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Arts & Culture

Arts and Culture Calendar 2024 12월~2025 02월

Arts & Culture 2024 WINTER

Arts and Culture Calendar 2024 12월~2025 02월 안규철의 질문들 - 지평선이 없는 풍경 일상적 사물과 공간에 내재된 삶의 이면을 드러내는 미술 작업과 글쓰기를 병행해 온 작가 안규철이 지난 40년간 미술에서 품어온 질문들을 담은 신작을 소개하는 전시다. 작가가 건네는 질문들은 사회나 예술 같은 큰 담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가깝게 와닿는 삶의 작은 이야기들에 대해서 또 다른 시각으로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기간: 2024. 08. 23.~2025. 01. 3. 장소: 스페이스 이수 홈페이지 : isu.co.kr/kor/culture/spaceisu.jsp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아시아 여성 예술을 신체성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국제기획전이다. 전시는 초국가적이고 비교문화적인 관점에서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타자와의 연결망으로서의 예술의 의미가 부각되고 있는 현재, 국내외 미술계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여성미술의 다층적 면모를 동시대 관점에서 살핀다. 기간: 2024. 09. 03.~2025. 03. 03.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홈페이지 : mmca.go.kr 드림 스크린 국내 신진 작가 지원 전시인 아트스펙트럼의 이번 기획전은 이다. 이번 전시는 밀레니얼 이후 세대가 인터넷, 게임, 영화 등 ‘스크린’이라는 매개체를 통한 경험을 체화하면서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감각을 갖게 된 점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또 새로운 세대가 매체를 경유한 경험과 파편적인 잔상으로부터 삶의 조건을 탐색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개척해 가는 다양한 경로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간: 2024. 09. 05.~12. 29. 장소: 리움미술관 홈페이지 : www.leeumhoam.org Mika Rottenberg: NoNoseKnows 국내 최초로 진행하는 미카 로텐버그(Mika Rottenberg)의 개인전이다.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는 상품 생산 과정과 신체·노동 간의 관계 등을 영상과 움직이는 예술인 키네틱 아트로 표현해 주목을 받아 왔다. 이번 전시는 그의 초기작부터 최신작을 아우르는 개인전으로, 주요 영상 작품과 영상 속 일부를 옮겨 온 듯한 설치 및 조각 작업을 통해 세상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작가의 작업 세계 전반을 소개한다. 기간: 2024. 10. 23.~2025. 03. 02. 장소: 현대카드 스토리지 홈페이지 : www.dive.hyundaicard.com/web/storage/spaceMain.hdc 올해의 작가상 < 올해의 작가상 2024 > 참여 작가는 권하윤(權河允), 양정욱(樑正旭), 윤지영(尹智英), 제인 진 카이젠(簡·陳凱成)이다. 이들의 작품은 심리적 역동과 일상의 삶, 역사적 기억, 신화와 제의 등을 주요 관심사로 삼는 이들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으로 침잠하거나 거대한 세계로 확장해 나가고, 사실과 허구 사이를 오가는 방법론을 통해 통념을 전복하고 확장된 경험을 전한다. 기간: 2024. 10. 25.~ 2025. 03. 23.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홈페이지 : www.mmca.go.kr 손으로 빚어낸 팔레트 이번 전시는 공예가들이 자신만의 색을 빚어낸 과정의 기록이자, 그 시간과 집념에 관한 이야기이다. 도자, 염색, 유리 공예가들이 각각 자신이 원하는 색을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 자연에서 색을 빚어내는 과정을 탐구하고 작품에 담아낸 색채의 의미를 조명한다. 기간: 2024. 10. 31.~ 2025. 05. 02. 장소: 서울공예박물관 홈페이지 : www.craftmuseum.seoul.go.kr 찬란한 전설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고(故) 천경자 화백의 탄생 100주년 기념을 기념하는 특별전시다. 주제 전시가 열리는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는 채색화, 드로잉, 아카이브 등 160여 점을 통해 천 화백의 삶과 예술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특히 이번 전시는 천 화백의 대표작뿐만 아니라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작품과 유품을 최초로 선보인다. 기간: 2024. 11. 11.~2024. 12. 31. 장소: 고흥분청문화박물관, 고흥아트센터 홈페이지 : : www.buncheong.goheung.go.kr 취향가옥: Art in Life, Life in Art 디뮤지엄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취향가옥: Art in Life, Life in Art’를 개최한다. 해당 전시는 취향을 통해 개성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소비 트렌드가 지속되는 요즘,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페르소나들의 특별한 공간을 공개한다. 더불어 김환기(金煥基 Kim Whan-ki), 박서보(본명 朴在弘, Park Seo-bo), 파블로 피카소 등과 같은 거장들의 마스터 피스부터 장 푸르베(Jean Prouve), 핀 율(Finn Juhl) 등의 디자인 가구까지 총망라한다. 기간: 2024. 11. 15.~2025. 05. 18. 장소: 디뮤지엄 홈페이지 : www.daelimmuseum.org 한국 현대 도자공예: 영원의 지금에서 늘 새로운 1950년대 이후 한국 현대 도자를 조망하는 전시이다. 한국 근현대 자생적 도자 창작물의 출현과 1970년대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도자 양식의 변화를 조명한다. 더불어 1980~90년대 국제화의 영향으로 활성화된 도자 작업의 대형화와 건축과의 협업을 선보인다. 2000년대 이후에는 디지털 세대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도자 역사와 전통의 해석을 짚어보며 도자 생활과 예술이 생산한 미적·사회적 가치를 다양한 측면에서 고찰하는 전시다. 기간: 2024. 11. 21.~2025. 05. 06.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홈페이지 : www.mmca.go.kr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고려인이 이루어낸 수준 높은 최첨단 제품이었던 고려청자. 그중에서도 동·식물, 인물 등의 특정 형태를 본떠 만든 상형청자는 고려청자의 수준 높은 기술과 미감을 잘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는 300여 개의 제품을 통해 고려인이 사랑한 세상이 담긴 고려 상형청자를 단독으로 조명한다. 기간: 2024. 11. 26.~2025. 03. 03.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 www.museum.go.kr ACC FOCUS 〈구본창: 사물의 초상〉 2024 ACC FOCUS 〈구본창(具本昌 Koo Bohnchang): 사물의 초상〉은 구본창 작가의 사물 연작을 통해 그가 선택한 사물이 가지고 있는 거대·미시 서사에 주목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한국성· 아시아적 정서에 주목하는 전시이다. 한국현대사진의 선구자인 구본창의 주요 사물 연작인 〈DMZ〉, 〈백자〉, 〈탈〉(총 14개 연작)과 미공개 영상작품 〈코리아 환타지〉, 작가 소장품 등 총 160여 점의 작품과 아카이브 200여 점을 소개한다. 기간: 2024. 11. 22.~2025. 03. 30. 장소: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홈페이지 : www.acc.go.kr 백남준,백남준,그리고 백남준 최초의 비디오 예술가이자 세계적인 작가인 백남준(白南準)의 대표작을 총망라하여 그의 예술적 도전을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전시는 2000년대 백남준의 레이저 작품을 시작으로, 1980~1990년대의 비디오 설치와 로봇, 1960~1970년대 비디오와 텔레비전 작업, 1963년 첫 개인전 및 플럭서스 활동에 이르는 주요 작업을 시간의 역순으로 보여준다. 기간: 2024. 11. 30.~2025. 03. 16. 장소: 부산현대미술관 홈페이지 : www.busan.go.kr/moca

전쟁이 남긴 푸짐한 맛, 부대찌개

Arts & Culture 2024 WINTER

전쟁이 남긴 푸짐한 맛, 부대찌개 부대찌개는 한국전쟁 이후 생겨난 음식이다. 전쟁 이후 세 끼는 고사하고 한 끼도 제대로 먹기도 힘든 가난했던 시절 등장한 부대찌개는 푸짐한 양으로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선사했다. 양만이 아니었다. 서양의 식재료를 한국인의 손맛으로 풀어낸 맛도 일품이었다. 김치, 고추장 등의 한국 식재료와 햄과 소세지, 베이크드빈 등의 서양 식재료를 더해 만든 부대찌개는 동서양의 식문화 조합이 돋보이는 음식이다. 한 국가의 식문화가 고유성을 확립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동한다. 기후, 토질 등이 선천적 요소라면, 역사적 사건이나 자연재해 등은 후천적 요소다.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엔 전쟁이 있다. 전쟁이 전 세계 식문화를 바꾼 사례는 넘치고도 남는다. 끓는 물에 각종 채소와 소고기, 양고기 등을 넣어 살짝 익혀 먹는 샤브샤브는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가 세계 정복에 나서면서 퍼진 음식이다. 나폴레옹이 질 좋은 식량 보급품 마련을 위해 개발을 독려해 태어난 게 통조림이다. ‘부대’에서 시작한 맛 한국에도 이와 유사한 음식이 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이후 생긴 부대찌개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커다란 상흔을 남겼다. 남북으로 나뉜 한반도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체제가 공존하는 땅이 됐다. 남한엔 종전 후에도 미군이 의정부, 파주, 평택(송탄) 등 여러 지역에 주둔하게 된다. 부대찌개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바로 이 미군 부대와 관련이 있다. 부대찌개는 육수에 햄, 소시지, 베이컨, 베이크드 빈스, 다진 고기, 김치 등을 넣고 고추장으로 맛을 낸 매콤한 양념을 섞어 끓인 음식이다. 여기에 라면까지 넣으면 감칠맛이 두 배가 된다. 조선시대엔 없었던 부대찌개는 어떻게 한국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 되었을까. 부대찌개 원조집 중 하나로 알려진 의정부 오뎅식당의 역사를 들추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오뎅식당의 창업주는 1960년부터 포장마차에서 부대찌개를 팔았다. 창업 초창기부터 부대찌개란 메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뎅식당 누리집에 있는 기록을 보면, 당시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던 이가 가져다준 햄과 소시지, 베이컨으로 볶음 요리를 만들어 팔았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단골들은 밥과 함께 먹을 만한 국물 요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주인장은 고민 끝에, 기존에 팔던 볶음 요리에 물을 붓고 김치와 고추장 등을 넣어 찌개를 만들었다. 부대찌개가 탄생한 것이다. 고기 맛과 진배없는 소시지나 햄, 베이컨은 사람들 입맛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매콤한 국물은 밥을 말아 먹기에 충분했다. 단박에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몰렸다. 오뎅식당이 인기를 끌자, 인근에 부대찌개 식당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과 같은 ‘의정부 부대찌개 골목’이 생겨난 사연이다. 2009년, 이 지역은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로 지정됐다. 부대찌개 명가들이 몰려있는 지역 대부분은 미군 부대 인근이다. 경기도 의정부, 동두천, 평택(송탄), 전북 군산, 서울 용산 등에는 맛이 조금씩 차이 나는 부대찌개 식당들이 즐비했다. 한편, ‘존슨탕’이라고도 불렸다. 1966년 방한한 미국 대통령 린든 베인스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1973) 의 이름을 땄다는 설이 유력하다. 부대찌개가 처음 만들어진 경기도 의정부에 위치한 부대찌개 거리. 매년 이 거리에서 부대찌개 축제가 열린다. ⓒ 의정부시 상권활성화재단 맛을 완성하는 재료 서양에선 소시지나 햄을 구워 먹거나 빵 사이에 넣어 먹는다. 이걸 국물에 넣어 익혀 국물과 함께 먹는 일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한국인에게 국물 요리는 식사에 필수적인 존재이다. 부대찌개의 넉넉한 국물 안에서 익은 소시지나 햄은 쫄깃하면서도 부드럽다. 또 소시지나 햄 특유의 기름진 맛이 국물에 스며든다. 여기에 베이크드 빈즈와 김치야말로 부대찌개의 간판 얼굴이다. 풍미를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시지와 햄의 쫀득한 식감에 지칠 때쯤 만나는 푹 익은 콩 요리는 혀의 쉼터가 되어줬다. 보드라운 질감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맛이다. 푹 익은 매콤한 김치는 부대찌개의 맛을 진두지휘는 장군 역할을 한다. 김치가 맛이 없으면 제아무리 다른 재료가 좋아도 부대찌개 특유의 맛이 안 난다. 식당에 따라선 라면이나 두부를 넣기도 한다. 치즈가 올라가는 식당도 있다. 라면은 탄수화물만이 줄 수 있는 넉넉한 포만감을 제공한다. 숟가락으로 들어 올릴 때마다 쭉쭉 늘어지는 치즈는 별미다. 치즈를 넣어 독특한 맛을 내는 한식이 부대찌개뿐이겠는가. 닭갈비, 등갈비 요리, 떡볶이 등 우리 전통 한식에 색다른 맛을 내려고 할 때 종종 출동하는 게 치즈다. 푸짐한 양과 다채로운 토핑, 감칠맛이 일품인 부대찌개는 김치찌개, 된장찌개 못지 않은 인기 메뉴이다. ⓒ 셔터스톡 특색 있는 부대찌개 노포 한국에서 부대찌개 명가는 어디일까. 부대찌개 식당은 동네마다 3~4개 이상 있을 정도로 많다. 프랜차이즈 부대찌개 식당도 전국에 퍼져있고 편의점에만 가도 시판 부대찌개 제품이 있다. 하지만 탄생 역사를 새기며 먹을 만한 곳은 역시 노포다. 더구나 부대찌개는 지역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 ‘OOO파’ 식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선 ‘의정부파’부터 살펴보자. 이 파의 수장은 3대째 맛을 이어오고 있는 오뎅식당이다. 양념이 이미 진하게 배여 있는 볶음 요리에서 출발한 찌개다. 달짝지근한 맛을 내는 베이크드 빈스가 들어가지 않는 게 특징이다. 이런 이유로 담백한 맛이 장점으로 꼽힌다. 의정부 부대찌개에 견줄만한 상대는 ‘송탄파’다. 그런데 현재 ‘송탄’은 행정구역상 없는 지역이다. 1995년 평택시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송탄식 부대찌개의 가장 큰 특징은 육수를 사골로 우린다는 점이다. 사골 육수라서 전체적으로 맛이 진하고 걸쭉하다. 치즈도 올라간다. 소고기 다짐육과 대파 등 고기와 채소가 한데 어우러져 풍미를 그윽하게 한다. ‘최네집 부대찌개’와 ‘김네집’, ‘황소집’, ‘땡집’ 등이 이 지역 부대찌개 노포로 알려져 있다. ‘최네집 부대찌개’는 1969년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친구들이 당시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던 주인장에게 권유해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가네’는 주문 시 이 가게만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소시지와 햄 추가는 첫 번째 주문에서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이미 졸아든 육수에 추가한 소시지와 햄이 짠맛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라면을 넣는 시간도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반쯤 끓었을 때 넣어 먹어야 면의 익힘과 맛이 가장 좋다고 한다. ‘황소집’도 한우 사골로 육수를 우린다. 다른 송탄파 부대찌개에 견줘 덜 맵다는 평이다. ‘파주파’는 부대찌개 양대 산맥인 ‘의정부파’와 ‘송탄파’에 견줘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채소가 다른 지역 부대찌개에 비해 많이 들어가 팬층을 확보했다. 쑥갓이 푸짐하게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사골 육수가 아니라서 국물이 상대적으로 담백한 편이다. ‘원조 삼거리부대찌개’가 이 지역 대표 노포다. 5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1990년대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정미식당 부대찌개’도 이 지역 부대찌개 강자다. ‘군산파’는 소고기로 육수를 내는 게 특징이다. 마치 평양냉면집처럼 얇게 썬 소고기가 올라간다. 1984년 문 연 ‘비행장정문부대찌개’가 이 지역 부대찌개 노포다. 독특하게 햄버거도 판다. 부대찌개와 햄버거를 함께 먹는 여행자가 많다. 서울은 부대찌개 강자가 많은데, 그중에서 용산 이태원에 있는 ‘바다식당’을 으뜸으로 친다. 이곳은 1970년대부터 영업해온 곳으로, 메뉴판에 부대찌개 대신 ‘존슨탕’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부대찌개는 한국인의 창의력이 반영된 한식이다. 시대의 참혹한 현실에 조응해 탄생한 부대찌개. 사람들은 여전히 이 얼큰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으로 과거 역사의 상처를, 오늘날 고단한 삶을 위로받고 있다. 박미향(Park Mee-hyang, 朴美香) 음식 저널리스트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임영웅과 영웅시대

Arts & Culture 2024 WINTER

임영웅과 영웅시대 임영웅(林英雄 Lim Young-woong)의 서사는 단순한 성공의 이야기를 넘어섰다. 그의 노래는 음률을 넘어 대중의 삶에 위로와 용기를 불어넣으며, 팬덤은 그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퍼뜨리는 등불이 되어주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따뜻한 공동체는 우리에게 진정한 영웅이 무엇인지 새삼 일깨운다. 임영웅의 팬은 대부분 중장년 층이다. 이들은 팬덤 활동을 통해 공동체를 만들어가며, 봉사와 기부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한다. ⓒ 물고기뮤직, CJ ENM 일본에서 새롭게 형성된 대중음악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형성된 한국의 ‘트로트’는 임(사모하는 사람)과 고향을 잃은 아픔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 당대인의 큰 호응을 얻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트로트가 한국 대중음악의 한 장르이면서 한국 전통 창법과 일본, 유럽,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을 결합한 장르로 소개되었다. 부침을 겪으면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은 트로트는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대중음악 장르로 자리하고 있다. 영웅의 탄생 요즘 국내 트로트의 대세는 단연코 임영웅이다. 그는 2016년 디지털 싱글 < 미워요 >로 데뷔한 그는 2017년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 아침마당 >의 ‘도전 꿈의 무대’에서 5연승을 하며 이름을 알리더니, 2020년 TV조선의 트로트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본격적인 전성기의 문을 열었다. 이후 이듬해 발매한 <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My Starry Love, 我如同星光般的爱) >가 MBC 음악 프로그램 < 쇼! 음악중심(Show! Music Core, Show! 音乐中心) >에서 1위를 차지함으로써 독보적인 인기를 입증했다. 트로트 곡이 음악 프로그램에서 정상에 오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한국 최대 음원 플랫폼인 멜론에서 누적 스트리밍 100억 회를 달성했는데, 이는 BTS에 이어 두 번째이고, 솔로 가수로는 최초다. 그의 공연 실황을 담은 영화 <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 >은 지난 2024년 8월 28일 개봉한 이후 357,858명의 관객수를 기록했다. 창간 20주년을 맞이한 스타뉴스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갤럽과 함께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그는 ‘21세기 가장 사랑받은 트로트 가수’ 1위에 올랐다. 막강한 팬덤을 거느리며 이른바 ‘임영웅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여타 트로트 가수들과 차별화된다. 콘서트 공연 실황을 영화로 담은 < 임영웅 |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 > 포스터 ⓒ 물고기뮤직, CJ ENM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국민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할 당시 임영웅의 감미롭고도 부드러운 노래는 불안한 많은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 내일은 미스터트롯 > 방송 당시 실시간 국민 투표 7,731,781표에서 전체 득표수의 25%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이루어낸 성과이니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때의 유행인가 했는데 그 인기가 벌써 몇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데다 오히려 날로 높아가니 일시적인 신드롬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영웅의 일대기를 닮은 삶 임영웅의 출현은 이름 그대로 영웅의 탄생이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그의 개인 서사는 많은 사람에게 연민과 공감의 감정을 불러왔다. 임영웅의 서사는 영웅의 일대기 구조와도 닮아있다. 영웅의 일대기를 비범한 탄생, 고난과 성장, 조력자의 도움, 위기 극복 후 승리자가 되는 것으로 볼 때,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임영웅의 개인 서사를 설명하는 데 이러한 영웅의 일대기가 유효하다. 모든 영웅의 서사에서 나타나는 고난과 역경을 임영웅의 성장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일차적 고난은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임영웅의 나이 5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임영웅의 가족은 큰 시련을 겪었다. 경연 당시 임영웅은 아버지가 잘 불렀다는 배호(裵湖 Bae Ho)의 1969년 리메이크곡 로 대중의 큰 공감을 받았는데, 노래에 개인적인 서사가 더해져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더해 그는 긴 무명 시절이라는 고난을 겪었다. 가요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음식점 서빙부터 공장, 마트, 편의점 등에서 일하며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는데도 한 달 수입이 30만 원이었고, 데뷔 이후에도 겨울에 군고구마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음악을 포기하지 않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고난은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었는데, 발라드에서 트로트로 주 장르를 바꾸고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은 그에겐 모험이면서 동시에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의 거라는 말을 증명하듯, 그는 오디션을 통해 실력은 물론이고 성실함과 겸손함까지 보여주며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인 고전적 영웅과 달리 현대의 영웅은 꾸준한 노력과 인내를 통해 성공을 이룬다. 오디션이라는 경쟁적 시스템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임영웅은 노력과 열정으로 성공을 이루어낸 현대의 영웅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게 있다. 바로 임영웅이 영웅으로 우뚝 서는 데 도움을 준 조력자다. 그가 영웅이 될 수 있던 건 조력자 덕분인데, 그 조력자가 바로 임영웅의 팬이라 할 수 있다. 중장년층의 버팀목이 되다 현재 그의 공식적인 팬카페 ‘영웅시대’의 회원 수는 20만 명을 넘었다. 임영웅의 팬은 아이돌의 팬 못지않게 충성도가 높다. 임영웅 팬의 특징은 여타 트로트 가수들의 팬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전 세대에 걸쳐 다양한 연령대가 고루 분포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역시 주축은 50대와 60대의 중장년층 여성들이다. 중장년층의 여성들은 중년 이후에 찾아오는 갱년기나 자녀가 독립하여 집을 떠난 후 양육자가 느끼는 슬픔이나 외로움을 뜻하는 ‘빈 둥지 증후군’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임영웅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텅 빈 가슴에 어느 날 들어온 임영웅은 그들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자 버팀목이 되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실제로 임영웅의 팬 중 많은 이들이 소위 ‘팬질’을 시작하면서 우울증과 불면증이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아무 의미와 즐거움을 찾을 수 없던 그들은 팬 활동을 하며 존재 이유를 찾고 자신처럼 고립된 여성들과 연대하며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고립에서 연대로, 소외에서 공감으로 나아가며 ‘다시’ 살기를 시작한 셈이다. 중장년층 여성들의 정신 건강을 책임지고 모든 가정의 화목과 평화에 이바지하였으니, 그의 업적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하다. 2024년 5월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콘서트 현장. 이 날 콘서트에는 그의 팬인 ‘영웅시대’ 약 10만 명이 함께 했다. ⓒ 물고기뮤직, CJ ENM 물론 이는 단지 임영웅의 팬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다른 가수의 공연 현장에서 종종 만나는 중장년층의 여성들은 자신의 스타를 위해 연계하고 연대한다. 그런데 임영웅의 팬이 여타 팬들과 다른 점은 일단 그 규모 면에서 우리나라 1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다른 가수가 아닌 임영웅을 선택하였을까? 임영웅의 개인적인 서사가 지닌 힘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 더해 그가 보여주는 노래와 태도가 팬들의 공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기존 트로트와 비교할 때 그는 비장하거나 비극적인 걸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몸짓이나 과잉된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창법에서 그는 담담과 덤덤 사이를 오가며 말하듯이 노래한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대중에게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2020)나 (2021) 같은 노래에는 남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으며 허세를 부리는 남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노래, 창법, 태도 등에서 ‘부드러운 남성성’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주효하였다. 또한 임영웅의 팬은 기부와 봉사 활동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기부의 형태도 다양하여 청소년 자립 지원 기부, 장애인 가정에 기부, 소아암 환아를 위한 기부 선행을 이어가며 팬덤의 선한 영향력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임영웅의 인성과 실력,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팬들이 만드는 수많은 미담은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고, 그래서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결국 임영웅이란 이름은 한 개인의 성공을 넘어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희망이 되어 가고 있다.

세대를 거쳐 이어온 투쟁

Arts & Culture 2024 WINTER

세대를 거쳐 이어온 투쟁 『 철도원 삼대 』 황석영 작, 김소라/배영재 번역, 486쪽, 16.99 파운드, 스크라이브 퍼블리케이션즈(2023) 세대를 거쳐 이어온 투쟁 『철도원 삼대』는 일제강점기의 철도처럼 한국 근대사를 꿰뚫고 있다. ‘기차’하면 떠오르는 낭만적인 감성과 달리, 철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억은 쓰라린 비극으로 가득하다. 철도는 많은 것을 상징한다. 멈출 수 없는 근대 사회의 힘, 불과 철을 동력으로 삼아 밝은 미래로 질주하는 모습, 사람과 장소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연결성의 시대 등이다. 하지만, 소설 속 한 인물의 표현처럼, 한국의 철도는 “조선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맹글어진”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철도 부지를 만드느라 집에서 쫓겨나야 했고, 선로 작업에 동원되어 노동 착취를 당했다. 영문본 제목(『Mater 2–10』)은 당시 사용된 전설적인 기관차의 모델명이다. 소설은 민족 분단이 상징이 된 기관차를 제목으로 삼음으로써, 또 다른 비극의 단면을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이진오가 공장 폐업에 항의하며 농성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물리적 세계는 우뚝 솟은 공장 굴뚝 꼭대기로 한정되어 있지만, 자신의 기억, 그리고 할머니와 친척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회상하며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이진오의 가족은 한반도 철도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증조부 이백만은 어릴 적에 기차를 보고 첫 눈에 반해, 아들의 이름을 각각 일철(한쇠), 이철(두쇠)로 지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회와 착취라는 철도의 양면성을 상징하듯 서로 엇갈린 행보를 보인다. 형 일철은 철도 종사원이 되어 기관수 자리까지 올라, 경제적으로는 여유롭지만 일제의 억압에 시달리며 그들의 입맛대로 맞춰야 하는 삶을 살게 된다. 반면, 동생 이철은 공산당원을 만나 노동운동가가 되어, 끊임없이 경찰에 쫓기는 신세임에도 정직한 양심을 갖고 살아간다. 결말이 명쾌하게 정리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이진오가 사측에 맞서 농성을 벌이는 모습은 식민지 시대와 해방 후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국내 노동자들이 이어간 투쟁을 상기시킨다.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이래 투쟁의 역사는 계속되어 왔다. 이진오는 결국 자신도 무대에서 하나의 배역을 맡은 배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하기로 결심한다. 『철도원 삼대』는 과거를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발견해낸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한 가지 언급할 것이 있다. 문학 번역은 매끄럽고 튀지 않아야 (즉, 순화 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대표적이지만, 이 작품의 번역자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지워버리지 않기 위해 친족 호칭과 지위 등 원문의 특정 요소들을 그대로 살렸다. 결과적으로는 독자에게 너무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한국적인 용어의 사용으로 훨씬 더 풍부한 내러티브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작, 안선재/김지형 번역, 278쪽, 28달러, 하와이대출판부(2024) 전 세계의 노동자들을 위한 목소리 1984년 27세의 한 공장 노동자가 박노해라는 필명으로 시집을 출간했다(‘노해’는 문자 그대로 ‘노동자의 해방’을 뜻한다). 군사정권의 금서 조치와 저자를 밝히기 위한 경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100만 부 가까이 판매되었다. 『노동의 새벽』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전에 발표된 매우 의미 있는 작품으로, 40년이 지나서 발표된 영문판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울림을 준다. 박노해의 시는 노동자의 글 답게 담백하고 소박하다. 화려한 기교 없이, 평범한 노동자의 담담한 언어가 시인의 감정과 경험을 빛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권력자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고, 빈부 격차의 문제를 고발하며, 평화로운 삶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갖고,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 박노해 시인의 작품에 독자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대한민국 노동자들을 위한 밝은 새벽을 꿈꾸고 있다. 국내 독자들이 영문본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원문 전체가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에 실린 두 편의 글은 박노해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설명을 제공한다. 지금도 곳곳에서 투쟁하고 있는 억압받는 이들에게, 박노해 시인의 이번 영문본 작품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힘이 되어 주기를 기대한다. 한국의 문화 및 자연 유산을 만나다 국가유산진흥원 https://www.kh.or.kr/visit/en 한국의 문화 및 자연 유산을 만나다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은 한국의 유•무형 자연, 문화유산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코스를 소개한다. 홈페이지를 통해 북쪽의 강원도부터 남쪽의 제주도까지 전국의 75개 국가유산을 체험할 수 있는 10가지 방문 코스를 만날 수 있다. 선사시대, 민속 음악, 사찰, 유교 문화 등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방문 코스를 통해 일반적인 관광지를 넘어선 새로운 경험을 해보길 바란다. 홈페이지에서는 운영 시간, 입장료, 상세 길 안내 등 75개 국가유산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며, 가이드북과 지도도 다운로드 할 수 있다. 외국인 방문객은 각 코스 체험을 기록할 수 있는 ‘여권(스탬프북)’을 인천공항 여행자 센터에서 신청해 캠페인에 참여할 수 있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삶의 질을 위한 치밀한 건축 언어, 건축가 민성진

Arts & Culture 2024 WINTER

삶의 질을 위한 치밀한 건축 언어, 건축가 민성진 SKM 건축사사무소(SKM Architects) 대표 민성진(Ken Sungjin Min)의 머릿속은 진행 중인프로젝트의 구상으로 늘 가득 차 있다. 그는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전체를 복기하는 것처럼 프로젝트의 작은 부분까지도 되새기고 상상한다. 그 긴 생각의 종착지는 효율적 기능과 감각적 아름다움의 균형이다. 아난티 클럽 서울(Ananti Club Seoul)은 주변의 울창한 숲과 자연환경을 고려하는 동시에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이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건축물의 대부분을 대지 안에 삽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고저 차이가 있는 경사진 지형을 활용해 공간을 5개의 레벨로 배치했다. 이를 통해 건물이 자연의 일부로서 대지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을 살릴 수 있었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송재영(Song Jaeyoung) 민성진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쓴다. 사무실에 쌓여가는 드로잉과 모형들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가 만들어 내는 크리에이티브는 근력처럼 단련을 통해 만들어진다. “나는 프로그램, 동선, 평면 등이 어느 수준의 완성도를 갖기 전에 물리적 형태를 머릿속에 미리 그리려 하지 않는다. 확정된 형태나 이미지에 프로그램이나 동선을 끼워 맞추기를 거부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에서 무수한 모형 작업과 디지털 기반의 3D 스터디를 통해 최적의 상태를 찾아 나간다.” 부산에서 태어난 민성진은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건축학을, 하버드대학교 건축대학원에서 도시디자인을 공부했다. 미국 손학식건축연구소(Hak Sik Son Architect)에서 근무했으며, 1995년 서울에서 SKM 건축사사무소를 설립했다. SKM 건축사무소 민성진 대표는 대담하고 파격적인 도전과 실험으로 유명하다. 이는 그가 존재 이유가 분명한 건축물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주거, 상업, 레저, 문화 등 저마다 용도가 다른 건축물들을 디자인하면서 그가 놓치지 않는 단 하나의 목표는 사람을 위해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 스튜디오 켄(Studio Kenn) 기능과 감각의 레이어링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Clayarch Gimhae Museum)에서는 2022년 12월부터 2023년 7월까지 < 건축가 민성진, 기능과 감각의 레이어링 >이라는 기획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에서 민성진은 미래 농촌 주택에 대한 제안을 담은 파빌리온 ‘메타 팜 유닛(Meta-Farm Units)’을 비롯해 대표작 15점의 아카이브를 선보였다. 농막을 연상시키는 메타 팜 유닛은 간결하게 구성된 온실 속 주거 공간이다. 이 작업은 공간 미학과 디자인의 문제에서 벗어나 농가 주택을 스마트팜이라는 생산 방식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준다. 중앙에 데크를 두고 각각 침실과 주방으로 나뉜 공간은 자연스레 외부로 연결되며, 필요에 따라 유닛을 조합해 필요한 규모로 확장할 수 있다. 수십 개의 스마트팜과 농촌 주택들이 모이고 커뮤니티 공간이 더해진다면 마을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린다. 한편 대표작들은 건축 모형과 영상, 사진, 도면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소개되었다. 교외와 도심을 넘나들며 작업한 복합 휴양 시설 아난티(서울, 남해, 부산) 시리즈, 세이지우드 골프앤리조트(Sagewood Golf & Resort)를 비롯해 S 갤러리, 세스코 아카데미, 준오 아카데미(Juno Academy), 숭실대 형남공학관(Soongsil University School of Engineering) 등은 ‘기능과 감각의 레이어링’이라는 그만의 작업 방식을 잘 보여 주는 프로젝트들이다. “나는 기능과 감각의 상호작용에 관심이 많다. 미술관, 호텔, 사옥 등 건축물의 유형과 용도를 막론하고 하나의 목적을 갖고 설계를 시작한다. 그것은 내외부 프로그램의 완벽한 구현이다. 하지만 작업을 진행하다 보면 수많은 도전이 더해지며 결정해야 할 과제가 늘어난다. 그때마다 기능과 감각이 계속 레이어링되며 하나의 결정이 이루어지고, 다음 결정으로 이어진다. 이런 끊임없는 두 요소의 중첩된 관계는 좋은 건축물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하며, 여기에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직관과 장인 정신을 통해 디자인이 완성된다.” 세이지우드 골프 앤 리조트(Sagewood Golf & Resort)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700m 고지에 자리한다. 로비, 식당, 수영장, 객실 등은 글루램 목재 구조체를 사용하고, 질감이 자연스러운 재료로 내외부를 마감하여 숲속에 있는 건축물이라는 느낌을 강조했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남궁선(Namgoong Sun) 도시-만들기 그는 가속화되고 있는 도시화 속에서 자신의 건축가적 역할을 찾고 있다. 근현대 건축사에서 이른바 명작이라 불리는 건축물들은 빛나는 조형 언어로 인정받았지만, 오늘날의 도시에서는 복합적 용도의 설계와 프로그래밍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충돌할 법한 이질적인 기능을 한 곳에 공존시키고, 다양한 층위의 사용자가 만들어 내는 공간들이 상생 효과를 낼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며,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공간적 실체로 재정립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이런 복합적인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얻은 창의적 대안이 자신의 건축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가 조형성에 천착하는 아틀리에 건축가와는 다른 길을 가는 이유다. “나는 오브제 같은 건축을 지양합니다. 건물은 조각품이 아니에요. 건축은 도시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고, 사람들이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장소입니다. 처음부터 형태를 정해 놓는다면 프로그램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디자인이 되겠죠. 설계를 하면서 주어진 대지, 빛, 바람 등 주변 환경을 당연히 고려해야죠. 그런데 오늘날 더 중요한 것은 공공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건축입니다. 사용자와 주변 지역에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혹시 정형화되어 있는 것들이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고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존 홍(John Hong)은 민성진의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 담론에 없는 ‘도시-만들기’라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도시-만들기는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차용하여 원래의 스케일을 의식하지 않고 일원화된 디자인 언어로 치환하는 시도다. 도시에 다양성과 교류에 기여하는 거리가 있다면, 건축에는 유사한 역할을 하는 복도나 길이 존재한다. 이는 동선, 오픈 스페이스, 물성, 이미지,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성까지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만들기는 정적인 명사가 아닌 동적인 동사로 활용되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다층적 스펙트럼을 지닌 공적 공간의 가능성에 초점을 둔다. 도시-만들기는 개인과 집단의 관계성을 공론화하고, 프로그램을 연결하며,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연의 역할을 고양하는 개념이다.” 아난티 남해 골프 앤 스파 리조트(Ananti Namhae Golf & Spa Resort)는 국내 리조트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평가받는 건물이다. 아파트처럼 짓던 그동안의 관례를 깨고 전체 층수를 3층 이하로 낮게 설계해 자연과 어우러지게 했으며, 티타늄 소재를 이용한 굵직한 유선형의 외형을 도입했다. 사진은 꽃을 모티프로 한 클럽하우스이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송재영(Song Jaeyoung) 도시 복합체로서 건축적 면모는 도심의 작업뿐만 아니라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리조트와 휴양 시설 설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건축이 도시를 만날 때 지니는 공공 프로그램에 대한 전향적 자세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고급 휴양 시설에 새로운 가치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날것 그대로의 자연이 아닌,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계획이 선행되고, 여기에 다양한 성격의 건축물들이 서로를 배려하며 디자인된 결과다. 한 건축평론가는 부산 아난티 코브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아난티 코브는 그것이 자리 잡은 세계에 마찰 없이 순응하면서도 형용과 꾸밈을 우아하게 고집함으로써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무대에 올리고, 그것이 빚진 하늘과 땅과 바다를 드러낸다.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이 됨으로써,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연의 풍경들을 아름답게 빚어냄으로써, 삶의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부산 해안가에 위치한 아난티 코브(Ananti Cove)는 펜트하우스와 호텔로 이루어져 있는 대규모 휴양 시설이다. 건축가는 과감한 공간 전개와 예상치 못한 동선을 설계해, 방문객들이 새로운 자극을 느낄 수 있도록 유도했다. 아난티 제공 사용자와의 교감 그는 건축물의 가능성에 대하여 사용자와 가능한 한 많은 대화를 나눈다. 건축가 개인의 자의식보다 사용자와의 적극적인 교감을 통해 프로그램을 공간으로 조직하고 완성해 가는 것을 선호한다. 사용자의 꿈과 바람을 온전히 담아낼 때 그 건축물의 생명력이 형상화된다고 생각한다. 즉 보편적인 가치를 뒤엎는 새로운 개념의 공간 지각, 행동 패턴, 동선 등의 변화를 유도하고 그것을 통해 사용자의 삶의 질이 향상되도록 형태와 프로그램의 모든 가능성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믿는다. 한창 설계 중인 심문섭미술관의 클라이언트 심문섭(Shim Moon-seup)은 민성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술관 모형을 보고 놀랐다. 매인 매스를 약간 기울였다. 마치 미술관이 운동하는 것처럼 움직임이 느껴졌다. 지난 3년 동안 나는 그와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는 내 작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렇게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냈다. 민성진은 아티스트다. 그는 사고의 폭이 크면서도 작은 디테일에 천착하는 끈기 있는 작가다.” 사용자와의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그는 창의적 방식으로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한다. 주어진 환경과 요청을 기반으로 건축물의 형태를 드러낸다. 아난티 클럽 서울은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면서 각 지형과 레벨이라는 자연적 요소에 사용자가 이용하게 될 프로그램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땅속에 90% 정도의 공간을 묻고 자연을 복원하여 덮는 방법을 택했다. 아난티 클럽 서울은 골프장뿐만 아니라 테니스장, 야외 수영장, 레스토랑 및 카페 등 다양한 레저ㆍ문화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송재영(Song Jaeyoung) 인천에 있는 엠파크 허브 중고차 매매단지는 자동차 전시관이라는 정체성에 초점을 맞췄다. 단지 내 전망용 엘리베이터는 수많은 전시 차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방문객들에게 신뢰와 더불어 편의성을 더해줬다. 전시장 내부는 차양을 고려한 입면 디자인으로 적절한 감도의 자연광이 유입되고, 내외부 마감이 한꺼번에 가능한 패널을 적용해 공간의 요구 조건에 부합하면서도 비용을 절감했다. 세간에서는 민성진의 건축에 대해 “대담하고 단단하며 자유롭다”고 평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건축에 대해 소리 높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나의 개념어로 자신의 건축이 규정되는 것도 피한다. 작업을 끝까지 잘 해내고자 온 마음을 집중할 뿐이다. 건축은 다양한 조건 및 관계자들과의 조율, 그리고 오랜 시간 축적된 감각을 통해 최선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 정답이 없다는 것. 그것이 그의 생각이다. 새벽녘 야외 수영장에서 바라본 부산 빌라쥬 드 아난티(Village de Ananti)의 타워 콘도. 자연 속 휴양지와 대도시의 활기찬 에너지가 공존하는 다중적 성격의 리조트를 구현했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남궁선(Namgoong Sun) 박성태(Park Seong-tae, 朴星泰)큐레이터

아버지와 아들이 부활시킨 전통 명란젓의 맛

Arts & Culture 2024 WINTER

아버지와 아들이 부활시킨 전통 명란젓의 맛 부산의 로컬 기업 덕화푸드(Deokhwa Food)는 전통 방식의 명란젓을 되살려내, 명란 종주국의 위상을 되찾은 것으로 유명해졌다. 2011년 수산식품 분야에서 최초로 명장 칭호를 받은 창업주 장석준(Jang Sug Zuen, 蔣錫晙, 1945~2018) 회장의 뒤를 이어 현재는 아들 장종수(Jang Jong Su, 蔣宗洙) 대표가 2대째 덕화푸드를 이끌고 있다. 덕화푸드의 장종수 대표가 명란젓을 활용한 음식들로 상을 차리고 있는 모습. 그는 기업 부설 연구소 설립과 학문적 연구를 통해 명란의 역사와 가치를 조명하는 한편 현대적 레시피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특히 부친 장석준 회장과 함께 오랫동안 잊힌 전통 명란젓 제법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명태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생선이다. 명태의 알집을 명란이라고 한다. 명란에 소금을 뿌려 삭힌 것이 명란젓인데, 오랜 세월 한식 밥상에 한몫을 해온 전통 음식이다. 잘 삭힌 젓갈은 ‘밥도둑’이라고 했던가? 갓 지은 밥에 참기름으로 양념한 명란젓 한 토막을 올려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명란은 그 자체로도 맛있지만, 소금 역할을 해서 음식의 풍미를 높이기에 요리에도 활용된다. 주로 샌드위치, 파스타, 각종 안주류에 쓰이며 동서양의 경계 없이 맛의 세계를 증폭시킨다. 명란젓은 400여 년 전 조선에서 시작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으로 건너가 발전했다. 전 세계 명란 생산량의 80%를 일본이 소비하기 때문에 일본 음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원조는 한국이다. 명란젓이 일찍이 조선 시대 왕실과 민가에서 두루 즐기던 흔한 반찬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사료에도 나온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 승정원일기(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承政院日記) >는 조선 시대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에서 각종 행정 업무를 기록한 일지인데, 여기에 보면 1652년 강원도 진상품으로 명태란(明太卵)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명란에 대한 세계 최초의 기록이다. 제조법에 대한 최초의 기록물로는, 1820년경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서유구(徐有榘)가 쓴 수산물 도감 < 난호어목지(Nanhoeomokji, 蘭湖魚牧志) >가 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명태 산지인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가 북한에 편입되면서, 이후 무분별한 남획과 수온 상승 등으로 명란은 서서히 우리 밥상에서 사라졌고,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일본식 명란젓이다. 전통 명란의 부활 이 땅에서 사라졌던 조선식 명란젓을 되살려낸 회사가 있다. 명란 전문 기업 덕화푸드는 1993년 부산에서 수산 가공 유통업으로 시작해 2000년도부터는 오로지 명란 한 품목만을 생산해 오고 있다. 창업주 장석준 회장은 1970년대 역수입된 일본식 명란의 제조법을 전수받은 초기 세대의 기술자이다. 그는 우리의 전통 제조법을 접목해 발전시킨 점을 인정받아, 2011년 고용노동부 수산 제조 부문에서 최초의 대한민국 명장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이 부문 유일한 명장이다. 장 명장은 식품 기준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일본에서도 실력을 입증해 일찍부터 일본 수출길을 열었다. 2008년 말부터는 7년간 편의점 브랜드 세븐일레븐으로 유명한 일본 최대 유통 기업 세븐앤아이홀딩스에 PB(자체 브랜드) 제품을 전량 수출했는데, 이는 세븐일레븐 그룹 역사상 명란 PB 제품의 제조를 해외에 의뢰한 첫 사례이다. 덕화푸드가 위치한 부산 감천항의 국제수산물도매시장(Busan International Fish Market)은 수산 물류 및 유통의 중심지로, 전 세계 명란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거래된다. 현재 국내산 명란은 사라졌지만, 러시아 어장에서 오는 배가 이곳을 수출 통로로 사용하는 덕분에 부산이 명란 산지와 같은 효과를 얻고 있다. 러시아산이 70%, 미국산이 30%인 냉동 명태알은 전량 일본과 한국이 수입한다. “최고의 명란젓 비결은 첫 번째가 우수한 품질의 원물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좋은 명란은 선홍빛을 띠고 알이 탱글탱글하죠. 2018년부터 전 세계에 유통되는 최상급 명태 알집은 저희가 전량 수매하고 있습니다. 선사(船社)들이 깜짝 놀랄 정도죠.” 부친에 이어 가업을 잇고 있는 장종수 대표의 말에서 제품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전통 방식의 조선 명란젓은 일반 명란젓에 비해 발효 기간이 더 길고 염도가 높으며 쫀득하다. 깊은 풍미를 내기 위해 품질 좋은 항아리에서 숙성시키는데, 잘 발효된 명란젓에서는 은은한 향이 풍긴다. 숙련된 기술자들 명란젓 제조 과정은 크게 해동, 염지(鹽漬), 숙성 단계로 구분한다. 냉동 상태의 알집은 적정 온도를 유지하도록 설계된 공간에서 해동을 거친 후 일정 농도의 소금을 뿌려 절인다. 원료 상태에 따라 소금과 물의 양을 조절하고 온도를 달리하는 염지 과정에는 숙련된 경험치와 과학적 분석이 필요하다. 소금물에 절인 알집은 숙성 과정을 거쳐 맛을 내는데, 이때 소금 외에 청주를 넣으면 백명란이 되고, 소금과 고춧가루, 마늘, 생강 등으로 조미하면 양념 명란이 된다. 염지와 숙성 과정을 거친 명란은 알의 성숙도, 입자, 색상, 형태 등을 살펴서 등급을 나누고 검품 후 상품화된다. “명란은 잘 삭은 해산물 향이 있어야 합니다. 싱싱한 비린내가 살짝 나면서 알알이 톡톡 터질 때 나는 풍미가 중요하지요. 이 같은 명란 입자는 염지 과정에서 결정됩니다.” 워낙 예민한 명란 특성상 덕화푸드의 깐깐한 위생 공정도 업계에서 인정받는 자랑거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내세우는 것은 숙련된 기술자 중심의 시스템이다. “일부 생산 라인은 기계로 자동화되었지만, 매일 원료에 따라 염지할 배합액을 조절하고, 명란의 등급을 나누는 후반 작업은 숙련된 안목이 아니면 안 됩니다. 20년 이상 숙련된 기술자들이야말로 저희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이죠.” 염지와 숙성 과정을 끝낸 명란은 등급을 나누는 선별 과정을 거쳐 상품화된다. 이 후반 공정은 언뜻 간단해 보이지만, 오랜 경험과 숙련된 안목이 필요하다. 덕화푸드에 10년, 20년 넘게 장기 근속한 기술자들이 많은 이유다. 명장 아버지와 명인 아들 장종수 대표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2006년 부친의 부름을 받고 덕화푸드에 합류했다. “한국환경공단에서 공적자금 운용 업무를 하면서 유학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어요. 평소 힘든 내색 한번 안 하셨던 아버님이 임대에서 벗어나 자가 공장을 세우고는 힘들어 하셨어요. ‘함께 해보자’는 말씀에 바로 내려왔습니다.” 부친이 그에게 주문한 과제는 당시 전적으로 일본 수출에만 의존하던 명란젓의 국내 시장 개척이었다. 그는 먼저 6개월간 일본의 앞선 생산 시스템을 배우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명란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식 명란젓은 소금을 적게 넣고 가쓰오다시와 맛술 등을 넣어 절입니다. 짜지 않은 대신 단맛이 많지요. 요즘 우리가 먹는 명란젓은 이러한 저염식 절임 제조법이 역수입돼 우리 입맛에 맞게 정착한 것입니다. 옛날 맛을 잊지 않은 아버님은 평소 전통 명란젓을 상품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대단하셨습니다.” 2009년 부자는 명란업계 최초로 기업부설연구소를 만들고 맛 개발에 집중했다. 전통 제조법에 대한 지속적 연구는 천연 발효 유산균을 만들어 내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색소나 방부제 없이 우리 입맛에 맞는 다양한 맛을 낼 수 있게 됐다. 2012년 아베노믹스로 인한 엔화 환율 급락으로 관련 수출업체들이 줄도산했을 때 결국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국내 시장을 염두에 둔 준비 덕분이었다. 방대한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거듭된 연구는 마침내 전통 방식의 ‘조선 명란젓’을 되살리는 결실로 이어졌다. “소금, 고춧가루, 마늘만으로 생선알을 약하게 삭히고 발효시키는 과정은 한반도만의 유일한 방식입니다. 우리 전통 방식으로 재배한 고추와 마늘을 써야 이 맛을 낼 수 있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죠.” 장 대표는 전통 명란젓 제조법을 계승해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2022년 해양수산부로부터 대한민국 수산식품 명인으로 지정받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국가 공인 명장과 명인에 지정된 유일한 사례다. “일본식 명란의 염도가 4%라면, 조선 명란은 7% 정도 됩니다. 짠맛이 강하고 질감이 쫀득하죠. 짜지만 건강하게 발효된 전통 식자재는 맛의 깊이가 다릅니다.” 장 명인에게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자 망설임 없이 “세계 최고의 명란젓을 만드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가 지금도 명란 공부에 힘쓰는 이유다.

액션의 재구성

Arts & Culture 2024 WINTER

액션의 재구성 류승완(柳昇完) 감독의 2015년 블록버스터 < 베테랑 >의 후속작 < 베테랑2 >는 비질란테가 사적 제재를 가하는 과정에서 선과 악의 구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칸 영화제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류승완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류승완(Ryoo Seung-wan, 柳昇完)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과 인간 본성을 날카롭게 조명하면서도 대중성을 잃지 않는 연출 스타일을 보여 주는 감독이다. 특히 역동적인 액션 연출과 캐릭터 중심의 강렬한 서사가 돋보이며, 사회적 메시지와 오락성을 조화롭게 결합한다. CJ ENM 제공 류승완 감독은 20년 넘게 한국 영화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액션 영화로 유명한 그는 사회 문제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문제의식을 담아내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흥행 돌풍을 일으킨 < 밀수 >에서는 평화롭던 바닷가 마을에 화학 공장이 들어서면서 생계를 잃게 된 해녀들이 겪는 사건을 다루기도 했다. 올해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형사들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왔다. < 베테랑 2 >는 추석 연휴 직전인 9월 개봉해 15일 만에 6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한편 전작 < 베테랑 >은 국내 박스오피스에서 9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리며, 한국 영화사상 다섯 번째로 높은 수익을 거둔 영화가 되었다. 그 인기는 국내를 넘어서, 2019년에는 유명 배우 살만 칸(Salman Khan) 주연으로 인도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미국 영화감독 마이클 만(Miachel Mann)이 또 다른 리메이크작을 준비 중이며, 많은 이들이 기다리는 < 히트 2 > 가 완성되는 대로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 베테랑 >은 2015년 토론토 국제 영화제(TIFF)를 통해 처음으로 해외에 선보였고, < 베테랑 2 >는 올해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에 초청받아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그동안 칸 영화제에는 다수의 한국 영화가 공식 초청된 바 있다. 김지운(金知雲) 감독의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 한재림(韓在林) 감독의 < 비상선언 >, 나홍진(羅泓軫) 감독의 < 황해 >, 박찬욱(朴贊郁) 감독의 < 아가씨 >, 윤종빈(尹鍾彬) 감독의 < 공작 >,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2019년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봉준호(奉俊昊) 감독의 < 기생충 >이 있다. 류승완 감독은 2005년 권투 영화 < 주먹이 운다 >로 감독주간에 초청받아 칸 영화제에 데뷔했다. 지금은 유명 스타가 된 동생 류승범(柳昇範), 그리고 2004년 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인 박찬욱 감독의 < 올드보이 >로 전 세계 관객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한국 영화의 아이콘 최민식(崔岷植)이 함께 출연한 작품이다. 류승완 감독의 초기작 중 하나인 < 주먹이 운다(Crying Fist) >(2005)는 왕년의 복싱 스타이자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였던 주인공이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세련된 테크닉과 액션을 배제하고, 인물들의 내면과 감정에 중점을 둔 영화이다. 용필름(Yong Film) 제공 전편 < 베테랑 >에서는 황정민(黃晸玟)이 거침없고 화끈한 형사 역을 맡아, 부패하고 사디스트적인 재벌 3세를 잡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아인(劉亞仁)이 재벌 3세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유머와 강렬한 액션, 사회적 불평등과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 베테랑 2 >에서는 오달수(吳達秀), 장윤주(張允柱) 등 전편에서 감칠맛 나는 연기를 펼쳤던 배우들과 황정민이 다시 호흡을 맞췄다. 여기에 정해인(丁海寅)이 강력 범죄 수사대에 새로운 멤버로 합류한다. SNS에서 범인의 정체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전 국민을 혼란으로 몰아넣는 가운데, 주인공 형사와 그의 팀원들은 수사 방법과 논리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류승완의 최신작 의 한 장면. 2024년 9월 개봉한 이 영화는 전국적으로 750만 명이 넘는 누적 관객수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CJ ENM 제공 2005년과 비교해 이번 칸 영화제 경험은 어땠는가? 19년 전에는 뤼미에르 대극장을 멀리서 바라보는 아웃사이더였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때는 훨씬 더 어렸고, 모든 것이 신선하고 새롭고 재미있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나도 언젠가는 여기에서 내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인사이더가 되어, 내 영화가 상영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또 다른 의미 있는 변화는 한국 영화에 대한 인식이다. 19년 전만 해도 한국 영화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객석이 꽉 차지도 않았고, 인터뷰 요청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액션 영화에 매료된 계기는 무엇인가? 학교에 다니기 전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나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이 고향인데, 대도시는 아니지만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부터 홍콩 영화 등 아시아 작품까지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었다. 특히 그 시절 나는 홍콩 무술 영화와 멋진 배우들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액션 배우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뼛속까지 영향을 주었고, 동작과 제스처를 포착하는 예술로서의 영화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액션에 대한 나의 접근법도 진화했다. 지금의 나에게 ‘액션’은 단순한 신체 동작이나 바디 랭귀지가 아니다. 캐릭터의 진화, 심리, 사건의 전개, 스토리에 따라 바뀌는 관객의 생각과 기분까지 담고 있는, 그 이상의 것이다.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 (2006)는 무술 감독이자 액션 배우인 정두홍(Jung Doo-hong, 鄭斗洪)과 함께 감독 자신이 주연으로 직접 출연한 영화다. 와이어에 의존하지 않은 맨몸 액션의 효과가 극대화된 작품이다. ⓒ 씨네21 < 베테랑 >의 성공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9년이 지나 < 베테랑 >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든 이유가 궁금하다. 1편의 성공은 정말 기대 이상이었고, 솔직히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처음에는 내 스타일에 충실한 장르 영화를 만들어 국내 관객들에게 탈출구 같은 재미있는 영화를 선보이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영화 속 사건과 유사한 사회적 논란이 불거지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 베테랑 >을 촬영하면서 인물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사실 1편의 성공 때문에 같은 소재로 바로 뛰어들기가 쉽지 않았다. 1편에서는 선과 악에 대한 묘사가 너무 도식화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명료한 구분이 성공 요인이었을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피상적으로만 다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의 정의 실현 방식은 복잡한 현실의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현실에서는 선과 악의 경계가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 < 베테랑 >의 흥행 이후 그 뒤를 잇는 다양한 국내 영화와 드라마가 나오고 성공을 거두면서, 나는 전작을 답습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간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중에는 2021년 아카데미 영화상에 한국 영화 출품작으로 선정된 정치 스릴러 < 모가디슈 >도 있었다. 9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새로운 방식으로 < 베테랑 >을 다시 선보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3년 개봉작 < 베를린(The Berlin File) >은 국제적인 음모에 휘말려 서로를 쫓은 이들의 추격전을 그린 영화다. 완벽한 캐스팅과 창의적 액션, 밀도 높은 스토리 등으로 한국 액션 영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류승완의 동생이기도 한 배우 류승범(Ryoo Seung-bum, 柳昇範)은 류 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린다. ⓒ 씨네21 속편에서 논란이 된 ‘박선우’는 어떤 인물인가? 의도적으로 캐릭터와 스토리에 논란의 여지를 두었다. 어떤 반응이든 관객들이 그들 자신의 반응을 보여주길 바랐다. 관객들이 어떤 논란에 대해 개인적인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은 관객이 그 논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의도한 바가 바로 그것이다. 홍콩의 대표적인 영화 감독 조니 토에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몰입감 있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굵고 짧게 대답했다. “주인공이 실수를 해야 한다”는 아주 마음에 드는 답변이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사적 제재를 가하는 사람은 결국 벌을 받는다. 류승완의 영화에서는 이것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닌 듯하다. 흥미로운 지적이다. 내 영화에서 실제 주인공은 박선우가 아닌 서도철 형사다. 서도철이라는 인물의 장점이자 박선우와의 차이점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있더라도 자신의 임무에는 충실하다는 점이다. 범죄자라도 일단 목숨은 살리고 보는 인물이고, 그것이 서도철에게는 진정한 정의다. 박선우를 전통적인 빌런으로 묘사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정의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개념, 그리고 그사이의 갈등을 탐색하고자 했을 뿐이다. 정의(正義)는 관점과 역사적 맥락, 적용 방식에 따라 다르게 정의(定義)된다. 따라서 절대적인 정의나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본다. 감독이 관객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강요하는 것보다는 관객 스스로 자신의 가치관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2편의 스토리는 어떻게 달라졌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옛날이 더 편하고 쉬웠고 현재가 제일 힘들다는 인식이 항상 있다. 자신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나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수월하고 다른 곳이 더 편안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결국 누구나 똑같다.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발전의 속도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 베테랑 > 1편이 개인보다는 사회와 시스템 전체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2편은 사회 전체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개인의 이야기를 주로 다뤘다. 예를 들어, 서도철의 아내가 베트남 여성과 아이들을 돕는 장면이 있다. 공무원이 아닌 일반인의 모습이다. 아무리 절망적인 사회에서도 한 사람만이라도 깨어 있고 자각하고 있다면, 희망의 씨앗은 이미 거기에 있다. 인류를 구하겠다며 말만 거창하게 늘어놓는 정치인보다는 가족, 친구, 동료를 돌보며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더 큰 희망이 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여론의 영향력이 바뀌었다고 보는가? 한국 사회에는 연대감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한국만의 독특한 지리적 여건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육로를 통해 다른 나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반면,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다소 단절된 느낌이다. 한국인이 해외로 여행하려면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하고, 육로로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게다가 남과 북이 분단되어 있어, 섬나라나 다름없이 고립되어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함께 뭉쳐야 했기 때문에 강한 연대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상황이 다르다. 인터넷과 SNS 덕분에 기성 세대에 비해 전 세계와 훨씬 더 많이 연결되어 있다. 해외에 있는 사람들과 쉽고 빠르게 소통할 수 있어 뛰어난 글로벌 감각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 세대에서는 공동체 의식이 강했지만, 이제는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유대감은 여전히 강한 편이지만, 젊은 세대들의 글로벌 커뮤니티 참여가 확대되면서 변화하고 있다. < 베테랑 3 > 제작 가능성은? 현재 첩보 액션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 국경 근처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파헤치는 남북한 비밀 요원들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 베테랑 3 >에 대해서는 배우들과 논의 중이다. < 베테랑 2 >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에 따라 후속편 제작을 검토할 예정이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 밀수(Smugglers) >(2023)는 밀수의 세계에 빠진 해녀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영화다. 몰입감 높은 연출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시대 배경을 잘 살린 미술이 호평을 이끌어 냈다.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

전설로 남은 이름 석 자

Arts & Culture 2024 WINTER

전설로 남은 이름 석 자 대학 시절 음악 활동을 시작한 김민기(Kim Min-ki, 金敏基)는 온 국민이 즐겨 부른 명곡들을 만들었고, 소극장 학전(Hakchon Theatre, 學田)을 개관해 기라성 같은 배우와 뮤지션들을 배출했다. 그가 연출한 록 뮤지컬 < 지하철 1호선(Line 1) >은 대한민국 공연 역사를 다시 쓴 작품으로 기록됐다. 2024년 여름, 유명을 달리한 김민기는 국내 음악 및 공연예술계에서 전설이 되었다. 뮤지컬 < 지하철 1호선 >의 2021년 공연 사진이다. 독일 그립스 극단(GRIPS Theater)의 동명 원작을 김민기가 각색하여 연출했고, 영화 < 기생충 >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 오징어 게임 >의 음악을 담당한 정재일(鄭在日)이 편곡했다. 이 작품은 한국 뮤지컬계의 교과서로 불리며, 1990년대 소극장 공연의 전성기를 열었다. 올해 7월 21일 김민기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수식어는 ‘한국의 밥 딜런’이다. 그는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특별한 음색으로 뭇사람의 귀를 파고들고, 시적인 가사로 가슴을 울린 싱어송라이터다. 그가 가수로 첫발을 뗀 1970년대는 군사독재 정권이 경제 개발을 국가의 제1 목표로 삼았던 시기이다. 청년들은 “나라의 역군이 돼라”, “열심히 공부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라”는 주문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야 했다. 그래서 당시 청년들에게 노래나 음악은 사치품처럼 느껴졌다. 그때 엄혹한 시대의 사슬을 뚫고 청년 김민기, 한대수(Hahn Dae Soo, 韓大洙), 양병집(Yang Byung Jip, 梁炳集) 등이 나타났다. 그들이 직접 쓴 노랫말에는 답답한 사회에 대한 직간접적 비판과 토로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게, 그러나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아로새겨 있었다. 그것은 바야흐로 대한민국 1세대 모던 포크 싱어송라이터 시대의 개막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김민기는 남달랐다. 늘 곁에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자연이나 동식물에서 그는 깊은 은유의 우물을 봤다. 그 심연으로 거침없이 노래의 두레박을 던졌다. 길어 올린 것은 그대로 사회를 투영하는 시가 되고 음악이 됐다. 그의 곡들은 가사와 멜로디가 어렵지 않고 수수하다. 하지만 듣는 이나 부르는 이 모두를 먹먹한 감동에 젖게 한다. 김민기(Kim Min-ki, 金敏基)는 한 시대를 이끈 가수이자 탁월한 기량의 예술가로 찬사받는 인물이다. 1970년대 그가 만든 명곡들은 지금도 널리 애창된다. 연출가로 전향한 후에는 소극장 공연 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헌신했다. ⓒ 학전(HAKCHON) 저항의 상징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을 만든 1987년 6.10 민주 항쟁(June Democratic Struggle)은 대학생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밝혀지면서 촉발되었다. 분노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김민기의 대표곡 중 하나인 < 아침 이슬(Morning Dew) >(1971)을 한목소리로 불렀다. 6월 항쟁은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고, 한국은 진정한 민주화의 역사적인 첫걸음을 떼게 되었다. 이로써 이 노래는 한국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 잡았다. 1951년에 태어난 김민기는 원래 촉망받는 미술학도였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미술에 몰두했고, 196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친구와 즉흥 듀엣을 이뤄 공연한 것이 학내에서 바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에 김민기는 붓을 놓고 작곡가,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1971년 김민기는 유일한 정규 앨범이라고 할 수 있는 1집 < 김민기 >를 세상에 낸다. < 아침 이슬 >, < 친구 > 등 노래 10곡이 담긴 이 앨범은 대한민국의 현대적 싱어송라이터 시대를 연 기념비적 음반으로 꼽힌다. 그러나 1970년대에 그의 곡들이 지속적으로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불림에 따라 그는 당국에 소환돼 조사를 받고, 1집 음반은 판매 금지 조치를 받으며 거의 모든 곡들이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만다. 상심한 김민기는 학교와 무대를 떠나 농촌으로, 탄광으로, 공장으로 터전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 그의 또 다른 명곡 < 상록수(Evergreen) >(1979)가 태어났다. 자신이 일하던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합동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들을 위한 축가로 만든 것이 이 노래였다.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로 마무리되는 이 노래 또한 집회 때마다 수도 없이 불렸다. 이 곡은 훗날 다시 한번 전 국민의 가슴에 뜨거운 눈물의 비를 내리게 한다. 1998년, 한국 국민들이 아시아 금융 위기로 경제적 고난에 처했을 때 한 공익 광고에서 프로 골퍼 박세리가 양말을 벗어던지고 물에 들어가 스윙하는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것이다. 노래가 주는 메시지와 멜로디는 세월을 뛰어넘어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이들에게 다시 한번 불굴의 의지를 상기시켰다. 무대 뒤의 삶 김민기는 평생 노래를 만들고 불러도 좋을 사람이었지만, 무대에 제2의 삶을 던지기로 한다. 그가 지향한 곳은 정확히 말하면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뒤였다. 1978년, 그는 당국의 눈을 피해 노동자와 음악가들을 모았다. 그렇게 비밀리에 제작한 음악극 < 공장의 불빛(Light of a Factory) > 음반은 해적판 카세트테이프 형태로 유통되었다. 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탄압과 노동조합 결성, 투쟁으로 긴박하게 이어지는 스토리를 담았다. 포크, 재즈, 로큰롤, 국악 등 다양한 장르가 고루 사용되었고, 악기도 서양 악기와 국악기가 두루 쓰였다. 이 음악극의 짜임새를 보면, 영국 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명반 < The Wall >보다도 앞선 ‘콘셉트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김민기는 1991년 서울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개관한다. 극장 운영자이자 공연 연출가로의 완벽한 변신이었다. 1990년대 홍대 앞 라이브 클럽에서 한국 인디 음악 1세대가 태동하기 전까지 학전은 라이브 공연의 중심지였다. 수많은 명곡을 남기고 요절한 싱어송라이터 김광석은 이곳에서 1,000회 공연의 신화를 썼다. <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1991)도 학전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특별히 정해진 형식 없이 초대 손님과 진솔한 대화를 이어가며 음악도 감상했던 이 콘서트는 인기에 힘입어 KBS TV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되기에 이른다. 이후 < 이소라의 프로포즈 >, < 윤도현의 러브레터 >, < 유희열의 스케치북 > 등 음악 토크쇼의 계보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편 록뮤지컬 < 지하철 1호선 >은 독일의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Volker Ludwig)의 원작을 김민기가 번안해 각색한 작품으로, 20세기 말 한국 사회의 모습을 풍자와 해학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1994년 초연 이후 2008년까지 4,000회의 공연 횟수를 기록해 한국 뮤지컬계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훗날 한국 영화계의 거물이 된 김윤석, 설경구, 조승민, 황정민 같은 배우들을 배출한 것도 큰 화제가 됐다. 2012년 초연된 연극 < 더 복서(The Boxer) >는 복싱 세계 챔피언이었던 노인과 문제아로 낙인 찍힌 고등학생 소년의 만남을 통해 소통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독일 청소년 연극상(Deutscher Jugendtheaterpreis)을 수상한 루츠 휘브너(Lutz Hübner)의 1998년작 < 복서의 마음(Das Herz eines Boxers) >을 김민기가 번안해 연출했다. ⓒ 학전(HAKCHON) 조용하고 묵직한 발자취 김민기는 농촌과 노동 현장에 있을 때부터 어린이들에게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마침내 2004년부터 어린이극을 집중적으로 제작해 무대에 올렸다. 그는 위암과 싸우면서도 학전의 마지막 작품이 된 어린이 뮤지컬 < 고추장 떡볶이 >에 큰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결국 김민기의 건강 악화와 극장 운영난으로 학전은 2024년 3월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약 넉 달 후 김민기는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뮤지컬 < 고추장 떡볶이 >의 한 장면. 천방지축인 초등학생 형제들의 성장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린 작품이다. 2008년 초연 이후 연극계에서 다수의 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한국 어린이 뮤지컬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 학전(HAKCHON) 한국처럼 유교 문화권에 속했던 나라에서는 본명을 직접 부르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허물없이 쓰기 위한 용도로 호(號)를 지어 사용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풍속이 거의 사라졌지만, 시조 시인이나 동양화 작가들 중에는 여전히 호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김민기에게도 비공식적인 호가 있다. 그가 스스로 붙인 호는 ‘뒷것’이다. ‘뒤에 있는 하찮은 존재’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이 호는 그의 삶을 압축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지 않고 뒤에서 묵묵하게 예술가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헌신했다. 노래와 연출로 역사를 보듬고 신념을 불태운 김민기는 무대 위의 거물이 되려 하지 않았다. 저마다 큰 별을 자처하는 세계, 휘황찬란한 빛을 선망하는 세상, 아주 어린 아이들마저 스타 유튜버나 아이돌을 꿈꾸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의 조용한 그림자가 더 크고 절실하게 느껴진다.

Arts and Culture Calendar 2024년 9월 ~ 2024년 12월

Arts & Culture 2024 AUTUMN

Arts and Culture Calendar 2024년 9월 ~ 2024년 12월 보이는 수장고: 유영국 유영국은 산과 바다를 주제로 비정형적이고 기하학적인 다양한 추상의 세계를 일구었다. 이번 전시는‘산의 화가’라고 불릴 정도로 1960년대부터 줄곧 산을 그린 유영국(劉永國)의 ‹산› 시리즈 작품 중 1968~1974년에 제작된 5점의 작품을 연대기 순으로 보여준다. 기간: 2024. 07. 12.~ 2024.09.29.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홈페이지 : mmca.go.kr 연결하는 집: 대안적 삶을 위한 건축 건축가의 집을 통해 2000년 이후 한국 현대 건축과 주거 문화를 사회 문화적 관점으로 조망해 보는 전시다. ‘개인과 사회, 장소, 시간’을 주제어로 삼아 거주의 다양한 양식과 의미를 환기한다. 이 전시에는 한국의 주요 건축가 30명(팀)이 설계한 58채의 주택이 소개된다. 전시에 소개된 집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주택과 주거 문화를 대표할 수는 없지만, 이곳에는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요청하는 힘이 있다. 기간: 2024. 07. 19.~2025. 02. 02.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홈페이지 : mmca.go.kr 다니엘 아샴 : 서울 3024 는 천년 후 미래라는 시간을 설정으로 아샴만의 고유한 세계관을 몰입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전시이다. 작가의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250여 점의 작품들이 공개된다.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을 활용하여 만든 고전 조각 시리즈를 시작으로 애니메이션 포켓몬과의 협업 작품, 서울에서 개최되는 전시를 기념하여 제작한 신작 회화와 드로잉, 유물 발굴 현장을 재현한 대형 설치 작업 등 시대와 영역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기간: 2024.07.12.~2024.10.13. 장소: 롯데뮤지엄 홈페이지 : lottemuseum.com 부산비엔날레 2024부산비엔날레는 < 어둠에서 보기(Seeing in the Dark) >를 주제로 부산현대미술관과 부산근현대역사관, 한성1918, 초량재에서 펼쳐진다. 어둠에서 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어둠’은 우리가 처한 곤경이자, 이미 알려진 곳이면서도 알 수 없는 장소를 항해하는 두려움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전시는 어둠을 쫓아내는 대신, 포용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기간: 2024. 8. 17.~10. 20. 장소: 부산현대미술관, 부산근현대역사관, 한성1918, 초량재 홈페이지 : busanbiennale2024.com 서도호: 스페큘레이션스 영국을 기반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국 설치미술 작가 서도호의 전시가 열린다. 이번 전시명은 ‘스페큘레이션스(speculations)’로, ‘만약에’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펼쳐진 그의 모든 창작 활동 과정이 담긴 회고전 성격이다. 이번 전시에는 전시는 드로잉 작품, ‘완벽한 집: 다리프로젝트’영상을 비롯해 그의 ‘별똥별’, ‘다리를 놓는 집’ 등이 모형으로 재현됐다. 기간: 2024. 8. 17.~11. 3. 장소: 아트선재센터 전관 홈페이지 : artsonje.org JOHN PAI 존 배 : SHARED DESTINIES 존 배의 70여 년의 예술적 여정을 집약적으로 선보이는 < 운명의 조우 > 전시가 열린다. 이번 전시는 1960년대 초반 구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제작된 초기 강철 조각을 비롯해 연대기별로 주요 철사 조각, 드로잉과 회화까지 작가의 작품 세계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작품 30여 점을 선별하여 소개한다. 기간: 2024. 08. 20.~2024. 10. 20. 장소: 갤러리현대 홈페이지 : galleryhyundai.com 마음의 기술과 저변의 속삭임 예술과 과학의 교차점에서 인식과 정체성, 그리고 경계성에 대해 탐구하는 마이클 주(Michael Joo)의 전시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일상적인 지각 기저에서 이루어지는 교환과 연결, 언어화하기 어려운 영향 관계에 주목한다. 전시 제목처럼 표면화되지는 않지만 각종 숨겨진 연결망을 환기하고, 여러 비가시적 관계와 친밀성을 조율하는 소프트 스킬(soft skill) 에 주의를 돌린다. 기간: 2024. 08. 30.~2024. 11. 03. 장소: 국제갤러리 서울 홈페이지 : kukjegallery.com 공예로 짓는 집 다양한 장르와의 실험을 통해 공예의 새로운 역할과 가능성을 모색하는 특별기획전이다.전시는 현대공예가와 전통 장인, 건축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 20인(팀)이 실내외 건축 공간에 담긴 공예 요소를 발견하고, 바닥에서 지붕에 이르는 건축의 기본 구조와 개념을 확장된 공예의 관점으로 풀어낸다. 기간: 2024. 09. 05.~2025. 03. 09. 장소: 서울공예박물관 홈페이지 : craftmuseum.seoul.go.kr 아니카 이 <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 기술과 생물, 감각을 연결하는 실험적인 작업을 전개해 온 한국계 미국 작가 아니카 이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이다. 아니카 이는 박테리아, 튀긴 꽃처럼 유기적이고 일시적인 재료를 사용해 인간의 감정과 감각을 예민하게 포착한 작업으로 이름을 알렸다. 전시에는 지난 10여 년간 제작된 작품 30여 점이 출품되며, 작가의 전반적인 작업 세계와 최근 경향을 폭넓게 소개한다. 기간: 2024. 09. 05.~2024. 12. 29. 장소: 리움미술관 홈페이지 : leeumhoam.org 광주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가 30주년을 맞았다. 올해 열리는 제15회 광주비엔날레는 《판소리, 모두의 울림》(Pansori, a soundscape of the 21st Century)이라는 주제로 30개국 72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이번 비엔날레는 현시대 복잡성의 좌표를 그리는 시도이며, 개인의 거처부터 인간이 점령한 지구 전역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오페라적 전시로 채워진다. 기간: 2024. 09. 07.~2024. 12. 01. 장소: 광주비엔날레 홈페이지 : gwangjubiennale.org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안동에는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한국의 역사마을에서 800년 전부터 전승되어 오던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있다. 마을 공동체들은 탈놀이를 통해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했고, 별신굿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왔다. 2024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은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문화의 춤’을 주제로 5대양 6대주 세계 각국의 탈과 탈춤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여행의 장을 마련한다. 기간: 2024. 09. 27.~2024. 10. 06. 장소: 안동역, 원도심, 탈춤공원 일원 홈페이지 : maskdance.com 궁중문화축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서울 소재 5개의 궁궐과 종묘에서 펼쳐지는 문화유산 축제인 궁중문화축전이 열린다. 이번 축제에는 한국의 전통 복식인 한복을 중심으로 < 경복궁 한복 연향 >, 창경궁에서 열리는 뮤지컬 < 복사꽃, 생각하니 슬프다>, < 고궁음악회-발레x수제천 >등 궁궐과 궁중문화를 더 쉽게 경험할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기간: 2024. 10. 09.~2024. 10. 13. 장소: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홈페이지 : kh.or.kr/fest

서울의 닭요리, 닭한마리

Arts & Culture 2024 AUTUMN

서울의 닭요리, 닭한마리 닭한마리는 서울에서 생겨난 요리다. 1960년대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투박한 양푼 냄비 안의 닭한마리는 맛과 재미로도 훌륭한 음식인 동시에 대도시 서울의 성장기에 시민들이 거친 노동을 견뎌야 했던 용광로 같은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닭한마리는 이름 그대로 닭 한 마리를 다른 재료들과 함께 냄비에 넣고 끓인 뒤 양념을 찍어 먹는 서울 요리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김치찌개, 소고기 잡채, 떡볶이처럼 한국의 요리는 대개 재료+조리법(또는 특별한 양념 이름)의 순서로 명명된다. 그런데 닭한마리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처음 수학을 배우기 시작할 때 수를 세던 방식에 머물러 있다. 그냥 ‘닭 한 마리’이다. 당신이 세 마리를 먹고 싶어 가게 직원에게 “닭 세 마리요!”라고 하면 식당 직원은 아마 당황할 것이다.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닭한마리 세 개요!”. 닭한마리가 갖는 의미 이렇게 단순하고 직선적인 이름이 붙은 과정이나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음식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일단, 닭한마리라는 요리가 생겨날 당시 닭은 귀중한 음식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당시에는 더 비쌌다. 비싼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먹는다니!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놀라운 축복이었다. 마치 미국인들이 칠면조 한 마리를 놓고 추수감사절을 보내는 것이 깊은 의미를 담고 있듯이 말이다. “닭을 통째로 먹는다고?’” 그 이름만으로도 손님들은 흥분했다. 이 요리가 퍼져 나갈 무렵, 한국의 양계산업은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식용을 위한 닭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닭을 한 마리나! 제공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한국인은 어떤 음식을 통째로 놓고 먹거나 제사상에 올려야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그런 전통이 닭한마리의 성공 요인에 투영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한국인은 프라이드치킨을 ‘통닭’이라고 부르는 문화가 있다. 만약에 그 닭이 조각조각 나뉘어 튀겨졌다고 해도 말이다. ‘통’은 원만하고 많은 것, 완벽한 것, 100퍼센트라는 의미가 있다. 더 좋은 대접, 만족감을 의미한다. 닭한마리라는 명명도 그런 의미를 같이 담고 있다. 닭 한 마리는 닭 반 마리의 두 배가 아니라 완전체를 상징한다. 서울의 역사가 담긴 맛 의류 상가가 즐비한 서울 동대문 뒷골목에는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30년 이상 된 닭한마리 골목이 있다. 이 골목에 간다면, 골목의 역사에 대해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본래 이 골목은 시장의 일부다. 서울은 조선시대에 수도가 되었는데, 광화문 앞에 정부에서 운영하는 시장이 있었다. 또한 지금의 닭한마리 골목 주변은 서울의 서민적인 동네로 번성했고, 시장이 생겨났는데 한국전쟁 이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큰 시장으로 확장되었다. 동대문시장, 광장시장, 평화시장 등 서울의 주요한 시장이 자리 잡았다. 이 시장이 닭한마리의 인기에 큰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시장은 시민들이 장을 보는 곳인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일터이기도 하다. 의류 제조 종사자들은 저렴하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하거나 일 끝난 후 소주 한잔을 나눌 수 있는 술집을 찾게 되었다. 저렴한 가격, 충분한 양, 맛있는 음식, 여기에 ‘고기’가 들어간다면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음식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닭백숙을 팔던 집에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칼국수와 떡, 야채 등의 사리를 제공하면서 닭 한 마리를 ‘풀 서비스로’ 즐길 수 있게 완성되었다는 설, 다른 하나는 닭칼국수를 팔던 집에서 저녁 술안주로 닭백숙을 제공하면서 자연스럽게 특별한 양념을 내어놓은 것이 지금과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이다. 동대문 뒷골목 닭한마리 골목. 과거 시장 닭한마리를 먹기 위해 상인들과 직장인들이 모여들던 골목에는 최근 외국인도 모여들며 한국의 맛과 문화를 즐기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1970년부터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서울에는 시장의 상인들, 노동자들 외에 이른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도 늘어났다. 그들은 낮엔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는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면서 피로를 풀었다. 서울의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서 다니는 것은 당시의 새로운 문화였다. 그들은 저렴하면서 맛있는 술집을 넘어서는 어떤 재미를 갈구했는데, 닭한마리는 그런 니즈에 완벽한 메뉴나 다름없었다. 백숙이나 삼계탕처럼 닭을 삶아서 다른 그릇에 내는 게 아니라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찌그러진 양푼 냄비에 닭이 통째로 들어가고, 각자 입맛에 맞게 만든 양념에 닭고기를 찍어 먹으며 소주 한 잔 기울이는 행위는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점차 닭한마리 골목엔 직장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몰려드는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눈치 빠른 상인들은 서울의 다른 지역에도 닭한마리 가게를 열기 시작했다. 사실 이 음식을 잘 모르는 한국인도 상당히 많다. 집에서는 거의 먹지 않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활동을 해보지 않은 어린이나 학생들, 혹은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세월을 보낸 여자 노인들은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 닭한마리 자체가 집밥의 카테고리에 속한 적이 없으며, 음식이 담겨 나오는 그릇도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육수나 양념장이 그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대체로 잘하는 가게에서 먹어야 맛있다는 인식이 강했으며, 드럼통 식탁에 빙 둘러앉아 팔팔 끓여가며 먹는 특유의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또 사회생활을 하는 임금 노동자들이 먹기 시작한 요리라는 점도 한몫했다. 필자의 어머니는 서울에서 오랫동안 가족을 부양하고 80세가 넘었는데, 이 요리의 이름조차 모른다. 이 원고를 쓰면서 혹시 이름을 들어보았냐 물었더니 엉뚱한 대답만 돌아왔다. “왜 닭 한 마리를 굳이 돈 주고 가서 먹는다는 것이야? 그리고 두 마리를 먹으면 안돼?” 냄비에 담긴 즐거움 각종 채소와 집마다 비밀 레시피를 넣어 끓인 육수를 양푼 냄비에 담은 다음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넣는다. 닭은 어느 정도 익어 나오지만 떡, 대파, 감자, 버섯 등의 사리가 익을 때까지 펄펄 끓여야 한다. 닭에 알맞은 간이 배고 사리가 익을 때까지 사람들은 각자 입맛에 맞는 양념을 만든다. 양념은 간장, 식초, 겨자, 매운 다지기(여러 가지 재료를 다져서 만든 양념)를 섞어 만든다. 같은 재료인데도 맛은 천차만별이다. 닭이 익으면 양념장에 찍어 먹는다. 뻑뻑했던 양념장은 국물과 고기의 수분이 섞여 점차 묽게 변한다. 다 먹어갈 때쯤이면 칼국수 사리를 넣어 익힌 후 묽어진 양념장에 찍어 먹거나. 냄비에 양념과 김치를 넣어 얼큰 칼칼하게 끓여 먹어도 좋다. 닭고기를 먼저 건져 먹은 다음 남은 국물에 취향에 맞게 다지기와 칼국수 사리를 넣어 칼칼하게 즐길 수도 있다. ⓒ한국관광공사 뜨거운 냄비가 올려진 테이블에 둘러앉아 먹는 방식은 구성원들의 유대감을 높이고, 식당 직원들은 가능한 요리에 적게 개입하여 불필요한 인건비용을 줄이는 이중 효과가 발생한다. 한국 속담으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러니까 모두에게 이득이라는 소리다. 그래서 닭한마리는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요리는 조금은 거칠면서도 다정한 장소에서 먹어야 맛있다는 신념이 있어서다. 그리고 아마도 미쉐린 투스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닭한마리에 깃들어 있는 철학이자, 우리가 이 음식을 대하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오늘 중요한 거래처 접대가 있으니 닭한마리에 가자고!”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최근 닭한마리는 외국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맵지 않아서, 한국식 노포 감성을 느낄 수 있어서도 이유겠지만, 서울이 어떻게 성장했고, 서울시민이 거친 노동에 견디며 성장하던 시기의 용광로 같던 시대의 산물을 체험해 보는 상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닭한마리는 서울의 다양한 사람들, 연인들, 외국인들이 몰려드는 복잡한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서울의 사회적 문화재와 유산이 되었다. 어떤 음식이든 그 내부에는 역사적 나이테가 있게 마련이다. 아픈 기억과 즐거움이 공존한다. 그런 역사성을 우리가 알고 음식을 먹는다면 더 풍부한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음식이란 결코 칼로리와 화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맛의 분자들, 물리적 촉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닭한마리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적절한 음식이다. 혼자서 이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친구들과 나누는 커다란 냄비 요리의 맛과 즐거움이 이 요리에 담겨 있다.

마니악한 장르를 대중적으로 만든 K-오컬트의 세계

Arts & Culture 2024 AUTUMN

마니악한 장르를 대중적으로 만든 K-오컬트의 세계 올해 개봉한 장재현(張在現 Jang Jae-hyun) 감독의 영화 < 파묘 (破墓 Exhuma) > (2024)는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최근 한국의 오컬트 영화는 공포적인 요소를 극대화하기보다, 다양한 요소를 결합하여 대중이 즐길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오컬트가 마니악한 장르라는 편견을 깨고 있다. 수상한 묘를 이장한 풍수사와 장의사, 무속인들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담은 오컬트 영화 < 파묘 (破墓 Exhuma) >(2024). 오컬트 장르에 대중적이고 오락적인 재미요소를 더해 K-오컬트를 완성했다는 평이다. ⓒ 주식회사 쇼박스 과거 “뭣이 중한디”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었던 영화 < 곡성(哭聲, The Wailing) >(2016)은 680만 관객을 기록하며 K-오컬트가 거둘 수 있는 최대의 성공으로 여겨진 바 있다. < 곡성 > 개봉 1년 전에 개봉한 장재현 감독의 이 거둔 540만 관객 흥행을 넘어선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장 감독이 다시 들고 온 영화 < 파묘 >는 그 기록을 갈아치웠다. 1,190만 관객이 영화에 열광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컬트 장르를 고집해 온 장재현 감독만의 색깔이 분명히 느껴지는 대목이고, 그것이 이러한 놀라운 흥행을 가능하게 한 저력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건 바로 마니악한 장르로 여겨지던 오컬트를 대중적으로 해석해 낸 그만의 방식이다. 오컬트에 장르적 재미를 더하다 < 파묘 >는 무당(巫堂 한국에서 신을 섬겨 길흉을 점치고 굿을 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과 풍수사(風水師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좋은 터를 잡아 주는 사람) 그리고 장의사(葬儀師 장례 의식을 전문적으로 도맡아 하는 사람)가 등장하고 이들이 귀신 같은 존재들과 사투를 벌이는 내용으로 분명 오컬트 장르의 색깔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특이한 건, 오컬트 특유의 마니아적인 공포 속으로 관객들을 빠뜨리기보다는 훨씬 더 대중적이고 오락적인 장르물의 재미요소를 더했다는 점이다. 영화가 입소문을 탄 후 관객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MZ세대 무당 화림(김고은 金高銀 Kim Go-eun)과 봉길(이도현 李到晛 Lee Do-hyun), 어딘지 정감이 가는 꼰대 풍수사 상덕(최민식 崔岷植 Choi Min-sik), 감초 같은 해학이 묻어나는 장의사 영근(유해진 柳海真 Yoo Hai-jin)을 일컬어 ‘묘벤져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오컬트 특유의 공포물이 갖는 오싹함이 있지만, 이들 묘벤져스의 장르적인 재미를 따라가면 마치 저 귀신과 치고받고 싸우는 액션물 같은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게다가 영화 후반부로 가면 묫자리를 잘못 써서 흉흉해진 집안 이야기를 넘어서 일제 잔재의 과거사를 파헤치는 이야기까지로 확장된다. 일제의 쇠말뚝에 의해 끊긴 민족정기를 잇기 위해 묘벤져스가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는 냉혹한 일본의 정령과 싸우는 민족적인 영웅처럼 그려진다. 이러한 장르적 재미를 더한 영화는 공포를 줄이는 대신 대결 구도를 선명히 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장르적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 됐다. 이것은 < 검은 사제들 >, < 사바하(Svaha: The Sixth Finger) >(2019)에 이어 < 파묘 >까지 이른바 장재현 감독의 오컬트 3부작에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특징이다. 그리고 이건 최근 K-오컬트라는 지칭이 생길 정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한국적 오컬트의 특징이기도 하다. 범죄물과 결합한 K-오컬트 K-오컬트는 죽음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종종 범죄물과 결합하는 양상을 보이곤 한다. SBS에서 방영된 김은희(金銀姬 Kim Eun-hee) 작가의 드라마 < 악귀(Revenant) >(2023)가 대표적인 사례다. 미스테리한 댕기를 만진 후 귀신이 든 주인공과 귀신을 보는 민속학자 그리고 강력범죄수사대 경위가 연달아 발생하는 의문의 죽음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다뤘다. 여기서 악귀는 자신이 깃든 자의 욕망을 들어주면서 점점 존재가 커지고, 주인공이 가진 세상에 대한 욕망과 분노에 반응한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만으로 실제 악귀가 그걸 실행해내는 걸 알게 된 주인공은 민속학자의 도움을 받아 악귀와 싸워나가게 된다. 이건 오컬트의 소재로 종종 등장하는 저주를 악귀라는 존재로 해석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범죄와 오컬트의 결합은 일찍이 김홍선 감독의 드라마 < 손 the guest >(2018)에서도 시도된 바 있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귀신에 빙의된 자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이를 막으려는 이들의 협업을 그렸던 작품이다. 이 두 드라마는 범죄물이 접목된 K-오컬트로서 도저히 인간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잔혹한 범죄들에 대한 비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처럼 K-오컬트는 그저 자극적인 공포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의미까지 담아내기도 하는데, 보다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K-오컬트가 되기까지 오컬트라고 하면 악령 같은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하고 이에 맞서는 사제들의 구마 의식 같은 것을 소재로 하는 장르로 받아들여지곤 했지만, K-오컬트는 여기에 한국적인 토속적 색깔을 더해 넣는다. < 파묘 >에도 등장하지만, K-오컬트의 단골 소재처럼 나오는 무속인들의 굿 장면이 대표적이다. 고조되는 북소리와 흥분시키는 춤사위를 더해 강력한 에너지를 경험하게 해주는 무속인들의 세계는 영화 < 곡성 >에서도 등장해 세계인들을 매료시킨 바 있다. 인간의 세계와 귀신의 세계 사이를 잇는 존재로서 무속인들이 보여주는 한국의 샤머니즘은 전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K-오컬트만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 파묘 >는 영화 스토리 뿐만 아니라 가죽 자켓, 실크 셔츠, 청바지, 컨버스 운동화 등 기존 무속인의 틀을 깨고 주인공 무속인 화림의 개성을 살린 스타일링도 관객의 주목을 받았다. ⓒ 주식회사 쇼박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오컬트라는 장르를 구마 의식이나 사제, 악령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칭한다면, 과거 1998년에 개봉한 < 퇴마록 >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는 3명의 퇴마사가 등장하는데, 여자의 혼이 봉인된 칼을 사용하는 무사, 기도로 악마와 싸우는 신부 그리고 부적술과 독심술을 사용하는 아이가 그들이다. 즉 서구의 신앙과 우리네 토속신앙을 접목하려는 K-오컬트의 노력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K-오컬트의 또 하나의 특징은 < 파묘 >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보다 대중적인 장르들을 결합해 B급 장르라는 한계를 넘어서려 한 점이다. < 퇴마록 >이 오컬트 장르가 아니라 판타지 액션 장르로 대중들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2015년 방영된 장재현 감독의 역시 사제복마저 멋진 수트처럼 소화해 낸 장르적인 해석으로 500만 관객을 넘기는 흥행을 기록했다. 악령이 든 소녀의 구마의식을 그린 오컬트 영화 < 검은사제들(The Priests) >(2015). ⓒ 영화사 집 K-오컬트는 토속신앙이나 민담, 설화 같은 고전에서 재해석해 낸 캐릭터들 같은 한국적인 색채를 더해 넣으면서, 동시에 마니악한 B급 장르가 아닌 보다 대중적인 장르로 접근하려는 특징을 보인다. 그래서 로컬 색깔이 갖는 차별성은 물론이고 글로벌하게 이해되는 장르의 보편성까지 아우르는 세계가 되었다. 이것은 현재의 글로벌 콘텐츠 시장이 요구하는 것으로서 K-오컬트가 왜 경쟁력을 갖게 됐는가를 설명해 준다.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맞추다

Arts & Culture 2024 AUTUMN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맞추다 『경청』 김혜진(金惠珍) 작, 장해니(張傑米) 번역, 200쪽, 18달러, 레스트리스 북스(2024)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맞추다 김혜진의 『경청』은 진정 이 시대를 위한 소설처럼 느껴진다. 이 작품은 주인공 해수가 자신을 비난한 기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된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해수의 편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이 편지도 끝맺지 못한 채 남겨진다. 편지는 해수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기만을 위한 시도’에 가깝다. 심리 상담사이자 토크쇼 패널로도 잘 알려진 해수는 어느 날 무심코 대본에 적힌 대로 한 배우에 대한 평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발언을 했으니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배우의 자살로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뀐다. 네티즌들이 다른 여러 명과 함께 해수를 가해자로 지목하면서, 그녀는 배우의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해수는 자신이 언어의 힘을 잘 알고 있고 뛰어난 소통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했었지만, 아직 배울 점이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해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욕할까봐 두려워하며, 타인과의 접촉을 줄이고 혼자 지낸다. 그러던 중 같은 동네에 사는 여학생 세이와 길고양이 순무를 만난다. 세이는 덩치가 크고 재빠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같은 피구팀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고 있고, 순무는 구조가 시급한 상황이다. 해수는 길거리에서 서서히 힘겹게 죽어가는 순무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따뜻한 공감을 통해 세이가 힘든 상황을 이겨내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해수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애초에 심리상담사가 되고 싶었던 목적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가일 것이다.   『경청』이라는 작품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중 하나는 바로 ‘도덕적 범주(도덕적으로 배려할 가치가 있는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의 구분)’이다.  길고양이를 잡기 위해 통 덫을 들고 돌아다니던 해수는 사람들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걱정하면서, ‘자신이 집중해야 하는 일과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의 구분에 대해 생각한다. 한때는 자신은 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배우의 자살 사건 이후로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해수는 이것이 자신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해수의 도덕적 범주 가 확장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인터넷과 SNS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연결성이 높아진 지금, 단편적인 사건들까지 모두 연결해서 살펴보지 않으면 현대 사회의 모순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한편으로 심각한 고립감을 느끼기도 한다. 온라인상의 타인을 인간이나 도덕적 존재가 아닌, 공터에서 우는 길고양이처럼 굳이 관심을 쏟을 필요가 없는 얼굴 없는 개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유사한 두 단어 ‘cancel’과 ‘counsel’을 활용한 재치 있는 영어 제목은 이야기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을 강조한다. 한국어 제목 『경청』에서 드러나듯이, 귀 기울여 듣는 것, 즉 나의 관점을 내세우고 싶은 욕심이 아니라, 듣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경청』은 배려심 깊은 독자들에게 귀 기울일만한 많은 이야기를 던져준다. 『이별 후의 이별』 장석원(張錫原) 작, 데보라 김(金) 번역, 83쪽, 10,000원, 아시아 퍼블리셔스(2023) 언어의 혁명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박상수는 장석 원의 시(이번 시집에는 영문 번역된 20여 편의 작품이 실려있다.)의 기원이 ‘혁명과 사랑’이며 그 기원이 지금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 두 주제는 이번 시집에서도 잘 드러난다. 언뜻 보기에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노래하는 듯하지만, 여기에서 혁명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장석원은 언어의 혁명 없이는 어떤 혁명도 완성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시는 그러한 대대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노력을 담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탐색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트랜스 휴머니즘의 미래까지 나아가며, 그는 갈등과 투쟁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 사이로 사랑의 빛이 비추지만,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모습의 사랑은 아니다. 작가가 노래하는 사랑은 고통과 그리움, 때로는 야만적이고 죽음과 연결되는, 날것의 사랑이다. 새로 출간된 이번 시집은 시인의 세계관을 엿보고 독자 자신의 투영된 이미지를 관조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창문이 될 것이다. MMCA 리서치랩 한국 현대 미술의 세계를 탐색하다 www.mmcaresearch.kr MMCA(국립현대미술관) 리서치랩은 ‘한국 현대미술 연구에 관한 지식 및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온라인 플랫폼’이다. 1945년부터 1990년대 이후까지의 한국 미술에 대해 인명, 단체, 기관, 전시 등 미술과 관련된 방대한 정보, 그리고 한국 미술에 대한 학술적 에세이를 담고 있다. 한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 MMCA의 플랫폼답게, 리서치랩은 세련된 인터페이스 안에서 방문자들이 방대한 정보를 탐색할 수 있는 서로 연결된 다양한 경로를 제공한다. 첫 화면에서는 월별 연표를 통해 다양한 미술 용어를 시대별로 정리해 두었으며, 상단의 메뉴에서는 미술 용어와 학술적 에세이 (모든 컨텐츠는 훌륭한 영문 번역이 함께 제공된다.)를 시대별, 주제별, 알파벳순으로 확인할 수 있다. 페이지 가장 상단의 검색창을 통해 원하는 내용을 검색할 수도 있다. 근현대 한국 미술에 관심 있는 사용자에게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는 리서치랩이 앞으로도 발전을 거듭하기를 기대한다.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