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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SPRING

기획 특집 : 근대로 가는 길, 20세기 여명 속의 한국

개화기, 그리고 100년 후

1876년 한일수호조약으로 시작된개항 이후 조선은 유교적 질서의 붕괴와 함께 급격한 사회 변화를 몰고 온 개화기를 맞았다. 그리고 한 세기가흐른 지금, 한국은 문화적 세계화의 물결 속에 제2의 개화를 맞고 있다. 100여 년 전 외세의 압력에의한 수동적 개화가 식민 지배의 굴욕으로 이어진 것과 달리‘신개화기’를 맞아 우리의 문화적 잠재력이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능동적으로 피어나고 있다.

BTS를 대표하여 RM이 2018년 9월 24일 뉴욕 유엔본부 신탁통치이사회 회의장에서 열린 유니세프의 새로운 청소년 어젠다 ‘제너레이션 언리미티드(Generation Unlimited)’ 출범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세계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라”는 메시지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 조선일보

2018년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의 상징적 절정은 인기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었다. 이 드라마는 미국, 프랑스, 일본 함대들이 잇따라들어와 개항을 요구했던 19세기 말 조선을 배경으로 펼쳐졌는데, 당시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사라진 이름 모를 의병들을 재조명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더욱 큰 의미를 가졌던 이유는 서구의 신문물이 들어오면서 조선 사회가 겪게 된 균열, 여러 계층에서 일어난 의식의 변화를 의병들의 투쟁과 더불어 균형 있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도 개화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항일 서사 중심이었다. 반면에 이 드라마속에는 한양 거리에 들어선서양식 호텔, 프랑스 빵집, 일본식 선술집과 양장점 등이 재현되었고, 거기서 벌어지는 근대식 노동과 연애 같은 일상사가 담겼다. 특히 명문 사대부가의 자제인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매우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 준다. 담대한 성격의 이 여성은 집안끼리 약조한 정혼자가 이미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노비 출신으로 미국으로 밀항해 건너갔다가 미해병 장교가 되어 한양 주재 공사관에 파견된 유진 초이와 사랑에 빠진다. 또한 천민 포수에게 남몰래 사격술을 배워 총을 들고 친일 세력들을 저격하는 스나이퍼로 활동한다. 이처럼 누군가 정해 놓은 삶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해 가는 삶을 선택하는 여주인공을 통해 시청자들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개화기의 여성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2018년 8월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BTS의 콘서트 실황을 담은 영화 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는 에 이어 두 번째로 개봉된 BTS 실황 영화이며 2019년 1월 26일 95개국 3800개 스크린에서 동시 개봉했다. ©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신개화기가 요구하는 콘텐츠

구한말을 콘셉트로 한 복고풍 사진을 연출해 촬영해 주는 대구 산격동 사진관은 2017년 문을 연 후 폭발적 인기를 끌며 서울과 부산에도 분점을 냈다. 현재 이곳은 젊은 층에 불고 있는 복고 트렌드를 대변하는 핫스팟으로 알려졌다.

<미스터 션샤인>은 또다른 상징성도 내포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으로부터 100여 년이 흐른 지금,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된 문화적 세계화 시대가요구하는 콘텐츠의 정형을 보여 준 것이다. 제작비만 무려 430여 억 원을 쓰고 방영을 시작하기 전 제작이 완료되었던 이 작품은 국내의 영세한 드라마 제작 시스템으로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은 총제작비의 70%에 해당하는 금액을투자한 글로벌 플랫폼 넷플릭스였다. 그 결과 한국과 동시간대에 전 세계인이 시청할 수 있는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그리고이를 통해 한국 드라마 콘텐츠의 제작과 소비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 국내 대중문화 콘텐츠 제작업계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이미 시청자들은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문화 사업은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국내 시장 안에 계속 머물 것인지를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신개화기’에 들어선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다시 <미스터 션샤인>을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글로벌 시장에는 거기에 걸맞은성격의 콘텐츠가 요구되기 마련이다. 개화기라는 시대적 배경은 우리 역사에서 가져온 특수한소재이면서 동시에 다른 나라 관객들도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매력을 갖는다. 우리의 개화기가 잉태했던 자유와 평화,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욕망들은 국적과 인종을 뛰어 넘는 보편적 주제이기 때문에 이 드라마는 시청자층을 확장시키고 공감대를 넓힐 수 있었다.

강렬한 문화적 충돌이 벌어지는 특수한 시기인 개화기는 상상력을 펼치기에 좋은 시대적 배경이다. 예를 들어 웨스턴 장르를우리 식으로 해석한 김지운 감독의<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놈> 같은 작품도 개화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중첩의시기’가 허용한 상상력 덕분에영화적 재미와 완성도가 높아졌다.

향후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을 끌 수 있는 우리 문화 콘텐츠의 매력적인 배경이 이 땅에 근대의 문이 열린 개화기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그런 이유다.

새로운 글로벌 스탠다드

현재 신개화기의 양상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두드러진 사례는 BTS 현상이다. 짧은 기간에 글로벌 아이돌그룹으로 떠오른 BTS는 이미 신개화기의 중요한아이콘이 되었다. ARMY라고 불리는 국가와 민족과언어를 모두 뛰어넘은 전 세계적 팬덤을 통해 이름을 알린 이 일곱 명의 보이 밴드는 유튜브 같은 글로벌 네트워크의 요구를충족시키면서 엄청난 신드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핵심적 비결은 춤과 음악이라는 인류 공통의 자산이다.

흥미로운 것은 BTS 열풍과 충돌한 구시대적 반발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일본의 일부 우익 단체들이 이 그룹의 멤버 지민이 입었던 티셔츠를 ‘원폭 티셔츠’라 부르며 혐한 감정의 타깃으로 몰아세운 사건이 그것이다. 이들은 <홍백가합전> 같은 일본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한국 아이돌들을 출연시키지 말아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IT 시대에 글로벌네트워크를 통해 이미 전 세계에 팬덤을 확보하고 있는 BTS에게 구미디어 시대의 TV 프로그램 출연이 그리 긴요한 일은 아니었다. 일부 일본 우익의 반발은 글로벌 시대의 문화 환경에서 시대착오적인 대응 방식이라는 사실만 확인시켜 주었고, 급기야 일본 내 BTS Army들을 자극하여 더욱 굳게 뭉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이것은 신개화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글로벌 스탠다드의 콘텐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확인시켜 주는 사례였다. 신개화기의 글로벌스탠다드에는 국가와 지역 등 구시대적 개념을 뛰어넘어 인류가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가치들이 담긴다. 대결과 경쟁보다는 그 틀을 뛰어넘는 자유와 평화, 그리고공존의 가치들이 그것이다. 지민이입은 티셔츠가 ‘원폭 티셔츠’가 아니라 ‘광복 티셔츠’이고 나아가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홍보한 지구촌 팬들의 자발적움직임은 그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 준다.

신개화기의 글로벌 스탠다드에는 국가와 지역 등 구시대적 개념을 뛰어넘어 인류가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가치들이 담긴다. 대결과 경쟁보다는 그 틀을 뛰어넘는 자유와 평화, 그리고 공존의 가치들이 그것이다.

뉴미디어 시대의 도전

2018년 큰 인기를 끌었던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공식 포스터이다. 대한제국 시절 의병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능동적인 여성상을 제시한 이 드라마는 서양식 호텔, 빵집, 양장점 등 근대적 공간과 일상도 흥미롭게 보여 주었다. © 스튜디오 드래곤

지금 우리는 신개화기의 달라진풍경들을 글로벌 시대의 독특한문화 소비 과정을 통해 목격하고 있다. 영국의 록밴드 퀸과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담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지난해한국에서 일으킨 열풍이 또 하나의 좋은 사례다. 음악 영화 히트작들의 박스오피스 기록들을 모두 갈아치운 이 영화는 퀸의 본고장인 영국보다도 오히려 한국에서 더 큰 신드롬을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가만히 앉아서수동적으로 감상하는 차원을 넘어 함께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이른바 ‘싱어롱 상영회’라는 새롭고 독특한 관람 문화가 있다.

이제 콘텐츠는 창작자가 만들고 수용자가 완성하는 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다. BTS의 공연이 아미들의 떼창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음악 영화도 관객들의 열정적인 호응으로 완성되었다. 신개화기의 문화 소비는 이처럼 어느 나라건어떤 언어를 쓰건 상관없이 이를 수용하는 집단에 의해 새로운의미를 갖게 된다.

그런가 하면 방송을 통해 스타덤에 오른 연예인들이 이제는뉴미디어 플랫폼의 1인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역전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글로벌 문화 환경 속에서는 기존의 인기 연예인들보다 대도서관, 벤쯔, 씬님처럼 스타로 부상한 1인 크리에이터들이 훨씬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다. 최근 들어 유튜브를 통해 유명해진 1인 크리에이터들이 방송 프로그램과 광고에 등장하고, 반대로연예인들의 개인 방송 시도가점점 늘고 있는 것은 구미디어에서 뉴미디어로 권력이 이동하는 현상을 잘 보여 준다.

IT 시대의 뉴미디어가 만들어 낸 디지털 네트워크가 ‘글로벌 문화의 시대’라는 신개화기를 열고 있다. 100여 년 전 우리가 맞이했던 개화기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보면, 오늘의 신개화기에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는 중대하고 명확한 사안이다. 이미 문은 활짝 열려 있고, 가야할길도 분명해 보인다. 우리 문화를지켜 내면서 동시에 글로벌한 보편적가치들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신개화기의 문턱을 넘은 우리의 도전이다.

 

정덕현(Jung Duk-hyun 鄭德賢)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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