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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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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SUMMER 626

물결의 정점에 선 여성 감독들 1세기가 조금 넘는 한국 영화의 역사에서 제작의 주체로나 소재로서 여성은 대부분 주변인에 불과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여성 감독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이들의 앞선 노력으로 더 이상 남성의 눈을 빌리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다. 임순례(Yim Soon-rye 林順禮), 변영주(Byun Young-joo 邊永姝), 정재은(Jeong Jae-eun 鄭在恩), 김초희(Kim Cho-hee 金初喜), 김보라(Kim Bo-ra [金宝拉]). 이들은 한국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임순례: 접점을 찾기 위한 노력 한국 여성 감독 중 가장 오랜 기간 꾸준히 활동했으며,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든 사람. 그리고 여성 영화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언제나 앞장서 온 사람. 임순례는 그 자체로 한국 영화 역사의 일면을 상징한다. ⟨리틀 포레스트(Little Forest)⟩ 촬영 현장의 임순례(왼쪽 아래) 감독과 제작진. 이 영화는 임 감독의 여덟 번째 극영화로,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주인공이 시골 고향집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1994년 단편영화 ⟨우중산책(Promenade in the Rain)⟩으로 데뷔한 임순례는 한국 영화사의 여섯 번째 여성 감독이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MEGABOXJOONGANG, INC, PLUSM)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Forever the Moment)⟩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덴마크 팀과 명승부를 펼쳤던 여자핸드볼 국가 대표팀 선수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누적 관객수 400만 명을 기록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이 영화는 대중에게 ‘임순례’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리틀빅픽처스(Little Big Pictures) 요즘 감독은 신작 ⟨교섭(The Point Men)⟩의 막바지 편집 작업에 분주하다. 중동에서 납치된 한국인들을 구하려는 외교관과 특수 요원의 이야기로, 기독교 선교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난 한국 교인들의 실화를 모티프로 삼았다.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영화의 주요 장면들을 지난해 요르단에서 촬영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영화가 가진 행운을 해외 촬영에 다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 마쳤다고 한다. 이 영화는 남성 스타 배우들이 전면에 나선 범죄 액션 장르다. 그래서 감독은 그간 자신이 내놓은 작품들에 비해 여성주의 시각을 발휘할 기회가 부족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는 “어떤 작품을 만들든 인물들을 그리는 데 있어 기존 시각을 답습하는 데 그치는 걸 경계하는 편이고, ⟨교섭⟩ 역시 이러한 태도로 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작품을 포함해 그의 필모그래피는 다양한 영화들로 채워져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의 벽에 부딪치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 데뷔작 ⟨세 친구(Three Friends)⟩(1996),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는 밴드 뮤지션들의 굴곡진 인생을 들여다본 ⟨와이키키 브라더스(Waikiki Brothers)⟩(2001), 국가 대표 여자 핸드볼 선수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Forever the Moment)⟩(2008), 이른바 ‘줄기세포 스캔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극화한 ⟨제보자(The Whistleblower)>(2014), 고향으로 돌아가 소박한 시골살이를 시작한 20대 청춘의 이야기를 싱그럽게 담은 ⟨리틀 포레스트(Little Forest)⟩(2018) 등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는 선뜻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색채가 다양하다. 이 작품들 사이사이에 참여한 인권 영화 프로젝트도 여럿이다. 1994년 서울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우중산책(Promenade in the Rain)⟩ 이후 그의 영화 세계는 끊임없이 깊고 또 넓어졌다. 이는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와 관객 사이의 접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이다. 그는 어떤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성을 놓치고 갈 순 없다고 생각한다. “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 두 편을 합쳐도 개봉 당시 누적 관객수가 15만 명이 채 안 됐어요. 그래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상업영화의 감각을 발휘해 보려고 했죠. 이후에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견지하면서 대중성을 갖춘 작품들을 선택해 왔어요. 최소한 제작비는 회수해야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지금도 여전히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작품이다. 비인기 종목 스포츠를 소재로 삼은 데다가 아이 엄마와 이혼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탓에 당시로서는 여러 핸디캡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4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감독은 “기획의 승리”라며 제작자인 명필름 심재명(Shim Jae-myung [Jamie Shim] 沈載明) 대표에게 공을 돌렸다. 그와 심 대표는 각각 여성 감독, 여성 제작자 1세대다. 두 사람은 (사)여성영화인모임을 설립한 원년 멤버들로, 여성 영화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역사를 기록해 오는 데 앞장서 왔다. “1999년도 부산국제영화제 때였어요. 심재명 대표, 변영주 감독 등 여성 영화인 몇 명이 모여 모임을 구상했어요. 여성들이 연합해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영화계에 진출할 후배들에게 기회의 문을 넓혀 주기 위해 조직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나눴죠. 이듬해 4월에 정식으로 모임이 첫발을 떼었습니다.” ‘여성영화인모임’은 출범 이후 여성 영화인 사전을 엮고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Keeping the Vision Alive)(2001)를 제작했으며, 매년 연말 열리는 여성영화인 축제를 기획해 진행했다.과거 여성 영화인의 당면 과제는 영화계 내 생존 그 자체였다. 누구보다 훌륭히 ‘생존’해 있으며, 지금도 활발히 활동 중인 그가 바라보는 영화계의 모습은 어떨까? “지금 한창 주목받는 젊은 여성 감독들의 감수성과 그들이 만드는 이야기를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어요. 더 큰 기회로 빠르게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최근 1~2년 사이 여성 영화의 결이 훨씬 다양하고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해요.”또한 그는 “페미니즘 이슈를 담은 영화가 개봉하면 남성 관객들이 일부러 낮은 별점을 주는 것”처럼 대립적인 분위기가 여전하지만, “OTT 시장이 커지면서 여성 감독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젠더를 떠나 인물이 하나의 인격체로서 공포와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일상을 영위하는 영화를 보고 싶고, 또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꿈꾸는 사회가 그런 모습이기 때문이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견지하면서 대중성을 갖춘 작품들을 선택해 왔어요. 최소한 제작비는 회수해야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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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SUMMER 173

여성의 관점으로 세상을 읽다 최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사회적 이슈를 여성의 관점으로 바라본 영화들이 늘고 있다. 이런 영화들이 관객들의 공감과 지지를 통해 힘을 얻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확산시킨다. 이지원(Lee Ji-won 李智原) 감독의 ⟨미쓰백(Miss Baek)⟩은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거부한 채 살아가던 주인공이 가정 학대에 노출된 여자아이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투자 유치에 거듭 실패하다가 가까스로 제작된 이 영화는 여성 관객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에 힘입어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영화사 배(BAE PICTURES), CJ ENM 2018년은 한국 페미니즘 역사에 중요한 분기점이 된 해였다. 그해 초 한 여성 검사가 법조계 고위 인사에게 당한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이후 한국에서도‘미투(Me Too)’ 운동이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오랜 시간 억눌려 왔던 고통과 분노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드러나지 않은 채 지나칠 뻔했던 가해자들의 면모가 속속 공개됐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여성이 겪는 성폭력과 성차별 문제에 있어 갈 길이 멀지만, 돌부리에 걸려 있던 역사의 수레바퀴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앞을 향해 굴러간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 영화에서 여성 서사, 특히 사회적 이슈를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실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이 남성성을 바탕으로 한 세계의 운영 방식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이었는지를 밝히려는 움직임이라면, 사회적 여성 서사의 잇따른 시도는 그간 미디어가 여성성을 바탕으로 사회를 경험하고 체감하도록 하는 일에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증명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미투’의 의미 1인 가구 여성의 주거와 소득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 ⟨소공녀(Microhabitat)⟩(전고운 Jeon Go-woon 田高賱 감독), 1인 가구 여성이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공포를 담은 ⟨도어락(Door Lock)⟩(이권 Lee Kwon 李权 감독),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법정 투쟁기 ⟨허스토리(Herstory)⟩(민규동 Min Kyu-dong 閔奎東 감독),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유무형의 폭력에 맞서 연대하는 작품 ⟨미쓰백(Miss Baek)>(이지원 Lee Ji-won 李智原 감독), 10대 여성의 시선으로 이 사회의 어른이란 어떤 존재인지 묻는 ⟨영주(Youngju)⟩(차성덕 Cha Sung-duk 車成德 감독) – 모두 사회적 여성 서사로 분류할 수 있는 2018년 개봉작들이다. 이후 한국 영화에서 여성 서사는 하나의 뚜렷한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 작품이 개봉 몇 해 전부터 기획되어 세상에 나온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회적 인식이 전반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에도 가부장적 사회 시스템과 그에 따른 폭력적 환경은 그대로인 현실에 대한 자각이 2010년대 후반부에 이르러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결과로 볼 수도 있겠다. 단 두 개의 단어, ‘me’와 ‘too’의 조합은 “나 또한 피해를 당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 채 가까스로 지내왔으며 다른 피해자와 함께 이 사실을 밝힘으로써 연대의 힘으로 생존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비단 성폭력 문제를 다루지 않았더라도, 최근 2~3년 사이 한국에서 쏟아지고 있는 사회적 여성 서사 작품들이 공유하는 인식 또한 여기에 있다. 월세를 낼 돈이 없어 집을 포기하고 떠돌아다니지만, 좋아하는 담배와 위스키만은 버릴 수 없는 전고운(Jeon Go-woon 全高云) 감독 작품 ⟨소공녀(Microhabitat)⟩의 주인공. 20~30대의 가치관이 투영된 이 캐릭터는 젊은 층의 관객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광화문시네마(Gwanghwamun Cinema) 연대와 공감 ⟨미쓰백⟩은 여성 관객들의 연대 의식이 팬덤으로 승화해 긍정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대표적 사례다. 개봉 당시 스스로를 ‘쓰백러’라 이름 붙인 ⟨미쓰백⟩의 팬들은 감독에게 편지 보내기를 비롯해 다양한 응원 방식을 고안했다. 이들의 공통 목표는 이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기도록 실질적인 힘을 보태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여러 차례 관람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화를 보러 가기 어려운 상영 시간대의 티켓을 구입해 마음을 전하는 이른바 ‘영혼 보내기’에 동참하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필자가 만난 한 20대 여성 관객은 이 영화를 5번째 보고 나와 “이 작품이 많은 관객들과 만나지 못한 채 묻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폭력 피해를 당한 등장인물들이 자신을 연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멋있었다”고 말하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이런 팬덤에 힘입어 ⟨미쓰백⟩은 손익분기점인 누적 관객수 70만 명을 넘겼다. 폭력 피해를 다룬 작품에 열렬한 지지 여론이 형성된 것은 관객들이 앞서 언급한 미투의 의미, 즉 ‘나 또한’이라는 마음이 한데 모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 여자아이가 겪는 폭력 피해를 외면하지 않고 그 곁을 지킨다. 어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도 이 사회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영화가 상기시킨다. 이지원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두 인물이 서로를 구원해 주고 연대하면서 갇힌 세상으로부터 뛰쳐나오는 내용에 관객들이 깊이 공감해 주셨고, 힘 있는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었는지에 대해 절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것이 가슴에 맺힌 응어리든 변화를 이끄는 에너지든 폭력적인 사회 환경 속에서 응축돼 있던 어떤 것이 분출된 현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한편 ⟨소공녀⟩의 주인공은 한국의 20대가 경험하고 있는 주거난과 취업 문제를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자신의 취향만큼은 굳건히 지켜 나가는 인물이다. 일상에 위안을 주는 위스키와 담배를 즐기기 위해 월세방을 포기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를 통해 영화는 생계가 어려운 20대 여성이 독립된 인간으로 자존감을 유지하는 하나의 유형을 제시하면서 공감대를 만들어 간다. 이 영화의 인물들 역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를 구하면서도, 각자도생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주변 사람들과의 우정,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 작품 분위기는 ⟨미쓰백⟩과 사뭇 다르지만,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는 이 같은 공통점이 있다. 최근 한국에서 20대 여성의 자살이 다른 연령대나 남성에 비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우울증 치료 건수도 급증했다는 통계가 보도된 점을 보더라도 이 영화의 사회적 발언이 갖는 무게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문제 제기 2019년 사회적 여성 서사의 대표작으로는 단연 ⟨82년생 김지영(Kim Ji-young: Born 1982)⟩(김도영 Kim Do-young 金度英 감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016년에 출간된 동명 원작 소설은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논란과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30대 여성인 주인공이 일상적으로 겪는 차별과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를 다룬 이 작품을 두고, 일부 남성들이 “지나친 과장”이라며 반감을 드러낸 반면 다수의 여성들은 “현실에 비하면 과장은커녕 축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장”이라고 말하는 쪽은 작품에서 다루는 이슈들을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소수 가해자의 잘못으로 문제를 진단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에 “축소”라고 생각하는 쪽은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적인 문제로 사태를 대한다. 과연 어느 쪽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며, 한 단계 진보한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지 질문을 던진 것이 원작 소설과 영화가 해낸 일이다. 영화는 원작에 비해 이 문제들을 완곡하게 제시함으로써 다수의 남성 관객들로부터도 호평받으며 문제 인식의 저변을 넓히는 역할에 충실했다. 2020년에는 불법 체류 노동자 수옥이 뇌출혈로 거동하지 못하는 할머니를 간병하면서 불거지는 이야기를 그린 ⟨욕창(A Bedsore)⟩(심혜정 Shim Hye-jung)이 여성 감독에 의한 사회적 서사의 맥을 이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코로나19로 인해 돌봄 노동을 비롯한 사회 필수 노동에 관심이 높아진 시기였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수옥이 최소한의 급여만을 받고 그 집 할아버지의 식사부터 청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사 노동까지 도맡는다는 것이다. 왜 어떤 남성들은 자신의 끼니조차 스스로 챙기지 못하는가? 왜 돌봄 노동은 여성만의 몫이어야 하는가? 그 몫에 대한 대가는 적절히 지불되고 있는가? 실제로 한국에선 노년 남성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의 식사를 해결할 줄 모른다. 코로나19 시국에서 폭증한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 대부분은 여성의 몫으로 돌아갔다. 방역에 골몰한 정부의 대책 마련 과정에서 여성의 돌봄 노동과 사회적 약자의 필수 노동에 대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다. 또한 사회에 재난이 닥쳤을 때 언제나 먼저 피해를 보게 마련인 약자층 가운데서도 이주 노동자들이 겪는 말 못할 차별은 팬데믹 속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코로나19가 오기 전인 2019년 제작된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지난해 가장 시의적절한 독립영화가 되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하다 못해 둔감해진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적시에 던진 것이다. 평소 여성의 시선으로 사회적 사안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 3. 김도영(Kim Do-young 金度英) 감독의 ⟨82년생 김지영(Kim Ji-young: Born 1982)⟩은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와 살림에 전념해야 하는 주인공이 가정과 사회에서 겪는 차별을 다루어 한국 사회에 뜨거운 젠더 논쟁을 일으켰다.ⓒ 롯데엔터테인먼트(Lotte Entertainment Co., Ltd) 심혜정(Shim Hye-jung) 감독의 ⟨욕창(A Bedsore)⟩은 이주 여성의 돌봄 노동을 통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파헤치며, 당연하게 여겨온 여성의 노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필름다빈(FILM DABIN) 남성 감독들의 여성 서사 여성 서사가 하나의 굵직한 물결을 이루면서 이제 감독의 성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감독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여부를 떠나 여성의 서사를 담은 시나리오에 투자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허스토리 민규동(Min Kyu-dong 閔奎東) 감독의 2018년 개봉작 ⟨허스토리(Herstory)⟩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일본 재판부와 맞서 싸웠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화가 바탕이다.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보상 판결을 받아낸 의미 있는 사건으로, 제목 ‘Herstory’에는 여성들이 스스로 쟁취한 승리에 대한 자부심을 담아내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담겨 있다. 특히 이 영화는 이른바 ‘허스토리언’으로 불리는 여성 팬덤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자체적으로 상영관을 마련하며 영화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 NEW 세자매 올해 초 개봉한 이승원(Lee Seung-won 李承元) 감독의 ⟨세자매(Three Sisters)⟩는 올해 한국 영화의 새로운 발견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만한 수작이다. 세 주인공들이 트라우마를 안은 채 각자의 어려운 처지를 감내하고 버텨 나가는 가운데 이들의 자매애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무엇보다 김선영(Kim Sun-young 金善映), 문소리(Moon So-ri 文素利), 장윤주(Jang Yoon-ju 張允珠) 세 배우의 탁월한 연기에 입이 벌어질 정도다. 국내 최고의 영화상 중 하나인 2021년 백상예술대상에서 김선영은 여우조연상을 받았으며, 문소리는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 영화사 업(Studio Up) 야구소녀 지난해 개봉한 최윤태(Choi Yun-tae 崔允泰) 감독의 ⟨야구소녀(Baseball Girl)⟩는 프로야구 리그에 진출하려는 여성 선수를 주인공으로 ‘경계’의 자리에서 젠더 인식에 관한 의제를 던진 문제작이다. 고교 야구팀의 유일한 여성 선수인 주인공은 프로팀에 입단해 야구를 계속하는 게 꿈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기회를 얻지 못한다. 가족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야구를 포기하라고 종용하지만, 주인공은 “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아요? 나도 모르는데…”라며 일침을 가한다. 윤희에게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소개된 임대형(Lim Dae-hyung 任大炯) 감독의 ⟨윤희에게(Moonlit Winter)⟩(2019)는 이전에 한 번도 조명되지 않았던 중년 여성의 퀴어 서사를 담아낸 작품이다. 딸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자신의 첫사랑과 더불어 그동안 외면하고 살아왔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섬세하고 절제된 연출을 통해 전하는 따뜻한 메시지에 찬사가 쏟아지면서 다수의 각본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 제22회 타이베이 영화제 Asian Prism 부문 등 해외 영화제에도 초청되었다. ⓒ 리틀빅픽처스(LITTLEBIG PICTURES), 영화사 달리기(FILM RUN) 도어락 이권(Lee Kwon 李权) 감독의 ⟨도어락(Door Lock)⟩은 1인 가구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늘어나는 현실을 소재로 삼은 스릴러이다. 오피스텔에 혼자 살고 있는 주인공이 어느 날 퇴근 후 자신의 집 도어락 덮개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단순한 영화적 상상력이 아니라 실제로 누구나 느껴 봤을 법한 공포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 관객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제37회 브뤼셀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Thriller Award’를 수상했다.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MEGABOXJOONGANG, INC, PLU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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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SUMMER 149

주목받지 못했던 캐릭터들의 부상 대개의 영화들은 상업적 성공을 보장받기 위해 안전한 길을 택한다. 그중 자주 선택되는 방법은 관객의 주목을 끌 수 있는 매력적인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최근 여성 감독들은 이제까지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유형의 여성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임선애(Lim Sun-ae 林善爱) 감독의 2019년 장편 데뷔작 <69세(An Old Lady)>는 이전에는 다뤄진 적 없는 노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문제를 다룬 영화다. 국내외 다수의 영화제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기린제작사(KIRIN PRODUCTIONS) 1970년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최인호(崔仁浩)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1974)과 조선작(趙善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1975)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자, 이후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다룬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들이 한동안 쏟아졌다. 가난한 시골 여성들이 도시로 모여들어 몸과 웃음을 팔아 살아가는 이야기가 하나의 장르로 정착한 것이다. 현실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영화들 가운데 여성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 이들 중 작품성이 높게 평가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을 그렸다는 점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단 호스티스 장르뿐 아니라 대개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남성의 관점으로 표현되었다. 변화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아주 더디게 찾아왔다.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여성 감독이 만든 작품들에는 기존에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유형의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해 영화를 무게감 있게 이끌며 주목을 받고 있다. 여자아이들의 세계 2016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은 다수의 영화제에서 윤가은(Yoon Ga-eun 尹佳恩) 감독에게 신인 감독상을 안겨 줬다. 수준 높은 작품성과는 별개로 이 영화는 내용과 소재 면에서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이전까지 한국 영화에서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캐릭터는 애니메이션에나 어울린다는 고정관념과 더불어 여자아이의 이야기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지배적이었다. 주인공 선(Sun 善)의 아버지는 “애들이 무슨 고민이 있어?”라고 말한다. 그 말마따나 아이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괴로움이 있고 지옥 같은 일상이 있다는 사실을 어른들은 관성적으로 눈감아 왔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선은 반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지만 따돌림을 당한다. 친구가 없던 선은 어느 날 전학 온 지아(Jia 智雅)에게서 희망의 빛을 본다. 여름방학 동안 지아와 친하게 지낸 선은 새로운 학교 생활을 꿈꾸지만, 2학기가 되면서 선의 바람은 산산이 부서진다. 지아가 선의 유일한 친구가 되는 대신 선을 따돌리는 무리와 어울리는 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집단 따돌림 현상을 뉴스 매체에서 흔히 그러하듯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에 가두지 않았다는 데 있다. 또한 이를 폭력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남자아이들의 세계를 다루는 영화에서는 대개 집단 폭행 장면이 빠지지 않는다. 은 물리적 폭력을 묘사하지 않았음에도 아이들이 느끼는 고통을 생생히 전달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어느 사회, 어느 집단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 초등학교에서는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윤가은(Yoon Ga-eun 尹佳恩) 감독의 2016년 개봉작 은 어린아이들의 시선으로 그들 사이의 관계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2019년 개봉된 에서도 감독은 섬세하면서도 사려 깊은 시선으로 아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그려냈다.ⓒ CJ ENM, ㈜아토(ATO Co., Ltd.) 여성 감독들이 보여 주는 다양한 표현 방식과 관심 받지 못했던 인물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여성 서사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한가람(Han Ka-ram 韩佳嵐) 감독의 2019년 작품 는 무미건조한 현실에 지쳐 버린 주인공이 달리기를 통해 삶의 변화를 모색해 가는 과정을 담았다. ⓒ 영화진흥위원회(KOREAN FILM COUNCIL) 노인 여성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된 임선애(Lim Sun-ae 林善爱) 감독의 장편 데뷔작 <69세(An Old Lady)>는 한국 영화에서 한 번도 다루어지지 않았던 노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을 다룬다. 이 작품은 하트랜드국제영화제(Heartland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아미앵국제영화제(Amiens International Film Festival) 등 다수의 해외영화제에도 초청되었는데, 주최측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노인 성폭행 문제를 섬세하면서도 힘있게 그려낸 점을 초청 이유로 밝혔다. 주인공 효정(Hyojeong 孝貞)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69세 여성이 20대 남자에게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남자는 합의된 관계였다고 주장하고 구속 영장은 거듭 기각된다. 이러한 현실에 주인공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고소인이 젊은 여자였으면 가해자가 구속됐을까요?” 그동안 사회적 약자로 생각했던 부류에 노년의 여성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영화를 통해 임 감독은 관객들이 갖고 있는 성폭행과 여성에 대한 편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한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잘 입는다’는 담당 형사의 칭찬에 효정은 옷을 잘 못 입으면 사람들이 무시하고 치근덕댄다면서, “이 정도 입고 다니면 제가 안전해 보입니까?”라고 반문한다. 옷차림 하나에서도 방어 태세를 갖춰야 하는 누군가의 현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영화는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영화는 거의 유일하게 효정의 편에 서 있는 동거인 남성을 등장시키는데, 이 싸움이 남성의 투쟁이 되도록 두지 않는다. 효정은 동거인의 집을 떠나서 혼자 성폭행범의 뒤를 쫓는다. 감독은 남성의 도움을 받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선입견을 뒤집는다. 욕망의 자각 한편 한가람(Han Ka-ram 韩佳嵐) 감독의 장편 데뷔작 (2019)는 젊은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만 보면 새로울 게 없지만, 두 명의 젊은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새롭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감독은 매우 도발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8년째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31살 여성 자영(Ja-young 子英)이 남자친구로부터 버림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무런 의욕도 없고 삶의 목표마저 잃어버린 그의 눈에 어느 날 조깅을 하는 현주(Hyun-joo 玄珠)가 보인다. 아름답고 건강한 현주의 몸을 선망하게 된 주인공은 현주가 몸담고 있는 동호회에 가입해 달리기를 시작한다. 언뜻 보면 여성의 외모에 대한 통속적인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것 같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주인공은 성공과 출세 등 자신에게 주입된 ‘타인의 욕망’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자각하며 회복해 간다. 아빠와 고모, 주인공 남매 등 2대에 걸친 남매들이 겪은 어느 여름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윤단비(Yoon Dan-bi 尹丹菲) 감독의 은 국내외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거머쥐며 2020년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오누필름(ONU FILM) 서사의 확장 윤단비(Yoon Dan-bi 尹丹菲) 감독의 2020년도 장편 데뷔작 은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어 4관왕을 기록했고, 제24회 토론토 릴 아시안국제영화제(Toronto Reel Asi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오슬러 최우수 영화상(Osler Best Feature Film Award), 제38회 토리노국제영화제(Torino Film Festival)에서 국제영화비평가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Film Critics Award)이 선정한 최고 작품상(Best Film)을 받았다. 토론토 릴 아시안국제영화제 심사위원들은 “윤단비 감독이 그려 낸 3대 가족의 섬세하고도 복잡한 관계의 역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은 작은 몸짓들, 고요하지만 사무치는 기쁨의 순간들, 그리고 변화와 슬픔을 통해 가족의 사랑을 말해 준다(The jury was impressed by debut Director Yoon Dan-bi’s depiction of the delicate and complex dynamics of a multi generational family. Their love is told through small gestures and quiet but poignant scenes of joy, change and grief.)”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 영화는 그 외에도 제17회 홍콩 아시아영화제(Hong Kong Asian Film Festival)에서도 주목할 만한 젊은 아시아 감독들에게 수여하는 뉴 탤런트 상(New Talent Award)을 수상하는 등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작품상, 신인 감독상, 심사위원 특별상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영화의 주인공은 10대 소녀 옥주(Okju 玉周)이고, 이야기는 옥주와 남동생이 아버지와 함께 갑자기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시작된다. 옥주는 의지나 분노 혹은 욕망의 주체라기보다 사건의 관찰자에 가깝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아버지,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혼자 외롭게 이층집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 남매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고모, 그리고 어린 남매로 구성된 가족의 이야기는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해 여름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그들에게 특별한 정서적 연대감을 선사한다. 영화는 어린 남매와 성인 남매(아버지와 고모)를 평행한 구도로 묘사함으로써 수십 년 시간의 간극을 하나의 장면처럼 표현한다.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이 사회 통념이나 선입견에 진중하게 문제 제기를 하는 것과 달리 은 소녀의 성장을 응원하며, 관객들이 이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에 정서적으로 몰입하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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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SUMMER 209

장르물을 다시 쓰는 방식 범죄, 스릴러, 액션 같은 장르는 주로 남성 관객들을 겨냥한 영화인 반면 로맨스는 여성을 위한 영화라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이런 선입견을 깨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사건은 여성 팬덤의 부상이었다. Director Hong Eui-jeong (far right) talks with actor Yoo Ah-in and other crew members on location for “Voice of Silence.” The movie earned her best new director at the 2021 Blue Dragon Film Awards. 김성수(Kim Sung-su 金性洙) 감독의 범죄 영화 (2016)와 변성현(Byun Sung-hyun 卞成賢) 감독의 누아르 영화 (2017)은 대중적으로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열렬한 지지자들을 만들어 냈다. 두 영화는 각각 ‘아수리언(Asurian)’과 ‘불한당원(Bulhandang Members)’이라는 팬덤을 형성했고, 팬들은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벌이며 영화를 응원했다. 주목할 점은 이를 주도한 것이 주로 여성 관객들이었다는 것이다. 여성 관객들은 장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통념이 깨지면서 주인공으로 여성이 등장하거나 여성 감독들이 이런 부류의 영화를 제작하는 현상이 이어졌다. 특히 2020년에는 손원평(Sohn Won-pyung 孫元平), 홍의정(Hong Eui-jeong 洪義正), 박지완(Park Ji-wan 朴智媛) 등 여성 신인 감독들이 직접 쓴 시나리오로 데뷔하며 장르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었다. 유아인은 범죄 조직의 하청으로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하다가 납치된 아이를 돌보면서 변화하는 태인(泰仁) 역을 맡았다. 균열과 공포 첫 장편소설 『아몬드』로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손원평 작가의 영화 데뷔작 는 감독의 색다른 이력으로 인해 크랭크인부터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는 남성 주인공의 시선으로 여성을 바라보는데, 특이한 점은 일인칭 시점의 불안정성이다. 영화의 주된 서스펜스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여성이 어린 시절 잃어버린 진짜 동생 유진(有真)인지 동생 행세를 하는 사기꾼인지 분간할 수 없는 데서 온다. 관객이 느끼는 혼란은 이뿐만이 아니다. 오빠 서진(书振)은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데, 영화는 그의 트라우마가 진실인지 조작인지, 과연 그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관객들을 시종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처럼 감독은 분열하는 주인공을 통해 관객이 1인칭 시점에 온전히 이입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이 영화는 가족을 그리는 방식 또한 일반적이지 않다. 유사 가족이 등장하는 기존 영화들이 그 같은 가족의 탄생 과정을 설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 영화는 유사 가족과 진짜 가족의 우열 관계를 통해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가족이라고 주장하는 의문의 인물이 등장하면서 진짜 가족인 주인공과 부모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감독은 주인공의 심리 변화에 중점을 둔 채 평범한 일상에 예기치 못한 균열이 생기면서 야기되는 공포를 그려 냈다. 2018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유은정(Yu Eun-jeong)의 또한 분열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은 이 영화의 주인공 혜정은 유령이 되는데, 영화는 하루씩 시간을 거슬러 가며 그가 왜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지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인간관계의 면모들이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호러 영화에서 유령은 등장인물들에게 가해를 가하는 위험한 존재로 표현되지만, 이 영화에서는 삶에 대한 희망과 타인에 대한 관심을 자각하는 계기로 활용된다. 최근의 장르 영화들은 장르 규칙을 활용하는 동시에 이것을 비트는 방식을 보여 준다. 더는 새로움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포화 상태인 장르물에서 관객의 기대를 교묘하게 배반하는 가운데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는 것이다. 은 표면적으로는 한 소녀의 실종 사건을 추적하는 범죄 영화지만,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삶의 이유를 모색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워너 브러더스(Warner Bros. Ent) 손원평(Sohn Won-pyung 孫元平) 감독의 는 남성이 가족의 중심에 서 있는 전통적인 가부장제를 전복시킨다. 이 영화에서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던 오빠는 25년 전 잃어버렸던 자신의 여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에 의해 가족으로부터 배척당하며 고립된다.ⓒ 에이스메이커 무비웍스(ACEMAKER MOVIEWORKS) 새로운 스타일 올해 청룡영화제가 신인 감독상을 안겨 준 홍의정의 는 남성 캐릭터가 주인공이라는 점은 와 같지만, 급변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인물의 시선을 빠르게 따라간다는 측면에서는 사뭇 다르다. 평단으로부터 “한 번도 보지 못한 스타일의 범죄 영화”라는 평가를 받은 이 작품은 신인 감독의 도전과 야심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살인과 유괴를 소재로 다루면서도 그다지 폭력적인 장면 없이 이야기만으로 관객을 몰입시키며, 범죄 영화가 흔히 사용하는 상투적인 수법을 비껴간다. 유아인(Yoo Ah-in 劉亞仁)이 연기하는 주인공 태인(泰仁)은 창복(昌福)과 함께 범죄 조직의 하청을 받아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한다. 영화는 대부분의 범죄 영화와 달리 조직원들이 무슨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는지, 두 사람이 언제부터 범죄에 가담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을 착실한 직장인처럼 묘사하며, 관객들이 두 캐릭터의 기묘하고 독특한 호흡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이들에게 범죄는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매우 일상적인 일일 뿐이다. 이런 일상은 두 사람이 어느 날 느닷없이 유괴범 신세가 되고, 태인이 유괴된 11살 소녀를 떠맡게 되면서 달라진다. 태인과 유괴된 소녀의 관계 또한 관객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인물이 처한 다소 황당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인물의 매력과 힘을 부각시키는 절묘한 균형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의 포스터. 그 자신이 ‘내언니전지현’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는 감독은 이 게임을 떠나지 못하는 유저들의 이유를 영화에 담았다.ⓒ 호우주의보(Rainydays Pictures) 장르에 대한 질문 박지완의 은 장르적인 재미와 영화적인 의미 사이의 균형을 잡는 측면에 있어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이 영화는 유서를 남기고 절벽에서 투신했다고 여겨지는 한 소녀의 실종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스릴러다. 감독은 이 사건을 맡게 되는 주인공 현수(賢秀)의 불안정한 상태를 먼저 보여 준다. 그는 실종된 소녀의 흔적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살기 위한 안간힘을 느끼며, 형사로서가 아니라 동질감을 느끼는 한 인간으로서 사건에 이입된다. 주인공은 소녀의 사건을 실종으로 처리할지, 자살로 처리할지 오래 망설인다. 그 망설임이 무엇보다 이 영화를 의미 있게 만든다. 미스터리 영화에서는 사건을 추리하며 긴박하게 해결해 가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이 영화는 사건의 해결 대신 인물의 내면에 더 집중한다. 장르적 스펙터클을 절제하면서 감정의 스펙터클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 사려 깊은 스릴러라 할 수 있다. 최근의 장르 영화들은 장르 규칙을 활용하는 동시에 이것을 비트는 방식을 보여 준다. 더는 새로움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포화 상태인 장르물에서 관객의 기대를 교묘하게 배반하는 가운데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는 것이다. 특히 작년에 개봉한 여성 감독들의 장르 영화들은 장르 그 자체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들은 언뜻 장르적 쾌감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장르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던져준다는 측면에서 다른 방식의 재미를 창출한다. 넥슨의 MMORPG ‘일랜시아(Elancia)’의 화면. 일랜시아 유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윤진(Park Yun-jin 朴允珍) 감독. 김소희(Kim So-hui 金昭希)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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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SUMMER 180

글로벌 트렌드와 함께하는 대중문화 콘텐츠 최근 몇 년간 여성 서사는 한국 대중문화의 주류 콘텐츠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전면에 부각되었다. 영화는 물론이고 TV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웹툰에서도 여성의 시각과 목소리가 두드러지고 있다. 1. 올해 미국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Youn Yuh-jung 尹汝貞)의 영화 데뷔작 김기영(Kim Ki-young 金綺泳) 감독의 포스터. 그는 이 영화에서 신인 배우답지 않은 격정적이고 농염한 연기를 펼쳐 주목받았다.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Pioneer Pictures Film) 2. 김기영 감독의 (1960)를 리메이크한 임상수(Im Sang-soo 林常樹) 감독의 (2010). 하녀로 잔뼈가 굵은 눈치 빠른 선임 하녀를 연기한 윤여정은 이 영화로 다수의 국내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다.ⓒ 씨네21 3. (2012)은 전작 에서 가진 자들의 본성을 밑바닥까지 파헤쳤던 임상수 감독이 후속작으로 내놓은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윤여정은 자신의 돈과 권력을 과시하며 젊은 남성의 육체를 탐하는 재벌가 안주인 역할에 도전했다. ⓒ 씨네21 리 아이작 정(Lee Isaac Chung) 감독의 2020년 작 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쿠키를 굽는 대신 화투를 치고, 프로레슬링 중계를 챙겨 보며, 욕도 잘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남편과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순종적인 모습이야말로 여성의 진정한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할머니는 한국인들이 어머니 혹은 할머니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 이미지와 다소 거리가 있다. 배우 윤여정(Youn Yuh-jung 尹汝貞)이 이 배역으로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전형적이지 않다. 그는 동시대 여배우들이 흔히 그러했듯 비련의 여주인공이나 발랄한 청춘 스타가 아닌 ‘악녀’로 대중과 만났다. 그의 영화 데뷔작은 국내에서 사이코 스릴러 장르를 개척한 김기영(1919~1998 金綺泳) 감독의 (1971)로, 자신을 겁탈한 주인집 남자에 대한 집착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고 파국을 맞이하는 가정부 역할을 맡았다. 이 작품으로 그는 국내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에는 같은 감독의 (1972)에도 주연 배우로 출연했는데 의 속편 격인 이 영화 또한 애증과 질투를 그린 스릴러다. MBC TV 드라마 (1971~1972)에서도 표독스러운 주인공 역할을 맡은 그의 초기 배역들은 하나같이 본연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강렬한 캐릭터였다. 결혼 이후 오랜 공백기를 거쳐 1980년대 후반 활동을 재개한 이후 선택한 작품들에서도 그는 대부분 상식과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파격적인 연기를 보여 줬다. 4. 이재용(E J-yong 李在容) 감독의 (2016)에서 윤여정은 생존을 위해 노인 남성들을 상대로 몸을 팔며 살아가는 역할을 연기해 주목을 받았다. ⓒ 영화진흥위원회(KOREAN FILM COUNCIL) 상업 영화 2019년 한국 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영상자료원이 개최한 기획 전시 은 ‘나쁜 여자, 이상한 여자, 죽이는 여자’라는 부제를 달았다. 전시 제목을 통해 드러나듯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욕망이나 의지를 드러내는 일은 나쁘거나 이상한 것으로 평가되었고, 영화 속에서 여성은 남성 감독의 시선에 의해 왜곡된 모습으로 그려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점차 높아지면서 영화계에 여성 감독과 프로듀서가 등장하게 되었고,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 내는 여성 서사와 여성 캐릭터들이 점차 늘어났다. 최근 대중문화 콘텐츠의 주류로 떠오른 여성 서사는 상업영화 속에서도 그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조남주(Cho Nam-ju 趙南柱) 작가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김도영(Kim Do-young 金度英) 감독의 <82년생 김지영(Kim Ji-young: Born 1982)>(2019), 전 세계 여러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거머쥐며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김보라(Kim Bo-ra [金宝拉]) 감독의 (2019) 같은 작품들에 이어 김초희(Kim Cho-hee 金初喜) 감독의 (2020), 윤단비(Yoon Dan-bi 尹丹菲) 감독의 (2020), 홍의정(Hong Eui-jeong 洪義正) 감독의 (2020) 같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와 관객과 평단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런 상업 영화들을 살펴보면 페미니즘을 전면에 드러내는 작품뿐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 기업의 조직적 비리와 싸우는 여직원들, 범죄와 맞서는 여성 히어로 등 주제와 소재 면에서 여성 서사가 풍부해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코미디, 범죄, 퀴어 로맨스 등 장르적으로도 다양하게 확산되고 있다. 1. 는 한 소년의 추락 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여형사를 통해 과연 이 시대의 참다운 어른은 누구인지 질문을 던지는 TV 드라마이다.ⓒ 스튜디오S TV 드라마와 웹툰 주목할 점은 이런 경향이 비단 영화만이 아닌 대중문화 전반에서 뚜렷한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파극에서 가족 드라마, 멜로 드라마를 거쳐 최근 장르물로 옮겨온 드라마 트렌드의 변화는 그 자체로 여성 캐릭터들의 변화 과정을 담고 있다. 신파극이나 가족 드라마 속에서 여성은 주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안에서 이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인물로 그려졌으며, 멜로 드라마에서는 부유한 남성을 만나 신분 상승에 성공하는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가 주로 다뤄졌다. 하지만 드라마의 주력 트렌드로 장르물이 자리를 잡으면서 가족과 결혼에 한정되었던여성 캐릭터들의 다양한 면모가 묘사되고 있다. (2020, SBS TV)의 성공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여성 변호사, (2020, SBS TV)의 권위주의적인 동료 남성 형사들과는 사뭇 다른 강인함으로 수사에 임하는 여형사, (2020, Netflix Original Series)의 젤리 괴물들과 싸우는 주체적인 여전사가 그렇다. 그런가 하면 기존 가족 드라마가 그려 내곤 하던 성차별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드라마도 등장했다. (2020, tvN)은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사회생활과 어떤 갈등 상황을 빚어내는지 탐색한 작품이고, (2020, 카카오TV)는 결혼 후 시집 식구들에게서 느끼게 되는 차별을 통해 한국의 가부장제가 야기하는 불행을 섬세하게 포착해 냈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수신지(Soo Shin Ji) 작가의 인기 웹툰이다. 이처럼 웹툰에서도 서서히 여성 서사가 부상하는 중이다. 최근 가장 대표적인 여성 서사 웹툰으로 (2019~2020, 네이버 웹툰)를 꼽을 수 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당시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단을 새롭게 조명한 이 작품은 성차별과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난다.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대중들의 가치관과 정서를 수용했고, 여성 서사의 봇물도 이 흐름 위에서 탄생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같은 흐름이 세계적인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진화하는 서사 한국은 1970~80년대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하는 ‘가족적이고 국가적인’ 시스템을 통해 압축 성장의 길을 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희생된 많은 가치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1980년대 정치 민주화, 1990년대 경제 민주화로 확장되던 열망이 이제 ‘삶의 민주화’로 발전했다. 이 지점에서 전면에 나타난 것이 바로 성 평등 사회를 요구하는 목소리다.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대중들의 가치관과 정서를 수용했고, 여성 서사의 봇물도 이 흐름 위에서 탄생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같은 흐름이 세계적인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이 2019년 칸 국제영화제 퀴어종려상(Queer Palm)과 각본상을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열린 다수의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던 것처럼 해외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여성 서사가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2. TV 드라마 에서는 부유한 법조계 집안의 엘리트 남성 변호사와 간신히 변호사가 된 후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성 변호사의 치열한 대립이 펼쳐진다.ⓒ 키이스트(KEYEAST) 3. 출산으로 인해 삶의 변환기를 맞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실감 나게 그린 TV 드라마 은 여성 시청자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었다.ⓒ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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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SPRING 674

웹툰 스토리 유니버스 웹툰은 영화•드라마•게임•뮤지컬 등 타 장르에 원작을 공급하고 있으며, 때로는 이러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작업이 주목할 만한 성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넷플릭스를 위시한 글로벌 OTT 플랫폼들의 등장으로 향후 슈퍼 IP(intellectual property)로서 웹툰의 가치가 더욱 빛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웹툰 원작의 매체 전환은 장르가 극히 한정되어서 강풀(Kang Full)의 몇몇 작품이 연극 무대에 오르고, 강도하(Kang Do-ha [Doha])의 (2004~2005)가 뮤지컬로 만들어진 정도였다. 영화, 드라마, 게임, 애니메이션 등 비교적 다양한 장르에서 웹툰이 원천 콘텐츠로서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은 2010년대 이후부터다. 강우석(康祐碩) 감독의 2010년 개봉작 는 윤태호(Yoon Tae-ho 尹胎鎬) 작가의 동명 스릴러 웹툰이 원작이다. 이전까지 웹툰 원작의 영화가 흥행 면에서 저조한 성적을 보였던 것과 달리 이 영화는 누적 관객수 약 335만 명으로 손익 분기점을 넘겼으며, 그해 여러 영화제에서 감독상•남우주연상•촬영상 등 다수의 수상 실적도 거두었다. 이후 웹툰의 영상화 작업은 급물살을 탔다. 특히 14년간 네이버에 연재되었던 조석(Cho Seok 趙奭)의 최장수 웹툰 (2006~2020)는 다양한 장르로 전환된 대표적 사례다. 작가가 자신의 주변 인물을 등장시켜 신변잡기적 에피소드로 시작된 이 웹툰은 2016년 시트콤 형식의 5부작 웹드라마로 제작되어 이후 TV에서도 상영되었다. 2018년에는 출연진을 전원 교체해 새롭게 제작한 20부작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그런가 하면 2016년에는 원작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등장시킨 모바일 게임이 출시되었고, 같은 해 총 26화 분량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 다수의 어린이 채널을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2016년, ‘웹툰 플랫폼의 시대, 웹툰 IP에 주목하라’는 주제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2016 올 웹툰 체험전>에 의하면 2010년대 중반까지 대략 영화 19편, 드라마 36편, 게임 19편, 애니메이션 17편, 연극 65편, 뮤지컬 14편이 웹툰을 원작으로 제작되었다. 윤태호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강우석(康祐碩) 감독의 2010년 작 영화 의 한 장면. 아버지가 생전에 머물렀던 시골 마을을 찾은 주인공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비밀을 파헤쳐내는 이야기를 담았다. ⓒ CJ ENM © CJ ENM ⓒ 윤태호, 슈퍼코믹스 스튜디오(SUPERCOMIX STUDIO Corp.) 마을 이장의 심복이 주인공이 머무르는 집 안에 몰래 침입하려는 장면이다. 배우들의 우수한 연기가 원작과 영화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 한몫한 것으로 평가된다. ⓒ 스튜디오 드래곤(STUDIO DRAGON) ⓒ 윤태호, 슈퍼코믹스 스튜디오(SUPERCOMIX STUDIO Corp.) 서사성이 강한 윤태호의 웹툰은 대다수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다음 웹툰에 연재되었던 은 2014년 20부작 TV 드라마로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과 웹툰은 주인공 장그래와 같은 팀 직원의 모습이다. 기폭제 2019년 1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시즌 1이 전 세계에 소개되면서 원작 웹툰의 매체 전환은 제작 규모와 질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현재 시즌 2까지 방영된 시리즈는 웹툰 제작사 와이랩(YLAB)이 2014년 일본 소학관의 인기 잡지 『빅 코믹 스피리츠』에 발표한 만화 가 원작이다. 드라마 작가 김은희(金銀姬)가 처음으로 만화 스토리를 맡고 만화가 양경일(梁慶一)이 작화를 담당해 호흡을 맞춘 이 작품은 원작의 고유성과 각색의 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 방영되기 약 일주일 전 웹툰 형태로 가공되어 네이버에서 연재를 시작했다. 은 원작 만화와 드라마 극본을 같은 작가가 집필함으로써 기본적인 플롯과 세계관이 드라마에 더욱 치밀하게 반영되었다. 총 190개국에 공개된 시리즈는 미국 영화•드라마 정보 사이트 IMDB 인기 순위 9위, 『뉴욕타임스』 2년 연속 ‘최고 인터내셔널 TV쇼 Top 10’에 올랐고 현재 시즌 3을 제작 중이다. 이 시리즈가 거둔 성과는 웹툰 원작의 매체 전환 작품 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유통 네트워크도 국내 방송과 OTT 플랫폼 중심에서 한 발 나아가 넷플릭스와 중국 텐센트 등 글로벌 플랫폼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만화 를 원작으로 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은 원작의 세계관이 드라마에도 잘 반영된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반역자로 몰린 왕세자가 좀비와 맞서 싸우는 한편 왕권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Netflix original series) 2019년 1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즌 1이 전 세계에 소개되면서 원작 웹툰의 매체 전환은 제작 규모와 질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하나의 세계관, 다양한 이야기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 장르들을 넘나들며 동일한 주제 아래에서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전개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보통 원작의 성패에 따라 추이를 지켜보며 시차를 두고 대응하는 방식과 아예 기획 단계에서부터 종합적인 전략 아래 여러 장르의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이 혼용되고 있다. 윤태호의 은 전자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웹툰이 다음(Daum)에 연재(2012~2013년)되며 선풍적 인기를 끌게 되자 이 원작을 기반으로 2013년 웹영화 이 제작되었다. 이 모바일 영화에서는 원작에서는 소개되지 않았던 주요 등장 인물들의 과거사가 다뤄졌다. 이후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임시완(任时完)을 다시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20부작 TV 드라마 이 2014년 tvN을 통해 방영되었고, 드라마 방영 도중 윤태호 작가는 웹툰 특별판 5부작을 만들어 공개했다. 번외편 웹툰에서는 극중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오 과장의 과거 이야기가 펼쳐졌다. 이후 웹툰 의 속편인 가 다음과 카카오페이지(KakaoPage)에 연재(2015~2018)되었는데, 전편이 대기업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계약직 사원의 고군분투를 다루었다면, 속편에서는 대기업에 맞서 분투하는 중소기업의 이야기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웹툰과 웹영화, 드라마는 별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각 작품들은 모두 ‘미생’이라는 커다란 세계관을 이루는 일부이다. 광진(Kwang jin) 작가의 웹툰 (2016~2018)는 국제적인 맥락에서 웹툰의 매체 전환을 이해해 볼 수 있는 사례이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 연재가 한창이던 2017년, 카카오(Kakao Corp.)가 설립한 자회사 카카오재팬이 일본에서 운영하는 웹툰 애플리케이션 픽코마를 통해 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었다. 이태원에서 롯폰기로 배경을 바꾸며 현지화 노력이 더해진 이 작품이 큰 인기를 끌게 된 시점은 그로부터 3년 후였다. 2020년 초, 국내 방송사 JTBC가 웹툰을 드라마로 제작해 방영하고, 이 드라마가 넷플릭스를 통해 일본에 유통되며 인기를 얻자 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이다. 드라마 는 일본 넷플릭스 종합 Top 2에 올랐고 웹툰 의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454%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매체 전환의 매개 역할 웹툰 (2016~2018)는 동명의 웹소설과 드라마 사이에 스토리텔링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대중성을 확보한 사례이다. 이 작품은 2013년 발표된 정경윤(鄭慶允) 작가의 동명 웹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원작의 주제 의식을 잘 살려 매체 전환에 성공했다. 웹툰이 큰 인기를 끌자 2018년 tvN이 16부작 드라마로 만들어 또다시 화제를 모았고, 원작 소설이 발표된 지 5년 만에 단행본 출판으로 이어졌다. 한편 조성희(趙圣熙) 감독의 영화 는 우주 쓰레기 청소선 승리호의 선원들이 대량 살상 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를 발견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담았는데, 2021년 2월 5일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했다. 이 영화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전략이 적용되었다. 동일한 주제를 기반으로 영화사 비단길(Bidangil Pictures)이 영화를 제작하고 카카오엔터테인먼트(Kakao Entertainment Corp.)가 같은 시기에 웹툰을 만든다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이에 따라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넷플릭스 개봉에 앞서 동명의 웹툰을 19화(2020. 5.~2020. 9.)까지 미리 공개했다. 또한 영화가 공개된 후 국내에서는 20화 이후의 스토리를 제공하는 한편 일본, 북미, 인도네시아, 프랑스에서는 1화부터 동시 연재를 시작했다. 한정된 시간 내에 모든 서사를 보여 줘야 하는 영화와 달리 웹툰에서는 각 캐릭터들의 서사가 더 치밀하게 전개되는데, 영화가 웹툰으로 전환되면서 원작 시나리오가 웹툰 언어로 어떻게 재창조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영화와 웹툰으로 각 장르의 특성에 최적화된 이야기를 관객과 독자들에게 동시에 제시하는 의 전략은 좀 더 진화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영화와 웹툰이‘승리호’라는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 내는 데 각 매체 특유의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관객들과 독자들은 보다 풍부한 이야기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영화 관객이 웹툰의 독자로, 웹툰의 독자가 영화의 관객이 되는 선순환 소비를 통해 수익 구조의 다각화와 극대화를 꾀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 광진 / 다음 웹툰 제공 © JTBC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중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는 서울 이태원을 무대로 젊은이들의 창업 신화를 그린 청춘 드라마다. 웹툰 원작자인 광진(Kwang jin 光真) 작가가 직접 드라마 대본을 집필했다. 사진과 웹툰은 주인공 박새로이와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장대희 회장의 모습이다. 영화사 비단길(Bidangil [Silk Road] Pictures)이 제작한 조성희(趙圣熙) 감독의 는 우주 쓰레기 청소선 승리호의 선원들이 인간형 로봇 도로시를 발견한 후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 영화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와 협업해 영화와 웹툰을 동시에 제작함으로써 작품의 캐릭터와 주제를 확장시킨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전략의 두드러진 사례이다. 넷플릭스(Netflix) 제공 ⓒ 홍작가(Hongjacga), 카카오엔터테인먼트(Kakao Entertainment Corp.) 슈퍼 IP를 위한 시도 현재 네이버 웹툰,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와이랩 등 한국 웹툰 산업을 이끌고 있는 기업들이 슈퍼 IP를 개발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슈퍼 IP는 중국 IT 기업 텐센트가 제안한 용어로 게임, 웹툰, 영화 등 강력한 팬덤이 형성된 IP를 다른 엔터테인먼트 포맷으로 무한히 확장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데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례로 와이랩은 네이버 웹툰 전용관을 통해 자사가 제작한 웹툰 작품들을 서로 연결하여 등장 인물들이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슈퍼스트링(super string)’을 제공 중이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 차원을 넘어온 캐릭터들이 슈퍼스트링을 결성해 악의 세력에 대항한다’는 거대 서사 아래 자사의 작품들이 재편되거나 크로스오버되고 있다. 마치 마블의 히어로들이 때로는 한데 뭉쳐서, 때로는 각개 전투로 활약하는 것과 비슷하다. 첫 번째 크로스오버 작품은 의 주인공과 의 주인공이 만나 충돌하는 이야기를 담은 로 2021년 1월 1화 공개 이후 연재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장르를 활용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전략은 향후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면서 장르를 꾸준하게 확장해 가는 ‘스토리 유니버스(story universe)’ 형태로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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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SPRING 535

웹툰을 이끌어 가는 작가들 웹툰이 국내외적으로 큰 인기를 끌며 새로운 매체로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많은 작가들의 창의력과 노력이 뒷받침되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초기부터 현재까지 한국 웹툰의 특징적 경향을 이끌어 온 대표적 작가들을 소개한다. (2003~2004 다음 웹툰) (2004~2008 다음 웹툰) <26년>(2006 다음 웹툰) (2007 다음 웹툰) (2008 다음 웹툰) (2011 다음 웹툰) (2013 다음 웹툰) (2015 다음 웹툰) (2017 다음 웹툰) 강풀(Kang Full) 웹툰계의 살아 있는 화석 언론인 손석희(孫石熙)는 2015년, 자신이 진행하는 TV 뉴스 프로그램의 인터뷰에 게스트로 나온 강풀을 “웹툰계의 삼엽충이라고 불린다”며 시청자들에게 소개했다. 이는 웹툰 1세대 작가인 강풀의 상징성을 잘 나타내는 표현이다. 2003년, 그가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Daum)에 를 연재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웹툰이라는 개념이 아직 뚜렷하게 규정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의 작품을 제대로 된 만화가 아니라고 폄하하는 시각이 존재했다. 사실 기존 출판 만화 시장의 잣대로 보면 그의 그림 실력은 미숙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이듬해 연재한 도 성공하면서 세간의 편견이 바뀌기 시작했다. 연인들의 순정적인 연애 감정을 사랑스럽고 귀엽게 그려 내거나 아파트 주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혼에 대한 이야기를 미스터리 장르 문법으로 풀어낸 그의 이 초기작들은 잘 짜인 스토리텔링만으로도 충분히 인기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강풀의 선례 이후 그림 실력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흥미로운 아이디어만 있으면 얼마든지 웹툰 작가에 도전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졌으며, 이를 통해 다양한 장르의 질 높은 작품들이 축적될 수 있었다. 한편 를 비롯해 강풀의 작품 상당수가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웹툰이 ‘원 소스 멀티 유즈(OSMU)’의 핵심 콘텐츠로 부상하게 되었다. 영화나 드라마 등 타 미디어 시장의 종사자들이 원천 스토리로서 웹툰을 주목하고 2차 판권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웹툰 시장이 전체적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순전히 강풀 혼자의 힘으로 해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웹툰계의 삼엽충’으로서 그가 새로운 매체의 1세대로 좋은 본보기를 남겼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의 주인공 남녀 캐릭터. 웹툰 작가 강풀의 본격 데뷔 작품이다. ⓒ 강풀 / 다음 웹툰 제공 의 주인공 남녀 캐릭터. 사회에서 소외된 노인들의 삶과 사랑을 부각시켜 잔잔한 감동을 준 작품이다. <26년>의 예고편에 소개된 등장인물들. 1980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웹툰으로 강풀이 가장 힘들고 조심스럽게 그렸다고 말하는 작품이다. (2006 파란닷컴) (2010~2011 네이버 웹툰) (2011~2012 네이버 웹툰) (2012~2013 네이버 웹툰) (2018~2019 네이버 웹툰) 하일권(Ha Il-kwon [Ilkwon Ha] 河壹權) 웹툰이기에 가능한 미적 성취 스크린과 세로 스크롤이라는 웹 환경의 특성 안에서 다각적인 미적 실험을 시도한 여러 작가들의 노력은 웹툰이 기존 만화에서 독립된 새로운 범주의 매체로 위치를 굳히는 데 한몫했다. 그중 1.5세대에 속하는 하일권은 웹툰의 표현력을 크게 확장한 작가다. 데뷔작 (2006)에서 종이보다는 PC 스크린에 어울리는 색감으로 주목받았던 그는 (2010~2011)에서는 무채색과 컬러의 대비를 통한 분위기의 변화, 칸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연출을 선보였다. 그러다가 한층 원숙해진 연출이 돋보인 (2011~2012) 이후 자신을 비롯한 웹툰 작가들의 작화 기법이 비슷해졌다고 판단한 그는 화려한 연출 대신 한 컷 한 컷 밀도를 높이는 데 집중하는 한편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같은 구성을 더하는 전략을 취했다. 스토리의 우울함을 극대화한 (2012~2013)이 바로 그것이다. 하일권의 연출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PC나 스마트폰의 물리적 속성에 맞춰 표현을 확장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 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연출은 이야기의 재미와 정서적 반응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진동을 비롯해 스마트폰에 내재된 기능들을 효과적으로 살린 명랑 모험 만화 (공동 작업, 2015), 공황장애를 겪는 주인공의 절망적인 심리 상태를 몽환적인 연출로 그려 낸 (2018~2019) 등 작품 거의 대부분에서 이야기와 연출력의 완성도 높은 결합을 확인할 수 있다. 하일권은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고민을 감성적으로 풀어내는 경향을 보인다. 역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한 소녀 가장이 마술사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환상적으로 그려 냈다. ⓒ 하일권 / 네이버 웹툰 제공 (스토리 아루아니, 작화 김칸비, 2007~2008 다음 웹툰) (스토리 아루아니, 작화 김칸비 2008~2009 네이버 웹툰) (스토리 김칸비, 작화 황영찬, 2014~2016, 네이버 웹툰) (스토리 김칸비, 작화 황영찬, 2017~2020, 네이버 웹툰) (스토리 김칸비, 작화 서재일(Seo JaiIl 徐載壹), 2018~2019 투믹스(Toomics)) (스토리 김칸비, 작화 홍필(Red Brush), 네이버 웹툰 2021~) 김칸비(Carnby Kim [Kim Kan-bi] 金坎比) 스릴러 장르의 마스터 김칸비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넷플릭스를 통해 영상화된 (2017~2020)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 그는 단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의 원작자일 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국 웹툰의 역사에서 그는 스릴러 장르에 깊이 천착하며 해당 장르의 발전을 이끈 작가로 기록된다. 그가 스토리 작가 아루아니(Aruani)와 함께 ‘팀 겟네임(Team Getname)’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데뷔작 (2007~2008)과 두 번째 작품 (2008~2009)는 모두 인간의 악마성을 치밀하게 다룬다. 은 열 살 남짓한 나이에 살인을 서슴지 않는 ‘교수인형’ 멤버들과 그들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인물이 성장한 후 벌이는 잔인한 복수극이다. 성인 등급을 받은 에선 살인을 통해 우월함을 느끼는 연쇄 살인마와 그를 제압한 바 있는 악독한 킬러, 그리고 그 둘이 만든 게임에 휘말린 선량한 주인공의 고난이 그려진다. 에서 그림을 담당한 황영찬(黃英璨) 작가와의 첫 협업 작품 (2014~2016)의 주인공 역시 연쇄 살인마인 아버지의 강요와 협박으로 공범 역할을 한다. 인간의 잔혹함이 펼쳐지는 그의 작품들에서 주인공들은 흔히 심각한 윤리적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스릴러 작가로서 그는 서사적 트릭보다는 등장인물들을 극단적 상황에 몰아넣은 뒤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양상을 섬뜩하고 적나라하게 그려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 스릴러보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장르에 가까운 이 이전 작품들의 연장선에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괴물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괴물이 되면 편하게 살 수 있지만, 그럼에도 괴물이 되지 않으려 애쓰는 인간의 이야기는 그가 지속적이고도 가장 능숙하게 다루는 테마다. 은 독특한 괴물 캐릭터와 강렬한 서스펜스, 섬뜩한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는 일반적인 아포칼립스 장르와 차별화시키기 위해 주인공의 내적 성장에 포커스를 두었다고 말한다. ⓒ Carnby Kim, Youngchan Hwang / 네이버 웹툰 제공 <3그램>(2012, 미메시스 출판사) (2015, 올레 마켓) (2017~2018,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2019~2020,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수신지(Soo Shin Ji) 주류 플랫폼 바깥에서 시작된 물결 동시대 한국 웹툰에서 (2017~2018)와 (2019~2020)의 수신지 작가가 이끌고 있는 변화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지난 18년 동안 다음과 네이버라는 양대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중심으로 발달한 웹툰 시장에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인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통한 연재로 폭발적 인기와 인지도를 얻었다는 점이다. 잠재적 독자가 상주해 있는 플랫폼의 견인 효과 없이도 는 오직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이용자들의 입소문과 추천만으로 100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모았다. 플랫폼에서 고료를 받으며 연재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작품이 출판된 이후에야 수익이 발생했지만, 거대 플랫폼에 종속된 연재 시스템에서 벗어나 히트작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사건이다. 또 다른 중요한 흐름은 국내에서 몇 년 전부터 인터넷을 중심으로 본격화된 페미니즘 이슈를 자신의 작품에 효과적으로 녹여 냈다는 점이다. 에서는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대개 남편 집안의 며느리로 귀속되는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다뤘으며, 에서는 낙태 경험 유무를 쉽게 검사할 수 있는 기술을 통해 낙태를 경험한 여성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가상의 상황을 그려 냈다. 이 작품은 낙태죄가 어떻게 여성의 신체적 자율권을 침해하는지에 대해 강력하게 풍자한다. 웹툰 시장이 양대 포털을 중심으로 양적으로 팽창하자, 어느 순간부터 작가들은 해당 포털의 눈에 들어 자신의 작품이 정식으로 연재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한 성공 사례가 많아질수록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도가 줄어드는 문제가 생겨났다. 이러한 때에 주류 플랫폼 밖에서 성공이 보장되기 어려워 보였던 페미니즘 텍스트로 모험을 시도한 수신지의 성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후 인스타그램을 통해 바로 독자와 만나는 작가들이 늘어갔으며,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지닌 페미니즘 웹툰이 다수 등장함에 따라 이제는 역으로 포털에서 정식 연재되는 일도 생겨났다. 거대하고 단단한 구조 바깥에서 수신지가 일으킨 작은 파문은 생각보다 강력하게 퍼져나가는 중이다. 의 한 장면. 웹툰 플랫폼 대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연재되었던 이 작품은 매회 수많은 댓글이 올라오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 수신지 (2014~, 네이버 웹툰) (스토리 박태준, 작화 김정현(Kim Junghyun), 2019~, 네이버 웹툰) (스토리 박태준, 작화 전선욱(田善旭), 2019~2020, 네이버 웹툰) 박태준(Pak Taejun [Taejun Pak] 朴泰俊) 쉬지 않고 마시게 되는 사이다의 짜릿함 2009년, 박태준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미남•미녀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유명세를 얻었다. 이후 방송 활동을 하다가 의류 쇼핑몰의 CEO 역할을 맡게 되었고, 데뷔작 (2014~)를 통해 웹툰 작가로 전향했다. 이 작품은 네이버에서 아직도 연재 중인데, 첫 에피소드가 공개되던 2014년부터 현재까지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국내 웹툰계에서 박태준은 생태계 교란 생물 같은 존재로 인식되는데, 이는 그의 전력 때문만은 아니다. 박태준만큼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만화계 바깥에서 진입한 작가가 놀랄 만한 수준의 인기를 누리는 경우는 이전에도 종종 있었다. 그가 웹툰 생태계를 교란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독자들의 말초적 욕망을 자극해 성공하는 법칙을 거의 모범 답안처럼 제시했기 때문이다. 웹툰 독자들은 흔히 ‘사이다(soda)’라 불리는 서사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탄산음료의 톡 쏘는 맛과 향, 시원한 목 넘김처럼 통쾌함을 주는 극 전개를 가리킨다. 이러한 장치는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개연성 있는 해결보다는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를 통해 독자들이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를 들어 에선 작고 못생겼던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완벽한 미남의 몸을 얻어 선망의 대상이 된다. (2019~)에선 힘없고 가난한 주인공이 싸움 기술을 가르쳐 주는 유튜브 계정의 도움을 받아 점차 강해지고, 자신의 싸움을 중계해 인기 유튜버가 된다. 이러한 서사 구조는 매우 단순하지만, 독자들에게는 직관적인 쾌감을 보장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 (2019~2020)도 네이버에 동시에 연재되며 최고 수준의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그의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보여 준다. 문제는 쉽고 빠르게 쾌감을 주려다 보니 종종 사회적 약자에 대한 대중들의 혐오 정서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매번 여성이나 이민자 혐오에 대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가 해외 시장에서 폭넓은 관심을 끄는 작가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 꼭 해결해야 할 숙제다. 의 한 장면. 못생긴 얼굴로 괴롭힘을 당하던 주인공이 완벽한 외모를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네이버 웹툰 ‘도전 만화’에 업로드되자마자 빠르게 상위권에 진출, ‘베스트 도전 만화’로 승격되었고,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2014년 9월부터 정식으로 연재되기 시작했다. ⓒ 박태준 / 네이버 웹툰 제공 2020년 12월부터 연재를 시작한 는 옴니버스 형식의 스릴러물로 박태준 만화회사가 기획하고 제작한 작품이다. 김주인(Kim Juin 金主人) 작가가 스토리와 작화를 맡았다. ⓒ 김주인, 박태준 만화회사(Taejun Webtoon Company) / 네이버 웹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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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중인 역동적 미디어 디지털 만화 웹툰은 태동부터 성장까지 채 20년도 되지 않는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은 미디어, 플랫폼, 향유자, 디바이스 등 웹툰 생태계를 이루는 다기한 요소들이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늘 열려 있기 때문이다. ‘웹툰’이란 용어는 국내 최초로 PC 통신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 천리안이 2000년도에 만화를 게재하기 시작하며 ‘천리안 웹툰’으로 명명한 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천리안 웹툰은 기존의 출판 만화를 단지 인터넷상에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해 현재의 웹툰 개념과 큰 차이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비연속적 서사 구조를 지닌 옴니버스 형식의 만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권윤주의 (1998), 정철연(Jung Chul-yeon)의 (2001~2007), 심승현(Shim Seung-hyun)의 (2002)처럼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그 예이다. 현재의 웹툰 스타일과 거리가 있지만, 세로 스크롤 방식으로 감상한다는 점에서 웹툰의 시발점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현재와 같은 웹툰의 시작은 다음(Daum)에 연재되었던 강풀(Kang Full)의 (2003~2004)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강풀은 앞서 언급한 작품들이 보여 주었던 세로 스크롤 방식을 수용하는 한편 다양한 형식 실험을 시도했다. 무엇보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장편 서사를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그를 통해 웹툰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 웹툰 플랫폼들인 다음 웹툰, 네이버 웹툰, 카카오페이지, 레진코믹스의 애플리케이션 화면이다(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2004년에 연재를 시작한 강도하(Kang Do-ha, aka Doha Kang)의 는 섬세한 심리 묘사와 정교한 그림으로 청춘의 고뇌와 사랑을 그려 내며 서사 웹툰의 새 장을 열었다. 그의 로맨스 웹툰은 대부분 신변잡기적 이야기를 다루었던 당시의 인터넷 만화들과 크게 구분되었다. ⓒ 강도하 / 다음 웹툰 제공 고유의 형식 웹툰의 출발을 가속화시킨 주인공은 주요 포털 사이트이다. 2003년 다음을 시작으로 이듬해 네이버, 파란, 엠파스로 이어진 포털의 웹툰 서비스는 이후 야후가 뒤따르면서 급물살을 탔다. 웹툰을 무료로 제공함으로써 사이트 방문자 수와 검색량을 늘리고 이를 기반으로 콘텐츠 노출과 광고 수익을 올리겠다는 전략이었다. 포털에 의해 대중과 접촉할 수 있는 게재 공간이 확보되면서 만화 연재를 원하는 작가들이 모여들어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웹툰은 한층 발전할 수 있었다. 먼저 강도하(Kang Do-ha [Doha Kang])의 (2004~2005)는 엠파스에서 연재를 시작했으나 이 회사가 웹툰 사업을 종료하면서 다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청춘의 고뇌와 사랑을 노래한 수준 높은 성인물로 섬세한 심리 묘사와 정교한 작화로 주목받았다. 강도하는 이 작품에서 스크롤 기반의 수직 화면 구성을 보다 본격화함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세련되게 연출하였고, 메타포를 통한 심리 묘사, 색감과 구도의 고도화, 반전 서사의 극적 활용 등을 통해 차별화된 웹툰 문법을 선보였다고 평가받는다. 이후 와 함께 청춘 삼부작으로 불리는 (2006), (2007)에서 보다 심화된 웹툰 문법을 탐구했다. 강풀이 장대한 이야기 구조를 담아내면서 서사 웹툰의 토대를 마련했다면, 강도하는 여기에 더해 웹 환경에 적합한 연출 방식을 구조화했다. 다음이 좋은 작품을 선별하기 위해 편집자의 역할을 강조했던 반면에 네이버는 사용자 통계를 중심으로 작품을 관리하며 이를 기반으로 작품 고료도 책정했다. 포털 간 이러한 경쟁은 웹툰의 질적, 양적 성장에 지렛대가 되었다. 경쟁 천리안에서 처음 사용했지만 대중화되지 못했던 웹툰이라는 용어는 네이버가 2005년 ‘네이버 웹툰’을 론칭하며 비로소 정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강풀과 강도하를 통해 자리를 굳히기 시작한 다음에 비해 웹툰 플랫폼으로서 네이버의 위상은 미약했다. 네이버는 다음 웹툰을 벤치마킹하여 자신들의 지향점에 맞게 보완하거나 정반대 전략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다음이 서사 웹툰에 주력하자 네이버는 일상 웹툰에 주목했고, 다음이 15세 이상 여성을 타깃으로 한 드라마에 중심을 두자 네이버는 15세 이하 남성을 타깃으로 삼았으며, 다음이 좋은 작품을 선별하기 위해 편집자의 역할을 강조했던 반면에 네이버는 사용자 통계를 중심으로 작품을 관리하며 이를 기반으로 작품 고료도 책정했다. 포털 간 이러한 경쟁은 웹툰의 질적, 양적 성장에 지렛대가 되었다. 네이버 웹툰의 이러한 특성을 잘 반영한 대표작이 바로 조석(Cho Seok 趙奭)의 (2006~2020)이다. 이 작품은 옴니버스 형식의 코미디물인데, 연재 시작 후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고공비행을 계속했다. 또한 2020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연재된 국내 최장수 웹툰이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조석은 이 작품으로 네이버 웹툰의 초창기 시절 흥행을 이끌었으며, 지금은 네이버를 대표하는 간판급 작가가 되었다. 한편 강풀과 강도하로 이어지던 다음 웹툰의 특성은 잔혹 스릴러를 표방한 윤태호(Yoon Tae-ho 尹胎鎬)의 (2007~2009)에서 서사성이 더욱 강화된다. 인지도가 낮은 한 웹툰 사이트에서 연재를 시작한 이 작품은 정교한 스릴러 문법, 강렬한 캐릭터, 치밀한 심리 묘사, 강력한 메타포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초반부터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며 관심을 모았고, ‘2007년 대한민국 만화대상 우수상’을 받았다. 해당 사이트가 운영을 종료한 후에는 다음으로 옮겨 80화를 끝으로 완결되었다. 윤태호가 보여 주는 강력한 서사적 흡입력은 (2012~2013)이 드라마로, 와 (2010~2012)이 영화로 제작돼 큰 성공을 거두는 요인이 되었다. 조석(Cho Seok 趙奭)의 1000화 중 한 장면. 작가 자신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을 등장시켜 코믹한 이야기를 전개했던 이 작품은 2006년 9월 제1화가 네이버 웹툰에 업로드된 이후 2020년 7월 1,237화를 마지막으로 완결됨으로써 국내 최장수 웹툰으로 기록되었다. ⓒ 조석 / 네이버 웹툰 제공 최규석(Choi Gyu-seok 崔圭碩)의 은 실제 외국계 대형마트를 배경으로 벌어진 노동 현실을 정면으로 다뤘으며, 2013년 12월 1부 첫 화를 시작으로 2017년 8월 5부 30화로 종결되었다. 웹툰의 소재를 한 차원 격상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 최규석/ 네이버 웹툰 제공 유료 서비스 작품의 질적 향상이 이뤄지던 시기, 웹툰 시장의 변화도 함께 일어났다. 2012년은 웹툰의 부분 유료화가 시도되었던 해이다. 다음은 작가와 협의해 연재가 완결된 후 해당 작품을 유료화하여 수익의 90%를 작가에게 돌려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러한 시도는 강풀의 연재작들을 모두 유료화하면서 본격화되었으며, 예상과 달리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부분 유료화 시도는 기업의 사업성보다는 웹툰의 창작과 소비 문화 창달이라는 문화적 접근을 보여 준 시도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웹툰 생태계를 건전하게 조성하기 위해서는 작가에게 정당한 수익이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는 2013년, 웹툰의 유료화 플랫폼을 지향하는 레진코믹스가 등장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사용자 편의를 기반으로 프리미엄급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면 유료화가 가능하다”는 모토를 내세우며 전격적으로 유료화를 시행한 레진코믹스는 이후 성인물 중심으로 매출을 창출하며 화제를 모았다. 무적핑크(Superpink 无敌PINK)가 스토리를, 이리(YiLee)가 작화를 맡은 은 중국의 고전 소설 『삼국지연의』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스마트폰에서 세로 스크롤 대신 좌우로 한 컷씩 넘겨 가며 보는 형식을 도입했고, 1인 방송이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인터페이스를 활용한 형식 실험이 눈길을 끌었다. 2018년 5월부터 현재까지 네이버 웹툰에 연재되고 있다. ⓒ 와이랩(YLAB), Superpink, YiLee 윤태호(Yoon Tae-ho 尹胎鎬)의 는 그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작품이다. 섬세한 장면 연출과 몰입감 있는 서사 구조는 독자들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 냈다. ⓒ 윤태호, 슈퍼코믹스 스튜디오(SUPERCOMIX STUDIO Corp.) 소재와 표현 2010년대 중반부터는 소재의 다각화가 이뤄졌다. 외국계 대형 마트를 배경으로 부당 해고 등 노동 현장의 문제를 다루면서 작가 특유의 블랙 유머를 가미한 최규석(Choi Gyu-seok 崔圭碩)의 (2013~2017)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사회 참여적 성격의 소재에 이어 최근 들어서는 젠더 이슈를 다룬 작품들이 크게 늘고 있다. 기맹기(Gi Maeng-gi 淇萌琪)의 (2016~2017)을 위시한 여성주의적 색채의 작품들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성 억압의 문제를 가부장제와 성폭력, 직장 생활 등 다양한 방면에서 다채로운 시각으로 접근한다. 이는 사회적 담론이 웹툰이라는 접근성이 용이한 매체를 통해 확장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웹의 특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과감한 형식 실험이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시청각적 효과를 도입하거나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스턴트 메신저의 대화창을 주된 표현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독자가 웹툰의 등장인물이 되어 주인공과 소통하는 인터랙티브 웹툰까지 등장했다. 인공지능, 증강현실,머신러닝 등 첨단 기술을 접목한 이런 시도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웹툰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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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SPRING 814

보편적 감성에 다가서다 PC와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웹툰이 특유의 스타일과 뛰어난 작품성을 앞세우며 국경을 넘어 세계 여러 나라의 독자층에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에는 스토리텔링을 통한 보편적 공감대 형성과 함께 현지화 전략이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못생긴 외모가 콤플렉스인 여고생이 완벽한 화장을 통해 자신감을 되찾고 원하는 사랑도 이루어 낸다. 이는 현재 네이버 웹툰 플랫폼에 연재되고 있는 야옹이(Yaongyi) 작가의 데뷔작 (2018~)의 간략한 줄거리이다. 이 작품은 네이버 ‘웹툰(WEBTOON)’의 태국어 사이트를 시작으로 인도네시아, 대만, 일본 등 아시아 지역을 비롯해 북미, 스페인, 프랑스에서도 동시에 연재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해외 누적 조회수 40억 회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웹툰은 PC나 모바일의 스크린 환경에 맞게 각 컷들이 세로로 길게 나열되며 스토리를 전개해 나간다. 이러한 세로 스크롤 방식은 웹툰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특성이다. 또한 일주일에 한 번씩 업로드되는 짧은 연재 주기와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감상할 수 있는 편리한 접근성은 문화 콘텐츠를 짧은 시간에 쉽게 즐기려고 하는 최근의 풍조에도 부합한다. 그러나 한국 웹툰이 다른 문화와 역사적 배경 속에서 살아온 세계 여러 지역의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이유가 단지 이러한 기능적 측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2019년 6월 이탈리아 카타니아에서 열린 유럽의 대표적 만화 축제 ‘에트나 코믹스(Etna Comics)’에서 의 현지 팬들이 웹툰 관련 상품과 단행본을 구매하고 있다. 쿠기(Koogi) 작가가 이 행사에 공식 초청을 받아 사인회를 열었다.ⓒ 레진엔터테인먼트(LEZHIN Entertainment, Inc.) 제2회 레진코믹스 세계 만화 공모전 대상 수상작인 은 비극적인 과거를 가진 연쇄 살인마와 이 사실을 모르고 그를 쫓던 스토커가 한 집에 머물게 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스릴러물이다. 2016년 1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레진코믹스에 연재되었다. ⓒ Koogi /레진엔터테인먼트 제공 #장르&스타일 앞서 언급한 을 비롯해 한국 웹툰은 한 장르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장르들을 선보임으로써 취향이 세분화된 독자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성인 등급으로 동성애 코드와 선정적이고 잔혹한 스토리를 지닌 스릴러 웹툰 (2016~2019)은 북미 지역에서 큰 인기를 거둔 뒤 유럽에도 진출했다. 레진코믹스에 이 작품을 연재했던 쿠기(Koogi) 작가는 2017년, 미국 LA에서 열린 애니메 엑스포(Anime Expo)를 비롯해 유럽 최대 만화 축제로 꼽히는 이탈리아 루카 코믹스 앤 게임즈(Lucca Comics and Games)에 초청받아 팬 사인회를 가졌으며, 2019년에는 이탈리아 에트나 코믹스(Etna Comics)에도 초대되어 현지 팬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이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과 긴장감이 어우러진 빼어난 작품이라는 것이 공통된 평가이다. 그런가 하면 추공(Chugong) 원작의 판타지 소설을 웹툰으로 각색한 현군(h-goon), 장성락(DUBU, REDICE STUDIO) 작가의 (2018~)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괴수들과 맞서 싸우는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다루는데, 캐릭터가 과제를 해결해 갈수록 레벨이 올라가는 롤 플레잉 게임처럼 게임 유저들에게 매우 익숙한 포맷의 전개 방식을 접목해 독자들을 매료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현재 영미권의 웹툰 연재 플랫폼 웹노벨(Webnovel)과 태피툰(Tappytoon)이 서비스하고 있으며 일본, 중국, 베트남, 프랑스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각국에서 모두 최상위권의 조회수를 유지하고 있고, 일본 및 브라질과 독일에서는 만화책으로 출간되었다. 은 2016년 카카오페이지에 발표된 추공(Chugong)의 인기 소설이 원작이다. 현군(h-goon)이 각색하고 레드아이스 스튜디오(REDICE STUDIO)의 두부(DUBU)가 작화를 담당한 웹툰이 2018년 3월부터 현재까지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되고 있다. 이 웹툰은 일본, 브라질, 독일에서 만화책으로도 출간되었으며 그중 브라질과 독일에서는 아마존 만화 부문 랭킹 1위를 기록했다. ⓒ DUBU(REDICE STUDIO), Chugong, h-goon, 디앤씨웹툰비즈(D&C WEBTOON Biz) #작품성 웹툰은 연재 주기가 일주일로 매우 짧은 데 비해 대체로 스토리와 작화의 완성도가 높다. 이는 작가들뿐 아니라 플랫폼들이 함께 작품의 완결성을 높이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작가 혼자서 대략 60~90컷 정도의 한 회 에피소드를 기간 내에 완성하기는 무척 벅찬 일이다. 그래서 채색을 돕는 보조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스토리와 작화를 분업하기도 한다. 웹툰 플랫폼에서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작가와 여러 번 회의를 거치고, 이런 과정을 통과한 작품만이 연재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대개 한 편을 기획하는 시간은 짧게는 6개월이고, 1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다. 근래에는 제작의 부담을 줄이는 한편 완성도는 더욱 높이기 위해 전문 제작 스튜디오를 활용하는 추세다. 이곳에서는 기획, 스토리 구성, 콘티, 데생, 배경 이미지, 채색 등으로 분업하여 웹툰을 만든다. 대학을 비롯해 문화 콘텐츠를 진흥하는 기관에서 실행하는 다양한 교육도 웹툰의 완성도를 담보하는 데 한몫한다. 디지털 툴과 스토리 창작, 드로잉 같은 창작 기술뿐 아니라 비평 교육을 통해 웹툰의 질적 수준이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현재 해외 젊은 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동세대가 겪고 있는 공통된 경험을 다루고 있다.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며 간절한 소망을 하나씩 이루어 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대리 만족을 느끼게 된다. #현지화 글로벌 시장 개척을 위한 국내 기업들의 본격적 시도는 2013년부터 시작됐다. 웹툰 플랫폼들이 자사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계정을 이용하여 해외 시장에 우수한 작품들을 선보였고, 해외 플랫폼에 공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어 문제가 큰 장애물이었다. 이에 따라 현지 번역가들을 발굴하여 작품의 문맥을 이해시키려 노력하는 한편 현지 작가들도 등용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일례로 네이버 웹툰은 미국에서 아마추어 만화가 등용 시스템 ‘웹툰 캔버스 어워즈(WEBTOON CANVAS Awards)’를 도입했다. 이는 네이버가 2006년 도입한 ‘도전 만화’ 시스템을 북미에도 적용한 것으로, 웹툰 작가를 희망하는 창작자들이 누구나 작품을 올릴 수 있게 한 뒤 독자들에게 인정받은 작품을 선별해 정식으로 연재 기회를 주는 제도이다. 이 시스템을 통해 연재된 대표적 작품으로는 레이첼 스미스(Rachel Smythe)의 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2019년, 만화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아이스너 어워드(Eisner Award) 후보에 올랐고, 한국어로 번역되어 2020년 8월부터 네이버 국내 플랫폼에 연재되고 있다. 야옹이(Yaongyi) 작가의 데뷔작 은 못생긴 외모 때문에 괴롭힘을 당했던 주인공이 화장을 통해 최고의 미인으로 변신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그리고 있다. 2018년 4월부터 현재까지 네이버 웹툰에 연재되고 있으며, 해외 여러 나라에도 서비스되면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 Yaongyi / 네이버 웹툰(NAVER WEBTOON) 제공 레이첼 스미스(Rachel Smythe)의 는 그리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작품으로 네이버 웹툰이 아마추어 만화가 등용을 위해 미국에서 운영 중인 WEBTOON CANVAS Awards를 통해 발굴되었다. 2018년 3월 첫 번째 에피소드가 네이버 웹툰의 해외 서비스 ‘웹툰(WEBTOON)’에 업로드된 이후 지금까지 연재되고 있다. ⓒ Rachel Smythe / 네이버 웹툰 제공 #보편성 그동안 해외 독자들의 호응을 받기 위해서는 각국의 문화와 트렌드에 적합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하지만 윤태호(Yoon Tae-ho 尹胎鎬)의 (2012~2013)은 그런 기존의 관념을 뒤집었다. 바둑이 인생의 전부였지만 프로 입단에 실패한 고졸 출신의 주인공이 계약직으로 들어간 대기업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2017년 제20회 일본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만화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는 점이다. 선정 이유는 “한국의 학력 사회와 경제 성장의 왜곡된 길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에게 공감이 간다. 장기 불황을 겪은 일본의 청년 세대와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국경을 넘어 청년 세대의 공통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현재 해외 젊은 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동세대가 겪고 있는 공통된 경험을 다루고 있다.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며 간절한 소망을 하나씩 이루어 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대리 만족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웹툰이 지닌 가장 큰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처럼 단순히 젊은 세대들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처럼 꿈을 실현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고난을 다룸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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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0 WINTER 575

현대적 변용과 가능성 창작 주체와 향유 대상이 모두 대중이었던 민화는 당대 사람들의 욕망과 염원이 담긴 ‘대중의 미술’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민화는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21세기의 민화가 이 시대의 이야기와 소망을 담아내며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민화의 향유층은 제한적이었다. 1970~1980년대에는 일본 화상을 비롯한 외국인 바이어나 국내 주요 호텔 등 특정 집단에서 , , 같은 전통 민화를 구매했다. 반면에 현재는 주부들이 취미로 민화를 배우는가 하면 패션•뷰티 브랜드가 민화 작가들과 협업하여 제품을 출시하는 등 폭넓게 향유되고 있다. 민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인데, 이런 현상의 시작점에는 과거 소규모 공방을 운영하며 민화를 생산하던 공방 출신 작가들이 있다. 1990년대 들어 이들 중 상당수가 대학 부설 평생교육원이나 백화점 문화센터 등으로 자리를 옮겨 민화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특히 초본을 활용한 모사 교육 방식은 그림을 그려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쉽게 입문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민화 화단이 형성되던 초기에는 모사 작업으로 그려 낸 전통 민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민화 창작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작가들의 역량 또한 크게 성장함에 따라 민화를 현대적으로 변용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무엇보다 기존의 전통 민화가 지닌 형식만으로는 현대적인 감성과 가치관을 담아내기 어려웠기에 기존 양식을 해체하여 새로운 스타일로 재구성하는 작가들이 늘고 있다. 현재의 이야기 전통 민화에도 능숙하지만 창작에도 훌륭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금광복(Keum Goang-bok 琴光福)은 벽사의 의미를 지닌 호랑이를 통해 한국 문화를 수호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 그는 “민화가 선조들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생겨났듯 현대의 작품에는 현재의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민화를 꾸준히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길상적 메시지를 넘어 역사적 의식을 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안성민(Ahn Seong-min; aka Seongmin Ahn)은 뉴욕의 대표적 주거 양식인 브라운스톤의 대문과 창문을 그림에 담아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일명 ‘국수 산수’로 불리는 그녀의 산수화 작품은 정신적 감흥을 일으키는 자연에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인 국수를 대입해 표현하고 있다. 제주에 사는 김생아(Kim Saeng-a 金生亞) 작가 역시 작품 속에 자신이 사는 지역의 풍경을 반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그림 속에는 제주의 설화들이 녹아 있으며, 더 나아가 제주 해변에서 비치코밍(beachcombing)으로 모은 유리 조각들을 도자기 가마에 구워 오브제로 활용하고 있다. “아름다운 제주가 환경 오염으로 몸살을 앓는 요즘, 바닷가에서 유리 조각을 줍는 작은 실천이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자신의 작품에 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시도들 민화 도상을 활용해 벽지처럼 특정 패턴을 반복하거나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등의 실험적 시도는 보는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해골 모양을 형상화한 이지은(Lee Jee-eun 李智恩)의 은 게슈탈트 쉬프트(gestalt shift) 기법을 활용했는데, 소재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력과 뛰어난 감각을 보여준다. 그녀는 “해골은 보통 죽음과 연관돼 부정적으로 떠올리지만, 아름다운 삶을 산다면 해골조차 아름답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렸다”며 자신의 작품을 설명했다. 화폭의 일부분을 추출하여 크게 확대하는 방식도 현대 민화의 특징 중 하나로 꼽힌다. 공방 출신의 작가 윤인수(Yoon In-soo 尹仁壽)는 에서 꽃병이 있는 부분만을 클로즈업하듯 단독 조명한다. 수많은 기물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꽃병이 화면 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순간 기존의 책가도에선 보이지 않던 꽃병 본연의 색감과 조형미가 빛을 발하며 색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공방에서 치열한 습작 시기를 거친 그는 늘 제자들에게 “옛것을 올바로 익힐 때 성공적인 창작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한편 요즘 민화 작가들 중엔 스스로 민화 속 주인공이 되는 이들도 있다. 민화 속 캐릭터가 일종의 페르소나가 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처럼 잘 알려진 캐릭터는 보는 이의 동심을 일깨워 작품을 한층 더 쉽고 편안히 받아들이게 한다. 곽수연(Kwak Su-yeon 郭洙淵)은 사람의 모습을 빗댄 반려동물 시리즈로 유명한데, 책가도나 십장생도에 개와 고양이가 위트 있게 등장해 웃음을 준다. 기존의 전통 민화가 지닌 형식만으로는 현대적인 감성과 가치관을 담아내기 어려웠기에 기존 양식을 해체하여 새로운 스타일로 재구성하는 작가들이 늘고 있다. 전통을 넘어 최근의 민화 화단에서는 많은 작가들이 ‘한지에 전통 안료’라는 공식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재료를 활용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재료 선택의 폭이 넓어진 데다가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세계화 시대에 동서양 문화권의 재료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입을 모은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크레파스, 색연필을 사용하는가 하면 직물이나 각종 문양의 벽지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콜라주하여 작품에 현대적인 감성을 불어넣은 작품을 곧잘 볼 수 있다. 아예 평면 작업에서 탈피해 설치,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들도 있다. 이돈아(Lee Don-ah 李暾雅) 작가는 민화의 전통 도상을 해체하여 육면체, 사각형, 액자 등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시각화한 회화 작품을 그려오다가 2015년부터 영상, 렌티큘러(lenticular), 미디어파사드(media facade) 등 미디어 기술을 회화에 접목하고 있다. 서양화나 동양화 전공자를 포함해 현대 미술 작가들도 민화적 요소를 즐겨 활용하는 것만 봐도 민화 대중화의 파도가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글로컬리즘 민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화단을 넘어 뷰티, 패션, 리빙 산업으로 번지는 추세다. 애초 민화는 집 안이나 생활용품을 장식하는 등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돼 장식성과 실용성이 뛰어난 데다 한국 고유의 미감이 녹아 있어 차별화된 브랜딩 작업에 효과적이다. 민화에 대한 관심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곳은 뷰티 브랜드 설화수이다. 이 브랜드는 유명 작가들과 컬래버레이션한 화장품 패키지를 오랫동안 선보여 왔으며, 2019년에는 전통 문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기획전을 개최한 바 있다. 이 전시는 오늘의 작가들이 나 에 등장하는 전통 문양을 인테리어, 가구, 패션 등 다양한 분야의 제품에 접목시켜 눈길을 끌었다. 오트쿠튀르(haute couture) 브랜드 해일(HEILL)은 2020년 파리에서 개최된 봄•여름 시즌 패션쇼에서 민화의 전통 부채 그림을 모티프로 작업한 컬렉션을 발표했다. 패션쇼를 앞두고 양해일 디자이너는 “한국에 민화라는 아름다운 자원이 있다는 사실이 감동스럽다”고 밝힌 바 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는 그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브랜드들이 기민하게 민화를 활용하는 데서 알 수 있듯 민화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전 세계에 통용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민화가 지니고 있는 길상과 염원의 메시지는 국적과 인종의 경계 없이 누구에게나 통용된다. 바로 이 점이 근래에 민화가 부상하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끊임없는 도전과 실험을 거쳐 민화가 언젠가 새로운 한류를 일으키는 ‘K-art’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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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0 WINTER 416

다양한 소재가 상징하는 삶의 이야기 주로 조선 시대 후기에 널리 그려진 민화는 민중에 의해 창작되고 향유되었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한 일반 서민들이 그렸기에 직업 화가에 비해 표현법이 미숙하지만, 오히려 민중의 집단적 가치관과 상상력, 세속적 소망이 자유분방하게 펼쳐져 흥미로운 세계를 이룬다. 또한 각 소재마다 의미하는 주제가 다르다는 점도 민화의 큰 특징이다. 산수화 동아시아에는 유가, 불가, 노장사상 등을 근간으로 자연을 인간과 하나로 느끼며 살아온 오랜 전통이 있다. 산수화는 이 문화권에서 공유하고 있는 자연에 대한 깊은 친화감과 일체감이 만들어 낸 회화 장르이다. 그렇기에 가장 널리 그려지고 중요하게 여겨졌다. 민화의 산수화는 정통 회화를 모방하면서 비롯됐다. 주로 정선(鄭敾 1676~1759)의 진경산수화법을 모방한 그림들이 다수를 이룬다. 진경산수화는 민화가 주로 그려진 조선 시대 후기와 시대적 배경을 같이하는데, 이런 이유 외에도 진경산수화법이 사물을 대담한 필법으로 단순화시켜 표현했기 때문에 정통 회화의 섬세한 묘사력을 그대로 따라 그릴 수 없었던 아마추어 화가들이 비교적 모방하기가 수월했던 까닭도 있다. 화조도 정통 회화의 화조도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존재하는 그대로 충실히 표현한다. 반면에 민화의 화조도는 여기에 더해 남녀의 화합을 기원하는 의미를 보탰고, 이를 통해 화려한 장식성과 주술성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다. 주로 다뤘던 소재는 모란, 석류, 연꽃, 매화, 국화, 수선화, 목련, 난초 등의 꽃과 꿩, 봉황, 학, 기러기, 오리, 닭, 해오라기, 원앙, 제비, 꾀꼬리, 참새 등의 새이다. 가장 널리 그려진 모란은 부귀와 행복을 상징한다. 석류는 잘 익은 열매 안에 무수히 들어박힌 씨앗들처럼 자식을 많이 낳으라는 기원을 담았으며, 꿩이나 원앙•오리 등은 항상 암수를 함께 그려 부부간 사랑과 화합을 바랐다. 십장생도 건강과 장수를 바라는 인간의 보편적 소망을 표현한 십장생도에는 거북•학•소나무•불로초•사슴•산•바위•물•구름•해•복숭아•대나무 등이 그려졌다. 이는 정령 숭배에 바탕을 둔 자연 존중 사상인 샤머니즘이 지배했던 고대의 원시 종교로부터 비롯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샤머니즘은 국가 종교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지배 계층에서부터 백성들에게까지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오랜 역사를 지닌 샤머니즘적 사고는 사람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 각인되어 훗날 불교가 들어온 뒤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것이 십장생도 탄생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장르 중에서 특히 색채가 강렬하고 화려해 한국 고유의 색채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신선도 신선 사상은 한반도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오늘날 한국인들의 국조인 단군도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국인은 신선이 인간과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속세를 떠나 자신과 세계를 응시하는 깊은 수양을 통해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으면 삶과 죽음의 세계를 초월한 신선이 된다고 믿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불로장생하며, 고통스러운 세상사에 휩쓸리지 않고 지혜롭고 욕심없이 살아가고자 했던 믿음이 그림으로 나타난 것이 신선도이다. 문자도 문자도는 유교적 윤리 덕목들을 글자로 쓰고 획의 안이나 밖에 그것에 합당한 옛 고사를 그림으로 그린 독특한 양식이다. 주로 쓰인 글자는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 여덟 글자로 각 글자마다 그 의미를 상징하는 동물, 꽃, 물건 등이 그려진다. 예를 들어 제(悌) 자 그림에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돕고 사는 형제를 상징하는 할미새, 화합을 상징하는 상체꽃(산앵두)이 등장한다. 문자도는 추상적 표현과 사실적 표현이 조화를 이룬 독특한 구성으로 주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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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0 WINTER 209

나의 민화 사랑 민화의 수집과 연구, 전시에 평생을 바치고 있는 가회민화박물관 윤열수 관장. 그는 1973년 에밀레박물관 학예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만난 민화의 세계로 점점 빠져들었다. 그가 수많은 호랑이와 용과 까치, 모란과 연꽃들과 더불어 울고 웃으며 살아온 자신의 지난날들을 돌아본다. 내가 태어나 자란 전라북도 남원은 백제와 신라의 요충지였다. 그런 까닭에 삼국시대 유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밭을 갈다 보면 토기 조각은 물론 거의 원형에 가까운 토기도 나왔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 밭에 굴러다니던 토기 조각을 주어서 집으로 가지고 들어오곤 했다. 그런 습관이 들어서인지 언제나 무엇인가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본격적인 수집벽은 초등학교 때 시작한 우표 수집에서 출발했다. 여러 해 동안 열심히 모은 덕에 꽤 많은 우표를 모았는데, 불행하게도 어느 날 우표 수집책을 도둑맞았다. 실망이 컸던 나는 누가 훔쳐가지 않을 수집품을 생각하다가 부적을 떠올렸다. 집집마다 붙어 있는 부적이야말로 제격이라고 생각해 열정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은 군대에서였다. 소대장인 나의 취미가 부적 수집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병들이 휴가 갔다 돌아오면서 이런저런 부적을 가져다주었고, 덕분에 여러 지역의 것을 다양하게 모을 수 있었다. 내가 민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3년 4월 전역과 동시에 조자용 선생이 설립한 에밀레박물관의 학예사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였다. 에밀레박물관 관장 조자용 선생은 미국에서 공부한 건축가임에도 한국 전통 문화와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민화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수집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직함은 학예사였으나 민화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선생과 함께 거의 매일 민화 한 점을 앞에 놓고 자세히 뜯어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수백 점을 보고 나니, 조금씩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빠져들게 되었다. 1975년 11월, 조자용 선생은 박물관 소장 민화 32점을 가지고 미국 순회전을 시작하였다. 하와이를 시작으로 7년 동안 이어진 순회전은 한국 민화가 처음 해외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81년 오클랜드 시립미술관 전시 때부터 나는 순회전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때 미국 현지인들이 보여준 뜨거운 반응을 보면서 우리 민화의 새로운 비전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1983년 에밀레박물관이 서울 등촌동에서 충북 보은의 속리산으로 옮겨가면서 나도 박물관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한번 빠져든 민화에 대한 사랑은 멈출 줄 몰랐다. 이후 다른 박물관에 근무하는 동안에도 체계적으로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많이 보는 것이 최고의 공부라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러는 사이 수집품이 하나씩 늘어갔다. 가회민화박물관 30여 년간 박물관 학예사로 근무하며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서 언젠가는 직접 박물관을 운영해 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가슴속 깊이 품고 있었던 그 꿈은 우연히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서울시 도시개발공사에서 북촌에 박물관을 운영할 사람을 공개 모집한다는 공고문을 마감 하루 전에 보게 된 것이다. 나와 아내는 하루 만에 구비 서류를 갖추느라 진땀을 뺐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뜨거운 열정과 오랜 경험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붙잡았다. 민화와 한옥, 그것은 완벽에 가까운 조합 그 자체였다. 민화는 한국인의 생활 정서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이다. 전통의 체취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서울 북촌한옥마을에서 민화 박물관을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은 내게는 더없는 행운이었다. 2002년, 드디어 작은 한옥에 민화 전문 박물관을 열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박물관 이름에서부터 전시 방법 등 한옥에 어울리는 박물관을 어떻게 운영할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칸칸이 나눠져 있는 한옥 내부를 하나로 연결하여 전시 공간을 마련하고, 바닥에 난방 시설을 하여 관람객이 신발을 벗고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 월급쟁이로 적잖은 돈을 민화 수집에 써왔기에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든든한 후원자인 아내의 적극적 지원과 격려가 없었다면 가회민화박물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내는 한국사 전공자로 무엇보다 북촌에 세운 민화 박물관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첫 전시 주제는 ‘벽사(辟邪)’로 정했다. 내가 오랫동안 수집해왔던 부적과 민화 중에서 벽사도만 추렸다. 부적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그중 당사주(唐四柱)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민화의 필치와 매우 흡사한 그림으로 개인의 운명의 흐름을 그려놓은 것이다. 사람들의 아픈 곳을 보듬어 주는 역할을 했던 당사주와 서민들의 다양한 소망을 대변해 주었던 민화, 비록 이 두 가지의 형태와 쓰임새는 달랐지만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그림들이라는 점에서 당사주 또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도 벽사와 관련된 민화 전시는 간혹 있었지만, 벽사용 민화와 부적을 주제로 한 특별전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전시를 위해 그동안 모아왔던 부적을 패널과 벽에 빽빽이 붙여 놓으니 공간이 모자랐다. 그래서 실제로 가정에서 하듯 부적을 대들보와 서까래에까지 붙여 놓았다. 그러고 나니 한옥 바닥에 누워야 그림을 구경할 수 있었다. 신발을 신고 들어가 서서 관람하는 일반적인 전시가 아니라 신발을 벗고 바닥에 누워 전시 공간을 온몸으로 느끼는 한옥 체험형 전시가 된 것이다. 이때 가회민화박물관의 향후 전시 방향까지 자연스레 잡혔다. 특히 벽사용 민화 중 가장 민화답고 한국 문화의 원초적 뿌리의 상징이기도 한 호랑이를 주제로 한 그림을 통해 우리 민족이 호랑이를 얼마나 영험하고 친근하게 여겼는지를 알리고자 했다. 민화는 한국인의 생활 정서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이다. 전통의 체취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서울 북촌한옥마을에서 민화 박물관을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은 내게는 더없는 행운이었다. 해외 전시 첫 전시에는 우리 민속학자들은 물론 한국의 민간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외국인들도 다수 방문해 주었다. 그후 매년 기획 전시를 통해 수집한 민화를 대중들에게 알려오고 있다. 자체 소장품만으로 기획한 전시들이라서 규모가 제한적이기는 해도, 특정 주제로 분류된 민화를 선보일 수 있어서 보람이 있다. 전시는 나의 수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후 (2003), (2004), (2005), (2006), (2007) 등 20여 회가 넘는 전시를 진행해 왔다. 서울뿐 아니라 지방 전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시를 기획할 때마다 각 화제에 대해 연구가 깊어지고 그 성과는 도록으로 남았다. 좁고 가난한 박물관에서 출발한 소박했던 전시는 바다 건너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2006년 3월, 몽골 울란바토르 자나바자르 박물관에서 한국 민화의 익살과 재치를 담은 개최를 시작으로 일본 니시노미야 오오타니 기념미술관에서 (2010), 주프랑스 한국문화원 주최 (2010), 오사카 사야마이케 박물관 (2012) 전시에 특히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런가 하면 2013년 1월부터 2015년 7월까지 총 8회에 걸쳐 호주 순회 전시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 후 2018년에는 모스크바 국립동양미술관에서 러시아 최초로 민화 단독 전시를 개최하였으며, 뒤이어 벨라루스 민스크에 위치한 국립 벨라루스 미술관으로 전시가 이어졌다. 호랑이 특별전 어느덧 민화를 만난 지 47년이 되었다. 요즘 나의 목표는 호랑이를 그린 민화 100점을 한데 모아 ‘호랑이 특별전’을 여는 것이다. 전시는 자연스레 논리적, 체계적 연구를 수반할 것이며 도록으로 남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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