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는 조선 후기의 뛰어난 학자 김정희가 유배지 제주도에서 1844년에 그린 그림으로, 흔히 한국 문인화의 정수로 불린다. 개인 소장품이었던 이 유명한 그림이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자, 정부는 이를 문화훈장으로 치하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은 특별전을 열어 긴 여정의 끝에 국민의 품에 안긴 국보를 환영했다.
2020년 12월 8일, 정부는 13명의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날 수훈자 중 가장 눈길을 끈 이는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孫昌根) 씨였다. 유일하게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데다가 이 훈장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는 경우도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수집한 국보•보물급 문화재를 아무런 조건 없이 국가에 기증해 왔으며, 특히 2020년 1월엔 값을 매길 수 없는 국보 <세한도>를 국민 모두의 자산이 되게 해 국민 문화 향유 증대에 기여했다.”
문화재청은 손 씨에 대한 훈장 수여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는 2018년에도 수백 점의 미술품과 문화재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소장하고 있던 미술품 전체를 기증하려다가 마지막 순간 빼놓은 한 점이 바로 <세한도>였다. 그만큼 애착이 컸다는 얘기다.
<세한도>. 김정희. 1844. 종이에 수묵. 23.9 × 70.4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세한도> 두루마리 중 가로 약 70cm 길이의 그림 부분이다. 작가가 『논어(The Analects of Confucius)』의 한 구절에 자신의 처지와 마음을 빗댄 발문을 왼쪽에 써서 붙였다. 소나무와 측백나무,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오두막집으로 유배지 제주도의 외롭고 황량한 풍경을 묘사한 이 그림은 조선 시대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배지 스승의 선물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허련(許鍊 1808~1893). 19세기. 종이에 채색. 79.3 × 38.7 cm.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 Amorepacific Museum of Art) 소장.
조선 후기 산수화의 대가 허련이 그린 제주에서 유배 생활 중인 스승 김정희의 모습. 중국의 시인 소동파를 그린 <동파입극도(東坡笠屐圖)>가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허련은 평소 소동파를 존경했던 스승을 위해 <동파입극도>에 스승의 모습을 투영했다.
1974년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 두루마리’는 다 펼치면 전체 길이가 1,469.5㎝에 이른다. 이 중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그린 가로 약 70㎝ 길이의 그림이 <세한도>이며, 나머지 대부분은 여러 사람의 감상평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세한도>와 후일 덧붙여 장정된 두루마리를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해서 그림보다 감상문이 더 긴 두루마리가 만들어진 것일까?
김정희가 태어난 18세기 말 한반도는 조선 왕조(1392~1910)가 통치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선 루이 16세에 반기를 든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됐고, 미국은 독립을 선언하고 8년간의 전쟁 끝에 1783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았다. 조선은 이러한 세계사적 격변과 동떨어진 채 아직도 이웃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유교 국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실용주의 학문이 활기를 띠면서 근대가 서서히 태동하고 있었다.
왕실의 먼 친척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희는 고증학과 금석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 일찍부터 선진 학문을 익혔고, 24세 땐 사신으로 청나라를 방문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연경(현재의 북경)에 가서 석학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추사, 또는 완당이라는 아호로도 널리 알려진 그는 문인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로 요구됐던 시•서•화 모두에 뛰어났으며, 특히 독창적 서체인 ‘추사체’를 창안했다.
19세기 조선은 어린 왕들이 잇따라 즉위하면서 외척의 세도가 극에 달했던 정치적 혼란기였다. 실학과 천주교 같은 신식 사상이나 새로 유입된 종교는 보수적인 지배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정적들을 내쫓아 먼 곳으로 유배시키는 일이 흔했다. 김정희도 모함을 받아 1840년, 55세의 나이에 귀양지 중 가장 멀고 험한 지역이었던 제주도에 유배됐다.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혹독한 귀양살이는 8년 4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는 유배 기간 동안 끊임없이 질병에 시달렸고 아내가 사망하는 슬픔까지 겪어야 했지만, 절망 속에서도 글씨와 그림에 몰두했다. 그런 그에게 역관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 배편으로 보내 주는 귀한 서적과 연경의 최신 정보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상적은 중국을 왕래하며 어렵게 사 모은 서적들을 유배지에서 외롭게 지내는 스승에게 보내오곤 했다.
<세한도>는 이 시기 김정희가 이상적에게 선물한 그림이다. 화폭 속에는 한 채의 소박한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는 텅 빈 여백으로 처리되었다. 그림 왼쪽에는 다른 종이를 이어 붙이고 칸을 그려 그동안 책을 보내준 일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정갈한 필체로 적었다. 이어 『논어(論語 The Analects of Confucius)』의 「자한(子罕 Zi Han)」 편에 나오는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When the year becomes cold, then we know how the pine and the cypress are the last to lose their leaves; 번역 James Legge)”는 구절을 인용했다. 그림 제목은 이 인용문의 첫 두 글자에서 왔다. 제주도 고독한 유배살이를 ‘추운 계절’로 은유하면서 역경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제간 우정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총 길이 1,469.5cm에 이르는 <세한도> 두루마리에는 김정희로부터 이 그림을 선물로 받은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중국 지식인 16명에게 받은 감상문이 이어져 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 그림이 품고 있는 의미를 새기면서 군자가 지조를 지키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술회했다.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이기도 했던 김정희는 그림 왼쪽에 다른 종이를 이어 붙여 제자 이상적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비롯해 유배 중인 자신의 심경을 적었다.
이 그림의 세 번째 소장자였던 김준학(金準學 1859~?)이 1914년에 쓴 ‘완당세한도’ 다섯 글자와 감회를 적은 시(詩).
국경을 넘은 긴 여정
스승에게서 <세한도>를 받았을 때 이상적은 중국 출장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감격한 그는 이 그림을 들고 연경으로 향했다. 그의 방문을 환영하는 모임에 중국의 지식인 17명이 모였는데, 이상적은 그들에게 스승의 그림을 보여 주며 감상문을 부탁했고, 그중 16명이 글을 써 주어 지금까지 전해 오게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군자가 지조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과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이 두루마리에는 총 20명의 감상문이 적혀 있는데, 중국인 16명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은 한국인이다. 여기에도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 이 그림은 첫 번째 소유자였던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와 그 아들에게 대물림되었다가 또 다른 주인을 거쳤고, 20세기 전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Chikashi Fujitsuka 1879~1948 )의 손에 들어갔다. 경성제국대학 중국 철학과 교수였던 그는 김정희에 관한 연구에 심취해 그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 그림을 소유하게 되었고, 1940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편 김정희의 서화를 연구했던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은 일본으로 건너간 이 그림을 돌려받기 위해 1944년 도쿄 대동문화학원(大東文化学園) 원장으로 있던 후지쓰카를 찾아갔다. 그는 “원하는 대로 다 해 드리겠으니 작품을 양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후지쓰카는 자신도 김정희를 존경한다며 그의 간곡한 제안을 거절했다. 뜻을 접지 않은 손 씨는 두 달간 매일 후지쓰카를 찾아갔고, 마침내 그해 12월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당신”이라는 말과 함께 아무런 대가 없이 작품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이듬해 3월 도쿄는 미군의 폭격을 받았고, 후지쓰카의 연구 자료 대부분이 이때 화재로 손실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35년의 일제 강점에서 해방됐다. 손재형은 이 기쁜 마음을 담아 세한도 두루마리에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 정치인 3명에게서 감상문을 받았다. 이들은 나라를 되찾은 감격과 함께 일본인에게서 <세한도>를 되찾아온 손재형을 상찬하는 글을 남겼다. 당시 그는 비단 두루마리를 새로 단장하면서 군데군데 여백을 남겨 놓았다. 아마도 더 많은 글을 받으려 했으나 실현되지 않은 듯 두루마리의 상당 부분이 지금도 비어 있다.
이후 손재형은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면서 자금이 필요해 이 그림을 포함해 많은 서화 소장품들을 내놓게 됐다. 이를 인수한 이가 인삼 무역으로 크게 성공한 개성 출신 사업가 손세기(孫世基 1903~1983)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뛰어난 안목을 지녔던 그는 김정희의 작품을 특별하게 여겼다. 그의 수집품을 물려받은 이가 바로 지난해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장남 손창근 씨다.
두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 중국으로, 다시 일본을 오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던 <세한도>가 디지털 시대 새로운 작품의 소재로 재해석된 것이다.
미디어 아티스트 장-줄리앙 푸스(Jean-Julien Pous)는 <세한도>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흑백 영상 작품 <세한의 시간(Winter Time)>을 통해 표현했다.
두루마리의 끝부분에는 20세기 학자, 정치인 등 한국인 4명의 감상평도 실려 있다.
두루마리의 맨 끝에는 한학자 정인보(鄭寅普 1893~1950)의 매우 긴 감상평이 적혀 있다. 그는 김정희의 심경을 헤아리는 한편 이 그림과 함께 나라를 되찾은 기쁨에 대해서도 적었다.
서예가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은 2차 대전 막바지에 포탄이 떨어지는 도쿄에서 이 그림을 어렵게 가지고 돌아온 손재형의 용기를 크게 칭찬했다.
『몽고유목기(蒙古游牧記)』 등을 저술한 중국 학자 장목(張穆 1805~1849)은 김정희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신하는 감상평을 남겼다.
21세기 프랑스인의 해석
2020년 11월 말 국립중앙박물관은 세한도 두루마리 기증을 기념하는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 – 세한(歲寒)•평안(平安)>전을 열었다. 그림이 전시된 적은 몇 차례 있었지만, 두루마리 전체를 공개한 것은 2006년 이후 처음이다. 오는 4월 4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회에서 특히 눈여겨볼 게 있다. 인트로 성격으로 제작된 흑백 영상물 <세한의 시간(Winter Time)>이다. 이 7분짜리 영상에는 제주의 바람과 파도, 쉼 없이 줄을 잣는 거미와 무성한 소나무숲 등이 고독하게 담겼다.
이 영상을 제작한 미디어 아티스트 장-줄리앙 푸스(Jean-Julien Pous)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세한도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겠지만 외로움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La peinture Sehando me fait ressentir plusieurs émotions, mais peut-être est-ce le sentiment de solitude le plus fort.)”면서 “요즘 우리도 코로나19 때문에 외로운 도시에 사는 상황이라서 더 크게 와 닿았다(Ce sentiment est sans doute exacerbé par la Covid-19, qui nous fait sentir d'autant plus seuls dans une grande ville.)”고 설명했다. 정밀한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21세기 프랑스인이 <세한도>에 남긴 감상문이라 하겠다. 두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 중국으로, 다시 일본을 오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던 <세한도>가 디지털 시대 새로운 작품의 소재로 재해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