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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SPRING

기획특집

근대로 가는길: 20세기 여명 속의 한국 기획특집 1 정동, 근대를 향한 꿈과 좌절의 여운

서울의 구도심에 위치한 정동은 100여 년 전 조선 왕조가 근대 국가로 다시 태어나고자 선포했던 대한제국(1897~1910)의 짧은 흥망을 지켜본 역사적 공간이다. 이곳에는 전통과 근대가 병존한 새 황궁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을 둘러싸고 서구 열강의 공사관들이 즐비했다. 사실상 우리 역사상 최초의 다자 외교 타운이었던 정동은 근대식 교육 기관과 병원,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급격히 유입된 서구 문명의 전시장이기도 했다.

옛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덕수궁의 정전을 전통식 전각과 20세기 초에 건립한 서양식 전각들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의 26대 군주 고종은 1897년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활발한 외교 활동을 전개했으나 1910년 강제 한일합방 조약으로 주권을 일본에 찬탈당했다.© 덕수궁관리소(Deoksugung Palace Management Office)

100여 년 전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각국 공사관들이 앞다퉈 들어서면서 정동은 ‘공사관 구역(Legation Quarter)’ 혹은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로 불리게 되었다. 다른 나라들이 이곳에 당시로서는 거대한 규모의 서양식 건물을 세우고 자국의 위세를 과시했던 것과 달리 미국은 전통 한옥에 공사관을 개설했고, 이 건물은 지금도 미국 대사관저에 남아 있다.

공사관들 주변으로 서양인들이 드나드는 호텔,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엔 외국인 거리가 형성되었으며, 당시 서울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이 대부분 이 주변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이곳에 거주했던 최초의 서양인은 초대 주한미국공사 푸트(Lucius Harwood Foote)였다. 그는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특명전권공사의 신분으로 이듬해 내한했고, 정동에 위치한 왕비 민씨의 친척 집을 사들였는데 이것이 미국공사관의 시초이다.

외국인들의 집단적 거주가 시작되면서 이 거리에는 새로운 풍경이 조성되었다. 미국공사관 옆에 미국 북장로회와 북감리회의 선교 기지가 둥지를 틀었고,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배재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 등 근대식 교육 기관과 병원이 문을 열었다. 화려한 서양풍 건물뿐 아니라 진귀한 서양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들이 들어선 이 일대는 곧바로 근대 서구 문명의 전시장이 되었으며, 당시 한국인들에게 이곳은 ‘근대’와 ‘서양’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다가왔다.

1910년 준공된 석조전 1층 중앙홀에서 영친왕(앞줄 가운데)이 일본 관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 전각은 고종이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미술관으로, 해방 이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옛 모습을 복원하여 2014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1903년 미국 공사 호러스 N. 알렌(오른쪽에서 네번째)의 초청으로 각국 공사들이 미국공사관에 모여 회의를 한 후 기념 사진을 찍었다. 미국공사관은 정동에 세워진 최초의 외국 공사관이며, 다른 나라들과 달리 전통 한옥에 공사관을 개설했다.

근대 국가의 출발
대한제국은 청과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서구 열강과 대등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추진하여 부국강병한 근대적 주권 국가로 거듭나고자 했다. 그 출발점으로 대한제국은 1897년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에서 벗어나 국제법이 지배하는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겠다고 선언하며 정동의 서구 여러 나라 공사관들과 외국인 주택들에 인접한 경운궁에 새로운 황궁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새 황궁에는 전통 양식의 전각 외에 다수의 서양식 전각이 건립되었다. 개명군주를 표방한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양관 건축에 나섰다. 전통 양식의 정전인 중화전이 전통적 권위를 상징한다면, 새롭게 도입된 서양식 건축물들은 근대를 표상하며 황제의 궁궐을 화려하게 수식했다.

열강 공사들은 일본의 보호국이 된 대한제국을 떠나고, 외교 타운 정동도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종이 새로운 황궁 경운궁을 정동에 건설하고 외교 활동에 전념하면서 기대했던 열강의 도움은 전혀 없었다.

1920년 발행된 『이왕가기념사진첩(李王家記念寫眞帖)』에 실린 고종의 모습. 해외 열강의 내정 간섭 속에서 자주적인 근대 국가를 이루기 위해 힘썼던 고종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었다. 1907년 순종 즉위 이후 단발한 모습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그 가운데 현재의 미국대사관저 앞 도로에 가까이 위치한 중명전은 원래 황제의 서재용으로 건립된 건물이었다. 1901년 화재 이후 2층 양옥으로 재건된 이 건물은 1904년 4월 경운궁 대화재 이후에는 고종 황제의 일상적 기거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9월, 아시아 순방 중 서울을 방문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즈벨트도 이 건물 2층에서 고종을 알현하고, 1층에서 서양식 오찬을 대접받았다. 이때 황제는 대한제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며 앨리스를 극진히 환대한 후 이 건물 복도에서 찍은 자신의 사진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그런가 하면 일제 강점기에 훼철되어 없어진 돈덕전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축하식을 국제적 행사로 치르기 위해 외빈 접대용 건물로 지어졌다. 결국 기념식은 취소되었지만, 르네상스와 고딕 양식을 절충한 이 2층 양옥 건물은 이후 황제의 외국인 접견이나 연미복을 입은 고관대작들이 참석하는 연회시설로 사용되었다.

현재 덕수궁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양관으로 남아 있는 석조전은 1900년 영국인 총세무사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의 발의로 건립이 추진되어,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엔지니어 하딩(J. R. Harding)에게 설계를 맡겼던 건물이다. 고종은 부족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의 근대성을 과시할 수 있는 웅장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전 건축에 큰 기대를 걸었으나, 아쉽게도 이 건물은 식민지화 직전인 1910년 6월이 되어서야 완공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경운궁을 중심으로 서울에 방사상 도로망이 개설되고 도로가 확장되었으며, 최초로 시민을 위한 공원이 개설되는 등 도시 개조 사업도 추진되었다. 새로운 도시계획은 주미공사관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한성판윤 이채연이 미국의 워싱턴 D.C.를 모델로 작업한 것이다.

도시 기반 시설을 갖추기 위한 전차, 전기, 전화, 수도 시설 사업에는 고종이 내탕금을 출자한 한성전기회사가 나섰고, 1899년 서대문에서 청량리 구간에 서울의 서쪽과 동쪽을 잇는 첫 전차가 개통되었다. 전차의 등장은 아시아에서는 교토에 이어 두 번째이고, 도쿄보다도 빠른 대중 교통 수단이 장안 사람들의 첫째가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1900년에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종로 거리에 가로등이 점등되어 서울의 밤거리 풍경을 훤하게 밝혔다. 한국을 네 차례 방문했던 영국인 여행가 이자벨라 버드 비숍은 1897년 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여행기 『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서울 거리에 큰 놀라움을 표시했다.

외교 전략의 중심지
고종은 1880년대 개화 정책 추진 당시부터 기독교 선교사, 서구 출신 외교관, 여행가 등과 두루 접촉하면서 누구보다도 먼저 서양 문물과 정보를 수용했다. 그는 궁궐에 전기와 전화를 도입하고 커피와 샴페인을 즐기는 등 서구식 생활 문화에도 익숙했다. 독일 황제와 비슷한 제복을 입고 각국 외교관들을 접견하는가 하면 서구식 연회와 프랑스식 정찬을 베풀었다.

고종은 궁궐에서 외국인 접대를 전담할 인물로 주한러시아 공사의 친척인 독일계 여성 손탁(Antoinette Sontag)을 고용했는데, 그녀는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정동 부지에 손탁호텔을 짓고 영업을 하기도 했다. 고종 황제는 또한 근대화 정책 추진을 위해 정부 각 부처의 고위 고문관에서부터 전기, 전차, 전신, 광산, 철도 관련 기술자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 명의 서양인들을 고용했다. 이들은 대한제국 정부 자문에 응하여 서구적 제도와 문물을 전했지만, 한편으로 각기 자국의 이해를 대변하며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정동에 거주하며 외교관, 선교사들과 함께 대한제국의 외국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다.

근대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대한제국은 외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정동이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 대외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대한제국은 1887년 미국 워싱턴에 최초로 상주 외교관을 파견한 후 러시아,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에 특명전권공사를 파견하고 상주 외교 공관을 설치했다. 또한 고종은 자신의 측근 민영환을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특사로 파견한 데 이어, 1897년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축하 기념식에도 파견했다.

대한제국은 국제조약 가입에도 나서 1899년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고, 1903년에는 제네바협약 가입국이 되었다.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세계 각국 대표들이 모인 1899년 제1차 헤이그 평화회의에는 비록 참여하지 못했지만, 1902년 2월에는 대한제국 명의의 가입 신청서를 내고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비하려 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전 대한제국은 1월 21일자로 중국의 지푸에서 전 세계를 향해 전시 중립 선언을 타전했다. 이 선언은 고종의 심복인 이용익의 지휘로 궁중에서 궁내관(宮內官)들이 프랑스어 교사 에밀 마르텔(Emile Martel)과 벨기에인 고문의 협조를 받아 작성했다고 알려졌다. 중립 선언문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은 주한프랑스공사관의 대리공사 퐁트네(Vicomte de Fontenay)였고, 지푸 주재 프랑스 부영사가 이를 직접 타전했다. 하지만 전시 중립 선언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러시아와의 개전과 동시에 한반도에 수만 명의 군사를 파병하여 불법적으로 군사적 강점을 진행했고, 국제 사회는 일본의 국제법 위반 행위를 모른 체했다.

영국은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오히려 일본을 지지했다. 러일 간 강화 담판을 중재하기 위해 미국 포츠머스로 두 나라 대표를 불러들인 루즈벨트 대통령은 포츠머스 평화 조약을 이끌어 낸 공로로 1906년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 영국, 러시아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권리를 승인받고 1905년 11월, 대한제국에 보호조약을 강요하였다. 고종 황제는 끝까지 조약을 승인하지 않았고,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정부 대신들은 협박했으므로 이 조약은 국제법상 무효에 해당된다. 하지만 일본은 서둘러 국제 사회에 조약을 공포하고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중명전은 1899년 황실 도서관 용도로 지어졌으나 1904년부터는 고종의 집무실 겸 일상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이곳에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현재는 덕수궁 외곽 서쪽에 있다. © 게티 이미지 뱅크

일본의 식민사학자 오다 쇼고(小田省吾)가 1938년 펴낸 『덕수궁사』(德壽宮史)에 수록되어 있는 중명전의 모습이다. 1925년 화재 이후 개수로 2층이 크게 변형되었다. © 한국콘텐츠진흥원

국권 피탈의 현장
경운궁 안 중명전에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보호조약을 강요당하던 날 밤, 궁궐 담 너머 미국공사관의 부영사 윌라드 스트레이트(Willard Straight)는 중명전 앞 뜰이 총칼을 든 일본 군인들로 가득 차 있음을 생생히 목격했다. 하지만 보호조약이 발표되자 미국은 가장 먼저 공사관 철수를 결정했다. 나머지 열강의 공사관들도 보호조약 체결과 동시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철수를 결정했다. 그나마 러시아와 군사적 동맹 관계였던 프랑스가 가장 늦게 공사관을 철수했다.

열강 공사들은 일본의 보호국이 된 대한제국을 떠나고, 외교 타운 정동도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종이 새로운 황궁 경운궁을 정동에 건설하고 외교 활동에 전념하면서 기대했던 열강의 도움은 전혀 없었다. 정동은 국력이 미진하면 열강에 의존한 외교만으로는 독립 주권을 지킬 수 없다는 냉혹한 국제 사회의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 황제는 여전히 국제 사회를 향한 호소를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과 러시아에 특사를 파견하고 친서를 보내 도움을 호소했다. 보호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었으므로 국제법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했으나, 열강은 이를 철저히 외면했다. 고종은 주한 미국 공사였던 알렌(Horace N. Allen)을 통해 미국이 열강과 공동으로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미국의 응답은 없었다. 또한 고종은 신임하던 미국인 선교사이자 교육자 헐버트(Homer Hulbert)를 통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태리, 벨기에, 중국 등 9개국 원수에게 친서 전달을 시도하고, 대한제국 문제를 헤이그 상설 중재재판소에 제소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고종은 마지막 노력으로 1907년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단을 파견했다. 중명전의 어느 방에서 고종 황제와 심복들이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으로 구성된 평화회의 특사단 파견을 논의했다. 러시아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한 대한제국 특사단은 44개국이 모인 평화회의에 직접 참석은 못했지만, 회의를 취재하기 위해 모인 전 세계 언론을 향해 일본의 불법적인 국권 침탈 행위를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열강은 또다시 대한제국 문제를 외면했다. 다만 헤이그 현지에서 대한제국 특사단을 도운 미국인 헐버트는 끝까지 한국을 사랑한 인물로 훗날 죽어서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단 파견을 빌미로 1907년 7월 고종 황제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고종이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황태자에게 양위를 강요당한 장소가 중명전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 순종은 일제에 의해 예전 조선 왕조 시대의 전통 궁궐인 창덕궁으로 옮겨 갔다. 강제로 퇴위당한 고종만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 경운궁에 남아 유폐 생활을 하다가 1919년에 승하했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은 나라를 되찾으려는 민중의 거국적 시위로 이어졌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출범과 함께 새 황궁으로 조영되었던 경운궁은 주인을 잃고 빈 궁궐이 되었고, 일제는 궁역을 대대적으로 축소하고 많은 전각들을 훼철했다. 고종 황제가 기거했던 중명전은 외국인을 위한 사교 클럽으로 대여했고, 외빈 접대용 양관으로 건축한 돈덕전을 철거한 자리에는 어린이 놀이 공원을 만들어 버렸다. 1930년대 일제는 덕수궁의 공원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중화전과 석조전 등 몇 개의 전각만 남긴 채 수많은 궐내 건물들을 철거했다. 대한제국의 자주권과 국격은 일제에 의해 이처럼 철저히 훼손되었으며 이와 함께 정동 시대도 막을 내렸다.

근대 국가를 향한 대한제국의 꿈과 좌절이 펼쳐졌던 역사의 현장 정동은 이제 더 이상 서양인 거리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로부터 100여 년 후 글로벌 메가 시티로 성장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유서 깊은 심장으로 남았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에게 정동은 번화한 도심 한복판에서 옛 궁궐의 돌담길을 따라 고즈넉한 정취를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산책길로 더 유명하다.

바쁜 도심 한가운데 고즈넉한 정취가 가득한 덕수궁 돌담길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산책로이다. 왼쪽이 덕수궁 후문 길이고, 오른쪽이 미국 대사관저이다. © 게티 이미지 뱅크


3.1운동의 발원지, 탑골공원

대한제국이 시민을 위해 조성한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 — 요즘에는 노인들의 쉼터로 더 많이 알려진 이곳에서 1919년 3월 1일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는 조선 민중의 거국적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약 2개월에 걸쳐 전국 곳곳에서 계속되었던 비폭력 시위는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금되어 고초를 당했으나, 시민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민주공화정의 씨앗이 되었다. 또한 식민 지배 하에 있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민중 운동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919년 1월 21일 타계한 고종 황제의 장례 행렬 장면이다.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퍼지면서 고종의 죽음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프란츠 에케르트가 대한제국 시위연대군악대원들과 함께 1902년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연주회를 마친 후 찍은 기념 사진이다. 앞줄 중앙에 중절모자를 쓴 사람이 에케르트이다. © 한국콘텐츠진흥원

1898년 독립협회 주최로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의 민중 집회가 여러 차례 열렸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백정 출신도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의 인식이 변한 덕분이었다.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황제의 거처인 경운궁 정문 앞으로 나아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기도 했는데, 이때마다 탑골공원은 사람들이 모이는 집결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시민을 위한 열린 공간
탑골공원은 고종이 1896년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도시 개조 사업의 일환으로 늘 인파가 운집하는 종로에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이 공원의 터는 원래 원각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를 민가들이 둘러싸고 있는 부지였고, 아직도 이 절의 탑이 남아 있는데 공원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고종은 1902년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면서 탑골공원에 팔각정을 건립하였는데, 이후 이곳에서 최초로 시민을 위한 양악 연주회가 열렸다.

황제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초빙된 시위연대군악대 지휘자 독일인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는 군악대를 연습시켜 황제의 생일에 연주함은 물론, 독일에서 사들여 온 아치 모양의 공연 무대를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양악 연주회를 열었다. 이 정기 연주회에는 서양 여러 나라의 국가와 민요를 비롯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도 연주되었다.

에케르트가 1902년 황제의 명으로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는 서양식 음계와 리듬에 한국풍 주제를 담았다. 이 곡은 국경일과 황실 행사, 각급 학교에서 연주되어 태극기와 함께 대한제국 신민(臣民)들의 애국심을 고취했다. 에케르트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제국의 훈3등 태극장을 서훈받았고, 죽어서는 서울 양화진의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상제(하느님)는 우리 황제를 도와서 온 세계에 권세가 오래도록 떨치게 하소서”라는 내용의 이 노래는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강제 병합된 이후 금지곡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하와이, 중국, 러시아 등지에 망명한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 가사와 선율이 조금씩 변형되어 계속 불렸다.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글이다. 이날 정오 탑골공원에서 선언서 낭독과 함께 전국적인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 독립기념관

유폐되었던 황제의 장례
1919년 1월 21일, 일제에 의한 강제 퇴위 이후 덕수궁(이전의 경운궁)에 유폐되었던 고종 황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던 고종의 갑작스런 사망을 두고 장안에는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3월 3일로 예정된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애도 인파가 경성으로 모여들었다. 3월 1일, 고종의 대여(大輿) 운구 예행 연습이 있던 날, 탑골공원에서는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한위건이 팔각정에 올라가 학생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서 수많은 공∙사립학교 학생들이 대대적인 항일 거리 시위에 나섰다. 덕수궁 정문 앞에 운집했던 애도 인파도 학생 시위대에 합류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이는 일제 강점기 전국 각지에서 가장 큰 규모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항일 독립 운동인 ‘3.1 독립 만세 운동’의 시작이었다. 애초에 해외 망명객과 유학생, 종교계 지도자 등 지식인 위주로 준비되었던 3.1운동이 학생 시위대와 시민들의 참여로 대중적인 민족 운동이 된 것이다. 서울 최초의 시민을 위한 근대식 공원이었던 탑골공원은 이렇게 근대의 또 다른 역사를 여는 광장이 되었다. 계급 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근대적 시민으로 발돋움하던 민중들이 모여 대중 연설회를 열었던 공원에서 항일 독립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운동의 결과로 그해 4월,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식민지 근대화의 표상, 군산

일제는 조선 제1의 곡창 지대인 호남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실어 가기 위해 군산항을 적극 활용했다. 이에 따라 군산은 일제에 의한 경제적 수탈의 현장이 되었으나, 역설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를 상징하는 도시로 변모하기도 했다.

비옥한 전답이 아름다운 강줄기를 따라 드넓게 펼쳐진 전라북도의 가장 큰 항구 군산은 일제 강점기에 대표적인 쌀 반출 항구였다. 조선 쌀의 일본 수출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쌀과 잡곡의 무제한 유출과 무관세무역을 허용한 일방적 불평등 조약이었다.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선 정부는 조약 개정을 통해 가까스로 곡물 수출 금지령을 얻어 냈지만, 일본은 번번이 이에 항의하며 배상금을 요구했다.

조선에서 ‘수출’한 쌀은 일본의 신흥 공업 지대 노동자들의 값싼 식량이 되었다. 일본은 이들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한 기계제 면포를 조선에 수출했다. 이렇게 개항 이후 일제 강점기까지 30여 년에 걸쳐 한국과 일본 간에는 농산품인 쌀과 공산품인 면포를 교환하는 무역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무역 구조는 한반도를 일본을 위한 식량 창고이자 자본제 상품의 시장으로 전락시켰다.

1926년 군산항 제3차 축항 기공을 기념한 쌀탑에는 쌀 800가마 이상이 쓰였다고 한다. 1933년까지 이어진 이 공사로 쌀 25만 가마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 3동이 건립되었다.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쌀 수탈의 현장
그 결과 조선에서는 늘 식량이 부족했고 쌀값이 크게 뛰어올랐다. 춘궁기에 입도 선매로 쌀을 헐값에 넘겨 버린 농민들은 가을 추수철이 되어도 먹을 쌀이 없었다. 이로 인해 빈농층이나 영세 상인 등 도시 빈민들은 물가 상승에 따른 생활고가 날로 심각해졌다. 1894년 호남 지방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산된 동학농민전쟁도 개항 이후 시작된 일본으로의 쌀 유출과 그로 인한 농민층 몰락이 배경이었다. 농민군들은 “외국 상인들이 마음대로 내지에 들어와 상행위를 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1899년 대한제국 정부는 관세 수입 증대를 기대하며 군산을 개항했다. 군산 지역에는 조선 시대에도 조창(漕倉)이 있어서 호남 조운(漕運)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개항 이후 군산에는 한때 객주와 상회사 등이 번성했다. 부국강병을 목표로 식산흥업정책을 펼치던 대한제국은 객주와 같은 일부 상인들에게 영업 특허를 주는 대신 그들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했다. 군산항에서 활동하던 객주들은 황실 재정을 관장하는 궁내부에 세금을 내는 대신 영업 특허를 획득하고 근대적 상회사로 변신을 도모하기도 했다.

하지만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침탈 야욕이 더욱 노골화됨에 따라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은 중단되었고,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군산항의 조선인 객주들은 조합이나 회사를 차려 일본 상인들에게 대항해 보았으나, 자금력 면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병합 이후에는 총독부가 객주업을 통제하게 되어 조선인 상회사는 더 이상 군산항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 결과 군산항을 거점으로 금강, 만경강, 동진강 유역의 토지들이 대거 일본인 지주들에게 넘어갔다. 바로 그 일본인 농장에서 생산된 미곡이 대일 수출용으로 군산 항구에 대규모로 집적되었다. 그뿐 아니라 주변 지역들에서 생산되어 군산항으로 모인 쌀도 모두 ‘군산미’라고 불렀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1914년 조선 전체의 쌀 수출량 중 군산이 40.2%, 부산이 33.5%, 인천이 14.7%를 차지했다.

한때 토지의 80%가 일본인 소유일 정도로 군산 일대에는 일본인 대지주 농장들이 즐비했다. 이 일본인 농장들은 후지모토(藤本), 오오쿠라(大倉), 미쓰비시(三菱) 등 일본 대자본이 개입하여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형 농장으로 운영되었으며, 조선인 소작 농민들을 거느리고 운영되었다.

1910년대 군산항에서 인부들이 일본으로 보낼 쌀을 나르고 있다. 일제는 조선의 소작 제도를 이용해 쌀과 노동력을 수탈했으며, 1899년 개항된 군산은 곡창 지대인 호남 지역의 쌀을 일본으로 선적하는 거점 항구였다.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일제 시대에 1만 명 가까운 일본인들이 살았던 군산 구도심에는 당시 지어진 일본식 가옥들이 100여 채 이상 남아 있다. 이 집들은 현재 숙박 시설이나 카페 등으로 운영되며 영화 촬영 장소로도 각광받고 있다. © 여미랑

근대 역사 유적들
한편 군산은 식민지 근대화를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했다. 쌀을 효과적으로 빠르게 반출할 수 있도록 일찍부터 근대적 교통망이 체계적으로 개설되었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의 아스팔트 도로(전주-군산 간 26번 국도)가 1908년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고, 1912년에는 익산과 군산항을 잇는 철도가 건설되었다. 이 철도에는 주요 일본인 농장마다 역이 개설되고, 철도를 항구까지 연결하여 쌀을 쉽게 운반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군산항에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 부잔교가 설치되기도 했다. 항구 주변에는 조선 쌀을 일본인 입맛에 맞는 백미로 도정하기 위해 정미 공장들이 들어서고, 주조장들도 생겨났다.

지금도 군산 지역에는 이런 역사를 돌아보게 만드는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 도시 전체가 근대 역사박물관을 이루고 있다. 이 중에는 일본인들이 살았던 고급 주택, 일본인들을 위한 절 동국사, 그리고 일본인들이 운영했던 조선은행과 제18은행 등의 건물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일제 강점기에는 다다미가 깔린 영화관도 개설되어 활동 사진을 상영하거나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요즘에도 관광객들이 날마다 긴 줄을 서는 유명 빵집 이성당도 당시 군산 지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춰 생겨난 곳이다.

서영희(Suh Young-hee 徐榮姬) 한국산업기술대학교 근대사 교수(Professor of Modern Korean History, Korea Polytechnic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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