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첨단 기술이 미술과 접목되며, 미술의 의미를 ‘보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바꾸고 있다. 또한 기술은 ‘화이트 큐브’라는 제한된 공간을 도심 곳곳으로 확장시킨다. 오늘날 기술은 동시대와 소통하며 새로운 예술 향유 방식을 만들어 내는 한편 미술관이 존재하는 방식까지 변화시킨다.
쏟아질 듯 다가오는 초대형 파도를 경험할 수 있는 < 웨이브(Wave) > 는 아르떼뮤지엄 여수의 미디어 아트 전시작 중 하나다. 착시를 통해 입체감을 극대화하는 애너모픽(anamorphic) 기법이 적용되었다. 2021년 8월 개관한 이곳은 해양 도시 여수의 특성을 살려 오션(ocean)을 테마로 삼은 12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 디스트릭트
2014년 10월, 서울 용산에 위치한 전쟁기념관(The War Memorial of Korea)에서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을 원화가 아닌 영상으로 감상하는 < 반 고흐: 10년의 기록(Van Gogh: A Record of 10 Years) > 이 그것이다. 그림 속 인물들이 움직이고, 사이프러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고흐가 살았던 집이 3차원으로 실감 나게 구현된 모습에 관람객들은 연신 탄성을 터뜨렸다. 기존의 평면적인 작품 전시와는 달리 입체적 경험을 제공한 이 전시는 관람 기간을 한 달 더 연장했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관람객들이 전시장에서 강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모션 그래픽 기법과 프로젝션 매핑(Projection mapping) 등 첨단 기술이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모션 그래픽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이미지를 움직이게 만드는 기법을 말하며, 프로젝션 매핑은 건축물의 외벽이나 오브제 등 대상물 표면에 빛으로 이루어진 영상을 비추는 기술이다. 콘서트나 뮤지컬 무대 같은 공연 예술에서도 다각도로 활용되는데,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세리머니에도 프로젝션 매핑이 사용돼 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새로운 예술 체험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몰입형 미디어 아트는 디지털 기술의 진보에 힘입은 바 크다. 몰입형 미디어 아트는 다수의 프로젝터를 사용하여 전시가 열리는 공간의 벽면과 기둥, 바닥면에 이르기까지 전 범위에 걸쳐 영상을 비춘다. 기존에는 전시장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고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공간 전체가 캔버스 역할을 하는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에서는 관람객들이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 일부가 되는 듯한 환상을 경험한다. 시각적 경험이 2차원의 평면에서 3차원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이렇게 몰입형 미디어 아트는 관람객들이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을 새로운 차원으로 탈바꿈시켰다
특히 몰입형 미디어 아트는 예술 감상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고 싶어 하는 MZ 세대의 욕구와 맞물리면서 더욱 인기를 끄는 중이다. 이에 따라 몰입형 미디어 아트 창작자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들이 늘고, 나아가 이러한 콘텐츠를 상설 전시하는 전용 공간들도 생겨나고 있다. 기술이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은 물론 그것을 경험하는 공간까지 바꾸고 있는 것이다.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용관들은 문턱 높은 미술관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다. 첫 번째로 포문을 연 곳은 2018년 11월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에 개장한 ‘빛의 벙커(Bunker des Lumières)’다. 이곳은 원래 1990년 당시 한국통신(현재 KT)이 해저 광케이블 통신망을 운영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이었으나, 2000년대 들어 모바일 시대가 열리면서 쓸모가 없어짐에 따라 방치되었다. 이후 모바일 결제 솔루션 업체 티모넷(TMONET)이 아미엑스(AMIEX, Art & Music Immersive Experience) 전시관으로 개조해 일반에 공개한 것이 바로 빛의 벙커이다
아미엑스는 프로젝션 매핑에 음향을 더해 전시 영상을 투사하는 기술을 말한다. 100여 개의 비디오 프로젝터가 빛을 투사해 벽면과 천장, 바닥에 이미지를 만들고 스피커 수십 개가 웅장한 음악을 들려주면서 관람객들에게 몰입감을 제공한다. 개관 첫 전시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로 꾸며졌다. 빛이 완전히 차단되고 방음이 완벽한 지하 벙커의 공간적 특성 덕분에 관람객들은 영상과 음향에 더욱 깊이 집중할 수 있었다. 티모넷은 그랜드 워커힐 서울(Grand Walkerhill Seoul) 지하 대극장을 개조해 올해 5월부터 또 다른 몰입형 에술 전시관 ‘빛의 시어터(Théâtre des Lumières)’도 운영한다. 빛의 벙커가 수평으로 긴 공간 구조를 감안하여 콘텐츠를 구성했다면 이곳은 20m가 넘는 층고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데 무게중심을 두었다.
미디어 아트 전용 상영관 그라운드시소 명동에서 2021년 6월부터 올해 2월 말까지 선보인 < 블루룸 >. 미디어 아트 스튜디오 해비턴트(HABITANT)가 제작한 이 작품은 신비롭고 몽환적인 푸른색과 강렬한 붉은색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시청각적 경험을 제공했다.
ⓒ 미디어앤아트
아르떼뮤지엄 제주와 여수에서 볼 수 있는 <웜홀(Wormhole)>은 우주의 시공간을 여행하는 듯한 환상적인 몰입감을 경험할 수 있어 관람객들의 호응도가 매우 높다.
ⓒ 디스트릭트
지역의 명소
한편 제주에는 빛의 벙커 성공 이후 또 다른 몰입형 상설 공간이 문을 열었다. 2020년 9월 디지털 미디어 디자인 기업 디스트릭트(d’strict)가 아르떼뮤지엄(ARTE MUSEUM)을 개관함으로써 지역 내 또 다른 매력을 지닌 몰입형 공간이 추가되었다. 스피커 제조 공장을 개조해 만든 이곳은 바닥 면적 1,400평에 최대 높이가 10m에 달해 현재까지는 국내 최대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섬을 콘셉트로 만들어진 11개의 미디어 아트 전시가 각 공간마다 펼쳐진다.
디스트릭트는 이듬해 8월,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여수세계박람회장 내 국제관에 바다를 테마로 한 두 번째 상설 전시관을 마련했으며, 2021년 12월에는 강원도 강릉 경포호 인근에 세 번째 전시관을 개관했다. 이곳에서는 백두대간의 중추인 강원도와 강릉의 지형적 특성을 반영한 전시가 열린다. 빛의 벙커가 화가 중심의 몰입형 공간인 데 반해 아르떼뮤지엄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자연을 테마로 삼았다
아르떼뮤지엄의 전시들은 프로젝션 매핑 기술에 더해 스마트 센서를 통해 추적된 관람객의 움직임이 전시 작품을 변화시키는 모션트래킹 기술, 바람‧향기‧조명 등을 영상과 연동하여 공감각적 효과를 이끌어 내는 실감 재현 기술 등으로 구현된다. 이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환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이 전시장들이 각 지역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이유다.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스튜디오 사일로랩(SILO Lab)의 시그니처 작품인 < 풍화(Breezing Ember 風火) > 와 < 묘화(Mysterious Fire 妙火) > 를 합친 키네틱 미디어 아트 전시다. 음악에 맞춰 풍등의 불빛이 점멸하고, 벽에 설치된 백열전구는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한다. 2019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 아세안의 빛 > 전에서 처음 발표한 후 여러 지역에서 순회전을 이어갔다.
ⓒ 사일로랩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하이브인사이트(HYBE INSIGHT)는 엔터테인먼트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기업 하이브가 운영하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특히 이곳은 기술과 접목된 최근의 전시 경향과 관람 방식이 제대로 구현돼 있다. 사진은 하이브 소속의 아티스트들이 받은 트로피들과 영상으로 꾸며진 8.5m 높이의 대형 트로피 월 공간이다.
ⓒ 하이브
도시로 확장된 미술관
디스트릭트는 2009년 12월, 서울대학교 정보문화학과(Information and Culture Technology Studies)와 함께 학교 문화관 건물 외벽에 진행했던 프로젝션 매핑 프로젝트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산학(産學) 협력 프로젝트는 국내에 프로젝션 매핑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첫 번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지구 온난화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하면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길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건물 외벽을 3D 스캐닝하여 빔 프로젝터로 영상을 투사했다
디스트릭트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은 2020년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SM타운 코엑스 아티움(SMTOWN Coex Artium) 외벽에서 펼쳐진 거대한 파도의 향연이다. 퍼블릭 미디어 아트 <웨이브(WAVE)>라 불리는 이 미디어 파사드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했다. 이 프로젝트는 기술을 통해 미술관의 영역이 거리로 확장된 사례라 할 수 있다. 디스트릭트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미디어 아티스트 유닛인 에이스트릭트(a’strict)를 결성했으며, 2020년 8월부터 9월까지 서울 소격동에 있는 국제갤러리에서 첫 전시 <별이 빛나는 해변(Starry Beach)>을 개최했다. 에이스트릭트는 대형 멀티미디어 인스톨레이션 작업을 선보이며 대중에게 예술 창작자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편 앞서 말한 <반 고흐: 10년의 기록>을 기획하고 제작한 미디어앤아트(MEDIA & ART)도 복합 문화 공간 그라운드시소(GROUNDSEESAW)를 개관해 그중 서울 명동 지점을 2021년 4월부터 미디어 아트 전용관으로 운영 중이다. 예술 콘텐츠 기획사 쿤스트원(KUNST1)이 운영하는 뮤지엄 원(MUSEUM1)도 빼놓을 수 없다. 부산 센텀시티(Centum City)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쿤스트원이 2019년에 설립한 미디어 전문 현대 미술관을 올해 3월 이름을 바꿔 재개관한 곳이다. 약 700여 평 규모의 복층 형태로 이루어진 이곳은 8천만 개의 LED를 바닥과 천장, 벽면에 설치해 관람객들을 초현실적인 경험 속으로 안내한다.최근에는 몰입형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는 국내 창작자들의 작업도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미술관을 벗어나 카페나 팝업 스토어, 플래그십 스토어 등에서 작품을 선보여 그야말로 예술을 사회적 공간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아르떼뮤지엄 제주와 여수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미디어 아트 전시 <문(Moon)>은 관람객들에게 인기 있는 포토존 중 하나이다. 높이 4m의 토끼 모형이 거울을 통해 무한히 확장하면서 색다른 시각적 재미를 선사한다.
ⓒ 디스트릭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