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에는 특정 지역의 문화가 농축되어 있다. 양질의 재료가 나는 산지가 공예 활동의 본거지가 되고, 역사와 문화 같은 지역 정체성이 공예품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는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로컬리티에 대한 관심 덕분에 지역에 뿌리를 둔 공예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김홍도(金弘道, 1745~?). <자리 짜기>. 18세기 후반. 종이에 먹과 담채. 28 × 23.9 cm.
어린 아들의 글 읽는 소리에 맞추어 아버지는 자리를 짜고, 어머니는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공예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일상적인 노동이었다.
©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대장간>. 18세기 후반. 종이에 먹과 담채. 27.9 × 24 cm.
장정들이 불에 달군 쇠를 모루 위에 올리고 쇠망치로 내리치면서 흥겹게 일하는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대장간은 쇠붙이로 생활에 필요한 온갖 도구를 만들던 곳으로,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지방 소도시의 재래시장에서 드물게 볼 수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초 편찬된 『규합총서(閨閤叢書)』는 살림에 필요한 정보를 모아 놓은 책이다. 그중 전국에서 생산되는 명품을 따로 언급한 대목은 당시 소비자들의 시선을 읽을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저자 빙허각(憑虛閣) 이씨가 기록한 공예 명산지 중에는 근대화 과정에서 명맥이 끊긴 곳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지금까지도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공예의 전통은 예외 없이 그 뿌리가 지역에 있다. 삶을 영위하고 지혜를 축적해 온 공동체의 근간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세간을 손수 만들어 나누어 쓰면서 저마다 솜씨를 갈고닦아 온 분투의 시간이 곧 공예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전통 사회에서는 근거리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로 제품을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강화도(江華島)의 화문석(花紋席), 한산(韓山)의 모시, 담양(潭陽)의 죽세공품, 통영(統營)의 나전칠기 등도 그 지역에서 나는 풍부한 재료에 기반한다. 장인이 만드는 명품은 재료의 주요 산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빼어난 공예품은 그 재료가 생육하는 지역과 함께 거론되며 명품으로 인정받는다.
공동체의 협업
김봉룡(金奉龍, 1902~1994). <나전칠 와태 봉황 당초문 화병(螺鈿柒 瓦胎 鳳凰 唐草紋 花甁)>. 1930년대. 입지름 27 cm, 몸통 지름 27 cm, 높이 61 cm.
1936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작품으로 옹기에 옻칠을 한 후 봉황, 무궁화, 덩굴 문양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통영 출신인 김봉룡은 조선 시대 나전 공예의 전통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대담한 기법을 구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6년 국내 최초로 국가무형문화재 나전장이 되었다.
ⓒ 원주(原州)역사박물관
통영은 남해안에 위치한 도시로, 이곳에서 나는 전복은 좁은 해협의 거센 물살을 이겨낸 탓에 다른 지역보다 무늬가 유난히 곱고 선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복 껍데기를 가공해서 만든 공예품이 나전칠기(螺鈿漆器)이다. 통영 나전칠기는 오랫동안 애호된 명실상부한 명품 중 하나이며, 가파른 시대의 변화를 이겨낸 대표적인 공예품이다. 이 저력은 장인들이 한 지역에서 유구한 세월 동안 연대의 끈을 이어 온 데서 찾을 수 있다.
통영은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본영이 설치된 곳이다. 이 군을 통솔했던 지휘관이 거북선으로 유명한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다. 통영이 공예 명품으로 유명해진 데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자리한다. 군수품과 생활용품을 대기 위해 근방의 솜씨 좋은 장인들을 모아 조직적으로 공방을 운영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후 공방이 더욱 많아지면서 ‘통영 12공방’이라는 표현이 생겼는데, 이 말은 공방이 12개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공방이 많았고 공예 문화가 발달했다는 의미다.
전복 껍데기를 얇게 갈아 무늬를 놓는 나전장은 나무로 기형을 만드는 소목장(小木匠), 옻칠하는 칠장(漆匠) 등 다른 장인들의 도움 없이 혼자 작업하기가 불가능하다. 또한 금속 장석(裝錫)을 만드는 두석장(豆錫匠)도 힘을 보태야 한다. 결국 나전칠기는 이들이 가까이 살며 함께 협력한 결과였다. 통영에서는 지금도 나전장과 소목장, 두석장들이 피붙이처럼 모여 산다.
‘저산팔읍(苧産八邑)’은 모시풀이 잘 자라는 지역을 뜻하는 말로, 국내에서 모시 생산량이 가장 많은 충청남도 서천(舒川) 일대의 여덟 마을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낙동강(洛東江) 일대의 ‘석산팔읍(席産八邑)’은 갈대로 짠 깔개가 유명했던 여덟 도시를 한데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이처럼 명산지는 장인 한둘의 솜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지역 전체가 생산과 유통의 공동체로서 유기적인 협업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명성을 떨칠 수 있다. 예컨대 합죽선 한 자루를 만드는 데도 예닐곱 개의 공방이 긴밀하게 움직인다. 대나무를 다듬어 부챗살을 만들고, 겉대를 맞붙이고, 부챗살의 모양에 따라 종이를 접고, 인두로 낙죽을 그리고, 자루 끝에 매다는 선추를 조각하는 일까지 공정을 세분할수록 작업 효율과 완성도가 오르게 마련이다.
지리적 이점
김봉룡. <나전 쌍봉문 연엽형 과반(螺鈿 雙鳳紋 蓮葉形 果盤)>. 1945년 이후. 40 × 40 cm.
김봉룡은 통영과 원주에 공예소(工藝所)를 설립해 많은 장인들을 길러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전 공예의 두 가지 중요한 재료 중 하나인 자개는 통영의 것을 가장 우수하게 여겼으며, 다른 하나인 옻나무 수액은 예로부터 원주의 것을 최고로 쳤다.
ⓒ 원주역사박물관
놋그릇은 추운 겨울에 유용한 그릇이다. 온돌방 아랫목에 밥주발을 놓고 담요로 덮어 두면 몇 시간 뒤에도 손대기가 겁날 만큼 뜨겁다. 놋그릇은 대를 물려 쓸 정도로 수명이 길고 금빛을 띠어 귀하게 여겼다. 18세기 이후에는 서민들에게도 널리 보급되면서 기술이 전국으로 퍼져 갔다. 특히 경기도 안성(安城)의 유기는 평안북도 정주(定州) 납청(納淸)마을의 유기와 더불어 놋그릇의 양대 산맥이다. 이 두 지역은 내륙을 관통하여 서울로 통하는 물류의 요충지라는 공통점이 있다.
서울과 가까운 안성은 과거 도성 안 사대부가에 놋그릇을 공급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안성 유기는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만드는 주물 방식의 그릇이다. ‘안성맞춤’이란 조건이나 상황이 잘 맞는다는 뜻인데, 매끈하고 정확하게 그릇을 뽑아내고 차질 없이 공급하는 주물 유기의 장점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런 표현이 생길 정도로 안성 유기는 누구나 알아주는 명품이었다.
반면에 납청 유기는 서너 명이 둥글게 서서 크고 작은 망치로 모루 위의 쇳덩이를 두드려 만드는 방짜 유기다. 벌겋게 달군 쇳덩이를 다루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공정도 까다로워 장인들 간 유대가 남다르고 자긍심도 높았다. 특히 징이나 꽹과리 같은 악기는 방짜 기술로 만들어야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다. 그래서 악기를 만들 때는 정교한 소리를 얻기 위해 생활 소음이 잦아든 조용한 밤중에 작업하곤 했다.
한편 전라북도 남원(南原)은 지리산 자락의 풍부한 목재를 기반으로 목공예가 발달한 지역이다. 이곳에서는 나무를 갈이틀에 걸어 목기를 깎는다. 회전축을 이용하는 갈이틀은 수요가 많은 식기와 제기, 이남박처럼 작고 둥근 그릇을 만드는 데 더없이 효과적이다. 갈이틀은 조선 시대의 풍속화에도 등장하는데, 그림을 통해서 전통적인 목기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남원에서는 지금도 전통 방식인 갈이틀 기술이 전승된다.
이처럼 명품의 고장에서는 뛰어난 장인들이 서로 솜씨를 겨루며 함께 성장하고, 그 명성을 좇아 찾아온 젊은이들이 지역의 전통을 잇는 대물림이 이루어졌다. 그 전통이 오늘날 무형문화재가 전승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해 무형유산 보호 정책을 수립한 우리나라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미래를 위한 대안 공예의 지역성은 현대에 와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근대화 이후 도시를 중심으로 문화가 발달하면서 지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최근 들어 로컬리티가 인문학 담론의 테제로 부상한 것은 지역 소멸의 위기가 현실적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 공예가 지역의 미래를 살릴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으로 재조명되고 있는데, 비단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젊은 창작자들은 지역 공예에서 영감을 찾고, 지역 장인들은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재해석하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다.
숙련된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수공예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사회가 가져온 다양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인식된다. 요즘 젊은 세대가 천편일률적인 상품과 콘텐츠에서 벗어나 고유한 지역성이 담긴 문화 콘텐츠에 눈길을 돌리는 현상도 지역 공예 부흥에 힘을 실어 준다. 장인의 기술과 그것을 배태한 지역의 공예 문화가 지역 생태계 활성화를 이끌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김수영(Kim Soo-young, 金壽榮) 유기장과 조기상(Gio Ki-sang, 趙基相) 디자이너가 예올 프로젝트(Yéol Project)를 통해 협업해 만든 다양한 유기그릇들. 안성 유기의 맥을 잇고 있는 국가무형문화재 유기장 김수영은 젊은 디자이너들과 함께 현대적인 감각의 유기 제품도 선보인다.
재단법인 예올 제공
김대성(Kim Dae-sung, 金大成) 이수자가 2021년 국립무형유산원 창의 공방 레지던시에 참여해 제작한 부채. 국가무형문화재 선자장(扇子匠)인 부친의 뒤를 이어 5대째 전주(全州) 지역 전통 부채의 맥을 잇고 있다.
국립무형유산원 제공, 사진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2대째 통영 누비 공예를 업으로 삼고 있는 박경희(Park Gyeong-hyi, 朴耿嬉) 작가의 무명함(Nubi cotton box). 지금은 거의 사라진 통영 누비의 ‘아(亞)’자 문양을 사용해 전통을 계승 중이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제공
골을 재료로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물건을 만드는 완초(莞草) 공예는 강화도 지역에서 특히 번성했다. 사진은 완초장 이수자 허성자(Huh Sung-ja, 許性子) 장인이 스튜디오 워드(Studio Word)와 협업해 만든 기러기함(Wild goose sedge box).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제공
국가무형문화재 입자장(笠子匠) 정춘모(鄭春模) 장인이 스튜디오 워드와 협업해 만든 펜던트 조명. 입자장은 갓 만드는 일을 하는 장인으로 주로 통영과 제주 지역에서 기술이 전승되었다.
스튜디오 워드 제공
최공호(Choi Gong-ho, 崔公鎬) 공예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