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2020 AUTUMN

문화예술

포커스 전쟁터에서 문화재를 지켜 낸 사람들

국립중앙박물관이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준비한 <6.25 전쟁과 국립박물관 - 지키고 이어가다>는 COVID-19로 인해 6월 25일 온라인으로 먼저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문화재 소개(疏開)와 보존 노력의 선두에 있었던 김재원(金載元 1909~1990) 박사의 딸이자 후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영나 교수가 당시 상황을 돌아본다.

전쟁은 인간의 생명뿐 아니라 중요한 문화재와 미술품들도 파괴하기 마련이다. 약탈 행위도 서슴없이 일어난다. 패전국의 문화재를 파괴하고 ‘문화’를 그들의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행위는 정체성을 없애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는 문화재 약탈 전담 기구를 꾸려 유럽 각국에서 체계적으로 예술품과 역사적 문서, 서적을 약탈했다. 그 수는 미술품만 약 25만 점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서적이나 기록물, 다른 유물들을 합치면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행위는 후일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전쟁 범죄로 인정되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 중에도 북한군에 의한 문화재 약탈 시도가 있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약탈하려는 그들의 시도를 막고, 그 이후 임시 수도 부산으로 소장품을 소개(疏開)시키고 수호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국내외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52년, 국립박물관 직원들이 전시 수도 부산 임시 청사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중앙 정면에 김재원 관장이 보인다(왼쪽에서 여섯 번째). ⓒ 국립중앙박물관

1915년, 경복궁 경내에 서양식으로 지어진 조선총독부 박물관. 오른쪽으로 경복궁의 전각들과 동문인 건춘문, 그리고 왼쪽 하단에 근정전 회랑이 보인다. ⓒ 국립중앙박물관

북한군의 서울 점령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때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유한 문화재를 지켜 내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당시 초대 관장으로 일하고 있던 김재원이었다. 그는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친 독일 뮌헨대학 유학 시절 히틀러 집권 아래서 정치적 혼란을 목격했고, 그 후 벨기에 겐트대학의 동양고고학실에서 칼 헨쩨(Karl Hentze) 교수의 연구 조수로 있다가 1940년에 귀국했다. 보성전문학교(현재의 고려대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던 그는 1945년 12월 미군정에 의해 일제의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할 초대 국립박물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1915년, 경복궁 내에 서양식 건물로 지어진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궁 내 건물 몇 채를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해방 후 박물관을 인수할 책임자를 찾던 미군정은 독일 유학생 출신의 이 고고학자를 적임자로 판단했다.

독립 후 새로운 박물관 정립을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직원들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범했고, 서울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3일 후인 6월 28일 아침, 박물관에는 북한 인민공화국 기가 올라갔고 직원 중 한 명이 이승만 대통령 타도를 외치며 나섰다. 다음 날 관장 자리에서 쫒겨난 후 김재원은 요인 납치를 위해 그를 찾아다니는 북한군을 피해 지인의 집에 숨어 지내야 했다.

국립박물관을 장악한 북한 요원들은 이 박물관의 소장품뿐 아니라 간송미술관 창립자인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의 수집품도 함께 북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박물관 직원들에게 1급 문화재를 모두 포장해 시내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독촉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포장할 종이가 부족하다”거나 “궤짝을 짤 재료가 부족하다”는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작업을 지연시켰다. 그러는 사이 3개월이 지나고 9월 28일 서울이 다시 유엔군에 의해 탈환되자, 북한 요원들은 계획을 포기하고 황급히 북으로 도망쳤다. 대부분의 문화재들이 이미 포장되어 덕수궁에 쌓여 있었지만, 퇴각하는 군인들을 태우기에 바빠 문화재를 운송할 트럭을 구할 여력이 없었다. 북한군 점령 하에 경복궁은 폭격으로 크게 파손되었고, 박물관 소장품이 있었던 건물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국립박물관 초대 관장 김재원(金載元 오른쪽) 박사와 한국전쟁 당시 부산 미국공보원 원장으로 근무하던 유진 크네즈(Eugene I. Knez). 크네즈가 문화재 운송을 위한 차량을 비밀리에 마련해 줌으로써 김 관장은 국립박물관 소장 문화재들을 부산으로 무사히 소개할 수 있었다.

비밀 작전
9.28 서울 수복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을 향해 진격해 올라갔다. 그러나 곧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고 말았다. 10월 말 김재원 관장은 미군 장교에게 북진하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부딪쳐 후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11월에는 수십 대의 미군 탱크가 후퇴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그는 문교부 장관 백낙준(白樂濬 Paek Nak-chun)에게 “박물관 소장품을 아직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는 한반도 최남단 도시 부산으로 피난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만약 다시 한 번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면 문화재를 영영 구할 수 없을 것이란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에 백 장관은 비밀 유지를 위해 영문으로 작성된 승인 편지를 김 관장에게 써 주었다.

장관의 허락은 떨어졌지만 문제는 수송 수단이었다. 군병력과 피난민을 수송할 운송 수단도 턱없이 부족한 터에 문화재 운송을 위한 차량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길을 터 준 사람은 부산 미국공보원(US Information Service)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유진 크네즈(Eugene I. Knez 1916~2010)였다. 인류학자였던 그는 당시 미국대사였던 존 무초(John J. Muccio 1900~1989)의 승인을 받아야 했으나, 사안의 긴박성을 감안해 비밀리에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했다. 군수품을 실어 나른 미군의 화물 기차가 대개 빈 채로 부산에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았던 크네즈는 담당 미군 장교를 설득해 기차 편을 확보했고, 미군 수송부에서는 서울역까지 수송 트럭을 마련해 주었다.

12월 6일 김재원 관장은 백낙준 장관에게 출발을 보고하고, 몇몇 박물관 간부들과 그의 식구 등 일행 16명이 함께 기차에 올랐다. 이들은 비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정차한 역에서 몇 시간씩 쉬기도 하면서 지금이면 2시간 반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의 부산을 4일이나 걸려 도착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월 4일, 서울은 다시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서울이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재수복된 것은 그로부터 2달이 지난 후였다.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던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문화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쟁이 더 확산되면 부산에 있던 문화재를 다시 국외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해 미국 국무부의 의중을 타진했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에서는 미국이 한국 문화재를 약탈했다는 악의적 선전에 휘말릴 것을 염려해 일본으로 옮길 것을 추천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다행스럽게도 1951년 전세가 한국과 유엔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그런 논의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 하나가 더 있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국방부 김일환(金一煥) 대령에게 지시해 국립박물관 경주 분관에 있던 금관을 비롯한 주요 문화재 139점을 한국은행의 금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 금고로 보냈다는 사실이다. 이 문화재들은 1957~58년에 미국 8개 도시를 순회한 전시 때 포함되었고, 휴전 이후인 1959년에 다시 안전하게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은 김재원 관장처럼 국제적인 경험, 뛰어난 언어 능력, 빠른 판단과 사명감을 가진 리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또한 그와 함께 목숨을 걸고 문화재를 지킨 박물관 직원들, 국적을 떠나 문화재의 가치를 존중했던 조력자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57~58년 미국 8개 도시에서 열렸던 최초의 한국 문화재 해외 순회전 의 도록. 이 전시는 한국이 전쟁의 피해를 딛고 부흥하고 있음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도록에 실린 사진은 보물 제339호인 서봉총 금관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서원화(誓願畵) 벽화>. 흙. 145 × 57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6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조성된 투르판 지역 최대 석굴사원인 베제클리크 제15굴에서 출토한 서원화 중 하나이다. 석가모니의 전생 모습이며 양손에 푸른색 꽃을 들고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의 가치
한편 임시 수도 부산에 있던 김재원은 서울에 여전히 남아 있던 세계적 문화재 때문에 애를 태워야 했다. 그것은 중앙아시아의 벽화들(Murals from Central Asia) 60여 점이었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이 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한 이 벽화들은 토벽 위에 그린 것으로 너무 무겁고 두꺼워 부산으로 가져갈 수 없었다. 수송이 어려운 벽화는 전시에 훼손되기 쉬운 작품이다. 일례로 독일 베를린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었던 또 다른 중앙아시아 벽화들은 전시 효과를 높이기 위해 진열실에 벽을 만들고 그 속에 끼워 전시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다른 진열품들처럼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없어 30%가량이 파손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때 박물관의 벽화 책임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 작품을 구하기 위해 나선 김재원 관장과 박물관 직원 몇 명은 1951년 4월과 5월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북한군의 춘계 대공세로 대포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이 벽화들을 포장해 부산으로 옮겼다. 이때 포장과 서울역까지의 수송을 도운 인물은 유진 크네즈의 부탁을 받은 먼스키(Charles R. Munske) 대령이었다. 이로써 전쟁이란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던 우리 문화재 총 1만 8,883점이 430개의 상자에 실려 안전하게 지켜질 수 있었다.

온 국민이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혼란기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은 박물관 본연의 역할인 발굴과 전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3년 휴전이 되자 정부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부산에 있던 문화재 역시 서울로 옮겨져 1955년 박물관의 새 터전이 된 덕수궁 석조전 재개관 당시 전시되었다.

나는 김재원 관장의 막내딸로 부산 피난 시절에 태어났다. 부산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지만, 2011년부터 약 5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면서 전시실을 돌아볼 때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문화재를 지켜 낸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김재원 관장처럼 국제적인 경험, 뛰어난 언어 능력, 빠른 판단과 사명감을 가진 리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또한 그와 함께 목숨을 걸고 문화재를 지킨 박물관 직원들, 국적을 떠나 문화재의 가치를 존중했던 조력자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5년, 국립박물관을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하여 개관했을 당시 전시실 내부 모습.

김영나(Kim Youngna 金英那)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