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은 나무, 뼈, 뿔, 수정, 돌, 금 등에 글씨나 문양을 새겨 문서에 찍도록 만든 물건으로 인주나 잉크를 묻혀 날인하여 개인이나 단체를 증명하는 용도로 쓰인다. 한국에서 도장은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만큼 중요한 물건이다. 도장에 대해서는 잘 안다는 뜻인 ‘박인당(博印堂)’의 박호영 씨는 70여 년 동안 세상에 하나뿐인 도장을 만들고 있다.
박호영 씨는 매일 아침 집을 나서 그의 가게인 박인당(博印堂)으로 출근한다. 도장 대신 사인이 익숙한 요즘이라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에서 하나뿐인 도장을 만드는 일에 마음을 다하고 있다.
박호영(朴浩榮) 씨는 매일 아침 집을 나선다. 84세나 되었지만,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쉬는 날은 없다. 손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전철을 타고 그의 가게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에 있는 오래된 빌딩 3층에 8평 남짓한 박인당이 있다. 가게 입구와 벽면은 그가 지금까지 받아온 상장으로 빼곡하다. 근무 시간은 아침 열 시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지만, 자리를 비울 때도 종종 있다. “나이가 드니까 병원에 자주 가야 해. 오후 세 시쯤엔 점심 먹으러 나갔다 오기도 하고.”
빌딩 밖에는 간판도 걸려 있지 않고, 운이 나쁘면 주인을 만날 수도 없다. 그래서야 운영이 제대로 될까 싶지만, 이곳을 찾는 손님들의 대부분은 오랜 단골 아니면 단골의 소개로 온 사람들이라 문제 되지 않는다.
도장의 존재 이유
도장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에 일찌감치 등장한다. 기원전 5,000년 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장은 점토판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 신화)에는 ‘천부인(天符印)’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환인이 그 아들 환웅에게 천하를 다스리고 인간 세상을 구하게 함에 있어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보냈다’라는 기록이 고려 시대 때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 ‘천부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여기에 도장‘인(印)’이 들어가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환웅이 환웅 천체(하늘의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표이자 상징으로 추측된다. 도장의 존재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한때 도장은 한국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도장이 없으면 각종 계약서, 문서를 작성할 수 없었고 은행 거래도 할 수 없었다. 71년 전, 1〮4후퇴(한국전쟁이 일어나고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공세에 따라 정부가 수도 서울에서 철수한 사건)로 인해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피란민들에게도 도장은 필요했다.
피란 후 살기 위해 배운 일
당시 박호영 씨는 함경남도 흥남시에 살고 있었다.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흥남시에 살던 육촌 형님 집으로 가족들과 함께 옮겨갔다. 1〮4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피란하여 정착한 곳은 거제도(한국 남해에 있는 섬으로 지금은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였다. 박 씨는 쇠톱을 갈아서 도구를 만들고 직접 나무를 해서 도장을 새겨 사람들에게 팔았다. 돈이 없다고 하면 곡식으로 대신 받았다.
“거기서 3년을 살았어. 처음에는 1인당 3홉씩 배급식량을 주다가 점점 줄어들더니 결국 끊어졌어. 먹고 살 것이 없으니까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지.”
부산의 판자촌으로 주거지를 옮긴 지 6개월쯤 지났을 때, 흥남시에서 함께 살던 육촌 형님의 연락을 받았다.‘내 후배가 서울 신당동에서 인장 업을 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일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열여섯 살의 박 씨는 짐을 꾸려 서울로 올라왔다.
“그 집에서 10년 동안 일했어. 추사체 연구회 회원이었던 김두칠(金斗七) 선생이 나를 가르쳤어. 그분이 글씨를 써주면 나는 새기는 작업을 했는데, 낮에 일을 받아 오니 나는 주로 밤에 일을 했지. 그러면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고. 바쁠 때는 하루 두 시간 자고. 글자 한 자 새기는 데 얼마, 하는 식으로 돈을 받았어. 24시간 동안 1,000자를 새길 때도 있었어.”
도장을 새기고 있을 때면 손님이 찾아와도 모를 집중력을 발휘한다. 작은 인면에 글자를 새기는 탓에 시력이 저하되는 직업병을 얻기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이 일을 그만두면 더 큰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며 웃는다.
집중과 노력의 시간
좌서(左書), 전서(篆書), 예서(隸書), 초서(草書) 등 한자의 서체와 서예도 이때 익혔다. 어린 시절 천자문(千字文 한문 학습 입문서로 널리 사용된 중국의 책)을 익힌 것이 도움이 되었다. 독립을 한 것은 스물여섯 살 때였다. 서울 을지로 5가에 있는 인쇄소 한쪽에 책상 하나를 놓고 손님을 받았다. 이후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지금의 자리에 가게를 얻은 것이 11년 전이다.
도장을 새기는 데 필요한 건 집중력과 노력이라고 박 씨는 말한다.
“이제 손으로 직접 새겨서 하나하나 만드는 도장 가게는 거의 없어. 돈벌이도 안 되는 데다가 너무 힘이 들어.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서체를 알아야 하고 서예도 배워야 하는데 젊을 때부터 익히지 않으면 힘들지.”
동전보다 작은 인면(글자를 새기는 부분)에 최대 24자까지 새길 때도 있다. 그래서 ‘황반 변성’이라는 직업병도 얻었다. 황반은 망막 중심부에 있는 신경조직으로, 시세포 대부분이 존재하고 물체의 상이 맺히는 곳이다. 황반변성은 황반부의 후천적인 퇴행으로 변성이 일어나 시력장애를 일으키는 질환으로 실명을 초래할 수도 있는 질환이다. 글자나 직선이 휘어 보이고 글을 읽을 때 어느 한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왼쪽 눈은 온전한데 오른쪽 눈이 그래. 벌써 20년쯤 되었어. 수술로도 치료가 안 되고. 그러니 일하다가 자주 쉬어야 해. 지금은 하루에 한 개 정도 만들어.”
70여 년 동안 도장을 만들어 왔지만,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2001년 수해로 그가 만든 도장이 찍힌 명부를 모두 잃은 이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4,700여 개에 달한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도장이 필수품이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1990년대 컴퓨터 프로그램과 기계가 보급되면서 빠르고 값싸게 만들 수 있을뿐더러, 서명 거래가 일반화되어 도장이 없어도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박 씨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도장’만드는 일을 멈출 생각이 없다.
“한 번 새기면 평생 사용하는 게 도장이야. 내가 만드는 도장은 위조가 불가능해.”
손님과의 상담 시간은 그래서 중요하다. 먼저 도장의 재료를 정한다. 단단한 나무에서부터 값비싼 춘천옥(강원도 춘천에서 나는 옥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 중 하나를 선택한 후 이름의 획수를 계산하여 몇 자를 새길지 정한다. 한국인의 이름은 성을 포함하여 보통 세 글자인데, 한자 이름의 총 획수에 따라 길흉이 달라진다는 성명학의 수리론을 적용하여 이름 뒤에 복과 운을 불러오는 글자를 더하는 경우도 있다. 이어서 이름과 어울리는 서체를 정하고, 먼저 붓으로 인면에 쓴다. 그 후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전각 작업이 시작된다.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 집중하다 보면 시간이 금세 지나가지. 눈 때문에 자주 쉬어야 하지만.”
박 씨는 4,700명의 이름과 연락처, 인영(도장을 찍은 형적) 등이 기록된 고객 명부를 갖고 있다. 2001년, 청계천이 범람하여 당시 반지하에 있던 가게가 수해를 입었는데, 그 후 컴퓨터로 명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60이 넘은 나이였지만 컴퓨터를 구입하여 차근차근 독학으로 배워나갔고 명부 정리는 물론 포토샵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 도장을 늘 가지고 다니느냐’고 묻자 그는 주머니를 뒤져 두 개의 도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손으로 직접 뜬 도장 주머니는 젊은 시절, 아내가 만들어준 것이다.
“아내는 할 만큼 했으니 쉬라고 말하지. 그런데 나는 싫어. 내 나이에 일하는 사람, 내 주위에 한 명도 없어. 일이 없으니 먹고 자는 것밖에 할 게 없잖아. 머리도 몸도 퇴화하는 거야. 나도 그렇게 될까 봐 일을 못 놓는 거지."
소원을 묻자 박 씨는 가볍게 웃으며 머리를 흔든다.
“소원? 없어. 인생 말년에 무슨 소원이 있겠어.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다 가는 것 말고는.”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이름 안에는 그가 행한 일, 그가 걸어간 일, 그가 뿌린 씨앗과 거두어들인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박호영 씨가 새겨온 또 새겨갈 이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가 만든 도장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한 사람의 삶을 증명해 줄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몇 분이면 도장을 만들 수 시대지만 그는 여전히 고객의 행복을 바라며 글자 하나하나를 그의 손때 뭍은 조각도로 새긴다. 이 일은 어떤 기계로도 대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