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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AUTUMN

문화예술

전통 유산을 지키는 사람들 상생을 위한 무술

올해 29세인 박신영(Park Shin-young 朴信暎) 사범은 무려 25년 동안 한국 전통 무술 택견을 연마해 왔다. 그는 무술의 고수에 머물지 않고, 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며 세계 곳곳에 택견의 상생 정신을 전파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이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이기도 한 택견은 손과 발을 이용해 상대를 타격하거나 넘어뜨리는 한국의 전통 무술이다. 민간에 전승되어 온 여러 문화 현상이 그렇듯 택견 또한 그 기원이 문헌상으로 명확히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고구려(BC 37~AD 668) 무용총에 그려진 벽화의 대련 그림이 비슷한 동작을 묘사하고 있어 유구한 역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수박희(手搏戱)나 각희(脚戱)처럼 택견의 다른 명칭 중에는 ‘희’자가 붙은 것들이 보이는데, 이 한문 글자는 놀이를 뜻한다. 택견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야외에서 선수들이 서로의 기량을 겨루며 한바탕 즐겁게 노는 특징이 있다. 구한말까지만 하더라도 마을 잔치가 있는 날이면 택견 판이 종종 열리곤 했다. 윗동네와 아랫동네가 대표 선수들을 선발해서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를 벌였는데, 나이가 가장 어린 아이들이 먼저 나섰다. 박신영 사범이 택견의 매력에 푹 빠져 일찌감치 인생의 전부를 걸게 된 계기도 사실 그 아이들과 무관하지 않다.

“100년도 더 된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저를 택견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사진이란 서양 선교사가 찍은 택견 놀이 장면이다. 조선 말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진에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어린 구경꾼들 앞에서 두 아이가 힘을 겨루고 있다.

이크택견 박신영 대표가 자신의 대표적 발차기 기술인 곁치기를 응용한 시범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이 기술로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 이크택견

춤과 닮은 무술
“부모님께서 유치원을 운영하셨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그 사진을 보시고는 어느 날 갑자기 택견 사범님을 모셔와서 원생들에게 매일같이 가르치신 거예요. 정신 단련과 호신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셨대요. 저도 끼어들어 배웠는데, 저는 무엇을 배운다기보다 그저 신나게 춤을 추며 논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그 시간만 손꼽아 기다렸죠.”

그렇게 시작한 택견 수련이 올해로 25년째다. 어린 나이에 그가 느낀 대로 이 무술은 춤과 닮았다. 곡선의 동작들이 끊임없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다. 택견이 춤을 연상케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발놀림에 있다. ‘품밟기’라 불리는 이 발동작은 택견을 수련할 때 맨 처음 배우는 기본 동작으로 그 모습이 마치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 같다. 양팔을 허공에 휘휘 젓는 활갯짓까지 곁들이면 영락없다.

품밟기는 단순해서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다. 다리를 앞으로 내밀 때 무릎을 살짝 구부려서 굼실거리고, 그 다리를 뒤로 뺄 때 몸을 뒤로 젖혀서 능청 떨면 그만이다. ‘굼실’은 발질에 속도와 다양성을 부여하고, ‘능청’은 힘을 싣는다. 그런데 품밟기라고 다 같지는 않다.

“품밟기 한 가지만 봐도 고수인지 하수인지 알 수 있어요. 하수들은 조급해요. 아주 바쁘게 움직이죠. 반면에 고수들은 확실히 여유가 있어요. 리듬을 탈 때도 무미건조한 3박자가 아니라 강약약, 약약강 등 다채롭게 액센트를 주죠. 그렇게 우아하게 품을 밟다가 상대의 빈틈이 보이는 순간 느닷없이 발로 차거나 손으로 잡아서 내동댕이쳐 버리는 거예요. 그 호흡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박신영 씨의 남편 이주영(Lee Ju-young 李珠映 왼쪽) 사범과 안형수(Ahn Hyung-soo 安烱秀) 이크택견 부대표가 점프 곁치기 기술 시범을 보여 주고 있다.

택견은 겉으론 춤처럼 부드러워 보이지만, 유술(柔術)과 타격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 매우 전투적이다. 하지만 이 격렬한 무술은 배려와 상생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박신영 씨의 손동작 시범 장면. 택견은 발동작뿐만 아니라 손으로 가격하는 기술도 다양하고 화려한데,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공격력은 매우 강하다.

양면성
춤 같은 동작과 “이크”, “에크” 하는 추임새 때문에 종종 코미디 소재로 쓰여서 그런지 택견을 우습게 보는 시선이 있지만, 한마디로 오해다. 택견은 그 어떤 무술보다 파괴력이 큰 실전 무술이다. 한쪽 팔을 쭉 뻗은 거리 안에서 승부를 보는 특성 때문에 별다른 예고 동작도 없이 갑자기 모든 종류의 발질이 나온다. 발등으로 정면 위를 차는 제겨차기, 방망이로 후려치듯이 차는 후려차기, 발등으로 곁을 휘어 차는 곁치기,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회전시켜서 두 발로 차는 날치기 등 어떤 발차기가 언제 등장할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이 중에서 박 사범의 특기는 곁치기다. 이 기술로 전국체전을 비롯해 여러 이름 있는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택견은 발동작뿐만 아니라 씨름이나 유도처럼 상대를 넘기고 던지는 기술, 손으로 가격하는 기술도 다양하고 화려하다. 겉으론 춤처럼 부드러워 보이지만, 유술(柔術)과 타격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 매우 전투적이다. 하지만 이 격렬한 무술은 배려와 상생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택견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무술과의 차이점을 깨닫게 된다. 즉, 필사적으로 기선을 빼앗고, 상대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요량으로 쉴 새 없이 몰아붙여 다시는 덤빌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하는 걸 강하다고 여기는 다른 무술과 딴판이다. 택견은 상대에게도 늘 동등한 기회를 준다. 품밟기를 하면서 상대의 공격 범위 안에 내 한쪽 발을 내주는 행동이 대표적이다. 이 동작을 ‘대접(待接)’이라 부르는데, 귀한 사람을 융숭하게 응대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택견에서 상대는 물리쳐야 할 적이기 이전에 예를 갖춰 대해야 하는 손님이다.

또한 상대를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것을 수련의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겨루기를 하다 보면 투쟁심이 솟게 마련이고 자기도 모르게 상대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다. 택견에서는 상대를 다치게 한 사람이 패배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무술이 추구하는 상생의 가치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련자는 기술 연마만큼이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도 노력을 쏟아야 한다. 기술만 있고 평정심은 없는 수련자의 손과 발은 그저 흉기일 뿐이다.

“힘을 써서 남을 다치게 하기는 쉬워요. 사람들은 그걸 보고 세다고 말하죠. 하지만 그건 강한 게 아니라 잔인한 거예요.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이고, 그걸 해낼 수 있어야 진정한 강자라고 할 수 있어요. 내적 수련이 동반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에요.”

사회적 기업
한동안 그도 강해지고 싶은 욕망에 지배당한 적이 있었다. 배움이라는 이름 뒤에 그 욕망을 숨긴 채 서울에 있는 수련관들을 찾아다니며 고수들을 만났다. 그들의 비기를 모두 흡수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아닌 기술만을 좇는 자신이 보였다 정신이 번쩍 들어 그만두었다. 그리고 대한택견협회에서 시범단 활동을 함께 해 온 이들과 함께 사회적 기업 ‘이크택견’을 만들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전쟁이 완전히 없어지는 날이 올까요? 만약에 세상 사람들 모두가 택견을 수련한다면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요. 오랫동안 수련하다 보면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질 테니까요. 그러자면 택견을 널리 알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크택견은 사회적 기여뿐만 아니라 제 꿈을 키우는 곳이기도 하죠.”

그 후로 6년이 흘렀다. 세계를 누비며 택견 시범도 하고, 마당극이나 뮤지컬 같은 예술 장르와 접목시켜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다른 어떤 일보다 택견을 할 때가 행복하고 기운이 나요. 제게는 택견이 곧 일이자 휴식이에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그러니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아직도 택견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거든요.”

다부지게 말하는 그를 보며 어쩐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외로운 길에서 동분서주하는 그가 고마웠고, 힘들어도 멈추지 말고 그 길을 계속 가 주었으면 하는 염치없는 바람이 마음 속에 일었다.

김동옥(Kim Dong-ok 金東鈺)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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