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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디보다 특별한 미식 여행지

Features 2025 SUMMER

그 어디보다 특별한 미식 여행지 삼면이 바다인 한국은 유난히 섬이 많다. 그중 음식이 가장 돋보이는 섬은 단연 울릉도다. 넘쳐나는 해산물, 토종 한우, 육지에서 맛보기 힘든 각종 나물들까지 군침 도는 먹거리가 여행객을 기다린다. 울릉도는 특별한 미식 여행지이다. 울릉도 마른오징어는 열풍이나 기계 건조로 말리는 다른 지역과 달리 자연 해풍 건조 방식을 고수해 맛과 향이 더 좋다. 오징어 귀에 구멍을 뚫어 긴 막대로 꿰어 말리는 것도 울릉도만의 건조 방식이다. 섬은 고립과 단절의 상징이다. 하지만 이런 점 때문에 섬 음식은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고유성을 지키며 발달해 올 수 있었다. 특히 울릉도가 그렇다. 울릉도에서 가장 먼저 맛볼 만한 음식은 비빔밥이다. 한식을 대표하는 비빔밥은 각종 나물과 계란프라이, 고추장 양념 등을 밥에 비벼 먹는 음식이다. 유명 할리우드 배우가 조리법을 SNS에 올릴 정도로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대중화되었다. 그러니 울릉도라고 해서 뭐가 다를까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울릉도의 비빔밥은 다르다. 주재료가 독특하기 때문이다. 색다른 비빔밥 갯바위에 붙어사는 바다 생물 따개비가 주인공인 따개비밥은 울릉도를 대표하는 비빔밥이다. 전복보다 크기가 작은 따개비를 따끈한 밥 위에 수북하게 올리고 참기름, 깨소금 등을 넣어 먹으면 바다 향을 흠씬 느낄 수 있다. 울릉도의 여러 항구 인근에 있는 대부분의 식당에서 판다. 그만큼 울릉도의 식문화를 대표하는 향토 음식인 것이다. 따개비는 칼국수나 죽 등으로도 만들어 먹는다. 따개비 비빔밥은 울릉도의 향토 음식 중 하나다. 해녀나 어부들이 해안가 바위에 붙어 있는 따개비를 직접 채취해 일일이 손질하기 때문에 조리 과정이 번거롭지만, 쫄깃하고 오독오독한 식감과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바다 향 가득한 비빔밥이 또 있다. 홍합밥은 울릉도에서 채취한 자연산 홍합이 재료다. 양식 홍합과 달리 자연산 홍합은 ‘섭’이라 부른다. 쫄깃쫄깃한 홍합엔 바다 특유의 달곰한 짠맛이 배어 있다. 씹을수록 상큼한 단맛이 입안에 퍼진다. 황홀한 별미다. 바다에서 나는 식재료만 비빔밥의 재료가 되는 건 아니다. 울릉도만의 매력이 가득한 산채 정식이 있다. 산나물로 차려낸 정식의 메인은 비빔밥이다. 각종 산나물을 밥과 비벼 먹는다. 울릉도에서 산나물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은 나리분지다. 섬에서 유일한 평야 지대인 이곳은 성인봉을 비롯해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나리분지에 가면 마을이 형성돼 있고, 식당도 있다. 이들 식당은 나리분지에서 자란 다양한 산나물로 비빔밥을 낸다. 명이나물, 부지깽이, 취나물, 고비, 삼나물(눈개승마), 더덕, 두릅 등 그야말로 산나물의 향연이 펼쳐진다. 나물은 한국인만 먹어온 식재료다. 예부터 한국인들은 들과 산에서 채취하거나 키운 나물을 볶고, 삶고, 무쳐 반찬으로 만들었다. 국으로 끓여서도 먹었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에선 나물도 계절마다 맛이 다르다. 햇볕에 잘 말린 나물을 겨울철 물에 불려 조리해 먹으면 봄에 먹는 나물과는 다른 풍미가 느껴진다. 한국인들은 그 맛을 즐기면서 계절을 보낸다. 기실 한식의 정수는 나물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평범한 나물이 외국에선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한식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요즘,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한식을 내세운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요리사들이 나물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구하기 쉽고 가격이 싸서 먹었던 나물이 지금은 최고 건강 음식으로 등극했다. 고기 맛이 나는 나물이 있을 정도로 다채로운 맛과 채소에 버금갈 만큼 영양소가 풍부한 게 나물의 특징이다. 나물, 울릉도의 진짜 맛 울릉도에는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희귀한 나물들이 자란다. 대표적인 게 명이나물이다. 이 나물의 정식 명칭은 울릉산마늘이다. 이름엔 유래가 있다. 옛날 울릉도로 이주한 이들이 눈 쌓인 겨울 먹을거리가 부족해 눈을 헤치고 다녔다고 한다. 이때 발견한 것이 바로 명이나물이다. 이 나물로 배를 채우며 하루하루 연명한 울릉도 사람들은 “명(命)이 길어지게 한다”란 의미에서 ‘명이나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쌈이나 장아찌로 조리해 먹는다. 울릉도 사람들이나 즐겨 먹은 명이나물이 건강에 좋다는 정보가 널리 알려지면서 육지에서도 인기 식품이 됐다. 자생하는 명이를 캐는 데 머물지 않고 키워서 소득원으로 삼는 농부들이 늘었다. 특히 명이나물 장아찌는 새콤달콤해 기름진 삼겹살 구이와 찰떡궁합이다. 섬말나리는 명이나물 버금가는 ‘유명 나물’이다. 심지어 국제적인 명성도 얻었다.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는 섬말나리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식물이다. 국제슬로푸드협회가 지정하는 ‘맛의 방주(Ark of Taste)’에 2013년 울릉도 칡소와 함께 등재됐다. ‘맛의 방주’는 한 지역에서 예부터 소비되어 왔으나 소멸 위기에 처한 가치 있는 식재료를 보존하기 위해 기획된 프로젝트다. 울릉도 사람들은 섬말나리를 재료로 한 전통 음식을 복원하고 종자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 더덕은 한국이 원산지다. 전국적으로 재배되는 더덕은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열량이 낮아 건강식으로 인기다. 더덕을 손질해 납작하게 두드린 다음 매콤달콤한 양념을 발라 굽는 더덕구이가 가장 인기다. 조리하지 않은 생더덕을 양념에 무쳐 먹는 더덕무침은 아삭하면서 향긋하다. 더덕장아찌, 더덕밥 등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다. 울릉도엔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더덕 음식이 있다. 등산로 입구에서 판매하는 더덕주스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질 좋은 울릉도 더덕을 갈아 만들어 맛과 건강을 다 잡은 음식이다. 이 외에 부지깽이와 삼나물(눈개승마)도 울릉도에서 만날 수 있는 귀한 식재료들이다. 울릉도 특산식물인 부지깽이나물은 맛과 향이 좋아 식재료로 애용되는 산나물이다. 비타민을 비롯해 각종 영양소가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 40헥타르에서 재배되고 있으며, 울릉도 밭농사 중 소득액 규모가 가장 크다. © 울릉군 미각의 확장 도동항 인근에는 칡소 전문 식당들이 있다. 차림표에는 약소 구이, 약소 양념불고기 등이 적혀 있다. 약소는 토종 한우 종자인 울릉도 칡소를 말한다. 황갈색 몸에 검은색 줄무늬가 있는 게 특징이다. ‘약소’는 울릉도에서 자라는 각종 산나물과 깨끗한 물을 먹고 자랐기 때문에 약과 다를 바 없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칡소의 장점을 살피기 전에 한우 얘기부터 해보자. 기원전 2000년부터 한반도에서 사육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는 한우는 외래종과 섞이지 않은 토종 품종이다. 과거 농경문화 시대에는 밭을 가는 일꾼 역할을 했던 가축이다. 이런 이유로 집마다 재산 1호가 한우였다. 누런색인 황소, 칡소, 몸 전체가 검은색인 흑우 등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멸종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수십 년 전부터 정부와 지자체들이 한우 종자 복원 사업을 활발하게 펼쳐왔다. 2006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우리 민족의 문화 중 대표성을 지닌 100가지 상징을 선정하면서 한우도 포함시켰다. 그만큼 한우는 우리의 문화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부드러운 식감과 고소한 풍미를 제공하는 한우는 한국을 방문한 세계적인 요리사들조차 탐내는 식재료다. 양질의 단백질과 미네랄 등 영양소도 풍부하다. 어업 전진 기지인 저동항은 예로부터 오징어잡이 어선들로 유명하다. 어두운 밤바다를 밝히는 오징어잡이 배들의 불빛은 울릉도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다. 울릉도 특산물을 얘기할 때 오징어도 빼놓을 수 없다. 예부터 울릉도 여행객이 선물용으로 잔뜩 사가는 게 바로 마른오징어였다. 청정한 해풍과 따스한 섬 햇볕에 잘 말려진 오징어는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우러난다. 도톰한 살도 식미를 돋운다. 밤새 잡은 오징어를 바로 손질해 팔기 때문에 신선도가 높다. 오징어를 재료로 하는 음식도 다양하다. 우선 오징어 내장과 갖은 채소를 함께 끓여낸 보양식인 오징어 내장탕이 있다. 신선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음식이다. 여름에는 오징어를 얇게 썰어 찬물에 넣고 밥과 함께 비벼 먹는 오징어 물회가 아주 인기다. 또 오징어불고기, 오징어순대도 있다. 섬이 만들어 낸 음식은 육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질수록 입맛에 맞게 다듬어진다. 하지만 고유성은 훼손되지 않고, 여행자들의 미각만 넓힌다. 섬 음식의 힘이다. 독도새우를 비롯해 울릉도에서 나는 제철 식재료를 활용한 음식. 코스모스 울릉도에서는 전담 셰프가 울릉도만의 특별한 식재료를 테마로 한 파인 다이닝을 선보인다. © 코스모스 울릉도

삶을 위한 또 다른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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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또 다른 선택 복잡하고 치열한 도시 생활에 지친 청년들이 대안적 삶을 위해 농촌이나 어촌으로 이주하고 있다.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으며 살겠다는 게 아니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울릉도에 정착한 지 7년이 넘은 임효은(Lim Hyo-eun) 씨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서울 직장인이었던 임효은 씨에게 울릉도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2018년 울릉도 여행을 통해 이곳의 풍경과 사람들에게 매료된 그녀는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며 자신만의 속도대로 살고 있다. © 스튜디오 켄 울릉공작소(Ulleung Gongzakso)는 울릉도 북동쪽 천부항 근처에 있는 작은 기념품 가게다.이곳에서는 임효은 씨가 직접 디자인해 만든 컵, 에코백, 마그넷, 키링 같은 물건들을 판다. 모두 울릉도의 지역성이 드러나는 관광 상품들이다. 그녀가 울릉도에 정착하기 전까지 이곳에는 그 흔한 기념엽서 하나 없었다. 이제는 그녀의 손에서 디자인 상품들이 개발된다. 그녀가 2024년 출간한 책 『마음이 울릉울릉』과 SNS 채널을 보고 울릉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졸업 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2018년, 일에 치여 지쳐갈 무렵 울릉도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그녀에게 울릉도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참가자들에게 무료로 숙박을 제공한다고 하니 안 갈 이유가 없었다. 한 달살이 프로그램 참여자들 대부분이 2주만 머무르거나 예정대로 한 달 후 떠났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섬 생활은 낯설었고, 내륙보다 물가도 비싼 편이라 경제적 부담도 컸다. 하지만 임효은 씨는 복잡한 도시 대신 한갓진 섬 울릉도에서 자유롭게 살기를 선택했다. 울릉도가 그녀에게 새롭게 살아볼 용기를 준 것이다. 이제 그녀는 디자이너이자 사진작가, 에세이스트, 인플루언서로서 부지런히 울릉도를 알리고 있다. 울릉도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지금이 아니면 엄두를 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멀고 낯선 섬에 자발적으로 고립되어 본다면, 그 자체로 재미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누군가가 울릉도에서 살라고 강제로 등 떠밀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울릉도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나? 울릉도에 온 지 7년이 지났지만, 처음 왔던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첫날부터 입도가 쉽지 않았다. 선박 출항이 지연되고, 가는 동안 배도 많이 흔들려서 무척 고생했다. 멀미할까 봐 밤을 꼬박 새우고 배에 올랐으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비몽사몽 중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 채 다녔는데, 첫날 저녁 마주친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울릉도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해안도로 길이는 약 45㎞다. 마라톤 풀코스와 비슷하다. 하지만 작은 섬 안에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지형들이 숨어 있다. 마치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는 외국 같은 느낌이다. 그야말로 신비의 섬이다. 울릉도는 연교차가 적고 눈이 많이 내리는 독특한 기후와 화산 지형인 탓에 지리 과목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어릴 때부터 지리 과목을 좋아하던 나에게는 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살아보니 어떠했나? 아름답고 험준한 곳이다. 울릉도는 1880년대 공식적으로 ‘사람이 살아도 되는 섬’이 되었다. 그때 내륙에서 이주한 50여 명이 험준한 산을 개척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었다. 처음 이곳에 정착한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메마른 땅을 힘겹게 일구며 고된 노동을 이어가면서도 이 섬이 유독 아름답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매일 같은 풍경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한 번도 같은 적이 없다. 계절은 다르게 찾아오고, 해 질 녘 하늘의 색도 매일 다르다. 그렇게 하루하루 관찰하다 보니 시간이 이만큼 지났다.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다는 건 참 행운이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울릉도는 오롯이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이다. 낯선 곳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오늘 태어나 처음으로 바게트를 만들었다. 원래 빵을 좋아하지도 않고, 만드는 것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울릉도에 빵이 없다고 생각하니 왠지 아쉬웠다. 그래서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다행히 생각보다 맛이 좋아서 앞으로 종종 만들어 보려고 한다. 또 지난해부터는 마당에 가지, 고추, 상추 같은 채소를 키워서 먹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마음도 편해졌다. 도시에 살 때는 변화가 두려웠다. 사람이 하던 일이 인공지능, 디지털 기술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하지만 섬에 정착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수록 변화가 두렵지 않다.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오로지 내 힘으로 산다는 것은 어렵지만 행복한 일이다. 기념품 가게 울릉공작소는 어떻게 열게 됐나? 울릉도 정착 후 처음에는 지역 영화제인 ‘우리나라가장동쪽영화제’의 기획, 디자인, 운영을 맡았다. 울릉도에는 영화관이 없어서 영화를 보려면 배를 타고 다른 도시로 나가야 한다. 그런 점이 아쉬워서 2019년부터 영화제를 열고 있다. 그리고 울릉도 2주살이 프로그램과 게스트 하우스도 운영했다. 울릉도를 알리기 위해 SNS 채널을 개설해 웹툰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2023년 울릉공작소를 열었다. 울릉도에 여행 왔을 때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을 사고 싶었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그 기억이 떠올라 내가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엽서를 만들었다. 관광지에는 으레 기념엽서를 판매하기 마련인데, 울릉도에만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어 나리분지, 송곳봉, 공암(코끼리바위) 등 울릉도를 대표하는 명소들을 캐릭터화하기 시작했고, 이를 활용해 디자인 상품군도 점차 확대했다. 임효은 씨는 디자이너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울릉도의 명소들을 캐릭터화하거나 울릉도 특산품을 소재로 기념품을 제작해 판매한다. 울릉도 곳곳을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만든 기념엽서도 반응이 좋다. © 임효은 현재는 병뚜껑을 재활용해 만든 리사이클링 키링 등 친환경 제품과 컵, 에코백 등 생활용품 등을 주로 판매한다. 울릉공작소가 있는 천부리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 지역이 아니다. 그런데도 책이나 SNS 채널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사인을 요청하는 방문객들도 있었다. 울릉도를 찾는 사람이 많을수록 내가 할 일도 많아진다. 경상북도, 울릉군과 협업해 관광 콘텐츠도 개발 중이다. 최근에는 나리마을 홍보 영상과 관광 포스터, 울릉군 관광 SNS 콘텐츠 등을 제작했다. 지역 발전을 위해서 일하기도 하나? 울릉도는 대표적인 인구 소멸 지역이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고, 상황을 개선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고 있다. 나도 2023년까지 울릉군 청년 정책 참여단의 일원으로, 울릉도에서 살며 겪는 어려움과 해결책에 대해 정기적으로 토의했다. 이와 동시에 나의 이야기를 통해 울릉도를 알리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2024년 출간한 에세이. 직장을 그만두고 울릉도에 정착하기까지 겪은 다사다난한 에피소드를 생생하게 담았다. © 임효은 그리고 나처럼 울릉도로 이주한 이웃 청년들과도 서로 도우며 지내고 있다. 청년들은 프리다이빙 가게, 숙박업소, 카페 등을 직접 운영하며 이곳을 더욱 활기차게 만든다. 최근 울릉도 일 년살이를 시작한 사람도 있다. 지난해 울릉공작소에 찾아와 “울릉도에 꼭 살고 싶다”며 이것저것 묻던 손님인데, 정말로 이웃이 되었다. 울릉도 청년으로서 가장 풀고 싶은 과제는 무엇인가? 의료와 주거 문제가 가장 절실하다. 울릉도는 전국 평균 대비 주택 보급률이 낮다. 도서 지역 특성상 건축비가 많이 들고, 건물을 짓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주거 공간이 마땅치 않아서 정착을 포기한 청년들도 종종 봤다. 저렴하고 깨끗한 주택이 공급된다면, 인구 유입도 늘어날 것 같다. 가족 단위 이주민과 주민을 위해 의료 인력도 더 많이 제공되어야 한다. 울릉도 방문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사는 말이 있다. “목적지가 없는 기차를 탄 것처럼 살아라.” 지금 타고 있는 기차에서 잠깐 내려도 괜찮다. 우리 인생은 거기서 다시 흘러간다. 조금 느린 기차를 타봐도 좋다. 울릉도에 머무르는 것도 좋다. 이러한 작은 선택들이 모여 우리 인생이 더욱더 근사해질 것이다.

울릉도를 즐기는 새로운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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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를 즐기는 새로운 방법 울릉도는 오랫동안 중장년층의 단체 패키지 관광지로 인식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색다른 경험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특별한 여행지로 떠오르며, 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한반도 내륙과 달리 이국적인 정취를 선사하며 해외여행 못지않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취향을 겨냥한 재미있는 콘텐츠가 많아진 것도 한몫했다. 울릉도 여행 하면 흔히 트레킹을 떠올리지만, 요즘 젊은 세대에게 울릉도는 프리다이빙의 성지로 꼽힌다. 아직 숨겨진 다이빙 포인트가 많아 다이버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아틀란티스(Atlantis) 프리다이빙 울릉도에 가기 위해서는 동해안에 위치한 강릉, 묵호, 포항, 후포 네 지역의 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타야 한다. 쾌속선을 타면 약 3시간, 일반 여객선으로는 6시간 남짓 걸린다. 그런데 울릉도가 워낙 기상 변화가 심한 섬이다 보니, 날씨가 악화되면 운행 날짜가 조정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현재 사동항 일대에 건설 중인 울릉공항이 2028년 개항하면 접근성이 훨씬 좋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울릉도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살면서 반드시 한 번은 가봐야 하는 매력적인 섬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최근 울릉도를 여행하는 방식에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단체 패키지 관광 상품이 주를 이루었고, 주로 중장년층 여행객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섬 전체를 빠르게 훑어보는 여행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요즘엔 20~30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자신의 일정에 따라 개별적으로 자유 여행을 즐기는 방식이 증가하는 추세다. 울릉도 자유 여행이 처음인 사람들은 대중교통 수단이 다소 제한적인 현지 상황을 고려해 보통 렌터카를 이용한다. 2012년 54대에 불과했던 울릉도 렌터카 수는 2024년 429대까지 늘었다. 예약을 해두면 내비게이션을 이용해 편리하게 섬을 돌아볼 수 있다. 울릉도 해안 일주도로는 총 길이 약 46km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이면 완주할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따라 이어지는 해안도로 곳곳에서 울릉도의 소문난 절경을 마주할 수 있다. 좀 더 활동적인 여행을 선호하는 이들은 전동 스쿠터를 선택한다. 스쿠터를 이용하면 바람을 몸으로 직접 느끼며 이동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또한 언제든지 원하는 장소에 멈춰 서서 소셜미디어에 공유할 만한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스쿠터는 도동항 근처에서 대여 가능하다. 지형이 험준한 울릉도에서 모노레일은 효용성 높은 교통수단이다. 고지대로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가파른 경사면을 오르내리며 숲과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 울릉군청 야외 스포츠의 성지 최근 젊은 층이 울릉도를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해외에서나 가능한 줄만 알았던 프리다이빙을 경험해 볼 수 있기때문이다. 아예 프리다이빙 투어 상품이 따로 있을 정도다. 울릉도가 다이버들에게 매력적인 이유는 수중 지형이 웅장하고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야가 깨끗하게 펼쳐진다. 평균적으로 20~30m, 계절에 따라서는 40~50m까지 시야가 확보돼 다양한 종류의 어류들이 군무를 이루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다이빙 포인트로는 북쪽 해안에 있는 삼선암과 공암, 남쪽 해안 통구미항 근처의 가재굴, 그리고 서북쪽 모서리에 위치한 대풍감 절벽 밑이 유명하다. 걸어서 울릉도의 자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백패킹이나 트레킹 역시 인기 있는 여행 방식이다. 울릉군에서는 2013년 구암마을의 초등학교 분교를 리모델링해 캠핑장으로 운영 중이다. 이곳은 바다와 산을 두루 경험할 수 있고 비수기에는 4만 원, 성수기에는 5만 원으로 가격이 저렴해 인기가 높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학포야영장도 있다. 야영장에서 바라보는 바다 경관이 빼어나 예약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울릉도에는 해안산책로도 잘 조성돼 있어 기암절벽과 천연 동굴, 동해를 감상하며 가벼운 하이킹을 즐길 수도 있다. 이러한 인기를 반영하듯 최근에는 코오롱스포츠나 고아웃 같은 아웃도어 브랜드들이 하이킹, 클라이밍, 트레일러닝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해 참가자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주고 있다. 겨울철에는 백컨트리 스키나 보드를 즐기는 사람들도 찾아볼 수 있다. 패키지 단체 관광에서 개인별 자유 여행으로 울릉도 여행 트렌드가 변화하면서 전동 스쿠터를 이용해 섬을 일주하는 젊은 여행자들이 눈에 많이 띈다. 최고급 휴양 시설 울릉도에서 근래 들어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코스모스 울릉도’이다. 제조 기업 코오롱글로텍이 2017년 오픈한 이 리조트는 세계적인 건축가 김찬중이 설계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건축미를 인정받아 2018년 월페이퍼가 ‘Best Hotel of Year’로 선정했으며, 2019년에는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에서도 수상한 바 있다. 세계적 건축가 김찬중이 설계한 코스모스 울릉도는 섬을 찾는 관광객들이 꼭 한 번은 사진을 찍기 위해 방문하는 장소다. 특히 야간 레이저 쇼가 젊은 세대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코스모스 울릉도 코스모스 울릉도는 크게 독채 ‘빌라 코스모스’, 호텔형 객실 ‘빌라 떼레’, 풀빌라형 객실 ‘빌라 쏘메’로 이루어져 있다. 빌라 코스모스는 오직 한 팀만을 위해 전담 버틀러와 셰프가 함께하는 맞춤 서비스가 제공된다. 이 특별한 경험의 이용 금액은 4인 2박 3일 기준으로 약 3,600만 원이다. 빌라 떼레는 온돌방과 침대방 등 8개 객실이 준비돼 있으며 투숙 비용은 비수기 약 40~50만 원, 성수기 약 50~70만 원이다. 빌라 쏘메는 크기에 따른 세 가지 타입의 객실 10개로 구성돼 있는데 객실가는 2인 1박 기준으로 평균 200만 원 선이다. 젊은 층은 이 중 상대적으로 가격 부담이 덜한 빌라 떼레를 주로 이용한다. 리조트 방문의 즐거움을 더하는 공간으로 카페 울라(ULLA)를 빼놓을 수 없다. 코스모스 울릉도 정원 내에 자리한 이 카페는 고릴라 캐릭터 ‘울라’를 테마로 운영된다.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관광 빅데이터 사이트 한국관광데이터랩 선정 울릉도 맛집 1위를 수년째 유지 중이다. 울라 캐릭터 모양의 큐브 얼음 위로 우유를 부어 마시는 ‘울라 큐브라떼’, 울릉도 호박과 명이나물을 활용한 빙수, 오징어 먹물이 들어간 소금빵이 시그니처 메뉴다. 특히 높이 7m짜리 울라 캐릭터 조형물과 ‘코스모스 링’은 이곳을 방문한 여행객들이라면 누구나 인증샷을 남길 정도로 인기 있는 포토존이다. 밤에는 또 다른 볼거리가 기다린다. ‘코스모스 라이팅쇼’는 야간 관광 자원이 부족한 울릉도의 밤을 화려하게 수놓기 위해 코스모스 울릉도 운영팀이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1~2월 휴장 기간을 제외한 매일 저녁 네 곡의 음악에 맞춰 레이저 쇼가 펼쳐진다. 일몰 시각에 따라 변경되므로 방문 전 확인이 필요하다. 소문난 핫플레이스 코스모스 울릉도의 크리에이티브 플래닝실에서 근무하는 조현재(Cho Hyun-jai) 씨는 울릉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정보통이다. 그는 울릉도의 매력에 깊이 빠져 라는 노래와 뮤직비디오까지 직접 제작했다. 그가 울릉도 여행자들에게 가장 먼저 추천하는 장소는 ‘울라 웰컴하우스’다. 이곳은 한국관광공사, 울릉군, 코오롱글로텍이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해 운영하는 국내 최초의 민관 합작 여행자센터이다. ‘보다, 먹다, 놀다’라는 콘셉트를 기반으로 울릉도에서 꼭 가봐야 할 곳, 맛봐야 할 것, 즐겨야 할 것들을 추천하는 ‘여행 큐레이션 카드’를 제공해 방문객들이 자신만의 여행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돕는다. 기존 여행자센터의 틀을 깨고, 요즘 젊은 세대가 열광할 만한 트렌디한 콘텐츠와 독창적인 상품을 선보이며 젊은 감각의 울릉도 관광 트렌드를 만들어가고 있다. 조현재 씨가 추천하는 또 다른 핫플레이스로는 기념품 가게 독도문방구와 소울(SO:ULL)이 있다. 우선 독도문방구는 2015년 문을 연 울릉도 최초의 기념품 가게다. 이름처럼 초등학교 앞 작은 문방구 정도의 규모지만, 여행자들의 눈과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다양한 물건들로 가득하다. 소울은 최근에 생겼지만, 울릉도에 정착한 외지 디자이너가 직접 작업한 감성적인 상품을 구경할 수 있어 입소문이 났다. 울릉브루어리는 울릉도를 대표하는 양조장이다. 이곳에서는 미네랄 함량이 풍부한 추산 용출수를 사용해 프리미엄 수제 맥주를 만든다. © 울릉브루어리 또 있다. 커피전문점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만, 저동커피는 울릉도에만 있다. 투박한 궁서체 간판 디자인이 옛정취를 선사하는 이곳은 오징어 먹물 아이스크림과 호박 아이스크림이 유명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에도 등장해 더 화제가 된 곳이다. 그런가 하면 요즘 지역 고유의 수제맥주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울릉도에서도 그렇다. 지난해 3월 오픈한 수제맥주 양조장 울릉브루어리는 이 지역 출신의 브루마스터가 수제맥주를 빚고 있다. 울릉도에서 나는 물로 만들어져 다른 지역 수제맥주보다 더 맑고 깨끗한 맛이 난다는 평이다.

세계적으로 드문 진화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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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드문 진화의 현장 울릉도는 다양한 식물이 살아가는 자연의 보고다. 오랜 기간 섬의 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종으로 진화한 수십 종의 고유종을 비롯해 한반도 내륙에서는 볼 수 없는 식물들도 자생한다. 울릉도의 독특한 식물 생태계는 그 자체로 곧 섬의 역사이기도 하다. 섬나무딸기는 울릉도 산지에서 흔하게 자라는 식물이다. 한반도 내륙의 산딸기보다 꽃과 잎이 대형인 것이 특징이다. 지면에 소개된 세밀화들은 한국식물화가협회 소속 회원들의 작품이다. 2007년 창립한 한국식물화가협회는 정기전, 공모전, 해외 교류전 및 출판 활동 등을 통해 보타니컬 아트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 김예숙(Ye Sook Kim) 울릉도는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식생을 자랑한다. 현재 울릉도에는 약 500종의 관속식물(물과 양분을 전달하는 관다발을 가진 식물)이 존재하며, 그중 50여 종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산식물이다. 울릉도의 특산식물은 약 250만 년 전 섬이 형성된 이래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쳤다. 어떤 식물들은 한반도 내륙에 있는 종(種)과 유사하지만, 몇 가지 다른 형질을 나타내며 아직 종 분화 단계에 놓여 있다. 육지의 조상종과 완전히 구별되는 것들도 많다.  이는 울릉도의 지형적, 지질학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울릉도는 신생대에 형성된 대양도(大洋島)이다. 대륙의 일부였다가 대륙판 이동이나 해수면 상승으로 육지에서 떨어져 나간 섬이 아니라, 바닷속 화산 활동으로 불쑥 솟아올랐다는 얘기다. 울릉도는 한 번도 육지와 연결된 적이 없는 섬이었다. 울릉도에서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내륙 지역과도 약 140㎞나 떨어져 있다. 이 말은 지금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식물들이 오랜 세월 고립된 상황에서 독자적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한반도의 식물 분포 구역을 대체로 북부, 중부, 남부, 제주도, 울릉도로 분류한다. 같은 화산섬이지만 울릉도는 제주도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양상을 보인다.   생존을 위한 투쟁 화산 폭발로 생성된 뜨겁고 척박한 땅 위에서 처음에는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토양도 없거니와 물과 양분도 부족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들이 떠오른다. 현재 울릉도에서 자라는 특산식물의 씨앗은 어디서 왔을까? 울릉도에 자리 잡은 개척종들은 하나의 계통일까, 아니면 두 개 이상의 계통이 종 분화에 관여했을까? 그리고 개체군 내에서 종 분화의 정도는 어느 정도일까?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보자. 울릉도 해안가에서 자생하는 선모시대는 1997년 신종으로 발표된 식물이다. 개체 수가 많지 않아 보호가 필요하다. © 전병화(Jeon Byeong Hwa) 섬노루귀는 한반도 내륙에 분포하는 노루귀보다 잎이 3배 이상 크고 씨방 및 열매에 털이 없는 특징이 있다. © 정진안(Jin Ahn Joung) 처음에는 주로 이끼류, 지의류 같은 생물들이 바위 위에 정착했을 것이다. 이들이 바위를 분해하고 유기물을 축적하면 토양이 조금씩 만들어진다. 시간이 더 흐른 뒤에는 가까운 대륙에서 씨앗들이 바람이나 해류를 통해 흘러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또 새들도 씨앗의 운반책이 되었을 것이다. 대륙에서 건너온 선구종들은 매우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 분명하다. 처음 울릉도에 도달한 식물들은 씨앗이나 포자가 작고 가벼우며 생존력이 강했을 것이다. 대부분 바위 지형인 데다가 건조한 대기와 고온, 강풍 등으로 주변 환경이 열악했으니 생존을 위해 뿌리가 잘 발달했을 것이다. 또한 짝이 없어도 번식 가능한 자가 수분 능력이나 무성 생식 등으로 자손을 널리 퍼뜨릴 수 있도록 적응력을 키웠을 것이다. 생존에 성공한 작은 수의 개체들은 정착지 주변 공간으로 확장해 개체군을 형성했을 터이고, 어떤 한 종이 개척에 성공하면 다른 종들이 연이어 들어와 또 정착을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이렇게 초본류가 자라기 시작하고, 죽은 식물체가 쌓이는 과정이 반복되면 토양이 두터워지고 비옥해진다. 그리고 섬 전체가 초기 생태계를 형성한다. 이후에는 작은 나무들과 함께 곤충, 조류, 소형 포유류가 살기 시작하면서 먹이 사슬이 형성되고 생태계가 조금 복잡해진다. 그렇게 해서 점점 숲이 커진다. 울릉도는 오랜 세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생태계가 안정화되는 단계에 도달했다. 그런데 극소수의 개체들이 정착에 성공하더라도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의 특성상 개체군의 유전자 다양성은 매우 낮을 수밖에 없다. 한정된 지역 안에서 생존한 개체군들은 긴 지질학적 시간이 지나면서 돌연변이, 유전적 부동(浮動), 자연선택 등을 통해 새로운 형질들을 얻게 되고, 처음의 선구종들과는 형태학적으로 매우 다른 새로운 종으로 분화되었다. 추산쑥부쟁이는 울릉도 추산리 해안가에서 발견되어 2005년 신종으로 발표되었으며, 이름도 지명에서 유래했다. 자연 교잡종이라는 특징이 있다. © 신항숙(Shin Hangsuk) 너도밤나무는 경사가 가파른 울릉도 산지에서 잘 자라고, 산림 생태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나무이다.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는 수종이다. © 김홍주(Hongju Kim) 울릉도만의 독특한 양상 식물분포학적으로 울릉도는 매우 특이한 곳이다. 우선 울릉도에는 동백나무(Common camellia)나 후박나무(Thunberg’s bay-tree) 같은 난대성 상록활엽수와 만병초(Short-fruit rosebay) 같은 한대성 식물이 함께 자란다. 이러한 공존이 가능한 이유는 울릉도가 해양성 기후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위도상에 있는 강릉이나 포천 등 다른 내륙 지방과 달리 울릉도는 난류의 영향을 받아 온난다습한 기후를 보인다. 그리고 울릉도에는 한반도 내륙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식물들이 대규모 군락을 이루며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태하마을의 너도밤나무(Engler’s beech) 군락지가 있다. 낙엽활엽수인 너도밤나무는 일본 열도에서도 생육한다. 그러나 울릉도의 너도밤나무는 잎이 타원형이고, 가장자리에 잔톱니가 있으며, 꽃차례가 다소 짧은 편이라 일본산 너도밤나무와 다르다. 또한 수피가 회색빛으로 약간 갈라지는 것도 차이가 난다. 태하마을에는 너도밤나무와 함께 울릉솔송나무(Ulleungdo hemlock)와 섬잣나무(Ulleungdo white pine) 군락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우산마가목은 성인봉 정상부 주변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수종이다. 2014년 신종으로 발표되었다. © 권수현(Su Hyun Kwon) 또한 울릉도에는 환경에 맞게 진화된 고유종이 많다. 울릉도 생태계를 살펴보면, 많은 식물들이 육지의 것들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생김새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생물의 진화에는 방향성이 있다. 왜성화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형화로 진행되기도 한다. 울릉도는 후자의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울릉도 전 지역에서 자라는 섬나무딸기(Ulleungdo raspberry)는 내륙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산딸기(Korean raspberry)가 조상이다. 생김새는 둘이 비슷하지만, 섬나무딸기가 키가 더 크고 잎과 꽃도 대형이다. 크기 외에 다른 점이 더 있다. 울릉도에는 사슴이나 산토끼 같은 초식성 포유동물이 없기 때문에 섬나무딸기가 외부 위험에 방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육지의 산딸기와 달리 섬나무딸기는 줄기에 가시가 없다. 섬나무딸기는 최소 두 번의 독립적인 진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밝혀졌다. 섬노루귀(Ulleungdo liverleaf)도 그렇다. 내륙에 분포하는 노루귀(Asian liverleaf)가 소형에 낙엽성인 것과 달리 섬에서 지리적 격리를 통해 진화한 섬노루귀는 잎이 노루귀보다 3배가량 크고 상록성이다. 한편 추산쑥부쟁이(Chusan aster)는 유전자 교류를 통해 잡종화 현상을 보였다는 점에서 진화의 또 다른 현주소를 보여주는 식물이다. 추산쑥부쟁이는 울릉도 해안가에서 섬쑥부쟁이(Ulleungdo aster), 해국(Seashore spatulate aster)과 함께 섞여서 자란다. 꽃 크기, 잎 모양, 총포 모양 등이 섬쑥부쟁이와 해국의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어 두 종들의 자연 교잡종으로 추정된다. 추산쑥부쟁이는 2005년 추산마을에서 처음 발견되어 신종으로 발표되었다. 가을에 흰 꽃이 피는 울릉국화는 개체 수가 많지 않아 천연기념물로 보호된다. 나리분지에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다. © 김정아(Kim jung a) 생물 다양성의 지표 식물 분류학자들은 새로운 종으로 추정되는 식물을 발견했을 때 기존의 문헌과 표본을 대조해서 뚜렷한 형태학적 차이점이 있으면 신종으로 발표한다. 울릉도 식물에 대한 연구는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대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Takenoshin Nakai)에 의해 처음으로 진행됐다. 앞서 언급한 너도밤나무 등 목본류와 섬나무딸기, 섬노루귀 등 초본류는 100여 년 전 당시 나카이 다케노신에 의해 학계에 신종으로 보고되었다. 그런 연유로 울릉도 특산식물임에도 불구하고 학명에는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가 신종으로 발표한 식물들은 이 외에도 수십 종이 더 있다. 말오줌나무는 울릉도 산지 및 해안가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해풍에 견디는 힘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김홍주(Hongju Kim)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조사가 시작됐는데, 이 시기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식물의 분류학적 측면에서 연구가 수행됐다. 이후에는 생태학적 측면의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1990년도에 시작한 휴먼 게놈 프로젝트의 눈부신 기술 발전 덕분에 유전자 분석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식물 분류학 분야에도 접목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울릉도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에 대한 연구도 보다 심화되고 있다. 섬기린초는 5월에서 10월까지 노란 꽃이 모여서 핀다. 울릉도 암석지를 비롯해 독도에서도 볼 수 있다. © 권수현(Su Hyun Kwon) 예컨대 1922년 나카이에 의해 발견된 섬초롱꽃(Korean bellflower)은 울릉도 전역에서 자라고 있는 특산식물이다. 섬초롱꽃의 조상종은 대륙의 초롱꽃(Spotted bellflower)이다. 몇 년 전 섬초롱꽃이 독도에서도 발견되었다. 이후 국립생물자원관이 독도산 섬초롱꽃의 엽록체 유전자형을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독도에 서식하는 섬초롱꽃이 울릉도 섬초롱꽃의 기원에 징검다리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처럼 울릉도의 특산식물들은 하나의 종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방식이 아닌, 원래의 종이 새로운 종으로 바뀌는 진화 과정을 대부분 보인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드문 독특한 사례이다. 울릉도에 사는 특산식물 중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지정한 적색목록종(red lists)에는 섬개야광나무(Ulleungdo cotoneaster), 섬시호(Ulleungdo hare’s ear) 등을 비롯해 많은 수가 등재되어 있다. 이처럼 울릉도 특산식물은 단지 한 지역이나 국가의 자원을 넘어, 지구의 생물 다양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로서도 의미가 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자생지 보호와 관리, 종 보전 및 증식, 위협 요인 해소 등 다양한 방면에서 협력이 필요하다.

동해의 수려한 화산섬

Features 2025 SUMMER

동해의 수려한 화산섬 울릉도는 경상북도 동쪽 해상에 있는 화산섬이다.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 투명한 바다가 어우러져 한반도 내 다른 지역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을 지닌다. 2012년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섬 내 23곳이 지질 명소로 보호되고 있다.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지역이기도 하다. 해발 약 450m인 송곳산은 울릉도 중앙에 자리한 성인봉 줄기의 최북단부에 있다. 바다에 인접해 있어 해상에서 더욱 웅장하게 보이며, 전문 산악인들에게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해심이 깊은 동해상에 위치한 울릉도는 신생대에 일어난 화산 폭발로 용암이 분출돼 형성된 섬이다. 우리나라 가장 동쪽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의미가 큰 섬이다. 독도를 비롯해 죽도, 관음도 등 크고 작은 수십 개의 부속 섬을 거느리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며 섬 가운데 솟아 있는 해발 986.5m의 성인봉을 기준으로 울릉읍, 서면, 북면으로 나뉘어 있다. 이 섬의 인구는 현재 9천 명이 약간 넘는다. 1970년대까지는 약 3만 명 정도 살고 있었지만, 2000년대 들어 약 1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후에도 감소 추세를 보이다가 2021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늘고 있다. 뭍으로 나간 사람들이 돌아오거나 울릉도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관음도는 원시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야생 식물의 천국이라 불린다. 2012년 보행교가 설치되어 울릉도 부속 섬 중 유일하게 도보로 이동할 수 있다. 고대의 흔적 울릉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첫 고고학적 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서 이뤄졌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1957년과 1963년 두 차례 유적 발굴에 나섰는데, 상당수 고분이 이미 도굴되고 파괴된 상태였다. 당시 발견된 고분은 모두 87기로, 대부분 통일신라(676~935) 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확인됐다. 산의 경사지에 위치한 이 고분들은 시신을 넣은 석곽 위에 흙을 덮지 않고 돌을 쌓아 올린 적석총 형태이다. 정면에는 입구가 뚫려 있다. 이는 섬의 지형과 재료를 최대한 이용한 것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울릉도만의 고유한 묘제 양식이다. 그로부터 30여 년 만에 울릉도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다시 이루어졌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은 1997년부터 이듬해까지 정밀 지표 조사를 실시해 울릉도 내 산재한 고분군과 유물들을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조사단은 고인돌로 추정되는 3기의 유적을 새롭게 발견했으며, 토기 파편과 마제 석기도 발굴했다. 울릉도의 대표적 관문인 도동항은 포항과 묵호에서 출발한 여행자들이 도착하는 곳이다. 주요 관공서와 학교들이 밀집해 있어 섬 내에서 가장 번화하다. © 한국관광공사 이 발견은 울릉도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제공했다. 우리나라에서 울릉도에 대한 기록은 12세기에 간행된 『삼국사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역사서에는 6세기 초 신라(B.C 57~A.D 935)가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이라는 나라를 정벌하였으며, 해마다 우산국이 신라에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를 통해 우산국이 신라 문화권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울릉도의 역사가 시작된 시점을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된 6세기 초반으로 보았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은 출토된 유물들을 검증한 결과 울릉도의 역사가 6세기 이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현재는 이후 조사에서 관련 유물이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는 등 시기를 확신하기 어렵고, 보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며 조심스럽게 유보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내용이 허구가 아니라면 6세기 이전 울릉도 원주민들의 흔적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15세기에 편찬된 역사서 『고려사』에 의하면 우산국은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여진의 침략을 받아 패망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고려의 관리들이 울릉도에 수시로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1018년 11월 8일 자 기록에는 여진의 침략으로 울릉도 백성들이 농사일을 못 하게 되자 나라에서 농기구를 하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조정에서 백성들을 육지로 이주시키자는 논의가 있었고, 실제 이주를 시도한 기록을 근거로 우산국 패망 이후 울릉도가 상당히 황폐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울릉도에서 유일한 평야 지대인 나리분지에는 옛날 사람들의 주거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집들이 남아 있다. 사진은 1940년대 건립된 너와집으로, 지붕을 너와(얇은 나뭇조각)로 이은 일자형 건축물이다. 이주 정책 조선 태종(재위 1400~1418년) 때도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탓에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우는 정책을 폈다. 대신 2~3년에 한 번씩 섬의 현황을 파악하고 관리하기 위해 지방군 지휘관을 파견했다. 거친 동해를 건너야 하는 울릉도행 뱃길은 녹록하지 않았다. 1613년, 삼척 지역의 지휘관 김연성은 군사 180여 명을 이끌고 울릉도 뱃길에 올랐으나 거친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군사들과 함께 익사했다. 1694년에는 이준명이라는 관리에게 울릉도 순찰이 맡겨졌으나, 배를 타기가 두려워 임무를 회피했다는 기록이 있다. 1760년에는 비슷한 이유로 자신을 차라리 파직해 달라는 문서를 조정에 올린 이도 있었다. 울릉도 남쪽의 통구미마을은 깊고 좁은 골짜기 사이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서쪽 절벽은 향나무 자생지로, 향나무 원종이 자라고 있어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그러던 중 1882년 고종(재위 1863~1907)은 울릉도를 계속 비워 둬선 안 된다는 생각에 이규원을 현지로 보내 섬의 상황을 낱낱이 보고하도록 했다. 그 시기 이규원은 지금으로 치자면 군 사단장급 장성에 해당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10여 일 동안 울릉도 전역과 해안을 검찰한 뒤 보고서와 지도를 작성해 올렸다. 당시 그가 남긴 보고서가 『울릉도 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다. 이규원은 고종에게 하직 인사를 한 뒤 출발해 울릉도를 조사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2개월의 여정을 일기에 담았다. 울릉도 체류 당시의 기록엔 매일의 날씨와 지형, 식생, 만난 사람들, 느낀 점 등을 상세히 적었다. 이를 바탕으로 고종이 그해 12월 ‘울릉도 개척령’을 내렸고, 이듬해 16가구 54명을 섬으로 이주시키며 울릉도 재개척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규원은 울릉도에 머무는 동안 총 129명을 만났다. 이 가운데 전라도 출신이 103명으로 전체의 80% 수준이었다. 당시 섬에서 접촉한 전라도 사람들은 거문도를 비롯해 여러 지역 출신이었는데 이들은 울릉도에서 주로 배를 만들거나 미역, 전복 같은 해산물을 채취했다. 이들에게 울릉도행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집을 짓고 배를 만들기 위해선 목재가 필수였으나, 전라도에선 벌목이 금지돼 있었고 거문도 일대는 큰 나무가 잘 자랄 수 없는 환경이었다. 결국 그들은 울창한 숲과 해산물이 풍부한 울릉도를 찾게 됐고, 대대로 육지와 섬을 오가는 항해를 이어왔던 것이다. 특히 거문도 어민들에게 울릉도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거문도 뱃노래 중 < 술비소리 >는 밧줄을 꼬면서 부르는 노동요인데, 가사에 그들의 심경이 고스란히 담겼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 울릉도로 나는 간다 / (중략) 울릉도를 가서 보면 / 좋은 나무 탐진 미역 / 구석구석 가득 찼네.” 재개척 이후 섬으로 이주한 이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자연에 순응하며 울릉도만의 독특한 문화를 일궈왔다. 섬사람들은 굶주림을 이기기 위해 옥수수와 감자를 주식으로 삼고 산나물로 끼니를 이으며, 울릉도만의 독특한 음식 문화를 만들었다. 1910년쯤부터는 이곳의 대표 특산물인 오징어를 잡기 시작했다. 오징어잡이와 함께 조선 산업도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해 왔다. 약 150m 높이의 대풍감 절벽 위에 세워진 향목(Hyangmok) 전망대에서는 울릉도 서쪽 바다가 장대하게 펼쳐진 광경을 볼 수 있다. 대풍감 왼쪽 절벽은 언론에서 우리나라 10대 비경 중 하나로 꼽은 곳이다. © 한국관광공사 바다를 고즈넉하게 감싸 안고 있는 천부항은 과거에 목재를 운반하던 항구였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8월이면 오징어 축제가 열린다. 해안 절경 이규원이 일기에 기록한 ‘장작지포’는 사동의 옛 이름이다. 장작지포는 ‘자갈밭이 길게 펼쳐진 포구’란 의미다. 지금 여행자들이 울릉도에 가려면 포항, 묵호, 후포, 강릉에서 여객선을 타고 출발해야 하는데 사동은 그중 포항과 후포에서 도착한 배가 정박하는 곳이다. 북면 현포마을의 이름은 당시에 ‘흑작지’였다. 검은 자갈로 이뤄진 해변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울릉도에는 눈에 보이는 대로 이름을 붙인 정감 어린 지명이 많다. 울릉도 동쪽 절벽 아래 위치한 와달리도 마찬가지다. 경사가 심한 지역이라 돌이 ‘와달와달’ 굴러 내린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서면 구암마을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학포항 방면으로 가다 보면 수층교가 나온다. 복잡한 경사면 때문에 구불구불 만들어진 도로인데, 옛날엔 물이 층층이 흐른다고 해서 ‘물칭칭’으로 불렸다. 도동항에서 저동항 촛대바위까지는 행남해안산책로가 연결되어 있다. 울릉도 지질 명소 중 하나인 이곳에서는 해안 침식으로 만들어진 동굴과 절벽을 감상할 수 있다. CNN이 한국에 가면 꼭 들러야 하는 관광지로 선정한 바 있다. 한편 울릉도는 바닷속 화산 분출로 이뤄진 섬인 만큼 기암절벽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절경이 도처에 이어진다. 어딜 가더라도 허투루 지나칠 풍경이 없다. 그래도 해안 경관의 백미를 꼽으라면 단연 북면이다. 현포항에서 천부항을 지나 섬목까지 이어지는 북면 해안은 울릉도에서 가장 웅장하고 다채롭다. 수천 개 돌판을 쌓아놓은 듯한 노인봉과 하늘을 찌를 듯 뾰족이 솟은 송곳봉, 코끼리 모양의 공암, 세 선녀의 전설을 간직한 삼선암, 두 개의 해식동굴이 뚫려 있는 관음도 등 울릉도를 대표하는 해안 절경이 대부분 이곳에 있다. 바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빛깔을 가졌다.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천부항 인근 언덕에 서면 송곳봉과 공암이 바다와 함께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서북쪽 끝 태하리와 현포리를 잇는 고갯마루에서, 130㎞나 떨어진 한반도 동쪽 산줄기가 손에 잡힐 듯 성큼 다가오기도 한다. 130여 년 전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 출발점이었던 경상북도 울진에서 강원도 삼척 쪽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다. 울릉도에서 육지를 볼 수 있는 날은 1년에 10일 정도에 불과하다. 주로 겨울철이나 태풍이 지나간 직후 해가 질 무렵 육안으로 볼 수 있다. 공암은 추산수력발전소 앞 해변에서 북쪽으로 약 1.5㎞ 정도 떨어진 바다에 있다. 10m 높이의 해식 터널은 소형 선박이 왕래할 수 있으며, 스킨스쿠버들에게 최고의 포인트로 인기가 높다.

고색창연한 도시의 젊은 감성

Features 2025 SPRING

고색창연한 도시의 젊은 감성 경주가 그저 고풍스럽기만 한 도시는 아니다. 감성적인 카페와 소품 가게, 야경 명소 등을 비롯해 스릴을 즐길 수 있는 놀거리도 가득해 젊은 세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요즘 경주는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힙한’ 도시로 변신 중이다. 황리단길은 경주의 고풍스러운 정취와 트렌디한 감성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장소로, 경주 여행 코스의 메카로 불린다.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해 주말이면 젊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국관광공사 경주 구도심 남쪽에 위치한 황남동은 무덤이 지천이다. 이곳은 경주역사유적지구 중 신라 왕과 왕비, 귀족들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는 대릉원지구에 속한다. 주변에는 계림과 월성 같은 유적지를 비롯해 한옥마을이 인접해 있다. 그런 까닭에 황남동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각종 건축 행위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오랫동안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황남동이 지금은 ‘황리단길’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적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경주시가 올해 2월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설 명절 기간 경주의 주요 관광지를 방문한 관광객은 약 54만 명이다. 여러 관광지 중 가장 방문율이 높은 곳은 약 35만 명이 찾은 황리단길이었다. 불국사 9만 7,621명, 대릉원 5만 3,881명, 첨성대 2만 6,953명, 봉황대 1만 1,422명 등과 비교해 볼 때 황리단길의 인기는 압도적이다. 월성 지구는 신라의 역대 왕들이 거주하던 궁궐이 있었던 자리이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터만 남아 있다. 봄이면 유채꽃이 만발해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다. ⓒ경주시, 사진 박수용 최신 트렌드의 집합소 황리단길은 경주의 최신 트렌드를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황리단길은 공식 명칭이 아니다. 내남사거리부터 황남초등학교 사거리까지 700미터 남짓 이어지는 이 길의 정식 명칭은 ‘포석로’이다. 포석로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황리단길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황리단길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건 2010년대 중후반 무렵이다. 상권 활성화를 위한 상인들의 부단한 노력과 경주시의 지원에 힘입어 개성 있는 가게들이 하나둘 들어섰는데, 기존에 있던 1960~70년대의 낡은 건물들과 어우러져 독특한 경관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서울 이태원의 소문난 명소 ‘경리단길’을 빗대 황리단길이라는 별칭이 생겨났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과거와 현대의 절묘한 하이브리드다. 한옥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만 놓고 보면 전주 한옥마을과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천천히 걷다 보면 맛이 다르다. 경주만의 DNA가 느껴진다. 황리단길의 상점 거리는 500번 버스가 지나는 도로가 중심이다. 대릉원 담벼락을 돌아 제과점과 기념품숍이 보이기 시작하면 딱 거기가 시작점이다. 한옥 호텔 황남관까지 이르는 길에는 주전부리를 파는 가게, 개성 있는 카페와 빵집, 기념품이나 신기한 물건을 파는 잡화점, 사진관 등이 줄줄이 이어진다. 메인 도로 옆으로는 군데군데 좁은 골목이 가지처럼 뻗어 있다. 골목 안에는 술집과 레스토랑, 사주 카페, 한옥 게스트하우스, 서점 등이 빼곡하게 포진해 있다. 혈관처럼 고불고불 뻗은 샛길을 탐험하는 맛이 끝내준다. 마치 일본 규슈의 유후인 마을이나 동유럽 옛 도시의 플라자마켓 거리를 빼닮았다. 황리단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즐기는 방식도 다르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그냥 마시는 법이 없다. 인증샷이 필수라서 사진 먼저 찍는다. 마시고 먹는 건 그다음이다. 톡톡 튀면서 앙증맞은 가게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황리단길 투어를 한층 재미있게 해주는 요소는 주전부리다. 경주의 트렌디한 간식거리가 이곳에 다 모여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건 십원빵이다. 불국사 다보탑이 그려진 십 원짜리 동전을 재현한 빵으로, 크기는 손바닥만 하다. 경주의 문화유산을 모티프로 한 도굴빵도 인기다. 이 외에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이색적인 디저트가 많다. 작지만 강력한 페스티벌 황리단길에서는 무려 15만 명이 모이는 축제 ‘황금 카니발’도 벌어진다. 이 행사는 2022년 ‘황남동 카니발’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2024년 황리단길 인근 지역까지 장소를 확장하면서 명칭을 바꾸었다. ‘우리 동네 작은 페스티벌’을 표방하는 이 축제는 지역 내 노포들이 주요 무대이다. 카페, 식당, 게스트하우스, 미용실, 주차장 등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소규모 공간에서 진행하다 보니 코앞에서 뮤지션들의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다. 황금카니발은 황남동 일대에서 진행되는 소규모 음악 페스티벌로 국내 최고의 인디 밴드들과 뮤지션들이 공연을 펼친다. 2024년 3회를 맞이한 이 행사는 도심 상권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황금카니발 무대는 작지만 출연하는 뮤지션들은 국내 정상급 밴드들이다. 지난해에는 김창완밴드, 잠비나이, 추다혜차지스 등이 멋진 공연을 펼쳤다. 고즈넉한 한옥 북카페를 록음악으로 물들인 크라잉넛과 갤럭시익스프레스의 무대도 방문객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다. 황금 카니발은 공연뿐 아니라 대중음악사를 주제로 한 토크쇼, 플리마켓, 전국 유명 브루어리의 수제 맥주 시음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곁들여졌다. 고도(古都)로만 알려진 경주에서 ‘현재 시제’를 만날 수 있어 흥미로웠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황금 카니발은 동시대 음악이 지역의 역사와 만나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스릴 만점의 놀이기구 경주에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경주월드도 있다. 이곳의 연간 방문객은 110만 명으로,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와 경기도 용인의 에버랜드에 이어 국내 3대 테마파크로 꼽힌다. 경주월드는 보문관광단지에 있다. 1970~80년대에 태어난 이들은 이곳에서 젊은 시절 오리배를 타고 놀며 데이트를 즐겼다. 지금의 20~30대 연인들은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특히 경주월드의 대표적 어트랙션인 드라켄은 압권이다. 63미터에 달하는 이 기구는 고층 빌딩 21층에 해당되는 높이에서 수직 하강한다. 높이로는 국내 놀이기구 중 원톱이다. 드라켄을 타보기 위해 전국에서 찾아올 정도로 인기 있다. 최고 순간 시속은 117km/h, 경사각은 90도에 달한다. 운행 시간 2분 동안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전 세계 롤러코스터의 랭킹을 집계하는 데이터베이스닷컴이 조사한 2022년 랭킹에는 세계 11위에 올라 있다. 보문관광단지에 위치한 경주월드는 1985년 국내에서 두 번째로 개장한 놀이공원이다. 이곳을 대표하는 가장 인기 있는 놀이기구는 드라켄이다. 63m 높이에서 90도로 수직 하강한다. ⓒ경주월드 파에톤도 무시무시하다. 온라인 패널 서비스 패널나우가 2023년 10월 3일부터 10월 8일까지 전국 3만 2,2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내에서 가장 무서운 놀이기구 톱10’ 조사 결과 5위에 올랐다. 에버랜드의 T익스프레스, 롯데월드의 자이로스윙과 어깨를 견준다. 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들이 더 있다. 360도로 회전하다가 거꾸로 매달리는 크라크도 그중 하나다. 최소한 40분은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타야 하는 명물이다. 급격한 각도 변화와 무중력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토네이도도 있다. 비교적 최근에 설치된 스콜&하티는 아시아 최초의 싱글 레일 롤러코스터이다. 타고 있으면 숨이 멎는 느낌이다. 보문관광단지에서 자동차로 약 15분 거리에는 야경 명소가 있다. 신라 시대 천문대인 첨성대, 그리고 동궁과 월지이다. 야경을 즐기며 사진을 찍으려는 젊은이들로 언제나 북적거리는 곳들이다. 아름다운 현대 건축물들 경주엑스포대공원은 최근 들어 유명해진 핫플레이스다. 1988년 국제박람회를 계기로 조성된 이곳은 현재 전시·체험·공연 등 다양한 경험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젊은 세대가 이곳에 열광하는 이유는 공원의 상징인 경주타워의 독특한 외관 때문이다. 82미터의 아찔한 높이를 자랑하는 타워는 중심부가 뻥 뚫려 있는 파격적인 설계를 보여준다. 타워의 중심부는 7세기 건립되었던 황룡사 구층 목탑의 실루엣을 음각으로 디자인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주타워를 “탑을 품은 건물”로 부른다. 이 아이디어를 낸 이는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이다. 사라져 버린 황룡사 구층 목탑을 현대식 건물에서 되살리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담겼다. 꼭대기 층인 전망대에서는 보문호를 중심으로 자리한 보문관광단지, 경주월드 등 주변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 쿠마 켄고가 설계한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기념관도 놓칠 수 없다. 현무암을 이어 붙이듯 쌓아 올린 독특한 외관은 주상절리의 형상이다. 건물 전체를 덮고 있는 황금빛 격자와 3개의 언덕 형상은 각각 신라 금관과 고분을 상징한다. 경주엑스포대공원의 백미는 솔거미술관이다. BTS 리더 RM이 방문해 화제가 됐던 곳으로, 아미들의 성지 중 하나다. 현대적인 수묵화로 널리 알려진 박대성 화백의 작품 830여 점이 이곳에 소장돼 있다. 한편 따뜻한 봄날에는 자전거 공원 펌프트랙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젊은이들을 목격할 수 있다. 이곳은 통상적인 자전거 공원이 아니다. 면적 7,800㎡ 규모로 전국 최대이며, 난이도별로 코스가 갖춰져 있다. 다양한 형태의 요철을 통과하면서 기술 연마와 더불어 스릴을 즐길 수 있다. 최고의 매력은 무료라는 점이다. 경주엑스포대공원은 1998년 국제박람회 행사장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미술관, 박물관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원으로 자리 잡았다. 경주엑스포대공원 내에 자리한 경주타워는 신라 시대 목조 건축물인 황룡사 구층 목탑을 형상화한 건물이다. ⓒ경주시, 사진 유영님

왕실 제사상에서 길거리 음식까지

Features 2025 SPRING

왕실 제사상에서 길거리 음식까지 한 나라의 음식 문화는 수도를 중심으로 꽃핀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다채로운 음식 문화를 만들어 냈다. 이런 동력은 근현대에도 이어져 경주만의 풍요로운 먹거리 문화를 창출했다. 경주 여행에서 미식이 필수인 이유이다. 하우스오브초이는 경주의 명문가 최부자댁의 후손이 설립한 라이프스타일 플랫폼으로, 한식 파인 다이닝 ‘요석궁1779’를 운영하고 있다. 이 가문의 내림 음식을 재해석한 정갈하고 품격 있는 한식을 선보인다. ⓒ 하우스오브초이 대릉원지구에 있는 신라 왕족 무덤 중 하나인 서봉총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때는 1920년대이다. 일제강점기였던 이 시기에는 유물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서봉총의 학술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2016년부터 이듬해까지 2년간 이 무덤의 재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로 2020년 < 서봉총 재발굴의 성과: 영원불멸의 성찬 >이라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500년 전 신라 왕족의 제사 음식이었다. 서봉총에서 돌고래 뼈와 복어 뼈, 성게, 민어 등이 발견되면서 제사 음식으로 사용되었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제사 음식을 담았던 사각형 합(盒)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단아하고 세련된 모양새였다. 교촌마을은 신라 최초의 국립대학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 최부자 고택을 비롯해 조선 시대의 전통 한옥이 많이 남아 있어 고즈적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 한국관광공사 양반가 내림 음식 정성을 다해 차리는 제사상에 귀한 식재료가 올라갔다면, 평상시 왕실 밥상은 쌀과 나물, 고기나 생선 등으로 구성된 균형 잡힌 소박한 식단이었다. 왕실 밥상인데도 지천으로 흔한 나물이 빠지지 않은 데엔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불교의 영향이 컸다. 스님들의 일상식인 사찰 음식은 그저 허기를 채우는 용도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는 수행식이다. 육식을 금한 사찰 음식의 주재료는 나물이었다. 그러한 영향으로 지금도 경주의 여러 한식당들은 나물 위주로 맵고 짜지 않은 담백한 음식을 내놓는다. 조선 시대 지배 계급인 양반가의 음식도 경주의 식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양반가 음식은 같은 식재료를 사용해도 지역별로 조리법이 달랐다. 예컨대 닭고기 요리라도 전라도 양반가와 경상도 양반가의 맛이 달랐다. 가풍이 맛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됐다. 양반가 음식은 종가를 중심으로 후대로 이어졌다. 교동법주는 최부자댁에서 대대로 빚어 온 전통 술이다. 토종 찹쌀과 누룩으로 만드는 이 술은 밝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며, 곡주 특유의 향기가 난다. 맛은 단맛과 약간의 신맛이 난다. ⓒ 국가유산청 경주를 대표하는 최고 양반가는 이른바 ‘경주 최부자댁’으로 불리는 가문이다. 조선 시대부터 12대에 걸쳐 부를 축적한 이 집안은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일제강점기엔 독립운동을 하며 자금도 지원했다. 12대 후손 최준(1884~1970)은 가문의 모든 재산을 대학 설립에 바쳤다. 그래서 경주 최부잣집에는 항상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칭송이 따라다닌다. 후손 최재량 씨는 2024년 집안 음식을 정리한 책 『경주 최부자 종가 충의당의 음식』을 며느리인 이영주 씨와 함께 펴냈다. 충의당은 이 가문의 출발점이 된 조선 시대 무신 최진립(1568~1636)이 거주했던 가옥의 이름이다. 책에는 이 댁 제사 음식부터 내림 음식까지 자세하게 기술돼 있다. 제사상에는 가로세로 길이까지 정확하게 재서 정갈하게 조리한 문어, 조기, 쇠고기 등의 요리가 올랐다. 나물 요리도 재료가 콩나물, 도라지, 고사리, 시금치 등 다양했다. 한식의 기본인 장도 정월 장, 보리쌀 된장, 찹쌀고추장 등 여러 가지였다. 계절의 변화에 조응해 만든 음식은 더없이 근사한 건강식이었다. 봄 내림 음식엔 고사리 보리밥, 가자미 미역국, 쑥버무리, 완두콩죽 등이 있다. 여름엔 보리 열무김치, 청각 홍합 냉국, 오리 백숙 등이 있다. 가을엔 녹두전과 버섯전골 등이, 겨울엔 갈치식해와 생대구탕 등이 내림 음식이다. 하나같이 품격 넘치는 음식들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한식의 진수가 이 댁 밥상에 있다. 음식의 품격 경주 교동엔 한정식 레스토랑 ‘요석궁 1779’가 있다. 한정식은 한식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음식을 내는 정식을 말한다. 한국의 전통 밥상이다. ‘요석궁’은 신라 시대 사람인 요석공주가 살던 궁터에 최준의 첫째 동생인 최윤이 분가하여 지은 집 이름이다. 지금 그 후손들이 최씨 가문의 내림 음식을 기본으로 한 한식을 이 레스토랑을 통해 선보이고 있다. 한국 전통 가옥에서 맛보는 한정식이다. 운치가 미식의 반일 정도로 근사하고 격조가 높다. 그런가 하면 경주를 대표하는 술도 경주 최부자댁과 관련 있다. 명주로 알려진 교동법주는 최씨 가문의 3대손인 최국선이 조선 숙종 때 낙향해 처음 빚은 술이다. 그는 궁중음식을 관장하는 기관 사옹원의 관리였다. 당시 이 집 마당 우물물이 쓰였다는데, 물의 온도가 사계절 변함없이 같고 맛이 좋았다고 한다. 주재료는 토종 찹쌀이다. 교동법주는 최씨 가문의 가양주다. 가양주란 집에서 만든 술을 말하는데, 양반가는 집마다 술을 빚었다. 그 맛도 다 달랐다. 집마다 레시피가 달랐다는 소리다. 소중한 자산이었던 레시피는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교동법주는 300년 넘는 역사와 뛰어난 맛 등을 인정받아 1986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나라의 크고 작은 행사에 만찬주로 자주 오르는 술이다. 현재 이 가문의 일원인 최경 씨가 교동법주 기능보유자로 맥을 잇고 있다. 교동법주 체험 행사나 시음회마다 내국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도 몰린다. 경주에는 신선한 제철 식재료를 전통 조리법대로 만들어 내놓는 한정식 가게가 많다. 보통 입맛을 돋우는 전채 요리를 시작으로 활어회, 갈비찜, 보리굴비 구이 등의 요리에 각종 밑반찬이 딸려 나온다. ⓒ 경주시 다채로운 길거리 음식 경주에 고급 한식당만 있는 건 아니다. 경주 별미 중에는 회국수가 있다. 말 그대로 국수에 회가 들어간 음식이다. 다른 말로 놋전국수라고 한다. 고급 식기인 놋그릇이 많이 생산되던 동네의 주민들이 먹던 음식이다. 회국수는 경주에서 맛볼 수 있는 별미 중 하나다. 삶은 소면에 채 썬 채소와 김 가루, 참가자미 회를 올린 후 새콤달콤한 초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는 국수다. 사진 가운데가 회국수이다. ⓒ Ya Happy Project 경주를 대표하는 국수엔 밀면도 있다. 서울에 평양냉면이 있다면 경주엔 밀면이 있다. 평양냉면이 메밀가루로 면을 만든다면, 밀면은 그보다 저렴한 밀가루로 제면한다. 밀가루가 재료라면 일반 국수와 뭐가 다른지 의문을 표할 이들도 많겠지만, 면만 다를 뿐 맛이 평양냉면집과 비슷하다. 평양냉면에서 면만 달라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명성이 높은 곳은 1998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밀면 전문점 ‘현대밀면’이다. 한국판 미쉐린 가이드로 불리는 식당 평가서 ‘블루리본 서베이’에 10년 연속 맛집으로 선정됐다. 쫄면 명가도 빼놓을 수가 없다. 분식점 대표 메뉴인 쫄면은 탱탱한 면과 달고 매운 양념이 버무려져 혀를 달구는 음식이다. 몇 젓가락만 집어먹어도 얼굴에 땀방울이 맺힌다. 요리 방송에도 소개된 바 있는 ‘경주명동쫄면’이 유명하다. 한편 어느 지역이나 그렇듯 경주에도 오래된 가게들이 있다. 특히 황오동 해장국 골목에 역사가 오래된 해장국 노포들이 줄지어 있다. 이 거리에서 대표 식당은 ‘팔우정해장국’이다. 실내는 소박하고 음식은 푸짐한 정겨운 식당이다. 채소에 밥과 고기 등을 싸먹는 쌈밥은 한식의 매력을 한껏 드러내는 음식이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사람들만 오랫동안 즐겨온 독특한 먹거리다. 경주에도 맛깔난 쌈밥 전문점이 있다. 그중 ‘별채반교동쌈밥’은 경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로 음식을 만든다. 10가지가 넘는 반찬이 나온다. 전국적인 유명세로 여행객이 많이 몰린다. ‘이풍녀 구로쌈밥’도 가볼 만하다. 생선구이, 잡채 등 15가지가 넘는 반찬과 다양한 종류의 쌈 채소가 나온다. 그런가 하면 이른바 황리단길로 불리는 황남동과 인근 골목엔 향긋한 음료와 달콤한 디저트 등을 파는 세련된 공간이 많다. 이곳에는 경주를 찾은 여행객들 대부분이 구입하는 황남빵이 있다. 1939년 황남동에서 만들기 시작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빵의 겉을 만들고, 삶아서 으깬 팥으로 속을 채우는데 달지 않고 담백하다. 이른 아침 찌자마자 판매하는 따끈한 빵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 별미다. 경주의 기념품 같은 빵이다. 경주 향토 음식의 대명사가 된 황남빵은 여행자들이 반드시 사가는 간식거리이다. 1939년 황남동의 한 빵집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1994년 경주의 향토 전통 음식으로 지정되었다. ⓒ 황남빵

천혜의 자연 환경을 품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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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자연 환경을 품은 도시 경주 여행 하면 흔히 유적지를 돌아보는 역사 기행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곳은 수려한 자연 경관으로도 유명하다. 산과 바다, 호수와 평야가 두루 어우러져 그 자체로 매력이 넘친다. 경주시 남쪽에 자리한 남산은 해발 468m와 494m 두 개의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6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들로 이루어진 산이다. 우리나라에서 불교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며, 자연 경관도 빼어나다. ⓒ 경주시, 사진 박영희 “남산을 보지 않고는 경주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경주 시내 남쪽에 있는 남산은 ‘신라의 정신’이라고 할 만한 상징적인 산이다. 신라인들에게 신앙의 대상이었기에 천년 역사 동안 이곳에는 무수한 절들이 세워졌다. 신라가 존속했던 시간만큼 긴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이 산의 범상하지 않은 기상(氣像)은 여전하다. 수많았던 절들은 사라졌지만, 당대인들이 바위에 새긴 부처의 형상과 층층이 쌓아 올린 석탑들은 바위와 나무처럼 산의 일부가 되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 깨지고 닳았지만, 그래서 인위적이지 않고 더 자연스럽다. 등산로를 걸으며 만나는 숱한 석불과 석탑은 모두 다르게 생겼다. 돌이지만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신라인들이 정성을 다해 어루만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솔숲의 싱그러움 남산은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 두 봉우리에서 뻗어 내려오는 4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기암괴석이 웅장하고 구석구석 볼거리가 많아 등산로만 수십 코스에 달한다. 남산 서쪽 기슭의 삼릉숲은 왕릉 3기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숲이다. 이곳은 휘어진 노송들이 신비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 독특한 정취를 담으려는 사진 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게티이미지 남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빠르지 않다. 곳곳에 산재한 문화유산 앞에서 자주 멈추고, 오랫동안 응시한다. 그들의 목표는 정상에 닿는 것이 아니라, 남산이라는 ‘노천 박물관’ 관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분포된 유적과 유물은 약 700점에 이른다. 그중에는 13기의 신라 시대 왕릉도 포함된다. 그 왕릉들을 수만 그루의 소나무들이 수호한다. 남산의 숲을 이루는 수종의 80%는 소나무다. 그래서 남산은 한겨울에도 내내 푸르다. 남산의 솔숲은 강운구(Kang Woon-gu)나 배병우(Bae Bien-u) 같은 국내 대표적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 그들의 앵글로 찍힌 솔숲은 붓이 가는 대로 자유롭게 그린 수묵화 같다. 곡선과 직선으로 뻗은 나무 기둥들이 조화롭게 얽혀 있고, 그 사이로 온화한 햇빛이 쏟아지거나 어슴푸레한 안개가 감돈다. 특히 삼릉숲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솔숲으로 꼽힌다. 남산 서쪽 기슭에 3기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삼릉(三陵)’이라 불리는 구역의 숲이다. 하늘을 향해 뻗은 소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반원 형태의 커다란 무덤들은 죽은 이의 공간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언덕처럼 푸근해 보인다. 많은 이들이 이른 아침에 삼릉숲을 찾는다. 새벽안개가 채 걷히지 않아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아침의 신선한 솔향이 깊은숨을 쉬게 하기 때문이다. 삼릉숲에선 소나무 아래 앉거나 나무 기둥을 안고 오랫동안 명상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상적인 산책 봄에 경주를 찾는 여행자들은 보문호로 간다. 경주를 대표하는 벚꽃 명소이기 때문이다. 수령 50년의 1만 5천여 그루 벚나무가 호수를 둘러싸고 있다. 벚나무들이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면 주변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다. 이때만큼은 보문호가 경주의 수많은 천년 유적지들을 압도한다.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꽃잎들이 수면과 사람들 어깨로 내려앉는다. 호숫가를 걷기만 해도 황홀하다. 호수의 역사는 60년이 조금 넘었다. 보문호는 원래 홍수와 가뭄을 대비해 1963년에 축조한 대규모 저수지였다. 그런데 정부의 ‘경주 종합 개발 계획’에 의해 1979년 보문 관광 단지가 개장하면서 쓰임이 달라졌다. 보문호는 보문 관광 단지의 중심축으로 오랜 시간 시민들과 여행자들의 쉼터 역할을 해 왔다. 경주의 다른 명소들과 견주어 역사는 매우 짧지만, 경주가 관광 도시로 거듭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호숫가에는 전망 좋은 호텔과 리조트, 카페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들을 잇는 산책로는 약 8km에 이른다. 벚꽃이 피는 봄뿐만 아니라 사계절 자연의 변화를 눈으로 감상하며 걷거나 자전거 타기에 좋은 길이다. 호숫가에는 1991년 설립된 우양미술관도 있다. 현대 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국내외 원로 및 중견 작가들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또한 유럽과 미국의 현대 예술 작품과 1970년대 한국 모더니즘의 대표작까지 두루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은 미스 반 데어 로에를 사사한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 김종성(Kim Jong Soung, 金鍾星)이 설계했다. 한국 전통 건축의 구조와 중정의 개념을 빌려온 건축물로 정확한 비례와 섬세한 화강암 마감이 돋보인다. 수변 길을 따라 산책하고 미술관에 들러 전시회 관람까지 하면 호숫가에서 누리는 하루가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해진다. 보문호는 야경도 아름답다. 해가 지면 산책로와 그 주변에 조명이 켜져서 낭만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보문호는 ‘역사의 도시’ 경주가 아닌 온전히 쉬고 즐기는 ‘휴양지’ 경주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1970년대 말 개장한 보문관광단지는 인공 호수 보문호를 중심으로 240만여 평의 면적에 특급 호텔과 레저 시설, 미술관 등이 들어서 있다. 벚나무가 가로수로 식재되어 봄이면 만개한 벚꽃이 흩날리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 경주시, 사진 박춘엽 경주 바다의 숨은 보석 경주는 바다와 접한 고장이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주 잊는다. 유명한 사적을 둘러보느라 바다까지 발걸음을 옮기는 여행자들이 많지 않은 까닭이다. 경주의 해안선은 30km에 이른다. 경주 바다에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있던 한반도를 통일한 문무왕(재위 661~681)이 용으로 환생해 나라를 지키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경주시 양남면의 주상절리군은 규모와 형태에 있어 다른 지역의 주상절리와 뚜렷한 차별성을 지닌다. 10m가 넘는 정교한 돌기둥들이 1.7㎞에 걸쳐 분포해 있으며 주름치마, 부채꼴, 꽃봉오리 등 다양한 형태의 주상절리가 대규모로 발달해 있다. ⓒ 경주시, 사진 이정희 해안선의 대부분은 트레킹 코스로 연결되어 있는데,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구간은 1.7km에 걸쳐 이어진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이다. 이 길은 군사 지역이어서 오랫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베일에 싸여 있다가 2012년 공개되었다. 길이 개방되자 경주의 ‘숨은 보석’ 양남 주상절리군이 드러났고, 중요성을 인정받아 그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빠르게 냉각되어 만들어진 오각형, 육각형의 돌덩이다.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은 무려 2,000만 년 전인 신생대 3기에 형성되었다. 각진 돌덩이는 성냥개비처럼 균일하게 쌓여 부채꼴, 주름치마, 꽃봉오리 등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주상절리는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해안가에 만들어져 매 순간 파도와 만난다. 파도가 주상절리를 덮치며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모습은 눈을 떼기 어려운 절경이다. 유서 깊은 씨족 마을 경주 북쪽 끝 낮은 구릉과 골짜기에 조성된 양동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씨족 마을이다.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가문이 15세기부터 자리 잡기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6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큰 변화 없이 주민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경주 양동마을은 조선 시대 초기에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입향해 대를 이어 살아온 마을이다. 한국의 씨족 마을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며, 주민들이 오늘날까지 전통적인 유교적 관습을 지키고 있어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경주시 양동마을의 가치는 자연에 어우러져 전통 문화를 보존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한국인의 지혜에 있다. 마을을 처음 방문한 이방인들은 언덕과 골짜기를 따라 집들이 들어선 입체적인 풍경에 감탄한다. 본래의 지형을 따라 세워졌기 때문에 같은 층위의 집들이 없다. 한 집이 다른 집을 가리는 경우도 없어서 어느 곳이나 햇볕이 잘 들어온다. 또 어떤 집에서나 마을을 감싼 산을 바라볼 수 있다. 구릉 위로 난 마을 길을 따라 오르면 서로 다른 구조와 디자인으로 지은 개개의 고택들을 만날 수 있다. 양동마을에는 조선 초기에 지은 기와집이 원형 그대로 네 채나 남아 있다. 마을의 역사를 함께한 수령 500년을 넘긴 나무도 여러 그루다. 마을 길은 구릉을 넘어 골짜기 아래로 이어진다. 골짜기에는 또 다른 집들이 외지인을 반긴다. 마을의 가장 높은 지대에 서면 경주를 관통하는 형산강의 지류와 드넓게 펼쳐진 평야, 그리고 그 주변의 수려한 산세를 조망할 수 있다. 발아래로는 올망졸망 자리 잡은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보인다.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시야를 가리는 것,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게 하는 풍경이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경주의 자연 경관은 유구한 문화유산과 더불어 이곳을 특별한 도시로 만든다. 경주는 사계절 내내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며, 여행자들에게 잊지 못할 최고의 순간을 제공한다.

세계 문명과의 교류로 이루어 낸 신라의 황금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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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명과의 교류로 이루어 낸 신라의 황금 문화 경주에는 많은 보물이 있다. 그중 화려한 금관을 비롯한 황금 유물들은 매우 아름답다. 단순히 황금으로 만들어져서가 아니다. 동시대 유라시아 초원에 살았던 민족들과 교류했던 신라가 그들의 문명을 내재화해 독자적 문화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의 황금 유물들은 보편적이면서도 독창적이다. 2023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 천마, 다시 만나다 > 전시 모습. 이 전시회에는 사진작가 구본창의 천마총 출토 황금 유물과 유리잔 촬영 작품 11점이 소개되었다. 구본창은 한국인의 미의식이 담긴 백자, 탈, 꼭두, 단청 등을 비롯해 일상적인 오브제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작가다. 최근에는 황금 문화유산을 주제로 한 연작을 선보인다. 구본창은 한국 현대 사진의 예술성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황금은 신대륙과 구대륙, 아프리카를 통틀어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인정받는 대표적인 귀금속이다. 우리나라에 황금이 유입된 시기는 매우 늦었다. 한반도에서는 약 2천여 년 전 평양 근처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삼국 시대(B.C 1세기~7세기)에는 직접 제조하지 않고 주변 국가에서 수입했다. 중국의 역사책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2천 년 전 한국에 대한 이런 기록이 있다. “마한(한반도 남서부에 존재했던 정치 연맹체) 사람들은 금은보화와 비단, 융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직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의 장식으로 삼거나 목이나 귀에 건다.” 여기서 말하는 구슬은 옥(玉)을 가리킨다. 옥과 관련된 속담도 많고, 지금도 옥 사우나나 옥 장판이 인기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인들은 옥을 좋아한다. 옥에 대한 선호는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고, 3천 년 전부터 만들었던 고인돌에서도 청동기 대신 옥이 더 많이 발견될 정도로 역사가 깊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황금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이 바로 서기 4세기 경주였다. < Gold (KR 043-1) >. 구본창. 2023. Archival Pigment Print. 58 × 45.5 ㎝. 작가 및 국제갤러리 제공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금관 안쪽에 착용했다. 사진은 금관총에서 발견된 관모이다. 금관 발굴의 역사 고고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이집트를 떠올린다. 여기에는 1922년 발굴된 투탄카멘 미라의 영향이 크다. 신라 금관은 그보다 한 해 앞선 1921년 세상에 알려졌다. 민가 증축 과정에서 우연히 신라 시대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이 무덤에서 수많은 황금 유물이 출토되었던 것이다. 특히 금관이 처음으로 발굴되었기에 이 무덤의 이름은 ‘금관총(金冠塚)’으로 명명되었다. < Gold (KR 052) >. 구본창. 2023. Archival Pigment Print. 58 × 45.5 ㎝. 작가 및 국제갤러리 제공 사진은 금관총에서 출토한 금관으로 높이 44.4㎝, 머리띠 지름 19㎝이다. 원형 머리띠 정면에 3단의 ‘출(出)’자 모양 장식 3개가 있으며, 뒤쪽 좌우에 2개의 사슴뿔 모양 장식이 세워져 있다. 이는 신라 금관의 전형적 형태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 이 무덤은 전문 지식을 갖춘 고고학자가 아닌, 경주에 거주하던 일본인 비전문가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파헤쳐졌다. 발굴자들이 유물 수습에만 관심을 둔 탓에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는 물론 자료 하나 남은 게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발굴로 얼마나 많은 황금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발견된 화려한 금관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동아시아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 한국의 황금 문화가 주목받게 되었다. 1926년에는 스웨덴의 황태자였던 구스타프 6세 부부의 방문에 맞춰 또 다른 무덤의 발굴이 진행됐다. 이때는 고고학이 취미인 구스타프 6세도 작업에 참여했다. 그래서 이 무덤은 스웨덴을 의미하는 한자 ‘서(瑞)’와 금관에 달린 봉황 장식을 의미하는 ‘봉’을 합쳐 ‘서봉총(瑞鳳塚)’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왕위에 오른 구스타프 6세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대규모 의료 지원단을 파견했다. 1500년 전 찬란한 황금 문화에서 이어진 소중한 인연이다. 한국전쟁 이후 신라 금관은 세계 곳곳에서 전시되면서 한국의 고대 문화를 알리는 문화 사절단 역할을 했다. 이후 1970년대에는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이 발굴되었다. 신라 금관은 단순한 금공(金工) 장신구를 넘어 식민지 역사의 아픔을 딛고 문화 강국으로 부상한 한국의 현대사를 상징하기도 하는 셈이다. 문화적 유사성 신라 금관은 신라와 유라시아 초원의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이기도 하다. 서기 1~5세기 동안 유라시아 각지에서 일어난 민족 대이동 시기, 흑해 크림반도의 호흘라치 스키타이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이나 아프가니스탄 틸리아 테페의 금관 등은 신라 금관과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이들은 흉노에서 시작된 황금 예술을 공유하면서 스스로를 흉노의 후예로 자처하는 등 공통점이 있다. 신라 금관은 유라시아 곳곳에서 목도되는 샤먼의 관(冠)과 비슷하다. 하늘의 대리인인 샤먼의 의식에 사용되는 관은 황금이 아니라 철이나 동으로 만들어졌지만, 사슴과 나무를 모티프로 해 많이 닮았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사슴뿔과 나무를 형상화한 관이 유럽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광활한 유라시아 지역에서 공통으로 사용된 셈이다. 사슴뿔은 매년 자라는 것이니 그 자체로 무한한 생명력을 뜻한다. 또 하늘로 뻗은 아름드리나무는 하늘과 이어지는 통로를 연상케 한다. 지금도 유라시아 곳곳의 샤먼들은 신성한 나무 밑에서 하늘과 소통하는 의식을 치른다. 만주족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신라 금관과 비슷한 관을 쓰고 신성하게 모시는 자작나무 앞에서 샤먼이 주도하는 제사를 모셨다. 샤먼의 관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역할을 의미했다. 시베리아의 암각화에는 마치 와이파이 수신기처럼 관을 쓰고 하늘과 연결되려는 샤먼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 Gold (KR 50) >. 구본창. 2023. Archival Pigment Print. 64 × 140 ㎝. 작가 및 국제갤러리 제공 천마총에서 발굴한 금관 드리개이다. 금관 좌우에 매달아 늘어뜨리는 장식이며, 나뭇잎 모양의 정교한 조각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하게 연결했다. 한편 금관에는 권력의 독점이라는 의미도 내재해 있다. 금관총에서 금관이 발견되고 3년이 지난 해에 또 다른 무덤의 발굴 작업이 시행되었다. 이 무덤은 부장품 중 특이한 금방울이 들어 있어 ‘금령총(金鈴塚)’으로 불리게 되었다. 금령총에서는 기마 인물형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자세히 보면 말을 탄 인물의 머리가 뾰족하다. 이를 편두(扁頭)라 하는데, 갓난아이의 머리에 나무 같은 단단한 물체를 대고 헝겊으로 감아서 형태를 변형시키는 고대의 풍습이다. 편두를 했다는 것은 화려한 금관과 황금 장식으로 치장할 수 있는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 Gold (KR 48) >. 구본창. 2023. Archival Pigment Print. 58 × 45.5 ㎝. 작가 및 국제갤러리 제공 신라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귀걸이를 즐겨 착용했다. 천마총에서 발굴된 귀걸이는 무덤 주인이 착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리와 샛장식, 하트 형태의 드림이 연결되어 있다. 총길이 6.2cm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신라만의 일이 아니었다. 유라시아 곳곳에서 신라 금관과 비슷한 관을 썼던 사람들 모두 편두 머리를 했다. 흉노가 유라시아 초원을 지배한 직후 세계 곳곳에 금관과 편두 풍습이 결합되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유라시아 곳곳에서 신라와 비슷한 금관이 발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금과 샤머니즘을 받아들인 동서양의 여러 지역은 자신들의 방법으로 금관을 재창조했다. 지금도 금관의 비밀은 다 밝혀지지 않았다. 서양에 ‘다빈치 코드’가 있다면 한국에는 ‘금관 코드’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은 금관총 재발굴 작업을 통해 유물을 다시 조사해서 그 무덤과 금관의 주인공이 ‘이사지(尒斯智)’라는 이름의 왕이었음을 밝혀냈다. 국력의 상징 신라 금관에는 다른 나라의 금관에는 없는 특별한 장식이 있다. 바로 반달 모양의 옥 장식인 곡옥(曲玉)이다. 쉽게 지나치기 쉬운 이 장식에는 신라만의 지혜가 숨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신라에 황금이 도입되기 이전에 한국에서는 옥을 더 좋아했다. 황금 같은 금속과 달리 옥은 가공 시 뜨거운 도가니의 제련 기술이 필요 없다. 대신에 돌을 갈아내야 하는 도구와 노동력이 필요하다. 황금이 도입된 후 신라인들은 기존에 애용하던 옥을 버리는 대신 황금과 결합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한국의 옥과 유라시아의 황금이 한데 모여 신라만의 독특한 황금 문화가 창조된 것이다. 즉 신라 금관은 곡옥이라는 동아시아의 전통 위에 유라시아의 황금 제작 기술과 샤머니즘를 조화시켜 새로운 미적 경지를 연 사례라 할 수 있다. < 천마, 다시 만나다 > 전시 전경. 천마총에서 발굴된 관모, 금관, 금제 관식 등을 촬영한 구본창의 사진 작품들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에서 신라는 가장 늦게 나라를 발전시켰다. 신라는 원래 박, 석, 김 씨의 세 왕족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다가 서기 4세기경 내물왕 시절부터 김 씨가 단독으로 왕위를 계승하기 시작했다. 황금을 뜻하는 ‘김(金)’ 씨와 무슨 상관이라도 있는지 이때부터 신라는 본격적으로 화려한 황금 문화를 발전시켰다. 황금은 단순한 보물이 아니었다. 세계 문명과 활발히 교류하며 성장했던 신라의 국력이 황금이라는 아름다운 유물에 응축된 것이다. 유라시아를 넘어 유럽 문명까지 받아들였던 적극성과 개방성이 있었기에 신라가 천년을 이어가며 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 가장 외진 동남쪽에서 유라시아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적극적으로 나라를 발전시킨 신라의 모습은 21세기 한국과 닮았다.

신라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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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도시 세계 곳곳에는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적들이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경주는 특별하다.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한옥으로 만들어진 게스트하우스에서 문을 열면 바로 앞에 거대한 고대 무덤인 대릉원이 보인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신라로 여행을 간 듯하다. 경주가 한국인의 사랑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진은 경주역사유적지구 중 대릉원 지구이다. 이곳에는 신라의 왕과 왕비, 귀족들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192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굴 작업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으며, 금관과 장신구를 비롯해 당대의 생활용품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 한국관광공사 경주는 과거 한반도의 고대 왕조 신라(B.C 57~A.D 935)의 고도(古都)였다. 삼국시대(B.C 1세기~7세기)를 거쳐 통일신라(676~935)에 이르기까지 고대 한반도에서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개 지구에 52개에 이르는 지정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어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이 원형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어 이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도시 전체가 역사지구로 세계유산이 된 사례는 터키 이스탄불이나 오스트리아 비엔나 등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다. 동궁과 월지는 왕자가 거처했던 공간이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외국에서 귀한 손님이 왔을 때는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신라 시대의 정원과 연못 조경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지이다. ⓒ 게티이미지 천년 왕조의 궁궐터 경주역사유적지구 중 신라의 왕실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은 월성 지구와 대릉원 지구이다. 월성 지구의 주요 기념물은 월성 옛터, 흔히‘안압지’로 알려져 있는 동궁과 월지, 현존 최고(最古) 천문대로 일컬어지는 첨성대, 그리고 경주 김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서린 계림이 대표적이다.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을 말한다. 동서로 890m, 남북으로 260m 길이의 반달 모양 토성이고 둘레는 2,340m이다. 문무왕(재위 661~681) 때 인근 안압지, 임해전, 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규모가 확장되었다. 신라의 성장과 번영, 멸망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동궁과 월지는 별궁이 자리했던 궁궐터이다. 왕자가 거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역사적 자료와 연구를 통해 여러 전각을 복원하고 아름다운 야경을 조성해 관광객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다. 1970년대 이루어진 월지 발굴에서는 호수 밑바닥 진흙 속에 묻힌 3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그중 1,100여 점을 엄선하고 주제별로 나누어 상설 전시 중이다. 용면문와(龍面文瓦), 금동판 불상, 금동 초심지 가위 등에서 신라 왕실과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대릉원 지구는 세 그룹의 왕실 무덤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서 화려한 금제 부장품과 유리 제품, 도자기들이 발굴되었다. 그중 천마총은 자작나무 껍질에 날개 달린 말을 그린 천마도가 발굴된 고분이다. 그 상상의 동물이 지켰던 무덤의 주인이 궁금해진다. 한편 산성 지구에는 명활성이 있다. 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둘레 6㎞의 산성인데, 주로 왜구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외적(外敵)에 대항해 경주를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한 방어 시설이다. 고대 불교 예술의 정수 한반도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했다. 이후 기존의 여러 토착 신앙이 행해지던 남산이 불교 성산(聖山)이 되어 순례지로 탈바꿈했으며, 당대 최고 건축가들과 장인들이 이곳에 사찰과 암자를 지었다. 수십 기의 석탑과 석불이 남아 있는 남산 지구는 우리나라에서 불교 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사회 통합에 적극 활용했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지만, 대표적 호국 사찰이었던 황룡사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구층목탑(80m가량)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대 발굴에서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13세기 몽골 제국 침공 때 목탑을 비롯해 많은 문화유산들이 불타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황룡사 터는 맞은편에 위치한 분황사지와 함께 신라 불교의 정수가 담긴 황룡사 지구를 이룬다. 그런가 하면 경주 동남쪽의 토함산에 위치한 석굴암과 불국사에서는 통일신라의 불교 미술과 만날 수 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된 두 유산은 최고의 예술적 경지를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774년 완공된 석굴암은 지금까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비도(扉道)를 지나 돔 형태의 주실(主室)로 이어지는 공간마다 사천왕상과 여러 보살들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주실에는 3.45m 높이의 석가여래좌상이 연꽃 위에 앉아 있다. 용의 얼굴을 조각한 용면문와는 건물 지붕을 장식하는 건축 부재이며, 물의 신(神)인 용(龍)이 목조 건축물을 화재로부터 막아주기를 바라는 벽사의 의미도 있었다. 이 장식 기와는 삼국 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통일신라에 이르러 제작 기술이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사진은 황룡사지에서 발굴된 길이 18.5cm의 용면문와. ⓒ 국립경주박물관 정신없이 신라 불교 예술의 정수를 감상하다 보면 왜 이곳이 세계유산에 드물게 적용되는 등재 기준 1번, 즉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으로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다. 서양에서 조각에 주로 쓰이는 대리석과 달리 까다롭다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기에 당대의 기술적 수준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한편 불국사에는 불교의 이상향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황룡사와 마찬가지로 호국 사찰이지만, 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깨끗한 세상인 불국정토(佛國淨土)를 이루겠다는 신라의 야심찬 꿈을 보여준다. 신라인들은 신라가 바로 부처의 나라라고 믿었기에 불국사는 부처님 나라의 사찰로서 곧 현세의 낙원을 의미한다. 8세기 건축 당시 모습 그대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청운교와 백운교를 지나 예배 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올라갈 수 있다.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신라 시대의 우수한 석공 기술을 엿볼 수 있는데, 대웅전 앞 완벽한 비례와 직선미를 보여주는 석가탑과 자유분방하면서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다보탑이 대비된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수난을 여실히 겪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의 일본이 조선(1392~1910)을 침략하면서 발발한 임진왜란(1592~1598) 시기 불국사의 목조 건축물은 방화로 모두 불타고 파괴되었다. 현재 모습은 1960~70년대에 석조물을 중심으로 다시 재건한 것이다. 석굴암의 경우 일제강점기(1910~1945)에 대대적인 해체와 복원을 거치면서 오히려 훼손의 위기에 놓였다. 근대에 와서야 전면적인 수리를 거쳤는데, 여기에 국제 사회의 도움이 있었다. 1960년 당시 한국은 석굴암에서 원인 모를 누수가 계속되자 유네스코한국위원회를 통해 국제적 전문가를 초빙했고, 유네스코의 기술 자문과 재정 지원을 통해 긴급 보수를 마칠 수 있었다. 프로젝트를 총괄한 헤럴드 J. 플렌더라이스(H.J. Plenderleith) 박사는 석굴암이 당시 완전히 원형을 잃어버릴 뻔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세계인의 도움으로 되살아난 석굴암이 한국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것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진다. 전 세계인의 핫플레이스 경주는 중장년층과 노년 세대에게 수학여행의 인기 명소였다. 인근 도시에서 소풍을 온 초등학생부터 전국 각지에서 온 중고등학생들까지 관광 버스로 항상 붐비는 곳이었다. 2박 3일 일정으로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이동해도 볼 것이 가득하니, 토함산의 구불구불한 길에 느끼는 멀미도 참을 만했을 것이다. 신라 귀족들이 술잔을 띄워 놀았다는 포석정에는 그를 따라해 보는 학생들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가득하곤 했다. 첨성대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 시대의 천문 관측대로, 선덕여왕 때 축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시대의 과학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유물로, 높이는 9.51m이다. ⓒ 한국관광공사 지금 경주는 20~30대 젊은 세대의 핫플레이스로 거듭났다. 경주는 우스갯소리로 아무 땅이나 파도 유물이 나오는 곳이라, 일대의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법과 정책이 강력한 편이다. 한때 개발 바람이 불며 지나친 규제라는 반발도 있었지만, 지금은 지역 주민이 발 벗고 나서 마을과 문화유산을 지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덕분에 고층 건물의 방해 없이 신라 시대 고분을 볼 수 있고, 월지 전각에 올라 주변 경치를 둘러볼 수도 있다.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야경은 덤이다. 밤늦게까지 밝히는 조명 덕분에 안전하게 주요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으니 젊은 세대들의 인증샷이 끊이지 않는다. 기성 세대가 간직한 수학 여행의 추억이 시대의 변화와 함께 또 다른 모습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경주는 지금도 변하고 있다. 끊임없이 출토되는 유물과 함께 이미 발굴된 문화유산도 단장을 쉬지 않는다. 덩달아 거리 모습도 시대에 따라 빠르게 바뀌고 있다. 최고의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대릉원 옆 한옥 거리를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카페와 음식점, 게스트하우스 등이 들어서 있어 이채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과히 수천 년 전 시간과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다. 나아가 미래도 이야기된다. 2025년 10월 말 경주 개최로 예정된 제32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그것이다. 과거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속에서 미래를 보고 싶어 하는 전 세계 손님들로 경주는 더욱 바빠질 것 같다. 가급적이면 빨리 경주를 만나길, 그리고 미리미리 방문지 목록도 만들라고 당부하고 싶다. 경주에 담긴 천년을 만나는 데 시간은 항상 부족할 테니. 8세기에 완공된 석굴암은 경주 토함산 중턱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굴 사원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주위 벽면에 총 40구의 불상이 조각되었으나, 현재는 38구만이 남아 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게티이미지 김지현(KIM Jihon)유네스코한국위원회 정책팀장

서촌의 공공 한옥들

Features 2024 WINTER

서촌의 공공 한옥들 서촌은 북촌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한옥 마을로 꼽히는 지역이다. 그중 서울시와 종로구가 운영하는 서촌 내 공공 한옥들은 전통 주거 문화 체험은 물론 다채로운 문화 예술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어 서촌을 대표하는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는 중이다. 서촌라운지의 안마당 전경. 2층 구조의 한옥을 개조한 서촌라운지는 아파트 등 현대식 라이프스타일에 익숙해진 시민들에게 한옥의 주거문화를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 서울시청 서촌의 한옥들은 대부분 근대기에 양산된 ‘도시형 한옥’이다. 1920~30년대 주로 지어진 도시형 한옥은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인구 과밀 현상을 겪고 있던 경성(京城, 현재의 서울)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났다. 당시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토지를 매입해 필지를 잘게 쪼갠 뒤 소형 한옥을 지어 대량 공급했다. 도시형 한옥은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대문과 방들이 ㅁ자 형태로 연결된 구조이다. 전통 한옥에 비해 규모나 구조가 간소화된 대신 장식적인 요소가 많아지고, 재료에서도 유리나 벽돌 등 근대적인 소재가 사용되었다. 또한 점차 달라지는 생활 양식을 반영해 부엌과 화장실을 신식으로 고치는 등 개량되었다. 하지만 도시형 한옥에도 한옥 특유의 정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많은 이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하룻밤이라도 특별함을 누리고자 한옥 스테이를 찾는 이유다. 그러나 한옥 스테이는 만만치 않은 가격 때문에 부담이 큰 게 사실이다. 이에 서울시와 종로구에서는 공공 자금으로 한옥을 매입해 일반에 개방하고,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서촌에도 상촌재(Sangchonjae, 上村齋), 홍건익 가옥(Hong Geon-ik House, 洪建翊 家屋), 서촌라운지(Seochon Lounge) 같은 공공 한옥이 있어 지역 주민들과 서촌 방문객들이 즐겨 찾고 있다. 이들 공공 한옥에서는 전통 주거 문화를 경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예 체험이나 미술 작품 전시 등 색다른 문화 예술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다. 서촌에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도시형 한옥이 밀집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전통 한옥과 유사해 보이지만 형태와 재료, 구축 방식 등에서 차이가 난다. 유리와 벽돌, 타일, 함석 등 근대적 재료를 사용하는 한편 장식적 측면이 매우 강화되었다는 점이 도시형 한옥의 특징이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전통 한옥의 미 상촌재는 오랫동안 방치된 경찰청 소유의 폐가를 종로구가 2013년에 매입해 복원한 후 2017년부터 일반에 개방한 공간이다. 19세기 말 전통 한옥 방식으로 조성된 이곳은 온돌 문화를 비롯해 한국 전통 가옥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장으로 활용된다. 안마당과 사랑마당이 지형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위계를 지니며, 이들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상촌재는 한옥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2017년에 국토교통부의 <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을, 2018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의 <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을 받았다. 상촌재는 장기간 방치된 한옥 폐가를 19세기 말 한옥 양식으로 복원한 공간이다. 전통 한옥 미학을 되살린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으며, 서촌의 대표적 공공 건물로 자리 잡고 있다. ⓒ 종로문화재단(Jongno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상촌재의 매력은 건축물뿐 아니라 풍성한 문화 예술 프로그램에도 있다. 이곳은 한옥·한복·전통 공예·세시 풍속과 관련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한다. 일회성 체험 행사뿐 아니라 전문 교육 프로그램도 탄탄하게 갖추고 있다. 또한 젊은 예술가들을 발굴해 주기적으로 전시회도 개최한다. 상촌재는 시민들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기 때문에 연간 평균 약 2만 명이 방문하는 서촌의 인기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서촌의 공공 한옥 중 하나인 상촌재에서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운영한다. 사진은 그중 하나인 ‘전통 의식주 교육’ 현장으로, 한복을 갖춰 입은 어린이들이 예절 교육을 받고 있다. ⓒ 종로문화재단(Jongno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근대적 절충 양식 1930년대 지어진 홍건익 가옥은 전통 방식과 근대적 양식이 절충된 민가 건축물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한옥 중 우물과 빙고(氷庫)까지 갖춘 몇 안 되는 집이다. 홍건익은 상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얕은 구릉 위에 지어진 이 집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등 각 건물을 독립적으로 배치했는데, 이러한 구조는 전통 한옥 양식의 전형적 특징이다. 반면에 대청에 설치한 유리문과 처마의 차양은 근대기 한옥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홍건익 가옥은 2011년 서울시가 매입해 보수 공사를 진행하였고, 2017년 공공 한옥으로 개방되었다. 이곳에서는 방문객을 대상으로 도슨트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중 서촌을 산책하며 곳곳에 자리한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을 듣는 프로그램이 인기다. 조선 시대의 화가 정선(Jeong Seon)이 남긴 화첩 < 장동팔경첩(Album of Eight Scenic Sites of Jang-dong in Seoul) >의 배경을 방문해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홍건익 가옥의 또 다른 매력은 시즌별 문화 행사다. 여름밤에는 전통차를 즐기는 다회를, 추석에는 송편을 빚는 행사를 운영하는 등 계절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침선, 옻칠, 도예 등 공예 프로그램은 지역 예술가나 크리에이터들과 함께한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2022년 12월부터 2023년 1월까지 진행된 홍건익 가옥 특별전 < 집의 사물들 - 삶의 품행 > 전시 모습. 오우르(OUWR) 등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공예가들의 다양한 작업을 소개한 전시다. ⓒ 홍건익 가옥, 오우르(OUWR) 전통과 현대의 연결 서촌라운지는 서울시가 추진 중인 한옥 정책의 일환으로 2023년 10월 오픈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한옥 내부를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한 이곳은 기획 전시가 열리는 1층과 방문자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는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촌라운지는 회화, 공예, 건축 등 여러 분야의 창작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서촌 지역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콘텐츠를 주로 제공한다. 특히 국가와 세대를 초월한 라이프스타일 콘텐츠에 초점을 두고 있다. 개관 기념 전시 < 독일 바우하우스×전통 공예, 음미하는 서재(Bauhaus×Korea Craft Design) >는 바우하우스 양식을 대표하는 가구와 국내 공예가들의 작품이 어우러진 전시로, 이 공간의 성격과 지향점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올해에도 스위스 로잔예술대학 산업디자인과 학생들과 국내 조명 브랜드 아고(AGO)의 협업 전시가 열리는 등 국내와 해외,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는 프로그램이 꾸준히 개최되었다. 서촌라운지는 전시 프로그램 외에도 티 소믈리에와 함께하는‘계절 차[茶]회(Global Seasonal Tea-Talk)’가 유명하다. 우리나라 차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전통 차를 마시며 비교해 보는 시간도 있어, 예약이 금세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한옥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구조와 형태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지만, 특유의 고즈넉한 정취는 여전하다. 현대인의 삶과 문화에도 영감을 준다. 서촌의 공공 한옥들이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은 서촌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다. 서촌라운지의 인기 프로그램인 계절 차회에서 한 참가자가 차를 음미하고 있다. 티 소믈리에의 설명을 들으며 차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은 외국인을 위한 차 모임이 따로 운영된다. ⓒ 서촌라운지

느리고 소박하며 자연스러운 삶

Features 2024 WINTER

느리고 소박하며 자연스러운 삶 2015년부터 ‘가정식 패브릭(Gajungsic Fabric)’이라는 의류 브랜드를 운영해 온 김우정(Kim Woo-Jung, 金佑定) 대표는 소박하고 편안한 옷을 짓는다. 서울 여러 동네를 떠돌다가 5년 전 서촌에 정착해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녀가 만든 옷을 ‘서촌스럽다’고 말한다. 경상남도 마산이 고향인 김우정(Kim Woo-Jung, 金佑定) 씨는 스무 살이 되면서 서울에 살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스무 번 가까이 이사를 다녔다. 의류 디자이너인 그녀는 5년 전 서촌에 작업실을 마련하면서 이 동네와 인연을 맺었고, 지난해에는 인왕산이 보이는 집으로 이사해 서촌살이를 만끽하고 있다. 밥도 ‘짓고’, 옷도 ‘짓고’, 집도 ‘짓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의식주에 대해 한국어는 같은 동사를 사용한다. 건강을 생각하고 편안함을 중히 여기는 그 마음이 같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밥 먹고 건강하길, 이 옷 입고 편안하길, 이 집에서 행복하길. 가정식 패브릭의 김우정 대표가 옷 짓는 마음이 딱 그렇다. 식당 앞에 붙은 ‘가정식 백반’이라는 문구가 엄마의 손맛 같은 집밥을 생각나게 하듯 ‘가정식 패브릭’이란 이름에서는 마치 가족을 위해 만든 옷 같다는 느낌이 든다. “집밥은 속이 편하잖아요. 인공 조미료 덜 쓰고 좋은 재료로 만드는 집밥처럼 천연 소재로 오래 두고 입어도 안 질리고 예쁜 옷들을 만듭니다. 옷에 대해 오래 공부했고, 의류 회사에 근무하며 합성 섬유부터 온갖 종류의 소재를 다 써봤더니, 결국 자연에서 나는 소재가 제일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좋은 소재 어려서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던 김 대표는 대학에서 의류학을 전공한 후 아동복과 여성복을 제작하는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10년간 근무했다. 치열하게 산 만큼 꽤 지쳐 있었다. 잠시 쉬어 보자며 떠난 3개월 장기 여행에서 돌아온 후 퇴사를 결심했다. 잊고 지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빠듯한 회사 생활이 지겨울 때면 이따금 손수 옷을 지어 입곤 했다. 회사를 그만두니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2015년, 가정식 패브릭은 이렇게 탄생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쉽게, 너무나 많이 만들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조금은 느리게, 조금 더 정성스럽게 시간을 들여 옷을 짓고 싶었어요. 의류 회사에서는 정상 판매율이나 재고 관리에 신경 써야 했고 그런 비용이 옷 가격에 포함됩니다. 좀 더 값싼 재료로 더 많이 만들어 큰 수익을 거두는 게 목표죠. 저는 천천히 다가가 오래 머무르고, 적은 수의 사람들일지라도 깊이 있게 교감하고 싶었어요. 어떤 사람이 얼마만큼 정성을 담아 만들었는지를 상상하며 옷을 고르면, 그 태도가 그 옷 입을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믿거든요.” 김 대표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옷 만드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공예품을 만들 듯 가정식 패브릭을 꾸려왔다. 그래서 소재에 들이는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음식의 재료가 중요하듯 옷도 소재가 핵심이다. 그녀는 리넨과 코튼을 특히 좋아한다. 봄·여름 옷감으로 리넨을 추천하는 그녀는 일 년의 절반 이상 리넨 원피스를 입고 지낸다. “입으면 입을수록 몸에 맞춰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느슨함의 멋”을 만드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큰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좋은 소재를 구하기 위해 전 세계를 누비며 출장비를 지불한다. 얼마 전 서울 정동에 있는 신아기념관에 마련한 가정식 패브릭의 쇼룸 전경. 김우정 씨는 옷이 체온뿐 아니라 마음의 온도까지 높여 준다고 생각하고, 정성 들여 지은 옷들이 고객들의 일상에 여유를 만들며 오랫동안 함께하기를 바란다. “양털에서 채취하는 울은 오랜 역사를 가진 영국에서 주로 구해옵니다. 리넨도 리투아니아, 벨기에 산(産)이 유명해요. 질 좋고 가격 좋은 캐시미어를 찾아 몽골의 농장들을 뒤지기도 하고, 현지에서 직접 소재를 받아 니트웨어를 만들어요. 실과 원단을 만드는 기술력도 중요해서, 원단 가공 기술을 오랫동안 발전시켜 온 이탈리아를 누비기도 했어요. 오래된 방직기를 지금도 사용하는 일본에서는 손으로 짠 듯한 성근 느낌의 소재를 구할 수 있죠. 인도에서는 여전히 사람이 직접 베틀로 실을 짭니다. 그렇게 만든 카디(khadi) 소재로 올봄 몇 벌의 옷을 만들었는데 얼마나 부드러운지 몰라요. 인도의 목화 중에는 척박한 환경에서 굳이 물을 많이 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오가닉 코튼이 있는데, 조금 거친 듯한 그 질감이 매력적인 옷을 만듭니다. 환경 문제와 지속가능성까지 생각하니 더 좋잖아요.” 회사원으로 출장을 다닐 때는 유행을 파악하고 효율성만 따졌다. 얼른 만들어 빨리 팔고 금방 잊혀도 상관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혼자 만들어서 느리고, 어렵게 구한 좋은 재료라 적게 만들 수밖에 없다. “좋은 소재와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이 만나면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이 만들어진다”고 자신하는 그녀는 “조금 모자란 듯 만들어서 남기지 않고 다 파는” 자신의 경영 철학에 더없이 만족한다. 쇼룸 선반 위에 공예 작품들이 놓여 있다. 김우정 씨는 유리, 도자, 금속, 가죽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공예가들과 협업하여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연다. 그들 중 상당수가 서촌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다. 서촌살이 손님은 대부분 오래된 단골이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사람들이 많다. 엄마가 입던 옷을 딸이 물려받아 엄마와 딸 모두가 고객이 된 경우도 잦다. 김 대표는 “유행을 타지 않아 서로 다른 세대가 모두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기쁨”이라 말한다. 오래 운영해 온 블로그와 홈페이지에서 옷을 보고 택배 주문하는 이들이 많지만, 직접 와서 옷을 느껴보고 싶어 하는 손님들이 늘어나 얼마 전 정동(貞洞)에 쇼룸을 열었다. 알음알음 이름을 알려온 가정식 패브릭은 “서촌스럽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서촌스러운 옷은 대체 뭘까? “자연스러운 옷이요. 입고 동네를 거닐 수도 있고, 그 옷차림으로 미술관도 갈 수 있는 옷인 것 같아요. 화려하지 않지만, 결코 남루하지도 않죠. 나를 감싸는 가장 가까운 사물이 옷이니까 정서적으로 따스한 느낌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편안하고 단정하면서도 따스한 온기를 가진 옷을 서촌스럽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누구보다도 서촌을 잘 알지만, 그녀는 서촌 토박이는 아니다. 경상남도 마산(馬山)이 고향인 그녀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살기 시작했다. 용산구에서 시작해 종로구까지 서울 지역 10여 개 구(區)에서 살아봤다. 서촌에는 5년 전쯤 왔다. 서울 곳곳에서 다 살아 본 뜨내기가 “살아보니까 여기 서촌이 좋더라”면서 눌러앉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서울살이 18번째 집이요, 결혼 후 세 번째 집이다. 대로변 상가주택의 3층과 4층을 쓰는 복층집이다. 문 열자마자 보이는 큰 창 너머 인왕산 풍경과 사방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반해 단번에 이 집을 선택했다. “여기 서촌에는 오래된 옛날과 최신의 오늘이 뒤섞여 있어요. 조금만 나가면 도심의 높은 빌딩들이 보이지만, 동네 안쪽에는 어릴 적 뛰놀던 고향처럼 정감 있는 골목들이 빼곡하죠. 골목 안쪽에는 한옥과 현대식 주택들이 공존합니다. 볕 좋은 길가에서 고추 말리는 할머니와 유행을 좇는 힙한 젊은이들이 함께 머무는 곳이 바로 서촌이에요. 명동이나 강남 같은 상업 지역과 다르게 사람 사는 느낌이 있다는 게 서촌의 매력이죠. ” 인왕산이 보이는 옥상에는 가드닝을 좋아하는 남편이 정성 들여 가꾸고 있는 갖가지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김우정 씨는 해가 저물 무렵 이곳에서 서촌의 노을을 만끽하곤 한다. 자연과 함께하는 일상 시간의 흔적과 사람 냄새, 오래됨과 느림의 미덕을 간직한 곳. 낡음과 늙음이 흠이 되지 않는 동네가 바로 서촌이다. 자연이 가까이 있기에 얻을 수 있는 회복력도 큰 선물이다. “높은 건물 없이 나지막한 동네라 저 너머 인왕산까지 보이죠. 서촌이 사대문 안 도심이지만, 여기서 조금만 가면 수성동 계곡이 있고 서울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도 있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등바등 힘들게 일하던 도시인의 삶을 순식간에 한 발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친 마음이 회복되고 충전되는 느낌이 들죠. 그래서 서촌을 좋아해요.” 동네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거실의 널따란 창문 앞 은행나무로 까치가 날아들었다. “올봄 저 나무에 집을 지은 까치들이에요. 둘이 합심해서 끊임없이 잔가지를 물어다 나르는데, 대체 어디서 구해왔을까요? 둥지를 짓다 떨어뜨리기도 해서 이 나무 아래에만 잔가지가 소복했어요.” 김우정 부부가 집을 고치고 꾸미는 과정도 새들과 다를 바 없었다. 광고·마케팅 전문가로 잘나가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 인생을 준비 중인 남편 정영민(鄭詠珉) 씨가 구석구석을 손봤다. 벽을 페인트칠 했고, 문과 붙박이장의 색을 고르고 바꿨다. 조명, 문고리, 손잡이를 교체하는 데는 그녀가 유럽 출장 때마다 사서 싸들고 온 수집품들이 요긴하게 쓰였다. 카펫을 깔고 빈티지숍에서 함께 고른 가구들을 배치했다. 작은 옥상 정원에는 서리 내릴 때까지 꽃을 피우는 아네모네, 잎을 만지면 향이 올라오는 애플민트, 키 큰 수크령을 비롯해 은쑥과 야생 안개꽃 같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이사한 후 일 년 가까이, 느리더라도 하나하나 직접 고치고 키워낸 집 가꾸기의 과정은 그녀가 옷을 만드는 모습과 똑 닮았다. 살림집 2층 다락방 풍경. 남편 정영민(鄭詠珉) 씨가 벽면을 직접 페인팅하고 가구도 만들었다. 구석구석에는 부부가 오랫동안 수집해 온 빈티지 소품들을 놓아 장식했다. 부부는 이곳을 이웃들과 함께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한다. 그녀는 거실 창문 앞에 오수(Sue Oh) 작가의 < 인왕산의 돌들 >이란 작은 그림을 놓았다. 버터옐로우 컬러로 칠한 따뜻한 느낌의 거실 벽에는 고지영(KO Jiyoung) 작가의 그림을 걸었다. 그 아래 수납장에 놓인 인형은 손뜨개 작가 강보송(Bosong Kang)의 작품이다. 이들은 모두 비슷한 취향으로 알게 된 서촌의 예술가들이다. “예전부터 흠모해 온 유리 공예가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서촌에 사시더라고요. 혼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꾸리는 사람들이 서촌에 많이 삽니다. 취향이 비슷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내가 만든 옷과도 잘 어울려서 쇼룸 한쪽에서 전시도 열곤 해요. 우쿨렐레 연주와 목공일을 좋아하는 남편이 꾸민 4층 다락방에서는 북토크나 소규모 문화 모임도 열어요. 마치 음식을 나눠 먹듯 동네 지인들과 문화와 경험을 나누며 삽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서로를 보듬고, 때로는 자연을 통해 위로받는 일상. 서촌에서 살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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