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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SUMMER

K-패션의 새로운 지형도

탄탄한 중견 브랜드들의 컬렉션이 해외에서 스포라이트를 받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활약이 K-패션의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이들은 신선한 시도와 온라인을 활용한 감각적인 스토리텔링 등 전 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성장 중이다.

롯데월드타워에 자리한 마르디 메크르디 매장. 프렌치 감성을 표방하는 디자이너 브랜드이며, 감각적이면서도 친숙하고 편안한 디자인으로 20~30대 여성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언라벨 제공, 사진 한성훈(Sunghoon Han, 韓成鑂)

지난 2월, 영화 <듄: 파트 2>를 홍보하기 위해 할리우드 배우 티모시 샬라메가 서울을 방문했다. 체류 기간은 짧았지만, 그의 행보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특히 공식 행사에서 입었던 의상과 개인적인 쇼핑 목록은 연일 화제였다. 콘래드 서울(Conrad Seoul) 호텔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그는 준지(JUUN.J)와 포르쉐가 협업한 미래적인 점프 슈트를 입은 데 그치지 않고, 서울 강남에 위치한 준지 플래그십 스토어를 직접 찾아가 제품을 구입했다. 우영미(禹英美) 디자이너의 편집숍 맨메이드 도산(Manmade Dosan)에서 쇼핑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준지를 이끄는 정욱준(鄭旭峻)은 글로벌 패션 교육 기관 에스모드 서울을 졸업한 뒤 유명 패션 기업들에서 일하다가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는 정도를 밟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로 2007년 파리 패션위크를 통해 글로벌 디자이너로 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준지는 현재 삼성물산 패션 부문(Samsung C&T Fashion Group)에 속해 있다.

한편 준지가 해외에서 각광받기 이전 K-패션의 물꼬를 튼 디자이너가 바로 우영미였다.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를 졸업한 우영미는 1980년대 말 부티크를 열어 성공시키며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복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대 초 파리에 진출한 이후 현재까지 가장 성공한 국내 디자이너로 평가된다.

준지(JUUN.J)가 2023년 6월, 파리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에서 선보인 2024 SS 컬렉션 중 일부. ‘스킨(Skin)’을 테마로, 실루엣의 대비를 극대화했다.
ⓒ 준지

K-패션의 계보

K-패션은 현재 국적을 넘어 동시대성을 지닌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젊은 디자이너들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며, 해외에서도 이들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K-패션의 계보를 간략하게 훑어보자.

K-패션의 출발점은 1990년대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정상급 디자이너들의 모임인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Seoul Fashion Artists Association)의 주도로 1990년 가을부터 시즌마다 정기적인 패션쇼가 열렸다. 이 단체는 국내에 컬렉션 개념을 도입해 디자이너들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이후 서울패션위크(Seoul Fashion Week)를 비롯해 다양한 컬렉션들이 개최되는 바탕을 마련했다. 또한 국내 디자이너들이 해외 컬렉션에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당시 국내 유명 디자이너였던 이신우(李信雨), 이영희(李英姫)가 1993년 3월 함께 파리 패션계에 진출했다. 이신우는 전위적인 디자인으로 관록을 보여 줬으며, 이영희는 한복의 선과 색감을 응용한 양장으로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에는 ‘패션계 대모’라 불리는 진태옥(陳泰玉)이 한국적 정서를 담은 간결한 디자인을 내세우며 이신우, 이영희와 함께 파리 무대에 섰다. 이들은 한국 패션사에서 컬렉션 시대를 연 1세대에 해당하며, 이들의 노력을 통해 K-패션의 토대가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한섬(Handsome), 형지(Hyungji) 같은 패션 회사에서 만든 로컬 브랜드가 백화점이라는 공급망을 통해 붐을 일으켰다. 한섬의 시스템(SYSTEM), 타임(TIME) 등과 형지의 크로커다일 레이디(Crocodile Ladies)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로컬 브랜드들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외국 패션 브랜드들이 수입되는 한편 동대문 공장에서 생산된 로드숍 제품, 패스트 패션 브랜드에 차례차례 밀리면서 한동안 정체기를 겪게 된다.

민주킴이 바리공주 설화에서 영감을 받아 2022년 한 해 동안 지속한 ‘BARI’ 컬렉션 중 일부. 민주킴은 동화적 요소를 현실감 있게 풀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평가된다.
ⓒ 민주킴

그러나 최근 우영미, 준지 같은 하이엔드 브랜드가 해외에서 공고히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2014년 뉴욕 패션위크 무대를 통해 출발한 혜인서(HYEIN SEO), 2015년 브랜드 출시 후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서 첫 컬렉션을 선보인 민주킴(MINJUKIM)처럼 해외에서 먼저 인지도를 높인 젊은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역수입되면서 K-패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온라인의 영향력

과거 K-패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정규 교육을 밟은 후 도제식으로 일을 배워 브랜드를 만들었다. 반면에 최근에는 정형화되지 않은 방법을 통해 브랜드가 탄생하고 성장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존에 브랜드를 홍보하는 일반적 방식인 카탈로그와 잡지 광고, 패션쇼를 대신해 인플루언서나 셀럽의 언급을 통해 하루아침에 브랜드가 널리 알려지는 세상이 된 것이다. 또한 시즌별로 공들여 만들던 패션 필름은 이제 숏폼 형태로 하루에도 몇 개씩 대중들에게 전달된다. 온라인을 통해 글로벌 디자이너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얘기다.

물론 의상 디자인을 위해 기본기를 다지고 해외로 나가 더 넓은 경험을 하는 방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만큼 파리 패션위크의 위상 또한 여전하다. 김인태(Kiminte Kimhekim)가 이끄는 브랜드 김해김(KIMHĒKIM)은 파리 무대에 컬렉션을 올리는 방법을 고수한다. 그는 파리에서 10년 동안 생활하며 발렌시아가에서 커리어를 쌓다가 2014년 자신의 성씨인 ‘김해(金海) 김’을 브랜드 이름으로 삼아 론칭했다. 2019년에는 프랑스 패션협회(FHCM, Fédération de la Haute Couture et de la Mode)에 이름을 올렸는데 우영미, 정욱준에 이어 세 번째 한국인 멤버이다. 파리 패션위크를 주관하고 있는 이 협회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파리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어야 하며, 패션계 전문가들의 까다로운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김해김이 ‘블랙 앤 화이트(Noir et Blanc)’라는 타이틀로 파리 패션위크에서 선보인 2024 SS 컬렉션. 김해김은 시적이면서 심플하고, 여성적이면서도 내면의 강인함이 엿보이는 디자인을 구현하는 브랜드이다.
ⓒ 김해김

김해김은 우영미처럼 파리에 숍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준지처럼 대기업을 배경으로 두고 있지도 않다. 대신 이 브랜드는 SNS를 통해 유명해졌다. 2019년 파리 컬렉션에서 김인태는 ‘관종’을 주제로 무대를 구성했다. 모델들이 링거 폴대를 끌며 워킹하거나 셀카봉을 들고 무대 위에 섰다. 그의 표현 방식은 큰 화제가 되었고, 인스타그램이나 핀터레스트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섬세한 테일러링을 통해 완성된 과감한 의상은 쿠튀르로서 가치도 높고, 보는 재미도 크다. 김해김의 약진은 인터넷상의 ‘좋아요’ 수와 판매량이 비례하지 않더라도 SNS가 글로벌 디자이너에게 어떤 수단이 되는지 보여 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독자적 방식

신진 디자이너들은 때로 색다른 행보를 보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마뗑킴(Matin Kim)은 일반적인 디자이너 브랜드와 다른 길을 걸어왔다. 마뗑킴은 심플하고 자유분방한 디자인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젊은 층에게도 사랑받고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다. 이 브랜드는 국내 주요 포털 사이트 중 하나인 네이버(NAVER)의 블로그 마켓에서 출발했다. 시작이 블로그였던 만큼 구독자, 구매자들과 끈끈하게 소통했고 견고한 팬층을 얻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지난해 도쿄를 시작으로 올해 일본 곳곳에서 연이어 진행한 팝업 스토어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올해 하반기에는 홍콩, 마카오, 대만 등 중화권 지역에 오프라인 매장을 새롭게 오픈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할 수 있도록 현지 비즈니스와 브랜딩 강화에 나설 계획이다.

온라인으로 출발했지만, 오프라인에서도 경쟁력을 인정받은 마뗑킴은 지난해 매출 1,000억 원을 기록했고, 현재 14개의 매장을 운영하며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는 진정성 있는 소통이 빛을 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ON THE PATH’를 주제로 한 마뗑킴의 2024 봄 컬렉션. 봄 햇살의 따뜻함에서부터 도시의 현대적인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순간을 다양한 관점으로 자유롭게 표현했다.
ⓒ 마뗑킴

2018년 권지율, 조영민 두 사람이 합심해 만든 브랜드 떠그클럽(THUG CLUB) 또한 비상한 관심 속에서 성장했다. 이들은 직접 모델로 활동하고 SNS에 사진을 올리는 등 틀에 박힌 방식을 지양하고, 브랜드에 자유분방한 감성을 담는다. 2021년에는 도발적인 문구가 적힌 언더웨어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일반적으로 표출하기 힘든 태도와 철학을 대리 만족하려는 마니아들의 심리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떠그클럽은 더 정제된 브랜드로 거듭나며 전성기를 맞고 있다. 국내외 내로라하는 힙한 뮤지션들이 이들의 옷을 입고 브랜드를 언급하면서, 떠그클럽은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스트리트 브랜드로 정착했다. MCM, 젠틀몬스터 같은 브랜드와 협업하며 더 큰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떠그클럽의 2024 SS 컬렉션 ‘하이브리드 카우보이(Hybrid Cowboy) 중 일부. 영상 매체로만 접한 카우보이 문화를 상상력을 더해 재해석했다. 떠그클럽은 자신들의 감성을 거침없이 그려내며 새로운 트렌드를 창출하는 브랜드로 통한다.
ⓒ 떠그클럽

팬덤의 형성

돌고 도는 유행의 쳇바퀴 안에는 ‘국민 티셔츠’라는 영역이 항상 존재한다. 최근 몇 년 사이 데이지꽃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옷을 입은 젊은 여성들을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혹시 어디서 옷을 나눠주는 것이냐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장악력이 대단하다. 이 데이지꽃은 마르디 메크르디(Mardi Mercredi)의 시그니처 심볼이다. 프랑스어로 화요일, 수요일을 뜻하는 이름처럼 프렌치 캐주얼을 표방하는 브랜드이며, 패션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던 디자이너들이 의기투합해 2018년 만들었다.

브랜드의 정체성이 되어 버린 플라워 그래픽은 원래 한 시즌을 위한 디자인이었는데, 론칭한 지 1년 만에 대유행하게 되자 시그니처 디자인으로 자리 잡았다. 누가 봐도 부담 없는 꽃무늬가 신의 한 수였지만, 플랫폼의 힘 또한 한몫했다. 이 브랜드는 10대부터 30대까지 이용하는 대표적인 온라인 패션 스토어 무신사(MUSINSA)와 29CM에 입점하며 세를 확장했다. 온라인을 이용하는 대다수 타깃에 맞춰 가격대를 설정하고, 기억하기 쉬운 로고로 대중성을 획득한 것이 마르디 메크르디의 성공 요인이다. 온라인 파워에 힘입어 낸 한남동(漢南洞) 플래그십 스토어 앞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그런 점에서 마르디 메크르디의 플라워 그래픽은 지금 K-패션을 상징하는 로고라 할 수 있다.

과거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통상적인 과정을 밟으며 차근차근 브랜드를 성장시켰다면, 최근 신진 브랜드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정신을 담아내며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처럼 현재 K-패션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지형도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박의령(Park Ui-ryung, 朴誼玲) 프리랜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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