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개혁 군주 정조와 함께 조선의 부흥을 꿈꾸며 인문,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비판적 지성과 실천을 주장했던 정약용. 올해는 그가 18년의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고 동시에 대표적인 저서 『목민심서』를 세상에 내놓은 지 200 년이 되는 해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180년이 넘었지만, 그의 마음은 아직도 고향 마을 옆을 흐르는 작은 시내, 초천(苕川)에 머무르는 듯 하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경기도 양수리 두물머리는 한때 사람과 물류를 실어 나르는 나루터로 번성했던 곳이지만, 1970년대 초반 팔당댐이 완공되면서 물길의 기능을 잃었다. 그러나 기온 차가 큰 새벽이면 어김없이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물안개는 바라보려는 대상을 흐릿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시야를 온전히 가로막는 것은 아니므로 눈길은 드러난 것과 감춰진 것 사이에 머문다. 투명하고 정직하게 드러난 부분과 절반쯤 숨겨진 부분이 주는 비밀스러움과 환상이 적절한 균형을 이룰 때 사람들의 미적 호기심은 발동한다. 수종사에서 내려다본 두물머리는 예부터 이름난 명승으로 시인묵객들이 한강의 광활함과 청정함을 시로 읊고 화폭에 담기 위해 즐겨 찾던 곳이다. 지금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수종사와 물안개
정약용의 저서 500여 권 가운데서 대표작에 속하는 『목민심서 』는 총 48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올해로 발간 200주년을 맞았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하고, 목민관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백성의 입장에서 저술한 점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두 물길이 만나는 곳이란 뜻을 가진 두물머리는 지명으로 흔히 쓰이는데, 이 글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경기도 양수리 남쪽을 일컫는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하남을 지나 팔당대교를 건너 늦어도 한 시간 안에 탁 트인 강과 산을 코앞에서 호젓하게 느낄 수 있으니 서울 사람들에겐 최적의 주말 나들이 코스다. 여기서 300m 정도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수고를 감내하면 두물머리를 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운길산 수종사에 오를 수 있다.
두물머리에는 강원도 정선과 충북 단양 일대를 서울의 뚝섬이나 마포나루와 잇는 나루터가 있어 한때 물류 중심지로 매우 번성하였다. 그러다 바로 그 하류에 다목적 댐인 팔당댐이 1973년 완공되면서 물길로서의 기능은 완전히 사라졌다. 댐의 영향으로 강폭이 넓어지고 유속도 느려지다 보니 강이라기보다 차라리 호수에 가까워 이 일대는 고인 물을 좋아하는 부들, 갈대, 연꽃, 마름 같은 수생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런 생태 환경의 변화를 이용해 부근 강변 습지에 길을 내고 다양한 시설과 조형물을 설치해 습지 공원을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세미원(洗美園)과 다산생태공원이다. 평일에도 이 일대에 차들이 붐비는 데에는 이들의 역할이 크다. 압권은 물안개다. 기온 차가 큰 새벽이면 이 잔잔한 수면에 어김없이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정약용의 고향 마재마을은 그가 강진에서 18년의 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세상을 떠나기까지 18년을 더 살았던 곳이다. 고향에서 낚시를 하며 여유롭게 전원 생활을 즐기는 게 그의 꿈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운 좋게 상류인 청평호에서 생겨난 물안개가 이 산 저 산의 허리를 휘감다 산바람에 쓸려 두물머리의 새벽 강가로 내려앉는 광경을 보면 저절로 숨이 멎는다.이 미명의 물안개를 마주한 사람은 누구도 오래된 풍경으로 변해 버린 옛날의 기억 속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한강 제1경으로 꼽히는 두물머리의 일출을 수종사에서 보고 내려오는 길에 주차장 옆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러 여주인과 몇 마디 인사를 나누게 된다면, 아마 그녀를 이곳에 붙들어 놓은 스마트폰에 담긴 비밀스럽고 환상적인 두물머리의 전경 사진 몇 장도 보게 될 것이다.
1783년 봄, 22세의 정약용(1762~1836)은 초급 관리가 되는 생원시에 합격하자 이를 자축하기 위해 10여 명의 벗들과 함께 수종사를 찾았다. 초라하지 않게 동학들과 함께 귀향하라는 아버지의 뜻이었다. 15세에 결혼한 뒤 서울로 분가해 과시를 공부한 지 7년 만이었으니 아버지로서는 기다리는 동안 마음고생이 컸을 것이고, 자신의 가문이 속한 붕당인 남인들의 유대와 결속을 바라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수종사는 천년이 넘은 고찰로 경개가 아름답고, 나고 자란 마재마을에서도 멀지 않아 어린 시절 정약용이 자주 머물며 독서를 하고 시를 짓던 곳이다. 그날도 밤이 되고 달이 밝자 술을 가져오게 하고 시를 지으며 “어렸을 때 노닐던 곳에 어른이 되어 돌아온 즐거움”을 함께 누렸다. 다산은 그날의 일을 소상하게 「수종사 유람기」(遊水鍾寺記)에 남겼다.
해배 200주년
동시대로 비유하자면, 한국인들에게 정약용은 독일의 피히테나 프랑스의 볼테르에 견줄 만큼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시대를 초월한 비판적 지성과 경세치용의 사상을 방대한 저술로 남겼다. 2012년 유네스코가 ‘세계 기념 인물’에 정약용을 헤르만 헤세, 클로드 드뷔시, 장 자크 루소와 함께 선정해 발표했으니 그 명성이 꼭 국내에 그친 것만은 아니다. 올해는 그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인 『목민심서』(牧民心書) 발간 200주년과 18년의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마을로 돌아온 지 200주년이 겹친 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남양주시와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지난 4월 서울에서 국제심포지엄을 갖기도 했다.
양평군에서 생태 환경을 이용해 만든 정원인 세미원(洗美苑)에서는 약 27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데 그중 수생식물이 약 70여 종에 달한다. 골풀(Juncus effuusus var. decipiens Buchenau)과 부들(Typha orientalis C. Presl) 등 각종 수생식물로 이곳의 여름은 더 싱그러워진다.
그의 저서가 500여 권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 우리는 거의 해마다 그의 저작들을 꺼내 오늘의 길을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19세기 후반 밀려오는 외세를 막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주와 개혁을 꿈꿨으나 그때마다 좌절했던 고종이 그의 문집을 읽어 보고는 그와 동시대에 살지 못했음을 개탄했다는 그 마음으로.
이번 여행길은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 자라고 또 노년을 보내다 돌아간 한강 일대를 돌아보며 그의 생애와 생각의 조각들을 더듬어볼 요량이지만, 세간에서 이해하고 기대하는 학구적이고 엄숙하고 교훈적인 길에서는 멀찌감치 벗어날 것이다. 네 살에 천자문을 읽고, 일곱 살에 시를 지어 열 살 이전에 쓴 시만으로 『삼미집』(三眉集)이란 시집을 묶었다는 천재적 재능보다는 앞서 말한 대로 간신히 생원이 된 뒤 정조의 눈에 들었음에도 번번이 대과에 떨어지다 28세에 어렵게 급제했다는 왠지 모를 친근한 이력들을 들춰낼 것이다. 그 역시 자신이 꽁생원처럼 고지식한 인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리라.
동시대로 비유하자면, 한국인들에게 정약용은 독일의 피히테나 프랑스의 볼테르에 견줄 만큼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의 저서가 500여 권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 우리는 거의 해마다 그의 저작들을 꺼내 오늘의 길을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사흘간의 일탈
운길산 수종사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두물머리의 빼어난 경관은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아온 명소이다. 정약용의 생가에서 멀지 않아 어린 시절 그도 이곳을 찾아 자주 머물며 책을 읽고 시를 지었다.
정조의 발탁으로 왕실의 학술기구인 규장각에 들어간 정약용은 주요 관직을 거치며 정조의 개혁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했다. 그러나 그의 일탈은 기록된 것만도 두 번이니 아마 그의 능력이나 재능만큼 엉뚱한 구석도 많았던 모양이다. 한번은 진주목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뵈러 간다며 무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했다.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이라는 2년차 교육생 시절이었다. 이를 안 정조가 그를 잡아오라 명하고 태형 50대의 벌을 내렸다. 물론 정조는 얼마 뒤 정약용의 죄를 사면해 주었다.
두 번째는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좌부승지 시절의 일로 스스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797년 여름, 내가 서울 남산 아래 살 때이다. 석류가 처음 꽃을 피우고 보슬비가 막 개는 광경을 보니 초천에서 물고기를 잡기에 가장 알맞은 때란 생각이 들었다. 규정에 따르면 관리는 휴가를 청하여 허락을 얻어야 도성 문을 나설 수 있다. 그러나 정식 휴가는 얻을 수 없으므로 그대로 출발하여 초천에 갔다. 다음 날 강에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았는데, 크고 작은 고기가 모두 50여 마리나 되었다.
작은 배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물 위에 뜬 부분이 겨우 몇 치에 불과했다. 배를 옮겨 남자주(濫子洲)에 정박하고 즐겁게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갈대로 둘러싸인 초천은 고향 마을 옆을 흐르는 작은 내로 그에게는 고향의 상징이다. 남자주란 두물머리 아래쪽에 있는 작은 모래섬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일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물고기 맛을 보았으니 나물 맛도 보자며 일행을 부추겨 강 건너에 있는 광주 천진암으로 향한다. 천진암은 정약용의 형제들이 천주학을 공부했던 인연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에 배를 댄다 해도 걸어서 10㎞는 올라가야 하는 산속에 있다.
“우리 사형제와 일가 사람 서너 명이 함께 천진암에 갔다. 산속에 들어가자 초목은 이미 울창하였고 꽃들이 만발하여 꽃향기가 코를 찔렀다. 온갖 새들이 울어대는데 소리가 맑고 아름다웠다. 새소리가 들리면 길을 가다 멈추고 서로 돌아보며 즐거워하였다. 절에 도착한 뒤 술 한 잔에 시 한수를 읊으며 시간을 보내다 사흘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이때 지은 시가 20여 수가 되었고, 우리가 먹은 산나물은 냉이, 고사리, 두릅 등 모두 56종이나 되었다.”(『다산시문집 14권』)
그의 근무지 이탈 사건이 정조에게 보고 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정약용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긴 유배에서 돌아와 노년을 보냈던 고향 집 ‘여유당’의 안마당이다. 1957년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그의 고향 마을에 조성된 다산 유적지는 이 집과 다산문화관, 다산기념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스스로 지은 당호 ‘여유당’은매사를 “마음에 두려움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대하여야 한다”노자의 가르침을 담았다.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조선 시대에는 이름 외에도 친구나 동료들이 편하게 부르는 ‘호’라는 호칭이 있다. 대개 인물의 특징이나 성품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명칭을 붙인다. 집에도 ‘당호’라 불리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당호를 자신의 호로 삼기도 한다. 다산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온 직후에 자신의 공부방에 스스로 붙인 당호가 ‘여유당(與猶堂)’이다.
“나는 나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용기는 있지만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하나 선택해서 할 줄을 모른다. 그러니 한없이 착한 일만 좋아하다 욕만 실컷 얻어먹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노자』를 읽다가 편들고 좋아하는 일(與)은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猶)은 사방을 두려워하듯 하라는 글을 보았다. 안타깝다. 이 두 마디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다스려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개혁 군주의 총애를 받는 젊은 관리에게 정적은 피해갈 수 없는 조건이었다. 특히 서학과 천주교에 우호적인 생각을 가진 그에 대한 공격은 정조의 보살핌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1800년 1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온 그는 자신의 소원대로 초천에 방이 한 칸 있는 뱃집을 장만해 처자와 함께 낚시를 하며 지내려고 그럴 듯한 현판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 현판은 걸어 보지도 못한 채 그해 여름 갑작스런 정조의 부음과 함께 시작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자신과 둘째 형 약전(若銓)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 유배형을 받았지만, 종교적 신념이 남달랐던 셋째 형 약종(若鍾)은 결국 순교했다.
정약용에게는 다산(茶山)뿐 아니라 ‘삼미(三眉)’라는 호도 있다. 어려서 앓았던 천연두의 흔적 때문에 눈썹이 세 개처럼 보여서 붙은 것이다. 그는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여섯을 홍역과 천연두로 잃었다. 막내아들의 사망 소식은 강진의 유배지에서 들었다.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데 살아 있고, 너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데 죽었구나”라는 그의 탄식에는 자식을 연민하는 아버지의 깊은 슬픔이 배어 있다.
그는 죽은 자녀 모두에게 절절한 애도의 글을 남겼으며, 4일 만에 잃은 첫딸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향 마을 뒷산의 선영에 묻었다. 이런 개인적인 슬픔을 밑거름으로 정약용은 전염병에 대한 치료에 관심을 높여 홍역의 치료법을 소개한 의학서와 종두법을 소개한 의학서 두 권을 집필하기도 했다.
한강에서 여름 나기
강진에서 18년의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정약용은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 고향에서 18년을 더 살았다. 그는 만년의 자신을 ‘열수(冽水)’라 불렀다. 열수는 한강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한강에서 태어나 평화로운 전원의 삶을 꿈꾸었지만 현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819년, 배를 타고 충주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면서 둘째 형 약전과 해마다 가을이면 수십 일 동안 머물며 농사 일을 보살피던 문암(門巖, 양평 서종면 수입리 벽계구곡 부근)에 있는 논밭을 둘러보았다. 그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기를 40년 전부터 꿈꿔 왔다”고 회고했다. 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3년 전인 1816년에 죽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쓴 자신의 저술들을 교정하고 편집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그렇다고 그의 기발함과 엉뚱함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는 더위를 이기는 방법에 관한 16편의 시를 남겼다. 제목 몇 개만 나열하면 이렇다. 「시원한 대자리 위에서 바둑 두기」, 「동쪽 수풀에서 매미 소리 듣기」, 「달밤에 물속에 발 담그기」, 「집 앞 나뭇가지를 쳐내 바람 통하게 하기」, 「도랑 쳐서 물꼬 트기」, 「처마까지 포도나무 덩굴 올리기」, 「아이들과 햇볕에 책 말리기」, 「오목한 냄비에 매운탕 끓이기」. 그는 체질적으로 더위를 많이 탔을까? 아니면 뚱뚱했을까?
정약용의 고향 마을에 자리한 다산유적지에는 그의 묘와 복원한 생가, 그리고 다산문화관과 다산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다산문화관에는 긴 유배 생활 동안 집필한 수많은 저서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다산기념관에는 수원성 축조에 쓰였던 조선 최초의 거중기를 비롯해 다양한 전시물이 소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