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 이수자 허성자(Hur Sung-ja, 許性子) 씨는 완초(莞草) 공예에 과감하게 현대적 디자인을 적용한다. 기존 완초 공예의 제한된 용도와 형태에서 벗어난 그의 오브제들은 전통 공예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완초 공예의 기본 형태인 원형 화방석(花方席)이다. 완초 공예는 논이나 습지에서 자라는 한해살이풀인 왕골을 재료로 돗자리, 방석, 합 등을 만드는 작업이며 고드랫돌을 사용하거나 손으로 직접 엮는 두 가지 방법을 활용한다.
과거 농경 생활을 하던 한국인들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짚이나 풀로 생활 공예품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중 완초라고도 불리는 왕골 공예는 일손을 놓은 겨울철 농가의 좋은 부업거리이기도 했다. 왕골로 만든 자리는 한여름 더위를 식혀줄뿐더러 형형색색 무늬가 아름다워 인테리어 소품 역할도 했기 때문에 수요가 적지 않았다.
한국의 왕골 공예 문화는 그 역사가 깊다. 고려 시대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1145)에 보면, 이미 삼국 시대에 왕실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을 만드는 전담 기구가 있었고, 신분에 따라서는 왕골로 자리를 엮어 수레에 휘장을 쳤다는 기록도 있다. 왕골 공예의 진수를 보여 주는 화문석(花紋席)은 일찍이 고려 인삼과 함께 중요한 교역품이기도 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1123)에 화문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에 이미 화문석 짜는 기술이 매우 정교하고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초기 지리서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에는 지금의 강화군(江華郡)이 속해 있던 지역에서 왕실에 특산품으로 왕골속(왕골의 겉껍질을 벗겨 낸 속살)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 이미 이 지역이 왕골 재배에 적합한 날씨와 풍토로 완초 공예의 명산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때 강화군 교동(喬桐) 지역은 집집이 왕골을 짠다고 했을 만큼 완초 공예가 왕성했지만, 1980년대 이후 저렴한 수입산 공예품에 밀려 수요가 급격히 줄면서 위기를 맞았다. 현재는 몇몇 장인들에 의해 전통 공예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기교와 집중의 극치
서른이 훌쩍 넘은 늦은 나이에 완초 공예의 길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허성자 장인은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 현대적 감각의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완초 공예의 공정은 크게 재료 준비와 제작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재료인 왕골은 7~8월에 수확했다가 주로 겨울철에 물에 적셔서 말리는 정련 작업을 거친다. 이렇게 물에 적셔 말리기를 반복해야 껍질이 부드러우면서도 질겨지고, 왕골 특유의 푸른 기가 빠져 전체적으로 미백색을 띠게 된다. 정련 작업 후 문양이나 패턴에 사용될 왕골은 따로 염색한다. 끓인 물에 색깔별로 염료를 풀어 왕골을 넣고 푹 익힌 다음 건조시키면 된다. 이렇게 준비한 왕골을 굵기별로 분류해 보관해 두고 사용한다.
재료 손질을 마치면 제작에 들어가는데, 왕골을 짜는 기술에는 기구를 이용하는 방법과 손으로 엮는 방법이 있다. 화문석과 같은 자리는 보통 기구를 이용한다. 고드랫돌에 맨 실을 자리틀에 걸고 왕골을 한 가닥씩 올려 실을 교차해 가며 짠다. 방석, 바구니, 각종 합(盒)처럼 크기가 작은 기물은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손으로만 엮기 때문에 숙련된 장인의 솜씨와 감각이 필요하다.
먼저 왕골을 가늘게 쪼갠 후 두 개를 교차해 시계 방향으로 길게 꼬아서 날줄을 만들고, 다양한 굵기의 씨줄을 준비해 본격적으로 문양을 만들어 가며 제작에 들어간다. 합이나 바구니같이 높이가 있는 입체 형태의 기물은 기본형인 원형 화방석(花方席) 제작 공정에 운두(옆면)를 올리는 공정을 더한다. 엮는 방식은 동일하지만, 적절한 곡선을 주며 운두를 올리는 데는 정교한 기술과 숙달된 솜씨가 요구된다. 전체적으로는 왕골 굵기에 따라 짜임이 고르도록 당기는 힘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이같이 기교와 집중의 극치를 보여 주는 왕골 공예 장인을 완초장(莞草匠)이라고 한다.
재미에서 재능으로
허성자 씨는 강화도에서 나고 자랐다. 태어나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그에게 왕골은 가장 흔한 놀잇감이자 생활의 일부였다. 여느 강화 사람들처럼 그의 집도 화문석을 짜는 게 일상이었고, 그 또한 어머니 어깨너머로 간단한 기법 정도는 깨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 살던 허 씨가 완초 공예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5년, 그의 나이 서른이 훌쩍 넘은 뒤였다.
“집 근처에 화문석문화관이 개관하면서 직원으로 일하게 됐어요. 완초 공예는 화문석, 화방석만 있는 줄 알았다가 생활 전반에 다양하게 사용된다는 걸 그때 알게 됐죠. 문화관에서 완초장 체험 수업을 들으며 장인들께 체계적으로 배우다 보니 이 일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퇴근해서도 애들이 잠자리에 들면 완초부터 손에 잡았으니까요.”
관심사와 일이 일치하다 보니 그는 빠르게 성장했다. 2009년 서울 한벽원(寒碧園)미술관에서 열린 <한일 바스켓트리(basketry) 교류전>을 비롯해 크고 작은 공예전에 꾸준히 출품도 했다. 그가 자타 공인 완초 공예인으로 들어선 계기는 2011년 ‘강화군 공예품 경진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다. 같은 해 ‘인천광역시 공예품 대전’에서는 대상을, ‘대한민국 공예품 대전’에서는 중소기업청장상을 받았다.
“제가 상복이 있나 봐요. 재미가 있어 만들면서도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아 보고 싶어서 출품했던 건데…. 뭐든 상을 받으면 힘이 나고 열심히 하게 되잖아요.”
재미에 빠져 몰두한 결과 그는 쟁쟁한 장인들을 제치고 인정받으며 성과를 올렸다. 이듬해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완초장 전수장학생이 됐고, 2017년에는 이수자로 선정됐다. 이수자가 되면서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완초 공예에만 집중하게 됐다.
“제가 이수자들 중에 가장 젊어요. 오랜 세월 이 일을 해 오신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저는 뭔가 새로운 걸 해 보고 싶었어요. 전통 공예라고 해서 전통 문양만 넣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른 분야의 전시회나 책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구했죠.”
한정된 용도와 표현 방식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직선과 사선, 격자 패턴을 넣어 완초 공예에 현대적 감각을 입혔다. 이른바 ‘허성자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작업실 벽장의 절반을 채운 각종 디자인 관련 서적들이 그간의 과정을 짐작하게 한다.
공예와 예술 사이
완성된 합의 안쪽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허 장인이 나무 방망이로 두드리며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허 장인은 조규형, 최정유 두 명의 디자이너로 이루어진 스튜디오 워드(Studio Word)와 함께 1년여 동안 협업을 지속했으며, 그 결과 기본 형태에서 벗어난 다양한 오브제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스튜디오 워드 제공
“국가무형문화재 이수자 지원 사업 중에 전승 공예품 인증제라는 게 있어요. 2020년, 이 프로젝트에 출품한 제 화방석을 보고 심사위원이자 문화유산 보존 단체인 재단법인 예올의 자문위원이기도 한 조규형(Cho Kyu-hyung, 趙奎衡), 최정유(Choi Jung-you, 崔定有) 디자이너께서 협업을 제안하셨어요. 1년여 협업을 거치면서 왕골로만 작업하기 어려웠던 것들이 가능해졌고, 제 작업에도 큰 변환점이 됐죠.”
나무로 만든 모형[木型]을 활용하게 되면서 기본 형태에서 벗어나 원뿔형, 삼각형, 팔각형 등의 다양한 오브제가 탄생했다. 모양과 기능을 확장하면서 완초 공예의 쓰임에 대한 갈증도 어느 정도 해소됐다. 전통 기술을 구현하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그의 작업은 곧 세간의 인정을 받았고, 2021년에는 예올이 뽑은 ‘올해의 장인’으로 선정됐다.
디자이너들과 협업하여 내연을 확장했다면, 지난해에는 밀라노디자인위크 한국공예전을 통해서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다. 밀라노 한국공예전 10주년을 맞이해 이탈리아 디자이너들과 한국 장인들의 협업으로 진행된 특별 전시에서 그는 브랜드 디자이너 프란체스코 파신(Francesco Faccin)과 함께 한국의 전통 갓을 모티브로 한 오브제를 비롯해 왕골의 짜임 기술을 접목한 의자, 조명 등을 선보여 호평받았다. 그의 말마따나 경륜에 비해 비약적인 성취를 얻은 것이다.
“사실 장인이라는 호칭은 사양하고 싶어요. 그 정도로 경륜이 쌓인 것도 아니고, 장인이라면 뭔가 힘들게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할 것 같잖아요. 저는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말 재미있어서 해 오고 있거든요.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해내야 하는 일을 재미없으면 절대 못 하죠. 그래서 장인보다는 작가로 불렸으면 해요.”
허 장인이 한국 전통 갓을 모티브로 디자이너 프란체스코 파신(Francesco Faccin)과 협업한 작품으로 2022년 밀라노디자인위크 한국공예전에서 전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