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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AUTUMN

더 이상 다음 소희가 없길

< 다음 소희(NEXT SOHEE, 下一个素熙) > (2023)는 지난해 열린 제75회 칸 영화제(Festival de Cannes) 국제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됐다, 이는 한국 영화로서는 최초이기도 하다. 사회에 가려진 청소년 노동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영화는 국적과 세대를 초월한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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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다음 소희 > 는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간 여고생이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주목받았다. 영화는 제목처럼 주인공 소희가 끝이 아님을, 어딘가에 있을 소희의 다음에 주목해 주길 바라고 있다.
ⓒ 트윈파트너스플러스

제75회 칸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 다음 소희 >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자, 현지 관객들은 눈물을 훔치며 7분여간 기립박수를 쳤다. 상영관 밖을 나오며 한국인 취재진이 극장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본 관객들은 카메라를 향해 기꺼이 박수를 전했다. 어떤 이들은 “최고”를 외치며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상영 후 극장 안에서의 기립박수는 영화제 관례상 흔한 일이기도 하지만, 극장 밖에서까지 반응은 꽤 드문 일이다.

세계의 공감을 얻다

당시 경쟁 부분에 초청된 한국 영화 <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 分手的決心) > (2022)이나 < 브로커(Broker 掮客) > (2022) 상영회와 비교해도 한층 뜨거운 반응이었다.

프랑스 언론인 에마뉘엘(Emmanuel) 씨는 “정말 가슴 아파요. 매우 매우 좋은 작품이에요”라며 울먹이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벨기에에서 온 엘리(Elly) 씨는 “유럽 사람이 이 영화를 보고 한국인과 다르게 느낄까요? 그렇지 않아요. 이 영화를 볼 때 나는 당신과 같은 감정을 갖게 됩니다. 이런 영화로 인해 우리는 서로 연결됩니다”라고 했다.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하다 자살에 이른 한국 학생의 특수한 비극이 현대인의 보편적 공감대를 얻어낸 순간이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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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실습을 통해 콜센터에서 일하게 된 소희. 그녀는 고객을 위해 ‘친절함’을 만들고, 자신의 ‘수치심’을 감내하며, 마지막에는 높은 실적을 위해 그 어떤 상황에도 ‘무감각’해지는 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 트윈파트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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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직 여직원이 되었다며 기뻐하던 것도 잠시, 춤추는 것을 좋아하던 해맑은 소녀는 그곳에서 점점 피폐해져 간다.
ⓒ 트윈파트너스플러스

한국의 고등학교 중에는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일반계 고교와 취업 위주의 교육을 하는 직업계 고교가 있다. 현장실습은 직업계 고교 학생이 기업에서 인턴십과 비슷한 형태로 일하면 해당 업체에서 채용에 가산점을 주거나 경력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다. 학교 입장에선 학생들을 기업에 많이 보내 취업률을 높여야 실적을 인정받을 수 있고 예산도 확보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들 학생 중 일부는 열악한 노동 조건 속에서 산업재해를 당하거나 심한 경우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2017년 1월, 직업계 고교 3학년 A양이 전주의 한 저수지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대기업 하청 콜센터에서 인터넷 가입을 해지하려는 고객을 ‘방어’하는 부서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온갖 항의와 욕설에 응대하며 밤늦도록 야근하기 일쑤였지만 정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급여는 계약했던 것보다 적었다. “더 이상 못 견디겠어.” 친구에게 이런 말을 남긴 A양은 차디찬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영화 < 다음 소희 > 의 소재가 된 실화다.

정주리(Jung July, 鄭朱莉) 감독은 한 방송사의 시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이를 접한 뒤 이후에도 비슷한 사망 사건이 되풀이되는 걸 지켜보며 영화화를 결심했다. 이 영화의 한국 개봉 이후 사회적 파급력이 적지 않았다. 결국 올해 3월, ‘다음 소희 방지법’으로 불리기도 하는 ‘직업교육훈련촉진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개정안은 현장실습생도 근로기준법상 강제 근로 금지와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 등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했다.

현실적으로 그려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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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유진은 소희의 죽음을 파헤치며 어른들이 어떻게 한 학생을 죽음으로 내몰고, 또 외면했는지를 마주한다.
ⓒ 트윈파트너스플러스

< 다음 소희 > 는 내용상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가 앞서 소개한 실화를 다큐멘터리의 화법으로 그렸다면, 2부는 그때 소희(So-hee 素熙) 곁에 단 한 명의 어른이라도 지켜주는 이가 있었다면 하는 희망 사항을 담았다.

1부는 단순히 회사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대결 구도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21세기 현대 사회가 실제로 그렇듯,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하고 해결은 한결 더 어렵다. 극 중 중간 관리자인 팀장은 상담원들에게 실적을 강요하지만, 비인간적인 상황에 내몰리긴 마찬가지다. 주인공 소희가 실적을 올리면서 회사의 목표 기준이 올라가자, 동료들 사이에 반목이 싹튼다. 가난한 친구보다 더 가난한 소희는 누가 더 한심한 신세인지를 두고 넋두리를 늘어놓다 본의 아니게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이처럼< 다음 소희 > 는 약자의 잘못이 아닌데도 약자들끼리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경쟁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파고든다. 장애인을 위한 대중교통 인프라가 부족한 사회에서 이동권 시위를 벌이는 장애인과 이로 인해 출근이 늦어진 비장애인 노동자가 반목하게 되는 것처럼. 최저 시급이 충분하지 못한 사회에서 대출 이자에 시달리는 편의점 점주와 삼시 세끼도 제대로 못 챙기는 아르바이트생이 최저임금을 놓고 등 돌리게 되는 일처럼. 구조조정을 이유로 해고된 노동자와 고용이 승계된 노동자 사이에 연대가 깨지는 일처럼…. 잘못은 저 위쪽에서 비롯됐는데 아래쪽에 있는 이들이 더 아래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갈등하게 되는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넓게 담고 있다.

그에 비하면 2부는 좀 더 대결 구도의 형태를 띤다. 그래야 했다. 소희의 자살을 수사하는 형사 오유진(Oh Yoo-jin 吳宥真)은 사태의 실체에 접근하면서 점차 외로운 투쟁의 길에 접어든다. 적절한 조치가 제때 이뤄졌다면 이 젊은이의 죽음을 막을 기회가 몇 번은 있었다고 여긴다. 그래서 더 이상 ‘소희 다음’의 비극을 만들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유진이 잘못한 자들을 찾아 따져 물을 때마다 돌아온 답은 ‘실적 못 올리면 우리도 죽는다’는 취지의 말들이다. 소희가 일한 회사, 그 회사에 하청을 준 회사, 그 회사가 대기업이라며 좋다고 알선해 준 학교, 그 학교를 감독하는 교육청….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어느 한 개 기관이나 개인의 잘못만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잘못된 일들은 종종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거대한 차원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통찰을 영화의 플롯으로 구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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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와 학교, 교육청과 경찰서를 오가며 홀로 조사를 이어가던 유진은 소희의 죽음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속이 후련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뀔 수 없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낀다.
ⓒ 트윈파트너스플러스

이 때문에 유진은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는 결연함과, 커다란 시스템에 맞서는 개인의 무력감을 동시에 보여줘야 했다. 유진 역을 맡은 배우 배두나(Bae Doo-na 裴斗娜)가 초췌한 얼굴로 소희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연기는 이 지점에서 설득력을 더한다. 칸영화제 현장에서 만난 정주리 감독은 “촬영 전 두나 씨에게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것 같은 얼굴을 화면에 보여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는데, 다음날 정말로 그런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그 얼굴을 봤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라고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다.

취업에 짓밟힌 꿈

필자를 비롯한 기성세대들이 이 영화를 보며 가장 가슴 아파한 대목이 있다. 첫 번째는 “소희가 춤추는 거 아셨어요? 춤추는 걸 좋아했대요. 엄청나게 잘했대요”라고 유진이 소희의 부모에게 건넨 말이다. 이를 들은 부모는 목 놓아 통곡한다. 또 한 차례는 유진이 소희의 휴대전화 속 동영상을 보는 마지막 장면이다. 소희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휴대전화 안에 있는 모든 메시지며 앱을 삭제하고도 남겨둔 단 하나의 영상이었다. 거기엔 혼자 열심히 춤추며 끝내 웃음 짓는 소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번엔 유진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영화가 두 차례에 걸쳐 소희의 춤을 안타깝게 보여주는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기성세대가 미래세대의 진정한 꿈을 알고 있는지 따져 묻는 것이다. 비극은 어쩌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다음 세대의 장기, 특기, 소질, 자질, 취향, 취미, 개성, 특성, 적성, 재능을 알아봐 주고 있는가? 영화의 질문은 이어진다. 고등학생들이 저마다 다른 꿈을 접고 취업률 높은 학과만 지망해야 하는 사회라면? 청년들이 각자 희망을 저버린 채 안정된 직장에 지원하지 않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처럼 불안한 곳이라면? 인문계 전공 자체를 미안해해야 하고 자연계 우등생 모두가 의대 진학만을 바라보는 세상이라면? 그다음에는 또 다른 형태의 소희가 나오지 않을까? 당신은 미래 세대가 꿈을 키울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나? 칸영화제에서 만난 선진국 관객들이 < 다음 소희 > 를 보고 울먹인 까닭은, 각자의 사회가 이런 질문들을 끊임없이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송형국 (Song Hyeong-guk, 宋亨國)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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