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의 캠핑카를 구입하거나 렌트하지 않아도 자신의 차량으로 캠핑을 즐길 수 있는 ‘차박’이 새로운 레저 문화로 떠오르고 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며 한층 상승세를 타고 있는 비대면 야외 활동이다.
“첫 번째로 1열의 의자를 앞쪽으로 최대한 당겨 주시고요. 그다음에는 2열의 의자도 같은 방향으로 접어 주세요.”
한 유튜버가 자신의 SUV 차량 내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30초도 되지 않아 내부 공간을 넓힌 그는 “이제 바닥에 매트를 깔 거예요”라며 “그 전에 제가 누울 수 있는지 의자를 치운 공간의 가로, 세로 길이를 재 보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곧 이어 차량 내부의 가로 길이는 약 1m, 세로는 1m 95㎝로 측정됐다.
그는 “이 정도면 일반 성인 남성도 편안히 누울 수 있다”며 “여러분이 커플이라면 오붓한 2인 캠핑을 즐길 수도 있겠다”고 미소 지었다. 지난해 7월 한 유튜브 계정에 올라온 차박 준비 과정을 다룬 이 영상은 올 10월 기준 조회수 10만 건을 넘겼다.
‘차박(車泊)’이란 차와 숙박을 합친 신조어로 ‘차에서 잔다’는 의미다. 여행을 떠나 차에서 잔다면 주방 시설에 침대도 있는 캠핑카를 떠올리기 쉽지만, 차박은 필수 장비 몇 가지만 갖춘 채 평소에 사용하던 자신의 차에서 자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 보니 대개 실내 공간이 넓은 SUV 차량을 이용하는데, 운전석 뒤의 의자를 눕혀 공간을 최대한 넓히면 그런대로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할 수 있다. 캠핑의 감성은 그대로 살리면서도 최소한의 짐만으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여행 형태이다.
차박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장소를 불문하고 숙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캠핑장이나 휴양림에 갇힐 필요 없이 마음에 드는 곳이면 어디든 머물 수 있다.
새로운 레저 문화
한국자동차산업협회 보고서에 의하면 트럭과 승용차의 장점을 섞은 픽업트럭 판매량이 2017년 2만 2000여 대에서 이듬해 4만 2000여 대로 90% 이상 증가했다. 또한 캠핑아웃도어진흥원은 같은 기간 국내 캠핑 산업 규모가 2조 원에서 2조 6000억 원대로 30% 이상 성장했다고 발표했다.
캠핑 용품 시장도 올해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다. 온라인 쇼핑몰 SSG닷컴이 지난 6~7월의 매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차 트렁크와 연결해서 쓰는 도킹텐트와 텐트 안에 까는 에어매트 매출이 직전의 두 달보다 각각 664%, 90% 늘었다. 캠핑 필수 아이템인 아이스박스 매출은 10배 이상 증가했다. 롯데마트도 같은 기간에 전년 대비 캠핑 용품 매출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 “의자와 테이블 등을 포함한 캠핑 가구는 103.7%, 침낭•매트리스 등 캠핑 침구는 37.6%, 텐트는 55.4%, 캠핑 취사 용품은 75.5%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2018년 무렵부터 세간에 회자되며 성장세를 보인 차박은 TV 방송 프로그램의 소재로도 인기다. MBC TV의 대표적인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는 지난 3월 한 신인 남자 배우가 자신의 차량을 끌고 바닷가를 찾아 아이돌 가수와 함께 캠핑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차량 뒷좌석을 전면 개조했는데, 차 안에 전구를 달아 밤에는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 방송이 나간 뒤,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 차박이 등장했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는 차박을 해 보고 싶다는 반응이 폭발적으로 이어졌다.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로 ‘차박’을 검색하면 수십만 건의 게시물이 쏟아진다.
새로운 매력
이 새로운 레저 문화가 급격히 성장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크게 번거로운 준비 과정 없이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날 수 있다. 금요일 퇴근 후에 떠나 바닷가에서 지낼 수도 있고, 산림을 찾아 이튿날 아침 상쾌한 공기도 마실 수 있다. 영상 하나로 4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한 어느 여성 유튜버는 홀로 여유를 즐기는 데 그만이라고 말한다. 특별한 장비 없이 캠핑을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인기 요인이다. 끼니를 해결할 냉동 식품 몇 가지에 술 한 병만으로도 하룻밤의 캠핑이 완성된다.
캠핑장을 예약할 필요도 없다. 캠핑 인구가 늘면서 유명한 캠핑장들의 경우 오랫동안 기다려야 예약이 가능한데, 굳이 캠핑장이 아니라도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코로나19가 영향을 미친 측면도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대면 접촉이 제한되면서 혼자서 또는 가족끼리 오붓하게 자연 속에서 우울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탈출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기반하고 있는 국내 최대 차박 커뮤니티 ‘차박캠핑클럽’만 보더라도 올해 2월 말 8만 명이었던 회원수가 9월 초에는 17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차량에 까는 매트가 다소 불편하다. 차박용 매트를 사용한다 해도 잠자리에 예민한 사람에게는 불면의 밤이 될 수 있다. 올 2월 28일 자동차관리법이 개정되면서 승용차도 캠핑카로 개조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바닥을 고르게 하는 작업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반드시 세안이나 샤워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쾌한 여행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건전한 문화
차박에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불편함도 따른다. 차 속에 오랫동안 에어컨이나 히터를 틀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기를 생산하는 파워뱅크와 무시동 히터 등의 장비를 갖춰야 더위와 추위를 막을 수 있다. 또 차 안에 들어오는 벌레도 귀찮은 문제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차박용 모기장을 따로 준비해야 한다.
필요한 장비를 하나씩 사다 보면 갈수록 더 비싼 물건을 찾게 된다. 안락한 차박을 추구하다 보면 자연스레 생기는 일이다. 한 남성 유튜버는 자신이 차박을 그만둔 이유가 이런 ‘장비병’ 때문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차박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장소를 불문하고 숙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캠핑장이나 휴양림에 갇힐 필요 없이 마음에 드는 곳이면 어디든 머물 수 있다. 물론 대다수 차박족은 화장실을 갖춘 공원이나 해변, 강가를 선호한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차박 성지’로 떠오른 곳들도 많지만, 야영과 취사로 인해 불거질 수 있는 문제점 때문에 출입을 제한하는 곳들도 늘고 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자연을 훼손하고, 쓰레기를 무단으로 투기하기 때문이다. 건전한 문화를 정착시킬 수만 있다면, 차박은 코로나19 시대에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유익한 여행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