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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 & Culture

한 봉지의 감성

Arts & Culture 2025 AUTUMN

한 봉지의 감성 커피믹스는 뜨거운 물만 부으면 간편히 마실 수 있는 음료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점차 대중화됐고, 현재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들이 시장에 나와 있다. 사람들의 입맛과 인식이 변화하면서 2010년대 이후 소비량이 줄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커피믹스는 인스턴트커피와 설탕, 크림을 일정 비율로 한 봉지에 넣은 제품이다. 1976년 동서식품이 국내 최초로 커피믹스를 개발한 이래 현재는 맛과 건강을 고려한 다양한 종류의 커피믹스가 출시되고 있다. © 뉴믹스커피 믹스 커피는 인스턴트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넣어 조제해 먹는 방식의 커피이다. 믹스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누군가에겐 취향의 표현이고, 또 누군가에겐 위로의 언어이다. 한때는 서열과 관계를 상징했으며, 여성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기도 했다. 그 믹스 커피를 한 봉지에 담아낸 제품, 커피믹스가 탄생했다. 모두가 표준화된 맛을 즐기게 된 순간,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커피믹스는 단지 빠르고 간편한 커피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로 감정을 포장한, 한국식 커뮤니케이션이다.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물 속에서 퍼지는 그 맛은 어떤 시대의 감성을 품고 있다. 우수한 발명품 2020년 개봉한 영화 에는 유니폼을 맞춰 입은 여직원들이 누가 먼저 믹스 커피를 타는지 속도를 겨루는 장면이 등장한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여성 사원들은 저마다 커리어 우먼을 꿈꾸지만, 8년을 일했음에도 여전히 믹스 커피 타는 일이 주요 업무이다. 영화는 코믹한 장면 뒤에 시대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런가 하면 인스턴트커피와 크림, 설탕의 비율로 범인을 추적하는 장면은 커피 취향이 곧 정체성이던 시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정체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치며 수많은 고졸 여성들이 가장 먼저 정리 해고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여성이고 고졸이라는 이유로 저부가가치 인력으로 분류된 그들이 사라지자, 믹스 커피를 타고 회의실을 정리하며 일상의 틈을 메우던 손길 또한 함께 없어졌다. 남은 직원들은 곧 그 공백을 체감했다. 특히 믹스 커피를 직접 타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바로 그 시점에 커피믹스가 해결사처럼 등장했다. 봉지를 뜯어 컵에 넣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누구나 일정한 맛을 낼 수 있는 이 표준화된 취향의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효율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그 상징성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2017년 특허청이 설문 조사한 ‘한국을 빛낸 발명품 10선’에서 커피믹스가 5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보다 앞선 순위가 훈민정음, 거북선, 금속활자, 온돌 같은 역사적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작은 봉지가 지닌 사회적 파급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웃도어 아이템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왕실을 비롯한 일부 고위층만 즐기던 사치품이었다. 커피가 대중적인 기호 음료로 정착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였다. 미군 보급품을 통해 인스턴트커피가 암암리에 유통되고, 다방에서도 믹스 커피를 팔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퍼졌다.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커피를 물에 타 마시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다. 1970년에는 식품 제조 기업 동서식품이 국내 최초로 인스턴트커피를 선보였다. 그리고 6년 뒤인 1976년, 세계 최초로 커피, 크림, 설탕을 한 봉지에 담은 커피믹스를 출시했다. 낱개 포장된 이 발명품은 과거 ‘빨리빨리’ 문화로 상징되던 산업화 시대 한국의 성장 속도와 정서를 담은 생활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초창기엔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가정과 사무실에는 각각의 유리병에 담긴 ‘커피 삼총사(커피, 크림, 설탕)’가 갖춰져 있었고, 커피를 개인의 취향에 맞춰 타 줄 인력과 사회적 여유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커피믹스는 오히려 아웃도어 아이템이었다. 사람들은 믹스 커피를 만들어 먹기 어려운 야외에서 레저 활동 중 커피믹스를 마시며 당분을 충전했다. 1980년대 들어 등산과 낚시, 야유회 문화가 확산되면서 커피믹스 소비량도 점점 증가했다. 커피믹스가 그 편리성 덕분에 인기를 얻자, 이후 여러 기업들이 커피믹스를 생산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고, 전체 커피 시장에서 커피믹스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게 됐다. 상징의 스펙트럼 커피믹스가 야외에서 실내로 들어온 건 1997년 이후였다. 잉여 인력의 부재, 급박한 노동 환경, 그리고 정수기의 대중화는 커피믹스가 업무의 기본 세팅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예전처럼 누군가의 취향을 일일이 기억해 커피를 내어줄 필요 없이, 모두가 같은 봉지로 만족할 수 있었다. 이로써 커피는 더 이상 서열과 기호의 상징이 아니라, 생존과 자기 위로의 도구가 되었다. 해외에서의 인식 변화도 흥미롭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커피믹스는 한국만의 이상한 문화였다. 에스프레소, 블랙커피, 캔 커피 중심의 시장에서 커피믹스는 지나치게 달고, 아무런 감각도 감정도 없어 보였다. 커피는 예나 지금이나 취향의 영역이고 감성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 모든 걸 생략한 듯한 커피믹스가 환영받을 리 없었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믹스커피에 우유, 시나몬 가루, 바나나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제조하여 마시는 트렌드가 불고 있다. ‘달고나 커피’가 대표적이다. 그릇에 꿀을 넣고 색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거품기로 젓다가 커피믹스를 넣고 걸쭉해질 때까지 계속 저은 다음 우유에 부어서 마신다. © 한국관광공사 하지만 2010년대 들어 한국 드라마를 비롯한 K-컬처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외국인들은 커피믹스를 감성적인 음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 달달한 커피 한 잔을 매개로 나누는 대화가 그들의 감성을 건드린 것이다. 지금은 러시아, 동유럽, 인도네시아, 베트남, 대만 등지에서 박스째 수입하는 K-푸드가 되었다. 2016년 국내 한 여행사가 외국인 관광객 약 천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과반이 넘는(53%) 외국인들이 커피믹스를 ‘가장 맛있는 한국 차’로 뽑기도 했다. 믹스 커피를 한국의 차로 보는 시선이 흥미롭다. 한편 커피믹스는 생존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2022년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는 한 광산이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 당시 무너진 갱도에 고립된 광부들이 221시간을 버티게 해준 것이 바로 커피믹스였다. 이들은 커피믹스를 식사 대용으로 조금씩 나눠 먹으며 생명을 이어갔고, 구조 후 스스로 걸어 나올 만큼 건강했다. 커피믹스에 함유된 당분과 열량, 카페인의 각성 효과가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유용했는지를 보여준 극적인 사례다. 젊은 세대의 변화 최근 커피믹스는 다시 한번 새로운 얼굴로 나타났다. 배달 서비스 플랫폼 배달의민족 창업자로 유명한 김봉진 그란데클립 대표가 선보인 ‘뉴믹스커피’는 커피믹스를 시대감각에 맞게 재해석한 브랜드다. “커피는 원래 타 먹는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다방과 사무실을 오가던 옛 감성을 다시 불러냈다. 서울 성수동과 북촌의 쇼룸형 매장은 그 자체로 커피 문화의 회고적 감성을 재현한 공간이다. 이 브랜드의 등장은 단지 레트로 감성 때문만이 아니다. 원두커피가 처음 보편화됐을 때 사람들은 그 쓴맛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카페모카, 프라푸치노 같은 달콤한 음료가 인기를 끌었다. 이후 아메리카노의 깔끔한 쓴맛으로 점점 입맛이 이동했지만, 최근 들어 다시 달고 진한 커피가 돌아오고 있다. 크림 라테, 아인슈페너, 비엔나 라테 같은 음료의 유행은 젊은 세대의 기호 변화를 잘 보여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뉴믹스커피 성수동 매장 앞에서 제품을 시음해 보고 있다. 2024년 론칭한 뉴믹스커피는 ‘기념품 커피’, ‘디저트 커피’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브랜드이다. 군밤 맛, 시나몬 약과 맛, 팥빙수 맛 등 획일화되었던 기존 커피믹스의 맛을 다양하게 변주함으로써 커피믹스 문화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 뉴믹스커피 이러한 흐름 속에서 커피믹스는 다시 새로운 것이 되었다. 뉴믹스커피 매장을 찾는 외국인 비율이 높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SNS와 드라마에서 본 한국식 커피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그들을 뉴믹스커피로 이끈다. 발상의 전환 측면에서는 이보다 신선할 수 없는 뉴믹스커피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커피 한 잔조차 부담스러운 요즘 젊은 세대에게 커피믹스는 새로운 감정의 언어일 수 있다. 최근에는 커피믹스를 활용한 다양한 영상 콘텐츠도 활발히 유통된다. 커피믹스로 카페라테, 칼루아, 크림커피 등을 만드는 레시피 영상이 유튜브에 쏟아진다. 커피믹스 시장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진화하고 있다. 건강과 다이어트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당분이 거의 없는 제로 슈거, 고단백, 무지방 제품 등 기능성을 더한 제품들이 등장하면서, 기존 원두커피와 스페셜티 시장 사이에서 꾸준한 수요를 견인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통계에 의하면 2022년 기준, 국내 커피 시장에서 액상 커피 판매 비중이 35.6%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커피믹스 판매량도 24.8%를 기록해 아직도 믹스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2024년에는 커피믹스 판매량이 10년 만에 증가세로 전환됐다. 2024년 기준, 동서식품이 출시하는 커피믹스의 대명사 ‘맥심 모카골드’는 연간 약 57억 개가 팔렸다. 초당 약 180개가 팔린 셈이다. 이처럼 커피믹스는 여전히 한국인의 일상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효율과 위로의 상징이던 커피믹스는 다시 한번 새로운 세대에 의해 감정의 매개체로 재해석되고 있다. 취향의 서열을 해체하고, 감정을 연결하는 한국식 커피. 그 중심에서 커피믹스는 여전히 한 모금의 여유를 내어준다.

K-팝의 최전선, 팝업 스토어

Arts & Culture 2025 AUTUMN

K-팝의 최전선, 팝업 스토어 K-팝 신에서 팝업 스토어가 성행 중이다. 기존에는 앨범 발매를 홍보하기 위한 단순한 이벤트 성격이 짙었지만, 최근에는 유수의 브랜드들과 협업해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거나 뮤지션의 세계관을 스토리텔링해 전달하는 등 콘텐츠가 창조적으로 진화하면서 팬덤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 aespa WEEK – #Whiplash_mood 〉는 에스파의 미니 5집 앨범 < Whiplash > 발매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팝업 스토어이다. 에스파의 세계관 및 앨범 콘셉트를 키네틱 아트로 재해석했으며, 공간 전체가 살아 숨 쉬는 듯한 공감각적 연출로 팬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2024년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서울 성수동에서 열렸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제 팝업 스토어가 없는 K-팝은 허전하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었다. 불과 4~5년 사이 일어난 일이다. 단기 운영되는 임시 매장으로, 상업 브랜드와 좋은 상성을 보이며 빠르게 성장한 이 새로운 마케팅 방식은 K-팝과도 궁합이 꽤 좋았다. 새것이라면 뭐든 반가운 K-팝 업계 특유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자연스럽다. 자리를 잡아도 너무 잘 잡아 이제는 “잘 만든 팝업 스토어 하나가 웬만한 타이틀곡이나 뮤직비디오보다 낫다”는 소리가 팬들 사이에서 종종 들려올 정도다. 안정감과 소속감 어느새 K-팝의 필수 요소가 되어 버린 팝업 스토어는 지난 몇 년간 K-팝을 산업으로 보는 시각 아래 활발하게 호명되었다. 특히 지금까지 없던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K-팝 산업 속에서 비즈니스 확장이나 수익 구조 다각화를 가능케 해 가치를 인정받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가수와 팬이 직접 만날 수 없었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팝업 스토어가 부쩍 성장한 점만 봐도 그렇다.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서는 안 되는 인류 초유의 사태 속에서, 팝업 스토어는 K-팝 팬덤이 ‘우리’로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K-팝 팝업 스토어와 일반 팝업 스토어의 차이가 생긴다. 후자가 팝업 대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그로 인해 형성된 잠재 고객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전자는 이미 탄탄하게 구성된 팬덤과의 깊이 있는 교류를 핵심으로 한다. 예를 들어 신상품을 알리기 위한 팝업 스토어를 생각해 보자. 일반 팝업 스토어는 제품의 호감도와 인지도를 높여 궁극적으로 해당 제품의 판매량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반면 K-팝 팝업 스토어는 새롭게 발매된 앨범을 통해 팬덤을 한자리에 모으고, 콘텐츠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강한 소속감과 몰입감을 느끼게 하는 데 집중한다. 수익화는 대부분 현장 머천다이즈 판매로 이뤄진다. 2025년 3월 더현대서울에서 열린 < G-DRAGON Media Exhibition: Übermensch >는 지드래곤의 정규 3집 < 위버멘쉬(Übermensch) > 발매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미디어아트 전시다. VR, AI 기반의 음성 인터랙션, 홀로그램, 초대형 미디어 파사드 등 신기술을 기반으로 기획된 이 전시는 팬들에게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제공했다. 또한 지드래곤의 오랜 상징인 데이지꽃 조형물을 곳곳에 설치해 일관된 디자인을 완성했다. ⓒ 셔터스톡 요컨대 K-팝 팝업 스토어는 직접 만지고 경험하는 팬 행위의 가장 진보적인 형태이다. 지금껏 대표적인 K-팝 오프라인 콘텐츠로 군림해 온 콘서트와 팬 사인회 그 어떤 것도 가수가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가수, 즉 IP의 힘이 유난히 강한 K-팝 산업에서 직접적인 IP 노출 없이도 이 정도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팝업 스토어가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다. 그런 점에서 K-팝 팝업 스토어는 좋아하는 뮤지션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팬들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이벤트들과 비슷한 속성을 지닌다. K-팝 팝업 스토어의 서막 그동안 K-팝이 강력한 IP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을 펼쳐온 만큼 팝업 스토어의 원조를 찾기는 쉽지 않다. 전시와 체험, 교류와 제품 판매가 모두 이루어지는 K-팝 팝업 스토어의 속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다만 ‘오프라인에서 가수 없이 색다른 방식으로 콘텐츠를 즐기는 공간’이라는 특성을 생각하면, 2015년 서울 이태원 드로잉 블라인드에서 열린 f(x)의 정규 4집 <4 Walls> 앨범 발매 기념 전시회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당시만 해도 K-팝과 전시회를 연결한다는 게 상당히 생소했는데, 앨범 발매 전 빔프로젝터를 통해 천장을 포함한 사방 벽면에 멤버들의 티저 사진과 영상을 공개하며 화제를 모았다. K-팝의 기본적 홍보 방식인 티저 프로모션과 전시 형태를 융합한 이 행사는, 지금은 한없이 체급을 불린 K-팝 팝업 스토어의 체험판이자 프로토타입이라 할 만하다. 흥미로운 건 당시 f(x)의 전반적 아트 디렉팅을 진행한 인물이 이후 그룹 뉴진스를 만든 민희진이라는 점이다. 뉴진스는 여러 면에서 2020년대 K-팝의 변화를 주도한 아이콘으로 불리는데, 그중 브랜드와 협업해 이를 효과적으로 풀어낸 팝업 스토어의 흥행도 빼놓을 수 없다. 2022년 8월, 더현대 서울에서 열린 뉴진스의 데뷔 기념 팝업 스토어는 현재 나타나고 있는 K-팝 팝업 스토어 전쟁의 서막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어마어마한 대기 줄을 비롯해 상투적인 K-팝 머천다이즈 형태에서 벗어난 패셔너블한 디자인과 구성으로 분야를 막론한 각계각층의 큰 관심을 모았다. 뉴진스는 이후에도 디저트 브랜드 누데이크, 애니메이션 등 대중의 예상을 뛰어넘는 창조적인 협업으로 끝없이 뉴진스 붐을 이어 나갔다. 2023년 발매한 EP 발매 프로모션 관련 팝업 스토어에는 10만 명이 넘는 누적 관객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팝업’의 재정의 팝업 스토어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면서, K-팝 그룹을 보유한 크고 작은 기획사들 모두가 분주해졌다. 가수의 사진만 활용하거나 머천다이즈 판매에만 눈에 불을 켠 팝업 스토어는 설 자리가 없어진 지 오래다. 보다 적극적으로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고 있다. 일례로 최근 SM엔터테인먼트와 산리오코리아가 협업한 ‘Where is KEY? with HELLO KITTY’가 눈에 띈다. 샤이니 키의 시그니처 캐릭터 복실이와 산리오 캐릭터 헬로키티가 등장해 동화 같은 스토리라인을 펼쳐낸 이 팝업 스토어는 2D와 3D라는 다른 차원의 두 콘텐츠가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뉴진스의 미니 2집 < Get Up > 발매 기념으로 열린 < 버니랜드 >는 글로벌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와 디지털 IP 플랫폼 기업 IPX가 협업해 선보인 팝업 스토어다. 2023년 7월부터 8월 말까지 서울 낙원동, 홍대, 강남 등지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됐으며 뉴진스의 정체성을 담은 특색 있는 공간 연출과 체험형 콘텐츠로 큰 화제를 일으켰다. 사진은 낙원동 악기 상가에 마련된 체험 공간. 아트포인트(Artpoint) 제공 그뿐만이 아니다. K-팝 팝업 스토어는 이제 공간도, 차원도 넘어선 곳으로 개념을 넓혀 나가고 있다. 세븐틴의 대표적인 오프라인 이벤트 ‘SEVENTEEN STREET’는 제한된 실내 공간을 넘어 한강 세빛섬이나 성수동, 압구정동 일대를 무대로 삼은, 천장 없는 거대한 팝업 스토어라 할 수 있다. 2025년 상반기 큰 화제 속에서 마무리된 플레이브의 2주년 기념 팝업 스토어 ‘Happy Plave Day’는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그룹의 특징을 십분 발휘했다. ‘직접’ 만날 수 없는 가수와 팬 사이의 한계는 팝업 스토어라는 물리적 공간과 데뷔 2주년이라는 기념일을 통해 흥미롭게 극복되었다. 멤버들의 필체가 담긴 축하 리플릿과 손 편지, 직접 그린 그림을 실물로 완성한 축하 케이크, 독자적 기술을 활용해 멤버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운영한 라이브 포토존 등 팬과 가수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로 꼼꼼하고 세심한 기획력이 돋보였다. 그렇다. K-팝 팝업 스토어의 핵심은 ‘함께’다.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시공간을 통해 가수와 팬, 팬과 가수, 팬과 팬 모두가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을 더 공고히 다진다. 공통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한 팀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유대감과 커뮤니티의 현신 앞에서 ‘팝업’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가 재정의되고 있다.

낯선 것에 쫓기다

Arts & Culture 2025 AUTUMN

낯선 것에 쫓기다 『절망의 구』 김이환 작, 숀 린 할버트 역 서펜츠 테일, 2024 368쪽, 14.99파운드 낯선 것에 쫓기다 서울의 무더운 어느 일요일 저녁, 정수는 담배를 피우러 집을 나선다. 모든 것이 평범해 보이던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의 구가 나타나 사람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지르던 이들은 순식간에 새까만 덩어리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도시는 공포에 휩싸이고, 구는 천천히 그러나 끈질기게 사람들을 쫓아다닌다. 그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두려움은 극에 달한다. 정수는 부모님을 찾기 위해 남쪽으로 서둘러 나서지만, 곧 자신 또한 끝없이 위협하는 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도망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는 과연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면 결국 굴복하고 절망에 빠지게 될까? 이것이 바로 김이환의 『절망의 구』 속 주인공이 처한 위기다. 이 작품은 2009년 처음 출간되었으나 최근에야 영어로 번역되었다. 10년이 훌쩍 지난 작품이지만, 마치 코로나19 팬데믹을 배경으로 한 것처럼 여전히 시의성을 지닌다. 좀비 영화에 익숙한 독자라면 좀비 영화와의 유사점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좀비처럼 구 또한 아무것도 개의치 않으며 거침없이, 살아 있는 자들을 집어삼키려 한다. 느리게 움직여 달아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공포는 그 압도적인 규모와 결코 멈출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위기가 확산되고 두려움이 고조되면, 좀비 영화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류 사회의 근간이라 믿었던 문명성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남는 것은 결국 각자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뿐이다. 더 나아가 『절망의 구』에서는 좀비 영화의 공통된 주제이기도 한 미디어의 불신 문제가 드러나며, 어떤 정보가 진실인지 가려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공포와 고통은 더욱 극대화된다 한편, 구는 좀비와 다르다. 인간과 괴물 사이 어디쯤에도 속하지 않는다. 또한 좀비로 인한 세상의 종말이 흔히 바이러스의 발병이나 초자연적 현상으로 설명되는 것과 달리, 구는 완전히 미스터리다. 그 어떤 논리나 동기로도 설명할 수 없는, 철저히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무섭고, 현대 사회의 막연한 불안과 절망의 메타포로 기능한다. 저자가 말하듯, “무언가로부터 도망치지만 정작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지는 결코 알 수 없는” 바로 그러한 상태다. 『절망의 구』는 뛰어난 과학소설이 대개 그러하듯,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성찰과 비판을 담고 있다. 한국 작가가 한국을 배경으로 집필한 만큼, 의무 군복무 제도나 그로 인해 형성된 부정적 남성성 같은 한국 특유의 문화적 맥락도 담고 있다. 그러나 작품이 던지는 물음은 궁극적으로 인류 전체를 향한다. 위기 속에서 우리는 누구를 믿을 것인가? 모든 것이 붕괴되는 순간에도 우리는 품위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가? 놀라운 결말과 함께 『절망의 구』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관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되돌아보게 하며, 스스로에게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던지게 만든다. 『한옥, 오늘』 박나니 저, 사진 이종근 한림출판사, 2023 280 쪽, 35,000원 과거의 건축, 현재에 다시 살아나다 박나니의 『한옥, 오늘』은 한옥, 즉 한국의 전통 가옥에 대한 저자의 애정 어린 시선을 한층 더 확장한 책이다. 첫 번째 책이 주거 공간으로서의 한옥을 다루었다면, 이번 책은 공공 및 상업 공간으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가 직접 한옥을 찾아가 주인들과 나눈 대화에서 얻은 통찰은, 이종근 사진작가가 담아낸 예술적 건축 사진과 어우러져 한층 더 깊이 있고 아름답게 펼쳐진다. 이 책에 담긴 한옥들은 휴가용 숙소나 호텔, 미술관과 전시장, 바와 레스토랑 등 다양한 공공·상업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중에는 스위스 대사관, 테스트 키친, 예술가의 작업실과 쇼룸처럼 다소 특별한 용례도 눈에 띈다. 소개된 한옥들은 전통 건축을 레노베이션한 경우도 있고, 새로 지어진 건물도 있으며, 때로는 한국적 건축 요소와 서구적 감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경우도 있다. 각 건축물을 들여다볼수록 분명해지는 사실은, 한옥이 한국 전통의 중요한 일부분이면서도 결코 과거에 묶여 있는 화석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한옥은 한국적 정신이 살아 숨 쉬는 형태로 지금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소유자들은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문화적 책임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 전통을 오늘의 삶 속에 되살리려 애쓴다. 『한옥, 오늘』은 오래된 건축이 품은 새로운 가능성을 통해 독자의 눈을 열어줄 것이다. 단편선 순간들, 오소리웍스, 미러볼뮤직, 2024 기이하고 아름다운 실험 밴드 ‘단편선 순간들’의 데뷔 앨범 는 올해 2월,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음반’ 부문을 수상했다. 한국대중음악상은 한국의 그래미 어워즈를 표방하며 2004년 탄생한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상이다. 음악을 면밀히 살펴보는 깐깐한 전문가들에게 최고의 음악적 평가를 받은 것이다. 리더인 단편선(본명 박종윤)은 21세기 한국 인디음악을 이해할 때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키워드다. 대학에서 언론정보학을 전공한 그는 미학과 철학에도 심취한 바 있는데,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단편들을 좋아해서 예명을 ‘단편선’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음악은 문학적이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음악 비평 커뮤니티에서 논객으로 활약하던 그는 2012년 첫 번째 정규 음반을 발표했다. 이후 2013년에는 4인조 밴드 ‘단편선과 선원들 ’을 결성해 ‘어쿠스틱 호러 판타지 하드록’이라 불릴 만큼 아방가르드 색채가 물씬한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고, 2017년 밴드 해체 후 최근 몇 년 동안은 독보적인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는 뮤지션으로서 그의 복귀작이다. 그가 여러 명의 연주자들과 결성한 새로운 밴드 ‘단편선 순간들’의 정규 1집이기도 하다. 록, 재즈, 클래식 등이 뒤섞인 이 음반은 그동안 그의 음악이 ‘뒤틀린 아름다움’을 지향했던 것과 달리 ‘아름다운 뒤틀림’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의 첫인상이 뒤틀림이었다면 후자의 방점은 이제 아름다움에 있다. 그래서인지 발라드곡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친절한 느낌의 곡들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하지만 적당한 불친절이 없다면 단편선이 아니다. 몇몇 곡들은 편안하게 감상하기 어려운 긴장감을 조성한다. 타이틀곡 ‘음악만세’는 연주곡에 가깝지만, 중반부에 등장하는 연설이 뜻밖의 감정적 진폭을 만들어낸다. 그는 한 노동 운동가의 연설을 삽입해 기막힌 콜라주 같은 음악적 연출을 선보였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임희윤 음악평론가

SoA, 손끝으로 짓는 공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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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A, 손끝으로 짓는 공동의 SoA(Society of Architecture)는 2010년 강예린, 이치훈 두 사람이 함께 설립한 건축가 그룹이다. 이들은 현대적인 삶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것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는 건축적 가능성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 도시사회학, 역사, 미술 등 건축 이외의 분야와도 다양한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윤슬: 서울을 비추는 만리동’은 광학렌즈 형태로 만들어진 지름 25m의 공공미술 작품이다. 노천극장을 연상케 하는 중심 공간은 지면 아래 4m 깊이로 움푹하게 들어가 있으며 2,800개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만리동은 서울역 바로 옆에 위치한 동네로, 보행자들은 서울역 고가도로를 단장해 조성한 공중 보행로 ‘서울로7017’부터 이곳까지 이동하며 시각적 경험을 확장할 수 있다.   © 신경섭 SoA는 도시와 건축의 사회적 조건을 분석하며, 다양한 규모의 구축 환경을 탐구해 왔다. 비교적 초기 작업이었던 ‘지붕감각’ 또한 그러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카드와 공동으로 주최하는 건축 전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에서 선보였던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장소성을 고려하여, 주름지고 과장된 지붕을 통해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제공했다. SoA는 이 작품을 필두로 건축을 단순한 공간을 넘어 사회적, 감각적 경험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발전시켜 왔다. 협업, 감각, 관계, 지속 가능성, 허용 오차 등의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며, 건축이 사회와 함께 변모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은 개인의 작가성을 내세우기보다는, 건축을 집단적인 노력의 결과물로 간주한다. 이러한 철학은 그들의 작업 방식과 결과물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지붕감각’은 전통 건축의 중요한 요소였던 지붕을 재해석한 작업이다. 갈대발을 활용해 대형 지붕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관람객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는 한편 발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과 바람을 통해 과거 한옥 지붕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감각적 경험을 재현했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카드, 뉴욕현대미술관이 공동 주최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의 우승 작품이다. © 신경섭 공동의 감각 SoA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의 생산을 넘어, 감각 경험을 통해 사회적 연결을 엮어내는 데 주목한다. 이는 개인의 감각을 확장하고, 궁극적으로 사회적 소통을 촉진하는 건축의 잠재력을 탐색하게 한다. 앞서 말한 ‘지붕감각’과 ‘통의동 브릭웰’은 이러한 SoA의 건축 철학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공동의 감각을 추구하는 건축적 실험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선 ‘지붕감각’은 개인의 감각적 경험이 어떻게 공동의 감각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촉각, 청각 등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결합해 공간과 교감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이 작품이 감각에 방점을 둔다면, ‘통의동 브릭웰’은 ‘공동’ 쪽에 더 가닿는다. 보통 ‘정원’과 ‘브릭’으로 설명되곤 하는 이 건물에는 사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 통의동 브릭웰이 세워진 골목에는 1990년 돌풍에 쓰러져 죽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지역 주민들에게 쉼터 역할을 했던 천연기념물 백송이 있었다. SoA는 이 건물이 “막다른 골목에서 역사성과 공간성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대한 제안”이라며, “진정한 필로티로서 기능하는 것, 그리고 제2종 일반 주거 지역에서 건폐율 60%라는 제약을 극복하며 건축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려가 중요했다”고 말한다. 법규를 따르면서도 ‘해석’을 포함해야 했던 것이다. 건축을 통해 지역 사회와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SoA는 현대적 삶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것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는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는 건축가 그룹이다. 이들은 건축뿐만 아니라 공공예술, 리서치, 출판 등을 통해 건축적 고민을 풀어가고 있다. 202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초청되었다. 사진 왼쪽부터 강예린, 이치훈 건축가. SoA 제공 수공예를 닮은 건축 ‘통의동 브릭웰’은 천연기념물 백송이 있었던 골목에 자리하고 있다. 터가 지니고 있는 역사성을 고려해 지어진 이 건물은 1층부터 4층까지 시원하게 뚫린 개방적 원형 구조가 특징이다. 외장재로 사용된 벽돌이 독특한 시각적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 신경섭 SoA는 건축에 수공예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재료의 물성을 탐구한다. 기존 건축에서 흔히 사용되지 않는 재료를 과감하게 도입하거나, 기존 재료를 사용할 때도 어떤 산업 재료가 아니라 크래프트맨십이 들어갈 만한 것에 대해 먼저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건축은 실험 정신으로 빚어낸 결과물이다. ‘지붕감각’에서는 갈대를 재료로 선택했는데, 이를 위해 집요한 탐구와 실험을 거듭해야 했다. “전형적이지 않은 재료를 찾아다니며 직접 다 만져봤다. 갈대 역시 구하기 쉽지 않았다. 순천 습지 개발 지역에 가서 구해와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수입해 오게 되었는데, 바람에 제대로 흔들리지 않아 결국 을지로에 가서 다시 찾아야 했다. 바람에 반응하는 재료와 방식을 찾는 데 정말 오래 걸렸다.” 통의동 브릭웰 프로젝트에서는 다채로운 질감과 색상의 벽돌을 혼합하여 다양한 각도로 쌓고, 이로써 독특한 패턴을 만들어냈다. 또한, 벽돌과 벽돌 사이의 간격을 조절하여 빛과 바람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설계했다. 서울 학동사거리에 위치한 LG 플래그십 스토어 리뉴얼 프로젝트에서는 테라코타와 LED 조명을 결합하여 혁신적인 파사드를 구현했다. SoA의 이러한 시도는 재료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건축 디자인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낯섦으로 무장한 그들의 건축은 우리에게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권유한다. 이들은 실험적인 태도가 건축의 형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믿는다. 서울의 대표적 대학가 중 하나인 신촌은 1990년대 이후 상업 자본이 침투하면서 ‘자생적 청년 문화’라는 특유의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신촌 청년문화 전진기지’는 청년들의 창조적 문화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곳으로, 주변 상업 시설들과 변별되는 특색 있는 형태로 디자인되었다. 특히 벽과 기둥, 지붕과 창문을 드러내는 대신 수공예적 파사드로 건물 전체를 감쌌다. © 텍스처 온 텍스처 빌더로서의 건축가 한편,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다수 수행하며 SoA가 쌓은 역량 중 하나는 ‘디자인 빌드’다.  재료를 직접 다루고 시공 과정을 이해하며, 디자인과 빌드 사이의 ‘허용 오차’를 줄여나갈 때 건축물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우리의 디자인이 결과적으로 구현되기 전까지 허용 오차를 붙잡고 가는 일이 건축"이라는 SoA의 말처럼, 그들은 디자인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섬세하게 조율하며 최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SoA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시공 가능성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혹시 발생할 수 있는 변수에 유연하게 대처한다. 숙련된 기술자들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시공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고, 새로운 기술과 공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특히 이들은 1:1 목업을 빌더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구이자 작업이라고 여긴다. 도면이나 3D 모델링으로는 완벽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재료의 질감, 색상, 빛의 투과도, 공간감 등을 실제로 경험하고 디자인에 반영하기 위해서다. 복잡한 형태나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는 경우, 1:1 목업은 필수적인 과정이다. 디자인의 실현 가능성을 검증하고, 시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사전에 파악하여 해결하기 좋다. 숙련된 장인들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협력하는 일도 허용 오차를 줄이는 데 중요한 과정이다. 예를 들어 국립중앙박물관 으뜸홀 리뉴얼 프로젝트에서도 18m 길이의 데스크에 반가사유상의 옷 주름 형태를 적용하기 위해 1:1 목업을 활용했다. 복잡한 형태의 데스크를 실제로 제작하기 전에 1:1 모형을 만들어 형태와 재료, 색상 등을 검토하고 디자인을 개선했다. 그런 다음 시공 과정에서의 정밀성을 위해 모듈로 나누어 제작하고, 각 모듈을 연결하는 디테일을 고안했다. 앞서 언급한 LG 플래그십 스토어 리뉴얼 프로젝트에서는 파사드를 디자인하면서 VSA 코리아와 협업하며 디자인적 의미는 물론, 시공의 효율성까지 고려했다. 파사드의 강관을 돌려가며 시공할 수 있도록 설계하여, 디자인적 완성도와 시공 편의성을 동시에 확보한 것이다. SoA는 “현재 한국의 제도나 여건은 건축가가 현장에서 점점 배제되는 방향”이라며, 시공과 기술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바탕으로 디테일이나 기술적인 노하우를 축적한 빌더로서의 건축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건축의 만듦새와 완성도를 높이려면, 결국 설계의 정확도가 높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SoA의 건축은 이처럼 디자인과 시공, 이상과 현실, 그리고 건축과 사회의 경계를 넘나들며 완성된다. 그들은 손으로 직접 재료를 만지고, 몸으로 시공 과정을 경험하며 건축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얻는다. 또한, 숙련된 기술자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건축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열려 있는” 협업을 통한 그들의 건축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대구 미래농원’은 과거 아버지가 가꾸던 조경수 농원을 아들이 물려받아 새로운 공간으로 바꾼 프로젝트다. SoA는 20년 세월이 만들어 낸 숲과 정원을 해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풍경이 될 수 있도록 건물을 설계했다. © 텍스처 온 텍스처

무더위 속에서 빚어낸 청량함

Arts & Culture 2025 AUTUMN

무더위 속에서 빚어낸 청량함 서해와 금강을 끼고 있는 한산 지역은 습도가 높고 토양이 비옥해 질 좋은 모시풀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갖췄다. 그래서 조선 시대 한산모시는 지역 특산품으로 전국적 명성을 떨쳤고, 지금도 모시의 대명사로 통한다. 한산모시짜기는 1967년 국가무형유산 종목으로 채택됐으며, 2000년 기능 보유자로 지정된 방연옥 장인과 지역의 부녀자들이 함께 명맥을 잇고 있다. 방연옥 장인이 입으로 가늘게 쪼갠 모시를 틀에 걸어놓은 후 한 올씩 빼내 무릎에 대고 손바닥으로 비벼서 실을 길게 잇고 있다. 한산모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여름철 옷감이다. 모시풀 줄기의 껍질을 벗겨 얻은 실로 전통 방식의 베틀을 이용해 직조한다. 모시 짜기는 가족 내 분업, 이웃과 마을 간 협업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 왔다. 이는 화합과 결속의 주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같이 공동체 안에서 전승돼 온 전통 기술이라는 점에서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모시는 아토피를 전혀 일으키지 않는 천연 섬유다. 땀에 젖어도 처지지 않고 살갗에 달라붙지 않으며, 바람을 맞으면 다시 까슬까슬해져 며칠을 입어도 상쾌하다. 그 시원한 착용감은 어떤 섬유에도 댈 게 아니다. 오래 입어 낡아져도 빨아서 풀을 먹이면 새 옷 같다. 살짝 구겨져도, 해져서 기워 입어도 멋스럽다. 한여름 무더위에 모시옷을 입은 이는 단아한 기품을 풍긴다. 고급 옷감 애초부터 모시는 멋을 내기 위한 옷감이며, 일할 때 입는 평상복 용도가 아니다. 예부터 모시는 예복이나 상복 등에 사용되는 고급 옷감으로, 나라에 바치는 진상품이나 귀한 교역품으로 쓰였다. 모시옷을 언제부터 입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통일신라 경문왕(재위 861~875) 때 당나라에 모시를 보낸 기록이 있어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123년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고려(918~1392)에 와서 한 달간 머물며 쓴 보고서 『고려도경』에 보면, “직조 기술이 매우 정교해 왕부터 일반 백성까지 흰 모시옷을 입는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통해 이 시기에 모시옷 제작 기술이 크게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베틀에 걸린 모시 섬유의 모습. 한산모시는 실의 균일도가 일정해 다른 지역 모시보다 더 단아한 느낌을 준다. 조선 후기에는 모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가격이 폭등하고 위조품이 유통되는 등 각종 폐단이 일어나자, 나라에서 모시 생산을 아예 금한 적도 있었다. 옛날 문헌을 보면 충청도 전역이 모시 생산지로 언급되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서천군 한산 지역만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감각과 인내 모시 일은 한산 일대의 농가에서 가장 큰 부업이었다. 이곳 여인네들은 누구나 논밭일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모시 작업에 참여했다. 베틀에서 옷감을 짜는 일은 각자 집에서 하지만, 말린 모시풀 줄기를 실로 만드는 과정은 여럿이 모여 함께해 왔다. 모시는 다년생 쐐기풀로 6월, 8월, 10월 세 차례 수확한다. 수확 시기가 빠르면 모시가 약하고 늦으면 거칠기 때문에 8월에 수확하는 모시가 품질이 가장 좋다. 모시풀 줄기의 껍질을 벗겨내면 푸른 속살이 나온다. 이 속대를 물에 담갔다가 볕에 말리기를 서너 번 반복해 푸른 물을 빼면 하얀 섬유질만 남는다. 이것을 태모시라고 한다. 추출한 태모시는 입에 물고 이를 사용해 하나하나 쪼갠다. 이때 혓바닥과 입술의 감각으로 굵기를 가늠하며 일정하게 쪼개야 한다. “태모시 쪼개는 일은 기계로는 할 수 없어요. 숙련된 감각이 필요하거든요. 경험이 부족한 초보자는 입술이 터져 피가 나기도 합니다. 침을 적셔가며 째기 때문에 입안이 자주 마르는 사람은 하기 어렵죠. 사람마다 치아 구조와 혀의 감각이 다르다 보니 각자 쨀 수 있는 굵기가 다릅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쪼개 놓은 태모시 올은 가는 것, 중간 것, 굵은 것 세 종류로 분류한 다음 손바닥으로 비벼서 잇고 실로 만든다. 그 뒤엔 날실을 계량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실의 굵기가 다르므로 한 폭에 날실을 몇 올이나 쓸지 결정하는 단계다. 가느다란 날실이 많이 들어갈수록 고운 모시가 된다. 모시는 보통 7새에서 15새까지 있으며, 10새 이상을 세모시라고 부른다. ‘새’는 피륙의 날실을 세는 단위로, 1새는 80올이다. 모시 한 폭이 보통 30㎝ 내외이니, 10새 모시는 30㎝에 800올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새의 숫자가 높을수록 올이 가늘고 고우며 상품 가치가 높다. “15새 모시는 비단보다 고와서 마치 잠자리 날개 같죠. 그렇게 짜려면 아주 촘촘한 바디가 있어야 하는데, 2006년 바디장이 돌아가신 뒤로는 구할 수가 없어요. 개량 베틀의 금속 바디로는 만들 수 없습니다.” 실을 베틀 바디에 한 올씩 끼운 다음에는 실이 매끈해지도록 풀을 먹인다. 이때 콩가루 풀을 조금만 잘못 발라도실이 엉키거나 끊어지곤 해서 장인도 애를 먹는다고 한다. 이렇게 실이 비로소 완성되면 베틀을 조립해 모시를 짠다. 한 필을 짜는 데 10새의 경우 15일 정도 걸린다. 한 필이면 보통 여자 치마저고리 한 벌과 남자 윗도리 하나를 만들 수 있다. 다 짜낸 직물은 물에 씻어 풀기를 빼고 말린 다음 보관한다. “모시실은 건조하면 쉽게 끊어져요. 그래서 찜통더위 속에서 바람이 통하지 않게 문을 닫고 땀을 쏟으면서 짭니다. 요즘엔 가습기가 있어 습도를 맞추기 쉬우니 일하기가 조금 수월해졌죠.” 모든 공정이 어렵고 까다롭지만, 가장 힘든 것은 마지막 모시를 짜는 단계다. 습하고 무더운 한여름이 고운 모시를 짜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서다. 이렇게 모시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낸 직녀의 손끝에서 완성된다. 한 주먹 정도의 모시 섬유 한 타래를 ‘한 굿’이라 부른다. 10굿 정도는 돼야 한 필의 모시를 짤 수 있다. 피, 땀, 침, 눈물 1945년생인 방 장인은 손놀림만 보면 나이가 무색해진다. “어머니가 저를 젖먹이 때부터 데리고 일하셨어요. 제가 철들어 막상 배우려고 드니까 ‘고생한다’며 못 하게 하셨습니다. 8남매 중 막내인 저만큼은 힘든 모시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녀가 어깨너머로만 알고 있던 모시 짜기를 제대로 배운 것은 결혼한 다음이었다. 시집와서 보니 이웃 마을에 문정옥(1928~2016) 선생이 살고 있었다. 문 선생은 한산모시짜기가 1967년 국가무형유산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첫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사람이다. “운명이었나 봐요. 저는 그분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오며 가며 어르신이 마당에서 모시 일 하시는 것을 구경도 하고 도와드리기도 했어요.” 방 장인의 솜씨와 품성을 눈여겨본 문 선생의 권유에 따라 본격적으로 모시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1980년에 전수자가, 1986년에 이수자가 되었다. “태모시를 째고 한 올씩 잇는 일은 어렸을 때부터 익혔던 터라 어렵지 않았지만, 날실에 풀 먹이기와 모시를 짜는 작업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문 선생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지요.” 그녀는 2000년 국가무형유산 한산모시짜기 2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녀만큼 모시를 솜씨 있게 짜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모시 일이 크나큰 고통에 불과했다. 결국 방 장인이 문정옥 선생의 뒤를 이어 기능보유자가 된 데는 솜씨를 떠나서 일을 좋아하는 마음이 한몫했다. “모시 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시 짜는 데 피, 땀, 침, 눈물이 들어간다’는 말이 있어요.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죠. 하지만 다 만들어 놓고 보면 참 뿌듯해요. 그 재미에 가르치고 배우는 거죠.” 팔순이 된 그녀는 여전히 전승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즐긴다. 딸과 며느리가 이수자로 같은 길을 걷고 있으니 힘들 게 없다고 환히 웃는다. 모든 준비 과정을 마친 후 베틀에서 모시를 짜고 있는 방연옥 장인. 이 작업은 상당히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며, 숙련도에 따라 모시를 짜는 기간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3일에 한 필 정도를 짤 수 있다.

멀리서 비추는 등불 같은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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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비추는 등불 같은 연출 이인수는 작가들의 언어를 사랑하는 연출가이다. 희곡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작가가 구현하려는 세계를 탐구하며 무대 위에 실현한다. 또한 그 과정을 함께하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창조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언제나 마음을 열어둔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연극은 모두가 함께 만드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인수는 최근 한국 연극계에서 주목받는 연출가 중 하나다. 그녀는 깊이 있는 텍스트 분석으로 희곡이 가진 본래의 언어적 힘을 드러내고, 섬세한 연출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그녀의 연출에는 “좋은 작품은 좋은 글에서 시작된다”는 두터운 믿음이 깔려 있다. “너무 행복해요.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지요.” 2015년, 마틴 맥도나 원작의 을 처음 연출한 이후 10년이 흐른 지금까지 쉼 없이 공연을 이어 온 이인수는 지금 행복하냐는 질문에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출한 작품들마다 대부분 호평 일색이었고, 무엇보다 그 과정이 행복한 작업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자신도 속해 있는 ‘글과 무대’라는 창작 집단의 든든한 동료들이 있다. ‘글과 무대’는 네 명의 극작가와 두 명의 프로듀서, 그리고 한 명의 연출가로 이루어진 단체이다. 이들은 각자 개인 작업을 하면서도 동시에 ‘글과 무대’라는 이름으로 함께 작업하는 여정을 수년째 이어오고 있다. 10년쯤 됐으면 번아웃이 올 법하건만, 그녀는 연극 작업이 마냥 즐겁다고만 했다. 한국에서 연극은 큰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OTT를 통해 전 세계적 명성을 얻는 드라마 감독들처럼 높은 인지도가 생기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즐거운지 우문을 던졌더니,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기쁨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극은 이야기의 표현 방식이 무척 다양해요. 같은 이야기라도 정말 소소한 일상처럼 풀어낼 수도 있고, 응축해서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죠.” 2025년 7월 19일부터 8월 3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소극장 무대에서 상연되었던 중 한 장면. 창업 2년 차 스타트업을 배경으로 노동 환경 문제를 고발하는 블랙 코미디다. ‘글과무대’의 중장기 프로젝트 두 번째 작품이며 김윤영이 희곡을 썼다. 글과무대는 이인수 연출가가 속해 있는 창작 집단으로 극작가 김윤영, 진주, 최보영, 황정은이 함께 꾸려가고 있다. 글과무대 제공 새로운 세계 이인수가 매료된 ‘새로운 세계’는 무엇일까? 스포일러의 위험을 감수하고 살짝 이야기를 해보자면, 먼저 최근작인 에 등장하는 천수관음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온라인 플랫폼을 운영하는 한 스타트업을 배경으로 갈수록 열악해지는 노동 환경을 고발하는 블랙 코미디다. 극 중에는 두 명, 세 명의 몫을 넘어 수십 수백 명의 일을 대신하는 느낌으로 살다 보니 손이 천 개가 된 인물이 등장한다. 기상천외한 일이지만, 천수관음으로 변신한 인물은 마치 카프카의 「변신」 속 주인공처럼 천연덕스럽게 사무실에서 일하며 사람들과 어울린다. 독특한 매력의 배우 황석정이 출연하는 역시도 노숙자들이 죽어서 집의 일부가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황당무계한 설정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의 잔인무도한 면모를 너무나 잘 보여주었다. 연출을 하는 동안 이인수 자신도 마음이 아팠다는 또한 마찬가지다. 극작을 가르치는 예술대학 교수와 학생이 주고받는 대화로 구성된 이 작품은 극중극 형태로 한 자매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진행된다. 내밀한 상처로 괴로워하는 여성들을 그려내는 데 있어 그 섬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몰입했다는 관객 평이 많았던 작품이었다. 2023년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상연되었던 윤미희 작가의 는 ‘보존’이라는 주제 속에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액자소설처럼 뒤섞여 있는 작품이다. 소멸과 영원, 보존과 복원에 대해 추상적이고 우화적이지만 결코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보편적 서사가 전개된다. 이인수만의 심도 있는 해석으로 희곡에 숨결을 불어넣었다는 평을 받았다. 국립극단 제공 섬기는 연출 “20년 넘는 배우 경력에서 이렇게 다정한 연출가는 처음 봤어요. 연출가도 다정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죠.” 는 암 병동에 함께 머무는 일곱 명의 여성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 연극에 출연했던 배우 중 하나는 이인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주로 50대 중후반의 남성 연출가들이 주도하고 있는 국내 연극계에서 여성 연출자가 무대를 지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다정한’ 연출로 배우들을 사로잡기는 더욱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인수는 보기 드문 연출가라 할 수 있다. 이인수는 연출이 “텍스트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작가의 의도와 구상을 되도록 충실하게 구현해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연출”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작품을 연출가에게 넘기고 나서는 ‘더는 내 작품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연습실에도 일부러 잘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작가들이 많은 기존 관행으로 볼 때 이인수의 이 말은 참으로 신선하다. 사실 그녀는 극작에 문외한이 아니다. 이쯤에서 그녀의 길고도 긴 ‘가방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녀는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에 진학했으며, 이후 미국 마이애미대학과 피츠버그대학에서 연극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구자로서 커리어도 길지만 극작에 대한 열정도 뜨거워 몇 편의 작품을 썼고, 유학 뒤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녀의 희곡이 다른 연출가에 의해 공연되기도 했다. “정말 힘들었어요. 연출가가 제 작품을 존중하지 않더라고요. 연출가는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마음대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물론 그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이후 그녀는 극작보다 연출에 집중했다. 다양한 연출 기회를 얻었고, 그때마다 작가에 대한 존중을 첫 번째로 생각하며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의도적인 작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글과 무대’에도 ‘무대’보다 ‘글’이 앞서 있다. 서로 존중하는 그 하모니 덕분에 ‘글과 무대’는 그 어느 단체보다 풍성하고 역동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2023년 대학로예술극장에서 초연된 은 관객과 평단의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큰 화제를 모았다. 18세기 후반, 양반집 별당을 배경으로 당대 여성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흔적을 조명하는 이야기다. 글과무대의 진주 작가가 희곡을 썼다. 글과무대 제공 관객과의 싱크로나이즈 “PPT를 띄우고 강연할 때보다 PPT 없이 그냥 이야기할 때 듣는 이들의 집중도가 더 올라간다는 연구가 있대요. 저는 연극이 그런 매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 장소, 실물 소도구가 없어도 이야기만으로 장소와 도구를 상상하게 하는 게 연극이고, 그걸 보는 관객과 배우들의 뇌는 그 순간 싱크로나이즈드 되는 거죠. 저는 그게 연극의 대단한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관객들과의 교감에 대해 질문을 던지자 돌아온 답변이다. 7월 19일부터 8월 3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소극장 무대에 올랐던 공연 시 이런 일이 있었다. 직원들을 사정없이 몰아치는 대표 역할을 맡은 배우에게 객석에서 느닷없이 “미친놈”이라는 욕이 날아왔다고 한다. 그만큼 관객들이 몰입하고 공감했다는 말이겠다. 또 공연을 다 보고 나가면서 “과로하면 안 돼. 과로하면 죽어”라고 일행에게 속삭인 관객도 있었다. 이인수는 그런 순간이 제일 기쁘다고 했다. “제 사촌 언니 딸이 과로사하겠다 싶은 곳에서 일하다가 이 연극을 보고 직장을 그만둔 뒤 새 직장에서 즐겁게 일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정말 좋더라고요” 고전 인문학의 재해석 이인수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고전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일이다. 지난 5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레퍼토리 공연으로 셰익스피어의 를 연출하기도 했거니와 필립 리들리의 나 앨런 베넷의 , 데이비드 그레이그의 등 굵직한 해외 작품들 여러 편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문학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라는 공연에서도 여실히 묻어난다. 미국의 두 남녀 작가 엘리자베스 비숍과 로버트 로웰이 일평생 주고받은 편지들을 묶은 이 작품은 네 명의 배우들이 한 공간에 앉아서 이렇다 할 동선 없이 편지를 읽는 형태로 공연되었다. 짧은 영상에 중독된 현대 사회에서 이런 진중한 작품을 매우 아날로그적 형태로 무대에 올리는 일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터. 그러나 그녀는 ‘관객에 대한 믿음’으로 이 작품을 연출했고, 2시간 가까운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한 사람이 다른 이성과 사랑에 빠져도, 각자의 삶이 어떤 굴곡을 거치든 서로에게 ‘저기 멀리 등불 하나 들고 기다려 주었던 존재’였던 두 사람의 우정의 결, 그 텍스처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인수의 이 변은 그녀의 예술 세계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기도 한 듯하다. 작가의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결을 충실하게 구현해 관객들이 그 작품과 교감하게 하고, 그로 인해 마침내 사람들을 위로하는 등불 하나 켜는 일 말이다. 이인수가 보여줄 다음 등불이 어떤 색으로 빛날지 사뭇 기대된다. 진주 작가가 극을 쓴 는 2021년 두산아트랩 공연에서 쇼케이스로 첫선을 보였고, 이듬해 두산아트센터 소극장 무대에 정식으로 오른 작품이다. 어느 예술대학의 극작 수업에서 교수와 학생이 일대일 수업을 진행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인수 연출가는 세대 간 동행과 연대를 중점적으로 표현했던 쇼케이스와 달리 2022년 공연에서는 등장인물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대면하고 극복해 가는지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한국어의 밤하늘을 빛내는 시의 별자리들

Arts & Culture 2025 AUTUMN

한국어의 밤하늘을 빛내는 시의 별자리들 한국에서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이 처음으로 간행된 시기는 1970년대다. 이때부터 현대시가 널리 읽히며 차츰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국내 출판문화의 양대 산맥이었던 창비와 문학과지성사는 각각 '창비 시선'과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반백 년 동안 꾸준히 발간하며 한국 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1978년 첫 시집을 낸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현재 620권이 넘는다. 시인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는 표지는 이 시리즈의 시그니처이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전 세계에서 한국처럼 시집을 많이 읽는 나라는 거의 없다. 오랫동안 사랑받아 독자들 입에 꾸준히 오르내리거나,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만 즐기는 게 아니다. 한국 독자들은 이제 막 나온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을 꾸준히 읽고, 때때로 수십 권씩 책장에 모으곤 한다. 거의 매년 신작 시집이 종합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서점에서 수시로 열리는 시인들의 낭송 콘서트엔 독자들이 빼곡히 몰려든다. 이에 부응해 출판사들도 열심히 시집들을 출간한다. 2024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유통된 시집 숫자는 무려 1만 3,611종에 달한다. 한국의 시집 출판이 얼마나 활성화되어 있는지는 서점에 가면 금세 알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서점인 교보문고는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다. 여기엔 걷는사람,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민음사, 아침달, 창비, 천년의시작 등의 출판사가 펴낸 시집 시리즈들이 모여 있다. 마치 음반 회사의 레이블처럼 시리즈 각각엔 신작 시집들이 수십 권에서 수백 권씩 같은 디자인을 입고 나와 있다. 한때 시집 시리즈를 내는 출판사 숫자가 100여 곳을 넘었을 때도 있었다. 독일의 문예 비평가 발터 베냐민은 어떤 이념의 존재 형식을 밤하늘의 별자리에 비유했다. 뭇별들이 모여 별자리 하나를 이룩하듯 한국에서 각 출판사가 꿈꾸는 시의 이상은 시리즈 아래 뭉쳐진 수많은 시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하나의 시집은 제각각 ‘잘 빚은 항아리’이지만, 그들은 또한 모여서 시의 장엄한 장독대를 이룬다. 한국어는 언어의 마당에 늘어선 시의 항아리들 속에서 불멸의 힘을 쌓아가고 있다. 시의 대중화 한국에서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이 본격적으로 묶여 나온 건 1970년에 출판된 ‘현대시인선집’에서부터다. 한국시인협회가 기획한 이 선집엔 김광림, 박남수, 박재삼, 신석정, 이형기, 조병화 등 주로 순수 서정 계통의 시인들이 참여했으나, 오래지 않아 맥이 끊겼다. 시집 시리즈가 대중들의 지속적 독서와 수집 대상이 된 건 민음사에서 1973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세계시인선’과 1974년부터 간행한 ‘오늘의 시인 총서’부터다. 고은 시인이 한국어로 옮긴 『당시선』을 시작으로 매년 10~15권 정도 출간된 ‘세계시인선’은 괴테, 보들레르, 랭보, 워즈워스, 바이런, 푸시킨, 휘트먼, 엘리엇, 타고르 등 세계적 시인들의 대표작을 가려 뽑아 원문과 함께 수록했다. 1978년까지 모두 80권이 차례로 간행되었다. 이 시인선은 1990년대와 2010년대에 각각 장정과 판형, 그리고 수록 시집의 구성을 바꾸면서 개정돼 현재에도 출판되고 있다. 살아 있는 시집 시리즈 중에서 가장 오래된 셈이다. ‘오늘의 시인 총서’는 자유와 저항의 시인 김수영의 유고 시집 『거대한 뿌리』를 내면서 시작됐다. 이 총서는 현대성, 혁신성, 실험성이 돋보이는 시집들을 잇달아 펴내, 한국 시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김수영을 비롯해 김춘수, 고은, 김종삼, 황동규, 오규원, 정호승, 최승호, 황지우 등 현대 한국 시에 큰 업적을 남긴 시인들이 참여했다. ‘세계 시인선’과 ‘오늘의 시인 총서’의 성공을 계기로 문학 출판에서 시집 비중이 늘었고, 시의 대중화 현상이 비로소 자리 잡았다. 이어서 기획돼 나온 ‘창비시선’(1975년)과 ‘문학과지성 시인선’(1978년)의 영향이 컸다. 두 시리즈는 1970년대 중후반 각각 첫 책이 나온 이래, 지난 50년 동안 한 해도 쉬지 않고 꾸준히 시집들을 더하면서 한국 현대시의 우람한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2025년 7월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문학과지성사 팝업 스토어 전경. 종이 박스로 제작한 부스에 시집을 비롯해 신간들이 진열돼 있다. 팝업 스토어는 최근 출판사들의 주요 마케팅 전략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1978년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시작으로, 올해 7월에 621번째 시집이 나왔다. 국내에서 가장 큰 시집 시리즈이고, 전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와 짝패를 이루는 ‘창비시선’의 규모도 만만치 않다. 이 시선은 1975년 신경림의 『농무』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모두 521권이 출간됐다. 두 시집 시리즈는 2000년대 초까지는 시적 경향에서도 서로 뚜렷이 대비되면서 한국 시의 지형을 풍성하게 만들어 왔다. 문학의 사회 참여 ‘창비시선’은 현실 변혁 의지와 사회 비판 의식을 내세우면서 민중적 서정성을 담은 시집들을 주로 출판해 왔다. 예컨대 신경림의 『농무』는 한국 농촌의 척박한 현실과 고단한 삶, 농민들의 분노와 슬픔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로써 오랫동안 초월의 세계에 머무르던 한국 시의 언어가 현실적 구체성과 민중적 생동성을 회복했다. 초기에 이 시선에 참여한 시인들은 문학의 사회 참여를 내세우면서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 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고취하는 한편, 민중의 아픔과 저항 의지를 소박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언어로 그려냈다. 『새벽길』(고은),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저문 강에 삽을 씻고』(정희성), 『사상의 거처』(김남주), 『섬진강』(김용택), 『참된 시작』(박노해), 『초혼제』(고정희)는 초기 ‘창비시선’을 대표하는 시집들이다. ‘문학동네 시인선’은 다른 출판사들에 비해 출발이 늦었지만, 대담하고 간결한 디자인으로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24년에는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문구 편집숍 포인트오브뷰와 함께 팝업 스토어를 열어, 스페셜 리커버 시집 3종을 선보였다.   포인트오브뷰 제공  1990년대 이후 ‘창비 시선’은 이념이 붕괴하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노골화하는 시대 흐름에 맞추어 조금씩 변화해 갔다. 민중적 서정성의 영역을 도시 생활에까지 확장하고, 생태주의나 여성주의도 적극 수용했다. 『가만히 좋아하는』(김사인),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김선우), 『어두워진다는 것』(나희덕), 『맨발』(문태준), 『그리운 여우』(안도현),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정호승),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함민복) 등은 이 시기 창비를 대표하는 시집들이다. 실존에 대한 성찰 약 40년의 역사를 지닌 ‘민음의 시’는 민음사를 대표하는 브랜드 중 하나로, 실험적인 시 세계를 펼쳐 보이는 시인들의 시집을 출간하며 다른 출판사들과 구분되는 색깔을 견지해 왔다 민음사 제공  민중주의를 내세운 ‘창비시선’과 달리,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아방가르드 정신을 바탕으로 개인의 내면과 실존에 관한 성찰, 언어에 대한 탐구에 집중했다. 이 시리즈는 “시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고 묻지 않고, “시는 무엇이며, 언어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초기 이 시인선에 참여한 시인들은 정치적∙사회적 폭력, 전통과 관습의 억압 등에 대한 성찰을 문법의 해체, 양식의 파괴 등 언어의 혁신을 통해 보여주는 한편, 산업화한 도시에서 새롭게 나타난 감각 세계를 시 안에 끌어들였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이성복), 『이 시대의 사랑』(최승자),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불쌍한 사랑 기계』(김혜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황인숙), 『잎 속의 검은 잎』(기형도) 등이 이 시기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대표하는 시집들이다. 2000년대 이후에도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그 정신을 잃지 않고, 한국 시의 언어적 혁신과 전위적 첨단을 개척해 왔다. 『수학자의 아침』(김소연), 『이별의 능력』(김행숙), 『생물성』(신해욱), 『슬픔이 없는 십오 초』(심보선),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이원),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진은영), 『혼자 가는 먼 집』(허수경), 『육체쇼와 전집』(황병승) 등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시집들이다. 새로운 서정의 언어 2010년 이후, 시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두 시리즈를 넘나드는 시인들이 늘어났다. 언어의 혁신이 감각의 혁신으로, 감각의 혁신이 인식의 혁신으로, 인식의 혁신이 현실의 혁신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두 시리즈 모두 자유롭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강조하고, 감각적 언어 실험과 새로운 서정의 언어를 결합한 시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창비 시선’에선 안미옥, 안희연, 최지은 등이, ‘문학과지성 시인선’에선 서윤후, 유희경, 임솔아, 이제니 등의 시집이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 밖에도 한국에는 시리즈 시집들이 넘쳐난다. 민음사에서 1987년부터 펴내기 시작한 ‘민음의 시’는 현재까지 334권이 나와 있다. 개성적이고 실험적인 시를 우선하는 이 시집 시리즈엔 김영승, 문보영, 성미정, 성동혁, 안미린, 양안다, 오은, 장정일, 최승호, 황인찬 등의 시인이 참여했다.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창비와 함께 한국 문학 출판을 주도하는 문학동네에서도 2011년부터 ‘문학동네 시인선’을 펴내면서 시집 출판에 뛰어들었다. 이 시인선은 현재까지 238권이 나와 있는데, 무엇보다 2010년대 이후 한국인의 일상과 감성을 새로운 서정의 언어로 담아내는 시도를 꾸준히 선보이는 게 특징이다. 김경주, 김현, 김민정, 박준, 신철규, 이원하 등이 이 시집에 참여했다. 이 외에 천년의시작이 내고 있는 ‘시작시인선’(539권), 걷는사람의 ‘걷는사람 시인선’(126권), 아침달의 ‘아침달 시집’(51권) 등도 한국 시라는 거대한 우주에서 중요한 별자리를 이루고 있다. 창비는 2024년 4월, ‘창비시선’ 500호 출간을 기념해 서울 망원동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시에 어울리는 향과 음악을 추천하고, 한정판 굿즈를 판매하는 등 독자들이 시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체험 공간을 제공해 큰 인기를 끌었다. 창비제공

컵에 담긴 청춘의 생존기

Arts & Culture 2025 SUMMER

컵에 담긴 청춘의 생존기 급격한 물가 상승 때문에 점심값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던 2010년대 초반, 서울 노량진에 포진한 포장마차들에서는 작은 혁명이 일어났다. 빠르게, 싸게, 든든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이른바 ‘컵밥’이 탄생한 것이다. 컵밥은 이제 단순한 끼니를 넘어 시대의 필요가 만들어 낸 새로운 식문화로 자리 잡았다. 고시촌의 생존 음식에서 K-푸드로 확장된 컵밥에는 청춘의 고단한 시간과 한국인의 밥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로벌 푸드엔터테인먼트 브랜드 ‘컵밥’은 송정훈 대표가 2013년 미국 유타주에서 푸드트럭으로 시작해 현재는 미국 전역으로 매장을 확장했다. 현지인의 문화와 입맛을 반영한 레시피 덕분이다. ⓒ 컵밥 “점심값 1만 원 시대.” 이 표현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2011년이었다. 당시 언론은 콩국수 한 그릇 9,500원, 칼국수 8,000원, 설렁탕 1만 원 등을 예시하며 물가 상승을 대서특필했다. 직장인들은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 관공서나 학교, 회사 구내식당을 찾기 시작했고, 편의점 도시락도 불티나게 팔렸다. 이는 단순한 식비 절약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생존형 소비에 진입했다는 신호였다. 2011년은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유난히 팍팍했던 시기였다. 제조업과 대기업의 생산성이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경제 성장률은 세계 평균에도 못 미쳤다. 생산자 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6.7%, 소비자 물가지수는 4%나 올랐다. 이 시기는 우리 경제가 ‘고성장’에서 ‘저성장’으로 궤도를 바꾼 변곡점이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비싸지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물가 상승으로 직장인조차 점심값을 고민하던 시절, 취업준비생, 특히 고시생들의 현실은 더욱 암담했다. 부모의 지원에 의존하며 온종일 공부에 매진해야 했던 이들에게 아르바이트는 사치에 가까웠다. 고시생의 하루는 공부를 중심으로 철저히 계획되어 있었고, 식사조차 효율성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했다. 노량진 컵밥의 탄생 서울 노량진은 학원가로 유명한 지역이다. 1980~90년대에는 대학 입시 학원들이 밀집해 호황을 누렸다. 이후 입시 학원들이 강남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는 공무원 시험을 위한 전문 학원들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노량진은 전국에서 고시생들이 모여드는 대표적인 고시촌이다. 이곳엔 ‘고시 식당’이라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일정 금액을 내면 밥과 반찬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뷔페식 식당이다. 지금도 고시 식당의 가격은 7,000원 안팎으로 저렴하지만 2011년 당시엔 3,000원 선이었다. 점심값이 1만 원을 넘는 시대에 이 가격은 분명 저렴했지만, 고시생들에게는 그것조차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물가가 오르면서 고시 식당의 가격도 조금씩 인상되고 있던 터라 고시생들의 걱정이 커져갔다. 노량진역 앞, 긴 행렬을 이룬 포장마차도 이 지역만의 독특한 풍경이었다. 떡볶이, 핫도그, 햄버거 같은 분식을 주로 팔았지만, 주먹밥이나 간단한 덮밥 형태의 메뉴도 일부 있었다. 그러던 중 2011년, 본격적으로 밥을 파는 포장마차들이 등장했다. 플라스틱이나 스티로폼, 혹은 넓적한 종이 용기에 볶음밥을 담아 팔거나 맨밥 위에 여러 가지 토핑을 얹은 덮밥을 팔았다. 가격은 한 그릇에 2,000원 정도였다. 뷔페식으로 구성한 고시 식당이 1인당 3,000원가량 했으니, 포장마차에서 파는 2,000원짜리 컵밥이 그다지 매력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시생에게 차액1,000원은 무시 못 할 금액이었다. 또 고시 식당은 여러 반찬을 내놓다 보니 개별 품질이 떨어졌으며, 음식을 고르고 받아야 하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는 고시생들도 많았다. 반면 컵밥은 간편하게 먹을 수 있고 양이 푸짐했으며, 달고 짠 맛으로 젊은 입맛을 사로잡았다. 줄 서서 기다릴 필요 없이 서서 5분 만에 한 끼를 해결하고 바로 학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컵밥은 가격, 맛, 시간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다. 노량진 컵밥 거리 모습. 컵밥은 노량진 포장마차에서 개발된 거리 음식으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수험생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 서울관광재단 컵밥 거리의 퇴색 ‘컵라면’에서 파생된 신조어 ‘컵밥’은 언론이 좋아할 만한 소재였다. 고시생들이 만든 신개념 식문화라는 스토리는 충분히 화제성이 있었다. 점심값 1만 원 시대에 한 끼에 2,000원이라는 상징성까지 더해져 컵밥은 빠르게 주목받았다. 단순히 값싼 끼니가 아니라, 청년 세대가 고안해 낸 생존 방식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컵밥 열풍이 커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주변 식당들이 포장마차의 컵밥 때문에 매출이 줄었다며 민원을 제기했고, 구청은 단속에 나섰다. 결국 포장마차 사장님들은 라면, 핫바 등으로 품목을 바꾸거나 컵이 아닌 알루미늄 포일 용기를 사용하는 식으로 우회해야 했다. 식당과 포장마차 간 컵밥 전쟁으로 컵밥 원조들이 노량진에서 사라져갈 때 아이러니하게도 컵밥은 전국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건강을 강조한 ‘비건 컵밥’, ‘키토 컵밥’ 같은 차별화된 메뉴도 등장했다. 2012년엔 한 편의점 브랜드가 발 빠르게 컵밥 제품을 출시했다. 이 무렵 노량진 포장마차들은 단속으로 인해 이미 컵밥을 팔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대기업은 되고, 서민은 안 되냐”라는 포장마차 사장님들의 항변은 컵밥 열풍 이면의 사회적 불균형을 보여줬다. 노량진의 컵밥 포장마차들은 3년 후 구청의 중재로 기존 학원가에서 150미터 떨어진 사육신역사공원 앞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컵밥 거리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청년 세대가 공무원을 더 이상 안정적인 직업으로 여기지 않기 시작하면서 고시생 인구가 줄었고, 이에 따라 고시촌의 분위기 역시 예전 같지 않게 됐다. 노량진 컵밥도 그만큼 활기를 잃었다. 그러나 컵밥 거리는 흥미로운 탄생 과정으로 인해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고, 한번쯤은 가봐야 하는 명소로 떠올랐다. 이제는 고시생보다 가족 단위의 여행객이나 젊은 연인들이 이곳을 더 많이 찾는다. 노량진 컵밥이 생존형 식문화에서 관광 콘텐츠로 확장되며 새로운 소비문화를 창출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포장마차에서 분식 대신 밥을 팔자 대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처럼 젊은 고시생들도 떡볶이나 국수 대신 밥을 먹어야 든든하다고 여겼다. 알곡 상태의 밀을 곱게 빻은 밀가루는 일종의 가공식품이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섭취 후 혈당을 급격히 올리고, 이내 급격한 허기를 유발한다. 반면 쌀은 천천히 흡수되어 포만감이 오래간다. 이는 수천 년 동안 쌀을 주식으로 삼아온 식습관에서 비롯되어 몸에 자연스럽게 새겨진 감각이다. 시대적 트렌드 오늘날 컵밥은 더욱 진화하고 있다. 고급화된 메뉴, 브랜드화된 제품, 해외에서의 K-푸드 아이콘으로 거듭나며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문화로 남아 있다. 우선 컵밥은 컵라면처럼 빠르게 대중화에 성공했다. 냉동식품이나 레토르트 형태로 가공되며 편의점과 마트에서 ‘전자레인지 2분’이면 완성되는 간편식으로 자리 잡았다. ‘집에서도 간단한 한 끼’라는 메시지는 시대 흐름과 맞아떨어졌고, 컵밥의 대중성을 더욱 굳혔다. 이제 컵밥은 한국을 넘어 세계로 향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 유타주에서 시작된 컵밥(Cupbop) 프랜차이즈다. 비보이 출신이었던 송정훈 대표가 유학을 왔다가 시작한 이 브랜드는 컵밥을 미국식 패스트푸드 스타일로 재해석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밥, 고기, 소스, 토핑을 조합해 하나의 볼로 제공하는 방식은 미국의 푸드 트렌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한국적 맛을 유지하면서도 서구적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 주효했다. 어느덧 창업 20년이 넘은 이 브랜드는 현재 미국 전역으로 매장을 넓혀가고 있으며, K-푸드 열풍과 맞물려 더욱 성장 중이다. 이 외에도 컵밥은 일본, 동남아, 유럽 일부 지역에서 한식 간편식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BTS, 김치, 불고기와 함께 컵밥은 ‘일상 속의 한류’를 구성하는 아이템으로 떠오르는 중이다. 컵밥의 가치는 단순히 간편하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한국 사회의 변화, 특히 청년 세대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음식이라서다. 고된 공부와 취업 준비, 아르바이트 사이에서 허겁지겁 끼니를 해결해야 했던 수많은 청춘들의 진심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컵밥은 시대의 필요가 만들어낸 음식 문화였다. 길거리에서 시작된 작은 컵 하나가 세계인의 식탁에 오르기까지 컵밥은 그 자체로 한국인의 생활과 감성을 담아낸 살아 있는 음식 문화의 사례다. 한 손에 쥔 이 작고 따뜻한 한 끼가 앞으로 또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지 기대가 된다. 노량진 컵밥은 간편식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1인 가구 증가에 따라 간편식 시장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다양한 종류의 컵밥이 편의점과 마트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 뉴스뱅크

전 세계를 울린 가족 드라마

Arts & Culture 2025 SUMMER

전 세계를 울린 가족 드라마 방영 내내 국내외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 폭싹 속았수다 >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한국적 정서가 물씬한 이 드라마는 국내를 넘어 세계 각국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 폭싹 속았수다 >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을 아우르며 주요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는 드라마다. 촬영지를 찾아 인증샷을 찍거나 드라마를 테마로 한 이벤트가 열리는 등 현재까지도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 넷플릭스 올해 3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16부작 드라마 < 폭싹 속았수다 >는 한반도 남쪽에 자리한 아름다운 섬 제주를 배경으로 광례에서 애순을 거쳐 금명으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가족사를 그려냈다. 이 드라마는 전 회차를 한꺼번에 공개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4회씩 순차적으로 방영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첫 회부터 최종회까지 흡인력과 화제성을 잃지 않으며 시청자들을 몰입시켰다. 특히 OTT 플랫폼의 주 이용층인 20~30대뿐만 아니라 중장년층과 노년층 시청자들까지 불러들이면서, 그동안 젊은 세대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던 OTT 서비스의 장벽을 허물었다. < 폭싹 속았수다 >는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력을 비롯해 김원석 감독의 짜임새 있는 연출과 임상춘 작가의 탄탄한 극본이 삼박자를 이루며, 작품성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근래 한국 드라마들 중 최고의 작품’이라는 극찬이 무색하지 않게, 지난 5월 열린 제61회 백상예술대상에서도 8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으며 최종적으로 작품상, 극본상 등 4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그런가 하면 글로벌 평론 사이트 IMDb에서 9.2점, 로튼토마토에서는 토마토미터 100%의 평점을 받았다. 이는 역대 한국 드라마 중 가장 높은 점수다. 이 수치는 < 폭싹 속았수다 >가 국내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국적 감성 < 폭싹 속았수다 >는 첫 회부터 한국인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바다 깊숙이 들어가 고된 물질을 하는 애순의 엄마 광례의 모습에서 저마다 자신의 어머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초반부의 시대적 배경이었던 1960~70년대는 경제 발전이 최상의 과제였던 재건의 시기였다. 이 시대를 살았던 한국의 어머니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억척스럽게 일하며 자식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키워내려 했다. 주인공 애순이 어린 시절 급장 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고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급장이 됐을 때 광례는 애순에게 “엄마가 가난하지, 네가 가난한 거 아니야. 쫄아붙지 마. 너는 푸지게 살아.”라고 위로했다. 그 말은 한국전쟁 이후 생존이 절실했던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가진 소망이었다. 광례는 딸에게 푸지게 살라고 했지만, 정작 자신은 거친 물질로 생계를 이어가다 겨우 스물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광례는 자신의 꿈이나 성공 같은 것은 사치에 불과했던 생존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열 살에 엄마를 잃고 생활력 없는 새아버지의 아이들을 돌보며 살아야 했던 애순의 삶도 모질기는 마찬가지였다. 애순에게는 지긋지긋한 섬을 떠나 대학도 가고 시인도 되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소처럼 밭을 일궈 수확한 양배추를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잇는 고된 삶만을 허락할 뿐이었다. 생존과 생계의 시대를 지나 부모 세대의 꿈을 현실화한 건 다음 세대이다. 애순의 딸 금명은 결국 애순이 그토록 바라던 섬을 떠나 최고의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고군분투 끝에 인터넷 강의 회사를 차려 성공을 거두고, 엄마의 꿈이었던 시집 발간도 대신 이뤄준다. 금명의 성공 스토리는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지는데, 행복과 불행이 끝없이 교차하는 복잡한 인생사를 통해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고통과 절망, 기쁨과 열망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시청자들이 온전히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래서 드라마가 공개된 후 오랜만에 펑펑 울었다는 시청 후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편적 테마 < 폭싹 속았수다 >는 지극히 한국적인 드라마다. 제주 방언을 그대로 사용한 제목에서부터 이미 드러나듯 지역적 정서가 깊게 밴 작품이다. 작품 제목인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 방언으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사실 제주 방언은 타 지역의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낯선데, 이 작품에는 한국인도 알아듣기 어려운 제주 사투리로 가득한 대사가 계속 이어진다. 여기에 더해 제주 지역의 토속적 문화, 여성들에게 버거웠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질풍노도 같았던 한국 현대사가 간접적으로 펼쳐진다. 18개 언어로 더빙되어 전 세계 시청자와 만난 이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 번역과 더빙에 심혈을 기울였다. ⓒ 넷플릭스 그런 연유로 이 드라마가 넷플릭스에서 막 공개됐을 때만 해도 세계적 반향을 일으킬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더욱이 자극적인 장르물들이 적지 않은 넷플릭스에서 따뜻한 가족 이야기가 과연 통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방영 내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들이 쏟아졌고, 넷플릭스 순위 집계에서도 비영어권 1위, 전체 3위를 기록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대부분의 국가들은 물론이고 남미권에서도 열풍이 불었다. 브라질에서는 한 마트에서 마지막 회를 다 같이 모여 단체 관람하는 이색적인 풍경도 펼쳐졌다. SNS에서도 해외 팬들의 이른바 ‘나의 관식’ 인증 릴레이가 유행처럼 번졌다. 평생 가족을 위해 몸을 혹사해 무쇠 같던 몸이 어느새 닳아버린 남자 주인공 관식은 당대를 살았던 한국 아버지들의 전형적 모습이다. 그런가 하면 아내 애순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순정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 캐릭터에 몰입한 팬들은 ‘당신의 아빠가 당신의 관식일 때’라는 제목으로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거나 커플 사진에 “나는 나만의 관식이랑 결혼할 것입니다.”라는 글귀를 붙였다. “나는 이미 나만의 관식과 살고 있다”며 다정해 보이는 부부의 사진을 올린 경우도 있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한 관식의 삶에 대한 감동을 릴레이 인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결국 국가, 언어, 문화가 달라도 ‘가족’이라는 보편적 테마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이 가장 한국적인 드라마가 세계인들의 ‘인생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한국형 가족 서사의 가능성 근대화 과정에서 남다른 가족주의 시대를 거쳐온 한국인들에게 가족 서사는 오랜 전통을 지닌 소재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1인 가구가 전체의 30%에 다다르게 된 한국은 가족보다는 개인의 삶을 더 중시하는 풍조로 변화했다. 이러한 사회상은 드라마에도 반영되어, 가족 드라마보다는 멜로물이나 장르물이 한국 드라마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다. 특히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의 등장 이후 보다 보편적인 서사에 무게중심이 쏠리면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스릴러 같은 장르물이 더 많이 쏟아졌다. 그런 점에서 < 폭싹 속았수다 >는 최근 흐름에서 빗겨나 있는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젊은 날의 꿈과 좌절, 가족 간 갈등과 화해, 예상치 못한 이별 등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들을 그려내며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 넷플릭스 문화적 할인(cultural discount)은 한 문화권의 문화 상품이 다른 문화권으로 진입할 때 언어, 관습, 종교 등 문화적 차이 때문에 가치가 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하지만 SNS와 유튜브가 공유되면서 문화적 할인은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다. 글로벌 시청자들이 한국 드라마를 함께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이색적인 풍경은 문화적 장벽이 점차 무너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는 곧 차별화된 로컬 문화를 깊이 있게 담아내는 콘텐츠가 글로벌 성취의 관건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취향과 관심사가 다원화된 시대에 전 세계 모든 대중들이 열광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 폭싹 속았수다 >의 이례적 성취는 가족 서사가 한국 콘텐츠 산업에서 중요한 매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미래의 꿈, 현실과 만나다

Arts & Culture 2025 SUMMER

미래의 꿈, 현실과 만나다 『네 이웃의 식탁』 구병모 작, 김지영 번역 와일드파이어, 2024 224쪽, 14.99 파운드 미래의 꿈, 현실과 만나다 구병모의 『네 이웃의 식탁』은 정부의 저출산 해결 프로젝트 사업에 참여한 네 커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녀 셋을 낳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서약을 하면 실험공동주택에 입주할 수 있게 해주는 사업이다. 요진과 남편 은오가 네 번째 입주 부부로 공동주택에 들어오면서, 독자들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이 커뮤니티의 모습을 처음 마주하게 된다.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라는 희망적인 이름과 달리, 이곳 입주민들 사이에는 이미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공동주택 반장 역할을 자처하는 단희는 쾌활하고 적극적이지만, 이웃에 대한 관심이 간섭과 참견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출산 직후 동화책 그림 그리는 일에 복귀한 효내는 남편이 출근한 사이 아이를 돌보며 마감에 시달리고 있다. 공동체 생활에 참여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여산과 교원 부부는 그들만의 문제가 있지만, 작은 공동체에서 비밀이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그 가운데 새로 합류한 요진과 은오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커플로, 요진은 ‘직장맘’이고 은오는 전업 아빠다. 단희의 남편 재강의 차가 고장 나자, 은오가 요진과의 카풀을 제안하면서 부담스러운 상황이 연출된다. 출퇴근길을 함께하게 된 재강은 요진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꾸 선을 넘으려 하고, 요진은 자신의 판단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서울의 높은 집값, 최저 수준의 출산율, 정부의 어설픈 대응 등 현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조명한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인간적 질문들의 틀에 불과하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전통적인 성 역할에 따라 사회가 아버지 또는 어머니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이를 낳은 후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요진의 친구들이 말하듯, 정말 아이를 낳아야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며, 그 이전까지는 그저 ‘소꿉놀이’에 불과한 것인가? 생물학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이 서로 얽히고설켜 인물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지만, 그 원인이 정확히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작품 속의 공동체는 마치 현미경 아래 놓인 페트리 접시와 같다.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이 고립된 공간에 모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리 좋은 의도로 시작했더라도, 곧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입주자들은 과연 그 균열을 메꿀 수 있을까? 아니면 균열이 점점 깊어져 그들이 섬세하게 쌓아올린, 취약한 세상을 뒤흔드는 단층선으로 변하게 될까? 중대한 사회 문제로 인해 아무리 상황이 심각하다 해도, 사회란 결국 개인과 개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곳이다. 구병모 작가는 거시적인 한국 사회와 미시적인 공동체의 삶을 동시에 들여다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성인으로 산다는 것, 부모가 된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무한화서』 이성복 작, 안톤 허 번역 앨런레인, 2023 176 쪽, 18.00 달러 시의 거장이 들려주는 시와 삶에 대한 성찰 이성복의 『무한화서』는 창작 수업 중 470개의 아포리즘을 학생들이 정리하여 담은 책이다. 깊은 성찰을 통해 얻은 지혜의 글을 통해 저자는 종교, 철학, 스포츠, 과학, 수학 등 다른 분야들을 인용하면서 은유와 비유를 통해 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언어, 사물, 시, 글쓰기, 삶이라는 다섯 주제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에 대한 저자의 일관된 생각이 그 기저에 흐르고 있다. 즉, 시란 의도적 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미묘한 사유가 드러나며, 저자는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도 매번 다른 관점과 시선을 보여준다. 각각의 아포리즘은 빗방울처럼 잠깐 스쳐 지나가지만, 쌓이고 쌓여 결국 바위를 뚫는 물방울처럼 깊은 울림을 남긴다. 특히 마지막 장에는 시와 무관해 보이는, 그러나 어쩌면 가장 시적인, 인생의 지혜들이 담겨 있다.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야 독자는 그 여정이 ‘언어’에서 ‘삶’으로 곧게 이어지는 직선이 아니라,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하나의 원형임을 깨닫게 된다. 한 번 읽으면 저자의 시 철학을 엿볼 수 있고, 차분히 여러 번 읽다 보면 더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 역성 > 이승윤, CD,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마름모, 2024 불합리한 세상을 향한 포효 이승윤은 2011년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이후 인디 음악계에서 활동했다. 그가 대중적 인지도를 얻게 된 건 JTBC가 2020년부터 방영하는 예능 프로그램 의 초대 우승자가 되면서부터다. 브릿팝, 하드록, 헤비메탈, 펑크 록에 이르기까지 날것의 재료들을 도마에 올려 난도질한 뒤 특유의 한국어 말맛을 뒤섞는 게 그의 음악적 레시피다. 2024년 발매한 정규 3집 은 싱어송라이터로서 그가 걸어온 여정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 용어를 가져온 가사들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폭풍처럼 질주하는 록 템포에 올라타 활어처럼 펄떡인다. 그가 쓰는 가사는 대체로 호전적이다. 싸움의 대상은 자기 자신과 세계다. 그는 세상이 제시하는 진리와 삶의 방식, 성공 방정식에 대해 끝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고개를 흔든다. 15곡이 실려 있는 이 앨범은 64분에 이르는 대장정이다. 타이틀곡 은 사납게 포효하는 보컬과 밴드 사운드에 산뜻한 현악을 가미해 ‘처박혀 버린 얼’과 ‘짓밟힌 넋’을 되찾는 역성혁명을 이루겠다고 천명한다. 앨범은 중반부 어쿠스틱 팝 발라드에서 야성적 펑크 록을 지나 후반부쯤 6분이 넘게 몰아붙이는 에서 하이라이트에 도달한다. 부드럽게 시작해 광기 어린 드럼의 질주로 치닫는 마지막 곡까지 이 앨범은 이승윤이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물게 굵은 붓과 커다란 캔버스를 쓰는 아티스트임을 입증한다. 다양한 음악적 색깔을 자기 식대로 쌓아 올려 큰 그림을 그려 내는 앨범 지향형 음악가 말이다. 이승윤은 이 음반으로 2025년 열린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악인, 최우수 록 노래, 최우수 모던록 노래 3개 부문의 트로피를 안으며 3관왕에 올랐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임희윤 음악평론가

조경가 정영선, 모두를 존중하는 조경

Arts & Culture 2025 SUMMER

조경가 정영선, 모두를 존중하는 조경 한국의 1세대 조경가 정영선(Jung Young-sun)은 서구에서 시작된 조경이란 개념을 한국의 땅과 기후, 그리고 한국인의 삶의 방식에 맞게 정착시킨 인물이다. 그녀의 대표작들은 자연과 인간, 장소와 시간이 서로를 존중하며 공존하는 풍경을 그려낸다. 그녀는 조경을 아름다움을 설계하는 기술이 아니라 모두의 삶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실천으로 여기며, 그 실천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겸허한 태도에서 출발한다. 원다르마센터는 원불교가 미국 포교 활동을 위해 뉴욕에 건립한 시설이다. 건축물과 경관이 하나의 유기체로 어우러지며 상생의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광활한 대지의 기존 질서를 그대로 존중해 설계되었다. 원다르마센터 제공 정영선과 그녀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2024)에서 ‘조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국토’이다. 그녀가 말하는 국토는 지정학적 범주나 경제적 개념이 아니다. 그녀는 국토를 시간과 기억, 생명과 감각이 중첩된 살아 있는 풍경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은 언제나 장소의 맥락을 읽는 것에서 출발하며, 이는 곧 국토를 구성하는 각각의 장소들이 지닌 고유성과 관계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1941년생인 정영선은 한국의 1세대 조경가이다. 그녀는 50여 년의 조경 인생 동안 우리 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자생종의 생물 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 하퍼스 바자 > 코리아 제공, 사진 표기식 정다운(Jung Dawoon) 감독의 다큐멘터리 < 땅에 쓰는 시 >의 한 장면. 선유도공원은 산업 시설물이었던 정수장을 다양한 공간적 체험이 가능한 장소로 탈바꿈시킨 사례이다. © 영화사 기린그림(Giraffe Pictures) 국토에 대한 인식 정영선에게 국토는 채워야 할 공간이 아니라, 비우고 들여다봐야 할 장소다. 그녀는 무분별한 도시화와 균질화된 개발이 국토의 고유한 풍경을 지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맞서 그녀는 조경을 통해 국토의 본래 결을 되살리고, 그 안에 스며 있는 역사와 생태, 사람의 흔적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다가간다. 서울식물원은 이러한 태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사례 중 하나다. 이 프로젝트에서 그녀는 기존의 습지와 수로, 버드나무 숲을 존중하며 인공적인 개입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흐름을 따라 정원을 구성했다. 관람객은 정형화된 식재가 아닌, 물과 식물이 어우러진 생태적 흐름을 경험하면서 국토의 원형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서울식물원은 다양한 식물 종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한편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도시의 일상적 공간에서 벗어나 어딘가 다른 곳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어졌다. 조경설계 서안(SeoAhn Total Landscape) 제공 이와 더불어 여의도샛강생태공원에도 정영선의 국토 인식이 스며 있다.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인 여의도에는 초고층 빌딩숲이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도회적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여의도 가장자리를 따라 흐르는 샛강 일대는 한때 콘크리트 제방에 갇혀 방치된 수로였으며, 생태적으로는 죽어 있는 공간에 가까웠다. 그녀는 이곳을 녹지 공간으로 만드는 데에서 나아가 본래의 자연성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도시와 생태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기존의 인공 구조물을 걷어내고, 샛강의 수질 정화와 호안 조성을 통해 강과 습지가 스스로 기능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 생태적 복원뿐 아니라 사람들의 접근성도 중요하게 여겼다. 행인들이 무심코 지나치던 둑길과 철로 주변을 걸으며 산책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고, 야생 식물과 조류가 살아 숨 쉬는 곳에 인간의 감각이 다시 접속할 수 있도록 연결 통로를 열었다. 이는 그간 잊혔던 국토성과 자연성이 어떻게 되살아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정영선은 국토를 감각과 경험의 장으로도 인식한다. 그녀는 땅을 걷고, 만지고, 냄새 맡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총체적 감각으로 국토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조경은 이러한 감각을 다시 연결하는 실천이며, 국토는 그러한 감각의 무대가 된다. 감각의 회복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옥상 정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녀는 문화 시설의 옥상이라는 비일상적 조건에서도 땅과 하늘, 바람과 식물, 사람의 움직임이 얽히는 생생한 풍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방문자들은 옥상 위에 펼쳐진 ‘대지’를 걸으며, 이곳이 위치한 광주라는 도시의 역사성과 자연의 숨결을 감각적으로 체험한다. 이는 단순히 흙이 깔리고 한국 고유의 수종이 식재된 정원이 아닌, 국토적 풍경의 수직적 확장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정영선이 말하는 국토는 ‘국가의 땅’이 아니라 삶과 시간, 감각과 기억이 쌓인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녀는 조경가의 역할을 단지 땅 위에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존재하던 것들을 다시 보이게 하고,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일로 파악한다. 국토는 그녀에게 있어 언제나 ‘다시 읽어야 할 시’이며, 조경은 그 시를 낭독하는 또 하나의 언어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은 빌딩 숲 사이에서 숲과 습지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조류학, 곤충학, 어류학, 식물학 등 각계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아 한강 변에서 가장 생태적인 공간으로 거듭났다. © 서울관광재단 공공성과 정치성 정영선은 조경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공공의 장소’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화려하고 기념비적인 공간이 아니라 걷고, 쉬고, 머물 수 있는 공간 말이다. 그녀는 그것이 조경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한다. 특히 그녀는 조경의 ‘정치성’에 주목한다. 즉, 조경은 사회의 구조와 권력의 흐름, 일상의 불균형을 드러내고 조율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의 프로젝트에서는 언제나 사용자의 관점이 중심이 된다. 벤치 하나, 나무 하나, 길 하나까지도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떻게 쓰일 것인지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특히 공공 프로젝트에서 이런 태도가 더 두드러진다. 특정한 계층의 미감을 위해 공간을 계획하기보다 누구나 평등하게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정영선은 조경을 공공성과 가장 깊이 맞닿아 있는 디자인 영역으로 본다. 그녀의 설계는 늘 사용자에 대한 세심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앉을 수 있고, 누구나 지날 수 있으며, 누구나 머무를 수 있는 장소. 그는 “조경은 삶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공간”이라 말한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조경, 누구에게도 편파적이지 않은 조경 말이다. 이러한 철학은 서울 곳곳의 공공 프로젝트에서 구현되어 왔다. 그녀는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경이 도시 속에서 어떻게 권력과 시선을 분산시키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며, 사회적 대화를 가능케 하는지를 고민한다. 조경을 사회를 조율하는 하나의 장치로 다루는 것이다. 정영선의 작업이 조용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 안에 기술을 넘어선 태도와 철학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조경은 그녀의 손에서 ‘풍경을 디자인하는 일’이 아니라, ‘삶을 위한 여백을 마련하는 일’로 확장된다. 복합 문화 시설인 예술의전당 설계를 위한 모형. 1980년대에는 경제 성장에 따른 생활 방식의 변화로 다양한 문화 기관과 레저 시설이 계획됐다. 특히 예술의전당은 여가 활동을 위한 장소를 조성하는 데 있어서 조경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조경설계 서안(SeoAhn Total Landscape) 제공 한국적 조경 정영선의 작업에는 늘 묵직한 질문이 깔려 있다. “조경이란 무엇인가, 한국에서 조경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그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의 작업 속에서, 그리고 자연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 속에서 풀어내고자 노력해 왔다. 그녀의 철학은 2023년 세계조경가협회(International Federation of Landscape Architects, IFLA)로부터 제프리 젤리코 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주최 측은 선정 이유에서 “서양에서 유래한 조경의 낯선 개념을 한국적 토양과 경관에 맞게 해석했다”고 밝혔다. 이는 정영선이 보여준 조경적 감각이 단지 지역적 특색을 덧붙이는 토속주의가 아니라, 장소의 본질과 관계를 섬세하게 짚어내는 방식으로 조경의 세계적 언어를 갱신한 것임을 의미한다. 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호암미술관의 전통 정원 희원은 정영선이 전통적 요소를 본격적으로 구사하게 된 전환점이었다. 화계, 연못, 담장, 정자 등의 건축적 요소와 더불어 한국 전통 정원의 미의식이 곳곳에 구현되었다. © 호암미술관 그녀는 ‘한국적 조경’에 대해서 “조경은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야 한다”고 자주 언급한다. 건물, 나무, 물길, 동선 등 각각의 요소들은 그 자체로 목적을 갖기보다는 근경, 중경, 원경으로 이어지는 시선의 흐름과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다. 이때 그녀가 중시하는 개념이 바로 차경(借景)이다. 차경은 말 그대로 외부 자연 경관을 정원의 일부처럼 끌어들이는 전통적인 조경 기법이지만, 정영선에게 그것은 단순한 시각적 수법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태도, 자연을 향한 겸허한 시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영선의 조경은 흔히 말하는 ‘전통 재현’과는 다르다. 그는 전통의 형태나 상징을 복원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 한국인의 경관 인식과 자연관, 삶의 태도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구성한다. 그녀가 받은 제프리 젤리코 상은 단지 한 개인의 성취를 기리는 것이 아니다. 조경이라는 서양 중심의 공간 개념이, 한국의 경관과 철학 속에서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세계에 보여준 결과였다. 정영선은 자신의 설계가 “자연이 말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은 언제나 눈에 띄지 않지만, 자연이 항상 드러난다. 그녀의 작업은 땅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과 다시 관계 맺을 수 있도록 장면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녀는 그렇게, 오늘날의 땅 위에 담 너머 풍경의 조용한 아름다움을 다시 불러온다. 제주도에 위치한 오설록 티뮤지엄은 아모레퍼시픽이 차 문화를 소개하고 확산하기 위해 건립한 박물관이다. 정영선은 건축물 주변으로 제주의 차밭과 자연이 서로 어우러질 수 있도록 정원을 조성했다. © 김용관(Kim Yong-kwan)

과거에서 온 현재의 인형들

Arts & Culture 2025 SUMMER

과거에서 온 현재의 인형들 연희공방 음마갱깽은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 전통 인형극을 계승하는 동시에 현대적 요소를 도입해 전통 인형극을 확장하고 대중화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또한 기존 인형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표현과 움직임이 가능한 인형을 개발하고 있다. 흔히 꼭두각시놀음으로 불리는 덜미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전통 인형극이다. 남사당놀이 이수자이자 전통 연희 집단 음마갱깽 대표인 음대진은 인형 제작과 극 창작 및 연출을 통해 전통 인형극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서양에 마리오네트극, 일본에 분라쿠가 있듯이 한국에는 꼭두각시놀음이 있다. 전통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은 남사당놀이의 일부이다. 남사당놀이는 40여 명의 남성들로 구성된 유랑 극단 남사당패가 선보였던 전통 민속 공연이다. 풍물과 버나(대접돌리기)를 비롯해 현대의 텀블링과 비슷한 살판,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 등 총 여섯 마당으로 구성된다. 덜미가 바로 꼭두각시놀음인데, 연희자들은 꼭두각시놀음이라는 용어 대신 보통 덜미라고 부른다. 인형의 목덜미를 잡고 조종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꼭두각시놀음은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을 따서 박첨지놀음이나 홍동지놀음이라고도 불린다. 이 인형극은 음악, 춤, 곡예와 같은 기교 외에도 사회적 메시지를 던진다는 점에서 여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인형극의 등장인물들은 양반 주인과 저항하는 하인, 늙은 부부와 남편의 첩, 속세의 쾌락에 빠져버린 승려, 끝없는 억압과 착취로 고통받는 민중 등 각기 다른 사회 계층의 전형적인 인물을 대표한다. 극은 단지 이야기의 재미만 주는 것이 아니라, 신분제에 갇힌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풍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성평등과 인간 존중의 이상을 보여 주기도 한다. 사회상 반영 꼭두각시놀음은 포장막을 치고 사방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워 공중무대를 만든 다음 인형 조종자인 대잡이가 포장 안에 들어앉아 인형이 달린 막대기를 잡고 움직인다. 인형들은 상반신만 포장 위로 올라와 관객들과 마주한다. 대잡이가 막 안에 들어가면 관객들의 표정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무대 앞에 앉은 산받이가 내뱉는 소리를 통해 객석의 분위기를 파악한다. 산받이는 인형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대개 악사(樂士) 중에서 이 역할을 맡는다. 대잡이와 산받이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1시간 남짓 극을 끌어간다. 이들이 중간중간 관객에게 말을 걸기 때문에 꼭두각시놀음은 무대와 관객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형태를 띤다. 창작극 < 절 대목 >의 한 장면. 전통 연희와 전통 건축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절을 짓고 부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번뇌, 깨달음을 그리고 있다. © 음마갱깽 고려 시대의 문신이자 시인인 이규보(1168~1241)가 쓴 「관농환유작(觀弄幻有作)」은 꼭두각시놀음을 본 후 감상을 시로 남긴 작품이다. 꼭두각시놀음의 극본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시를 통해 고려 시대에도 극본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꼭두각시놀음의 내용은 채록본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보통 7~10막으로 구성된다. 주인공 박첨지의 일대기가 펼쳐지면서 서민들의 애환과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풍자, 종교를 뛰어넘는 구원 등이 묘사된다. 꼭두각시놀음은 일제강점기에 명맥이 끊어질 뻔했으나 1964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1988년에는 남사당놀이의 나머지 다섯 종목도 추가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9년 남사당놀이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 새로운 시도 연희공방(演戱工房) 음마갱깽은 남사당놀이의 덜미 인형을 직접 제작해서 가장 활발하게 공연하는 단체로 꼽힌다. ‘음마(音摩)’는 소리를 어루만져 음악을 만든다는 뜻이고, ‘갱깽’은 대장간에서 나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이다. 이들은 기존 덜미 인형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양한 표현과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개발해 현대에 맞는 전통 인형극을 보여 준다. 음마갱깽은 2016년 연희자이자 인형 제작자인 음대진(Eum Dae-jin 陰大眞)을 중심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출신 7명이 모여 창단했다. 현재 인형 제작 및 예술감독, 기획자, 작곡가, 디자이너, 연희자 등 총 18명이 활동 중이다. 음마갱깽 작업실 한쪽에 놓인 덜미 인형들. 덜미 인형은 하반신과 팔꿈치가 없는 것이 특징이며, 인형을 어떻게 잡고 조종하느냐에 따라 살아 있는 듯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하다. “저희는 덜미 인형극 단체인 만큼 처음부터 창작극에도 전통적 요소를 꼭 넣자는 원칙을 정했어요. 대잡이와 산받이, 그리고 관객의 구도 안에서 전통 인형극의 요소가 하나라도 나오게 합니다. 마리오네트극에 덜미 하나, 테이블 인형극에 산받이를 넣는 식이죠.” 음마갱깽 대표 음대진은 남사당놀이 이수자이다. 그는 덜미 인형뿐 아니라 마리오네트라고 불리는 끈인형, 손을 인형 안에 넣어서 연기하는 손인형 등 다양한 형태의 인형을 제작해 개성 있는 오브제극을 보여 주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미국, 러시아, 일본,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각지의 인형 전문가들을 찾아가 배웠다고 한다. 그는 꼭두각시극에 나오는 절을 짓고 허무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전통 건축인 대목(大木) 이수 과정을 수료하고, 실제로 절 짓는 현장에 들어가서 상세히 배우기도 했다. 이를 토대로 2023년 무대에 올린 창작극 은 세간의 호평과 함께 극단이 크게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덜미 인형은 팔꿈치와 하반신이 없는 게 특징인데, 대잡이에 따라 여러 동작이 가능합니다. 음악을 타며 춤 동작을 할 때면 투박하지만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덜미는 대사 외에도 즉흥적인 재담을 통해서 극을 이끌어 가다 보니 관객의 몰입도가 매우 높다. “공연을 하다 보면 인형에 사람의 감정이 투사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관객 입장에서 앞에 막이 드리워지고 인형만 나와 있는 상태에 놓이면 인형에 신경이 집중되죠. 또 인형과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 노출돼 있는 경우에도 인형의 동선에 따라 관객의 감정이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형극임에도 눈물을 흘리는 관객분들도 많습니다.” 그는 사람이 보여줄 수 없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게 인형극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한다. 음대진 대표가 덜미 인형을 제작하기 위해 도면 작업을 하고 있다. 인형은 성별과 성격에 따라 디자인이 다른데, 그는 주로 관상 책을 참고해 캐릭터의 특징을 담는다. 해외 관객들의 반응 음마갱깽을 세상에 제대로 알린 것은 2020년 황해도 장연(長淵) 지역에서 전승되던 인형극을 재현한 공연이었다. 장연 꼭두각시극에 사용되었던 전통 인형들을 복원해 제작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대 변화에 따른 현대화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 공연은 음마갱깽의 고정 레퍼토리로 자리 잡아 매년 무대에 올리고 있다. “황해도 장연 꼭두각시놀음의 경우 대본 채록본이 남아 있었어요. 대본에 나와 있는 6점의 덜미 도판을 토대로 29개 인형을 재현했습니다.” 인형극은 대본이 먼저 나오기도 하지만, 인형을 먼저 만들고 이야기를 풀어가기도 한다. 그때는 인형의 성별, 성격, 특징에 따라 디자인을 하는데 주로 관상 책을 참고한다. 또한 비뚤어진 성격이라면 코를 비튼다든지 말이 많은 캐릭터라면 입을 크게 하는 식으로 포인트를 잡아서 표현한다. 밑그림이 완성되면 모눈종이에 옮겨 그려서 나무 도판에 붙이고 조각한다. “덜미 인형은 얼굴부터 손잡이까지 일체형이에요. 얼굴 윤곽을 따고 코를 중심으로 조각하죠. 입이나 안구가 움직이는 구조라면 전체 얼굴을 먼저 완성한 뒤 뒤통수를 파내고, 어깨판과 팔을 만든 뒤 마지막으로 의상을 제작합니다. 사람이 입던 옷을 리폼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2024년 5월에는 모스크바 킥클랍(KykLab) 극장에서 음마갱깽의 대표 레퍼토리 세 작품을 옴니버스극으로 올려 화제가 됐다. 전석 매진을 기록한 이 공연은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한국 인형극이다. 지원 사업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기획으로 성사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지난해 10월에는 러시아에 이어 이탈리아 토리노 인칸티연극제(Incanti Theatre Festival)에도 참가해 꼭두각시놀음 중 일부를 공연했어요. 해외 관객들의 열띤 반응에 K-인형극의 가능성을 엿보았습니다.” 인형 제작자로서 그의 꿈은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의 대표 이미지로서 덜미를 알아봐주는 것이다. 음대진 대표의 작업 공간. 그는 탈이나 소도구 등 작품에 필요한 도구들을 모두 직접 만든다. 처음에는 인형 하나를 만드는 데 두 달이 넘게 걸렸지만, 지금은 며칠 만에 만들 정도로 손에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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