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목가구는 화려한 채색이나 정교한 조각 대신 나뭇결을 활용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특성이 있다. 2010년 국가무형문화재 소목장 기능 보유자로 지정된 박명배 장인은 전통 목가구 기법을 계승하는 한편 철저한 도면 작업을 통해 비례미를 구현한다.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자신의 공방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박명배 소목장. 꼼꼼한 도면 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그의 작품들은 간결하고 기품 있는 전통 목가구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나무를 다루는 목수는 건축물을 짓는 대목(大木)과 가구나 각종 기물을 만드는 소목(小木)으로 구분한다. 전통 목공 기법으로 장롱, 문갑, 책상 등을 만드는 장인을 소목장(小木匠)이라고 한다. 기교가 화려했던 고려 시대(918~1392)와 달리 조선 시대(1392~1910)의 공예품은 유교적 영향으로 소박함과 절제미가 돋보인다.
소목장 박명배(Park Myung-bae, 朴明培)의 작품은 조선 시대 목가구의 전형을 나타내면서도 화장판(化粧板, 가구의 앞면)의 재질로 인해 수려한 느낌을 준다. 간결한 선과 판재의 역동적 무늬가 어우러진 그의 작품은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목수에게 용목(龍目)이 없으면 속 빈 강정이죠. 나뭇결은 인위적으로 만든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자연 그대로이니 싫증이 나지 않아요. 전통 가구는 장식이나 조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뭇결 자체를 잘 살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박 장인이 마치 용이 뒤엉킨 것 같은 오래된 느티나무의 나뭇결을 좋아하는 이유다. 그의 말처럼 나무가 만들어 내는 무늬들은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기술력과 창의성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의 기능 보유자 문하에서 오랜 시간 수련하며 전수자, 이수자, 전승교육사의 과정을 거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박 장인은 이와 달리 전승 계보가 없다. 특정 소목장의 제자로 들어가 기술을 전수받지 않았다는 얘기다. 21세 때인 1971년 전국기능경기대회 목공예 부문 1위를 시작으로 스스로 능력을 입증해 인정받았다. 1989년에는 동아(東亞)일보사가 주최한 동아공예대전에 목리반(木理盤)을 출품해 대상을 받았고, 1992년에는 한국문화재재단이 주관하는 전승공예대전에서 의걸이장(欌)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도면 구성에만 1년이 걸린 이 작품은 판재로 사용한 소나무를 인두로 지져 독특한 색감을 냈다. 그가 고안해 낸 방법이다.
“원래 이 기법은 오동나무를 써요. 오동나무판을 인두로 지져 태운 후 솔이나 짚으로 문지르면 무른 부분은 검게 패고 단단한 부분은 덜 파여 나뭇결대로 무늬가 생기죠. 그 무늬가 질박하고 품위가 있어 예로부터 사랑방(舍廊房) 가구에 많이 쓰였습니다. 이 기법을 소나무에 적용해 수려한 문양을 내 봤는데 큰 상을 받았죠.”
박 장인은 바티칸박물관 한국관에 들어가는 가구 일습을 비롯해 미국 LA와 워싱턴D.C., 독일 베를린, 폴란드 바르샤바, 일본 오사카 등 세계 주요 도시의 한국문화원에 들어간 사랑방 가구를 제작했다. 또 고종(高宗)황제(재위 1863~1907)가 태어난 저택인 서울 운현궁(雲峴宮)을 복원할 때 100여 점에 이르는 가구 제작을 총괄하기도 했다. 전통 목가구의 제작 기법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뛰어난 기량 덕분이었다.
한국의 전통 목가구는 못이나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부재에 홈을 파서 끼워 맞추는 결구법을 사용한다. 박 장인은 젊은 시절 내로라하는 목수들을 찾아다니며 70여 가지의 짜맞춤 방식을 배웠다.
특별한 인연
비록 계보는 없지만, 그에게도 스승이라 할 만한 특별한 인연이 있긴 했다. 1950년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태어난 그는 집안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 후 상급 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 됐다. 18세 때 서울로 올라와 목수인 친척 형의 소개로 당시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공예과 최회권(崔會權) 교수의 공방에 들어갔다. 상업적으로 제작해 파는 가구가 아니라 목공예 작품을 먼저 접한 것이다.
“예전에는 교수나 전공자는 디자인만 하고 제작은 목공소에서 해 주는 경우가 많았어요. 최 교수님 공방에서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작품을 기획하고 완성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죠. 대학에서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교수님 공방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몇 년 후 최 교수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공방이 문을 닫자 그는 진로를 고민해야 했다.
“현대 공예는 작가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저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장인 기질이 요구되는 우리 전통 가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죠.”
그는 이름난 목수들에게 못을 쓰지 않고 목재에 홈을 파서 짜맞추는 70여 가지 전통 짜맞춤[結構] 방식을 배웠다. 수년에 걸쳐 나무를 말리고 다스려서 숨통을 틔워 주는 결구법은 소목의 핵심 기법이다. 소목장이 갖춰야 할 기능적인 면을 두루 익힌 그는 30세가 되던 1980년에 독립했다.
최상의 도면
자신의 공방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최순우(崔淳雨, 1916~1984)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목공예 인생에 큰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최 관장은 한국 미술사학의 기초를 마련한 학계의 큰 스승으로 박 장인에게 전통 공예의 철학과 안목을 가르쳐 주었다.
박 장인은 최 관장을 통해 전통 가구의 비례미에 눈을 떴다. 우리 가구는 앞면을 테두리로 분할하고, 나뉜 면에 무늬 좋은 목재를 쓴다.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는 여름과 겨울의 온도 및 습도 차이가 크다. 그래서 판재를 통으로 쓰면 시간이 지나면서 뒤틀리기 때문에 면을 나눠야 한다. 기능적인 이유로 면을 분할하지만 이를 통해 아름다운 비례가 생기니, 어떤 비율로 면을 쪼개느냐가 관건이다. 1984년 그는 청와대에 전통 안방을 꾸미면서 판재 선별부터 디자인, 비례와 형식, 제작 공정에 이르기까지 최 관장의 세밀한 가르침을 받았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솜씨 좋은 목수를 불러들여 집 안 분위기에 맞는 가구를 합작으로 만들어 냈던 것처럼 그도 최 관장과 합심해서 조선 시대 가구의 원형을 되살려냈다. 최 관장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인연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지금도 최 관장과 작업할 때와 마찬가지로 일대일 도면 그리기를 고수한다.
“가구 도면을 실물 크기 그대로 그려서 벽에 붙여 놓고 자꾸 들여다봅니다. 그러면 어제 안 보이던 것이 오늘 보이고, 어제는 괜찮아 보였는데 오늘은 고쳐야 할 게 눈에 들어오죠. 시간을 두고 수정하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해 최상의 도면을 완성합니다.”
뒤틀림 없이 깔끔한 비례미를 자랑하는 그의 작품은 이처럼 꼼꼼한 도면 작업을 거쳐 만들어진다. 재현은 하되 복제는 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진 그는 지금도 짬이 날 때마다 스케치하며 디자인을 구상한다. 두 딸을 비롯해 19명의 이수자들과 많은 교육생들을 배출한 그는 올해 18번째를 맞는 < 소목장 박명배와 그의 제자전 > 을 해마다 거르지 않는다. 전통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 아직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결한 면 분할과 나뭇결로 인해 단아하면서도 화려함이 풍기는 사층 책장. 전통 가구는 목재의 수축 및 팽창으로 인한 변형과 파손을 막기 위해 가구 전면을 분할하는데, 이를 통해 아름다운 비례와 조형미가 생겨난다.
화장판의 나뭇결이 아름다운 박 장인의 머릿장. 머리맡에 두고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의 단층 장이다. 남성들은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여성들은 간단한 옷가지를 수납하는 데 주로 사용했다.
반닫이는 앞면의 위쪽 절반을 아래로 젖혀서 여는 가구이다. 빈부에 상관없이 집집이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던 필수품이었고, 지역별로 다른 특징을 나타낸다. 사진은 앞면 중앙에 호리병 모양의 경첩 장식이 달려 있는 강화(江華) 반닫이.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