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2019 AUTUMN

생활

인문학 기행 주목할 만한 섬, 서해 5도

38선 바로 남쪽에 위치한 ‘서해 5도’는 군사적으로 매우 민감한 곳이어서 남북한 간 문제가 떠오를 때마다 어김없이 뉴스에 등장한다. 북한 땅을 바로 코앞에 마주 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은 있지만 쉽게 발길을 향하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 바닷길을 통해 중국과 활발히 무역을 하기도 하고, 천주교 선교사들이 오고 가기도 했다.

‘서해 5도’ 중 가장 면적이 넓은 백령도의 두무진 포구는 해안선을 따라 기암절벽이 4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북한과 마주 보고 있어 군사적 긴장감이 감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신비한 경치에 끌려 이 섬을 찾는다. 지난 7월 백령·대청·소청도의 지질 명소 10곳이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언어는 현실을 반영한다. 일정한 지역 안에 있는 다수의 섬들을 가리키는 ‘군도’는 고대에는 에게해를 지칭했으나, 차츰 에게해에 있는 수많은 섬들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이러한 어원학적 탐구는 어떤 시기에 그리스 사람들이 에게해의 섬들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1950년에 발발해 엄청난 희생을 치른 한국전쟁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과 소련이 획정한 분단선인 북위 38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교전선을 군사분계선(MDL)으로 하는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3년 만에 끝이 났다. 이때 연해도서 및 해면에 관한 통제권은 전쟁 이전으로 되돌렸는데 군사분계선보다 위도상으로 훨씬 북쪽에 위치한 서해의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우도, 연평도만은 UN군의 관할 아래 두고 이를 서해의 남북 경계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시 UN군 총사령관이 남북한 간 군사 충돌을 방지할 목적으로 이 다섯 개의 섬과 북한의 황해도 사이의 해상에 북방한계선을 설정했다.

이는 38선 이남이었던 코앞의 황해도 옹진반도를 넘겨준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방어선을 지킨 결과였다. 이때부터 서로 별 연관이 없어 보였던 이 다섯 개의 섬을 하나의 범주로 묶은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이른바 ‘서해 5도’다. 그렇다면 이 섬들은 어떤 ‘주목할 만한 가치’를 부여받은 것일까?

백령도 서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사항포는 어선들이 조업하는 포구로 이곳 앞바다에서는 까나리가 많이 잡힌다.

대치에서 화해로
서해 5도로 가는 교통편은 인천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이 유일하다. 소청도와 대청도를 거쳐 백령도로 가는 배는 하루 세 번 왕복하고, 연평도는 하루 한두 번 오간다. 인천에서 가장 먼 백령도까지는 평균 30노트의 고속페리로 4시간 정도면 도착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 한 번 12시간씩이나 걸리던 뱃길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지만, 파도가 거세면 제 속도를 못 내고 안개나 바람으로 인한 결항도 잦다. 연평도는 백령도보다 훨씬 가까이 있지만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인천에서 뱃길로 약 200㎞ 떨어진 백령도는 지도상으로 보면 훨씬 가까운 육지가 따로 있다. 장산곶과의 거리가 불과 16km에 불과하다. 연평도는 이보다 더 가까운 10㎞ 앞에 부포리라는 포구가 있다. 문제는 이 두 지역이 모두 북한 땅이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조업을 하는 어민들은 안개가 짙게 낀 날 뱃길을 잃고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한 수역으로 들어갔다 놀라서 허둥지둥 돌아왔다는 에피소드 하나쯤은 너나없이 말한다. 이것이 서해 5도의 첫 번째 ‘주목할 만한 가치’다.

중화동 바닷가에서 한 주민이 수확한 다시마를 말리고 있다. 이 마을에는 국내에서 두 번째로 오래 된 장로교회가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이 섬들이 옆구리에 들이밀어진 비수와 같다. 백령도에서 평양까지 거리가 150km에 불과하고, 연평도에서는 해주에 있는 북한의 최남단 해군 기지를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으니 민감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최근 몇 해 동안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모두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40여 개소의 현대화된 민간 대피 시설들이 이 섬들의 전략적 중요성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긴장과 대치가 강화될수록 평화와 화해에 대한 열망 또한 절실하다. 번번이 기대에 어긋나긴 했지만, 최근 그 열망에 불을 지핀 것이 지난해 남북 지도자의 판문점 선언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올 4월부터는 이 지역에서 야간 어로 활동이 55년 만에 재개되었고, 조업이 가능한 어장도 크게 늘었다. 여기에 지난 6월 30일 남북한과 미국의 지도자가 함께 판문점에서 만나 정전을 넘어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것을 다짐했다.

이 일련의 소식들은 오래 잊고 지냈던 옛이야기들과 함께 분단 이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이 섬들이 간직한 빼어난 자연 풍광과 독특한 섬 문화의 가치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이 섬들이 내세운‘머물고 싶고, 가고 싶은 섬’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비로소 현실감을 주었다.

아침 7시 50분, 등짐은 물론 양손 가득 보따리를 들고 기대와 설렘에 가득한 사람들을 태우고 백령도로 향하는 첫 배가 인천항을 미끄러지듯 떠난다. 오늘 점심은 백령도 냉면에 김치떡? 아니면 싱싱한 해삼 한 접시와 간자미에 양념을 얹어 끓인 팔랭이찜?

서해 방어의 최전선
지리적으로 서울의 북쪽을 에워싸고 있는 황해도는 평지가 많아 육지의 외곽 방어에서는 이렇다 할 역할을 못했지만 해안 방어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이 지역은 5세기 삼국 시대부터 한반도 서쪽 해안을 따라 중국 요동 지역까지 이어지는 북부 연안 항로의 중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려 말인 14세기 전후부터 16세기 조선 중기까지는 왜구가 이곳까지 올라와 해안 지방 약탈을 서슴지 않았으며, 명·청 교체기인 조선 후기에는 혼란을 틈타 바다에 해적의 무리들이 출몰하기도 했다. 주변 정세가 안정된 18세기 이후에는 청의 어선들이 수시로 와서 불법 어로를 하다 주민들과 충돌하는 일이 잦았고, 청과 조선 상인들의 밀무역이 성행하던 곳이기도 했다. 중국 산동성까지의 거리가 187㎞로 인천보다 오히려 더 가까웠던 백령도는 오랜 기간 이런 갈등과 교역의 최전선이었다.

조선 정부는 침입자들을 감시하고 추포하기 위해 연안의 주요 포구에 진을 설치했다. 이 진들은 점차 포구에서 곶으로, 나아가 섬으로 옮겨졌다. 바다에서부터 외적이 뭍으로 상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내륙에는 저지선으로 삼을 만한 적당한 산악이나 요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초 가장 먼저 백령도에 진을 설치했는데 이곳에는 이미 11세기 고려 때부터 백령진이라고 불리는 군사 기지가 있었다. 이곳을 지나 장산곶에 이르면 바로 남북 연안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물길을 만날 수 있다. 주둔한 군사들이 자급자족할 만큼 농토가 넓다는 이점도 있었다. 지금도 백령도에는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이들과 주민들의 식량은 자급자족하고도 남는다. 그 탓인지 지금도 이 섬에는 어업보다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주민들이 훨씬 더 많다.

백령도 해안 철조망 너머로 북한 땅이 보인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 간 가장 큰 군사적 충돌의 대부분이 이 인근 바다에서 일어났다.

천주교 전래의 길
백령도 사람들은 고전소설 『심청전』의 중요한 무대인 인당수가 바로 이 섬의 북서쪽 바다라고 믿는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이 필요했던 심청은 남경 상인들이 무사귀환을 위해 바다에 바칠 제물로 순결한 처녀를 사러 다닌다는 말을 듣고 기꺼이 몸을 판다. 그가 몸을 던진 소설 속 유리국 인당수가 백령도 진촌리 앞 바다라는 것이다. 이런 심청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섬 사람들은 인당수가 바라다 보이는 진촌리에 심청각을 지었다.

『심청전』은 작자 미상의 설화 소설로 이런 믿음이 사실일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의 바다가 상인들이 두려워할 만큼 파도가 거센 곳임은 분명하다. 남북으로 흐르는 연안 해류와 동서로 오가는 조류가 수시로 겹치는 데다 암초가 많아 예부터 선박 침몰 사고가 잦았다. 영조 때인 1771년에는 해상 군사 훈련을 벌이다 이곳에서 군선이 침몰하고 수군들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자, 임금이 직접 나서 장산곶을 기준으로 이남과 이북이 각각 따로 훈련하도록 규정을 바꿀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2010년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인해 남한의 초계함 천안함이 침몰된 곳도 이 부근이다.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백령도를 거쳐 한양이나 개성을 오가는 루트를 역사에 남긴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1821~1846)이다. 1845년 중국 상해에서 사제가 된 김대건은 이듬해 제3대 조선교구장이었던 페레올(Jean-Joseph-Jean-Baptiste Ferréol 1808∼1853)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선교사의 입국로로 개척하라는 명을 받았다. 당시 조선은 외세의 문호 개방 요구에 맞서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해 박해하던 때였다. 5월 14일 교우들과 함께 마포를 출발한 김대건은 5월 29일 백령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청나라 어선과 접촉하여 조선 지도 2장과 6통의 서한을 주고받은 뒤 돌아오다 6월 5일 체포되었다. 조선 정부는 그해 9월 16일 김대건을 처형했고, 로마 교황청은 1984년 그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서해 5도에는 교회가 유난히 많다. 상주 인구가 약 5,700명 남짓한 백령도에만 교회가 13곳이고 신도는 전체 주민의 75%에 이른다. 백령도에 있는 중화동교회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 교회다. 1898년 조선 정부가 전도와 교회 설립의 제한을 해제하자 이곳 기독교인들이 한학 서당을 고쳐 초가 6칸짜리(39.6㎡) 교회를 세운 것이 그 시작이다. 그 옆에 있는 백령기독교역사관에는 19세기 초부터 이 섬과 주변에서 전개된 초기 기독교 선교의 역사 기록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서양목 열풍의 중심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개항을 시작하기 전 모든 무역은 정부가 관장했다. 그렇다고 밀무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초기 밀무역은 부산의 왜관이나 대마도에서 이루어졌다. 일본 상인들이 가져온 은과 조선의 인삼이 이들의 주거래 품목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장산곶 부근이 청나라 상인과 조선 상인 간의 밀무역 중심지였다. 주 교역 품목은 조선의 홍삼과 청나라 상인들이 가져온 서양목이었다. 아편전쟁을 겪은 청나라에서는 아편의 해독제로 홍삼의 인기가 높았고, 조선에서는 베틀로 짠 거친 재래식 무명보다 영국이나 인도에서 방직 기계로 짠 무명의 품질이 좋다고 소문이 나면서 서양목 열풍이 일어났다.

개성 상인들은 물론 서울의 자본가들도 앞다퉈 홍삼과 서양목을 맞바꿔 큰 이득을 보았다. 거래 현장인 백령도나 소청도 등지에서는 허술한 경비 속에서도 관헌들이 불법 거래 무역상들을 체포하는 일이 잦았고, 이들은 서로 사기를 당했다며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뒷날 개항이 되면서 조선의 경제를 뒤흔든 서양목 상권은 일본 상인들에게 넘어갔고, 19세기 중반 밀무역으로 한국인의 의생활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곳이 바로 백령도 앞바다였다는 역사적 사실도 잊혀져 갔다.

백령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관창동 마을. 과거에는 중국에서 무역상들이 실어온 물품들을 마을 앞 포구에서 하역한 뒤 이곳에서 보관했다.

이 일련의 소식들은 오래 잊고 지냈던 옛이야기들과 함께 분단 이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이 섬들이 간직한 빼어난 자연 풍광과 독특한 섬 문화의 가치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이 섬들이 내세운‘머물고 싶고, 가고 싶은 섬’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비로소 현실감을 주었다.

인천항에서 하루에 3번 있는 초쾌속선을 타면 4시간 만에 백령도 용기포 신항에 도착한다. 휴가에서 돌아오는 군인들을 비롯해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배에서 내리고 있다.

서해 5도 관광의 백미는 뛰어난 자연 경관이다. 이곳은 백령도의 두무진을 비롯해 어디를 가든 해안선마다 겹겹이 쌓인 깎아지른 절벽이 장관을 이룬다. 그런가 하면 소형 항공기가 착륙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한 백사장도 있다. 지질학자들은 이런 신비한 풍광이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3개의 육괴가 오랜 기간 동안 서서히 현재의 위치로 이동해 한반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곧 충돌 시 발생한 엄청난 에너지가 지각 변동을 일으켜 기이하게 변형된 새로운 암석 덩어리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난 7월 환경부는 백령·대청·소청도의 지질 명소 10곳을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했다.

그뿐 아니라 서해 5도는 식물지리학적으로도 남방과 북방의 한계 지역이어서 두 지역의 식물이 혼재하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특히 대청도는 동백나무 자생 북한지일 뿐만 아니라 대청부채, 실부추 등의 식물이 자생하는 지역으로 학계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자, 이제 머리를 식히고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황해도식 냉면은 쇠고기 국물에 닭이나 꿩, 돼지 육수를 섞는 평양식 냉면과는 달리 돼지고기로만 국물을 낸다. 이 밍밍한 황해도식 냉면에 간장 대신 까나리액젓으로 간을 하는 것이 백령도 냉면의 특징이다. 메밀이 70% 이상 들어가다 보니 면발이 입안에서 뚝뚝 끊어진다. 여기에 부드러운 돼지고기 수육 한 접시 또는 황해도식 왕만두나 녹두 빈대떡을 곁들이면 한 끼의 상차림이 끝난다. 김장김치에 굴과 홍합을 넣어 빚은 만두 모양의 큼직한 ‘김치떡’은 계절 음식이니 겨울 손님에게 미루자. 모든 식재료는 현지산이다. ‘머물고 싶고, 가고 싶은 섬’이란 말을 혀끝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이창기 (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