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피아나소에서 태어난, 본명이 빈첸시오 보르도인 김하종 신부는 1990년에 한국에 왔고 이후 빈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해 왔다.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도 그가 운영하는 복지센터는 매일 수백 명의 배고픈 노숙자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다.
김하종 신부는 30년째 매일 신부복 대신 앞치마를 입고 있다. 신부복보다 앞치마가 본인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성남시 안나의 집에 있는 그의 소박한 사무실에는 김수환 추기경(Stephen Cardinal Kim Sou-hwan, 金壽煥, 1922~2009)의 사진이 걸려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여전히 세상을 위협하고 있지만 김하종 신부는 조용히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
그에게 ‘나눔’은 전염력 높은 행복감으로 사람들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다. 성남에서 그가 운영하는 사회복지센터 ‘안나의 집’에서 나눔은 여러 형태를 갖는다.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초 이래로 가장 눈에 띄는 나눔의 형태는 매일 가난한 노숙자들을 위해 수 백 개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는 일이다.
김 신부가 이 무료급식소를 연 건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오래 전이다. 팬데믹으로 실내 음식 섭취가 제한되자 대부분의 무료급식소는 문을 닫았지만 김 신부는 그렇게 하길 거부했다. “무료급식소를 문 닫을 수 없어요. 위장은 쉬지 않으니까요. 이곳을 찾는 70퍼센트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우리가 급식을 하지 않으면 이들은 굶어야 해요.”라고 그는 말한다.
무료 점심 도시락
급식을 도시락으로 전환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는 다른 운영 체제를 요구했고 포장재 때문에 비용도 오르고 종사자들의 건강에 대한 위협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2020년 1월 이후 시 당국의 허가를 받아 안나의 집은 매일 650에서 750개의 도시락을 큰 문제없이 제공해오고 있다.
김 신부는 가난한 이들에게 매일 급식을 하는 게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언젠가 한번 쌀이 거의 다 떨어졌던 때를 떠올렸다. “매일 160킬로그램의 쌀이 필요해요. 근데 이틀 분밖에 남지 않았죠. 제가 걱정을 했더니 주방장이 ‘예수님이 보내주실 거예요’라고 하더군요. 다음날 쌀 100포대가 문밖에 놓여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음식과 돈, 옷과 마스크 등 여러 물품을 기부한다. 많은 이들은 시간을 내서 음식 준비, 포장, 청소, 도시락을 받기 위해 줄 선 사람들 안내하는 일 등을 돕는다. 자원봉사자들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찾아온다. 천주교인뿐 아니라 스님과 회교도도 포함하며 유명인사도 회사원과 학생들도 있다. 심지어 루이 뷔통이라는 이름의 개도 있어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빈민들은 성남의 곳곳에서 찾아오고 3시에 배급되는 도시락을 받으러 심지어 서울에서도 찾아온다. 김 신부와 자원봉사자들은 이들을 환영하며 “어서 오세요.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팬데믹 때문에 어려운 상황인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랑과 나눔의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팬데믹의 또 다른 경험인데 정말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요.”라고 그는 말한다.
빈민을 위한 헌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미래의 김 신부가 될 빈첸시오 보르도는 이미 신부가 되기로 작정했다. 대학에서 동양 철학과 종교를 공부한 후 그는 빈민을 돕는 데 집중하는 오블리티 선교수도회에 가담했다. 아시아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고 1990년 5월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 빈곤 가정을 돌보는 수녀님과 함께 일하기 시작한다.
2020년에 출간된 그의 책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에서 김 신부는 1992년 변곡점이 된 사건을 기억한다. 그는 곰팡이가 핀 지하방에서 어떤 날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기도 하면서 이웃이 가져다주는 음식에 의존하며 홀로 사는 50대 반신 불구의 남자를 만났다. 그와 얘길 나누고 방을 청소한 후 김 신부는 허락을 받고 그를 안아주는데 냄새가 너무나 고약해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형용할 수 없는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복지체계 밖에 남겨진 걸 깨달은 김 신부는 다음 해 빈민을 위한 급식소를 시작한다. 그 당시 한국은 지금과는 달랐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사람들이 저에게 왜 노숙자를 돕느냐고 묻곤 했어요. 노숙자는 문제를 일으키는 알코올 중독자니 도와서는 안 된다고 했죠.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진 않아요. 한국 사회가 많이 변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노숙자가 되었다. 이듬해 김 신부는 어머니의 세례명이 ‘안나’인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무료급식소를 시작했고, 그렇게 ‘안나의 집’이 탄생했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모든 요일에 무료 급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무료급식소는 성남성당이 제공한 공간에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2018년에 그곳을 비워야 했다.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김 신부의 걱정이 커졌다. 성남시 직원들은 길 건너 그린벨트로 묶였던 땅이 해제될 테니 그곳에 새로운 공간을 지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실행가능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땅을 살 돈이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인 걸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제 정말 이 일을 끝내고 퇴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라고 그는 말한다.
새로운 둥지
도움은 인터뷰 요청의 형태로 찾아왔다. 김 신부는 주저했지만 지역신문이라고 착각하고 인터뷰를 하기로 동의하고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인터뷰는 KBS방송과 하는 거였고, ‘인간극장’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김 신부에 대한 방송이 나가자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후원이 밀려들어왔고 빠르게 12억에 도달한 후원금은 땅을 사기에 충분했다.
김 신부는 오랜 기간 타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자신의 에너지를 ‘사랑’으로 꼽았다. 힘들고 포기할 뻔한 상황마다 누군가가 나타나 도움을 주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안나의 집을 꾸릴 수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이 가진 사랑의 힘이라고 믿는다.
안나의 집은 2018년 새 건물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무료급식이 주된 업무이지만 김 신부의 노력으로 더 많은 일에 봉사를 하게 되었다. 현재 의료봉사, 재활, 법률 서비스, 인문학 강좌 등이 주 단위로 제공된다. 또한 노숙자와 노인들, 가출청소년들을 위한 쉼터, 젊은이를 위한 셰어하우스, 가출청소년과 도움이 필요한 젊은이들을 위한 모바일 봉사활동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코로나 이전에 봉사활동 프로그램 ‘아지트’(아이들을 지켜주는 트럭)는 매일 밤거리를 배회하는 수십 명의 소년 소녀들을 만났다. 팬데믹으로 인해 많은 활동이 중지되었지만 김신부는 여전히 지금은 소형차인 아지트를 끌고 거리로 나간다. 아지트는 한국어로 ‘집합소’ 혹은 ‘안전한 집’을 의미한다.
“희망을 주려고 해요.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는 거죠. 씨앗이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하고 또 실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가능한 무엇이든 하도록 부름 받았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무료급식소를 문 닫을 수 없어요. 위장은 쉬지 않으니까요. 이곳을 찾는 70퍼센트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우리가 급식을 하지 않으면 이들은 굶어야 해요.”
하느님의 종
지난 30년 동안 김 신부는 거의 매일 앞치마를 몸에 걸쳤다. 하지만 일요일에는 자전거를 타기 위한 채비를 하고 한강 둑을 따라 자전거를 타러 간다. 귀중한 휴식의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긴 하지만 매일 같이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육체적으로 힘든 건 말할 것 없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뛰는 걸 알아차렸을 때 그는 의사를 찾아갔고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분간 그가 유일하게 지켜온 이탈리아 습관인 모닝 에스프레소를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힘들고 베푸는 삶에서 그가 보상으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빈민들을 위해 일하는 게 절 행복하게 합니다. 저에게는 일이 아니예요. 저의 사명이고 이곳에서 저의 삶은 이들을 환영하고 사랑하고 돕는 겁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 사명은 ‘하느님의 종’을 의미하는 그의 한국 이름 ‘하종’에 반영되어 있다. 김이라는 성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성직자였던 앤드류 김대건 (1821-1864)에 헌사하는 의미로 따왔다. 김대건은 천주교를 탄압한 조선왕조 시기에 처형당했고 1984년에 다른 한국인 순교자들과 함께 성인으로 공표되었다.
김 신부의 업적이 알려지면서 그는 2014년 명망 있는 호암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았다. 어떤 상이 가장 의미가 크냐는 질문에 김 신부는 표정이 환해지면서 최근에 손때 묻은 천 원짜리 지폐를 모아 그에게 선물한 유치원 어린이들을 언급했다. 그를 특별히 행복하게 만든 또 다른 상은 2015년 대통령령으로 주어진 한국 국적 취득이다.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오래 전에 그는 한국에 영원히 머물 것을 결심했다. 심지어 사후 장기 기증 서약까지 해 놓았다.“저는 외국인이 아니고 한국 사람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자원봉사자들은 매일 1시부터 안나의 집 지하에 있는 식당에 모여 도시락을 준비한다. 밥, 반찬, 국, 빵, 통조림 캔 등을 일사불란하게 담고 포장하는 손놀림이 무척 능숙하다. 김 신부(맨 오른쪽)도 항상 이들과 함께 일한다.
김 신부는 매일 3시부터 안나의 집 앞에 있는 성남동 성당의 너른 공터에서 노숙자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준다. 700여 개의 도시락은 2시간 정도면 모두 소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