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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023 SUMMER

조각이 된 사진

권오상(Gwon Osang, 權五祥)은 사진으로 조각을 구현해 냈다. 큐비즘이 3차원 입체 사물을 여러 시점의 2차원 평면 그림으로 구성한 것이었다면, 권오상은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수백 수천 장의 평면 사진을 이어 붙여 입체 조각을 빚었다. 속은 텅 비우거나 스티로폼으로 채워 가벼움을 추구했다. 이 ‘사진 조각’은 미술사 그 어디에도 없었다.


권오상 작가가 자신의 초기 작품들 사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조각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조형 구조를 실험해 오고 있는 작가다.

<무제의 지드래곤, 이름이 비워진 자리(Untitled G-Dragon, A Space of No Name)>. 2015. C-프린트, 혼합 재료. 380 × 176 × 105 cm.
대천사 미카엘이 악마 루시퍼를 무찌르는 장면에 가수 G-드래곤을 등장시킨 작품이다.
ⓒ 빅토리아앤앨버트 뮤지엄

영국의 록 밴드 킨(Keane)은 권오상이 만든 멤버들의 조각상 이미지로 2008년 발표한 앨범 <퍼펙트 시메트리(Perfect Symmetry)>의 재킷을 만들었고, 그를 천재 작가라 칭송했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와 펜디, BMW와 나이키 등의 제안을 받아 협업했고, 영국 자블루도비츠(Zabludowicz) 컬렉션과 데이비드 로버츠 재단(The Roberts Institute of Art)을 비롯한 해외 여러 나라의 기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가수 지드래곤(G-DRAGON)의 사진으로 대천사 미카엘이 악마 루시퍼를 무찌르는 모습을 제작한 <무제의 지드래곤, 이름이 비워진 자리(Untitled G-Dragon, A Space of No Name)>는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 기획전의 화제작이었고, 지금은 런던 빅토리아앤앨버트 뮤지엄(V&A South Kensington)에서 6월 25일까지 열리는 <한류! 코리안 웨이브(Hallyu! The Korean Wave)> 전시의 주요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전 세계를 누비는 예술가 권오상을 만나기 위해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그의 작업실로 찾아갔다. 그곳에는 1998년에 만든 최초의 사진 조각인 친구들의 흉상 두 점부터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낸 배우 강수연(Kang Soo-yoon, 姜受延)의 이미지들로 한창 작업 중인 최신작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획기적인 개념이라도 반복적인 작업은 재미없다. 초창기 작품이 큐비즘을 떠올리게 했다면 최근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와 추상적 경향을 보이며 깊이를 더해간다. 김민기(金旼琦) 작가와 협업한 가구 제작, 서울예술단과 함께한 무대 공연까지 그의 활동 영역은 점점 더 넓어지는 중이다.

‘사진 조각’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제가 입학한 1994년 홍익대학교 조소과는 신임 교수들의 넘치는 의욕과 유학파의 패기가 어우러져 ‘뭔가 새로운 미술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지배적이었어요. 게다가 홍대 앞 인디 문화가 색깔을 내기 시작한 때였고, 이전 베이비붐 세대와 구분되는 X세대가 등장한 시기였습니다. 세기말적 분위기와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가 공존했죠. 학교의 커리큘럼 자체는 전통적 수업이 많았지만, 서로가 새로운 시도를 응원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저는 학교 동아리 사진반에 들어갔어요.

입학 첫날 찾아간 조소과 작업실은 천장이 무척 높고 꽤 널찍했는데, 작업하던 흙덩이가 비닐에 덮여 있고 돌과 나무들이 널브러져 있었어요. 그 장면을 보고 있으니 ‘나는 체격이 왜소한 편이라서, 체력이 요구되는 조각 작업이 쉽지 않겠구나’ 싶더라고요. 좋아하는 조각 작업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으로, 다루기도 쉽고 구하기도 용이한 재료를 찾다가 인화지를 발견했고, 그렇게 사진 조각이 시작되었어요. 내 몸 편하자고 시작한 셈이죠.

<구성(Composition)>. 2023. Archival pigment print, 혼합 재료. 110 × 40 × 42 cm.
헨리 무어의 조각을 오마주한 작품으로, 작가 특유의 이미지 채집과 유희적 콜라주가 더해져 독특한 조형 미학이 완성되었다.
ⓒ 아라리오갤러리

< New Structure 4 Prism & Macallan > . 2014. 잉크젯 프린트, 알루미늄. 275 × 316 × 197 cm.
‘뉴 스트럭처’ 시리즈는 잡지에 나오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오려 붙인 ‘더 플랫’ 시리즈를 입체화한 작업이다.
ⓒ 아라리오갤러리

자기 몸에 대한 자각에서 사진 조각이 탄생한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대학 졸업 전에 전시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하셨죠?
우리나라 최초의 대안 공간인 루프(LOOP)가 1999년 개관했는데, 루프의 세 번째 기획전에서 ‘데오도란트 타입(Deodorant Type)’을 처음 선보였어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쌍둥이에 관한 420장의 진술서(A Statement of 420 Pieces on Twins)>(1999) 같은 스타일의 작품이었습니다. 운이 좋았죠. 첫 개인전은 2년 뒤에 인사미술공간(Insa Art Space)에서 열었어요. 이후로 여러 미술관들의 초대를 받았고, 전속 화랑인 아라리오갤러리와는 2005년부터 함께하고 있습니다.

다루기 쉽고 구하기도 용이한 재료를 찾던 작가는 인화지에서 실마리를 발견했고, 그로부터 그의 사진 조각이 출발했다.

인터넷과 잡지 등에서 수집한 사진 이미지를 점토와 청동으로 제작한 미니어처 자동차들은 ‘더 스컬프처’ 시리즈로 불린다.

통칭해서 사진 조각이지만, 25년의 작업을 살펴보면 그 종류가 무척 다양합니다.
제 홈페이지에 ‘작품(Works)’으로 분류해 둔 것만 10개 섹션입니다. 그중 학부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진 큰 줄기가 데오도란트 타입이에요. 방취제인 데오도란트는 냄새의 근본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다른 향으로 슬쩍 냄새를 가릴 뿐인데, 대상을 포착한 사진 이미지의 조합이 본래 대상과 살짝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는 사진 조각과 그 성질이 유사하죠.

‘더 플랫(The Flat)’ 시리즈는 잡지 광고에서 오려낸 시계, 화장품, 보석 사진을 조각처럼 설치한 후 사진을 찍어 프린트한 겁니다. 입체가 잡지의 평면으로, 다시 조각이 됐다가 사진으로 변화해요. 또 플랫 시리즈가 사진으로부터 튀어나와 입체가 된 ‘뉴 스트럭처’(New Structure)가 있고요, 이것들이 벽에 붙은 ‘릴리프’(Relief) 연작도 있어요.

구조가 아닌 소재로 봤을 때는 사람과 동물의 흉상, 그리고 정물로 나뉩니다. 전체적으로는 조각이라는 형식이 갖는 재현의 의미, 무게•공간•시점•추상에 대한 탐구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조각 작업을 하다 남은 자투리 나무가 아깝다는 생각에 작업실에서 쓸 만한 가구를 만들기 시작한 게 김민기 작가와의 협업 프로젝트였습니다. 2021년부터는 3D로 모델링한 형상 위에 사진들을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한 2D 이미지로 풍선 형태 조각도 시작했어요.

장식장 하나를 꽉 채운 수십 대의 미니카들도 흥미롭습니다. 이건 사진 작업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점토와 청동 등 전통적 조각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대신 실물을 보지 않은 채 인터넷과 잡지 등에서 수집한 사진 이미지만으로 자동차와 오토바이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더 스컬프처(The Sculpture)’ 연작으로 불러요. 르망 경기에 나오는 자동차들로 시작했고, BMW가 미술가들과 협업한 아트카도 만들었어요. 대략 100대 정도 만들었는데 전시하러 내보낸 것들을 제외하고 남은 게 40대 정도 되네요.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이 소형 자동차는 장대한 자연의 축소판으로 수집하던 수석과 비슷합니다. 실물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지만,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그 이미지를 접하게 되죠.

권오상에게 사진은 무엇이며, 조각이란 무엇인가요?
제가 김세중(金世中)조각상(2013)보다 먼저 받은 상이 사진비평상(Sajin Bipyong Award, 2001)이었습니다. 첫 해외 전시도 일본 미술관의 사진전이었죠. 조각에서 형태를 만들어 내는 거푸집이 아날로그 사진의 네거티브와 개념적으로 흡사합니다. 이 점에서 저는 조각과 사진이 같은 방식이라 생각해요. 게다가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3차원 지도나 증강현실은 우리가 ‘사진이 조각으로 응용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조각 전공자인 저에게 조각이 무엇이냐 질문한다면, 조각가가 만드는 것들이 조각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만드는 조각들이 조각사의 맥락과 닿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여전히 실험을 이어가고 있죠. 잔 로렌초 베르니니 같은 르네상스 조각가를 탐색한 적도 있고, 인상주의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조각 작품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요즘 관심은 사진을 붙일 수 있는 추상 조각으로 옮겨가 헨리 무어에 이르렀습니다. 보통의 조각가들은 인체를 변형할 때 근육이나 뼈의 형태를 바꿔보는데 무어는 좀 엉뚱합니다. 양차 세계대전 때 방공호에 숨어 지내며 어둠 속에서 목탄 드로잉을 하다가 그런 자유로운 형식을 얻었다고 해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고립됐던 저의 경험이 그가 겪은 전쟁과 가족애를 더 이해하게 했고요. 무어의 방식을 인용하며 얻은 자유로움을 아마도 새로운 작업에서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2011 December>. 2012. 라이트젯 프린트, 나무 액자. 217.6 × 172 cm.
‘더 플랫’ 연작은 잡지에서 수집한 동시대적 이미지들을 입체적으로 구축한 후 이를 촬영해 다시 평면의 사진으로 종결시키는 작업이다.
ⓒ 아라리오갤러리



조상인(Cho Sang-in, 趙祥仁) 서울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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