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개봉된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은 1952년 ‘위탁 교육’을 위해 동유럽 5개국으로 보내진 북한 전쟁 고아들의 흔적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다. 뉴욕국제영화제 등 해외 주요 영화제에 초청된 이 영화의 제작을 위해 감독은 16년 동안 50번 넘게 동유럽과 한반도를 오가며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루마니아의 소도시 시레트(Siret)에 어린이들을 태운 특별열차가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도착했다. 한껏 상기된 표정의 어린이들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열 살 안팎의 이 아이들은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온 북한의 전쟁 고아들이었다. 위탁 교육을 받기 위해 줄잡아 5천여 명의 아이들이 이처럼 루마니아를 비롯해 폴란드,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 등 동유럽 5개국에 보내졌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거리를 헤매게 되었다. 남한의 전쟁 고아들이 미국이나 유럽으로 보내진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 아이들이 동유럽으로 간 사실은 최근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김일성의 아이들>은 오랫동안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동유럽행 북한 전쟁 고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덕영(Kim Deog-young 金德榮) 감독이 2004년부터 16년간 50번 넘게 동유럽을 오가며 사재와 발품을 팔면서 집념을 쏟아부은 결과이다. 김 감독이 처음 루마니아행을 결심한 것은 대학 2년 선배인 영화감독 박찬욱(Park Chan-wook 朴贊郁)으로부터 기막힌 사연을 전해 들은 뒤였다.
“북한으로 송환된 북한인 남편을 40년 넘게 기다리고 있는 루마니아 할머니가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북한 전쟁 고아 문제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죠.”
어떤 부부
그가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1952년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열여덟 살의 제오르제타 미르초유(Georgeta Mircioiu)는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100㎞ 정도 떨어진 시레트 조선인민학교에 미술 교사로 부임한다. 그곳에서 북한 고아 관리 책임자로 파견된 당시 26세의 청년 교사 조정호를 만난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1957년 루마니아와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아 결혼에 이른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고아 소환 정책으로 두 사람은 1959년 평양으로 가야 했고, 귀국 직후 남편 조 씨는 숙청당해 지방의 탄광 노동자로 전락한다.
1960년대부터 주체사상이 확립되던 북한에서는 외국인 배척 운동이 일기 시작해 국제결혼을 했다가 추방당하는 외국인들이 속출했다. 남편과 떨어져 살던 미르초유는 두 살짜리 딸이 칼슘 부족으로 병에 걸려 1962년 딸과 함께 루마니아로 일시 귀국했는데, 이후 북한 입국이 불허된 1967년 남편과 연락이 끊겼다. 그 뒤 미르초유는 여든여섯 살이 된 지금까지 남편의 생사(살아 있다면 94세)만이라도 확인해 달라는 탄원서를 북한 당국에 수없이 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83년부터 ‘실종’이라는 짤막한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어느덧 환갑이 된 딸과 함께 부쿠레슈티에서 사는 그는 지금도 국제기구에 호소문을 보내면서 남편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미르초유는 ‘정호 1957’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결혼 금반지를 평생토록 끼고 있다. 남편과의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미르초유는 지극 정성을 기울여 『루마니아-한국어 사전』(13만 단어)과 『한-루 사전』(16만 단어)을 만들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절절한 사연은 김 감독에 의해 지난 2004년 KBS TV 6•25 특집 <미르초유, 나의 남편은 조정호입니다>로 방영됐다.
한편 동유럽 5개국에서 북한 고아들의 흔적을 찾던 김 감독은 루마니아 기록필름보관소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내리는 북한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4분 30초짜리 영상을 극적으로 발견했다. 하얀 장갑을 낀 직원이 먼지를 뽀얗게 덮어쓴 은빛 통에서 꺼낸 35㎜ 필름을 보는 순간 미르초유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
그 순간, 김 감독은 “이 역사를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 계기로 관련 자료를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반세기 전의 북한 관련 문서나 사진, 영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시 관계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 증언을 듣는 것부터가 불가능했다.
그때부터 김 감독은 동유럽 곳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행여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문서 보관소, 관련 학교, 기숙사를 샅샅이 찾아다녔다. 그리고 북한 아이들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 역사학자, 언론인들의 증언을 카메라에 담았다. 외교 문서 등으로 추정하는 동유럽행 북한 전쟁 고아는 5천여 명이지만, 김 감독은 1만 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말한다.
송환과 이별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에는 북한 아이들이 현지 아이들과 함께 수업하고 뛰어노는 모습들이 흑백 영상으로 생생하게 담겼다. 영상에는 이 아이들의 단체 생활 모습도 담겨 있다. 아침 6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김일성 얼굴이 그려진 인공기를 향해 경례를 한 뒤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이채롭다.
북한 아이들과 함께 공부했던 루마니아, 불가리아 친구들은 60여 년이 지나 백발이 된 지금도 ‘백두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한국어로 부를 정도다. 이 노래는 지금도 북한에서 모든 행사 때 서곡으로 불릴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증언에 따르면 이 아이들의 일상이 항상 군인처럼 엄격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같이 축구도 하고, 동산 같은 곳에서 배구도 하며 놀았죠. 다들 친형제처럼 지냈어요.”
불가리아인 친구 베셀린 콜레브의 증언이다. 그에 따르면, 북한 아이들은 선생님들을 엄마, 아빠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 아이들의 선생님이었던 디앙카 이바노바는 색이 바랜 사진을 보여주며 “이 친구가 나를 가장 많이 따랐던 ‘차기순’이었어요.”라고 이름까지 기억했다.
김 감독은 당시 기숙사를 탈출한 일부 아이들이 인근에 정착해 현지인과 결혼하고 택시 기사 등으로 생활했다는 제보를 받고 추적했지만, 끝내 이들을 찾아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위탁 교육은 당시 동유럽 국가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련이 기획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쟁 고아를 돌봐주는 동유럽의 선한 모습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홍보하려는 프로파간다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기술과 문화가 앞선 동유럽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이 장차 국가 건설에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북한이 이러한 위탁 교육을 수용했을 것이라고 김 감독은 추측한다.
1956년 낯선 땅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가던 북한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본국 소환령으로 정들었던 친구, 선생님들과 이별을 해야 했다. 아이들은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북한으로 차례차례 송환되었다. 당시 헝가리를 비롯해 동유럽 국가에서 소련에 반대하는 자유화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일성이 1956년 불가리아를 방문하는 동안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제거하려는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 일어났다. 또 폴란드에 있던 북한 고아 2명이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다 붙잡히는 사건도 터졌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거리를 헤매게 되었다. 남한의 전쟁 고아들이 미국이나 유럽으로 보내진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 아이들이 동유럽으로 간 사실은 최근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객관적 자료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귀국 열차가 북한 땅에 들어서자 역마다 2~3명씩 내리게 했다고 합니다. 만약의 집단 행동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타국 생활을 같이 한 아이들을 분리시킨 것으로 볼 수 있지요.”
김 감독의 얘기다. 아이들이 보내오던 편지는 채 3년이 되지 않은 1961년 이후 북한 당국의 검열로 말미암아 영원히 끊겼다. 마지막으로 보내온 편지에는 “입을 옷이 있었으면 좋겠다. 뭔가를 쓸 수 있는 공책을 보내달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었다. 아이들은 편지 끝에 언제나 “엄마, 보고 싶어요.”라고 썼다.
떠나기 전 아이들은 자신들이 살던 곳에 흔적을 남겼다. 학교 근처 숲에 이름을 새긴 오벨리스크와 기념비가 남아 있는 곳도 있다. 폴란드 프와코비치 국립중앙제2학원에서 발견된 현판에는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조선 전쟁 고아들인 우리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기념비에는 아이들의 이름이 한글과 알파벳으로 쓰여 있다. 체코 발레치 마을 인근에 있는 중세 오벨리스크에서도 두 명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김 감독은 “10m 정도 되는 높이의 탑에 몰래 올라가 단단한 돌을 깎아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에서 떠나기 직전 아이들의 절박한 심경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김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특정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에 편향된 감상에 치우치지 않으려 각별한 노력과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한다. 그를 위해 풍문에 기대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 자료를 찾아내 논란을 줄이려 노력했다. 그 결과물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에 때맞춰 개봉했지만, 코로나19 상황으로 흥행은 부진했다. 하지만 최근 한 재미교포의 주선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130여 개국에서 이 영화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국내에서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이 영화는 뉴욕국제영화제, 니스 국제영화제, 폴란드 국제영화제 등 13곳의 국제영화제 본선에도 진출해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