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웅(Koh Sun-woong, 高宣雄)은 희곡을 쓰고 각색하는 극작가이자 대본에 숨결을 불어넣는 연출가다. 연극에서 출발해 창극(唱劇)과 뮤지컬, 오페라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선보여 왔다. 관객의 호응과 평단의 호평을 동시에 받으며 흥행성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은 흔치 않은 연출가이다. 전방위 예술가로 통하는 그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내에 있는 ‘극장 용(YONG 龍)’에서 만났다.
연극계의 블루칩’으로 통하는 고선웅은 수많은 희곡상과 연출상을 휩쓴 중견 연출가이다. 연극뿐 아니라 뮤지컬과 오페라, 창극 등 장르를 넘나들며 전방위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울시극단 단장에 선임된 그는 동시대의 이야기가 담긴 창작극을 꾸준히 선보이는 것이 목표다.
고선웅은 연출을 “바닥에 누워 있는 텍스트를 일으켜 세우는 작업”이라고 정의한다.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도, 그것을 무대에 올려 감동과 재미를 만들어 내는 것도 그에겐 모두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다. ‘재미’야말로 그의 작품들에 일관되게 흐르는 핵심 요소다. 그런데 그 재미는 그냥 웃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그에게 희극적 장치는 비극에 더 깊이 닿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연극과 첫 인연을 맺었다. 1999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우울한 풍경 속의 여자>가 당선됐다. 이후 수많은 작품을 쓰고 각색하고 연출했다. 그가 손을 댄 작품마다 반응이 좋아 ‘연극계의 블루칩’으로 주목받았고, 수많은 희곡상과 연출상을 휩쓸었다.
2018년 평창 동계패럴림픽 개‧폐막식 총연출, 5‧18민주화운동 40돌 기념 창작 뮤지컬 <광주(City of Light)>,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묵직한 오페라 <1945>의 연출도 맡았다. 가장 최근의 작품은 지난 10월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 무대에 올린 주크박스 뮤지컬 <백만 송이의 사랑>이다. 2021년 경기도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그 시기 동안 히트했던 대중가요들로 꾸며 큰 화제를 낳았다. 이 다재다능한 예술가는 마침내 영화에도 관심을 보인다. 언젠가 ‘감독‧각본 고선웅’이란 타이틀이 붙은 영화를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다.
선한 의지가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일하는 방식도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위의 독재자와는 거리가 멀다. 배우는 물론 연극계의 여러 종사자들과 두루 원만하게 소통한다. 쉴 새 없이 작품에 매진해 온 그에게 지난 9월, 임기 3년의 서울시극단 단장 직책이 주어졌다.
연출가로서 가장 중점을 두는 요소는 뭔가?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는 게 가장 중요하다. 관객 지향적인 작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학과 예술성도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관객들이 힘들어하고 외면하면 무슨 소용이겠나. 작품으로서 존재할 이유가 없는 거다. 나는 관객들이 극장에 와서 작품을 봐야만 비로소 공연이 완성된다고 본다. 재미와 예술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작가, 배우, 스태프들과 수없이 의논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2021년 11월, 경기도에 위치한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초연한 주크박스 뮤지컬 < 백만 송이의 사랑 >. 지난 100여 년간 히트한 대중가요들을 토대로 만든 이 작품은 각 시대를 상징하는 근현대사의 주요 장면들이 펼쳐진다.
ⓒ 극공작소 마방진(Playfactory Mabangzen)
<조씨고아(The Orphan of Zhao 趙氏孤兒), 복수의 씨앗>, <낙타상자(Camel Xiangzi 駱駝 祥子)>에 이어 올해는 중국 고전을 원작으로 삼은 세 번째 연극 <회란기(The Chalk Circle 灰闌記))>를 무대에 올렸다. 중국 고전에 관심을 갖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중국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어서다. 이 고전들은 이야기가 단순 명료하다.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들이 연극이라는 장르와 잘 어울린다. 중국 고전에는 ‘죽은 사람 퇴장’ 같은 지문도 나온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어떻게 퇴장을 하나. 하지만 그냥 그렇게 한다. 연극의 형식에 충실한 거다. 또한 주제나 소재가 요즘 시대와 딱 들어맞는 작품들이 많아서 현재를 되돌아보게 한다.
최근 재연(再演)한 뮤지컬 <백만 송이의 사랑>은 어떤 내용인가?
거대한 역사적 사건 속에는 위인과 영웅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민초들의 삶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시대의 격랑에 휩쓸리면서 겪었던 사랑과 이별, 아픔을 노래한 대중가요들이 있다. 과거 100년 동안의 대중가요들을 연결해서 쭉 듣다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100년을 살아왔구나 하는 걸 이해하게 된다.
중국 고전 <조씨고아>를 동시대적 감성으로 각색하여 무대에 올린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2015년 11월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되었고, 그해 최고의 연극으로 꼽혔다. 이듬해 중국 북경의 국가화극원(國家話劇院) 대극장 공연에서도 현지 관객들에게 기립 박수를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 국립극단
다양한 장르를 오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뭔가?
장르는 다르지만 본질은 똑같다. 연극에서도 제스처를 쓰는데, 이게 무용에 가깝다. 대사도 말을 하다가 극단으로 가면 노래가 된다. 장르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무척 재미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텍스트를 보면 이건 연극이 좋겠다, 또 저건 뮤지컬로 만들면 재미있겠다 하는 느낌이 온다. 연출가로서 한 가지 형식만 고수하는 것보다 여러 장르를 경험하는 게 훨씬 재미가 있다. 그리고 작품이라는 게 인연이 있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인연이 없으면 결국 못 하게 되더라.
서울시극단 단장을 맡았는데, 중점을 두는 게 뭔가?
대중성과 오락성은 중요한 요소다. 공공 극단인 만큼 다수가 공감하고 납득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를 다루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잘 만들어진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 수준 있는 미학을 선보여야 한다는 얘기다. 내가 욕심이 좀 많다.
서울시극단에서는 어떤 작품을 얼마나 올릴 계획인가?
우선 매력적인 서양 고전 작품을 하려고 한다. 19세기나 20세기 초반 작품들을 검토하고 있다. 준비를 잘해서 내후년쯤엔 동시대성을 지닌 창작극을 만들 계획이다. 서울시극단이니까 서울에 대한 이야기를 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내가 직접 대본을 쓰기보다 작가를 섭외하거나 공모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임기 3년 동안은 연극에 주력할 생각이다. 1년에 5편 정도 제작하려고 한다. 적지 않은 숫자다. 예전 작품들 중에서 좋았던 것을 다시 올릴 계획도 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억울하게 멸족당한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이 성장하여 복수를 벌이는 이야기이다. ‘국립극단에서 가장 보고 싶은 연극 1위’에 꼽힌 이 작품은 관객들의 끊임없는 재공연 요청으로 2021년 4월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다시 올려졌다.
ⓒ 국립극단
어떤 방식으로 연출 아이디어를 얻나?
존경하는 화가 박방영(Park Bang-young, 朴芳永)선생님이 2002년에 ‘사랑하면 알게 되고’란 서예 작품을 내게 주셨다. 처음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3년이 지나서 깨닫게 됐다. 그 뒤로 내 삶이 변하기 시작했다. 알아야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라, 사랑하면 알게 된다. 납득이 돼야 사랑한다는 건 틀린 얘기다. 사랑하면 굳이 납득시키고, 이해시킬 필요가 없으니 일에서도 진도가 빠르고 갈등이 줄어든다.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 건 사랑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더 사랑하면 이상하게 아이디어가 나온다. 매사에 이 원칙을 적용하려 노력하는데, 이렇게 하다 보니 배우들이나 스태프들하고도 사이가 좋아지더라. 작품을 할 때마다 이 말을 생각하는데, 그러면 크게 힘 안 들이고 편안하게 작품을 할 수 있었다.
‘사랑’이란 단어가 고선웅의 연극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키워드인가?
내 연극은 다 그렇게 해서 나왔다. 사랑해서 나온 작품들이다. 연출하면서 작품을 연구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런데 나는 그 작품을 사랑하니까 그렇게 오래 연구할 필요가 없다. 사랑하니까 이미 아는 거다. 복잡할 게 없다. 물론 이걸 종종 잊어서 어떤 때는 스트레스도 받고 어떤 일에는 분노하기도 한다. 그래도 자꾸 이 말을 떠올리다 보면 자제하고 절제하게 된다.
창작 뮤지컬 <백만 송이의 사랑>은 올해 10월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재연됐다. 사진은 9월 말 막바지 연습에 한창인 고선웅 연출가의 모습이다. 그는 묵직한 서사를 재치 있고 능란하게 구현하는 연출가로 평가된다.
연극이 점점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참 좋은 것이다. 연극은 계속돼야 한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기계의 부속품처럼 되고 더욱 고독해질 거다. 그럴수록 실시간으로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연극은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는 걸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도 있나?
나중에 영화를 한번 해 보고 싶다. 연극과 영화는 조금 다르다. 연극은 관객들과 같이 호흡하며 늙어가는 일을 날마다 반복하는 거고, 영화는 한 번 잘하면 된다. 영화는 자연스러워야 하고, 연극은 자연스러움 이상의 무엇을 보여 줘야 한다. 먼저 시나리오를 써야 영화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영화도 나와 인연이 돼야 만들 수 있는 거다. 아직 시나리오를 쓰지는 않았고, 준비는 해 보려고 한다.
임석규(Lim Suk-kyoo 林錫圭)한겨레신문 기자
허동욱(Heo Dong-wuk 許東旭)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