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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SUMMER

마음을 끌어당기는 간판

박근철(Park Guen-chul 朴根哲) 대표는 2005년 간판을 제작하는 종합 광고 기획사 ‘DISIGN M’을 창업해 지금까지 일해 오고 있다. 그는 튀지 않으면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품위 있는 디자인으로 고객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다.

2005년부터 간판 제작하는 ‘DESIGN M’을 운영하는 박근철 씨는 고객의 마음을 빠르게 읽고 원하는 디자인을 만들어 신뢰를 얻고 있다.

낯선 곳에 가면 길가에 줄줄이 늘어선 간판들을 비교하며 식당을 선택하게 된다. 비슷비슷한 음식을 파는 가게들 사이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간판이 있다면 음식 맛이 남다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간판은 가게의 얼굴이자 가게 안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 간판은 가게의 첫인상에 불과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문을 하게 만드는 마법, 딱 거기까지다. 손님의 두 번째, 세 번째 발걸음은 주방장의 손맛과 고객을 대하는 태도, 청결, 분위기 같은 요소들이 좌우한다. 이처럼 간판은 첫걸음을 이끌 뿐이지만, 그 힘이 없이는 아무리 뛰어난 손맛도 세상에 알려질 수 없으니 고객의 물꼬를 트는 마중물이라 할 수 있다. 박근철 대표는 그런 마중물을 붓는 사람이다.


직장 생활
건물 입구에 세워진 DISIGN M의 간판은 간결하지만 강한 인상을 준다. 열린 출입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돈된 사무실이 고요하다. 좌우를 살펴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다. 크기로 봐서는 열 명 정도는 너끈하게 일할 공간이다.

“계십니까?”

그제야 출입문 맞은쪽 책상에 놓인 두 개의 모니터 사이로 얼굴이 올라온다. 박 대표다. 주문받은 간판 디자인에 열중한 나머지 사람이 들어서는 줄도 모른다.

박 대표의 고향은 강원도 인제군으로 깊고 높은 한계령 초입에 있다. 1등급 물에서만 산다는 쉬리가 살 만큼 깨끗한 개울이흐르는 곳이다. 초등학교를 나와서는 이웃 마을의 중‧고등학교로 통학했고, 한계령 너머 고성에 있는 경동대학교 건축공학부에 입학했다.

삼남매인 그는 위로는 형이, 아래로는 여동생이 있다.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집안 살림살이라 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학비는 스스로 벌어야 했다. 그러던 차에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닥쳤다. 직업 군인이 되려고 부사관 지원을 했는데 경제 위기 탓에 경쟁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결국 자원 입대해서 군 복무를 마쳤다. 전역 후 춘천으로 간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여러 곳에서 일하다가 2002년 우연찮게 간판 제작 시공 업체에 취업을 하게 됐다. 그곳에서간판 디자인과 제작, 시공을 배웠다.

간판 일이라는 게 한 가지 기술만 익혀서는 안 된다. 자그마한 간판 하나를 시공하려 해도 철공, 조명, 전기 같은 다양한 기술이 필요하다. 용접, 그라인더, 드릴 작업은 필수고 커팅, 전기 배선그리고 다양한 소재의 특성도 익혀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는 사람의 힘만으로 무게가 수백 킬로그램이나 되는 간판을 끌어올리고 밧줄에 매달려 설치해야 했다. 육체 노동 강도가 대단히 셌고 위험성도 컸다.

“그때는 너무 무서웠어요. 지금처럼 사다리차나 스카이 같은 장비가 없었거든요. 건물 4~5층 옥상에서 간판을 끌어올린 다음 안전 달비계에 몸을 의지해 작업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평균적으로 한 사람이 100kg 정도를 당겨야 했다. 간판 무게가 400kg이면 4명이 위에서 당기는 식이다. 때때로 사고도 일어났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가로 30m 길이의 간판을 옥상에서는 8명이 당기고, 아래에서는 한 명이 사다리에 올라가 밀어 올렸다. 그때 갑자기 아래에서 밀고 있던 동료가 사다리 아래로 추락한 거다. 3층 높이였다.

“2단 사다리의 걸쇠가 풀려 미끄러졌어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친구였는데……. 당시 사고로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다녀요.”

박 대표도 왼쪽 엄지를 들어 보인다.

“저도 엄지손가락이 안 구부러져요. 드릴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 인대가 끊어졌어요.”

가운뎃손가락에도 드릴 날에 장갑이 말리면서 생긴 상처가 또렷하다.

홀로서기
간판 업체 직원 시절 월급은 85~90만 원이었다. 2003년께 그 월급을 받으며 달세 방에서 살았다. 보증금 50만 원에 달세가 30만 원이었다. 학비를 마련하려고 일을 시작했는데, 달세를 내고 나면 통장이 휑하니 비었다. 대학에 복학한다고 장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빨리 기술을 익혀 독립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직원 시절 디자인 편집 작업도 어깨너머로 배웠다. 부족한 부분은 책을 사서 독학으로 익혔다. 20년 전 그가 했던 첫 디자인은 닭발 집 간판이었다. 이 간판은 지금도 춘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 가게가 번창해 춘천에만 스무 개가량 체인점이 생겼기 때문이다.“지금 보면 폰트나 그림이 촌스럽다는 생각도 들어요.하지만 제 첫 디자인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시공할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해요.”지금의 회사는 2005년 창업했다. 월급쟁이 직원으로는 장래가 막막해 작은 사무실을 얻고 다이어리 한 권을 무기로 간판 업계에 들어섰다. 박 대표의 어깨 뒤로 보이는 책꽂이에는 제각각의 다이어리가 빼곡히 꽂혀 있다. 그의 간판 업력과 엇비슷한 권수다. 고객의 요구 사항을 비롯해 결제 내역까지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몇 쪽을 넘기다 보니 과거 그의 발자국을 따라 동행하는 듯하다. 십수 년 동안 그의 손을 거친 간판들, 그리고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담겼다.그는 직관적인 사람이다. 디자인에서도 느낄 수 있다. 현장에서 익힌 감각으로 고객의 요구를 빠르게 읽고 디자인 콘셉트를 뽑아낸다. 회사 이름인 ‘M’도 그렇다. 거창하게 의미를 담고, 고민을 해 짓지 않았다. ‘업체 명을 뭘로 하지?’ 궁리할 때 신용카드에 찍힌 브랜드 로고가 보였다. ‘아, 이거다!’ 그건 바로 알파벳 M이었다.

간판 제작엔 철공, 조명, 전기 같은 다양한 기술이 접목된다. 여기에 배선, 사다리 작업 등 위험한 순간이 뒤따른다. 늘 안전에 유의해야 하는 이유다.

직관과 열린 마음
작가가 글을 쓰거나 디자이너가 책 표지를 작업할 때, 거듭 고치고 바꾸다가 첫 콘셉트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인이 시를 쓸 때도 그렇다. 시를 쓰도록 마음을 흔든 첫 감성이 중요하다. 탈고를 거듭하다 감성을 놓치면 구겨 버려야 한다. 처음 그 순간의 직관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타고난 광고쟁이다. 논리나 지식, 이성을 뛰어넘는 직관의 소유자다. 회사가 십오 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빛바랜 느낌이 들지 않고 여름날 햇빛처럼 쨍하고 빛나는 이유도 그의 직관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고객의 요청이 들어오면 현장 답사를 간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는 간판을 구상하면서 어디에 포인트를 줘 돋보이게 할까를 고민한다. 튀지 않으면서 눈길을 사로잡는 품위. 그것이 그가 추구하는 디자인이다. 자신의 디자인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고집하지 않는다. 고객의 마음을 빠르게 읽어 내 다시 작업에 들어간다. 열린 마음을 지닌 기획자다. 직관과 열린 마음은 회사가 지속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처음엔 알음알음 고향 사람들 인맥으로 시작한 사업인데, 이제는 영업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될 만큼 자리를 잡았다. 따로 영업 사원을 고용할 필요도 없다. 이미 스무 해 가까이 직접 디자인하고 시공한 간판들이 천군만마의 몫을 해내고 있다. 여기에 한번 맺은 고객과 쌓은 무한한 신뢰 관계도 한몫한다. ‘왜 그런 신뢰가 쌓였을까?’ 그도 모른다. 자신은 그저 고향 강원도 산골의 나무와 집 앞의 개울물처럼 소소하고 맑게 살아왔을 뿐이다.

때론 가슴 아픈 주문도 있다. 장사를 접으며 ‘상가 임대’ 현수막을 걸어 달라는 요구다. 이런 광고에는 돈을 받을 수 없어 시공을 하고 조용히 돌아온다. 박 대표는 큰 욕심 없이 일한다. 사업을 더 키울 계획도 없다. 지난 20년처럼 자신을 믿고 찾아 주는 고객들에게 진심을 담아 디자인하고, 정성껏 시공하며 살아가겠다는 다짐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주꾸미 식당 간판 시공 현장으로 가는 박 대표와 동행했다. 묵직한 공구 벨트를 차고 스카이 고소 작업대에 고민 없이 올라선다. 간판 배선을 마무리하며 글자 캡을 씌우는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똑 떨어진다. 땀방울 떨군 자리, 오늘도 그와 고객 간의 신뢰가 피어난다.

20년 전 처음 간판 디자인을 맡은 닭발 집은 번창해 춘천에만 스무 개가 넘는 체인점이 생겼다. 새로운 체인점이 생길 때면 지금도 직접 간판을 제작한다.

오도엽 (Oh Do-yeob 吳道燁) 시인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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