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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 & Culture

Arts and Culture Calendar 2024년 9월 ~ 2024년 12월

Arts & Culture 2024 AUTUMN

Arts and Culture Calendar 2024년 9월 ~ 2024년 12월 보이는 수장고: 유영국 유영국은 산과 바다를 주제로 비정형적이고 기하학적인 다양한 추상의 세계를 일구었다. 이번 전시는‘산의 화가’라고 불릴 정도로 1960년대부터 줄곧 산을 그린 유영국(劉永國)의 ‹산› 시리즈 작품 중 1968~1974년에 제작된 5점의 작품을 연대기 순으로 보여준다. 기간: 2024. 07. 12.~ 2024.09.29.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홈페이지 : mmca.go.kr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 건축가의 집을 통해 2000년 이후 한국 현대 건축과 주거 문화를 사회 문화적 관점으로 조망해 보는 전시다. ‘개인과 사회, 장소, 시간’을 주제어로 삼아 거주의 다양한 양식과 의미를 환기한다. 이 전시에는 한국의 주요 건축가 30명(팀)이 설계한 58채의 주택이 소개된다. 전시에 소개된 집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주택과 주거 문화를 대표할 수는 없지만, 이곳에는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요청하는 힘이 있다. 기간: 2024. 07. 19.~2025. 02. 02.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홈페이지 : mmca.go.kr 다니엘 아샴 : 서울 3024 는 천년 후 미래라는 시간을 설정으로 아샴만의 고유한 세계관을 몰입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전시이다. 작가의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250여 점의 작품들이 공개된다.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을 활용하여 만든 고전 조각 시리즈를 시작으로 애니메이션 포켓몬과의 협업 작품, 서울에서 개최되는 전시를 기념하여 제작한 신작 회화와 드로잉, 유물 발굴 현장을 재현한 대형 설치 작업 등 시대와 영역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기간: 2024.07.12.~2024.10.13. 장소: 롯데뮤지엄 홈페이지 : lottemuseum.com 부산비엔날레 2024부산비엔날레는 < 어둠에서 보기(Seeing in the Dark) >를 주제로 부산현대미술관과 부산근현대역사관, 한성1918, 초량재에서 펼쳐진다. 어둠에서 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어둠’은 우리가 처한 곤경이자, 이미 알려진 곳이면서도 알 수 없는 장소를 항해하는 두려움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전시는 어둠을 쫓아내는 대신, 포용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기간: 2024. 8. 17.~10. 20. 장소: 부산현대미술관, 부산근현대역사관, 한성1918, 초량재 홈페이지 : busanbiennale2024.com 서도호: 스페큘레이션스 영국을 기반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국 설치미술 작가 서도호의 전시가 열린다. 이번 전시명은 ‘스페큘레이션스(speculations)’로, ‘만약에’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펼쳐진 그의 모든 창작 활동 과정이 담긴 회고전 성격이다. 이번 전시에는 전시는 드로잉 작품, ‘완벽한 집: 다리프로젝트’영상을 비롯해 그의 ‘별똥별’, ‘다리를 놓는 집’ 등이 모형으로 재현됐다. 기간: 2024. 8. 17.~11. 3. 장소: 아트선재센터 전관 홈페이지 : artsonje.org JOHN PAI 존 배 : SHARED DESTINIES 존 배의 70여 년의 예술적 여정을 집약적으로 선보이는 < 운명의 조우 > 전시가 열린다. 이번 전시는 1960년대 초반 구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제작된 초기 강철 조각을 비롯해 연대기별로 주요 철사 조각, 드로잉과 회화까지 작가의 작품 세계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작품 30여 점을 선별하여 소개한다. 기간: 2024. 08. 20.~2024. 10. 20. 장소: 갤러리현대 홈페이지 : galleryhyundai.com 마음의 기술과 저변의 속삭임 예술과 과학의 교차점에서 인식과 정체성, 그리고 경계성에 대해 탐구하는 마이클 주(Michael Joo)의 전시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일상적인 지각 기저에서 이루어지는 교환과 연결, 언어화하기 어려운 영향 관계에 주목한다. 전시 제목처럼 표면화되지는 않지만 각종 숨겨진 연결망을 환기하고, 여러 비가시적 관계와 친밀성을 조율하는 소프트 스킬(soft skill) 에 주의를 돌린다. 기간: 2024. 08. 30.~2024. 11. 03. 장소: 국제갤러리 서울 홈페이지 : kukjegallery.com 공예로 짓는 집 다양한 장르와의 실험을 통해 공예의 새로운 역할과 가능성을 모색하는 특별기획전이다.전시는 현대공예가와 전통 장인, 건축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 20인(팀)이 실내외 건축 공간에 담긴 공예 요소를 발견하고, 바닥에서 지붕에 이르는 건축의 기본 구조와 개념을 확장된 공예의 관점으로 풀어낸다. 기간: 2024. 09. 05.~2025. 03. 09. 장소: 서울공예박물관 홈페이지 : craftmuseum.seoul.go.kr 아니카 이 <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 기술과 생물, 감각을 연결하는 실험적인 작업을 전개해 온 한국계 미국 작가 아니카 이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이다. 아니카 이는 박테리아, 튀긴 꽃처럼 유기적이고 일시적인 재료를 사용해 인간의 감정과 감각을 예민하게 포착한 작업으로 이름을 알렸다. 전시에는 지난 10여 년간 제작된 작품 30여 점이 출품되며, 작가의 전반적인 작업 세계와 최근 경향을 폭넓게 소개한다. 기간: 2024. 09. 05.~2024. 12. 29. 장소: 리움미술관 홈페이지 : leeumhoam.org 광주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가 30주년을 맞았다. 올해 열리는 제15회 광주비엔날레는 《판소리, 모두의 울림》(Pansori, a soundscape of the 21st Century)이라는 주제로 30개국 72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이번 비엔날레는 현시대 복잡성의 좌표를 그리는 시도이며, 개인의 거처부터 인간이 점령한 지구 전역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오페라적 전시로 채워진다. 기간: 2024. 09. 07.~2024. 12. 01. 장소: 광주비엔날레 홈페이지 : gwangjubiennale.org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안동에는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한국의 역사마을에서 800년 전부터 전승되어 오던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있다. 마을 공동체들은 탈놀이를 통해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했고, 별신굿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왔다. 2024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은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문화의 춤’을 주제로 5대양 6대주 세계 각국의 탈과 탈춤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여행의 장을 마련한다. 기간: 2024. 09. 27.~2024. 10. 06. 장소: 안동역, 원도심, 탈춤공원 일원 홈페이지 : maskdance.com 궁중문화축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서울 소재 5개의 궁궐과 종묘에서 펼쳐지는 문화유산 축제인 궁중문화축전이 열린다. 이번 축제에는 한국의 전통 복식인 한복을 중심으로 < 경복궁 한복 연향 >, 창경궁에서 열리는 뮤지컬 < 복사꽃, 생각하니 슬프다>, < 고궁음악회-발레x수제천 >등 궁궐과 궁중문화를 더 쉽게 경험할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기간: 2024. 10. 09.~2024. 10. 13. 장소: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홈페이지 : kh.or.kr/fest

서울의 닭요리, 닭한마리

Arts & Culture 2024 AUTUMN

서울의 닭요리, 닭한마리 닭한마리는 서울에서 생겨난 요리다. 1960년대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투박한 양푼 냄비 안의 닭한마리는 맛과 재미로도 훌륭한 음식인 동시에 대도시 서울의 성장기에 시민들이 거친 노동을 견뎌야 했던 용광로 같은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닭한마리는 이름 그대로 닭 한 마리를 다른 재료들과 함께 냄비에 넣고 끓인 뒤 양념을 찍어 먹는 서울 요리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김치찌개, 소고기 잡채, 떡볶이처럼 한국의 요리는 대개 재료+조리법(또는 특별한 양념 이름)의 순서로 명명된다. 그런데 닭한마리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처음 수학을 배우기 시작할 때 수를 세던 방식에 머물러 있다. 그냥 ‘닭 한 마리’이다. 당신이 세 마리를 먹고 싶어 가게 직원에게 “닭 세 마리요!”라고 하면 식당 직원은 아마 당황할 것이다.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닭한마리 세 개요!”. 닭한마리가 갖는 의미 이렇게 단순하고 직선적인 이름이 붙은 과정이나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음식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일단, 닭한마리라는 요리가 생겨날 당시 닭은 귀중한 음식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당시에는 더 비쌌다. 비싼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먹는다니!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놀라운 축복이었다. 마치 미국인들이 칠면조 한 마리를 놓고 추수감사절을 보내는 것이 깊은 의미를 담고 있듯이 말이다. “닭을 통째로 먹는다고?’” 그 이름만으로도 손님들은 흥분했다. 이 요리가 퍼져 나갈 무렵, 한국의 양계산업은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식용을 위한 닭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닭을 한 마리나! 제공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한국인은 어떤 음식을 통째로 놓고 먹거나 제사상에 올려야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그런 전통이 닭한마리의 성공 요인에 투영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한국인은 프라이드치킨을 ‘통닭’이라고 부르는 문화가 있다. 만약에 그 닭이 조각조각 나뉘어 튀겨졌다고 해도 말이다. ‘통’은 원만하고 많은 것, 완벽한 것, 100퍼센트라는 의미가 있다. 더 좋은 대접, 만족감을 의미한다. 닭한마리라는 명명도 그런 의미를 같이 담고 있다. 닭 한 마리는 닭 반 마리의 두 배가 아니라 완전체를 상징한다. 서울의 역사가 담긴 맛 의류 상가가 즐비한 서울 동대문 뒷골목에는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30년 이상 된 닭한마리 골목이 있다. 이 골목에 간다면, 골목의 역사에 대해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본래 이 골목은 시장의 일부다. 서울은 조선시대에 수도가 되었는데, 광화문 앞에 정부에서 운영하는 시장이 있었다. 또한 지금의 닭한마리 골목 주변은 서울의 서민적인 동네로 번성했고, 시장이 생겨났는데 한국전쟁 이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큰 시장으로 확장되었다. 동대문시장, 광장시장, 평화시장 등 서울의 주요한 시장이 자리 잡았다. 이 시장이 닭한마리의 인기에 큰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시장은 시민들이 장을 보는 곳인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일터이기도 하다. 의류 제조 종사자들은 저렴하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하거나 일 끝난 후 소주 한잔을 나눌 수 있는 술집을 찾게 되었다. 저렴한 가격, 충분한 양, 맛있는 음식, 여기에 ‘고기’가 들어간다면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음식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닭백숙을 팔던 집에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칼국수와 떡, 야채 등의 사리를 제공하면서 닭 한 마리를 ‘풀 서비스로’ 즐길 수 있게 완성되었다는 설, 다른 하나는 닭칼국수를 팔던 집에서 저녁 술안주로 닭백숙을 제공하면서 자연스럽게 특별한 양념을 내어놓은 것이 지금과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이다. 동대문 뒷골목 닭한마리 골목. 과거 시장 닭한마리를 먹기 위해 상인들과 직장인들이 모여들던 골목에는 최근 외국인도 모여들며 한국의 맛과 문화를 즐기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1970년부터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서울에는 시장의 상인들, 노동자들 외에 이른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도 늘어났다. 그들은 낮엔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는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면서 피로를 풀었다. 서울의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서 다니는 것은 당시의 새로운 문화였다. 그들은 저렴하면서 맛있는 술집을 넘어서는 어떤 재미를 갈구했는데, 닭한마리는 그런 니즈에 완벽한 메뉴나 다름없었다. 백숙이나 삼계탕처럼 닭을 삶아서 다른 그릇에 내는 게 아니라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찌그러진 양푼 냄비에 닭이 통째로 들어가고, 각자 입맛에 맞게 만든 양념에 닭고기를 찍어 먹으며 소주 한 잔 기울이는 행위는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점차 닭한마리 골목엔 직장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몰려드는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눈치 빠른 상인들은 서울의 다른 지역에도 닭한마리 가게를 열기 시작했다. 사실 이 음식을 잘 모르는 한국인도 상당히 많다. 집에서는 거의 먹지 않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활동을 해보지 않은 어린이나 학생들, 혹은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세월을 보낸 여자 노인들은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 닭한마리 자체가 집밥의 카테고리에 속한 적이 없으며, 음식이 담겨 나오는 그릇도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육수나 양념장이 그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대체로 잘하는 가게에서 먹어야 맛있다는 인식이 강했으며, 드럼통 식탁에 빙 둘러앉아 팔팔 끓여가며 먹는 특유의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또 사회생활을 하는 임금 노동자들이 먹기 시작한 요리라는 점도 한몫했다. 필자의 어머니는 서울에서 오랫동안 가족을 부양하고 80세가 넘었는데, 이 요리의 이름조차 모른다. 이 원고를 쓰면서 혹시 이름을 들어보았냐 물었더니 엉뚱한 대답만 돌아왔다. “왜 닭 한 마리를 굳이 돈 주고 가서 먹는다는 것이야? 그리고 두 마리를 먹으면 안돼?” 냄비에 담긴 즐거움 각종 채소와 집마다 비밀 레시피를 넣어 끓인 육수를 양푼 냄비에 담은 다음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넣는다. 닭은 어느 정도 익어 나오지만 떡, 대파, 감자, 버섯 등의 사리가 익을 때까지 펄펄 끓여야 한다. 닭에 알맞은 간이 배고 사리가 익을 때까지 사람들은 각자 입맛에 맞는 양념을 만든다. 양념은 간장, 식초, 겨자, 매운 다지기(여러 가지 재료를 다져서 만든 양념)를 섞어 만든다. 같은 재료인데도 맛은 천차만별이다. 닭이 익으면 양념장에 찍어 먹는다. 뻑뻑했던 양념장은 국물과 고기의 수분이 섞여 점차 묽게 변한다. 다 먹어갈 때쯤이면 칼국수 사리를 넣어 익힌 후 묽어진 양념장에 찍어 먹거나. 냄비에 양념과 김치를 넣어 얼큰 칼칼하게 끓여 먹어도 좋다. 닭고기를 먼저 건져 먹은 다음 남은 국물에 취향에 맞게 다지기와 칼국수 사리를 넣어 칼칼하게 즐길 수도 있다. ⓒ한국관광공사 뜨거운 냄비가 올려진 테이블에 둘러앉아 먹는 방식은 구성원들의 유대감을 높이고, 식당 직원들은 가능한 요리에 적게 개입하여 불필요한 인건비용을 줄이는 이중 효과가 발생한다. 한국 속담으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러니까 모두에게 이득이라는 소리다. 그래서 닭한마리는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요리는 조금은 거칠면서도 다정한 장소에서 먹어야 맛있다는 신념이 있어서다. 그리고 아마도 미쉐린 투스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닭한마리에 깃들어 있는 철학이자, 우리가 이 음식을 대하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오늘 중요한 거래처 접대가 있으니 닭한마리에 가자고!”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최근 닭한마리는 외국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맵지 않아서, 한국식 노포 감성을 느낄 수 있어서도 이유겠지만, 서울이 어떻게 성장했고, 서울시민이 거친 노동에 견디며 성장하던 시기의 용광로 같던 시대의 산물을 체험해 보는 상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닭한마리는 서울의 다양한 사람들, 연인들, 외국인들이 몰려드는 복잡한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서울의 사회적 문화재와 유산이 되었다. 어떤 음식이든 그 내부에는 역사적 나이테가 있게 마련이다. 아픈 기억과 즐거움이 공존한다. 그런 역사성을 우리가 알고 음식을 먹는다면 더 풍부한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음식이란 결코 칼로리와 화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맛의 분자들, 물리적 촉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닭한마리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적절한 음식이다. 혼자서 이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친구들과 나누는 커다란 냄비 요리의 맛과 즐거움이 이 요리에 담겨 있다.

마니악한 장르를 대중적으로 만든 K-오컬트의 세계

Arts & Culture 2024 AUTUMN

마니악한 장르를 대중적으로 만든 K-오컬트의 세계 올해 개봉한 장재현(張在現 Jang Jae-hyun) 감독의 영화 < 파묘 (破墓 Exhuma) > (2024)는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최근 한국의 오컬트 영화는 공포적인 요소를 극대화하기보다, 다양한 요소를 결합하여 대중이 즐길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오컬트가 마니악한 장르라는 편견을 깨고 있다. 수상한 묘를 이장한 풍수사와 장의사, 무속인들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담은 오컬트 영화 < 파묘 (破墓 Exhuma) >(2024). 오컬트 장르에 대중적이고 오락적인 재미요소를 더해 K-오컬트를 완성했다는 평이다. ⓒ 주식회사 쇼박스 과거 “뭣이 중한디”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었던 영화 < 곡성(哭聲, The Wailing) >(2016)은 680만 관객을 기록하며 K-오컬트가 거둘 수 있는 최대의 성공으로 여겨진 바 있다. < 곡성 > 개봉 1년 전에 개봉한 장재현 감독의 이 거둔 540만 관객 흥행을 넘어선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장 감독이 다시 들고 온 영화 < 파묘 >는 그 기록을 갈아치웠다. 1,190만 관객이 영화에 열광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컬트 장르를 고집해 온 장재현 감독만의 색깔이 분명히 느껴지는 대목이고, 그것이 이러한 놀라운 흥행을 가능하게 한 저력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건 바로 마니악한 장르로 여겨지던 오컬트를 대중적으로 해석해 낸 그만의 방식이다. 오컬트에 장르적 재미를 더하다 < 파묘 >는 무당(巫堂 한국에서 신을 섬겨 길흉을 점치고 굿을 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과 풍수사(風水師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좋은 터를 잡아 주는 사람) 그리고 장의사(葬儀師 장례 의식을 전문적으로 도맡아 하는 사람)가 등장하고 이들이 귀신 같은 존재들과 사투를 벌이는 내용으로 분명 오컬트 장르의 색깔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특이한 건, 오컬트 특유의 마니아적인 공포 속으로 관객들을 빠뜨리기보다는 훨씬 더 대중적이고 오락적인 장르물의 재미요소를 더했다는 점이다. 영화가 입소문을 탄 후 관객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MZ세대 무당 화림(김고은 金高銀 Kim Go-eun)과 봉길(이도현 李到晛 Lee Do-hyun), 어딘지 정감이 가는 꼰대 풍수사 상덕(최민식 崔岷植 Choi Min-sik), 감초 같은 해학이 묻어나는 장의사 영근(유해진 柳海真 Yoo Hai-jin)을 일컬어 ‘묘벤져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오컬트 특유의 공포물이 갖는 오싹함이 있지만, 이들 묘벤져스의 장르적인 재미를 따라가면 마치 저 귀신과 치고받고 싸우는 액션물 같은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게다가 영화 후반부로 가면 묫자리를 잘못 써서 흉흉해진 집안 이야기를 넘어서 일제 잔재의 과거사를 파헤치는 이야기까지로 확장된다. 일제의 쇠말뚝에 의해 끊긴 민족정기를 잇기 위해 묘벤져스가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는 냉혹한 일본의 정령과 싸우는 민족적인 영웅처럼 그려진다. 이러한 장르적 재미를 더한 영화는 공포를 줄이는 대신 대결 구도를 선명히 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장르적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 됐다. 이것은 < 검은 사제들 >, < 사바하(Svaha: The Sixth Finger) >(2019)에 이어 < 파묘 >까지 이른바 장재현 감독의 오컬트 3부작에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특징이다. 그리고 이건 최근 K-오컬트라는 지칭이 생길 정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한국적 오컬트의 특징이기도 하다. 범죄물과 결합한 K-오컬트 K-오컬트는 죽음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종종 범죄물과 결합하는 양상을 보이곤 한다. SBS에서 방영된 김은희(金銀姬 Kim Eun-hee) 작가의 드라마 < 악귀(Revenant) >(2023)가 대표적인 사례다. 미스테리한 댕기를 만진 후 귀신이 든 주인공과 귀신을 보는 민속학자 그리고 강력범죄수사대 경위가 연달아 발생하는 의문의 죽음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다뤘다. 여기서 악귀는 자신이 깃든 자의 욕망을 들어주면서 점점 존재가 커지고, 주인공이 가진 세상에 대한 욕망과 분노에 반응한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만으로 실제 악귀가 그걸 실행해내는 걸 알게 된 주인공은 민속학자의 도움을 받아 악귀와 싸워나가게 된다. 이건 오컬트의 소재로 종종 등장하는 저주를 악귀라는 존재로 해석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범죄와 오컬트의 결합은 일찍이 김홍선 감독의 드라마 < 손 the guest >(2018)에서도 시도된 바 있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귀신에 빙의된 자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이를 막으려는 이들의 협업을 그렸던 작품이다. 이 두 드라마는 범죄물이 접목된 K-오컬트로서 도저히 인간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잔혹한 범죄들에 대한 비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처럼 K-오컬트는 그저 자극적인 공포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의미까지 담아내기도 하는데, 보다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K-오컬트가 되기까지 오컬트라고 하면 악령 같은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하고 이에 맞서는 사제들의 구마 의식 같은 것을 소재로 하는 장르로 받아들여지곤 했지만, K-오컬트는 여기에 한국적인 토속적 색깔을 더해 넣는다. < 파묘 >에도 등장하지만, K-오컬트의 단골 소재처럼 나오는 무속인들의 굿 장면이 대표적이다. 고조되는 북소리와 흥분시키는 춤사위를 더해 강력한 에너지를 경험하게 해주는 무속인들의 세계는 영화 < 곡성 >에서도 등장해 세계인들을 매료시킨 바 있다. 인간의 세계와 귀신의 세계 사이를 잇는 존재로서 무속인들이 보여주는 한국의 샤머니즘은 전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K-오컬트만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 파묘 >는 영화 스토리 뿐만 아니라 가죽 자켓, 실크 셔츠, 청바지, 컨버스 운동화 등 기존 무속인의 틀을 깨고 주인공 무속인 화림의 개성을 살린 스타일링도 관객의 주목을 받았다. ⓒ 주식회사 쇼박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오컬트라는 장르를 구마 의식이나 사제, 악령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칭한다면, 과거 1998년에 개봉한 < 퇴마록 >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는 3명의 퇴마사가 등장하는데, 여자의 혼이 봉인된 칼을 사용하는 무사, 기도로 악마와 싸우는 신부 그리고 부적술과 독심술을 사용하는 아이가 그들이다. 즉 서구의 신앙과 우리네 토속신앙을 접목하려는 K-오컬트의 노력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K-오컬트의 또 하나의 특징은 < 파묘 >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보다 대중적인 장르들을 결합해 B급 장르라는 한계를 넘어서려 한 점이다. < 퇴마록 >이 오컬트 장르가 아니라 판타지 액션 장르로 대중들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2015년 방영된 장재현 감독의 역시 사제복마저 멋진 수트처럼 소화해 낸 장르적인 해석으로 500만 관객을 넘기는 흥행을 기록했다. 악령이 든 소녀의 구마의식을 그린 오컬트 영화 < 검은사제들(The Priests) >(2015). ⓒ 영화사 집 K-오컬트는 토속신앙이나 민담, 설화 같은 고전에서 재해석해 낸 캐릭터들 같은 한국적인 색채를 더해 넣으면서, 동시에 마니악한 B급 장르가 아닌 보다 대중적인 장르로 접근하려는 특징을 보인다. 그래서 로컬 색깔이 갖는 차별성은 물론이고 글로벌하게 이해되는 장르의 보편성까지 아우르는 세계가 되었다. 이것은 현재의 글로벌 콘텐츠 시장이 요구하는 것으로서 K-오컬트가 왜 경쟁력을 갖게 됐는가를 설명해 준다.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맞추다

Arts & Culture 2024 AUTUMN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맞추다 『경청』 김혜진(金惠珍) 작, 장해니(張傑米) 번역, 200쪽, 18달러, 레스트리스 북스(2024)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맞추다 김혜진의 『경청』은 진정 이 시대를 위한 소설처럼 느껴진다. 이 작품은 주인공 해수가 자신을 비난한 기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된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해수의 편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이 편지도 끝맺지 못한 채 남겨진다. 편지는 해수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기만을 위한 시도’에 가깝다. 심리 상담사이자 토크쇼 패널로도 잘 알려진 해수는 어느 날 무심코 대본에 적힌 대로 한 배우에 대한 평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발언을 했으니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배우의 자살로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뀐다. 네티즌들이 다른 여러 명과 함께 해수를 가해자로 지목하면서, 그녀는 배우의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해수는 자신이 언어의 힘을 잘 알고 있고 뛰어난 소통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했었지만, 아직 배울 점이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해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욕할까봐 두려워하며, 타인과의 접촉을 줄이고 혼자 지낸다. 그러던 중 같은 동네에 사는 여학생 세이와 길고양이 순무를 만난다. 세이는 덩치가 크고 재빠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같은 피구팀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고 있고, 순무는 구조가 시급한 상황이다. 해수는 길거리에서 서서히 힘겹게 죽어가는 순무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따뜻한 공감을 통해 세이가 힘든 상황을 이겨내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해수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애초에 심리상담사가 되고 싶었던 목적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가일 것이다.   『경청』이라는 작품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중 하나는 바로 ‘도덕적 범주(도덕적으로 배려할 가치가 있는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의 구분)’이다.  길고양이를 잡기 위해 통 덫을 들고 돌아다니던 해수는 사람들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걱정하면서, ‘자신이 집중해야 하는 일과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의 구분에 대해 생각한다. 한때는 자신은 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배우의 자살 사건 이후로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해수는 이것이 자신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해수의 도덕적 범주 가 확장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인터넷과 SNS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연결성이 높아진 지금, 단편적인 사건들까지 모두 연결해서 살펴보지 않으면 현대 사회의 모순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한편으로 심각한 고립감을 느끼기도 한다. 온라인상의 타인을 인간이나 도덕적 존재가 아닌, 공터에서 우는 길고양이처럼 굳이 관심을 쏟을 필요가 없는 얼굴 없는 개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유사한 두 단어 ‘cancel’과 ‘counsel’을 활용한 재치 있는 영어 제목은 이야기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을 강조한다. 한국어 제목 『경청』에서 드러나듯이, 귀 기울여 듣는 것, 즉 나의 관점을 내세우고 싶은 욕심이 아니라, 듣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경청』은 배려심 깊은 독자들에게 귀 기울일만한 많은 이야기를 던져준다. 『이별 후의 이별』 장석원(張錫原) 작, 데보라 김(金) 번역, 83쪽, 10,000원, 아시아 퍼블리셔스(2023) 언어의 혁명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박상수는 장석 원의 시(이번 시집에는 영문 번역된 20여 편의 작품이 실려있다.)의 기원이 ‘혁명과 사랑’이며 그 기원이 지금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 두 주제는 이번 시집에서도 잘 드러난다. 언뜻 보기에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노래하는 듯하지만, 여기에서 혁명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장석원은 언어의 혁명 없이는 어떤 혁명도 완성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시는 그러한 대대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노력을 담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탐색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트랜스 휴머니즘의 미래까지 나아가며, 그는 갈등과 투쟁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 사이로 사랑의 빛이 비추지만,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모습의 사랑은 아니다. 작가가 노래하는 사랑은 고통과 그리움, 때로는 야만적이고 죽음과 연결되는, 날것의 사랑이다. 새로 출간된 이번 시집은 시인의 세계관을 엿보고 독자 자신의 투영된 이미지를 관조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창문이 될 것이다. MMCA 리서치랩 한국 현대 미술의 세계를 탐색하다 www.mmcaresearch.kr MMCA(국립현대미술관) 리서치랩은 ‘한국 현대미술 연구에 관한 지식 및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온라인 플랫폼’이다. 1945년부터 1990년대 이후까지의 한국 미술에 대해 인명, 단체, 기관, 전시 등 미술과 관련된 방대한 정보, 그리고 한국 미술에 대한 학술적 에세이를 담고 있다. 한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 MMCA의 플랫폼답게, 리서치랩은 세련된 인터페이스 안에서 방문자들이 방대한 정보를 탐색할 수 있는 서로 연결된 다양한 경로를 제공한다. 첫 화면에서는 월별 연표를 통해 다양한 미술 용어를 시대별로 정리해 두었으며, 상단의 메뉴에서는 미술 용어와 학술적 에세이 (모든 컨텐츠는 훌륭한 영문 번역이 함께 제공된다.)를 시대별, 주제별, 알파벳순으로 확인할 수 있다. 페이지 가장 상단의 검색창을 통해 원하는 내용을 검색할 수도 있다. 근현대 한국 미술에 관심 있는 사용자에게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는 리서치랩이 앞으로도 발전을 거듭하기를 기대한다.

정체성 위에 또 다른 정체성을 포개는 건축가 조민석

Arts & Culture 2024 AUTUMN

정체성 위에 또 다른 정체성을 포개는 건축가 조민석 매스스터디스(Mass Studies) 대표 조민석(Minsuk Cho, 曺敏碩)이 설계한 건축물들은 독특한 형태와 과감한 시도로 사람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이는 조민석이 복잡다기한 현대 사회의 모습을 대면하고, 이질적인 것들을 그대로 포용해 드러낸 결과이다. 서펜타인 파빌리온 설계를 앞두고 조민석이 고려했던 것은 파빌리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곳에 모여들 사람들이었다. 그는 총체적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부지의 중심에 완결된 형태의 건물을 세우는 대신 오히려 여백을 만듦으로써 그곳에서 다양한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도록 했다. 서펜타인 갤러리 제공, 사진 이반 반(Iwan Baan)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ies)는 매년 여름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를 초대해 임시 별관을 짓고, 이를 통해 건축계의 최신 흐름을 선보인다. 2000년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첫 시작을 알린 이래 토요 이토(Toyo Ito), 렘 콜하스(Rem Koolhaas), 프랭크 게리(Frank Gehry), 사나(SANAA), 페터 춤토어(Peter Zumthor), 디에베도 프랑시스 케레(Diébédo Francis Kéré) 등 동시대 최고의 건축가들이 이 프로젝트를 거쳐 갔다. 여름 몇 달 동안 전시되는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세계 건축계가 주목하는 축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영국에 완성한 건물이 없는 건축가들 중에서 대상자를 선정하기 때문에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대체로 초청된 건축가들의 영국 데뷔작이 된다. 지난 6월 7일 런던 켄싱턴 공원(Kensington Gardens)에서 올해의 서펜타인 파빌리온이 공개됐다. 영예의 주인공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가 조민석과 그의 회사 매스스터디스다. 한국인 건축가로는 그가 처음이다. 조민석(Minsuk Cho, 曺敏碩)은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그것의 맥락을 심도 깊게 고민하는 건축가이다. 그는 공간에 본래 내재해 있었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춰 균형을 잡는 것이 건축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비어 있는 중심 조민석은 이번 파빌리온을 ‘Archipelagic Void’로 명명했다. 갤러리, 도서관, 오디토리움, 티하우스, 플레이 타워라는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다섯 개의 구조물들은 한가운데 자리한 텅 빈 원을 중심으로 연결된다. 기능이 규정되고 형태가 분명한 군도를 이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규정되지 않은 빈 공간이다. 조민석은 이 보이드를 ‘마당’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전통적인 주거 건축은 여러 채들이 마당을 둘러싸고 배치된 형태이다. 텅 빈 마당은 놀이, 노동, 제례 등 성격이 다른 일들이 벌어지는 장소로 매번 변신한다. 중국 철학자 노자(Lao Tzu)는 『도덕경(Tao Te Ching, 道德經)』에서 바퀴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바퀴 한가운데는 비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비움[虛]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민석이 비어 있는 마당을 중심으로 파빌리온을 배치한 것은 한국이나 동양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재해석이다. 동시에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역사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기존까지 진행된 22개의 파빌리온은 대체로 지붕이 있는 단일한 구조물인 경우가 많았고, 중심이 비어 있는 경우는 없었다. 원불교 원남교당(Won Buddhism Wonnam Temple, 圓佛敎 苑南敎堂)의 대법당 내부 모습. 9미터 높이의 철판 중앙을 뚫어서 만든 지름 7.4미터의 원형 개구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로 인해 빛과 그림자가 시시각각 움직이는 정중동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 신경섭(Kyungsub Shin, 申璟燮) 정체성의 축적 조민석은 하나보다는 여럿을 선호하며, 기존 내러티브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대고 싶어 한다. 그는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서울은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번화한 지역 중 하나인 강남에 건물보다 풀이 더 많았던 시절이었다. 역시 건축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한강에 위치한 섬 여의도(汝矣島)에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를 설계했다. 목가적 풍경과 개발의 살풍경이 공존하는 한강, 콘크리트가 광활하게 깔린 광장, 이 둘을 가로지르는 한강 다리의 교각….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뒤엉킨 풍경을 조민석은 자신이 느꼈던 최초의 건축적 감각이었다고 회상한다.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마리네티(Filippo Tommaso Emilio Marinetti)는 1909년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에 「미래파 선언(The Futurist Manifesto, Le Futurisme)」>을 발표하며 미래주의 운동의 기치를 올렸다. 이 글에서 그는 교각을 거인의 무용으로 추켜세웠다. 마리네티에게 거대한 인프라스트럭처는 미래를 앞당기는 기술의 선물이었다. 반면에 조민석은 일렬로 늘어선 교각의 콘크리트 아치에서 파리 개선문을 포개 읽었다. 그에게 한국의 현재는 서구의 과거와 얽혀 있었고, 기념비와 인프라스트럭처는 완충 지대 없이 공존했다. 네모반듯한 빌딩들이 일률적으로 늘어선 마곡산업단지에 개관한 스페이스K 서울미술관(Space K Seoul Museum). 자유로운 형태에 나지막한 높이의 미술관을 설계함으로써 정형화된 건물들의 획일적인 리듬을 깨고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 신경섭(Kyungsub Shin, 申璟燮) 조민석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교 건축대학원에서 공부한 뒤 뉴욕에서 실무를 시작했다. 이 지적 여정은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외국에서 공부한 한국 건축가가 없지는 않았지만,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해외여행과 유학 등에 규제가 완화되면서 많은 학생들이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는 한국 건축계에서 주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당대 건축의 주요 흐름을 시차 없이 학습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한국과 적당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까지 한국 건축가들은 한국만의 고유한 것을 건축으로 시각화해야 한다는 과제에서 자유롭기 힘들었다. 그는 뉴욕과 서울 사이의 거리와 시차 속에서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 등 “정체성들 위에 다른 정체성들을 축적”할 수 있음을 재차 확인한다. 전라남도 보성에 위치한 초루(醋樓)는 천연 식초의 하나인 흑초(黑醋)로 만든 차와 음료를 맛볼 수 있는 장소이다. 건축가는 수려한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튀지 않는 검박한 건축물을 디자인했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북촌 중심가에 위치한 송원아트센터(Songwon Art Center)는 대지의 형국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태가 결정된 건축물이다. 경사지와 평지의 높이 차이가 3미터에 이르는 데다 부지가 협소해 큰 제약이 뒤따랐지만, 지형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최대치의 효율성을 얻어냈다. ⓒ 신경섭(Kyungsub Shin, 申璟燮) 이질적인 것들의 포용 조민석은 세기말 세기 초 세계 건축계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 렘 콜하스가 이끄는 OMA 로테르담 사무실에서 다양한 실무 경험을 쌓았다. 그 후에는 제임스 슬레이드(James Slade)와 함께 뉴욕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2003년 서울로 돌아와 매스스터디스를 설립하고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펼쳐나간다. 매스스터디스의 전략은 “21세기 초 한국의 현대성을 조건 짓는 것들, 과거와 미래, 지역적인 것들과 전 지구적인 것들, 유토피아와 현실 그리고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하나의 통합된 시각을 제시”하기보다 다층적이고 복잡한 상황을 대면하고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는 정체성을 하나로 환원시키지 않으며, 복잡한 현실을 재단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려는 전략이다. 뉴욕과 로테르담에서 싹튼 이 태도는 서울에서 완전히 만개한다. 이질성과 복합성이 넘쳐나고, 혼란과 획일성이 공존하는 곳으로 서울만 한 도시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주한 프랑스대사관은 한국의 1세대 건축가 김중업(Kim Chung-up 金重業, 1922~1988)의 설계로 1962년 완공된 건물이다. 여러 차례의 증개축으로 인해 심하게 훼손된 파빌리온을 원래 의도대로 복원하기 위해 고심한 결과, 지붕은 다시 날렵한 곡선을 갖게 됐으며 1층 역시 본래의 필로티 구조를 되찾았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조민석과 매스스터디스의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바둑 두기에 비유한다. 그들의 작업 전체가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는 이 말은 쉽게 확장될 수 있다. 바둑판 위에 깔려 있는 무수히 많은 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이미 깔려 있는 돌에 따라 놓을 수 있는 수는 무척 다양해진다. 강남 한가운데 자리한 럭셔리 오피스텔 부티크 모나코(Boutique Monaco)에서 공공성을 묻고, 연구 단지와 아파트가 격자 패턴에 따라 펼쳐진 서울의 뉴타운에서는 획일적 리듬을 깨는 미술관으로 도시의 박자를 변주한다. 또 서울 구도심 안에 자리 잡은 종교 시설은 기념비적이고 다채로운 형태를 드러내면서도 주변의 끊어진 좁은 골목을 연결해 미세한 움직임을 촉발한다. 그런가 하면 제주도와 전라남도 보성(寶城)의 압도적인 자연 속에서는 검박한 형태로 돌아간다. 그들은 때로 도시 계획가 로버트 모지스(Robert Moses)처럼 대형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듯 보이지만, 때로는 사회 운동가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처럼 작은 골목을 보존하기 위한 대안을 궁리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서펜타인 파빌리온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스타 건축가들이 그곳에 세웠던 기존 파빌리온들이 써온 역사를 소환하고, 공원이라는 장소가 가진 잠재력을 끌어내려고 시도한다. 특이한 형태를 통해 단일한 정체성을 강조하기보다 이질적인 것을 포용하고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켄싱턴 공원에 내려 앉은 별은 조민석과 매스스터디스가 오랫동안 빚어온 것이고, 그들이 바둑판 위에 올린 가장 최근 돌이다. 그들이 다시 세상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하나보다는 다른 여럿이 함께 있는 편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IT 기업 카카오(Kakao)의 사옥 스페이스닷원(Space.1). 제주도 구릉지에 자리한 이 건물은 창의적이고 수평적인 기업 문화를 지닌 조직에 어울리는 공간 유형을 고민한 결과 디자인되었다. 건축가는 8.4 × 8.4 m 크기의 캔틸레버 구조 모듈 5개를 변주하여 조합함으로써 수직,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공간을 탄생시켰다. ⓒ 신경섭(Kyungsub Shin, 申璟燮)

그림이 된 말들

Arts & Culture 2024 AUTUMN

그림이 된 말들 홍인숙(Hong In-sook, 洪仁淑)은 글자와 그림을 넘나드는 독특한 화풍을 구사하는 작가이다. 그녀는 민화 장르 중 하나인 문자도(Munjado, 文字圖)를 현대적 어법으로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해석하는데, 작품의 소재는 대부분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다. 자신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홍인숙 작가. 2000년 인사동 경인(耕仁)미술관(Kyung-in Museum of Fine Art)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개성이 뚜렷한 작품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노트에 수시로 기록하고 곱씹은 뒤 그것을 이미지화한다. 지난 5월, 서울 회현동(會賢洞)에 자리한 모리함전시관(Moryham Exhibition Center, 慕里函)에서 홍인숙의 개인전 < 다시 뜬 달, 월인천강지곡(Re-rising moon, Worin cheongangjigok) >이 열렸다. 『월인천강지곡(Songs of the Moon’s Reflection on a Thousand Rivers, 月印千江之曲)』은 조선의 4대 국왕 세종(재위 1418~1450)이 세상을 떠난 아내 소헌(昭憲)왕후(1395-1446)의 공덕을 빌기 위해 지은 찬불가(讚佛歌)다. 작가는 이 전시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심정을 달, 빛, 사랑 등의 글자와 그림을 통해 선보였다. 글자가 그림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림이 글자로 읽히기도 하는 작품들이다. 그녀는 글과 그림이 하나로 인식되는 전통 문자도를 자신만의 어법으로 표현하며, 우리 삶의 사라지지 않을 가치에 주목한다. < 한글자풍경 – 꽃 >. 2024. 한지에 종이 판화, 드로잉, 채색. 140 × 118 cm. ⓒ 홍인숙 < 한글자풍경 – 빛 >. 2024. 한지에 종이 판화, 드로잉, 채색. 140 × 118 cm. ⓒ 홍인숙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글자는 무엇일까?’에 대한 작가의 상념을 전통 문자도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올해 5월, 모리함 전시관에서 열린 < 다시 뜬 달, 월인천강지곡 >의 전시작들이다.   유년의 경험 문자도는 민화의 한 종류로, 글자의 의미와 관계있는 옛이야기를 한자(漢字) 획 속에 그려 넣어 구성한 그림을 말한다. 조선 시대 유교의 주요 덕목이었던 효(孝), 충(忠), 신(信) 같은 글자를 형상화한 교훈적인 내용과 부귀(富貴), 수복강녕(壽福康寧), 길상(吉祥)과 같이 복을 기원하는 기복(祈福) 신앙적 측면이 강조된 그림으로 나뉜다. “제 작품은 전통적인 문자도와 차이가 있어요. 작품 속 요소들이 저의 유년 시절 경험에서 나온 것들이거든요. 시대적 가치관이나 기복과는 거리가 멀죠.”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한글자 풍경’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달, 집, 꽃, 밥, 빵 등 한 음절로 이루어진 단어와 그에 맞게 형상화된 이미지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상상이 어우러져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다. < 한글자풍경 – 안(安)>. 2020. 한지에 종이 판화, 드로잉, 채색. 110 × 90 cm. ⓒ 홍인숙 < 한글자풍경 – 녕(寧)>. 2020. 한지에 종이 판화, 드로잉, 채색. 110 × 90 cm. ⓒ 홍인숙 2020년 교보(敎保)아트스페이스(Kyobo Artspace)에서 열린 < 안,녕 >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두가 큰 고통을 겪었던 시기, ‘안녕’의 의미와 소중함을 되새기는 전시였다. 판화 기법 서툰 연필화 같은 드로잉, 순정 만화에 나올 법한 소녀의 모습, 글자의 획이 된 담벼락…. 홍인숙의 그림은 재기발랄하면서 키치적인가 하면 소박한 전통 회화의 면모도 엿보인다. 그런데 나무, 꽃, 새, 사람 등 풍경을 이루는 요소들을 자세히 보면 어쩐지 공예적 느낌이 든다. 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그렇다. “제가 대학에서는 서양화를, 대학원에선 판화를 전공했어요. 판화 작업이 제게 맞는다 생각했는데, 뭔가 만족스럽지 않은 거예요. 서양식 소재에 한계를 느끼던 중 우리 전통 한지와 섬세한 동양화법에서 길을 찾았죠.” 그림 속 영롱하면서도 선명한 색채는 정교한 판화 방식을 접목한 결과다. 우선 담고자 하는 조형적 요소들로 종이에 밑그림을 그린다. 한지 위에 먹지를 대고 밑그림을 옮긴 다음 판화적 기법이 필요한 부분에 맞도록 색판을 만든다. 색깔별로 종이를 오려서 판을 만든 다음 물감을 칠해서 압축기로 찍어낸다. 그림판의 위치를 바꿔가며 찍어내기를 반복해서 원하는 색감을 완성해 간다. “도장에 인주를 묻혀 찍듯이 간단할 것 같지만, 실은 찍어내는 과정 하나하나 엄청 집중해야 합니다. 컴퓨터의 포토샵 기능으로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하면 손쉽게 할 수도 있겠지만, 일일이 손으로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죠. 때론 조금 어긋나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죠. 그런 점이 그림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판화 기법을 이용한 그림은 붓에 물감을 묻혀 색칠하는 일반 회화와는 다른 독특한 색감을 보여 준다. 색깔별로 판을 자르고, 롤러로 색을 칠하고, 그 색판의 수만큼 프레스기를 돌리기 때문에 판화라고는 하지만 에디션 없는 그림이 되기도 한다. “제가 작업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미련하다 못해 신선하다고 할 정도예요. 드로잉처럼 빠르지도, 컴퓨터처럼 매끈하지도 않아요. 가장 나다운 것을 찾다가 고안한 방식이죠.” 작가가 판화 작업 시 사용하는 다양한 크기의 롤러들. 오랫동안 판화 장르를 탐구해 온 홍인숙은 물리적 감각의 완급과 강약 조절을 통해 섬세하고 간결한 화법(畫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글자가 이루는 풍경 홍인숙은 1973년 경기도 화성(華城)에서 헌신적인 부모님의 삼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시골에서 자란 그녀는 또래 친구 하나 없이 놀잇감이라고는 나무, 꽃, 풀, 책이 전부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는데, 손때 묻은 책 속에 제가 어릴 때 낙서 삼아 그린 그림이 있었어요. 제가 즐겨 그리는 커다란 눈망울의 여자아이는 그 그림을 옮긴 거예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제 막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그녀에게 크나큰 상실이었다. 든든한 울타리와 같던 아버지를 잃고 작가는 마치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지나간 사랑을 찾듯 작품들을 쏟아냈다. 판화와 회화가 공존하는 그녀의 그림은 동양화와 서양화의 어딘가 중간 지점에 걸쳐 있는 듯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일러스트레이션이나 그래픽 디자인 같기도 하다. 혼성적 형식으로 담백한 느낌을 주는 그의 참신한 어법은 2003년 < 목단(牧丹) >, 2006년 < True Love, Always a Little Late > 등 초기 개인전에서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작가의 집이자 작업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水原華城) 성곽길을 마주보고 있다. 오래된 양옥을 개조해 갤러리를 겸한 집은 판화를 배우려는 학생들, 전시 공간을 찾는 젊은 작가들을 위한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혼자만의 작업도 좋아하지만, 뜻이 맞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시간도 소중하다”는 작가의 다음 글자 풍경이 궁금해진다. < 누이오래비생각(Realize) >. 2011. 광목천에 채색. 116 × 90 cm. ⓒ 홍인숙 작가는 여백, 시문(詩文), 낙관(落款) 등 전통 회화의 요소들을 자신의 어법으로 각색해 활용한다. 또한 뜻글자인 한자를 조합해 복합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이미지가 문학적, 서사적으로 전달된다.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 작가 이민희 포토그래퍼

우리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즐거움

Arts & Culture 2024 AUTUMN

우리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즐거움 세이수미(Say Sue Me)는 2012년 결성된 4인조 록 밴드이다. 부산 광안리에서 출발한 이들의 음악은 동시대 한국 록 밴드 음악의 최전선에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제 지역과 국경을 넘어 전 세계 무대를 향하고 있다. 세이수미는 2023년 10월 < 타이니 데스크 코리아(Tiny Desk Korea) >에 출연해 < Old Town > 등 대표곡들을 불렀다. 지난해 8월 출항한 이 프로그램은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NPR 뮤직이 진행하는 <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Tiny Desk Concerts) >의 한국판 버전이다. ⓒ 타이니 데스크 코리아 한반도 남동쪽 끝에 자리한 부산은 서울에서 약 400㎞ 떨어져 있는 국내 최대의 항구 도시이다. 이곳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백화점이라 일컬어지는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Shinsegae Centum City)가 우뚝 솟아 있는가 하면 서민들의 발걸음이 분주한 수산 시장도 있다. 수십만 원대의 코스 요리로 유명한 5성급 호텔이 서울과 제주 다음으로 많은 곳이지만, 저렴한 시장 음식이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 말투와 달리 억양에 높낮이가 약간 있는 부산 말씨를 쓰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록 밴드 세이수미가 있다. 보컬과 기타의 최수미(Sumi Choi, 崔守美), 리드 기타의 김병규(Byungkyu Kim, 金秉奎), 베이스의 김재영(Jaeyoung Kim, 金才永), 드럼의 임성완(Sungwan Lim, 林性完). 네 명의 멤버들은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화요미식회’를 진행한다. 리처드 오스먼의 범죄 소설 『목요일 살인 클럽(The Thursday Murder Club)』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인공들만큼은 아니지만, 이날은 멤버들 사이에 긴장감이 꽤 흐른다. 화요미식회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인기 먹방(mukbang) 프로그램 (2015~2019)에서 따온 이름이다. 저녁 식사로 먹고 싶은 메뉴를 각자 정한 뒤 가위바위보를 통해 결정된 최종 승자가 결정권을 갖는 일종의 회식 배틀이다. 이들은 때로 신경전을 펼치기도 하지만, 모두를 평화로 인도하는 공통적인 선호 메뉴가 있다. 다름 아닌 돼지국밥이다. 세이수미(Say Sue Me)는 부산 출신의 4인조 인디 록 밴드로,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독자적 음악 세계를 펼쳐 보인다. 2012년 팀을 결성해 2년 후 1집 < We’ve Sobered Up >을 발매했다. 그로부터 3년 후에는 영국 레이블 댐나블리(Damnably)와 계약을 맺고 첫 해외 투어를 성공리에 마쳤다. 광안리 서프 록 해운대(海雲臺)와 함께 부산이 자랑하는 대표적 휴양지인 광안리(廣安里) 해수욕장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작은 동네 골목. 한 건물의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 100㎡쯤 되는 작은 공간이 나타난다. 이곳은 세이수미의 아지트이자 연습실, 녹음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DIY 방식으로 운영하는 비치 타운 뮤직(Beach Town Music) 레이블의 사무실이기도 하다. 2012년 결성 이래 세이수미는 지금껏 이 자리를 지켰다. 멤버들은 음악 연습을 하다가 지치거나 뭔가 잘 풀리지 않으면 3분쯤 내리막길을 걸어 바닷가로 향한다. 그러고는 함께 맥주를 마시곤 한다. 그룹명 세이수미는 보컬 최수미의 이름에서 따왔다. 초기에 그들은 주로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펍에서 공연하며 한 명씩, 두 명씩 팬을 늘려 갔다. 그룹명 중 ‘수미(Sue Me)’를 “Sue me”로 읽은 이방인들에게 이들은 꽤 흥미롭게 다가왔을 것이다. 최수미가 쓰는 영어 가사는 문법적으로는 어색했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귀엽게, 한국인들에게는 힙하게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 광안리 밤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조금 지글거리면서도 몽환적이고 청량하기도 한 사운드가 이 밴드의 매력이었다. 누군가는 광안리 앞바다에 ‘서식’하는 이 그룹의 음악에 ‘서프 록(surf rock)’이란 장르명을 붙여 줬다. 하지만 1960년대 미국의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나 딕 데일(Dick Dale)이 구사한 대서양 연안의 서프 록과는 확실히 다르다. 드림 팝(dream pop)이나 슈게이즈(shoegaze)의 꿈결 같은 소릿결, 인디 팝(indie pop)의 속삭이는 듯한 수줍은 태도, 때로는 펑크 록(punk rock)의 무모한 질주감까지 오가는 세이수미의 음악은 한두 가지 장르로 못 박기 힘들다. 터닝 포인트 “2014년 발표한 1집 < We’ve Sobered Up>은 광안리 출신 록 밴드나 서프 록 밴드라는 외부 시선을 어느 정도 의식하며 제작한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는 그때그때 와닿는 메시지와 사운드에 집중하면서 우리만의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김병규의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2018년 발매한 2집  < Where We Were Together >는 세이수미의 커리어에 터닝 포인트가 됐다. 수록곡 중 하나인 < Old Town >은 영국의 전설적 싱어송라이터 엘턴 존이 자신의 팟캐스트 ‘엘턴 존의 로켓 아워(Elton John’s Rocket Hour)’에서 극찬해 화제가 됐다. 그리고 세이수미는 그해 월드 투어‘Busan Calling!’을 시작했다. 또한 같은 해에 이들은 미국의 유명 콘서트 프로그램 < Live on KEXP >에 한국 음악가 최초로 출연해 공연했다. KEXP는 워싱턴주 시애틀의 유서 깊은 공영 라디오 방송이다.  이듬해 세이수미는 이 음반으로, 한국의 그래미 어워즈라 불리는 한국대중음악상(Korean Music Awards)에서 인디 밴드로는 이례적으로 무려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그중 최우수 모던 록 음반, 최우수 모던 록 노래 부문에서 두 개의 트로피를 수상했다. 올해 6월, 인천 파라다이스시티(PARADISE CITY)에서 펼쳐진 아시안 팝 페스티벌(Asian Pop Festival) 무대에 오른 세이수미. 파라다이스 문화재단(Paradise Cultural Foundation)이 주관한 이 행사는 아시아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뮤지션들 가운데 라이브 공연이 특히 뛰어난 아티스트들로 라인업이 꾸려진다. ⓒ 아시안 팝 페스티벌 해외 음악 팬들 몇 년 전부터 보수동쿨러(Bosudong Cooler)나 해서웨이(Hathaw9y) 같은 부산 지역 밴드들이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세이수미와 함께 합동 공연 무대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부산 신(scene)은 크지 않다는 게 세이수미의 진단이다. 김병규는 이렇게 말한다. “대구가 그렇듯이 부산도 명맥을 유지하는 대표적인 라이브 클럽이 하나 정도 있을 뿐이에요. 서울 홍대 앞처럼 왕성하진 않죠.” 대신에 요즘은 지역과 국경을 넘어 해외 음악 팬들 사이에서 세이수미의 음악이 편견 없이 확산되고 있다. 최수미는 “일본, 중국은 물론이고 멀리 북중미에서도 젊은 팬들이 느는 걸 체감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투어 마지막 일정으로 찾은 멕시코시티에서는 전체 관객의 약 90%가 20대 젊은 층이었다. K-팝, K-드라마 덕도 있다고 한다. tvN에서 방영된 TV 드라마 < 유미의 세포들(Yumi’s Cells, 柔美的细胞小将) >(2021~2022)이나 JTBC의 < 알고 있지만(Nevertheless, 无法抗拒的他) >(2021) 등에 이들의 음악이 삽입된 것도 해외 팬들을 더 매혹한 계기가 됐다. 최수미는 “영어 작사에 대한 고민이 늘 깊은데, 해외 팬들은 갈수록 한국어 가사에 더 열광하는 분위기여서 놀랍다”고 말했다. 2022년 발매된 정규 3집 < The Last Thing Left >의 컴팩트 디스크.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10개의 곡들이 트랙을 채우고 있다. 최수미가 모국어로 부른 타이틀곡 < 꿈에(To Dream) >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통해 응원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세이수미 제공 2022년 결성 10주년을 기념해 공개한 EP < 10 >의 리미티드 에디션 카세트테이프. 기존 대표곡들을 편곡한 작품들과 함께 요 라 탱고(Yo La Tango), 페이브먼트(Pavement) 등 세이수미가 평소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노래를 커버한 트랙들이 담겼다. 세이수미 제공 수년간 투어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묻자 네 가지 답이 나온다. 김병규는 2018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공연을, 임성완은 2019년 영국 웨일스의 그린 맨 페스티벌(Green Man Festival)을 꼽았다. 김재영에겐 지난해 일본 가고시마의 그레이트 사츠마니안 헤스티벌(The Great Satsumanian Hestival)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최수미는 2018년 첫 유럽 투어 당시 프랑스 소도시 콜마르(Colmar)의 가정집 뒷마당에서 했던 공연을 잊을 수 없다고. “아, 맞다. 폴란드 크라쿠프(Krakow)에서 술고래 아저씨랑 진탕 마셨단 것도요!” 최수미가 기억을 끄집어내자 다른 멤버들이 손뼉을 치며 웃는다. 이들은 폴란드식 만두 피에로기(pierogi)와 함께 그곳의 술 문화를 제대로 체험했다고 한다. 이들의 월드 투어는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우여곡절이 많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곳은 하나다. 지금 이 자리, 부산 수영구 남천바다로의 비치 타운 뮤직. 인터뷰 말미에 최수미가 이런 말을 던진다. “어떤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을 내놓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것보다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즐거움을 최대한 담아내고 싶어요. 그게 바로 밴드 하면서 사는 거죠.”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보컬과 기타의 최수미(Sumi Choi, 崔守美), 리드 기타의 김병규(Byungkyu Kim, 金秉奎), 드럼의 임성완(Sungwan Lim, 林性完), 베이스의 김재영(Jaeyoung Kim, 金才永).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적 정체성이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솔직담백함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새롭게 도약하는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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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도약하는 간송미술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 자리 잡은 간송(澗松)미술관(Kansong Art Museum)은 국내 최초의 사립 미술관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후대에 물려줄 문화유산을 지키며 연구해 왔다. 보수 공사를 마치고 올해 상반기 개최한 재개관전이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9월 초 대구간송미술관(Kansong Art Museum Daegu)도 개관하여 더욱 기대를 모은다. 간송미술관은 문화유산 보호와 연구를 위해 설립된 사설 미술관이다. 초기에는 소장품 연구에 집중했으며, 1971년 가을 정선(鄭敾, 1676-1759)의 작품 공개를 시작으로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전을 개최해 왔다. 지난 5월 1일부터 6월 16일까지 간송미술관에서 < 보화각(Bohwagak, 葆華閣) 1938: 간송미술관 재개관전 >이 열렸다. 설비 노후, 외벽 탈락 등의 문제로 1년 7개월간 보수 및 복원 공사를 마치고 다시 문을 연 이곳에는 45일 동안 3만여 명의 관람객들이 방문했다. 과거, 봄과 가을에 열렸던 정기전은 전시 기간이 짧았던 터라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귀한 작품들을 보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터넷 예매로 시간당 100명씩 입장을 제한해 관람객들이 한층 여유롭게 전시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번 전시는 간송미술관 건축 과정을 알 수 있는 설계도와 각종 자료들을 비롯해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초기 컬렉션들을 볼 수 있어 더욱 이목을 끌었다. 간송미술관은 일제강점기였던 1938년, 문화재 수집가인 전형필(Jeon Hyeong-pil, 全鎣弼, 1906~1962) 선생이 세운 미술관이다. 미술관 이름 ‘간송’은 그의 호(號)이다. 건립 당시에는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라는 뜻의 보화각으로 불렸다. 국내 1세대 건축가 박길룡(Park Kil-yong, 朴吉龍, 1898~1943)은 전형필의 의뢰를 받아 당대 최신 모더니즘 양식으로 건물을 지었다. 미술관 건물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국가등록문화유산(National Registered Cultural Heritage)으로 지정됐다. 지난 5~6월 열렸던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재개관전 모습. 1층 전시실에는 간송미술관 건립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었으며, 2층에서는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서화와 유물들이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간송미술관 정원에 설치된 전형필 동상. 교육자이자 문화유산 수집가였던 전형필은 선친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탁월한 감식안을 바탕으로 민족 유산 수집 및 보호에 일생을 바쳤다. 방대한 컬렉션 간송미술관은 흔히 ‘보물 창고’로 불린다. 그 이유는 소장품들의 면면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컬렉션의 정확한 규모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화, 서적, 도자, 공예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1만 점 이상을 보유했다고 알려졌다. 그중 12점은 대한민국 국보로, 30점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신윤복(申潤福, 1758~1814년경)의 < 풍속도 화첩(Album of Genre Paintings) >과 정선(鄭敾, 1676-1759)의 < 해악전신첩(Album of the Sea and Mountains, 海嶽傳神帖) >이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 모나리자 > 이상으로 유명한 신윤복의 < 미인도(A Beautiful Woman) >도 빼놓을 수 없다. 1938년 전형필이 일본 주재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John Gadsby)로부터 인수한 ‘개스비 컬렉션’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개스비로부터 고려청자 20점을 40만 원에 샀는데, 이는 당시 기와집 400채 가격이었다. 이 가운데 훗날 국보로 지정된 청자만 4점이다. 이 유물들은 모두 전형필이 개인 재산을 털어 사들였다. 그는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청년 부자였다. 그가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오세창(Oh Se-chang, 吳世昌, 1864~1953)의 영향을 받아,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 본격적인 수집을 시작한 것이 1934년 그의 나이 28세 때다.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연구∙보존할 장소로 현재 간송미술관이 자리한 성북동 부지를 사들였고, 4년 뒤 보화각이 세워졌다. 개스비 컬렉션 중 하나인 청자 기린형뚜껑 향로(Celadon Incense Burner with Girin-shaped Lid, 靑磁 麒麟形蓋 香爐). 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20㎝이다. 뚜껑에는 상상의 동물인 기린이 조각되어 있는데, 기린의 입을 통해 향의 연기가 배출된다.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며,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 국가유산청 간송미술관의 대표적 소장품 중 하나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Celadon Prunus Vase with Inlaid Cloud and Crane Design, 靑磁 象嵌雲鶴文 梅甁). 높이 42.1㎝, 입지름 6.2㎝, 밑지름 17㎝ 크기이며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 주는 유물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 국가유산청 뛰어난 감식안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한국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혼란 속에서 우리 문화재들이 어디로 어떻게 흩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전형필은 막대한 돈을 써가며 컬렉션을 늘려갔다. 귀한 물건이다 싶으면 가격을 깎지 않았고, 오히려 상대방이 제시한 가격에 웃돈을 얹어 사기도 했다. 좋은 물건을 유리하게 확보하려는 전략이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게 『훈민정음 해례본(The Proper Sounds for the Instruction of the People)』이다. 훈민정음은 조선의 네 번째 임금 세종(재위 1418~1450)이 창제한 한국 고유의 글자 ‘한글’의 옛 이름이다. 해례본은 새 문자 체계의 사용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1446년 간행된 책이다. 여러 사람이 실제로 사용하는 문자 시스템에 대해 이를 만들어 낸 사람이 직접 해설한 자료는 전 세계에 오직 이 책뿐이다. 이러한 연유로 이 책은 1962년 국보에 지정됐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됐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40년 경상북도 안동(安東)에서다. 여러 문헌에서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은 언급됐지만, 실물이 확인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한글이 창제된 원리를 두고 추측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제작된 지 약 500년 만에 어느 유서 깊은 가문의 서고에서 책이 발견됐다. 오랫동안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고 있던 전형필은 깜짝 놀랐고 당연히 그 가치를 알아챘다. 그는 책값으로 제시되었던 1천 원의 열 배인 1만 원을 주고 이 책을 사들였다. 그러면서 이 사실을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당시 일제는 한국인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한글학자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전형필은 보화각 깊숙한 금고에 책을 숨기고는 광복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 화접도(Flower and Butterfly, 花蝶圖) >. 고진승(高鎭升, 1822~?). 지본채색. 각 22.6 × 116.8 ㎝. 19세기. 간송미술관 제공 조선 시대 도화서 화원이었던 고진승의 나비 그림은 실물을 옮겨 놓은 듯 묘사가 세밀하다. 실제로 그는 나비의 생태를 관찰하고 연구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살아남은 유산들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면서 한국은 독립 국가가 됐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1950년 6월 25일 소련을 등에 업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면서 서울이 사흘 만에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다. 전형필은 가족들을 피난시켰지만, 자신은 보화각의 수장품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인근 빈집에 몸을 숨기고 아침저녁으로 북한군의 동태를 살폈다. 매일 피가 마르는 듯했다. 북한군은 보화각의 문화유산들을 북녘으로 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당시 국립박물관의 직원들을 불러서 포장을 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이들은 간송 컬렉션의 위대함과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으로 보낼 수 없었다. 이들은 “목록을 먼저 작성해야 한다”, “더 큰 상자가 필요하다”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던 중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면서 서울을 되찾았다. 전형필도 기쁜 마음으로 보화각에 돌아왔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이듬해 1∙4 후퇴가 벌어지면서 서울은 다시 위기에 처했다. 행운을 두 번 기대할 수 없었던 전형필은 중요한 수장품을 기차에 싣고 부산으로 피신했다.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은 늘 품 속에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문화유산들을 가져올 순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보화각에 남겨 두었던 수장품들이 부산에서 목격되기 시작했다. 누군가 빼돌려 내다판 것이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맺어지면서 그도 서울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보화각은 이미 큰 피해를 입은 뒤였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을 딛고 그는 다시 문화재를 사들이고 보화각을 정비했다. 196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문화보국(文化保國)에 대한 그의 신념은 한결같았다. 지금 간송미술관은 그의 아들을 거쳐 손자가 운영하고 있다. 9월 초엔 간송 컬렉션을 상설 전시하는 대구간송미술관도 문을 열었다. 대구광역시가 부지를 제공하고, 정부와 지자체가 사업비 총 446억 원을 부담해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건물이 들어섰다. 운영은 간송미술문화재단(Kansong Art and Culture Foundation)이 맡았다. 대구 개관전에는 간송미술관이 자랑하는 스타 유물들이 총출동했다.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은 1971년 대중에게 공개된 이래 처음 서울 밖으로 나들이했다. 이 밖에도 국보 청자상감운학문매병(Celadon Prunus Vase with Inlaid Cloud and Crane Design, 靑磁 象嵌雲鶴文 梅甁)과 최고 인기 유물 < 미인도 >도 빼놓을 수 없다. 대구간송미술관 개관전은 올해 12월 초까지 진행된다. 올해 9월 3일 개관한 대구간송미술관 전경. 이곳은 간송미술문화재단의 유일한 상설 전시 공간으로 운영된다. 소장품 중 국보와 보물을 선별해 공개하는 개관 기념전이 12월 1일까지 열리고 있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강혜란(Kang Hye-ran, 姜惠蘭) 중앙일보 기자 이민희 포토그래퍼

Arts and Culture Calendar 2024년 6월 ~ 2024년 8월

Arts & Culture 2024 SUMMER

Arts and Culture Calendar 2024년 6월 ~ 2024년 8월 필립 파레노: 보이스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의 한국 첫 개인전이 열렸다. 이번 전시는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파레노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서베이 전시이다. 작가의 활동을 대표하는 주요 작품 및 신작으로 구성되며, 대형 신작 (2024), 최초의 작품 (1987)을 비롯해 40여 점을 선보인다. 기간 : 2024. 02. 28.~2024. 07. 07. 장소 : 리움미술관 홈페이지 : leeumhoam.org 소원을 말해봐 전시는 가벼움의 시대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회복해야 할 것들에 주목한다. 8인의 작가는 관람객에게 이야기와 지혜를 전하는 안내자로 등장한다. 일종의 ‘영적 여행’으로 구성된 전시에서는 가벼움이 삶을 흩어놓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존엄성과 정신적 자유를 누리는 조건을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기간 : 2024. 04. 23.~2024. 08. 04. 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관 홈페이지 :sema.seoul.go.kr 서울의 젊은이와 대중가요 평범한 서울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이야기하는 서울생활사박물관에서 대중음악을 선도한 젊은이들이 불렀던 노래와 장소를 전시한다. 1930년대 종로 다방, 1950년대 명동 음악감상실, 1980년대 신촌 라이브카페, 1990년대 홍대 앞 클럽, 2000년대 온라인 공간 등 각 시대를 이끈 젊은이들이 즐겨 들은 음악부터 그 시절 낭만과 감성을 느낄 수 있다. 기간 : 2024. 05. 03.~2024. 09. 22. 장소 : 서울생활사박물관 홈페이지 :museum.seoul.go.kr/sulm/index.do 한국의 신발, 발과 신 이 전시는 발로부터 시작된 한국 전통 신발의 역사 전체를 조망하고 신발이 가진 다양성과 문화사를 소개한다. 한국 신발과 복식 문화에 관한 것으로 발의 진화, 신발의 탄생부터 신분과 기후, 패션에 따른 신발,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신발 등 7부로 구성됐다. 기간 : 2024. 05. 14.~2024. 9. 22. 장소 : 국립대구박물관 홈페이지 :daegu.museum.go.kr MMCA 기증작품전: 1960-70년대 구상회화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가운데 한국 구상화단의 형성과 성장에 자양분이 된 1960~1970년대 구상회화를 재조명한다. 자기 반영적이며 사적인 재현에서부터 장소와 일상, 삶의 변화를 보여주는 풍경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공감하는 독특한 서정성을 띤 33명의 작가, 1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기간 : 2024. 05. 21.~2024. 09. 22.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홈페이지 :mmca.go.kr 80 도시현실 1960~1970년대 고도성장을 기반으로 도시화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1980년대 도시를 둘러싼 한국의 현실이 드러나는 작품 전시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가나아트 컬렉션과 소장품으로 구성되었으며, 당시 한국의 사회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민중미술 및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을 포괄하고 있다. 기간 : 2023. 05. 25.~2024. 08. 04. 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홈페이지 :sema.seoul.go.kr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아시아 최고 판타스틱 장르영화제인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오는 7월 4일부터 14일까지 부천 일대에서 개최된다. 올해 역시 영화제의 정체성인 ‘이상해도 괜찮아’ 슬로건을 유지하는 동시에 메가 트렌드로 자리 잡은 AI와 관련해 국내 최초 AI 영화 국제경쟁 부문도 도입하여 AI 영화의 가능성을 제시할 예정이다. 기간 : 2024. 07. 04.~2024. 07. 14. 장소 : 경기도 부천 일대 홈페이지 :bifan.kr 2024 여우락 페스티벌 국립극장이 지난 2010년부터 개최하고 있는 여우락은 우리 음악과 다양한 예술 장르가 만나 새로운 무대를 선보이는 자리다. 올해 역시 정해진 틀 없이 한국음악 기반의 과감한 시도로 주목받는 음악가들과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독보적이고 새로운 차원의 무대를 펼칠 예정이다. 기간 : 2024. 07. 04.~2024. 07. 27. 장소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하늘극장, 문화광장 홈페이지 :ntok.go.kr 여자야 여자야 시대와 사람을 고찰하며 자신의 작품세계를 확장해 가는 안무가 안은미(Ahn Eun-me 安恩美)가 를 통해 근현대를 살았던 신여성을 표현한다. 작품에는 신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용기 있게 나섰으나 시대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면서도 자기만의 삶을 살았던 여자들의 면면과 움직임의 변화, 의복과 같은 상징적 요소들과 그 시대 유행어, 신조어 등이 등장해 무대를 더 풍성하게 꾸밀 예정이다. 기간 : 2024. 07. 05.~2024. 07. 06. 장소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홈페이지 : acc.go.kr Sync Next 세종문화회관 컨템퍼러리 시즌 ‘Sync Next(싱크 넥스트)’는 매년 여름 세종문화회관에서만 만날 수 있는 가장 트렌디한 예술 경험이다. 올해도 10주 동안 재즈, 코미디, 회화, 설치미술, 합창 등 각자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매력을 지닌 아티스트가 한데 모여 장르에 대한 규정 없이 예술의 내일을 고민하고 관객과 소통한다. 기간 : 2024. 07. 05.~2024. 09. 08. 장소 : 세종문화회관 세종S씨어터 홈페이지 :season.sejongpac.or.kr/portal/season/syncnext24.do 평창대관령음악제 대한민국 대표 클래식 음악 축제인 평창대관령음악제가 올해 21회째를 맞는다. 오는 7월 24일부터 평창 알펜시아 일대 및 강원도 일원에서 개최된다. 올해는 ‘루트비히(Ludwig!)’를 주제로 콘서트, 찾아가는 음악회&가족음악회, 부대행사 등이 풍성하게 열릴 예정이다. 기간 : 2024. 07. 24.~2024. 08. 03. 장소 : 평창 알펜시아 일대 및 강원도 홈페이지 :mpyc.kr 2024 글로벌 웹툰 페스티벌 오는 9월 ‘2024 글로벌 웹툰 페스티벌’이 열린다. 이번 행사는 웹툰 종주국 입지를 다지기 위해 올해 처음 열리는 것으로, 팝업의 성지 서울 성수동에서 팝업스토어 형식으로 진행된다. 팝업스토어 외에도 토크콘서트, 가상현실(VR)·증강현실(AR)을 활용한 전시, 웹툰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콘서트 등을 다채로운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기간 : 2024. 09. 26.~2024. 09. 29. 장소 : 서울 성동구 성수동 에스팩토리 D동 일대

한국의 특별한 여름 별미, 물회

Arts & Culture 2024 SUMMER

한국의 특별한 여름 별미, 물회 물회는 과거 불을 피울 수 없던 목선에서 어부들이 간편하게 만든 뒤 빠르게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였다. 하지만 그 탄생 배경은 그리 가볍지 않다. 밥이 주식으로 하는 오랜 전통, 갓 잡은 생선을 날것으로 먹는 독특한 활어회 문화, 그리고 고추를 발효시켜 만든 고추장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절묘하게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물회는 세계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음식이다. 싱싱한 회와 각종 해산물, 아삭한 식감을 더해줄 야채와 고추장을 베이스로 한 시원한 육수가 어우러진 물회는 한국인들이 여름철 즐겨 찾는 보양식이자 별미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서 발간하는 세계수산양식현황(SOFIA)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해산물 소비량은 매년 세계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국토의 삼 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라는 환경 탓도 있겠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국의 많은 해산물 소비량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한국보다 더 넓은 바다를 가진 나라도 많기 때문이다. 해산물 소비가 많은 한국 한국인의 해산물 소비량이 매년 세계 순위권에 드는 이유에는 한국인의 독특한 식문화도 한몫한다. 우선 한국인은 김, 미역, 다시마 등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종류의 해조류를 먹는다. 심지어 수출도 많이 한다. 해조류는 바다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바다에 해조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생물이 사는 건강한 바다라는 증거다. 한반도의 바다는 육지와 가깝고 수심도 너무 깊지 않아 해조류 자생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햇볕이 닿지 않는 너무 깊은 바다나 육지와 멀리 떨어져 무기물이 충분하지 못한 바다에는 해조류가 자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한국인은 예로부터 바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해조류를 활용해 다양한 요리를 만들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바다의 잡초로 인식되었던 해조류가 한국인에게는 요긴한 식재료였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한국인의 건강한 밥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생선을 익히지 않고 먹는 식문화를 들 수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생선을 날것으로 먹는 방식이 일반화된 나라는 한국과 일본 정도가 유일하다. 서구의 경우 남미(특히 페루)에서 시작된 세비체(ceviche)라는 음식을 통해 생선을 날것으로 먹는 문화가 일부 남아있다. 그런데 세비체는 엄밀히 따지면 생선을 전혀 익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비체는 라임이나 레몬에 해산물을 재웠다가 먹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열 대신 산(acid)에 의해 생선의 표면이 익는다. 날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날것이 아닌 셈이다. 이에 반해 한국과 일본은 생선을 비롯한 다양한 해산물을 날것으로 먹는 방식을 오래전부터 이어오고 있으며, 이는 한일 양국 식문화에서 중요한 장르로 굳어졌다. 이렇게 생선을 날것 그대로 먹는 방식을 한국에서는 ‘생선회’, 일본에서는 ‘사시미’라고 부른다. 복합적인 맛을 즐기다 생선을 날것으로 먹는 방식에서 있어 한국과 일본은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일본은 날생선을 손질한 후 충분한 숙성을 거친 후에야 맛볼 수 있는 부드러운 질감과 풍부함 감칠맛을 즐겼다. 숙성을 거쳐 부드러워진 사시미는 밥과 잘 어울렸다. 밥에 식초를 섞어 부패를 방지한 다음 사시미를 얹어 만든 음식이 스시다. 한국은 생선회를 먹는 포인트가 일본과 달랐다. 숙성된 생선회보다는 사후경직이 진행 중인 생선, 즉 단단한 질감을 선호했다. 대신 다양한 양념과 채소를 곁들였다. 일본이 간장과 고추냉이(와사비) 등 최소한의 소스를 사용해 생선이 가진 본래의 맛을 끌어내는 것에 중점을 뒀다면, 한국은 간장, 된장, 고추장, 참기름, 마늘, 고추 등 다양한 부재료를 곁들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상추나 깻잎 등에 싸서 함께 먹었다. 얼핏 일본보다 덜 섬세해 보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인간의 미각은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의도된 방향으로 발달한다. 생선과 소스 그리고 채소의 조화를 추구했던 한국인의 미각은 복합적인 맛을 즐기는 쪽을 선호하게 된다. 그래서 사시미를 먹는 일본인의 테이블은 단조로운 반면, 생선회를 먹는 한국인의 테이블은 매우 복잡하고 푸짐하다. 한국 어부의 패스트푸드, 물회 조선시대(1392~1910년)까지 한국의 어업은 나무로 만든 목선과 노를 젓거나 바람을 이용하는 무동력선에 의지했다. 근대 이후 엔진에 의해 움직이는 동력선이 도입되었으나, 선박의 재질이 나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동력선이 도입되자 이전보다 훨씬 먼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먼 바다로 나갈수록 조업 시간은 길어졌다. 배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매콤하면서 새콤달콤한 육수는 무더위에 지친 입맛을 달래기에 제격이다. 각종 회와 해산물, 그리고 야채를 덜어 먹은 후 남은 육수에 취향에 따라 밥 또는 면을 말아먹어도 좋다. 한국인의 주식은 전통적으로 쌀이나 보리 등을 익힌 밥이었다. 밥은 곡물의 껍질만 벗겨 낱알 그대로를 익힌 음식이다. 밀이나 메밀을 분쇄해 가공한 분식(粉食)에 비해 조리가 간편하고 영양 손실도 적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쌀과 보리에 함유된 탄수화물은 아주 단단한 구조로 결합 되어 있다. 여기에 열과 수분을 가하면 단단 구조가 깨지면서 부드럽게 변한다. 이를 겔화(gelation)라고 한다. 즉 쌀의 겔화가 진행되면 밥이 된다. 그런데 밥을 상온에 두면 수분이 증발하면서 다시 딱딱해진다. 과거 한국 어부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자. 이른 아침 먼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나면서 밥 한 덩어리를 챙겼을 것이다. 고된 바닷일을 하다 보면 금방 허기를 느끼게 된다. 집에서 가져온 밥은 이미 차갑게 식었고 그냥 먹기에는 딱딱하다. 불을 피워 물을 끓이면 딱딱한 밥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지만, 나무로 만든 목선에서 불을 피우는 것은 위험한 행위다. 게다가 배 위에서는 여러 가지 반찬을 늘어놓고 여유 있게 식사할 상황이 아니었다. 차가운 물에 밥을 말았고 반찬으로 갓 잡은 싱싱한 생선을 듬성듬성 썰어 넣었다. 여기에 고추장 한 숟가락을 곁들여 밍밍한 맛을 보완했다. 조업 중 잠깐 짬을 내어 밥과 생선회를 물에 말아 그릇째 들고 후루룩 마시듯 먹던 물회는 어부들이 배 위에서 쉽고 빠르게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고안한 패스트푸드였던 것이다. 뚜렷한 지역별 특색 시원한 육수에 싱싱한 횟감의 조화가 일품인 물회는 어부의 음식에서 발전해 오늘날 바다 주변 관광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시원한 육수에 취향별로 고른 횟감과 아삭한 채소, 밥 또는 면을 선택해 후루룩 말아먹는 물회는 무더운 여름을 달래줄 별미가 되었다. 최근에는 몇몇 바닷가 주변에서 관광지 음식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소박한 음식으로 출발한 물회는 점점 화려하고 다양하게 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계절에 따른 생선이나 해산물, 채소 또는 과일을 사용하는 것엔 크게 다를 것 없지만, 한국에서 물회는 ‘물회’라는 하나의 형식만 존재할 뿐 지역마다, 음식점마다 개성이 다른 음식으로 분화하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육지와 달리 된장을 넣어 만든 육수로 물회를 만든다. 자리돔을 뼈 채 썰어 꼬들꼬들하고 담백한 회와 구수한 된장의 조화가 일품이다. ⓒ 비짓제주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시작된 일명 강원도 물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미지의 물회다. 냉수나 차가운 육수에 초고추장과 식초, 설탕 등을 넣어 만든 양념이 더해져 매콤 새콤한 맛이 조화를 이루는 가장 대중적인 맛이다. 횟감으로는 주로 담백한 물가자미 등을 사용하며 강릉에서는 길게 채 썬 오징어를 넣은 오징어 물회도 유명하다. 또 속초에서 시작해 전국 체인을 두고 있는 청초수 물회에서는 활전복, 해삼, 멍게, 문어, 날치알과 계절에 따른 여러 가지 횟감, 사골육수 등이 어우러진 ‘해전물회’ 메뉴가 인기다. 사람들은 이 물회를 맛보기 위해 사시사철 긴 대기시간도 기꺼이 감수한다. 고추장을 베이스로 하는 또 다른 물회에는 포항식 물회도 있다. 이 물회의 가장 큰 특징은 언 육수를 갈아서 슬러시 형태로 그릇에 담는 것이다. 각종 횟감과 야채 위에 팥빙수처럼 수북하게 쌓인 고추장 베이스의 매콤달콤한 육수를 함께 버무려 먹는 방식이다. 동해식 물회가 식초의 맛을 살린 육수라면 포항식 물회의 육수는 고추장의 맛을 살린 진득함이 두드러진다. 얼핏 보이엔 물회보단 비빔회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슬러시 육수 덕분에 식사를 마칠 때까지 시원하게 먹을 수 있다. 다른 지역의 물회가 대부분 고추장을 기본으로 하는 육수를 쓰는 반면, 제주도에서는 된장을 사용한 육수를 썼다. 지리적인 특성으로 고추가 귀했기 때문이다. 물회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고추장보다는 된장으로 맛을 내는 음식이 많다. 주로 자리돔을 넣은 자리물회가 유명하다. 된장으로 양념한 물회에 제피나무 잎을 약간 넣어 특유의 향을 살리고 생선 비린내를 없앴다. 또 톡 쏘는 빙초산 한 방울을 넣은 뒤 보리밥을 말아서 먹었다. 뼈째 썰어 투박하지만, 담백한 회와 구수한 된장의 조화가 돋보이는 제주 물회는 육지와는 전혀 다른 특징과 매력을 보여준다. 이처럼 계절과 지역에 따라서 서로 다른 생선을 사용하고, 고추장에 설탕, 참기름, 식초, 콩가루 등을 더해 특별한 소스를 만들기도 하고 물 대신 전용 육수를 만들어 사용하는 곳도 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저마다 ‘물회의 원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물회는 그 어느 곳도 원조가 아니면서, 그 모든 곳이 원조가 될 수도 있는 미스터리한 음식이다. 이것은 한국 음식이 갖는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멀리서 보면 단조로워 보이는데 알면 알수록 복잡하고 섬세하다. 아무튼 한국의 여름은 물회가 있어 행복하다.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신세계

Arts & Culture 2024 SUMMER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신세계 버추얼 아이돌 신드롬이 불고 있다. 이들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아이돌 그룹으로 여느 아이돌처럼 앨범을 내고 SNS로 일상을 공유하며, 팬들과 소통한다. 팬들은 버추얼 아이돌의 실체를 궁금해하기보다 이들의 음악과 춤에 집중한다. 지금 버추얼 아이돌은 현실 세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며 새로운 생태계로 주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 VLAST 2024년 2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백화점 더현대 서울이 온통 가상의 존재로 뒤덮였다. 오픈 이래 최대 규모라는 미디어 아트도 대단했지만, 백화점 지상과 지하를 모두 점령한 버추얼 아이돌의 기세가 놀라웠다. 이 날 참여한 버추얼 아이돌은 6인조 걸그룹 이세계아이돌(ISEGYE IDOL)과 5인조 보이그룹 플레이브(PLAVE), 그리고 6인조 걸그룹인 스텔라이브(StelLive)까지 무려 세 팀의 버추얼 아이돌이 동시에 대형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가로 33m, 세로 5m 규모의 LED를 통해 30분간 송출된 이들의 공연은 팬은 물론 그날 현장을 찾은 누구나 관람할 수 있도록 무료로 진행되었다. 또 지난 3월 9일에는 플레이브가 인기 걸그룹 르세라핌(LE SSERAFIM), 가수 비비(BIBI) 등을 제치고 MBC 음악방송 < 쇼! 음악중심 >에서 1위를 차지했다. 버추얼 아이돌이 국내 공중파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 3월 9일 플레이브는 버츄얼 아이돌 최초로 국내 공중파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했다. 플레이브는 팬들을 위해 1위 인증샷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 VLAST 버추얼 아이돌 신드롬 버추얼(Virtual), 즉 ‘가상’이라는 점 때문에 이들이 현실에서 얻는 인기까지 가짜라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 이들의 인기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일부 마니아 문화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좋아하는 팬들의 팬심은 결코 버추얼이 아니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2023년 9월, 인천 송도달빛축제공원에서는 국내 최초 메타버스 연계 오프라인 뮤직 페스티벌인 ‘이세계 페스티벌’이 열렸다. 버추얼 걸그룹인 이세계아이돌과 버추얼 유튜버, 버추얼 아티스트를 비롯해 현실 아티스트 등 총 16팀의 아티스트가 음악으로 가상세계와 현실을 연결했다. 메타버스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메타버스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 페스티벌을 찾은 현장 방문객은 20,000여 명에 달했으며, 극장 동시 상영 객석률은 95.7%를 기록하며 화제가 됐다. 또 2023년 12월 28일, 국내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에서는 이세계아이돌 관련 웹툰 ‘마법소녀 이세계아이돌’ 단행본 펀딩이 진행됐다. 목표 금액은 2천만 원이었다. 펀딩이 시작된 지 24시간 만에 25억 원이 모였고, 한 달 뒤 최종 모금액 41억 9,889만 원을 달성했다. 텀블벅에서 진행한 국내 크라우드 펀딩 사상 최고 모금액이었다. 이제 데뷔 갓 1년을 넘긴 버추얼 보이 그룹 플레이브의 사례도 놀랍다. 2024년 2월 발표한 이들의 두 번째 미니 앨범 < ASTERUM : 134-1 >은 발매 첫 주에만 56만 9,289장이 팔렸다. 이는 버추얼 보이 그룹이 거둔 최초이자 최고 기록이었고, 그 비교 대상을 일반 보이 그룹으로 넓혀도 그룹별 최고 기록 17위에 달하는 상당한 수치였다. 2023년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한 엔데믹 분위기 속 오프라인이 다시 강조되며 케이팝 아이돌 그룹 초동(발매 첫 주 판매량)이 전반적으로 하락세에 들어선 가운데 거둔 성과이기도 했다. 이들이 케이팝계에서 주목받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23년 발표한 데뷔 앨범 < ASTERUM : The Shape of Things to Come >은 초동 판매량 20만 장을 넘기며 업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2024년 현재, 한국의 버추얼 아이돌을 둘러싼 거의 모든 지표가 이들이 자신만의 생태계를 확실히 다져가고 있다는 증거를 명확히 가리키고 있다.   현실과 가상세계가 음악을 통해 연결된다는 컨셉으로 열린 이세계페스티벌(ISEGYE FESTIVAL)은 국내 최초 메타버스 연계 오프라인 뮤직페스티벌이다. 해당 무대에서 공연하는 이세계아이돌(ISEGYE IDOL)의 모습. ⓒ 패러블 엔터테인먼트 버추얼 아이돌의 시작 버추얼 아이돌이 문화산업계에 이토록 빠르게 자리할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팬데믹의 영향이 컸다. 지난 몇 년간 전 세계에 걸친 팬데믹은 문화예술계 대부분의 영역을 초토화했지만, AI(인공지능), 메타버스 등 기술을 중심으로 한 흐름에 있어서만은 21세기의 지난 모든 시간을 합해도 부족할 만한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인간과 인간이 직접 만나서는 안 되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가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비극이 진행되는 동안 기술은 개척할 수 있을 만한 모든 업계의 빈틈을 호시탐탐 노렸다. 마침 세상은 IP(지적재산권) 소유자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기술과 IP를 결합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으며, 대부분의 도전이 그렇듯 살아남은 일부를 제외한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버추얼 아이돌은 그렇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 가운데 하나였다.   특색 있는 버추얼 아이돌 사실 버추얼 아이돌, 나아가 버추얼 휴먼에 대한 산업과 대중의 욕구는 이전부터 꾸준히 있었다. 한국인이라면 아마 버추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가장 먼저 사이버 가수 아담(Adam)을 떠올릴 것이다. 1998년 1월 데뷔한 그는 당시 대세를 이루던 세기말 감성과 호응하며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2020년 등장한 걸 그룹 에스파(aespa)는 데뷔 초 현실 멤버 4명에 가상 세계에 존재하는 그들의 아바타 4명을 합한 8인조 그룹이라며 자신들을 홍보했고, 2021년에는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없이 사람을 닮은 비주얼을 자랑한 버추얼 인플루언서 로지(Rozy)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다만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버추얼 아이돌은 과거의 버추얼 휴먼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버추얼 휴먼의 경우 크게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형과 3D로 구현된 실사형으로 나눌 수 있다. 앞선 사례들이 사람에 가까운 실사형이었다면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버추얼 아이돌 그룹 대부분은 캐릭터 형이다. 더현대 서울 팝업에 참여한 세 그룹 역시 멤버 모두 캐릭터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실사형의 경우 그래픽 기술 구현을 하기 까지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소요된다. 팬과 빠르고 가깝게 교류할수록 호감을 얻는 아이돌 산업의 기본 규칙을 생각하면 꽤 치명적인 단점이다. 또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을 지나치게 닮은 경우 느끼는 불쾌한 감정을 뜻하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도 무시할 수 없다. 실사형과 캐릭터형으로 이들의 외양을 나누고 나면, 이제는 속성을 따져볼 차례다. 최근 버추얼 아이돌계 가장 큰 성공 사례로 주목받는 이세계아이돌과 플레이브를 보자. 흔히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쉽게 말해 이세계 아이돌은 ‘버추얼’에 플레이브는 ‘아이돌’에 방점을 찍으며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나가고 있다. 버추얼과 유튜버의 합성어인 ‘버튜버(VTuber)’ 멤버를 앞세운 이세계아이돌은 그룹 결성 및 운영, 활동 방식까지 자신들이 속한 버튜버 세계의 공식을 기본으로 한다. 서바이벌을 통해 아이돌 그룹으로 탄생시킨 팀 서사부터가 버추얼과 아이돌 사이의 새로운 연결 고리 그 자체다. 이 연결 고리는 비단 아이돌 뿐만이 아닌 앞서 언급한 ‘이세계 페스티벌’ 같이 음악계 전반을 아우르는 페스티벌 영역까지 확장되는 중이다. 한편 플레이브는 단지 외양만 캐릭터일 뿐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 보이 그룹과 전혀 다르지 않은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플레이브는 여느 아이돌 그룹처럼 앨범을 내고 음악 방송 무대에 서며 라디오에 출연한다. 영상통화로 진행되는 팬 이벤트도 열고 팬들과 소통하는 실시간 라이브 방송도 주기적으로 제작한다. 플레이브의 이 같은 특징은 이들의 소속사가 버추얼 캐릭터 전문 회사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원천 기술은 버추얼 캐릭터와 인간 사이의 감도 높은 결합이다. 인간의 매력과 버추얼 캐릭터의 매력이 지금까지 존재한 적 없는 새로운 시너지로 승화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자신들의 노래를 직접 작사/작곡하는 등 활발히 참여하며 실력파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지금껏 없던 길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버추얼 아이돌의 미래 아이돌, 캐릭터, 유튜버, 음악이 혼재하는 세상. 그곳에 버추얼 아이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현시점에서 이들은 쉽게 정의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실제로 버추얼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들조차 자신들이 사랑하는 세계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아직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이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 그것 하나만은 명쾌한 사실이다. 팬들은 버추얼 아이돌이 어떤 세계에서 왔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중요하지 않다. 또 멤버 뒤에 있는 실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며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버추얼 아이돌의 모습 그대로와 그들의 음악, 춤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실존하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일반 팬심이나 덕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앞으로 버추얼 아이돌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알기 위해선 결국 그를 좋아하는 팬들의 마음을 편견 없이 똑바로 바라보는 게 가장 쉬운 지름길일 것이다.

운명의 베틀로 짠 태피스트리

Arts & Culture 2024 SUMMER

운명의 베틀로 짠 태피스트리 『고래』 천명관(千明官) 작, 김지영(金知暎) 번역, 365쪽, 22달러, 아키펠라고 북스(2023) 운명의 베틀로 짠 태피스트리 천명관의 『고래』는 세대를 넘나들며 운명의 실타래에 얽힌 두 엄마와 두 딸의 이야기다. 소설은 유난히 큰 체구로 태어난 금복의 딸인 소녀 춘희가 끔찍한 비극을 겪은 이 후 몇 녀 만에 집으로 돌아온 이야기, 그리고 같은 동네에서 춘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마을에 살았던, 자신에게 잔인했던 세상을 저주하는 노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후 소설은 일제 강점기와 춘희의 어머니인 금복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복은 어린 시절부터 남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외모와 암내를 타고났지만, 남자들의 욕망에 희생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원대한 꿈과 계획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녀가 손을 대는 일은 모두 성공을 거둔다. 해안 마을에서 건어물 사업을 시작하여 많은 돈을 번 그녀는 자신이 더 크고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이후 평대로 이사한 그녀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횡재하게 되면서 벽돌 공장을 열고 자신의 궁극적인 꿈을 이룬다. 그 꿈은 그녀가 해안 마을에서 처음 본 거대 생물인 고래 모양으로 영화관을 짓는 것이었다. 세상이 그녀의 발아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예언의 얽힘이 그녀를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스스로 지은 무대에서 그녀의 최후 운명은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고래』는 깔끔하게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한 소설이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삶은 모두 기묘하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무대를 떠난 것처럼 보였던 캐릭터도 종종 변화한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여전히 운명에 얽매여 있다. 운명은 이 소설의 서사 전반에 시계추처럼 소설의 서사를 지배하는 주제이다. 즉 운명은 우리가 아무리 거부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결국 뜻대로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다. 우선, 다양한 인물들에게 닥칠 사건에 대한 끊임없는 전조가 있다. 화자는 또한 사랑의 법칙, 반사의 법칙, 어리석음의 법칙, 이데올로기의 법칙, 자본주의의 법칙, 심지어 자만의 법칙과 같은 다양한 ‘법칙’의 관점에서 결과를 설명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모든 법칙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게 연결된 이야기 세계, 즉 인간의 의도와 행동이 미리 정해진 결과를 갖는 세계를 확립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군사독재 시대까지 한국 역사의 가장 고통스러운 수십 년을 다루고 있지만, 작가의 이러한 전조와 법칙의 사용은 시대를 초월한 느낌을 준다. 마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태피스트리를 보는 것처럼 시간이 붕괴한다. 분명히 사건의 순서와 사건의 진행이 있지만,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대한 이야기가 끝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심오한 신비를 엿본 듯한 느낌을 들게 된다. 『날개 환상통』 김혜순(金惠順) 작, 최돈미(崔燉美) 번역, 208쪽, 18.95달러, 뉴디렉션즈북스(2023) 복화술사가 하늘을 향해 노래하다 김혜순의 시집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종종 새를 보며 우아하게 날아다니거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연상하지만, 이 시에서는 새-시인(혹은 시인-새)은 하이힐을 신고 땅 위를 걷고, 자신의 커다란 날개를 부끄러워하고, 새장 같은 옷을 입는다. 새들은 종종 새장에 갇혀 사람들의 관찰 대상이 된다. 또한 많은 문화권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새로 나타난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삶의 비극을 경험하고 큰 슬픔에 빠지는 경우를 생각하면 적절해 보인다. 영문판에 추가된 시집 말미의 에세이에서 시인은 복화술의 기법을 재활용한다고 언급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남성 시인들이 여성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자주 사용했던 기법이다. 복화술이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배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영적인 영감이나 홀림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특히나 적절해 보인다. 시인은 우리를 위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 홀린 무당처럼, 하늘의 숨결을 노래하는 시인처럼 우리를 고양시킨다. < The Gleam > 빛의 은유 박지하(朴智夏)의 < The Gleam >(2022)은 제목 그대로 어슴푸레한 빛의 잔상을 쫓는다. 상태이자 순간이고, 이미지이자 감정인 빛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가 이 음반에 담겨있다. 가장 먼저 뚜렷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한국의 전통 악기인 피리(觱篥), 생황(笙簧), 양금(洋琴)이다. 악기의 모양만큼이나 독특한 음색이 단숨에 귀를 사로잡는다. 악기 본연의 소리는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뻗어나가 산란하는 빛으로, 긴 잔향으로 아득한 시공간을 빚어낸다. 음을 길게 지속할 때 미세하게 변화하는 진동과 호흡,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섬광과도 같은 노이즈, 아스라이 멀어지는 잔향, 섣부르게 몸집을 키우지 않고 섬세하게 고안된 공간감은 깊은 고요, 내면의 침묵으로 우리를 이끈다. 박지하는 가야금 연주자 서정민(徐廷旼)과 함께 ‘숨(suːm)’이라는 듀오로 9년간 활동하며 한국 전통음악의 문법에 보다 깊게 천착한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솔로 음반을 발매한 이후 미니멀리즘(Minimalism), 엠비언트 뮤직(Ambient Music) 영토로 선회해 자신의 입지를 다져왔다. < The Gleam >도 넓게 보면 < Communion >(2016), < Philos >(2018)의 연장선에서 음악적 재료와 패턴을 반복하고 중첩시키는 방식을 채택해 왔다. 그는 양금의 현을 활로 연주하거나 손톱으로 긁어 예리한 음향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등 일반적인 연주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감의 소리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는 참신한 테크닉을 선보이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 악기로 구현할 수 있는 소리의 다이내믹을 확장해 이질적인 감각을 조형하는 데 방점이 찍혀있다. 이 음반을 이해하는 데 또 한 가지 유효한 키워드는 공간이다.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박물관인‘뮤지엄 산(Museum San)’은 이 음반을 구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Ando Tadado)가 설계한 이 공간에서 진행됐던 2020 The Art Spot Series ‘Temporary Inertia’ 공연의 일부를 발전시켜 음반으로 엮었다. 공간의 음향적 측면을 세심하게 고려해 개별 악기의 응축된 소리를 미니멀하게 배치한 흔적이 음악 도처에서 발견된다. 박지하에게 공간은 연주가 이루어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음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하나의 ‘요인’이자 음악을 구성하는 ‘재료’로 기능한다. 빛의 여러 형태와 잔상을 포착한 음악의 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다다를 것이다. 빛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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