덜 알려졌지만, 주목할 만한 장소들이 아주 많고 이곳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배울 기회가 많다고 느꼈어요.” 그의 가장 야심적인 유튜브 프로젝트가 뒤따랐다. 서울의 467개 행정 구역인 동에 대한 영상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미 약 40개 동을 찍었다. “지역들이 모두 자기만의 이야기와 역사가 있어요. 각 지역을 흥미롭게 만드는 이 작은 조각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매력적이에요”라고 그는 말한다. 지금까지 만든 동 콘텐츠 중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뽑아 달라고 하자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포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곳은 한국에서의 제 고향입니다. 제가 자란 곳 같은 곳이죠. 길들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잘 알아요. 그래서 고향 같고 그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그는 궁극적으로는 전문가나 지역 주민들과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하며, 유튜브 시리즈를 보완해 책으로 내기를 바란다. 많은 한국 시청자가 댓글로 반 그늑튼 씨는 외국인이지만 한국에 대해 자신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부인한다. “아마 그렇지 않을 거예요. 저는 그저 계속해서 배우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는 교수가 아니에요. 저는 그저 소셜미디어 인류학자라고나 할까요.”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의 열정과 배움의 여정을 공유하길 원한다. “저의 목표는 구독자를 모으는 것이었지만, 그건 아주 표면적인 것일 뿐이에요. 왜냐하면 그다음엔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세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에게 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지 묻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시청하고 즐길 뿐이죠. 사람들이 제 채널에서도 그러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Daniel Bright 에디터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살기 좋은 마을의 비결

Lifestyle 2024 SPRING

살기 좋은 마을의 비결 경상북도 예천(醴泉)은 산악 오지인 동시에 낙동강이 휘돌아나가는 물의 고장이다. 또 조선시대 사회의 난리를 피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여 곳의 피난처를 꼽은 ‘십승지지(十勝之地)’ 마을도 있다. 자연환경에서 비롯되는 풍요로움과 공동체 결속을 위한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예천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이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 한국관광공사 예천의 지리적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가볼 곳이 있다. 회룡포(回龍浦) 전망대이다. 장안사(長安寺)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언덕길을 10분 정도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강인 낙동강(洛東江)의 지류, 내성천(乃城川)을 조망할 수 있다. 동쪽에서 흘러온 물길이 180도 휘어지더니 다시 180도를 돌아 나가는데, 유장하게 흘러가는 그 모습이 마치 비상하는 용의 몸짓을 닮았다. 회룡포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이다. 강들이 만나는 물류망의 핵심   회룡포에서 직선거리로 2킬로미터 남짓한 곳에 삼강주막(三江酒幕)이 있다. 세 개의 물길, 즉 회룡포를 지나 흘러온 내성천과 북서쪽에서 내려온 금천(錦川), 그리고 동쪽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주막이다. 지금이야 고속도로와 철도, 항공로가 주요한 물류 루트지만, 지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물류는 주로 물길로 이어졌다. 수레나 등짐보다 평평한 나룻배나 뗏목을 이용하면 그 어떤 교통수단보다 많고 무거운 물량을 상대적으로 쉽게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룻배나 뗏목이 못 갈 정도로 얕다면 그때부터는 완만한 하천 주변 길을 이용하면 되었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역사가 깊은 도시들의 이름은 ‘주(州)’ 자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巛 또는 川)과 그 사이의 하중도(河中島)를 본뜬 상형자로서, 이후에는 마을을 거쳐 도시를 상징하는 어휘로 확장되었다. 여러 나라들이 그러했듯 한반도 역시 옛 도시들은 거의 모두 하천을 끼고 탄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예천도 마찬가지였다. 삼강주막이 그 상징이다. 지난 1900년까지만 하더라도 나룻배들이 하루에 서른 번 넘게 왕래했던 발 디딜 틈 없이 바쁜 물류의 중심이자 휴게소, 그리고 식당과 숙소였다. 다만 1934년 대홍수로 근방의 건물들이 모두 사라졌고, 지금은 삼강주막과 그 옆에 있는 수령 500여 년의 회나무 한 그루만이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다행히 그 시절 나그네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을 배추전과 막걸리를 옛 삼강주막 바로 옆에 새로 지은 주막에서 맛볼 수 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삼강주막. 과거 삼강나루를 왕래하는 사람들과 보부상, 사공에게 식사를 해주거나 숙식을 제공하던 건물이다. ⓒ 예천군 예천의 대표 축제로 자리잡은 삼강주막 나루터 축제에서 전통놀이를 즐기고 있는 모습 ⓒ 예천군   살기 좋은 마을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을 담아 살기 좋은 곳으로 꼽은 십승지지(十勝之地)는 대개 골 깊은 내륙 오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옥토가 펼쳐져 있고 물류망도 잘 갖춰져 있어 예부터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경상북도 예천에도 십승지지 중 한 마을이 있다. 삼강주막에서 자동차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금당실(金塘室)마을이 십승지지 중 한 곳이다. 마을 안팎에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산재해 있을 만큼 이미 오래전부터 거주지로서 주목을 받아온 금당실마을은 현재 수십 채의 고풍스러운 한옥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한옥들은 약 7킬로미터에 달하는 돌담길로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유유히 마을을 걷다 보면 이내 왜 이곳이 십승지지 중 한 곳으로 일컬어지는지 알 수 있다. 북쪽은 높은 소백산맥(小白山脈)으로 막혀 있고, 마을 주변에는 논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물류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도, 주요 도시 간의 이동로에서는 빗겨나 있어 군사상의 중요성은 작아 보이는 위치다. 순탄하고 풍요롭게 살아가기에 더없이 훌륭한 지리적 장점을 갖고 있다. 마을 북서쪽 끝에 있는 송림(松林)에서는 안전한 마을을 만들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도 엿볼 수 있다. 이 송림에는 900여 그루의 소나무가 800미터에 걸쳐 자라고 있다. 마을 앞을 흘러가는 금당천(金塘川)이 종종 범람하자, 주민들이 수해(水害) 방지를 위해 힘을 합쳐 조림한 숲이다. 수령이 100~200년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그 오랜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풍광도 뛰어나고 역사성도 있어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그리고 요즈음 같은 봄에는 송림도 송림이지만, 송림 근처 용문사(龍門寺)까지 7킬로미터 남짓한 구간을 수놓는 벚꽃길도 일품이다. 금당실마을에 들를 예정이라면 시간을 충분히 잡아야 하는 이유다. 한옥에서 숙박하며 송림 산책을 하고, 이어 벚꽃길도 걸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주민들이 이 마을에서 그저 안빈낙도(安貧樂道)에 안주하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송림의 경우에서처럼 범람과 같은 자연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아가 십승지지 특유의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문화도 발전시켜 왔다. 그 예를 살펴보기 위해 벚꽃길 중간쯤에 있는 초간정(草澗亭)으로 가보자. 조선시대 전통가옥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금당실마을. 청동기 시대 고인돌과 고택 각종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며, 미로 같이 이어진 돌담길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송림도 마을의 볼거리다. ⓒ 예천군 풍요를 바탕으로 꽃피운 문화 초간정은 16세기 조선의 문신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 1534~ 1591)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심신 수양을 위해 세운 정자이다. 계곡 한쪽의 수직 암반 위에 지어 올렸는데, 그 모습이 원래부터 그곳에 있던 것처럼 모나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일교차가 큰 봄에 물안개까지 피어오르면 신비로움이 배가 되는데, 이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사는 십승지지를 넘어 마치 신선이 노니는 상상 속 이상향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초간정이 겉모습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곳은 권문해가 한반도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일컬어지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편찬한 서재이기도 하다. 이 사전은 고대부터 15세기까지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 인물, 동식물, 설화 등을 총망라한 것으로, 모두 20권(卷) 20책(冊)으로 이뤄져 있다. 옛 책을 헤아릴 때 쓰는 단위 중 ‘권’은 내용 분류에 따른 장(章, chapter)의 개념이고, ‘책’은 오늘날 쓰는 낱개 수량을 뜻한다. 즉 『대동운부군옥』은 20가지의 주제를 20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말이다. 권문해의 아들 권별(權虌 1589~1671)이 『대동운부군옥』에서 벼슬을 지낸 이들의 이야기만을 선별해 만든 인물사전식 문헌설화집인 『해동잡록(海東雜錄)』을 저술한 곳도 초간정이었다. 19세기 중반에는 배상현(裴象鉉 1814~1884)이 형법과 논밭과 관련한 여러 제도와 지리 등을 정리한 『동국십지(東國十志)』를, 박주종(朴周鍾 1813~1887)은 조선의 전통문화를 14개의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한 『동국통지(東國通志)』 등을 잇달아 편찬했다. 그런 면에서 예천은 백과사전의 보고(寶庫)와도 같다. 예천의 사대부들은 풍요로움을 향유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것을 바탕으로 지식과 노하우를 타인, 나아가 후세대에 전수하기 위해 애썼고, 실제 이루어냈다. 인공적으로 만든 원림과 조화를 이루며 조선시대 정자 문화를 잘 보여주는 초간정(草澗亭)의 모습. ⓒ 예천군 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지혜 공동체의 안녕과 결속을 위한 절묘한 지혜들도 놀랍다. 예천에는 무려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나무가 두 그루나 있다. 퍼진 가지의 너비가 동서 23미터, 남북 30미터에 달하는 ‘석송령(石松靈)’이라는 거대한 소나무와 그에 준하는 ‘황목근(黃木根)’이라는 팽나무다. 수령 600년이 넘는 석송령이 한국 최초의 재산을 소유한 나무가 된 연유는 이렇다. 이수목(李秀睦)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에겐 자식이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1927년 본인의 토지 6,600㎡를 이 소나무에 상속 등기한 뒤, ‘영험한 소나무’라는 뜻에서 석송령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자식이 없어도 그렇지, 토지를 일가친척이나 친한 이웃 등에게 상속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비밀의 실마리는 나무가 소유한 토지를 임대해 사용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가 꼬박꼬박 임대료를 내고 있으며, 그 임대료로 마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수목은 특정 개인에게 상속함으로써 마을에 분란의 소지를 만드는 것보다는 이웃들이 나무와 토지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으로는 공공의 번영을 위해 쓰이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뜻이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주민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석송령을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행여 아래로 쳐진 석송령의 가지가 부러지지 않게 돌로 가지를 받치고, 겨울이면 가지에 눈이 무겁게 쌓이기 전에 쓸어낸다. 벼락이라도 맞을까 봐 피뢰침도 설치해 두었다. 그동안 석송령의 장학금으로 학업을 마친 학생이 수십 명에 달하기 때문이며, 지금도 혜택을 받는 청소년들이 있어서이다. 석송령에서 자동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황목근도 비슷한 경우다. 매년 5월이면 나무 전체에서 노란 꽃을 피워 황목근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팽나무는 보유 토지의 면적이 석송령의 두 배가 넘는 13,620㎡나 된다. 다만 특정 개인에 의한 상속의 결과는 아니다. 마을의 공동재산이던 토지를 1939년 황목근 앞으로 이전등기(移轉登記)하면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당연히 황목근 소유의 토지에서도 임대료가 발생하는데, 마을의 중학생들에게 매년 30만 원 정도씩 장학금으로 전달된다고 한다. 사실 황목근이 있는 금원(琴原) 마을에서는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각 가정마다 밥을 짓기 전에 쌀을 한 수저씩 떠 모아 공동 재산을 형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1903년의 ‘금원계안(琴原契案) 회의록’과 1925년의 ‘저축구조계안(貯蓄救助契案) 임원록’ 등이 그것이다. 마을 공동체 구성원 가운데 누구에게라도 어려운 일이 닥칠 때를 대비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주는 나무인 석송령. 나무의 키에 비해 가지의 길이가 무려 세 배에 달하는 기이한 모습이다. 옆으로 길게 뻗은 가지를 지탱하기 위해 돌기둥을 받쳐두었다. ⓒ 권기봉(權奇鳯) 진정한 십승지지의 요건 공동체의 결속과 평화를 위해 서로를 배려하는 지혜는 예천의 남쪽에서 절정에 달한다. 거기에 ‘말무덤(言塚)’이라는 것이 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언덕 같아 보이지만, 인공적으로 바위와 흙을 돋워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만든 구조물이다. 오랜 옛날 주민들 사이에 크고 작은 다툼이 그치지 않자, 말(言)을 묻어 버리자며 무덤(塚)을 만든 것이다. 본디 모든 싸움의 씨앗은 말이기 때문이다. 고즈넉하면서도 들이 넓고 물류망이 잘 갖춰져 있어 예부터 십승지지로 이름 높았던 금당실마을과 예천의 곳곳…. 그러나 십승지지는 자연과 지리적 요건이 갖춰졌다고 해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공감,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관심과 배려가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십승지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경북 예천을 여행하다 보면 비록 정답은 아닐지언정 그와 관련한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마을 주민들 간 싸움이 잦자 싸움의 시작이 되는 말(言)을 묻자는 것에서 시작된 말(言)무덤. 이곳에는 무덤과 함께 말조심을 표현하는 각종 문구가 돌에 새겨져 있다. ⓒ 신중식(申中植)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 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문구 취향의 발견

Lifestyle 2023 WINTER

문구 취향의 발견 인간 문명의 역사 속에서 문구는 빼놓을 수 없는 도구다. 안료를 쓴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 무중력 상태 우주에서 기록 수단인 된 우주 볼펜…. 특히 한국은 예부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문구를 ‘문방사우(文房四友)’라 하여 친구로 표현하기도 했다. 역사를 거듭하며 발달해 온 문구는 오늘날 ‘취향의 도구’로 자리하고 있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연필은 누군가에겐 창작의 연료였고, 누군가에겐 추억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역사 속에서 연필을 비롯한 ‘문구’는 수많은 발명품 옆에 항상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종이와 펜 대신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찾는다. 메모장 애플리케이션을 켜서 기록하고, 사진을 찍거나, 녹음하기도 한다. 그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 태블릿PC나 패드로 스케치는 물론 다양한 색과 질감으로 색칠까지 가능하니 훨씬 간편해졌다. 그렇다면 종이와 펜을 비롯한 문구는 미래에 사라질 것인가? 그 답은 ‘아니오’라 확신할 수 있다. ‘디깅(Digging)’ 트렌드와 결합된 문구 문구 마니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다. 모두가 똑같이 스마트폰을 들고, 키보드 자판을 치고 있는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디지털 사회에서 문구는 개인의 ‘취향의 도구’가 되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제품별로 다양한 탄생 일화가 있고, 사용자의 수많은 취향을 맞추기에 이만큼 풍성한 아이템이 있을까. 연필만 하더라도 주로 사용하는 손(오른손잡이, 왼손잡이), 무게, 색, 나무 종류, 촉감, 흑심 진하기 등 각종 조건에 따라 선택지는 무궁무진하다. 유통업계는 이렇게 자신에게 맞는 취향에 집중하고 파고드는 행위를 ‘디깅(Digging)’이란 단어로 표현한다. 한 해 소비 트렌드를 분석하는 도서< 트렌드 코리아 2023 > 에는 ‘디깅 모멘텀(Digging Momentum)’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이는 자신이 좋아하고 선호하는 분야에 더 깊게 파고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국내 최대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PENHOOD)는 디깅 트렌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만년필, 필기구, 손 글씨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은 약 4만 6,000명에 달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펜후드가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오프라인 행사인 펜쇼에서는 몇십 개의 부스에서 다양한 만년필 컬렉션을 선보인다. 다양한 아이템으로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표현하기 좋은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는 누구나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 활동으로 손꼽힌다. ⓒ 모나미 국내 대표 문구 브랜드인 모나미는 서울 성수동에 오프라인 매장인 모나미 팩토리를 오픈했다. 이곳에서는 물건 구매뿐만 아니라, 모나미의 역사와 제품 소개, 체험 등을 통해 브랜드 경험을 제공한다. ⓒ 모나미   팬데믹과 함께 커진 ‘다이어리 꾸미기’ 문구 시장 특히 최근의 문구 취향은 더욱 다양해지고 세분되고 있다. 이는 지난 2~3년 동안 이어진 팬데믹 기간의 트렌드 변화다. 사람들은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아날로그 활동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을 찾아갔다. 그 중에서도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는 특별한 기술이나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 활동으로 꼽힌다. 특히 다꾸는 큰돈이 드는 취미가 아니다. 500~3,000원 사이면 새로운 문구 아이템을 구매하기에 충분하다 보니 진입장벽 또한 낮다. 다양한 아이템으로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표현하는 데 익숙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다꾸 문화가 확산하면서 온〮오프라라인 매장에서 문구 아이템 역시 매출 효자 품목이 되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에 익숙한 세대에게 ‘다꾸’는 색다른 레트로 문화이기도 했다. 빈 노트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손 글씨를 쓰며, 스티커와 각종 패턴이 인쇄된 마스킹 테이프, 종이 등을 붙이는 다이어리 꾸미기는 킬링타임용으로도 제격이었다.   문구 마니아들을 위한 이곳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추억의 도구로 전락한 연필의 가치에 대해 알리는 공간이다. 단종된 제품부터 컬렉션 제품까지 다양하고 아름다운 연필을 큐레이션하고 있다. ⓒ 이승연(李承姸) 동네 문방구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지난 7월 15일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 > 에서는 폐업을 앞둔 문방구의 정리를 돕고자, 일일 영업 사원으로 변신한 출연진들의 모습을 비춘 적 있다. 이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동네의 오래된 문방구, 문구점 수는 점차 줄어가고, 이 자리를 생활용품점, 무인 문구점 등이 대체하고 있다. 사람들의 아쉬움 때문일까. 역으로 사람 냄새, 추억을 담은 문구 공간들은 주목받고 있다. ‘문구’라는 상품에 더욱 집중한 공간들로, 서울의 성수동, 홍대 입구, 종로구, 이태원 등 소위 핫플레이스에 위치해 눈길을 끈다. 국내 문구 기업 모나미(monami)의 오프라인 공간 ‘모나미 스토어’ 역시 젊은 세대들이 꼽는 핫플레이스다. 지난해 성수동에 오픈한 모나미 스토어 성수점은 1963년 출시된 국내 최초의 볼펜인 모나미 153이 만들어진 성수동 공장을 모티브로 하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이다. ‘모나미 팩토리(Monami Factory)’를 주제로 한 이곳에선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 스토어뿐만이 아니라, 모나미의 역사와 제품을 통해 새로운 브랜드 경험을 제공한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체험형 특화 공간에서 내가 원하는 펜을 DIY 해서 만들어 볼 수 있다는 것. ‘DIY 153 시리즈’ 볼펜 만들기, 프러스펜 만들기부터 잉크 랩(Ink LAB) 공간에서는 다양한 색상의 잉크를 조합해 나만의 만년필 잉크 DIY 체험 등이 가능하다. 이 밖에도 다양한 수요를 가진 고객들을 겨냥한 문구 상품들이 즐비하다. 연남동 골목에 있는 ‘작은연필가게 흑심(Black Heart)’은 문구 마니아들에게 입소문 난 공간이다. 흑심은 오래된 연필과 그에 담긴 이야기를 수집하는 공간이다. 주인의 취향과 기준으로 직접 수집한 연필과 그에 관련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곳은 젊은 세대들뿐만 아니라 40~50대 손님들도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단종된 브랜드 또는 과거 디자인의 연필들도 있어 이용객들 역시 흥미로워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듯한 모양새다. 그 밖에도 성수동의 ‘포인트 오브 뷰 서울’, 홍대 ‘호미화방’, 종로 ‘파피어프로스트’ 등은 문구 마니아들이 좋아할만한 창작을 위한 도구를 판매한다.문구 탐험과 여행을 겸하고 싶은 문구 여행자들이라면, 강원도 동해시에 있는 연필뮤지엄(pencil museum)으로 향하는 것도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영국의 ‘더웬트 연필박물관’을 벤치마킹한 이곳은, 연필뮤지엄 대표가 30여 년간 100여 개 국가를 다니며 수집한 나라별 다양한 테마의 연필 3,000여 점을 전시한다. 각종 세계적인 브랜드의 연필과 함께 ‘흑연이 연필로 탄생하기까지의 제작 과정’, ‘역사에 남은 연필의 기록’ 등 연필 관련 역사와 오브제를 한눈에 살펴보기 충분하다.   문구, 스토리를 담다 문구는 없어지지 않겠지만, 해당 시장은 여전히 어렵다. 세대가 어려질수록 문구 소비 행태가 줄어든 것은 물론, 저가상품이 많아지며 경쟁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시장엔 변화가 필요했다. 마치 전기·전구가 확산하면서 양초의 쓰임이 변화한 것처럼, 문구의 용도를 확대하고 디테일한 변화로 차별성을 주기 시작했다. 모나미는 자사의 상품에 스토리를 입히며 주목받았다. 지난해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 에디션 제품 ‘153 ID 8.15’를 출시해 한국 광복군을 알리기도 하고 최근엔 탄생화, 탄생석, 별자리 3가지 의미를 담은 펜 등을 출시하기도 했다. 또한 일회용 폐플라스틱, 코코아 껍질 등을 활용해 친환경 제품을 출시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제품을 업사이클 굿즈로 제작하는 등 지속가능성 측면까지 고려하고 있다. 이처럼 문구는 변화를 거듭해 가며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역할,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채 소비자들의 오랜 ‘친구’로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승연(Lee Seung-yeon) 매일경제 주간국 시티라이프

맨손으로 고치는 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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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으로 고치는 만년필 손으로 글씨를 쓸 일이 도통 없는 이 시대에, 여러모로 불편한 만년필을 사랑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 만년필 한 자루가 그들에겐 작은 행복이고 사치다. 만약 아끼는 만년필이 고장 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의 금이 간 행복을 고쳐줄, 만년필 수리를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여기 있다. 손으로 글씨 쓸 일이 별로 없는 요즘 시대에 만년필을 수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김덕래(金德來) 씨. 그는 이 일이 단순히 펜을 수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잇는 일이라고 말한다. ‘만년필의 미덕, 만년필의 고집을 절반이라도 지닌 사람은 우리 중에 없다’라고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말했다. ‘잉크가 샘물처럼 솟아난다’는 의미의 파운틴 펜을 우리나라에서는 만년필이라고 부른다. ‘천년만년’, 즉 영원히 사용할 수 있는 펜이라는 뜻이다. 물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만년필도 예외는 아니다. 펜촉은 마모되고 자칫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고장 난다. 오래 방치하면 잉크가 말라붙어 제 기능을 상실한다. 수리한 만년필로 쓰는 손 편지 그의 아지트이자 작업실은 방에 딸린 작은 드레스룸이다. 이곳에는 수리를 맡긴 고객들의 만년필, 수리 도구와 색색의 잉크, 그리고 고객들이 보내온 편지와 선물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는 도구 대신 맨손과 손톱으로 만년필을 수리한다. 손끝만큼 예민하고 또 정밀한 도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년필을 구입하기는 쉽지만, 고장이 난 만년필을 수리하는 일은 불편하고 때론 어렵다. 국산 브랜드인 모나미를 제외한 대부분의 만년필은 수입품이다. 국내에서 구입한 수입 만년필이 고장 나면 구입처로 접수 가능하지만, 병행수입 제품을 구입했거나 해외에서 구입한 경우 등은 사실상 수리를 맡길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구입한 제품이라도 손상의 정도가 심각하면 애지중지 아껴온 펜일지라도 수리불가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 또 부모님의 유품이거나 오래된 빈티지 만년필 등이 손상된 경우는 더더욱 맡길 곳이 없다. 이 때문에 만년필 사용자들에게 김덕래(金德來) 씨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만년필 수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이가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아니라 중학생과 고등학생인 두 아이를 둔 1974년생 아버지이다. 경기도 김포시의 아파트, 그 안에서도 방에 딸린 한 평 남짓한 드레스룸이 그의 작업실이다. 갖가지 만년필들과 색색의 잉크병들, 벽에 붙은 메모지들, 작업대와 컴퓨터, 앙증맞은 냉장고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한쪽 벽에 있는 창문으로 손바닥만 한 햇빛이 들어온다. 좁지만 아늑한 공간이다. 그의 하루는 아침 일곱 시 무렵 시작된다.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있으니 늦잠 잘 여유는 없다. “아내와 교대로 아이들 아침밥을 차려주거든요. 아이들을 깨워서 간단한 시리얼 등으로 아침을 챙기고 학교 보내고 나면 아홉 시쯤 되요. 그때부터 제 일과가 시작됩니다.” 그의 손에 맡겨지는 만년필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떨어뜨려 펜촉이 완전히 손상된 경우,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필기감이 이전과 달라진 경우, 실제로는 멀쩡한 상태지만 사용하는 사람이 ‘정상 컨디션인지 모르겠다’라고 느끼는 경우이다. 즉 심각, 경미, 정상, 세 가지로 나뉜다. ‘심각’으로 분류된 만년필의 대부분은 펜촉이 망가진 케이스다. 펜촉은 만년필의 심장이자 가장 비싸고 예민한 부품이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휘어진 부분을 펜촉보다 강한 도구로 펴면 되레 더 심하게 꺾이는 경우가 많아요. 수리할 때 손톱으로 조금씩 펴주는 게 저는 가장 좋더라고요” 도구 대신 맨손을 사용하는 이유이다. 손끝만큼 예민한 도구, 손톱만큼 정밀한 도구는 없다. 펜을 분해해서 펜촉을 반듯하게 잡고, 내부를 세척하고, 다시 결합하여 잉크를 주입하면 일이 끝나는 것 같지만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은 그 후부터다. 수리된만년필을 직접 사용하며 테스트해야 한다. “만년필을 반나절 눕혀두었다가 사용해 보고, 그다음 날엔 하루 동안 세워두었다가 사용해 보기도 해요. 뒤집어서 놔두기도 하고요. 어떤 경우에도 잘 쓰여야 하니까요.” ‘심각’의 경우보다 까다로운 것은 ‘경미’의 경우다. 사용하는 사람이 그만큼 예민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작업할 때도 예민해진다. 사용하다 생길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고 반복적으로 테스트하여 완벽한 상태로 만들지 않으면 안심할 수가 없다. 하루 안에 작업이 마무리될 때도 있지만 길게는 열흘쯤 걸리기도 한다. 작업이 끝나면 수리한 만년필로 손 편지를 쓴다. “펜을 다 수리하면 그 펜으로 편지를 써서 함께 보내요. 편지에는 ‘내가 의뢰한 펜이 이런 과정을 겪었구나’라고 이해하실 수 있는 내용들을 적어요. 왜 문제가 생겼는지, 어떤 조치를 했는지, 어떤 테스트를 거쳤는지 알려드리고 앞으로 사용할 때 도움이 될 내용도 적어요. 편지는 만년필이 이제 이렇게 잘 써진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고, 손 편지가 귀한 시대에 펜으로 쓴 편지를 받는 기쁨을 전하기 위함이기도 해요.” 그 시간에 펜 하나 더 수리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이도 있지만 김덕래 씨에게는 의미 있는 과정이다. 물건을 고치는 일이 마음과 마음을 잇는 일로 바뀐다.   새로운 선택 손상 정도에 따라 적절하게 수리하면 작업이 끝난 것 같지만, 본격 작업은 그 이후부터이다.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하고 수없이 테스트를 반복한 후에야 고객에게 보낸다.   강릉이 고향인 김덕래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삼척산업대학교 토목학과에 입학했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 복무 후 복학해 학교를 다니던 중 길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가 굉장히 재미있다며, 너도 한 번 우리 학교에 대해 알아보라던 친구의 말이 이상하리만큼 마음에 남았다. 친구의 권유로 학교를 그만두고 그 해에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전공과 관련 없는 의류매장 운영, 사회복지사, 해외배송업체, 일식조리사, 자동차 정비, 레저용품 생산회사 등을 전전하다가 2012년 수입 필기구 유통회사에 들어갔다. 내세울 경력이 없는 자신에게 마음을 써주는 사장님에게 보답하려고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열심히 일을 익혔다. 고객관리가 주 업무였는데 ‘고객의 만년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어느 날 들었다. 퇴근 후와 주말에 자신의 만년필을 일부러 고장 내고 고치면서 수리하는 방법을 스스로 익혔다. 고객들의 만년필을 고쳐주면서 만년필 사용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고, 지방의 한 대학교에서 강의해달라는 요청과 교내 웹진에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강의와 연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선택해야 할 시기가 왔어요. 안정된 직장에 다니느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냐. 아내는 어처구니없어 했지만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죠. 그게 2020년이었어요.”   수입은 줄어도 행복은 는다 고객은 초등학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다양하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 연재한 글을 보고 연락한 사람, 고객의 소개를 받은 사람, 인터넷 검색으로 그를 찾아낸 사람들이 의뢰인이다. 전화, 이메일, SNS 등으로 먼저 상담한 후 일이 진행되는 방식을 알려주고 택배로 만년필을 받는다.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경우에는 방법을 알려드려요. 수리가 필요할 경우에는 비용이 얼마 정도 드는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안내한 후 잘 생각해 보시고 보내라고 해요. 여러 변수가 있으니 느긋하게 기다리실 수 있는 분의 의뢰만 받아요.” 적게는 4~5만 원, 많게는 40~5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발생하고 수리 기간은 3개월에서 5개월 정도 걸린다고 미리 설명한다. 한 달에 20~30자루 정도 수리하는데 지금 수리 중이거나 대기 중인 만년필은 40자루 정도이다. “한 달에 20일은 만년필을 수리하는 것에 집중해요. 나머지 10일 중 일주일 정도는 글을 쓰고요. 그리고 2~3일 정도 강릉에 계신 부모님을 만나러 가요. 한 달에 한 번 강릉 가는 것, 2주에 한 번 헌혈하러 가는 것, 그리고 가끔 산책하는 것 외에 외출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주말도 휴일도 없어요. 이 공간이 일터이자 휴식처예요. 창문이 없었다면 밤낮도 몰랐을걸요. 끼니 챙기는 것도 종종 잊어버릴 정도니까요.” 아침 아홉 시에 시작한 작업은 저녁 아홉 시, 열두 시, 때로는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기도 한다.수리, 테스트, 상담, 작업 과정 기록, 손 편지 쓰기, 고객들과 안부 주고받기 등으로 하루가 빼곡하게 채워진다. “한 달에 열 자루도 못 고칠 때도 있어요. 언젠가부터 속도가 오히려 느려졌어요. 전에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젠 만족이 안 되니까.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게 저의 도리죠. 좁은 작업실에 있지만 전 세계의 펜을 만질 수 있는 직업이에요. 작업시간을 줄이면 수입이 나아질지 몰라도 저는 덜 행복할 것 같아요. 그리고 누구보다 진심으로 만년필을 대하는 수리공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 고객들이 있어서 좋아요. 전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 제가 선택한 인생이니까요.”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 작가(Photographer)

빨리빨리 이면(裏面)의 한국, 무주

Lifestyle 2023 WINTER

빨리빨리 이면(裏面)의 한국, 무주 한국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는가? 오랜 기간 ‘빨리빨리’가 한국의 주요 이미지였던 적이 있었다. 사실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전쟁 이후 새로운 도약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내재화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방편이었다. 이 겨울, 당신이 한반도 남쪽의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무주군(茂朱郡)을 여행한다면 단편적인 빨리빨리 이미지 너머에 존재하는 진짜 한국의 숨겨진 단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한국관광공사 덕유산은 남한에서 내로라하는 명산이다. 특히 겨울이면 눈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상고대를 만드는데, 그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 이재형(李在烱) 덕유산(德裕山)은 ‘덕(德)이 넉넉하다’는뜻을 품고 있다. 해발고도 1,614미터의 향적봉(香積峯)을 중심으로 장대한 능선이 남북 방향으로 30킬로미터 넘게 이어져 있다. 그 속에는 해발고도 1,300미터 안팎의 봉우리들만이 아니라 20여 개의 크고 작은 폭포, 13개의 이름난 대(臺), 수십 개에 달하는 못(潭)들이 안겨져 있다. 특히 물돌이가 9천 개에 이를 정도로 굽이굽이 흐른다고 하여 구천동(九千洞)이라 부르는 계곡은 경치가 빼어나 사시사철 여행자들을 불러 모은다. 그 중 인상적인 곳을 추려 ‘구천동 33경(景)’이라 한다. 한국 최고의 겨울 산 등산뿐만 아니라 스키장으로도 유명한 덕유산은 곤돌라를 이용하면 정상인 향적봉까지 20분이면 오를 수 있다. 겨울스포츠와 눈꽃 산행을 즐기려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곤돌라 예약은 필수다. ⓒ 한국관광공사   산의 매력은 두 발로 걸어야 제맛이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눈이 낮엔 햇빛에 살짝 녹는 듯하다가 기온이 내려가면 다시 얼어붙는데, 이렇게 녹았다 얼기를 반복하면 나뭇가지 전체가 마치 유리로 코팅한 듯 투명한 얼음으로 둘러싸이게 된다. ‘상고대’라 부르는 자연현상이다. 그런데 덕유산의 상고대는 다른 곳의 상고대와 달리 훨씬 두껍고 투명하다. 고도가 1,000미터 이상인 데다 습도와 풍량까지 알맞기 때문이다. 상고대가 뒤덮은 나무를 밀치며 걸을 때면 가지끼리 서로 맞부딪치며 소리를 내는데, 직접 들어보지 않고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덕유산은 한국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다. 평소 등산이 익숙하지 않아 산행이 힘들다면, 곤돌라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발고도 1,520미터 지점까지 단 20분 만에 오른다. 곤돌라를 타고 상부 승강장에서 내린 후 향적봉까지 가기 위해서는 완만한 계단 600미터만 걸으면 된다. 등산 채비가 되지 않았다면, 승강장 휴게소에서 아이젠과 스패츠, 등산 스틱 등의 겨울 산행용품을 대여할 수 있다. 덕유산을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스키가 있다. 한국 유일의 국립공원 내 스키장이자, 슬로프 면적이 가장 넓은 스키장인 동시에 제일 큰 표고 차를 보이는 스키장이다. 여러모로 압도적이다. 하이킹을 하든 스키를 타든 왜 덕유산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겨울 산이라 불리는지, 어렵지 않게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절경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자연환경도 어느 곳보다 청정한 곳이 덕유산, 나아가 무주다. 예컨대 무주에서는 1997년 이래 코로나19가 유행한 2020년과 2021년을 제외하면 매년 여름마다 무주반딧불축제가 열리고 있다. 반딧불이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곳에서만 서식하기 때문에 환경지표종으로도 알려져 있다. 덕유산의 북쪽을 휘돌아 흐르는 남대천(南大川) 일대에 특히 반딧불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무주 일원 반딧불이와 그 먹이 서식지는 1982년부터 천연기념물 32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빼어난 자연환경 반딧불이 탐사와 생태환경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되는 무주반딧불축제는 청정환경지표인 반딧불이를 소재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의 가치를 공유하는 무주군의 대표 축제이다. ⓒ 한국관광공사 한반도에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된 것은 지난 1960년대부터다. 1963년 재건국민운동본부는 정부에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했다. 이어 1964년 덕유산 남쪽에 있는 지리산(智異山) 근방 구례군민들이 지리산국립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십시일반 기금을 마련하는 등의 자발적 움직임 끝에 지리산은 1967년 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1975년, 덕유산 일대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한국의 10번째 국립공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덕유산 해발고도 1,300미터 지점에는 낯익은 나무가 보인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빼놓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되는 구상나무이다. 야외용 크리스마스트리로는 키가 큰 독일가문비나무나 전나무를 많이 사용하지만, 실내용으로는 아담한 구상나무를 사용한다. 크기도 크기지만, 가지 사이사이에 여백이 있어 장식물을 달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트리용 구상나무는 20세기 초반에 ‘한반도 고유종’으로서의 구상나무를 개량한 것으로, ‘한반도 고유종’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한반도가 원산지다. 그런데 이 친숙한 나무를 언젠가는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2013년 국제자연보전연맹에서 이 나무를 ‘위기종’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한반도 고유종’이라는 말은 한반도에서 사라지면 멸종된다는 뜻과도 같다. 자칫하다간 크리스마스트리의 원형이 멸종돼 지구상에서 영영 자취를 감출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구상나무의 멸종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응책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4년부터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라는 이름으로 산림조성 및 숲가꾸기 사업을 펼쳐오고 있는 (주)유한킴벌리(Yuhan-Kimberly, Ltd.)가 국립백두대간수목원과 함께 2021년부터 구상나무 보존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실제로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온실에서 6,800여 본의 모종을 키우고 있으며, 그 수를 늘리기 위해 2022년에는 12만 개의 구상나무 씨앗을 수집했다. 덕유산을 비롯해 구상나무가 살기에 적합한 곳을 찾아 이식하기 위해서다. 마치 중요한 데이터를 잃지 않기 위해 백업 작업을 하듯 구상나무를 보존하기 위한 일종의 ‘노아의 방주’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무주 등나무운동장에서 열린 무주산골영화제. 등나무운동장은 등나무 넝쿨이 관중석 지붕에 올라타도록 500여 그루의 등나무를 심어 관중석에 나무 그늘이 만들어지도록 설계된 경기장이다. ⓒ 무주군 백업의 기원 그러고 보면 무주에는 실제 노아의 방주 역할을 해온 공간이 있다. 덕유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적상산(赤裳山)에 위치한 사고(史庫)가 그곳이다. 14세기 말~20세기 초 존재했던 조선왕조는 기록을 무척 소중히 여겼다. 기록을 남김으로써 절대 권력자인 왕의 전횡을 막고, 후대에는 노하우를 전수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대표적인 기록물로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있다. 건국 이래 자그마치 472년 동안의 역사를 매일 같이 수록한 책이다.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 중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에 걸쳐 작성된 기록물로 꼽힌다. 심지어 왕조 시절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세계 유일의 사례다. 이러한 점을 높이 사 1973년에는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었다. 기록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전쟁과 화재, 그리고 무수한 천재지변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되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로 ‘백업’ 덕분이다. 조선은 『조선왕조실록』을 항상 4~5질씩 만들어, 한 질은 수도에 두고 나머지는 여러 지방에 분산해 보관했다. 그냥 보관만 한 것이 아니었다. 3년마다 한 번씩 꺼내 ‘포쇄(曝曬)’라 부르는 작업, 즉 습기 때문에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일을 반복했다.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순간도 있었다. 16세기 말에 벌어진 동아시아 3국 사이의 전쟁 도중이었다. 무주 남서쪽 약 50킬로미터 거리의 전주(全州) 사고에 있던 것을 제외한 모든 『조선왕조실록』이 불에 타 버린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그 유일한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백업하는 것이었다. 재차 5질로 복구해 전국에 분산 보관했는데, 그중 한 곳이 적상산 사고였다. 사고 주변이 절벽이다 보니 적군이 침입하기 어려웠고, 완만한 지대에는 이미 1,500여 년 전부터 있었던 적상산성(赤裳山城)을 고쳐 지어 보완했다. 다만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어 온 조선왕조실록은 20세기 초에 서울로 옮겨졌는데, 한국전쟁 와중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총 1,893권 888책으로 구성된 방대한 양의 『조선왕조실록』은 오늘, 이 순간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익히 이야기한 백업 덕분이다. 태권도원은 경기, 체험, 수련, 교육, 연구, 교류 등 태권도에 관련된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 유일의 태권도 전문 공간이다. 또 일반인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즐길 수 있는 태권스테이도 운영하고 있다. ⓒ 무주군 무주 여행을 해야 하는 까닭 무주는 관광을 넘어 한국 사회가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 들이는 노력의 깊이와 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곳이다. 읍내 남쪽에는 ‘등나무운동장’이라는 곳이 있다. 500여 그루의 등나무 넝쿨이 철제 뼈대를 타고 올라가 여름에는 관중석에 그늘을 만들어 주고 겨울에는 내리는 눈을 막아줄 수 있도록 설계한 운동장이다. 한때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건축물을 지향했던 모더니즘 건축이 놓친 것이 있었다. 바로 인간과 자연의 교감이다. 사실 모더니즘 건축은 자연 위에 군림하려는 듯 왕왕 위압적인 모습을 보였고, 자연도 조경(造景)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낸 인공적인 자연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장을 설계한 건축가 정기용(鄭奇鎔, 1945-2011)의 생각은 달랐다. 자연을 인위적으로 변형해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주인처럼 설 수 있도록 자연을 대하는 시각을 바꾼 것이다. 자연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매년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줄기를 뻗으며 잎이 돋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오면 앙상해진다. 건축가는 앙상한 가지조차 인상적인 등나무를 이용해 천연의 스타디움이 완성되도록 유도한 것이다. 관중석 가장 뒷줄에 올라서서 운동장 한 바퀴를 걸어본다면 세계에 단 하나뿐인 무주 등나무운동장의 매력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무주 여행은 한국의 겨울이 어떤 매력을 가졌는지 감탄하는 계기를 마련해줄지 모른다. 또 그 매력의 가장 큰 근원 가운데 하나인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여정이 될 것이다. 동시에 ‘빨리빨리’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돌보지 못했을 것 같은 한국 사회가 자연과 어떤 방식으로 교감하고 공존해 왔는지를 발견하는 여행이 될 수 있다. 무주에 겨울이 왔다. 당신도 어서 무주에 와야 할 이유다.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 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삶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나누다

Lifestyle 2023 WINTER

삶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나누다 미국인 메건 문(Megan Moon) 씨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메건 문Megan Moon’을 통해 수십만 명의 구독자에게 한국을 소개하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꿈을 좇아갈 수 있도록 영감을 준다. 쌍둥이의 엄마이자 유튜버인 메건 모어(Megan Moore) 씨는 2012년 한국에 왔다. 다양한 인종이 섞인 미국에서 살다가 한민족으로 구성된 한국의 삶이 매우 흥미로웠다는 그녀는 한국 문화에 매료되어 계속 머물게 되었다. 메건 씨가 거실에 있는 넓은 감청색 소파에 앉아 있다. 거실 창가에는 아침 이슬이 반짝이는 잔디밭이 보인다. 파주에 있는 그녀의 집은 고요하고 편안하다. 그녀가 미국 남부에서 자랄 때의 환경도 이와 비슷했는데, 사슴이 가끔 정원에 들르곤 했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서울에서 살다가 남편과 작년에 태어난 쌍둥이와 함께 이곳에 정착하는 중이다. 그녀의 남편은 한국의 유명 인사들을 위한 옷을 디자인하는 패턴 도안가이다. 이들의 삶은 메건 씨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유된다. 수십만 명 구독자들은 그들의 일상을 통해 한국 문화와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미국 문화의 장점을 잃지 않으면서 한국 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데 열중했다. 이제 메건 씨는 문화적으로 자신이 “미국과 한국 그 중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통 창구인 유튜브 메건 씨는 한국어 소리에 반해 한국어 공부에 푹 빠졌고, 이제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그녀는 능숙한 한국어 실력이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이는 그녀의 유튜브 영상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해 그 나라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법의 구조가 정말로 어떻게 사물을 생각하는지를 결정하는 것 같아요.” 유튜브 채널에 올릴 콘텐츠의 기획과 촬영, 편집 등에는 시간도 많이 투입되고 이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조율할 것도 많다. 그래서 전업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90만 명의 구독자를 달성하여 유료 광고 수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주로 브이로그 형태로 제작하며, 한국 사람들의 일상과 좋아하는 곳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가 한국이 낯선 이들에게 전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음식이다. 한국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은 한국 문화 경험의 깊이를 더하는 일이다. 메건 씨의 경우 처음에는 뜨거운 찌개나 국을 먹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그래서 식을 때까지 10분을 기다린 적도 있다. 이제 그녀는 주저하지 않는다. “그냥 바로 먹어요. 적응되었고, 아주 뜨거운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지난번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식당의 음식들이 모두 너무 차가웠어요. 혼자‘온기가 어디로 간 거야?’라고 생각했죠.” 그녀가 또 한 가지 놀라웠던 것은 한국은 요리할 때 재료의 모든 부분을 사용해 아무것도 버리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에서는 식재료의 어떤 부분들이 그냥 버려지기 일쑤다. 예를 들면 고구마 줄기 같은 것이다. “고구마 줄기는 아주 맛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마늘종도요. 미국에서 운전하고 있을 때였어요. 길가에 쑥이 있었어요. 하지만 미국인은 그걸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것들을 이용해 요리하죠.” 그녀의 유튜브 콘텐츠 중에서도 도전과 개인의 목표, 그리고 가족생활을 보여주는 콘텐츠에 구독자 코멘트가 더 많이 달린다. 그녀는 자신의 콘텐츠가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길을 걷다 외국인이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의 영상을 보고 한국에 왔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들은 ‘한국에 오는 게 꿈이었지만 겁이 났어요’라고 말해요.”라고 메건 씨는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콘텐츠를 통해 사람들이 사람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자 한다. “잘 안된 일들도 있어요. 예를 들어 온라인에서 옷을 파는 일 같은 거죠. 하지만 ‘좋아. 그건 나한테 맞지 않는 일이었어. 다른 걸로 해보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죠. 인생은 너무 짧아요. 시도해 보지 않으면 잘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깊은 인상들 그녀는 아이들이 어느 하나에 본인의 역할을 국한하지 않는다. 아내이자 부모, 고양이의 보호자이자 유튜브 운영자, 그리고 자신만을 위한 시간도 꼼꼼히 챙긴다. 메건 씨가 어떻게 한국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에 다시 음식 이야기가 언급되었다. “미국에 있을 때 한국 음식점에 간 적이 있어요. 음식도 맛있고 반찬도 무료여서 대학 다니는 동안 자주 갔었죠”라며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국어를 들었는데 소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레스토랑 직원들이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 메건 씨는 2012년에 영어 강사로 2년간 일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한국을 이제 ‘고향’이라고 부르는 많은 외국인에게 한국의 첫인상은 완전히 새로운 것의 시작이었다. 메건 씨는 처음으로 단일 인종으로 이루어진 곳에 있게 되었고 그것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한국인들에만 둘러싸여 있는 경험은 완전히 새로웠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는 미국에서 온 저에게는 이상했어요.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그저 한 종류의 사람들만 보는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그녀가 적응해야 했던 또 다른 경험은 사람과 쉽게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커뮤니티 특유의 여유로움 덕분에 서로 쉽게 친해지고 지속해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은 집중적인 생활 방식과 회사 생활의 비중이 높아 사람들과의 교제가 쉽지 않았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국 체류를 기약 없이 연장하기로 했다. “한국이 고향 같은 느낌을 받아서 계속 머물기로 결심했어요. 한국이라는 나라와 문화가 저랑 잘 맞는 것 같아요.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국 사람들을 정말 좋아해요. 아주 친절하고 사람들을 잘 도와주죠.”   엄마가 되기 딸 루나와 아들 루빈이 태어난 이후 메건 씨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두 아이는 하루 종일 저를 필요로 하죠. 밥하고 청소하는 것이 다가 아니에요. 아이들이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는 데에 제 도움이 필요해요. 주의와 자극도 필요하고요. 또 아이들이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해요. 작은 일 하나하나를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하죠.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저는 완벽주의자예요. 모든 일을 다 잘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 그냥 여기 앉아서 만화나 영상 등만 보여주지 않으려고 해요.” 그녀의 주요 목표는 아이들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도전을 극복하는 데에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성장 마인드를 갖기 바란다고 말할 수 있죠. 그렇게만 되면 잘 살아갈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편의점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고 해도 말이죠.” 유튜브 운영과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와중에 메건 씨는 자신만을 위한 시간도 잊지 않는다. 그 시간엔 주로 운동을 하는데, 이는 그녀가 정서적으로 충전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2021년에 비키니 모델 대회에 나가기 위해 도전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된 영상을 유튜브 채널에 올렸고, 이것이 KBS 다큐 프로그램에 방영되기도 했다. 혼합된 유산과 정체성 그녀는 아이들이 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며 클 수 있도록 노력한다. “Q&A 내가 흑인이라는 걸 알게 된 한국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제목으로 2013년에 업로드된 영상은 13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 영상에서 메건 씨는 자신이 “흑인이지만 아주 밝은 피부를 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부모 사진을 보여줬다. 그녀의 어머니는 백인, 흑인, 인디언 원주민이 혼합된 사람이고, 아버지는 흑인이다. 그녀가 크면서 흑인이지만 밝은 피부색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피부색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예를 들면 자신의 개성과 행동 등이다. 그녀는 그녀의 아이들이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 어떠한 ‘딱지’도 붙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냥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로 살아가려고 해요. 너는 한국인이야. 너는 미국인이야. 너는 두 개의 언어를 할 수 있어. 우리는 크리스마스도 추석 명절도 축하하는 것처럼요.” 성인이 되었을 때 그녀는 다른 환경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저는 매우 추진력이 강하고 목표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도전하기를 좋아하고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그러한 태도가 아버지 덕분이라고 했다. 그녀가 여섯 살 때 치어리더를 하게 되었는데 축구장을 여러 번 도는 훈련을 해야 했다. 한 바퀴가 2.5킬로미터 정도였다. 그녀는 반복적인 그 훈련이 싫었고 그래서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안 돼, 그만둘 수 없어. 그걸 하면서 뭔가를 배울 수도 있잖아’라고 말했어요.” 그 후 메건 씨의 아버지는 그녀와 함께 매번 달리기를 완주했다. “그 일은 제게 아주 중요했어요.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죠. 아빠가 ‘그만두고 싶어? 그래, 그만둬’라고 말했다면 저는 지금 한국에 있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 삶에 대한 다른 태도와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아요.” 그녀의 다음 도전은 무엇일까?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이 길다고 말한다. 그중 하나는 특히 유별나고,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사실 저는 버스 운전 면허증을 따고 싶어요. 젊은 외국인 여자가 한국에서 버스 운전하는 것, 상상하실 수 있겠어요?” Daniel Bright 에디터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장난감 순환 공장, 코끼리 공장

Lifestyle 2023 WINTER

장난감 순환 공장, 코끼리 공장 아이들에게 장난감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 정서와 신체 발달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도구지만, 쉽게 구입하고 흥미가 떨어지면 또 쉽게 버려진다. 환경 오염과 기후 위기로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문제 의식이 높아지면서 대부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는 장난감 역시 구입부터 수리, 수명 다한 장난감을 처리하는 방식까지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코끼리공장은 미세플라스틱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폐장난감의 분해품을 이용하여 동물 형태의 정크아트를 제작하고 있다. 해당 작품명은 ‘연어떼’이다. ⓒ 코끼리공장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모두 쥐여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하지만 환경 오염과 기후 위기 문제로 인해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문제 의식이 높아지면서 먹고, 마시고, 입고, 노는 모든 생활의 전 영역에서 이제 우리는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 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도 예외는 아니다. 폐기물이 된 장난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대부분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다. 환경 영향이 적은 소재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조금씩 변화가 이뤄지고는 있지만, 문제는 쇠, 고무 등 혼합소재가 포함되어 있어 일반폐기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즉 100%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장난감이라면 일부는 녹여서 재활용할 수 있지만 나사나 전선 등 다른 소재가 더해진 장난감들은 곧바로 매립되거나 소각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장난감이 재활용되지 못한 채 폐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자원 순환이 어렵다는 문제도 있지만 폐기되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환경 물질 또한 큰 문제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버려지는 장난감의 양을 줄이고, 최대한 쓸모를 다하도록 하는 데 있다. 장난감의 생애주기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고민하는 사회적 기업으로는 울산에 위치한 코끼리공장이 있다. 코끼리공장의 시작 21%코끼리공장에 기부된 장난감. 이렇게 모인 장난감은 수리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으로 나뉜다. 수리한 장난감은 취약 아동에게 나눠주고, 불가능한 장난감은 재생 소재로 재탄생되어 사용된다. ⓒ 코끼리공장 ⓒ Elephant Factory 장난감이 버려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아이들이 금세 싫증을 느끼기도 하고, 가지고 놀다 고장 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럴 때마다 얼마간 방치해두다 버려지는 일이 다반사. 세상에는 새로운 장난감이 가득하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흥미가 떨어진 재미 없는 장난감을 억지로 가지고 놀게 하는 것 역시 썩 옳은 방법이 아닌 데다, 고장 난 장난감을 고쳐주는 서비스 업체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이는 장난감 대여관을 운영했던 코끼리공장 이채진(Lee Chae-jin 李埰瑨) 대표의 경험담이다. 그는 많은 장난감이 쉽게 고장 나고 더 쉽게 버려지는 모습을 목격한 뒤, 고장 난 장난감을 고치기 위해 제조사나 유통 업체를 찾아봤지만, 600여 개의 제조 업체 중에서 수리 서비스를 운영하는 곳은 5% 남짓이었다고 한다. 이러니 아이들의 장난감이 쉽게 버려지는 소모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의식을 느낀 코끼리 공장 이 대표는 고장 난 물건을 고치는 데 능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어린이집을 돌아다니며 고장 난 장난감을 고치기 시작했다. 일명‘장난감 수리단’이자 코끼리공장의 전신이다. 어린이집에 장난감을 수리하러 가면 고마움의 표시로 장난감을 기부받는 일도 있었는데, 코끼리공장은 이렇게 받은 장난감을 다른 어린이집에 전달하여 필요한 곳에 나누는 순환 활동을 사업화한 것이다. 매년 어린이집이 방역 업체를 불러 실내 공간과 장난감들을 소독하는 점에 착안해 약품만 뿌리고 떠나는 보통의 방역 업체와 달리, 코끼리공장은 고장 난 장난감들을 모아 수리해 주고, 아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장난감을 기부받는 식으로 장난감을 수거하여 사업 모델을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현재 매년 만 개 이상의 장난감을 수거해 취약계층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만 개의 장난감이라면 적어도 만 명 이상의 아이들의 시간을 풍성하고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소중한 선물이 되는 셈이다. 격차를 허무는 장난감 순환 고장이 난 장난감을 수리하고 있는 코끼리공장 직원들. ⓒ 코끼리공장 아이들은 연령대에 맞는 장난감을 갖고 놀며 발달 단계에 맞는 성장과 발육 과정을 거친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의 아이들이나 복지 예산이 많은 지자체의 보육시설에 다니는 아이들은 좋은 장난감을 다양하게 가지고 놀 수 있지만 취약계층 아이들의 상황은 다르다. 이채진 대표가 장난감을 고쳐주는 봉사단체 장난감 수리단을 사업화해 코끼리공장으로 한 걸음 나아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거한 장난감 중 70%에 달하는 제품을 수리하고 소독하여 넉넉하지 못한 계층의 아이들에게 나눠 준다. 이는 플라스틱 폐기물을 줄여 환경을 이롭게 하는 것뿐 아니라 아이들이 다양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함으로써 시기에 맞는 감각을 발달시키고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다. 이렇게 코끼리공장이 전국의 개인과 기관에서 받는 장난감은 매월 40~60톤에 달한다. 봉사활동으로 시작한 작은 단체가 경기, 인천, 울산 등 4개의 사업소를 운영하는 사회적기업이 된 데에는 너무 많은 장난감이 버려지고 있다는 문제의식, 기후 변화로 느껴지는 환경 오염의 심각성, 장난감 순환을 통해 쓰레기를 줄이고 소외계층 아동을 생각하는 사회적 가치에 있다. 장난감의 모험 재생 플라스틱으로 만든 AI 자율주행로봇 ‘코봇’의 조립 과정에는 코딩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 코끼리공장 코끼리공장에 모인 장난감은 여러 방법으로 순환된다. 우선 수리할 수 있는 상태의 장난감은 봉사자들이 정성껏 수리해 새 생명을 얻고 다른 기관으로 기부된다. 고쳐 쓸 수 없거나 색이 바랜 장난감의 경우 꼼꼼히 분해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장난감에서 나온 전선, 나사, 스피커 등 플라스틱을 제외한 소재들은 각각 따로 모아 다른 장난감을 수리할 때 부품으로 사용한다. 나머지 플라스틱은 소재별로 분류하는데, 녹는점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합성수지, 폴리프로필렌, 폴리에틸렌 등 재활용이 가능하도록 색과 소재에 분류한다. 이렇게 나눈 플라스틱은 잘게 부수고 녹여 또 다른 제품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장난감 플라스틱은 유해성이 적어 혼합소재만 제대로 분리되어도 10배 이상의 부가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코끼리공장은 초분광선별기를 이용해 플라스틱 소재를 95% 순도로 분류해 월 300톤 규모의 재생 플라스틱을 생산하고 있다. 이렇게 만든 재생 플라스틱으로 화분, 열쇠고리 등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코끼리공장의 활동 중 하나이다. 또 단체나 가족 단위를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주제의 체험 행사를 통해서도 재활용 플라스틱의 선순환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장난감이 새로운 소재로 순환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 아이들은 흥미가 떨어진 장난감을 바로 버릴 것이 아니라 자원으로서 충분히 가치 있고 재사용, 재순환할 만한 물건이라는 점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자원순환이 만드는 교육 코끼리공장의 친환경 제품 중 하나인 키링은 폐장난감 플라스틱을 재가공한 플레이크로 만들었다. ⓒ 코끼리공장 코끼리공장에서는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는 장난감을 가득 안고 오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꼬물꼬물한 손가락으로 기부자에 자신의 이름을 직접 적고, 가져온 장난감을 기부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대견하고 사랑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기부하고 난 아이들은 코끼리공장에서 수리하고 소독한 장난감 중 하나를 골라 가져갈 수 있게 했다. 기부의 즐거움이 더해지는 순간이다.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는 장난감을 휙 버리거나 방치하지 않고 필요한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기부 활동은 분명 아이들에게 큰 배움이 된다. 자원의 소중함, 나눔의 보람, 순환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배우는 경험이 되어 환경 보호, 에너지 절약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다미(Yoo Da-mi 劉多美) 에디터

완벽한 취향과 미래의 고민을 담아 만든 매거진

Lifestyle 2023 AUTUMN

완벽한 취향과 미래의 고민을 담아 만든 매거진 『어반라이크』는 일 년에 두 번 발행되는 잡지지만 실체는 무크 또는 단행본에 가깝다. 시작은 매달 발행하는 타블로이드 매거진으로, 도시 감성의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을 주로 다루었다. 김태경 편집장은 대학 시절 우연히 발을 들인 이 일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지나고 보니 선택의 순간마다 자신도 모르게 책을 만드는 일을 선택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김태경(金泰庚) 씨는 도시를 의미하는 ‘urban’에 ‘like’를 더한 만든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어반라이크』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새벽 다섯 시.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 ‘새벽에 하는 일’을 시작한다. 이를테면 차를 마시는 일, 음악을 듣는 일, 책을 읽는 일. 잠으로 충전된 몸과 마음이 차와 음악과 책을, 새로운 하루를 오롯이 받아들인다. 학생 기자에서 편집장이 되기까지 한 가지 주제를 다루는 『어반라이크』는 일 년에 두 번 발행된다. 소모성 잡지 보다는 아카이빙의 기능에 더 충실한 편이다. 도시를 의미하는 ‘urban’에 ‘like’를 더해 만든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어반라이크』의 편집장 김태경(金泰庚) 씨의 새벽시간은 오 년 전쯤 시작되었다. 그전까지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야행성 생활을 이어왔다. “몸이 좀 안 좋았어요. 건강을 위해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운동은 귀찮고 건강식을 챙겨 먹는 것도 번거로울 것 같아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보자’라고 마음먹었어요. 밤에 하던 일들을 새벽에 하는 거죠. 그랬더니 몸이 좋아졌어요. 삶의 질도 달라지고 풍성해진 기분이더라고요.” 그녀가 잡지계에 발을 디딘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각 신문사에서 패션 잡지를 만들 때였어요. 학생 기자를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엽서로 응모했어요. 친구들이 커피숍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할 때, 저는 선배들 서포트하고, 스트리트 패션 취재했는데 그 일이 꽤 재미있었어요.” 전공인 경영학보다 잡지사 일이 신났지만 내심 간직하고 있던 꿈은 따로 있었다. “드라마 PD가 되고 싶었어요. 이 일은 재미있으니까 잠깐 해보는 거지, 그랬는데 제가 졸업하던 1998년도에 IMF가 터졌어요. 그때 어느 잡지사에서 제의가 왔고, 취직하기도 힘든데 잘됐다 싶어 입사했어요. 그때 시작한 이 일을 이 나이 되도록 이 일을 계속할 줄은 그땐 정말 몰랐죠.”   취향과 개성을 담은 잡지 매거진은 해당 호 주제에 따라 책의 페이지나 크기, 인쇄되는 용지와 표지의 모양새도 매번 달리한다. 늘 만들던 잡지지만, 늘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후 여러 잡지사를 섭렵하며 패션 에디터, 프리랜서 등으로 일하다가 2009년, 콘텐츠 전략회사 어반북스에 정착하고 2013년 『어반라이크』를 창간했다. 타블로이드판형의 잡지였던 『어반라이크』가 일 년에 두 번 발행하는 지금의 형태로 변화한 것은 2016년이었다. “패션 잡지사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당시 유행하던 타블로이드 판 형의 잡지를 내게 되었는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많았어요. 꾸역꾸역 매달 마감하다가 어느 순간 이게 맞나 싶더라고요. 독자들은 점점 책을 구입하지 않고, 광고주들은 지면광고에서 웹광고로 옮겨가고….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장용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 선택과 집중을 하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무크 형식으로 제작하면서 한 가지 주제를 다루게 되었어요. 일 년에 두 번 발행하는 잡지가 매체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걸 개성으로 봐주시고 다양성으로 봐주셔서 그때 잘 변화했다고 생각해요.” 이후 『어반라이크』는 ‘호텔’, ‘집에서 일하기’, ‘출판사’, ‘문구’, ‘식사’, ‘그릇’ 등 매 호 한 가지 이슈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무크 형식의 잡지로 변모했다. 볼륨과 판형, 인쇄되는 용지도 주제에 따라 매 호 바꿨다. 그 결과 독자들의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면서 한 번 발행한 책은 ‘과월호’가 아닌 ‘단행본’이 되어 꾸준히 팔리고 있다.   정형화되지 않은 시스템 ‘이게 되나?’ 했는데 ‘이게 되네’ 싶었던 게 또 있다. 출퇴근과 고정인력을 없앤 것이다. “3년 전 어느 날, 출근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어요. 감시하려고 기자들을 책상 앞에 앉혀 놓은 것 같고, 매일 출근하는 게 비효율적인 것 같더라고요. 이러려고 조직을 만든 게 아닌데, 그래서 정리했어요. 직장이 없어진 후배들한테는 다른 직장을 주선해 주거나 프리랜서 일을 맡겼어요. 그 후부터는 책의 테마에 따라 그에 맞는 사람을 찾아 외부 팀을 꾸려 책을 만들었어요. 불필요한 인간관계에 신경 쓰지 않고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죠. 그렇게 2년 동안 자유롭게 지내다가 1년 전에 어시스턴트 두 명을 뽑았어요. 프로젝트가 커지면서 일이 많아졌거든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아닌지 고민도 돼요. 그런데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지만 사람으로 인해 기운을 얻기도 하잖아요.”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요소들을 덜어낸 이후, 기획은 김태경 편집장의 몫이 되었다.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과 기획을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차피 아이덴티티는 제가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결국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거니까요. 아이템이 정해지면 그걸 토대로 해서 세부 기획안을 받고, 역할을 분담하고, 각자 취재해서 원고를 넘기면 제가 취합해서 디자이너에게 보내요. 아이템은 늘 정리하고 있고요." 프로젝트 에디터들은 매번 바뀌지만, 사진작가 한 명과 디자이너 두 명은 십 년째 함께 해오고 있다. 형식과 돈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는 뜻이 통한 이들이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어반라이크』의 정체성은 탄탄해졌다. 틀 속에 갇힌 조직이 아니라 밖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시스템이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안주하지 않는 삶을 위한 질문 그녀의 라이프스타일 역시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공유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있다. 출근도 퇴근도 없고 회식도 야근도 없다. “회의는 화상으로 하고 다른 업무는 이메일 등으로 처리해요. 경기도에 『어반라이크』 사무실이 있어서 자료와 책들은 그곳에 보관하고, 서울에도 사무실이 하나 있어요. 사무실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나가고, 외부 미팅이 일주일에 두어 번 있어요. 주 4일 이상은 일을 하지 않아요. 장소가 어디가 됐든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돼요. 언제든지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요.” 이 말의 숨은 뜻은 ‘안주하지 않겠다, 언제든지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걸음을 멈추고 ‘나는 왜 아직 이 일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도 종종 있다. “무리하지 않아요. 모든 걸 쏟아붓지는 않아요. 예전에 잡지사에서 일할 때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나 자신이 소진되지 않도록 몸을 사려 왔던 것 같아요. 솔직히 독자를 생각해서 만드는 건 아니에요. 너무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했나 싶지만 그래서 버틸 수 있었고 질리지 않고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좋은 편집장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얻었다. “저는 글을 특별히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인터뷰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게 많지도 않고 모든 게 중간이에요. ‘모든 걸 다 잘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잘하는 사람을 찾아서 일을 맡기면 되는 거라는 결론을 내렸죠. 그릇’에 대한 책을 만들기 위해 그릇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요.”   이루고 싶은 꿈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집중하며 살아온 그녀의 다음 스텝은 무엇일까? 그 즐거운 고민이 깊어지고 무르익는다. “한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을 인터뷰해 보니, 그들의 마지막 정착지는 정원 아니면 서재였어요. 저는 식물 키우는 것엔 재능이 없으니, 정원은 아닌 것 같고, 책을 읽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궁극적으로는 도서관이에요. 얼마 전 출장에서 헬싱키에 있는 도서관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보드를 타고 놀고 있고 몇몇 사람들은 잔디밭에 누워서 책을 읽는 등 놀이터처럼 즐겁고 감각적인 공간이었어요. 저도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여행 갈 때마다 책을 엄청나게 사 오는데 혼자 갖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서울과 가까운 곳에 그런 도서관을 만들어서 도서관 할머니로 살고 싶어요.” 『어반라이크』의 다음 스텝도 있다. “해외에 진출하는 게 목표예요. 그래서 해외 도서전 같은 데 참가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도 고민 중이에요. 책을 만드는 일은 컵 하나를 만드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해요. 그런데 가성비는 컵이 훨씬 높죠. 효율적인 방식을 찾아야 해요. 비즈니스로도 성공하고 싶어요. 잡지 업계에 예전 같은 의 호시절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뭔가 찾아보고 싶어요. ‘이것도 지겨운데’, ‘하다 보니 비슷해지는데’라는 느낌이 올 때, 거침없이 변화하기 위해 늘 생각하고 있는 거죠.” 『어반라이크』는 ‘어떻게 하면 도시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품고 태어났다. 그에 대한 답을 김태경 편집장은 갖고 있을까? “제가 지향하는 것은 중간이에요. 위와 아래 사이, 경계, 가운데에 있는 중간층에 대한 고민이 부재하다고 생각해요. 보편적인 것에 대한 콘텐츠, 메시지가 없어요. 그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선택지도 없어요. 그런 걸 찾아가고 있어요. 도 아니면 모가 아니라.” 중간을 탄탄하게 채우면 도시에서 잘 살 수 있다. 매일 새벽, 그녀는 오롯한 혼자의 시간 속에서 그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자신을 위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김태경 편집장이 찾아낸 방법은 또 어떻게 변주되고 확장될까? 마음에 품을 즐거운 기대가 하나 생겼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 작가(Photographer)

당신이 다시 입을 때까지 연구합니다

Lifestyle 2023 AUTUMN

당신이 다시 입을 때까지 연구합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미덕인 패션 산업은 끝없는 재생산과 소비를 부추긴다. 그럴수록 기후 위기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늘 새롭고 특별하면서도 나와 지구의 건강을 지키는 의생활을 어떻게 운영할 수 있을 지 우리 모두 사려 깊은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시입다연구소는 패션산업이 환경에 끼치는 악영항을 알리고 패션의류 폐기물을 줄이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 스타트업이다. ⓒ 다시입다연구소 번화가를 조금만 걸어 보더라도 언제 누가 다 사 입을까 싶을 만큼 많은 옷들이 상점마다 걸려 있다. 전 세계 어느 도시에나 자리 잡은 글로벌 패션 브랜드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새로운 컬렉션을 쏟아내며 유행을 추동하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계절마다 새로운 옷이 대거 만들어진다. 덕분에 우리의 옷장에도 입을 거리는 넘쳐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마다 한 번쯤은 ‘왜 이렇게 입을 옷이 없지?’라고 생각한다. 제로웨이스트 의생활을 실천하는 연구소 새로운 옷을 입고 싶어도 패션 산업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이 마음에 걸리는 이들이라면, 버리기엔 아깝지만 더 이상 손이 가지 않는 옷가지가 부담스러운 이들이라면 다시입다연구소를 주목해 보자. 제로웨이스트 의생활 비영리 스타트업으로, 말 그대로 ‘다시 입기’를 통해 패션 산업의 문제점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재사용의 의미와 가치를 실천하는 연구소다. 주요 활동인 21%파티는 중고의류를 교환하는 장터이자 잔치로 자원 순환을 모색하는 프로그램이다.‘21%’라는 이름은 대략 우리 옷장 속 방치되는 옷의 비율을 말한다. 참가자들은 옷장 한 편에 방치된 옷들을 가져와 다른 참가자들의 옷과 교환해갈 수 있다. 살 빼면 입어야지 하고 몇 해째 입지 못한 원피스, 큰마음 먹고 구매했지만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액세사리,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구매했지만 막상 다른 옷들과는 매치하기 어려운 신발, 추억이 선연하지만 더 이상 지니고 있기엔 손이 안 가는 옷가지 등이 21%파티의 준비물이다. 그래서 가격표 대신 사연표가 달려있다. 구경하는 재미만으로도 쏠쏠한 이곳은 단순한 쇼핑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시간, 옷의 연대기를 들춰보는 흥미진진한 경험이기도 하다. 재활용보다는 재사용 21%파티에 내놓을 의류에 대한 설명과 사연을 적을 수 있는 Goodbye & Hello 태그 ⓒ 다시입다연구소 환경부가 발표한 2021년 전국폐기물발생 및 처리 현황에 따르면 생활폐기물 중 재활용 가능자원으로 분리배출되는 폐의류는 약 11만 8천 톤이다. 여기에 재활용가능 자원으로 분리배출되는 폐섬유류와 종량제방식 등 혼합배출된 폐섬유류까지 더하면 41만 2천여 톤에 달한다. 문제는 지금도 전 세계 공장에서 엄청난 의류가 새로 만들어지고 또 버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다시입다연구소는 이 새로움을 새활용이나 재활용에 두지 않고 재사용에 방점을 둔다. 새활용이건 재활용이건 당장 버려지는 것보다 낫지만 그 역시 재활용, 새활용하는 과정에서 자원이 소모되기는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다. 또한 전 세계 사람들의 옷장 속에 있을 엄청난 양의 옷을 모두 재활용하고 새활용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시입다연구소는 이미 만들어진 옷을 최대한 오래 입고 최소한으로 버리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교환을 통해 의료 폐기물을 줄이고 중고 패션 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힘쓴다. 다시입다연구소의 연구 의의 다시입다연구소의 주요 활동인 21%파티는 중고의류를 교환하는 장터이자 패스트패션에 익숙한 소비자들에게 지속가능한 의문화를 알리는 장이다. 참가자들은 가져온 의류 개수만큼 교환 티켓을 받아 다른 의류와 교환할 수 있다. ⓒ 다시입다연구소 중고 패션의 매력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그중 가장 큰 기쁨은 예상치 못한 것들을 발견했을 때 오는 즐거움이 아닐까. 예컨대 쇼핑에는 저마다 지형도가 있다. 패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평소 원하고 추구하는 스타일이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중고 패션 마켓에는 절대 가보지 않았을 지역, 관심사 밖의 취향과 브랜드, 새롭게 시도해 볼만한 스타일이 넘쳐난다. 또한 유행에 동조할 필요 없이 무궁무진한 시간여행이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한두 해 지나면 멋쩍게 느껴지는 시즌 아이템이 아니라 재치와 센스를 더해 나만의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는 곳. 바로 여기가 고루한 의생활이 풍성해지는 지점이다. 게다가 물물 교환으로 이뤄지는 21%마켓이라면 그야말로 뜻밖의 행운을 얻을 수도 있다. 한 번쯤 시도해 볼까 싶었던 옷도 부담 없이 입어볼 수 있고, 환경 문제에 대한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홀가분함은 더 큰 기쁨이다. 새 주인이 내 옷을 가져가 입는 모습을 보며 맺는 관계 또한 특별하다. 참여자끼리 서로의 옷을 나눠 입음으로써 모두가 우려하는 미래를 조금은 희망찬 미래로 바꿔 나가고 있다. 다시입다연구소가 연구하는 것들은 이렇게 대부분의 패션 산업에서 연구하지 않는, 혹은 외면하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다시입다연구소는 감정적 경험만을 위한 곳은 아니다. 폐기되는 옷의 수명이 연장된다는 사실은 확실하니 분명한 의미가 있다. 옷의 수명이 늘어날수록 폐기하며 발생될 에너지는 줄어들고 물 소비와 탄소 배출량을 더하지 않는다는 점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주 잊는 사실이고 또 모른척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다시입다연구소는 구체적인 수치로 결산한다. 지난 4월, 831명이 모여 10일 동안 진행된 21%파티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18개 팀이 참여하고 2,908벌의 옷을 모아 2,239벌을 교환했다. 이는 물 652,601L, 탄소 17,263kg을 절감하는 효과와 같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확실한 숫자다. 동시에 다시입다연구소의 연구 의의도 선명해진다. 지속가능을 위한 움직임 Goodbye & Hello 태그를 작성하는 참여자. 이 태그에는 언제 샀고 몇 번을 입었는지에 대한 정보와 떠나 보내는 옷에 대한 작별 인사, 그리고 새로운 주인에게 전하는 인사 등을 적는다. ⓒ 다시입다연구소 다시입다연구소는 21%파티를 통해 시민들의 의생활에 변화를 만드는 동시에 정책과 시스템을 통해서도 변화가 이뤄질 수 있게끔 움직이고 있다. 바로 패션 기업이 재고와 반품을 폐기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다. 입법 운동은 가장 확실하고 영향력 있는 운동이다. 브랜드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폐기되는 재고 의류, 그러니까 아무도 입지 않은 새 옷을 버리는 이기적인 기업의식을 향한 일침이기도 하다. 2021년 KBS에서 방영한 환경스페셜 <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 > 에서는 국내 매출 상위 7개 패션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했는데, 7개 기업 중 4개 기업이 “판매되지 않은 재고 상품을 소각한다”라고 밝혔고, 한 곳은 공개 불가를, 또 한 곳은 응답을 거부했다. 단 한 기업만이 소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한 것이다. 한쪽에서는 다시 입기를 실천하며 기후 환경의 안위를 모색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에너지와 노동력을 낭비하면서 오늘날의 윤리와 의식을 소각하는 아이러니다. 다시입다연구소는 이런 모순을 정책적으로 막기 위해 올해 1월부터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고 지난 4월 ‘재고 및 반품 폐기 행위 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민 1,363명의 서명을 국회의원실에 전달했다. 의생활에 관한 관심이나 즐거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기후 위기가 몰고 올 위험은 지구상 모든 생명체에게 영향을 준다. 아무리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며 만들어지는 제품이라도 엄밀히는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기후 절멸에 향하고 있지 않은지. 의생활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방식은 이제 달라져야 한다. 중고 패션에서 해답을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유행은 끝이 있지만 중고 패션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유다미(Yoo Da-mi 劉多美) 에디터

한국에서 와인을 빚는 프랑스 농부

Lifestyle 2023 AUTUMN

한국에서 와인을 빚는 프랑스 농부 프랑스인 도미니크 에어케(Dominique Herqué) 씨에게 한국은 꿈을 이뤄가는 나라다. 땅을 살리는 방법으로 농사를 짓고, 그 결실들로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와인을 제조하며 산다. 그는 한국인 아내 신이현(Shin Ihyeon) 씨와 함께 프랑스 알자스를 닮은 한국의 ‘작은 알자스’에서 꾸리는 이 삶이 참 좋다고 말한다. 프랑스 알자스에서 태어난 도미니크 씨는 오랜 세월 엔지니어로 일하다 와인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농업 대학에서 양조학을 전공하고 알자스 와이너리에서 경험을 쌓았다. 아내와 한국으로 들어온 후 충청북도 충주에 내추럴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 ‘작은알자스’를 만들었다. 도미니크 에어케 씨가 있는 작은 알자스는 고요한 듯 고요하지 않다. 마당에선 풍경(風磬 작은 종)이 쉼 없이 울려대고, 밭에선 새와 닭과 거위가 수시로 울어댄다. 하지만 전혀 시끄럽지 않다. 자연 속의 소리는 소음보다는 음악에 가깝다. 숲과 같은 포도밭 귀마저 즐거운 ‘작은 알자스’는 수안보온천(水安堡溫泉)으로 유명한 충북 충주시(忠州市) 수안보(水安堡)면에 있다. 뒤론 산이 있고 앞은 탁 트여 있어, 평온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도미니크 에어케 부부가 ‘첫눈에 반했던’ 이 땅은 프랑스 알자스와 비슷한 데가 많다. 알자스(Alsace)는 도미니크 씨의 고향이다. 프랑스 최북단에 자리한 와인 생산지로, 산 밑 언덕배기에 포도밭이 많다. 흙도 까맣고 볕도 깊다. 그가 지금 있는 이곳도 마찬가지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새 인생을 시작했지만, 이곳에서 그는 자주 고향을 느끼며 산다. “2017년에 여기로 왔어요. 한국에서 농사도 짓고 와인도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아 1년간 전국을 둘러봤는데,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어요.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이 땅을 만났어요. 보자마자 ‘여기다’ 싶었죠.” 도미니크 씨는 아내와 가꾸는 약 4,000㎡의 농토를 ‘숲과 같은 포도밭’이라 부른다. 이들의 밭엔 10여 종의 포도나무와 30종 안팎의 사과나무가 있다. 다양한 와인 맛을 내기 위해 다양한 품종의 포도와 사과를 재배하고 있다. 이 밭에 심은 건 포도나무와 사과나무만이 아니다. 복숭아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무화과, 보리수, 키위, 라벤더…. 부부는 제초제나 살균제 같은 화학성분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퇴비’가 되어줄 100여 종의 식물을 주위에 빼곡하게 심어 놨다. 닭과 거위가, 벌과 지렁이, 온갖 미생물이, 서로를 이롭게 하며 더불어 살아간다. 그와 아내는 어떻게 하면 와인을 더 맛있게 만들까보다, 어떻게 하면 땅을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더 많이 고민한다. 좋은 와인은 잘 지은 농사에서 오고, 좋은 과일은 비옥한 땅에서 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그는 익숙한 프랑스식 농사법을 따른다. “한국인들이 절기(節氣 한 해를 스물넷으로 나눈, 기후의 표준점)에 맞춰 농사를 짓는다면, 우리는 행성달력(행성의 움직임에 맞춰 농사를 짓는 달력)에 맞춰 농사를 지어요. 우주의 모든 행성은 매일 움직이고, 그 움직임에 따라 식물의 반응이 달라지거든요. 열매에 좋은 날, 뿌리에 좋은 날, 잎에 좋은 날, 꽃에 좋은 날이 따로 있어요. 오랜 세월 축적한 삶의 지혜를 기꺼이 따르고 있죠.”   와인 한 병에 담긴 자연 오크통에서 숙성하고 있는 레돔 내추럴 레드 와인 그들은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맛있는 과일을 얻기 위해 농약이나 퇴비를 쓰지 않고 건강하게 땅을 일구며 다양한 과수나무와 거위, 닭, 지렁이를 키워 땅속 미물까지 함께 돌본다. 그렇다고 달력에만 의지하진 않는다.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날씨엔 농부가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그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꼼꼼히 검토하며 농사짓는다. 예컨대 풀을 깎아놓았는데 며칠 후 꽃샘추위가 들이닥치면 갓 나온 싹이 모두 얼어버리고, 풀을 안 깎았는데 장맛비가 내리면 벌레들이 떼 지어 몰려든다. 그간의 실패가 그에게 알려준 소중한 경험들이다. 매년 같은 일을 하지만, 도미니크 씨는 단 한 해도 같은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믿고 있다. “땅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라 처음 한두 해는 참 힘들었어요. 거리의 낙엽들을 차에 꽉꽉 채워 오고, 동네 깻단을 죄다 모아와 밭에 뿌렸어요. 해마다 왕겨 5톤씩을 밭에 집어넣었고요. 그렇게 3년쯤 지나니 땅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모습으로 회복되었어요.” 사과로 만드는 내추럴 시드르는 작은알자스의 대표 상품으로, 레돔이라는 이름은 도미니크의 애칭을 따 이름 붙였다. ‘작은 알자스’에서 생산하는 와인은 사과를 발효시켜 만드는 시드르(Cidre, 영어로는 사이더 Cider), 포도로 빚은 로제와 산머루를 섞어 빚은 레드와인이다. 첨가제는 물론 효모도 넣지 않는다. 말 그대로 ‘내추럴 와인’이다.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는 대신 ‘그 해의 모든 것’이 담긴다. 나무들을 키운 햇볕과 바람, 농부의 땀과 고민까지 와인 한 병에 고스란히 실린다. 발효 시간까지 합하면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그의 와인을 마시는 일은 그가 만난 자연과 교감하는 일이다. “와인 브랜드가 레돔(LESDOM)이에요. ‘Le’는 불어로 복수를 뜻하고 ‘Dom’은 저의 애칭입니다. ‘도미니크 가(家)’란 뜻이에요. 이젠 여기가 제 고향이에요.” 도미니크의 아내 신이현 씨는 소설가다. 1994년 「숨어 있기 좋은 방」이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하며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도미니크 씨가 아내를 처음 만난 건 1998년 프랑스 파리에서다. 당시 도미니크 씨는 파리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었고, 신이현 씨는 프랑스에서 1년쯤 살아보는 꿈을 이루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이 모두 아는 베트남 부부가 집들이에 두 사람을 초대했다. 도미니크 씨와 신이현 씨는 만나자마자 서로 호감을 느끼고 연애를 시작했고. 파리에서 1년만 살아보려던 신이현 씨의 계획은 변경됐다. 2003년 결혼식을 올린 뒤 파리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그러다 도미니크 씨가 캄보디아 회사로 가게 되면서 6년간 캄보디아 생활을 했고, 이후 그가 한국의 대기업으로 파견되면서 아내의 나라인 한국에서 처음 살아보게 됐다.   한국에서 시작된 제2의 인생 숙성 중인 레드 와인을 점검 테이스팅 하는 도미니크 씨. 그는 누구나 떠올리는 정형화된 맛을 추구하기보다는 과일이 자란 땅의 성격과 맛을 와인 한 병에 그대로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첫’ 한국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당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 자신이 맡은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땐 일에 허덕이느라 삶을 돌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론 매우 고마운 시기예요. 농부가 되는 꿈을 갖게 해줬으니까요. 알자스에서 평생 포도 농사를 지으신 외할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포도밭을 나눠주시면서, 어릴 때부터 저는 포도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포도밭에서 자주 놀았고, 포도 수확기 때마다 농사일을 거들곤 했죠. 언젠가부터 그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더라고요. 한국에서 그 그리움이 꿈으로 이어졌네요.” 농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미니크는 다시 파리로 갔다. 프랑스농업대학(Centre National d'Enseignement Agricole par Correspondance)에서 2년간 공부한 뒤 와인 양조장에서 1년간 일을 배웠다. 이제 농부가 될 차례였다. 처음에 그는 프랑스에서 포도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다. 남프랑스 곳곳을 돌아다니고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곳도 찾아냈지만, 이번엔 아내가 망설였다. 프랑스에선 파리 외의 지역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그녀가 처음으로 타국살이를 두려워했다. “아내가 한국으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한국엔 제대로 된 시드르 생산지가 없으니, 우리가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요. 그때 저는 농사를 지을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좋았어요.” 2016년 한국으로 다시 왔고, 이듬해 지금의 땅을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보낸 지난 6년이 그저 꿈만 같다. 한여름 포도밭의 풀을 깎을 때도, 한겨울 포도나무 가지를 칠 때도, 그는 더위나 추위보다 즐거움을 더 많이 느낀다. 프로그래머로서 한국에 살 때는 미처 몰랐던 기쁨이 매일 새롭게 그에게 찾아온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이 나라를 그는 농사를 통해 하루하루 알아가고 있다. 그에게 한국은 꿈을 이루게 해준 아주 고마운 나라다. “지금의 ‘작은 알자스’는 지난해 새로 지은 건물이에요. 양조를 위해 지은 건데, 짓다 보니 애초 생각보다 규모가 커졌어요. 공간이 커진 만큼 쓰임새도 커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안에서 생태적 농사법이며 자연적 와인 제조법도 나누고, 술이며 농사와 관련된 작품 전시도 해보고 싶어요. 내성적인 저보다는 아내가 그 일을 맡게 되겠지만, 이 공간이 그렇게 쓰일 걸 생각하면 저도 기분이 좋아요.” ‘농부’ 도미니크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간다. 해가 뜨자마자 밭으로 가서, 온갖 생물들과 안부를 나눈다. 볕이 너무 뜨거워지면 집에서 쉬고, 볕의 기세가 누그러지면 다시 밭으로 나가 해가 온전히 질 때까지 밭을 가꾼다. 요즘 그가 힘쓰는 일은 포도나무 가지가 처지지 않고 올라가도록 줄로 잡아주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십 대 초반의 포도나무인 셈이라 손이 아주 많이 간다. 꽤 힘들 텐데도 그는 자주 웃음 짓는다. 자연을 그대로 담는 그의 와인들처럼, 그의 미소에 그의 행복이 오롯이 실려 있다. 박미경(Park Mi-kyeong 朴美京)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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