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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SUMMER

기획 특집 : 여성 서사 – 한국 영화의 새로운 물결

주목받지 못했던 캐릭터들의 부상

대개의 영화들은 상업적 성공을 보장받기 위해 안전한 길을 택한다. 그중 자주 선택되는 방법은 관객의 주목을 끌 수 있는 매력적인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최근 여성 감독들은 이제까지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유형의 여성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임선애(Lim Sun-ae 林善爱) 감독의 2019년 장편 데뷔작 <69세(An Old Lady)>는 이전에는 다뤄진 적 없는 노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문제를 다룬 영화다. 국내외 다수의 영화제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기린제작사(KIRIN PRODUCTIONS)

1970년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최인호(崔仁浩)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별들의 고향(Heavenly Homecoming to Stars)>(1974)과 조선작(趙善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영자의 전성시대(Yeong-ja's Heydays)>(1975)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자, 이후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다룬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들이 한동안 쏟아졌다. 가난한 시골 여성들이 도시로 모여들어 몸과 웃음을 팔아 살아가는 이야기가 하나의 장르로 정착한 것이다.

현실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영화들 가운데 여성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 이들 중 작품성이 높게 평가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을 그렸다는 점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단 호스티스 장르뿐 아니라 대개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남성의 관점으로 표현되었다.

변화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아주 더디게 찾아왔다.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여성 감독이 만든 작품들에는 기존에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유형의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해 영화를 무게감 있게 이끌며 주목을 받고 있다.

여자아이들의 세계

2016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우리들(The World of Us)>은 다수의 영화제에서 윤가은(Yoon Ga-eun 尹佳恩) 감독에게 신인 감독상을 안겨 줬다. 수준 높은 작품성과는 별개로 이 영화는 내용과 소재 면에서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이전까지 한국 영화에서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캐릭터는 애니메이션에나 어울린다는 고정관념과 더불어 여자아이의 이야기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지배적이었다. 주인공 선(Sun 善)의 아버지는 “애들이 무슨 고민이 있어?”라고 말한다. 그 말마따나 아이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괴로움이 있고 지옥 같은 일상이 있다는 사실을 어른들은 관성적으로 눈감아 왔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선은 반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지만 따돌림을 당한다. 친구가 없던 선은 어느 날 전학 온 지아(Jia 智雅)에게서 희망의 빛을 본다. 여름방학 동안 지아와 친하게 지낸 선은 새로운 학교 생활을 꿈꾸지만, 2학기가 되면서 선의 바람은 산산이 부서진다. 지아가 선의 유일한 친구가 되는 대신 선을 따돌리는 무리와 어울리는 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집단 따돌림 현상을 뉴스 매체에서 흔히 그러하듯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에 가두지 않았다는 데 있다. 또한 이를 폭력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남자아이들의 세계를 다루는 영화에서는 대개 집단 폭행 장면이 빠지지 않는다. <우리들>은 물리적 폭력을 묘사하지 않았음에도 아이들이 느끼는 고통을 생생히 전달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어느 사회, 어느 집단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 초등학교에서는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윤가은(Yoon Ga-eun 尹佳恩) 감독의 2016년 개봉작 <우리들(The World of Us)>은 어린아이들의 시선으로 그들 사이의 관계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2019년 개봉된 <우리 집(The House of Us)>에서도 감독은 섬세하면서도 사려 깊은 시선으로 아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그려냈다.
ⓒ CJ ENM, ㈜아토(ATO Co., Ltd.)

여성 감독들이 보여 주는 다양한 표현 방식과 관심 받지 못했던 인물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여성 서사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한가람(Han Ka-ram 韩佳嵐) 감독의 2019년 작품 <아워 바디(Our Body)>는 무미건조한 현실에 지쳐 버린 주인공이 달리기를 통해 삶의 변화를 모색해 가는 과정을 담았다. ⓒ 영화진흥위원회(KOREAN FILM COUNCIL)

노인 여성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된 임선애(Lim Sun-ae 林善爱) 감독의 장편 데뷔작 <69세(An Old Lady)>는 한국 영화에서 한 번도 다루어지지 않았던 노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을 다룬다. 이 작품은 하트랜드국제영화제(Heartland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아미앵국제영화제(Amiens International Film Festival) 등 다수의 해외영화제에도 초청되었는데, 주최측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노인 성폭행 문제를 섬세하면서도 힘있게 그려낸 점을 초청 이유로 밝혔다.

주인공 효정(Hyojeong 孝貞)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69세 여성이 20대 남자에게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남자는 합의된 관계였다고 주장하고 구속 영장은 거듭 기각된다. 이러한 현실에 주인공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고소인이 젊은 여자였으면 가해자가 구속됐을까요?”

그동안 사회적 약자로 생각했던 부류에 노년의 여성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영화를 통해 임 감독은 관객들이 갖고 있는 성폭행과 여성에 대한 편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한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잘 입는다’는 담당 형사의 칭찬에 효정은 옷을 잘 못 입으면 사람들이 무시하고 치근덕댄다면서, “이 정도 입고 다니면 제가 안전해 보입니까?”라고 반문한다. 옷차림 하나에서도 방어 태세를 갖춰야 하는 누군가의 현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영화는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영화는 거의 유일하게 효정의 편에 서 있는 동거인 남성을 등장시키는데, 이 싸움이 남성의 투쟁이 되도록 두지 않는다. 효정은 동거인의 집을 떠나서 혼자 성폭행범의 뒤를 쫓는다. 감독은 남성의 도움을 받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선입견을 뒤집는다.

욕망의 자각

한편 한가람(Han Ka-ram 韩佳嵐)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아워 바디(Our Body)>(2019)는 젊은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만 보면 새로울 게 없지만, 두 명의 젊은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새롭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감독은 매우 도발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8년째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31살 여성 자영(Ja-young 子英)이 남자친구로부터 버림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무런 의욕도 없고 삶의 목표마저 잃어버린 그의 눈에 어느 날 조깅을 하는 현주(Hyun-joo 玄珠)가 보인다. 아름답고 건강한 현주의 몸을 선망하게 된 주인공은 현주가 몸담고 있는 동호회에 가입해 달리기를 시작한다. 언뜻 보면 여성의 외모에 대한 통속적인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것 같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주인공은 성공과 출세 등 자신에게 주입된 ‘타인의 욕망’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자각하며 회복해 간다.

아빠와 고모, 주인공 남매 등 2대에 걸친 남매들이 겪은 어느 여름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윤단비(Yoon Dan-bi 尹丹菲)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Moving On)>은 국내외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거머쥐며 2020년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오누필름(ONU FILM)

서사의 확장

윤단비(Yoon Dan-bi 尹丹菲) 감독의 2020년도 장편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Moving On)>은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어 4관왕을 기록했고, 제24회 토론토 릴 아시안국제영화제(Toronto Reel Asi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오슬러 최우수 영화상(Osler Best Feature Film Award), 제38회 토리노국제영화제(Torino Film Festival)에서 국제영화비평가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Film Critics Award)이 선정한 최고 작품상(Best Film)을 받았다. 토론토 릴 아시안국제영화제 심사위원들은 “윤단비 감독이 그려 낸 3대 가족의 섬세하고도 복잡한 관계의 역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남매의 여름밤>은 작은 몸짓들, 고요하지만 사무치는 기쁨의 순간들, 그리고 변화와 슬픔을 통해 가족의 사랑을 말해 준다(The jury was impressed by debut Director Yoon Dan-bi’s depiction of the delicate and complex dynamics of a multi generational family. Their love is told through small gestures and quiet but poignant scenes of joy, change and grief.)”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 영화는 그 외에도 제17회 홍콩 아시아영화제(Hong Kong Asian Film Festival)에서도 주목할 만한 젊은 아시아 감독들에게 수여하는 뉴 탤런트 상(New Talent Award)을 수상하는 등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작품상, 신인 감독상, 심사위원 특별상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영화의 주인공은 10대 소녀 옥주(Okju 玉周)이고, 이야기는 옥주와 남동생이 아버지와 함께 갑자기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시작된다. 옥주는 의지나 분노 혹은 욕망의 주체라기보다 사건의 관찰자에 가깝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아버지,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혼자 외롭게 이층집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 남매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고모, 그리고 어린 남매로 구성된 가족의 이야기는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해 여름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그들에게 특별한 정서적 연대감을 선사한다. 영화는 어린 남매와 성인 남매(아버지와 고모)를 평행한 구도로 묘사함으로써 수십 년 시간의 간극을 하나의 장면처럼 표현한다.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이 사회 통념이나 선입견에 진중하게 문제 제기를 하는 것과 달리 <남매의 여름밤>은 소녀의 성장을 응원하며, 관객들이 이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에 정서적으로 몰입하도록 이끈다.

남동철(Nam Dong-chul 南東喆)부산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program dir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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