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두박질하듯 살며 사랑과 예술로 인간 승리를 이룬 삶”– 청각 장애 화가의 헌신적인 아내일뿐 아니라 자신도 그 못지않게 훌륭한 작가였던 박래현(Park Re-hyun 朴崃賢 1920~1976)은 스스로 인생을 이렇게 표현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설이 된 삶의 그늘에 가리워졌던 작가 박래현의 예술 세계를 돌아보는 기획전을 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래현, 삼중통역자>전(2020년 9월 24일부터 2021년 1월 3일까지)은 데뷔 시절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 약 30년간에 걸친 그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전시는 주로 여인들을 소재로 한 1940~50년대의 구상 작품, 남편 김기창(Kim ki-chang 金基昶)과 함께한 부부전 자료들과 박래현의 개인적 사유를 엿볼 수 있는 글들, 1960년대 추상화, 그리고 1970년대 판화 작품들을 소개한다.
전시 제목인 ‘삼중통역자’는 청각 장애를 가졌던 남편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한국어, 영어, 그리고 구화(口話)의 삼중통역자 역할을 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번 전시는 박래현의 치열한 삶과 예술을 향한 열정을 함께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양식의 변화
1920년에 태어난 박래현은 일제 식민 치하에서 미술을 시작했다. 경성사범학교(현재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재학 시절 일본인 미술 교사 에구치 게이시로(Eguchi Keishiro)에게 그림을 배웠고, 1940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의 화단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1943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한 <단장(丹粧)>이다. 붉은색 화장대와 마주하고 있는 검은색 기모노 차림의 일본 소녀를 단순하고 강렬한 색채 대비로 표현한 이 작품은 관습적인 일본화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이때부터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감각적이고 과감한 구성미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혼 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박래현의 가족은 친정이 있는 군산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4년여 동안 부부는 전쟁 중이었음에도 오로지 작업에 열중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조형적 탐구를 시도했다. 그 결과 그는 <이른 아침>(1956)과 <노점>(1956)으로 1956년 대한미협전과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영예로운 시간을 맞이했다.
이처럼 1950년대 중반 시기까지 그의 작품에서 꾸준히 발견되는 소재는 여인들인데, 피난 시절을 거치면서 그림 속 여인들은 점점 꾸밈없는 가난하고 평범한 모습을 하게 된다. 데뷔작 <단장>과 비교해 볼 때 그로부터 13년 후 그린 <이른 아침> 과 <노점> 두 작품에서는 큰 변화가 느껴진다. 일본과 한국이라는 작가가 속한 지리적 위치, 그림을 대하는 태도, 결혼 후의 개인적인 환경, 국가의 정치적인 상황 모두 너무나 달라져 있었기 때문에 작품의 변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중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양식적인 변화이다.
“형태와 색채의 융합을 생각하게 되고 색의 변화가 이룩하는 고유한 형태의 화면 통일에 신경을 쓰게 되며 때로 특유한 선이 암시하는 입체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박래현이 1965년 한 월간 잡지에 기고한 「동양화의 추상화」라는 제목의 글에서 한 말이다. 이런 생각은 선과 색채의 적절한 융화를 통한 대상의 간결하고 입체적인 표현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화풍의 변화는 1955년도 작품 <자매>에서 이미 시작되었는데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단순하고 평범한 두 소녀의 모습이지만 언니의 살색과 저고리의 색이 같아 구분이 되지 않고 동생의 치마 또한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게 표현되어 있다.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먹선은 작품의 소재에 외곽선으로 쓰이는데, 박래현은 먹선과 채색을 하기 위한 붓터치를 혼용하여 자유롭게 그어 나갔다.
이 시기 그가 직접 언급한 ‘입체적’이라는 표현은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 화단에 수용된 큐비즘의 영향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그는 피카소를 “시시각각으로 변화가 무쌍하고 항상 싱싱한 젊음을 보여주는” 작가로 평가하는가 하면 1973년 4월에 사망한 피카소의 부고 기사와 그의 작품 이미지들을 콜라주하여 판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추상화와 판화
1950년대 후반까지 박래현의 그림에서 대상은 점점 더 단순해졌다. 1960년 1월, 그는 동양화의 새로운 모색을 함께하기 위해 결성된 그룹 백양회(White Sun Group 白陽會)의 일원으로 타이완을 방문하여 <한국현대화가전>이라는 첫 해외전을 가졌다. 이 전시는 이듬해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도 이어졌는데 박래현은 이 시기의 해외 여행을 통해 동시대 동아시아 화가들이 전통적인 양식에 회의를 품고 새로운 형식을 갈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60년대 한국 화단에서는 앵포르멜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비정형’을 의미하는 앵포르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카데믹한 기하학적 추상에 반발하여 나타난 유럽 미술의 한 동향으로 추상의 서정적인 측면을 강조했고 두터운 유화 물감의 질감을 살려 표현했다. 박래현은 이 유행을 수용하면서도 동양화의 재료적 특성을 이용한 독자적인 화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변화는 1962년 12월에 열린 여섯 번째 부부전에 출품된 작품들에서 나타났다. 대상의 구체적인 형태가 사라지고 적갈색 계열의 색채 덩어리들로 구성된 작품들이 대거 출품된 것이다. 이 무렵 앵포르멜 양식을 실험하던 다른 동양화가들의 리드미컬한 선들로 가득 찬 화면과 비교했을 때 그의 작품은 확실히 독특했다.
그는 바탕 종이를 구겨서 생긴 결 위에 먹을 그어 자국을 만들기도 하고, 종이 위에 안료를 쏟아 흐르게 한 후 번지게 하여 먹과 물감이 서로 뒤섞이는 효과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러한 실험은 1961년부터 63년경까지 계속되다가 1966년부터 이른바 ‘맷방석 시리즈(straw mat series)’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에서 가늘고 수없이 반복되는 먹선이 더해져 보다 높은 완성도에 다다르게 된다. <작품>(1966~67)을 보면, 앵포르멜을 수용함에 있어서도 화려하고 힘찬 선으로 가득 찬 다른 동양화가들과 달리 얇고 질긴 한지에 가는 선을 그으면서 종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특유의 수공예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여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1969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뉴욕 프랫 센터(Pratt Graphic Center)와 밥 블랙번 판화공방(Bob Blackburn Print Studio)에서 수학했는데, 같은 시기 그의 큰딸은 프랫 인스티튜트에 재학 중이었다. 초기에는 주로 에칭 기법을 사용하여 기존의 동양화 작품을 판화로 변환하는 데 주력했다. <희열의 상징>(1970~73) 이후 판화만의 속성을 탐구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동양화와 확연히 구분되는 입체적 질감 효과를 창출해 냈다. 판화는 회화와 달리 직접 작가가 손으로 그 물질성을 느낄 수 있는 매체이므로 그의 장기인 세밀한 터치가 물질에 그대로 드러나는 결과가 즉각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작업 과정은 작가 자신에게 더없는 기쁨을 줬을 것으로 생각된다.
앵포르멜 양식을 실험하던 다른 동양화가들의 리드미컬한 선들로 가득 찬 화면과 비교했을 때 그의 작품은 확실히 독특했다. 그 이유는 박래현이 앵포르멜의 ‘분위기’는 받아들이면서도 동양화의 재료적 특성을 살려 특유의 섬세한 기법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안식의 시간
박래현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늘 새로운 시도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대중에게는 ‘김기창의 아내’로 더 잘 알려졌던 것도 사실이다. 1943년 그는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번 특선을 차지하며 중견 작가로 자리를 굳히던 김기창과 만났고, 3년 뒤 결혼했다. 이들의 만남은 김기창의 표현대로 ‘귀먹고 가난하고 학벌도 없는 나와 지주의 맏딸로 최고학부를 나온 당신’의 결합이었는데 그해 한국 화단에 큰 이슈가 되었다. 평생의 반려자로 인해 자신의 예술 인생이 지속될 수 있을 것임을 감지했었기에 가능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그의 호를 지어 준 이도 남편이었다. 김기창은 자신의 호 ‘운보(雲甫)’에 어울리는 ‘우향(雨鄕)’이라는 호를 붙여주었는데, 이는 시골 고향(鄕)에 비(雨)를 내려 씨앗이 잘 자라도록 하고 열매를 거두어들인다는 의미이다.
박래현은 네 아이를 키우며 청각 장애 남편이 혼자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될 때까지 5년 동안 구화를 가르쳤다. 이러한 의지와 헌신이 그를 뛰어난 작가이기 이전에 ‘어진 아내, 좋은 어머니’의 표상으로 알려지게 만들었다. 1974년 한 여성단체로부터 이 점을 높이 평가받아 신사임당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일생에 대해 “곤두박질하듯 살아왔다”, “남편의 말문을 연 사랑과 예술이 인간 승리의 기록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시도 쉴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예술은 그에게 잠시 쉴 수 있는 소중한 틈새이자 마음껏 자신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갈 수 있는 안식처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