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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SUMMER

화려하지만 우울한 현대인의 자화상

안창홍(Ahn Chang-hong 安昌鴻)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독자적 예술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이다. 한국과 에콰도르 수교 6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지난해 에콰도르에서 열렸던 그의 전시가 올해 서울 사비나 미술관에서도 이어졌다.

<유령패션 2021-19>. 2021. 면지에 오일 파스텔(Oil pastel on cotton paper). 162.2 x 112.1 cm. 사비나미술관 제공.

서울의 북쪽, 북한산 봉우리가 바라보이는 곳에 삼각형 모양으로 생긴 미술관이 있다. 국내 대표적인 사립 미술관 중 하나인 사비나 미술관(Savina Museum)이다. 이곳에서 2월 23일부터 5월 29일까지 화가 안창홍의 개인전 <유령패션(Ghost Fashion)>이 열렸다. 작가의 최신작들과 새로운 시도가 소개되었던 이 전시는 한국과 에콰도르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양국 간 문화 교류 행사로 열리게 됐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유령패션>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언급해야 할 다른 전시가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절정이었던 2020년 겨울, 사비나 미술관에서는 에콰도르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 오스왈도 과야사민(Oswaldo Guayasamín 1919~1999)의 개인전 이 개최되었다. 그의 작품은 에콰도르 국가 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비단 에콰도르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에서도 크게 존경받는 작가다. 국내에 최초로 선보인 그의 작품들은 관람객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지난해에는 이 전시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한국 작가 안창홍의 특별전이 에콰도르에서 열렸다. 전시가 열린 장소는 오스왈도 과야사민의 대표작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는 과야사민 미술관(Casa Museo Guayasamín)과 인류의 예배당(The Chapel of Man, La Capilla del Hombre)이었다. 특히 스페인의 거장 프란시스코 고야 이후 인류의 예배당에서 전시가 열린 다른 나라 작가는 안창홍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 전시는 현지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독자적 스타일
1953년에 태어난 안창홍은 한국 미술계에서 독특한 존재다.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영혼과 치열한 작가 정신을 지닌 인물이다. 지난 50여 년간 보여 준 행보가 이를 증명한다. 그는 지금까지 어떠한 제도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화가로서 자존심을 묵묵히 지켜 왔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교육열이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미술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선 치열한 입시 경쟁을 통과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안창홍은 미술대학 진학을 거부했다. 이는 즉 미대 진학을 위한 획일화된 입시 미술과 입학 제도를 거부했다는 의미다. 이렇듯 그는 일찍부터 제도권 미술과 거리를 두고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었다. 형식적인 원숙함 못지않게 주제 또한 매우 진지하다. 작품을 통해 소외된 인간과 정의로운 역사에 대한 문제 의식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왔다.

국내의 많은 미술 평론가들은 그를 매우 개성적인 작가로 평가한다. 화단의 집단 중심주의나 진영 논리, 혹은 아카데미즘 등과 달리 개인주의적 화법으로 역사 속 개인의 비극을 표현했다. 또한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과 차별화된 조형적 특성이 결합되었기에 누구보다도 개성이 뚜렷한 작가로 손꼽는다. 작품을 구현하는 소재 선택과 주제, 표현 방식도 다채롭고 자유롭다. 최근작 ‘유령패션’과 ‘마스크’ 시리즈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유령패션 시리즈
안창홍은 사비나 미술관의 오스왈도 과야사민 전시를 보고 큰 감흥을 받았다. 이후 에콰도르에서 자신의 개인전 개최가 결정된 직후부터 유령 패션 시리즈를 완성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작업에 임했다. 대형 캔버스에 유화로 제작된 이 시리즈의 출발은 아주 작은 크기에서 시작됐다. 그는 인터넷에 떠도는 화려한 패션 모델들의 다양한 이미지를 수집했다. 그리고 스마트폰에 장착된 펜을 이용해 이 이미지들에 그림을 그렸고, 이 결과물을 디지털 프린트로 출력했다. ‘디지털 펜화’라는 새로운 영역을 창조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가장 전통적인 방식, 즉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이용해 붓으로 그리는 페인팅 작업으로 다시 제작했다. 기술과 예술, 디지털과 아날로그 기법의 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모델들이 취한 포즈도 각양각색이다. 인간 삶의 방식이 다양하듯 의상도 다채롭고 화려하다. 그런데 핵심은 이 모델들의 얼굴과 손, 발이 지워졌다는 것이다. 인체는 사라지고 입었던 옷만 남았다. 이것은 마치 신체와 영혼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유령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유령패션 2021-1>. 2021. 면지에 오일 파스텔(Oil pastel on cotton paper). 162.2 x 112.1 cm.

<유령패션 2022-1>. 2022. Oil on canvas. 162 x 133 cm.

<유령패션 2021-10>. 2021. 면지에 오일 파스텔(Oil pastel on cotton paper). 162.2 x 112.1 cm.

<유령패션 2021-8>. 2021. 면지에 오일 파스텔(Oil pastel on cotton paper). 162.2 x 112.1 cm.

마스크 시리즈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안창홍 작품의 핵심 키워드다. 인간의 모습은 얼굴로 구체화된다. 얼굴엔 생로병사, 고통과 절망, 희망과 염원 등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머리’와 ‘얼굴’은 분명히 다르다고 규정했다. 예컨대 동물에게도 머리가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얼굴과 다르다. 동물의 머리는 표정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얼굴은 표정을 지닌 특별한 신체 기관이다. 물론 평생 고된 일을 한 노동자나 농민의 거친 손, 피곤에 지쳐 힘없이 축 처진 어깨 등 다른 신체 기관에서도 표정을 읽어 낼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눈, 코, 입이 모여 있는 얼굴은 인간의 감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눈의 표정이 가장 중요하다. 눈빛이 지닌 상징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대형 부조 작품 <마스크> 시리즈는 얼굴, 즉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강력한 상징이다. 작가는 이 시리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 FRP에 혼합 매체(Mixed Media on FRP. 155(H) X 110(W) X 50(D) cm.

. FRP에 혼합 매체 Mixed Media on FRP. 155(H) X 110(W) X 50(D) cm.

3층 전시실에서는 투명한 디스플레이를 통해 작가의 디지털 펜화 작품 150점을 볼 수 있다.

<마스크> 연작 23점과 평면 회화를 입체로 확장한 작품 3점을 감상할 수 있는 2층 전시실.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안창홍은 어떠한 제도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다.

“마스크는 미쳐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다. 우민화된 대중들, 집단 이기주의와 폭력, 마치 최면에 걸린 듯이 표리부동한 목적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질주하는 집단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다. 눈을 가린 붕대와 이마에 뚫린 열쇠 구멍은 상실된 자아와 무의식을 상징한다. 제각각 화려한 색들로 치장했으되 막상 들여다보면 허깨비처럼 부유하는 부평초 같은 삶들. 나는 마스크를 통해 욕망의 주체이자 희생자들이기도 한 우리들에 대해, 자본과 권력의 정교한 음모와 사적인 탐욕에 못 이겨 스스로 자신을 망가뜨리거나 타의에 의해 망가지는 이중적 현상을 표현하고 싶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전 지구를 강타했다. 이를 계기로 탐욕적인 인간과 욕망에 찌든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요구된다. 과야사민은 선구자적인 자세로 20세기 남미와 특히 조국 에콰도르가 겪은 역사적 아픔과 인간에 대한 주제 의식을 표현했다. 같은 맥락에서 안창홍 역시 21세기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고민한다. 사비나 미술관에서 마주친 그의 작품들은 겉모습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미술관 4층 전시장에선 작가의 드로잉 작품 100여 점이 함께 전시되었다. 유화 페인팅이나 대형 입체 작업의 기본이 된 스케치다. 작가의 그림 솜씨가 얼마나 빼어난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안창홍은 작은 드로잉부터 캔버스 유화 작업과 디지털 펜화, 입체 조형, 사진 등 미술의 거의 모든 영역을 넘나들면서 새로움을 시도한다. 열정적인 도전 정신이 만들어 낸 값진 결과물이다.

이준희(Lee Jun-hee 李俊喜) 건국대 현대미술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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