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등단한 소설가 윤고은(Yun Ko-eun 尹高恩)은 지금까지 네 권의 소설집과 네 권의 장편 소설을 펴냈다. 독특하고 참신한 발상, 은유와 알레고리를 통한 통찰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같은 평가에 부응하듯 지난해에는 영국 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대거상 번역 추리 소설 부문에서 수상했다. 라디오 DJ로도 살고 있는 그를 방송국 스튜디오가 있는 경기도 일산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윤고은(Yun Ko-eun)의 두 번째 장편 소설 『밤의 여행자들(The Disaster Tourist)』은 자본주의 사회를 풍자한 작품으로, 지난해 영국 추리작가협회(The Crime Writers’ Association)가 주관하는 대거상(The CWA Dagger) 번역 추리 소설 부문에서 수상했다.
윤고은 제공
윤고은의 두 번째 장편 소설 『밤의 여행자들(The Disaster Tourist)』은 재난으로 폐허가 된 지역을 관광하며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는 사람들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냉정한 시스템을 풍자한 작품이다. 2013년 출판된 이 소설이 지난해 영국 추리작가협회(The Crime Writers’ Association)가 주관하는 대거상(The CWA Dagger) 번역 추리 소설 부문에서 수상했다. 아시아 작가로 이 상을 받은 사람은 윤 작가가 처음이다.
영국 추리작가협회는“한국에서 온 매우 흥미로운 에코 스릴러로, 비대해진 자본주의의 위험을 신랄한 유머로 고발하는 작품(A wildly entertaining eco-thriller from South Korea that lays bare, with mordant humour, the perils of overdeveloped capitalism.)”이라고 평가했다.
1980년생인 윤고은은 동국대학교 재학 시절인 2003년, 대산문화재단이 대학생들에게 수여하는 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이후 첫 번째 장편 『무중력증후군』(2008)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펼쳐 왔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재기발랄한 설정과 흥미로운 인물들을 내세워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한 일상을 예리하게 풍자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한가운데에서 재난 여행이라는 소재로 상을 받았다.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었나?
약 10년 전 이 소설을 쓸 때는 이렇게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돌고 백신을 맞는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 당시 다크 투어리즘에 관심이 있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자연재해가 없고 테러나 분쟁 지역이 아닌 곳이 드물었다. 대부분 어떤 종류든지 재난을 제각각 안고 있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나 쓰나미가 덮치는 것을 보면서 ‘재난’이 자꾸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재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정리해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았다. 충격에서 동정과 연민 혹은 불편함으로, 그리고 내 삶에 대한 감사, 책임감과 교훈 혹은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우월감이 그것이다.
재난 여행 자체가 자본주의 질서이자 법칙을 드러내는 한 편의 시나리오라는 시각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나?
그렇다. 내가 써 온 소설들은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부품으로 전락한 것 같다는 인식이 늘 따라다녔다. 내가 중요한 사람인 것 같지만 실상은 없어져도 상관없는 존재, 마치 칫솔이나 텀블러처럼 교체될 수도 있는 존재라는 측면은 분명히 자본주의 세계의 속성이다.
해외에서 이 소설을 ‘페미니즘 에코 스릴러’로 평가하고 분류한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재미있었다. 나는 원래 순수 문학이니 장르 문학이니 하는 구분을 좋아하지도 않고 그런 용어를 잘 쓰지도 않는다. 그런 분류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장르를 의식하고 쓰지도 않거니와 작품을 발표하고 난 뒤 뭐라고 분류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작품의 어떤 측면이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 냈다고 보는가?
독자분들이 소설에서 자본주의의 잔혹한 뼈대, 어떤 분들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과도 비슷한 맥락을 느낀 것 같다.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할 뿐인데도 파국을 막을 수 없다는 공포감이 가장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두려움은 소설을 썼던 10년 전보다 지금 훨씬 더 커졌을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을 망라해 한국에서 생산된 콘텐츠들의 서사에서 공통점을 찾는다면 무엇일까?
키워드는 ‘생존’인 것 같다. 지금 각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우선순위의 가치들보다 이 사회에서 누락되거나 고립되지 않고 제 역할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느냐에 대한 강박감이 더 큰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징어 게임>이나 아카데미상을 받은 <기생충>과 내 작품을 함께 블랙코미디 스타일로 언급하는 것 같다.
2021년 발표한 장편소설 『도서관 런웨이』(왼쪽)와 2019년 발간된 네 번째 소설집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 현대문학, 문학동네
지난해에 펴낸 장편 『도서관 런웨이』는 도서관 서가 사이를 산책하듯 걷다가 남녀가 만나는 장면을 설정했다. 도서관을 배경으로 설정하게 된 이유는?
도서관에서 가서 서가 사이를 걸어갈 때 기분이 아주 좋다. 수많은 책들이 런웨이를 걷는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다. 그 책들은 접혀 있을 때는 부피가 작지만 펼치면 수많은 생각들이 담겨 있다. 그것들이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썩 괜찮은 모델이 된 듯하다.
이 작품은 ‘안심 결혼 보험’이라는 아이디어를 동원해 이 시대 결혼의 조건을 탐색한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각자 생존할 수 있는 두 사람이 굳이 함께 살면서 같이 가기로 하는 행위의 핵심은 무엇인지 짚어 보았다. 결혼을 통해서 사회를 지탱한다는 이야기는 너무 거창한 거고, 결혼의 핵심은 두 사람이 모험을 함께해 보기로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알아서 그 ‘모험’의 조건에 무엇을 넣을 것인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분위기가 돼야 된다.
당신의 소설들은 기발한 상상력이 뒷받침되는 점이 특징이다. 흥미로운 설정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건가?
‘불안한 구조’인 것 같다. 불안한 우리 발밑을 들여다보는 거다. 호기심을 부르는 기발한 요소들은 내가 재밌어 하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그렇게 화사하고 재밌는 게 아니다. 지금 땅이 단단하게 우리를 받쳐 주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언제든 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게 나의 한쪽 세계이다. 이 생각을 진지한 톤으로 얘기할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내 스타일을 입히는 거다.
최근에는 여러 작가들과 공동으로 여행을 테마로 한 소설집도 출간했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가?
짧더라도 자주 다니는 편이다. 여행 자체도 좋지만 계획하는 것도 좋아한다. 특히 숙소를 고를 때 제일 좋다. 인터넷 사이트를 너무 많이 검색해 봐서 실제로 어느 장소에서 호텔들을 둘러보면 그 안의 구조가 눈에 선하게 그려질 정도다. 단편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에도 숙소를 예약하는 해프닝이 나온다.
여행이 소설에 영향을 미치는가?
영향을 많이 준다. 꼭 해외 여행이 아니더라도 국내 여행이나 하다못해 옆 동네에만 가도 보이는 게 있다. 늘 보던 횡단보도랑 간판이 아닌, 무언가 새로 보는 게 있다는 것 자체가 다 자극이다. 아무래도 여행지가 멀면 멀수록 더 낯설고 위험해지니 자극에 노출될 기회가 많아진다.
EBS 채널에서 라디오 DJ로 매일 생방송을 하고 있다. 소설 쓰기에 도움을 주는가?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어서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접할 수 있어 좋다. 내 취향을 넘어 폭넓게 접하다 보니 의도하지 않은 자극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여행과도 닮았다. 청취자들과는 실시간 댓글을 통해 소통한다. 라디오 스튜디오가 우주 정거장 같은 느낌도 있다. 이중문을 닫고 그 안에 혼자 있으면, 음악이 흘러가고 라디오 전파는 우주를 떠도는 느낌이다.
지금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가?
『불타는 작품』이라는 소설을 한 잡지에 연재하는 중이다. 화가인 주인공이 ‘로버트’라는 강아지가 이사장인 재단의 창작 지원을 받는 이야기다. 로버트는 엄청난 예술성을 가진 천재견이어서 백만장자의 유산까지 상속받았다. 그 개가 인간들의 허울을 비판하면서 진짜와 가짜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개가 갑이고 사람이 을인 계약을 설정해 예술을 둘러싼 관념과 구조를 풍자하고 싶었다. 내년 상반기에 출간할 예정이다.
글로벌 독자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은?
인스타그램 같은 공간에 리뷰를 올려 주거나 해시태그로 나를 선택하기도 하고, 직접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동네 서점에 꽂혀 있는 책을 찍어서 사진을 보내 주기도 한다. 이렇게 직접 소통하는 게 무척 좋다. 자주 말을 걸어 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