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네컷이 일상인 시대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만남을 인증하듯 사진으로 남기고, 각종 브랜드를 알리는 팝업 행사엔 어김없이 하나의 이벤트로 포토 부스가 등장한다. 무한한 온라인 콘텐츠에 익숙했던 이들에게 촬영 후 곧바로 손에 쥐어지는 한 장의 아날로그 사진은 더없이 매력적이다. 놀이를 넘어 취향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자리 잡은 인생네컷, 그 비결은 무엇일까
요즘 청소년을 비롯한 20~30세대들도 뭘 하고 놀든 인생네컷 사진을 찍어 오늘의 만남을 인증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1990년대 후반, 한국엔 스티커 사진이라는 것이 있었다. 서너 명이 길거리에 있는 작은 포토 부스에 몸을 비집고 들어가 사진을 찍으면 스티커 형태로 프린트되는 기계다. 당시 학생들이나 연인들이 우정사진, 커플 사진을 찍기 위해 스티커 사진을 이용했고,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했다. 손바닥만 한 스티커 인화지에 프린트된 사진들은 한 컷씩 잘라 같이 찍은 사람들끼리 나눴다. 그렇게 지갑 속으로, 다이어리 안으로, 또는 열쇠고리로 만들어져 꽤 오랜 시간 간직됐다. 얼마나 유행이었던지 그 사진을 스캐너로 스캔한 뒤 싸이월드(당시 한국에서 페이스북 역할을 하던 웹 기반 SNS)에 게시하는 일도 많았다.
아날로그의 인기
서울 신촌 명물사거리에 오픈한 인생네컷 신촌명물사거리점. 이곳은 디지털 역량을 집약한 매장으로 곳곳에 디지털 사이니지를 배치해 디지털 결합형 매장의 느낌을 강조했다.
ⓒ 인생네컷
모든 유행은 생명체와 같다. 스티커 사진 열풍도 2000년대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에 밀려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누구나 손에 고화질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든 순간을 포착할 수 있게 됐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요즘 과거의 스티커 사진이 부활해 세계로 진출하고 있다. ‘인생네컷’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열풍은 지금 Z세대 사이에서 큰 인기다. 이들은 요즘 뭘 하고 놀든 4,000원짜리 네 컷 사진을 찍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스마트폰으로 무제한 셀카를 언제 어디서든 찍을 수 있는 시대에 갑자기 인생네컷은 왜 이렇게 붐을 일으키게 된 걸까.
신촌명물사거리점 오픈 기념으로 진행한 타임세일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줄 선 이용자들.
ⓒ 인생네컷
과거 스티커사진 열풍이 불었던 2000년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당시는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대전환되는 시기였다. ‘디지털=새로운 것’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다. 태어날 때부터 PC와 모바일에 익숙한 MZ세대들에겐 ‘아날로그=완전히 새로운 것’인 셈이다. 인생네컷은 그 지점을 겨냥했다. 우선 서울 홍대 앞과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등 역세권에 테스트 버전의 낡은 즉석 사진기를 들여놨다. 그러자 한여름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MZ세대들이 몰려와 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사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포토프레스 세대(PhotoPress, 사진을 뜻하는 Photo와 표현을 뜻하는 Express의 합성어)에게 유한한 온라인 콘텐츠가 아닌 단 한 장의 사진으로 출력되는 아날로그 감성이 더해진 인생네컷은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놀이로 흥미를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포토 부스 브랜드 중 가장 많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인생네컷을 만든 엘케이벤처스(LKVENTURES) 이호익(Lee Ho-ik 李浩益) 대표는 서울의 지하철역마다 있는 여권 사진 무인 촬영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사진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사소한 것을 기록하기 좋아하는 Z세대에게 딱 맞는 아이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인생네컷에 따르면 매월 평균 200~230만 명이 인생네컷을 찍어 사업 시작 5년 만인 지난 2023년 1월 기준 1억 장을 넘겼다. ‘누구나 인생에서 가장 손꼽힐 만한 인생샷을 찍을 수 있다’는 의미로 탄생한 인생네컷은 2023년 초 국내를 넘어 영국 런던 소호 등 9개국에 ‘Life Four Cuts’라는 이름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온 · 오프라인의 믹스&매치
인생네컷을 비롯한 다양한 포토프레스 브랜드는 사용자들이 포토프레스 부스를 하나의 놀이문화로 인식할 수 있도록 매장 가득 가발과 소품, 액세서리 등을 구비해 놓았다.
ⓒ 인생네컷
한국인은 워낙 유행에 민감한 데다 요즘 Z세대의 취향은 교체 주기가 이전보다 훨씬 짧아졌다. 그런데도 인생네컷에서 시작된 포토 프레스 인기는 5년 넘게 식을 줄 모른다. 인쇄된 사진만으론 결코 이루지 못했을 성과다. 그 성공 비결엔 온〮오프라인의 믹스&매치가 있다.
사용자들만의 놀이 문화를 만들기 위해 여러 포토 프레스 브랜드는 매장을 오프라인에서만 가능한 놀이터처럼 꾸몄다. 공간 안엔 우스꽝스러운 가발과 소품, 액세서리들을 가득 채워 넣었다. 또 촬영한 사진은 QR코드를 이용해 다운받을 수 있어 아날로그에서 찍은 사진을 온라인에서 또 한 번 새로운 콘텐츠로 재구성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출력 속도는 한 장당 단 30초 내외로, 밈과 쇼츠(Shorts) 등 이미지를 빠르게 소비하는 MZ세대의 놀이문화에 안성맞춤이다.
MZ세대가 열광하니 각종 브랜드와 인플루언서도 따라왔다. 수많은 브랜드가 팝업스토어 등을 만들 때 포토 프레스 부스를 설치하는가 하면, 정부 등 공공기관은 공익 캠페인을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재미를 더한 프레임
사진을 찍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QR을 통해 사진과 사진을 찍는 과정이 녹화된 동영상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다운로드 받은 사진은 애플리케이션에 등록해 또 다른 프레임으로 꾸밀 수 있어 재미를 더한다.
인생네컷의 성공 이후 한국엔 40여 개의 포토 프레스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다. 서로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을 선보이니, 사람들은 브랜드별로 찾아 다니며 촬영하기 바쁘다.
모노맨션은 포토 프레임에 물결, 벚꽃, 풀밭 등 다양한 색과 디자인을 입혀 피크닉에 와서 사진 찍은 듯한 분위기를 만든다. 무브먼트 포토부스는 바닥과 천장 등에서 다양한 카메라 앵글을 제공한다. 입구에서 직원에게 어떤 앵글로 촬영하고 싶은지 말하면 이에 맞는 방으로 안내를 해준다. 1990년대 한국을 강타했던 힙합 뮤직비디오 영상감독이 찍어주는 것 같은 레트로한 느낌과 독창적인 사진이 특징이다. 더필름은 일반 용지와 투명 용지 등 인쇄용지를 선택할 수 있게 했다. 투명 용지는 다이어리를 꾸미는 걸 좋아하는 10~20대들을 겨냥한 것으로, 어디에나 붙여 DIY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인생네컷은 초기에는 기본 프레임만 제공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만든 특별한 프레임을 애플리케이션에 등록해 촬영할 수 있도록 해 이용자들의 재미를 더했다. 또 인기 많은 연예인이나 캐릭터와의 협업도 돋보인다. 특히 콘서트나 컴백, 생일 등 특별한 기념일에 해당 가수 사진으로 꾸민 한정판 프레임을 출시하기도 한다. 이는 ‘덕질’이라 불리는 팬덤을 활용한 최신의 마케팅 도구가 됐다. 그뿐만 아니라 빅히트 뮤직과 쏘스뮤직은 인생네컷과 협업하여 오디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인생네컷 앱을 통해 지원하는 방식으로, 남성 참가자는 빅히트 뮤직 프레임을, 여성 참가자들은 쏘스뮤직 프레임을 활용해 지원하는 방식이다.
아이돌 못지않게 사랑받는 캐릭터도 프레임도 있다. MZ세대의 밈 열풍을 시작으로 10대 20대들의 탄탄한 지지와 인기를 확보한 잔망루피, 유아들이 좋아하는 콩순이 (Kongsuni)와 시크릿 쥬쥬(Secret Jouju) 같은 애니메이션 캐릭터, 모바일 게임 ‘쿠키런: 킹덤(COOKIERUN: KINGDOM)’ 캐릭터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시대를 거스르며 여전히 사랑받는 ‘월트 디즈니’ 캐릭터까지도 네 컷 사진의 프레임 안에서 만날 수 있다.
네 컷 사진의 인기는 언제까지 유효할까. 형태와 기술은 조금씩 바뀌더라도 아마 꽤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우리의 인생엔 기억하고 싶은 순간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명장면이 필요한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