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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SUMMER

생활

두 한국 이야기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

분단 상황이 70년 이상 계속되면서 남북한의 미술은 상반된 이념적, 정치사회적 환경에 따라 매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한국전쟁에 대한 그림에서도 양쪽의 기억은 사뭇 다르다. 남북의 화가들은 각기 다른 관점과 양식으로 전쟁을 기록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3일 만에 서울은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화가들은 대부분 양식 배급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좌익 단체인 조선미술동맹(Korean Art Alliance)의 주도 아래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를 그려야 했다. 같은 해 9월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이 퇴진하자 이들은 적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때 공산 치하에서 북한군 협력에 앞장섰던 기웅(奇雄), 김만형(金晩炯)을 포함한 여러 화가들이 북쪽으로 떠났는데 그 이전에 이미 북으로 갔던 사람들까지 합치면 월북 미술가는 대략 40여 명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인 사람도 있겠지만, 공산 치하에서의 행적이 문제가 될까 두려워 마지못해 월북을 택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은 같은 민족이 이념으로 나뉘어 서로를 적으로 여기며 싸우는 과정에서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된 커다란 역사적 시련이자 충격이었다. 이러한 민족적 비극을 다룬 걸출한 문학 작품들은 꽤 많이 나왔지만, 미술 작품은 그렇지 못했다. 남북한 모두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전쟁의 참상에 비해 실제로 전투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은 몇 점 되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남한 국방부에서 관리하던 종군화가단(Army Signal Corps)에 속해 있었던 유병희(柳秉熙)의 <도솔산(兜率山) 전투>(1951)다. 이 작품은 1951년 6월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있었던 치열한 전투를 그리고 있다. 태극기는 화면 위에 높이 세워져 있고, 북한의 인공기는 피에 젖은 채 땅에 떨어져 있다. 그림은 국군의 승리를 표현하고 있지만, 대한민국 해병대 5대 작전 중 하나로 기록된 이 전투에서 약 2,260여 명의 북한군과 700여 명의 국군이 희생되었다.

<38선(The 38th Parallel)>. 김원(金原). 1953. 캔버스에 유채. 103 × 139 ㎝.

<역사의 흔적(Vestiges of History)>. 남관(南寬). 1963. 캔버스에 유채, 콜라주, 부식. 97.5 × 130.5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피난민들의 참상
한국전쟁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시사만화가 김성환(金星煥; 1932~2019)이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18세의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그는 「연합신문」에 <멍텅구리>라는 제목의 만화를 연재하고 있었다. 서울이 북한군에 넘어가자 그는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다락방에 숨어 지내면서 거리에서 목격한 장면을 약 110점의 생생한 수채화 스케치로 남겼다. 이 중에는 국군이 막강한 화력을 과시하던 소련제 탱크 T34를 빼앗고, 주변에 북한군 시체가 널려 있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당시 다수의 화가들은 전투 현장을 사실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피난민의 고달픈 생활이나 혼란스러운 피난길의 상황을 화폭에 담았다. 화가들 자신이 피난민의 일원으로 매일 겪어야 했던 가장 절박한 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양 출신으로 전쟁 전에 월남한 김원(金原 Kim Won; 1912~1994)은 1953년 작 <38선>에서 분단의 선을 넘으려는 북한 피난민들의 행렬을 비장하게 그려냈다. 앞에 선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안고 오열하거나 아이를 안거나 업은 채 힘들게 언덕을 넘고 있다. 대지의 어두운 청색과 붉게 물든 하늘이 이들의 절망과 고통을 표현한다면, 오른쪽 언덕 위의 밝은 광선은 희망을 상징한다.

전쟁에 대한 참혹한 기억은 전후 한국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가던 시기에도 계속 그림으로 제작되었는데 대체로 은유적이거나 추상적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소련이나 북한에서 성행하던 사회주의 사실주의(Socialist Realism) 미술이 정치적으로 오염되었으며 선동성이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이러한 추세는 세계적인 것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나 미국 화단에서도 사실주의는 외면당하고 추상미술이 강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사실주의 회화는 정치적이거나 좌파 계열로 인식되었으며, 예술로서 평가조차 하지 않으려는 시각도 존재했다. 전후 한국 미술인들 역시 해외 미술의 동향이었던 추상미술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치색을 피하고 전쟁의 상처에 대한 분노, 아픔, 허무감, 가족의 상실을 추상적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다. 일례로 남관(南寬 Nam Kwan; 1913~1990)은 전쟁 중에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고 하는데, 피난길에서 목격한 참상들이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63년 작 <역사의 흔적(Vestiges of History)>에서는 그러한 잠재된 기억들이 침울하고 회상적이며 감상적인 분위기로 전달된다. 화면에는 인간의 형상이나 기호 또는 상형문자와 같은 형태들이 부유하듯이 자리 잡고 있다. 크고 작은 획으로 이루어진 형태들은 시간이 정지되고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배경 속에서 비극적인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조중 우의탑 벽화 – 승리도(Victory − Mural in the Sino-Korean Friendship Tower)>(부분). 이쾌대(李快大). 유채. 1958. 200 × 700 ㎝.

<고성 인민들의 전선 원호(Kosong People, Supporting the Front Line)>. 정종여(鄭鍾汝 Chung Chong-yuo). 1958/1961(개작). 조선화. 154 × 520 ㎝.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Fatherland Liberation War)으로 부르는 북한에서 그려진 전쟁 관련 그림들은 남쪽과 판이하게 달랐다 … 북한 미술에서는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다고 해도 전투 장면보다는 주로 북한군을 도와주는 영웅적인 인민들의 모습들이 등장한다.

<남강마을의 여성들(Women in the Nam River Village)>. 김의관(金義冠). 1966. 조선화. 121× 264 ㎝.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영웅적인 인민들의 모습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Fatherland Liberation War)으로 부르는 북한에서 그려진 전쟁 관련 그림들은 남쪽과 판이하게 달랐다. 전후 북한이 채택했던 미술의 방향이 사회주의 사실주의였기 때문이다. 평양미술대학에서도 러시아 미술은 정규 과목이었고, 화가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역사화처럼 극적이면서도 영웅적인 인물들의 구성을 배웠다. 특히 월북 작가로 한국전쟁을 주로 그린 화가는 남한에 있을 때부터 장엄한 군중화로 주목받았던 이쾌대(李快大 Lee Quede; 1913~1965)였다. 그의 대표적인 전쟁화 <승리도>(1958)는 북한이 중공군의 참전에 감사하면서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다지기 위해 평양의 모란봉 구역에 건립한 조중 우의탑(Sino-Korean Friendship Tower) 내부에 그려진 벽화이다. 그림 중앙에는 중공군이 미군과 국군을 물리치는 상감령(上甘嶺)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 장면이, 오른쪽에는 패잔한 미군이, 윗부분에는 승리한 중공군이 등장한다.

북한 미술에서는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다고 해도 전투 장면보다는 주로 북한군을 도와주는 영웅적인 인민들의 모습들이 등장한다. 월북 화가였던 정종여(鄭鍾汝 Chong Chong-yuo; 1914~1984)가 국가미술전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고성 인민들의 전선원호(Kosong People, Supporting the Front Line)>(1961)는 강원도 고성 주민들이 눈보라 속에서 전선에 탄약과 음식을 나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는 인물들과 동물들의 움직임이 리듬감 있게 구성되어 있으며 함축적인 필선이나 먹의 농담, 원근법적인 배치로 공간감이 잘 살아나 있다.

1950년대만 해도 북한에서는 유화로 그리는 화가가 붓과 먹으로 그리던 동양화가(ink wash painters)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조선화(Chosonhwa)’가 권장되었다. 김일성이 “서양에서 들어온 유화보다는 전통적인 붓과 먹을 사용하는 고유한 조선화가 민족적 형식이며, 이를 주체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조선화의 약점은 색채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색채를 사용하여 선명하고 간결하며 아름답고 힘있게 인민들의 투쟁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그렇게 색채 조선화를 강조했던 그가 칭찬한 작품들로는 김의관(金義冠 Kim Ui-gwan; 1939~)의 <남강마을의 여성들(Women in the Nam River Village)>(1966)과 리창(李昌 Ri Chang; 1942~)의 <낙동강의 할아버지(Grandfather at the Nakdong River)>(1966)가 있다. <남강마을의 여성들>은 강원도 고성군 남강마을에서 추수한 볏단 속에 인민군을 숨기고, 총을 든 강인한 여성들이 소를 끌면서 영웅적으로 싸우는 작품으로 국가미술전람회에서 일등상을 받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 미술에서 한국전쟁을 다룬 작품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보다는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그린 작품들이 양적으로 월등히 많다. 조국해방전쟁은 실패로 끝난 전쟁이었고, 항일 투쟁을 통한 김일성 우상화가 우선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김영나(Kim Young-na 金英那)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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