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협력하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스틸 사진가는 모든 작업을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외롭기는 하지만, 성취감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30년 가까이 현장을 누빈 이재혁(Lee Jae-hyuk 李宰赫) 스틸 사진가를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재혁(Lee Jae-hyuk 李宰赫) 스틸 사진가는 국내외 내로라하는 감독들의 영화 촬영 현장에서 영화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스틸 사진 작업을 30년 가까이 해 왔다. 얼마 전에는 박찬욱(Park Chan-wook 朴贊郁) 감독의 <아가씨(The Handmaiden)> 스틸 사진을 모은 사진집 『아가씨의 순간들(The Moments: The Handmaiden)』을 펴냈다.
단 16분 만에 1억 원이 모였다. 박찬욱(Park Chan-wook 朴贊郁) 감독의 영화 <아가씨(The Handmaiden)>(2016)의 스틸 사진을 모은 사진집 『아가씨의 순간들(The Moments: Handmaiden)』 한정판 출간을 위한 펀딩 이야기다. 올해 봄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tumblbug)에서 성공리에 자금을 모은 이 책은 총 520쪽의 방대한 분량에 가격 또한 만만치 않지만, 출간 소식과 동시에 독자들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영화 촬영 현장을 담은 400여 장의 사진과 촬영 현장의 비하인드 에피소드를 기록한 꼼꼼한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이 사진집의 저자는 스틸 사진가 이재혁이다.
그는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영화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스틸 사진 작업을 해 오고 있다. 특유의 미술적 감각과 집요함으로 영화의 순간들을 포착해 온 그는 명감독들이 신뢰하는 작가다. 필모그래피를 훑는 것만으로도 근 20년 동안 한국 영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힌 작품들을 확인할 수 있다. 봉준호(Bong Joon-ho 奉俊昊) 감독의 < 기생충(Parasite) > (2019), 한재림(Han Jae-rim 韓在林) 감독의 < 관상(The Face Reader) > (2013), 김지운(Kim Jee-woon 金知雲) 감독의 < 악마를 보았다(I Saw the Devil) > (2010)를 비롯해 최동훈(Choi Dong-hoon 崔東勳) 감독의 < 타짜(Tazza: The High Rollers) > (2006) 촬영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봉준호(Bong Joon-ho 奉俊昊) 감독의 <기생충(Parasite)> 촬영 현장을 담은 스틸 사진. 이 영화는 < 설국열차(Snowpiercer) > , < 옥자(Okja) > 에 이어 봉 감독과 함께한 세 번째 작업이다.
ⓒ 이재혁
영화 스틸 사진가는 어떤 직업인가?
영화 촬영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스태프이다. 과거에는 영화사 직원들이 영화가 완성되기 전에 스틸만으로 극장에 영업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개봉 전 마케팅, 해외 필름 마켓에서 스틸로 작품을 홍보한다. 스틸 작가는 영화의 포장지와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재혁은 자신의 스틸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는데, 주로 미술 전시회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어떤 계기로 스틸 사진가가 됐나?
형이 먼저 영화 일을 시작했다. 이후 아버지께서 형에게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해 보면 어떻겠냐고 권하셔서 사진을 배웠다. 형의 영화 현장에서 스틸을 찍는 것으로 이 일을 시작했는데, 내게 잘 맞았다. 상황에 맞게 순간적 판단을 내리는 게 재밌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스틸 사진가에게 필요한 역량은 무엇인가?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현장 시스템을 잘 파악해야 한다. 스틸 작가는 감독이나 다른 스태프들과 달리 스틸의 사전 작업, 촬영, 후반 작업을 혼자 해내기 때문이다. 나는 스틸이 일반적인 사진이 아니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길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늘 연구한다. < 기생충 >촬영 현장에서 최우식(Choi Woo-shik 崔宇植) 배우가 내 사진을 보고, “영화처럼 보인다”고 말해 줘서 기뻤던 기억이 난다.
촬영 현장에 들어가기 전 어떤 준비를 하는가?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나서 받는 느낌에 집중한다. 그 느낌에 따라 영화에 맞는 색감이 무엇일지 고민한다. 다양한 미술 전시회에 다니며 아이디어를 얻는 편인데, 컴퓨터나 모바일로 그림을 보는 것보다 실제 전시장에서 접해야 색감을 더 풍부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가씨> 촬영 전에는 파리에서 피카소 그림을 본 것이 큰 도움이 됐다.
CG나 VFX 기술이 많이 쓰인 작품들은 스틸을 찍기 까다롭지 않나?
아무래도 그런 현장에는 블루 스크린, 그린 스크린이 많다. 그것들이 프레임에 걸리지 않도록 찍어야 한다. 앵글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영화적인 느낌을 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예를 들어 최동훈 감독의 < 외계+인(Alienoid) > (2022) 시나리오에서는 옛날 무협 영화 냄새를 맡았다. 스틸 사진에서도 그런 복고적인 느낌이 났으면 했다.
박찬욱 감독이 아이폰으로 찍은 단편 영화 < 일장춘몽(Life Is But a Dream) > (2022)도 작업했는데, 그 작품에서는 클라이맥스 장면에 LED 월이 쓰이기도 했다. 감독님이 아이폰으로 영화를 찍었듯 나 또한 아이폰으로 스틸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에 제약을 느끼는 동시에 흥미롭게 임했다.
외국 영화 현장에도 참여했는데 어떤 경험을 했나?
< 이퀄스(Equals) > (2015), <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Avengers: Age of Ultron) > (2015), < 엔딩스, 비기닝스(Endings, Beginnings) > (2019) 등에 참여했다. 언어나 로케이션도 새로웠지만, 할리우드의 스틸 작가들을 보며 많은 걸 느꼈다. 감독이나 헤드 스태프가 되어 제작 현장을 지휘하는 자리를 최종 목표로 하는 영화인들이 대부분인 데 반해 할리우드에는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같은 역할을 하되 영화의 규모만 키워서 숙련도를 높이는 식이다. 좀 더 장인 정신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 엔딩스, 비기닝스 > 를 작업할 때는 < 귀여운 여인(Pretty Woman) > (1990)의 스틸을 찍은 70대 사진가도 만났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데도 현장에서 열정이 넘쳤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진집 < 아가씨의 순간들 > 은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언젠가 촬영 현장에서 슬펐던 적이 있다. 감독, 배우, 스태프들이 모두 모여 단체 사진을 찍는데, 나는 카메라를 들어야 했기에 정작 사진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또한 스틸 작가가 찍은 수많은 사진 중 극히 일부만 공개되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진다는 점도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런데 사진집이 나오니 그런 슬픔이 다 해소되는 기분이다. 이렇게나마 내 인생의 한 궤적을 다른 분들과 공유하는 것이지 않나. 영화 스틸을 담은 사진집이 나온 사례가 많지 않은데, 박찬욱 감독에게 큰 선물을 받은 셈이다.
사진집의 품질을 높이려다 보니 제작비가 꽤 들었는데, 많은 분들이 사랑해 주셔서 다행이었다. 서촌 미뗌바우하우스(Mit Dem Bauhaus)에서 사진전도 열었다. 책과 전시로 작업물을 보여 줄 기회가 많지 않은 스틸 작가로서 뜻깊은 시간이었다.
최동훈(Choi Dong-hoon 崔東勳) 감독의 2022년 개봉작 <외계+인(Alienoid)> 촬영 현장에서 배우 류준열(Ryu Jun-yeol 柳俊烈)이 액션 연기를 펼쳐 보이는 장면이다. 이재혁은 스틸에 옛날 무협 영화에서 느껴지는 복고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 이재혁
작업 외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 편인가?
원래 여행을 많이 다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국내에서 캠핑 위주로 여행하고 있다. 전시회를 다니거나 그동안 못 봤던 영화를 몰아 보기도 한다. 특히 자연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사진은 SNS용 음식 사진 외에는 잘 안 찍는다. 현장 밖에서 사진을 덜 찍어야 현장에서 열정이 쏟아져 나온다고 믿어서다. 체력이나 집중력이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에너지를 비축해 두려고 한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지금은 한재림 감독이 연출하는 OTT 시리즈 < 머니게임(Money Game) > 의 스틸을 찍고 있다. 웹툰 원작으로 극한의 상황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협력과 반목을 거듭하는 이야기다. 나는 항상 이 작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는다. 현장에서 촬영을 하다 보면 다치기도 하는데, 장훈(Jang Hun 張薰) 감독의 < 고지전(The Front Line) > (2011) 때는 무릎 수술도 했다. 이제 노안도 왔다. 과연 이 일을 얼마나 더 오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늘 마지막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현장에서 힘을 쏟고 싶다. 이제 해외에서도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큰데, 내가 찍은 스틸이 외국 관객들에게 한국 문화의 매력을 기대하게 만들 수 있었으면 한다.
남선우(Nam Sun-woo 南璇佑) 『씨네21』 기자
허동욱(Heo Dong-wuk 許東旭)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