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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AUTUMN 114

한국 문화 콘텐츠, 한국어, 그리고 한글 BTS로 대표되는 K-pop, 봉준호 감독의 영화 , 그리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같은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온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현상은 이제 한국어와 한글로 확장되고 있다. 국외 한국어 및 한국 문화 교육 기관인 세종학당의 수강생들이 2020년 한글날을 기념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적어 들고 있다. 세종학당은 올해 기준 82개국에 234개의 학당을 운영하고 있다. ⓒ 세종학당재단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외국인이 드물었다. 그래서 2014년부터 2017년까지 JTBC가 방영한 TV 예능 프로그램 은 큰 놀라움을 안겨 줬다. 한국에 거주하는 여러 나라의 외국인들이 능숙한 한국어로 특정 주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광경이 매우 신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인 이상으로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외국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입담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들 중 대다수는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에 정착한 이유가 문화 콘텐츠에 매력을 느껴서였다고 말한다. 1990년대에 한국 드라마들이 중화권에 소개되면서 이른바 ‘한류’ 붐이 촉발되었고, 2000년대 초반에는 첫사랑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그린 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가 2010년대부터 K-pop이 아시아부터 미국, 남미, 유럽에 이르기까지 굳건한 팬덤을 형성하면서 한국 문화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와 가요 속 노랫말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만들어 낸 문화 콘텐츠로 인해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단순히 콘텐츠의 성공을 넘어 변화하고 있는 글로벌 사회의 한 양태를 보여 준다. 2019년 방콕 임팩트 아레나(Impact Arena) 및 임팩트 국제전시장(Impact Exhibition Center)에서 열린 ‘KCON 2019 THAILAND’에서 현지 팬들이 K-pop 노래를 따라 부르며 안무를 배우고 있다. KCON은 엔터테인먼트 기업 CJ ENM이 2012년부터 매년 해외 여러 지역에서 개최하고 있는 K-pop 페스티벌이다. © CJ ENM KCON 풍경 KCON은 엔터테인먼트 기업 CJ ENM이 2012년부터 주최하고 있는 K-pop 페스티벌로 매년 해외 여러 지역에서 열린다. 단지 대중 음악 공연뿐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를 비롯해 IT, 패션, 뷰티 분야의 상품까지 아우르며 한국 문화를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인 2019년 10월에는 방콕에서 행사가 열렸는데, 이틀 동안 무려 4만 5천여 명의 현지 팬들이 몰려들었다. K-pop과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 해외 팬들은 소주나 라면, 화장품 같은 한국산 상품에도 관심이 많다. 그래서 상품들이 진열된 부스 앞에는 긴 줄이 이어지기 마련인데, 그러다가 아이돌 그룹의 공연이 펼쳐지면 여럿이 함께 한국어 가사로 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춤을 추는 광경으로 이어지곤 한다. 행사장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이런 모습만이 아니다. 팬들이 직접 쓴 응원 메시지가 벽면 가득 빼곡하다. 그중에는 “사랑해요”, “응원합니다”, “너무 좋아요” 같은 한국어 문장들도 보인다. 특히 방콕 콘서트에서 스페셜 MC로 무대에 오른 아이돌 그룹 2PM의 태국인 멤버 닉쿤은 태국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사용하며 공연을 진행했는데, 자국어 번역 없이도 그의 한국말을 듣고 웃거나 환호하는 태국인들이 적지 않았다. 태국에서 K-pop은 한국어 배우기 열풍에 기폭제로 작용했다. 그곳의 국공립 중등학교에서 2010년 이후 한국어를 정규 과목으로 채택하여 현재 4만 명이 넘는 중고등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것을 알려졌다. 또한 2018년 대학 입시부터 한국어가 제2외국어 선택 과목이 됨에 따라 학습 열기가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BTS와 아미 전 세계적으로 막강한 팬덤을 지닌 BTS가 한글과 한국어 전파의 일등공신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2012년 발표된 싸이의 은 그해 대중음악계에서 최고의 히트곡이었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일반인부터 인기 연예인들까지“오빤 강남스타일”을 외쳤다. 하지만 그 가사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반면에 최근 신곡 와 로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에서 연속 8주 1위 기록(7월 26일 기준)을 세운 BTS는 그 이전 노래의 대부분을 한국어로 불렀고, 노래의 메시지를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팬들이 한국어를 공부하게 만들었다. 2018년 미국 뉴욕 시티필드에서 열린 공연에 내걸린 “고마워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줘서”라는 한글 응원 슬로건은 그런 현상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나아가 아미의 폭발적 영향력을 의식해 이제 국제 사회에 도움을 청하는 한글 호소문이 등장할 정도가 되었다. 지난해 아르메니아 소녀들은 자국과 아제르바이잔 사이에 일어난 무력 충돌에 반대하며 “평화를 원한다”고 적힌 한글 팻말을 들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올해 초 미얀마에서도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K-pop 팬들이 한글로 “도와주세요”라는 문구를 적어 소셜미디어에 남긴 바 있다. ‘KCON 2019 THAILAND’에서 현지 팬들이 K-pop 노래를 따라 부르며 안무를 배우고 있다. KCON은 엔터테인먼트 기업 CJ ENM이 2012년부터 매년 해외 여러 지역에서 개최하고 있는 K-pop 페스티벌이다. © CJ ENM 글로벌 문화 공동체 한국어에 대한 관심과 수용에 K-pop이 주효한 역할을 했지만, 유튜브를 타고 한국 음식을 소개하는 비디오가 해외에서 인기를 끌면서 아예 고유 명사가 되어 버린 ‘먹방’처럼 음악 외에 다른 장르나 매체를 통해 한글 단어가 알려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 드라마가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플랫폼으로 퍼져 나가면서 드라마가 담고 있는 한국 사회의 여러 면모가 한국어 단어를 통해 이해되기도 한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젊은 세대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꼰대’, 한국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숨죽여 살다가 생기는 병인 ‘화병(火病)’, 아기를 업어 키우는 데 사용하는 전통적인 육아 용품 ‘포대기’ 등은 한국 문화의 일면을 설명해 주는 매개로 작용했다. 이러한 현상은 일차적으로 콘텐츠 자체가 지닌 재미와 파급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SNS 같은 글로벌 네트워크가 한국 문화뿐 아니라 그간 저평가되고 소외되었던 세계 여러 지역 다양한 로컬 문화들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유튜브 같은 글로벌 디지털 플랫폼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환경을 제공했다. 이 글로벌 네트워크가 일상화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나 언어를 뛰어넘는 글로벌 문화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됐고, 서로 다른 문화들을 이해하려는 욕구를 갖게 됐다. 한글에 대한 관심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고 확산된 것이다. 이에 따라 글로벌 네트워크에 등장하는 특정 인물이나 콘텐츠가 갖는 매력이 이전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 클럽이 한글날을 기념해 “한글날을 축하합니다”라는 한글 메시지를 구단 공식 SNS에 올렸던 것은 박지성(Park Ji-sung 朴智星) 선수의 매력이 촉발시킨 결과다. 으로 아카데미 4관왕을 거머쥔 봉준호(Bong Joon-ho 奉俊昊) 감독은 그 직전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면서 이런 수상 소감을 남겼다. “자막의 장벽을… 장벽도 아니죠, 1인치 정도 되는 그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영화입니다.” 그의 말이 의미하고 있는 것처럼 글로벌 무대에서 언어는 더 이상 장벽이 아니다. 한국인이 만들어 낸 문화 콘텐츠로 인해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단순히 콘텐츠의 성공을 넘어 변화하고 있는 글로벌 사회의 한 양태를 보여 준다. 동시에 이러한 현상은 한국 문화 콘텐츠가 앞으로 더욱 인류의 보편적 감성과 가치에 부응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어와 한글이 인류 문화를 보다 풍요하게 가꾸어 나가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정덕현(Jung Duk-hyun 鄭德賢)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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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AUTUMN 111

K-Pop 팬들의 필수 어휘 해외의 열성 K-pop 팬들은 자주 만나는 한국어 단어를 종종 발음 그대로 로마자로 표기해 온라인에서 서로 소통한다. 각기 자국어로 번역했을 때 단어가 내포하는 독특한 의미와 재미를 제대로 표현하고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K-pop 팬덤의 글로벌 유대감을 상징하는 새로운 문화 현상이다. 이들이 쓰는 말이 바로 ‘돌민정음’, 즉 ‘아이돌’과 ‘훈민정음’을 합성한 신조어이다. 여기 돌민정음의 몇 가지 설명과 용례를 간단히 엮어 본다. 대박(daebak) 원래 어떤 일이 크게 성공하는 것을 뜻하는 명사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놀라거나 뜻밖에 매우 기쁜 일이 생겼을 때 내뱉는 감탄사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TV 드라마의 대사 또는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라서 한류 팬들에게 매우 익숙하다. 대박! BTS의 가 Billboard 차트 1위를 차지했어. 오빠(oppa) 원래 여동생이 손위 남자 형제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지만, 가족이 아닌 경우에도 여성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에게 사용할 수 있다. 단, 화자와 청자가 서로 격의 없이 친밀한 관계일 때로 한정된다. 이 때문에 K-pop 여성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남성 멤버를 오빠라 부르며 팬심을 표현한다. 최근에는 남자 친구나 남편을 부를 때도 흔히 사용되어 논란이 되기도 한다. 저 오빠는 춤은 잘 추는데 노래 실력이 못 미쳐서 안타까워. 멘붕(menbung) 영어 단어 ‘멘탈(mental)’과 한국어 단어 ‘붕괴(bunggoe meaning“breakdown”)’를 합성하여 만든 신조어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을 겪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거나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사용된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해체된대. 너무 멘붕이야. 아이고(aigo) 아프거나 힘들 때, 놀라거나 기막힐 때, 반갑거나 좋을 때, 당황하거나 절망했을 때 등 여러 상황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는 감탄사이다. 누군가를 꾸짖을 때도 한탄하는 의미로 이 말을 쓴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이 단어가 나이 든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옛날 말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그저 어감이 좋은 재미있는 말이다. 아이고, 죽겠다. 날씨가 왜 이렇게 덥냐. 애교(aegyo) 남에게 귀엽게 보이는 태도를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가져야 하는 자질로 인식되어 왔으며, 반대로 애교가 있는 남성은 남성성이 결여된 것으로 폄하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성별을 떠나 누군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행동을 했을 때 이 말을 사용한다. K-pop 팬들에게는 필수적인 단어로 알려졌다. 그 보이 그룹의 막내는 애교가 많다. 막내(maknae, or mangnae) 여러 형제자매 중에서 맨 나중에 태어난 가장 어린 사람을 말한다. 조직이나 단체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을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보통 막내는 형들이나 언니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통념이 있으며, 실수나 잘못을 저질러도 용인되는 경우가 많다. K-pop 팬들은 한 그룹의 멤버들을 나이를 기준으로 형·언니 라인과 막내 라인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Hey 막내야, 물 한 잔만 갖다 줄래? 페이크 막내(fake maknae) 실제로 막내가 아니면서도 막내처럼 귀엽거나 어리게 구는 멤버를 가리킨다. 형이나 언니들이 막내처럼 굴면 수직적이고 무거운 팀 분위기가 밝아지는 측면이 있다. ‘evil maknae’라는 표현도 있다. 일반적인 막내처럼 고분고분하지 않고, 형과 언니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심한 장난꾸러기를 말한다. K-pop 팬들이 한국어 단어와 영어 단어를 섞어서 만든 대표적인 신조어다. 제일 어려 보이는데 저 형 나이가 서른이 넘었다고? 페이크 막내가 틀림없군! 귀엽다(kyeopta/kyopta, or gwiyeopda) 해외 K-pop 팬들이 한국어 단어 ‘귀엽다(gwiyeopda)’의 로마자 표기를 발음하기 쉽게 변형한 것으로, 한국어 단어의 발음이 현지화된 특별한 사례이다. 이 강아지 정말 귀엽다. (This puppy is really kyeopta.) 자기야(jagiya) 자기’는 사전적 정의로는 자기 자신을 뜻하는 명사이며, 앞에서 이미 언급된 사람을 다시 가리키는 3인칭 대명사로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타인을 부를 때 쓰는 격조사 ‘야’는 이 단어 뒤에 붙을 수 없다. 그러나 구어체에서는 연인이나 배우자를 좀 더 살갑고 애교스럽게 부를 때 ‘자기야’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K-pop 팬들은 명사와 조사가 결합된 이 말을 “My Korean jagiya”처럼 명사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야, 잘 자. 내 꿈 꿔. 사생(saseng) ‘사생활’의 줄임말로 좋아하는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며 사생활까지 침해하는 극성 팬을 가리킨다. 지속적으로 메시지를 보내거나 몰래 사진을 찍는 것에서 나아가 집을 알아내 무단 침입하는 이들도 있다. 스타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질수록 팬덤 내에서 우월한 지위를 가지기 때문에 사생에 빠지게 된다는 분석이 있다. 얘들아, 우리 나쁜 사생 팬이 되지는 말자! 눈치(nunchi)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는 능력을 뜻한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대체로 대인 관계가 원만하고, 남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하는 데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반면에 이 낱말은 종종 부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해 소신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쓰인다. 태형이는 눈치가 빨라서 내가 무엇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금세 알아. 강우성(Kang Woo-sung 姜宇城) 『K-Pop Dictionary』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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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AUTUMN 82

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 한류는 이제 아시아를 너머 유럽과 아프리카, 미 대륙까지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한국 문화에 매료된 세계 여러 나라 팬들은 단순한 콘텐츠 소비에만 만족하지 않고 있다. 많은 이들이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식으로 놀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한다. 특히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에 기여하고 싶어요.” 응웬 티 투이 란(Nguyen Thi Thuy Lan 베트남 후에외국어대학교 4학년) 응웬 티 투이 란 씨는 베트남 후에외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한류에 푹 빠진 뒤로 한국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싶어졌다. 최근 제주대학교에서 어학 연수를 시작한 그는 앞으로 한국어 교사가 되어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를 돕는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 꿈이다. 그는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하는 한국어가 무척 아름답게 들렸다”면서 “최근에는 베트남에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한 덕분에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응웬 씨는 한국어를 배운 뒤로 자연스레 한국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예를 들어 밥그릇에 수저를 꽂아 놓지 않거나 밥을 먹을 때는 숟가락을 사용해야 하는 점, 식사가 끝나면 수저를 원래 있던 자리에 놓아야 하는 식사 예절을 배웠다. 그는 “베트남인의 식사 예절보다 복잡했지만, 문화를 이해할수록 말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겼다. 응웬 씨가 대학교 일학년 때 말하기 수업에서 ‘신발’이라는 단어를 발음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크게 웃었다고 한다. 그의 발음이 유사한 발음의 한국어 욕설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제가 발음한 단어는 나쁜 말이라고 해서 친구들도 크게 웃었지만, 그 덕분에 발음에 더욱 신경 쓰게 됐어요.” 응웬 씨는 베트남에서 한국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음을 체감한다고 말했다. 한국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듣고 한국 방송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한국의 음식과 놀이에 관심이 생긴 학생들도 많다고 했다. 베트남 초·중·고등학교 정규 교육 프로그램에 한국어가 도입된 이유다. 이제 4년째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우리’다. 처음엔 ‘우리 남편’, ‘우리 아내’라고 말하는 한국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단어에 공동체 문화가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좋아졌다고 한다. 응웬 씨는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한국 문화는 세계화 시대에 큰 저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어를 배우며 한류를 알게 됐어요.” 헨리 로클리프(Henry Rawcliffe 영국 쉐필드대학교 2학년) 헨리 로클리프 씨는 요즘 한국어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BTS 멤버들이 자주 사용하는 한국어 표현을 배우는 온라인 강좌를 수강하고 있어서다. 이 강좌는 문법 중심 교육 대신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생생한 언어를 그대로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수강생들의 만족도가 높다. 그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데 관심이 있었다”면서 강좌가 개설되었을 때 곧바로 수강 신청을 했다고 말했다. 이 강좌는 BTS 소속사 하이브의 자회사인 하이브에듀와 한국외국어대학교가 함께 제작한 교재로 수업을 진행한다. 로클리프 씨는 대중 매체에서 접한 한국 문화도 한국어를 배우는 계기가 됐다며, “한국 문화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언어를 배우는 거잖아요”라며 웃었다. 강좌를 수강한 지 이제 반 년. 기초적인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그는 나중에 스스로 한국어를 학습하는 수준까지 되기를 꿈꾼다. 그는 “아직 한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창덕궁 같은 멋진 공간을 여행하고 싶다”고도 했다. 대개 한류로 인해 한국어를 접하게 되는 것과 달리 그는 거꾸로 한국어를 배운 후 한류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같은 강의를 듣는 많은 수강생들이 항상 BTS 노래를 들으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강의를 통해 K-pop을 즐겨 듣게 되면서 노래 가사를 이해하려는 욕구가 커졌다고 한다. 그가 한국어에서 느낀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존중’이다. 인종 차별과 혐오가 무분별하게 퍼져나가는 상황에서 “다른 나라들이 한국의 존중 문화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헨리 씨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어는 ‘엉금엉금’, ‘깡총깡총’ 같은 의태어다. 그는 영어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이런 단어들이 사랑스럽다고 말했다. 한글은 쉽지만 한국어 문법은 어렵다고 느낀다는 그는 “한국 드라마와 음악을 통해 한국어를 지속적으로 배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A Teacher’s View “학생들에게 지금 배우는 것을 곱씹으라고 말해요.” 김미옥(金美玉 용인대학교 한국어학당 주임교수) 12년간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온 용인대학교 한국어학당 김미옥 주임교수는 한류의 힘을 느끼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수강생들 대부분이 한국 아이돌 가수의 열렬한 팬이기 때문이다. 그는 “태권도가 특화되어 있는 용인대의 경우 과거에는 태권도를 배우며 한국어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 학생들이 많았던 것에 비해 최근에는 슈퍼주니어, 동방신기, BTS 팬들이 교환 학생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수강생들 대부분이 MZ 세대이다 보니 교육법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비대면 수업이 많아지면서 학생들의 집중력을 높일 수 있는 묘책이 필요해졌다. “교실에서 하는 대면 수업은 현장의 상황에 대처하며 집중을 유도할 수 있었지만, 근래의 화상 수업에서는 게임하듯 가르쳐야 학생들이 따라오더군요. 그래서 가끔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요.” 한국인과 외국인이 언어를 대하는 태도는 교수법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국인은 문법이나 단어 사용의 정확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말하기로 소통이 되면 쓰기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는 “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국인 교사들이 문법과 단어를 중심으로 평가하는 걸 억울하게 생각하는 외국인 학생들도 많다”고 말했다. 또 한국 학생들과 달리 ‘숙제’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한글은 배우기 쉬운 문자라는 점에 김 교수도 동의한다. 처음 보는 생소한 문자임에도 학생들이 쉽게 익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음은 그렇지 않다. 낱자는 비교적 잘 발음하는 편이지만 연음이나 격음, ㅎ 탈락, ㄴ 첨가 같은 발음은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많다. 김 교수의 학생들은 용인대 한국어학당의 교육 과정 중 3급에서 가장 큰 고비를 겪는다고 한다. 1급과 2급은 초급 단계라 독학도 가능하고, 특히 K-pop을 좋아하는 학생들은 가뿐하게 정복한다. 하지만 3급부터는 단어와 문법의 난이도가 달라진다. 단어를 익혔다고 해도 문장 안에서 그 단어의 의미를 금세 떠올리기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를 잘 견디면 4급부터는 재미있게 배울 수 있다. “언어는 기본이 가장 중요한 만큼 1급을 탄탄히 학습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간혹 진급에만 욕심을 내는 학생들이 있는데 지금 단계에서 습득한 것들을 충분히 곱씹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해도 곧 위기를 맞게 되죠.” 결국 기초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김 교수 밑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전 세계에서 꿈을 펼치고 있다.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태권도장을 운영하거나 국제 심판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태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중국인 학생도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강영운(Kang Young-woon 姜詠云) 『매일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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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AUTUMN 67

백성을 위한 소리 글자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한글은 만들어 낸 인물과 시기, 그리고 목적이 분명한 유일한 문자이다. 또한 한 음절을 초성·중성·종성으로 구분한 최초의 문자이며, 비슷한 소리를 나타내는 자음이나 모음이 형태상으로도 유사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글자로 평가된다. 서울 경복궁 앞 광화문 광장에 위치한 세종대왕 동상. 높이 6.2m, 폭 4.3m 규모로 기단 위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동상은 홍익대학교 조소과 교수이자 조각가인 김영원(金永元)이 설계하여 2009년 건립되었다. 세종은 조선의 4대 군주로 한글 창제를 비롯해 과학 기술과 음악을 크게 발전시켜 중세 한반도의 문예 중흥을 이끌었다. ⓒ 하지권(Ha Ji-kwon 河志權) 한글은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재위 1418~1450)이 1443년 완성하고 1446년 반포한 글자이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한국어 음성언어는 존재했지만, 그에 맞는 문자언어가 없어 오랜 기간 사람들은 한자와 한문으로 음성언어를 표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자와 한문은 중국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한국어 음성언어를 제대로 표기하기가 어려웠다. 말과 글이 제각각인 상황에서 한자와 한문을 비교적 능숙하게 사용한 지배 계층은 이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일반 백성들은 이를 배워 사용하기 어려웠다. 세종은 일반 백성들이 글자를 쉽게 배워 사용하며 생활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데 천착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한글이었다. 세계 문자사를 거시적으로 봤을 때 한글도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수천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다른 주요한 문자들에 견주어 봤을 때 한글은 창제 배경이나 제자 원리에 있어 뚜렷한 특징이 존재한다. 세계 문자사에서 한글은 어떤 유형으로 분류되나?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표음문자(phonography)와 표의문자(logography)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문자는 음성언어(spoken language)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고, 음성언어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음성언어를 구성하는 단위 가운데에는 음소(phoneme)나 음절(syllable)처럼 어떤 소리에 해당하지만 그 자체로 의미는 갖지 않는 것이 있고, 형태소(morpheme)나 단어처럼 어떤 소리에 해당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특정 의미를 갖는 것도 있다. 전자가 표음문자이고, 후자가 표의문자이다. 표음문자에 속하는 한글 문자 체계에서 ‘ㄱ’, ‘ㅏ’ 같은 글자는 한국어 음성언어의 어떤 자음과 어떤 모음을 나타낼 뿐 의미와는 상관없다. 반면에 표의문자인 한자 ‘首’는 중국어 음성언어의 어떤 단어와 대응되는데, 이 단어는 ‘shǒu’라는 소리를 갖고 있으며 또한 머리, 으뜸, 우두머리라는 의미도 갖는다. ‘首都’가 중국어 단어 ‘shǒudū’를 나타낼 때는 이 의미가 살아 있다. 하지만 ‘首尔’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나타내고 ‘shǒu’ěr’로 발음될 때에는 본래의 의미가 없어진다. 이는 표의문자 체계에 속하는 어떤 글자를 필요에 따라 본연의 방식이 아닌 특수한 방식으로 사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용법을 ‘가차(假借 rebus)’라고 한다. 『석보상절』 6, 9, 13, 19권. 1447. 금속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세종의 명으로 둘째 아들 수양대군(뒤의 세조)이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을 담아 편찬한 책이다. 여러 불경에서 발췌해 모은 글을 한글로 번역하여 엮었으며, 문장이 매우 유려하여 당시 국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 국립중앙도서관 한글은 다른 문자의 영향을 받았을까 인류가 사용해 온 문자들은 대체로 표의문자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다. 초기에는 표의문자를 표의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표음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점차 후자의 용법이 우세해지고 마침내 후자의 용법만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나타난 것이 표음문자다. 이집트 표의문자에 영향을 받은 페니키아문자는 표음문자화되어 서쪽으로는 유럽의 그리스문자, 키릴문자, 로마자 등으로 발전했고 동쪽으로는 서아시아의 히브리문자, 아랍문자 등으로 이어졌다. 표음문자의 발달에서 일정한 경향이 관찰된다. 히브리문자, 아랍문자 등은 자음과 모음 가운데 주로 자음만을 온전히 표기한다. 이런 문자를 자음문자(abjad)라고 하는데, 이 서아시아의 자음문자가 인도로 가서 자음중심문자(abugida)로 발달한다. 자음 뒤에 오는 모음이 기본 모음(default vowel)일 때는 아예 표기하지 않고, 그 외의 모음일 때는 특수한 부호(diacritic)를 첨가함으로써 나타낸다. 티베트문자도 기본적으로는 자음중심문자지만, 모음 글자가 약간 더 독립적이다. 파스파문자에 가서는 모음 글자가 자음 글자로부터 독립하기에 이른다. 모음 글자가 자음 글자와 완전히 대등한 단계에 이른 글자가 알파벳인데, 파스파문자는 자음중심문자와 알파벳의 중간 단계이다. 이처럼 지리적으로 볼 때 동쪽으로 갈수록 모음 글자의 독립성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시기적으로 티베트문자와 파스파문자보다 약간 뒤에 출현한 한글은 이러한 경향이 극단에 이르러 온전한 알파벳이 만들어진 경우다. 한글은 몇 명이 만들었을까? 오늘날 전 세계에서 수천만 명 이상의 사람이 사용하는 주요 문자들은 모두 최초의 발명자를 특정하기 어렵다. 매우 오랜 세월 동안 자연발생적으로 변천하고 확산되어 왔기 때문이다. 오직 한글만이 예외이다. 한글은 한 개인에 의해 매우 짧은 시간 동안 발명된 문자이다. 한글을 조선 시대 학문 연구 기관인 집현전의 여러 학자들이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꽤 널리 퍼져 있지만, 여러 사료를 종합해 보면 세종 개인의 창조물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시대의 임금이 왕위에 있는 동안 조정에서 일어난 일과 그 외 여러 사실들을 정리한 역사서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세종 25년 12월 기록 말미에 그가 한글을 창제했다는 짤막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이 한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만약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만들었다면 그 과정이 당연히 실록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록에 한글 창제 과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신하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왕이 한글 창제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추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세종은 중국 음운학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혼자서도 당시 한국어의 음운 체계를 분석하고 각 음소의 특징, 음소들 사이의 관계를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한글을 혼자서 다 만들고 난 뒤에야 한글을 사용하여 책을 편찬하는 등의 일에 집현전 학사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월인천강지곡』 권상(卷上). 1447. 금속활자본. 미래엔교과서박물관 소장. 세종이 석가모니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직접 지은 시가집(詩歌集)이다. 한글 창제 이후 만들어진 가장 첫 문헌 중 하나이며, 언어학적 가치와 문학적 가치로 2017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 미래엔교과서박물관, 문화재청 제공 표음문자로서 한글의 특징은? 한글은 표음문자 중에서도 음소문자이고 음소문자 중에서도 알파벳이다. 문자 체계의 기본 단위가 음성언어의 음소에 대응하고, 자음 글자와 모음 글자의 지위가 대등하다. 이 점에서는 로마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로마자를 비롯한 다른 문자 체계의 경우 어떤 두 음소가 비슷하다고 해서 이를 나타내는 두 글자의 모양이 비슷한 것은 아니다. 영어 표기 체계로서 로마자를 생각해 보면, p와 b는 양순음(bilabial), t와 d는 치조음(alveolar), k와 g는 연구개음(velar)이다. 조음 위치가 같다고 해서 각 글자들의 모양이 비슷한 것은 아니다. 또한 p, t, k는 무성음(voiceless)이고 b, d, g는 유성음(voiced)인데, 무성음과 유성음 역시 글자들끼리 형태상 유사성이 없다. 반면에 한글은 양순음은 ‘ㅁ, ㅂ, ㅍ, ㅃ’, 치조음은 ‘ㄴ, ㄷ, ㅌ, ㄸ’, 연구개음은 ‘ㅇ, ㄱ, ㅋ, ㄲ’으로 조음 위치가 같은 글자들이 형태상 유사하다. 그리고 비음(nasal) ‘ㅁ, ㄴ, ㅇ’, 평음(plain obstruent) ‘ㅂ, ㄷ, ㄱ’, 격음(aspirated) ‘ㅍ, ㅌ, ㅋ’, 경음(glottalized) ‘ㅃ, ㄸ, ㄲ’ 등 소리 측면에서도 형태상 일정한 관계가 있다. 비음 글자에 획을 더하여 평음 글자를 만들고(ㅁ→ㅂ, ㄴ→ㄷ), 평음 글자에 획을 더하여 격음 글자를 만들며(ㅂ→ㅍ, ㄷ→ㅌ, ㄱ→ㅋ), 평음 글자 2개를 좌우로 나란히 배열하여 경음 글자를 만드는(ㅂ→ㅃ, ㄷ→ㄸ, ㄱ→ㄲ) 식이다. 소리의 관계를 글자 모양으로 잘 반영하고 있는 점은 다른 문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글의 제자 원리와 체계를 간단히 정리한 도표이다. 발음 기관을 형상화한 자음은 발성 위치에 따라 어금닛소리, 혓소리, 입술소리, 잇소리, 목구멍소리의 기본 다섯 글자(ㄱ, ㄴ, ㅁ, ㅅ, ㅇ)를 정하고 여기에 획을 더해 글자를 추가했다. 하늘(ㆍ), 땅(ㅡ), 사람(ㅣ)을 본떠 만든 모음은 세 가지 기본 요소를 다양하게 결합하는 방식으로 소리를 표현한다. 지리적으로 볼 때 동쪽으로 갈수록 모음 글자의 독립성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시기적으로 티베트문자와 파스파문자보다 약간 뒤에 출현한 한글은 이러한 경향이 극단에 이르러 온전한 알파벳이 만들어진 경우다. 2021년 6월 서울 인사동에서 출토된 한글 금속활자 중 일부. 도시 환경 정비 사업 부지에서 발굴 조사 중 발견된 금속활자 1,600여 점은 모두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처럼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되어 있는 한글 금속활자 600여 점도 포함되어 있다. 이 외에 세종 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해시계, 물시계의 부품과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제조된 총통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조선 시대 여러 관청이 모여 있던 곳으로 이 유물들은 1588년 이후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지역에서 확인된 지하 6개 문화층 가운데 지하 3m 최하층에서 발견되었다. ⓒ 문화재청 어떻게 보급되고 확산되었나? 한글이 창제된 초기에는 상층 지식인들이 여전히 한자와 한문을 주로 사용했고 한글은 그다지 존중받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점차 한글 사용이 확대될 수 있었던 데에는 여성, 불교, 소설의 역할이 컸다. 전근대 시기에는 지배층에서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교육을 충분히 체계적으로 받지 못했다. 능력과 의욕이 있는 일부 여성은 한문을 배워서 사용했지만, 다수의 여성들은 한문에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글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편지를 주고받을 때는 대체로 한글을 사용했다. 또한 타지에 나가 있는 양반 남편과 고향 집에 있는 아내가 서신으로 왕래할 때도 대개 한글을 사용했다. 남편은 한문을 쓸 수 있지만 아내가 한문에 미숙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글 편지는 당시 한국어의 모습과 한글 사용 양상을 알려줄 뿐 아니라, 당대의 생활상을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소중한 자료이다. 한편 불교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을 가급적 많은 대중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한문 불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한글로 표기하여 널리 보급했다. 조선은 표면적으로 성리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배척했지만, 왕실에는 개인적으로 불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꽤 있어서 이들의 후원으로 불경이 간행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가 하면 조선 후기에 들어 계층과 성별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즐기게 된 현상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초기에는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적고 민간의 인쇄 문화도 그리 발달하지 못해 한글 소설을 손으로 필사하고 이를 돌려보는 식으로 소설을 감상했다. 한글을 소리내 읽을 때 내용을 재미있게, 그리고 감정적으로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소설을 읽어 주는 일도 빈번히 행해졌다. 그러다가 남이 읽어 주는 것을 듣는 데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글을 배워 읽어 보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소설 향유의 욕구가 한글 문해력 향상을 촉진한 것이다. 18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소설 유통의 확대와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인구의 증가는 한글 사용 확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박진호(Park Jin-ho 朴鎭浩)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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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AUTUMN 95

영화가 그린 한글의 역사 는 15세기 조선 시대에 한글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고, 는 20세기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일제가 말살하려던 한국어와 한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을 다룬 영화다. 한국 영화에 매료되어 서울로 유학 온 전 아사히신문 기자 나리카와 아야가 두 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조철현(Cho Chul-hyun 曺喆鉉) 감독의 2019년 개봉작 에서 세종이 신미 스님으로부터 표음문자인 산스크리트어는 소리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는 장면이다. 한글 창제 과정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흥미를 끌었다. 나는 가끔 한국 학생들에게 강연할 기회가 있는데, “히라가나나 가타가나는 언제 만들어졌어요?”라는 질문을 받고 당황한 적이 있다. 히라가나도, 가타가나도 한자로부터 파생된 글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변화를 거쳐 만들어졌기 때문에 창제 시기를 언제라고 못박기 어렵다. 반면에 한글은 창제와 반포에 관한 확실한 기록이 있는 전 세계 유일의 문자다. 일본에서는 히라가나나 가타가나와 함께 한자도 쓰고 있다. 대다수 일본인들은 한자가 중국에서 들어온 문자라는 건 알지만, 한자도 일본어의 일부라고 인식한다. 따라서 한자에 비해 히라가나나 가타가나에 특별히 애착을 가지는 일본인들은 별로 없다. 조철현(Cho Chul-hyun 曺喆鉉) 감독의 2019년 개봉작 는 한글 창제 과정에 대한 영화다. 도입부에 “이 영화는 훈민정음의 다양한 창제설 가운데 하나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라는 자막이 나온다. 이 설명처럼 영화는 세종대왕과 신미(信眉) 스님이 주축이 되어 한글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영화적 허구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강조되는 것처럼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는 창제 목적은 사실이다. 영화 속에 상징적인 대사가 나온다. 한글을 만들기 전 세종대왕은 한자로 쓰인 책들을 버리면서 “다 쓸모없는 종잇조각일 뿐”이라고 하거나 “내가 아무리 많은 책을 만들어도 백성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렇듯 한글과 한자 사이에는 사회적 신분과 계급이라는 간극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는 중국이란 대국이 있었다. 그는 “나는 중국을 능가하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면서 그것은 바로 “모든 백성들이 문자를 읽고 쓰는 나라”라고 말한다. “복숭아 속의 씨가 몇 개인지는 누구나 알지만, 그 씨에 복숭아가 몇 개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미 스님이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 안평대군에게 산스크리트어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두 아들이 세종과 함께 은밀히 한글 창제를 추진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 수양대군은 불경 언해서 『석보상절』을 지었다. 왕의 선물 이 영화가 강조하는 또 다른 점은 한글이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이다. 신미 스님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를 그대로 문자로 표현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하며 수많은 시도를 한다. 이들이 그토록 표음 문자에 매달린 것은 표의 문자인 한자로는 조선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를 제대로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헌왕후(1395~1446)의 존재도 인상적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한국 속담처럼 일반적으로 한국 여성들은 어린 시절부터 남성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부덕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소헌왕후는 영화 속에서 “암탉이 울어야 집안이 흥하고 나라도 번성하리라 믿는다”고 말한다. 여성이 문자를 배우고 힘을 발휘해야 가정도 나라도 번성한다는 뜻이다. 궁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장면도 있다. 사회적 약자인 백성과 여성에게 힘을 실어 주는 문자가 한글이었던 것이다. 한글을 만든 다음에도 세종대왕의 고민은 계속된다. 한자를 중요시하고 새로운 문자를 거부하는 신하들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불교를 배척했기에 신미 스님이 한글 창제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새 글자의 반포를 더욱 격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뜻을 굽히지 않은 채 신하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며 훈민정음으로 제작된 책을 배포한다. 영화에서 신미 스님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의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말한다. “복숭아 속의 씨가 몇 개인지는 누구나 알지만, 그 씨에 복숭아가 몇 개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글의 탄생으로 얼마나 풍요로운 세상이 펼쳐질지 알 수 없다는 뜻인 것 같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글은 세종대왕이 후세에 남겨준 크나큰 선물이라고 느꼈다. 나 또한 그 선물을 받은 사람 중 하나로 종종 한글로 기사를 쓰고 있다.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엄유나(Eom Yu-na 嚴柔那) 감독의 에서 주인공 조선어학회 회장 류정환(柳正焕, 오른쪽)과 사환 김판수(金判秀)는 일제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한국어 사전 편찬을 추진하며 한반도 전역의 사투리를 수집한다. 류정환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으나, 김판수는 영화를 위해 설정된 가상 인물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Lotte Entertainment Co., Ltd) 독립운동의 일환 같은 해에 개봉된 엄유나(Eom Yu-na 嚴柔那) 감독의 는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국어와 한글을 말살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제목의 ‘말모이’는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주시경(周時經 1876~1914)과 그 제자들이 1911년 편찬한 최초의 국어사전인데, 편찬자들의 사망과 망명 등으로 출판되지는 못했다. 당시 만들어진 초기 원고는 여러 단체로 인계되었다가 조선어학회를 통해 1942년 초고가 완성됐다. 그러나 인쇄 직전 일제의 탄압으로 원고가 유실되었다가 1945년 해방 직후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영화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 세종대왕이 바랐던 것처럼 과연 한글이 한국 민중에게 널리 전파됐는지 의문이 든다. 주인공 김판수(金判秀)가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까막눈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캐릭터에는 글자를 깨우치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보여 주기 위한 영화적 설정이 담겨 있지만, 실제로 이 시기 문맹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은 조선어학회 회장 류정환(柳正焕)이다. 두 남자의 인연은 김판수가 류정환의 가방을 훔치면서 시작된다. 김판수는 돈이 목적이었지만 사실 가방 속에는 중요한 원고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시경의 한글 사전 원고였다. 그는 훈민정음에 처음‘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인 인물로 ‘한글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조선어학회는 주시경의 작업을 이어 조선어사전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들에게 한국어와 한글을 지키는 일은 하나의 독립운동이었다. 영화 속에서 조선어학회 회원 구자영(具子英)은 목숨을 걸고 사전을 만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김판수에게 “말과 글이라는 게 민족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 우리 딸, 우리 가족’을 서양에서는 ‘나의 나라, 나의 딸, 나의 가족’이라고 말한다며, ‘우리’라는 말에 담긴 공동체 정신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일본어 사용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등장인물들이 한국말 사전을 만드는 일은 상당히 위험했다. 실제로 1942년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관계자들이 검거되어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 있었다. 이런 아픈 역사 때문에 한국인들이 더더욱 한글에서 특별한 민족성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뒤늦게 한글을 깨친 김판수가 조선어학회가 발간한 잡지 『한글』 표지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Lotte Entertainment Co.,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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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AUTUMN 208

시대와 함께 변해 온 글꼴의 조형미 문자는 시대 정신과 미감, 변화하는 기술을 반영하여 계속 새로운 글자체가 개발된다. 창제 이후 6세기에 걸쳐 한글 역시 여느 문자처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변화해 왔다. 『초한전』. 조선 후기. 방각본(완판본).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의 대립을 그린 작자 미상의 역사 소설 『초한전』의 완판본이다. 조선 후기 민간에서 간행한 방각본은 지역에 따라 서울에서 판각한 경판본, 경기도 안성의 안성판본, 전라북도 전주의 완판본으로 나뉜다. 완판본 한글 서체는 이 소설에 나타난 것처럼 글씨가 크고 자형이 반듯반듯한 것이 특징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자는 사물이나 자연의 모습을 모방해 만들어졌다. 이에 비해 한글은 대체적으로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추상적 개념을 반영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글자 형태 또한 점, 수평선, 수직선 등 가장 단순화된 기호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자음 글자의 경우는 발성 기관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하여 된소리, 센소리 등 소리 변화에 맞춰 획이 더해지면서 확장되고 조합된다. 이것이 한글 창제의 원리와 사용법을 설명한 해설서 『훈민정음』(1446)에 “천지 자연의 소리가 있다면 그에 대응하는 글자가 있다”고 밝힌 이유일 것이다. 한글은 창제 당시에는 나라의 공식 문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주로 궁중 여성들과 불교계를 통해서 확산되었고, 이와 함께 민간에서도 한글을 배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특히 조선 말기에 들어서는 한글 소설이 크게 유행하면서 신분과 나이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읽고 쓰게 됐다. 이 과정에서 아름다운 조형미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글자체가 등장하게 되었다. 초기의 글꼴 서지학자들은 세종이 후덕하게 생긴 한문 서체를 좋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만든 한글은 매우 간결한 기하학적 도형으로 이루어졌다. 자음과 모음이 결합되어 꽉 차 보이는 네모꼴은 웅장해 보이고, 단순한 획은 단호함과 우직함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 반듯한 원 모양으로 그려진 ‘ㅇ’은 시각적 경쾌함을 더한다. 그러나 이런 글자체는 한글 창제 직후 간행된 몇 권의 책에만 쓰이고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필기구였던 붓이 글자의 획에는 쉽게 변화를 줄 수 있지만, 반대로 일정한 굵기로 획을 긋기는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웅장하고 우직한 글자체가 사라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AG 훈민정음체(AG Hunminjeongeum). 『훈민정음』에 사용된 한글 글꼴의 원형과 그 맥을 잇는 『석보상절』의 글꼴 구조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가로쓰기 방식에 맞게 제작된 글꼴이다.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가 2018년 발표했다. ⓒ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한자 서체의 영향 이 새롭고 낯선 글자는 그 특성이 반영된 독자적인 양식보다는 이전에 익숙했던 한자의 서풍(書風)에 영향을 받았다. 한글을 한자처럼 썼다는 얘기다. 획을 가로세로로 반듯하게 만들고 글씨 전체가 정사각형을 이루는 것이 특징인 한자 해서체처럼 한글도 정방형의 비례를 유지하면서 글자의 획 수에 따라서 조밀함을 다르게 표현하였고, 무게중심을 중앙에 놓아 사방으로 뻗어 있는 획들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平昌 上院寺 重創勸善文)에서 그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전모를 상세히 기록한 의궤(儀軌)의 글자체도 또박또박 반듯하고 정갈하게 쓰여 있다. 나라의 공식적인 기록이니 정확하게 썼을 것이고, 당대에 가장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이 가장 대표적인 글씨체로 썼을 것으로 짐작한다. 정조(재위 1776~1800) 때 발행된 『오륜행실도』는 인간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덕목을 잘 지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책으로 여기에 쓰인 글자 역시 무게중심을 가운데 두면서 글자의 상하좌우를 대칭으로 썼다. 이 글자체는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해 보인다. 한편 무게중심이 글자의 한가운데 있는 해서체의 특징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필획의 연결에 속도감이 나타나는 행서체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있다. 물론 한글이 한자에 비해 획 수가 많지 않아서 강약의 대비는 적지만, 자음과 모음 글자가 네모틀 안에서 크기와 공간을 조율하며 단단하고 엄정한 인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여유와 운치가 보이기도 한다. 효종(재위 1649∼1659)의 글씨와 16세기에 명필로 이름을 떨친 문인 양사언(楊士彦)의 글씨는 한자의 행서처럼 자유로우면서 힘이 넘친다.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平昌 上院寺 重創勸善文)』. 1464. 필사본.상원사를 중창할 때 왕사였던 신미 스님이 다른 스님들과 함께 쓴 권선문 및 세조가 중창을 돕기 위해 물품을 보내면서 쓴 어제가 함께 필사되어 있다. 한문본과 언해본 2권이 전하며 특히 이 언해본은 가장 오래된 한글 필사본이다. 네모틀 안에서 각 글자의 좌우 대칭이 균형 있게 유지되고 있으며, 힘 있는 획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 월정사 성보박물관 17세기 효종의 셋째 딸 숙명공주가 국왕과 왕후들에게서 받은 한글 편지 66편에 숙명공주가 쓴 편지 1편을 더해 총 67편을 묶은 『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 중 효종(재위 1649∼1659)의 친필 편지다. 한자 행서체의 특징이 드러나는 한글 서체로 필획이 자유로우면서도 힘이 넘쳐 호방한 인상을 준다. 고체(古體)에서 궁체(宮體)로 가는 과도기인 17세기의 대표적인 필적이다. ⓒ 국립청주박물관 궁체 한글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비로소 고유한 조형이 나타나게 되었다. 편지글에서 흔히 볼 수 있다고 하여 ‘서간체’라 불리기도 하고, 궁중의 여인들이 쓰던 글씨라서 ‘궁체’로도 불리는 이 글씨는 조선 후기에 형태가 완전히 잡혀 현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 글씨의 정자체는 단정한 반면에 흘림체는 유려하고 때로는 화려하기까지 하다. 또한 모음 글자가 물리적인 글줄 흐름을 만들고, 이것을 기준으로 받침 글자가 글자의 너비를 이루어서 글자를 나열하면 좁거나 넓은 띠를 형성한다. 이는 마치 라틴 폰트의 베이스-라인과 엑스-하이트 같은 역할을 한다. 『여사서(女四書)』. 19세기 추정. 필사본.영조(재위 1724~1776)의 명에 의해 문신 이덕수(李德壽)가 중국의 『여사서(女四書)(Nu sishu, Four Books for Women)를 한글로 언해한 부분을 누군가 궁체 정자로 베껴 적은 것이다. 궁체는 글자의 중심축이 오른쪽에 있으며, 동일한 자음이라 하더라도 모음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특성을 보인다. 이 글씨는 궁체의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주며, 자음과 모음의 결구가 균형을 이루어 단아한 느낌을 준다. ⓒ 국립한글박물관 왕실 여성들 밑에서 전문적으로 필사를 담당했던 서사상궁들은 공문서뿐 아니라 왕족들의 편지를 대필하는 일도 맡았다. 이 글씨는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1808~1890)의 궁인이었던 서기 이씨가 궁체 흘림으로 쓴 것이다. 획의 굵기와 비례가 다양하고 역동적인 그의 글씨는 명필로 손꼽힌다. ⓒ 국립중앙박물관 방각본 글자체 궁체가 궁궐에서부터 발전한 한글 글자체 양식이라면 민간에서 발달한 것이 방각본 글자체다. 조선 시대 후기에 한글로 쓴 소설이 널리 유행하면서 민간 출판업자들이 책을 대량으로 인쇄해 유통했다. 이처럼 직접 붓으로 써서 전해오던 것을 판각하여 출판한 책들을 방각본이라 한다. 방각본 글자체는 목판에 한글을 빠르게 쓰고 새기는 데서 글자의 특징이 형성되었으며, 나라에서 관여하여 만든 글자체처럼 정갈한 맛은 없지만 서민적이고 질박한 멋이 있다. 『홍길동전』. 조선 후기. 방각본(경판본).조선 중기의 문인 허균(許筠 1569~1618)이 지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경판본이다. 주인공이 부패한 관리들을 응징하고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경판본은 다른 지역의 방각본과 달리 글씨가 작으며 흘림체로 정교하게 새긴 점이 특징이다. ⓒ 국립한글박물관 서체 디자이너 하형원(Ha Hyeong-won 河馨媛)이 2017년 발표한 디지털 글꼴 됴웅체. 20세기 초에 간행된 영웅 소설 『됴웅젼』 방각본의 글꼴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서체다. 세로쓰기용 서체로 개발되었으며 반흘림을 적용했다. ⓒ하형원 현대 글꼴 1945년을 기점으로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며 한글의 문장 방향이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에는 없던 새로운 한글 조형이 나타나는데, 탈네모틀 글자체가 대표적이다. 탈네모틀 한글을 가로로 쓰면, 아이들이 명랑한 리듬에 맞춰 콩콩 뛰어노는 듯한 경쾌한 리듬이 만들어진다.그러나 19세기 말 조선의 쇠락과 멸망,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사회 복구와 경제 발전에 집중했던 한 세기 동안은 한글 조형의 침체기였다. 아직 사회적, 경제적 여유가 없었고, 따라서 다양한 한글 글자체에 대한 요구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 사회가 다양성을 추구하게 되면서 한글 글자체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당시는 아직 앞서 있는 서양의 시각 문화를 좇아가기에 바빴다. 그렇게 다시 10여 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세대의 자유로운 조형 실험을 통해서 다채로운 형태의 글꼴이 나타나고 있으며, 옛 한글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글자체들도 나오고 있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앞으로 한글 글꼴의 진화가 지금까지보다 광범위하고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예측해 본다. 1945년을 기점으로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며 한글의 문장 방향이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에는 없던 새로운 한글 조형이 나타나는데, 탈네모틀 글자체가 대표적이다. AG 최정호체 Std.(AG Choijeongho Std.). 현대 한글 글꼴 개발의 선구자로 불리는 최정호(崔正浩 1916~1988)가 설계한 부리 계열의 글꼴로 그의 마지막 원도(原圖 original typographic drawing)이다. 당시 일반적인 글자 스타일과 달리 장체로 설계된 것이 특징이며, 부리가 크고 획의 끝이 날카롭게 마무리되어 힘차게 보인다. 본문용 한글 활자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모범적인 형태로 인정받고 있다. ⓒ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310 안삼열체(Ahn Sam-yeol). 그래픽 디자이너 안삼열(安三烈)이 2011년 발표한 활자체로 가로획과 세로획의 극명한 대비가 특징이다. 제목용 글꼴로 개발되었으며, 크게 쓸수록 글자의 특징이 더욱 두드러진다. 2013년 도쿄 TDC 애뉴얼 어워즈 활자체 디자인 부문에서 수상했으며, 한글 글꼴의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안삼열 AG 마노 2014(AG Mano 2014).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安尙秀)가 1985년 완성한 안상수체는 대표적인 탈네모틀 글꼴로 꼽힌다. 이후 그는 한글의 간결함을 극명하게 표현하는 세벌식 모듈 글꼴을 다양하게 실험했으며, 그중 1993년 첫선을 보인 마노체는 선 모듈로 이루어진 글꼴로 획수에 따라 글자 면적이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 AG 마노체 2014는 기존 마노체를 판올림한 것이다. ⓒ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바람체.한글 디자이너 이용제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해 2014년 발표한 글자체다. 조선 왕실의 활자 조각공이었던 박경서(朴景緖)의 1900년 초 활자를 디스플레이용으로 재해석했다. 글꼴의 구조는 명조체를, 점과 획의 표현은 궁체를 따랐다. 제목용 세로쓰기 서체로 개발된 이 글꼴은 가수 아이유의 앨범 에 쓰이며 널리 알려졌다. ⓒ 이용제 둥켈 산스(Dunkel Sans).한글 디자인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과감한 시도로 강한 인상을 주는 제목용 글꼴이다. 독일에서 활동 중인 글꼴 디자이너 함민주(Ham Min-joo 咸珉珠)가 1950년대 국내에서 개봉한 외화의 포스터 레터링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해 2018년 발표했다. ⓒ 함민주 심심체.탈네모틀 조형을 실험하기 위해 2013년 제작된 이용제의 이 글꼴은 획수에 따라 글자 면적이 확장하는 특징이 있다. 가로쓰기를 하면 경쾌한 리듬이 만들어진다. ⓒ 이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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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AUTUMN 184

자음과 모음의 변주 한글은 이제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을 넘어 창조적 영감으로 작용한다. 가구, 패션, 일상 소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한글의 조형 원리가 디자인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단순히 글자 형태를 이미지로 차용하는 것을 넘어 문자에 내재된 독창적 개념과 구조를 예술적, 실용적으로 접목하기 위해 많은 디자이너들의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2014년 서울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과 함께 개관한 국립한글박물관은 이러한 디자인적 탐구를 이끌며 다양한 기획 전시를 열고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그 일환으로 제작된 것이다. 이 작품들을 통해 한글에 잠재된 시각 예술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 박철희(Park Chul-hee 朴哲熙), 유혜미(Yoo Hye-mi 劉彗美). 2019. 나왕 합판. 각 400 × 400 ㎜. 한국 전통 가옥에서 마루는 방과 방을 연결하는 매개이자 가족이 모여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소통의 공간이다. 이 작품은 그 같은 마루의 구조적 형태와 기능을 네모꼴 안에 자음과 모음이 조합되는 한글의 조형 원리와 접목시켰다. 각 모듈은 자음과 모음을 응용한 부분은 나뭇결을 세로 방향으로, 여백 부분은 가로 방향으로 재단한 뒤 조합해 시각적으로 변별성을 갖게 했다. 또한 모듈을 바둑판처럼 연결했을 때 호나 원이 완성된 형태가 될 수 있도록 패턴을 만들었다. 그래픽 디자이너 박철희와 가구 디자이너 유혜미의 협업 작품이다. . 하지훈(Ha Ji-hoon 河志勳). 2016. 참나무, 크롬 도금된 폴리카보네이트(Oakwood, chromed polycarbonate). 왼쪽 1450 × 400 × 370 ㎜ (WDH). 오른쪽 370 × 420 × 1535 ㎜ (WDH). 1050 × 350 × 1420 ㎜ (WDH). 장석(裝錫)은 전통 목가구의 결구나 모서리 부분을 보호하고, 개폐 부분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부착하는 금속으로 장식적인 역할도 겸한다. 이 작품은 한글 자음과 모음을 패턴화해 장석처럼 표현했다. 자음과 모음을 이루는 점과 선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한편 한글 고유의 질서와 규칙을 심미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훈은 전통적인 모티프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가구 디자이너이다. . 임선옥(Im Seon-oc). 2019. 한글 자모를 3차원 입체 글자로 만든 뒤 이를 잘라내 만든 그래픽을 패브릭에 프린트한 작품이다. 한글 자음 ‘ㄱ’을 뒤집으면 ‘ㄴ’이 되고, 여기에 획을 하나 더 그으면 ‘ㄷ’이 되는 것처럼 제자(制字)의 확장성을 의상 디자인에 응용한 점도 특징이다. 이에 따라 동일한 디자인이 조합 방식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로 변형될 수 있게 만들었다. 패션 디자이너 임선옥이 론칭한 브랜드 ‘파츠파츠(PARTsPARTs)’는 모든 요소들(parts)이 유닛처럼 존재하는 브랜드로, 이 작품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 . 티엘(TIEL). 2019. 혼합 매체(Mixed Media), 75~150 mm(W), 50~150 mm D, 50~150 mm(H).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음절 단위로 조합하는 모아쓰기 방식으로 표기된다. 디자인 스튜디오 티엘은 자음과 모음을 무한히 조합해 사용할 수 있는 한글의 구조적 특징을 부각시킨 육면체 블록을 만들었다. 각기 다른 색상과 물성을 지닌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한 음절의 초성, 중성, 종성에 해당되는 블록들을 결합시켰을 때 조화와 대비가 느껴지도록 했다. 티엘은 이중한(Lee Joong-han 李重漢)과 샤를로트 테르(Charlotte Therre)가 함께 운영하는 디자인 스튜디오이며, 주로 모듈형 디자인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10 한글 유닛(10 Hangeul Unit)>. 송봉규(Song Bong-kyu 宋奉奎). 2016.플라스틱(ABS), 호두나무, 알루미늄. 180 × 180 × 180 ㎜ (WDH). 이 블록 작품 또한 한글의 음절 단위 모아쓰기 표기 방식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10개의 모듈로 구성된 이 블록은 각 자음과 모음의 재료를 달리하여 글자의 물성을 감각적으로 표현했으며, 3D 툴로 제작되었다. 한글 조형 원리를 놀이처럼 즐길 수 있게 한 작품이다. 송봉규는 창의성과 실용성의 균형을 추구하는 산업 디자이너이다. . 박길종(Park Kil-jong 朴洁宗). 2019. 금속에 분체 도장, 전구, 아크릴. 가변 크기. 오늘날 한글의 기본 자모는 자음 14자와 모음 10자를 합쳐 총 24자이지만, 15세기 창제 시에는 28자가 만들어져 쓰였다. 훈민정음으로 불렸던 당시의 한글 28자의 형태에 흥미를 느낀 박길종은 그 글자들을 기본 골격으로 활용해 의자, 탁자, 옷걸이를 만들었다. 그는 실용적이면서도 위트 있는 맞춤형 제작 가구로 알려진 가구 디자이너이다. . 서정화(Seo Jeong-hwa 徐廷和). 2019. 참나무, 황동, 현무암, 레진, 아크릴, 유리. (왼쪽부터) 스툴 600 × 400 × 600 (WDH). 벤치 1800 × 600 × 400㎜ (WDH). 레진 조명 100 × 300 × 800 ㎜ (WDH). 현무암 조명 200 × 500 × 500 ㎜ (WDH). 긴 유리 조명 200 × 200 × 700 ㎜ (WDH). 레진 조명 1400 × 150 × 400㎜ (WDH).유리 조명 200 × 200 × 400 ㎜ (WDH). 쉽게 익혀 널리 쓰이게 하겠다는 한글 창제의 실용 정신을 계승한 작품이다. 자음을 전구로, 모음을 스탠드 기둥으로 표현한 조명 기기처럼 자음과 모음의 부피, 비례, 소재 등을 변주하며 일상에서 사용되는 여러 종류의 가구에 적용했다. 서정화는 형식과 구조, 소재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가구 디자이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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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SUMMER 1214

물결의 정점에 선 여성 감독들 1세기가 조금 넘는 한국 영화의 역사에서 제작의 주체로나 소재로서 여성은 대부분 주변인에 불과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여성 감독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이들의 앞선 노력으로 더 이상 남성의 눈을 빌리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다. 임순례(Yim Soon-rye 林順禮), 변영주(Byun Young-joo 邊永姝), 정재은(Jeong Jae-eun 鄭在恩), 김초희(Kim Cho-hee 金初喜), 김보라(Kim Bo-ra [金宝拉]). 이들은 한국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임순례: 접점을 찾기 위한 노력 한국 여성 감독 중 가장 오랜 기간 꾸준히 활동했으며,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든 사람. 그리고 여성 영화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언제나 앞장서 온 사람. 임순례는 그 자체로 한국 영화 역사의 일면을 상징한다. ⟨리틀 포레스트(Little Forest)⟩ 촬영 현장의 임순례(왼쪽 아래) 감독과 제작진. 이 영화는 임 감독의 여덟 번째 극영화로,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주인공이 시골 고향집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1994년 단편영화 ⟨우중산책(Promenade in the Rain)⟩으로 데뷔한 임순례는 한국 영화사의 여섯 번째 여성 감독이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MEGABOXJOONGANG, INC, PLUSM)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Forever the Moment)⟩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덴마크 팀과 명승부를 펼쳤던 여자핸드볼 국가 대표팀 선수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누적 관객수 400만 명을 기록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이 영화는 대중에게 ‘임순례’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리틀빅픽처스(Little Big Pictures) 요즘 감독은 신작 ⟨교섭(The Point Men)⟩의 막바지 편집 작업에 분주하다. 중동에서 납치된 한국인들을 구하려는 외교관과 특수 요원의 이야기로, 기독교 선교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난 한국 교인들의 실화를 모티프로 삼았다.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영화의 주요 장면들을 지난해 요르단에서 촬영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영화가 가진 행운을 해외 촬영에 다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 마쳤다고 한다. 이 영화는 남성 스타 배우들이 전면에 나선 범죄 액션 장르다. 그래서 감독은 그간 자신이 내놓은 작품들에 비해 여성주의 시각을 발휘할 기회가 부족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는 “어떤 작품을 만들든 인물들을 그리는 데 있어 기존 시각을 답습하는 데 그치는 걸 경계하는 편이고, ⟨교섭⟩ 역시 이러한 태도로 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작품을 포함해 그의 필모그래피는 다양한 영화들로 채워져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의 벽에 부딪치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 데뷔작 ⟨세 친구(Three Friends)⟩(1996),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는 밴드 뮤지션들의 굴곡진 인생을 들여다본 ⟨와이키키 브라더스(Waikiki Brothers)⟩(2001), 국가 대표 여자 핸드볼 선수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Forever the Moment)⟩(2008), 이른바 ‘줄기세포 스캔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극화한 ⟨제보자(The Whistleblower)>(2014), 고향으로 돌아가 소박한 시골살이를 시작한 20대 청춘의 이야기를 싱그럽게 담은 ⟨리틀 포레스트(Little Forest)⟩(2018) 등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는 선뜻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색채가 다양하다. 이 작품들 사이사이에 참여한 인권 영화 프로젝트도 여럿이다. 1994년 서울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우중산책(Promenade in the Rain)⟩ 이후 그의 영화 세계는 끊임없이 깊고 또 넓어졌다. 이는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와 관객 사이의 접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이다. 그는 어떤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성을 놓치고 갈 순 없다고 생각한다. “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 두 편을 합쳐도 개봉 당시 누적 관객수가 15만 명이 채 안 됐어요. 그래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상업영화의 감각을 발휘해 보려고 했죠. 이후에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견지하면서 대중성을 갖춘 작품들을 선택해 왔어요. 최소한 제작비는 회수해야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지금도 여전히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작품이다. 비인기 종목 스포츠를 소재로 삼은 데다가 아이 엄마와 이혼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탓에 당시로서는 여러 핸디캡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4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감독은 “기획의 승리”라며 제작자인 명필름 심재명(Shim Jae-myung [Jamie Shim] 沈載明) 대표에게 공을 돌렸다. 그와 심 대표는 각각 여성 감독, 여성 제작자 1세대다. 두 사람은 (사)여성영화인모임을 설립한 원년 멤버들로, 여성 영화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역사를 기록해 오는 데 앞장서 왔다. “1999년도 부산국제영화제 때였어요. 심재명 대표, 변영주 감독 등 여성 영화인 몇 명이 모여 모임을 구상했어요. 여성들이 연합해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영화계에 진출할 후배들에게 기회의 문을 넓혀 주기 위해 조직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나눴죠. 이듬해 4월에 정식으로 모임이 첫발을 떼었습니다.” ‘여성영화인모임’은 출범 이후 여성 영화인 사전을 엮고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Keeping the Vision Alive)(2001)를 제작했으며, 매년 연말 열리는 여성영화인 축제를 기획해 진행했다.과거 여성 영화인의 당면 과제는 영화계 내 생존 그 자체였다. 누구보다 훌륭히 ‘생존’해 있으며, 지금도 활발히 활동 중인 그가 바라보는 영화계의 모습은 어떨까? “지금 한창 주목받는 젊은 여성 감독들의 감수성과 그들이 만드는 이야기를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어요. 더 큰 기회로 빠르게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최근 1~2년 사이 여성 영화의 결이 훨씬 다양하고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해요.”또한 그는 “페미니즘 이슈를 담은 영화가 개봉하면 남성 관객들이 일부러 낮은 별점을 주는 것”처럼 대립적인 분위기가 여전하지만, “OTT 시장이 커지면서 여성 감독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젠더를 떠나 인물이 하나의 인격체로서 공포와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일상을 영위하는 영화를 보고 싶고, 또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꿈꾸는 사회가 그런 모습이기 때문이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견지하면서 대중성을 갖춘 작품들을 선택해 왔어요. 최소한 제작비는 회수해야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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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SUMMER 583

여성의 관점으로 세상을 읽다 최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사회적 이슈를 여성의 관점으로 바라본 영화들이 늘고 있다. 이런 영화들이 관객들의 공감과 지지를 통해 힘을 얻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확산시킨다. 이지원(Lee Ji-won 李智原) 감독의 ⟨미쓰백(Miss Baek)⟩은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거부한 채 살아가던 주인공이 가정 학대에 노출된 여자아이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투자 유치에 거듭 실패하다가 가까스로 제작된 이 영화는 여성 관객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에 힘입어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영화사 배(BAE PICTURES), CJ ENM 2018년은 한국 페미니즘 역사에 중요한 분기점이 된 해였다. 그해 초 한 여성 검사가 법조계 고위 인사에게 당한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이후 한국에서도‘미투(Me Too)’ 운동이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오랜 시간 억눌려 왔던 고통과 분노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드러나지 않은 채 지나칠 뻔했던 가해자들의 면모가 속속 공개됐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여성이 겪는 성폭력과 성차별 문제에 있어 갈 길이 멀지만, 돌부리에 걸려 있던 역사의 수레바퀴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앞을 향해 굴러간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 영화에서 여성 서사, 특히 사회적 이슈를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실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이 남성성을 바탕으로 한 세계의 운영 방식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이었는지를 밝히려는 움직임이라면, 사회적 여성 서사의 잇따른 시도는 그간 미디어가 여성성을 바탕으로 사회를 경험하고 체감하도록 하는 일에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증명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미투’의 의미 1인 가구 여성의 주거와 소득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 ⟨소공녀(Microhabitat)⟩(전고운 Jeon Go-woon 田高賱 감독), 1인 가구 여성이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공포를 담은 ⟨도어락(Door Lock)⟩(이권 Lee Kwon 李权 감독),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법정 투쟁기 ⟨허스토리(Herstory)⟩(민규동 Min Kyu-dong 閔奎東 감독),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유무형의 폭력에 맞서 연대하는 작품 ⟨미쓰백(Miss Baek)>(이지원 Lee Ji-won 李智原 감독), 10대 여성의 시선으로 이 사회의 어른이란 어떤 존재인지 묻는 ⟨영주(Youngju)⟩(차성덕 Cha Sung-duk 車成德 감독) – 모두 사회적 여성 서사로 분류할 수 있는 2018년 개봉작들이다. 이후 한국 영화에서 여성 서사는 하나의 뚜렷한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 작품이 개봉 몇 해 전부터 기획되어 세상에 나온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회적 인식이 전반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에도 가부장적 사회 시스템과 그에 따른 폭력적 환경은 그대로인 현실에 대한 자각이 2010년대 후반부에 이르러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결과로 볼 수도 있겠다. 단 두 개의 단어, ‘me’와 ‘too’의 조합은 “나 또한 피해를 당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 채 가까스로 지내왔으며 다른 피해자와 함께 이 사실을 밝힘으로써 연대의 힘으로 생존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비단 성폭력 문제를 다루지 않았더라도, 최근 2~3년 사이 한국에서 쏟아지고 있는 사회적 여성 서사 작품들이 공유하는 인식 또한 여기에 있다. 월세를 낼 돈이 없어 집을 포기하고 떠돌아다니지만, 좋아하는 담배와 위스키만은 버릴 수 없는 전고운(Jeon Go-woon 全高云) 감독 작품 ⟨소공녀(Microhabitat)⟩의 주인공. 20~30대의 가치관이 투영된 이 캐릭터는 젊은 층의 관객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광화문시네마(Gwanghwamun Cinema) 연대와 공감 ⟨미쓰백⟩은 여성 관객들의 연대 의식이 팬덤으로 승화해 긍정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대표적 사례다. 개봉 당시 스스로를 ‘쓰백러’라 이름 붙인 ⟨미쓰백⟩의 팬들은 감독에게 편지 보내기를 비롯해 다양한 응원 방식을 고안했다. 이들의 공통 목표는 이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기도록 실질적인 힘을 보태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여러 차례 관람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화를 보러 가기 어려운 상영 시간대의 티켓을 구입해 마음을 전하는 이른바 ‘영혼 보내기’에 동참하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필자가 만난 한 20대 여성 관객은 이 영화를 5번째 보고 나와 “이 작품이 많은 관객들과 만나지 못한 채 묻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폭력 피해를 당한 등장인물들이 자신을 연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멋있었다”고 말하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이런 팬덤에 힘입어 ⟨미쓰백⟩은 손익분기점인 누적 관객수 70만 명을 넘겼다. 폭력 피해를 다룬 작품에 열렬한 지지 여론이 형성된 것은 관객들이 앞서 언급한 미투의 의미, 즉 ‘나 또한’이라는 마음이 한데 모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 여자아이가 겪는 폭력 피해를 외면하지 않고 그 곁을 지킨다. 어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도 이 사회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영화가 상기시킨다. 이지원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두 인물이 서로를 구원해 주고 연대하면서 갇힌 세상으로부터 뛰쳐나오는 내용에 관객들이 깊이 공감해 주셨고, 힘 있는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었는지에 대해 절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것이 가슴에 맺힌 응어리든 변화를 이끄는 에너지든 폭력적인 사회 환경 속에서 응축돼 있던 어떤 것이 분출된 현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한편 ⟨소공녀⟩의 주인공은 한국의 20대가 경험하고 있는 주거난과 취업 문제를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자신의 취향만큼은 굳건히 지켜 나가는 인물이다. 일상에 위안을 주는 위스키와 담배를 즐기기 위해 월세방을 포기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를 통해 영화는 생계가 어려운 20대 여성이 독립된 인간으로 자존감을 유지하는 하나의 유형을 제시하면서 공감대를 만들어 간다. 이 영화의 인물들 역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를 구하면서도, 각자도생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주변 사람들과의 우정,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 작품 분위기는 ⟨미쓰백⟩과 사뭇 다르지만,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는 이 같은 공통점이 있다. 최근 한국에서 20대 여성의 자살이 다른 연령대나 남성에 비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우울증 치료 건수도 급증했다는 통계가 보도된 점을 보더라도 이 영화의 사회적 발언이 갖는 무게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문제 제기 2019년 사회적 여성 서사의 대표작으로는 단연 ⟨82년생 김지영(Kim Ji-young: Born 1982)⟩(김도영 Kim Do-young 金度英 감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016년에 출간된 동명 원작 소설은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논란과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30대 여성인 주인공이 일상적으로 겪는 차별과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를 다룬 이 작품을 두고, 일부 남성들이 “지나친 과장”이라며 반감을 드러낸 반면 다수의 여성들은 “현실에 비하면 과장은커녕 축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장”이라고 말하는 쪽은 작품에서 다루는 이슈들을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소수 가해자의 잘못으로 문제를 진단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에 “축소”라고 생각하는 쪽은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적인 문제로 사태를 대한다. 과연 어느 쪽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며, 한 단계 진보한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지 질문을 던진 것이 원작 소설과 영화가 해낸 일이다. 영화는 원작에 비해 이 문제들을 완곡하게 제시함으로써 다수의 남성 관객들로부터도 호평받으며 문제 인식의 저변을 넓히는 역할에 충실했다. 2020년에는 불법 체류 노동자 수옥이 뇌출혈로 거동하지 못하는 할머니를 간병하면서 불거지는 이야기를 그린 ⟨욕창(A Bedsore)⟩(심혜정 Shim Hye-jung)이 여성 감독에 의한 사회적 서사의 맥을 이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코로나19로 인해 돌봄 노동을 비롯한 사회 필수 노동에 관심이 높아진 시기였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수옥이 최소한의 급여만을 받고 그 집 할아버지의 식사부터 청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사 노동까지 도맡는다는 것이다. 왜 어떤 남성들은 자신의 끼니조차 스스로 챙기지 못하는가? 왜 돌봄 노동은 여성만의 몫이어야 하는가? 그 몫에 대한 대가는 적절히 지불되고 있는가? 실제로 한국에선 노년 남성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의 식사를 해결할 줄 모른다. 코로나19 시국에서 폭증한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 대부분은 여성의 몫으로 돌아갔다. 방역에 골몰한 정부의 대책 마련 과정에서 여성의 돌봄 노동과 사회적 약자의 필수 노동에 대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다. 또한 사회에 재난이 닥쳤을 때 언제나 먼저 피해를 보게 마련인 약자층 가운데서도 이주 노동자들이 겪는 말 못할 차별은 팬데믹 속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코로나19가 오기 전인 2019년 제작된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지난해 가장 시의적절한 독립영화가 되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하다 못해 둔감해진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적시에 던진 것이다. 평소 여성의 시선으로 사회적 사안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 3. 김도영(Kim Do-young 金度英) 감독의 ⟨82년생 김지영(Kim Ji-young: Born 1982)⟩은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와 살림에 전념해야 하는 주인공이 가정과 사회에서 겪는 차별을 다루어 한국 사회에 뜨거운 젠더 논쟁을 일으켰다.ⓒ 롯데엔터테인먼트(Lotte Entertainment Co., Ltd) 심혜정(Shim Hye-jung) 감독의 ⟨욕창(A Bedsore)⟩은 이주 여성의 돌봄 노동을 통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파헤치며, 당연하게 여겨온 여성의 노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필름다빈(FILM DABIN) 남성 감독들의 여성 서사 여성 서사가 하나의 굵직한 물결을 이루면서 이제 감독의 성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감독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여부를 떠나 여성의 서사를 담은 시나리오에 투자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허스토리 민규동(Min Kyu-dong 閔奎東) 감독의 2018년 개봉작 ⟨허스토리(Herstory)⟩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일본 재판부와 맞서 싸웠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화가 바탕이다.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보상 판결을 받아낸 의미 있는 사건으로, 제목 ‘Herstory’에는 여성들이 스스로 쟁취한 승리에 대한 자부심을 담아내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담겨 있다. 특히 이 영화는 이른바 ‘허스토리언’으로 불리는 여성 팬덤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자체적으로 상영관을 마련하며 영화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 NEW 세자매 올해 초 개봉한 이승원(Lee Seung-won 李承元) 감독의 ⟨세자매(Three Sisters)⟩는 올해 한국 영화의 새로운 발견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만한 수작이다. 세 주인공들이 트라우마를 안은 채 각자의 어려운 처지를 감내하고 버텨 나가는 가운데 이들의 자매애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무엇보다 김선영(Kim Sun-young 金善映), 문소리(Moon So-ri 文素利), 장윤주(Jang Yoon-ju 張允珠) 세 배우의 탁월한 연기에 입이 벌어질 정도다. 국내 최고의 영화상 중 하나인 2021년 백상예술대상에서 김선영은 여우조연상을 받았으며, 문소리는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 영화사 업(Studio Up) 야구소녀 지난해 개봉한 최윤태(Choi Yun-tae 崔允泰) 감독의 ⟨야구소녀(Baseball Girl)⟩는 프로야구 리그에 진출하려는 여성 선수를 주인공으로 ‘경계’의 자리에서 젠더 인식에 관한 의제를 던진 문제작이다. 고교 야구팀의 유일한 여성 선수인 주인공은 프로팀에 입단해 야구를 계속하는 게 꿈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기회를 얻지 못한다. 가족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야구를 포기하라고 종용하지만, 주인공은 “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아요? 나도 모르는데…”라며 일침을 가한다. 윤희에게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소개된 임대형(Lim Dae-hyung 任大炯) 감독의 ⟨윤희에게(Moonlit Winter)⟩(2019)는 이전에 한 번도 조명되지 않았던 중년 여성의 퀴어 서사를 담아낸 작품이다. 딸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자신의 첫사랑과 더불어 그동안 외면하고 살아왔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섬세하고 절제된 연출을 통해 전하는 따뜻한 메시지에 찬사가 쏟아지면서 다수의 각본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 제22회 타이베이 영화제 Asian Prism 부문 등 해외 영화제에도 초청되었다. ⓒ 리틀빅픽처스(LITTLEBIG PICTURES), 영화사 달리기(FILM RUN) 도어락 이권(Lee Kwon 李权) 감독의 ⟨도어락(Door Lock)⟩은 1인 가구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늘어나는 현실을 소재로 삼은 스릴러이다. 오피스텔에 혼자 살고 있는 주인공이 어느 날 퇴근 후 자신의 집 도어락 덮개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단순한 영화적 상상력이 아니라 실제로 누구나 느껴 봤을 법한 공포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 관객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제37회 브뤼셀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Thriller Award’를 수상했다.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MEGABOXJOONGANG, INC, PLU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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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SUMMER 373

주목받지 못했던 캐릭터들의 부상 대개의 영화들은 상업적 성공을 보장받기 위해 안전한 길을 택한다. 그중 자주 선택되는 방법은 관객의 주목을 끌 수 있는 매력적인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최근 여성 감독들은 이제까지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유형의 여성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임선애(Lim Sun-ae 林善爱) 감독의 2019년 장편 데뷔작 <69세(An Old Lady)>는 이전에는 다뤄진 적 없는 노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문제를 다룬 영화다. 국내외 다수의 영화제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기린제작사(KIRIN PRODUCTIONS) 1970년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최인호(崔仁浩)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1974)과 조선작(趙善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1975)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자, 이후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다룬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들이 한동안 쏟아졌다. 가난한 시골 여성들이 도시로 모여들어 몸과 웃음을 팔아 살아가는 이야기가 하나의 장르로 정착한 것이다. 현실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영화들 가운데 여성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 이들 중 작품성이 높게 평가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을 그렸다는 점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단 호스티스 장르뿐 아니라 대개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남성의 관점으로 표현되었다. 변화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아주 더디게 찾아왔다.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여성 감독이 만든 작품들에는 기존에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유형의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해 영화를 무게감 있게 이끌며 주목을 받고 있다. 여자아이들의 세계 2016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은 다수의 영화제에서 윤가은(Yoon Ga-eun 尹佳恩) 감독에게 신인 감독상을 안겨 줬다. 수준 높은 작품성과는 별개로 이 영화는 내용과 소재 면에서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이전까지 한국 영화에서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캐릭터는 애니메이션에나 어울린다는 고정관념과 더불어 여자아이의 이야기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지배적이었다. 주인공 선(Sun 善)의 아버지는 “애들이 무슨 고민이 있어?”라고 말한다. 그 말마따나 아이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괴로움이 있고 지옥 같은 일상이 있다는 사실을 어른들은 관성적으로 눈감아 왔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선은 반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지만 따돌림을 당한다. 친구가 없던 선은 어느 날 전학 온 지아(Jia 智雅)에게서 희망의 빛을 본다. 여름방학 동안 지아와 친하게 지낸 선은 새로운 학교 생활을 꿈꾸지만, 2학기가 되면서 선의 바람은 산산이 부서진다. 지아가 선의 유일한 친구가 되는 대신 선을 따돌리는 무리와 어울리는 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집단 따돌림 현상을 뉴스 매체에서 흔히 그러하듯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에 가두지 않았다는 데 있다. 또한 이를 폭력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남자아이들의 세계를 다루는 영화에서는 대개 집단 폭행 장면이 빠지지 않는다. 은 물리적 폭력을 묘사하지 않았음에도 아이들이 느끼는 고통을 생생히 전달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어느 사회, 어느 집단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 초등학교에서는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윤가은(Yoon Ga-eun 尹佳恩) 감독의 2016년 개봉작 은 어린아이들의 시선으로 그들 사이의 관계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2019년 개봉된 에서도 감독은 섬세하면서도 사려 깊은 시선으로 아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그려냈다.ⓒ CJ ENM, ㈜아토(ATO Co., Ltd.) 여성 감독들이 보여 주는 다양한 표현 방식과 관심 받지 못했던 인물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여성 서사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한가람(Han Ka-ram 韩佳嵐) 감독의 2019년 작품 는 무미건조한 현실에 지쳐 버린 주인공이 달리기를 통해 삶의 변화를 모색해 가는 과정을 담았다. ⓒ 영화진흥위원회(KOREAN FILM COUNCIL) 노인 여성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된 임선애(Lim Sun-ae 林善爱) 감독의 장편 데뷔작 <69세(An Old Lady)>는 한국 영화에서 한 번도 다루어지지 않았던 노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을 다룬다. 이 작품은 하트랜드국제영화제(Heartland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아미앵국제영화제(Amiens International Film Festival) 등 다수의 해외영화제에도 초청되었는데, 주최측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노인 성폭행 문제를 섬세하면서도 힘있게 그려낸 점을 초청 이유로 밝혔다. 주인공 효정(Hyojeong 孝貞)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69세 여성이 20대 남자에게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남자는 합의된 관계였다고 주장하고 구속 영장은 거듭 기각된다. 이러한 현실에 주인공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고소인이 젊은 여자였으면 가해자가 구속됐을까요?” 그동안 사회적 약자로 생각했던 부류에 노년의 여성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영화를 통해 임 감독은 관객들이 갖고 있는 성폭행과 여성에 대한 편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한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잘 입는다’는 담당 형사의 칭찬에 효정은 옷을 잘 못 입으면 사람들이 무시하고 치근덕댄다면서, “이 정도 입고 다니면 제가 안전해 보입니까?”라고 반문한다. 옷차림 하나에서도 방어 태세를 갖춰야 하는 누군가의 현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영화는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영화는 거의 유일하게 효정의 편에 서 있는 동거인 남성을 등장시키는데, 이 싸움이 남성의 투쟁이 되도록 두지 않는다. 효정은 동거인의 집을 떠나서 혼자 성폭행범의 뒤를 쫓는다. 감독은 남성의 도움을 받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선입견을 뒤집는다. 욕망의 자각 한편 한가람(Han Ka-ram 韩佳嵐) 감독의 장편 데뷔작 (2019)는 젊은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만 보면 새로울 게 없지만, 두 명의 젊은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새롭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감독은 매우 도발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8년째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31살 여성 자영(Ja-young 子英)이 남자친구로부터 버림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무런 의욕도 없고 삶의 목표마저 잃어버린 그의 눈에 어느 날 조깅을 하는 현주(Hyun-joo 玄珠)가 보인다. 아름답고 건강한 현주의 몸을 선망하게 된 주인공은 현주가 몸담고 있는 동호회에 가입해 달리기를 시작한다. 언뜻 보면 여성의 외모에 대한 통속적인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것 같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주인공은 성공과 출세 등 자신에게 주입된 ‘타인의 욕망’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자각하며 회복해 간다. 아빠와 고모, 주인공 남매 등 2대에 걸친 남매들이 겪은 어느 여름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윤단비(Yoon Dan-bi 尹丹菲) 감독의 은 국내외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거머쥐며 2020년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오누필름(ONU FILM) 서사의 확장 윤단비(Yoon Dan-bi 尹丹菲) 감독의 2020년도 장편 데뷔작 은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어 4관왕을 기록했고, 제24회 토론토 릴 아시안국제영화제(Toronto Reel Asi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오슬러 최우수 영화상(Osler Best Feature Film Award), 제38회 토리노국제영화제(Torino Film Festival)에서 국제영화비평가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Film Critics Award)이 선정한 최고 작품상(Best Film)을 받았다. 토론토 릴 아시안국제영화제 심사위원들은 “윤단비 감독이 그려 낸 3대 가족의 섬세하고도 복잡한 관계의 역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은 작은 몸짓들, 고요하지만 사무치는 기쁨의 순간들, 그리고 변화와 슬픔을 통해 가족의 사랑을 말해 준다(The jury was impressed by debut Director Yoon Dan-bi’s depiction of the delicate and complex dynamics of a multi generational family. Their love is told through small gestures and quiet but poignant scenes of joy, change and grief.)”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 영화는 그 외에도 제17회 홍콩 아시아영화제(Hong Kong Asian Film Festival)에서도 주목할 만한 젊은 아시아 감독들에게 수여하는 뉴 탤런트 상(New Talent Award)을 수상하는 등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작품상, 신인 감독상, 심사위원 특별상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영화의 주인공은 10대 소녀 옥주(Okju 玉周)이고, 이야기는 옥주와 남동생이 아버지와 함께 갑자기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시작된다. 옥주는 의지나 분노 혹은 욕망의 주체라기보다 사건의 관찰자에 가깝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아버지,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혼자 외롭게 이층집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 남매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고모, 그리고 어린 남매로 구성된 가족의 이야기는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해 여름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그들에게 특별한 정서적 연대감을 선사한다. 영화는 어린 남매와 성인 남매(아버지와 고모)를 평행한 구도로 묘사함으로써 수십 년 시간의 간극을 하나의 장면처럼 표현한다.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이 사회 통념이나 선입견에 진중하게 문제 제기를 하는 것과 달리 은 소녀의 성장을 응원하며, 관객들이 이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에 정서적으로 몰입하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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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SUMMER 502

장르물을 다시 쓰는 방식 범죄, 스릴러, 액션 같은 장르는 주로 남성 관객들을 겨냥한 영화인 반면 로맨스는 여성을 위한 영화라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이런 선입견을 깨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사건은 여성 팬덤의 부상이었다. Director Hong Eui-jeong (far right) talks with actor Yoo Ah-in and other crew members on location for “Voice of Silence.” The movie earned her best new director at the 2021 Blue Dragon Film Awards. 김성수(Kim Sung-su 金性洙) 감독의 범죄 영화 (2016)와 변성현(Byun Sung-hyun 卞成賢) 감독의 누아르 영화 (2017)은 대중적으로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열렬한 지지자들을 만들어 냈다. 두 영화는 각각 ‘아수리언(Asurian)’과 ‘불한당원(Bulhandang Members)’이라는 팬덤을 형성했고, 팬들은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벌이며 영화를 응원했다. 주목할 점은 이를 주도한 것이 주로 여성 관객들이었다는 것이다. 여성 관객들은 장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통념이 깨지면서 주인공으로 여성이 등장하거나 여성 감독들이 이런 부류의 영화를 제작하는 현상이 이어졌다. 특히 2020년에는 손원평(Sohn Won-pyung 孫元平), 홍의정(Hong Eui-jeong 洪義正), 박지완(Park Ji-wan 朴智媛) 등 여성 신인 감독들이 직접 쓴 시나리오로 데뷔하며 장르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었다. 유아인은 범죄 조직의 하청으로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하다가 납치된 아이를 돌보면서 변화하는 태인(泰仁) 역을 맡았다. 균열과 공포 첫 장편소설 『아몬드』로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손원평 작가의 영화 데뷔작 는 감독의 색다른 이력으로 인해 크랭크인부터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는 남성 주인공의 시선으로 여성을 바라보는데, 특이한 점은 일인칭 시점의 불안정성이다. 영화의 주된 서스펜스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여성이 어린 시절 잃어버린 진짜 동생 유진(有真)인지 동생 행세를 하는 사기꾼인지 분간할 수 없는 데서 온다. 관객이 느끼는 혼란은 이뿐만이 아니다. 오빠 서진(书振)은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데, 영화는 그의 트라우마가 진실인지 조작인지, 과연 그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관객들을 시종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처럼 감독은 분열하는 주인공을 통해 관객이 1인칭 시점에 온전히 이입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이 영화는 가족을 그리는 방식 또한 일반적이지 않다. 유사 가족이 등장하는 기존 영화들이 그 같은 가족의 탄생 과정을 설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 영화는 유사 가족과 진짜 가족의 우열 관계를 통해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가족이라고 주장하는 의문의 인물이 등장하면서 진짜 가족인 주인공과 부모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감독은 주인공의 심리 변화에 중점을 둔 채 평범한 일상에 예기치 못한 균열이 생기면서 야기되는 공포를 그려 냈다. 2018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유은정(Yu Eun-jeong)의 또한 분열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은 이 영화의 주인공 혜정은 유령이 되는데, 영화는 하루씩 시간을 거슬러 가며 그가 왜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지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인간관계의 면모들이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호러 영화에서 유령은 등장인물들에게 가해를 가하는 위험한 존재로 표현되지만, 이 영화에서는 삶에 대한 희망과 타인에 대한 관심을 자각하는 계기로 활용된다. 최근의 장르 영화들은 장르 규칙을 활용하는 동시에 이것을 비트는 방식을 보여 준다. 더는 새로움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포화 상태인 장르물에서 관객의 기대를 교묘하게 배반하는 가운데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는 것이다. 은 표면적으로는 한 소녀의 실종 사건을 추적하는 범죄 영화지만,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삶의 이유를 모색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워너 브러더스(Warner Bros. Ent) 손원평(Sohn Won-pyung 孫元平) 감독의 는 남성이 가족의 중심에 서 있는 전통적인 가부장제를 전복시킨다. 이 영화에서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던 오빠는 25년 전 잃어버렸던 자신의 여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에 의해 가족으로부터 배척당하며 고립된다.ⓒ 에이스메이커 무비웍스(ACEMAKER MOVIEWORKS) 새로운 스타일 올해 청룡영화제가 신인 감독상을 안겨 준 홍의정의 는 남성 캐릭터가 주인공이라는 점은 와 같지만, 급변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인물의 시선을 빠르게 따라간다는 측면에서는 사뭇 다르다. 평단으로부터 “한 번도 보지 못한 스타일의 범죄 영화”라는 평가를 받은 이 작품은 신인 감독의 도전과 야심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살인과 유괴를 소재로 다루면서도 그다지 폭력적인 장면 없이 이야기만으로 관객을 몰입시키며, 범죄 영화가 흔히 사용하는 상투적인 수법을 비껴간다. 유아인(Yoo Ah-in 劉亞仁)이 연기하는 주인공 태인(泰仁)은 창복(昌福)과 함께 범죄 조직의 하청을 받아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한다. 영화는 대부분의 범죄 영화와 달리 조직원들이 무슨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는지, 두 사람이 언제부터 범죄에 가담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을 착실한 직장인처럼 묘사하며, 관객들이 두 캐릭터의 기묘하고 독특한 호흡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이들에게 범죄는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매우 일상적인 일일 뿐이다. 이런 일상은 두 사람이 어느 날 느닷없이 유괴범 신세가 되고, 태인이 유괴된 11살 소녀를 떠맡게 되면서 달라진다. 태인과 유괴된 소녀의 관계 또한 관객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인물이 처한 다소 황당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인물의 매력과 힘을 부각시키는 절묘한 균형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의 포스터. 그 자신이 ‘내언니전지현’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는 감독은 이 게임을 떠나지 못하는 유저들의 이유를 영화에 담았다.ⓒ 호우주의보(Rainydays Pictures) 장르에 대한 질문 박지완의 은 장르적인 재미와 영화적인 의미 사이의 균형을 잡는 측면에 있어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이 영화는 유서를 남기고 절벽에서 투신했다고 여겨지는 한 소녀의 실종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스릴러다. 감독은 이 사건을 맡게 되는 주인공 현수(賢秀)의 불안정한 상태를 먼저 보여 준다. 그는 실종된 소녀의 흔적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살기 위한 안간힘을 느끼며, 형사로서가 아니라 동질감을 느끼는 한 인간으로서 사건에 이입된다. 주인공은 소녀의 사건을 실종으로 처리할지, 자살로 처리할지 오래 망설인다. 그 망설임이 무엇보다 이 영화를 의미 있게 만든다. 미스터리 영화에서는 사건을 추리하며 긴박하게 해결해 가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이 영화는 사건의 해결 대신 인물의 내면에 더 집중한다. 장르적 스펙터클을 절제하면서 감정의 스펙터클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 사려 깊은 스릴러라 할 수 있다. 최근의 장르 영화들은 장르 규칙을 활용하는 동시에 이것을 비트는 방식을 보여 준다. 더는 새로움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포화 상태인 장르물에서 관객의 기대를 교묘하게 배반하는 가운데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는 것이다. 특히 작년에 개봉한 여성 감독들의 장르 영화들은 장르 그 자체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들은 언뜻 장르적 쾌감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장르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던져준다는 측면에서 다른 방식의 재미를 창출한다. 넥슨의 MMORPG ‘일랜시아(Elancia)’의 화면. 일랜시아 유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윤진(Park Yun-jin 朴允珍) 감독. 김소희(Kim So-hui 金昭希)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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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1 SUMMER 411

글로벌 트렌드와 함께하는 대중문화 콘텐츠 최근 몇 년간 여성 서사는 한국 대중문화의 주류 콘텐츠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전면에 부각되었다. 영화는 물론이고 TV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웹툰에서도 여성의 시각과 목소리가 두드러지고 있다. 1. 올해 미국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Youn Yuh-jung 尹汝貞)의 영화 데뷔작 김기영(Kim Ki-young 金綺泳) 감독의 포스터. 그는 이 영화에서 신인 배우답지 않은 격정적이고 농염한 연기를 펼쳐 주목받았다.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Pioneer Pictures Film) 2. 김기영 감독의 (1960)를 리메이크한 임상수(Im Sang-soo 林常樹) 감독의 (2010). 하녀로 잔뼈가 굵은 눈치 빠른 선임 하녀를 연기한 윤여정은 이 영화로 다수의 국내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다.ⓒ 씨네21 3. (2012)은 전작 에서 가진 자들의 본성을 밑바닥까지 파헤쳤던 임상수 감독이 후속작으로 내놓은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윤여정은 자신의 돈과 권력을 과시하며 젊은 남성의 육체를 탐하는 재벌가 안주인 역할에 도전했다. ⓒ 씨네21 리 아이작 정(Lee Isaac Chung) 감독의 2020년 작 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쿠키를 굽는 대신 화투를 치고, 프로레슬링 중계를 챙겨 보며, 욕도 잘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남편과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순종적인 모습이야말로 여성의 진정한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할머니는 한국인들이 어머니 혹은 할머니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 이미지와 다소 거리가 있다. 배우 윤여정(Youn Yuh-jung 尹汝貞)이 이 배역으로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전형적이지 않다. 그는 동시대 여배우들이 흔히 그러했듯 비련의 여주인공이나 발랄한 청춘 스타가 아닌 ‘악녀’로 대중과 만났다. 그의 영화 데뷔작은 국내에서 사이코 스릴러 장르를 개척한 김기영(1919~1998 金綺泳) 감독의 (1971)로, 자신을 겁탈한 주인집 남자에 대한 집착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고 파국을 맞이하는 가정부 역할을 맡았다. 이 작품으로 그는 국내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에는 같은 감독의 (1972)에도 주연 배우로 출연했는데 의 속편 격인 이 영화 또한 애증과 질투를 그린 스릴러다. MBC TV 드라마 (1971~1972)에서도 표독스러운 주인공 역할을 맡은 그의 초기 배역들은 하나같이 본연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강렬한 캐릭터였다. 결혼 이후 오랜 공백기를 거쳐 1980년대 후반 활동을 재개한 이후 선택한 작품들에서도 그는 대부분 상식과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파격적인 연기를 보여 줬다. 4. 이재용(E J-yong 李在容) 감독의 (2016)에서 윤여정은 생존을 위해 노인 남성들을 상대로 몸을 팔며 살아가는 역할을 연기해 주목을 받았다. ⓒ 영화진흥위원회(KOREAN FILM COUNCIL) 상업 영화 2019년 한국 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영상자료원이 개최한 기획 전시 은 ‘나쁜 여자, 이상한 여자, 죽이는 여자’라는 부제를 달았다. 전시 제목을 통해 드러나듯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욕망이나 의지를 드러내는 일은 나쁘거나 이상한 것으로 평가되었고, 영화 속에서 여성은 남성 감독의 시선에 의해 왜곡된 모습으로 그려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점차 높아지면서 영화계에 여성 감독과 프로듀서가 등장하게 되었고,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 내는 여성 서사와 여성 캐릭터들이 점차 늘어났다. 최근 대중문화 콘텐츠의 주류로 떠오른 여성 서사는 상업영화 속에서도 그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조남주(Cho Nam-ju 趙南柱) 작가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김도영(Kim Do-young 金度英) 감독의 <82년생 김지영(Kim Ji-young: Born 1982)>(2019), 전 세계 여러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거머쥐며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김보라(Kim Bo-ra [金宝拉]) 감독의 (2019) 같은 작품들에 이어 김초희(Kim Cho-hee 金初喜) 감독의 (2020), 윤단비(Yoon Dan-bi 尹丹菲) 감독의 (2020), 홍의정(Hong Eui-jeong 洪義正) 감독의 (2020) 같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와 관객과 평단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런 상업 영화들을 살펴보면 페미니즘을 전면에 드러내는 작품뿐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 기업의 조직적 비리와 싸우는 여직원들, 범죄와 맞서는 여성 히어로 등 주제와 소재 면에서 여성 서사가 풍부해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코미디, 범죄, 퀴어 로맨스 등 장르적으로도 다양하게 확산되고 있다. 1. 는 한 소년의 추락 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여형사를 통해 과연 이 시대의 참다운 어른은 누구인지 질문을 던지는 TV 드라마이다.ⓒ 스튜디오S TV 드라마와 웹툰 주목할 점은 이런 경향이 비단 영화만이 아닌 대중문화 전반에서 뚜렷한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파극에서 가족 드라마, 멜로 드라마를 거쳐 최근 장르물로 옮겨온 드라마 트렌드의 변화는 그 자체로 여성 캐릭터들의 변화 과정을 담고 있다. 신파극이나 가족 드라마 속에서 여성은 주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안에서 이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인물로 그려졌으며, 멜로 드라마에서는 부유한 남성을 만나 신분 상승에 성공하는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가 주로 다뤄졌다. 하지만 드라마의 주력 트렌드로 장르물이 자리를 잡으면서 가족과 결혼에 한정되었던여성 캐릭터들의 다양한 면모가 묘사되고 있다. (2020, SBS TV)의 성공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여성 변호사, (2020, SBS TV)의 권위주의적인 동료 남성 형사들과는 사뭇 다른 강인함으로 수사에 임하는 여형사, (2020, Netflix Original Series)의 젤리 괴물들과 싸우는 주체적인 여전사가 그렇다. 그런가 하면 기존 가족 드라마가 그려 내곤 하던 성차별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드라마도 등장했다. (2020, tvN)은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사회생활과 어떤 갈등 상황을 빚어내는지 탐색한 작품이고, (2020, 카카오TV)는 결혼 후 시집 식구들에게서 느끼게 되는 차별을 통해 한국의 가부장제가 야기하는 불행을 섬세하게 포착해 냈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수신지(Soo Shin Ji) 작가의 인기 웹툰이다. 이처럼 웹툰에서도 서서히 여성 서사가 부상하는 중이다. 최근 가장 대표적인 여성 서사 웹툰으로 (2019~2020, 네이버 웹툰)를 꼽을 수 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당시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단을 새롭게 조명한 이 작품은 성차별과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난다.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대중들의 가치관과 정서를 수용했고, 여성 서사의 봇물도 이 흐름 위에서 탄생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같은 흐름이 세계적인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진화하는 서사 한국은 1970~80년대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하는 ‘가족적이고 국가적인’ 시스템을 통해 압축 성장의 길을 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희생된 많은 가치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1980년대 정치 민주화, 1990년대 경제 민주화로 확장되던 열망이 이제 ‘삶의 민주화’로 발전했다. 이 지점에서 전면에 나타난 것이 바로 성 평등 사회를 요구하는 목소리다.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대중들의 가치관과 정서를 수용했고, 여성 서사의 봇물도 이 흐름 위에서 탄생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같은 흐름이 세계적인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이 2019년 칸 국제영화제 퀴어종려상(Queer Palm)과 각본상을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열린 다수의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던 것처럼 해외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여성 서사가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2. TV 드라마 에서는 부유한 법조계 집안의 엘리트 남성 변호사와 간신히 변호사가 된 후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성 변호사의 치열한 대립이 펼쳐진다.ⓒ 키이스트(KEYEAST) 3. 출산으로 인해 삶의 변환기를 맞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실감 나게 그린 TV 드라마 은 여성 시청자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었다.ⓒ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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