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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비일상적 경험을 위한 공간 구축

Features 2022 SUMMER 591

비일상적 경험을 위한 공간 구축 최근 국내에 지어진 많은 호텔들과 스테이에서 공간 경험이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건축가들도 이를 실현하기 위해 다양하고 새로운 실험으로 휴식의 층위를 넓히고 있다. 울릉도에 위치한 힐링 스테이 코스모스(Healing Stay KOSMOS)는 6개의 날개가 소용돌이치는 원형 건물로 6개의 객실에서 각기 다른 주변 풍경을 접할 수 있는 구조이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호텔은 로비와 부대시설, 복도, 그리고 개별 객실이라는 간결하고 압축된 기능으로 구성된다. 휴양지의 숙소는 자연과 만나는 보다 여유로운 휴식 환경을 제공한다. 건축가들은 여기에 더해 호텔의 역할을 확대하거나 휴식의 의미를 다시 물으며 신선한 접근을 시도한다. 호텔에 대한 건축가들의 고민과 실험은 숙박이라는 최소 기능을 비일상적 경험으로 확장시킨다. 익숙한 옛 건물의 공간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지역의 특색과 장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텍토닉을 선보인다. 객실 유닛의 전형을 벗어나 새로운 유형을 제안하거나 호텔에 도착했을 때부터 객실에 이르는 여정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또한 구조적인 조형성을 통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공간의 감성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시도는 결국 휴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건축가들의 답이자 우리가 여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감성을 일깨우는 제안들이다.   포도 호텔의 창문은 아래쪽에 위치해 땅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 PODO Hotel 제주도 안덕면 중산간에 자리한 포도 호텔은 건축가 이타미 준(Jun Itami 庾東龍)의 대표작으로 제주의 오름에서 영감을 얻은 둥근 지붕이 포도송이를 연상시킨다. ⓒ PODO Hotel 순수한 감동 둥근 지붕은 제주의 오름에서 영감을 얻었다. 독립된 객실들이 불규칙하게 모이면서 둥근 지붕들은 포도송이를 연상시킨다. 주변 풍광에 거스르지 않도록 단층으로 낮게 깔려 있어 멀리서 보면 억새 너머로 초가집이 모여 있는 것 같다. 제주도 안덕면 중산간 자락에 자리한 포도 호텔(PODO Hotel)은 제주의 토속적인 환경과 어우러지며 제주 민가의 정서를 담아낸다. 2001년 지어진 후 꾸준히 사랑받는 이곳은 건축가 이타미 준(Jun Itami 庾東龍)의 대표작이다. 건축가는 26개의 객실과 프런트의 기능을 각각 독립된 상자처럼 담았고, 하나의 지붕 아래 여러 상자를 불규칙하게 배치했다. 마치 길 하나를 두고 펼쳐지는 마을과 같다. 개별 상자를 조금씩 비틀어 배치하면서 객실 사이에는 각기 다른 각도의 틈도 생겼다. 이 틈을 유리로 마감해 호텔 내부에 빛을 들이고 주변 풍경을 담아낸다. 기존 지형을 그대로 살려서 호텔 내부에는 작은 단 차도 생겼다. 덕분에 호텔에 도착해 객실에 이르는 여정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네의 골목길을 산책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복도 중간에는 외기와 면한 원형 공간을 두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복도 끝에는 중정을 두어 시각적인 여유를 더한다. 창은 모두 아래로 향해 풍경 대신 땅을 바라보게 한 것도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어둑하게 가라앉은 내부에 적절하게 자연광과 풍경을 끌어들이는 방식에서 이타미 준 특유의 빛에 대한 감각이 드러난다. 이와 함께 포도 호텔에는 돌, 흙, 나무, 물과 같은 자연 소재가 사용되었다. 현대 건축에 결여된 따스함과 야성미를 추구한 건축가는 편마암을 활용해 바닥을 마감하고 목재로 내부를 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감물을 들인 제주 특유의 삼베인 갈천으로 내벽을 마감했다. 지역의 자연 소재를 활용하면서 지역적 특성과 자연 그 자체의 원초적 감성을 동시에 살려 낸 것이다. 이타미 준이 전하는 감동은 무엇보다 객실 문을 열었을 때 와락 안겨 온다. 높은 층고를 지지하는 굵은 나무의 간결한 구조와 질감은 공간에 엄숙함과 고요함을 부여한다. 창밖으로 뻗어 나간 툇마루를 변형한 데크, 그 너머까지 이어지는 풍경은 한옥의 공간감을 지니되 이를 현대적으로 성찰해 낸다. 특히 좌식인 한실은 앉았을 때 시선의 높이를 섬세하게 조율해 높은 층고가 주는 시각적 시원함과 한옥의 아늑함을 동시에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전통적인 방식을 따른 흙벽과 한지로 마감한 온돌 바닥도 정취를 더한다. 포도 호텔은 ‘자연적인 소재의 농도와 재질이 주는 묵직한 존재감이야말로 현대 건축이 놓치고 있는 본연의 순수한 감동’이라는 이타미 준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한옥의 포근한 공간감, 비정형 배치가 만들어 낸 공간의 변주, 자연 소재가 주는 고요한 공간감은 오늘의 호텔이 선사할 수 있는 휴식의 의미를 사유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기술적 성취 단순하지만 명확한 형태는 호텔의 독특한 공간 경험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건축가들은 때로 실험에 나서기도 한다. 경상남도 남해에 있는 사우스케이프 리니어 스위트 호텔(Southcape Linear Suite Hotel)은 들쭉날쭉한 해안선과 경사지의 흐름에 대응해 선처럼 길게 뻗은 매스로 건물을 구성하면서 15m 길이의 과감한 캔틸레버 구조를 실현했다. 이 긴 매스는 객실에 남해의 강렬한 수평선을 담아낸다. 2017년 완공된 힐링 스테이 코스모스(Healing Stay KOSMOS) 역시 울릉도라는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호텔인데, 지역의 특색에 조응하는 과정에서 기술적 성취를 이루어 냈다. 섬이 많은 한국에서도 울릉도는 화산암이 만들어 낸 절경으로 유명하다. 쉽게 갈 수 없어 신비감을 더하고, 바다 한가운데에서 자연 풍광을 더 극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힐링 스테이 코스모스는 울릉도의 절경 중 하나인 추산(錐山) 앞에 자리한다. 장소의 강렬함을 담기 위해 건축가 김찬중(Kim Chan-joong 金贊中)은 호텔을 마치 우주 현상을 관찰하는 천체 도구로 접근했다. 해와 달의 궤적을 따라 수렴된 원은 헬릭스 커브를 그리며 6개의 날개가 소용돌이치는 원형 건물이 되었다. 이 말은 객실의 평면이 커브를 그리며 긴 형태를 보인다는 의미다. 추산의 형태를 반영한 듯한 객실은 수직으로 높고 긴 창을 향해 커브를 그린다. 중앙의 원형 계단을 중심으로 6개의 객실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한다. 그 덕분에 각 객실에서는 추산, 바다의 바위, 항구, 숲 등 각기 다른 주변 풍경을 접할 수 있다. 김찬중은 “맹렬한 울릉도 추산의 풍경에 아주 가벼운 그릇 하나를 올려놓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UHPC(Ultra-High Performance Concrete)라는 새로운 소재의 콘크리트를 활용했다. 철근 없이 얇은 두께의 콘크리트로 섬세한 조형미를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토목에서 주로 사용되는 이 신소재를 비정형 곡면을 가진 건축물로 구현하기 위해 거푸집을 입체적인 형태로 제작하고,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현장 타설을 실험해야 했다. UHPC의 구현을 위한 건축가의 과감하고 집요한 실험을 통해 이 호텔은 12cm 두께의 외벽을 구현했다. 내부에서도 기계 장치를 구조체와 일체화시켜 가볍게 손으로 빚어낸 듯 유려하고도 세밀한 형태를 완성한다. 울릉도라는 환경에서 만나는 이 섬세한 구조체는 우리에게 새로운 감성을 선사한다. 경상남도 남해의 사우스케이프 리니어 스위트 호텔(Southcape Linear Suite Hotel)은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캔틸레버 구조를 과감하게 도입했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건축가 정재헌(Jeong jae-heon 鄭宰憲)이 설계한 나무 호텔(NAMU Hotel)은 모든 객실에 벽으로 둘러싸인 외부 공간을 설치해 휴식의 의미를 한층 강조했다. ⓒ 박영채(Park Young-chae 朴榮采) 집과 같은 휴식 2021년 문을 연 나무 호텔(NAMU Hotel)은 호텔의 가장 기본적인 유닛에 질문을 던진다. 건축가 정재헌(Jeong jae-heon 鄭宰憲)은 최소의 기능만으로 충분했던 호텔 객실에서 집처럼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경험을 제안한다. 그는 지금까지 20여 채의 집을 설계했는데, 그의 프로젝트들은 풍부한 중간 영역이 특징이다. 예컨대 집의 진입부인 대문에 깊이감 있는 공간을 만들고, 집의 내부와 외부 사이에는 지붕으로 덮인 반외부 공간을 두곤 한다. 또한 바라보는 마당 대신 사용하는 마당을 만들기 위해 마당과 거실의 동선을 중요하게 고려하는데, 그 결과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이 쌍을 이루어 배치되곤 한다. 집은 홑집으로 구성해 마치 여러 채가 모인 듯 연결하고, 높낮이를 달리해 중정에 빛을 들이는 방식도 자주 사용한다. 이는 지형과 기후에 적응해 온 한옥의 특징을 현대적으로 적용한 결과이다. 그로 인해 그가 설계한 집들은 내외부 공간이 긴밀하게 엮여 있다. 비어 있지만 각각의 방을 유연하게 연결해 주는 한옥의 대청과 같은 맥락이다. 보호받는 외부 공간은 아파트처럼 효율적인 실내 공간에 익숙한 한국 사회에서 놓치고 있던 집의 의미를 환기시키곤 한다. 집에서 출발한 정재헌의 호텔 역시 반외부 공간이 주는 풍요로움을 담고자 했다. 호텔이 위치한 서울 광장동은 한강을 마주하고 있지만, 아직 소규모 인쇄소 같은 시설이 남아 있어 어수선한 느낌을 준다. 동네의 위치가 가진 장점을 취하면서 도심의 소란스러움과 분리하기 위해 건축가는 호텔 외부를 견고한 벽돌 벽으로 감쌌다. 대신 건물 뒤편 로비로 들어서면 외부와 분리된 정적인 대기실과 프런트, 공용 공간이 나타난다. 작은 규모의 호텔이지만, 이곳에서도 내부는 외부 정원과 짝을 이룬다. 집의 평온함을 담으면서도 개별 객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것은 호텔 프로젝트에서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했다. “집을 열 채는 지은 것 같다”는 그의 말처럼 나무호텔에는 24개의 객실에 10개의 각기 다른 평면과 형식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모든 객실에는 벽으로 보호된 외부 공간을 두었다. 발코니보다 적극적인 이 외부 공간은 야외 목욕을 즐기거나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등 머물 수 있는 중간 영역을 제공한다. 외벽을 둘러 프라이버시는 확보하면서도 내 집에서 누리는 듯한 평온함을 주는 것이다. 객실과 짝을 이룬 이 외부 공간의 존재는 휴식의 의미를 바람과 빛, 하늘과 같은 자연의 경험으로 확장한다. 각 층에는 수직으로 통하는 적절한 외부 공간도 두어 시선을 확장한다. 나무 호텔은 부산한 도심에서도 이러한 경험이 가능함을 보여 주는 동시에 휴식을 위한 공간의 의미까지 묻는 곳이다.

다양한 경험 가치를 제공하다

Features 2022 SUMMER 586

다양한 경험 가치를 제공하다 단순히 숙박을 위한 공간을 넘어 다채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담아내는 경험의 장으로 호텔이 진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의 호텔들은 여정의 일부가 아닌 호텔 그 자체가 여행의 목적지가 될 수 있도록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거제도에 위치한 리조트 거제 벨버디어(Geoje Belvedere)는 바다를 보면서 요가를 할 수 있는 웰니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처럼 최근에는 휴식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힐링 장소로서 호텔의 역할이 한층 강조되고 있다. ⓒ 한화호텔앤드리조트(Hanwha Hotels & Resorts) 힙스터들의 잡지로 불리는 『모노클』은 2019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모노클 컨퍼런스(The Monocle Quality of Life Conference)에서 여행의 의미를 재정의한 바 있다. 앞으로 여행은 비일상적 경험을 통해 일상의 창의력을 재충전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여행과 뗄 수 없는 호텔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호텔은 여행지에서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담당해 왔다. 여행을 떠날 때는 목적지를 먼저 선택한 후 적당한 곳에 위치한 숙소를 정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기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시대다. 호텔에서 자는 것 이상의 어떤 경험을 할 수 있는지 고객들이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호텔은 ‘여가’라는 카테고리 내에서 백화점, 놀이공원, 심지어 넷플릭스와 경쟁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했다. 호텔에 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국내 각 호텔들은 저마다 다양한 답변을 제시하며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비스타 워커힐 서울(Vista Walkerhill Seoul)의 투숙객들이 객실에서 복고풍 아케이드 게임을 즐기고 있다. 새로운 타깃층인 MZ세대를 사로잡기 위해 이들의 취향을 반영한 패키지가 꾸준히 개발되고 있다. ⓒ 워커힐 호텔앤리조트(WALKERHILL HOTELS & RESORTS) 놀이터가 된 호텔 호텔이 경제적 여유가 있는 기성세대 혹은 부유층의 휴식 공간에서 젊은이들의 놀이터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이면에는 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 출생한 MZ 세대가 자리한다. 이들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는 특성이 있다. 이에 따라 국내 호텔들은 새로운 타깃층인 MZ 세대를 사로잡기 위해 그들의 주요 관심사를 비롯해 라이프스타일에 부응하는 이색 프로그램들을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추세다. 예컨대 안다즈(Andaz)서울 강남은 올해 초, 프로필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이 세대의 특성에 맞춰 바디 프로필 패키지를 출시한 바 있다. 바디 프로필 촬영 전문 스튜디오와 협업하여 50객실 한정으로 선보였는데, 해당 패키지의 이름이 ‘러브 유어셀프’였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바디 프로필이 단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관리함으로써 자존감을 높이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어필한 것이다. 더 나아가 MBTI 유형에 최적화된 호캉스 코스를 제안하는 패키지도 등장했다. MBTI는 브릭스(Katharine Cook Briggs)와 마이어스(Isabel Briggs Myers) 모녀가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Carl Gustav Jung)의 심리 유형론을 토대로 개발한 성격 유형 검사다. 최근 MZ 세대가 자기 소개용으로 활용할 만큼 매우 보편화되어 있다. 총 네 가지 영역에서 각각 선호하는 경향에 따라 유형이 나뉜다. 예를 들면 에너지의 방향이 외향인 사람은 E유형, 내향인 사람은 I유형에 속한다. 파라다이스호텔 부산과 파라다이스시티는 이러한 유형 결과에 기반하여 지난 3월, 호텔 외부에서 다양한 액티비티를 체험해 보는 E형 상품과 호텔 내에서 휴식과 미식을 누리는 I형 상품을 출시했다. 필름 카메라가 주는 아날로그 감성을 소환한 프로그램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코오롱그룹의 호텔들은 올해 봄맞이 패키지를 구성하면서 레트로 콘셉트를 도입했다. 업사이클링 흑백 필름 카메라 증정 및 현상 서비스를 제공한 이 패키지는 스마트폰 카메라에 익숙한 MZ 세대에게 인기를 끌었다. 필름 카메라는 MZ 세대에게 생소한 물건이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레트로 트렌드로 인해 일회용 필름 카메라가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친환경 및 비건 흐름도 자신의 주관이나 신념을 기준으로 제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한 MZ 세대로부터 기인했다. 호텔의 어메니티가 대표적이다. 친환경적인 여행을 선택하는 수요가 늘면서 플라스틱을 줄이는 캠페인에 호텔이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비건 메뉴를 확대하거나 비건 칵테일을 판매하는 등 가치를 우선시하는 젊은 고객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온전한 충전 온전히 휴식에 집중할 수 있는 힐링 장소로서 호텔의 역할이 한층 강조되는 것도 최근의 추세다. 타오르는 장작불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거나 강, 호수를 물끄러미 보는 행동 등을 ‘멍 때리기’라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이 현상은 초기에는 비생산적이라는 다소 부정적 인식이 있었지만, 경쟁 사회에서 쫓기듯 사는 현대인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준다는 의학적 소견이 뒷받침되면서 힐링 요법으로 정착되고 있다. 이 현상은 특히 코로나19 장기화로 사회적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더욱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동시대적 문화 현상을 반영한 ‘멍 때리기 패키지’를 출시하는 호텔들이 많다. 바다가 보이는 객실 테라스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음악과 함께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바다멍’, 명상 도구인 싱잉볼의 진동과 주파수를 이용하거나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는 ‘소리멍’, 원시림 속 산책로나 피톤치드 향이 가득한 숲속을 거니는 ‘숲멍’ 등 다양한 취향을 고려한 힐링 패키지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호텔의 영역을 예술적 감성을 고양시키는 공간으로 확장하는 것도 뚜렷한 현상 중 하나다. 최근 몇 년 사이 예술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향유층이 확산되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인천 국제공항 근처에 있는 파라다이스시티는 오픈 당시부터 ‘아트테인먼트(art+entertainment)’라는 콘셉트를 강조해 왔다. 국내외 최정상 예술가들의 작품에서부터 파라다이스그룹이 후원하는 신진 작가의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어 호텔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만으로 현대 미술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MZ 세대에게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사진으로 남기며 인증하는 것이 중요한데, 오픈 당시부터 화제가 되었던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 草間彌生)의 작품은 이 호텔이 인증샷 명소로 자리 잡게 하는 데 한몫했다. 호텔 투숙 시 발생하는 일상 폐기물을 줄이기 위한 친환경 캠페인도 최근 호텔업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경향 중 하나이다. 사진은 시즌 한정 판매 중인 객실 패키지에 포함된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JW Marriott Dongdaemun Square Seoul)의 친환경 어메니티이다. ⓒ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 파라다이스시티 내 카지노에 설치된 뮌(Mioon)의 키네틱 작품 . 예술 향유층이 폭넓게 확산되면서 호텔의 역할이 예술적 감성을 고양시키는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 파라다이스시티(PARADISE CITY) 서울 홍대 지역에 위치한 L7 홍대(L7 HONGDAE)에서는 투숙객들이 LP 음반을 취향껏 골라 들을 수 있다. 인디 뮤지션들의 버스킷 공연을 비롯해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서비스이다. ⓒ 롯데호텔앤리조트(LOTTE HOTELS & RESORTS)   쏠비치 삼척(SOL BEACH SAMCHEOK)의 해변 산책로에는 이용객들이 바다를 편안히 조망할 수 있도록 그리스 산토리니를 모티브로 삼은 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멍 때리기’가 웰니스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서비스들이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 소노인터내셔널(SONO INTERNATIONAL Co., Ltd.) 매주 토요일 호텔 내 광장에서 열리는 플레이스 캠프 제주(Playce Camp Jeju)의 플리마켓 ‘골목 마켓(Golmok Market)’ 모습이다. 지역의 크리에이터들이 직접 만든 상품들을 선보인다. ⓒ Playce Camp Jeju 지역 커뮤니티 지역 사회와의 연계를 강조한 콘셉트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메종 글래드 제주는 호텔에서 출발해 1시간 이내로 이동할 수 있는 여행지들을 둘러보는 패키지를 선보인 바 있다. 제주 하면 떠오르는 대표 여행지뿐만 아니라 도민들이 추천하는 로컬 여행지까지 포함시켜 살아 있는 제주의 속살을 느낄 수 있도록 기획된 점이 눈에 띈다. 또한 경주 코오롱호텔은 고대 왕국 신라의 수도였던 지역 특성을 살린 상품을 론칭했는데,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1281)의 기록을 토대로 왕실 전통 차와 수라상을 제공하는 한편 한국사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작용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커뮤니티 호텔도 업계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다. 호텔이 위치한 지역 사회의 역사, 자연환경, 건축물, 음식을 경험하는 것에서 나아가 지역민들과 커뮤니티를 만들어 주는 거점으로 호텔의 역할이 새롭게 실험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제주 성산에서 시작한 플레이스 캠프 제주(playce CAMP JEJU)는 20~30대가 선호하는 취향의 숙박과 상업 시설뿐 아니라 미술, 요가, 글쓰기, 아웃도어 등 지역 자원과 호텔 시설을 활용한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지역 내 크리에이터들이 참여하는 주말 플리마켓은 호텔 투숙객들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인기다. 이 외에도 서울의 로컬스티치(Local Stitch), 충청남도 공주시의 게스트하우스 봉황재(Bonghwangjae), 강원도 정선의 마을호텔 18번가(Village Hotel 18st) 등 여행자들과 동네 상업 시설 및 주민들을 연결하는 커뮤니티 호텔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와 함께한 호텔들

Features 2022 SUMMER 549

한국 근대사와 함께한 호텔들 19세기 후반 개항장 인천에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 등장한 이후 서울 정동 지역을 중심으로 서구식 호텔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호텔들은 서구 문화가 수용되고 확산되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국 근대사의 질곡이 담긴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 서울역사박물관 ⓒ 국립민속박물관 근대의 공간으로 탄생한 호텔은 국내에서는 개항 이후 인천에 최초로 등장했다. 개항장 인천에 도착한 외교관, 선교사, 사업가, 여행객 등 외국인들은 서울로 들어가기 전에 일단 인천에서 며칠 묵을 수 있는 숙박 시설을 찾아야 했다. 인천 개항 초기 대불(大佛)호텔은 일본인 호리 큐타로(Kyutaro Hori 堀久太郞)가 운영하는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다. 일본제일은행 인천 지점 바로 옆에 위치했던 이 호텔은 3층 규모의 서양식 건물로 당시 대부분의 외국인 여행객들이 거쳐 가는 필수 코스였다. 배재학당을 설립한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1885년 조선에 도착했을 때 대불호텔에 묵었다. 대불호텔 바로 옆에는 미국공사관에서 집사로 일한 경력이 있는 중국인이 운영하던 스튜어드(Steward)호텔도 있었는데, 1894년 조선을 방문한 영국인 여행가 비숍 여사(Isabella Bird Bishop)는 이곳을 숙소로 삼았다.   대불호텔 터에 당시 모습을 재현하여 지은 전시관 내부. 대불호텔은 개항장 인천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초기에는 성행했으나 점차 쇠락하다가 1970년대 말 철거되었다. 역사적 가치를 기념하기 위해 2018년 전시관이 개관되었으며, 현재 인천중구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 인천중구문화재단(Incheon Jung-gu Culture Foundation) 개항장 호텔들의 쇠락 인천의 호텔들은 1899년 인천과 서울을 잇는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점차 쇠락해 갔다. 서울을 목적지로 조선에 온 외국인들 대부분이 인천에 묵지 않고 곧바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경인선이 서울 도성까지 완전히 개통된 후에는 종착지인 서대문 정거장 앞에 영국인 앰벌리(W. H. Emberley)가 운영하는 스테이션호텔이 1901년 문을 열었다. 서대문은 1899년 5월 개통된,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종로를 관통하여 청량리까지 운행하는 전차의 시발점이기도 했으므로 서울을 방문하는 서양인들이 스테이션호텔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황궁인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이 위치한 정동 지역의 호텔들도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는 프랑스인 마르탱(L. Martin)이 운영하던 팔레호텔(Hotel du Palais), 미스 손탁(Antoinette Sontag 1838~1922)이 운영하던 손탁호텔 등이 있었다. 근대 문명의 전시장 당시 정동 지역은 1880년대 조선이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각국 외교관과 기독교 선교사, 서양인 고문관들, 사업가들이 거주하는 국제 타운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각국 공사관들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가 조성되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양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이 지역에 최초로 서양인들이 살게 된 것은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1883년 5월, 초대 주한미국공사로 부임한 푸트(Lucius Harwood Foote)가 공사관을 개설하면서부터이다. 이후 각국이 거대한 규모의 서양식 건물을 세우고 자국의 위력을 과시하기 시작하면서 공사관 거리가 만들어졌다. 미국은 서양식 건물 대신 전통 양식의 한옥 건물에 공사관을 개설했지만 주위에 근대식 교육 기관, 병원, 상점 등이 들어서면서 정동 지역은 곧 근대 서구 문명을 자랑하는 전시장이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을 방문하는 서양인 사업가나 여행객들도 자연스럽게 정동 지역을 찾게 되었다. 초기에는 제대로 된 근대식 숙박 시설이 없어 서양인 여행객들이 주로 각국 공사관에서 유숙했지만, 곧 이들을 위한 호텔과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정동 지역은 특히 1897년 근대 주권 국가로서 대한제국(1897~1910)을 선포한 고종 황제가 새롭게 황궁인 경운궁을 조성하면서 더욱 주목받는 새로운 문화 공간이 되었다. 고종은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열성적으로 서양인 고문관들을 초빙했다. 정부 각 부처의 고위 고문관에서부터 해관, 전기, 전차, 전신, 광산, 철도 관련 기술자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 명의 서양인 고문들을 고용했다. 이들은 대한제국 정부 자문에 응하며 서구 문화와 제도를 전달했지만, 한편으로 각기 자국의 이해를 대변하며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정동에 거주하며 외교관, 선교사들과 함께 대한제국의 외국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과 교류하면서 누구보다도 먼저 서양 문물과 정보를 수용했던 고종 황제는 궁궐에 전기와 전화를 도입하고 커피와 샴페인을 즐기는 등 서구식 생활에 신속하게 적응해 갔다. 정동 지역에 포진한 열강 공사관의 외교관들과 더욱 잦은 교류를 가지면서 궁궐에서는 프랑스식 정찬을 베푸는 서구식 연회가 자주 열렸는데, 이때 외국인 접대를 전담하기 위해 고용된 인물이 바로 미스 손탁이다.   손탁호텔의 전경을 찍은 사진이 컬러로 인쇄된 우편엽서로, 1909년 이곳을 인수한 프랑스인 보에르(J. Boher)가 발행했다. ⓒ 국립민속박물관 손탁호텔 프랑스 알자스 지방 태생의 독일 여성인 손탁은 1885년 조선에 부임한 러시아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 1841~1910)를 따라온 인척으로서, 1909년 귀국하기까지 무려 25년을 조선에 머물렀다.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지키기 위해 미국,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했던 조선에서 손탁은 서양식 요리와 사교 문화를 궁궐에 소개하면서 황제의 신임을 얻었고, 사교가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특히 당시 정치 세력 중 친미, 친러파들이 모인 정동구락부(Chongdong club)가 그의 집에서 사교 모임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커다란 신임을 얻은 손탁은 고종으로부터 경운궁과 도로를 마주하는 서쪽에 가옥을 하사받았고, 1902년 무렵에는 손탁호텔이 신축되어 황실의 프라이빗 호텔로 사용되었다. 손탁호텔이 대한제국을 방문하는 국빈용 숙소로 사용된 것이다. 위층은 귀빈실 용도, 아래층은 손탁의 거주 공간과 일반 객실, 식당 등으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손탁호텔은 단지 국빈용 숙박 시설일 뿐 아니라, 일반 여행객 혹은 정동 지역의 각국 외교관이나 서울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근대적 사교 공간으로도 쓰였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눴다. 하지만 서구적 근대 문화를 상징하던 손탁호텔은 러일전쟁 이후에는 갑작스럽게 비운의 역사 현장이 되어 버렸다. 1905년 11월,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조약 체결을 강요하던 이토 히로부미가 손탁호텔에 머무르며 주권 침탈 공작을 지휘한 것이다. 이때 미스 손탁은 휴가를 받아 1년간 독일에 가 있었고, 그의 뒤를 이어 궁중 의전 담당으로 고용된 또 다른 독일인 여성 엠마 크뢰벨(Emma Kroebel)이 이토 히로부미를 대접했다. 그는 손탁이 휴가 중이던 1905년 여름부터 1906년 가을까지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하는 중요한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기록을 남겼다. 이토 히로부미의 서울 방문 직전, 고종 황제의 초청을 받아 서울에 온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의 접대도 엠마 크뢰벨이 담당했다. 고종은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며 앨리스 루스벨트 일행을 성대하게 대접했지만, 이들은 이미 도쿄에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일본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바라며 열성적으로 그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서구식 음식과 사교 문화까지 수용했던 고종은 정작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열강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정동에서 서양인들의 사교 중심지였던 손탁호텔도 점차 그 영향력을 상실해 갔다. 손탁은 1907년 고종 황제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고, 식민지화를 목전에 앞둔 1909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다른 이에게 넘어간 손탁호텔은 경영난에 빠져 점점 쇠락해 가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17년 이화학당에 매각되어 여학생 기숙사로 사용되던 이 호텔은 1922년 건물 신축을 위해 철거되었다. 역사의 현장 1914년 완공되어 영업을 시작한 철도호텔은 일본의 강제 병합 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직영으로 세운 최신식 호텔이다.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가 설계 초안을 맡은 이 호텔의 정식 명칭은 ‘조선호텔’이다. 일본이 경성(현재의 서울)에 철도호텔 건립을 계획한 것은 만주와 조선 사이에 직통 열차가 운행되면서부터이다. 일본에서 온 철도 승객들이 부산을 출발하여 신의주를 거쳐 만주까지 가는 동안 중간에 경성에서 숙박할 수요가 증가할 것에 대비한 것이다. 일본은 이미 부산과 신의주에도 서양식 호텔을 개업한 상태였다. 문제는 경성에서 철도호텔 건립을 추진한 자리가 고종이 1897년 황제에 즉위하면서 쌓은 제단인 환구단이 있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원래 이곳에는 조선 후기 이래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던 남별궁이 있었다. 고종은 근대 주권 국가를 향한 지향을 서방 세계에 보여 주기 위해 남별궁이 있던 자리에 환구단을 쌓고,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그런데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한 후 한국의 근대화 의지를 상징하던 환구단을 헐어 버리고, 바로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건립했다. 장차 중국 대륙 침략을 목표로 했던 일본은 만주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종단 철도의 중간 지점인 경성에 호텔을 세운 것이다. 이처럼 한국 근대사에서 호텔은 개항 이후 서구식 문화 수용과 확산의 매개체이면서 나중에는 주권 침탈의 역사 현장이 되기도 했다.

여관, 문화 예술의 산실이 되다

Features 2022 SUMMER 556

여관, 문화 예술의 산실이 되다 여관은 누군가에게는 하룻밤 편안한 휴식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힘겨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일 수 있다. 때로 그곳은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지난 세기, 서민들의 삶과 함께했던 여관은 이제 대부분 사라졌지만, 몇몇 여관은 여전히 살아남아 그 시절의 이야기를 전해 준다. 국가등록문화재인 보성여관(寶城旅館)의 2층 복도 모습이다. 조정래(Jo Jung-rae [Jo Jeong-rae] 趙廷來)의 대하소설 『태백산맥(Taebaek Mountain Range (Taebaek sanmaek) 』의 주요 무대 중 하나로 등장한다. 우리나라에 근대식 여관이 등장한 것은 1876년 개항 이후였다. 그 시기 부산(釜山), 원산(元山), 인천(仁川) 등 개항장 주변에 하나둘 여관이 생겨났는데, 대부분 일본인들이 운영했고 손님들도 주로 한국을 찾은 일본인들이었다. 한국인이 여관업에 뛰어든 것은 그로부터 약 20년 후였다. 1900년대 들어서는 서울에도 여관이 등장했고, 1910년대 이후 일제 강점기엔 더욱 확산되었다. 주로 교통과 통신이 좋은 곳이나 관광 휴양지에 집중되었다. 초창기에는 여관이 술집을 겸하기도 했으나, 1920년대 무렵 지금과 같은 여관 모습이 정착되었다. 당시 서울의 인기 있는 여관은 방마다 전화 시설을 갖추기도 했다. 여관은 사람이 숙박하는 곳이다. 하룻밤 묵어갈 수도 있지만, 장기 투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오랫동안 머물다 보면 다양한 인연이 생기고 스토리가 축적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문학과 예술에 관한 것이다. 서정주와 보안여관 1936년 11월, 시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 창간호가 나왔다. 동인지라고는 하지만 특정한 문학적 이념이나 지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한 달 후 제2집을 내고 종간되었기에 발간 당시 크게 주목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김동리(Kim Dongri 金東里), 유치환(Yoo Chi-hwan/Yu Chi-whan 柳致環), 김광균(Kim Gwang-Gyoon/Kim Kwang-kyun 金光均) 등 여기에 참여한 작가들이 나중에 한국 문단의 중추가 됨으로써 문학사적으로 의미 있는 동인지로 평가된다. 시인부락 동인들은 기교적이고 감각적인 문학보다는 인간의 정신과 생명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여 이들을 ‘생명파’라고 불렀다. 창간호의 편집인 겸 발행인은 21세의 젊은 시인 서정주(Seo Jeong-ju/So Chong-ju 徐廷柱 1915~2000)였다. 그는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 현재의 동국대학교) 학생이었다. 제1집의 편집 후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될 수 있는 대로 우리는 햇볕이 바로 쪼이는 위치에 생생하고 젊은 한 개의 ‘시인부락’을 건설하기로 한다. 뒤에로 까마득한 과거에서 앞으로 먼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곳…….” 보안여관(保安旅館) 옆에 지어진 신관 2층의 보안책방 모습이다. 1930년대 초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여관은 시인 서정주(So Chong-ju [Seo Jeong-ju] 徐廷柱)가 오랫동안 머물며 시를 쓰고 동인지를 기획했던 장소이다. ⓒ 일상의실천(Everyday Practice) 초가지붕을 얹은 ‘ㄷ’자 형의 가옥인 수덕여관(Sudeok Yeogwan 修德旅館)은 문인이자 화가인 나혜석(Na Hye-seok 羅蕙錫)이 잠시 머물렀으며, 화가 이응노(Lee Ung-no 李應魯)가 매입해 한동안 사용했다. ⓒ 게티이미지코리아(gettyimagesKOREA) 젊은 시인들의 자신감과 창작열이 잘 드러나 있다. 창간호 맨 뒤에 있는 판권 면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인쇄인, 인쇄소, 발행소, 쪽수, 정가 등 발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정보가 적혀 있다. 그런데 서정주의 주소로 적힌 ‘통의동(通義洞) 3번지’는 그가 묵고 있던 보안여관(保安旅館)의 소재지였다. 이 여관은 1930년대 초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서정주는 이곳에 장기 투숙하면서 시를 쓰고 동인지도 기획했다. 이러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자 지방에서 상경한 작가 지망생들이 이 여관에 장기 투숙하며 꿈을 키웠다.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1970~1980년대 초에는 청와대 직원들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기도 했다. 당시엔 경복궁에 청와대 경호 부대가 주둔했다. 그래서 보안여관은 군인들의 면회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면회객이 몰리는 날이면 여관에 통닭 냄새가 진동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기 전 경복궁에 위치했던 1980년대 초에는 밤늦게까지 전시 준비를 하느라 집에 갈 수 없었던 직원들이 이곳에서 잠을 청했다. 보안여관은 지금도 서울 통의동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경복궁 영추문(迎秋門) 바로 앞, 청와대 가는 길목이다. 하얀 바탕에 파란색 글씨로 된 간판이 옛 분위기를 풍긴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욕탕 표시도 정겹다. 수십 년 동안 여관으로 사용되던 이곳은 폐업 후 일맥(一麥)문화재단이 인수해 갤러리로 활용되다가 2017년에는 ‘보안1942’라는 이름의 복합 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카페와 서점, 프로젝트 공간 등을 갖춘 지금 이곳은 서촌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옛날 여관 내부로 들어가면 미술 전시 효과를 위해 천장을 드러내고 목조 가구(架構)를 옛 모습 그대로 노출시켜 놓았다. 위아래로 둥둥 떠다니는 듯한 목조 뼈대, 촘촘하게 얽혀 있는 전선과 애자(礙子), 중간중간 속을 드러낸 누런 흙벽, 빛바랜 옛날 벽지, 일제 강점기 때의 상량문(上樑文)……. 창문 밖 영추문 너머로 쫙 펼쳐지는 경복궁 풍경 또한 매력적이다. 나혜석, 이응노, 그리고 수덕여관 충청남도 예산에는 고찰 수덕사(修德寺)가 있다. 백제(기원전 18~660) 말기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사찰은 1308년 고려 시대 때 건립된 대웅전(大雄殿)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대웅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수덕사 일주문(一柱門) 옆에는 사찰의 이름을 딴 수덕여관(修德旅館)이 있는데, 이곳에도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전한다. 1937년 말, 문인이자 화가인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 수덕사로 친구 김일엽(金一葉 1896~1971)을 찾아갔다. 몇 년 전 승려가 된 그를 만나 자신의 출가를 도와 달라고 부탁할 요량이었다. 동갑내기인 이들은 나이 외에도 공통점이 많았다. 개화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뛰어난 재능과 예술적 감각을 지녔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교유했고, 남녀평등과 자유연애의 기치를 내세우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신여성의 선두주자들이었다. 근현대 시기 벌교의 역사와 문화에서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던 보성여관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보성여관 1층 카페 안쪽에 마련된 자료실. 옛날 교과서와 동화책 등이 진열되어 있어 방문자들이 추억을 떠올리는 장소다. 그러나 세상은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을 넉넉하게 수용하지 못했다. 김일엽은 몇 차례의 사랑과 이별을 거듭하다 1928년 입산하여 1933년 수덕사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나혜석 역시 가부장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심신이 피폐해져 갔다. 그런 상황에서 결심한 것이 출가였다. 그는 김일엽을 통해 수덕사 만공(滿空)스님(1871~1946)에게 귀의를 요청했다. 하지만 만공 스님은 “나혜석은 중이 될 재목이 아니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미련이 남았던 나혜석은 수덕사를 등지지 못하고 일주문 밖 수덕여관에서 한동안 생활했다. 이곳에서 지내던 나혜석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그 시절 그는 합천에 있는 해인사(海印寺)도 방문해 풍광을 화폭에 담았는데, 이 작품은 해인사 입구 홍도여관(紅濤旅館) 주인에게 선물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수덕사와 수덕여관, 해인사와 홍도여관을 떠난 이후 여기저기 전전하다 1948년 서울 용산의 한 병원에서 행려병자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김일엽은 1971년 수덕사에서 입적했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 머물 당시 화가 이응노(Lee Ung-no 李應魯 1904~1989)를 만나기도 했다.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이응노는 나혜석으로부터 세상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프랑스 파리의 낭만을 동경하게 됐다. 그는 생계 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1945년 여관을 매입했다. 커다란 방들은 화실로 사용하기에도 적당했다. 해방 후 서울에서 활동하던 이응로는 한국전쟁 시기에도 수덕여관에서 피란 생활을 하면서 창작 활동을 이어 갔다. 그는 훗날 여관 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문자 추상 조각을 남겼다. 그는 장르와 소재를 넘나드는 끊임없는 실험으로 한국 미술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데, 1960년대 초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문자 추상은 초기에는 서정적 경향을 나타냈으나 점차 문자를 입체적, 기하학적으로 조합했다. 수덕여관의 문자 추상 조각도 그런 조형적 실험의 흐름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보성여관 1층 안쪽의 한옥에는 온돌방 7개가 있으며 현재 숙박 시설로 쓰이고 있다. 조정래와 보성여관 1970년 문단에 데뷔한 조정래(Jo Jung-rae/Cho Chong-nae 趙廷來)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한국 현대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1983년 한 문예지에 연재되기 시작한 이 작품은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차례에 걸쳐 총 10권이 출간되었다. 광복 이후인 1948년부터 한국전쟁이 끝나고 분단이 고착화된 1953년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이념 갈등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민초들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그려 냈다. 이 소설의 제3권에는“지금이 어느 때라고,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 잠을 자고 여관 밥을 먹어?”라는 대목이 나온다. 소설 속에는 경찰 토벌대장과 대원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 남도여관(南道旅館)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곳의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寶城旅館)으로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벌교읍(筏橋邑)에 지금도 존재한다. 보성여관은 벌교 지역이 한창 번성하던 때인 1935년 번화한 중심가에 들어섰다. 일제 강점기, 벌교는 교통의 요지였다. 선착장에는 배들이 가득했고 일본인들의 왕래도 잦았다. 자연히 상업이 번창해 늘 돈이 돌았고, 사람들이 북적였다. 그렇다 보니 주먹패도 생겨났다. “벌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도 그렇게 생겼다. 보성여관은 벌교역과 함께 이 지역의 중심 공간이었고 그렇기에 사람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광복 후에도 운영되었으나, 1988년 여관 영업을 중단하고 가게 점포로 사용되었다. 조정래는 벌교에 인접한 순천(順天) 출신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과 주변에서 있었던 비극적인 갈등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 그는 소설 속에 벌교 곳곳의 공간을 되살렸다. 이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큰 인기를 끌자 보성여관을 보존하여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200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고, 2008년에는 문화재청이 여관을 매입해 보수 및 복원을 거쳐 2012년 새롭게 개관되었다. 현재 갤러리, 공연장, 카페, 숙박 시설 등을 갖춘 복합 문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지역 명소가 되었다.

통찰력 있게 세상을 보라

Features 2022 SUMMER 587

통찰력 있게 세상을 보라 폴라리스 어드바이저리(Polaris Advisory)의 한이경(Han Lee-kyung [HAN Leekyung] 韩利庚) 대표는 최근 국내 호텔 트렌드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에게 호텔업계의 변화와 최근 동향에 대해 들어 봤다. 호텔 디벨로퍼인 폴라리스 어드바이저(Polaris Advisor) 한이경(Han Lee-kyung 韩利庚) 대표는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호텔의 경험 경제에 주목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여행 문화에 변화를 가져왔다. 해외 여행에 제한이 생기면서 국내 여행으로 수요가 몰릴 수밖에 없었고, 역설적이게도 호텔업계에는 분기점이 찾아왔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숙박업소들은 도산했으며, 반대로 내국인 여행객들의 호응을 얻은 곳들은 빈방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호황을 맞이했다. 지금 국내 호텔업계에서는 위기를 기회로 삼으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고 있다. 여기에 대해 한이경 대표는 몇 가지 조언을 들려줬다. 한 대표는 메리어트 호텔 그룹의 한국 신규 오픈 총괄 PM(Property Management) 회사인 폴라리스 어드바이저(Polaris Advisor) 대표다. 지난 20년 동안 미국 전역과 유럽, 아랍에미리트, 일본, 말레이시아, 중국 등 국경을 넘나들며 약 40여 곳의 호텔과 리조트 개발 작업에 참여했다. 건축과 부동산 개발, 그리고 호텔업을 넘나들며 기량을 펼쳐 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를 만난 곳은 서울 천연동(天然洞)에 있는 복합 문화 공간 원앙아리(WonAngARi)다. 1960년대 지어진 전용 면적 약 40m² 크기의 원앙여관을 직접 리모델링해 2019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의 작업 중 특히 의미 있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호텔 디벨로퍼로서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게 중국의 첫 번째 홀리스틱 웰니스 리트릿(holistic wellness retreat)인 상하 리트릿 바이 옥타브(SANGHA Retreat by Octave)다. 5만 5천 평이 넘는 면적인데,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버려진 것들을 재활용했고, 광산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대리석도 쓰지 않았다. 나무도 페인트나 왁스칠 없이 가능한 한 그대로 노출시켰다. 그 외에도 상하이에 그와 유사한 모델의 더 리빙룸 바이 옥타브(THE LIVING ROOM by Octave)라는 도시형 웰니스 센터를 오픈했다. 그런 작업을 할 때는 “도대체 웰니스가 뭐야? 그게 왜 필요해?” 하는 반응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게 새로운 트렌드를 좌지우지하게 됐다. 이후 『포브스(Forbes)』 같은 매체에서 관심을 가져 뿌듯했다. 국내에서 기억에 남는 작업은? 페어필드 바이 메리어트 부산 송도 비치(Fairfield by Marriott Busan Songdo Beach)를 들 수 있다. 코로나19 상황에 문을 열어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오픈 이후 지금까지 영업이 너무 잘돼 성공적으로 꼽히는 호텔이다. 합리적인 가격에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누릴 수 있으며, 특히 전 객실에서 해변을 바라볼 수 있는 게 장점이다. 럭셔리 호텔 중에서는 조선 팰리스 서울 강남(Josun Palace Seoul Gangnam)이 있다. 고층에서 바라다보이는 조망이 인상적이어서 인기가 많다. 한국 호텔만의 특징이 있다면? 호텔은 시설도 중요하지만 숙련된 전문 인력도 필수적이다. 한국 호텔의 직원 서비스는 지나치게 매뉴얼만 따르지도 않고 너무 공손하기만 하지도 않다. 한마디로 적당히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매너가 있다. 영어를 잘하는 직원들도 많기 때문에 해외에서 오는 여행객들은 아시아권의 다른 나라들보다 더 편안하게 느낄 것 같다. 서울 테헤란로에 위치한 조선 팰리스의 수영장에서는 강남 지역의 스카이라인이 내려다보인다. 조선호텔앤리조트의 최상급 브랜드인 조선 팰리스는 세계적 여행지 『콘데 나스트 트래블러(Conde Nast Traveler)』가 선정한 ‘2022 세계에서 가장 주목할 신규 호텔’ 목록에도 올랐다. ⓒ 조선호텔앤리조트(JOSUN HOTELS & RESORTS Co.) 호텔은 입지도 중요할 것 같다. 한국은 작은 나라인 것 같지만 사실 풍부한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강원도에 가면 험준하면서도 호방한 산세가 인상적인데, 그 한복판에 파크로쉬 리조트 앤 웰니스(Park Roche Resort & Wellness)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자연환경 속에서 투박하고 거친 식감을 지녔지만 자연 친화적이고 건강한 음식인 산채를 먹는다면 오랫동안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원도와 달리 전라도는 전반적으로 산세가 둥글둥글하고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염전이 있다. 그리고 전 세계 고인돌의 40% 이상이 한반도에 있는데 그중 1,665기가 전라북도 고창에 집중돼 있다. 지난 2000년 밀집 분포 지역인 죽림리(竹林里) 일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런 문화유산이 있는가 하면 토양이 좋아서 먹거리도 훌륭하다. 특히 쪄서 무치는 스타일이기에 웰니스 푸드로서 손색이 없다. 입지와 음식, 호텔이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는 곳이 한국이다. 그동안 호텔 트렌드는 어떻게 변화해 왔나?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시작된 호텔은 기본적으로 먹고 자는 곳이었다. 근현대 들어 휴가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는데, 근래까지만 해도 글로벌 체인이 운영하는 호텔들은 굉장히 천편일률적이었다. 너무 똑같다 보니 자고 일어나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사람들이 그런 부분에 질려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개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주목하며 나온 게 부티크 호텔이다. 미국에서는 부티크 호텔의 벽지나 디자인을 자신의 집에 구현하는 게 유행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이른바 ‘경험’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거다. 앞으로는 트렌드가 어떻게 변화해 갈까? 호텔도 경험 경제에 주목하게 된다. 예술 감상을 원하는 이들이 생기니 미디어아트 같은 작품들이 호텔 안으로 들어오고, 힐링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지니 그 부분에 중점을 둔 상품들이 등장한다. 호텔 디자인도 이런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예전에는 비싼 대리석에 화려한 샹들리에 같은 걸 꾸몄다면 지금은 지구온난화 같은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친환경적인 스타일로 변모하고 있다. 예컨대 미국의 더 원 부티크 호텔 뉴욕 시티(The One Boutique Hotel New York City) 같은 경우엔 실내를 마치 나무 캐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구성했다. 화려한 벽지를 쓰지 않고 통나무로 대범하게 마감한 것이다. 예전처럼 휘황찬란한 카페트도 사용하지 않는 추세다. 최대한 친환경적으로, 그리고 단순하고 편안하게 바뀌어가고 있다. 페어필드 바이 메리어트 부산 송도 비치(Fairfield by Marriott Busan Songdo Beach)의 로비 모습. 이곳은 실용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고객들을 타깃으로 설계되었으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해수욕장 중 하나인 송도 해변을 전 객실에서 조망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이경 제공(Courtesy of Han Lee-kyung) 트렌드의 변화를 감지하는 원천이 궁금하다. 호텔은 트렌드 자체를 선도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려면 매우 큰 규모의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고객이 원하는 걸 따라간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좇아가지 않고 선도하려는 시각을 갖고 있다. 남들이 무얼 좋아하는지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살피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변화의 방향을 감지하고 내다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각의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책을 열심히 읽는 편이다. 철학이나 문학, 역사, 소설을 가리지 않고 읽으면서 내가 사고하는 방식 자체를 고민한다. 코로나19를 겪으며 호텔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가 많이 바뀐 듯하다. 프라이버시와 위생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다. 타인들과 섞이지 않고 우리 가족끼리 안전하게 즐기고 싶어 하는 양상이 보인다. 그래서 호텔도 예전처럼 방들이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지 않도록 설계한다. 냉난방 공기가 나오기 전에 배관 안에서 레이저 등을 이용해 살균하는 식으로 배관 설계도 바뀌고 있다. 또 사회적 거리 두기 때문에 이용객을 덜 받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가격은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럭셔리 호텔은 더 고급스럽게, 저가 호텔은 더 저렴하게 가는 양극화 현상이 엿보인다. 중간이 사라지는 거다.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호텔이 있는가? 엄밀히 말하면 호텔은 아니지만 정말 추천하고 싶은 한옥 스테이가 있다. 전라북도 전주에 있는 늦잠(Ntjam), 무렵(Mouryub), 사로(Saro 絲路) 세 곳이다. 모두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 운영한다. 침구 구성이 럭셔리 호텔만큼 좋아서 깜짝 놀랐다. 한옥 고유의 개방적이고 편안한 느낌도 잘 살렸다. 전통적이면서도 상당히 현대적이어서 누구에게나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또 경상남도 통영에 있는 스탠포드 호텔 앤 리조트(Stanford Hotel & Resort)도 괜찮다. 나는 통영국제음악제(Tongyeong International Music Festival) 참석을 위해 거의 매년 통영에 가는데 그때마다 머문다. 부족한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베란다에서 보는 바다 모습이 항상 좋다. 남해의 파도 소리와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매우 큰 장점이다.

호텔에서 즐기는 여름 보양식

Features 2022 SUMMER 544

호텔에서 즐기는 여름 보양식 무더운 날씨에 기력이 떨어지는 여름철이면 한국인들은 생기를 되살리는 보양식을 먹곤한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여파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지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스몰 럭셔리’ 소비가 사회 현상이 되면서 고급 호텔의 인기 메뉴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여름 시즌, 호텔들이 앞다퉈 출시하는 대표적인 보양식을 소개한다. 삼계탕은 가장 대중적인 여름 보양식이다. 영계의 내장을 빼고 그 안에 찹쌀, 대추, 수삼, 통마늘 등을 넣어서 푹 고아 만든다. ⓒ 클립아트코리아(Clipartkorea) 기온이 30도가 넘는 여름이 찾아오면,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지친다. 일의 능률도 떨어진다. 시원한 음료를 마셔도 더위로 찌뿌둥해진 몸이 나아지지 않는다. 찬 음식은 열기를 잠시 식혀 주지만, 체력을 보강해 주지는 못한다. 여름철 더위로 기진해진 몸을 보호하고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조치가 필요한데, 한국인들은 주로 뜨끈한 보양식을 선택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보양식은 말 그대로 ‘몸에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고 기운을 북돋워 주는 음식’을 말한다. 삼계탕, 추어탕, 민어탕, 장어탕, 전복탕 등이 주로 보양식 목록에 오른다. 그중에서 닭과 삼을 함께 넣어 푹 끊인 삼계탕은 대표적인 여름 음식이다. 단백질 식품인 닭고기에 약재로도 쓰이는 삼 한 뿌리를 추가하면, 이만한 건강식도 없다. 삼계탕을 대중적으로 먹기 시작한 때를 대략 1960년대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한편 여름철 보양식으로 유난히 해산물 음식이 많은데, 이는 삼면이 바다인 한국의 지리적인 특성 때문이다. 여름철 보양식의 인기를 호텔들이 놓칠 리 없다. 날이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면 엄선한 고급 재료로 무장한 보양식 특선을 앞다퉈 내놓는다. 최근에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건강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호텔 보양식을 눈여겨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호텔의 고급 빙수까지도 덩달아 히트다. 호텔 인기 음식은 아예 조리가 간편한 밀키트나 즉시 먹을 수 있는 가정간편식으로 출시되기도 한다. 대표적 보양식, 삼계탕 여름철만 되면 호텔 특선 메뉴판에 단골로 등장하는 보양식 중 삼계탕이 단연 으뜸이다. 하지만 일반 식당에서 파는 삼계탕과는 조금 다르다. 일단 닭이 특별하다. 친환경 인증을 받거나 토종닭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 방목해 기르거나 유기농 사료를 먹여서 키운 닭들이다. 손바닥만 한 전복까지 합쳐지면 육지와 바다의 맛이 그릇 하나에 모여 왈츠를 추듯 어우러진다. 조리법도 특별나다. 삼계탕은 일반적으로 손질한 닭 안에 찹쌀, 밤, 대추 등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푹 끓인다. 하지만 호텔에 따라서는 별난 조리법으로 특별한 맛을 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닭고기를 얇게 발라낸 다음 전복과 수삼, 능이버섯 등과 섞어 저온에서 익힌다. 그다음 황기, 마늘, 대추 등을 추가해 3시간 이상 푹 끓인다. 전복은 단백질과 무기질이 풍부하고, 수삼이나 능이버섯도 영양소가 많은 식재료다. 황기나 대추, 마늘 등은 기력을 보충하는 식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푹 끓인 삼계탕의 뜨끈한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면 더위 따위는 저 멀리 달아나는 기분이 든다. 삼계탕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탕, 국, 찌개 등은 우리 밥상을 대표하는 국물 요리다. 한식의 도드라지는 특징 중 하나가 국물이다. 우리 민족을 ‘국물 민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또한 ‘국물도 없다’는 관용구는 어떤 일의 대가로 생기는 이득이나 몫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인다. 그만큼 한국인의 식문화에서 국물은 기본이다. 서울신라호텔 중식당에서 2016년 선보인 ‘백봉(白鳳) 오골계 인삼 수프’. 백봉 오골계는 깃털은 하얗고 피부와 뼈는 검은색인데, 예로부터 귀한 약선 식재료로 사용되었다. 담백하고 깊은 육수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 ⓒ 호텔신라(HOTEL SHILLA CO., LTD.) 고급 생선 요리, 민어탕 민어탕도 대표적인 고급 국물 요리다. 민어의 산란 시기가 7~9월이다 보니, 민어 먹기 좋은 계절은 6~8월이다. 일반적으로 생선은 산란 전이 가장 맛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영양소도 풍부하다. 민어가 대표적인 여름 생선이 된 이유다. 민어회, 민어탕 등 민어 요리가 여름철 대표 먹거리로 등극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0여 년 전, 민어가 조선 시대 임금의 밥상에 올랐던 귀한 생선이란 게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면서부터다. 이렇다 보니 고급 호텔의 보양식 리스트엔 어김없이 민어탕이 오른다. 다시마를 넣어 맛을 낸 국물에 민어와 무, 배추, 대파 등 갖은 채소를 넣고 끓이면 완성이다. “시원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더운 날 뜨거운 음식을 먹으면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가 사라지면서 상쾌한 기분이 든다. 한국인들은 그것을 시원하다고 표현한다. 민어를 활용한 요리에 탕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호텔에서는 탕 이외에도 다양한 고급 보양식 재료로 민어를 자주 활용한다. 그중 민어해삼편수는 정성이 많이 들어간 만두 요리다. 과거 우리 선조들이 더운 여름에 많이 먹었던 네모난 모양의 찬 만두로 속 재료가 민어와 해삼이다. 민어해삼만두는 민어, 해삼, 숙주 등을 잘 으깨 속 재료로 만들고 그것을 만두피로 감싸 쪄낸 만두다. 그런가 하면 민어껍질만두는 만두피로 민어 껍질을 사용한다. 대략 12시간 냉장 숙성한 민어에 소금을 쳐 간을 한 다음 밀가루와 달걀 등을 입혀 지져 내면 맛난 민어전이 만들어진다. 6시간 숙성을 거친 민어회도 맛이 일품이다. 그래비티 서울 판교, 오토그래프 컬렉션(GRAVITY Seoul Pangyo, Autograph Collection)의 레스토랑 ‘호무랑(HOMURAN)'이 올해 여름 선보이는 민어 매운탕. 자체 개발한 특제 소스의 칼칼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민어와 잘 어우러진다. 고급 어종인 민어로 조리한 음식은 조선 시대 양반들 사이에서 최고의 보양식으로 꼽혔다. ⓒ 조선호텔앤리조트(JOSUN HOTELS & RESORTS Co.) 차가운 보양식, 임자수탕 호텔 보양식에 뜨거운 요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갖은 해산물이 소복하게 쌓인 물회가 대표적이다. 회와 밥을 한 그릇에 담고 비벼 먹다가 물을 부어 마저 먹는 물회는 본래 어부의 음식이다. 먼바다로 조업을 나간 어부가 배 안에서 생채기가 나 팔 수 없는 생선에 밥을 비벼 먹던 데서 비롯됐다. 음식의 시초는 소박하나, 호텔에서는 갖은 고급 재료들을 활용해 고급 물회를 출시한다. 지역별로 재료나 양념, 조리법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예컨대 전라도와 제주도는 된장을, 경상도는 고추장을 양념으로 쓴다. 맛이 당연히 달라지는데 이런 양념 맛의 변주는 미식의 즐거움이다. 조선 시대에는 물회가 서민의 음식이었던 데 반해 임자수탕은 왕족의 먹거리였다. 조선 시대 임금들이 여름철 주로 먹은 찬 보양식이다. 오색 고명이 어우러진 임자수탕은 눈이 먼저 즐겁다. 닭을 푹 삶아 살을 가늘게 찢은 다음 양념으로 버무린다. 오이, 황백 지단, 고추, 버섯 등으로 고명도 만든다. 그릇에 양념한 닭고기를 담고, 그 위에 고명을 얹는다. 여기에 부을 시원한 국물이 필요한데, 깨를 활용해 만든다. 볶은 참깨를 으깨 닭 국물과 섞으면 완성이다. 깨 특유의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의 프리미엄 빙수 세트. 왼쪽부터 쑥 아이스크림에 팥과 연유가 어우러진 ‘쑥 빙수’, 제주산 애플망고가 듬뿍 올라간 ‘애플망고 빙수’, 코코넛과 두부, 아보카도로 만든 ‘아보카도 비건 빙수’. ⓒ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PARNAS HOTEL Co., Ltd.) ‘스몰 럭셔리’의 대표 주자, 빙수 호텔 셰프들이 고문헌을 뒤져서라도 특별한 보양식을 만들려는 가장 큰 이유는 더 많은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보양식 말고도 그런 바람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빙수다.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인 빙수는 1930~40년대 손수레에 얼음 덩어리를 싣고 다니던 얼음 장수들이 손님들에게 곱게 간 얼음 위에 팥이나 식용색소 등을 얹어 주면서 보편화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970년대엔 고급 제과점의 대표 메뉴로 자리 잡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팥과 연유, 얼음이 주재료였고 1990년대에는 통조림 과일을 토핑으로 쓰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눈꽃처럼 보이는 얼음을 사용한 이른바 ‘눈꽃 빙수’, 대패로 깎은 듯한 얼음이 재료인 ‘대패 빙수’ 등이 인기를 누렸다. 빙수의 판도가 달라진 시기는 대략 7~8년 전이다. 일부 호텔들이 출시한 고급 빙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지금은 여름철 빙수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가격이 일반 빙수보다 적게는 4배, 많게는 10배인데도 찾는 이들이 많다. 고품질 벌꿀, 여러 종류의 베리류, 열대 과일 등이 토핑으로 수북하게 올라간다. 한마디로 호텔 빙수의 특징은 토핑의 최고급화다. 팥을 사용하는 경우도 통조림 대신 국내에서 재배되는 질 좋은 것을 사용하는데, 국산 팥은 단맛이 은은하게 돈다. 고급 빙수의 포문을 연 것은 파크 하얏트 서울의 베리빙수였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빙수 열풍의 견인차 노릇을 한 곳은 신라호텔이었다. 이 호텔의 망고빙수는 얼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릇에 망고가 가득 차 있다. 당시 다른 호텔들도 신라호텔을 따라 고급 빙수를 출시했고, 그 인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죽하면 “망고빙수 시즌이 돌아왔다”란 말까지 생겼겠는가! 한 그릇 가격이 무려 6~8만 원인데도 여전히 즐겨 찾는다. 이런 이유로 ‘스몰 럭셔리’의 대표 주자라는 별명도 붙었다. 망고빙수의 인기 비결은 당연하게도 망고 때문이다. 열대 과일인 망고는 비타민이 풍부해 맛이 상큼하다. 한입 베어 물 때마다 즙이 흥건하게 나온다. 향도 다른 과일에 견줘 짙다. 코를 대고 과일 향을 맡다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람들도 있다. 색깔도 인기 요인이다. 과육의 짙은 노란색은 눈을 즐겁게 한다. 미식에서 시각은 중요한 요소다. 한반도 기후가 변하면서 요즘 자주 거론되는 과일이 제주산 망고다. 수입산과는 또 다른 풍미가 있다. 그래서 호텔들은 특별히 ‘제주’를 강조한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우울감에 젖은 이들이 많은데, 달고 시원한 빙수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든다. 혀의 촉각을 건드리는 얼음과 달콤한 맛이 나는 팥과 과일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신드롬을 이끄는 연주자들

Features 2022 SPRING 2126

신드롬을 이끄는 연주자들 수백 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세련되고 깊은 울림으로 다시 태어난 크로스오버 신드롬의 기저에는 탄탄한 연주 기량을 갖춘 인스트루멘털 컨템퍼러리 국악의 선구자들이 있다. 국내외 무대에서 크게 조명받고 있는 대표적인 세 그룹 – 그들이 추구하고 지향하는 음악 세계를 들여다본다. 2019년 벨라 유니언(Bella Union)에서 발매된 잠비나이(Jambinai)의 세 번째 정규 앨범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이다. 200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기인 이일우(Ilwoo Lee 李逸雨), 김보미(Bomi Kim 金寶美), 심은용(Eun Youg Sim 沈恩用) 세 명으로 출발하여 2017년 드러머 최재혁(Jaehyuk Choi 崔宰赫)과 베이스 유병구(B.K Yu 兪炳求)가 정식 멤버로 합류한 뒤 처음 내놓은 앨범이다. 전작들에 비해 한층 역동적인 리듬감이 살아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블랙스트링(Black String) “거문고의 진정한 소리, 평생을 바쳐도 다다를 수 없는 그것과 블랙스트링이 추구하는 지향은 큰 틀에서 볼 때 다르지 않다.” 2011년 결성된 4인조 그룹 블랙스트링(Black String)은 전통 음악과 재즈를 접목시켜 즉흥성에 중심을 둔 실험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왼쪽부터 거문고의 허윤정(Yoon Jeong Heo 許胤晶), 아쟁과 장구의 황민왕(Min Wang Hwang 黃珉王), 대금과 양금의 이아람(Aram Lee 李アラム), 기타의 오정수(Jean Oh 吳定洙). ⓒ 나승열(Nah Seung-yull 羅承烈)   지난 여러 해에 걸쳐 국내외 월드 뮤직 및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주목을 받아온 이 4인조 그룹의 독특한 이름은 이들 음악의 깊은 뿌리가 거문고에 있음을 천명한다. 줄잡아도 천 오백 년의 역사를 가진 이 악기는 그 담백하고 장중한 음색이 한국 전통 음악의 품격을 상징한다. ‘현금(玄琴)’이라는 한자 이름을 영어로 옮기면 그대로 Black String이다. 2011년에 팀을 이룬 이들 4인의 걸출한 연주가는 거문고의 허윤정(Yoon Jeong Heo 許胤晶), 기타의 오정수(Jean Oh 吳定洙), 대금과 양금의 이아람(Aram Lee), 아쟁과 장구의 황민왕(Min Wang Hwang 黃珉王)이다. 2016년 이들에게 이륙의 순간이 왔다. 독일의 세계적 음반사 ACT와 무려 5장의 정규 음반을 내는 파격적인 계약을 맺은 것이다. ACT는 ECM과 함께 재즈를 중심으로 실험적 현대 음악까지 아우르는 음반사다. 블랙스트링은 이 회사와 음반을 내게 된 최초의 한국 연주 그룹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출시한 1집 음반 로 2018년 영국의 세계적 월드 뮤직 시상식 송라인즈 뮤직 어워즈(Songlines Music Awards)의 Asian and Pacific 분야 수상자가 되었다. 이것도 한국 음악가로서는 최초로 이룩한 성과였다. 블랙스트링의 음악 세계는 어찌 보면 유럽 민속 음악과 명상적 재즈를 결합하는 ECM의 색깔과 더 맞는지 모른다. 2019년 발매된 2집 의 동명 타이틀곡에서 보여 주는 앰비언트 뮤직의 선(仙)적인 재해석, ‘Exhale-Puri’나 ‘Song of the Sea’가 들려주는 재즈 퓨전적인 접근법은 한국적 ECM 사운드에 가깝다. 그룹의 리더 허윤정은 파격의 열쇠를 쥔 인물이다. 서울대 국악과 교수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거문고 연주자인 그는 20세기 한국 연극의 지평을 크게 넓혔던 마당극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연출가 허규(1934∼2000 許圭)의 딸이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즉흥 음악의 대가들을 알게 됐고, 해금 연주자 강은일(姜垠一)이 국악의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을 보고 나도 참여하게 됐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허윤정은 강은일과 함께 국악계에 자유로운 실험 바람을 일으키는 주역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철현금(鐵絃琴) 연주자 유경화(柳京和)와 함께‘상상 트리오(SangSang Trio)’를 만들어 활동하며 전통적 시김새와 장단을 프리 재즈나 현대 음악의 방법론과 섞어 냈다. 유경화, 그리고 작곡가로 협업했던 원일(Won Il 元一)은 허윤정과 국립국악고등학교 동기들이다. 블랙스트링의 다른 멤버들은 모두가 국악과 재즈 분야에서 손꼽히는 젊은 베테랑들이다. 이들은 재료 선택에 거침이 없다. 전통 민요나 무속 음악, 불교 음악을 비롯해 영국 록밴드 라디오헤드의 ‘Exit Music - For a Film’까지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가져와 몽환적인 음악 비빔밥을 거침없이 만들어 낸다. 결코 플루티스트에게 밀리지 않는 독보적이고 창조적이며 비르투오소적인 대금 연주를 들려주는 이아람, 그와 함께 다른 팀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황민왕은 물론이고, 오정수의 미니멀하면서도 입체적인 기타 사운드는 이들이 결코 거문고만을 위한 앙상블이 아님을 방증한다. 국악에 막 눈을 뜬 독자라면 제각기 솔로와 프로젝트 활동도 겸비하는 이 멤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허윤정은 “즉흥 음악을 너무도 사랑하지만 팀의 아이덴티티는 즉흥만으로 나오지 않는다. 곡의 명확한 콘셉트와 정체성이 뼈대가 되고, 즉흥성이 동력이 돼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전통의 즉흥 음악 독주 장르인 산조야말로 허윤정과 블랙스트링의 뿌리이자 심장이다.   잠비나이(Jambinai) “멸종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동물이 눈앞에 나타날 때의 충격, 마치 심해에서 살아 있는 실러캔스가 발견됐을 때와 같은…. 그런 뭔가를 추구한다.” 포스트 록 밴드 잠비나이는 한국 전통 악기를 중심으로 록과 메탈이 뒤섞인 독특한 스타일의 음악을 연주한다. 왼쪽부터 드럼의 최재혁, 거문고의 심은용, 기타와 피리, 태평소의 이일우, 해금의 김보미, 베이스의 유병구. ⓒ 강상우(Kang Sang-woo)   헬페스트(Hellfest)라는 음악 축제가 있다. 축제라고 하기엔 조금 살벌한 이름인가? 매년 6월이면 수만 명의 열혈 청춘들을 프랑스의 작은 마을로 불러 모으는 세계적 메탈 페스티벌이다.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부터 캐니벌 콥스(Cannibal Corpse)까지 날 선 금속성을 앞세운 록, 메탈 밴드들이 주요 출연진이다. 그런데 2016년, 이 축제 무대에 한국의 전통 악기들이 난데없이 대거 등장했다. 밴드 잠비나이가 공연을 펼쳤던 것이다. 이 팀은 2009년 결성된 5인조 포스트 록(post rock) 밴드로 기타와 피리, 태평소를 두루 연주하는 이일우(Lee Il-woo [Ilwoo Lee] 李逸雨), 해금의 김보미(Kim Bo-mi [Bomi Kim] 金寶美), 거문고의 심은용(Sim Eun-youg [Eun Youg Sim] 沈恩用), 드럼의 최재혁(Choi Jae-hyuk [Jaehyuk Choi] 崔宰赫), 베이스의 병구(B.K Yu 兪炳求)로 구성됐다. 이들의 음악은 음산하고 기괴한 한국 도깨비와 귀신들의 한바탕 난장을 연상시킨다. 술대로 거문고의 몸통과 현을 한번에 내려치는 거친 반복 악절(loop)이 해금의 귀곡성과 전기 기타의 포효를 만날 때 헤비메탈은 만들어 낼 수 없는 서스펜스와 호러가 거친 물결을 이룬다. 포스트 록, 슈게이징, 메탈, 국악의 미학이 예상할 수 없는 비율로 충돌한다. 해금과 거문고가 내는 마찰음과 파찰음이 낯설되 짜릿하다. 그룹의 핵심 멤버인 이일우, 김보미, 심은용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동기인데 어려서부터 국악을 전공한 정통파들이다. 그러나 사실 잠비나이는 국악에 대한 이일우의 반항심이 야기한 산물에 가깝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피리를 잡았고, 3학년 때부터는 전기 기타를 쳤다. 학교에서는 국악을 배우고 집에서는 메탈리카를 보며 로커를 꿈꿨다. 잠비나이 이전에는 ‘49 Morphines’라는 격정적 스크리모(screamo) 장르의 밴드에서 활동했다. 그는 잠비나이의 결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국악기는 밴드 사운드와 절대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없어. 전통 한옥에나 어울리지’ 하는 선입견, 국악은 지루한 음악이라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 그러려면 강렬한 사운드가 필요했는데, 브라질 전통 음악을 메탈과 결합한 밴드 세풀투라(Sepultura)의 ‘Roots’에서 간접적 힌트를 얻었다.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앨범에서 들은 인더스트리얼 록의 사운드 콜라주, 바이올린, 첼로, 백파이프 같은 악기가 록 사운드와 이질감 없이 맞물리는 포스트 록 장르 모두 자양분이 됐다.” 2014년 미국 SXSW 페스티벌 공연에서 잠비나이는 2명의 관객으로 시작해 30분 만에 공연장을 가득 메워 놓았다. 이 놀라운 광경을 직접 본 것은 필자의 콘서트 관람 중 가장 강렬한 경험이었다. 이 밴드는 마침내 2015년 영국의 세계적 레이블 벨라 유니언(Bella Union)과 계약하고, 이듬해 2집 를 세계 시장에 내놔 극찬을 받았다. 촛불처럼 시작해 거대한 들불로 번지는 듯한 이들의 드라마틱한 사운드는 1집 의 ‘소멸의 시간(Time Of Extinction)’, 2집의‘벽장(Wardrobe)’, 3집 의 수록곡 ‘사상(絲狀)의 지평선(Event Horizon)’처럼 맹렬한 곡들뿐 아니라 1집 마지막 곡 ‘커넥션(Connection)’처럼 명상적인 작품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2집 제목이기도 한 ‘은서’라는 단어는 이 팀을 이해하는 좋은 키워드가 될 것 같다. 이 말은 네시(Nessie)나 설인을 다루는 유사 학문 은서동물학(cryptozoology, 隱棲動物學)에서 유래했다. 잠비나이는 코로나19 이전에는 매년 50회가 넘는 해외 공연을 다녔다. 영국의 워매드(WOMAD), 세르비아의 EXIT, 그리고 덴마크의 로스킬레(Roskilde) 같은 세계적 페스티벌 무대에서 관객을 홀렸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을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했다.   동양고주파(Dongyang Gozupa)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부족함이 창의적인 걸 만들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셋이지만 충분한 팀이 되고 싶다.” 동양고주파(Dongyang Gozupa)는 2018년 결성된 3인조 그룹으로 리듬 악기로만 이루어진 악기 구성은 그 자체로 다른 그룹들과 구별된다. 질주하는 듯한 빠른 연주를 통해 음악적 서사와 폭발적 에너지를 전달한다. 왼쪽부터 퍼커션의 장도혁(Jang Do Hyuk 張道爀), 양금의 윤은화(Yun Eun Hwa 尹銀花, YIN YINHUA), 베이스의 함민휘(Ham Min Whi 咸民輝). ⓒ 김신중(Kim Shin-joong 金信中)   앞선 두 그룹에 결코 뒤지지 않는 파격적 개성을 지닌 3인조 밴드가 있다. 이름부터 만만치 않게 독특한 동양고주파다. 이 밴드에 대한 첫인상은 스콜처럼 내리퍼붓는 양금 주자 윤은화(Yun Eun-hwa [Yun Eun Hwa] 尹銀花, YIN YINHUA)의 타현(打絃)이 먼저 장악한다. 이는 메탈리카가 ‘Master of Puppets’를 연주할 때 보여 주는 다운 피킹의 폭풍우를 시각적으로 압도할 정도다. 여기에 함민휘(Ham Min-whi [Ham Min Whi] 咸民 輝)의 묵직한 베이스 기타와 신출귀몰하는 장도혁(Jang Do-hyuk [Jang Do Hyuk] 張道爀)의 퍼커션이 결합하면 아우토반을 내달리듯 질주하는 이들의 사운드가 완성된다. 양금의 명료한 음색은 싱그러운 초록 열대우림에 쏟아지는 청명한 빗방울같이 뛰어다닌다. 2018년 EP 앨범 으로 데뷔한 이 팀은 아시아 밴드 최초로 세계적 월드 뮤직 페스티벌인 워멕스(WOMEX)에 2020년과 2021년 연속 초청됐다. ‘동양에서 온 고주파’를 뜻하는 듯한 기괴한 팀명은 장도혁이 우연히 본 동네 전파사 간판에서 따왔다. 사납고 날이 선 자신들의 음악 세계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따온 이름이다. 이 밴드의 중심은 윤은화의 양금으로 블랙스트링이나 잠비나이가 연주하는 거문고의 현이 명주실인 데 반해 이 악기는 철현(鐵絃)이다. 윤은화는 이것으로 메탈을 방불케 하는 철의 음악을 뽑아 낸다. 양금은 페르시아에서 유래했다. 이후 조금씩 개량되면서 지터(zither), 덜시머(dulcimer), 침발롬(cimbalom) 같은 이름으로 불리다가 중국을 거쳐 한국까지 전파됐고, ‘서양에서 온 악기’ 라는 의미로 양금이라 불리게 되었다. 국악기 가운데는 생황과 함께 서양 음계나 화성을 어느 정도 연주할 수 있는 희귀한 악기이기도 하다. 세계양금협회 한국 지부장이기도 한 윤은화는 이 악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더 현대적으로 개량했다. 그는 “원래 우리 전통 양금은 작고 음역도 좁아 다양한 장르를 연주하기엔 제약이 있다”면서 “내가 개량해 쓰는 이 양금은 음역으론 4옥타브 반을 커버하고 서양의 12 반음계 체계를 갖췄다. 어떤 음악도 가능하다. 소리를 증폭하는 픽업도 달고 이펙터도 사용해 표현 영역을 더 넓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함민휘는 “윤은화만큼 양금을 헤비하게 두드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네 살 때 중국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했고, 북한식 양금에도 눈을 떴으며,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타악을 전공했다. 동서양은 물론 남한과 북한, 타악과 현악의 장점을 흡수한 ‘윤은화 스타일’은 오랜 단련의 결과물이다. 발로 밟는 킥 베이스 드럼을 쓰지 않는 장도혁도 독특한 연주자다. 사지를 모두 쓰는 대신 두 손만으로 저음부터 고음까지 모든 타악의 스펙트럼을 구현하다 보니 그만의 스타일이 탄생했다. 동양적 세계관을 결합했던 독특한 록 밴드 ‘단편선(短篇選)과 선원들(Danpyunsun and the Sailors)’ 출신인 그는 “연주의 제약이 오히려 나만의 사운드를 만든다. 이런 도전이 재밌다”고 말한다. 함민휘의 베이스 연주는 미국 뉴메탈 밴드 콘(Korn)이나 펑크록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둔중함과 날렵함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윤은화는 2021년 말 수림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수림뉴웨이브상을 받았다. 매년 단 한 명 또는 한 팀만 받을 수 있는, 실험적인 음악 작업을 선보이는 젊은 국악 연주자를 뽑는 영예로운 상이다. 얼터너티브 팝 밴드 이날치(LEENALCHI)의 보컬 권송희(Kwon Song-hee [Kwon Song Hee] 權松熙)와 황해도 무가(巫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밴드 악단광칠(ADG7; Ak Dan Gwang Chil)도 이 상을 받았다.

다양한 시도, 뜻밖의 즐거움

Features 2022 SPRING 1939

다양한 시도, 뜻밖의 즐거움 동시대성에 대한 고민을 안고 새로운 음악 세계를 개척하고 있는 젊은 아티스트들이 한국 전통 음악의 지평을 한껏 넓히고 있다. 재주와 야심이 넘치는 이 음악인들이 다양한 기법으로 만들어 내는 뜻밖의 묘미를 만나 보자.   ⓒ 김희지(Kim Hee-ji 金熙智) , HAEPAARY, 2021년 6월, 플립드코인뮤직(Flipped Coin Music) 얼터너티브 일렉트로닉 듀오 해파리는 국악을 전공한 박민희(Minhee 朴玟姬)와 최혜원(Hyewon 崔惠媛)이 2020년 결성했다. 이들은 국악이 지닌 미니멀한 미학에 존경을 표하는 동시에 그것이 지니는 가부장적인 맥락을 해체하고자 한다. 이 디지털 음반에서는 종묘제례악을 가져와 일렉트로닉 비트로 재해석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제례악은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음악과 춤으로 요즘에도 재현되고 있다. 특히 두 번째 트랙에 실려 있는 타이틀곡 ‘귀인(歸人)-형가(亨嘉)(Born by Irreproachable Gorgeousness)’의 음산한 전자음은 흡사 1960~70년대 독일 크라우트록(krautrock) 장르를 연상시키는 불길한 미니멀리즘의 잔치다. 젠더를 해체하는 박민희의 가창도 상징적이며 기묘하다. 국악 성악곡의 한 갈래인 가곡(歌曲)은 남성이 부르는 남창 가곡과 여성이 부르는 여창 가곡으로 나뉘는데, 그는 이러한 구분 없이 이펙터를 사용해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를 동시에 내되 여성을 앞세움으로써 전통의맥락을 뒤집고 재조합한다. 해파리는 2021년과 2022년 연속 미국 SXSW 페스티벌에 초청됐다.   비스킷 사운드(BISCUIT SOUND) 제공 , 정은혜(Jung Eun-hye [Jung Eunhye] 鄭恩寭), 2021년 8월, 비스킷 사운드(BISCUIT SOUND) 2017 초연된 창작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낭독극 사운드 프로젝트에 완성도를 더해 발매된 음반이다. 창극과 서양 고전 문학에 사운드적 건축학을 적용한 일종의 ‘소리 연극’이라 할 수 있다. ‘지옥의 문’, ‘카론의 강’, ‘악마의 먹잇감’ 등 음반에 실려 있는 17곡은 단테의 『신곡』 가운데 지옥편에서 착안했고, 주요 텍스트를 창(唱)과 대사로 풀어냈다. 스테레오의 입체 공간 속을 유령 같은 메아리로 떠도는 정은혜의 목소리는 이따금 타악, 첼로, 기타, 피아노의 지원을 받아 듣는 이의 감은 눈앞에 어둠침침하고 눅눅한 지하 소극장을 펼쳐낸다. 얼터너티브 팝 밴드 이날치(LEENALCHI)가 코믹한 판소리 에서 익살과 흥을 극대화했다면 정은혜는 판소리에 담긴 지극한 처연함의 미학을 단테의 지옥도와 결합 낸다. 그는 판소리와 창극, 연극을 오가며 소리꾼이자 배우로 활약해 왔다. 일곱 살 때 판소리에 입문해 당대의 명창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서울대학교에서 국악을 전공했다. 2013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여러 편의 창극에서 주역을 맡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 박진희(Park Jin-hee 朴眞姬) <“Hi, We are Jihye & Jisu”>, 지혜지수(Jihye & Jisu), 2021년 3월, 사운드 리퍼블리카(Sound Republica) 타악 연주자 김지혜(Kim Ji-hye 金智慧)와 클래식 연주자 정지수(Jung Ji-su 鄭智守)로 구성된 듀오의 첫 번째 정규 앨범이다. 김지혜는 어릴 적부터 국악을 했지만 다른 예술 장르와의 융합을 꿈꾸었고, 정지수는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성장했지만 창작욕과 대중성에 대한 갈증이 컸다. 미국 버클리음악대학 재즈 작곡과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이들은 연주가로서 활동하며 더불어 창작자로서도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이들의 음악 작업에서는 심각하고 난해한 실험은 찾아볼 수 없다. 디지털로 변환한 무언가도 없다. 수록된 일곱 곡이 연주되는 동안 북과 장구와 피아노가 있는 그대로의 음색으로 한 편의 담백한 어쿠스틱 콘서트를 만들어 낸다. 함께 스페인을 여행하며 떠오른 영감과 개인적 경험들을 녹여낸 이 앨범은 낙천적인 분위기, 밝은 에너지가 시종 넘실댄다. 굿거리, 자진모리, 칠채 같은 국악 장단이 재즈의 펑키한 리듬이나 홀수 박자와 맞부딪친다. 속도감 있게 질주하는 다섯 번째 곡 ‘론다와 나(Ronda and Me)’는 꽉 막힌 출근길에서 들으면 제격일 정도로 시원한 느낌이다. 여섯 번째 곡 ‘벚꽃의 기억(Memories of Cherry Blossom)’과 마지막 곡 ‘K-시나위(K-Sinawi)’에는 색소폰 연주자와 타악기 연주자가 참여했는데, 매우 인상적인 이들의 피처링도 기억할 만하다.   ⓒ Daniel Schwartz, Micha , 국악재즈소사이어티(The Gugak Jazz Society), 2021년 3월, 소리의 나이테 음악회사(Sori-e Naite Music Company) 국악재즈소사이어티는 한국, 그리스, 미국 출신의 음악가들로 구성된 다국적 앙상블로 2019년 보스턴에서 재즈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판소리 칸타타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이 음반은 제목에 쓰인 ‘Greekorea’라는 조어(造語)처럼 그리스와 한국 전통 음악의 화학적 결합을 시도한 작품이고, 재즈가 촉매로 합류한다. 보스턴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조미나(Cho Mi-na [Mina Cho] 趙美娜)가 주도해 만들어진 이 작품은 장구, 꽹과리, 생황, 가야금, 태평소와 같은 국악기부터 그리스의 류트, 중동 타악기인 벤디르, 리크, 다부카를 포함해 드럼과 베이스까지 다채로운 악기가 입체감을 만들어 낸다. 또한 이나래(Lee Na-rae [Lee Na Rae] 李翼)의 보컬은 놀랍게도 한국 민요와 중동의 소리를 유연하게 오가고 각국의 장단과 리듬, 화성이 이질감 없이 섞여든다. 그는 이날치의 멤버이기도 하다. 이 독특한 3개국 합작 프로젝트는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색감의 음악 팔레트를 만들었는데,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서울, 아테네, 보스턴에 위치한 각국의 연주자들이 원격으로 협업하며 음반을 제작한 점을 감안하면 더욱 놀랍다.   ⓒ 보이드 스튜디오(Void Studio) , 신박서클(SB Circle), 2021년 8월, 플랑크톤뮤직(Plankton Music) 재즈 색소폰 연주자 신현필(Shin Hyun-pill 申鉉弼), 가야금 연주자 박경소(Park Kyung-so [Kyungso Park] 朴景召), 베이스 주자 서영도(Seo Young-do 徐永道), 드러머 크리스천 모런(Christian Moran)의 이름을 결합한 팀명을 지닌 신박서클의 두 번째 앨범이다. 젊은 세대가 즐겨 쓰는 ‘신기하고 기발하다’는 뜻의 속어 ‘신박하다’의 의미도 담겨 있다. 이 ‘신박한’ 그룹은 전통 음악의 단선율 음계에 재즈 화성을 끼워 맞추는 식의 오래된 물리적인 결합은 지양했다. 대신 경쾌하되 경박하지 않은 공동 창작의 화학 작용을 준수하게 뽑아 냈다. 색소폰과 가야금의 단선율 유니슨(unison)이 뻥 뚫린 한강변 도로 위 세단처럼 뻗어나가는 첫 곡 ‘밀실의 선풍기(Fan in the Room)’부터 음악의 질감이 매끈하고 근사하다. 서영도의 베이스와 크리스천 모런의 드럼이 가져다주는 섬세하면서도 절도 있는 리듬도 매력적이다. ‘평면지구(Flat Earth)’나 ‘음이온(Negative Ions)’의 뻔하지 않으면서도 귀에 와서 철썩 부딪치는 멜로디는 국적이나 음악적 전통을 떠나 도회적인 재즈를 사랑하는 모든 이의 곁에 바짝 다가갈 만하다.

다름을 보여 준다

Features 2022 SPRING 2224

다름을 보여 준다 장영규(Jang Young Gyu 張領圭)는 영화, 무용, 연극, 현대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음악가이다.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몇 개의 밴드를 조직하고 이끌며 전통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실험을 지속해 왔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작업실이 그의 음악적 모험의 산실이다. 2019년, 로 국내외에서 돌풍에 가까운 호응을 얻은 얼터너티브 팝 밴드 이날치(LEENALCHI)에는 음악감독이자 베이시스트인 장영규가 있다. 어떤 이들은 이제야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겠지만, 사실 그는 이날치 이전에도 민요 록 밴드 씽씽(SsingSsing)으로 해외 음악 마니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음악과 거리가 먼 사람들도 (2016)이나 (2016) 같은 영화를 통해 그의 음악을 이미 경험했다. 최근에 높은 흥행을 이룬 이런 작품들 외에 타짜(Tazza: The High Rollers)>(2006), (2005)을 비롯한 80여 편의 영화에도 그의 손길이 배어 있고, 그는 실제로 국내외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음악상을 받기도 했다. 그 밖에도 무용과 연극 음악 분야까지 아우르며 종횡무진 작업하는 뮤지션 장영규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말을 잘하지 못한다며 수줍어했지만,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탬버린, 멜로디언으로 연주하는 ‘말도 안 되는’ 그룹을 만들었던 그의 생각은 그의 음악만큼 자유롭게 번득였다. 컨템포러리 국악의 한 축을 이끌어 온 장영규는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교류해 온 것이 음악 작업의 외연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전통 음악에 접근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국악 작곡가이자 연주자인 원일(Won Il 元一) 씨 때문이었다. 1990년대 초 그를 알게 되었고, 1994년 결성한 어어부(漁魚父) 프로젝트(Uhuhboo Project)에서 1집을 낼 때까지 함께 활동했다. 그때는 밴드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소리에 대한 호기심이 컸는데, 원일 덕분에 국악 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어 그들과 이런저런 작업을 함께했다.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전통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현대무용가 안은미(Ahn Eun-me 安恩美)와 함께 작업하면서부터였다. 안은미컴퍼니는 내 마음대로 음악을 해 볼 수 있는 기회였고, 그 이전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도록 이끌었다. 특히 이나 과 같은 작업을 할 때는 전통 성악의 세 장르, 즉 판소리, 민요, 정가가 그제야 구분되면서 각 소리의 특성과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겉핥기식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에 2007년 7인조 밴드 비빙(Be-Being 悲憑)을 만들었다. 비빙을 통해 불교 음악, 가면극 음악, 궁중 음악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사실 모두 공부하는 마음으로 해 본 작업들이었다. 음악감독으로서 국악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나? 오랜 시간이 아니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들에 큰 매력을 느낀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 듣는가,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가에 따른 차이도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운이 좋게도 국악인들을 직접 만나 가까이서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음반이라든지, 아니면 마이크를 통해 소리를 증폭시키는 공연에서 국악을 접하는 것과는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가까이에서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경험의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민요 록 밴드 씽씽이 2017년 7월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여우락 페스티벌(Yeo Woo Rak Festival) 무대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파격적인 음악과 유쾌한 퍼포먼스로 관람객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씽씽은 장영규를 비롯해 세 명의 소리꾼과 드러머, 기타리스트 등 6인이 모여 2015년 결성되었으며 2018년 해체되었다. 국립극장 제공(Courtesy of National Theater of Korea) 요즘 국악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난해, 오디션 심사를 하면서 60여 개 팀의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다. 심사하는 내내 저들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전통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 수련을 거치기 때문에 기술적으로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하지만 숙련된 테크닉뿐이라면 그 자체를‘음악’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솔직한 내 생각이다.최근 몇 년 사이 국악과 다른 장르를 접목하는 방식으로 활동하는 밴드들이 늘고 있고, 지난해에는 TV 방송에 국악 오디션 프로그램까지 생기면서 크로스오버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게 좋기만 한 일인지 모르겠다. 전통 음악을 들어본 경험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시청자들이 이런 경쟁 프로그램에 나오는 크로스오버 형식의 음악만 국악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음악만 찾게 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전통 음악의 재미와 매력을 제대로 들려줄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을 빨리 찾아내야 한다. 국악과 다른 장르가 접목된 음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김덕수(Kim Duk Soo 金德洙) 사물놀이패와 다국적 재즈 그룹 레드선(Red Sun)의 협연 음반을 들으며 자랐다. 음악적으로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에는 푸리(Percussion Ensemble Puri)와 양방언(Yang Bang Ean 梁邦彦, Ryo Kunihiko)이 눈에 들어왔다. 양방언의 경우 그가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공연 무대에서 그의 곡을 연주하지 않는 국악 밴드들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 그의 음악 스타일을 모방한 국악 그룹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국악계가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잠비나이(Jambinai) 같은 경우는 그들의 음악이 전통 음악에 속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자신들이 무슨 음악을 해야 되는지 방향성을 갖고 자신들만의 색깔을 확실히 내고 있는 팀이다. 음악적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번째달(2nd Moon)처럼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는 지점을 포착한 밴드도 있다. 다양한 팀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 12월, 홍대 앞 라이브 공연장 스트레인지 프룻(Strange Fruit)에서 공연하고 있는 이날치. 장영규를 중심으로 2019년 결성된 얼터너티브 팝 밴드로 두 명의 베이시스트와 드러머, 네 명의 보컬 총 7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판소리를 팝으로 재해석한 댄스곡 는 국내외에서 폭발적 호응을 이끌어 냈다. 오른쪽부터 베이스의 장영규, 보컬 권송희(Kwon Song Hee 權松熙), 이나래(Lee Na Rae 李翼), 안이호(Ahn Yi Ho 安二鎬), 신유진(Shin Yu Jin 申有珍), 뒷줄에 베이스의 박준철(Park Jun Cheol 朴俊澈)과 드럼의 이철희(Lee Chul Hee 李鐵熙). ⓒ LIVE CLUB DAY, Azalia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음악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다름’을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업할 때 다름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를 항상 중심에 두고 생각한다. 상투적 표현을 경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인가? 작업을 많이 하다 보니 스타일이 명확해지고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져 변화에 대해 고민하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꼭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항상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내 스타일 안에서 내용에 따라 다른 방식을 찾아가면 된다. 무용, 연극, 영화 음악을 만들 때와 이날치 작업은 어떤 차이가 있나? 다른 작업들은 목적이 분명하고, 내가 해야 되는 역할도 명확하다. 반면에 이날치는 완전히 열려 있다. 이날치 음악을 만들 때는 기본적인 리듬이나 패턴들을 만들어 놓은 후 소리꾼 4명이 모여서 소리 대목들을 찾는다. 리듬과 음악적 방향에 어울리는 선율을 만들기 위해 어떨 때는 주요 판소리 다섯 바탕을 다 찾아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발생하는 것들을 포착하여 발전시키는 게 재미있다. 전통 판소리를 놓고 편곡하는 방식이 아닌 작곡에 가깝다. 이날치가 성공한 이후 달라진 게 있는가? 대중음악 시장에 들어가고 싶다, 소비가 잘 됐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무얼 해야 되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2020년 1집 앨범 를 발매한 후에 보니 정말 하기 싫었던 일들, 예전 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이 내 앞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회피하면서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까지 해야 되나’ 여기던 것들을 받아들이게 된 게 내 스스로 가장 달라진 점인 것 같다.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날치는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과연 밴드로서 소비되고 있는가’ 자문해 봤을 때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갈 길이 남았다.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 사실 국내 음악 시장에는 밴드 시장이 없기 때문에 좋은 음악만 만들면 저절로 잘될 거라 기대해선 안 된다. 소비되기 위해서 때를 기다리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누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닌 이상, 밴드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해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해외 활동을 준비하고 있나? 밴드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국내에서도 물론 계속 방법을 찾아야겠지만, 해외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시장이 존재하니까 그곳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양쪽 모두 시도해 볼 작정이다. 올해는 해외 공연 일정도 잡혀 있다. 지난해 발매 예정이었던 2집이 늦어지고 있다. 사실 이렇게 바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음반 작업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리고 판소리 다섯 바탕 안에서 뭔가 더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기존 판소리 레퍼토리를 짜깁기하여 이야기만 새로 갈아 끼운다고 지금 시대에 맞는 음악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시대성을 지닌 새로운 이야기는 물론이고 작창에서도 다른 음악적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치 2집은 앞서 말한 고민들이 반영된 창작 판소리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것 같다. 가능하다면 올해 말에 발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융합과 협업의 축제

Features 2022 SPRING 1808

융합과 협업의 축제 국립극장이 주최하는 여우락(樂) 페스티벌(Yeo Woo Rak Festival)이 그 이름이 뜻하는 대로 모두가 함께 즐기는 흥겨운 행사로 자리 잡았다. 국악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 대중화를 모색하는 취지로 시작된 축제가 해를 거듭하며 많은 음악인들의 상상력과 영감을 일깨워 과감한 창작의 세계로 이끌어 가고 있다. 2017년 7월 국립극장에서 열린 여우락 페스티벌에는 월드 뮤직 그룹 1세대인 공명(GongMyoung 共鳴)이 창단 20주년을 맞아 풍성한 레퍼토리로 구성된 기념 공연을 펼쳤다. 여우락 페스티벌은 관객의 열렬한 호응 속에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국립극장 제공(Courtesy of National Theater of Korea) 서울 한복판 남산 자락에 위치한 국립극장에서는 매년 7월이면 한 달 내내 흥겨운 축제가 펼쳐진다. 여우락 페스티벌이다. ‘여우락’은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It’s our music)’는 뜻의 줄임말로 ‘동시대인들이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전통 음악’이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2010년에 시작해 올해로 13회를 맞는 이 페스티벌에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참여해 전통 음악을 매개로 과감한 시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명실상부한 전통 음악 실험의 장(場)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여우락은 대부분의 다른 국악 공연과 달리 수년째 유료 티켓의 매진 행렬을 자랑한다. 2021년 말 기준 누적 관객 6만 6천여 명(2020년 온라인 상영 시청자 제외), 평균 객석 점유율 93퍼센트를 기록했으며, 꾸준히 마니아층을 확보해 최근 대중 문화계에 불고 있는 국악 열풍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간 전통 음악이 매우 소외된 장르로 명맥을 이어 왔고, 전체 음악 시장에서 국악 기반의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도 여전히 미미함을 감안한다면 이 같은 성공은 매우 이례적이고 고무적이다. 그러나 이 페스티벌의 존재 가치는 단순히 티켓 판매에 성공했다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전통 예술 분야를 국가의 지원으로 이어가는 보존에만 한정하지 않고, 그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음악 활동을 펼치는 음악인들을 무대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전통 예술의 현대화, 나아가 그 가치의 향유를 해외 무대로 넓혀 가는 ‘국악 르네상스’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여우락은 그간 예술 감독으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양방언(Yang Bang Ean 梁邦彦, Ryo Kunihiko), 재즈 아티스트 나윤선(Youn Sun Nah 羅玧宣), 작곡가 겸 지휘자 원일(Won Il 元一), 철현금(鐵絃琴) 연주자 유경화(Ryu Kyung-hwa 柳京和)가 역임하였고, 2020년부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거문고 연주자 박우재(Park Woo Jae 朴佑宰)가 수장을 맡고 있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양방언과 나윤선은 재즈와 대중 음악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뮤지션들이고, 원일과 유경화는 전통 음악 전공자로서 자신의 개성적인 음악 세계를 기반으로 실험적이면서 창의적인 협업으로 일가를 이룬 중견 예술가들이다. 이처럼 장르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구성이야말로 여우락의 세 가지 키워드, 즉 실험성, 대중성, 그리고 협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주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우락 페스티벌의 포스터들. 국악의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대중화를 모색하기 위한 취지로 2010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매년 7월 국립극장 무대에서 창의적 공연을 펼친다. 국립극장 제공(Courtesy of National Theater of Korea) 그간 무대에 섰던 출연진들도 대체로 세 부류의 이질적인 그룹으로 대별된다. 첫째는 판소리 명창 안숙선(Ahn Sook-sun 安淑善)이나 황해도 대동굿 만신 이해경(Lee Hae-kyung 李海京)처럼 전통 음악의 원형을 보유하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나 이에 준하는 명인들이다. 둘째는 이들보다 한 세대 젊은 층으로 전통 음악을 전공했지만 재즈나 아방가르드, 대중 음악과 서양 클래식 등 타 장르와의 협업에 능숙하고, 예술성과 실험성, 대중성을 동시에 추구하며 일가를 이룬 새로운 세대의 음악인들이다. 바로 이들이 여우락 페스티벌의 중추적 역할을 맡아 왔다고 할 수 있다. 가야금 연주자 박경소(Kyungso Park 朴景召) 같은 아티스트와 공명(GongMyoung 共鳴), 신노이(Sinnoi)처럼 주로 월드 뮤직 연주로 알려진 밴드들을 꼽을 수 있다. 셋째는 주로 재즈와 대중 음악 쪽에서 실험적이고 예술성이 높은 작업을 해 왔던 뮤지션들로 평소에도 활발한 협업을 통해 전통 음악과의 융합에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아티스트들이다. 피아니스트 임동창(Lim Dong-chang 林東昌), 작곡가 정재일(Jung Jae-il 鄭在日), 래퍼 타이거 JK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외에도 사진 작가, 시각 디자이너 등 음악 외 장르 예술가들도 다수 참여해 새로운 형태의 콘서트를 만드는 데 활발히 기여하고 있다.

‘조선팝’의 탄생

Features 2022 SPRING 1931

‘조선팝’의 탄생 국악과 팝을 접목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 ‘조선팝(Joseon pop)’이 주목받고 있다. K-pop의 외연을 확장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이 ‘변종’ 음악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JTBC의 TV 국악 경연 프로그램 (2021. 9~12)이 마련한 전국 투어 콘서트 중 지난 2021년 12월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서도밴드(sEODo Band)가 공연하고 있다. 은 국악과 대중음악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전통 음악의 멋과 매력을 일반 대중에게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JTBC, 어트랙트엠(ATTRAKT M) “국악은 한국인의 음악이지만, 한국인과 가장 거리가 먼 음악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한 소설가의 이 말은 20세기 이후 한국 전통 음악의 현실을 그대로 나타낸다. 오랜 시간 전승되어 온 민족 고유의 음악이지만 오늘의 감각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국악은 한때 거의 사라질 뻔한 위기에 처했다. 고리타분한 음악이라는 인식이 대중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이러한 고정관념이 국악의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른바 ‘조선팝’의 부상과 인기에 지렛대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대중이 멀리 밀어 두었던 국악이 어느 날 색다른 변화의 옷을 입고 나오니, 그 변신의 폭이 새삼 크게 다가왔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사실 한국의 전통 음악은 시대마다 새로운 감각을 입으며 변화해 왔고, 그 같은 유산이 오랜 침체기를 지나 지금 빛을 발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015년 10월, 사물놀이 창시자 김덕수(Kim Duk Soo 金德洙)와 청배(請拜)연희단(Cheong Bae Traditional Art Troupe)이 함께 광화문 아트홀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김덕수는 1978년 전통 농악 장단을 무대 예술로 각색한 사물놀이를 세상에 내놓아 국내외 수많은 무대에서 공연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청배연희단은 20여 년 동안 전통 연희를 기반으로 창작 음악을 만들어 오고 있는 단체이다. ⓒ 사단법인 사물놀이 한울림(Samulnori Hanullim, A Non-Profit Organization) 보존을 위한 지원 20세기 후반 정부의 보존 및 지원 정책이 전통 음악의 생존에 중요한 결정적 뒷받침이 되었다. 보존이 가능했기에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의 창작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예로부터 어느 국가나 사회에서도 전통 음악은 변화하는 시대 앞에서 빛을 잃기 마련이었다. 한국의 전통 음악도 그런 운명 앞에 놓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 동안 위기를 맞았으며, 1950년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전통 음악인들을 비롯한 국악 자원의 파괴를 가져왔다. 휴전 이후에도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 전통 음악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으며, 1960년대부터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대변되는 근대화 물결이 거세지면서 전통 음악은 전근대적 예술이라는 이유로 그늘 속에 가려 있었다. 하지만 위기 속에도 미약하나마 보존을 위한 노력은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가 그 역할을 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조선 왕조는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었고, 궁중의례 음악도 자연히 축소되거나 폐지될 처지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왕직아악부가 학생들을 모집해 가르침으로써 궁중 음악의 명맥을 겨우 이어 나갔다. 해방과 건국에 이어 발발한 한국전쟁 동안 임시 수도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이 문을 열고 전쟁으로 흩어진 국악 자원과 음악인들의 중심 역할을 했다. 1953년 휴전 이후 서울로 이전한 국립국악원은 이후 계속 발전을 이루어 오늘날에도 전통 음악의 보존과 이를 응용한 창작을 지원하는 기관으로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1962년부터 시행된 문화재보호법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이 법에 따라 ‘국가무형문화재’ 제도가 도입되었다. 중요한 전통 문화 예술 분야를 보존 대상으로 지정하고, 이를 연마하고 전승 능력을 갖춘 이들에게 국가가 ‘보유자’ 및 ‘이수자’ 자격을 부여하고 지원하는 제도다. 전통 음악 부문에서는 종묘제례악, 가곡, 판소리, 대금 산조, 경기 민요를 포함한 다수의 종목이 지정되어 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최근 국악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주목받고 있는 연주자 중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이수자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블랙스트링의 허윤정(Heo Yoon-jeong [Yoon Jeong Heo] 許胤晶)은 거문고 산조, 잠비나이(Jambinai)의 이일우(Lee Il-woo [Ilwoo Lee] 李逸雨)는 피리 정악 및 대취타, 이날치(LEENALCHI)의 안이호(Ahn Yi-ho 安二鎬)는 판소리, 소리꾼 이희문(Lee Hee-moon 李熙文)은 경기 민요 이수자다. 2020년 9월, 데뷔 10주년을 맞은 고래야(Coreyah)가 구리아트홀에서 콘서트를 열고 있다. 2010년 결성된 국악 크로스오버 그룹 고래야는 전통 악기의 특성을 살린 음악적 구성에 전 세계의 다양한 민족 음악과 대중음악을 접목해 새로운 국악 스타일을 만들어 왔다. ⓒ 구리문화재단(Guri Cultural Foundation) 국악의 정착 1959년 서울대학교 국악과 창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국악이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 서울뿐 아니라 전국 여러 지역의 대학에 국악과가 개설되는 불씨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1970~80년대에 크게 증가한 국악과 개설과 졸업생들의 사회 진출은 국악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20세기 역사의 격변 속에 전통 음악이 사라질 위기를 목격했던 전 세대와 달리 대학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는 보존과 전승보다는 국악이 보다 새로운 감각을 입고 대중에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전통 음악의 여러 요소들을 밑바탕으로 시대에 어울리는 창작곡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창작’의 범위는 상당히 넓었다. 일반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민요나 판소리를 소재로 새로운 곡을 쓰거나 익숙한 서양 고전 음악을 편곡하여 국악기로 연주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되었다. 특히 1970년대 말 등장한 사물놀이는 국악이 대중과의 간극을 좁히는 데 획기적 역할을 했다. 전통 농경 사회에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즐기던 농악 장단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사물놀이는 북, 장구, 꽹과리, 징 4개의 타악기가 앙상블을 이루어 연주하는 흥겨운 음악이다. 젊은 국악인들은 사물놀이의 특성과 요소를 흡수하여 대중이 신나게 즐길 수 있는 공연으로 호응을 이끌어 내면서 오랫동안 뒷전에 물러나 있던 전통 음악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국악의 변신 대중음악 시장이 부상하던 1980년대에는 국악의 장단이나 가락을 살려 일반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든 민요풍의 가요가 등장했다. ‘국악 가요’라 불리는 이 장르는 대중 음악의 한 흐름으로 정착했으며, 국악 향유층을 넓히는 데도 한몫했다. 또한 국악기와 양악기를 결합한 반주 편성은 이후 1990년대 들어 퓨전 국악이 등장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한편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시작된 세계화의 물결은 또 다른 자극제가 되었다. 시장이 개방되고 새로운 무역 질서가 구축되며 서구 문화가 다수 국민들의 일상에 유입되는 가운데 우리 문화를 돌아보자는 시각이 확산되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국산 농산물을 애용하자는 내용을 담은 배일호(裴一湖)의 노래 (1993)가 크게 히트했고, 같은 해에 판소리를 소재로 한 임권택(Im Kwon-taek 林權澤) 감독의 영화 도 ‘국민 영화’로 불리며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비슷한 시기 판소리의 박동진(朴東鎭 1916~2003) 명창이 출연해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를 외쳤던 한 의약품 TV 광고의 카피가 한동안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2018년 12월, 멜론 뮤직 어워드(Melon Music Awards)의 BTS 특별 무대에서 멤버 지민(Jimin)이 부채춤을 추고 있다. BTS는 음원 사이트 멜론이 주최하는 이 시상식에서 (2018)을 국악 버전으로 편곡해 공연했고, 지민의 부채춤뿐 아니라 제이홉(J-HOPE)의 삼고무, 정국(Jungkook)의 봉산탈춤 등 전통 문화를 접목한 화려한 퍼포먼스로 관객의 열광적 호응을 받았다. ⓒ Kakao Entertainment Corp. BTS 멤버 슈가(SUGA)의 두 번째 믹스테이프 (2020)의 타이틀곡 ‘대취타’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이다. 조선 시대 임금이나 관리들의 공식 행차 때 연주되던 행진곡 대취타를 샘플링해서 만든 곡으로 트랩 비트(trap beat)와 악기 소리가 신명나게 어우러진다. 전 세계 아미들이 국악에 관심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 곡이다. ⓒ 하이브(HYBE Co., Ltd.) 당시 정부는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을 기념하고 관광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1994년을 ‘한국 방문의 해’ 및 ‘국악의 해’로 지정했다. 이를 통해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했고, 이 과정에서 국악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상품 역할을 하게 되었다. 몇 년 후 아시아 금융 위기로 국가 부도 사태를 맞게 되자 문화 예술인들의 활동도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으나, 한편으로 많은 국악인들에게 ‘먹고 살기 위해 어떤 음악을 해야 하는가’라는 시대적 당면 과제를 안겨 줬다. 1990년대 말부터는 인터넷의 확산에 따라 국악인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도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국의 전통 음악이나 민속 음악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음악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런 음악이 ‘월드 뮤직’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인도나 아프리카 등 다른 문화권의 음악은 국악인들이 새로운 음악을 창작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특히 종전의 해외 국악 공연이 전통 음악에 국한되었던 것과 달리 작곡가 원일(Won Il 元一)을 주축으로 한 그룹 푸리(Puri)나 월드 뮤직 그룹 공명(GongMyoung 共鳴)처럼 퓨전 스타일의 음악을 연주하는 사례가 늘어났고, 해외 음악 페스티벌이나 음반 시장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 이와 함께 변화와 변용도 넓은 의미에서 국악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다. 유네스코가 아리랑을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올릴 때도 “오래된 노래가 여전히 불리며, 동시에 새로운 창작을 통해 전승되고 있다”는 점을 등재 사유로 들었다.   2021년 7월, 포털 사이트 네이버를 통해 진행되었던 소리꾼 이희문(Lee Hee-moon 李熙文)의 온라인 콘서트 의 스틸 사진이다. 공연을 앞두고 공개된 이 사진에서 이희문은 자신이 만들어 낸 캐릭터 ‘미뇨’를 판타지적인 비주얼로 표현했다. 현장 공연과 뮤직 비디오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영상 콘서트는 새로운 공연 형식으로 주목받았다. 이희문컴퍼니(Lee Hee Moon Company) 제공 협업과 시너지 최근 들어 ‘조선팝’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대중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음악은 이처럼 오랜 역사와 배경을 갖고 있다. 국내에서보다 때로는 해외에서 더 사랑받고 있는 듯한 블랙스트링, 잠비나이, 이날치 같은 밴드들의 탄생도 이런 흐름의 한 자락으로 볼 수 있다. 2010년부터 국립극장이 매해 주최하고 있는 여우락 페스티벌도 국악계의 큰 행사인 한편 오늘날 변화하고 있는 국악인들의 생각과 작업을 소개하는 일종의 월드 뮤직 페스티벌로 자리 잡았다. 이런 흐름 속에 국악을 대하는 다른 분야 예술가들의 자세와 일반인들의 생각도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JTBC가 2021년 9월부터 12월까지 방영했던 TV 오디션 프로그램 은 젊은 국악인들의 자유로운 실험 정신을 가감 없이 보여줬고, 시청자들은 낯설지만 감각적인 이들의 음악에 환호했다. 연극∙무용∙영화∙뮤지컬∙미술 등 다른 장르들이 색다른 변화를 시도할 때 국악인들과 활발히 협업하는 것도 새로운 현상이다. 소리꾼 이희문은 패션∙영상∙뮤직비디오 같은 여러 분야의 아티스트들과 긴밀한 협업을 이어오고 있는데, 최근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국악을 잘 보존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악이 다른 예술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숨은 무기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고 했다. ‘조선팝’이 앞으로 지구 곳곳의 독특한 음악을 찾아 듣는 해외 월드 뮤직 팬들에게 앞으로 더욱 다가설 수 있는지 지켜볼 일이다.

월경(越境)하는 국악기들

Features 2022 SPRING 1962

월경(越境)하는 국악기들 국악기에는 고대로부터 한반도에 존재해 온 자생적 악기와 유라시아 대륙과의 교류를 통해 유입된 외래 악기가 있다. 이 악기들은 이 땅의 오랜 역사와 함께하며 각 시대의 문화와 감성을 담아 왔다. 그런 가운데 어떤 것은 한때 성행하다가 조금씩 잊히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잠시 잊혔다가 다시 조명되기도 한다.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국악기 가운데 몇 종류를 소개한다. 세상의 모든 악기에는 문화가 반영된다. 악기의 재료, 형태, 크기, 연주법은 지리, 환경, 종교, 정치 등 다양한 요소가 집약된 결과물이다. 외부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악기는 거의 없다. 설령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보편화되는 과정에는 반드시 사회적 요인이 개입한다. 새로운 악기는 인접 국가의 문화와 자국의 문화가 융합되고 충돌하며 탄생한다. 이렇듯 악기의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국악기도 마찬가지다. 까마득히 먼 과거에 중국에서 수입된 악기를 개량해 보편화된 것도 있고, 비교적 가까운 과거인 20세기에 서양 악기를 개조한 것도 있다. 오늘날에는 음량을 개선하거나 음역대를 넓히기 위해 기존 악기를 개량하기도 한다. 국악기는 지금도 여전히 경계를 넘으며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한편 서양 음악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근대를 거치며 밴드나 콰르텟, 서구 오케스트라 편성의 합주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편성은 국악기에 최적화된 합주 방식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국악기 본연의 특성이 배제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음량이 작거나 화성 진행에 어려움이 있는 국악기는 무대에서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다. 하지만 최근 각각의 악기가 지닌 고유한 특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솔리스트로 활동하는 음악가들이 늘었다. 합주에서 본연의 색깔을 드러내지 못하고 부차적으로 밀려났던 악기, 홀로 연주되는 일이 드문 악기가 주축이 되는 독주곡도 새롭게 등장했다. 악기를 사용하거나 전통 음악을 해석하는 방식도 과거에 비해 무척 다양해졌다. 오늘날 국악기는 전통 음악의 문법에 깊게 착안한 음악부터 장르의 경계가 모호한 음악까지 모두 아우른다.   거문고,악기 중의 으뜸 한국을 대표하는 현악기 거문고는 예로부터 모든 악기 중 으뜸이라 칭해져 왔다. 비단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의 역할뿐 아니라 지식인들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수양의 도구로도 활용되었다. 외관은 같은 현악기인 가야금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특성을 지녔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음색이다. 거문고는 가야금에 비해 줄이 굵어 낮고 중후한 소리가 난다. 연주법도 다르다. 가야금은 손가락으로 줄을 누르고 튕기며 연주한다. 하지만 거문고는 술대라는 막대를 사용해 줄을 밀거나 뜯고 내려치며 연주한다. 거문고가 다른 현악기들에 비해 강인하고 절제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이렇듯 현악기적 특성과 타악기적 특성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합주를 하는 전통 음악 레퍼토리에서 거문고는 핵심적인 입지를 갖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역할이 점차 줄고 있으며, 거문고가 중심이 되는 창작 음악도 드물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밴드나 서구 오케스트라 편성이 주를 이루다 보니 거문고의 작은 음량과 소박한 음색의 가능성에 주목하지 못한 탓이 크다. 실제로 거문고의 특징이 잘 발휘되는 작품을 만들기란 무척 어렵다. 하지만 최근 거문고만으로 존재감을 입증하는 연주자가 하나둘 늘고 있다. 거문고 솔리스트이자 창작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황진아(Hwang Gina 黃眞娥)는 이 악기의 가능성을 확장하며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작품을 만들어 낸다. 2021년 발표한 디지털 싱글 은 이별을 대하는 남녀의 상반되는 심리를 재치 있는 사운드로 표현했다. 분명한 기승전결 속에서 거문고만이 할 수 있는 리드미컬한 호흡의 연주를 가감 없이 담아냈다.   피리,숨결을 불어넣은 나무 어떤 악기는 나무에 숨을 불어넣었을 때 완성된다. 피리는 대나무로 만들어 세로로 연주하는 관악기로 향피리, 당피리, 세피리 세 종류가 있다. 궁중 음악부터 민간 음악까지 대부분의 전통 음악에서 주선율을 담당한다. 일반적으로 관악기는 소리를 내는 작은 진동판인 리드(reed)가 있는 악기와 그렇지 않은 악기로 나뉜다. 피리는 ‘서’라고 하는 겹리드(double reed)를 사용하며, 여타 관악기와 마찬가지로 숨을 불어넣고 강약을 조절하며 지공(指孔)을 여닫는 방식으로 연주한다. 혀를 사용하거나 서를 무는 위치를 달리하여 음정을 조절하고 피리만이 할 수 있는 다양한 기교를 구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민감한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해서는 연주자의 섬세한 기량이 요구된다. 피리가 소화할 수 있는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다. 꿋꿋하고 힘찬 음색 덕분에 현대에 만들어진 음악에서도 주선율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의외로 피리 연주자로만 이루어진 팀은 흔치 않다. 삐리뿌(BBIRIBBOO)는 두 명의 피리 연주자와 프로듀서로 구성된 3인조 밴드다. 다양한 전통 음악 레퍼토리를 재기발랄하게 풀어내 악기가 지닌 매력을 극대화한다. 2021년 발표된 는 조선 시대에 궁중과 상류층에서 연주되던 정악 연주곡들 가운데 ‘양청도드리’의 주선율을 펑키한 스타일로 편곡한 작품이다. 양청도드리는 정악 계열의 음악 중에서 템포가 빠르며, 누구나 쉽게 기억할 수 있는 흥겨운 선율로 구성되어 있다. 는 이러한 특성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해석해 피리와 생황으로 연주한다.   운라(雲鑼), 떨림과 울림 모든 국악기가 까마득히 먼 과거부터 사용된 것은 아니다. 운라는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사용되기 시작했다. 운라가 전래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시대 대표적 악서인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에 등장하지 않고, 조선 후기 사료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대략적인 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운라는 구리로 만든 작은 접시 모양의 ‘동라’를 나무틀에 매달아 작은 막대로 쳐서 연주하는 타악기다. 하지만 선율을 만들어 낼 수 있어 일반적인 타악기와는 조금 다르다. 동라는 여러 개의 단으로 일정하게 배열되어 있는데, 맨 아래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가면서 음이 높아진다. 제일 높은 단의 중앙에 위치한 동라의 음이 가장 높다. 연주법은 간단하다. 양손에 채를 쥐고 동라를 번갈아 치거나 한 손으로 치기도 한다. 이 악기는 주로 수문장 교대식이나 어가 행렬 재현식과 같은 행진곡에 사용된다. 다른 타악기와 함께 연주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단독으로 사용된 음악은 드물다. 최근에는 타악기 연주자 한솔잎(Han Solip)이 다른 타악기와 함께 운라를 사용해 다양한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2018년 발표된 첫 번째 디지털 싱글 는 맑고 청아한 음색의 운라를 사용해 따뜻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그려낸다. 이 곡은 행진곡에 사용되는 운라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동라를 강하게 타격할 때 발생하는 쨍한 소리보다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잔향과 서정적인 선율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미니멀하면서도 모던한 음색 속에서 운라의 가능성을 찾는 음악가들은 앞으로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최영모(Choi Yeong-mo) 철현금(鐵絃琴), 기타의 변신 철현금은 1940년대 남사당패 줄타기 명인이었던 김영철(金永哲)에 의해 고안된 현악기로 서양 악기인 기타를 국악기의 문법에 맞게 개량한 흔치 않은 사례이다. 기타를 거문고처럼 바닥에 놓고 연주하면서 놀다가 만들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다 보니 기타와 거문고의 속성이 절묘하게 결합되었다. 일반적인 현악기는 명주실을 사용하지만 철현금은 기타처럼 쇠줄이다. 연주법은 기타가 아닌 거문고와 비슷하다. 오른손에 술대를 쥐고 왼손으로는 농옥(弄玉)으로 줄을 문질러 연주한다. 쇠줄을 사용하지만 연주법은 기타와 전혀 다르다 보니 음색이 무척 독특하다. 미묘한 경계에 서 있는 이 악기는 근대의 역동성과 변화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사실 철현금은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들 사이에서 보편화된 악기가 아니어서 다른 악기에 비해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사람이 드물다. 당연히 연주할 수 있는 곡도 매우 적다. 최근에 들어서야 창작곡을 통해 접할 기회가 조금씩 늘고 있다. 가야금 트리오 밴드 헤이스트링(Hey String)이 2019년 발표한 중반부에 철현금이 등장한다. 가야금 선율과 대비되는 날카롭지만 둥글게 휘는 금속성 선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송광찬(Song kwang-chan 宋光燦) 장구, 음악의 처음과 끝 장구는 한국의 거의 모든 전통 음악에 사용되는 타악기다. 음악의 처음과 끝에는 언제나 장구가 있다. 음악의 기준이 되는 ‘박(拍)’을 짚어 주면서 템포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장구는 나무의 속을 파내고 가운데를 잘록하게 깎아 만든 긴 통의 양쪽에 가죽을 대고 줄로 엮어 만든다. 양쪽 가죽을 양손으로 두드려 연주한다. 장구의 왼쪽을 북편 또는 궁편, 오른쪽을 채편이라 부른다. 북편은 손바닥으로 두드리거나 동그란 궁알이 달린 궁채로 치고, 채편은 나무를 깎아 만든 길고 가느다란 열채로 연주한다. 일반적으로 장구는 반주용 악기로 인식된다. 물론 설장구, 풍물굿 등 장구를 중심으로 화려하고 다채로운 가락과 기교를 선보이는 음악도 있다. 하지만 온전히 타악기로만 연주되는 경우는 많지 않고, 타악기가 중심이 되는 음악도 다른 선율 악기에 비해 한정적이다. 최근에는 솔리스트를 선언하고 활동하는 타악 연주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타악기가 중심이 되는 음악을 선보이며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김소라(Kim So-ra [Kim So Ra] 金素羅)는 솔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대표적인 타악기 연주자이다. 2021년 발매된 두 번째 앨범 는 한국에 오랜 기간 전승되어 온 풍물굿과 무속 장단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해석한 작품이다. 그의 연주에는 폭발하는 에너지와 정제미가 공존한다. 긴장과 이완 속에서 가락을 섬세하게 변주하며 장구가 지닌 역동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장구 연주를 온전한 하나의 음악으로 감상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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