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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AUTUMN

생활

‘땅끝’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해남은 곳곳에 아름다운 경관의 산들과 유서 깊은 사찰들이 자리 잡고 있어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한반도 서남단에 위치한 이 지역은 고대 중국과 한국, 일본을 연결하는 뱃길이 있어 문화의 이동로 역할을 하기도 했고, 유배길에 오른 이들의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해남의 고천암(庫千巖)호는 매년 겨울 수십만 마리의 철새들이 찾아오는 주요 철새 도래지로 이곳을 찾는 가장 대표적인 철새는 가창오리이다. 그 외에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여러 종의 희귀한 새들이 종종 눈에 띄어 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슈베르트를 들을 때면 나는 오래전에 본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2001)에 나오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슈베르트는 그렇게 산책하듯 연주하는 게 아니야!”

피아노 선생인 에리카가 학생인 안나를 꾸짖으며 내뱉는 말인데,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아내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면 이 장면에 대한 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인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1983)에 나오는 에리카에게 이 정도의 독설은 그저 일상적인 언어인 것만은 분명하다. 정신착란으로 죽은 아버지, 딸의 성공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빠진 어머니, 빈(Wien)의 음악계에서 밀려나 근근이 피아노 강사로 살아가는 독신 피아니스트의 마음의 상처를 가장 가까이서 위로하는 것은 언제나 병들고 불행한 슈베르트의 음악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명연주의 모방에 급급한 안나의 ‘산책’은 “슈베르트의 정신에 위배되는 죄악”일 수밖에 없었다. 자, 이 비유를 본래적인 의미로 환원하면, 누구에게나 아무 생각 없이 산책하듯 걸어서는 안 되는 장소가 있다. 내게는 해남이란 곳이 그렇다.

<윤두서 자화상>. 1710. 종이에 담채. 38.5 × 20.5 ㎝.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은 한국인의 초상화 중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 윤선도의 증손이고 실학의 거두 정약용의 외증조부이다.

‘남도 답사 1번지’
나는 1980년 봄부터 1982년 가을까지 해남에서 살았다. 그때 나는 스무 살을 갓 넘었고 평생을 두고 나눠 써야 할 삶에 대한 물음과 울분과 격정을 죄다 탕진한 상태였다. 빈털터리가 된 나는 도망치듯 자원입대를 했다. 예상대로 그곳에서는 그 어떤 추상적인 질문도 허용되지 않았다. 한겨울에 기초 군사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곳은 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한반도의 서남쪽 끝에 붙은 해남반도였다. 나는 그 해안선을 지키는 초병이었다. 푸른 이끼가 낀 돌담과 탱자나무 울타리, 안개에 갇힌 눅눅하고 비릿한 바다 냄새, 끝없이 펼쳐진 들판 사이로 뻗은 황톳길과 작은 실개천, 그 둔덕에 뛰놀던 흑염소 두어 마리, 우편물에 적힌 남편의 이름자도 모르고 늙어가는 부대 앞 점방 아줌마, 이것이 간신히 잦아든 내 불안과 마주친 해남의 첫인상이었다. 그 시절로부터 40년이 지나 다시 우슬치(牛膝峙)를 넘는다. 영암, 강진 방면에서는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읍내로 들어간다. 일행과 나는 예약한 숙소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낯익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한때 찬란했던 문화유산을 둘러보며 역사 속의 기억을 되새기고 감상에 젖는 행위를 답사나 여행으로 여긴다면 해남은 찾아갈 곳이 못 된다. 우선 찬란했던 시절이 없다. 따라서 이렇다 할 볼거리도 없다. 굳이 찾자면 옛 왕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권력과의 불화로 낙향한 은둔자나 유배형을 받은 죄인들이 살던 터전이 있을 뿐이다. 이런 해남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의 첫 권 첫머리에 ‘남도 답사 1번지’로 소개해 문화 답사 여행의 붐을 일으킨 사람이 유홍준 교수다.

연동마을 안쪽 비자나무 숲에 둘러싸인 해남 윤씨 종갓집인 녹우당, 두륜산 골짜기 고목들이 터널처럼 하늘을 가린 십 리 숲길을 지나 호젓하게 들어앉은 대흥사, 달마산 능선에 자리 잡은 고색창연한 미황사와 땅끝 전망대가 있는 사자봉까지 그의 구성진 입담에 이끌려온 많은 사람들은 널리 알려진 기존의 명승지와는 전혀 다른 평온하면서 아득하고, 친근하면서 멋스럽고, 소박하면서 정갈한 해남의 풍광에 매료됐다. 그러나 무심하게 산등성이를 감싸며 들판을 휘감는 은근한 햇빛과 바람의 고요가 한바탕 거센 비바람을 사정없이 쏟아부으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난 이후의 풍경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으리라.

해남 윤씨 종가 녹우당의 사랑채. 조선 17대 왕 효종(재위 1649∼1659)이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수원 집의 일부를 뜯어 옮긴 것이다. 현판은 윤선도의 증손자 윤두서의 절친한 친구이자 빼어난 서예가였던 이서(1662~1723)의 글씨로 전해진다.

해남은 바다의 남쪽을 뜻한다. 곧 땅의 끝에서 바다의 남쪽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곳이란 뜻이 담겨 있다. 고대에 해양 문화가 번성하던 시절에도 그랬고, 절해고도의 유배지에서 꿋꿋하게 살아서 돌아오게 만든 힘도 이 ‘땅끝’에 있었다.

보길도 부용동 정원의 중심 세연정 전경이다. 1637년 인조(재위 1623~1649)가 조선을 침략한 청 황제에게 항복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윤선도는 이곳에 정자와 연못을 축조하여 은거하며 지냈다. 그는 이 정원에 머물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비롯한 수십 편의 한시를 남겼다.

미황사는 한반도 최남단에 있는 절로 749년 창건되었다. 13세기 중국의 학자와 관리들이 이곳에 내왕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중국에도 알려진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왼쪽에 이 사찰의 중심 건물인 대웅보전이 있고, 그 뒤로 달마산의 수려한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달마산 봉우리 가파른 암벽에 자리하고 있는 도솔암은 대흥사의 말사 암자로 오랫동안 폐사지로 방치되었다가 2002년 중건되었다.

녹우당과 부용동
우리가 녹우당을 찾은 날은 편의점에서 산 우산이 별 소용이 없을 만큼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 빗속에서 녹우당의 이곳저곳을 소개하며 이 집에 얽힌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생애를 설명해준 이는 문화관광해설사이자 윤선도의 13대손인 윤영진(尹泳鎭, 68세) 씨다. 그가 기억하는 학창시절의 해남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신작로와 담벼락마다 붙은 간첩 신고 포스터로 집약된다. ‘대공(對共) 취약지역’이었던 해남의 환경은 자연스럽게 그를 군인으로 만들었다. 윤선도의 손자이자 자신의 직계 할아버지인 윤이후(尹爾厚, 1636∼1699)가 꼼꼼하게 일상을 기록한 『지암일기(支菴日記)』를 줄줄이 꿰게 된 것은 그가 육군 대령으로 전역을 하고 귀향한 뒤의 일이다. 윤이후는 조선 최고의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아버지이며, 윤두서는 강진으로 유배를 와서 18년을 산 정약용의 외증조할아버지다. 윤두서는 이 집에서 태어났다.

녹우당의 기둥이 왕실의 건축물처럼 둥근 것은 효종이 왕세자 시절 사부였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집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준 이는 ‘윤 대령’이다. 윤선도는 그를 챙겨주던 효종이 죽자마자 유배형을 받고 7년 만에 돌아와 효종이 지어준 수원의 사랑채를 뜯어 이곳으로 옮겼다. 그의 나이 여든한 살 때였다. 녹우당 옆에 지어진 유물전시관에는 윤두서가 그린 자화상과 조선전도가 있다는데 쏟아지는 비도 비지만 도난을 우려해 복제품을 걸어두었다는 말에 일행은 발길을 돌렸다.

윤선도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보길도 부용동이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완도에 속하지만 그 시절에는 주로 해남 백포에서 뱃길로 드나들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완도와 해남 갈두리 선착장 두 곳에서 30분마다 페리호가 오간다. 백포마을에는 해남윤씨 소유의 별서가 있다. 윤선도의 할아버지 때부터 이 만의 개펄을 막아 농토로 만드는 간척 사업을 벌였다는데 윤두서 대에는 그 규모가 상당해 이곳에 토지를 관리하는 전택(田宅)을 지은 것이다. 윤두서가 그린 진경산수화 중에 ‘백포별서도(白浦別墅圖)’가 있다.

아마 외국인이 부용동 정원을 둘러보았다면 한 부유한 조선 귀족의 뛰어난 안목과 풍류,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절묘한 설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손님이 오면 맞은편 언덕에서 북을 쳐 손님을 맞는 퍼포먼스를 연출하기도 했다는 말에는 탄식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한국인들의 속내는 좀 복잡하다. 그의 행적이 청빈이나 여민동락(輿民同樂) 같은 한국인들의 관념 속에 있는 선비 정신이나 삶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가 살았던 때가 두 차례의 큰 전쟁으로 농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곤궁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는 점은 자연을 벗 삼은 그의 고결한 품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윤선도가 보길도를 배경으로 쓴 『어부사시사』는 표현이 세련되고 역동적이며 감각적인 묘사로 한국문학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시조다. 하지만 이 시조에 화자로 등장하는 어부 역시 그가 서문에 썼듯 “목청을 같이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고 서로 노를 젓게 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위한 풍경의 일부로 연출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政爭으로 세 차례나 유배를 가야 했던 그의 憂國의 깊은 울분마저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이것이 내가 그 아름다운 부용동 정원을 ‘산보’하듯 맘 놓고 걸을 수 없는 소이다.

보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예송리 앞바다 전복 양식장에 작업선들이 떠 있다. 주변에 몽돌해변과 상록수림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대흥사와 미황사
해남문화원의 주선으로 해남에서 보건소장으로 은퇴한 전국성(70세) 씨로부터 해남의 근황을 들었다. 그는 잊고 지냈던 해남 사람들의 부드러움과 부지런한 면모를 일깨워주었다. 그는 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사회복지학을 가르치기도 한데, 일찍 가세가 기운 탓에 자립해야 했던 처지가 오늘의 자신을 키웠다고 스스로를 대견해 했다. 길 안내까지 자청해 나서준 덕에 우리는 이동 중인 차 안에서 좀 더 느슨한 대화를 이어갔다. 해남에서도 가장 오지였던 화원면이 전국 최대의 겨울배추 생산지이자 절임배추의 공급지가 되었으며, 목포와 도로로 연결되면서 화원의 땅값이 크게 올랐다는 소식에 우리는 무릎을 쳤다. 40년 전만 해도 ‘화원 출장은 하룻길’이었다는 말에 나는 보급품 일제 조사를 위해 오로지 걸어서 해안가 초소들을 찾아다니던 땀에 전 기억을 떠올렸다. 간척 사업으로 경지면적은 전국에서 가장 넓어졌지만 그 바람에 바다 물길이 바뀌어 마음만 먹으면 주전자 한가득 주워 담던 세발낙지와 그 많던 짱뚱어가 사라졌다는 말에는 아쉬운 탄식이 나왔다.

개발은 유적지의 형편이나 인심도 수시로 바꾼다. 대흥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새로운 식당가가 들어서고, 옛 사하촌에 200년 역사의 유선여관이 문을 닫았다는 얘기도 ‘전 교수’가 전해준 소식이다. 유선여관은 추운 겨울 천 리도 더 되는 먼 길을 여동생을 앞세워 면회를 온 어머니를 모시고 눈 덮인 대흥사 경전을 둘러본 뒤, 온돌방에 나란히 누워 갑갑한 집안 소식에 오지 않는 잠을 청하던 곳이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 귀양길에 친구인 초의선사가 머물던 이곳 대흥사에 들렀다가 대웅전에 걸린 당대의 명필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현판을 떼어 내고 자신의 글씨를 걸었다가 근 8년 만에 해배되어 올라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이광사의 현판을 되걸게 했다는 일화는 사실인 듯하다. “추사는 바다를 건너간 뒤 남에게 구속받거나 본뜨는 일 없이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박규수의 평이 설득력을 더한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 손자이고 추사는 그의 아버지의 친구다. 차의 명인으로도 알려진 초의가 만년에 기거해 차 문화의 성지로 알려진 일지암(一枝庵)을 보려면 대흥사에서도 40분은 더 산을 올라야 한다.

더 사납게 바뀐 곳은 미황사다. 건물 서너 채로 간신히 절간의 구색을 유지하던 이곳에 높은 석축을 쌓고, 초입에는 어지간한 큰 절에서나 보는 사천왕상도 두고, 또 템플스테이도 한다고 하니 살림의 규모가 크게 는 모양이다. 나무꾼이나 수도승들이 다녔을 법한 달마산의 좁은 옛길을 보수해 미황사에서 땅끝 마을까지 돌아 나오는 ‘달마고도(達磨古道)’라는 멋스러운 이름을 붙인 등산로는 꽤 소문이 나 있다. 단청을 올리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의 대웅전에 안도감을 느끼는 초로의 나그네에겐 이 佛事의 영광이나 수고로움보다 격세지감이 먼저 다가온다.

내가 처음 미황사를 만난 것은 싸리나무를 하러 달마산 근방에 사역을 나와서다. 이 싸리나무로 빗자루를 만들어야 연병장에 흩날리는 낙엽을 쓸고 제설 작업도 한다. 매서운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지방은 아니지만 한 번씩 한밤중에 얌전하게 쌓인 눈을 치우는 데는 이 싸리비가 제격이다. 고개를 들면 기암절벽들이 병풍처럼 늘어선 바위산이 보이고, 고개를 숙이면 눈도 뜨지 않은 새끼 강아지들이 어미 품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듯한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요사채 앞 툇마루 끝에 늙은 대처승 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물이라도 한 잔 얻어 마셨는지, 아득한 바다 너머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화원면 일대 배추밭

두륜산 대흥사

윤두서 고택

사자봉 땅끝전망대

땅끝에서
해남이란 지명은 유사한 지리적 환경과 뜻을 가진 또 다른 지명인 남해와 다르다. 남해는 남쪽에 바다가 있는 땅, 남쪽 바다와 면한 곳이란 뜻이라면 해남은 바다의 남쪽을 뜻한다. 곧 땅의 끝에서 바다의 남쪽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곳이란 뜻이 담겨 있다. 고대에 해양문화가 번성하던 시절에도 그랬고, 절해고도의 유배지에서 꿋꿋하게 살아서 돌아오게 만든 힘도 이 ‘땅끝’에 있었다. 이 끝과 시작이 공존하는 땅이란 이미지는 종종 소박한 시인들에게 서정을 불러일으키곤 하지만 그 극단에서 치열하게 이 역설의 서사와 싸움을 벌인 이는 시인 김지하(金芝河, 1941~)다.

김지하는 부정부패를 일삼던 이들의 부패상을 독창적 형식으로 풍자한 『五賊』이란 시를 발표한 이후로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첨예한 문제가 벌어질 때마다 선두에 서 있었다. 도피, 체포, 투옥, 고문, 다시 사면이란 굴레에서 몸과 마음이 지친 그는 1984년 가족과 함께 외가인 해남에 내려온다. 생활은 차츰 안정되었으나 정작 그 자신은 그 안에 녹아들지 못했다. 그 무렵 그는 땅끝에서 “옛날도 훗날도 함께 들어와 외치고 울고 가슴을 치며 눈물 삼키고 고개 숙여 걷는 것”들을 본다. 그 어둡고 불길하고 축축한 이미지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존재”인 ‘애린’이란 추상의 존재였다.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혼자 서서 부르는/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 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하략)”-「애린」(1985)

그 뒤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본격적인 정신과 치료를 받기 위해 해남을 떠나야 했다.

만년의 비트겐쉬타인은 “비종교적이고 우울한” 슈베르트의 선율에서 “사고가 첨예화되는 요점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철학적 탐구』)는 것이 그 요점이다.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언제나 승리자의 것인 건강함을 주요한 판단의 척도로 삼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것을 일갈한다. “‘건강함’이라니, 무슨 어리석은 수작인가! 건강함이란 그저 존재하는 것을 미화시킨 것일 뿐이다.”(『피아노 치는 여자』) 이 빈(Wien) 사람들도 사고력이 바닥나기 직전의, 미치기 직전의 우울감에서 스스로를 넘어서는 새로움을 발견하는 모양이다. 이들에게 해남이라는 ‘거친 땅’을 보여주고 싶다.

이창기(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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